************************************************************ 꽈리 산장(酸醬,Physalis alkekengi) 글쓴이:한부울 산장(酸醬)이란 무엇인가. 한문을 풀이하면 신 맛을 저장하는 식물이라는 의미로 풀 수 있지만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부르는 지칭은 ‘꽈리’라 하여 꽉 깨무는 형상과 연결된다. 백과사전을 보면 초가을 여자아이들이 꽈리 열매를 놀잇감으로 해서 즐기는 것이라 하면서 지역에 따라서 꽈리를 꾸아리, 꼬아리, 푸께, 푸께기, 산꽈리, 고아리 등으로 불린다고 정리되어 있으며 한자어로는 산장(酸漿), 홍고낭(紅姑娘), 등롱초(登籠草), 왕모주(王母珠) 등으로 쓰인다고 나타난다. 또 산장의 고깔 모양에서 붉은 처녀 홍고랑(紅姑娘)와 같은 이미지 형상이 있으며 흰 사슴 가죽으로 만든 고대의 관(冠)을 상징하는 일명 피변초(皮弁草)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五洲衍文長箋散稿 萬物篇○草木類 / 果種 錦荔芰宜男辨證說 【按紅姑娘。《本草綱目》及《古今注》。一名皮弁草。盛稱王母珠。卽酸漿草也。楊升痷《丹鉛總錄》。紅姑娘。多生元時古宮階間者。卽今酸漿草。有囊如弁。中藏指頂巨珠。實生靑熟紅。味甘酸可餐。兒女輩挖去內瓤。口含轉氣。膨脹如毬。齒按有聲膈腷。以爲戲。我東俗名古兒里。】 [한부울譯]위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만물편(萬物篇) 초목류(草木類) 과종(果種) 금여지선남변증설(錦荔芰宜男辨證說)편에 나타나는 내용을 보면 “본초강목[本草綱目] 및 고금주[古今注]에서 일명 피변초(皮弁草)라는 것을 왕모주(王母珠)라 칭하는데 즉 산장초(酸漿草)이며 단연총록[丹鉛總錄]은 양승암(楊升痷)이라 하였다. 홍고랑(紅姑娘)은 원래 고궁계단사이에 많이 자라는 것으로 이것을 지금 산장초라 하고 고깔 같은 주머니가 있어 가운데에는 손가락마디 만한 커다란 구슬이 있으며 열매는 파랗다가 익으면 붉어지고 맛은 달고 시다 하였다. 여자 아이들은 안에 있는 속을 빼낸 뒤 입에 물고 공기를 넣어 공처럼 부풀게 하여 이빨로 누르면 ‘삑삑’ 소리가 난다고 하였고 우리나라 동국에서는 고아리(古兒里)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 동국 세속(世俗)에서 ‘고아리’라 하여 시대변천에 따라 꾸아리, 꼬아리, ‘꽈리’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종지리지 꽈리(酸醬) 자생지 전라도(全羅道)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 평안도(平安道) 오주연문장전산고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동국에서 자생한 것임도 알 수가 있다. 더하여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를 검색하면 위와 같은 지역에 꽈리 즉 산장 자생지로 나타나는데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를 기록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초류(草類) 필관(筆管), 산장(酸漿) ○ 조선의 특이한 산물(産物)로는 필관과 산장이 있다. 필관은 싹을 먹는데, 맛이 미끈하고 달다. 그 잎은 알 수 없는데, 혹은 황정(黃精)의 싹이라고도 한다. 산장은 잎이 뾰족하고 줄기는 푸르거나 붉으며, 맛은 달고 시다. 《조선부 주》 ○ 살펴보건대, 필관은 일명 즙(蕺)이라고 하며, 세속에서는 ‘멸’이라고 부른다. 산장은 세속에서는 ‘꽈리’라고 부른다. 또한 단군 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를 서술한 역사서로서 조선(朝鮮)사학자(史學者) 한치윤(韓致奫)이 편술하고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보충한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 초류편 소제 '필관과 산장'에서 보면 1488년에 명조(明朝)사신으로 조선(朝鮮)을 다녀간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朝鮮賦)를 인용하면서 조선의 특산물로 산장을 말하고 있으며 잎이 뾰족하고 줄기는 푸르거나 붉으며, 맛은 달고 시다라고 하면서 세속에서는 이를 ‘꽈리’라고 부른다라고 적고 있다. 즉 주홍색 물감을 들인 것 같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동그란 꽈리열매를 주물럭거리면 말랑말랑하게 되고 충분히 부드러워진 열매의 주머니를 잘 떼낸 뒤, 열매를 입안에 넣고 굴리면 안의 씨가 조금씩 빠져 나오면서 안이 다 비워진 열매를 입 안에 물로 이빨로 눌리면 꽉꽉 소리가 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바로 이는 꽈리불기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놀이를 우리나라 세속 풍속에서 여자아이들이 즐겨 했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 물론 위 해동역사만 보더라도 명조(明朝)사신 동월은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특산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빈 말이 아니다. 조선의 특산물이 오늘날 신중국 자료를 보면 하나같이 중국(中國)이 원산지라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늘 상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헷갈리는 것은 중국이라 함은 황제가 거주하는 한정된 구역에서 도시정도의 중앙정부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근세기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서세들에 의해 상당히 부풀려 졌던 것이 사실이고 하나의 거대한 체제를 조각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한 것인데 오늘날 거대한 대륙의 주체로 변질 되었고 이것이 한족 역사체제로 탈바꿈한 것에서 동아시아대륙 역사자체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중에 대표적인 역사 오류라고 보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따져보기로 하고 어쨌거나 조선은 이 산장의 근원지라는 점을 우리는 인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장은 서양인들에게는 어떻게 불리었을까 궁금하다. 酸浆(Physalis alkekengi),别名红姑娘、挂金灯、金灯、锦灯笼、泡泡草等,北方称为菇蔫儿、姑娘儿(一般指黄色的红姑娘,黄姑娘被称为小菇蔫儿),其果实可食用。 科學分類 界: 植物(Plantae)Haeckel, 1866 門: 被子植物門(Angiospermae) 綱: 雙子葉植物綱(Magnoliopsida) 目: 茄目(Solanales) Juss. ex Bercht. & J.Presl, 1820 科: 茄科(Solanaceae)Juss., 1789 屬: 酸漿屬(Physalis)L., 1753 種: 酸漿(P. alkekengi) 二名法 Physalis alkekengi L. 1753 =Alkekengi officinarum Moench, 1802 =Physalis alkekengi var. alkekengi =Physalis halicababum Scop., 1771 =Physalis hyemalis Salisb., 1796 Book] Gleason, Henry A. & Cronquist, Arthur J. 1991. Manual of vascular plants of northeastern United States and adjacent Canada. lxxv + 910 pp. 위 신중국 자료 및 영어자료를 보면 이 꽈리를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산장(酸漿)이라 했음을 알 수 있으며 서양 식물학의 시조(始祖) 린네(Carl Linnaeus, 1707-1778)가 명명한 학명 피잘리스 알키켄기(Physalis alkekengi L.)를 대표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Physalis (/ˈfaɪsəlɪs/, sometimes /faɪˈseɪlɪs/, from physalis = bladder[citation needed]) is a genus of flowering plants in the nightshade family (Solanaceae), which grow in warm temperate and subtropical regions of the world. Most of the species, of which there may be 75–90, are indigenous to the New World. New Latin, from Greek physallis a bladder (from the form of the calyx) capitalized : a large genus of low-growing chiefly American annual or perennial herbs (family Solanaceae) that have an angled campanulate corolla and an inflated and sometimes brightly colored calyx enclosing a fruit which is a greenish or yellow 2-celled globular berry and that include several plants which are cultivated for their edible fruit or their showy calyxes — see cape gooseberry , chinese lantern plant , ground-cherry, strawberry tomato 영어자료를 보면 이 학명의 어원설명을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세계 온난한 기후 아열대지방에서 상장하는 가지과(Solanaceae)의 꽃이 피는 식물이며 70~90개 대부분 종(種)이 신대륙의 고유종, 토착종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신대륙은 어딜 말하는 것인가. 바로 아메리카대륙이다. 이것 역시 위 유관속 식물 메뉴얼(1991)에서 말하고 있는 미국 북동부와 근접한 캐나다를 이야기 하는 것과 근원적으로 같다해야 맞다. 산장의 식물분류체계를 보면 쌍떡잎식물강(雙子葉植物綱:Magnoliopsida), 가지목(茄目:Solanales), 가지과(茄科:Solanaceae), 산장속(酸漿屬:Physalis)으로 분류된다. 산장속의 속명 피잘리스(phusallis) 어원(語源)에서 뉴 라틴어 방광(bladder)를 뜻하는 것은 꽃받침(calyx)형태가 그것을 연관하고 있으며 이 약효가 또한 이뇨계를 말하고 있기때문이 아닌가 하며 녹색 또는 노란색 2 셀 구형 장과로서 식용열매와 화려한 꽃받침을 가진 여러 식물을 포함한 것으로써 열매를 감싸 팽창하거나 때로는 밝은 색의 꽃받침과 모서리각을 가진 종 꽃 뿌리의 다년생 가지과 허브라 고 잘 설명되고 있으며 노란색과 녹색과일은 먹을 수가 있다라고 하고 있다. 이를 케이프 구즈베리(Cape gooseberry), 중국제등(提燈)식물[chinese lantern plant], 그라운드 체리(ground-cherry), 식용꽈리의 열매 스트로베리 토마토(strawberry tomato)라고 서양인들은 명칭하고 있다. A plant of a genus that includes the cape gooseberry and Chinese lantern, having an inflated calyx that resembles a lantern in shape. 또 다른 자료를 보면 산장(酸漿)의 기원 유래에서 페루의 안데스산맥에서 나는 가지목(茄目), 가지과(茄科)의 식물 케이프 구즈베리(Cape Gooseberry)와 그리고 접을 수 있는 장식용 제등(提燈)또는 ‘초롱이’라는 명칭의 다년생 초본인 차이니스 렌턴(Chinese lantern)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어원(語源)에서 보면 그리스어 퍼셀리스(phusallis)는 '방광'(bladder) 즉 팽창 된 꽃받침 형상을 의미로 하는 현대 라틴어로 알려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주목할 만한 특징은 열매를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감싸는 꽃받침에서 파생 된 대형 종(鍾) 껍질의 형성이 특징이고 열매는 작은 오렌지색이며 또한 작은 토마토와 크기, 모양 및 구조가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다. 酸浆原产于中国,南北均有野生资源分布。酸浆在中国栽培历史较久,在公元前300年,《尔雅》中即有酸浆的记载。目前在东北地区种植较广泛。其他地区种植较少,仍属稀特蔬菜。 위 신중국 자료를 다시 보면 산장(酸漿) 피잘리스(Physalis)는 북쪽과 남쪽 모두에 야생자원이 분산되어 있는 중국이 원산지라 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오랫동안 재배되어 왔고 기원전 300년에 산장(酸漿:Physalis)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자서(字書) 이아(爾雅,Er Ya)에 기록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명조의 동월은 이 산장을 조선의 특산물이라 했을까? 그것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현재는 북동지역에 널리 심어져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심기가 어렵고 희귀한 소채(蔬菜)로 알려진다는 것은 실제로 근원지라 하기엔 현 생장상황이 녹녹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Many Physalis species are called groundcherries. One name for Physalis peruviana is Inca berry; another is Cape gooseberry, not to be confused with the true gooseberries, which are of the genus Ribes in the family Grossulariaceae. Other names used to refer to the fruit are poha berries, and simply golden berries. 그리고 피잘리스(Physalis)종(種)을 그라운드 체리(ground cherries)라고도 하며 학명 피잘리스 페루비아나(Physalis peruviana)의 한 이름은 잉카베리(Inca Golden Berry)라고 하였고 다른 하나는 케이프 구스베리(Cape gooseberry)라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케이프 구즈베리라는 명칭에서 상당히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 보인다. 그밖에 또한 피잘리스 페루비아나(Physalis peruviana)도 골든베리(goldenberry)라 하거나 케이프 구즈베리(Cape gooseberry)라고 불리어진다는 것도 사실상 혼란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케이프 구즈베리는 어딜 근원지로 설명하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현실적인 근원지라 할 수 있는 남아메리카대륙이라 하지 못하고 굳이 아프리카대륙 남단 케이프(Cape:희망봉)라고 하고 있는 것도 사실상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피잘리스 페루비아나는 분명 종명 근원지가 페루라고 하고 있음에도 아프리카 남단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오류라고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반면 페루산, 페루비아나를 잉카베리라고 하고 이를 케이프 구즈베리라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케이프란 단어가 기어코 아프리카남단만을 지정한 것인지를 사뭇 의심되는 이야기다. Not all Physalis species bear edible fruit. Select species are cultivated for their edible fruit, however; the typical Physalis fruit is similar to a firm tomato in texture, and like strawberries or pineapple in flavor, with a mild acidity. Some species, such as the Cape gooseberry and tomatillo have been bred into many cultivars with varying flavors, from tart to sweet to savory. Physalis fruit are rich in cryptoxanthin.The fruit can be used like the tomato. Once extracted from its husk, it can be eaten raw and used in salads. Some varieties are added to desserts, used as flavoring, made into fruit preserves, or dried and used like raisins. They contain pectin and can be used in pie filling. Ground cherries are called Poha in native Hawaiian, and poha jam and preserves are traditional desserts made from Physalis plants native to the Hawaiian Islands. 그리고 수많은 피잘리스(Physalis)종(種) 모두에게 식용 과일이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관상용이나 전적으로 약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피잘리스(Physalis)과일은 질감이 있는 단단한 토마토와 비슷하고, 약한 산도를 지닌 딸기 또는 파인애플 같은 맛이 난다고 되어 있다. 케이프 구스베리(capose gooseberry)나 토마토(tomatillo)와 같은 일부 종(種)들은 타르트[tarte]에서 단맛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풍미를 가진 많은 품종으로 재배되었다고 알려진다. 피잘리스(Physalis)과일은 비타민A 효과를 갖는 식물의 엽록체에 존재하는 노란색이나 오렌지색의 보조 색소 카로티노이드(carotenoid)그룹에 속하는 크립토크산틴(cryptoxanthin)이 풍부하고 과일은 토마토처럼 사용할 수 있으며 일단 껍질에서 추출되면 날 것으로 먹고 샐러드에 사용할 수 있으며 일부 품종은 디저트에 첨가되거나, 향료로 사용되거나, 과일 보존 식품으로 만들어 지거나 건포도와 같이 건조되어 사용된다고 알려진다. 지상 체리 즉 그라운드 체리(ground cherries)는 하와이 원주민에게 포하(Poha)라고 불리며, 포하 잼 및 보존식품은 하와이 제도 원산인 피잘리스(Physalis)식물로 만든 전통적인 디저트로 알려진다. The Cape gooseberry is native to the Americas, but is common in many subtropical areas. Its use in South Africa near the Cape of Good Hope inspired its common name. Other species of commercial importance include the tomatillo (P. philadelphica). Some nations, such as Colombia, have a significant economic trade in Physalis fruit. Physalis are widely cultivated in India, where it is known as Tipari or Rashbari (Hindi), Tepari (Bengali), Bandoola (Kannada), and Mottaampuli (Malayalam), also having other names in other Indian languages. 케이프 구즈베리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생하지만 많은 아열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특히 남아프리카 남단에 있는 희망봉(Cape of Good Hope, 希望峰)근처의 자생한다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다 하였으며 상업적으로 중요한 다른 종(種)으로는 꽈리속의 과실이지만, 가까운 종인 토마토처럼 야채로 쓰이는 토마티요(tomatillo)의 학명 피잘리스 필라델피카(Physalis philadelphica)가 있다 하였는데 이것의 종명에도 알 수 있듯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필라델피아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도대체 실제로 인도(印度)가 존재했던 곳의 냉철한 판단이다. 서양인들의 일반적인 상식은 현재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에 대해 모호한 입장이 되어 버렸다. 북아메리카대륙의 인디언과 남아메리카대륙 인디언은 같은 명칭인 것 같아도 다르다고 우기는 형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원주민을 아메리카 인디언(American Indian)이라고 한다. 인디오(Indio)는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일대의 원주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아메리카대륙 선주민(indigenous peoples of South America)이라고 한다 사실상 인디아(India)라고 하고 인도(印度)라고 하는 선주민을 동일하게 명칭한 것인데 신대륙이라는 프레임으로 분리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근원적으로 서양인들의 시각에서도 아메리카대륙은 인디아라고 하는 것이 정답이다.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에는 옛 잉글랜드(영길이국)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필라델피아는 1674년부터 영국 잉글랜드(England)가 통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잉글랜드라는 국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속되던 왕계보가 끊어진 상태에서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House of Stuart)가문의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재위:1660-1685)가 임시로 내세우고 통치하였으며 이 스튜어트는 고려역사(COREA)와 연결됨을 본 블로그에서 수차례 밝혔던 바가 있다. 이제는 깔끔하게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 산장을 놓고 보더라도 남아메리카대륙 콜롬비아와 같은 일부국가의 경우 피잘리스(Physalis)과일은 상당한 경제적 교역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데 전통적으로 피잘리스 필라델피카(Physalis philadelphica)나 더 하여 피잘리스 페루비아나(Physalis peruviana)의 영향이 컸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사위국이며 인도 말기의 제국이었던 무굴제국(Mughal Empire:1526~1857)을 점령한 영국(동인도회사)이라 하는 것은 본 블로그 글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2"과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1"의 소제 "8.영길이국 위치풀이의 결론"에서 조선(朝鮮)과 인도(印度)가 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함을 현재 남아시아 대륙의 인도아(Indian Subcontinent)북부 고원지대가 아니라 남아메리카대륙 북부라 한 점과 그곳에 영길이국(英吉利國)이 존재한 사실을 밝혔던 사실을 전제한다면 남아메리카대륙은 인도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판단되는 곳이다. 물론 피잘리스(Physalis)를 인도어로 티파리(Tipari) 또는 라쉬바리Rashbari(Hindi), 테파리Tepari(Bengali), 반두라Bandoola(Kannada) 및 모탐풀리Mottaampuli(Malayalam)등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체제 고급언어로 풀어 본 명칭이라고 할 때 이를 우리는 밝혀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꽈리라 하고 한문으로 산장이라고 하는 이 식물의 근원지는 최종 아메리카대륙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말한 우리나라 동국 세속풍속에 대한 사실에 대한 답이 충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정리하는 단계에서 과연 이 산장이 기원 300년부터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현 중국이 원산지라는 사실에서 모순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서양 라틴어에서 방광이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하는 속명을 보면 형태적으로 독특한 모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착안한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은 동서양이 분리된 현대에서 공히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다. 즉 한어자료에는 계금등(挂金燈), 금등롱(錦燈籠), 아름다운 제등(초롱), 괴등구(鬼燈球)등과 이명에서 볼 때 동양에서는 등(燈)을 상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세속풍속에서 등은 상당히 문화적이며 진보적인 도구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서양인들이 말한 방광이라는 의학적인 용어보다 훨씬 종교적이면서도 문화적이라는 면에서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서양인들이 부여한 영어명칭에는 중국제등(Chinese lantern), 일본제등(Japanese lantern)하였다는 사실에서 늘 상 동양역사에서 일본문화보다 훨씬 앞서간 역사주체의 명칭을 붙인 조선제등이라 하지 않는 것은 서양인들 생각에는 중복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과 같게 볼 수밖에 없다. 물론 독일어에서도 알 수 있지만 방광체리라는 뜻의 독일어(Lampion+Blume)를 사용했다는 점도 알 수가 있다. 일본어로는 호주기(Hōzuki:ホオズキ)꽈리라 하였고 영어로는 방광체리(bladder cherry)라 하였다는 사실에서 동서양 명확하게 분리되고 갈리고 있음도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근원지로 하고 있는 학명 피잘리스 알키켄기(Physalis alkekengi)중에 속명(屬名) 피잘리스(Physalis)의 의미가 본래 고대 그리스 피산[φυσαν (physan)]에서 "부풀다"에 피잘리스(physalis)를 사용했고 종명 알키켄기(alkekengi)은 아랍어 페르시아كاكن(kākanj)에서 파생에서 산장과일(酸裝果)을 의미하지만, 알(al)은 아랍어와 영어가 동등하게 풀이하고 있음도 잘 설명되고 있다. 어쨌거나 동양이나 서양 모두는 특징적으로 부풀어 올라 자루처럼 생긴 꽃받침을 상징하는 어원들임을 알 수가 있다. 한어자료를 보면 산장(酸漿) 꽈리의 산지(産地)가 그냥 중국(中國)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명 피잘리스 알키켄기(Physalis alkekengi)가 현 동아시아대륙 특히 신중국 이 존재하는 곳이 아닌 북아메리카대륙 동북주를 지정하고 있다는 사실과 상당히 상반된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 근원적으로 이 산정 꽈리의 원산지가 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밝혀 본 사실이다. 때문에 아시아 용 학명으로 굳어진 “Physalis alkekengi var. franchetii(Mast.) Hort (1908)”에 변종(變種, variety)을 나타내는 var.가 붙어 실질적인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분류체계 사정도 마찬가지다. 1488년에 명조(明朝)사신으로 조선(朝鮮)을 다녀간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朝鮮賦)에서 그가 산장을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한 점을 생각 할 때 이 산장의 원산지 및 자생지가 조선이었음이 분명하거늘 어찌하여 변종의 학명을 우리가 산장이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답함이 존재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자연의 이치는 속일 수가 없다. 때문에 아무리 역사를 뜯어 고친다고 하여도 이러한 식물 한 종만을 가지고 따져보아도 금방 진실이 들어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말 본래의 산장(酸漿) 꽈리의 원산지가 동아시아대륙이었다면 무엇때문에 굳이 서양학자들이 분류체계를 세우면서 변종(變種, variety)을 붙여 체계를 세우려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한반도,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신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모두가 이 꽈리 산장을 중국이 원산지라고 하면서 학명 “Physalis alkekengi var. franchetii(Mast.) Hort (1908)”사용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 무엇인가 모순이며 오류인 것이 틀림없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하여 학명을 명명한 시기도 1908년이라면 식물체계분류시기로는 한참 늦은 시기임을 알 수가 있어 식물체계가 처음 완성될 때인 1753년보다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 알려진 구나 톰프슨(Gunnar Thompson)교수의 '신대륙의 이른 지도들(Early Maps of the New World)'란 글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근원적으로 아메리카대륙을 기반으로 하는 사실의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Roman tobacco pipe in Britain dating to about 100-300 AD.약 서기 100~300년 시기에 영국(브리튼)에서 발견된 로마 담배 파이프.] The 16th century botanist, Dodoen, identified “yellow henbane” as the Roman brand of New World tobacco. 16세기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과 프랑스 북부 지방에 분포하는 게르만 민족이며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랑드르(Flemish people)의 의사·식물학자 로버트 도둔스(Rembert Dodoens:1517-1585)는 신대륙 담배의 로마브랜드로 "황색 헨 베인(yellow henbane)"을 확인했다고 하였으며 로마 브랜드라고 하는 명칭은 대한민국에서는 식품위생법 제93조 제2항에 의해 제조, 가공, 수입, 조리가 금지되어 있는 사리풀(Hyoscyamus niger) 또는 천선자(天仙子), 낭탕(莨菪), 비옥사(菲沃斯)등으로 불리는 산장(酸裝)과 같은 가지과(Solanaceae)소속의 식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Clay pipe stems and bowls from the garden of the Roman Catholic] 물론 로마시대때 파이프를 만들면서 브랜드명으로 당시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식물의 명칭을 부여한다는 것은 이상하게 볼 것이 없다. 아니면 파이프에 이 식물을 건조시켜 흡연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역시 이 엘로 헨 베인(yellow henbane)을 영어사전에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설명되었다. found on sea beaches from Virginia to South America having greenish-yellow flowers and orange or yellow berries 즉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에서 남미(南美)에 이르는 바다 해변에서 초록빛 노란 꽃과 주황색 또는 노랑색 열매를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을 그라운드 체리(ground cherry)라 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지금까지 산장의 학명에서 보듯이 피잘리스 비스코사(Physalis viscosa[Ground Cherry])의 경우도 그라운드 체리라 하여 동일하게 명칭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어 이 로마파이프 브랜드 명은 전부 속명 피잘리스(Physalis)와도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엘로 헨 베인을 설명한 사리풀의 속명은 피잘리스속(屬)이 아닌 하이요사이아무스속(屬,Hyoscyamus)이며 이것을 히오스속(屬)이라고 하는데 거의 진경, 진통, 진정제의 약용 원료로 쓰임을 알 수가 있다. 즉 로마 담배 파이프라는 것은 진경, 진통, 진정제를 흡연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흡연 파이프의 역사를 보면 이것들은 이집트에서 발견되고 BC 2000년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로마 사람, 그리스 사람들, 켈트 사람 그리고 게르만 민족을 포함한 모든 종족들은 파이프 담배를 사용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A smoking pipe carved from meerschaum]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BC484-425)는 BC 500 년에 불에 타는 건조된 잎들을 피우는 스키타이(Scythai:BC 6세기-3세)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페르시아인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과 해포석(海泡石:sepiolite) 즉 미어샴(meerschaum)파이프들과 그들의 정교한 조각된 모양은 광범위하게 관심을 끌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1723년경에 시원하고 건조하며 맛이 좋은 연기를 제공하기에 완벽한 재료로 급부상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이어 파이프 대용으로 찔레가시나무(Erica arborea)로 만든 나무 파이프 역시 인기가 있었다고 알려진다. Sepiolite is also found, though less abundantly, in Greece, as at Thebes, and in the islands of Euboea and Samos. It occurs also in serpentine at Hrubschitz near Kromau in Moravia. Additionally, sepiolite is found to a limited extent at certain localities in France and Spain, and is known in Morocco.United States, it occurs in serpentine in Pennsylvania (as at Nottingham, Chester County) and in South Carolina and Utah. 또한 해포석(海泡石:sepiolite)이라는 것도 생산지가 북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이다. 마그네슘 규산염(Magnesium Silicate), 점토광물(粘土鑛物)의 일종인 해포석(海泡石:Sepiolite)은 북아메리카대륙 펜실베니니아의 뱀모양 노팅엄 체스터카운티와 사우스 캐롤라니아(South Carolina), 유타(Utah)에서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자료에서 알 수가 있다. 서양학자들은 로마를 유럽에 존재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이 해포석을 지금의 소아시아 아나톨리아(Anatolia)에서 수입했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민망한 이야긴가.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우연히 발견하였을 때, 이미 중앙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그을린 파이프들에 대한 기록과 담배의 샘플들을 유럽에 알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서양인들은 남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이 로마시대때 파이프흡연을 한 것과 같이 파이프로 흡연한 사실에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정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시대 대 흡연파이프의 브랜드를 찾았다고 하는 버지니아(Virginia)는 근대 담배재배가 이 버지니아(Virginia)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산업적으로 번창한 곳이며 이곳에서 남미까지의 여러 흡연재료가 많았다는 사실도 함께 알 수가 있다. 버지니아(Virginia)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론 어떤 곳이던가.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살펴보았듯이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1577년 이곳을 침범하여 개척하였다 하였고 그 이후 존 롤프가 정착하게 만들었다는 곳이며 이것들은 전부 일본해적 왜구(倭寇)들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옛 잉글랜드(England)의 별칭이며 남부 해안의 백악질 절벽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하는 앨비언(Albion)과도 밀접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버지니아를 뉴 앨비언(New Albion)이라 하였다는 사실만 하더라도 그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 그 만큼 버지니아는 존재가 미미할 때 잉글랜드의 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잉글랜드인들이 처음 개척한 땅이 바로 지금의 버지니아(Virginia)로 알려져 있고 그곳에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이은 식민지개척자 존 롤프(John Rolfe:1585-1622)가 1612년에 담배를 처음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으며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 거주하던 인디언들로부터 담배재배방법을 습득하여 인디언을 쫓아내고 담배 재배산업을 독점했다고 말하고 있는 비열한 역사 또한 문신처럼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자에서 엘로 헨 베인을 그라운드 체리(ground cherry)한 것에서 학명 피잘리스 비스코사(Physalis viscosa)를 발견할 수 있었다. Physalis viscosa (n)yellow henbane, Physalis viscosa(found on sea beaches from Virginia to South America having greenish-yellow flowers and orange or yellow berries) 범위:South-eastern N. America - Florida to Texas and Virginia. 피잘리스 비스코사 학명 역시 남부와 동부, 북부 아메리카대륙-플로리다에서 텍사스와 버지니아를 생육 범위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종(種)의 꽃받침은 유독하여 섭취되지 않아야 하고 열매는 먹을 수가 있다 하였으며 용변과 이뇨작용을 순조롭게 한다든지 요사증(尿砂症)치료, 소변장애, 열과 통풍을 치료하고 잎들과 줄기들은 해열제와 강장제로 사용되며 그것들은 말라리아에 뒤 이은 잔여 증상인 으스스한 느낌을 없애며 빈혈증도 치료한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상당히 약용작용이 강한 식물임도 알 수가 있다. In Chinese medicine, Physalis species are used to treat such conditions as abscesses, coughs, fevers, and sore throat. Smooth groundcherry (P. subglabrata) is classified as a hallucinogenic plant, and its cultivation for other than ornamental purposes is outlawed in the US state of Louisiana under State Act 159. 마찬가지로 중국 의학에서도 꽈리(산장) 피잘리스(Physalis)종(種)은 농양(膿瘍), 기침, 발열(發熱) 및 인후통(咽喉痛)과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된다 하였고 이 종들은 주로 관상용으로써 뿌리와 열매는 약용과 또는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였고 한방에서는 식물 전체를 말린 것을 산장(酸裝)이라 하여, 기생충, 열해, 임질, 통경, 안질, 임파선염, 간염, 간경화, 자궁염 등에 처방하며 이뇨, 진통, 해독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서양 자료와 거의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산장과 다른 종(種)이라고 하는 부드러운 그라운드체리[Smooth groundcherry(Physalis subglabrata)]는 환각적인(hallucinogenic)식물로 분류되고 있으며 장식적인 목적 이외의 재배는 2005년에 발효된 루이지애나주법(Louisiana State Act 159)에 의해 루이지애나에서는 아예 재배가 금지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Smooth groundcherry(Physalis subglabrata)] 그리고 꽈리(산장)을 아메리카인디언들은 음식으로 사용했다고도 알려진다. 피잘리스 롱기폴리아(Physalis longifolia)의 일반적인 이름은 그라운드체리(groundcherry), 긴 잎 그라운드체리(longleaf groundcherry) 및 야생토마토(Wild tomatillo)로 알려져 있으며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 동부, 멕시코 북부가 원산지이다. 푸에블로족(Puebloan peoples)은 이를 차로카(charoka)과일, 수마차로카(shuma charoka)라 하였고 신선하게 조리했다고 알려진다. 애리조나주와 접하는 뉴 멕시코주 중서부에 사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주니족(Zuni people)을 푸에블로족이라고도 하는데 케츠토키아(Ke'tsitokia)라 하면서 상대적인 학명 피잘리스 헤데리포리아(Physalis hederifolia)를 언급하였고 아마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리하고 있는 것은 다 식용으로 가능한 종이기 때문이다. 토마토 맛을 내는 과일은 양파, 고수, 칠리 등을 넣어 끊여서 섬세한 요리로 만들었고 과일도 말린 뒤 밀가루로 반죽을 하여 빵을 만들었다고 하며 오늘날에는 주니족은 야생종을 사용하는 전통요리에서 파생된 소스조리법을 이용하여 보통 토마토(common tomatillo)라 하는 ‘피잘리스 필라델피카(Physalis philadelphica)’를 사용한다라고 되어 있다. [피잘리스 헤데리포리아(Physalis hederifolia)] 결론적으로 산장(酸裝)이라 하고 꽈리하 하는 이 식물은 근원적으로 아메리카대륙이 원산지이므로 우리나라 동국의 세속풍속으로 전해진 여자아이들의 꽈리불기놀이는 그 근원지가 확실하다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1)酸浆(Physalis alkekengi L.)红姑娘, 挂金灯, 锦灯笼, 金灯, 泡泡草等 - Chinese Lantern JAPANESE-LANTERN, Physalis franchetii Mast; Strawberry groundcherry (2)苦蘵(Physalis angulata L.)炮仔燈, 天泡子, 天泡草, 黃姑娘, 小酸漿, 樸樸草, 打額泡。 CUT-LEAVED GROUND-CHERRY, Physalis parviflora RBr; Physalis pendula; Cutleaf groundcherry; Physalis lanceifolia Nees; Physalis pendula Rydb (3)毛苦蘵(Physalis minima L)Pygmy Groundcherry, Physalis eggersii OE Schulz; Physalis lagascae Roem & Schult (4)灯笼果(Physalis peruviana L.1763)秘鲁苦蘵- Peruvian Groundcherry CAPE GOOSEBERRY, Physalis edulis Sims; Cape-gooseberry; (5)毛酸漿(Physalis pubescens L.1753)洋姑娘, 甜姑娘, 戈力-Groundcherry, Husk-tomato, LOW GROUND-CHERRY, Physalis surinamensis (6)黏果酸漿(Physalis philadelphica L.)又稱墨西哥酸漿,為綠色莎莎醬等原料 - Tomatillo LARGE-FLOWERED TOMATILLO, Mexican groundcherry (7)Physalis viscosa L. – grape groundcherry, star-haired groundcherry, STELLATE GROUND-CHERRY, Published In: Species Plantarum 1: 183. 1753. (1 May 1753) Locality: Habitat in Virginia, Bonaria ***************************************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무굴제국" rel="tag" target="_blank">무굴제국</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파이프" rel="tag" target="_blank">파이프</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꽈리 산장(酸醬Physalis alkekengi)" rel="tag" target="_blank">꽈리 산장(酸醬Physalis alkekengi)</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피잘리스(phusallis)" rel="tag" target="_blank">피잘리스(phusallis)</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방광(bladder)" rel="tag" target="_blank">방광(bladder)</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케이프 구즈베리" rel="tag" target="_blank">케이프 구즈베리</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잉카베리" rel="tag" target="_blank">잉카베리</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그라운드 체리(ground cherries)" rel="tag" target="_blank">그라운드 체리(ground cherries)</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티파리(Tipari)" rel="tag" target="_blank">티파리(Tipari)</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계금등(挂金燈)" rel="tag" target="_blank">계금등(挂金燈)</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금등롱(錦燈籠)" rel="tag" target="_blank">금등롱(錦燈籠)</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괴등구(鬼燈球)" rel="tag" target="_blank">괴등구(鬼燈球)</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중국제등(Chinese lantern)" rel="tag" target="_blank">중국제등(Chinese lanter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일본제등(Japanese lantern)" rel="tag" target="_blank">일본제등(Japanese lanter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구나 톰프슨(Gunnar Thompson)" rel="tag" target="_blank">구나 톰프슨(Gunnar Thompso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황색 헨 베인(yellow henbane)" rel="tag" target="_blank">황색 헨 베인(yellow henbane)</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미어샴(meerschaum)" rel="tag" target="_blank">미어샴(meerschaum)</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해포석(海泡石:sepiolite)" rel="tag" target="_blank">해포석(海泡石:sepioli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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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리(酸醬,Physalis alkekengi)와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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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靈芝,Lingzhi mushroom)로 본 역사
********************************** 영지(靈芝:Lingzhi mushroom)로 본 역사 글쓴이:한부울 머리말서양학자들이 만든 영지 일본학명영지를 말하는 역사와 생물학영지는 아메리카대륙 동부 산(産)또 하나의 영지버섯인 실로사이빈(psilocybin) 정리 머리말 아마도 영지(靈芝:Lingzhi mushroom, Reishi Mushroom)가 세종지리지 토공 목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수많은 죽은 나무기둥에 생성되는 지극히 확률적으로 낮은 자연생육에 관한 문제도 있겠지만 특정 특산물와 같이 토산(土産)으로 나타낼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고 또한 영지의 인위적인 재배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기록으로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쨌던 아래 기록을 보면 적은 회수라고 하지만 임금에게 영지를 바쳤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가끔씩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중국역사를 포함한 조선의 자연환경적인 상황을 특별하게 그려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15일 乙酉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경산 부사 이황이 상서로운 영지 버섯을 캐서 바치다 ○京山府使李滉得異草於河濱縣, 色赤三枝, 體如菌。 以爲瑞, 送于參贊門下府事南誾第, 誾謂靈芝以獻。以爲瑞, 送于參贊門下府事南誾第, 誾謂靈芝以獻。 경산 부사(京山府使) 이황(李滉)이 하빈현(河濱縣)에서 이상한 풀[異草]을 얻었는데, 빛깔은 붉고 가지가 셋이며, 몸은 버섯과 같았으므로, 상서(祥瑞)라 하여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은(南誾)의 사제(私第)에 보내니, 남은이 영지(靈芝)라 하여 임금에게 바치었다。 분명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조3년(1394) 위 기사를 보면 영지(靈芝)가 발견되었고 그것을 임금에게 바치었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제11권 경기(京畿)편에 “적성현(積城縣)동쪽 20리 지점에 감악산(紺岳山)이 있는데 영지(靈芝)는 흰 구름 피는 둔덕에 나고, 늙은 잣나무는 돌 틈에 자란다.”라고 적혀 있다. 구과식물문(毬果植物門:松柏門Pinophyta), 구과식물강(毬果植物綱:Pinopsida), 구과목(毬果目:Pinales)에서 7과(科) 70속(屬) 630종(種)으로 분류된다고 하였으며 7과(科)가 개비자나무과(Cephalotaxaceae) : 3속 20종, 금송과(Sciadopityaceae) : 1속 1종(금송), 나한송과(Podocarpaceae) : 18속 170-200종, 남양삼나무과(Araucariaceae) : 3속 41종, 소나무과(Pinaceae) : 11속 22-250종, 주목과(Taxaceae) : 3속 12-30종, 측백나무과(Cupressaceae) : 30속 130-140종 로 나누고 이와 다른 계통분류를 보면 소나무과(Pinaceae)는 구과식물 중 경제적으로 주요한 여러 수종을 포함하는 과(科)로 분류되고 4개 아과의 11개 속(屬)으로 분류한다고 되어 있다.어쨌던 잣나무는 구과목의 소나무과의 식물로 분류되며 우리나라에서는 이 잣나무를 일반적으로 소나무라 하며 홍송(紅松 Korean Pine)이라 하는데 이를 우리는 한국소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서양에서는 이 홍송(RED PINE)을 노르웨이소나무로 알려져 있고 레지노사 소나무(Pinus resinosa Sol. ex Aiton)라 하는데 북아메리카대륙 중북부에 위치한 미네소타 주(State of Minnesota)의 주목(州木)일 뿐만아니라 뉴펀들랜드 서쪽에서 매니토바까지, 남쪽 애팔래치아산맥에서의 버지니아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펜실베니아까지의 작은 개체군, 그리고 북부뉴저지와 일리노이주에서 서식하고 있으며 이 소나무(잣나무)는 거의 린네시대때 학명이 분류되었다고 여겨지며 스웨덴 자연학자 솔랜더(Solander)와 스코들랜드(Scotland) 식물학자 월리엄에이톤(William Aiton)의 학명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본 블로그 글 "소나무(赤松, Korean Red Pine)와 잣나무(紅松, Korean Pine)의 혼란 http://blog.daum.net/han0114/17049727"에서 밝혀본 바에 의하면 일명 아메리카 적송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것을 글쓴이는 한국소나무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때문에 이것이 소나무일 가능성이 높을뿐만아니라 분포지가 놀랍게도 북아메리카 동북부지역 전역에 분포하고 있는 것은 분명 세계삼한역사학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편에 보면 천자(天子)의 은택을 선양(宣揚)함으로써 한 방면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소리와 화한 기운을 소통시켜, 서늘한 바람이 되고 엉키어 단비가 되게 함으로써, 따뜻하고 빛나서 신작(神雀)과 영지(靈芝)의 상서가 모두 지경 안에 모이는 것을 내가 군에게 바라지 않고 누구한테 바라겠는가라는 글귀를 발견할 수가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경상도(慶尙道) 편에는 골내사(骨乃寺)는 영지산(靈芝山)에 있다 하고 있음을 또한 알 수가 있는 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파악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모든 기록들은 조선(朝鮮)에서 영지(靈芝)가 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들이다. 그 외 이 영지가 조선에서 상서로운 서초(瑞草)라 하여 지면석이나 모퉁잇돌 또는 석경 등에 영지 무늬를 새겨 상서로움을 빌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데 세종 2년 경자년(1420) 9월 16일(신사) “열 두 방위로 놓은 지면석(地面石)이 열 둘인데【아래에는 영지(靈芝)를 새기고, 위에는 구름무늬와 열두 방위 지신(地神)을 새겼는데, 구름무늬는 좌우로 나누어져 있고, 지신은 중앙에 있으며, 돌 하나에 지신 하나씩 있다.】 높이가 각각 2척 8촌, 길이가 각각 4척 8촌 5푼, 두께가 각각 3척이다” 라는 기록과 세종 2년 경자년(1420) 1월 3일(임인) “모퉁잇돌[隅石]이 12개이니,【형상은 석경(石磬)과 같은데, 아래는 영지(靈芝)를 새기고, 위에는 대나무와 방울[鐸]을 새겼으니, 대는 왼편에 있고, 방울은 오른편에 있다.】높이가 각 2척 8촌, 길이가 각 3척 9촌, 두께는 각 3척이다”란 기록 그것이다. 영지가 성서 그리고 영지(靈芝)를 지초(芝草)라 하거나 버섯의 일종으로, 복초(福草)라고 하여 상서(祥瑞)로운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영지를 서지(瑞芝)라 함도 여기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영지(靈芝)는 버섯으로 모양이 계통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데 육질은 코르크 질 같고 표면은 니스를 칠한 것 같은 광택이 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형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로부터 영지초(靈芝草), 불노초(不老草)라 하여 영약으로 알려져 왔으며 갓과 줄기는 옻칠을 한 것처럼 광택이 나는데 갓은 대체로 콩팥 모양이거나 원형이라 하였으며 북반구의 온대 이북지역에서 오얏나무(李樹), 밤나무(栗樹), 뽕나무(桑樹), 너도밤나무(山毛櫸), 매화나무(梅花樹)등에 기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대체로 1년생이지만 기온이 연중 따뜻한 곳에서는 다년살이(多年生:perennial)를 한다고 적고 있어 수십년생이 발견되는 경우이다. 또한 고대 중국의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과 본초강목(本草綱目)등에 산삼과 더불어 가장 좋은 약으로 소개되었고 생명을 양생하는 영약으로 기록된 이후 중국에서는 다양한 목적으로 약용으로 이용되어 왔음을 알 수가 있으며 갈색 계통의 영지는 다른 것보다 약효가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고 영지가 속하는 구멍장이버섯류(polypores)는 이를 선초(仙草), 길상버섯(吉祥茸), 영지초(靈芝草), 적지(赤芝)등의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것들은 거의 조선에서 부르던 것과 동일한 명칭임을 알 수가 있다. 어쨌든 중국이라는 역사는 삼한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힘든다. 서양학자들이 만든 일본학명 그런데 놀랍게도 서양인들에 눈에 비치는 영지는 모두 일본영지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근세기 서양학자들에 의해 아시아용으로 분류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피각(皮殼)이 진한 자홍색, 자흑갈색이고 칠과 비슷한 광택이 있다는 자지(紫芝)의 근친종(近親種)으로 학명 가노데르마 자포니쿰“Ganoderma japonicum(Fr.)Lloyd”로 설명하고 있지만 생물학분류체계적으로 전혀 독립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명확하게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은 자포니쿰(japonicum)은 현 열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북아메리카대륙에 기생하던 해상족인 네덜란드나 잉글랜드 이주민이었던 사실을 토대로 그들의 근거지를 표본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확히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코니쿰을 명명한 스웨덴 균류학자, 식물학자인 엘리아스 프라이스(Elias Magnus Fries:1794-1878)는 린네와 비교되는 식물학자이며 특히 균류학의 연구원이었다. 그는 메사추세츠주(Massachusetts)에 있는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에서 1849년에 외국인 명예회원으로 임명되고 그해 관리자가 되었으며 1851년에 웁살라식물원(Uppsala Botanic Garden)과 박물관의 식물학 교수와 이사 재직하였다고 되어 있다. 물론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어느 곳에 위치한 웁살라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각자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으로 지금까지 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에서 발트해가 허드슨만이라 하였듯이 북유럽제국들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 허드슨베이 지역에 넓게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가 유럽대륙 스웨덴 출신인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출신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은 글쓴이의 판단으로 북유럽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의 위치적 혼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In the late 1960s, cultivation of Lingzhi had been achieved in China;at that time there were only four Ganoderma species both in commercial and ressearch cultivation, which included G.lucidum(Leyss. ex. Fr.) Karst. var., G. japonicum(Fr.) Lloyd., and G. capense(Lloud)Teng.<Edible and Medicinal Mushrooms: Technology and Applications[Diego Cunha Zied, Arturo Pardo-Gimenez.]386p> 1960년 이후에 신중국에서 영지(靈芝)가 경작, 재배되었다는 사실은 근원종을 찾기에는 매우 혼란스러운 결과이다. 때문에 동양종으로 가름되는 가노데르마 자포니쿰‘Ganoderma japonicum’ 은 일단 var. 가 붙어 가노데르마 종의 대표종인 "Ganoderma lucidum (Curtis) P. Karst. 1881"를 포함한 가노데르마 종의 변종(Variety)임을 간접적으로 확인 할 수가 있다. 문제는 아래 사진에서도 보듯이 이 자포니쿰(japonicum)에서 광택이 보이지 않고 흐려져 있으며 색상자체가 검은 빛이 나 자색의 진품으로 보이지않는다는 것이다. 자지[紫芝:Ganoderma japonicum(Fr.)Lloyd.(그림)] 在《神农本草经》中将灵芝依色泽的不同划分成赤芝、黄芝、白芝、青芝、黑芝、紫芝六种。而现代常见的只有赤芝和紫芝两种,其它以野生为主。 위 신중국자료를 보면 후한시대(後漢:25-220)에 정리한《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서 말하길 영지(靈芝)는 다양한 색상으로 나누어지고 적지(赤芝), 황지(黄芝), 백지(白芝), 청지(青芝), 흑지(黑芝), 자지(紫芝) 6종(種)이라 하였으며 유일하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두 가지 종(種)인데 적지(赤芝)와 자지(紫芝)이라 한 사실이 있다. 물론 이러한 색상이 다양한 영지가 현재 두가지 종으로 압축되어 있다는 점도 상당히 많은 종류에서 변종으로 결과물이 혼종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며 어쩌면 이것은 아시아용으로 용인되거나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의심케 하는 것이다. 据《山海经》中记载传说灵芝是炎帝之幼女“瑶姬”的精灵转化为“瑶草”即灵芝。而民间传说的《白蛇传》中白素贞盗南极仙翁的灵芝救许仙还阳的故事。灵芝同样也大量出现在中国古代小说等文学作品中。灵芝菌盖表面有一轮轮云状环纹,被称为“瑞征”或“庆云”,被古人看做是吉祥的图案,古代建筑的柱头、檐下等处都绘有这种庆云图。 산해경에 기재된 영지의 전설을 보면 염제신농(炎帝神農)의 어린 딸 요희(瑤姬)가 요절하여 그녀의 시신이 요초(瑤草)가 되었다(女屍化爲瑤草)는 전설이 있고 영지는 많은 고대 중국소설 및 기타 문학작품에 나타나며 영지의 머리 표면에는 단정(瑞征) 혹은 광운(庆云)이라 불리는 둥근 구름 모양의 고리무니가 있는데 이를 고대인들은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의 길상적인 도안으로 간주하였다는 사실은 조선의 기록과 거의 동일하다. 때문에 고대건축의 기둥머리(柱頭)와 댓돌(처마 밑)도처에 구름지도가 그려져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은 매우 전통적으로 내려온 관습인 것으로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알아보았듯이 건축물 지면석(地面石), 모퉁잇돌[隅石], 석경(石磬)등에 영지의 무늬를 새겼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어 중국과 거의 동일한 관습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赤芝 科學分類 界: 真菌界 Fungi 亞界: 雙核亞界 Dikarya 門: 擔子菌門 Basidiomycota 亞門: 담자균아문(傘菌亞門 Agaricomycotina) 綱: 傘菌綱 Agaricomycetes 目: 多孔菌目 Polyporales 科: 靈芝科 Ganodermataceae 屬: 靈芝屬 Ganoderma 種: 赤芝 G. lucidum 二名法 Ganoderma lucidum(Curtis) P. Karst 1881, Reishi Mushroom 물론 분류학적으로 들어가 보면 현재 단정적으로 동양 영지라고 알려진 것들은 동아시아 대륙 신중국학자들은 물론이고 아시아학자 모두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만 전통적 영지버섯의 두 가지의 종(種)에서 [1.赤芝]를 학명 “Ganoderma lucidum(Leyss. ex. Fr.) Karst.” 정리하였고 [2.紫芝]를 학명 “Ganoderma japonicum (Fr.) Lloyd” 로 정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매우 동양역사적으로 변화하였다는 의심이 존재한다. 1881년에 영지버섯속명(屬名)을 명명한 핀란드 균류학자 버섯전문가인 페터 카스텐(Petter Adolf Karsten:1834 –1917)은 주로 내륙에서 활동했다는데 핀란드 내륙이라면 거의 북유럽의 북해와 접한 곳이기 때문에 내륙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때문에 이 내륙이란 단어의 의미가 어딜 말하는지 명확하지가 않지만 글쓴이는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라고 판단한다. Ganoderma japonicum (Fr.) Sawada, Report of the Department of Agriculture Government Research Institute of Formosa 51: 76 (1931) [MB#268353] Basionym: Polyporus japonicus Typification Details: Specimen record #42108 Host-Substratum/Locality: Japan Citations in published lists and Bibliographies: Sawada, K. 1931. Descriptive catalogue of the Formosan fungi(菌) V. Report of the Department of Agriculture Government Research Institute of Formosa. 51:1-131 Position in classification: Fungi(菌類), Basidiomycota(담자균류), Agaricomycotina(담자균아문), Agaricomycetes(담자균강) , Polyporales(구멍장이버섯목), Ganodermataceae(불로초과), Ganoderma(불로초속) Synonymy: Boletus dimidiatus Thunb., Fl. japonica: 348, f. 39 (1784) [MB#468264] Polyporus japonicus Fr., Epicrisis Systematis Mycologici: 442 (1838) [MB#268361] Fomes japonicus (Fr.) Sacc., Sylloge Fungorum 6: 156 (1888) [MB#229469] Scindalma japonicum (Fr.) Kuntze, Revisio generum plantarum 3 (2): 518 (1898) [MB#471413] Polyporus lucidus var. japonicus (Fr.) Cleland & Cheel, Journal of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New South Wales 51: 474 (1917) [MB#293231] Ganoderma dimidiatum (Thunb.) V. Papp, Studia Botanica Hungarica 47 (2): 265 (2016) [MB#818577] Name: Ganoderma dimidiatum (Thunb.) V. Papp Nomenclature: Rank: Species Status: Accepted Name: Ganoderma dimidiatum Author: (Thunb.) V. Papp Citation: Deprecated Synonyms: Boletus dimidiatus Thunb., Fomes japonicus (Fr.) Sacc., Ganoderma japonicum (Fr.) Sawada, Polyporus japonicus Fr., Polyporus lucidus var. japonicus (Fr.) Cleland & Cheel, Scindalma japonicum (Fr.) Kuntze Notes on Taxonomy: Papp, V. (2016). The first validly published laccate Ganoderma species from East Asia: G. dimidiatum comb. nov., the correct name for G. japonicum. [STUDIA BOTANICA HUNGARICA, 47(2), 263-268.] 위 내용은 분류학 상황을 나타낸 것인데 살펴 보면 일본 영지“Ganoderma japonicum (Fr.) Sawada”는 일본균류학자 사와다(Kaneyoshi Sawada, Kenkichi:1888-1950)가 작성한 1931년 포모사(Taiwan)농무부 정부연구보고서에 나타난 학명임을 알 수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그것의 근거와 효력을 나타내는 옻칠 모양의 광택이 나는 가모데르마 종[laccate Ganoderma(Ganodermataceae)]를 발견했다 하였고 이것의 정확한 학명이 "Ganoderma dimidiatum"라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영지버섯은 형태적으로 매우 중요한 버섯 갓 표면에 광택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Abstract: Th e taxonomic interpretations of Ganoderma japonicum(Polyporus japonicus) was controversial in mycological studies and formerly proposed to be dropped for consideration, because of the lack of type specimen. However, according to the International Code for Nomenclature for algae, fungi and plants, P. japonicus is a superfl uous name for Boletus dimidiatus published validly by Thunberg in 1784. The original material of B. dimidiatus is available at the Museum of Evolution at Uppsala University (UPS). Therefore the new combination Ganoderma dimidiatum is proposed hereby. 위 자료에서 나타나는 관념적인 내용을 보면 Ganoderma japonicum(Polyporus japonicus)의 분류학적 해석은 균류학적 연구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하고 있으며 이전에 유형(類型)표본이 없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제안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조류, 균류 및 식물에 대한 국제 규약에 따르면 P. japonicus는 1782년 종명(種名)에 자포니카(japonica)를 수없이 붙여 되었던 일본의 린네라고 불리는 칼 튠베르그(Carl Peter Thunberg:1743-1828)가 정식으로 발행 한 “Boletus dimidiatus Thunb.1784”의 초유명으로 알려지고 B. dimidiatus의 원래 표본은 옵살라대학(Uppsala University)의 진화박물관에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새롭게 결합한 Ganoderma dimidiatum가 제안되었다는 것이다. [B. dimidiatus] Summary:Ganoderma P. Karst., Revue Mycologique Toulouse 3 (9): 17 (1881) [MB#17639] Synonymy: ≡Foraminispora rugosa (Berk.) Costa-Rezende, Drechsler-Santos & Robledo, Persoonia 39: 262 (2017) [MB#819019] 종명 디미디아툼(dimidiatum)은 라틴어로 의미가 절반, 이등분, 반감(halved)의 뜻이다. Ganoderma dimidiatum=>Ganoderma japonicum 으로 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1881년이라면 시대적으로 서양학자들이 힘을 쓰던 시절이고 상당히 많은 생물들이 서양학자들에 의해 분류체계가 장악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던 모든 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일본학명(Ganoderma japonicum)은 가노데르마(Ganoderma)속에 포함된 것으로 만족할 뿐 독립적 분류체계는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 이 글에서 핵심적 포인트이다. 서양학자들이 명명한 영지버섯의 속명 가노데르마(Ganoderma)의 어원(語源)을 살펴보면 그리스어 가노스(ganos/γανος)에 기원하는 것으로써 "밝기, 광택(brightness, sheen)"을 의미하고 또한 데르마(derma/δερμα)는 "피부(skin)"를 말하고 있어 ‘광택이 나는 표면’, ‘빛나는 피부’를 의미하는 합성어임을 알 수가 있는데 영지(靈芝)의 광택이 나는 버섯 머리 갓 부분에서 분명한 특징을 찾을 수가 있다. 아마도 이것은 동서양 모두 형태적인 면에서 동일하게 보았던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자포니쿰의 모체가 되는 디미디아툼은 이것이 반감이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노데르마속(Ganoderma屬)은 핀란드 균류학자 피테르 카르스텐(Petter Adolf Karsten:1834-1917)에 의해 1881년에 명명되었고 그에 의해 오직 유일한 종(種)인 카노데르마 루시덤(Ganoderma lucidum(Curtis)Karst)을 여기에 포함했음을 알 수가 있으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아시아용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바탕으로 프랑스인 제약사이며 균학자인 나르시스 파투야르(Narcisse Théophile Patouillard:1854-1926)는 1889년 연구논문에서 카르스텐 가노데르마(Ganoderma)속(屬)으로 분류 된 총 48종(種)의 색소 포자, 부착 관 및 왁스를 칠한 딱딱한 껍질이 있는 버섯 갓이 있는 모든 종(種)을 포함하도록 수정했다고 알려진다. 특히 파투야르는 열대성균류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브라질(Brazil), 자바(Java), 과들루프 (Guadeloupe), 멕시코(Mexico),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 갬비어 아일랜드(Gambier Islands), 필리핀(Philippines) 등 많은 지역에서 균류에 관한 연구가 상당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만큼 오늘날 신성 식물이었던 영지의 분류체계에 영향력을 상당히 끼쳤다는 짐작이 가능한 것이다. 1902년 윌리엄 머릴(William Murrill:1869-1957)이 북아메리카에서 가노데르마(Ganoderma)속을 조사 할 때까지 이전 연구는 G. lucidum, G. resinaceum Boud를 포함한 유럽 종에만 초점을 맞추었다고 알려진다. 사실상 가노데르마 루시둠(G. lucidum) 역시 유럽종에 가깝다. 그럼에도 중국의 고서 영향으로 근원종으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아사이종으로 굳어진 것이다. Ganoderma resinaceum Boud.(1890) 유럽남부産 Ganoderma valesiacum Boud.(1895) 스웨덴産 1.bright, shining 2.clear 위의 유럽종의 그림을 보듯이 버섯 표면에 광택이 없다. 카르스텐이 가노데르마속(屬)에서 수정하였다면 그는 무엇을 수정하려 했을까?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용, 아시아용이었을 것이다. 한 때 대표학명인 되었던 종명(種名) 루시덤(lucidum)역시 외관이 반짝반짝 빛나는 밝고 광택이 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도 많은 혼란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레이시 머쉬룸(reishi mushroom) Reishi, meaning "divine or spiritual mushroom", is from the japanese tradition, where it is also known as the phantom mushroom, or varnished conk. It may be related to the transformation of Buddha into rishi, meaning "forest sage". 레이시 머쉬룸은 서양인들이 호칭하는 영지를 말한다. 또한 위 영어자료를 보면 "신(神) 또는 령(靈)의 버섯"을 의미하는 레이시(reishi)는 팬텀 버섯 또는 ‘광택이 나는 니스’로도 알려져 있어 중국전통이 아니라 일본전통에서 온 것이라 하며 부처님을 "숲의 현자"를 의미하는 리시(rishi)와 관련이 있다 하였다. 여하튼 영지는 광택이 나는 버섯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레이시의 발음에서 보듯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충분한 이해가 가능하지만 어쩌면 일본인들의 관습이 서양인들이 그대로 전습되거나 전달되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mannentake, means "ten-thousand-year mushroom," or "mushroom of immortality." The Japanese also know it as saiwai-take, "good fortune mushroom," or sarunouchitake, meaning "monkey's seat." 좀 더 들어가보면 일본어 만넹타케(mannentake,まんねんたけ)는 "일만년(一萬年)짜리 버섯 만년용[万年茸]"또는 "불멸의 버섯"을 의미하며 일본인은 또한 그것을 세와이다케(saiwai-take)라 하고, 좋은 행운버섯"good fortun mushroom"또는 "원숭이 자리(monkey’s seat)"를 의미하는 사루노치타케(sarunouchitake,猿のうち丈)라고 하였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당시 일본인이라 함은 아메리카대륙전체에 거주하고 있던 잉글랜드계, 네덜란드계 등으로 나타나는 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대비할 때 일본은 결코 아시아계 열도를 지칭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일본인들이 지칭한 지칭들은 곧 한국인들이 영지(靈芝)라 하거나 서지(瑞芝)라 한 것과도 다르지 않다고 보며 이는 삼한의 역사문화가 그들에게 전수, 전습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이 영지버섯을 레이시머쉬룸이라 하는 것은 일본어를 따른 것이라 하는 것과 모든 서양인들이 작성한 생물자료에 유독 일본을 앞세운 것들은 근대사가 가진 또 하나의 모순이고 오류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영지를 말하는 역사와 생물학 중국에서도 영지(靈芝)는 영혼, 기적, 신성, 신비, 효능, 유효한 등으로 의미가 있는 령(靈)과 지초지(芝)는 장수(長壽)의 의미가 있는 명칭을 사용하고 여기에 상서로운 풀로 여기는 신초(神草)로 기록하거나 "길조 식물"의 의미인 서초(瑞草)라는 명칭은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 이아(爾雅,Erya)사전에서 균(菌 "mushroom"의 miscopy)을 초(草)"버섯"으로 정의하고 곽박(郭璞:276-324)의 주석에서 꽃이 1년에 3번 피며, 그것은 고대에 상서로운 풀을 가리키는 루이카오[ruicao,瑞草]라 하였다. 그 외 다른 중국 이름은 서지(瑞芝)"경사스러운 버섯", 신지(神芝) "신성한 버섯"(정신, 초자연, 신성), 목영지(木靈芝)라 하였고, 선초(仙草)"불사의 식물" 또는 영지초(靈芝草) 또는 지초(芝草)"버섯식물"이라 하였다. [문화포털 한국의 문양]글을 빌리면 중국과 동일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지버섯이 일 년에 세 번 꽃이 피기 때문에 삼수(三秀)라 부르기도 했다 하였으며 옛사람들은 영지버섯을 서초(瑞草: 상서로운 풀) 또는 선초(仙草: 신선의 풀)라 부르기도 하였고 또한 사람들은 이것을 먹으면 기사회생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한다고 믿어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바다 가운데 삼신산(三神山)에 있다는 불로초에 대한 관념과 관련이 깊으며 영지버섯은 그 모양이 여의(如意)를 닮았다고 하여 길상(吉祥)의 상징물로 널리 인식되었다고 적고 있다. [여의(如意)그림] 영지(靈芝)의 이름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신성한 버섯은 근세기에 들어서면서 온갖 조작에 대상이 되었고 결국 형체를 알 수 없도록 변형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뒤틀린 역사에 결과이다. 그만큼 이 신비스러운 약재에 서양인들이 무한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라고 풀어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들도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근원적으로 태생적 불로초의 진상을 파악하기엔 매우 어렵다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나 이것은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변명에 가깝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부족함을 과학이란 영역을 이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리화하고 있다. 근세기 DNA의 염기서열(鹽基序列)이 어떤 순서로 늘어서 있는지 분석하는 게놈시퀀싱(Genome equencing)이 아주 늦은 시기인 1990년 완성 출현으로 가노데르마속(屬)은 분류학적으로 재분류를 거쳤다는 사실이 있으며 균류(fungi)의 유전자 분석에 앞서 형태학적 특성에 따라 분류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과거 서양학자들의 영지버섯을 대하던 상황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문제는 근원지가 엉뚱한 방향으로 뒤바뀌는 것은 근세기 역사판짜기 일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냉정하게 따진다면 서양학자들이 들 쑤셔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밖에 없다. 옛 사서에 이미 명확히 니스 칠한 것처럼 광택이 나는 버섯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름무늬를 하였으며 색상별로 6가지를 말했고 1년에 꽃이 3번 핀다는 기록이 있다. 무엇이 어려웠을까? 하나의 근원을 동아시아용 또는 아시아용으로 떼서 억지로 분류시키기가 어려웠던 것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가노데르마(Ganoderma)게놈의 ITS 영역은 표준 바코드 마커로 간주되거나 인식되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1990년 이전까지의 분류체계가 정상이었다고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ganoderme [polypore ] luisant, (일어) reishi, (중국어) lingzhi, Ganoderma lucidum 영지는 일반적으로 주름버섯강(傘菌綱:Agaricomycetes), 구멍장이버섯목(多孔菌目:Polyporales), 불로초과(靈芝科:Ganodermataceae), 불로초속(靈芝屬:Ganoderma)에 속하는 버섯을 말하는데 학명은 Ganoderma lucidum(Curtis) P.Karst.(1881)가 대표학명으로 분류된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이것은 동양신중국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식물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그 밖에 다른 이름으로 선초(仙草), 길상버섯(吉祥茸), 영지초(靈芝草), 적지(赤芝) 등의 호칭으로 불리고 있고 색에 따라서 자지(紫芝), 흑지(黑芝), 청지(靑芝), 백지(白芝), 황지(黃芝)라 하지만 자지(紫芝)는 근친종(近親種)으로 Ganoderma japonicum(Fr.)Lloyd 은 1881년 동양종으로 굳어진 것이며 다른 네 가지 색의 영지는 두 가지 중 하나에 속하는 경우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명확하게 6개의 색상 구분이 사실상 와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자지(紫芝)의 근친종이 Ganoderma japonicum(Fr.)Lloyd 이라고 확정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대표학명으로 알려진 아시아용 학명 “Ganoderma lucidum(Curtis) P. Karst 1881”이 동양 영지 레이시 머쉬룸(Reishi Mushroom)으로 서양인들이 동양인에게 각인시킨 경우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 반론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한국균학회소속 박동석(농업과학기술원 분자유전과)외 3인이 분석한 논문자료(ITS II 영역의 DNA 염기서열 분석에 의한 불로초(Ganoderma)속의 계통분류학적 고찰)에도 이와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데 불로초의 계통 분류학적 조사를 위해 불로초속(屬)중 8종(Ganoderma lucidum, G. tsugae, G. pfeifferi, G. resinaceum, G. australe-applanatum, G. oregonense, G. neo-japonicum, G. applanatum) 12균주(菌株:strain)와 out-group 균주로는 기와층버섯(Inonotus xeranticus)의 rDNA ITS II를 PCR(Polymerase chain reaction)로 증폭하여 염기서열을 비교 조사하였다고 하였고 이 계통도를 분석한 결과는 5개의 군(cluster)을 형성하였으며 G. tsugae는 각각의 G. lucidum과 하나의 clade를 이루어 두 종(種)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진화된 것으로 사료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본 조사에서는 국내에서 재배되고 있는 불로초(G. lucidum)는 그 발생지 및 국외 ITS염기서열 자료와 비교 및 분석할 때 G. tsugae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한다는 사실이다. 위 연구를 참고해 보았을 때 문제는 동양종 불로초(G. lucidum)가 아시아용으로 확정된 사실과 반면 서양종 불로초(G. tsugae)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여다 보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매우 중요한 연구결과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서양학자들의 최종 분류계통도에서 결국 1881년 핀란드 균류학자 피테르 카르스텐(Petter Adolf Karsten:1834-1917)에 의해 명명된 가노데르마속(Ganoderma屬)에서 이것보다 한참 늦은 시기인 1948년에 불로초과(Ganodermataceae)가 1948년 자바(Java)에서 체류하던 더치(Dutch:옛 일본)국적의 균류학자 마리누스 던크(Marinus Anton Donk:1908-1972)에 명명되었고 이것은 불로초과(Ganodermataceae)의 구성원에서 전통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형태학적 특성, 동종의 과잉 및 광범위한 이름 오용으로 분류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을 정확히 알리고 있다. 최근까지 가노데르마속(Ganoderma屬)에서 잔나비불로초(Ganoderma applanatum)와 잔나비걸상속(Elfvingia)같이 무광택의 버섯 머리의 표면과 더불어 광택이 나 빛이 나는 버섯 머리의 표면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가 현재 영지라고 하는 학명 “Ganoderma lucidum” 과 "Ganoderma. tsugae"과 같이 2개로 분할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Phylogenetic analysis using DNA sequence information have helped to clarify our understanding of the relationships amongst Ganoderma species. The genus may now be divided into six monophyletic groups: (1)G. colossus group México, Veracruz. Sayula de Alemán, Barbados, Brazil, Bahia(중남미) (2)G. applanatum group 전 세계(특히 유럽) Also known as the Artist's Conk. An infestation of this species was the main factor in the loss of the Anne Frank Tree. (3)G. tsugae group 북미(서부와 동부) A polypore which grows on conifers, especially hemlock; thus the common name, Hemlock varnish shelf. Similar in appearance to Ganoderma lucidum, which typically grows on hardwoods. (4)G. lucidum group Asian(동아시아) Also known as Reishi or Lingzhi. A very valuable medicine in Asian herbal medicine, known as the "King of Herbs". (5)G. meredithiae group 북아메리카(동남부) (6)G. resinaceum group 하여튼 서양학자들은 이렇게 DNA 서열 정보를 사용 1965년 헨닉(Hennig)에 의해 고안된 분류법(phylogenetic systematics)으로 6 개의 단일식물 그룹으로 나눌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위 6 개 그룹을 다 여기서 이야기 할 수 없고 중요한 3가지 만 풀이하고자 하는데 첫째 아티스트의 콘크(Artist's Conk)라고 하는 (1)Ganoderma applanatum종(種)의 침입이 앤 프랭크 나무(Anne Frank Tree)를 고사시키는 주된 요인으로 발견되던 종(種)이며 둘째, 레이시(Reishi)또는 영지(Lingzhi)라 하며 "약초의 왕"으로 알려진 아시아용 약초 (2)Ganoderma lucidum종(種)이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의 침엽수에서 자라는 (6)Ganoderma tsugae 종(種)은 다공균(多孔菌:pore fungus)의 햄록(hemlock)이라 하거나 일반적으로 광택이 나는 헴록선반(Hemlock varnish shelf)이라 하는 종(種)인데 일반적으로 활엽수에 잘 자란다는 아시아용 영지(2)Ganoderma lucidum와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밝혀지고 있다. 때문에 아시아용으로 굳혀진 (2)Ganoderma lucidum종(種)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나타나는 (6)Ganoderma tsugae 종(種)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비교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아시아용으로 알려진 영지가 아니라면 명확하게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출몰하고 있는 자연산 (6)Ganoderma tsugae 종(種)을 진짜 영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Ganoderma colossus (Fr.) C.F. Baker 1918 Ganoderma colossum 영지는 아메리카대륙 동북 산(産) 서양인자료에 나타나는 영지(불로초)의 역사를 보면 동양사 중국 고전에서 처음으로 전국시대 (475-221 BCE)와 한 왕조(206 BCE-220 CE)에서 영지를 인용했다고 하였으며 한자어 지(zhi: 芝)단어는 고전 문헌에서 약 100번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Shiji,91BCE)의 "기록"과 전한(前漢:BC206-AC 8)의 역사를 서술한 한서(漢書:82 CE)와 같은 초기 중국 역사에서의 출현에서 "불멸의 버섯, 생명의 비약"을 의미하였고 그들은 방사(方士:fangshi: Taoist occultist-alchemist), 연금술사, 마술사로 추정되는 추연(鄒衍,騶衍:BC305~240)이 영지버섯이 있는 봉래산(蓬萊山)과 같은 비밀 위치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곳에서 마법의 영지(Zhi)버섯이 자랐다고 하였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기원전 3세기 경에 중국에 도착한 것으로 마신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신들의 음료, 흥분성의 음료인 소마(Soma)에 관한 인도 전설에서 유래한 신화의 지초(zhi草)를 말하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하게 진시황(秦始皇:Qin Shi Huang,BC260–210)과 한무제(漢武帝:BC156-87, r. 141-87)를 설득하여, 진(秦)의 방사(方士) 서복(徐福,徐巿)을 불사 지초(Zhi Plant of Immortality)를 찾도록 큰 원정(기원전 219 년 Xu Fu)에 파견하였던 결과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다른 고전문서에서 지(Zhi )의 존재를 종종 식용균을 가르키며 예기(禮記:Liji)에는 일종의 이끼류(lichens)로 기재 되어 있고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삼려대부 굴원(B.C.343-B.C277?) 등이 읊었던 시가집 초사(楚辭, Chuci)에 남쪽의 애가(Elegies of the South)에서 은유적으로 언급하여 신성한 약초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회남자(淮南子:Huainanzi ) 회남(淮南)의 현인 기록에 자지(zizhi:紫芝)를 보라색 버섯으로 경구(警句)되어 있고 지균(芝菌)은 산에서 자라지만 불모의 바위에서는 자랄 수 없다고 적혀 있어 불사초, 불로초의 의미가 없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만큼 불사초란 의미를 축소시키려 한 결과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광택이 빛나는 표피를 가진 버섯 가노데르마(Ganoderma)종(種)중에 아래 3가지 종은 건강제품으로 생산하도록 승인되었다. 그러나 저러나 서양학자들도 어쩔 수 없이 영지의 효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잠시 우리는 다른 방향에서 영지를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버섯은 어디에 있는 무슨 버섯일까? 그것과 동시에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고려의 화려는 고려강산을 여강, 여산이라 하였듯이 화려강산을 금수강산이라 하여 아름다운 삼한 땅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 화려강산(華麗江山)은 한반도가 될 수 없다는 것에서 자원의 풍부함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현대 잣대로 보기 때문에 이와같은 자연이치적 관점을 경시한 것이다. 적어도 화려(華麗)는 풍부함과 같고 모든 식물들이 사계절 끊임없이 자라며 수많은 종류의 짐승과 생물들이 넘쳐나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곳은 바로 한반도가 아니라 향상 생육할 수 있는 환경의 지리적인 광대함 함께 볼 수 있는 아메리카대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한 화려는 부려(富麗)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려는 자원이 풍부하고 아름답다는 의미가 있다. 그곳은 바로 삼한(三韓) 땅이라는 사실이다. 2012년 7월 6일자 미국자료를 보면 지금까지 발견 된 가장 큰 생물은 고대 미국의 숲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에 버섯의 일종이라고 나타난다. 우리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버섯이다. 일반적으로 꿀 버섯으로 알려진 잣뽕나무버섯(Armillaria ostoyae)은 현미경 없이는 볼 수없는 작은 포자에서 시작되고 많은 담자균류(擔子菌類)의 특징적인 뿌리 모양의 구조체(菌絲屬:rhizomorphs)라고 불리는 검은 색 필라멘트를 숲을 통해 약 2,400년 동안 퍼뜨리며 나무를 죽이면서 그대로 자랐고 되어 있다. 이 버섯이 자라는 시대적 환경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1992년에 발견된 것으로 현재 오리건 주 동부에 있는 멜히어국유림(Malheur National Forest)의 2,200 에이커[acres(260만평, 8.9평방키로미터)]를 차지하며 거대한 유기체들은 표면에 들어나지 않고 땅속에서 윤곽이 3.5mile(5.6 km)나타나 있으며 평균 3feet(1m)뻗어 있고 1665개의 축구장만큼 지역을 덮고 있으며 이 버섯의 중량은 약 650톤으로 측정하고 있는 오리건 몬스터 버섯(Oregon monster mushroom)이다. (Oregon monster mushroom:오리건 주 동부에 있는 맬히어국유림) Dragon Herbs[2017.02.25]Rocky Point, North Carolina The LARGEST wild Reishi ever in Dragon Herbs’ 20 year history just arrived in our office today. It is SO large that it takes 2 tall guys to hold it up for the shot. Ron and Borna(our senior herbalist) are both 6’2”. Most wild Reishi are 4-6” in diameter. This giant mushroom measures 40” (3’4”). Reishi exhibit? Let us know if you are interested in seeing our fairly large Reishi collection. 또 하나의 충격은 바로 드래곤 허브(Dragon Herbs)라는 페이스북에 나타나는 기사인데 20년 역사상 가장 큰 야생 영지버섯(Reishi)이 그들에게 도착했다고 하며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캘리포니아 로키산맥에서에서 출현하는 바로 레이시(Reishi or Lingzhi mushroom) 영지라고 설명되는 버섯이다. 너무 커서 2명의 잡아야 된다고 하고 식물학자 론(Ron)과 보나(Borna)의 키가 6피트 2인치 (188cm)인 것을 감안할 때 이 버섯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야생 영지버섯(Reishi)은 직경 4-6inch(10.16~15.24cm)정도이나 이 거대한 버섯은 40inch:3'4"(101.6cm)가 측정되어 1미터가 넘는다. 이러한 크기보다 작지만 영지버섯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사진도 발견된다.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본래 버섯의 산지(産地)가 북아메리카대륙이 제외되는 것은 맞지 않는다. 모든 지형적 환경조건이 바로 풍부 그 자체 북아메리카대륙을 빠뜨리고는 이야기 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Reishi mushroom commonly found on Eastern Hemlocks in forests in the midwest and eastern US. Ganoderma tsugae: very similar, all white flesh, only grows on conifers, especially Hemlock, found in northern North America. 그리고 햄록이라고도 하는 송솔나무는 마찬가지로 구과목(毬果目:Pinales)의 소나무과의 식물이다. 이 식물들이 전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또는 북동부에 자라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지버섯 서양종으로 알려진 Ganoderma tsugae 는 미국 중서부와 동부에 햄록 숲에 자라고 있다 하였고 특히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침엽수림 송솔나무속(屬:Tsuga)에 자란다고 되어 있다. 캐나다솔송 Eastern Hemlock (tsuga canadensis, also known as the Canada Hemlock or Hemlock Spruce) 또 하나의 영지버섯인 실로사이빈(psilocybin) 한때 영지버섯(Ganoderma lucidum)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생장하는 폼에 의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는데 하나는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견되는 작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는 줄기를 가진 큰 표본과 열대지방에서 발견되는 길고 좁은 줄기가 정착한 또 다른 작은 표본에 있다 한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고자 하면 전자의 것은 광택이 표면에 빛나는 형태적인 요소의 버섯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근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전자에 설명한 바로 (동양종)Ganoderma lucidum.(서양종)Ganoderma tsuage: 그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이야기 할 때 이 지역을 대체적으로 조선 경기(京畿)지역이라고 보아야 할 지역이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는 자연산 환각제로 알려진 것인데 미국 서남부의 버섯에서 추출된 실로사이빈(psilocybin)계의 버섯이 그것이다. 물론 현재균류학자들은 이것도 전통적인 영지(靈芝)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실로사이빈(psilocybin)은 중앙아메리카대륙산(産)의 버섯에서 채취되는 환각성 물질의 명칭이다. 먼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근원으로 하고 있는 버섯의 종류에서 최근 분자적 증거를 확고히 한 학자는 1902년 미국균류학자 윌리엄 머릴(William Murrill:1869-1957)이며 그가 북아메리카대륙 표본에 부여한 이름인 가노데르마 세실(Ganoderma sessile)이라는 별개의 종(種)으로 최초의 줄기가 없는 형태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의 분포지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의 동부지역을 대부분 가늠하고 있으며 최초 근원지를 살펴보면 미국 동부 뉴욕 주(州)의 화이트 플레인스(New York, White Plains)이고 학명은 “Ganoderma sessile Murr 1902” 일명 큰 장수버섯으로도 불리며 미국본토 약용버섯으로 알려진 버섯이다. 가노데르마 세실(Ganoderma sessile)의 학명자인 미국의 균류학자(mycologist) 윌리엄 머릴(William Murrill:1869-1957)의 거취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동해안, 태평양 해안(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 멕시코[Mexico]그리고 카리브해[Caribbean Sea]를 따라 여행하였고 주로 플로리다주(Florida州)에서 버섯채집을 하던 1905년에 토모파거스(Tomophagus)속(屬)에서 다른 종(種)들과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형태학적 특징을 가진 단일 종(種) 폴리포루스 코로수스(Polyporus colossus)로 알려지는 가노데르마 콜로서스(G. colossus)를 수용했다고 알려지며 역사적으로, 토모파거스(Tomophagus Colossus (Fr.)Murrill 1905)는 일반적으로 불로초(Ganoderma)의 동의어로 간주되면서 지금은 불로초가 이를 입증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동양 즉 아시아용으로 적용된 버섯들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Tomophagus Murrill, 1905 Tomophagus colossus (Fr.) Murrill 1905 Polyporus colossus Ganoderma lucidum, and its close relative Ganoderma tsugae, grow in the northern Eastern Hemlock forests. These two species of bracket fungus have a worldwide distribution in both tropical and temperate geographical regions, growing as a parasite or saprotroph on a wide variety of trees. Similar species of Ganoderma have been found growing in the Amazon. In nature, lingzhi grows at the base and stumps of deciduous trees, especially maple. Only two or three out of 10,000 such aged trees will have lingzhi growth, and therefore its wild form is extremely rare. Today, lingzhi is effectively cultivated on hardwood logs or sawdust/woodchips. 아시아종(種)으로 밝혀진 가노데르마 루시덤(Ganoderma lucidum)과 그것의 가까운 친척 학명 솔송나무를 포함하는 소나무과(科)식물의 한 속(屬)종명을 가진 학명 가노데르마 쑤가(Ganoderma tsugae)는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 솔송나무 숲(Hemlock forests)에서 생장되고 있으며 이 두 종류의 곰팡이 균류는 열대 및 온대지형지역에서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다양한 나무에서 기생하거나 부생영양(saprotroph)으로 자라는 것을 설명되고 또한 가노데르마(Ganoderma)에서 유사 종(種)이 열대지역인 아마존[Amazon]에서 자라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가노데르마(Ganoderma) 역시 온대, 열대를 다 포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노화 된 나무 10,000개 중 2~3 개만이 영지버섯의 성장이 가능하므로 야생형태의 것은 극히 드물게 발견되며 오늘날 재배는 단단한 장작이나 톱밥, 나무 조각으로 경작되고 있다. Ganoderma tsugae Ganoderma tsugae Murrill 지도 이와 별도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불로초란 영지의 일종에서 환각제를 가진 버섯이 있다는 설명이다. 바로 진균독이자, 환각제 실로시빈(Psilocybin)이다. 이 버섯을 섭취하면 환각, 정신 착란, 지각 상실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실로시빈은 몸에서는 실로신(psilocin)으로 작용한다고 되어 있으며 실로신은 시간이 지나면 푸른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실로시빈이 들어 있는 버섯을 찢는 등, 상처를 내면 푸른색으로 변한다고 알려진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환각 버섯을 섭취하여 영적인 체험을 수천 년 동안하면서 사용하였다고 설명된다. 1970 년대에는 많은 서구 국가의 젊은이들이 레크리에이션을 위해 이 버섯을 먹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물질의 장기간 또는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신경 독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로시빈(Psiloquapin)은 통제 약물로 취급되고 있다. 구나 톰슨(Gunnar Thompson)의 신세계 이른 지도(Early Maps of the New World)글에서 보면 기원전(BC)500년에서 300년 사이에 중국(中國)의 종교적 상징과 문화가 서부 멕시코 해안(West Coast of Mexico)을 따라 갑자기 나타났으며 당시 멕시코 동부에 위치한 타바스코(Tabasco)주 및 베라크루즈(Veracruz)주(州)를 중심으로 하여 살고 있었던 고대 인디오 올멕(Olmec)제국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하였으며 따라서 그곳에 존재했다고 믿는 중국(中國) 전설(傳說)에서, 동쪽 바다 속에 해가 뜨는 곳에 있다고 알려지는 신비의 나라 부상(扶桑)심장부(the Heartland of Fu Sang)에는 또한 링-치 즉 영지(靈芝,Ling-Chih:Ling Chih Jason Hollinger)라고 불리는 신성한 식물버섯의 서식지라 하였고 그것들은 오늘날 실로시빈 허루서너제닉(psilocybin hallucinogenic)버섯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에서 멕시코 남부를 부상이라고 하고 있지만 중국을 멕시코라 한다면 동쪽 바다는 카리브해가 되고 그곳에 부상이 존재했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니 만큼 다음기회에 다시 한번 이야기하기로 한다. psilocybin hallucinogenic [Mayan "mushroom stones" of Guatemala] 미국에서 사일로신(psilocin)과 실린빈(psililbin)이 금지 마약성 물질 스케줄(1)[Schedule I]약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실로시빈(psilocybin)함유 버섯의 소유는 불법이라고 알려진다. 그러나 향정신성 화학물질을 포함하지 않는 포자(胞子)는 조지아, 아이다 호 및 캘리포니아에서 명시적으로 불법이다. 나머지 연방주에서는 단지 포자만을 판매하는 것이 불법이 아니지만 환각 버섯을 생산할 목적으로 판매하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되는 모양이다. 반면 현대의학으로 영지버섯의 대다수가 항암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음을 말하고 있으며 관상동맥환자와 고지혈증환자에게 매우 유익한 결과를 얻고 있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든지 긴장감, 심장부위의 통증, 부종 등에 개선효과를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노인성만성기관지염 환자에게서도 식욕이 증가되면서 천식이 점차 나아지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으며, 이 밖에도 만성간염, 신경쇠약으로 인한 불면, 뇌세포발육부전증, 백혈구감소증, 시망막색소변성(視网膜色 素變性), 퇴행성영양불량과 위축성근육강직, 골절증식 등에 고루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 약효 역시 환각성만 빼면 신비한 약효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New Mexico appeals court ruled on June 14, 2005, that growing psilocybin mushrooms for personal consumption could not be considered "manufacturing a controlled substance" under state law. However, it still remains illegal under federal law. 뉴 멕시코 항소 법원은 2005 년 6 월 14 일 개인 소비를위한 실로시 빈 버섯의 증식이 주법에 따라 "규제 물질 제조"로 간주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연방법에 따라 여전히 불법이다.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학명으로 Psilocybe mexicana 가 있는데 이것은 특히 퇴적물 숲과 접경하는 풀밭 지역의 도로변과 산책로, 습한 초원 또는 옥수수 밭을 따라있는 이끼 중 독방 또는 소규모 그룹. 멕시코, 코스타리카, 과테말라에서만 알려진 300-550미터 (980-1,800 피트)의 저지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열매(Fruiting)는 5 월에서 10 월 사이에 열린다. 실로시브 멕시카나(Psilocybe mexicana Heim 1957) In a 2000 review on the worldwide distribution of psilocybin mushrooms, Gastón Guzmán and colleagues considered these to be distributed amongst the following genera: Psilocybe (116 species), Gymnopilus (14), Panaeolus (13), Copelandia (12), Hypholoma (6), Pluteus (6) Inocybe (6), Conocybe (4), Panaeolina (4), Gerronema (2), Agrocybe (1), Galerina (1) and Mycena (1). Guzmán increased his estimate of the number of psilocybin-containing Psilocybe to 144 species in a 2005 review. 실로시빈을 함유한 버섯은 환각버섯속(Psilocybe)에 많으며, 환각버섯속에는 116종, 미치광이버섯속(Gymnopilus)에 14종, 말똥버섯속(Panaeolus)에 13종, Copelandia속에 12종, Hypholoma속에 6종, 난버섯속(Pluteus)에 6종, 땀버섯속(Inocybe)에 6종, 종버섯속(Conocybe)에 4종, Panaeolina속에 4종, Gerronema속에 2종, 볏짚버섯속(Agrocybe)·Galerina속, 애주름버섯속(Mycena)에 각각 1종씩 실로시빈을 함유한다. 이 환각제 버섯은 186가지 종(種)의 버섯 중에 환각버섯속(Psilocybe)의 종(種)은 116종(種)이며 그 중에서도 아래 주요 4종(種)을 한번 들여다 보자. Psilocybe caerulipes (Peck) Sacc. 1887 동부 (1)Psilocybe cubensis 1906(Stropharia cubensis); the most commonly cultivated and consumed Psilocybe, due to ease of cultivation and large size of fruit bodies; also commonly collected throughout the tropics and subtropics, nicknamed the commercial psilocybe. (2)Psilocybe cyanescens;1910 Native to the Pacific Northwest of North America, but also found in western Europe; nicknamed the wavy-cap or wavies. (3)Psilocybe semilanceata;1871 The most common psilocybin-containing mushroom. Found in northern temperate climates; nicknamed the liberty cap. (4)Psilocybe azurescens, a highly potent species native to the U.S. states of Washington and Oregon, but popular in outdoor cultivation, and expanding its range as a result; nicknamed azies. (1) 실로시브 쿠벤시스(Psilocybe cubensis (Stropharia cubensis)) : 현재 재배되고 소비 된 Psilocybe는 경작이 용이하고 과일 야채가 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열대 지방과 아열대 곳곳에서 수집되며 상업용 psilocybe라고 불린다. (2) 실로시브 시아네센스(Psilocybe cyanescens): 북미의 태평양 북서부에 원산지이지만 서유럽에서도 발견되며 파형의 모자 혹은 물결으로 불린다. (3) 실로시브 세밀랜시타(Psilocybe semilanceata): 가장 흔한 실로시빈(psilocybin)을 함유 한 버섯으로 북부의 온화한 기후에서 발견되며 자유의 모자 (liberty cap)라고 불린다. (4)아지즈라고 별명이 붙어 있는 Psilocybe azurescens 는 미국 워싱턴주와 오레곤가 분포지이며 옥외 재배가 가능한 매우 강력한 종으로 그 범위가 확장된다. 정리 [Ganoderma tsugae Murrill(1902)-hemlock varnish shelf] [Ganoderma lucidum(Curtis)P. Karst (1881)] Ganoderma lucidum (Curtis) P.Karst.[Basionym: Boletus lucidus Curtis]지도 영지를 최종 정리 해보면 자지곡(紫芝曲)이라 하여 악부(樂府)에 실려 있는 거문고 곡조의 가사로, 자지(紫芝)는 먹으면 장생불사한다는 자주색의 영지(靈芝)를 가리킨다고 되어 있다. 옛 기록으로 보았을 때 장생불사한다는 신성초 영지는 자주색의 자지(紫芝)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동서양의 자료를 종합 해 본 결과 이것에 더하여 버섯 머리에 전체적으로 광택이 니스처럼 나타나는 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까지 밝혀 본 사실에 의하면 그것에 대표 종(種)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 자라는 솔송나무 숲의 영지 소나무과(科)식물의 한 속(屬)에 명을 가진 학명 가노데르마 쑤가(Ganoderma tsugae)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상 위 전통적인 영지로 보고 있는 학명 가노데르마 루시둠(Ganoderma lucidum)의 DNA 분석을 통한 분포지도를 보더라도 1902년까지 아시아대륙과는 무관한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아시아용으로 굳어진 학명이지만 실체 사실과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토산물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기록에서 영지산(靈芝山)이라는 명칭과 함께 그 위치가 경상북도 안동(安東)에 있는 산을 말하며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이 산의 지류로 도산(陶山)과 서취병산(西翠屛山)이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제11권 경기(京畿)편에 “적성현(積城縣)동쪽 20리 지점에 감악산(紺岳山)이 있는데 영지(靈芝)는 흰 구름 피는 둔덕에 나고, 늙은 잣나무는 돌 틈에 자란다.”라고 적혀 있는 사실에 의거하면 경기가 동부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영지가 자라는 잣나무는 동북부에 근거한다고 지금까지 생물학적 판단을 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한반도 처럼 서쪽에 위치한 것이 사실이라면 잣나무를 서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어쨌던지 조선에서 이러한 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반드시 영지가 자연스럽게 생육되거나 자생되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말해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분류학적으로 들어가 보면 현재 단정적으로 동양 영지라고 알려진 것들은 동아시아 대륙을 근거한 것으로 고체화된 것일뿐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확인이 가능하다. 동양에서 영지버섯의 두 가지의 종(種)은 첫째 적지[1.赤芝]라 하여 학명 “Ganoderma lucidum(Leyss. ex. Fr.) Karst.” 라 정리한 것은 전통적 아시아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나머지 진짜인 영지를 말하는 자지[2.紫芝]의 학명을 “Ganoderma japonicum (Fr.) Lloyd” 라 하여 일본계로 정리하고 있음은 우리가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미국인이나 서양인들은 영지를 레이시 머쉬룸(reishi mushroom)이라 하는데 이것은 마치 일본어의 발음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도 일본을 부상국이라 치부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발생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일본의 근원지는 지금의 열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분명 서양자료 여러곳에서 자지(紫芝)의 근친종(近親種)으로 일본계 영지 학명 Ganoderma japonicum(Fr.)Lloyd 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쨌던 1881년에 대만을 위치로하는 동양종으로 굳어진 것이며 다른 네 가지 색의 영지가 있었다지만 확인이 불가능하며 적지와 자지 이 두 가지를 진짜로 하여 그 중 하나에 속하는 경우로 전통영지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서두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자지(紫芝)의 근친종이 학명 Ganoderma japonicum(Fr.)Lloyd 이라고 확정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영지의 대표 학명으로 알려진 아시아용 학명 “Ganoderma lucidum(Curtis) P. Karst 1881”이 동양 영지 레이시 머쉬룸(Reishi Mushroom)이 되어야 했고 때문에 아시아인들에게 지금까지 사실여부를 불문한체 과학이란 테를 씌워 엉터리로 각인시킨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와같은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고 있는 사실도 한국균학회소속 박동석(농업과학기술원 분자유전과)외 3인이 분석한 논문자료<ITS II 영역의 DNA 염기서열 분석에 의한 불로초(Ganoderma)속의 계통분류학적 고찰>을 참고할 때 더욱 이와같은 사실의 의미가 있으며 계통도를 분석한 결과 5개의 군(cluster)을 형성한 사실에서도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 분포지로 하고 있는 학명 가노데르마 쑤가(Ganoderma tsugae)가 각각의 아시아대륙용으로 굳어진 카노데르마 루시덤(Ganoderma lucidum)과 하나의 계통군(clade)을 이루어 두 종(種)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진화된 것으로 사료된다고 한 것에서 밀접한 관계는 같은 동종이라고 해석함이 옳고 다만 분포지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문제에서 근원종 찾기에 고민을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때문에 이러한 형태에서 실제로 근원종을 아시아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찾을 것인가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만 남아 있다 할 것이다. 본 조사에서는 국내에서 재배되고 있는 불로초(G. lucidum)는 그 발생지 및 국외 ITS염기서열 자료와 비교 및 분석할 때 G. tsugae 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제 끝으로 정리할 것은 또 하나의 영지버섯인 환각제라 알려진 실로사이빈(psilocybin)이다. 전자에서 설명하길 영지의 하나는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견되는 작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는 줄기를 가진 큰 표본과 나머지 하나는 열대지방에서 발견되는 길고 좁은 줄기가 정착한 또 다른 작은 표본에 있다 한 것에서 바로 후자의 것이다. 이것도 불로초 영지에 속한다는 기록에 의해 밝혀진 것인데 멕시코 남부에 존재했다고 하는 부상국(扶桑國)에서 생산되는 영지가 바로 실로사이빈이라는 사실과 더하여 멕시코를 분포지로 하고 있는 학명 실로시브 멕시카나(Psilocybe mexicana Heim 1957)를 주목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빠른 년대에 학명이 명명되었으며 가장 흔한 실로사이빈 버섯으로 북반구 온화한 기후에서 발견되며 자유의 모자라는 별칭을 가진 학명 Psilocybe semilanceata 버섯과 1906년에 학명이 명명되고 일반적으로 열대지방과 아열대지역에서 채집되던 상업용 실로사이빈이라는 별칭을 가진 일명 스트로파리아 쿠벤시스(Stropharia cubensis) 학명 Psilocybe cubensis 라는 사실에서 무게 중심을 쿠벤시스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고유분포지가 쿠바라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만약 일본이 있었던 곳을 부상국이라고 하거나 중국 동쪽바다에 위치했다고 하는 위치적인 역사확인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본 블로그 글 "1차 려몽 일본원정으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0" 과도 정확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부상국이 존재했을 곳은 멕시코가 아니라 멕시코 동쪽 바다 카리브해를 말해야 하며 그 중 쿠바섬이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글쓴이의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서양인류학자 구나 톰슨(Gunnar Thompson)에 의해 종전 부상국을 동아시아에서 찾던 사실에서 벗어나 멕시코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혀 그래도 상당히 진보적인 연구가 실행되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고무적으로 생각해야 하나 한 발 더 나아가 볼 때 그 역시 냉정하게 정확한 맥을 짚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서양학자의 사고 한계가 아닌가 한다. 그것과 별도로 생각해 하는 것은 본 블로그 글 "무궁화(薰華草, 無窮花)와 주근(朱槿)으로 본 북아메리카대륙 http://blog.daum.net/han0114/17048036 "에서 부상국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부상(扶桑)을 신목(神木)이라고 하여 무궁화라 하였고 그것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근거한다는 사실과 그렇다면 불로초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덧 붙이고 싶다. 그 이상의 것은 생물학적으로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여의" rel="tag" target="_blank">여의</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영지(靈芝:Lingzhi mushroom)" rel="tag" target="_blank">영지(靈芝:Lingzhi mushroom)</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실로사이빈(psilocybin)" rel="tag" target="_blank">실로사이빈(psilocybi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홍송(紅松 Korean Pine)" rel="tag" target="_blank">홍송(紅松 Korean Pine)</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Ganoderma japonicum" rel="tag" target="_blank">Ganoderma japonicum</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Ganoderma lucidum" rel="tag" target="_blank">Ganoderma lucidum</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요희(瑤姬)" rel="tag" target="_blank">요희(瑤姬)</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선초(仙草)" rel="tag" target="_blank">선초(仙草)</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길상버섯(吉祥茸)" rel="tag" target="_blank">길상버섯(吉祥茸)</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영지초(靈芝草)" rel="tag" target="_blank">영지초(靈芝草)</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적지(赤芝)" rel="tag" target="_blank">적지(赤芝)</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구멍장이버섯류(polypores)" rel="tag" target="_blank">구멍장이버섯류(polypores)</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부상국(扶桑國)" rel="tag" target="_blank">부상국(扶桑國)</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Ganoderma dimidiatum" rel="tag" target="_blank">Ganoderma dimidiatum</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자지(紫芝)" rel="tag" target="_blank">자지(紫芝)</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밝기 광택(brightness sheen)" rel="tag" target="_blank">밝기 광택(brightness shee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염기서열(鹽基序列)" rel="tag" target="_blank">염기서열(鹽基序列)</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게놈시퀀싱(Genome equencing)" rel="tag" target="_blank">게놈시퀀싱(Genome equencing)</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솔송나무 햄록(hemlock)" rel="tag" target="_blank">솔송나무 햄록(hemloc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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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연(三釜淵)폭포의 역사진실
************************** 삼부연(三釜淵)폭포의 역사 진실 글쓴이:한부울 서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속의 삼부연폭포고서에서 나타나는 삼부연폭포삼부연폭포의 신구 비교철원이란 역사지명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한 진실.말 서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에 있는 폭포. 현재 한반도 철원군청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 1.5㎞ 지점, 명성산(921m)기슭에 있다는 삼부연폭포. 그래서 한탄강 유역 내의 명소로 알려지며 철원8경(鐵原八景)의 하나라고 하는 곳이 바로 역사 속에 남겨진 삼부연폭포이다. 역사 사실에서 보면 철원(鐵原)은 궁예(弓裔)가 후고구려의 새국호 태봉(泰封)의 수도를 천도한 곳이며 철원(鐵原)을 우리말로 풀면 '쇠벌'이라 하는데 이것은 '수도'를 의미하는 '서울'이란 말의 유래 중 하나라고 알려지기도 하다. 또한 철원8경중에 하나라고 하는 삼부연폭포는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에는 궁예가 풍천원(豊天原)에 태봉국(泰封國)의 도읍을 정할 당시 이곳에서 도(道)를 닦던 두 쌍의 이무기 가운데 세 마리가 폭포의 기암을 뚫고 용이 되어 승천하였고 그때 세 곳의 혈연(穴淵)이 생겨 삼부연(三釜淵)이라 이름 붙였다고 설명되고 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해악전신첩의 삼부연[海岳傳神帖 三釜淵] 본래 삼부연(三釜淵)이란 말은 높은 절벽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지점에 가마와 같이 생긴 곳이 세개가 있어 삼부연이라 한 것이라고 설명된다. 그림에도 알 수 있듯이 양쪽에는 거대한 암석이 버티고 있어 절벽인 것을 실감하게 한다. 부(釜)는 다리가 없는 가마솥이라는 의미로 풀이한 것으로 송조(宋朝) 진원정(陳元靚)의 사림광기(事林廣記)에는 발이 없는 솥을 부(釜)라 하고, 발이 있는 솥을 기(錡)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단 형태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폭포수가 높은 절벽 사이에서 세 번 꺾여 떨어지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 군데의 가마솥 같이 생긴 연(못)이 생겨 삼부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것은 실체의 형태 모습을 보는 듯하고 상당히 높은 위치에서 낙하하는 폭포수에 의해 구멍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위 산수화 로는 세개의 가마솥 같이 생긴 연(못)을 뚜렷하게 구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세번 꺾이는 형태를 그림으로 알 수 있고 세번 꺾이는 공간 휘도는 듯한 표현을 하였는데 이것을 소용돌이 정도가 아니라 구덩이 즉 연(못)으로 구분할 수 있지 않겠는가 판단할 수 있고 그렇게 짐작이 가능할 것 같다. 釜 [가마 부] 1. 가마(가마솥), 가마솥(아주 크고 우묵한 솥) 2. 솥의 범칭(汎稱ㆍ泛稱) 소(沼)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속의 삼부연폭포 역사적으로 삼부연폭포 화첩이 속해 있다는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의 기록에서 보면 1711년 정선 나이 36세 되던 해 8월에 정선을 후원했던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는 금강산행에 같이 동행하였고 이렇게 금강산을 다녀온 후 꼭 1년만인 1712년 8월, 정선은 다시 금강산 유람에 나선 것으로 되어 있다. 기록으로는 말년에 한번 더 금강산을 찾았던 것 같다. 물론 동학인 이병연(李秉淵)의 사천시초(槎川詩抄)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숙종 38년(1712)임진 경 8월, 부친, 아우, 장응두(張應斗), 정선(鄭敾)등과 금강산을 유람하다"란 내용과 함께 "정선이 선사한 내외금강산 眞景 21폭에 시를 곁들여 ‘海岳傳神帖’을 만들다"란 기록이 있다. 겸재 정선은 스승인 김창흡의 영향을 받았고, 동학인 이병연과 1711년 이후 두 차례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진경산수의 묘미를 터득한 것으로 전해지며 ‘신묘년풍악도첩(申卯年楓嶽圖帖)’에서 그 기법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1738년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을 그린 전후 무렵의 모색기를 거쳐 1747년 72세 때 3차 금강산을 유람하며 그린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 이후 완성기에 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는 내외금강산 진경 21폭을 그려 동학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에게 선물하니 이를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화첩들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알려지는데 이렇게 숨겨진 사실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해악전신첩에는 21의 화첩이 있다고 알려지는데 삼부연(三釜淵), 이외 화적연(禾積淵), 문암(門岩), 문암관일출(門岩觀日出), 사인암, 단발령망금강산도(斷髮嶺望金剛山圖), 칠성암(七星岩), 총석정(叢石亭), 당포관어(唐浦觀漁), 정양사(正陽寺), 해산정(海山亭), 용공동구(龍貢洞口), 화강백전(花江栢田), 피금정(披襟亭), 정자연(亭子淵), 시중대(侍中臺), 불정대(佛頂臺), 만폭동(萬瀑洞), 장안사비홍교(長安寺飛虹橋)등으로 알려진다. 시간이 있으면 특히 우리 눈에 참으로 귀괴하게 여겨지는 화첩 총석정도 사실관계를 따져 봄직 하겠지만 위 화첩의 진상과 현재 한반도 지형과 엇비슷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위 겸재 정선의 산수화의 특징을 보면 동양회화에서 북종화법(北宗畵法)으로 산이나 바위의 입체감과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부벽준(斧劈皴)기법을 사용하였다는데 준(皴)은 주름이라는 의미는 그림에서 뾰족하고 험악한 바위의 표면이나 깎아지른 산의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할 때 쓰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특징적으로 위 삼부연폭포 그림에서 특히 가운데 절벽 기암괴석에서 거대한 암석이 약간 비스듬하게 타원형으로 뉘어진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전면으로 돌출된 형태의 기암괴석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입체감의 화법은 붓을 옆으로 비스듬히 뉘어 재빨리 들면서 끌어당겨, 마치 도끼로 찍었을 때의 자국같으며 끌로 판 자국과도 비슷하다 하였으며 힘차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며 붓자국의 크기에 따라 대부벽준과 소부벽준으로 나뉜다고 백과사전에서 이를 세밀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화법은 북송 말기에 시작되었고 북송 산수화와 남송 산수화를 연결하는 이당(李唐:1080-1130추정)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또 남송 화원(畵院)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였던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마하파 화풍(馬夏派畵風)의 암벽의 처리에 자주 구사되었으며 명의 절파(浙派)화가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 역시 전통적으로 삼한화법(三韓畵法)이 아닌가 한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중기 화가인 김제의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역시 그와같은 화법을 볼 수있다고 설명되며 또한 조선 후기 화가인 이인문(李寅文)은 산수도첩(山水圖帖)에서 부벽준과 피마준(披麻皴)을 골고루 사용한 준법을 보였다고 알려진다. 피마준(披麻皴)기법은 갈필(渴筆)에 의한 약간 물결짓는 필선으로 베(麻, 마) 섬유를 푼 것 같은 꺼칠꺼칠한 감촉을 가지며, 산의 겉면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하였으니 상당히 기존 화법보다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화법들을 대대로 이어 전수한 실체가 조선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청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필사정도가 아니라는 사실등은 화법이 전통적으로 삼한 화법이라고 볼 수 있고 최종 조선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할 것이지만 이러한 발전 상황을 알 수 없게 처리했다는 부분에서도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삼부연폭포라고 알려진 곳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한반도에 존재하는 삼부연 폭포는 철원군청에서 동쪽, 명성산(鳴聲山)의 북쪽의 용봉산 계곡에 있는 3단으로 구성된 높이 20m의 폭포라고 정리된다. 현 주소지는 한반도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로 되어 있으며 폭포 상류 3km 지점에 각흘산(838m), 명성산(923m)에서 발원하는 용화저수지가 있으며 여기서 흐르는 천을 용화천이라 하며 사계절 마르지 않는 물과 기이한 바위가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폭포수가 가마솥 모양의 웅덩이를 세 번에 걸쳐 내려오기 때문에 삼부연(三釜淵)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지는 것처럼 모양새가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과연 이 형태의 지형이 맞는 것일까? 하지만 첫째로 지적할 것은 역사적 의미에서 언급한 양쪽 암석이 버티어 절벽을 이루고 있는 용화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과 현재 한반도 지형상 삼부연폭포에서 세 개의 가마솥같은 구덩이를 실체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확신이 없다. 이 세 개의 가마솥같은 구덩이가 얼마나 중했으면 세 개의 소(沼) 중 맨 위쪽을 노귀탕, 중간을 솥탕, 아래쪽의 못을 가마탕이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겠는가. 소(沼)① 늪 ② 둥근 것은 池, 굽은 것을 沼라 한다. 연(淵) 물 속이 깊고 넓어 물이 흐르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어 연못 고서에서 나타나는 삼부연폭포 다시 옛 기록을 찾아 분석을 해보면 인조 때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지냈으며, 이괄(李适)의 난때에는 병랑(兵郞)으로 있으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고, 정묘호란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였다는 철원 부백(鐵原府伯) 김정경(金正卿)이 삼부연(三釜淵)에 떨어지는 물이 끝나는 곳에 한 촌락이 있어 참으로 난리를 피할 만한 곳이라고 하였으며 길이 험하여 갈 수가 없기에 창연히 바라보면서 읊은 시가 바로 철원(鐵圓)이라 한 사실이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본래 철원은 상당히 험준한 곳임을 짐작할 수가 있고 난을 피해 은거할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는 곳임도 알 수가 있다. (1)철원(鐵圓) 문곡집 제5권 / 시(詩) 156수 작은형님께서 태화산을 유람하다가 아들 창흡에게 써서 보여 준 시를 삼가 차운하다〔敬次仲氏遊太華書示翕兒之韻〕 三淵興不盡 삼부연의 흥취 끝나지 않았으니 / 百折上危巓 백 번 감돌아 아찔한 꼭대기로 오르네 / 怒瀑能穿石 노한 폭포수 바위도 뚫을 수 있겠고 / 攢峯欲到天 솟은 봉우리들 하늘 닿으려 하는데 / 閒尋猿鳥社 원숭이와 새들 모임 한가로이 찾아가 / 共和鶺鴒篇 할미새 노래한 시편 함께 화답한다네 / 一聽禪房磬 선방의 경쇠소리 한번 들어보니 / 幽懷更爽然 그윽한 심회 다시 상쾌해지네 / (2)김창흡(金昌翕)완당전집 제9권 / 시(詩) 삼부연(三釜淵) 趺坐亂山裏 높고 낮은 산 속에 발괴고 앉아 / 閒看瀑布流 한가로이 폭포를 구경하누나 / 三漥連木末 세 웅덩이 나무 끝을 연이어 있고 / 雙壁起雲頭 두 벼랑 구름 위에 솟아났구려 / 吐納惟龍氣 들이고 뱉는 것은 용의 기운뿐 / 尋常便雨愁 심상한 곳도 문득 비 시름일레 / 淵翁眞卓絶 삼연 늙은이 정말 탁월도 하니 / 能辦此居幽 이와 같은 유거를 선뜻 구했네 / 한국고전번역에서 말하길 삼부연(三釜淵)은 강원도 철원에 있는 폭포 이름이며 1757년 홍양한(洪良漢)의 건의로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각읍의 읍지를 수집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다시 고치고 그동안 달라진 내용을 싣고 간행한 여지도서(輿地圖書) 철원도호부 산천조에는 “삼부연(三釜淵)은 용화산(龍華山)에 있고 여러 시내가 뒤섞여 모여 갈수록 깊고 점점 커지다가 석벽에 거꾸로 걸리면서 문득 3층의 돌구덩이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며 그 깊이는 알 수 없는데 모양은 세 개의 가마솥과 같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하였으며 이것이 곧 기우처(祈雨處)이다.”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그 만큼 중앙조정에서 제작하는 여지도서 등에 기우처를 명시해 두어 기우제를 지냈던 곳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삼부연폭포에는 여지도서가 말하는 용화산이 존재하지 않고 각흘산(838m), 명성산(923m)에서 발원하는 용화저수지 만이 폭포 상단 위치에 있으며 폭포수를 공급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 용화산(龍華山)은 거대하고 험준한 산임을 알 수가 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산으로 부터 수많은 시내가 펼쳐져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물론 용화산이란 지명이 지금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이 기록에서 보면 용화산 골짜기나 평지에서 흐르는 자그마한 여러 시내가 뒤 섞여 모여 갈 수록 깊고 점점 커지다가 석벽에 걸리면서 3층의 돌 구덩이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석벽이라는 용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지형이다. 석벽(石壁)은 계곡의 바위가 자연적으로 마치 바람벽처럼 내리질린 곳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천길 낭떠러기지 절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한반도 삼부연폭포는 저수지에서 공급되는 수로 말고 수많은 시내 가지가 모여 흐른다고 할 수 없고 천길 낭떠러기기의 석벽을 이야기할 수 없다. 다시 고전 기록을 보면 조선 숙종(肅宗)1699년(숙종 25)에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아들 김창집(金昌集)과 김창협(金昌協)이 간항한 문곡집 제5권에서 (1)철원(鐵圓)편에 김수항 셋째 아들 삼연(三淵)김창흡에게 써준 시에서 "백 번 감돌아 아찔한 꼭대기로 오르네, 노한 폭포수 바위도 뚫을 수 있겠고, 솟은 봉우리들 하늘 닿으려 하는데~ "라고 하여 실제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지명이지만 용화산이 하늘에 닿을 듯한 험준한 산이었음을 말하고 있고 그곳에는 원숭이와 새들 모임 한가로이 찾아가, 할미새 노래한 시편 함께 화답한다네~"라고 읊고 있음도 알 수가 있는데 놀랍게도 원숭이의 모임을 말하고 있다. 삼부연폭포가 있는 곳은 험준한 산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도대체 원숭이가 새들과 노닌다는 내용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한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지 않는가. 또한 삼부연의 풍경을 관찰하기 위해 첨부된 김창흡의 완당전집의 삼부연이라 시(詩)에서도 "두 벼랑 구름 위에 솟아 났구려~"라고 읊은 시에는 구름에 걸려 있는 높디 높은 두 벼랑 사이로 흐르는 삼부연폭포임도 알 수가 있다. 즉 절벽같은 석벽 사이로 폭포수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의 한반도 삼부연 폭포가 있는 곳이 구름이 걸릴 정도로 높고 깊은 산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절벽과 같은 석벽 사이로 폭포수가 흐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삼부연폭포의 신구 비교 [한반도 삼부연폭포(좌), 알 수 없는 겸재 정선이 그린 산수화의 삼부연폭포(우) 비교] 이러한 사실들을 좀 더 확실하기 위해 시각적인 검증도 할 수 있으면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가 기록한 삼부연 산수화의 모습과 오늘날 한반도에 남아 있다는 삼부연의 모습을 비교하기 위해 양쪽 형상의 그림들을 게시하고 비교에 들어가 보자. 위 게시한 그림에서 좌변은 한반도 지형상황 사진이며 우변은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에 있다는 삼부연폭포 산수화이다. 이 두 그림에서 무엇인가 명확히 말을 할 수 없지만 지형새와 폭포 위치 세번 꺾였다는 웅덩이 솥 형태, 규모면에서도 원거리 기법을 감안하더라도 형태적 차이가 상당히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첫째 (A) 부분을 양쪽 그림에서 비교해보면 한반도에는 작은 나무들이 우거져 양쪽 벼랑, 절벽, 또는 석벽이라는 지형을 구분이 어렵지만 우측 정선의 그림에서는 확연히 두 벼랑과 상당히 규모가 있는 석벽등이 나타나고 중앙이 훤히 뚫려 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즉 한반도 지형 형태상 우측 정선의 그림처럼 애초부터 불가능한 지형 형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둘째(B) 부분을 양쪽으로 비교해보면 좌측 한반도 실물사진의 암석 모양과 우측 정선 산수화 암석화법 모양이 절대적으로 같다고 할 수 없다. 한반도의 암석은 거대한 암석형태라고 말할 수 없는 매우 불규칙적으로 난해함을 느끼지만 우변 정선의 산수화의 화법에서 거대한 암석의 입체감이 품어내는 규칙적인 형태를 읽을 수 있다. 그것에는 정선의 산수화 화법이 뾰족하고 험악한 바위의 표면이나 깎아지른 산의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할 때 쓰는 부벽준(斧劈皴)기법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지만 약간 비스듬하게 그려진 암석 바위의 모양에서 절대로 현재 한반도 좌측 사진과 같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번째 (C)의 양측 그림을 비교할 때 좌측 한반도 사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정선 산수화 우편의 산정상에서 부터 시작하여 아래 폭포수를 관람할 수 있는 청솔숲을 그늘로 하는 바닥공간(D)까지 길게 굴곡지게 늘어져 있는 인위적인 계단과 잘 닦아진 길이 놓여 있음을 명확하게 식별할 수가 있다. 이것은 무섭게 낙하하는 폭포수를 관람할 수 있는 공간에는 그림처럼 갓을 쓴 조선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매우 지형환경이 단정하고 정리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평소에도 그곳에는 수많은 관람객들이 모여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반도 그림은 그러한 공간은 찾을 수도 없음은 물론이고 어딘가 모르게 그냥 방치된 상태의 매우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폭포수가 그만큼 현대인에게도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역사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찾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게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현재 비교를 해보아도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든 차이점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문곡집 철원편 시(詩)에 용화산에 원숭이가 서식하였다는 사실만큼 한반도 지형에서 이질적인 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두 그림에서 차이점을 총괄적으로 지적하게 만드는 것은 한반도 지형 사진 그림에서 보면 삼부연폭포로 들어오는 수로가 각흘산(838m), 명성산(923m)에서 발원하는 용화저수지에 모여 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본 사실에서 두개의 낮은 산이 아니라 거대하고 험준한 용화산이 존재하여야 하고 그 곳에서 발원하는 수많 가지의 시내가 모여 깍아지른 절벽과 석벽사이로 흘러들어가야 거대한 폭포수가 만들어질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감안 할 때 우측 그림 정선의 산수화 (A)부분을 자세히 보면 훤히 트림 공간에 거대한 물줄기가 폭포수 아래로 흘러드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이것에는 여러 시내들이 가지처럼 모여들어 거대한 물줄기를 만드는 것임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가 있다. 반면 한반도 지형사정은 그렇지가 않고 사진과 같이 상당히 활발하지 않는 흐름 형상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부첨할 것은 폭포의 길이 가시적인 측정인데 좌측 한반도 사진에 나타나는 현재 폭포수 아래 사람들의 원거리 구도와 우측 정선 산수화 그림(D)공간의 구경꾼들과의 원거리 구도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인데 한반도 그림에서의 사람과 폭포사이에 거리와 비교하더라도 정선 산수화의 사람과 폭포사이에 거리가 훨씬 멀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각적으로 정확할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원거리 구도상 폭포길이 측정 값은 한반도 폭포길이보다 정선 산수화의 폭포 길이가 훨씬 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그 크기가 정확하게 얼마라고 할 수 없겠지만 원거리상 비교할 때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한반도의 삼부연폭포는 겸재 정선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삼부연폭포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정말로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면 과거 역사에서 한양을 출발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는 철원(鐵原, 鐵圓)은 도대체 어딜 말하는 것일까? 철원이란 역사지명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 말하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헤머타이트(Hematite) 즉 ‘피’, 혈액(血液)를 뜻하는 그리스어 접두어(haema)에서 유래된 적철석(赤鐵石)의 가장 중요한 광상(鑛床:ore deposit)이 퇴적 기원으로, 북아메리카의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지역과 같은 퇴적광상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연간 약 7,500만t)되는 것을 바탕으로 판단 할 때 이곳을 철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른바 철원이란 뜻의 지명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철 생산지, 메사비산지(Mesabi range), 마켓산지(Marquette range), 메모미니산지(Menominee range), 고기빅산지(Gogebic range), 버밀리온산지(Vermillion range)가 있는 미네소타주를 말할 수 있다 한 사실이다. 물론 이곳에서 미국 철광 생산량의 75%가 생산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주로 고품질의 적철석(赤鐵石)을 산출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들은 철원이란 지명과 상당히 결부시킬 수밖에 없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일부가 다소 편협적이라고 하는 세계삼한역사관점이 아니라 지질학적인 분석에서 나온 주장이다. 대신 지명에서 광의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겠지만 미네소타주는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지명 철원으로써 충분한 역사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이에 더하여 본 블로그 글 "동청(冬靑)과 금강산(Blue Mountain)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2"에서 밝혔듯이 옛날 제왕들의 능침으로 사용했던 붉은 열매나무 감탕나무 동청(冬靑)으로 본 생물학적 판단에서 금강산은 미국동부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 높이 2,037m(6,683ft)의 미첼 산(Mount Mitchell) 이나 혹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전체에서 가늠할 수 있는 지칭이라고 하였던 사실을 비추어 보면 더욱 철원의 주장이 근거가 있는 신빙성을 더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금강산지역에서 석탄이 산출되었던 사실과도 일치하는데 애팔래치아산맥은 석탄광산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한번 다시 대중에게 물어본다. 한반도의 철원이 세계사적인 철의 원산지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역사 지명은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철원(鐵原, 鐵圓)이라 하는 지명은 바로 세계사적으로 철의 원산지를 나타내는 지명임을 의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네소타주(Minnesota)나 슈피리어호(Lake Superior)가까이에 삼부연폭포가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겠는가. 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한 진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생물학적 분석에서 원숭이가 철원 삼부연폭포에 서식한 사실을 밝히는 일이 남아 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시문집 문곡집 제5권 / 시(詩) 156수 철원(鐵圓)에서 "閒尋猿鳥社 원숭이와 새들 모임 한가로이 찾아가~"의 시귀에서 바로 삼부연에 원숭이와 새들의 모임이라 하였으니 상당히 많은 수의 원숭이들이 있었음을 감지할 수가 있다. 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원숭이가 서식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철원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에 과연 원숭이가 서식한 사실이 맞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원숭이 분류체계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본래 원숭이는 영장류(靈長類:Primate)에 속하는 동물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영장류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열대 또는 아열대 지역에 살고 있다라고 정리된다. 영장류의 원시 조상은 약 6,500만년 전의 백악기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약 5,500 ~ 5,800만년 전의 팔레오세 후기의 화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영장류는 플레시아다피스(Plesiadapis)라고 하였다. 영장류를 총칭하는 원숭이하목, 진원류(眞猿類:Simian)는 약 4,000만년 전에 등장했으며, 2개의 분류군을 포함하고 있는데 남아메리카에서 발달했고 신세계원숭이(New World monkey)를 포함하고 있는 광비원소목(廣鼻猿小目)과 아프리카에서 발달하였고 구세계원숭이(Old World monkey)와 사람 등의 유인원을 포함하고 있는 협비원소목(狹鼻猿小目) 바로 그것이다. 후자의 것이 인류시원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최초분류체계에서 시미아 또는 시미아속(Simia屬)을 지정하였는데 1758년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1707-1778)가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에서 영장목으로 분류했던 4개 사람속(Homo屬), 여우원숭이속(Lemur屬), 박쥐속(Vespertilio屬)의 속 (屬)중 하나로 체계화한 것이다. 긴꼬리원숭이 또는 구세계원숭이(Old World monkey)는 포유류 영장목의 협비류에 속하며 분류에는 긴꼬리원숭이상과(Superfamily:Cercopithecoidea. Gray, 1821), 긴꼬리원숭이과(Family:Cercopithecidae Gray, 1821)원숭이들의 총칭이라 하며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분포한다고 하고 이 류의 학명자가 영국동물학자인 존 에드워드 그레이(John Edward Gray,1800-1875)로 나타난다. 긴꼬리원숭이아과(Cercopithecinae)는 비비원숭이와 마카크원숭이 등 약 71종(種)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카크원숭이는 동아시아에서부터 북아프리카의 지브롤터까지 분포하지만, 대부분의 긴꼬리원숭이아과 원숭이들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제한적으로 서식한다고 하고 있다. 또한 광비원류(廣鼻猿類:Parvorder: Platyrrhini. E. Geoffroy, 1812) 또는 신세계원숭이(New World monkey)는 포유류의 영장목에 속하는 소목(小目)으로 (1)북부아메리카와 남부아메리카 아마존 유역(Amazon basin)에 발견되는 비단원숭이과(Callitrichidae)의 작은원숭이와 타마린(Marmosets and Tamarins)이 있고, (2)열대 및 아열대 남북부 및 중앙 아메리카 전역에서 발견되는 꼬리감는원숭이과(Cebidae)의 작은원숭이와 타마린 그리고 거미원숭이와 다람쥐원숭이(Capuchins, and Squirrel Monkeys)가 속해 있으며, (3)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숲에 널리 분포하며, 그 지역은 파나마 남부에서 파라과이와 북부 아르헨티나에 이른 올빼미원숭이과(Aotidae)의 올빼미원숭이가 있고, (4)북아메리카 동부와 대부분은 종들은 브라질의 아마조니아 지역에 살고 있으며, 일부는 북쪽의 콜롬비아부터 남쪽의 볼리비아에 걸쳐 발견되는 사키원숭이과(Pitheciidae)의 티티원숭이, 사키 및 우아카리(Titi Monkeys, Sakis, and Uakaris)와, (5)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 북부에 이르는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숲 지역에서 널리 발견되는 거미원숭이과(Atelidae)분류의 총칭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광비원류는 모두 5과 21속 138종(種)으로 분류된다. 특히 구세계원숭이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란 고체적인 서식지와는 다르게 신세계원숭이 중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에 서식했다고 판단되는 광비원류 비단마모셋속(Callithrix)은 구세계원숭이 명명자 존 에드워드 그레이가 명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모식종(模式種) "Simia jacchus Linnaeus, 1758"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말하고 있다. 모식종(模式種) 시미아 또는 시미아속(Simia屬)으로 영장목 4가지 속명 중에 하나임을 알 수가 있다.또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서식했다고 판단되는 거미원숭이과(Atelidae) 역시 영국 동물학자 존 그레이가 명명했고 모식종(模式種)으로 알려지는 "Simia belzebul Linnaeus, 1766" 와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역시 린네가 명명했다. 위 종(種)과 동일한 모식종은 주로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대륙을 분포하는 원숭이를 말하는것으로 "Alouatta belzebul (Linnaeus, 1766)"와 또한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다.모식종(模式種)에서 모식(模式, type)이라는 말은 생물학 특정 분류군의 특징을 정의하는 성격이라 정의하고 있으며 어떤 생물종이 정식 학명을 얻도록 하는 특정 표본 또는 표본군을 모식표본(模式標本, type specimen)이라고 하여 그것의 생물 분류군을 대표하는 종임을 알 수가 있다.물론 원숭이에 대해 좀 더 생물학적으로 밝혀 볼 일이 있겠으나 굳이 신구(新舊)세계로 분류한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아메리카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진 사자나 코끼리 등과 같이 아메리카대륙을 피해 어떤 특정 지역에 서식지화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지울 수가 없다. 최초인류가 아프리카대륙을 기원으로 하고 있지만 일단 북아메리카대륙을 기반으로 했음을 우리는 증명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원숭이가 영장류라 하고 이것이 인류와 연관성이 존재하는 한 영국 박물학자가 신구세계 원숭이 분류체계를 만들고 이것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현재 인류학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신구세계원숭이 분류에도 이러한 그들만의 방식에 의한 이분적 의도된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를 의심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위 3가지의 신세계원숭이 군의 분포지도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서식지가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는 구신세계원숭이를 분류하기전부터 원숭이가 서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최초인류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230만년전에서 240만년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 분리되었다고 하고 신생대 제4기 홍적세(플라이스토세)에 살던 멸종된 화석인류 곧선 사람,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를 대표적으로 베이징 원인이라고 순차적인 이동과정을 아프리카, 아시아대륙으로 하고 있지만 오늘날 사람의 형태를 지닌 지혜가 있는 사람 또는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실제로 이와같은 이동경로와 같은 분류로 취급해야 할 것인지는 다시금 생각해볼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이 중 약 85%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아프로-유라시아, 구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나머지 15%만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신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맞춰 보고 있다 하겠지만 이것은 본래 인류문화가 발생한 위치가 밝혀질 때 모두 한꺼번에 무너질 사상누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이론이 고체화된 과정에서 수많은 주요 생물들이 본래 서식지에서 변동되어 이질적으로 나타난 사실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들이 결국 혹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불편한 지식으로 남겨져 있지만 이것으로부터 해소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도 가져보는 것은 그렇게 잘못된 것만 아닐 것이다. 말 우리가 근대 역사에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겠지만 정확한 원인과 경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세계삼한역사주체가 서양세력에게 밀려 하는 수 없이 한반도로 이동하기 전까지의 역사상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글쓴이가 주장하는 부분들에서 수많은 밝힘이 있었지만 근원적으로 풀어 낼 수 있는 사실들은 솔직히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직까지 수많은 의혹이 산재하는 것도 사실이고 솔직히 긴가민가 하는 점도 없지 않지만 생각 해 보면 상식적인 상황을 전제한다면 어렵지 않게 풀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증명하기 위해선 여러가지 면에서 정보 부족의 한계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근세기에 급변하였던 역사적 환경에서 최소한 1920년까지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면 하나의 체제에서 사용하던 언어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수많은 의혹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기존 역사와 그리고 그 이후 변화하는 역사사실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때 대중적으로 사용되던 언어는 한글과 일본어 또는 영어가 섞여 사용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그 구성원들은 다문화적인 성격이 강했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정부나 관에서 사용하던 중요한 문서나 전문서적 등의 언어는 한문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지만 드물게 라틴어 서적도 존재했을 것이란 예상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적어도 1920년 이후부터 한글의 소요처, 일본어의 소요처를 동양계 사람들으로 한정지워 구분하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사용을 스스로 합법화하면서 개몽전략으로 나가던 서양문화와 결부시켰을 것이며 저변에서 범위를 넓혀 나갔을 것이란 사실도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하다. 한글 사용처를 명확히 만들기 위해 예를 들면 한글 신문들을 발행하게 만들고 속칭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행된 이른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1920년 1월에 3개의 한국인(동양계 조선인)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존 하나의 정치적인 체제가 동양계 조선인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현상을 맞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 흐름의 난해함과 아무리 꿰맞추려 해도 맞출 수가 없는 역사 혼돈을 느낄 수밖에 없다. 1920년부터 한글 전용 구어로 동양계조선에 한정 짓고 마찬가지로 일본어를 정부 공영어로 삼는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신문발행을 통하여 끊임없이 낯설다 할 수 있는 언어체계를 만들어 나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문발행이라는 것은 사실, 진실을 보도하는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떤 계층부류의 체계를 만들고자 하거나 어떤 프레임을 세우기 위해 대중들에게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의 여론을 가시화할 수 있는 과정의 실행 행위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될 때 이전까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던 정보 문화와 역사를 갑자기 변화하는 세태에 영향을 받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한 체제상태를 이성적이거나 전통적인 것이 아닌 대중적인 판단에 의존하게 하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기존체제를 지극히 이질적인 것으로 판단하게 하는 상황으로 돌변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몽차원을 넘어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게 만들고 기존 체제를 변화시키거나 개몽시키는 차원을 넘어서는 오히려 새로운 국가와 체제를 갈망하거나 요구하는 형태로 작용된다는 사실에서 만약 체제 흔들기와 체제를 붕괴시키기를 원하던 세력이 있었다면 이러한 방법을 동원하고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가 있다. 상당히 난해하게 들릴 수가 있겠지만 기존 역사 흐름은 냉혹하게 끊겨 버린다는 사실이다. 과거 특수한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체제 정보가 필요 이상으로 통제되거나 한정되면서 언어가 하나의 체제에서 통용이 가능할 때는 설령 문화가 달라 여러 언어가 존속되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형태를 대중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보 경직성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반대로 개몽, 개혁이란 이름으로 점차적으로 기존체제를 비판하게 되고 체제 정보가 어느 한 특수계층의 전유물인 것처럼 독점적인 사회체제를 거부하거나 부정하게 되면서 일반인들이 고급정보에 접근이 가능하게 되면서 기존 체제전복을 용인하는 사태까지 이를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기존 언어에 대한 불만, 불신이 쌓이면서 수많은 언어가 독립성을 주장하고 이것들이 혼란이 가중되면서 이를 사회적으로 제어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신문발행이라는 위력이며 아마도 20세기 초 사회변혁 바람이 심하게 나타날 때 신문이 사회에 주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한마디로 기존 언어체계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언어체계가 세워질 수밖에 없는데 이때 체제를 정복한 세력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언어를 사용하도록 유도하거나 개몽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에서 밝혔던 사실이지만 이상하게도 미국사회에서 "COREA"란 명칭사용을 자제하고 대중적으로 "KOREA" 로 사용해야 한다는 사설이 난무한 때가 바로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종결되고 난 후 부터이었다는 사실과 그 이후 1878년 5월 뉴욕 선대이메거진(Sunday Magazine)에 의해 마지막으로 "COREA"란 대중적인 지칭되고 사라졌다는 사실 등은 우리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고 난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미국사회에서 왜 이런 논란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무엇때문에 미국사회에서 한반도 존재하던 국가 명칭으로 인하여 그렇게 민감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 시민들에게 COREA 란 명칭이 얼마나 알려졌길래 신문 사설로 이를 비판하고 대신 KOREA 를 사용해야 한다고 홍보까지 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반도로 역사주체가 이동하기 이전 역사상황이 이러했다면 명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더래도 그것이 말하고 있는 그 이전 상황이나 그 다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전개 등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나름대로 무수한 억측을 낳고, 추측하거나, 추정 또는 나름대로의 가정등을 세우는 여러가지 형태로 생성되고 있음을 곳곳에서 미디어를 통해 목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리를 한다면 북아메리카대륙의 1920년 이전 역사상황과 그 이후 한반도 역사는 알 수 없는 역사고리 가 있으며 끊이지 않고 이어진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세계삼한역사주체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거대한 체제가 맞고 단일민족을 외치던 한반도 역사와는 달리 현 미국사회처럼 다문화, 다종교, 다민족체제였다고 한다면 사용하던 언어 역시 단순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고 앞에서 언급한 1871년 신미양요 상황과 그리고 뉴욕이 주도하던 상업적 신문태동이 정점에 있던 1878년 상황에 이어 1881년에 글쓴이가 주장했던 세계삼한조선이 난데없이 체제 해체에 이르기까지 역사 흐름의 역사는 끊을 수 없는 굵은 선은 이어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풍전등화격인 조선을 완전히 해체하기 위한 수많은 음모와 개혁세력들의 변화가 존재한 것이 사실일 것이며 이러한 바람은 하리케인처럼 조선사회와 역사전체를 핥퀴고 지나갔겠지만 우리가 안타깝게도 알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쪼그라진 한반도 역사와 허리가 갈라진 반토막난 영토, 그리고 일제에 의해 1910년부터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래서 숨어서 야학에서만 가르쳤던 한글 만이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변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같은 처참한 역사 변괴는 변괴가 아닌 정상적인 역사인 것처럼 오늘도 우리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 현재 보물 1949호로 지정되었고 일제시대때 불쏘시개가 될 뻔했다고 하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경치를 21점에 담아 엮은 화첩 ‘해악전신첩’에 나타나는 금강산 그림들은 모두 하나같이 실제로 한반도 풍경과는 사뭇다르다는 점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역사 변괴의 하나의 증거이다. 삼부연폭포 역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탐구해 본 결과 한반도 이동의 역사가 낳은 위치 문제를 바라 볼 수 있고 이 논제에 대한 결론은 한반도 삼부연폭포가 역사 속의 삼부연폭포라 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슈" rel="tag" target="_blank">슈</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미네소타" rel="tag" target="_blank">미네소타</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해악전신첩" rel="tag" target="_blank">해악전신첩</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왜소화된 체제 속의 한글 사용처" rel="tag" target="_blank">왜소화된 체제 속의 한글 사용처</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삼부연(三釜淵)폭포" rel="tag" target="_blank">삼부연(三釜淵)폭포</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적철석(赤鐵石)" rel="tag" target="_blank">적철석(赤鐵石)</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슈피리어 호(Lake Superior)" rel="tag" target="_blank">슈피리어 호(Lake Superior)</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애팔래치아 산맥" rel="tag" target="_blank">애팔래치아 산맥</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신세계원숭이" rel="tag" target="_blank">신세계원숭이</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모식종(模式種)" rel="tag" target="_blank">모식종(模式種)</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철원(鐵原)" rel="tag" target="_blank">철원(鐵原)</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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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가 어딘가.
********************* 요코하마가 어딘가. 글쓴이:한부울 서문포드회사의 개요‘T 모델’과 ‘A 모델’ 그리고 고종어차멕시코 역사요코하마 역사현 요코하마 모순 4가지멕시코에는 왜 유명 자동차메이커가 없을까?미국, 일본, 멕시코 국가존재유무재퍼니스(Japanese)와 흰독수리 상징의 역사 1926년 포드회사 동아일보 광고로 본 일본 마무리 서문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실 또한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글쓴이의 신념이기도 하지만 자연 속에 역사, 진실속에 역사가 살아 있다는 믿음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서의 다섯 가지 경전인 모세 오경(Torah: תּוֹרָה)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사막의 유목민들이나 애굽의 히브리 민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Canaan)땅"이라는 절대희망의 상징성은 땅이 비옥한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천혜의 비옥하고 사시사철 풍요로움이 끝이지 않는 그야말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환경조건이 그 땅에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 가나안이라고 하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포함하는 지역, 혹은 요르단 강 서쪽 땅이라 하는 곳을 냉정하게 보면 전혀 성서와 맞지 않는 건조하고도 메마른 땅이 있을 뿐이다. 과연 성서는 희망만 주려 한 것인가. 분명 실제로"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가나안이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물질이 풍부하고 아직도 무궁무진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는 어디라고 해야 할까? 북아메리카대륙이라고 쉽게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떠돌이 이민자들이 모여 만든 국가, 미국은 천상의 조건의 땅에서 부흥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생국이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였으며 그렇게 선점한 경제권과 질서통제권은 이제 감히 다른 국가가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막강한 힘의 위력을 자타가 공인하고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넘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강대국으로 1945년 2차 세계대전 후 75년이 가까워지도록 변함없이 세계 전지역을 막강한 힘으로 통제하고 추월을 불허하고 있는 것도 다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고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원에 대해 부족을 느끼지 않는 나라인 것은 틀림없다. 지난 역사에서 천혜(天惠)의 땅으로 존재했으며 꿀이 흐르는 대지 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해양세력들도 처음 신대륙에 발을 디디면서 했던 말이 북아메리카대륙은 천혜의 땅이며 꿀이 흐르는 대지라고 했으며 현재 글쓴이가 지리학적으로 밝히고 있는 형태적 자원이나 생물학적으로 밝히고 있는 생물학적인 자원에서 작은 분석이지만 결과는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북아메리카대륙은 자원이 풍부한 대지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8세기 중반부터 생성된 세계생물학체계 학명(學名)에서 느닷없이 재퍼니즈(Japanese)란 종명(種名)의 근원지 권역이 세계생물권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일본은 기존 역사대로 말하더라도 절대로 아시아 열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크다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째서 아시아 열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일본이 영어생물학 종명(種名)에서 그 근거지가 아열대, 열대, 온대를 포괄하고 있는지가 의문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변질된 서양판 일본의 역사모호성 때문이라는 결론이 이렇게 내려진다. 일본을 동양일본으로 만들고 열도일본에 들어앉힌 시기가 대체로 2차세계대전이 후라고 볼 수 있고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샌프란시스코화친조약이다. 일본이 동양권으로 들어가야 만이 서양사가 살아나고 서양우월성이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동양과 서양 간에 연결되는 매개체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역사조건에서 존재한다. 본래 일본은 서양일본으로써 정체성은 서양이 되어 맞다. 표면적으로 동양일본이 1858년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カ国条約: Ansei Five-Power Treaties)이란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면서부터 유럽국민국가(Europe國民國家:nation-state)형태의 체제가 되었고 서구해양국가조직들의 발판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구성체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체제를 상대로 하는 무역길드형태의 서양무역연합체라는 것을 성립시켰다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 놀음이 그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미국(US)를 필두로, 영국(United Kingdom), 러시아(Russia), 네덜란드(Netherlands), 프랑스(France)인데 당시 이들 국가를 실제로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많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위 논제 속으로 하나하나씩 따지고 들어가 보도록 한다. (1)Ford established a manufacturing facility in the port city of Yokohama in February 1925, where Model T vehicles were assembled using imported knock-down kits. The factory subsequently produced 10,000 Model A's up to 1936. Production ceased in 1940 as a result of political tensions betwee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After World War II, Ford did not have a presence in Japan, as the Ford facility was appropria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until 1958 when property was returned as a possession of the Ford Motor Company and became a research and development location for Ford partner Mazda. (2)1925 Formed Ford JAPAN TO IMPLEMENT AN ASSEMBLY LINE IN ASIA, assembling about 10,000 vchichles a year with imported components until th 1930s(operations there ceased due to Worlded War II but started again in the mid-1970s). vehicle EN[viːəkl̩]US 차량(車輛) 사람이나 화물을 운반하는데 쓰이도록 설계된 갖가지 차 종류를 두루 일컫는 용어로써 자전거, 자동차, 모터사이클, 기차, 선박, 보트, 항공기를 가리킨다. 게시한 (1)번의 영어자료를 보면 1925년 2월에 포드자동차(Ford Motor Company:1903-)가 항구도시인 요코하마(橫濱:Yokohama)에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하였고 모델 "T"차량을 부품들을 수입하여, 조립만을 하는 녹다운 킷(knock-down kits)의 방식으로 조립 생산하였으며 이후 1936년까지 10,000대의 “모델A”를 생산하였으나 1940년에 일본(Japan)과 미국(United States)간의 정치적인 갈등에 의해 중단되었다. 제2차세계대전후 포드공장시설은 포드자동차 회사에 반환되었으나 포드의 제휴회사 마쓰다(Mazda)를 위해 연구와 개발지원 하는 입장에서 1958년까지 일본정부(Japanese Government)에 의해 건물이 전유되었던 상황을 용인만하고 포드는 당시까지 일본에 없었다고 되어 있다. 때문에 포드는 요코하마에 사실상 1940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1940년부터 생산 중단되었다고만 하였지 철수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또한 (2)번의 자료를 보면 (1)자료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부품 10,000대를 1930년대까지 조립하였고 1940년부터 가동이 중단된 상태로 지속되다가 1970년 중반에 다시 가동되었다고 하고 있으며 다른 자료에 보면 1974년에는 수입차 일본 판매 대리점 망을 구축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1979년부터는 마쓰다(Mazda)에 출자를 하고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었으며 2015년에 마쓰다 주식 전량을 매각하고 지분 관계를 끝냈다고 정리되고 있는데 이것은 현 아시아대륙 열도일본의 요코하마에 포드회사 부품조립생산공장을 설립했다는 이야기다. (3)Ford was the first automaker to establish a manufacturing presence in Mexico, as early as 1925. Today there are Ford assembly plants in Hermosillo (Sonora State) and Cuautitlan (Distrito Federal), plus an engine plant in Chihuahua. In total, they have around 6,000 local employees. Historically, Hermosillo has been the home of passenger car production, and currently makes the Fusion, Mercury Milan and Lincoln NKZ models. The Distrito Federal base is the home of pick-up and light trucks (F-series, H215 and LFC models). (3)번 자료를 보면 포드회사는 놀랍게도 지금의 열도 요코하마에 조립공장을 설립한 똑같은 년도 1925년 초(as early as)에 멕시코에서도 자동차 제조공장을 설립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이것은 멕시코에서 최초의 자동차 회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즉 요코하마에 1925년 2월에 제조공장을 설치한 사실과 상당히 비교되고 있으며 오히려 요코하마 사실과 중복된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게 하는 자료이니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어“as early as”의 해석은 뒤에 숫자가 나와 몇 년 초(初)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이와 다르게 이른 시기, 빨리, 일찌감치 등으로 주관적으로 쓰여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어 1925년 일찍 이른 시기라는 것은 어쩌면 일본열도 요코하마에 설립한 시기 2월과 동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멕시코에 자동차공장을 설립한 것이 사실이라면 왜 요코하마처럼 자세한 일자를 지정할 수 없었는지, 왜 몇 월, 몇 일이라 하지 않았는지 의구심을 낳게 하고 있다. 무엇을 감추기 위한 것일까? 그렇지만 오히려 요코하마 보다 사실상 멕시코의 자동차부품공장 설립사실은 매우 구체적임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멕시코의 소노라 주(Sonora State)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주도인 에르모시요(Hermosillo)와 멕시코 연방구(Distrito Federal) 멕시코시티(Mexico City)북부지역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에 포드 부품조립공장을 두었다고 하고 더하여 치와와주, 치와와(Chihuahua)에 엔진조립공장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 지역 전체 약 6,000명의 현지 직원이 고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포드회사의 개요 1925 Ford Model T Touring:1908-1927 (Engine:177 C.I.D. (2.9 L) 20 hp I4 ) 경향신문 디지털뉴스팀 안광호 기자[자동차대백과]의 기사에 따르면 포드자동차회사(Ford Motor Company)는 1903년 6월 16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Dearborn)에서 헨리 포드(Henry Ford:1863-1947)가 자본금 10만 달러와 노동자 12명으로 설립하였다는 사실과 부자들의 전유물인 자동차를 서민들의 생필품으로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1908년 비로소 “모델 T”를 출시하고 1913년 첫 대량 생산 시스템인 컨베이어(conveyor)벨트를 따라 이동되고 작업자는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 부품을 장착하게 되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저비용으로도 높은 품질관리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대량생산을 할 수 있게 하는 당시 혁신적인 펙토리 운영 시스템을 개발하고 도입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결국 자동차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하는 전설 같은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이 기사에 보면 컨베이어 벨트 조립라인은 부품 조립을 12시간30분에서 무려 2시간40분으로 단축하는 믿지 못할 결과물을 내놓았고 3분에 한 대씩 차를 생산하며 노동시간은 10분의 1 수준으로 단축시켰고, 원가절감으로 이어진 시스템 효과는 급기야 300달러($) 이하로 판매가 가능토록 했으며 생산공정의 개선으로 생긴 이익의 분배는 당시 하루 9시간에 2.34달러($)에 불과했던 임금을 8시간에 5달러($)로 증가시키는 혁신도 가능케 하였으며 당시의 포드회사 공장의 직원들의 임금수준은 동종업종에 비해 최소 2배가량 높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가격 경쟁력은 차 값이 대당 2000달러가 넘는 고가(高價)에서 서민들에게 ‘모델 T’를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850달러($)에 판매하였다고 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어쩌면 헨리 포드가 생산한 자동차에 의해 신생국인 미국이 완성되었다고 하고 있을 정도로 근세기에 또 하나의 역사 변혁을 일으킨 본질이며 그러한 상황은 급기야 북아메리카대륙의 거대한 영토를 하루 생활권에 둘 수 있는 상황으로 곳곳에 연방행정권이 미치게 하고 단숨에 막혀있던 그들만의 역사 만들기에 대한 추진에 대단한 동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이와 같은 운송수단의 급격한 발전은 또 다른 역사조작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용되었을 것을 의심해볼 수 있는 이야기다. ‘T 모델’과 ‘A 모델’그리고 고종어차 위키자료에 따르면 포드 ‘모델 T’(Ford Model T)는 1908년부터 1927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제조 판매한 자동차로, "미국의 자동차 시대를 열다(put America on wheels)"라는 말처럼 대중화를 이끈 역사적인 자동차 모델이라 하였고 ‘모델 T’가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혁신적인 조립라인에 의한 원가절감뿐만이 아니라, 자동차 가격은 일반 노동자나 서민들이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낮아야 한다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판매 정책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미국의 고급 자동차는 2,000달러에서 3,000달러 정도에 판매되고 있었는데, ‘모델 T’의 가격은 850 달러에 불과했고 이어 1920년대에는 300달러까지 떨어졌다고 하였으며 1918년에는 미국 전체 자동차의 절반이 포드 ‘모델 T’일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헨리 포드는 1903년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면서 부터 지속적으로 자체 모델을 제작해 왔으며 포드 ‘모델 A’ 부터 시작해서 19번째 모델인 포드 ‘모델 S’까지 제작했고 포드 ‘모델 S’는 이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포드 ‘모델 N’의 후속 모델이었으며 지속적인 모델을 계속 제작하던 포드 자동차 회사는 마침내 1908년 9월 27일 역사적인 ‘모델 T’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피케트 공장(Piquette Plant)에서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27년 5월 26일까지 18년 반 사이에 15,007,033대가 판매가 되었다고 알려진다. 1922년 링컨자동차회사(The Lincoln Motor Company)를 매입해 고가품인 링컨 컨티넨탈(Lincoln Continental)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1927년에는 ‘T 모델’ 포드를 마지막으로 출시하는 한편 신형 ‘모델 A’가 생산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차동차가 도입된 것은 1903년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북장로교 선교의사이자 조선왕실부 의사이고 미국공사였던 한국이름 안련(安連)이라고도 한 호러스 N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을 통해 들여온 칭경식(稱慶式) 의전용으로써 당시 알렌이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 '프레이저'로부터 포드의 '모델A' 4인승 무개차(無蓋車) 1대를 수입하였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1927년에 출시된 ‘모델A’ 와는 다른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포드 자동차회사 설립이 1903년 6월 16일이다. 포드회사의 최초 '모델A'를 보면 대당 가격은 $800~$900이고 엔진은 수평 장착형 8마력[Flat-2 1668 cc,8hp]이며 유성기어 변속기(Planetary Transmission)에는 2개의 전진 속도와 후진이 장착되었고 형태스타일 4인승 토노(rear-entry 4-seat tonneau)로써 차량무게는 약 562kg 로 기록되어 있다. 최고속력은 45km/h 이며 1.8m의 휠베이스가 장착되었다고 하며 이 모델은 처음 붉은색(Red Color)만 공장 출고되었다는 특징이 있고 때문에 고종 어차(御車)가 는 붉은색 '모델A'형인 것으로 파악된다. 최초 출고사실은 시카고(Chicago)치과의사 인 독일계 어니스트 페니히(Ernest Pfennig)가 1903년 7월 23일 '모델A'의 최초 소유자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가지는 것은 포드회사가 미국본토 디트로이트인데 그곳에서 처음 생산된 시기가 1903년 7월 23일이라는 사실에서 어떻게 아시아대륙 한반도 경성에 있었던 고종이 그와같이 마치 한반도에서 생산한 것처럼 빠르게 '모델A'를 소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래 칭경식의 대한 내용을 고서에서 찾았다. [승정원일기]고종 40년 계묘(1903) 3월 13일(무진, 양력 4월 10일) 칭경하는 예식은 가을쯤에 택일하여 거행하게 하라는 조령 〈○〉 詔曰, 宮中, 際有痘疹之證, 各國使价之此時邀接, 竊有所難安, 稱慶禮式, 待秋間擇日擧行事, 分付, 養老宴與內外進宴日字以陰曆七月望念間, 更爲擇入, 太醫院都提調卿·少卿, 率醫官入侍, 太醫院都提調卿·少卿直宿, 移接泰寧門外行閣。 ○ 조령을 내리기를, “궁중에 요즘 천연두(天然痘)의 증세가 있으니, 각국의 사신을 이러한 때에 영접하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다. 칭경(稱慶)하는 예식(禮式)은 가을쯤에 택일하여 거행하도록 분부하라.“양로연(養老宴)과 내진연(內進宴), 외진연(外進宴)의 날짜를 음력 7월 보름과 20일 사이로 다시 택하여 들이라.”, “태의원의 도제조, 경, 소경은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입시하라.”,“태의원의 도제조, 경, 소경은 직숙(直宿) 처소를 태령문(泰寧門) 바깥 행각(行閣)으로 이접(移接)하라.”하였다. 위 기록사실을 보면 칭경식이 음력으로 7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실시한 것으로 보이며 양력으로는 1903년 9월 6일부터 9월 11일까지로 계산된다. 조선말기 특히 1903년에는 위 기록에서도 나타나지만 천연두가 궁중(宮中)에 발생하여 많은 의사가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인지 알 수 없지만 진보된 의학기술이 축적된 서양의사, 양의들이 조선말기에 많이 등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때 선교사라고 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정치브로커(broker)였다는 사실이다. 본 블로그에서 처음 밝힌 이야기지만 1881년은 대조선이 어쨌던 모한 세력에 의해 정부통제의 힘이 마감되고 해체된 해임을 밝혔다. 물론 상징적인 귀족들은 무사 했을 것이지만 기존 정부 각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그것을 친일파 각료들이라고 하여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억압주체가 일본제국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일본제국이라는 것이 틀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제국이란 명칭 뒤에 숨어 있는 강력한 힘의 세력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은 오늘날 우리 역사혼란을 증대시키는 요인이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1885년에 개원한 제중원(濟衆院)은 조선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병원이다.그런데 제중원 운영권을 미국북장로회(PCUSA)선교부로 이관하였는데 1894년에 이미 조선 정부는 일본인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런 상황에서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의료 선교사 한국명 어비신(魚飛信)이라고도 하는 올리브 에비슨(Oliver R. Avison:1860-1956)의 요청을 수용하여 미국북장로회(PCUSA)에 제중원을 이관했다고 알려진다. 이 북장로회는 스코틀랜드의 교회와 장로교인들이 처음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던 식민지 시대에 기원하고 미국독립이후 새로운 국가의 장로들에게 국가적인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서 조직된 단체이다. 거의 국가형태를 갖추고 1868년 남북전쟁 때 노예제도 때문에 남북으로 분활되었다는 것을 볼 때 정치현황에 민감하게 움직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고 미국선교사협회(ABCFM: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와 1870년 재결합했다.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여기서도 왜 제중원을 미국북장로회로 이관시켰을까 하는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한반도 역사는 이 때 조선말기 억압주체가 분명 일본제국이라 했다. 당연히 억압주체가 일본제국이라면 일본제국과 관계된 이해관계자에게 이관해야 할 것인데 일본이 아니라 미국 그것도 북장로회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억압추체가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고종40년 1903년은 사서(史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거의 사실로 판단이 되고 있는 미국의 필라델피아 피터 브라운(Peter Brown)박사의 딸 에밀리 브라운(Emily Brown)양과 1903년 8월 미국, 영국, 일본 외교관들이 보는 가운데 성대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하는 년도이다. 물론 이 해에 고종 칭경식(稱慶式)도 있었다. 조선말기에 식민주의적 한국제국의 이권침탈에 안내 역할을 한 인물이며 고종의 수행비서관 겸 주한미국공사로 알려진 호러스 알렌(H. N. Allen)은 의전용 어차를 수입한 장본인이다. 이 어차는 '모델 A'형 4인승 무개차이다. 그런데 그는 이 해 6월 1일부터 특별한(?)휴가를 얻어 서울에서 출발하여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유럽을 거쳐 대서양을 항해해 미국을 방문했다고 하며 그 기간을 6개월을 잡고 있고 그가 비로소 휴가를 마치고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03년 12월초순 임을 예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칭경식이 끝나고 난 후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알렌이 휴가를 시작하기 이전에 포드 첫 생산모델 ‘모델A’를 어차로 구입해 놓고 휴가를 떠났다고 보면 6월 1일전이니 시카고(Chicago)치과의사 인 독일계 어니스트 페니히(Ernest Pfennig)가 소유한 날짜(7.23)보다 훨씬 앞선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는 알렌이 어니스트 페니히 일 가능성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어쨌거나 포드가 생산하는 최초 출고되는 모델A 를 어차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당시 상징적인 황제 고종에게 포드가 최초 출시된 자동차 '모델A' 를 제공하고 이것을 어차(御車)로 사용하도록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기서 자꾸 이야기 하지만 미국공사라고 알려진 '호러스 알렌' 이 사람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특히 알렌이 한국에 잠입할 당시 국내법으로 불법종교인이기 때문에 당시 미국공관소속 의료책임자로 신분을 속이고 들어왔음도 알 수가 있다. 어쩌면 북장로회가 유대자본을 주도하거나 국제금융조직을 조정하여 적극적으로 선교사업을 추진했을 수도 있다. 때문에 비밀요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미국(국제금융조직)의 첩자일 가능성이 많고 또한 조선의 고종을 움직여 이권을 강탈했다는 의심을 받았던 인물이 알렌이다. 알렌은 의사이기 전에 미국기독교교회(Presbyterian Church in U.S)의 외국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소속의 선교사라고 알려지고 있는데 미국은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국가라고 단정지을만한 근거가 없었다는 사실이 존재하고 때문에 더하여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선교는 정치브로커활동이었을 가능성도 솔직히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그들의 기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필요에 의해 장로교회, 유대자본, 국제금융조직등이 고종(高宗)을 예우하고 정치적으로 복종은 하지 않았더라도 그 권위를 어느정도 보장하려고 노력한 주체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1881년에 조선이 해체되었다는 사실과 조선의 모든 권한은 어떤 주체에게 위힘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생각해볼 때 미국과 일본은 동일선상에서 조선을 상대했다고 볼 수 있고 적어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나는 통제조직이고 하나는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금융조직으로 체제 내부로 깊숙히 파고 들 수 있는 조직이며 그러한 미션(mission)을 위해 자본을 조달과 조정하는 임무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이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년도는 일본을 앞세워 러일전쟁이 발발시키고 러시아가 패한 1905년부터라고 판단할 수 있고 1887년부터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1856-1924, 재임:1913-1921)은 미국 행정학 성립의 기초가 된 논문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stration)를 발표함에 따라 국가형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점차 국가체제가 성숙해졌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이 윌슨은 미국대통령으로 1913년에 취임하여 한반도 역사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한 장본인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따져보면 이것은 그들만의 이익을 위한 자결주의라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가 한 정책을 보면 연방정부의 힘을 강화하고 중앙아메리카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1910년에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를 침공하여 베라크루즈(Veracruz)를 무력 점령하여 당시 멕시코의 우에르타 정권(Victoriano Huerta,재임:1913-1914)을 몰락시켜버렸다는 사실이 있다. 당시 멕시코는 군웅활거시대였다. 개인적으로 카톨릭과 군주제 혐오가 있기 때문에 황제의 퇴위와 민주정부 수립을 내걸어 2차세계대전을 촉발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우드로 윌슨은 조선에게 독립을 주선한 것이 아니라 고종 지위를 강탈하고 완전하게 파괴시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가 자결주의를 주장한 것은 1차세계대전(一次世界大戰)에서 패전한 동맹국(同盟國)측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독립시킨 식민지에 대한 자결주의일뿐이고, 승전국인 연합국의 식민지들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함으로써 많은 괴리를 불러 일으켰다는 비난도 받는 인물이다. 우드로 윌슨대통령이 한 정책 중에 또 한 가지 특별한 것은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에서 밝히길 동아일보 창간지(1920.04.01)에 미국(米國)육군 상비병 유육(紐育)발전(發電)이라는 제목과 함께 미국은 육군 상비병원을 300,000명(名)정하기로 국회에서 결의하였다고 보도한 사실이다. 이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교회와 국제금융조직을 위한 병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런 국가체제의 자신감은 조선(朝鮮)의 동양 한국계신문(동아, 조선, 매일신문)들의 정간조치를 해제시키고 발행을 허가 하였는데 모든 기사는 미국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라고 비난 받았던 뉴욕월드(New York World)와 뉴욕저널(New York Journal)을 그대로 옮겨 번역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 국제금융조직이 만든 미국기독교교회(Presbyterian Church in U.S)의 외국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의 소속인 알렌은 조선말기, 대한제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고종의 약점을 잡고 조선내부에 파고들게 한 것은 이러한 조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상 이권들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알렌은 적극적으로 그의 저서에서 부정하고 있지만 어쩌면 고종과 결혼에 이르게 한 에밀리 브라운(Emily Brown)사건도 그의 영향권 내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처음부터 의도하거나 주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의 변명은 이 결혼식이 거행된 시기가 알렌이 휴가 기간에 벌어진 일이라 하여 이일과 무관하다고 하지만 고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알렌이 이를 몰랐을 턱이 없다. 세기의 미국인 평민과 결혼식을 거행한 고종은 아마도 외교적으로 더 많은 것을 잃었을 수도 있다. 한반도 역사나 근대사를 바탕으로 보면 불과 $800 밖에 되지 않는 ‘모델A’를 인수했던 한반도의 고종은 차 값 보다 수송비가 더 소요되었을 것인데 이것을 알렌이 책임졌다는 이야긴지 황실재정에서 충당하였다는 것인지에 대해선 자료가 없으니 알 수가 없다. 멕시코 역사 요코하마를 이야기하기 전 멕시코의 역사부터 보자. 현재 멕시코의 집권여당 제도혁명당(PRI: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과 야당 민주혁명당(PRD)은 둘 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에 가입되어 있고 여당은 1929년~2000년 및 2012년~2018년, 77년간 장기집권을 하면서 독점적 통치에 각종 사회 모순이 축적되어 국민들은 정치적인 비판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관심도 부족하고 정부를 좀처럼 신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과거 스페인으로부터 300년간 지배받던 것을 비로소 1821년에 독립을 하였으며 그 이후 약 100년간 혁명가들의 군웅활거가 시작되었으며 크리스테로 전쟁(Cristero War or Cristero Rebellion:1926–29)으로 알바로 오브레곤 살리도(Álvaro Obregón Salido,1880-1928)가 암살되고 난 후부터 혁명가들에 의한 정치혼란이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수많은 혁명가에 의해 나라가 풍비박산이 난 형태와 특히 국가가 아닌 상태의 미국과 철저하게 엮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824년 설립된 코아우일라이테하스 주(Coahuila y Tejas)에는 헌법으로 미국 이주민의 정착을 인정하였고 코아우일라(Coahuila)성과 테하스(Tejas)성의 두 성(省)으로 나뉘었으며, 1835년에는 앵글로 색슨계(영국+독일혼혈)이주민이 반란을 일으켜 1836년에 멕시코령(領) 테하스는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을 했다. 이후, 미국이 1845년 텍사스를 합병하자, 1846년에는 텍사스를 둘러싸고 미국과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에서 멕시코는 멕시코시티를 점령당하고, 1848년에 패배하면서 텍사스를 미국에 매각하였고 뉴멕시코주(州), 캘리포니아주(州)등 광역의 땅을 미국에게 하릴없이 팔았다고 되어 있다. 결국 이때부터 멕시코는 리오 브라보 강(Rio Grande, Río Bravo del Norte)이북의 영토를 상실했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선조가 일구어 놓은 땅도 마구 팔아먹는 멕시코는 어떤 존재였는지가 뚜렷한 것이 없다. 미국자본의 용병으로 또는 현 미국의 전신으로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며 멕시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1910년 이후이다. 1910년은 우리에게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적인 역사사실이 있는 해이다. 아무리 부패하여 재정에 핍박을 받았다고 하지만 단돈 몇 푼을 받고 엄청난 자원이 산재한 영토를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질 수 있는 국가체제라고 그것은 쓰레기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국가를 어떤 국민이 믿을 수가 있을 것인지 판단할 문제이다. 그래서 그런지 멕시코는 본래 구심점이 없고 인종차별의 국가인 같은 착각에 빠지는데 거의 국가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북미권의 메스티소(Mestizo)는 유럽인과 아메리카 토착민의 인종적 혼혈인을 기반으로 한다. 이 혼혈 상황은 식민지 동화작용에 결과이다. 종족구성을 보면 메스티소(mestizo)60%, 인디오(원주민)30%, 멕시코출신 백인(Criollo)9%, 기타 1% 이며 하층인민인 물라토(mulatto), 삼보(Sambo)역시도 백인과 흑인, 원주민과 흑인의 혼혈이다. 유럽인들이란 좋게 이야기하면 해양세력들이며 나쁘게 말하면 바로 해적들이 아닌가. 또한 유럽대륙으로 들어가지 못한 유럽인과 아직도 남아 있을 법한 마야인(Maya)들 구성원들을 모두 합해 국민의 88.0%가 유럽인과 원주민사이의 혼혈인이라 하니 딱히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도 쉽게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원주민이 3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학살과 1521년 스페인 침공으로 인한 전염병에 의해 희생된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여간 본 블로그 글 "천연두(天然痘, Smallpox)로 본 박제가(朴齊家)는 에드워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5"에서 스페인의 침공이 있기 전 아메리카의 인구는 대략1억여 명이었으나 이 중 90%이상(90,000,000명)이 1518년 유행한 천연두란 역병으로 몰살했다고 밝힌 사실고 같다. 스페인어 명칭 '멕시코(México)'라는 이름은 본래 수도 ‘멕시코 시’에서 왔기 때문에 도시 명에 불과하며 발음도 우리가 아는 멕시코 보단 ‘메히꼬(mejiko)’라고 발음해야 맞다. 즉 멕시코라고 국명으로 부르지만 확실하게 전통성이 있는 국가명칭이라고 볼 수 없다. 고서(古書)에는 멕시코를 묵서가국(墨西可國), 묵국(墨國)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멕시코란 국명과 동일하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본 블로그 글 "흑조(黑潮)의 진실이 주는 일본의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9"에서 글쓴이가 말하길 묵서가(墨西哥)의 묵(墨)은 본디부터 ‘검은(Black)’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土(토)와 黑(흑)의 합자(合字)이고 묵(墨)은 '아궁이에 생기는 그을음' 본뜻이 있어 이 그을음을 현 멕시코 만(灣)의 바닷물이 검은 색으로 변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흑조(黑潮)' 혹은 `검은 찐득이', ‘얼룩'으로 불리고 검은 물덩어리(水塊:water parcel)이라 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묵(墨)이 멕시코 만이라 하면 묵에서 서쪽에 위치하니 묵서(墨西)가 된다고 볼 수 있고 가(哥)는 문장 끝에 자주 쓰이는 조사의 하나이기 때문에 붙여 묵서가라 했다. 그렇다면 과연 묵서국이 멕시코가 확실한가. 확언 할 수 없다. 요코하마 역사 위 멕시코 지도를 보면 위 세 군데 지역은 포드자동차가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멕시코시티와 가까운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도와 가깝다는 사실 때문인데 요코하마도 도쿄와 가깝다. 쿠아우티틀란이란 어원은 나와틀족어(Nahuatl)로 “나무들 사이”란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도시와는 거리가 있는 이름이고 이 도시의 설립년도는 1861년이다. 반면 요코하마 촌은 단기간에 거류지, 부두, 공물을 상납한 세관 등 국제항으로써의 체재가 정돈되기 시작하여 1859년 7월 1일에 요코하마 항으로써 개항했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도시 설립년도는 서로 불과 2년 차이다. 이 요코하마 촌에서 1854년 3월 31일 미(米)해군의 매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1794-1858)와 일본의 막부의 전권대신 하야시 후쿠사이(林復斎)사이에서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 神奈川条約)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코하마 촌이라 하였지만 이곳의 진짜 이름이 가나가와(神奈川)이고 관동(関東かんとう)지방의 현(県)이며 가나가와정(神奈川町)은 동해도(東海道) 역참(여관)중에 하나라고 하였고 지금에는 요코하마시(横浜市)의 구(区)중의 하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가나가와란 한문명칭에 우리는 천(川)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한문으로 신내천정(神奈川町)즉 “신(神)의 하천 경계” 우리나라의 리(里)정도의 그런 의미이다. 네이버백과사전에서 촌(村)을 木(나무 목)과 寸(마디 촌)이 합쳐진 글자로, 수호신으로 삼는 큰 나무(木)를 중심으로 질서 있게(寸) 모여 산다는 데서 '마을'의 뜻이고 엄격하게 보면 ‘나무사이’의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이란 어원과 비슷하다. 요코하마 촌(村)이 아니라 가나가와 촌이어야 맞고 바다나 강이 아니라 천(川) 즉 하천 정도의 경계를 가진 촌임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쿠아우티틀란에는 수많은 하천이 잘 정비되어 좌측에서 남북으로 흐르고 수로가 곳곳에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곳에서 일본 근대사가 야단스럽게 포장하여 페리의 흑선(黑船)을 부각시키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태평양함대사령관 운운하던 미국(美國)과 일본수호조약을 체결했다고 하는 장소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쿠아우티틀란이 멕시코시티와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요코하마가 도쿄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과 동일하게 보인다. 요코하마 촌의 운명을 변화시킨 것은 미국에 의한 것이라고 하며 당시에는 국교를 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태평양함대미국사령관이었던 매튜 캘브레이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가 지휘하는 외국 함선이 내항하고서부터라고 하고 있다. 태평양 항로의 거점이자 포경을 위한 공급 기지로서 일본의 항구를 이용하는 것을 바랐던 미국 해군의 외국 함선일행은 무추라번(六浦藩:Mutsuura) 고시바촌(小柴村:Koshiba-mura)에서 2개월 동안 정박하며 막부의 대응을 기다린 후에 요코하마 해로 들어갔으며 그 후 막부는 요코하마 촌의 응접소에서 외교교섭을 실시했다고 하였고 교섭의 결과 1854년에 요코하마 촌에서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하였다. 요코하마촌으로 들어가기 전 우라가(浦賀)뿐만아니라 무추라 번 고시반촌에서 2개월 동안 정박했다는 사실도 추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요코하마가 아니라 가나가와 촌(町, 里)이었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은 현재 일본열도에서 위 지명들을 찾아보면 거의가 바다와 접해있는 명칭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2개월 동안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함선 내의 점검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내륙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경우에 수단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현재 요코하마의 지도를 보면 그때 동선 모두가 거의 같은 해역에서 머물 수 있는 지명들이 나열되었다는 사실은 신뢰를 할 수 없는게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적어도 어떤 주 항구로 들어가 함선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작은 배를 이용하여 내륙으로 들어갔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하여 현 일본 열도의 지명이 될 수 없고 위치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코하마 촌은 막부가 설치한 공물을 상납한 세관을 경계로, 남쪽을 외국인 거류지(요코하마 거류지), 북쪽을 일본인 거주구로 하였다. 경계에는 관문이 놓여 관문으로부터 외국인 거류지 측을 간나이(関内), 이외를 간가이(関外)라고 불렀으며 외국인 거류지에는,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이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각국의 외국 상관이 줄지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외국인 거류지 안에 형성된 중국인 상관을 기원으로 하며 일본인 거주지는 요코하마 정(町)이라고 이름 붙였고 1889년 4월 1일 시(市) 제도가 시행되는 것과 동시에 시(市)가 되어 요코하마 시(市)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요코하마는 본래 다마 구릉(多摩丘陵) 임해부(臨海部)의 사주(砂洲)상에 자리한 한 촌이었다고 하며 다마 구릉이라는 것은 산보다 높지 않는 언덕이나 표고 100~180m의 높이의 구릉을 말하고 있는 것을 형태적으로 볼 때 근대 역사가 완성되고 난 후에 붙여진 지형임을 짐작이 가능하다. 현 요코하마 모순 4가지 현재 일본열도 가나가와현은 요코하마의 산업경제의 중심이 되어 임해매축지(臨海埋築地)에 제철·조선·자동차·기계·식품 등의 대단위 공장이 입지하고, 내륙부의 공업지화도 현저하여 호도가야(保土ケ谷)·도즈카(戶塚)·오후나(大船)등지에 많은 공장이 들어섰다고 하고 있다. 공업제품의 출하액은 수송용 기기·식품·전기기기·화학제품·석유제품의 순이고, 비단 스카프는 생산규모는 적으나 전통공업으로 유명하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가나가와현에 아메리카 부두라는 뜻의 ‘메리켕 하토바(メリケン波止場)’라는 대부두를 비롯하여 신항(新港)부두·야마시타(山下)부두 등을 중심으로 항만설비가 완비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1950년부터 한반도 전쟁 특수를 이용한 경제 재건시점인 60년대 이후에 시설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당연히 1945년 이전의 요코하마의 발전상황이 아니라는 부언이다. 위 메리켕이라고 하는 명칭은 미국을 나타내는 말인데 미리견(米利堅)이라는데 본래는 미리견(彌利堅)이다. 그렇다면 서두의 영어자료에서 설폈듯이 현 위치의 요코하마가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살펴보자. (첫째) 요코하마 포드자동차회사가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태평양전쟁 후 미국이 일본을 완전히 지배하는 입장에서 부동산이나 동산 모두가 포드회사의 재산이니 반환되어야 했고 포드회사가 요코하마 공장설립에 쓰였던 자금을 회수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일본 요코하마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던 기존 설비에 대한 사용상황은 당시 미국하수인에 불과하던 일본정부에 의해 전유되었다고 한다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제로 열도 요코하마에는 포드 자동차부품제조회사가 설치한 부동산과 설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만약 존재하였다면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 남아 있는 부동산과 설비들을 이용하여 포드회사가 왜 생산을 재개하지 못하였을까? 승전국인 미국(米國)이 일본을 지배하면서 자국의 포드회사에게 자동차 생산 재개를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이야기다. 왜 미국정부는 포드자동차회사의 소유물을 관리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미국정부의 도움아래 포드회사 입장에서는 아시아대륙을 겨냥하여 본격적으로 부품생산에 만족하지 않고 완성품을 생산하려 했을 것인데 이를 미국이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당시 아시아동부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중공(中共)은 죽의 장막을 드리우고 자본시장을 막고 있었다 한다면 잠재적인 일본경제와 그외 아시아경제의 무궁한 잠재성장가능성이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포드 완성차공장을 도모하지 않았다는 것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다. 문제는 과연 일본 열도 요코하마에 애초부터 포드 자동차 부품 공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만약 열도 요코하마에 포드자동차 회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기존 역사가 말하는 열도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投下)된 핵폭탄 2발의 정황도 믿을 수 없는 것일뿐더러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둘째) 현재도 그러하겠지만 국제정세가 불안하고 언제든지 투자금액을 한꺼번에 사장시킬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던 때 국가가 아닌 자동차회사가 나라 밖, 즉 국외 공장설립과 투자를 하고 그것에 따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선 정치적인 큰 모험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포드회사는 무엇보다도 큰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위험신호를 충분히 받았을 것이지만 어디에도 설립 후 정세불안을 이유로 요코하마 공장 철수에 대한 내용이 전무하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물론 열도 일본 요코하마에 포드 부품 공장을 설립해야 한다는 판단을 할 때 이러한 모험도 고려되고 미래 아시아 자동차 시장을 염두에 두고 심사숙고 끝에 포드경영진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그럼에도 포드회사가 위험을 감수하고 1925년 2월에 열도 항구도시인 요코하마(橫濱:Yokohama)에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했다고 한다면 그것에 상응한 경제이득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에 대한 아무것도 경제적인 해택이나 이익되는 징표가 나타나는 것이 없다. 일본 요코하마에 자동차공장을 설립해야 될 이유는 일본세격은 서구무역연합체 조직이므로 그 구성원들이 모두 서양인이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즉 포드회사는 유럽 공략의 일환이었다. 아시아열도에 당시 유럽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근대사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서양문물이 번성했다고 볼 수 있는 근가가 없다. 일단 지금의 열도는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지리적 환경적인 불리함이 분명히 존재하고 높은 운송비용 뿐만아니라 향후 리스크에 대한 위험을 충당할 수 있는 보험비용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한 비용을 감수하고도 포드이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 이익이 보장되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일단 1925년이라면 미국소유의 파나마운하(Panama Canal)가 1914년 8월 15일에 완공되었고 개통된 상태이기 때문에 남아메리카대륙 남단을 돌아가는 고운송비용은 면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파나마통과와 태평양횡단에 대한 운송비용문제는 포드회사경영진에겐 부담이 컸을 것이다.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넓고 긴 운송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해로로 곳곳에 기후도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상선이 수송동안의 위험은 엄청난 것이다. 근면한 일본인들의 생산성을 기대하여 그것을 노렸다고 하지만 포드회사가 부품에 대한 원가절감효과보다 외부적인 환경을 감내하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지 않음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미국 본토와 연결되고 유럽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멕시코 대륙 현지가 더 바람직한 것이며 경제논리를 따르더라도 포드회사에게 훨씬 유리했음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아시아의 열도 일본 요코하마에 포드회사가 자동차부품공장을 설립했을까. (세째) 이러한 사례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시가지와 항만 시설 등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 5월에는 미 육군의 폭격으로 시가지의 42%가 파괴되었다고 하였던 곳이 바로 열도 요코하마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주지한 것처럼 포드자동차회사가 1925년 2월에 열도 항구도시인 요코하마(橫濱:Yokohama)에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했다 하였다는 것은 또 무슨이야기란 말인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시기가 정확하게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32초(일본 표준시)에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사가미만(相模灣)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라 했다. [관동대지진과 가나가와현 지도] 위 사진을 보면 관동대지진 진앙지와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의 직선거리가 34.72km 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도 초토화된 피해발생지역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리다. 가나가와현은 바로 1858년 미 해군 함장 매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와 일본의 막부의 전권대신 하야시 후쿠사이(林復斎)가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을 체결한 장소이라고 하는데 지진이 발생하여 시가지와 항만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면 복구시간이 불과 1년 5개월 남짓 흐른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포드자동차회사가 공장건립을 기초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며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야기란 이야기다. 한번이라 하겠지만 시가지 전체가 초토화된 지역에 재발가능성도 생각하지 않고 무엇때문에 엄청난 투자비를 쏟아부으며 공장을 설립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태평양을 건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리고 엄청난 후유증이 남을 수밖에 없는 지진이란 자연재해를 당한 요코하마에 포드자동차 어셈블리(assy)제조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은 실로 만화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네째) 정치적인 문제라고 하겠지만 미국에서 이렇듯 일본에게 투자하였지만 캘리포니아주(州)에는 일본 사람이나 일본의 문물, 사상, 언어, 정치 따위를 배척하는 배일(排日)사상이 엄청났다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은 동양계 열도일본인만 일본이라고 하였다고 볼 수 없다. 동아일보 1921년 4월 11일자를 보면 배일사상에서 당시 논평하길 다음과 같이 하였다. 일영동맹(日英同盟)은 미국(米國)에서 매우 평판이 좋지 못하며 영국이 무슨 이유로 이 동맹을 계속하는지를 미국인들은 의아해하는데 일영동맹은 순연한 방어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미국이 일본에 대하여 부정당한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이 조약이 영국으로 인하여 미국에게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미국 내의 배일(排日)운동가가 생각하는 것은 일본이 크게 일영동맹을 신뢰하여 의지하기 때문에 가주(캘리포니아)에 있는 일본인대우개선에 대한 대담한 요구를 감히 미국에게 제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자료가 말하는 것처럼 불과 4년이 지난 후인 1925년 2월에 포드자동차(Ford Motor Company:1903-)가 열도 일본 항구도시인 요코하마(橫濱:Yokohama)에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했다 하였다. 만약 요새 같으면 배일사상이 비등한 미국시민들의 여론을 역행한 포드회사의 자동차를 가만히 두었겠는가. 아마도 전국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요코하마와 멕시코의 비교 [1846-1848 멕시칸 전쟁 지도] 그렇다면 이제부터 요코하마가 실제로 존재해야 할 위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자. 사실 미국이란 군사주체가 멕시코와 전쟁을 한 시기가 상당히 의심쩍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미국은 국가로써의 자체적인 모습을 갖추지 못한 시기로써 정식적인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위 멕시코전쟁(The Mexican War:1846-1848)의 지도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한 위치가 캔자스주의 레번워스(Leavenworth, Kansas)와 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즈(New Orileans, Louisiana), 텍사스주 남부 산 아토니오(San Antonio)와 코퍼스크리스티(Corpus Christi)에서 공격한 것이 보인다. 매우 산발적이고 미국이 존재했다고 하는 동부에서 출발한 군사 움직임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1858년 요코하마 가나가와현에서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고 하는 매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가 10년 전에 끝난 멕시코전쟁에서도 참전했다는 사실을 자료에서 알 수가 있다. 위 지도에는 뉴올리언즈에서 출발한 함대(艦隊:fleet)가 마타모로스(Matamoros), 파누코 강의 북쪽 제방에 있는 탐피코(Tampico)와 남쪽해안에 있는 베라크루즈(Vera Cruiz)를 공격하고 있다. 흑해(黑海), 흑조(黑潮)라고 하는 멕시코 만(Gulf of Mexico)을 통해 당시 미군들이 들어갈 수 있는 멕시코 동해안 두 도시는 큰 무역항으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라고 알려진다. 그렇게 유명했으니 미군(米軍)들이 그곳으로 진격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특히 위 지도에 붉은 화살표식의 멕시코 군들의 진로상황을 볼 수 있는데 매우 빈약하거나 보잘 것 없는 진영으로 그것도 모두 중앙에서만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아예 해안이나 경계북쪽, 또는 서부지역은 방어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멕시코만 연안 도시 마타모로스(Matamoros)에서 후퇴하여 멕시코 동북부에 있는 코아우일라 주의 주도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여 멕시코의 디트로이트로 불리는 살티요(Saltillo), 그리고 세드랄(Cedral), 산루이스포토시주의 주도 산루이스 포토시(San Luis Potosi)만 왔다갔다하였을 뿐 외곽지는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기껏 방어했다는 지역이 멕시코시티와 베라크루스주의 주도 할라파(Jalapa)정도이다.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파누코 강 하구에 있는 탐피코(Tampico)는 거의 무방비한 상태로 미군들이 자유롭게 움직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1840년대의 멕시코이니 이 전황(戰況)만으로도 당시의 멕시코란 국가체제를 어느정도인가를 알 수 있고 체제자체를 믿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니면 실제로 체제는 다른 조직이 있었고 현재 미국과 멕시코는 그들의 국부적인 영역때문에 충돌이 있었던 것을 확대하여 만든 것이 아닌가도 한다. 멕시코전쟁은 많은 것을 의심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하마가 멕시코에 존재했다면 어디를 지정할 수 있을까? 현재 멕시코 내 포드회사가 존재하고 있는 곳을 보면 북쪽 소노라주(Sonora) 에르모시요(Hermosillo), 치와와주(chihuahua) 치와와(Chihuahua), 그리고 멕시코주(Mexico)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에는 현재도 포드회사가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3개주(州)에서 요코하마를 찾을 만하다. 이 세 개주에서 각 지정된 도시들을 자세히 보면 현재 일본 열도 요코하마처럼 직접적으로 바다와 접한 곳은 없다. 그러나 소노라주(Sonora)의 에르모시요(Hermosillo)는 캘리포니아 만(Gulf of California)과 연결된 소노라강(Sonora river)이 도시 사이로 흐르고 에르모시요에서 소노라강과 미겔강이 합류하는 하천이 도시사이로 흐른다. 때문에 의사이며 동물학자인 에드거 알렉산더 머언스(Edgar Alexander Mearns)가 수생 포유류 모피로 유명한 비버의 가장 남쪽 범위를 정하게 된 배경에서 1907년 비버(beaver 학명:Castor canadensis)를 이 소노라 강에서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어 이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다. 또 한 도시 치와와주(chihuahua)의 치와와는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과 연결된 리오 콘쵸스 강이 있다. 이 강의 지류 추비스카르(Rio Chuviscar)는 치와와와 하천으로 연결되며 일단 멕시코만으로부터 리오그란테 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 콘쵸스 강으로 들어가고 다시 지류 추비스카르강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지리적 환경임을 알 수가 있다. 1964년 제작된 서부영화 리오 콘초스(Rio Conchos)의 무대가 바로 이 강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이시기에 이 지역은 서부무법자들이 설쳐되던 곳이기 때문에 이들을 미군이라고 할 수 있는 배경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하곳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바로 멕시코주(Mexico)의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이다. 멕시코 만(Gulf of Mexico)과 연결된 판누코강(panuco river:Río de Canoas)이 주강으로써 멕시코 주(State of Mexico)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내륙으로 멕시코 벨리(골짜기)를 지나 투라 강(Rio Tula)을 타고 들어가면 쿠아우티틀란(Cuautitlan)마을과 마주친다. 그들이 함선을 판누코강 하구에 정박해 두고 외륜선이나 이동선을 타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이곳은 모든 환경적 요소를 감안할 때 요코하마의 가나가와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솔직히 멕시코전쟁은 명칭자체가 역사적이지 못한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가 전쟁을 하였다면 ‘멕시코 전쟁’이 아니라 ‘미국과 멕시코 전쟁’이라 해야 맞다. 당시 서부에는 서부개척자, 살인자, 범법자들이 우글거렸다고 보면 그들이 미국인이라 칭할 때 멕시코를 상대로 곳곳에서 이념이 아닌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여 충돌하였을 경우 그것이 기록이 전해져 이것을 멕시코와 미국이 전쟁을 한 것이라고 조작할 수 있는 여지는 상당하다. 미국인이 아니라 멕시코의 한 구성원들이 반란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엄밀하게 따진다면 미국과 멕시코는 동일한 선상에 놓고 보아야 옳지 않겠는가 한다. 멕시코에는 왜 유명 자동차메이커가 없을까? 그런데 잠시 이런 생각을 한다. 왜 멕시코에는 유명자동차메이커가 없을까? 서두의 (3)번 자료를 보면 포드회사는 지금의 열도 요코하마에 조립공장을 설립한 똑같은 년도 1925년 초(as early as)에 멕시코에서 자동차 제조공장을 설립하였다고 되어 있다. 더군다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인 뷰익(Buick Motor Company)은 1921년 멕시코에서 최초로 자동차제조공장을 설립했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이라면 얼마든지 기술력을 쌓아 자국의 메이커가 적어도 몇개가 되어야 하지만 멕시코는 현재 트럭이나 사용차만 메이커가 있고 승용차는 자국의 메이커가 없이 전부 현지 OEM 공장뿐이다. 왜 자국메이커가 없을까? 멕시코인들의 구성원들을 보면 유럽인, 서양세력들의 유전성과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역사가 존재하고 대체적으로 의타심이 강해 결국 나태와 불만, 분쟁을 낳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종족간의 갈등과 인종차별적인 사회계층 분류가 자아 발전적이 못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과거 100년 동안 수많은 혁명가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형태가 지속되었듯이 현재는 마약전쟁으로 매일 주검이 생긴다. 선후와 원인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지만 빈민들은 거의가 하층계급으로 사회가 피부색이나 외모로 신분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출신 인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하류층은 본인의 노력으로 신분 상승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지고 이들 대부분은 성실한 생업보다는 한탕주의에 몰두한다고 알려진다. 경제관념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신용카드 발급 숫자가 2015년 기준으로 1억 2천만 명(名)의 인구에 3천만 장 정도로 신용이 보편화되지 못한 상태임을 알 수가 있는데 사회가 받아들이면도 그렇지만 매우 저조한 것이 사실이다. 2014 년 기준으로 9천2백만 장 수준인 한국은 인구가 멕시코인구의 반도 안 되는 5천만 명(名)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비가 충분히 된다. 멕시코 엘리트들은 정부와 정치를 비난해야 지식인이라는 이상한 의식도 존재하고 정치나 언론 및 경제계에는 주로 백인들이 진출해 있고 상류층은 스스로를 북아메리카나 유럽사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고 있으며 경제 활동 인구 중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은 20% 미만이라는 사실에서 제도권 경제보다 지하 경제 규모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국민전체 융합자체가 힘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멕시코는 2017년 기준 가채매장량(Proved developed reserves) 764억배럴(bbl) 세계19위의 산유국이지만 경제는 세계에서 11위 대한민국과 비슷하게 12위권에 있으며 잠재성장수치도 우리보다 높거나 비슷하다는 사실은 인구나 자원을 생각할 때, 인적 물적 자원 활용 여지에 따라 발전가능성은 높지만 구조적으로 상당히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멕시코는 빈부격차가 심해서 멕시코시티를 기준점으로 북쪽은 유태인 백인들이 비교적 수준 높은 생활을 즐기고 있다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인디오출신들이 많은데 세계 제일의 부호로 발표된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원주민이 공존하는 사회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글쓴이가 알기론 19세기중반까지 멕시코에는 유럽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북쪽지역이 그러한데 모든 산업발달은 북쪽으로 치우치고 있는 것도 미국과 접경을 맞대고 있는 것도 있지만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산업계획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유럽인들은 미국본초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실제 유럽대륙으로 이동한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문제는 자동차산업에서 여느 나라보다 일찍 기술력을 확보하고 자력으로 자동차생산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음에도 다른 나라 메이커 OEM 생산방식을 택하며 지금까지 답보상태에서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와 국민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른다. 남의 나라를 평가한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역사성에 기인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래 지속된 사회주의정치는 의타심과 불신을 낳고 경제관념이 무디고 국가가 잘되건 못되건 무관심하며 나만 편하고 나만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이기적인 경향에다 계층간 차별에 의한 자기발전에 적극적이지 못한 사회구조와 병행한 국민성에 기인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멕시코가 요코하마일 가능성 그렇다면 포드회사가 분명히 국외(國外) 자동차제조회사를 만든 것은 사실이라면 그곳이 태평양을 건너지 않는 상태에서 운송에 리스크가 없는 안전한 육지로 통행이 가능한 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극히 정당한 괴리가 없는 역사이다. 당시 유럽세력들이 상당히 밀집하여 존재하였던 중앙아메리카를 기반으로 하는 또 다른 자동차 시장을 포드회사가 노렸다면 (3)번 자료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연방구(Distrito Federal)의 멕시코시티(Mexico City)북쪽에 위치한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이나 소노라 주(Sonora State)의 에르모시요(Hermosillo), 그리고 치와와주의 치와와(Chihuahua)에 엔진조립공장을 설립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요코하마를 멕시코라 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멕시코는 근원적으로 도시이름이라는 어원에서 이를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쓴이의 판단은 1차세계대전 후 근대사가 생성될 시점인 1920년경 우라가, 요코하마 또는 가나가와, 무추라번, 고시바촌 등 멕시코를 국가로 보았을 때부터 멕시코 내에 존재했을 도시들을 생각하게 한다는 이야기다. 멕시코에는 일본이란 서구무역연합체 조직의 흔적이 산재된 곳이다. 사실상 요코하마가 항구라는 등식은 포드회사가 태평양을 건너 수송해야 하는 위치적 당위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어쩌면 항구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태평양을 건너지 않고 북아메리카대륙 철도를 이용하여 육지에 포드계열 자동차제조회사가 설립이 되었다면 구태여 항구나 항만시설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이에 더 보태진다. 리오 그란테강이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아니다. 항구나, 항만시설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큰 바다와 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1858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 곳의 이름을 보면 항구가 아니라 하천정도가 흐르는 작은 소(小)마을이었음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멕시코 내에 현재 자동차회사가 있는 쿠아우티틀란(Cuautitlan), 에르모시요(Hermosillo), 치와와(Chihuahua)가 모두 이와같은 대상에 포함된다 해야 맞다. 미국이란 국가와 일본이 존재하였고 2차세계대전(二次世界大戰)까지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은 국가로써 체제를 굳히기 시작한 국제금융조직이 점차 세계 지배쪽으로 무게추가 쏠리면서 모든 정책은 군사위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당시 중앙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 그리고 카리브해(Caribbean Sea)도서(島嶼)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길드형태의 서구무역연합세력)이 점차 북쪽으로 치고 올라갈 때 미국과 충돌이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형태의 정황을 어느정도 진단할 수가 있다. 이것은 본래 일찍부터 대조선이 일본세력에게 느끼던 갈등이기도 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에서 밝혔던 이야기지만 이미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내 존재하던 추축국이 이미 사라진 마당이다. 또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공영권을 강조하고 일호만협조(日華滿協助)를 강조한 관계가 사라진 것도 미국이 승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2차세계대전후 연합국에 의해 실체가 철저하게 제거되고 사라진 상태에서도 1951년 9월 8일에 연합국으로 선정된 48개국을 대동한 미국은 새삼스럽게 일본과의 다시 통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즉 평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을 체결하면서 이상하게도 일본은 전쟁전의 일본이 아닌 동양권 내에 일본으로 둔갑하게 하고 변조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의 일본은 2차세계대전 전의 미국 모습이라고 하면 과한 것인가. 미국은 일본을 왜 전쟁 전 체제를 유지하도록 만들었을까? 미국이 친일정책 뒤에 숨겨놓은 그 무엇을 우리는 찾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이 독일과 이탈리아는 붕괴시켜 잔재를 사라지게 만든 대신 일본을 살려두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동아시아대륙에서 미국 첨병역할을 하도록 만든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어쩌면 동양열도에 존재하는 일본은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米國)을 적극적으로 도와 미국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하던 잘 훈련된 세력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미국이란 국가가 태동하기 전까지의 역사사실을 끌어안을 수 있는 국가가 필요하여 일본이라고 명칭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그리고 현 일본이 재퍼니즈(Japanese)라고 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재퍼니즈(Japanese)는 안세이5개국불평등조약(安政五カ国条約)을 맺은 세력으로써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그 구성원이다.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대등한 해양세력이었지만 일본이 등장하자 구름처럼 근대사에서 사라지고 세계역사에서 소리소문없이 물러나 버리고 북유럽 조그맣게 영토를 잡아 앉는다.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어느날 갑자기 일본으로 바뀐다는 사실 말고는 네덜란드가 소리 소문없이 그렇게 허망하게 추락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무엇이 사실인가. 네덜란드가 식민지배 한 인도네시아가 카리브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바로 서양일본이 동양일본으로 둔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한반도에 정작 독립을 주도하는 인사들은 다 숙청되거나 암살되어 거의가 사라져 갔지만 미국에서 훈련받았던 파견된 세력은 미 군정 보호아래 정권을 잡았고 실세가 되었던 것처럼 일본열도에도 동일하게 친미세력들이 정치전면에 나섰고 그들은 새로운 일본이 아니라 과거 일본을 고집하며 그 체제를 유지코자 했던 것이 미국과 이해가 맞아지면서 지금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퍼즐은 오늘날 요코하마가 그것의 실체를 들어내고 있지 않는가. 미국, 일본, 멕시코 국가존재유무확인 미국인들의 주장처럼 멕시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물론 패전한 멕시코는 미국에게 점령당하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까지 미국인들이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할만한 국가체제였는가는 의문은 수십번 재기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4"에서 살펴본 바대로 적으면 미국은 적어도 러시아제국 샹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무기감축선언이 있었던 1868년 11월 29일까지 국가로써의 존재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이때 참가국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ia-Hungary), 바이에른(Bavaria), 벨기에(Belgium), 덴마크(Denmark), 프랑스(France), 브리튼왕국(United Kingdom(representing the British Empire), 그리스(Greece), 이태리(Italy), 네덜란드(the Netherlands), 포르투갈(Portugal), 프러시아(Prussia), 통일독일동맹(the North German Confederation(Greater Prussia)), 러시아(Russia), 스웨덴노르웨이(Sweden-Norway), 스위스(Switzerland), 오스만(the Ottoman Empire), 그리고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로 나타나 당시 미국이나 일본은 개최국으로부터 초대받을 수도 없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그 당시 세계 영향력이 있는 국가들의 모임이라는 것은 첫째로 군사문제를 토의하는 자리이며 무기감축선언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기감축선언에 참가할 수 있는 국가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멕시코가 국가로써의 면목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증명이 되며 주최국 황제인 평화주의자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1818-1881,1855-1881)의 초청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국가로써의 실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배운 근대사에서 이와 같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모순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믿고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무지렁이로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미국은 당시 1868년까지 국가로써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역사라고 하여도 비판과 검증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잘못된 사실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바로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은 진실조차 눈을 가리고자 하는 어리석음이 존재한다. 미국은 1776년 독립되었고 그 이후 독립된 국가주체로써 자본주의 선봉장이 되었다는 근대사만 믿고 있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 때문에 역사 개념을 정리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이란 주체는 자본주의의 결정체고 자본에 의한 궁극적인 체제를 갖추게 된 어쩌면 유대자본의 결정체라고 해도 외교, 군사, 정치, 문화, 통치통제권을 가지고 있던 정식 국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당시 미국은 자본력을 가진 집단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오늘날 국제금융조직이라는데 이의를 달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일본이란 조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1929년 대공황 때라고 볼 수가 있다. 아니면 그것보다 좀 더 이른 1920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페리가 미시시피호란 이름의 흑선을 타고 일본에 도착한 것은 멕시코일 가능성이 많으며 멕시코인들이 서구무역연합체에 의해 구성된 용병의 녹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그린고(gringo)라 한 것은 주체가 하나의 거대한 자본가동맹이며 이때부터 미국이라고 하는 조직체에 의해 멕시코 혁명기는 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즉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거듭 국력을 상승시킨 것과 다르지 않다. 1859년까지의 일본은 네덜란드 즉 더치(Dutch)무역에 의한 독점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1858년 우라가(浦賀)에 흑선(黑船)이 들어오고서부터 유대자본가들의 자본이 일본재정을 지배했을 것이란 추측이 있고 이로 인해 유대자본가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체제가 만들어졌으며 당시 하나의 체제주체였던 대조선(大朝鮮)을 상대로 무역행위를 하기 위하여 해양세력들을 규합한 것이 안세이5개국화친조약이며 이렇게 구성된 조직체가 현재 일본으로 나타나고 자체적으로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만든 것이 바로 난학(蘭学)이며 이것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완성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이 동양문화라고 볼 수 없다. 1858년 일본 막부정권으로부터 화친조약을 맺고 새로운 일본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내침과정에 사실상 우라가와 요코하마의 위치가 존재할 것 같은 멕시코 동부해안 탐피코(Tampico)를 통해 내륙으로 들어가 멕시코주(Mexico)의 쿠아우티틀란(Cuautitlan)에서 비주류라고 판단되는 새로운 일본세력과 화친을 맺은 것이라고 전체적으로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재퍼니스(Japanese)와 흰독수리 상징의 역사 Fine Japanese Large American Eagle and Stars and Stripes Silkwork Textile Picture, Circa 1885-1900. The superb large silkwordk depicts a large eagle with wings spread wide with aj silver banner in its mouth with the motto. E Pluribus Unum-above a shield-form Stars and Stripes with three American flags to each side with ten scattered silver stars above. 위의 사진은 자료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약 1885년부터 19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일본의 대형독수리와 별, 그리고 줄무늬 실크섬유로 작업한 걸개 그림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지만 도대체 “Fine Japanese Large American Eagle”란 문장은 역사적으로 혼랍스럽고 답답한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것일까? 눈을 의심해 보지만 실물인 것은 틀림없다. 포토샵한 것도 아니다. 미국 국기로써 상당히 오래된 비단 걸개인 것 같다. 우선 "Fine Japanese" 를 그대로 해석하면 훌륭한, 대단한 재퍼니스로 풀 수 있지만 실체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국기이며 미국상징인 흰독수리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백과사전을 보면 "American Eagle" 는 흰머리독수리로 미국을 상징하는 새라고 되어 있다. 흰머리수시(Bald eagle)라고도 하는데 1766년 린네가 명명한 학명 할리아이에투스 레우코케파루스(Haliaeetus leucocephalus)이며 할리아이에투스속(屬)으로 분류 되는 바다수리(Sea eagle)중 하나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한문으로 백두해조(白頭海鵰)라 하고 그 외 별칭으로는 백두응(白頭鷹), 독두응(禿頭鷹), 독두조(禿頭鵰), 미주조(美洲鵰), 미주응(美洲鷹), 미국응(美國鷹), 미국국응(美國國鷹)으로 불린다. 이를 우리말로 흰쭉지참수리라 하고 이는 두 가지 아종(亞種)이 있으며 흰꼬리 독수리와 더불어 보호종(種)을 형성한다. 1782년 미국의회에서 ‘미합중국의 국조(國鳥)’로 지정하였으며, 이후 미국의 각 공공기관에서 상징물로 사용되고 있다. 흰머리수리는 미국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사이에서 신성한 동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흰머리수리의 털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머리와 옷 등에 장식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정리된다. 白頭鷹, 禿頭鷹, 禿頭鵰, 美洲鵰, 美洲鷹, 美國鷹, 美國國鷹 科學分類 界:動物界 Animalia 門:脊索動物門 Chordata 綱:鳥綱 Aves 目:鷹形目 Accipitriformes 科:鷹科 Accipitridae 屬:海鵰屬 Haliaeetus 種:白頭海鵰 H. leucocephalus Haliaeetus leucocephalus(Linnaeus, 1766) 이 맹금류의 성년 것의 몸길이가 1m, 날개길이가 2m 이다. 종명 라틴어(Latin) 레우코케파루스(leucocephalus)의 어원을 보면 레우코(leuco/white)는 흰, 케팔루스(-cephalus/headed)는 머리라는 의미로 흰 머리를 뜻한다. 이것은 미시시피州(Mississippi) 야생 생물로 알려지며 위 분포지도를 보더라도 북아메리카대륙이 원산지임을 알 수가 있다. The superb large silkwordk depicts a large eagle with wings spread wide with aj silver banner in its mouth with the motto. 약 1885년부터 1900년 사이에 제작된 비단 걸개인데 거대한 흰 독수리의 문양을 실크섬유질로 작업한 상징물임을 알 수 있지만 도대체 “fine Japanese”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아무리 다르게 생각해보 재퍼니스가 일본이라고 하지만 1885년부터 1900년은 물론이고 그 이전 이 걸개의 상징물을 제작할 1776년 부터 미국은 재퍼니스라는 이야기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 미국이 재퍼니스라니... 위 영어자료를 풀어보면 최고의 큰 비단 천에 날개폭이 넓고 은색 깃발을 입에 물고 좌우(左右)에 배너를 붙인 큰 독수리를 묘사하고 있으며 배너의 "E Pluribus Unum"란 문구 위에 방패형태의 별과 줄무늬가 있고 그 위에 미국국기 세 개와 각 측면에 10개의 은색별이 흩어져 있다. E Pluribus Unum, the motto of the United States: Latin for "Out of many, One" it refers to the Union formed by the separate states. E Pluribus Unum was adopted as a national motto in 1776 and is now found on the Great Seal of the United States and on United States currency. 위 영어자료를 보면 미국의 모토인 “에 플루리부스 우눔(E Pluribus Unum)” 라틴어로 "많은 것 중 하나(Out of Many, One)"라는 뜻의 이것은 각기 다른 주(州)들이 모여 형성된 연합(US)을 가리킨다. 에 플루리부스 우눔(E Pluribus Unum)은 1776년에 국가적 모토로 채택되었고 현재 미국의 국새(Great Seal)와 미국 화폐에서 새겨져 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이 모토(motto)는 미국 독립운동에 참여한 스위스 출신의 예술가 피에르 드 시미티에르(Pierre Du Simitiere,1737-1784)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의 격언 "하나는 모든 것으로 이뤄져 있고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나온다."로부터 영감을 얻어 고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연방국가인 미국은 평등한 13개 주(州)가 모여 하나의 국가를 이뤘다는 건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1776년 건국 때부터 이 문구를 국가 인장(印章)에 넣어 왔고 현재는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가 모여 미국이 성립되었다는 의미로 쓰인다고 최종 정리된다. 그러나 이 모토를 제작한 시미티에르는 출신지역인 스위스를 떠난 후, 뉴욕과 필라델피아로 이주하기 전까지 10년 이상을 서인도지역(카리브해도서지역)에서 보냈다고 되어 있고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후 피에르 에우제네 두 시미테레(Pierre-Eugène du Simitière), 피에르 유진 두 시미티에르(Pierre Eugene du Simitiere) 또는 피에르 두 시미티에르(Pierre Du Simitiere)라는 이름의 철자를 썼다고 알려지는데 이렇게 많은 이름이 무엇 때문에 필요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인도지역인 카리브해 지역은 일본(서구무역연합체)의 근원지라 한 본 블로그를 참조할만하다 하겠다. 이 사람도 그 구성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1926년 포드회사 동아일보 광고로 본 일본 실제로 1926년 동아일보 광고에 등장하는 포드회사 앞에 일본은 정체는 무엇인가. 위는 동아일보 1926년 5월 15일자와 1926년 6월 9일자 "일본 포드자동차주식회사"의 "포드T" 광고이다. 이것은 분명 한반도 서울 경성에서 포드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한 광고인 것은 틀림없는데 당시 한반도가 열도일본인들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굳이 '미국포드자동차회사'라 하지 않고 '일본포드자동차회사'라고 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물론 생각해보면 '미국 포드회사 본점'에서 일본에 별도 법인을 만들어 한반도에 판매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광고효과가 미국(米國)보다 일본을 앞세우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해서일까 한다. 위 오른쪽 광고는 팔각정을 배경으로 하는 싯가 2,870원(圓) 자동차와 왼쪽편에 은진미륵불상을 배경으로 하는 1,810원(圓)자동차광고이다. 이 모두가 한반도 역사배경을 하였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앞에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포드 "모델T"는 1908년부터 1927년까지 생산한 제품인데 1925 Ford "New Model" T 투도 세단(Tudor Sedan)이다. 가격은 동일한 가격인지 알 수 없지만 1926년에는 $360 로 가격이 책정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미국현지에서 판매가격과 낮은 가격으로 대비할 때 당시 원(圓)과 달러($)의 환율은 5:1 정도로 보인다. 좌측 광고내용을 보면 "개량 포드 덮개형(幌型)자동차는 5인이 편하게 타고 어떠한 나쁜조건의 도로라도 용이하게 주행할 수 있는 유쾌한 승용차이 올시다. 차체는 길고 도 넓으며 그리고 전체는 4촌반이 작고 좌석은 새롭게 고안한 것이고 걸어앉기가 실로 좋습니다. 가격은 아시아는 바와 같이 저렴하고 조종은 간단하고 또한 비용이 지극히 경제적이 되어 1년 동안 가장 만족하게 타실 수 있습니다." 가격 1,810원(圓)은 경성 또는 부산매도가라고 되어있다. 우측광고를 보면 포드쎄단은 조종이 확실한 자동차란 큰 제목아래 "개량된 포드쎄단은 외관이 미려하고 가장 유쾌하게 타실 수 있는 자동차올시다. 조종이 확실하고 주행이 안전함은 포드차의 특장이고 칠색이 화려한 차체와 널직 널직한 차실, 아우러진 장식은 사람의 눈을 끌고 비용이 경제됨과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일찍이 정평이 있는 바이올시다. 사각테두리 옆에 보면 포드쎄단(출입문은 4구(口) 금 2,870원(圓), 그리고 경성 또는 부산매도가" 라고 되어 있다. 같은 시기이니 쎄단은 약 1,000원(圓)가량이 비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가격이야 환율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포드회사의 특약판매소가 경성에 있는 쎄일프레사 주식회사이다. 주소가 경성주첨정(京城 竹添町一丁目)75번지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 행정주소로 현재 충정로일가(忠正路一街)이다. 그런데 맨 아래 "日本 포-드 自動車株式會社"란 명칭은 상당히 곤욕스럽게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로 해석할 때 일본은 열도일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마무리 이제 마무리 하자.이글에서 놀라운 것은 미국의 정체이다.재퍼니스(Japanese)란 명칭을 그렇듯 꼭꼭 숨겨놓고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렇듯 쉽게 찾아낼 것이란 생각은 솔직히 하지 못했다.왜 일본이 재퍼니스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많이 가졌지만 원체 꼭꼭 숨겨놓은 사실이라 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그렇다면 지 재퍼니스를 동양열도일본인들에게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초창기 1776년의 미국은 재퍼니스를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그런 후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재퍼니스를 멀리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본 블로그 글 "구상나무(Abies koreana)로 본 소나무와 삼한역사 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9""에서 밝히길 본래 영어사전에 보면 Jap [dʒæp] a., n. ① (구어·경멸적) =JAPANESE. ② (j-) (미국속어) (야비한) 기습.♣pull a ∼ (미국속어) (숨었다가) 기습하다. Jap [dʒæp] vt. (j-) (미국속어) 숨어 기다리다, ┅을 기습하다. 모두 경멸적인 단어로 "Jap" 은 "japanese" 라고 되어 있다.더군다나 미국속어로 야비한 기습, 숨었다가 기습하는 것을 빗대어 jap(잡)이라 하였고 숨어기다리다, 어디를 기습하는 것도 jap(잡)이라 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 재퍼니스(Japanese)가 일본이라면 일본이란 영어 어원은 당시 특히 영어를 사용하는 서세(영국인)들은 재퍼니스에게 상당히 모욕적인 표현으로 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미국인들은 영국이라고 하는 브리티시의 식민지의 구성원들이다.그렇다면 브리티시인들에게 미국인들은 잡이라고 모욕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알 수가 있어진다. 아니면 줄여 네덜란드 디치라 하여도 이들도 미국인의 주요 구성인자들이다. 이러한 점을 뒤집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5년 8월 10일자 파리의 신문에 보면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알리는 신문 머리기사로, 신문에는 "잽은 떠났다"("Japs quit")라고 쓰여 있고 제이프스(Japes)는 잽과 원숭이의 합성어라 하여 일본인들을 경멸하였던 것이다."Let's Blast the Jap Clean Off the Map(잽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자), "Rap the Jap" (잽을 두들겨라), "Kill the Jap"(잽을 죽여라)등의 슬로건이 널리 유행했다라고 알려진다.이것은 동양계일본인들에게 미국인들이 취하던 극단적인 행동이다. 당시 미국은 영국의 지위를 누린 것인가. 영국이라고 하는 브리티시는 대조선인 것이 분명하다. 대조선의 지위를 미국이 가진 것이다. 현재 멕시코 내에 위치하고 있는 자동차제조회사들을 보면 전부 외국인 메이커이다. 특이하게도 일본 자동차 메이커 니산(Nissan)자동차가 23.5%를 차지하여 기존 멕시코에 정착하고 있는 외국메이커 중 판매가 최고라고 위 도표에도 나타난다. 1959년에 닛산자동차가 멕시코에 진출하고 1961년 멕시코 법인을 설립한 이후 2008년까지 GM에 밀리다가 그 이후 Nissan은 멕시코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줄곧 지키고 있다. 그리고 토요다 6.7%, 혼다가 5.7%, 마츠다 4.2%의 판매점유율이 나타나는데 어쨌던 일본회사들이 멕시코시장에서는 판매가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글쓴이가 살펴본 어떤 현상에 결과라고 볼 수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기아(KIA)가 5.5%이고 현대(HYUNDAI가 3.5%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살펴보면 일본 열도의 자동차 산업은 마치 멕시코가 그들의 본토인 것처럼 미국을 추월하는 발전을 이룩한 것이 퍽 이채롭다. 사실상 태평양전쟁으로 초토화된 일본에게 한반도 전쟁으로 인한 군수지원 영향에 따른 경제해택은 실로 우리한반도처지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인들은 한국을 경멸하고 그들이 앞선 경제 상황을 앞세워 선진국이라고 으쓱이겠지만 출발은 똑 같았다는 사실이다. 일본열도이나 한반도인이나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가난하기는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혜택을 열도일본인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경제부흥을 이루었지만 한반도의 한국은 경제 부흥이 아니라 기존 남아 있던 것마저도 2차세계대전(二次世界大戰)보다 더 많은 폭탄이 투하되었다고 하는 민족전쟁 화마에 의해 완전히 잿더미가 되고 초토화되어 버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제로상태의 불행한사태를 한반도 한국인들은 도리없이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곧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일본에 비해 약 70년이 넘도록 남북 분단으로 인한 안보비용은 일본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담을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60년대 경제에 기지개를 펼 수 있었다지만 그 이전까지는 한반도 한국인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냉정시대에 따른 주위 정세 환경이 주요요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50년대부터 이룬 일본경제발전은 과히 어부지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의 피와 수많은 인명이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런 면에서 지금이라도 진실되게 반성해야 마땅하다. 일본은 한국전쟁 통에 군사물자를 지원하는 중공업이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경제대국인 미국(米國)의 전폭적인 지원이 3년이란 전쟁기간동안 가속화되었고 냉전시대를 맞이하여 중공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일본인들이 뛰어나 그런 결과를 맞이했다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 한반도 전쟁은 미국이 전략적으로 접근 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환경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미군의 전초군수기지 역할은 열도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기대하는 일본경제인이나 정치인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열도일본이 멕시코보다 자동차산업이 발달이 된 것은 냉전대립에 의한 정치적인 환경과 전략적인 입장에서도 미국에게 필요한 요건에서 일본보다 멕시코는 불리하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한간에 지난 이야기이지만 미국이 한국전쟁때 군수지원물자를 멕시코에서 공급할 것을 기획했다는 설도 없었던 것은 아닌듯 하다. 열도 일본인들이 미국과 대적한 태평양전쟁의 진정한 적수로써 고도의 기술력을 보유한 것이 사실이라면 열도 일본인들의 자동차산업의 발전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짜 일본인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는데 글쓴이는 방점을 찍는다. 그러한 급속한 고급 산업기술들은 한반도전쟁으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공여되고 전수된 것이다. 근대사는 그렇게 가르쳤다. 진짜 서양문물을 역사적으로 취한 일본인이 될 수 있도록 서방에서 도와야 한다는 사실과 상당한 고급 기술력을 미국(美國)이 공여했던 사실도 기존 서구인들이 가지고 있던 역사 사실과 다르지 않다. 서양문물을 아시아에서 선도적으로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발전시켜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아시아인들에게 일본을 통해 보여줄 필요성이 충분했다고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도 그렇지만 열도 일본정치인들은 미국인들의 도움이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길정도로 눈치를 많이 본다. 어쨌던 그런 덕분에 세계4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어 잘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이 자랑하던 전자산업은 이미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점령하여 소위 기술속국으로 추락한 것이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이 앞서 나갈 상황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더욱 이러한 기술역조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날 것이며 향후 통일이 되면 일본경제가 앞에서 알짱거릴 수만도 없을 것이다. 미국이 공여한 기술로 우주정거장에 미국, 유럽우주기술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이것도 미국의 적극적인 기술지원이 아니면 일본인들 한국인의 우주기술처지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주기술력이 서구와 대등한 위치까지 간 아시아중국은 미국기술을 수단과 방법을 동원 적극적으로 모사한 덕분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 인류가 필요한 첨단 기술은 미국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열도일본은 과거 일본인척 하겠지만 그로인해 앞으로도 그러한 착각때문에 아시아 각국들에게 엄청난 갈등을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 지난 시간동안 글을 많이 쓰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오랫만에 쓰는 글이라서 그런지 못내 아쉬움이 많다. 못다한 글은 다음 글로 넘기자.[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모델A" rel="tag" target="_blank">모델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안세이 5개국 조약" rel="tag" target="_blank">안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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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나무와 산자나무
****************** 비타민나무와 산자나무 글쓴이:한부울 몽골에 나는 나무 비타민나무가 있다. 이것을 한자로 사극(沙棘, 砂棘)이라 하고 이를 산자나무라 한다. 朝鮮王朝實錄 연산군일기 37권, 연산 6년 3월 1일 乙卯 2번째기사 1500년 명 홍치(弘治) 13년 전라도 감사에게 동백을 조운선에 실어 보내고 보리수 열매가 익으면 진상하게 하다 ○下書于全羅道監司曰: "冬栢木五六株, 各盛盆戴土, 竝載漕船以進。 甫里樹實, 待熟封進。" 전라도 감사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동백(冬柏) 5∼6 그루를 각기 화분에 담고 흙을 덮어 모두 조운선(漕運船)에 실어보내고, 보리수(甫里樹) 열매를 익은 다음에 봉하여 올려보내라."하였다. 위 기사를 보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연산군일기에 나타나는 보리수(甫里樹)가 바로 사극(沙棘, 砂棘)이다. 사극은 모래에 나는 가시나무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이 한 기사만 나오고 보리수(甫里樹)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글쓴이가 조선왕조실록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문제가 이런 현상이 즐비하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보리수나무가 생장되었다고 하면 세종지리지나 그외 다른 기록에도 자세하게 기록되고 나타나야 하지만 이렇듯 감추어버렸다는 것은 숨기려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아메리카대륙만 생장되는 생물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감추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엇때분인지 독자여러분을 아실 것이다. 위 기록에는 보리수 열매를 중히 여겼는지 열매가 익으면 진상(進上)하라 하였다. 다른 자료들을 보면 이 보리수 열매를 징기스칸도 좋아했다고 하였다. 보양제로로 쓰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음직하다. 보리수나무의 열매가 익는 시기가 대체로 9월~10월로 알려진다. 위 기사는 음력 3월 초이니 양력으로 4월 정도가 될 것이니 익으려면 시일이 아직 많이 있다. 그러하더라도 미리 관리들에게 하서 한 것은 그만큼 주요하게 보았던 보리수 열매인 것은 분명하다. 아래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겠지만 현대들어 보리수나무의 열매와 씨앗을 음료, 주스, 잼, 식초, 술, 화장품, 비누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하며 인류에게 유익한 식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산자나무의 열매 맛은 독특한 감귤 맛이 나며, 패션 프루트(Passion Fruit)와 비슷한 상큼한 향이 있고 신 맛이 강하기 때문에 보통 생과일보다는 설탕을 섞은 주스로 마신다고 설명된다. 이제 이 보리수나무를 실펴봄에 있어 먼저 생물학분류체계를 통해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분류체계는 속씨식물문(被子植物門,Angiosperms), (TTS:系統群)진정쌍떡잎식물군(眞雙子葉植物群,Eudicots), 장미군(蔷薇类植物群,Rosids), 장미목(蔷薇目,Rosales), 보리수나무과(科:Elaeagnaceae)이며 전 세계적으로 3속(屬)의 약60종(種)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수나무과(科) 먼저 장미군(蔷薇类植物群,Rosids), 장미목(蔷薇目,Rosales), 보리수나무과(科:Elaeagnaceae) 페밀리를 살펴보자. 이것은 남 유럽산(産)보리수나무의 일종(올리브)으로 알려져 있고 북반구의 온대, 열대아시아와 호주로 남쪽으로 구성되며 특히 해안이나 건조지에 많고, 전 세계적으로 3속(屬)의 약60종(種)가량이 알려져 있다. 위 분포지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에는 북부지역 캐나다 영토 전반에 걸쳐 생장이 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북아메리카대륙은 그것으로 단절되고 유럽과 아시아를 지나 인도차이나반도 중부까지 끝어지고 있는데 아열대 위도를 충분히 커버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아메리카대륙을 기준으로 한다면 위도 13°~15° 카리브해안지역을 포함한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경계선을 그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적으로 아시아 일본종(種)이라고 하는 집착과 잘못된 역사잣대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의 보리수나무과의 일반적인 분포지역을 북반구 온대지역으로 나타난다. 일본종 때문에 아열대지역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보리수나무속에는 특히 올리브나무과(Oleaster)의 야생올리브와 비슷한 형태적구조가 있기때문에 올리브와 혼동되게 하지만 올리브나무는 이 보리수나무와는 다르게 속씨식물문(被子植物門:Magnoliophyta), 쌍떡잎식물강(雙子葉植物綱:Magnoliopsida), 꿀풀목(脣形目:Lamiales), 물푸레나무과(木犀科:Oleaceae)이며 지중해지방이 원산이고 잎이 작고 단단하며 비교적 건조에 강하기 때문에 레바논에서부터 카스피해 남단, 이란 북부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의 지중해 지역에서 널리 재배된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특히 아열대지역에서 유럽남부와 겹쳐지는 종이 존재한다.그러나 보리수나무가 올리브와 계통군자체가 다르다.속씨식물문에는 라틴어 마그노리오피타(Magnoliophyta), 안지오스퍼메(Angiospermae) 공히 쓰이며 1998년부터 속씨식물을 재 분류 발표하면서 Angiosperm Phylogeny Group (APG)의 연구를 통해 분류가 시작되었고 이렇게 통합 도입한 분류체계를 APG II 시스템(2003), APG III 시스템(2009), APG IV 시스템(2016)로 불린다.사실 속씨식물의 기원과 계통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는 것이 많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일반적으로 속씨식물의 특징을 불완전하게 나타내는 무리들은 원시적인 속씨식물로 간주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는 체계역시 불완전하다. 속씨식물은 크게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로 나누어지고 떡잎이 2개 또는 그 이상인 것은 쌍떡, 단지 1개인 것은 외떡이라 하는 단순한 구분이외 여러 가지 계통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함으로 1998년 이전 분류사실과 비교하면 1998년 이후 원천적으로 불완전한 작업에 의해 변질이 많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튼 보리수나무과(科:Elaeagnaceae)의 대부분은 호퇴자(胡頹子)라고 하는 보리수나무속(胡頹子屬:Elaeagnus L.)이 포함되고 이것을 한반도에는 보리수나무, 볼레나무, 보리밥나무, 녹보리수나무, 왕보리수나무 등 1속(屬)6종(種)정도가 분포하고 있다고 알려지지만 한반도[국립생물자원관국가생물종목록]자료를 참조하면 아종(亞種, subspecies)으로 보리장나무(Elaeagnus glabra), 보리밥나무(Elaeagnus macrophylla), 뜰보리수(Elaeagnus multiflora), 통영볼레나무(Elaeagnus pungens), 보리수나무(Elaeagnus umbellata) 정도이고 나머지는 변종(變種:variety)으로 나타나는데 긴보리수나무(Elaeagnus crispa var.longicarpa), 좁은잎보리장나무(Elaeagnus glabra f.oxyphylla), 왕보리수나무(Elaeagnus umbellata var.coreana), 민보리수나무(Elaeagnus umbellata var.parvifolia), 녹보리똥나무(Elaeagnus x maritima), 왕볼레나무(Elaeagnus x nikaii), 큰보리장나무(Elaeagnus x submacrophylla)이다.특이한 것은 한반도에 자생하는 왕보리수나무라고 알려지는 종은 아종명에 'coreana'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일본을 근원지로 하는 일본은(銀)베리(Elaeagnus umbellata Thunb.-Japanese silverberry)종의 변종으로 나타나고 이 종의 변종을 영어자료에 보면 'Elaeagnus umbellata C.P.Thunb. ex A.Murray', 'Elaeagnus umbellata subsp. umbellata Servett.', 'Elaeagnus umbellata var. umbellata' 로 나타나 있지만 그 속에 왕보리수나무(Elaeagnus umbellata var.coreana)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력자체를 찾을 수 없으며 아종(亞種)에도 못 끼이는 변종(Variety)이라는 이야기다. COREA 란 명칭은 동서양을 포괄하여 인류가 처음 범국가적으로 만든 명칭으로 역사에서는 언제나 신성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CORE 그 자체이다. 이토록 위대한 본래의 이름이 한반도 역사가 만들어지면서 엉뚱하게 쪼그라들고 결국 온전함이 사라진 것이다.현재 식물학분류역사가 이야기 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나타나는 보리수나무 기사가 참으로 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또한 식물학분류체계가 말하는 보리수나무과(科:Elaeagnaceae)내 일본종(種)이라고 하는 이 학명이 여기도 저기도 있어 비일비재하지만 위 분포지도가 알려주듯이 본래 근원지 분포지도에는 열도뿐만아니라 한반도조차 근원지 표식 자체가 없는 해괴함이 존재한다. 胡頹子科学分类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TTS:계통군):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蔷薇类植物 Rosids 目: 蔷薇目 Rosales 科: 胡頹子科 Elaeagnaceae Juss.1789 模式属 Elaeagnus L.1753 보리수나무과에는 전 세계적으로 3속(屬)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보리수나무속(胡頹子屬:Elaeagnus L.)1753, (2)비타민나무속(沙棘屬:Hippophae L.)1753, (3)스헤페르디아속(水牛果屬:Shepherdia Nutt.)1818 그것이다. Thomas Nuttall (1786–1858), English botanist and zoologist 위 스헤페르디아속의 학명은 영국식물학자이며 동물학자인 토마스 누탈(Thomas Nuttall:1786–1858)이 명명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영국 잉글랜드 프레스톤(Preston)에서 1786년에 태어났다 하고 22세 때인 1808년부터 미국에서 살았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1810년 오대호를 여행하고 1811년 미주리강를 답습하였으며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에서 인디언 아리카라족과 접촉을 하였으며 그해8월에 세인트 루이스(St. Louis)로 돌아 왔다. 그렇지만 그들이 채집은 표본을 분실하였다고 하였으며 때문에 누탈이 채집한 식물은 알려지지 않아 재차 표본을 수집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했다.1812년 미영전쟁 때문에 영국으로 귀환했다고 하였다.1815년에 미국으로 돌아 왔고 1818 년에 출판 된 '북미식물의 군들(Genera of North American Plants)'을 수집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818년부터 1820년까지 알칸소(Arkansas)와 Red rivfer(레드 리버)를 따라 여행하여 과거 영국이 있었다고 보이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돌아가 1819 년에 여행저널을 알칸소에서 출간했다. 1823년에는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의 부교수로 임명되고 1825 년에 하버드 대학식물원 관장이되었다. 표본을 분실했다고 하지만 식물학의 시조(始祖) 린네(Carl Linnaeus:1707-1778)보다 늦은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근원식물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으나 북아메리카대륙만 보면 그가 이른 것이 분명하다. 린네는 유럽대륙을 기준으로 표본을 수집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지만도 않다. 보리수나무과(科:Elaeagnaceae)의 식물들은 일반적으로 가시(棘:thorn)가 있으며, 작은 잎이나 작은 비늘로 덮여있다. 가시가 있으니 몽골(蒙古:Mongolia)에서 사극(沙棘, 砂棘)이라 칭한 것의 형태적의미와 일치한다. 대부분의 종(種)은 건조도(乾照度)가 연평균 강수량이 250㎜ 또는 그 이하인 건조한 서식지에서 발견되는 건생식물(乾生植物:xerophytes)이고 몇몇은 염생식물(鹽生植物, halophyte, halophilous plant)로 토양 염분의 높은 수준을 견뎌낸다 한 것을 보면 해안지역과 염수지역에서도 자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보리수나무과(Elaeagnaceae)의 대부분은 본래 북반구(北半球:northern Hemisphere)온대지역이 원산이며 남부(南部) 열대성(熱帶性:tropical)은 일본종이라고 하는 보리수나무(菩提樹:Elaeagnus umbellata)와 보리밥나무(大葉胡颓子:Elaeagnus macrophylla)을 포함할 수 있다. 보리밥나무(Elaeagnus macrophylla)는 주로 낙엽 또는 상록수 관목으로 자라는 장미목(薔薇目:Rosales)계통의 식물군(群)이기 때문에 대체로 온대지역의 온화한 곳에서 자란다. 그러나 분포지는 북유럽 스웨덴(Sweden) 팔룬(Falun)지역으로 나타기도 한다. 매력적인 단풍, 가을과 겨울에 싱싱한 오렌지 열매를 먹을 수 있는 비타민나무 혹은 산자나무(Hippophae rhamnoides:sea buckthorn)를 씨벅톤이라 한다. 씨벅톤의 벅톤(buckthorn)은 가시가 많은 나무로 해석하고 있어 한자로 사극(沙棘, 砂棘)과 같다. 보리수나무과(科:Elaeagnaceae)종(種)의 과일은 일반적으로 식용 가능하고 예를 들면 스헤페르디아 아르겐테아(Shepherdia argentea-silver buffalo berry) 실버 버팔로베리 과일은 젤리로 사용되며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지역에서 설탕과 함께 건조된다. 스헤페르디아 케나덴시스(Shepherdia canadensis-russet buffalo berry)러셋 버팔로베리란 열매는 건조하거나 훈제했을 때 에스키모의 음식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산자나무, 히포페 람노이데스(Hippophae rhamnoides)의 열매는 프랑스에서는 소스(sauce)로 사용되고 다른 곳에서는 젤리(jelly)로 만들어지며 나무는 결이 고와 선반용으로 사용된다 한다. 일본관목(Japanese shrub)이라 하는 뜰보리수(Elaeagnus multiflora-cherry elaeagnus)는 체리 엘레아구누스라 하는데 이 열매는 저장식품(잼)으로 사용되었고 알코올음료에도 사용된 것으로 정리된다. 하여튼 열도일본의 종명이 아종 전반에 걸쳐 이렇게도 많이 사용되었어야 했던 점은 근대사의 미스테리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 종을 보면 대호퇴자(大胡頹子)라고 하는 왕볼레나무(Elaeagnus nikaii Nakai)일본, 실버톤이라고 하는 일본종 엘레아구누스 푼겐스(Elaeagnus pungens Thunb.(Silverthorn; Japan)도 일본, 일본실버베리라고 하는 Elaeagnus umbellata Thunb. (Japanese silverberry or autumn-olive; eastern Asia)도 일본을 근원지로 하고 있다. 보리수나무속(胡頹子屬:Elaeagnus L.)1753 이제부터 보리수나무과에서 차례차례로 속명들을 살펴본다. 먼저 보리수나무속(屬)에는 50–70종(種:species)이 있다. History and Etymology for ElaeagnusNew Latin, from Greek elaiagnos, a kind of willow, from elaia olive, olive tree + agnos chaste tree. 속명(屬名) 엘레아구누스(Elaeagnus)는 그리스어(Greek)로 elaia(έλαια)에서 "올리브(olive)"를 의미하고, "Agnos"는 "유럽 남부산(産)의 마편초속(屬)의 관목(Chaste Tree)"를 의미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속명을 명명한 것이 유럽대륙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세세히 살펴보면 거의가 동아시아 일본으로 나타나고 기본적으로 아시아대륙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북미대륙을 근원으로 하는 것은 바로 엘레아구누스 코뮤타타(Elaeagnus commutata)이다. 미국실버베리(American silverberry)혹은 늑대버드나무(wolf-willow) 버팔로베리(buffalo berry)라 하는데 북미 서부 및 아한대(亞寒帶)가 근원지이고 알래스카남부에서 브리티시 컬럼비아, 동부퀘벡까지 유타남부에서 미국중서부 사우스다코타 및 서부 미네소타 등 대개 초원, 초원 또는 삼림 지대의 건조한 습한 모래 및 자갈 토양에서 자란다. 이 종은 뇌조(雷鳥), 참새아목(Passeri)에 속하는 노래하는 조류의 명금(鳴禽:Passeri Linnaeus, 1758 ), 사슴, 엘크 식량으로 사용된다. 사막보리수나무 사조(沙棗) Elaeagnus angustifolia L. (Oleaster, Russian silverberry or Russian-olive; western Asia)] 북미 유일의 고유종 엘레아구누스 코뮤타타 Elaeagnus commutata Bernh. ex Rydb (American silverberry or wolf-willow; North America). 보리장나무 Elaeagnus glabra Thunb. (eastern Asia) 보리밥나무 Elaeagnus macrophylla Thunb. (eastern Asia) 뜰보리수 Elaeagnus multiflora Thunb. (Cherry silverberry or Gumi; eastern Asia) 통영볼레나무 Elaeagnus pungens Thunb. (Silverthorn; Japan) 보리수나무 Elaeagnus umbellata Thunb. (Japanese silverberry or autumn-olive; eastern Asia). 위에서 열거한 주요한 몇 종(種)을 살펴 볼 수 있지만 대다수의 종(種)은 아시아의 온대 및 아열대 지방을 근원지로 하고 있다. Elaeagnus triflora 는 아시아 남부에서 호주 북동부이다. 아시아 종(種)의 하나 인 엘레아구누스 안구스티포리아(Elaeagnus angustifolia)는 사막보리수나무(沙枣:Elaeagnus angustifolia)라 하고 다른 명칭으로 은류(銀柳), 향류(香柳), 계향류(桂香柳)이라 하며 이를 서양에서는 러시아올리브라고 하는데 올리브[olive (Olea europaea)]와 유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올리브와는 다르다. 科学分类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蔷薇类植物 Rosids 目: 蔷薇目 Rosales 科: 胡頹子科 Elaeagnaceae 属: 胡頹子屬 Elaeagnus 种: 沙枣 E. angustifolia 二名法 Elaeagnus angustifolia L. 위 분류체계를 보다시피 서양 식물학의 시조(始祖) 린네(Carl Linnaeus:1707-1778)가 1753년 경 명명한 학명 Elaeagnus angustifolia L 이를 사막보리수나무 또는 사조(沙棗)라 한다. 린네가 명명한 대표적인 학명으로 러시아 올리브(Russian olive),은(銀)베리(silver berry), 오레스터(oleaster), 페르시아 올리브(Persian olive)또는 야생 올리브(wild olive)라고 불리고 혹은 일반적으로는 파키스탄에서 센호르(senjhor) 또는 신조르(sinjhor), 아프가니스탄의 신지드(sinjid), 아제르바이잔의 Iydə, 이란의 센예드(senjed), 아르메니아의 셔샤(p'shat (շշատ), 인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메갈라야(Meghalaya)에 있는 Sohshang 등으로 불리는 엘레아구누스(Elaeagnus)의 종(種)의 근원지는 서부 및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러시아 남부와 카자흐스탄, 터키, 이란 및 파키스탄이라고 나타난다. 그러나 현재는 북미(North America)에서 도입(外來. 歸化) 종(種)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 학명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이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북아메리카대륙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외 한반도에서 보리수나무(甫里樹)라고 하는 종(種) 학명 엘레아구누스 움베라타(Elaeagnus umbellata)가 있다. 이 종(種)은 일본 은(銀)베리(Japanese silverberry) 또는 가을올리브(autumn-olive)라고 하는 동아시아지역분포를 말하고 있지만 거의 일본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학명 명명자는 일본의 린네라고 불리는 스웨덴식물학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가 명명하였는데 자가 명명한 것은 거의가 동아시아대륙과 열도일본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위 분포지도들을 보면 일본열도에는 표시조차없고 오히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가 주요 분포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툰베리는 아시아대륙 일본열도에서 표본을 채집했던 것은 사실일까? 절대 아니다. 그곳은 위 북아메리카대륙 분포지도를 보듯이 동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곳이 일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스헤페르디아속(水牛果屬:Shepherdia Nutt.)1818 3종(種)의 속명(屬名) 중 스헤레프디아속(屬)은 일반적으로 버팔로베리(buffaloberry)라고 불리는데 보리수나무과(科:Elaeagnaceae)계통의 작은 관목으로 알려지고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영국식물학자이며 동물학자인 토마스 누탈(Thomas Nuttall:1786–1858)이 명명한 속이다. 이 식물은 북아메리카의 북부와 서부가 근거지로 되어 있다. 이속명에는 세가지의 종(種)이 있다. a) Shepherdia argentea(Pursh) Nutt.-silver buffaloberry 은 버팔로베리 프레드릭 퍼쉬(Frederick Traugott Pursh:1774-1820) was a German–American botanist b) Shepherdia canadensis(L.) Nutt.-Canada buffaloberry 캐나다 버팔로베리 c) Shepherdia rotundifolia Parry-roundleaf buffaloberry, endemic to southern Utah and northern Arizona 은 유타(州)남부(southern Utah) 및 애리조나 북부(northern Arizona)지방 특유의 둥근 잎(Having round leaves)를 가지고 있다. 이 속명에 나나타는 종들은 모두가 북아메리카대륙을 분포지로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열매는 하얀 점이 조금씩 있고 어두운 붉은 색상이며 촉감이 거친 것이 나무들과 관목에 발견된다. 이 스헤레프디아속은 쓴맛이 나는 열매를 가지면 이 열매는 곰의 먹이로 이용되는데 전하는 것에 따르면 겨울 동안 지방저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북미산(産) 버팔로베리(Buffaloberries)는 날개물결가지나방(Ectropis crepuscularia-Shepherdia canadensis)과 북아메리카대륙 미시간과 온타리오호수를 포함한 5대호에서 발견되는 (North America, from the Great Lakes northward, including Michigan and Ontario)얼룩 고치 애벌레나방(Coleophora elaeagnisella)를 포함한 나비목(目)(Lepidoptera species)의 유충에 의해 식용식물로 완성된다고 알려지고 있는 것도 근원적으로 이 속명의 종들은 모두가 북아메리카대륙을 근원지로하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비타민나무속(沙棘屬:Hippophae L.)1753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비타민나무 즉 산자나무속(屬)을 살펴볼 차례이다. 이 속명(屬名) 히포페(Hippophae)어원을 보면 동양역사와 상당히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태고 적에 씨벅톤(sea buckthorn)의 어린 잎과 가지를 말의 체중 증가와 외모의 광택이 빛나게 해주는 보양제로 말에게 먹였기 때문에 그리스어(Greek)로 히포(hippo:horse)(말)과 파오(phaos:shining)(빛나는)의 합성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속명은 말에게 광택을 준다는 의미가 있고 잎사귀 아래부분에는 은색이 있어 말의 눈을 밝게 하거나, 아래를 빛나게 하는 치료제로 사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스신화(Greek mythology)에 등장하는 날개를 가진 말인 페가수스(Pegasus)가 선호하는 식량이 씨벅톤(sea buckthorn)이라 한 것이다. 서양못지 않게 이러한 비슷한 이야기가 동양에도 전해지고 있는데 티베트와 내몽고 지역에 있는 몽고인들이 이 열매를 즐겨 먹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13세기, 칭기즈칸(成吉思汗:Chingiz Khan)이 주요하게 여기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 잘 조직된 군대, 둘째, 엄격한 훈련 셋째, 몽골어로 차차르간(ЧАЦАРГАНА)이라고 불리는 이 산자나무(비타민나무)라고 알려진다. 이를 몽고에서는 사극(沙棘, 砂棘)이라 한 것이고 차차르간(ЧАЦАРГАНА)이 바로 씨벅톤(sea buckthorn)이다. 당시 몽고 군인들은 치열한 전투로 지친 말들을 산자나무숲에 방목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말들이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져 살아 돌아왔다고 하며 이러한 산자나무의 특성 때문에 잎과 가지를 말에게 먹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sea buckthorn a thorny Eurasian shrub, Hippophaë rhamnoides, growing on sea coasts and having silvery leaves and orange fruits: family Elaeagnaceae Buckthorn may also refer to: a) 갈매나무과 갈매나무속 Rhamnaceae, the buckthorn family b) 감탕나무과 서구서리(欧鼠李:Frangula alnus) or alder buckthorn Hippophae or sea-buckthorn sea buckthorn이라는 이름은 (Rhamnus, family Rhamnaceae)가족에있는 관목 또는 작은 나무의 속buckthorns 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위 자료의 설명을 보면 일단 유라시아의 관목이라 했다. 씨벅톤의 근원지가 유라시아라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보리수나무의 근원종이 이 속명과 가깝다고 한다면 그리고 수많은 비타민을 가지고 있는 나무열매가 이 종이 확실하다면 이 속명도 북아메리카대륙 북부를 근원지로 했음을 충분하게 알 수가 있다. 위 자료에도 알 수 있듯이 분포지도에 노란 점이 표식하는 곳은 캐나다 전 지역이다. 영어자료에는 씨벅톤(sea buckthorn)이라 하여 바다(sea)를 붙인 이유로 a)갈매나무과(Rhamnaceae)갈매나무속 그리고 b)감탕나무과 서구서리(欧鼠李:Frangula alnus)의 벅톤(buckthorn)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으며 산자나무 즉 비타민나무를 또한 씨벅톤 이외 샌드톤(sandthorn), 셀우톤(sallowthorn), 또는 씨베리(seaberry)라고도 하였다는 사실을 자료에서 말하고 잇다. 위 설명에는 이것과 다른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씨(sea)를 붙인 것은 바로 해안에서 자라고 은 빛의 잎사귀와 오렌지 열매를 가진다고 하고 있다. 희랍전설에서 잎사귀 아래부분에는 은색이 있어 말의 눈을 밝게 하거나, 아래를 빛나게 하는 치료제로 사용되었다고 한 사실과 거의 일치한다. 그것 이외에도 사용처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씨벅톤 오일(Sea Buckthorn Oil)은 습진, 여드름, 코의 모공이 커지는 로세셔(rosacea), 화상, 상처 등의 국소 치료와 젊은 피부의 색조와 질감을 보존하기 위한 전통적인 미용관리 방법으로 오랫동안 사용돼 왔다 하였고 서양에서 말하는 말의 사료용이나 동양에서 말하는 말의 사료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동일한 이야기로써 근원적으로 이 산자나무(비타민 나무)에는 다양하고 풍부한 비타민 A, C, D, E, B, P, K 등과 여러 아미노산이 함유되어 있고 그 열매의 추출물에는 6~7% 정도의 오메가3, 오메가6 등의 40여종의 불포화 지방산 기름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의 주요 성분은 '비타민 E'라고 설명하고 있다. 말의 사료로 사용되던 잎과 열매는 비타민이 풍부한데 특히 열매에는 C, E, K의 함유량이 높다고 알려지며 '비타민 C'의 경우 재배지에 따라 편차가 큰 편인데 적게는 200mg에서 많게는 2000mg 정도로 보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론 450~600mg 정도를 함량하고 있다. 이러한 영양제가 함유되었기 때문에 노화방지와 간질환, 혈액순환에 효과가 좋으며 최근 연구 결과 항암 효과도 상당히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어 징기스칸이 왜 이를 복용하였는지도 알 수가 있고 서두에 게시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연산군일기에도 나타나지만 연산군이 이 보리수의 열매를 즐겨 먹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산자나무(비타민 나무)열매의 표면은 갈색이고 윤기가 있으며 중간에 도랑이 한 개 패어져 있으며 껍질은 단단하고 종자 알은 유백색에 기름기가 있고, 맛은 약간 시큼하고 떫다고 되어 있다. 산자나무(비타민 나무)열매의 수확 시기는 4, 9, 10월라고 알려지고 참고로 1톤의 열매에서 약 670㎏ 의 기름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진다. 또 다른 자료를 보면 이 산자나무(비타민 나무)열매의 비타민 함량은 과일 중에서 최고로 사과의 200~800배 정도로 매우 높으며, 사포닌 함유량도 인삼의 4배나 된다고 알려진다. 또한 비타민 나무의 잎과 열매에는 칼슘, 철분 등 수 십여 종의 미네랄과 자일리톨과 같은 천연당, 플라보노이드, 카포테노이드, 엽산, 폴리페놀, 유기산, 카테킨 등의 다양한 천연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아래 도표 [Table 1]에 잘 나타나 있다. 산자나무 주요 종(種) (1)棱果沙棘 Hippophae goniocarpa Y.S. Lian & et al. ex Swenson & Bartish 네팔, 중국의 산과 비탈진 지역 (2)沙棘 Hippophae rhamnoides L (ITS 잔존 종) (3)柳葉沙棘 Hippophae salicifolia D. Don 히말리야 (4)西藏沙棘 Hippophae tibetana Schltdl 티벳 (ITS 잔존 종) (5) Hippophae gyantsensis (ITS 잔존 종) 최종 히포페(Hippophae) 속명 중 5종의 근원지 분포지도를 살펴본 결과 (2)번 종(種) Hippophae rhamnoides L 이 사극(沙棘)이라 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을 산자나무 또는 비타민나무라고 최종 판단할 수 있다. ITS(Internal transcribed spacer)는 DNA의 내부전사되는 역전류기 부분, 두 종류의 리보솜 RNA(16S rRNA와 23S rRNA)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염기서열인데 이 연구에 따르면 유전자가 3개의 단세포 층으로 분할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H. tibetana 과 아종(H. rhamnoides ssp)을 제외한 H. rhamnoides, gyantsensis(=H. gyantsensis)를 잔존 종(種)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라틴어 어원이 알려주고 있는 사실이라던지 또는 몽고 징기스칸이 아끼던 나무열매등을 살펴본 결과 산자나무(비타민나무)는 학명 Hippophae rhamnoides L.종(種)으로 나타난다. 이 히포페 람노이데스(Hippophae rhamnoides)는 북반구의 온대 및 아북극(亞北極)지역에서 넓은 범위의 원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북아메리카대륙에는 1930년대에 캐나다에서 귀화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캐나다가 이 보리수나무과의 산자나무의 근원지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씨벅톤(sea buckthorn)의 영양 및 의약 가치는 북아메리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세기 동안 유라시아에서 알려지고 악용되었다 하였고 1940년대부터 과학자들이 열매, 나뭇잎, 나무 껍질에서 발견되는 생물학적 활성 물질을 조사하기 시작한 이래 씨벅톤(sea buckthorn)산업은 러시아에서 가장 번창했다고 알려진다. 왜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몽고제국의 역사를 북아메리카대륙에 놓고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식물은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된 것이 사실인데 러시아인들은 우주 비행사가 사용하는 제품을 개발했으며 우주 방사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크림으로도 개발했고 1950년 이후 냉전 기간 동안 러시아와 동독의 원예사들은 영양가가 더 높고, 열매가 더 크며 수확시기가 다른 여러 가지 품종을 개발했다고 알려진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를 못본척했다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하지만 이것과 다르게 지난 20년 동안 실험작물로만 미국 네바다(Nevada)1종, 애리조나(Arizona)1종, 그리고 캐나다의 여러 주에서 재배되었다는 사실만 현재 자료에는 알리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 몽골, 독일에서는 털갈이가 없거나 거의 흉벽이 없는 씨벅톤(sea buckthorn)의 재배 품종이 재배되었지만 북미(北美)에서는 이러한 재배 품종이 없다고 알려지는 것도 오리엔탈 문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sea buckthorn (Hippophae rhamnoides. L. spp. sinensis), (Hippophae rhamnoides L. spp. turkestanica) 또한 위 두 종(種)은 씨벅톤(sea buckthorn) 즉 산자나무(비타민나무)의 원종의 아종(亞種, subspecies)으로 이러한 분석에서 Hippophae rhamnoides 분포지가 본래 트루크족들이 거주한 곳 트루크(Turks)땅이 아닌가 판단할 수 있고 그 주위에 역사적으로 중국(sinensis)도 존재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게 해주고 있으며 더 하여 ITS 연구에 잔존 종으로 나타나는 "Hippophae tibetana" 는 현재 모든 자료에서 아시아대륙 히말리야산맥을 근원으로 하지만 이것 역시 잘못된 이야기다. 특히 현재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신중국분포지역에서 보면 동경 75도~121도 북위 27~48도 사이의 주로 청정고원과 내몽골 고비고원에 90% 로 집중되어 있으며 해발 450m~5,000m의 범위내에서 생장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그곳은 이미 본 블로그 글(2013.09.15) "안식향(安息香)으로 본 삼한(三韓)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48871"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 지아코모 가스탈디(Giacomo Gastaldi :1500–1566)가 1546년에 제작한 지도(Universale Cosmographo)에 놀랍게도 티벳이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종정리 전술한 바와같이 보리수나무과(科:Elaeagnaceae)에는 전 세계적으로 3속(屬)의 약60종(種)이 존재한다.3속(屬)은 보리수나무속(胡頹子屬:Elaeagnus L.)1753, 비타민나무속(沙棘屬:Hippophae L.)1753, 스헤페르디아속(水牛果屬:Shepherdia Nutt.)1818 이다. 물론 명명일자를 보면 (3)스헤페르디아속이 제일 나중에 명명된 것이며 앞에서 분포지도 자료에서 살펴보았듯이 (1)보리수나무속은 현 분류체계에서 전부 동아시아대륙, 유라시아, 러시아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최종 산자나무라 알려진 비타민나무는 (2)비타민나무속으로 알려진 히포페(Hippophae L) 속(屬)라고 판단할 수 있다. 연산군일기 37권, 연산 6년 3월 1일 기사에는 "동백(冬柏) 5∼6 그루를 각기 화분에 담고 흙을 덮어 모두 조운선(漕運船)에 실어보내고, 보리수(甫里樹)열매를 익은 다음에 봉하여 올려 보내라."한 기사를 다시 풀이를 하면 당시 조선에서는 분명 이 산자나무(비타민나무)라고 하는 보리수가 자생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물론 질이나 양적인 문제가 있겟지만 자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중앙정부에서 보리수 열매가 익을 때를 기다려 임금에게 진상(進上)하라고 전라도 감사에게 하서(下書)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것이 자생한 곳은 대체로 함경도와 평안도 정도라고 판단되는데 왜 전라도 감사에게 이러한 명령을 하달한 것일까. 보리수(甫里樹)열매는 대체로 북부지방의 특산물이지만 당시 연산군때 조운선(漕運船)을 관리하는 곳은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가 아닌가 한다. 이 조운선은 조세미(租稅米) 혹은 특산물을 실어 나르던 선박인데 거대한 강 하류에서 이 선박을 통제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전라도는 남쪽이 거의 확실하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관찰하면 조선 북서지역의 미주리강(Missouri)에서 조운선에 싣고 대도시 세인트루이스로 들어가던가 미시시피강(Mississippi)를 상류로 올라가던가, 아니면 하류로 내려가든가 얼마든지 조운선 방향 이동선을 상상할 수가 있다.영문자료를 보면 히포페 람노이데스(Hippophae rhamnoides)의 분포지는 유럽과 아시아의 추운 온대 지방이라 하였고 정확하게 위도(緯度:latitude)는 27°~69° 위이며 경도(經度:longitude)는 7° EW와 122° EE라고 하여 아시아대륙을 기준으로 삼았다. 핀란드, 폴란드, 독일의 발트해 연안, 스웨덴의 보스니아 만, 영국 연안,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인도 북부 지역, 네팔, 부탄 등의 히말라야 지역, 중국 북부 지역,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래봤자 아시아대륙이지 북아메리카대륙은 아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북아메리카대륙은 아시아역사에서는 고스란히 빠진다. 생각해 보면 이 산자나무가 한반도 국내에선 2006년 강원 지역을 중심으로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 또한 조선왕조실록과 얼마나 좁힐 수 없는 엄청난 괴리를 가지고 있는 가를 알 수가 있다. 연산군시대에 존재한 보리수나무가 전부 멸종되어 600년이 지나고 다시 2006년 강원지역 중심으로 재배되어야 했던 역사는 과연 어떤 역사인가. 그렇지만 근원지가 이렇듯 진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모든 자료에서 산자나무 전체 아시아대륙을 분포지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자체가 어찌 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식물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로써 나타나 약2억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1,200여 년 전부터 아랍과 몽골지역에서 음료와 술 등으로 사용된 나무 열매는 바로 동양한문 사서기록에 나타나는 사극(沙棘, 砂棘)이라고 하는 보리수(甫里樹)이다. 이 나무는 징기스칸과 몽고의 귀족들사이에 자양 강장(滋養强壯)의 비약(祕藥)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도 위에서 밝혀본 특별하게 함유된 각종 영양제를 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징기스칸은 이 열매를 장거리원정시 항상복용하였다고 알려지는데 그 열매가 익어 식용가능했던 몽고 땅은 과연 어딜 말할 것인지 살펴야 할 문제의 핵심이다. 본 블로그 글 "어르쇠 흑요석(黑曜石)과 아라사(愕羅斯)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1 "에서 러시아라고 알려진 대비달자라고 하는 아라사(愕羅斯)는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몬태나(Montana)주의 가디너(Gardiner)마을 옵시디언 절벽(Obsidian Cliff)에서 흑요석(黑曜石)을 채취하던 종족이며 그곳 주위에 몽고종락(蒙古種落)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본 블로그의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에서 밝힌 로키산맥을 발원지라고 하는 미주리강(Missouri river)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포괄적으로 흑룡강이라고 결론을 지었던 사실도 참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나타나는 보리수나무의 근원 분포지는 북부지역모두는 선 함경도일 가능성이 높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몽골" rel="tag" target="_blank">몽골</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히말리야" rel="tag" target="_blank">히말리야</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징기스칸" rel="tag" target="_blank">징기스칸</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함경도" rel="tag" target="_blank">함경도</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조운선" rel="tag" target="_blank">조운선</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씨벅톤(sea buckthorn)" rel="tag" target="_blank">씨벅톤(sea buckthor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산자나무(비타민나무)" rel="tag" target="_blank">산자나무(비타민나무)</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사극(沙棘)" rel="tag" target="_blank">사극(沙棘)</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티벳(Tibet)" rel="tag" target="_blank">티벳(Tibet)</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보리수나무속(胡頹子屬:Elaeagnus L.)" rel="tag" target="_blank">보리수나무속(胡頹子屬:Elaeagnus L.)</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비타민나무속(沙棘屬:Hippophae L.)" rel="tag" target="_blank">비타민나무속(沙棘屬:Hippophae L.)</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흑요석(黑曜石)" rel="tag" target="_blank">흑요석(黑曜石)</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라사(愕羅斯)" rel="tag" target="_blank">아라사(愕羅斯)</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히포페(Hippophae)" rel="tag" target="_blank">히포페(Hippophae)</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보리수(甫里樹)" rel="tag" target="_blank">보리수(甫里樹)</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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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북쑥과 새발쑥 그리고 대가뭄
************************ 다북쑥과 새발쑥 그리고 대가뭄 글쓴이:한부울 고사(古史)로 본 다북쑥일본과 다북쑥열도일본과 다북쑥의 지형모순조선 삼남지방 대가뭄다북쑥과 새발쑥의 구분 발견1809년 대가뭄발생 지역은 캘리포니아와 멕시코마무리 고사(古史)로 본 다북쑥 제목에서 다북쑥과 대가뭄이라 한 것은 서로 상호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주제이며 다 아다시피 다북쑥은 구황식물로 유명하고 가뭄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굶주림을 제공하는 무서운 자연재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원초적으로 쑥은 신성한 식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바로 단군신화를 이야기 하는 것인데 인간화되는 곰이 쑥 1다발과 마늘 20개를 먹고 사람으로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쑥은 신비스러운 약효를 지닌 식물로 예로부터 귀중히 여겨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쑥은 그렇게 신비스러운 곳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바로 구황(救荒) 즉 자연재해에 의한 기근을 해결해주는 식물로 범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종실록 152권, 지리지(地理志) 황해도(黃海道)편 기록에 지방토산 공물[貢]인 다북쑥을 호초(蒿草)라 하였는데 이것은 [後漢AD25~221]‘蓬蒿草莱 借指草野’<後漢書·文苑傳下·邊讓>의 궁벽한 시골 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써 다북쑥과 무더기로 자란 잡초의 대한 준말이라고 설명되는 것이데 구황에 대한 식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다북쑥은 봉애(蓬艾), 봉호(蓬蒿), 쑥, 애초(艾草)라 하며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특성으로 하는데 봉(蓬)은 무더기를 의미하는 한자이다. 풀 한 포기 먹을 것이 없다는 오매(烏昧)상태에서도 유일하게 무더기로 자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식용할 수 있는 식물로 제공된다는데 옛사람들에게 애용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 경오(1450) 10월 10일(경진) 전 현감 이운경이 책지의 폐단에 대해 상서하다 예조에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前縣監李云卿上書曰:乃下傳旨于禮曹曰: "前此一年, 進上各色冊紙, 慶尙道六千五百卷, 全羅道四千五百卷, 忠淸、江原道各二千卷。 自今每年, 慶尙道進麰節、柳木紙各二千卷, 全羅道蒿精、柳木紙各二千卷, 忠淸道麻骨紙一千卷, 江原道柳木紙一千卷, 其餘竝皆蠲減。" “이 앞서 1년에 진상(進上)하는 각색(各色) 책지(冊紙)는 경상도에서 6천 5백 권, 전라도에서 4천 5백권, 충청도ㆍ강원도에서 각각 2천 권인데, 이제부터 매년 경상도에서 모절지(麰節紙)ㆍ유목지(柳木紙) 각각 2천 권, 전라도에서 호정지(蒿精紙)ㆍ유목지(柳木紙) 각각 2천 권, 충청도에서 마골지(麻骨紙) 1천권, 강원도에서 유목지(柳木紙) 1천 권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아울러 모두 감면하도록 하라.”하였다. [주]호정지(蒿精紙) : 책지(冊紙)의 하나. 다북쑥을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인데, 전라도에서 많이 났음.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의 기사에서 보면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전라도 지역에 다북쑥이 많아 다북쑥을 원료로 만든 종이가 바로 호정지(蒿精紙)라 한 것인데 이를 1년에 진상(進上)하는 물목에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세종지리지에는 공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전라도(全羅道)지방에 다북쑥이 상당량이 자생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시경》 소아(小雅)편에, 녹명식평[鹿鳴食苹]라 한 것도“사슴들이 울며 다북쑥을 뜯고 있네”라고 한 것이며 친구와 화락(和樂)하게 지냄에 비유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임금이 신하를 대접함이며 청청자아 재피중아 개견군자 악저유의[菁菁者莪 在彼中阿 旣見君子 樂且有儀]는 “무성하고 무성한 새발쑥이여! 저 언덕에 있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즐겁고 예의(禮儀)가 있도다.” 라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하고 있는 것도 다북쑥과 새발쑥은 공통적으로 무성하게 자라는 식물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다산이 다산시문집에서 말한 새발쑥은 결코 다북쑥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는데 다북쑥과 새발쑥은 비슷하지만 구분이 잘 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구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흰쑥(白艾)이라는 형태적인 문제가 있다. 다북쑥은 일본사람들이 거주하는 땅에서 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일본인들에게 친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이 그의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라도 강진으로 들어온 서양일본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 자라는 다북쑥인줄 알고 캐고 캐지만 그것은 새발쑥이라 한 사실은 일본인들은 새발쑥을 잘 구분할 수 없었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 새발쑥에 대한 기록이 우리에게 남아 전달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한반도 사람역시 열도일본인 상식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왜 다산이 분명코 구별이 필요하다고 한 사실을 우리나라 생물학자들은 간과하고 자료조차 만들지 않는 것일까? 무슨 문제가 분명 존재한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과 다북쑥 일본인들은 새발쑥과 비슷한 다북쑥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일본인들은 이른 봄에 나오는 어린순으로 국을 끓여 먹고 이것에 봄을 느끼기도 하며, 쑥을 덖어 차로 마시기도 하며 떡이나 쑥떡을 만들어 먹기도 하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생활방식과 다르지 않다. 다북쑥을 다른 명칭으로 이호(伊蒿), 봉애(蓬艾), 괴호(魁蒿)로 불리는데 일본인들은 그냥 봉(蓬) 또는 봉호(蓬蒿)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특성적으로 무더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일본 식물분류체계에 나타나는 다북쑥에 대한 자료이다. ヨモギ(蓬、学名:Artemisia indica var. maximowiczii)キク科の多年草。 別名モチグサ(餅草)、エモギ、サシモグサ、サセモグサ、サセモ、タレハグサ、モグサ、ヤキクサ、ヤイグサ。 英語ではJapanese mugwortとも呼ばれるが英語のmugwortとは異なることがある。 요모기(蓬;다북쑥)는 다북쑥을 칭하는 일본어이고 국화과의 다년초, 일명 모지구사(병초(餠草), 쑥떡재료) 에모기, 사시모구사, 사세모구사, 사세모, 타레하구사, 모구사, 야키쿠사, 야이구사 등으로 불리며 영어로는 일본쑥(Japanese mugwort)라 하지만 다르게는 쑥(mugwort)이라하고 쓴나무(Wormwood)라고도 한다. 이것을 신중국(新中國)에서는 5월에 자란다고 오월애(五月艾(原变种)라 하고 그냥 보편적으로 애[艾(名医别录、台湾植物志)],야애호[野艾蒿(植物名实图考)],생애(生艾)、닭다리 잎을 가졌다고 계각애[鸡脚艾(福建)],무더기 초봉[草蓬(台湾)],흰쑥이라 하여 백호[白蒿(四川)],흰쑥 백애[白艾(浙江)],검은 쑥 흑호[黑蒿(云南)],좁은 잎의 협엽애[狭叶艾(湖南)],여엽[艾叶(广西)],지엽애[指叶艾(湖北)],가란-가송“卡蘭-加松”(台湾泰雅族语名)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분류(分類)표 階級なし : 被子植物 Angiosperms 階級なし : 真正双子葉類 Eudicots 階級なし : キク類 Asterids 目 : キク目 Asterales 科 : キク科 Asteraceae 亜科 : キク亜科 Asteroideae 属 : ヨモギ属 Artemisia 種 : A. indica 変種 : ヨモギ var. maximowiczii 学名 Artemisia indica Willd.(1809) 놀랍게도 일본쑥이라고 하면서 속명을 인디카(indica)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놀랍지만 원래는 위 자료에 보듯이 아르테미시아 인디카(A. indica)는 어딘가 감추어진 것이 아닌가도 한다. 어쨌던 인디카 속명은 위 분포지도에도 인도아대륙과 동아시아대륙 남부를 지정하고 있지만 일본종으로 구분하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고 그 위에 다시 변종(変種)을 Artemisia indica var. maximowiczii 으로 처리하고 있지만 최종학명자는 모두 열도일본인'(Nakai) Hara'들로 도배된다. 위 종명 아르테미시아 인디카(A. indica)학명자가 1809년 독일의 식물학자이며 약사인 칼 루드비히 빌데노브(Carl Ludwig Willdenow:1765–1812)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명확한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다. 이와 다르게 신중국에서는 이를 “Artemisia princeps Pamp” 로 분류하는데 이것의 명명시기가 1930년이니 인디카보다 신뢰성이 떨어지며 이미 역사판짜기가 끝난 시점으로써 전부 동아시아대륙을 분포지로 만들기에 이용된 것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魁蒿(学名:Artemisia princeps)是菊科蒿属的植物。分布在台湾、日本、朝鲜以及中国大陆的云南、广西、安徽、江苏、贵州、湖北、四川、河南、山东、福建、广东、辽宁、湖南、甘肃、山西、河北、陕西、江西、内蒙古等地,生长于海拔200米至2,500米的地区,一般生长在山坡、林缘、灌丛、低海拔、中海拔地区的路旁及沟边,目前尚未由人工引种栽培。 野艾蒿[植物名实图考(部分)],王候蒿(云南植物名录),五月艾(广东),野艾(湖南),艾叶、黄花艾、端午艾(广西),“陶如格-沙里尔日”(蒙语名) 科学分类 编辑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菊类植物 Asterids 目: 菊目 Asterales 科: 菊科 Asteraceae 属: 蒿屬 Artemisia 种: 魁蒿 A. princeps 二名法 Artemisia princeps Pamp in Nuov. 이를 신중국에서는 괴호(魁蒿)라 하고 분포지를 대만, 일본, 조선(한반도)과 중국대륙 운남, 광서, 안휘, 강소, 귀주, 호북, 사천, 하남, 산동, 복건, 광동, 요녕, 호남, 감숙, 산서, 하북, 협서, 강서, 내몽고등 전역을 말하고 있으며 해말 200m~2500m 지역 일반생장은 산야 삼림가장자리, 덤불에서 낮는 고도 중간해발 길옆 도랑가, 아직 인공재배는 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위 분포지도를 보면 일본열도를 정확하게 지정하는 것이다. 야애호[野艾蒿(植物名实图考)],왕후호[王候蒿(云南植物名录)],5월애[五月艾(广东)],야애[野艾(湖南)],애협(艾叶)、황화애(黄花艾)、단오애[端午艾(广西)]라 다른 명칭이 있다. 다북쑥의 일본백과사전을 보면 번식력이 강해 일본 전국 곳곳에 자생하고 지하줄기는 다소 옆으로 기어서 집단을 만들며 줄기는 일어서서 약간 목질화 된다 하였고 잎은 크게 찢어지고 뒷면에는 흰 털이 밀생 한다고 되어 있으며 7~10월에 분홍색 꽃이 피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다북쑥은 뒷면이 흰색임을 알 수가 있다. 특유의 향기가 있어, 봄에 단 새싹을 데치거나 국으로 먹고, 또 쑥떡[草餅(蓬餅)]으로 해 먹으며 튀김으로 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것을 건조하여 건위 복통 설사 빈혈 냉성 등에 사용하며 탕에 넣어 목욕에 사용하고 요통과 치질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며 특히 북해도 아이누(アイヌ)의 사람들은 감기나 폐렴이 걸렸을 시에, 이 쑥의 증기를 흡입하여 치료하였다고 한다. 주로 아시아대륙지역으로 분포지가 지정된 이 다북쑥은 여러 가지 변종들이 난무한다. 南西諸島にはニシヨモギ A. indica Willd. var. orientalis (Pamp.) Haraが自生し、沖縄方言では「フーチバー」と呼ばれる。 일본 최남단 규슈(九州)와 타이완(臺灣) 사이에 있는 1,200㎞에 걸쳐 있는 남서제도(南西諸島)에는 니시 요모기라 하는 변종“A. indica Willd. var. orientalis(Pamp.)Hara”가 자생하고, 오키나와 방언에서는 이를 "후치바"로 불리는데 이것의 표본발행 일자는 1952년 아주 늦은 시기에 정리된 것이다.[Published in: Enum. Sperm. Jap. 2: 123 (1952), 123, 1952] 그리고 미국자료 분포지도를 보면 이 변종(變種)의 분포지를 현 동아시아대륙 대만(臺灣)과 해남(海南)을 지정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또 신중국자료에 나타나는 일본 쑥을 학명 “Artemisia princeps.”으로 나타내는 것은 종명 시기가 1930년이라 신빙성이 결여된다는 점이 있고 이 종의 일종이 일본 국토의 햇볕이 잘 드는 산야 길가에 군생한다고 했으며 특히 本州の近畿地方以北~北海道の山地に自生 본주의 근기지방 북쪽으로부터 북해도까지의 산지에 자생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북부 냉한 지역에 종으로 자리잡은 것인데 사실상 일본 본래 위치와 맞지 않는 것이다. 근기(近畿)를 관서(関西)라고 하는데 그 경계 북쪽으로부터 북해도 산지까지라 했으니 혼슈 북부지방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현재 일본열도를 기준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인디카와 마찬가지로 봉애(蓬艾)라 하고 모구사(も‐ぐさ)라 하는데 이것의 의미는 타오르는 풀《燃え草の意》이라는 뜻이라 하여 기후환경을 나타내며 이것은 새잎을 풀떡 재료로 만든다 하여 떡초[草餅(蓬餅)]라고도 불리며, 뜸인 “뜸쑥(も‐ぐさ)"의 원료로도 사용되고, 민간에서는 복통·건위·설사금지에 이용하거나 욕탕용으로도 이용된다고 앞에서도 설명한 것인데 두가지 종명이 모두 일본종으로 나누어짐을 알 수가 있다. 가뭄이나 장마 등 기후의 영향을 적게 받고 비교적 척박한 땅에서도 가꿀 수 있어, 흉년 등으로 기근이 심할 때 농작물 대신으로 대용할 수 있는 구황식물(救荒植物) 또는 비황식물(備荒植物)로 이 다북쑥이 포함되는데 구황식물은 나무껍질(木皮), 쑥(蒿), 아카시아(相思树), 칡뿌리(葛根), 피(稗) 등이 있다. 열도일본과 다북쑥의 지형모순 즉 일본인들이 가뭄이 지속될 때 이를 구황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인들이 “타오르는 풀”이라고 하는 다북쑥은 이 의미와 같이 아열대작물이란 사실이다. 지금은 열도지형적인 조건에 맞춰 대체로 온대지역인 관서(関西)경계 북쪽으로부터 북해도를 다북쑥의 산지(産地)라고 하지만 원래 일본영역에서의 북부지역이라 할지라도 아열대지대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본 블로그 수많은 생물학적 분석에서 밝혀진 명확한 사실이며 이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아열대지역은 위도 25~30° 부근에 중심을 갖는 중위도 고압대(아열대 고압대)의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되어 있다. 일본열도 지형에서 다북쑥이 자란다는 근기지방 이북은 최소한 위도 35°이북(以北)이다. 벗어나도 한참벗어나 있어 이것만 보아도 오늘날 열도를 기준으로 하는 일본역사가 얼마나 허구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蓬蕭艾蒿 科名: キク科 別名: モチグサ 生薬名: ガイヨウ(艾葉) 漢字表記: 蓬 原産: 日本、朝鮮半島 用途: 餅草とも呼ばれ、若葉を草餅の材料にします。お灸の艾「もぐさ」の原料にもしますが、民間では腹痛・健胃・下痢止めに用いたり、浴湯料としても利用されます。 学名: Artemisia princeps Pamp. よもぎyomogi 蓬蕭艾蒿 Kanji Details 1. (n) Japanese mugwort (Artemisia princeps, Artemisia indica var. maximowiczii) 2. general term for plants in the Artemisia genus; mugwort; sagebrush; wormwood 위 또 다른 일본자료에서 말하고 있는 Artemisia princeps Pamp 1930 년에 명명된 다북쑥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도 보면 ‘일본쑥(Japanese mugwort)’이라고 하지만 원산(原産)은 일본과 조선반도(日本, 朝鮮半島)을 말하고 있다. 조선반도 즉 한반도가 아열대지역인가. 물론 지금 지구 온난화 현상에 의한 최근에 지구의 온도 상승과 기후변화가 있는 현상을 19세기초 기후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 조선반도라 함은 한반도를 말하는 것인데 일본인들의 생물학적 판단에서는 한낱 열도 부속물(식민지역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매우 불쾌한 것이다. 현재 한반도를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적 기준 모든 것이 이 모양이다. 그 외 명칭을 보면 쑥(mugwort)이라 한 사실과, 특이하게도 북아메리카 서부의 반 건조 기후 지역인 평원과 산 경사면에 자생 하는 세이지브러시(sagebrush)라 했으며, 쑥 속(屬)의 총칭 웜우드(wormwood)라 하고 있는 것은 웜 우드란 의미가 압생트(absinthe)이란 고미(苦味)‘쓴 맛의 나무’라는 의미하는 것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세이지브러시(sagebrush)라는 단어는 우리가 모르는 많은 역사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쑥의 대명사라고 알려진 세이지브러시(sagebrush)는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을 지정한다는데 우리는 관심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 다북쑥을 일본 쑥이라 하고 이 학명을 “Artemisia princeps Pamp in Nuov.”라 하는 것도 아마도 동아시아대륙과 열도를 분포지로 만들기 위한 학명정리가 아닌가 한다. Published in: Nouvo Giorn. Bot. Ital. ser. 2, 36:444. 1930 source: Catalogue of Life 때문에 이것을 근원적으로 원산지 또는 고유 분포지라 할 수 없는 것이어서 글쓴이가 늘 염려하는 유럽역사가 태동한 후 만들어진 생물체계의 분류학명임을 의심하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세종지리지 황해도(黃海道)편 기록에 지방토산 공물[貢]인 다북쑥과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1450) 10월 10일 기사 전라도에서 다북쑥으로 제작되는 호정지(蒿精紙)원료라고 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 쑥 중에 변종학명 “Artemisia indica Willd. var. orientalis(Pamp.)Hara” 역시 1952년에 명명된 변종(變種)일 뿐이다. 또한 일본의 린네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스웨덴식물학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가 명명한 학명 “Artemisia japonica Thunb.”가 있는데 향쑥속(屬)의 자포니카 종명을 붙인 이것은 이를 모호[牡蒿]‘제비쑥’이라 하는 것이어서 다북쑥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아이누 북해도근방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말하고 있는 다북쑥은 어떤 것일까? [동아시아대륙 분포지 지정, 특징이 없는 다북쑥 사진] [북아메리카대륙 분포지 지정 새발모양의 새발쑥 사진] [멕시코 분포지 지정 새발모양의 새발쑥 사진]이를 옛복건성에서는 닭발쑥[雞腳艾(福建)]이라 하였다. 위에서 일본쑥이라고 하는 모든 변종학명의 형태적인 것을 보면 일본인들이 말하고 있는 다북쑥과 속명(屬名), 종명(種名)에서 멕시코(Mexico)지역을 원산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학명(1)Artemisia mexicana Willd, (2)Artemisia ludoviciana Nutt. (3)Artemisia ludoviciana subsp. mexicana 각 학명의 쑥 형태가 결코 다르다고 할 수 없다. Artemisia mexicana Mexican White Sagebrush (1)Artemisia mexicana Willd. ex Spreng. Published in: Syst. veg. 3:490. 1826 (2)Artemisia ludoviciana Nutt. Artemisia ludoviciana subsp. mexicana (Willd. ex Spreng.) D.D.Keck 1946 Artemisia ludoviciana var. mexicana (Spreng.) A.Gray 1853 Artemisia ludoviciana var. mexicana (Spreng.) Fern. 1945 결론적으로 다북쑥은 아열대지역이라 할 수 있는 멕시코지역과 캘리포니아에서 자라는 쑥, 그리고 현재 일본열도를 근거로 하는 다북쑥이 다르며 이것은 다산(茶山)이 다산시문집(茶山時文集)에서 말하고 있는 새발쑥과 다북쑥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조선 삼남지방 대가뭄 여기서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다산시문집(茶山時文集)제5권 “채호는 흉년을 걱정하여 쓴 시다”에서 다산(茶山)이 기록하고 있는 대가뭄이 어떤 것에 대한 것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산시문집 제5권 시(詩) 채호는 흉년을 걱정하여 쓴 시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기근이 들어 들에 푸른 싹이라곤 없었으므로 아낙들이 쑥을 캐어다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釆蒿閔荒也 未秋而饑 野無靑草 婦人釆蒿爲鬻以當食焉] 기사년(己巳年:1809) 내가 다산의 초당에 있을 때인데, 그 해에 크게 가물어 그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였었다. 6월 초가 되자 유랑민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였다.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이몸으로서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기에 오매(烏昧)에 관하여 아뢸 길이 없고, 은대(銀臺)의 그림도 바칠 길이 없어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가(詩歌)로 엮어보았는데, 그것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슬피 울듯이 그들과 함께 울면서 올바른 이성과 감정으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오래 써 모은 것이 몇 편 되어 이름하여 전가기사(田家紀事)라고 하였다. 釆蒿釆蒿 다북쑥을 캐고 또 캐지만 / 匪蒿伊莪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로세 / 群行如羊 양떼처럼 떼를 지어 / 遵彼山坡 저 산언덕을 오르네 / 靑裙偊僂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 紅髮俄兮 흐트러진 붉은 머리털 / 采蒿何爲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 涕滂沱兮 눈물이 쏟아진다네 / 甁無殘粟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 野無萌芽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 唯蒿生之 다북쑥만이 나서 / 爲毬爲科 무더기를 이뤘기에 / 乾之䕩之 말리고 또 말리고 / 瀹之鹺之 데치고 소금을 쳐 / 我饘我鬻 미음 쑤고 죽 쑤어 먹지 / 庶无他兮 다른 것 아니라네 / 위 시(詩)의 배경장소는 분명 전라도 강진(康津)이다. 다산은 1791년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과 정조(正祖,1752년-1800,재위:1776-1800)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여 서교(西敎:천주교)신자인 그의 두 형과 함께 경상도(慶尙道) 장기현(長鬐縣)에 유배되었다가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그해 11월 유배지가 바뀌면서 유배생활을 18년간 하게 된 곳이다. 거의 18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알려진다. 그가 강진유배생활 중에 집필한 ‘다산시문집 제5권’ 위 시(詩)에 보면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나며 다음해인 기사년(己巳年:1809)에 크게 가물어 그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赤地千里)였고 6월 초가 되자 유랑민(流浪民:nomads)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라고 하고 있다. 그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몸으로서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기에 풀도 먹을 만한 것이 없는 오매(烏昧)에 관하여 아뢸 길이 없고, 승정원(承政院) 은대(銀臺)의 그림도 바칠 길이 없어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가(詩歌)로 엮어보았다는것인데, 상황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슬피 울듯이 그들과 함께 울면서 올바른 이성과 감정으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쳤다고 가뭄으로 인한 참상을 그는 시(詩)에서 그대로 전하고 있다. 이 시(詩)에서 관심을 가질 것은 유랑민(流浪民:nomads)이라 하면서 붉은 머리칼을 한 여자들이 떼를 지어 산에 오른다는 내용이다. 붉은 머리칼을 한 여인들을 다산은 그의 또 다른 시(詩)에서 일본종자(日本種子)라 한 사실이 있다. 이것에 대한 다음 글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일본이 현재 열도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적어도 본 블로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를 턱이 없다. 유랑민이라 하였으니 일단 조선 현지인(朝鮮人)이 아니며 당시 조선 땅에는 이민족들의 이동이 빈번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다산을 이들을 마치 조선인과 같이 안타까워했고 범 인류애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그도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것에 따른 구원의 말을 잊지 않았는데 ‘천지(天地)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 것에서 풀어 볼 때 하늘과 땅이 닺는 온 세상에서 비록 가뭄이 발생한 상태이고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유랑민이고 이민족이라고 하지만 서로 사이좋게 정다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범 민족적인 사고를 다산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다산의 사고를 전제한 상태에서 조선왕조실록에 그가 시에서 언급한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赤地千里)라 한 사실에서 적어도 1808년 후반부터 1809년 초여름까지의 가뭄 기사가 존재하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1)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6월 9일 무술 3번째기사 1809년 10일 남단에 나아가 친히 기우제를 지내겠다고 하교하다 ○敎曰: "見今中庚已近, 一直亢旱, 不得寸雨, 言念民事, 萬萬憂悶。 豈可以向時之得雨, 有所慰三農, 而益於民事乎? 憧憧一念, 宿食靡甘。 圭壁將過九擧。 屢次祈禱, 雖爲煩屑, 其在致誠至虔之道, 何敢不益致菲誠乎? 明日南壇, 當躬行禱雨, 該曹知悉。" 又敎曰: "明日擧動時, 勿治道, 勿撤市, 勿立儀仗, 嚴鼓置之。 隨駕軍兵, 竝爲省約, 一依先朝南壇擧動例爲之。" 又敎曰: "明日當以步輦爲之。 侍臣依已例許令乘馬。" 仍命嚴飭致齋。 하교하기를, "이제 중경일(中庚日)이 이미 가까워 가는데도 한결같이 모진 가뭄이 계속되어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고 있으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걱정스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떻게 지난번 내린 비를 가지고 삼농(三農)에 위안이 되고 백성의 일에 보탬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 침식(寢食)이 달갑지가 않다. 규벽(圭壁)을 올리는 기우제를 장차 아홉 번째 거행해야 되겠다. 누차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번독스럽고 설만스럽기는 한 것이지만 정성과 경건함을 극진히 한다는 도리에 있어 어떻게 감히 더욱 비성(菲誠)을 극진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일 남단(南壇)에서 마땅히 몸소 기우제를 지내겠으니, 해조(該曹)에서는 알고 있으라." (2)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6월 5일 갑오 1번째기사 1809년 구황하는 정사에 대하여 대신들과 논하다 ○甲午/次對。 上曰: "六次祈雨, 雨意邈然, 誠甚憫矣。 今若得雨, 則年事庶有可望乎?" 右議政金思穆曰: "趁此時, 如或得雨, 則豐年雖無望矣, 而百姓猶可爲賦稅之資矣。" 上曰: "八道總論, 則年事何如云耶?" 思穆曰: "兩西則稍勝, 而三南則移種者, 不得爲三分之一云矣。" 上曰: "見朴孝成之疏, 言開城府投石之變, 此事未知緣何而作也? 大臣亦或聞之乎?"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섯 번째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내릴 기미가 아득하기만 하니 참으로 매우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비가 내린다면 연사(年事)를 거의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말하기를, "이때에 혹 비가 내리게 되면 풍년은 비록 바랄 수 없겠습니다만 백성들이 그래도 부세(賦稅)의 밑천은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팔도(八道)를 통틀어 논한다면 연사(年事)가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김사목이 말하기를, "양서(兩西)는 조금 나으나 삼남(三南)의 경우는 이종(移種)하지 못한 것이 삼분의 일이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효성(朴孝成)의 상소를 보건대, 개성부(開城府)에 돌을 던진 변이 있었다고 말을 했는데, 이 일이 무엇으로 연유하여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대신(大臣)은 혹 들은 일이 있는가?" 1809년 순조9년 기사에서 가뭄에 대한 기록을 무수히 볼 수 있다. 중경일이 가까워지는데도 모진 가뭄이 계속되어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는다 하고 있으며 임금은 규벽(圭壁)을 올리는 기우제를 장차 아홉 번째 거행해야 되겠다고 신하들에게 뜻을 전하고 있다. 1809년 6월 5일 기사에서는 임금은 9번 지내는 기우제에서 6번 올렸음에도 지속되는 가뭄을 걱정하고 마침내 구황하는 정사에 대하여 대신들과 논하면서 묻길 팔도(八道)를 통틀어 논한다면 연사(年事)가 어떻다고 하던가 하고 임금이 궁금하여 물으니 김사목이 답하길 "양서(兩西)는 조금 나으나 삼남(三南)의 경우는 이종(移種)하지 못한 것이 삼분의 일이 된다고 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종을 못한것이라 함은 모종을 옮기 못한 상태가 33%라는 이야기다. 황해도와 평안도를 양서(兩西)라 하고 삼남(三南)은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말하고 이를 하남도(下南道)라고도 하는데 황해와 평안은 덜하지만 충청,전라, 경상은 심하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한반도 지형사정상 경기도를 제외하고 보는 황해도와 평안도는 사실상 구분하기 조차 어려운 지형이며 더군다나 하남도에서 충청도가 포함되어 삼남(三南)을 이야기 하지만 한반도 지형구분은 무엇때문에 그렇듯 구분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 이상한 지역구분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역사가 말하고 있는 한반도 팔도 구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혼돈 그 자체이다. 한마디로 하남도라 하거나 삼남(三南)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한반도 지형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북쑥과 새발쑥의 구분 (최초로 새발쑥 발견) 다북쑥과 새발쑥의 구분은 오늘 글쓴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포인트이다. 1809년의 대가뭄이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결국 전라도뿐만 아니라 조선 땅 남부지역 전체에 이와 같은 자연재해가 극심했다는 사실을 조선왕조실록 기록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일본이 역사서에 나타나듯이 조선에서 서남부에 존재한 사실을 적용하면 일본은 아마도 더 극심했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한다. 때문에 그나마 생물생성환경이 좀 형편이 났다고 하는 조선(朝鮮)땅 전라도로 먹을 것을 찾아 이민족(異民族)들이 밀려들었을 것이고 다산(茶山)은 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헤매는 상황을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라 한 것은 참상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글쓴이가 비로소 위 시(詩)의 시대적 배경, 자연환경적인 배경을 의심하고 그것을 따져 볼 심산이지만 분명한 것은 서교(西敎)라고 알려진 천주교 신자로 의심되는 다산(茶山)의 범 글로벌적인 인류애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과 가뭄에 따른 이민족들의 이동상황과 무엇보다도 물자가 풍부했던 조선을 향해 무작정 유랑민이 되어 가뭄을 이겨나고자 몰려들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현 우리나라 역사서만 가지고 이를 정확하게 밝혀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솔직히 기존 한반도역사 환경에서 이와 같은 의문투성이의 역사사실을 글쓴이처럼 세부적으로 밝히고자 노력한 역사학자가 존재했었던 것인가. 전부 하나같이 한반도를 벗어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한반도 테두리 내에서만 원인을 찾으려 했으니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기가 아닐 수가 없으며 자체가 식민지사관에 젖어 이와같은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詩)가 말하는 중요한 몇 구절을 인용해 보자. 전라도 강진 유배의 땅에서 이곳에 붉은 머리의 서양여자들이 쑥을 캐러 산위에 떼를 지어 오른다는 사실을 한반도 역사관으로 생각을 좀 해보라. 상상조차 하기 힘든 풍경이다. 다산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가혹한 가뭄이 때문에 먹을 양식이 부족하여 쑥을 캐러 산위로 오르는 풍경이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한반도 사관에서는 이러한 풍경을 상상하는 것은 천지개벽할 이야기인 것이다. 왜 조선 전라도 땅에 붉은 머리의 여자들이 유랑민(流浪民)으로 떼 지어 올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다북쑥을 캐고 또 캐지만 /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로세 / 양떼처럼 떼를 지어 / 저 산언덕을 오르네 /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 흐트러진 붉은 머리털(紅髮) /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 눈물이 쏟아진다네 /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 다북쑥만이 나서 / 무더기를 이뤘기에 / 말리고 또 말리고 / 데치고 소금을 쳐 / 미음 쑤고 죽 쑤어 먹지 / 다른 것 아니라네 / 위 시(詩)의 주요한 부분만을 발췌한 것인데 한눈에 보아도 가뭄으로 인해 얼마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고 양떼처럼 떼를 지어 산(山)언덕으로 오르는 붉은 머리털 홍발(紅髮)의 여자들이라 묘사 한 것은 바로 동양계 열도일본인이 아닌 유랑민(流浪民:nomads) 유럽 서양 여자들이 떼를 지어 산(山)을 오르는데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즐겨 먹었던 다북쑥이라는 사실이다. 전라도에도 그들이 먹던 다북쑥이 많이 자란다는 사실이며 그들이 떠나 온 다북쑥만을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이러한 상황을 다산이 훤히 짐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서양인들이 즐겨먹는 다북쑥이라는 종과 전라도에서 자라는 새발쑥에 대한 명확히 구분을 다산은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먹을 만한 풀은 없지만 유일하게 가뭄에 강한 식물로 무성이 자라는 다북쑥을 캐 입 풀칠하기 위함이라고 당시 가뭄 상황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다북쑥을 우리나라 세종지리지에서는 황해도(黃海道)토산물이라고 하였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다북쑥을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 호정지(蒿精紙)가 전라도(全羅道)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전라도(全羅道)에도 다북쑥이 자생했다고 믿을 수 있는 사실이며 특히 강진(康津)에서 다북쑥인줄 알고 일본여인들이 떼를 지어 산위로 올랐지만 실제로 그것은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라 한 사실은 다산이 얼마나 박식한 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다산이 훤히 꿰 뚫고 있는 새발쑥이라는 생물학적 자료가 한국 한반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새발쑥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백과사전에 보면 요아(蓼莪)를 새발쑥이라 했으며 ‘흰쑥(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의 옛말이라했다. 흰쑥이라 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새발이라 하였으니 잎이 새발처럼 생겼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위 새발쑥과 비슷한 그림사진들을 설명과 함께 올린 것도 독자들이 비교할 수 있겠끔 하기 위해서다. 놀랍게도 새발처럼 생긴 잎사귀를 가진 쑥이 흰색을 하고 있는 것이 이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글쓴이의 판단으로 일본열도를 분포지로 하는 변종들의 원종에 대한 기준이 되는 학명들을 새발쑥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표적인 것이 세 가지 종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하나같이 새발모양의 쑥 잎사귀를 가진 종이다. (1)Artemisia mexicana Willd 과 (2)Artemisia ludoviciana Nutt, (3)Artemisia ludoviciana var. mexicana (Spreng.) A.Gray 1853 로 판명된다. 바로 다북쑥은 한반도나 열도에서 자생하는 다북쑥이 아니라 멕시코를 분포지로 하는 다북쑥과 비슷한 새발쑥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임을 최종 확인할 수가 있다. 새발쑥은 흰쑥이라고 알려지고 북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이 약용식물로 사용하거나, 가정용으로 만드는 섬유 원료 및 종교적 의식 목적으로 사용하였던 학명 Artemisia ludoviciana Nutt. 라 할 수 있다. Native Americans use the species as a medicinal plant, a source of fiber for crafting household items, and for ceremonial purposes. The Dakotas used this plant to protect against maleficent powers. The Apache, Chiricahua and Mescalero used this plant for spices while Blackfoot tribe used it as a drug for dermatological purposes. Gros Ventre also used it for skin curing as well as medicine against cold, because it also antipyretic. 위 영어자료를 번역해 보면 다코타(Dakota)에서는 액운(厄運)보호하기 위해 사용했고 아파치(Apache), 애리조나주(Arizona)의 치리카후아족(Chiricahua) 그리고 텍사스(Texas)와 뉴멕시코(New Mexico)의 메스칼레로족(族:Mescalero)은 향신로로 사용했으며 블랙풋족(Blackfoot)은 피부병의 치료약으로 이 식물을 이용했고 오늘날 그로 반트(Gros Ventre)라 하고 3000년전부터 5대호 서부에 살았던 아라파호족(族:Arapaho)은 항균성에 의한 피부치료 뿐만아니라 감기치료에도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식물은 미국, 캐나다 및 멕시코 대부분에 넓게 퍼져 있는 북아메리카대륙 원산이다. 본래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또는 중부에 서식하던 것이 동부로 이동되었다는 식물학자들의 설명도 부과된다. 그렇다면 세종지리지가 말하는 황해도 다북쑥 역시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를 흰쑥이라 하거나 회색쑥이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이 학명의 종명을 명명한 영국의 식물학자이며 동물학자인 토마스 누탈(Thomas Nuttall:1786–1858)에 대한 이야기는 본 블로그 글 "비타민나무와 산자나무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4"의 견해와 같으나 그가 실제로 지금의 영국인이 아닐 공산이 크다. 1809년 대가뭄발생 지역은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당시 멕시코(Mexico) 기후사정과 가뭄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밖에 없다. 전라도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다산(茶山)이 위 시(詩)를 집필한 기사년(己巳年:1809)에 조선 하남도 즉 삼도에 분명 가뭄이 있었다는데 만약 조선의 다북쑥을 찾아 일본종자라고 하는 붉은 머리의 여자들이 떼를 지어 찾았다면 카리브해에 본거지를 둔 서양일본인들이 들락거릴 수 있는 멕시코에서 과연 1809년에 가뭄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한 확인 작업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1809년에 멕시코 뿐만아니라 서남부지역에서 가뭄이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캘리포니아지방 가뭄 California Mission Buena Ventura received no rain from November 25, 1808 into April 1809. A completely dry wet season means extreme drought with the onset of the dry season in California. PDSI as low as-5.2(Figure 3.17) Figure 3.25 Dust storm approaching Spearman, TX, 04.14.1935.(Source:NOAA Central Library) 캘리포니아 미션 부에나벤투라(Buena Ventura)에는 1808년 11월 25일부터 1809년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완전히 건조한 우기는 건기가 시작되면서 극심한 가뭄이 발생한다. 캘리포니아, PDSI는 5.2(그림 3.17)로 낮았다. 그림 3.25 텍사스 주 스피어 맨(Spearman)에 접근하는 먼지 폭풍우, 04.14.1935. (출처 : NOAA 중앙 도서관) 멕시코 독립 전쟁의 원인 분석 The Criollos and the Mestizos blamed the Spanish government for policies that limited their ability to socially advance. The Indians and Blacks blamed the government for the hard life they were forced to live. Another reason was the inability of New Spain to feed its people. In 1808 and 1809, the country suffered severe droughts. The price of corn, which was one of the foods that was affordable to the lower castes, was skyrocketing. People couldn’t afford to buy enough food to feed their families. As a consequence, the poorest were starving. Finally, in the north, the United States had won its independence decades before, and many Mexicans felt they could do it too. In 1808, they saw their chance when Napoleon invaded Spain and imprisoned the king. It is through this background of hatred, dissatisfaction and famine that the Mexican revolt broke out in New Spain. 위 영어자료를 번역해 보면 멕시코독립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말하는 것인데 멕시코독립전쟁의 주체였던 크리오요(Criollos)와 메스티조(Mestizos)는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는 정책에 대해 스페인 정부를 비난했고 인디언과 흑인들은 정부에게 살기 힘든 생활 상황해결을 요구했으며 뉴 스페인 정부가 국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1808년과 1809년에 심각한 가뭄을 겪었고 하류층에 저렴한 음식 중 하나 인 옥수수 가격이 급증했으며 이에 사람들은 가족을 먹일 수 있는 만큼의 음식을 살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결과적으로 북쪽 미국은 수 십 년 전에 이미 독립을 얻었다는 상황에서 수많은 멕시코 인들은 그들 역시 독립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는 사실과 동시에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하여 왕을 투옥했을 때 기회를 엿보다가 비로소 불만이 폭발하여 뉴스페인에서 멕시코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원인은 정부에 대한 증오, 불만 및 가뭄에 의한 기근이 배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볼 때 캘리포니아가 양서(兩西)에 들어간다 하면 이곳에서 1808년 11월 25일부터 1809년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캘리포니아 자료는 말하고 있는 것도 다산이 언급한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赤地千里)라 한 사실과 거의 일치한다. 그렇다면 멕시코에는 서양일본인들이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멕시코 인구상황을 보면 1810년에 멕시코 인구가 6,122,354 명에 달했고 유럽인(서양일본인)의 인구수는 1,097,928 명이었다. 전체 인구에 약 18%가 서양유럽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1800년 멕시코에는 15,000명의 스페인사람이 있었고 약 절반은 군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지배할 수 있는 인원이 너무 부족하다. 그럼에도 멕시코인들이 감히 독립을 선언할 수 없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자본을 축적한 일부 부르조아출신들만 불만을 가졌을 뿐이지 기존체제에 불만을 가졌던 것은 아니며 매우 자연스럽게 융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지금의 역사가 그 당시 상황을 붕소침대하여 마치 자연발생적인 반란임을 강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기존 역사에 의구심을 갖는 것이다. 가장 불만의 불씨가 되었던 당시 멕시코재정을 보면 100년만에 멕시코의 연간수입은 3백만 페소(peso)에서 2천 4백만 페소(peso)로 증가했다는 사실과 이 재정은 지방행정과 방위에 4백만 페소(peso)를 소비했고 4백만 페소(peso)는 다른 미국식민지에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나머지 천6백만 페소(peso)는 마드리드의 왕립재무부에 들어가 제국 수입의 3분의 2를 차지했다는 자료가 보인다. 물론 앞에서 전술했듯이 정부에 대한 불신, 증오, 가뭄에 의한 기근 등의 원인이 있었다지만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재정소모에 대한 불만인 것처럼 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여하튼 이것에 의해 1810년 9월 16일 크리오요(Criollos)와 메스티조(Mestizos)가 주동이 된 멕시코가 독립전쟁을 시작했고 이 전쟁은 1821년 8월 24일 코르도바(Córdoba)조약을 체결하면서 멕시코독립이 최종 확정되었다고 정리된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때 자본을 축적한 서양일본인들은 상당수가 카리브해 도서((섬)에서 빠져나와 멕시코에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에 따라 그들의 식솔과 그 외 딸린 인원들도 멕시코로 몰려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대혁명(1789-1794)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서교(西敎)가 활성화되면서 일본종자로 알져지는 서양유럽인들 중 붉은 머리칼을 한 여자들은 전라도 강진(康津)까지 들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으며 그들은 프랑스혁명으로부터 급격하게 개방이 시작되면서 조선(朝鮮)으로 유랑민으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 당시 서양국가들의 인구를 살펴보면 1810년 당시 미국인구가 고작 7,239,900 명이다. 그래봤자 멕시코인구나 비슷하다. 스페인인구가 11,500,000명이며 영국 인구는 11,970,200명이며 프랑스인구가 29,600,000명이다. 프랑스인구가 스페인이나 영국인구에 배가 된다. 반면 인도네시아를 호령하던 네덜란드인구는 2,194,000명에 불과하지만 놀랍게도 그 당시 1810년 일본인구는 25,930,000 명으로 나타나 프랑스인구와 비슷하다. 독일인구 22,110,000명, 이태리인구가 17,943,000으로 나타나며 인도 인구 255,587,000명, 중국 인구 345,717,200명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유럽인이라고 판단되는 러시아 인구는 1810년에 자료가 없으며 한참 후 1897년 67,473,000 명으로 확인되며 그 이전까지 인구자료가 없고 조선인구 역시 그 이전자료는 보이질 않고 조선이 해체된 1881년 16,227,900명으로 나타난다. 본 블로그에서 이미 2009년도에 주장한 사실이지만 미국인 역사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가 그의 저서[아시아역사:Asiatic history]에서 모던조선의 최종 종결시기를 1881년이라 한 사실과 그것을 조선해체시점이라고 볼 때 그 이전 인구자료를 서양학자들이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분명치 않는 일본과 비교할 때 상당한 역사연계성에 맞지 않고 연속성에도 엄청난 모순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인구자료가 빈약한 러시아나, 고려, 조선, 몽골은 중국인구와 인도인구가 중복되었거나 아마도 하나의 체제를 포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돌아가 지금까지 자료를 살펴본 결과 가뭄에 대한 기록들은 기가 막히게 다산(茶山)이 시(詩)를 집필한 기사년(己巳年:1809)에 가뭄과 일치하며 조선 하남도 즉 삼남지방에 가뭄이 발생하는 시기에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즉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와 남부지역에 가뭄이 심하게 발생했음을 알 수가 있으며 이를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풀어보면 양서와 삼남지방에 가뭄이 발생한 사실은 바로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강진이 있는 전라도는 지금의 멕시코 지역임을 확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마무리 상당히 많은 자료를 통해 써 내려오던 이 글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서두에서 의문을 제기한 일본종으로 묶여 있는 아르테미시아 인디카(Artemisia indica)의 실체는 아마도 (1)Artemisia mexicana Willd 과 (2)Artemisia ludoviciana Nutt, (3)Artemisia ludoviciana var. mexicana 위 세가지 학명들이 모두 포함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Botanary: ludoviciana, Meaning: Of or from Louisiana (U.S.), Pronunciation: loo-doh-vik-ee-AH-nuh특히 북아메리카대륙 본토식물로 알려지는 학명 Artemisia ludoviciana 에서 종명인 ludoviciana 는 스페인어로 식물원에서 불리던 칭호가 '루도비기아노(loo-doh-vik-ee-AH-nuh)'라 발음하는데 이것은 바로 미국 대초원이 자리잡은 중부 거대한 땅 루이지애나(Louisiana)를 통칭한 말이다.때문에 대초원을 뜻하는 ludoviciana의 종명은 서남쪽의 생장되는 '산쑥속의 식물'을 말하고 흰색쑥을 말하며 '떡을 해먹는 쑥' 떡쑥으로 불린다는 것을 찾을 수가 있다. 멕시코라는 명칭은 근세기 서양인들이 만든 명칭이며 인도는 현재 인도아대륙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종으로 굳어진 것들은 모두가 허구의 학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이 문제는 좀 더 역사를 진보적 개념으로 판단하고 생물학과 역사를 융합할 수 있으며 융합된 학문을 양심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생물학자나 식물학자가 나타나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가도 한다. 어쨌든 소발의 쥐잡기던 무엇이든 간에 최초로 새발쑥을 발견했다. 하여튼 현 멕시코지역이 조선 땅으로 밝힌 역사사실에서 본 블로그의 글을 참고하면 하나 둘 정도가 아니다. 이미 "순천(順天)과 해남(海南)은 남해바다 가운데 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88"에서 다산(茶山)이 시(詩)를 집필하기 시작하던 1808년에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등이 왕명에 의해 찬진(撰進)한 책,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編)4 해방(海防)편을 바탕으로 당시 남해(南海)지형을 비교하였고 뉴멕시코지역인 텍사스지역과 남쪽으로 둥글게 돌아 순천(順天)의 좌수영(左水營)과 고돌산(古突山), 흥양(興陽)의 현 전부와 발포(鉢浦), 사도(蛇島), 녹도(鹿島), 그리고 장흥(長興)의 회령포(會寧浦), 영암(靈巖)의 갈두(葛頭), 해남(海南)의 오란(於蘭)을 끝으로 이 모든 지명이 들어가야 할 곳이라고 판단하고 주장하였던 바가 있다. 때문에 멕시코 해양도시 마타모로스(Matamoros), 탐피코(Tampico), 베라크루즈(Veragruz)까지 우리는 그러한 영역으로 넣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이미 본 블로그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에서 테우안테펙지협을 멕시코지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코리아지협이라 하였을 것이라고 보지만 글쓴이는 두 지협을 모두 합해 코리아지협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예측했고 코리아지협(Isthmus of Corea)과 해남까지 이어지는 해안선을 선으로 그려 후금((喉衿:後金:Narrow Neck)이라 한 사실과 그곳에 위치한 멕시코의 베라크루즈(Veracruz)를 해남이라 하였거나 더 나아가 파나마(Panama)를 해남이라 하였을 가능성까지 이야기 한바가 있다. 이것은 그냥 상상만으로 이렇게 주장한 것이 아님을 위 블로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야심차게 기후학을 바탕으로 하는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에서 기후학적으로 치밀한 모든 자료를 동원하여 당시 일본이란 역사주체가 거주한 지역을 포괄적으로 확인했고 세부적으로도 거의 확신에 있으며 일본해(日本海)를 지금의 카리브해(Caribbean Sea)라고 한 역사사실을 결론까지 감히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본 블로그 글에 의한 것임을 밝혀두는 바도 있을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어디든지 과거 삼한역사가 숨쉬지 않는 곳은 없다고 감히 주장한다. 그러한 사실을 모두가 공감할 때가지 오늘도 찾아 나서야 함을 잊지 않고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다산 정약용" rel="tag" target="_blank">다산 정약용</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다북쑥" rel="tag" target="_blank">다북쑥</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새발쑥 요아(蓼莪)" rel="tag" target="_blank">새발쑥 요아(蓼莪)</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1809년 대가뭄" rel="tag" target="_blank">1809년 대가뭄</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호정지(蒿精紙)" rel="tag" target="_blank">호정지(蒿精紙)</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계각애[鸡脚艾(福建)]" rel="tag" target="_blank">계각애[鸡脚艾(福建)]</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Artemisia indica" rel="tag" target="_blank">Artemisia indic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Artemisia princeps" rel="tag" target="_blank">Artemisia princeps</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근기지방(近畿地方) 북해도" rel="tag" target="_blank">근기지방(近畿地方) 북해도</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세이지브러시(sagebrush) wormwood" rel="tag" target="_blank">세이지브러시(sagebrush) wormwood</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Artemisia mexicana" rel="tag" target="_blank">Artemisia mexican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유랑민(流浪民:nomads)홍발(紅髮)" rel="tag" target="_blank">유랑민(流浪民:nomads)홍발(紅髮)</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부에나벤투라(Buena Ventura)" rel="tag" target="_blank">부에나벤투라(Buena Ventur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크리오요(Criollos)와 메스티조(Mestizos)" rel="tag" target="_blank">크리오요(Criollos)와 메스티조(Mestizos)</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토마스 누탈(Thomas Nuttall:1786–1858" rel="tag" target="_blank">토마스 누탈(Thomas Nuttall:1786–1858</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파치(Apache) 치리카후아족(Chiricahua)" rel="tag" target="_blank">아파치(Apache) 치리카후아족(Chiricahu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강진(康津)" rel="tag" target="_blank">강진(康津)</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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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모인과 일본인
******************************* 홍모인과 일본인 글쓴이:한부울 서론 늘상 주지하고 경계하는 이야기지만 유럽(Erub)이란 명칭은 근세기에 창조된 역사 프레임에 의한 가짜 틀이다. 먼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유럽역사를 진단을 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다. 에럽(Ereb)이 아랍(Alab)으로 변했다는 설을 따른다면 유럽(Eurb)은 아랍(Alab)과 동일하다는 주장과 이것은 정확히 역사음모에 의해 분리된 오류의 역사로써 유럽과 아랍은 하나라는 묶음이라는 사실이다. 이 음모세력들은 즉 아랍을 만들고 그 위에 유럽이 올라 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동양사에서 삼한역사 내에 존재한 중국을 빼내면서 삼한역사를 쪼그라들게 만들었고 마찬가지로 삼한역사에서 아랍을 빼내고 그 자리에 아랍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유럽을 창출했다는 이야기다. 즉 삼한을 아랍으로 둔갑시켜 사라지게 만들고 그 위에 유럽역사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창조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포르투갈은 이미 에스파냐왕국에 점령당하여 망해버린 국가이다. 피지배민족 바스크(Vasco)의 귀족출신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설립한 예수회와 패망한 포르투갈은 같은 동질성을 가지고 에스파냐 즉 삼한에게 칼을 겨눈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개체들이 예수회를 앞세워 해양시대를 만들고 식민지제국을 건설했다고 하는 것이나 또 다른 해양시대를 개척한 국가들이 오늘날 서양사의 주역이라고 하는 역사바탕은 이치적으로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물론 본 블로그에서 2012년도에 밝힌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주장한 중국(中國)이나 아랍(ALAB)의 역사 모두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것으로 1534년 8월 15일에 군인출신 로마 가톨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Ignatius of Loyola,1491-1556)에 의하여 창설된 예수회의 철저한 기획아래 완성된 음모라 한 사실도 이러한 정황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좀 더 들어가보면 유럽서양문화는 14세기~16세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과 지식을 부흥하고자 한 르네상스 운동이라 한 사실의 대한 모순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동양사의 춘추전국시대, 전한과 후한, 위오촉 삼국시대, 오호16국(서진과 동진)시대까지 모두 고대 그리스와 로마역사와 묶인다. 그들은 비로소 서기 481년 건립된 프랑크왕국으로부터 시작한 역사가 그들의 문화이고 역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음모의 중심에 있는 예수회의 진면목을 한번보자. The Jesuits became the shock-troops of the Counter-Reformation, showing remarkable energy and success. 위 영어자료가 말하길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대항종교개혁의 돌격대가 되어 주목할만한 성과와 힘을 보여주었다고 되어 있다. 즉 예수회는 처음부터 종교단체가 아닌 하나의 전투조직으로 나타나고 예수회 최고 수장은 전투하는 장군(the general)이라 칭했으며 나폴레옹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예수회는 종교 조직이 아니라 군대 조직이다.'라고 한 사실은 기존 역사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진단할 수 있는 이야기다. 당시 르네상스문화가 그들에 의해 창출되고 서양사보다 훨씬 선진문화를 구가했던 동양사를 그들이 건너뛰면서 오히려 그리스, 로마가 오리엔탈 선진문화의 바탕임에도 그들 서양세력들이 이 오리엔탈문화를 탈취한 것이다. 또한 중세 시대 석공 길드 조합에서 시작한 비밀 결사대 프리메이슨의 한 엘리트지파이기도한 예수회는 이와같은 전투적 성향과 종교적인 힘을 이용하여 비밀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당시 이러한 종교활동이 카톨릭 자체에도 심각한 위협이 됨을 알아 교황 클레멘스 14세(Papa Clemente XIV 재위: 1769-1774)는 교황 칙령(papal bull)으로 1773년 7월 21일 예수회 자체를 완전 폐지시켰다. 그러나 잔존한 예수회는 1776년 5월 1일에 독일 바이에른 주에서 예수회가 설립한 잉골슈다트 대학(University of Ingolstadt)의 종교법 교수 '아담 바이스하우푸트(Adam Weishaupt)'가 주동이 되어 일루미나티(Illuminati)가 설립된다. 이 비밀결사대 일루미나티(Illuminati)역시 당시 바이에른의 통치자가 된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1743~1799) 봉건주에 의해 불순 단체로 규정되었고 1777년 일루미나티를 포함한 모든 비밀 단체 활동을 금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예수회나 일루미나티를 포함한 그들의 비밀활동이 봉건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란 추측은 당연한 이야기다. 앞서 러시아 수학자 포멘코의 주장대로 생각한다면 중국과 아랍은 하나의 거대한 역사주체에서 일개 부속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는데 거대한 주체는 물론 세계삼한이다. 세계삼한이 끝내 합체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이야기다. 서양인들의 해양시대를 열었다고 하는 포르투갈의 초기의 모습은 사실상 국가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본 블로그 글 "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미시시피강상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6"에서 밝혔지만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新羅,B.C57~A.D935) 기간인 A.D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나타나며 오늘날 에스파니야의 핵심왕국이라 할 수 있는 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1037-1230)의 페르난도1세(Ferdinand I, ?-1065)가 포르투갈세력에게 영토를 그저 주었다고 한 사실과 페르난도는 고려시대의 송조(宋,960-1279) 영종(英宗,재위:1063-1067)과 동일한 계보라고 밝힌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때문에 에스파니아를 송나라와 결부시킬 수 있는 것은 남송이 피해 달아난 곳이 바로 여송(呂宋)이었고 이 여송을 스페인이 차지한다는 결과가 있다.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에서 에스파니아(Hispania)는 “CORIA”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고 에스파니아는 신라(新羅)를 합병한 고려(高麗)라는 사실을 확인케 했다. 온통 삼한역사가 서양사에 흡입되어 잠식된 형태로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다. 포멘코가 음모라고 주장한대로 완성된 것이라면 아랍으로 분류되는 유럽문화를 손에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들은 최소한 19세기 초까지 거주지가 없어 떠돌아다니던 유랑민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프리메이슨이라고 하는 석공길드가 왜 비밀스러운 것인가를 잠시 살펴보자. 15세기부터 봉건 장원제도의 영주들이나 귀족들을 상대로 희귀한 물품이나 건강식품, 금은보석 따위, 각종 향료들을 수집하여 상업행위를 하던 세력들이며 이들은 최후 흉악한 해적행위를 마다하지 않았고 기존체제에 융합하지 못한체 늘 체제의 엄격한 제재가 미치지 못하는 카리브해 미지의 크고 작은 섬(島嶼)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던 족속들로써 엄격한 체제입장에서 보았을 때 향상 위험스러운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때문에 그들은 비밀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도 세력규합이 필요함을 느끼고 15세기에서 16세기에 중상주의에 발맞춰 수공업자나 상인들이 상호 부조와 보호 및 직업상의 권익 증진을 위해 결성하였던 것인 바로 길드(Guild)이다. 이 길드(Guild)는 바로 예수회 프리메이슨 조직으로 발전하며 이것이 다시 일루미나티로 넘어가고 이들이 만든 주식회사가 가지는 권능은 하나의 국가를 초월할 정도였다 하였으니 그들의 초법적인 활동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이 길드제도를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뛰어 넘는 매우 뛰어난 제도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상 경쟁이 없는 상품은 발전을 기대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특정인을 위한 상업행위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길드 수공업이 아닌 대량생산이 가능하면서 오히려 철저한 품질검사가 필요하여 길드제도의 장점이 필요하겠지만 길드가 가지고 있던 폐쇄성이나 독과점 경영은 매우 상거래 질서를 해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회사경영의 목적은 한정된 거래가 아니라 더 많은 이윤과 자본축적에 있었다면 대량생산의 시장 환경은 가격 경쟁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길드제도는 폐쇄성과 독과점 카르텔의 한계로 인하여 시장경쟁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었을 것이란 관측이다. 물론 길드상인들은 폐쇄성과 독과점거래로 당시 엄청난 자본을 축적했고 고리대금업자가 기승을 했다고는 것도 알 수 있다. 프리메이슨의 중세 석공길드 기원설이 내포하는 의미는 상거래에서 이런 비밀스러운 면이 많았으며 비밀조직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서양인들이 득세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고 부르조아를 낳아 프랑스혁명이 발생하도록 한 중상주의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영주들이나 귀족들은 사채 굴레에 벗어나지 못했고 끝내 모든 것을 내 주어야 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정한 자본주의를 생각할 때 길드는 비밀을 보장하는 폐쇄성과 독과점적 단합에 의한 구조적 요구는 특징적인 폐단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폐단이 공공연하게 나타나 공존 아니면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에 의해 19세기부터 길드를 폐지하는 법령(法令)이 제정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지는데 이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폐단을 막고 엄격히 감독하거나 제재를 가하는 하나의 체제가 요구한 법령으로써 길드상인들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길드의 이러한 독점적 폐단은 그 이후 시정되지 않는 체로 주식회사 경영방식까지 옮겨지고 마침내 단합에 의한 불공정 폐단이 극에 이르자 1890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독점규제법인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이 만들어진다. 그때까지 길드 폐쇄성이 유지되었던 것이며 독점하던 서양인들은 엄청난 이윤과 이득을 취득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식으로 금융산업이 발전하고 복리의 이식을 취하면서 거대한 자본괴물이 등장하여 급기야 자본으로 해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틀어쥐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역사 변혁을 만들고 변괴가 온천지를 뒤 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비밀스러운 단합이 가능하게 불공정거래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셔먼법도 소용이 없었고 1902년 이후 7년 동안 43개 독점기업을 제소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는 '트러스트 파괴자(Trust Buster)'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지만 글쓴이의 판단은 거대한 자본으로 법을 장악할 수 있었다면 제소따위는 그냥 제스처에 불과했을 것이란 판단이다. 트러스트는 신뢰, 신용이란 용어로 쓰이지만 최대의 이윤을 독식하고자 하는 독과점단합의 기업합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자본은 더욱 거대한 괴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경제전문가들의 이야기는 16세기~18세기에 접어들어 하나의 체제가 내린 중상주의(mercantilism)정책에 큰 혜택을 입은 상인들이 자본가가 되어 회사를 설립함으로써 길드의 중요성을 떨어뜨렸다 하고 그래도 잔존한 길드는 계속 주식회사 자본가와 충돌하면서 존립을 과시하고 끝내 도태되었다고 하지만 서양자본가들에게 이 길드정신은 지속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세계사에서 유럽에 대한 우월역사에 대한 틀을 만들고 싶어하던 해양세력들은 이러한 발상으로 출발한 인류이동역사를 다시 창출하였고 그들만의 역사터전을 만들게 되는데 미국 형질인류(形質人類)학자 칼튼 S. 쿤(Carleton Stevens Coon:1904-1981)이 대표적이며 유럽대륙을 서양 코카서스(백인)들의 본질적 근원지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버젓이 존재한다. 그것은 유럽대륙을 만들고 유럽역사를 등에 업는 기막힌 곡예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그의 주장을 보면 홍적세(Pleistocene)말기에 인간의 다섯 가지 지리적 인종의 분포도에서 몽골인(Mongoloids)과 코카서스(Caucasoids)가 자국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충돌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였고 몽골인들은 유럽으로 더 확장하지 못하고 아시아를 거쳐 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아시아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로 영역을 확장하였다는 주장을 폈다. 오스트랄로이드인(Australoids)들은 동양구와 오스트레일리아구 사이의 가설적인 경계선인 월러스 라인(Wallace's Line)을 건너 호주와 뉴기니를 점령했다고 정리하였으며 유럽 코카소이드들은 북쪽으로 밀려들었고 그들은 북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인류원인 코이코이인(Khoi-Khoi:Hottentot)과 산인(San:Bushman)인 카포(Capoid)를 몰아내고 케냐(Kenya)의 백인고지(White Highlands)와 탕가니카(Tanganyika)를 점령했다고 말하고 있다. 인류 원인인 본산지 아프리카 북부지역은 유럽인들이 애초부터 점령한 지역임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되니 지금의 아랍은 고스란히 유럽권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주장일 뿐이다. 그가 그어놓은 아시아와 유라시아를 경계선을 보더라도 너무 편의적이고 획일적이다. 흑인과 백인은 황인과 다르게 눈두덩이가 움푹 꺼져있으며 몸에 털이 많고, 두상이 장두형(長頭型)이라는 등의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유럽대륙이나 아프리카대륙 북부지역에 존재해야 할 장두형의 백인 미이라가 발견된 곳이 한반도란 사실과 타림지역에서 마찬가지로 백인미이라 발견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시아극동인 한반도의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 상자형 돌관(石棺)과 인골(人骨), 돌검(磨製石劍)이 출토되었고 이 인골 신장이 174m정도이고 두개골과 쇄골, 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한국인보다 크고 두개장폭(頭蓋長幅)지수가 66.3으로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이라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획일적인 주장은 맞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코카소이드라고 알려진 스키타이는 삼한역사와 연관이 많다고 알려지는데 스키타이 유물 중에는 신라금관으로 알려지는 1921년에 발견된 금관총 금관(金冠塚 金冠), 1924년에 발견된 금령총 금관(金鈴塚 金冠)이나 고구려 황금관(黃金冠)인 불꽃무늬금관(火焰文金冠)장식과 매우 유사한 양식의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근원적으로 유럽대륙과 아시아대륙을 선으로 그어놓을 수 없는 선사시대때 인류 이동환경이라는 사실이다. 고인돌의 어원을 돌멘(Dolman)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켈트어(Calt)로 보고 있다. 이 고인돌 역시 한반도 및 극동아시아지역에 무수히 많을 뿐만아니라 영국을 포함한 유럽지역과 북아프리카지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유럽 신석기시대에 고인돌은 전형적이라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들을 유추할 때 유럽과 아시아대륙 전반에 걸쳐 단일 역사장소로써 코카소이드와 몽골로이드가 혼재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합리적인 이야기다. 물론 유럽인들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지만 백인들 모두가 유럽인이라는 등식은 참으로 서양인들만의 어줍잖은 이야기다. 또한 북유럽대륙에 검은머리의 몽골로이드가 존재했을 것이란 사실 역시 부정키가 어려운 것이며 본 블로그 글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보았던 것처럼 대비달자(大鼻韃子)라고 하는 악라사(鄂羅斯)의 영토가 동서가 3만여 리(里), 남북이 2만여 리(里)라 한 사실과 서쪽 끝에는 서양(西洋)이 접해 있다 한 사실은 오늘날 대서양(大西洋)과 접한 사실과 동일한 것에서도 검은얼굴의 대비달자가 유럽대륙까지 도발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하기가 힘든다. 그리고 검은 얼굴의 코카서스라고 할 수 있는 이 악라사를 아시아황인종인 몽골인이라 한 사실을 더 하면 대비달자는 ‘얼굴이 검고 코가 높고 성질이 사납다’라고 정리되어 있고 몽고인은 일단 광대뼈(顴)가 높다는 것 이외 ‘눈이 푸르고(眼碧) 구레나룻수염(髥)이 붉은(紫)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라고 한 사실과 배척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이러할 때 코카소이드를 백인이라고 한정하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우리가 서양인으로 알고 있는 한자 호인(胡人)도 푸른 눈동자(靑眼), 벽안(碧眼)을 가졌다고 알려지고 옛 고려나 조선인에게 호(胡)를 붙이고 있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조선영내(朝鮮領內)에는 수많은 피부색이 다른 인종들이 모여 합체된 문화를 창출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사례들이 많다는 것은 다문화적 환경임을 우리는 명확히 알 수가 있다. 악라사(鄂羅斯)의 영토가 17세기~18세기 프랑스인들이 제작한 지도를 보면 모두 타타르(韃靼:Tatar)라 한 사실이 명확히 나타나고 그 뿐만아니라 콜럼버스의 착각지도[콜롬버스의 지리학 개념도]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도 타타르(Tatar)의 영역임을 알 수가 있다. 더 나아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방에도 북유럽대륙에 존재했다고 알려지는 바이킹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도 쿤이 그리고 있는 인종지도에서 획일적인 분포도를 고집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유럽대륙을 오마쥐려고 하는 서양인들의 무지한 발상에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반에서 현재 주장되고 있는 인류이동역사는 아시아대륙에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이동해 들어갔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은 서부 아프리카대륙에 존재하던 카포이드 인종(Capoid race)이 남아메리카대륙 동부 브라질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한 것으로 이것 역시 불분명한 것은 틀림없고 오히려 서양인들의 개척사에서 보았듯이 근세기에 무자비한 대량학살을 피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아시아대륙으로 넘어 들어갔을 가능성도 유추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문제는 세계삼한역사가 최초 시작된 역사장소가 어딘가에 따라 이 난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보았을 때 의심스러운 것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2차 세계대전(二次世界大戰)이 끝난 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전략 정보국(OSS)은 전 세계 도시항공지도를 제작하였고 이 작업에 아서 로빈슨(Arthur H. Robinson:1915-2004)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1938년 위스콘신 대학교-매디슨(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지리학석사학위를 받고 1941년 전략 정보국(OSS)에 합류하여 지도부장을 역임하였으며 로빈슨 투영법(Robinson projection)을 개발하여 1947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미국전략 정보국에서 실시한 5,000 장의 수작업한 지도 제작을 감독했고 1943년 퀘벡과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군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44년에는 미국지도 제작국장을 역임하고 1946년 미국 육군으로부터 훈공장(勳功章:Legion of Merit)을 받았다는 인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근세기 서양백인우월주의, 서양국수주의자들과 유럽 분리주의자들의 역사분탕질에서 그들만의 역사 새 판짜기가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완성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서양식민주의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저변에는 이와 같은 엉터리 이론과 분탕질들이 모여 유럽사조(思潮)를 만들었고 이것이 버젓하게 세계사(世界史)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고 되새겨야 할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붉은 머리의 역사 위 서론에서 이야기한 짧지 않는 글을 바탕으로 붉은 머리의 역사를 살펴보자. Red hair is a recessive genetic trait caused by a series of mutations in the melanocortin 1 receptor (MC1R), a gene located on chromosome 16. As a recessive trait it must be inherited from both parents to cause the hair to become red. Consequently there are far more people carrying the mutation for red hair than people actually having red hair. In Scotland, approximately 13% of the population are redheads, although 40% carry at least one mutation. 위 영어자료를 보면 붉은 머리카락은 16번 염색체에 위치한 유전자인 멜라노코르틴(melanocortin)1 수용체(MC1R)에서 일련의 돌연변이로 인한 열성유전(recessive genetic)특성이라 하였고 열성 특성으로 머리카락이 빨갛게 되도록 양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야 하며 결과적으로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보다 빨간 머리카락에 대한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인구의 약 13%가 적색 머리이지만 40%는 적어도 하나의 돌연변이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돌연변이라 함은 사전적 의미가 유전자를 이루는 염기서열의 변화로 유전정보가 변하면서 유전형질이 달라지는 현상이라 하고 있으며 우성이 아닌 열성유전자의 특성이라 하고 있다. The non-tanning skin associated with red hair may have been advantageous in far-northern climates where sunlight is scarce. Studies by Bodmer and Cavalli-Sforza (1976) hypothesized that lighter skin pigmentation prevents rickets in colder climates by encouraging higher levels of vitamin D production and also allows the individual to retain heat better than someone with darker skin. 붉은 머리는 인간에서 가장 희귀한 자연 머리카락으로써 붉은 머리카락과 관련된 비(非)태닝(non-tanning)피부는 햇빛이 부족한 북부 기후에서 유리했을 수도 있고 1976년 월터 보드머(Walter Bodmer)와 카발리 스포르자(Cavalli-Sforza)의 연구에 따르면 가벼운 피부 착색은 높은 수준의 ‘비타민 D’생산을 장려함으로써 추운 기후에서 구루병(佝僂病:rickets)을 예방하고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람보다 더 열을 유지할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때문에 순수백인들은 북쪽지방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동은 대륙을 불문하고 이러한 공식이 성립되어야 하며 유럽대륙북부 뿐만아니라 사실상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방에도 이러한 인종간의 활동이 존재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서의 바이킹 유물 발견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A DNA study has concluded that some Neanderthals also had red hair. DNA 연구에 따르면 35만년전 유럽대륙에서 나타난 일부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s)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독일 네안데르계곡의 화석 네안데르탈인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의 학설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亞種)인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sapiens neanderthalensis)’로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지만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DNA(mitochondrial DNA)의 염기 서열을 분석한 결과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유전적으로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붉은 머리를 만드는 페오멜라닌 유전자는 약 2만년전에서 4만년전 사이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로써 네안데르탈인과의 혼혈로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유전자 풀(gene pool)에 도입되었다고 한다. The term redhead has been in use since at least 1510. 붉은 머리(redhead)라는 용어는 16세기초를 말하는데 예를 들면 적어도 부산포, 염포, 내이포 등 삼포(三浦)에서 일본인들에 인해 발생한 폭동인 삼포왜란(三浦倭亂)이 발생하고 포르투갈이 인도 서해안의 고아(Goa)를 점령한 1510년 이후로 사용되어 왔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해양세력들의 부정적인 면과 그들에 의한 활동영역이 평소보다 넓게 퍼져나가는 것을 우려한 결과가 아닌가도 여겨진다. Both the ancient Greeks and Romans described the Celts as redheads.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모두 켈트족을 붉은 머리라고 묘사했다. 게르만족과 이어지는 켈트족의 삼태극 문양은 그들의 상징성이 있다. 이 삼태극 문양은 삼한과도 관계가 깊은 것인데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Celts)의 한 갈래라고 하고 골족이라고도 하는 갈리아족 즉 고구려인과 결부되며 그들의 제천사상은 북유럽을 근거로 하고 켈트족(Celts)이 지향하던 다종교, 다신교(多神敎)를 가르키기도 했다는 것은 삼한유민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켈트족은 고구려 백제 유민일 가능성도 있다. 고대 로마제국 갈리아의 원 거주민은 켈트족(Celts, Celtae)으로, 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켈타이(Celtae)'를 라틴어식으로 옮긴 것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켈트족에는 과연 붉은 머리만 존재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은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그리스시인 제노파네스(Xenophanes)의 단편(短片)에는 발칸반도의 트라키아 인(Thracians)들을 푸른 눈과 붉은 머리로 묘사하였고 흑해를 거점으로 하던 고대 민족 부디니(Budini)와 훈족의 급습을 받아 4세기에 쇠퇴한 사르마트인(Sarmatians)들은 그리스 작가에 의해 푸른 눈과 붉은 머리를 가진 것으로 보고되었다. Caucasian Tarim mummies have been found with red hair dating to the 2nd millennium BC. 토카리안(Tocharians)들 사이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는데, 토카리안들은 현재 중국의 북서쪽 지방에 있는 타림분지를 점령하였고 기원전 2천년의 붉은 머리카락의 백인 타림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이는 아시아대륙이라 할지라도 백인이 거주한 사실임을 알 수 있고 한반도 역시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 기원전 1만년(萬年)전의 서양인미이라 발견은 유라시아대륙전체에서 혼재된 상태로 서로 인구이동이 가능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 그리고 태평양지역에서의 적갈색(Reddish-brown:auburn) 머리카락은 키가 큰 편이고, 밝은 피부색과 직모 또는 곱슬머리가 특징인 일부 폴리네시아 인(Polynesians)들 사이에 일부 부족과 가족군(家族群)사이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며 폴리네시안 문화에서 붉은 머리카락은 전통적으로 고위 조상의 혈통과 통치의 표식으로 간주되어 왔다고 영어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붉은 머리 현황 지금까지 붉은 머리의 역사와 근원에 대해 알아보았다. 대체적으로 북유럽군과 서게르만민족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현재 붉은 머리는 영국 제도(British Isles)를 중심으로 많이 나타나고 일반적으로 켈트족 국가(Celtic nations), 아일랜드(Ire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웨일스(Wales), 콘월(Cornwall), 맨 섬(Isle of Man), 프랑스의 브르타뉴 반도(Bretagne)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영국(Britain's)의 DNA 조사에 따르면, 아일랜드 인구의 34.7%가 붉은 머리카락에 대한 대립 유전자를 가졌다고 나타난다. 스코틀랜드(Scotland)는 또한 인구의 약 6%가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고 영국(Britain's)의 DNA 연구원 짐 윌슨 박사(Dr. Jim Wilson)는 2,343명의 표본을 사용한 결과 스코틀랜드에서 6%의 적색 머리카락 발생을 확인했으며, 35%는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고 스코틀랜드 수도 에딘버러(Edinburgh)는 40%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 노르웨이 남서부에 금발과는 대조적으로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머리카락의 발생률이 더 높다는 것은 ‘단일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haplogroup) R1b-L21’로 알려진 부계 혈통의 비율이 더 높았다는 것이 최근에 발견되었고 이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이 바이킹에 의해 노르웨이 남서부로 아마도 노예로 끌려가면서 거기에서 붉은 머리카락의 빈도를 증가 시켰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볼 때 바이킹의 영향이 유럽북부지역에는 상당히 강하게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카잔(Kazan)과 페름(Perm)사이의 러시아 북부 볼가 분지[northern(Volga basin)]에 살고 있는 우랄 릭 부족(Uralic tribe)인 우드무르트(Udmurts)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구의 10% 이상의 많은 유일한 서구(西歐)에 살지 않는 유럽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단일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a single Y-chromosomal haplogroup)인"R1b"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공통조상을 공유한다고 되어 있으며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 나타나는 “R1b"와 같은 조상으로 사실상 확인할 수가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인 허드슨만(Hudson Bay)지역과 미국북동부에서 현대에 바이킹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붉은 머리 소유자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며 인디언과 프랑스 또는 스코틀랜드 계통의 유럽인 사이에서 생긴 캐나다의 혼혈인 메티스인(metis or Anglo-Métis)이 “R1b"계열이란 사실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The event, known as “Roodharigendag” in Dutch, occurs every September. 지금도 ‘붉은 머리 축제’,네덜란드어로 ‘루드하리겐다그(Roodharigendag)’로 알려진 이 행사는 매년 9월에 네덜란드 마을 브레다(Dutch town of Breda)에서 열리며 전 세계 80개국 이상의 붉은 머리 소유자들이 대표로 모여든다. In an article about International Kiss A Red Day, which is celebrated on January 12, the Telegraph reports that after Britain, countries that beat the global average are Iceland, Norway, Sweden, Finland, Northern France and the Netherlands. Heading south, the redheads become scarcer. In Italy, for example they are just 0.57% of the population. 1월 12일에 열리는 국제 키스 레드 데이(International Kiss A Red Day)에 관한 기사에서, 텔레그래프는 붉은 머리를 가진 영국이외 세계 평균을 넘는 국가들은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북부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라고 보고했고 유럽 남쪽으로 가면 붉은 머리는 희소해지며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인구의 0.57%에 불과 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였다. Belgium, north-western Germany and Jutland, i.e. where the percentage of R1b is the highest, and presumably the first region to be settled by R1b, before blending with the blond-haired R1a and I1 people from Scandinavia and re-expanding south to Germany during the Iron Age, with a considerably lower percentage of R1b and red-hair alleles. Red-haired is therefore most associated with the continental West Germanic peoples, and least with Scandinavians and Germanic tribes that originated in Sweden, like the Goths and the Vandals. This also explains why the Anglo-Saxon settlements on southern England have a higher frequency of redheads than the Scandinavian settlements of northeast England. 벨기에, 북서(北西)독일과 유틀란트 반도는 ‘R1b’의 비율이 가장 높고, 아마도 ‘R1b’에 의해 정착 된 첫 번째 지역이 스칸디나비아이며 이곳 출신의 금발 머리 ‘R1a’와 ‘I1’사람들과 혼합되어 남쪽독일로 확장되기 전까지인 기원전 300년경부터의 철기시대에는 ‘R1b’와 붉은 머리 대립 유전자의 비율이 상당히 낮았다고 한다. 따라서 붉은 머리는 대서양 서부 게르만민족과 가장 많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동부게르만 반달족(Vandals)과 고트(Goths)같은 스웨덴을 근원으로 하는 스칸디나비아인과 게르만 족은 이와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남부잉글랜드의 앵글로 색슨(Anglo-Saxon)정착촌이 영국 북동부의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n)정착촌보다 더 높은 빈도의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Wales), 콘월(Cornwall), 맨 섬(Isle of Man), 프랑스서부종단의 브르타뉴 반도(Bretagne)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Red hair is also common among Ashkenazi Jews. During the Spanish Inquisition, all those with red hair were identified as Jewish, while Spanish and Italian art, and even the plays of Shakespeare, used the trait to depict Jews. 또한 붉은 머리는 아슈케나즈 유대인(Ashkenazi Jews)에게는 일반적이라 했다. 아슈케나즈유대인이라는 것은 주로 라인란트(Rheinland)에 거주하는 독일유대인(German Jews)을 말한다. 본래 교회법률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지했다.그러나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 샤를마뉴(Charlemagne,재위:768~814)가 경영하는 프랑크왕국의 땅으로 돌아온 많은 유대인 상인들은 돈 대출이나 고리 대금을 포함하여 금융 및 상업 분야에서 직업에 종사했다. 유럽 개몽주의에 영향을 받아 유태인해방은 18세기 프랑스혁명과 함께 이루어졌으며 서, 중앙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중세 이후 유대인권리를 제한하던 독특한 옷을 착용하는 것, 특별세금을 내야하고 비유대공동체로부터 고립된 민가에 살아야 하고, 특정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지법들이 모두 폐지되었다고 알려진다. 2차세계대전 당시 8백만이 유럽대륙에 거주했고 그 중 6백만이 학살당했다고 알려진다. 현재 미국의 아슈케나즈유대인은 약 6백만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스페인 종교 재판에서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밝혀졌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예술,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도 유대인을 묘사하였는데 붉은 머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앵글로색슨계와 서부게르만 민족들에게 붉은 머리가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나 한편으론 붉은 머리가 많다고 하는 현재 네덜란드의 위치가 스웨덴을 포함하는 북 유럽군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 이러한 위치적 불합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며 아마도 네덜란드의 역사위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지역에 존재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이것은 본 블로그 글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 http://blog.daum.net/han0114/17049532"에서 충분히 밝힌바가 있다.. 고사(古史)에 등장하는 붉은 머리 우리 고사(古史)에는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다산시문집(茶山時文集)에 나타나는 붉은 머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북학파라고 알려지는 실학자이며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 공학자로 나타나는데 이는 다중(多重)능력자로써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것이다. 이 한 사람의 이름 내부에는 또 다른 조선인들이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난해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본다면 다른 조선인이라는 둘레에 서양인도 포함된다는 의미이다. 서교(西敎), 서학(西學)인 천주교(天主敎:Catholic)를 신봉하는 신서파(信西派), 남인(南人)들의 복잡한 혼맥(婚脈)과도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유럽 상인 길드를 지휘하던 거상들의 봉건귀족과의 혼맥(婚脈)과 동일하게 보는 경우가 있다. 1791년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과 정조(正祖,1752년-1800,재위:1776-1800)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때 그의 두 형과 함께 경상도(慶尙道) 장기현(長鬐縣)에 유배되었고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그해 11월 유배지가 바뀌면서 유배생활을 18년간 하게 된 곳이다. 향상 눅눅하고 끈적끈적하여 장독(瘴毒), 장기(瘴氣)가 늘 창궐하는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장기(瘴氣)는 열대나 아열대 산림의 습하고 더운 공기를 말한다. 그것에 노출 되는 것이 장독(瘴毒)인데 장려(瘴厲)는 전염병 말라리아를 발생시키며 이것은 장기(瘴氣)에 의한다고도 했다. 장기(瘴氣)에 의한 장독이 심해져 열병으로 변하고 그것을 풍토병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한반도에서는 당시 기후환경으로 찾을 수 없는 대단히 습한 기후에 따른 부패와 주위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복합적인 질병이었다고 하기 때문에 경상도 장기라 하더라도 아열대기후라 할 수 있다. 일본 나가사키(長岐縣)도 장기현 인데 중간 한자가 다르다. '岐' 갈림길, 산 이름, 울퉁불퉁하다 뜻이 있고 '鬐' 갈기(말이나 사자 따위의 목덜미에 난 긴 털), 물고기의 등지느러미, 무지개의 구부정한 모양의 의미가 있어 앞에 길 장(長)자가 붙어 지명의 뜻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앞에 나가사키는 길 장(長)자가 어울리지 않고 후자의 기에 장(長)자가 붙어 긴 갈기, 긴 물고기 지느러미, 긴 무지개모양 등으로 지명이 확실하게 각인된다. 나가사키는 일본지명이고 장기는 혹 조선지명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 이 문제는 나중에 또 거론할 것이다. 물론 기후상황에서 한반도 지형관계를 여기에 맞추려 하면 안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관료들이 귀양을 가게 되면 장독이 있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여 염라대왕처럼 여겼다는 기록이 비일비재하다. 기후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는 것인데 이 강진은 장기보다 더 심한 열악한 환경을 가진 곳임을 알 수가 있으며 이 강진이 그의 외가(外家)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藏書量)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알려지며 유배를 마치며 결국 1819년에 목민심서(牧民心書)완성되었다고 한다. [1]다산시문집 제5권 시(詩) 산행잡구(山行雜謳) 20수. 3월 18일 신유년(辛酉年1801) 瀲灩西池水 넘실넘실 서쪽에 있는 못물 / 無人話種蓮 연을 심자 말하는 자는 없고 / 年年破茅屋 세세 연년 다 깨진 초가집에서 / 但索築隄錢 둑 쌓을 돈만을 챙긴다네 / 沙上鮮魚市 모래밭 위는 생선 시장이요 / 橋邊濁酒家 다리 가엔 막걸리 집일러라 / 由來壚上女 언제나 목로집 계집들은 / 紅髮似夷鰕 붉은 머리털이 왜놈 종자 같아 / 臨水黃茆屋 물가에 자리 잡은 초가집 / 中棲賣藥翁 그 속에는 약장수 영감이 사는데 / 婆娑數枝柳 한들한들 버드나무 몇 가지가 / 搖作一簾風 바람결에 발처럼 흔들거리네 / [2]다산시문집 제5권 시(詩) 채호는 흉년을 걱정하여 쓴 시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기근이 들어 들에 푸른 싹이라곤 없었으므로 아낙들이 쑥을 캐어다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釆蒿閔荒也 未秋而饑 野無靑草 婦人釆蒿爲鬻以當食焉] 기사년(己巳年:1809) 내가 다산의 초당에 있을 때인데, 그 해에 크게 가물어 그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였었다. 6월 초가 되자 유랑민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였다.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이몸으로서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기에 오매(烏昧)에 관하여 아뢸 길이 없고, 은대(銀臺)의 그림도 바칠 길이 없어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가(詩歌)로 엮어보았는데, 그것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슬피 울듯이 그들과 함께 울면서 올바른 이성과 감정으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오래 써 모은 것이 몇 편 되어 이름하여 전가기사(田家紀事)라고 하였다. 釆蒿釆蒿 다북쑥을 캐고 또 캐지만 / 匪蒿伊莪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로세 / 群行如羊 양떼처럼 떼를 지어 / 遵彼山坡 저 산언덕을 오르네 / 靑裙偊僂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 紅髮俄兮 흐트러진 붉은 머리털 / 采蒿何爲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 涕滂沱兮 눈물이 쏟아진다네 / 甁無殘粟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 野無萌芽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 唯蒿生之 다북쑥만이 나서 / 爲毬爲科 무더기를 이뤘기에 / 乾之䕩之 말리고 또 말리고 / 瀹之鹺之 데치고 소금을 쳐 / 我饘我鬻 미음 쑤고 죽 쑤어 먹지 / 庶无他兮 다른 것 아니라네 / [1]번 시(詩)의 배경장소는 경상도 장기현(長鬐)임을 알 수 있고 [2]번 시(詩)는 정약용의 외가가 있는 전라도 강진(康津)임을 알 수가 있다. [1]산행잡구(山行雜謳) 20수. 3월 18일 신유년(辛酉年1801)의 싯귀를 보면 沙上鮮魚市 모래밭 위는 생선 시장이요 / 橋邊濁酒家 다리 가엔 막걸리 집일러라 / 由來壚上女 언제나 목로집 계집들은 / 紅髮似夷鰕 붉은 머리털이 왜놈 종자 같아 / 에서 보면 장기현은 어촌(漁村)임을 알 수 있고 어떤 다리 가엔 막걸리 주막이 있고 널빤지로 좁고 길게 만든 상이 놓인 선술집에서 시중들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들이 꼭 왜놈종자(夷鰕)같다 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장기현에 일본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일까? 나가사키라면 받아들일 것인가. 정약용은 왜놈종자를 이하(夷鰕)라 하였는데 이것은 낮춰부르는 별칭이라 할 때 정식으로 하이‘蝦夷’이며 이 하이는 일본열도(日本列島)의 동북(東北) 지방(地方)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키고 일본(日本)에서는 “海老, 蝦, 蛯, 鰕(虾)”라는 한자(漢字)를 사용하여 ‘에비’(えび)라고 발음(發音)하고, 모두‘새우’라는 의미이며 또한 ‘蝦夷’(하이)를 ‘에미시’(えみし), ‘에비스’(えびす), ‘에조’(えぞ)라고 발음(發音)하며 야마토(大和)에 의해 이(異) 민족시 되었던 민족 집단을 일컫는 말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일본(야마토)가 이(異)민족시 한 새우(鰕)종족은 어디에 위치한 민족일까? 하이(蝦夷)의 사람들은 짐승의 털로 옷을 짜입고 생선 기름을 먹는데 수염은 새우 수염처럼 길고, 다니는 데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으며 높은 산을 올라가고 험한 길을 다니는 데는 금수(禽獸)보다 빠르고 물밑으로도 다닐 수 있어 그 용맹스럽고 사납기가 비할 데 없다라고 다산시문집 제22권 / 잡평(雜評) 이아정(李雅亭)의 비왜론(備倭論)에 대한 평(評)에서 말하고 있다. 일본 동북(東北) 지방(地方)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였으니 일본을 카리브해 수많은 도서라고 할 때 새우모양을 한 땅을 찾으면 된다. 바로 그랜드 바하마 아일랜드(Grand Bahama Island)이다. 이곳을 하이도(蝦夷島)라 한 사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조선에 붉은 머리의 일본종자들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다산시문집만 보면 이곳 일본출신의 붉은 머리 여자들이 장기에 들어와 주막집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2]번 시(詩)의 群行如羊 양떼처럼 떼를 지어 / 遵彼山坡 저 산언덕을 오르네 / 靑裙偊僂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 紅髮俄兮 흐트러진 붉은 머리털 / 采蒿何爲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 涕滂沱兮 눈물이 쏟아진다네 / 甁無殘粟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 野無萌芽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 [2]번 시(詩)의 배경장소가 경상도 장기현에서 유배지 이동으로 인하여 전라도 강진(康津)임을 알 수 있는데 이곳에 붉은 머리를 한 여자들이 쑥을 캐러 산위에 떼를 지어 오른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1809년에 가혹한 가뭄이 있어 먹을 양식이 부족하여 쑥을 캐러 산위로 오르는 풍경을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가 있다. 이것과 관계가 깊은 글은 최근에 올린 본 블로그 글 "다북쑥과 새발쑥 그리고 대가뭄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5 " 을 참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은 분명 조선(朝鮮)땅 전라도(全羅道)이며 그리고 유배지 강진(康津)임에도 붉은 머리를 한 여자들이 떼를 지어 쑥을 캐러 산위로 오른다는 사실은 퍽 이채롭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번 시 글에서 경상도 장기현에서도 주막집에 붉은 머리의 일본여자들을 확인했고 [2]번글에서는 전라도 강진에서도 붉은 머리의 일본여자들이 쑥을 깨로 떼를 지어 산위로 오르는 풍경을 말하고 있는데 붉은 머리에 여자들이 남부지역에 상당히 많은 수의 일본여자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들은 곧 유랑민(流浪民:nomads)이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왜 이 당시에 붉은 머리의 일본여자들이 조선 남부지방에 많았을까? 바로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대가뭄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조선 삼남지방 즉 하남도에 심각한 가뭄이 지속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다. 북아메리카대륙의 붉은 머리 본 블로그 글 "다북쑥과 새발쑥 그리고 대가뭄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5 "에서 다산 정약용이 그의 시(詩)에서 말한 붉은 머리 여자들이 조선에 유랑민신세의 왜놈종자 즉 서양일본인이라 한 사실과 그 곳의 위치가 지금의 멕시코 해안과 북부지역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해안은 서양일본인들의 본거지인 카리브해 도서에서 밀려들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이고 그 해안에서 다시 북부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몰려들었을 수 있는 위치이다.이것은 현재 멕시코 북부지역에 백인서양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통계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한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에 붉은 머리(america red hair)의 상징성이라고 한다면 주로 미국초기 대통령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당시에 붉은 머리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했던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미국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 머리가 붉은 색이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숨기려고 흰색가루를 뿌렸다든지 흰색 배리스터 가발(barrister wig)을 사용 했던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대통령까지 역임한 워싱턴도 붉은 머리에 대한 사회편견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 틀림 없다. 우리 역사에서 붉은 머리나 붉은 털을 가진 서양인을 홍모인(紅毛人)이라 하였는데 주로 네덜란드인을 가리키고 실제로 백과사전에는 홍모인(紅毛人)이란 구체적으로는 ‘네덜란드 인 즉 화란(和蘭)을 가리킨다.’라고 정리되어 있다. 홍모[紅毛]라는 것은 붉은 수염, 붉은 머리카락, 붉은 털 이렇게 불릴 수 있는 명칭인데 조선시대(朝鮮時代)때는 머리털이 붉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서양 사람을 양이(洋夷)라 하는 것도 낮잡아 이르던 말이라고 했다. 서양이라고 하면 지금은 유럽대륙으로 총칭되지만 사실상 조선시대 때 양이란 명칭은 바다의 세력들을 말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양은 대륙이 아니라 물 즉 대양(大洋) 바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붉은 갈색 머리카락은 시리아 인, 레바논 인, 요르단 인, 팔레스타인인 중동사람들 사이에서 흔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의 아랍이란 틀을 씌웠다고 생각해보는 것도 앞의 유럽역사관에 따라 무리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북아메리카대륙 특히 뉴욕에 네덜란드인들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면이 있다.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네덜란드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1602-1799)가 매우 정상적인 펙트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거의 이 동인도회사는 서양일본세력들에게 상징적인 것으로써 기존 체제로부터 상당히 제한적으로 통제를 받았던 것이 분명하며 이것을 탈피하기 위해 그들은 합종연횡(合從連衡)형태를 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바로 1858년 안세이5개국조약(安政五カ国条約:Ansei Five-Power Treaties)이라는 것이며 이들 세력들은 독립적으로는 힘이 미치지 못하여 연합하는 형태를 취하고 그러한 연합형태의 힘을 빌어 하나의 체제인 대조선(大朝鮮)을 압박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글쓴이는 서양상업무역연합체, 일본무역회사연합체, 동인도회사연합체 등으로 호칭하는 것이다. 초기 해양세력들이 조직한 길드의 확대된 형태를 취한 것과 동일하게 볼 수 있다. 독일(Prussia)은 고려주체가 운영하는 상업체로 이때쯤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1273-1918)로 나타난다. 대조선(大朝鮮)이 19세기초 브리티시로 나타나는 것과 다르다 할 수 있다. 동인도회사가 칙허회사라고 서양자료에는 당당하게 나타난다. 18세기초 그때까지 칙허는 그들이 비밀스럽게 거래하던 귀족이나 봉건주의 칙허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으로는 하나의 체제 영역인 무역거리가 빈번하고 자원이 풍부한 북아메리카대륙을 깃점으로 하는 무역으로부터는 그들의 행동을 자유스럽게 할 수만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바로 대조선은 그들을 감시하고 제재할 수 있었던 강력한 하나의 체제였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칙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때론 궁지에 몰렸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1858년에 그렇게 뭉치고 합체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을 연합체일본이라 한다. 특히 이러한 서양일본인들은 어쨌거나 체제의 엄격한 제재를 피해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모여들었고 앵글족,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더치(네덜란드) 사람이 가장 핵심적인 구성원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잉글랜드 앨비언(Albion)출신등이 버지니아, 메사추세츠에 많이 모여들었다는 사실도 그기에 더 할 수가 있다. 이들이 모두 서양일본인 즉 일본종자라고 보아야 할 개연성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체제에 반기를 든 그래서 왜놈종자라고 비하하는 종족들은 어떤 것인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 지도자들의 붉은 머리 상황이 아래 자료에 나타난다. Like Britain, America is another place that's had its fair share of red-haired leaders. In fact George Washington, Thomas Jefferson and Andrew Jackson were all red-haired. Even the famed discoverer of the Americas, Christopher Columbus, was a freckle-faced redhead.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붉은 머리의 지도자들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몫을 차지했던 또 다른 장소라고 한 말은 미국 대통령들이 붉은 머리를 가졌어도 그곳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언질 속에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앤드류 잭슨은 모두 붉은 머리였다고 알려진다. 미주 지역의 유명한 발견자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조차도 주근깨가 있는 붉은 머리였다는 사실을 자료는 알리고 있다. 즉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붉은 머리였다는 사실인데 또 다른 사진들은 흰머리색으로 붉은 머리를 감추고 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대혁명가인 반기독교 이신론(理神論)자인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도 붉은 머리임에도 흰 가발을 즐겨사용 했음을 그림으로 알 수가 있다. 조선다능주의학자 다산이 말한 것처럼 그 만큼 어느시대에는 자신들의 붉은 머리가 부자유스럽게 그 사회가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며 그들 서양인들 사이에도 붉은 머리는 영혼이 없어서 불길하다는 미신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As a young man Washington had red hair. This fact often gets overlooked as he also used to powder his hair white, giving him the iconic look that we still associate with him today. His red hair seems to have been forgotten even by earlier historians, as I discovered from the following article, published in the New York Times in 1922. It stated:"Albert Bushnell Hart, Professor of Government at Harvard University, addressing a Washington's Birthday celebration here today, declared that the first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had red hair. "Although it has been ignored by posterity," he said, "Washington had red hair, covered by his wig"." 젊은 시절 조지 워싱턴은 빨간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종종 그가 머리카락을 흰색으로 만들었던 것을 간과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와 연관된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922년 《뉴욕 타임스》에 실린 다음 기사에서 내가 발견한 것처럼, 그의 붉은 머리는 초기 역사학자들에 의해서도 잊혀진 것 같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버드 대학의 앨버트 부쉬 넬 하트 교수는 오늘 워싱턴의 생일 축하 행사에 참석하여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다고 선언했다. "후세에 무시되었지만 워싱턴은 가발로 덮인 빨간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Incidentally, I also came across a similar New York Times article, only this time about Robespierre. It stated that he had "blue eyes, carnation lips, and light chestnut hair." If this was the case it's interesting to note that Washington, Cromwell and Robespierre - the three respective leaders of the revolutions in England, France and America, were all owners of copper-coloured locks. The colour of revolution it would seem. 게다가 나는 프랑스 혁명의 주요인물 급진적 자코뱅당 지도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에 관한 비슷한 《뉴욕타임스》 기사도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푸른 눈, 카네이션(담홍색)입술, 가벼운 밤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국, 프랑스, 미국의 혁명 지도자 3명인 워싱턴, 크롬웰, 로베스피에르가 모두 ‘구리 색 자물쇠’소유자 이었음을 주목하는 것이 흥미롭다. 붉은 색은 혁명의 색깔인 것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Andrew Jackson was the seven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was nicknamed "Old Hickory." He was tall, with penetrating blue eyes and a shock of unruly red hair. He is now probably most famous for his opposition to the National Bank, believing it to increase the fortunes of an "elite circle" at the expense of the rest of the country. 앤드류 잭슨은 미국의 7대 대통령이었고 "완고한 늙은이"라는 별명을 붙어있다. 그는 키가 크고 푸른 눈과 헝클어진 붉은 머리가 충격적이다. 그는 현재 국립은행에 대한 반대로 가장 유명하며 나머지 국가를 희생시키면서 "엘리트 서클"의 명운(命運)을 증가 시킨다고 믿고 있다. Martin Van Buren was the 8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He was only five and a half feet tall and had red hair and red sideburns. He was nicknamed "the Little Magician" and "the Red Fox of Kinderhook," partly because of his appearance and partly because of his political astuteness. However, he is probably more famous today for the Van Buren Boys episode of Seinfeld than he is for his time in office. 밴 뷰렌은 미국의 8대 대통령이었다. 키는 겨우 5.5피트(1.67m)밖에 되지 않았고 빨간 머리에 빨간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작은 마술사"와 "킨더 후크의 붉은 여우"라는 별명이 붙었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외모와 정치적 기민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사인필드의 반뷰렌소년(Van Buren Boys)에피소드에서 오늘 더 유명해 질 것이다. Thomas Jefferson: In my opinion America's greatest president. Thomas Jefferson was pretty much the architect of modern America and served as President from 1801 to 1809. He also drafted the Americ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He was apparently very tall and bony in appearance and had red hair and a sprightly step. He also had a penchant for wearing red breeches, which were often ridiculed by his political opponents. 내 생각에는 미국 최고의 대통령으로 3대 토머스 제퍼슨은 현대 미국의 건축가였으며 1801 년부터 1809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그는 또한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외모가 매우 크고 뼈대가 있었고 붉은 머리카락과 활기찬 발걸음을 가졌다. 그는 또한 종종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조롱당하는 빨간 바지를 입는 경향이 있다. The discourse also contained some interesting information regarding the frequency of red hair in Virginia during the days of Jefferson."Red hair was another peculiarity of the Virginians. One who saw the Virginia troops pass through Petersburg on their way to join the army of Greene, told my informant that two-thirds of the officers had red hair. Jefferson, Campbell, the hero of King's Mountain, Arthur Campbell, John Taylor of Caroline, many of the valiant race of Green, had red hair." 담화에는 제퍼슨 시대의 버지니아에서 붉은 머리카락의 빈도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빨간 머리카락은 버지니아 인의 또 다른 특색이었다. 버지니아 군대가 피터즈버그(Petersburg)를 지나 그린의 군대에 합류하는 것을 보았던 사람은 내 정보원에게 경찰의 3 분의 2가 빨간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제퍼슨, 캠벨, 킹스 마운틴(King 's Mountain), 아서 캠벨(Arthur Campbell), 캐롤라인(Caroline)의 존 테일러(John Taylor), 그린의 용감한 인종 중 다수는 빨간 머리카락을 가졌다. 위 내용들은 전부 북아메리카대륙 유명인들의 붉은 머리 현황을 영어자료로 살펴보았다. 아니 북아메리카대륙이라기 보다 왜놈종자라고 하는 서양일본인들에게 나타나는 현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독립전쟁 이후 초기의 미국대통령의 약력을 보면 참으로 이상한 것이 많다.지금이야 인권문제가 있어 그렇지 못하지만 조선시대 고서만 보아도 서양인을 인간취급조차 하지 않았고 특히 홍모인이라 하여 매우 멸시하였으며 다산의 시문집에서만 보더라도 왜놈종자라 하여 멸시하였다. 이러한 차별은 서양인들의 극한 대립관이나 필요이상으로 적대시하며 반체제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편견은 조선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범 세계적인 경향으로 풀어 볼 수 있다.물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조선인들이 서양인을 양이라 하거나 왜놈종자라 한 것은 당시 조선사회에서 어쨌든 붉은 머리칼을 한사람에게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음이 틀림없다.우리나라 고서내용 뿐만아니라 서양인 백인들도 붉은 머리와 주근깨를 가진 사람을 생강이름인 진저(Ginger)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서양인간에도 이처럼 비하한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붉은 계통의 머리 소유자들의 통계를 보면 아일랜드인들이 많고 그 다음은 스코틀랜드이다.그리고 미국의 버지니아주에는 상당히 많은 붉은 머리 소유자가 있었고 지금도 그 수가 미국 50개주에서 최고의 높은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영향력이 가장 높았다고 판단되는 미국대통령 중에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 ~1799)은 놀랍게도 버지니아 웨스트모어랜드 출신으로 붉은 머리 소유자로 밝혀져 버지니아에는 붉은 머리가 많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2대 존 애덤스(John Adams:1735~1826)는 붉은 머리는 아니지만 매사추세츠 만 브레인트리 출신으로 나타나고 3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은 버지니아주 구치랜드 카운티 출신으로 붉은 머리 소유자이다. 4대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1751-1836)도 붉은 머리는 아니지만 버지니아 식민지 포트 콘웨이 출신이며 5대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1831)역시 버지니아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 출신으로 나타나 초기의 대통령 거의가 버지니아출신으로 나타난다. 6대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1767~1848)는 2대 애덤스와 마찬가지로 매사추세츠 만 퀸시 출신이고 7대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1767~1845) 역시 붉은 머리 소유자로써 스코틀랜드 장로교 이민자인 앤드루 잭슨 시니어와 엘리자베스 허친슨 잭슨 부부 사이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웩스호스 태어났고 그의 부모가 켈트족 아일랜드에서 이민자 출신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붉은 머리가 많이 나타난다는 켈트족이다. 특이한 것은 미국 8대 대통령인 첫 네덜란드(Dutch)계인,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1782~1862)은 1631년 북미에 와서 맨하탄 섬의 땅을 구입한 네덜란드(Dutch)부말센 마을의 코넬리스 마센(Cornelis Maessen)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도 네덜란드(Dutch)출신이며 요하네스 반 알렌의 미망인인 마리아 호스라 알려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네덜란드어를 사용했고 대통령이 되었어도 네덜란드어를 사용했다고 알려진다. 네덜란드인들이 차지한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는 코네티컷(Connecticut),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델라웨어(Delaware)주를 포함한 1600년대 초반 네덜란드 식민지로 알려지고 1648년 2천명에서 1660년 1만명으로 늘어났으며 정착자의 절반 만이 네덜란드인들이지만 다른 절반은 주로 벨기에어를 사용하는 왈롱인(Wallonne)들과 프랑스 위그노(Huguenot)들이었다고 알져진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같은 언어군이다.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 "에서 밝힌 사실들이지만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뉴암스테르담의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Klaes van Rosenvelt)손자였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어머니가 바로 위그노신자이다.네덜란드인들은 미국독립전쟁으로부터 미국역사에 깊이 개입한 사실과 역대대통령들이 네덜란드계로 나타나는 것도 역사친밀성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네덜란드가 일본이라고 한다면 미국역시 이 범주에 넣고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북아메리카대륙 붉은 머리 분포지도(North American Reddish distribution map) 애팔래치아의 스카치 아일랜드인(The scotch Irish of the Appalachian) 마무리 북아메리카대륙 붉은 머리 분포지도(North American Reddish distribution map)에 보듯이 진 빨강 표식이 되어 있는 켄터키와 버지니아경계와 테네시와 노스캐롤라이나 경계, 조지아북부경계 등 비율이 10~15% 가장 높게 나타나며 이것은 아래 애팔래치아의 스카치 아일래드인의 이동경로도에 나타나듯이 이들의 영향이 크게 나타난다. 특히 북아메리카대륙 동남부전체와 텍사스동북부, 오클라호마, 아칸소, 루이지애나, 미시시피,앨라배마, 조지아, 플로리다 북부지방,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 캔터키, 테네시, 미주리·일리노이·인디아나·오하이오 남부 등 약 5~10%의 비율로 나타난다. 그리고 바이킹 유물이 발견된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지역인 온타리오, 퀘벡남부,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과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까지 넓게 분포지역으로 나타난다. 캐나다 서부지역인 브리티시컬럼비아, 알버타, 그리고 워싱턴 동부, 아이아도, 몬타나서부, 오레콘동남부, 네바다, 캘리포니아북부, 아리조나서북부, 유타 서남부 지역으로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북아메리카대륙을 대상으로 붉은 머리의 분포지가 어떻게 포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본 블로그 글 "여진어와 영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6"에서 밝혀 본 것으로써 동양사의 여진족이었던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 서게르만어군의 앵글로프리지아어(Anglo-Frisian languages)계통도 내에 포함되는 언어군을 붉은 머리 군으로 생각할 수 있다. 네덜란드어가 서(西)게르만어군의 북부 플랑드르(Flandre)으로 분류되는 것과 고대영어가 서(西)게르만어군의 앵글프리지아어족(Anglo-Frisian)로 구분되는 것에서 붉은 머리는 대서양 서부 게르만민족과 가장 많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위 자료를 인용하더라도 조사의 신빙성은 높게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중엽에 중국 청나라가 여진어(女眞語)를 청학(淸學:滿洲語學)으로 개칭 고쳐 불렀다는 것도 같은 시기 조선에서 실학파로 분류된 북학파(北學派)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북학파의 핵심적인 것이 선진문물과 고급기술이라 할 때 분명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문제이며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 산업발전이 크게 나타난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으로 북학파의 실체를 보면 당시 한양의 상공업 발전과 직간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 주로 상품의 유통이나 생산수단의 발전을 주장한 학파인데 중상학파(重商學派)라 하고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등은 상업을 영위하던 지식자들이다. 때문에 북학파들은 상당히 선진문물과 고급기술에 흠취되었던 것이 분명하다.북학의[北學議]를 쓴 박제가가 정조2년(1778)에 사은사 채제공을 동행하여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편찬한 책인데 농사, 누에치기, 가축 기르기, 성곽 축조, 집 짓기, 배와 수레 제작부터 기와, 인장, 붓, 자를 제작하는 방법을 일일이 적어 참고하도록 하였는데 사실상 이렇게 기술이 진보되었다고 하는 청나라는 1910년에 허망하게 망하고 오히려 서양산업혁명과 자본의 중심이라고 하는 미국과 영국은 번창하여 오늘날 선진국으로 군림하는 것 자체가 북학파의 실체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동아시아역사와 한반도 역사가 주장하는 역사 사실은 이치적으로 맞아드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정말 황당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청나라가 여진어를 청학(淸學)이라고 개칭한 것이나 한반도 조선사에서 청나라를 북청(北淸)이라 하여 북학이라 한 것은 영어권의 학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만약 여진어(女眞語)가 고대 영어라고 하고 청학(淸學) 역시 영문학이라면 북학파가 주장한 북학(北學)은 미국영국이 가지는 선진기술이며 즉 서양학(西洋學)이라 볼 수 있고 서교(西敎)가 서학(西學)이라고 칭했다면 바로 천주교(天主敎)와 연결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다산(茶山)이 서교(西敎)와 관계가 있어 유배를 당한 것처럼 서학과 친밀했었다는 반증이다. 오늘날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시대 유형원(柳馨遠:1622-1673), 이익(李瀷:1681-1763)으로 이어지는 실학을 계승했고 북학파의 사상까지 받아들여 실용지학(實用之學)인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했다 하였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 함은 사전적 의미가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하는 용어라 하였는데 이것은 서양실증생활과학과 경공업발달입문기술서 정도로 취급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본 블로그 글 "소화기와 자명종(問辰鍾:鬧鐘)으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8"에서 왜 조선과 서양국은 서로 과학 기술을 공유하며 공생공존하려 했을까? 하는 질문에 하나의 체제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고 조선 영역내 서쪽에 있는 도시에 사는 서양인들이라고 할 때 그들의 소속은 하나의 체제속에 존재해야 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으며 그들의 기술이 앞섰다면 조선에서 필요할 때 즉시 공급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받았을 것이라고 하였고 당시 조선은 많은 문물을 공개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 체제였으며 상대적으로도 공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기술을 공급했을 것이란 믿음이 있다 하였다. 때문에 산업혁명이후 서양인들이 보유한 기술선진문물을 습득하려고 노력한 조선시대의 실학전체를 다시 규명해야 할 문제가 대두된다. 비록 서양인들이 선진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과거 못된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왜놈종자란 이미지는 조선인들에게 깊이 새겨진 주홍글씨와 같은 것이 아니었겠는가 한다. 결국 현재까지 나타난 것에서 볼 때 거의 조선시대 사람들이 양이(洋夷)라 하거나 홍모인(紅毛人) 그리고 왜놈종자라고 한 것 전부 붉은머리와 관계되고 조선시대에서 가장 경계하는 종족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는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밝혔듯이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40-1596)를 한반도사 임진왜란에 등장하는 가공인물 풍신수길(豊臣秀吉:1537-1598)이라 한 것은 왜놈종자로 충분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역시 붉은 머리의 소유자이다. 또한 해적왕 드레이크를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고 하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1세((Elizabeth I, 1533-1603,재위:1558-1603)가 위 그림에도 알 수 있듯이 붉은 머리의 소유자임이 밝혀졌다. 우리가 늘 임진왜란을 판단할 때 왜란은 조선내 체제속에서 발생한 내란이라는 역사사실은 그들도 조선인체제속에 한 구성원이었다는 이야기다. 만약 조선에 대항하는 붉은 머리의 소유자들이 이와같은 반체제 성향이 짙은 종족이었다고 한다면 잉글랜드나,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이 오늘날 국가로 인식되고 있지만 대조선 내에 속한 역사 개체로써 조선체제 하에 존재했던 세력임을 알 수가 있다. 이들 속에 붉은 머리는 아슈케나즈 유대인(Ashkenazi Jews)같은 종족, 비밀리 상거래를 하는 길드 조직체 일원이나, 사채고리대금업자이거나 주식회사를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bourgeois)이거나 모두가 조선체제 속에서의 서양일본세력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붉은 머리 소유자들이 오늘날 버지니아에 많다는 것은 이러한 역사와 맞물려 있음이 틀림없고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지역을 거점으로 한 엘비언(Albion)들의 최종 정착지가 바로 버지니아라는 점에서 이러한 사실파악이 실증이 되고 있다 할 것이다. 또한 근대사적으로 보면 러시아(Russia)는 루시(Rusi)를 바탕으로 하는 명칭이라 하지만 일본이 말하고 있는 로서아(露西亞)가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에서의 "Russo"라 한 것은 본 블로그 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4"에서 말했듯이 Russo is an Italian surname meaning red-haired. Another variant is Rossi (Central and Northern Italy). It is derived from the nickname "rosso", meaning red, 루소(Russo)는 붉은 의미가 강하고 또는 붉은 머리를 가진 이탈리아인의 고유 별명(surname)이라 하였으며 러시아공국(Russian Principalities)을 설립한 바이킹족인 고대스칸디나비아인의 노를 젓는 사람들(the men who row)이라고 하여 해양세력임을 나타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고대 시칠리아의 귀족 별칭이라는 사실과 붉은 머리, 붉은 상징성이 해양세력과 도 정확히 연계되고 있음도 알 수 있고 본 블로그 글 "1차 려몽 일본원정으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0"에서 쿠바와 시칠리아가 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는데 이 또한 해양세력들이 활동한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끝으로 흥미로운 것은 지난 역사에서 기존체제를 부정하던 세력들은 전부 붉은 머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브리티시에게 반란을 도모한 미국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그렇고, 잉글랜드 찰스1세(Charles I)에게 반기를 든 크롬웰이 붉은 머리이고, 프랑스 루이16세(Louis XVI)에게 반란을 도모하고 처형장으로 내몬 로베스피에르 역시 붉은 머리 소유자로 밝혀졌다.그리고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 신대륙이라 하면서 원주민들을 집단 학살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붉은 머리이다. 해적왕 드레이크도 붉은 머리이다. 적어도 글쓴이는 미국독립과 당시 국가설립자체를 신뢰하지 않고 있지만 그러한 미국역사에서 초기의 미국대통령이라는 사람들이 모두가 거의 붉은 머리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실도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반란, 저항의 유전자라고 치부하기엔 그들은 너무 잔혹했다. 머리가 붉다는 편견이 아니라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본 상징성 때문이다.기존체제역사와 정반대 쪽에 있었던 모든 체제 반란인들은 흥미롭게도 붉은 머리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부스러져 먼지처럼 사라진 역사를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수많은 자국을 찾아 헤메고 있을 뿐이다. 근세기 이전 하나의 체제에 불만을 가지거나 반란을 도모하고 급기야 행동으로 옮긴 붉은 머리 서양인들은 오늘날 신대륙 문명을 만들었고 그리스 로마의 문명을 이어받은 우월한 유럽인되어 버렸다. 다산이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서양인들을 왜놈종자라고 한 엄중한 부르짖음은 지금도 가슴을 치는 듯하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바이킹" rel="tag" target="_blank">바이킹</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로베스피에르" rel="tag" target="_blank">로베스피에르</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개몽주의" rel="tag" target="_blank">개몽주의</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앨비언(Albion)" rel="tag" target="_blank">앨비언(Albio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 rel="tag" target="_blank">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유럽(Erub)" rel="tag" target="_blank">유럽(Erub)</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랍(Alab)" rel="tag" target="_blank">아랍(Alab)</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진저ginger" rel="tag" target="_blank">진저ginger</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붉은머리 redhead" rel="tag" target="_blank">붉은머리 redhead</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담 바이스하우푸트" rel="tag" target="_blank">아담 바이스하우푸트</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일루미나티(Illuminati)" rel="tag" target="_blank">일루미나티(Illuminati)</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예수회(Society of Jesus)" rel="tag" target="_blank">예수회(Society of Jesus)</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길드(Guild)" rel="tag" target="_blank">길드(Guild)</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트러스트 파괴자(Trust Buster)" rel="tag" target="_blank">트러스트 파괴자(Trust Buster)</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왜놈종자" rel="tag" target="_blank">왜놈종자</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 rel="tag" target="_blank">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서 로빈슨(Arthur H. Robinson)" rel="tag" target="_blank">아서 로빈슨(Arthur H. Robinso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로빈슨 투영법(Robinson projection)" rel="tag" target="_blank">로빈슨 투영법(Robinson projectio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R1b" rel="tag" target="_blank">R1b</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메티스인" rel="tag" target="_blank">메티스인</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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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도충(夜盜蟲)
******************** 야도충(夜盜蟲) 글쓴이:한부울 [1]南朝鮮(남조선)은旱魃繼續(한발계속) 1934.07.05 동아일보 南朝鮮(남조선)은旱魃繼續(한발계속) 移秧不能(이앙불능),夜盜蟲(야도충)까지發生(발생) 하지(夏至(하지))를 전후한 이앙기에 잇어 한발이 약간 게속하든 끝에 一(일)적천금의 감우가 나라기시작하야 十(십)여일을 장마로 화하야 중부이북에는 흡복을 넘어서 하천이 범람하야 도리어 침수된 곳도 잇는 반면에 남부지방엔 농무만 잠긴 중에 의연이 한발이 게속 되어 묘판이 균렬되고 앞으로 一(일)주일만 더 게속하면 다른 곡식의 씨앗을 뿌려 심는 대파(代播)를 준비한다는 가뭄 때문에 일어나는 소동인 한소(旱騷)의 기현상을 보이고 잇다. 경남밀양(密陽)지방에는 비가 올듯 올듯하면서 오지아니하야 사시로 쉬지않고 흘으는 밀양강 물도 상하로 곳곳이 지소(池沼)가되어 밀양 명산인 은어(銀魚)도 극히 귀하게 되고 각 수리조합구역을 제한 외에는 한포기의 모도 심지 못하고 일반농가에서는 크게 우려 중이며 각 촌락에는 식수에도 큰 곤난을 받는다 한다. 경남합천군 덕곡면(陜川德谷面)에는 요사이 야도충(夜盜蟲)이라는 버러지가 창궐하야 육도(陸稻)와 조(粟)등 피해가 막대하므로 일반농가에서는 게속하는 한반도 이앙(移秧:移植)도 못하고 잇는 이때 인심은 극도로 흉흉하며 관게 당국은 각 학교와 열락하야 구제에 노력중이라는대 피해 면적은 총 경작면적 224정보에 약 7할가량 되는153정보나 되고 방금도 피해가 늘어가는 중인대 일주야의 피해되는 면적이 28정보나 된다 한다. 때는 1934년 여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한발이 계속되어 이앙이 불가능할 정도로 한발피해가 막대하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경남 합천군 덕곡면(陜川德谷面)에는 야도충(夜盜蟲)이 발생하여 밭벼(육도 陸稻:upland rice)와 조(粟, Setaria italica)농사의 피해가 막대하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밤나방 1.나비목 밤나방과에 속한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 야도충 [夜盜蟲] ヨトウガの幼虫 <昆虫> ヨトウガ(夜盗蛾)の幼虫ようちゅう. 야도충(夜盜蟲)[지렁이] a night crawler; an army worm; a cutworm; ((英)) a nightwalker. [19655 Spodoptera litura Oriental Leafworm Moth] 야도충(夜盜蟲) 담배거세미나방 俗稱黑肚蟲、土蟲或行軍蟲 科學分類 界: 動物界 Animalia 門: 節肢動物門 Arthropoda 綱: 昆蟲綱 Insecta 目: 鱗翅目 Lepidoptera 科: 夜蛾科 Drepanidae 屬: 夜盜蛾屬 Spodoptera 種: 斜紋夜盜蟲 S. litura 二名法 Spodoptera litura(Fabricius, 1775) Johan Christian Fabricius:1745-1808 was a Danish zoologist 異名 Oriental Leafworm Moth-Spodoptera litura Cluster caterpillar Cotton leafworm-Alabama argillacea Tobacco cutworm Tropical armyworm 斜紋夜盜蟲(学名:Spodoptera litura)是鱗翅目夜蛾科夜盜蛾屬的一种,俗稱黑肚蟲、土蟲或行軍蟲。一年可發生 8至11 世代,初孵化的幼蟲為灰綠色,具群集性,三齡以後幼蟲漸轉為黑色。幼蟲晝伏夜出,雜食性,可危害多種作物如葉菜類、茼蒿、落花生、田菁、毛豆、紅豆、青蔥、玉米、花卉、瓜果類及印度棗、木瓜等果樹等多種作物,幼蟲食量極大,會大量啃食植株心梢及葉片,嚴重時常導致全園廢耕。 斜紋夜盜蛾成蟲體長約2公分,外觀呈黑褐色,翅中央有一條寬長灰白斜帶為其辨識特徵,有趨光性,雌蟲交尾後飛至植株葉背產下數 10 至數百粒卵,堆集成卵塊,其上附有雌蟲的鱗毛。 비스듬무늬야도충(斜紋夜盜蟲:Spodoptera litura)은 검은 표피가 있는 벌레 또는 군대벌레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나비목(Lepidoptera)속의 종이다. 새롭게 부화 된 유충은 회백색이며 군집생활 하고, 유생은 3세 이후에 검게 변한다. 유충은 야행성이며 육식성이고 잎이 많은 채소, 샐비어(茼蒿), 땅콩(落花生), 그레이프(田菁), 에다마메(Edamame:毛豆,) 팥(紅豆), 샬롯(青蔥), 옥수수(玉米), 화분(花卉), 멜론(melon,apple)과 인도채(印度棗), 중미와 남미 원산지 파파야(papaya) 및 기타 과일나무 등 다양한 작물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어린 애벌레는 먹는 것이 많고 심지와 엽편을 먹기 때문에 종종 심각한 폐허로 만든다. Spodoptera litura의 성충은 길이가 약 2cm이며 짙은 갈색을 띠고 있고 날개 중앙에 넓은 흰색의 사선(斜線)이 있어 식별 가능하며 빛의 자극에 대하여 그것을 향하거나 피하려고 움직이려는 성질 추광성(趨光性)이 있고 암충이 교미한 후, 식물 잎사귀의 아래 수로 날아와 알을 만들고, 알 덩어리를 쌓아서 그 위에 암충이 붙어 있는 털이 덮인 군집으로 만든다. 추광성(趨光性)-나방의 종에서 페로몬(pheromone)은 페로몬 땀샘(females gland)에 의해 암컷에 의해 생산되며, 자신의 종의 수컷을 유치하기 위해 방출된다. 호환되지 않는 동료의 정확한 인식은 재생산 성공에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간과 에너지 낭비, 포식의 위험성 증가, 생존 가능한 자손의 감소 등과 같은 가파른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Range[edit] S. litura is the most common in South Asia. However, its natural range extends from the Oriental and Australasian areas to parts of the Palearctic region as well. The countries with the most widespread population of S. litura include but are not limited to China, Indonesia, India, Japan, and Malaysia. The range of S. litura has also extended into non-indigenous regions through international trade. Moths in their egg, larvae, or pupae stages can be present in the soil, flower, or vegetation that are being transported across various regions. Pupae especially can be moved long distances, provided that they are not crushed, because of the relatively long pupation period. 위 중국자료를 보면 사실상 아시아 근원종으로 알려지고 있는 스포도프레라 리투라[Spodoptera litura(Fabricius, 1775)]를 설명하는 것인데 추광성을 가진 야도충은 특히 잎이 많은 채소, 샐비어(茼蒿), 땅콩(落花生), 그레이프(田菁), 에다마메(Edamame:毛豆,) 팥(紅豆), 샬롯(青蔥), 옥수수(玉米), 화분(花卉), 멜론(melon,apple)과 인도채(印度棗), 중미와 남미 원산지 파파야(papaya) 및 기타 과일나무 등 다양한 작물에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의 학명은 여러자료에서 다르게 나타나고 위 지도를 보면 학명자가 파브리치우스에서 1857년에 다시 워커로 이전 재수정된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즉 애초, 1775년 덴마크 동물학자 파브리치우스(Fabricius)가 명명한 것 원종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Spodoptera Guenée, 1852 Species Spodoptera litura (Fabricius, 1775 )= Noctua litura (Fabricius, 1775 ) = Prodenia litura (Fabricius, 1775) 위 학명 변천과정을 보더라도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북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동아일보 기사에서 말하고 있는 남조선 지역에 밭벼(육도 陸稻:upland rice)와 조(粟, Setaria italica)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준 야도충 창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위 자료들은 남아시아에서 가장 흔하다고 하였고 자연적 범위는 동양 및 호주 지역에서 북회귀선 이북지역의 일부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위 분포지 역시 이런 사실과 일치한다. S. litura가 가장 많이 근거하는 국가는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일본 및 말레이시아가 포함된다 하지만 이에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한 것은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며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아시아대륙이 아니라 위 분포지는 호주와 남아프리카 동부, 말레이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아시아대륙이라고 하였지만 아시아대륙에는 노란 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황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신중국은 아시아대륙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포함되어야 했을 것이고 일본은 근세기에 서양세력에 의해 생물학적 범위가 넓게 퍼져 있다는 특성을 가질 수 있어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나머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지아는 열대와 아열대 지역을 커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이러한 분포지를 나타내는 종을 1932년도의 동아일보에 기사처럼 남조선 지역에 한발과 함께 창궐한 야도충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S. litura의 분포 범위 또한 국제 무역을 통해 비 원주민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하고 애벌레 또는 번데기 단계에 있는 나방은 여러 지역에 걸쳐 운반되는 토양, 꽃 또는 식물에 존재할 수 있다고 알려지며 번데기는 상대적으로 긴 번식 기간 때문에 분쇄되지 않다면 장거리로 이동할 수 있다고 정리되어 언제든지 자연 대기, 풍에 따라 이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특히 이 종을 명명한 요한 크리스티안 파브리치우스(Johan Christian Fabricius:1745-1808)는 곤충, 거미류, 갑각류 등 모든 절지 동물을 포함하는 곤충강(昆蟲綱,insecta)를 전문으로하는 덴마크의 동물 학자이다. 그는 린네의 제자라고 알려지고 거의 10,000 종의 동물을 명명한 18세기의 가장 주요한 곤충학자로 알려지고 있다. 1762년 코펜하겐 대학에 입학하고 웁살라(Uppsala)로 가 2년간 린네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1776년 출판된 Systema entomologiæ 에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1770년 코펜하겐 교수가 되었으며 1776년에 키엘(Kiel)대학 자연사박물관 교수로 임명되어 평생지위를 유지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대륙을 방문한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다. 1934.07.05 일자 동아일보기사에서 특히 남조선(南朝鮮)은 한발이 계속되고 야도충이 창궐하였다는 이야기는 특별히 위 아시아종으로 규정된 스포도프레라 리투라(Spodoptera litura)로 볼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 [Spodoptera albula – Gray-streaked Armywom Moth – (Walker, 1857)]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줄무니가 있는 거염벌레나방[Spodoptera albula (Walker, 1857)GRAY-STREAKED ARMYWOM MOTH]의 분포지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텍사스와 플로리다주를 나타내고 있다. 이 학명의 명명자인 프란시스 워커(Francis Walker:1809-1874)란 사람인데 영국 곤충 학자이며 곤충학에서 가장 많은 집필가 중에 한 명이라고 소개되었고, 그의 출판물이 엄청난 수가 되어 오히려 후기의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고 알려진다. 워커(Walker)는 1848 년 6 월과 1873 년 후반에 곤충을 분류하기 위해 대영제국에 의해 고용되었다고 알려지는데 이 시기에 대영제국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삼한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체제개체이다. 본 블로그 글 "방울뱀(Rattlesnake, 響尾蛇)으로 본 마지막 대조선(大朝鮮)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2"에서 말하길 영국(브리티시) 즉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이라는 나라가 동양에서 용(龍)이라고 상징되는 드라곤(Dragon)을 국가 문장(文章)으로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순조(純祖, 1790-1834,재위:1800-1834)가 이은 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4년 수렴청정 끝에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소론(少論) 시파(時派)들은 대거 몰락했고 다시 권력은 노론(老論)이었고 시파(時派)인 안동김씨 김조순이 정권을 잡는데 이것이 바로 안동김씨 60년 세도라고 견주어 말했다.즉 브리티시로부터 임명된 것이라면 대조선으로부터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1809 년 7 월 31 일 잉글랜드 사우스 게이트(Southgate, London)에서 태어 났으며 1874 년 10 월 5 일 영국 완스테드(Wanstead)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지고 워커의 저서는 대영 박물관 소장품에 엄청난 양의 자료를 추가했으며 300가지가 넘는 과학 논문과 리포트를 저술했다고 말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메뚜기목(Orthoptera), 풀잠라지목(Neuroptera), 노린재목(Hemiptera), 파리목(Diptera), 나비목(Lepidoptera)과 벌목(Hymenoptera)의 카탈로그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야도충인 거염벌레 역시 나비목(Lepidoptera)임도 알 수가 있다. 평생 친구 인 알렉산더 헨리 할리데이(Alexander Henry Haliday:1806–1870)와 협력하여 벌아목의 장수말벌(Chalcidoidea)의 첫 연구자이기도 하고 곤충 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워커는 산을 좋아하는 여행자였고 1830년 곤충 학자 존 커티스(John Curtis)와 함께 프랑스로 장기간 여행을 하여 특히 잎눈나비과(Satyridae)표본을 수집하였고, 1836년에 윌리암 크리스티(William Christy, Jr.)와 식물학자이며 삽화가인 윌리암 후커(W. Hooker)와 함께 라플란드(Lapland)로의 3 개월간의 여행과 1849년 그의 새로운 신부 엘리자베스 메이(Elizabeth May)와 스위스와 와이트 섬으로 여행했다고 하며 그는 주로 영국(잉글랜드)와 북유럽 등을 방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란 산악 지역에서 보냈는데 이곳은 숲이 울창하여 검은 숲이라고 불린다고 알려진다. 이후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 그가 여행을 한 곳은 전부 유럽대륙임에도 현재 위 분포도에 나타는 검은 점은 텍사스주와 플로리다주, 그리고 카리브해를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아스러운 것이다. 아시아종(Spodoptera litura)으로 규정된 것의 별칭을 보면 담배거세미나방, 비스듬한 무니 야도충(斜紋夜盜蟲)이라 하고 특히 담배라 한 것을 보면 담배작물에 피해를 주는 야도충임을 알 수 있으며 그의 별칭들이 동양잎벌레나방(Oriental Leafworm Moth), 무리쇄기벌레(Cluster caterpillar), 목화잎벌레(Cotton leafworm), 담배거세벌레(Tobacco cutworm), 열대거염벌레(Tropical armyworm)등 목화, 담배, 열대 등의 용어는 전부 북미남부와 중앙아메리카대륙 과 연관되고 아시아 대륙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린네(Carl Peter Thunberg:1743-1828)가 1758년에 명명한 나비목(Lepidoptera)은 기록된 것만 16만종(萬種)가량이 속해 있으며, 46개 상과(上科)와 127개 과(科)로 분류된다. 밤나방상과(Noctuoidea)에는 4개 과(科)와 4개 아과(亞科)를 가지며, 4개의 과(科)중에 밤나방과(Noctuidae Latreille, 1809)가 약 35,000 종(種)으로 알려진다.여기에서 상위 분류: 카라드리니니(Caradrinini)의 스포도프테라속(Spodoptera)의 설명을 보면Spodoptera is a genus of moths of the family Noctuidae. Many are known as pest insects. The larvae are sometimes called armyworms. The roughly 30 species are distributed across six continents.스포도프테라속(Spodoptera)은 밤나방과(Noctuidae)계통의 나방속(屬)이다.이는 해충 곤충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유충은 특히 군대벌레(armyworms)라 부르고 대략 30종(種)이 육대륙(六大陸)에 분포한다고 되어 있다. 야도충에는 수많은 종(種)으로 나눠지고 있어 종을 숫자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숫자이다.특히 군대벌레(armyworm)란 명칭을 가지고 있는 것은 특히 스포도프테라속(Spodoptera)에 있으며 그 중에서도 분류가 빠른 시간적으로 종(種)들을 보면 (1)Spodoptera androgea(Stoll 1782), (2)Spodoptera dolichos(Fabricius 1794), (3)Spodoptera eridania(Cramer 1784), (4)Spodoptera frugiperda(J. E. Smith 1797), (5)Spodoptera ornithogalli(Guenée 1852)이다.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Spodoptera androgea (Stoll, 1782) -Androgea Armyworm Moth 나비목(Lepidoptera), 밤나방상과(Noctuoidea), 밤나방과(Noctuidae), 스포도프테라속(Spodoptera), 안드로케아 군대벌레나방(androgea armyworm moth)은 거세벌레(cutworm) 혹은 화살나방(dart moth)이라 하는데 It is found in North America.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견된다. 북미나방을 위한 체계가 MONA 와 Hodges number 라고 하는데 약 12,000종의 나방이 북미에 존재하고 주로 야행성의 나방과 나비를 함께 분류목록에서 1983년에 멕시코북부의 아메리카 인시목(Lepidoptera of America)발행 목록인데 사실상 미국과 캐나다이다. 위 분포지도를 보면 플로리다 남부와 쿠바, 푸에르토리코에 검은 점이 표식이 되어 있다. Spodoptera androgea의 MONA 또는 Hodges number 는 9671.1이다. (2)Spodoptera dolichos (Fabricius, 1794)-)-Southern Armyworm Moth(남부 군대벌레나방) 요한 크리스티안 파브리치우스(Johan Christian Fabricius:1745-1808)는 곤충, 거미류, 갑각류 등 모든 절지 동물을 포함하는 곤충강(昆蟲綱,insecta)를 전문으로하는 덴마크의 동물 학자이다. 그는 린네의 제자라고 알려지고 거의 10,000 종의 동물을 명명한 18세기의 가장 주요한 곤충학자로 알려지고 있다. Spodoptera dolichos (마라톤 군대벌레 나방 또는 고구마 군대벌레 나방)는 남부 미국 앨라바마(Alabama), 플로리다(Florida), 조지아(Georgia), 루이지애나(Louisiana), 미시시피(Mississippi), 남부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텍사스(Texas)에서 발견 된 밤나방과(Noctuidae)계통의 나방이며, 남쪽으로는 코스타리카에서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까지 미국의 동부 켄터키와 메릴랜드 북쪽으로 창궐할 수 있다. 날개 길이는 약 40mm이며 유충은 다양성이며 야생 및 재배식물의 다양한 먹이를 먹는다. 상당히 동아일보 기사와 일치되는 면이 많다. (3)Spodoptera eridania (Stoll, 1784)-Dolichos Armyworm Moth(마라톤 군대벌레나방) 카스퍼 스톨(Caspar Stoll:1725 and 1730-1791)은 헤쎄-카쎌에서 태어나고 곤충학자로 기억되고 아마포 린넨(linen)과 스페인양모를 파는 네덜란드(Dutch)상인인 피터 크레머(Pieter Cramer:1721-1776)이 시작한 나비에 관한 작업을 하고 출판을 의뢰한 프랑스 교회(De Uitlandsche Kapellen)의 대부분 설명과 plate 를 도왔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남방군대벌레는 해충으로 알려진 나방이다. 그들은 서반구 열대지방과 아열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식엽충(defoliators) 중 하나이며, 그들이 어릴 때 식물을 많이 먹어 종종 그들의 식물에 뼈대만 남긴다. 그들은 또한 플로리다에서 토마토를 많이 먹은 치우고 Spodoptera eridania 에 대한 살충제 생산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 나방 날개 길이는 33-38mm이고 어른들은 일년 내내 날개 짓을 한다. 유충은 다양한 잡초를 먹지만 비름속 아마란투스 종(種)(Amaranthus species)과 미국자리공 피톨라카 아메리카나(Phytolacca americana)를 더 좋아한다. 피해를 보는 작물을 보면 사탕 무우(beet), 양배추(cabbage), 당근(carrot), 콜라드(collard), 카우 피아(cowpea), 가지(eggplant), 오크라(okra), 후추(pepper), 감자(potato), 고구마(sweet potato), 토마토(tomato) 및 수박(watermelon)이 포함된다. 손상된 다른 작물에는 아보카도(avocado), 감귤류(citrus), 땅콩(peanut), 해바라기(sunflower), 벨벳 콩(velvet bean), 담배(tobacco)및 다양한 꽃(various flowers)이 포함된다. 잔디는 거의 먹지 않는다. 더 선호되는 숙주 식물 중 하나는 리마 콩(lima bean)인데 시안 생성 물질 배당체(cyanogenic glycoside)인 리나마린(linamarin)의 접촉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리적 범위를 보면 S. eridania는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중미에서 남아메리카대륙까지 발견된다. 북아메리카대륙 미국남부에서 캔사스와 뉴멕시코 와 같이 서쪽(the southern US states as far west as Kansas and New Mexico)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은 브라질을 통과하여 아르헨티나까지로 나타난다. 위 분포지도를 보면 텍사스주,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남부와 플로리다전역,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리고 카리브해 까지로 표식이 나타난다. (4)Spodoptera frugiperda (J. E. Smith, 1797)-Fall Armyworm Moth(낙엽 군대벌레나방) 담배거세미나방종은 학명자 제임스 에드워드 스미스(James Edward Smith:1759-1888)는 영국식물학자이며 린네 학회(Linnean Society)의 창립자이다. 낙엽 군대벌레(Spodoptera frugiperda) 나비, 나방 인시목(鱗翅目:Lepidoptera)의 순서로 종(種)이며 낙엽군대벌레나방의 애벌레 생활 단계이다. 군대벌레"armyworm"라는 용어는 종(種)의 유충 단계의 대규모 침입 행동을 묘사하는 여러 종(種)을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은 해충으로 간주되어 큰 피해를 입히는 다양한 작물을 파괴할 수 있다. 그것의 과학적인 이름은 'frugiperda' 에서 파생되는데 'frugiperda'는 손실 된 과일에 대한 라틴어로, 종(種)의 작물 파괴 때문에 명명되었다. 낙엽군대벌레 식물의 습성과 작물 보호 가능성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그것은 현재 두 종(種)으로 나뉘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상 종(種)의 분화를 연구하기 위한 주목할 만한 사례이기도 하다. 애벌레의 또 다른 주목할만한 특징은 그들이 동족끼리 잡아 먹는 습관인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다. 낙엽 군대벌레는 실제 군대벌레(armyworm)보다 다른시기에 활동적이며, 인시목(Lepidoptera)과 나비목의 밤나방과(Noctuidae)의 또 다른 종이지만 Mythimna (moth) 속(屬)이다. 진정한 'armyworm'의 발생은 대개 여름 초기에 발생한다. 낙엽군대벌레는 늦은 여름 미국 남부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히며 북부 지역에서는 일찍 가을에 나타난다. 낙엽 군대벌레(fall armyworm)는 동부 및 중부 북미 및 남미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2016년 이후로 아프리카에서는 침입종이며 그것은 동결 온도 이하에서 겨울잠을 할 수없기 때문에 미국의 대부분의 남부지역, 즉 텍사스와 플로리다에서만 겨울을 견뎌낸다. 이 때문에 가을 기생충은 남동부 주에서 더 두드러진 해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계절에 따라 미국 전역과 캐나다 남부까지 퍼져 나갈 수 있고 적절한 식량 공급이 있는 지역에 거주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2016년에 옥수수작물에 심각한 피해를 준다는 보고가 처음으로 있었으며, 더 많은 번식과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결론 내려졌다. 이후 아프리카 28개국으로 퍼졌고 2018년 인도에 널리 퍼지지 시작했다. (5)Spodoptera ornithogalli(Guenée, 1852)-Yellow-striped Armyworm Moth(노랑줄무니군대벌레나방) 위 학명의 명명자는 프랑스의 변호사이자 곤충학자 아킬레스 제네(Achille Guenée:1809-1880)이고 그는 샤르트르(Chartres)에서 탄생하고 샤토됭(Châteaudun)에서 사망했다. Spodoptera ornithogalli(노란색 줄무늬 군대벌레, 면화 거세벌레)는 과달루프섬(Guadeloupe), 마리 갈랑트(Marie-Galante), 세인트키츠(Saint Kitts), 도미니카(Dominica), 쿠바(Cuba), 도미니카공화국(Dominican Republic), 멕시코(Mexico), 과테말라(Guatemala), 코스타리카(Costa Rica)에서 발견된 밤나방과(Noctuidae)가족의 나방이다. 이 종은 북아메리카(North America)의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플로리다(Florida)와 동부주(州eastern states), 서쪽의 캔자스, 그리고 캐나다 동남부의 노바 스코샤(Nova Scotia)에서 온타리오(Ontario)까지 발견된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프랑스 령 기아나, 파라과이, 페루, 베네수엘라에서 발견되며 이자매 종(種)인 아프리카, 지중해 유럽 그리고 중동 국가들에게 발견되는 스포도프테라 리토랄리스(Spodoptera littoralis) 혹은 아프리카 목화 잎벌레(African cotton leafworm), 이집트 목화 잎벌레(Egyptian cotton leafworm), 지중해 무늬판(Mediterranean Brocade)이라 불리는 종(種)으로써 북아메리카대륙 대표 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두 종(種)의 형태는 매우 유사하며 'Spodoptera ornithogalli'는 날카로운 표식을 지닌 더 진한 색체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충 나방의 날개 폭은 32-44mm이고 4월에서 11월까지 위치에 따라 날개를 달고 있다. 이 성충 애벌레를 키우는 식물들을 보면 알팔파(alfalfa), 아스파라거스(asparagus), 콩(bean), 사탕무(beet), 양배추(cabbage), 클로버(clover), 옥수수(corn), 목화(cotton), 오이(cucumber), 홉(hops), 포도(grape), 잔디(grass), 흰꽃독말풀(jimsonweed), 나팔꽃(morning glory), 양파(onion), 완두콩(pea), 복숭아(peach), 땅콩(peanut), 고구마(sweet potato), 근대(swiss chard), 담배(tobacco), 토마토(tomato), 순무(turnip), 밀(wheat), 수박(watermelon), 달래(wild onion)등 대부분의 부드러운 잎이 있는 식물이다. 위에서 군대벌레(army worm);야도충 중에 주요한 5종(種)을 살펴보았다. 보다시피 전부 북아메리카대륙을 분포지로 하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정의 하듯 야도충이라 함은 나비목 밤나방과에 속한 곤충들이라 한 사실과 이에 더하여 영어명칭으로 밤벌레(a night crawler); 군대벌레(an army worm); 거세벌레(a cutworm); 야행충(a nightwalker)이라 한 사실에 충족되고 학명 명명시기가 빠른 것 중에 선별한 주요한 종(種)들을 살펴보았다.비록 아시아대륙에 자리한 한반도에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야도충은 학명 "Spodoptera litura(Fabricius, 1775)"으로 지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영어명칭에서 보았듯이 "동양 잎벌레나방(Oriental Leafworm Moth)" 이라 한 사실과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즉 야도충은 백과사전에서 정의 한 것처럼 잎벌레가 아니라 군대벌레란 사실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서두에 게시한 동아일보 1934.07.05 일자 기사 내용에서 보면 남조선(南朝鮮)은 한발(旱魃)이 계속(繼續)되고 경남합천군 덕곡면(陜川德谷面)에는 요사이 야도충(夜盜蟲)이라는 버러지가 창궐하야 육도(陸稻) 즉 밭벼(upland rice)와 조(粟, Setaria italica)등 피해가 막대하여 구제에 노력중이라 했는대 피해 면적은 총 경작면적 224정보에 약 7할가량 되는153정보나 되고 방금도 피해가 늘어가는 중이라 했는데 실제로 한발도 문제지만 야도충에 의한 피해가 지대했음을 알 수가 있다.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1922.10.28 일자 함남이원지방(咸南利原地方)에 야도충(夜盜虫)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평남평원군지방(平南平原郡地方), 평남대동군남곶면(平南大同郡南串面)과 중화군신흥면지방(中和郡新興面地方), 황해도은파지방(黃海道銀波地方), 황해도봉산군(鳳山郡), 대동군 고평면(大同郡古平面), 평남안주(平南安州), 평원(平原), 덕천등지(德川等地), 창성군창성면(昌城郡昌城面), 함북농가(咸北農家), 평남맹산지방, 평븍곽산(郭山)지방 등에 야도충번식과 그에 따른 피해사례가 너무 많다. 위 게시한 1934년 한해만 하더라도 1934.04.10 기사부터 시작하여 야도충이 발생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7월부터 본격적으로 피해가 나타난 지역으로 포천군영북면(抱川郡永北面), 함남신흥군, 경북고령군우곡면(高靈郡牛谷面), 경남합천군덕곡면(陜川郡德谷面), 충북괴산군 청천면(槐山郡靑川面)과 문광면(文光面), 경남협천군(陜川), 청덕(靑德)적중면(赤中面), 경북고령군 우곡면(高靈郡牛谷面), 함남석왕사(釋王寺)일대, 평남중화(中和), 양양군 서면(襄陽郡西面)과 도천면(道川面), 무산군동면(茂山郡東面), 강원도평강(江原道平康), 함남 안변군(安邊郡), 경남 김해군(金海郡)등 그해 1934.08.19 까지 계속 야도충에 의한 피해 사례가 기사를 가득 메우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기사가 말하고 있는 범위를 유심히 관찰하면 한반도 상황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대한 지역이다. 한반도 지형처럼 가로 폭이 좁은 곳이 아니라 넓게 퍼져 있는 영역이며 남부지역도 광폭이란 점이 상기된다. 마치 위에서 게시한 낙엽 군대벌레나방(Fall Armyworm Moth)의 분포지 같은 광대한 범위이다. 또한 1934.07.05 일자 기사에 경북선산군(善山郡)은 지난 25일부터 금월1일까지 농무(濃霧)가 습래 (襲來)하여 어느날이나 비방울이 아니듯 난날이 없었으나 이앙할 만한 비는 도무지 오지 아니하므로 일반농가에서는 대단히공황중에 있다하며 지금까지 이앙(移秧:移植)된 것은 겨우三(삼)활에 불과한바 아직까지도 비올 희망이 없으므로 방금 대파(代播) 즉 모를 내지 못한 마른논에 대신(代身) 다른 곡식(穀食)을 심는 일를 준비중에 있다는 기사도 볼 수 있다. 1934년 4월부터 한발과 야도충피해, 그리고 한여름의 짙은 안개, 농무(濃霧)까지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조선사회에 미치는 자연의 피해상황은 한마디로 극심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여름의 농무는 북아메리카대륙 대평원지역에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1934년은 어떤 해인가. 이해 8월 2일 독일 히틀러가 총통으로 선출되는 때인데 그 만큼 자연환경으로부터 주민들이 극심한 피해가 있어 여론의 악화에 따른 돌변적인 정치상황을 예측해 볼 수 있듯이 체제내 민심이 어딜 가나 상당히 흉흉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Fall armyworm (Spodoptera frugiperda) (North and South America) 이제 서두에서 의문을 가졌던 1934년 7월 3일자 기사 내용과 일치하는 야도충을 찾아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최종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위 5종(種)의 군대벌레(army worm)학명 중에서 포괄적으로 "(4)Spodoptera frugiperda (J. E. Smith, 1797)-Fall Armyworm Moth(낙엽 군대벌레나방)"를 꼽을 수가 있다.낙엽군대벌레는 늦은 여름 미국 남부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히며 북부 지역에서는 일찍 가을에 나타난다는 사실과 낙엽 군대벌레(fall armyworm)는 동부 및 중부 북미 및 남미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Northern armyworm, oriental armyworm or rice ear-cutting caterpillar (Mythimna separata) (Asia)그것과 더하여 밤나방상과, 밤나방과(Noctuidae)에서 1837년 프랑스 법률가이며 곤충학자인 아킬레스 제네(Achille Guenée:1809-1880)가 명명한 줄무늬밤나방아과(Hadeninae) 나방속[Mythimna (moth) Ochsenheimer, 1816]를 관찰 할 수 있는데 학명 멸강나방(Mythimna separata, Walker)은 철저하게 아시아(Asia)용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무엇때문일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범위가 중국, 일본, 동아시아, 인도, 동부 호주, 뉴질랜드, 태평양도서란 지역이 매우 포괄적이라는 사실이다. 나방이 바다를 건너 날아 다닐 수 있다는데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북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하는 Mythimna unipuncta 은 스포도프테라속(Spodoptera)의 낙엽 군대벌레나방과 밀접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Mythimna unipuncta(Haworth, 1809)는 미주, 남부 유럽, 중앙 아프리카 및 서부 아시아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흔하게 발견되고 북미에서는 록키산맥의 동쪽과 캐나다 북부에 분포한다. 일부 다처제로 암컷은 성 페로몬(pheromones)을 방출하고 여러 수컷을 배우자로 선택하고 페로몬의 생산과 방출은 온도, 광주기(光週期), 그리고 어린 호르몬에 영향을 받고 청각은 짝짓기 및 박쥐 포식을 피하는데 필요한군대벌레(armyworm)습성에 대한 중요한 의미라고 자료는 설명하고 있다. 이 나방은 또한 학명 멸강나방속"Pseudaletia unipuncta", 라고도 하는데 흰 반점 나방 또는 일반적인 군대벌레(armyworm)로 언급되며 분포지는 미주 및 유럽,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원래 근원지는 북미와 남미이다. 무척추 동물들은 군대와 같은 거대한 무리로 줄을 서서 이동하며 작물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것을 군대벌레(armyworms)라고 하는 것이다. 야도충의 피해는 이런 식으로 엄청난 피해를 농작물에 안기고 있다.이 멸강나방 유충이 다음과 같은 작물에 피해를 주는데 보리(barley-Hordeum vulgare),옥수수(Maize–corn), 귀리(Oats), 쌀(Rice), 호밀(Rye), 사탕수수(Sorghum:Sugarcane), 밀(Wheat), 알팔파(Alfalfa), 아티초크(Artichoke), 콩(Bean), 양배추(Cabbage), 당근(Carrot), 셀러리(Celery), 오이(Cucumber), 상추(Lettuce), 양파(Onion), 파슬리(Parsley), 후추(Pepper), 고구마(Sweet potato)이다.이 종의 학명을 명명한 에이드리안 하워스(Adrian Hardy Haworth:1767-1833)는 영국의 곤충학자이며 식물학자이고 갑각류학자로서 영국 나비와 나방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저서 나비목과 영국백과(Lepidoptera Britannica:1803-1828)의 저자이고 또한 새우 전문 연구가이며 원예학회 회원이자 린네학회 회원으로 알려진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얼마나 알아야 하는가. 캐도캐도 끝이 없다. 하지만 마무리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나비목(Lepidoptera)" rel="tag" target="_blank">나비목(Lepidopter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밤나방상과(Noctuoidea)" rel="tag" target="_blank">밤나방상과(Noctuoide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밤나방과(Noctuidae)" rel="tag" target="_blank">밤나방과(Noctuidae)</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스포도프테라속(Spodoptera)" rel="tag" target="_blank">스포도프테라속(Spodopter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거세벌레(cutworm)" rel="tag" target="_blank">거세벌레(cutworm)</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화살나방(dart moth)" rel="tag" target="_blank">화살나방(dart moth)</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인시목(Lepidoptera)" rel="tag" target="_blank">인시목(Lepidopter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Mythimna (moth)" rel="tag" target="_blank">Mythimna (moth)</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Mythimna unipuncta" rel="tag" target="_blank">Mythimna unipunct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페로몬(pheromones)" rel="tag" target="_blank">페로몬(pheromones)</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멸강나방속" rel="tag" target="_blank">멸강나방속</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Spodoptera frugiperda" rel="tag" target="_blank">Spodoptera frugiperd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Fall armyworm" rel="tag" target="_blank">Fall armywo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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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글쓴이:한부울 서문서양인들은 왜 17세기부터 조선을 배회했을까?고서(古書)로 본 고래 석탄보급소고래가 인간과의 만남 그리고 절멸서양인들의 끝없는 물욕양키의 등장벤자민 터커의 운명과 역사위치양키들이 사냥한 고래종류와 분포지마무리 서문 오래전부터 이글을 써 올리려 했지만 자료가 만만치 않았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 쓰지 못했던 고래(whale)역사에 대한 세계삼한역사관적 분석의 이야기다.고래에 대한 이야기는 한반도 역사만 놓고보면 우리 역사와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다.왜냐하면 우리나라 고서에는 고래자료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한반도 역사학자들이 고래가 한반도 동해에 서식했다고 인지하고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결코 한반도의 동해가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일본보다 고래를 많다고 할 수 없다.실제로 일본 동쪽 바다, 즉 서태평양에는 엄청난 고래들이 많이 서식하고 종류도 다양한 것으로 나타난다.고래와 접촉이 많다고 하는 것은 바다와 접하기 때문이며 그 바다는 대양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그것에 비하면 한반도와 열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동해바다로는 협소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이상하게도 울산 반구대 암각화(蔚州大谷里盤龜臺巖刻畵)만 보면 한반도 동해에 접근하는 고래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대왕고래, 혹등고래, 향고래뿐만아니라 북극고래, 참고래 등 다양한 고래가 그려져 있다.이 대다수 종들이 북극과 남극을 종횡한다 할지라도 동해라고 알려져 있는 한반도와 열도사이 해안선을 타고 통로로 사용할 수도 있으나 서식처라고 할 수 없음에도 암각화에는 매우 다양한 고래 종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이 글을 쓰면서 더욱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더욱이 의문스러운 것은 암각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고래종을 보면 한반도 역사 기록에도 그에 대한 많은 자료가 있을 법하지만 정작 고래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타나는 것이 없다.고대에는 고래가 많았지만 조선시대에 넘어오면서 고래가 거의 사라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고래는 인간들에 의해 절멸한 것이 아니라면 아주 오래전부터 습성적으로 서식한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정설인데 비이주성 범고래는 사라졌다가 해마다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암각화에 고래의 다양한 종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지금도 동해바다에 이 고래들이 나타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리고 일본인만큼 한반도인들이 고래에 대한 집착이 덜 하다.때문에 마구잡이 포획을 하여 절멸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역사고서에는 고래의 자료가 없고 현실적으로도 일본인 보다 고래를 접하기가 쉽지 않는, 동해가 논리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역사연속성의 괴리는 크다 할 것이다.이것에서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 상황을 읽을 수 있으며 기록이나 눈에 띄는 유물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은 그 만큼 어느 시점 큰 변혁기에 외부의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알 수 없도록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글쓴이가 판단하기에는 조선영해 동해바다에 태산 같은 온갖 고래가 득실거렸다는 사실을 빈약한 고서에서 그나마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이야기다.동해 고래가 태산(泰山)같다는 표현은 서거정의 사가시집(四佳詩集) 52권에 나타나는 기록이다.고래가 태산같다는 표현에 걸 맞는 고래들은 대왕고래, 큰고래, 보리고래, 혹등고래, 향유고래, 참고래, 북극고래 등 많다.울산 반구대 암각화 대로 고래가 서식하는 환경이 조성 되려면 적어도 열도일본처럼 대양을 직접적으로 접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범고래나, 북극고래의 이동 통로 정도의 역할을 하는 한반도와 열도 사이에 동해가 결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한반도 동해에서의 고래활동이 적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포경금지에 대한 결과라고 할 수 없는 근원에 의한 지리적, 생태환경적인 문제가 그속에 내재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멀쩡한 역사를 서양세력들이 난도질 한 후 그것을 고래 상황을 인지하려 하기 때문에 착각을 하고 있다고 해야 맞다.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한반도가 아닌 역사의 땅 동해에는 세계 온갖 다양한 고래가 태고적부터 들끓었다고 볼 수 있다.그곳은 단언하는데 바로 대서양이다.본래 일본인들은 고래에 집착이 강하다.그것은 아메리카대륙 서부쪽에 거주하면서 삶과 어우러진 습관적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때문에 아마도 고래가 한반도 동해에서 손쉽게 잡힐 수 있는 많은 량이 포획이 된다면 지금의 독도분쟁은 지금보다 몇 십배 증폭이 되어 갈등이 첨예화되었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가 있다.한반도 동해에는 일본인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고래가 많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일본은 지금도 연구목적으로 잡는 고래가 매년 1000 마리 이상으로 알려졌다.연구라는 것은 개체 수를 임의적으로 조정하겠다는 것인데 속내가 보이는 이야기고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모노세키(下關)시나 고래고기 음식이 발달한 나가사키(長崎)현 등에서는 음식 문화의 차이를 부정한다 하여 포경을 막고 있는 것에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렇다면 글쓴이가 주장한 조선 영해의 동해바다에 온갖 고래가 득실거렸을 것이라고 예상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이 질문에 답은 이글을 대신하고자 한다.한반도 포경역사에 있어 가장 권위자라는 모학자의 흥미로운 주장에서 보면 "17세기부터 한반도에 찾아 든 이양선은 대부분이 포경선(捕鯨船:catcher boat)이었다"는 사실이다.포경선이라 함은 고래잡이 배이다.이 말에는 결국 조선 영해에 포경선이 많았다는 이야기며 그 포경선들은 모두 이양선이라는 말이다.앞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한반도 동해는 포경선이 득실거릴 정도로의 고래서식지가 분명 아니다.그럼에도 그는 이를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역사 오류에 의한 착각속에서도 어떤 사실을 밝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비록 이 분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인으로써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판단이라 할 수 있겠지만 특별하게 지리적 자원이 없었던 한반도에 17세기부터 해양세력 즉 해적들이 이양선을 몰고 벌떼처럼 몰려 들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서 그들의 실제 추구하였던 포인트를 정확히 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7세기부터 서양세력들은 고래를 상업포경에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우리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이양선은 바로 1627년(인조5년)10월에 네덜란드 3인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653년(효종4년)8월에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호(De Sperwer:160톤)"가 제주도에 표착하는 것을 깃점으로 고래사냥이 성행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다.그 이후 18세기 후반 프랑스대혁명에 임박하면서부터 프랑스함대가 출현하는데 1787년 부솔호(La Boussole:500톤)와 아스트로라베호(La Astrolabe:500톤)가 제주도를 측량하고 울릉도까지 접근하는 등 배회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리고 이 후 영국 브로이튼(William Robert Broughton)지휘한 북태평양 탐험선 프로비던스호(Providence:406톤)가 동래 용당포에 표착한 사실이 있으며 1801년에는 서양선박 정체를 알 수 없는 1척이 제주도 대정에 표착하고 서양인 5명을 상륙시키는 등 행태가 이어진다.생각해보면 한 개의 마스트로 세로 돛을 가지는 소형 배, 슬루프형(Sloop)406톤 밖에 되지 않는 함선을 끌고 수만키로(km)를 넘나들었다고 하는 사실도 신기한 것이며 북태평양 탐험선이라고 하는 것도 탐험선이 아니라 포경선이 분명하여 그렇다면 북태평양에는 알레스카(Alaska), 알류샨열도(Aleutian Islands)에 회색고래, 큰고래, 북극고래를 포획하려고 했을 것이지만 포경과정에서 어떻게 한반도 동래 용당포에 표착하였는지가 분명하지가 않다.그들의 개략적인 기록을 보면 종전처럼 승무원들이 마카오에서 겨울을 나기 전에 홋카이도(Hokkaidō)의 해안을 조사했던 것처럼, 아시아(?)로 항해했고 1797년 5월 16일 오키나와 남쪽의 미야코 지마(宮古島) 산호초를 들이받아 파괴되었을 때 천우신조로 돛대가 두개인 작은 스쿠너(schooner)를 구입하였고 선장 브로이튼(Broughton)과 그의 선원들은 이 작은 스쿠너(schooner)로 동북아시아를 탐험하고 난 후 1799년 2월에 영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어떻게 천우신조로 작은 스쿠너를 구입했고 오키나와에서 어디로 구조되어 동래 용당포에 표착한 것인지도 연결되는 자료가 없고 동북아시아를 탐험을 어떻게 했다는 사실도 솔직히 알길이 없다.더욱 의심스럽게 하는 것은 천우신조로 구입했다고 하는 이 스쿠너가 100톤 미만의 배로써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대서양을 누볐던 배라는 사실이다.정말로 이양선들이 전부 포경선이었다면 별로 대형이지 않은 그런 배가 태평양을 횡당했다고 볼 수 있고 포경선이기 때문에 그들의 고래 포획지역에서 많은 표류자가 생겼으며 표착하여 조선에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다반사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으나 문제는 그들이 포경활동한 지역이 어딘가 하는 점이다.서양인들은 왜 17세기부터 조선을 배회했을까?지금까지 알아본 결과는 그들이 조선을 찾아 배회하는 이유는 해양세력들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래서 고가(高價)의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고래(whale)를 잡아 큰 이윤을 남기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곳은 동해(東海)이어야 맞다.그러나 그들은 한사코 북태평양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왜 동해라 하지 못하고 북태평양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예를 들어보면 1653년 160톤의 상선(商船) 스페르웨르호(De Sperwer)가 제주도에 표착한 사건에서 하멜(Hamel, Hendrik:?-1692) 포류기만 하더라도 그들은 동인도회사의 상선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화물선, 또는 화객선 정도로 생각하여 전혀 조선에 해를 끼칠 수 없는 것임을 알리고자 했지만 이 배 역시 고래잡이 포경선이라고 할 때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당시 조선이 그들을 대우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미개하다고 비난하지만 당시 16세기말 임진왜란이란 큰 사건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농간 때문에 곤욕을 치룬 조선입장에서 똑같은 서양인인 네덜란드인이라고 특별하게 대우했을리가 만무하다.왜란같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선은 안정된 체제를 위해 색안경끼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고 생존자를 구금과정에서 폭압적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객관적 판단이 되어야 마땅하고 만약 단순한 표류가 아닌 무단 포경활동이나 첩보활동의 의심을 받는다면 엄격한 조사와 감시가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그들은 목숨을 구했고 나중에 탈출했다고 하지만 무사히 귀환한 것으로 만족해야 함에도 글을 남겨 비난하게 하는 것은 서양역사만들기 차원에서 한반도 역사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한계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밖에 없다.정제된 역사만 알고 그시대를 경험하지 않는 우리가 세세하게 알 수 없지만 당시 조선을 들락거리던 서양인 즉 해양세력들은 믿을 수 없을 족속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교(邪敎)를 남발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손한 세력이라고 경계를 하고 있었던 기록들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사람들에게 그들은 좋은 이미지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잘못도 있을 것이다.특히 프랑스, 영국인들 같은 경우는 어느날 불현듯 나타나 침탈하는 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도 측량이니 해안조사니 하는 따위의 주제넘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이 프랑스니 영국이니 하는 따위에 국가 개념자체가 의심스러운 것도 그들이 정식적인 외교관계가 있었다면 절대 이런 식의 방자한 짓거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글쓴이의 냉정한 판단이다.자신들의 이런식의 무단침입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이 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핑계를 대며 범법행위를 정당화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감히 불손한 그들에게 개방을 하지 않는 것을 마치 아프리카 원주민처럼 미개인 취급하면서 조선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도 한반도 역사의 한계이다.한반도 역사가 역사스스로를 반드시 비판과 비평을 할 수 있을 것임에도 전혀 조선역사 편이 아닌 것처럼 매우 주관적으로 오히려 서양인들을 대변하는 기록이니 어찌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인가.그들이 당시에 얼마나 무도한 것인가를 보면 1868년 독일 출신의 유대인 상인이자 자칭 인류학자라고 하던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구(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실을 세상에도 크게 알려진 큰 사건으로 보도까지 되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비난은 우리 역사에서 나타나는 것이 없다.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당시 제도로써 엄청난 범법행위이고 체제가 그를 국제체포단을 구려 붙잡아 사형을 시켜도 무방한 것이다.그러나 한반도 역사에는 그러한 움직임조차 읽을 수가 없다.당시 서양인들은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천하에 부끄러움도 없는 망충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특히 서세동점시기에 선교사는 스스로 조선사회에 침투하는 전초병(前哨兵), 첨병(尖兵)을 자임하였고 솔직히 성스럽고 순수해야 할 종교를 바탕으로 체제 깊숙히 파고들어 민심을 이반시키며 혼란을 야기시켜 체제를 흔들리게 하였으며 불순한 세력들을 끌어들이고 세를 불려 조선을 더욱 곤욕스럽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미국북장로회(PCUSA)이다.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든 과정들을 모아 보면 1881년 제대로 힘한번 써 보지 못하고 내부로부터 몰락한 조선체제의 원인을 알 수가 있으며 집요하게 체제전복을 염두에 두고 벌였던 그들의 모든 행위가 결국 결실을 맺은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이어 현시대까지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관대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이고 그러한 자세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본 블로그 글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core)호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2"에서 조선 현종(顯宗, 1641-1674 재위:1659-1674)9년(1668)에, 1000톤급의 '코리아호'를 건조하였다는 사실을 네덜란드가 발행한 식민지문서 제255호에 나타나 알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의 설명을 보면 당시 동인도회사가 조선(朝鮮)과의 직교역을 검토하면서 1년 후인 1669년 새로 만든 상선의 이름을 "코레아호"라 명명했다고 하는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하지만 이것을 실행까지는 안했는 것 같다.하멜의 말대로 조선(朝鮮)에서 구금기간동안 그의 인권이 현격하게 유린되고 참혹하고 미개한 처우를 받았다면 그래서 당시 네덜란드가 조선(朝鮮) 위에서 군림하고 조선(朝鮮)을 불리하게 할 수 있었다면 무엇때문에 1666년 9월 14일에 필사적으로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한 하멜 일행의 불편한 호소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인도회사는 1000톤급의 '코리아호'를 건조하고 조공까지 할 생각을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조선 영해에 찾아 든 이양선을 보더라도 1000톤이 넘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에 1000톤이라면 가장 큰 선박이 아닌가 한다.동인도회사가 조선(朝鮮)을 상대로 무역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무역선을 건조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혹은 일본 막부쇼군이 막았다는 설도 있다.조건을 좋게 만들기 위해 코레아호를 명명했다거나 아니면 코레아호를 건조하여 조공식으로 바치려 했다면 조선의 당시 입지에서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한반도 역사는 네덜란드가 조선과 무역하는 것이 조선을 위한 것처럼 하는 한반도 역사의 한계라 할 수 있다.어쨌든 코리아호를 건조하여 명명하고 무역을 하려 했다는 것은 장사꾼인 더치(Dutch)동인도회사가 장기적으로 무역거래 상황을 읽고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기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고래를 포획하기 위함이라면 조선과 관계개선 뿐만아니라 고래를 포획할 수 있는 권한과 영역확대를 노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조선에 마구 침입하는 것도 모자라 해양측정이니 조사니 하는 따위를 늘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에서 또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본 블로그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 "에서 밝혔듯이 현대도 그렇지만 엄청난 거리의 조선내륙 해안경계가 엄격했다 하더라도 작은 도서나 굴곡이 심하고 미로(迷路)와 같은 해안선 주변에 수없이 많은 섬에는 경계가 취약할 수밖에 없고, 가파른 절벽(steep), 낭떨어지기(bluff:high cliff)처럼 돌출된 곶(岬)과 같은 지형에 해적선인 정크선(junks)들이 숨을 수 있는 작은 만(灣)도 수없이 많다고 생각할 때 그들이 숨어 들어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들이 암암리 숨어들수 있는 방법 찾기에서 조선이 아무리 경계해도 이것을 막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육지에 침투하는 방법도 예수회선교사들 경우를 보면 교묘하게 위장하거나 은밀하게 침입한 사실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사실도 그들이 먼저 기록으로 말하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물론 사건이 되어 조서가 만들어진 것들은 예외라 하겠지만 무수히 많은 고래잡이 포경선 경우는 이를 일일이 나타내기가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한반도 독도에 과연 프랑스 포경선이 도착한 것이 맞는지 아닌지 여러분은 알겠는가.그들이 그렇다고 기록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경우이다.이와같은 이야기가 특히 한반도역사에는 비일비재하는 것이 또한 특색이라 할 수 있다.파수꾼 100명이 도둑 하나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이와도 같은 이야기며 종교적으로도 지금의 천주교라고 하는 기독교전통교회가 서양인들에 의해 변질된 것이라고 용기있게 말할 수는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 끝난 경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이나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스며들 때 과정에서 지켜야 할 것이 있는데 어느나라이든지 그나라의 전통종교를 존중을 해주고 자극하거나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같은 종교인들로서 지켜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근세기에 서양종교는 그러한 덕목은 안중에도 없었고 그저 깔아 뭉게고 승리하는 것에만 집중을 했기 때문에 비난은 감수한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형태가 아니겠는가.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지나고 역사를 뒤돌아보니 그러한 모순이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포경역사의 권위자가 한 주장처럼 조선에 표착한 이양선들이 전부 고래잡이 포경(捕鯨)과 관계되는 선박이라는 사실은 한반도 역사 관점에서 이해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부분임에 틀림없다.문제는 동해에 고래가 많아 서양인들의 포경선이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다.옛 조선 영해(領海)에 서식하던 고래들을 포획하기 위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던 이양선들은 이제 사실을 진실로 말해 줄 때가 되었다고 본다.그들이 출현한 곳은 바로 한반도처럼 갇힌 바다가 아니라 삼면(三面)이 바다라는 것은 확트인 거대한 대양을 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종의 고래가 서식하기 좋은, 넓고 깊은 바다가 존재하여 그곳에 고래잡이 포경선들이 마구잡이로 고래를 포획하기 위해 떼를 지어 항해를 한 사실을 밝혀 이제는 알릴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고서(古書)로 본 고래세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로는 고래의 근원을 밝힐 수 없는 한계의 기록이라는 것이 입증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일부 잡서라고 알려진 사서(史書)기록에서 의외로 아주 작은 마치 숨겨놓은 듯한 증거들을 어렵게라도 찾을 수가 있어 다행이다.꼭꼭 숨겨놓은 것 같은 것은 아무래도 고래에 대해 한반도 역사는 말하길 꺼려하는 느낌을 받는다.조선 영해(朝鮮領海)에 고래가 서식한 사실을 왜 숨겨야 했을까?고래에서 추출되는 향유기름, 고래기름, 고래수염, 고래고기 등 이러한 것들이 공물, 혹은 토산물로 정리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한반도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먼저 서거정의 사가시집(四佳詩集) 52권에 보면 시귀 "又不見東海鯨鯢大如岳 또 못 보았나 동해의 고래는 크기가 태산 같아서~"의기록을 보면 분명 동해(東海)에 태산같은 고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또 필자 미상의 연경사행기인 계산기정(薊山紀程) 제3권 / 관사에 머물다[留館] ○ 갑자년(1804, 순조 4) 1월 22일(임자) 큰 눈. '옥하관에 머물렀다'.란 글을 보면,“경어(鯨魚)는 동해(東海)에서 나기는 하나 본래 수족(水族) 중에 거물로서 낚시에 걸려드는 예가 드뭅니다.”했다.란 글귀도 찾을 수가 있다.고래는 낚시로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조 1년 을사(1725) 9월 10일(갑진) 기사에 보면 "내수사에서 고래의 눈을 징납하는 일로 경상 감사 조영복이 상소"란 제목에서 "내수사(內需司)의 첩정(牒呈)에 고래[鯨魚]의 눈과 수염을 조금 보냈다는 일로 인하여 감세관(監稅官)을 형배(刑配)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래의 눈은 다만 하찮은 물품이고 원래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아닌데.."라고 하여 고려 수염과 눈을 징납(徵納)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고려수염과 눈은 하찮은 물품으로 조선관리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반대로 왕실제정을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의 첩정 즉 첩보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고래 부속물이 서양인들에 의해 암암리 거래되고 있는 상황을 내수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또 영조 23년 정묘(1747) 9월 12일(기해)기사에 서지수가 말하길 "...경유(鯨油)에 대해 말씀드리면, 신이 일찍이 듣건대, 신의 7촌 숙부인 서명연(徐命衍)은 본래 청백하다고 일컬어졌는데, 해읍(海邑)의 수령으로 있었을 때 경유를 팔아 시집가는 딸의 혼수를 장만했다 합니다..."라 하고 있다.이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본래 고래가 조선 동해에 서식하였기 때문에 고래기름을 일반에서 생산을 하였다는 사실까지 유추할 수가 있어진다.솔직히 한 두마리 한반도에서 잡았다고 하여 고래기름을 생산할 문제가 아니다.그러나 한 두마리가 아니라 대량으로 고래가 포획되었다고 한다면 고래기름을 추출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한 고래기름 추출 회사들은 많았을 것이다.향유기름은 마리 당 최고 8배럴, 지방 등에서 채취되는 고래기름은 최고 40배럴로 나타난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았을 때 조선 영내에 특히 동해에 태산같은 고래가 서식했고 고래눈과 수염 그리고 고래기름까지 생산이 가능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朝鮮) 동해(東海)에 태산(泰山)같은 고래(鯨)가 서식했다는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근세기에 독도지명이 되어버린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De ancourt)가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하여 리앙쿠르트 바위(Liancourt Rocks)라 한 사실은 한반도 독도와 함께 무거운 역사로 앞으로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다.1853년 1월[철종 4년(음력 1852년 12월 21일; 양력 1853년 1월 29일)], 미국의 포경선 606톤급의 포경선 사우스 아메리카(USS South America)가 부산 용당포(龍塘浦)앞바다에 표착했고 조사에서 그들 스스로 미리계, 며리계라 한 사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동생 박선수가 교정하고 김윤식이 편집하여 1911년 간행하였다고 하는 아래 게시한 환재집(瓛齋集)기사에서 보면 1855년 미국의 포경선 투브라더스호의 선원을 조선에서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이를 한국고전번역원의 해석에서 아래 '함풍(咸豐) 5년(1855)의 일'은 1855년 미국의 포경선 투브라더스호의 선원을 구해주었던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환재집(瓛齋集)조선 말기의 문신 박규수(朴珪壽:1807~76)의 시문집제7권 / 자문(咨文) 자문을 살펴보니 모두 15편인데, 방물(方物), 범월어채(犯越漁採), 전변(展邊) 등에 관한 의례적 자문 8편을 제외하고, 서양 선박 사건 관련 자문 7편만 수록하였다. 미국의 봉함을 전달해 준 것에 대해 답하는 자문〔美國封函轉遞咨〕 弊邦三面濱海。凡遇遭難來泊之別國客船。或助粮給需。候風歸去。或船破不完。旱路護送。以達皇京。轉歸本國。各隨其願。並無阻礙。莫非仰體我聖朝天地覆載。無物不遂之至仁盛德。而其爲藩邦之定規成憲。由來久矣。且擧美國難民之拯救護送者。曾有咸豐五年同治四年同治五年。先後三次移咨。俱在貴部。而事非久遠。則該國之人。亦應見聞攸及者也。遠人之經涉風濤。出沒艱險。在所矜恤。安有殘害之理哉。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입니다. 다른 나라의 객선(客船)이 조난을 당해 정박하면 양식과 물품을 제공하고 바람을 기다려 돌려보냈고, 혹 배가 부서져 온전치 못하면 육지로 호송하여 황경(皇京)으로 보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등 각각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며 전혀 저지함이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 성조(聖朝)의 천지처럼 덮어주고 실어주며 어떠한 사물도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함이 없는 지극한 인과 성대한 덕을 본받은 것이며, 이것이 번방(藩邦)의 정해진 법도가 된 지도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또 미국 난민을 구조하고 호송한 일을 거론하면, 함풍(咸豐) 5년(1855), 동치 4년(1865), 동치 5년(1866)에도 있었습니다. 전후 3차례 보낸 자문이 모두 귀부(貴部)에 있을 것이며, 오래된 일이 아니니 그 나라 사람 또한 응당 보고 들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먼 나라 사람이 풍랑을 겪어 위험에 빠진 것은 가련히 여길 일이니, 어찌 해칠 리가 있겠습니까.위 기록에도 나타나지만 양키라고 하는 미국인을 일본인들은 '메리켕'이라고 하였고 이는 미리견(米利堅), 미리견(彌利堅)이라고 하는데 이 포경선원인 미국인들과 인간적으로 엮이는 사실들이 나타난다.1855년 미국의 포경선 투브라더스호의 선원을 구해준 일, 1865년 경상도 연일(延日)을 거쳐 강원도 삼척에 표류해 온 미국인을 돌려보낸 일, 1866년 서프라이즈호 선원을 구조하여 호송한 일을 말하고 있는데 미국 포경선들이 풍랑에 못이겨 좌초할 때 매번 조선에서 그들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연결해보면 유독 조선 주위에서 양키 포경선이 많이 들락거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그리고 양키 미국은 1820년대부터 홋카이도에 포경선 전진기지를 세우고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했다고 알려지고 역시 일본을 개항시켰다고 하는 페리 제독은 이러한 고래를 쫓아 포경선과 함께 극동지역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도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인데 전자에서 언급하였듯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태평양까지 도달하려면 석탄보급지가 있어 1000톤 안되는 증기선 항로에 지장이 없어야 하지만 1857년까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들이 한반도나 일본열도에 들락거렸다는 것은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석탄보급소와 페리 임무잠시 미국(양키) 흑선(黒船) 함장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서 보면 그는 우라가(横須)에 입항한 1853년에 정식관직은 '동인도소함대지휘관(Commander of the East India Squadron)'으로 'Squadron'이라 함은 '소수의 군함'으로 구성된 함대라는 것인데 한반도인들이 말하는 '태평양함대제독'이란 거창한 명칭과는 거리가 있고 태평양(太平洋:Pacific Ocean)이 아니라 동인도(東印度)라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또 하나의 사실은 매슈페리를 '증기함대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Steam Navy)'란 별칭을 붙이고 있는 것도 당시 증기선을 건조하는 감독을 역임했다는 사실이 있어 정식 해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그리고 그가 끌고 일본 우라가(浦賀)항으로 들어간 증기선은 연안용에 불과하다.4척의 증기선을 세세히 보면 1)모선인 증기호위함 미시시피호(Mississippi) 3,272 ton(톤), 스피드 8노트, 필라델피아해군창(Philadelphia Navy Yard) 1842년 건조하고 1863년에 침몰시겼으며, 2)슬루프형 포함(砲艦) 플리머스호(Plymouth) 989 ton(톤) 보스톤해군창(Boston Navy Yard)에서 1843년 건조:1861년 납포를 방지하기 위해 침몰시킴, 3)슬루프형 포함(砲艦)인 사라토가호(Saratoga : Schuylerville) 882 ton(톤) 메인주의 키터리(Kittery, Maine)의 포츠머츠 해군창(Portsmouth Navy Yard)에서 건조하고 해양 학교 선박으로 사용하기 위해 펜실베니아 연방에 임대(1890-1907)되었으며 1907년 폐품으로 판매, 마지막으로 4)증기호위함 서스퀘해나호(USS Susquehanna) 2,450 ton(톤) 뉴욕해군창(New York Navy Yard)에서 1847년 건조:속력10 노트(knots) 1868년 조각으로 판매 한 것으로 나타난다.1), 4)번함은 그나마 3,272 ton(톤), 2,450 ton(톤)으로 크지만 나머지 두 척을 천톤도 안되는 소함이다.연안용(沿岸用:for coast)으로 건조된 1000톤 미만의 증기선(蒸氣船:steamship)이 2척이나 딸려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소형함을 가지고 거칠고 위험한 태평양을 횡단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근세기 서양역사가 얼마나 웃기는 것이냐 하면 상황이야 어떻든 조건이 어떻게 되었던 간에 동양을 설정하여 무조건 항해했다면 모든 것이 거침없이 해결됨은 물론이고 반증이나 검증이란 절차도 없이 고스란히 역사로 인정되는 사태를 지금 우리는 정확히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이런식의 주장은 얼마나 뻔뻔하고 무모한 것인가를 그들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서양사가 말하고 있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매슈 페리'의 본래임무가 태평양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포경선을 관활하는 책임자의 임무와 일본에게 개방을 요구하고 답을 얻으려 한 것은 일본의 고래잡이 구역을 넘겨받으려 했다는 것과 그곳에서 포경활동을 하고 있는 양키 고래잡이 포경선을 지원하기 위해서라 한 사실이고 더하여 그곳 아시아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실행될 수 있는 잠재적 석탄보급지의 독점화를 막기위해서라 했다.석탄이라 하니 또 할 말이 많아 진다.석탄소비는 산업혁명이 발생하기 전에는 소비자체가 미미했다는 것은 거의 공론적인 이야기다.그러나 1760년에서 1820년 사이에 발생한 산업혁명은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 공정(manufacturing process)으로의 전환되면서 수공업에서 새로운 동력(에너지)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때를 마추어 1769년 제임스와트에 의해 증기기관이 개량됨과 동시에 1776년 산업용증기기관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석탄소비가 증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산업의 쌀'이라고 하는 철강산업에서 18세기에 비로소 목탄 대신에 석탄(Cokes)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증기기관의 발달은 1803년 증기기관차가 등장하게 만들었으며 1829년 스티븐슨에 의해 '로켓트호'가 상업적으로 가능성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철도산업에 불을 붙였고 강이나 호수를 항해하기 위한 증기선은 1802년 시운전에 이어 1807년 미국공학자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에 의해 여객선에 마침내 이용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바뀌는 것이 1848년부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철강산업은 철도산업을 만들고 육지와 해상 운송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그리고 철도산업에 의해 우후죽순처럼 뻗어나가는 철로는 증기열차를 분주하게 왕래하도록 만들었다.생각해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의 철도산업과 이어 1869년에 완공된 대륙횡단철도에 의한 운송산업은 엄청난 것이었고 철로가 완성이 되면서 오히려 연안 여객선들도 소형규모에서 대형으로 교체되기 시작하였다.1848년부터 증기선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었고 증기선이 1000톤 정도의 규모였으나 1850대부터 3000톤에 육박하고 점점 대형화추세에 놓이게 된 것을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 "에서 밝혀 본 사실이고 처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연안항로을 이용 수송선 라인(line)만들면서 운송사업을 시작한 뉴욕 상인 윌리엄 아스핀월(William Henry Aspinwall:1807-1875)은 초보적인 스팀선인 1,000톤급 규모의 사이드외륜선(side-wheel steamer)인 1848년 캘리포니아호(SS California:1848–1866, 1872–1874), 오리건호(SS Oregon:1848–1861), 파나마호(SS Panama:1848–1861) 3척을 동시에 건조하여 운행을 시작했다고 알려진다.이 증기선(스팀선)이 항해한 곳은 대양 횡단은 엄두도 못냈고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남부 연안항로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연안항로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외 대다수는 북아메리카대륙 각 강이나 호수를 이용하는 여객선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즉 본격적인 석탄수요는 기존 무역항로가 빈번하게 집중이되던 북아메리카대륙의 운송 수단을 위한 증기기관이 필요한 연료로 모든 것에서 동시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니 석탄 수요는 폭발적인 것이 되었다.예를들어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밝혔지만 오늘날 1850년대 미국자료가 자꾸 태평양을 항해했다고 하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본 것이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시시피강을 태평양으로 보고 그것을 깃점으로 서부를 아시아라고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러한 역사사실은 숨기고 태평양이라고 하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남아메리카대륙 남단 혼곶(Cape Horn)을 휘돌아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처럼 만들고 도착한 곳을 오늘날 아시아대륙이라 설정한 것이어서 근세기에 무조건 항해를 하면 무사하고 아시아대륙을 별 걱정없이 왕래했다고 각인 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과장의 역사조작이라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이 시대상황이 전통적으로 조선(朝鮮)에서 모든 제반산업을 주도하고 문화를 이끌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석탄 소비가 조선에서 많았을 것이고 중국이라고 하는 개체가 조선 내에 경사(京師), 그리고 경기(京畿)로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정치적인 외교관계가 협의적으로 진행되는 공간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한정하여 보지 않을 수 없고 지하자원이나 산업생산물을 싣고 들락거니는 곳은 조선의 각 지방 주요한 항구라고 할 때 그곳에서 경제특수가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다.물론 그러한 역사 결과물은 현재 우리에게는 없다.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정확하게 풀어 볼 수는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분석을 마다 하지 않는 것이다.석탄은 증기선 운항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알아보자.초보적인 증기선을 이용하기 위하여 무역항로의 중간 깃점에 석탄의 공급지가 건설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곳을 선점하고 독점한다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이어야 하고 무역 거래 공간은 그곳에서 가까운 멕시코 또는 중앙아메리카, 더 나아간다고 할 때 카리브해제도나 버뮤다섬, 남아메리카대륙 동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바로 아래 그림은 1870년부터 1914년까지 브리티시가 설치한 각 운행 중간 깃점에서의 석탄보급소 지도이다.Figure1.3 Map showing British coaling stations in relation to those of foreign powers, 1870-1914. Foreign stations are shown in gray.일본인들은 1853년 미국(양키)를 보고 '메리켕'이라고 하였다.이는 미리견(米利堅), 미리견(彌利堅)이라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1853년 1월에 부산 용당포(龍塘浦)앞바다에 표착한 606톤급의 포경선 사우스 아메리카(USS South America)의 포경원이 말한 것과 동일하다.어쩌면 동일한 시간이니 페리가 조선에 표착한 사우스 아메리카 포경선의 선원들을 구하기 위해 일본과 선을 닿고 있는 조선에 연락하고 외교적으로 풀려고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다음에 "양키 고래잡이 상황"을 다루는 글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 하겠지만 증기기관이 발명 된 후 증기선에 대한 석탄공급이 원활해야 운행이 가능하지만 사실상 배에 적재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 되어 얼마간의 연료만 충당할 뿐 오랜 시간을 바다에서 항해가 이루어진다면 항해 로선 중간 깃점에 석탄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기지가 반드시 필요하였지만 1853년 페리가 일본을 향해 항해할 때만 하더라도 미국(양키)은 영국에 비해 석탄공급소가 전무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만약 이러했다면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주의 노퍽(Norfolk)에서 출항하여 석탄 공급없이 어디까지 항해가 가능하였겠는지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그러면서도 아시아대륙에서 거점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독점을 빼앗기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아시아지역에서 잠재적 석탄공급지를 지키려는 의도를 말하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인데 나중에 알고 보면 그것은 1860년에 설비되었다고 하는 태평양 하와이의 호놀룰루 석탄기장을 의식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전자에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석탄보급소(Fueling stations)라는 것은 증기 발생을 위한 석탄의 사용 때문에 석탄 연료 충전소가 선박이나 철도 기관차를 위한 석탄 공급을 보충하기 위해 각 중가지점에 건설되었으며 이 용어는 종종 군함(range of warships)의 항해 범위를 넓히기 위한 수단으로 석탄(역)충전소를 사용한 브리티시 블루 워터 해군(blue water navies)과 관련되며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지배항구와 반드시 연결되었음을 말하고 있다.브리티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잉글랜드가 아니다.브리티시는 대조선일 가능성이 많고 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과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에서 세세하게 살펴보았지만 조선은 거대한 전선을 92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때문에 곳곳에 조선은 석탄보급소를 보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여기서 여러가지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한반도 역사를 대입하여 생각하게 되어 사실 접근이 곤란하게 하고 퍼즐이 맞춰지기가 힘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세계삼한역사관점에 가능하면 담담해질 수 있어야 한다.19세기 후반,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선은 해양 수송을 위한 주요 추진 수단으로서 범선(sailing ships)을 대체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니 만큼 석탄 소비는 날로 증가했을 것은 뻔하다. 위 지도에도 나타나지만 이때 대서양에서의 브리티시(British)석탄공급지를 보면 온타리오주 남부의 포트윌리엄(Fort William), 퀘벡(Quebec), 북미동부연안 킹스턴(Kingstone), 캐나다 동북 헬리팩스(Halifax), 세인트존스(St. Jones), 동부에서 먼바다 버뮤다(Bermuda), 바하마(Bahamas), 카리브해 자메이카(Jamaica), 안티과(Antigua), 세인트루시아(St Lucia), 바베이도스(Barbados), 트리니다드(Trinidad), 그리고 서대서양 시에라 레온(Sierra Leone), 감비아(Gambia), 케이프 코스트 케슬(Cape Coast Castle), 나이지리아의 라고스(Lagos), 비아프라(Biafra)만(灣)의 페르난도포(Fernando Po), 어센션(Ascension), 세인트 헬레나(St Helena)등이다.이러했으니 적어도 조선은 충분히 커버 할 수 있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미국(양키)은 뒤 늦게 석탄보급소를 나름대로 설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1857년에서야 플로리다주 키웨스트(Key West, Florida)에 있는 석탄기지가 유일하며, 1860년대에 호놀룰루(Honolulu)에 석탄 기장을 설립하였다지만 태평양이라는 설정은 어쨌든 모호할 수밖에 없다.하여간 미국(양키)은 남북전쟁이후 수십 년 동안 주로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이때까지 미국(양키)은 정식 국가로써 행세가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모자라니 보충한다고 분명한 것은 미국(양키)은 남북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대양에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여기서 먼저 한가지 집고 넘어 갈 것은 바로 1860년 설립했다고 하는 호놀룰루 석탄기장에 대한 지리적 위치다.만약 그곳을 진주만이라고 했다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진주만은 지금의 하와이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있게 말 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다음 글에서 정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페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만약 태평양으로 미국(양키)함선이 들어가려면 반드시 남아메리카대륙 남단 혼곶을 휘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곳 버지나아 노퍽에서 태평양 호눌룰루까지의 거리가 자그마치 30,000km 가 넘는다.그러한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선 반드시 석탄공급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며 증기선을 운행하면서도 미국은 이러한 석탄공급소가 1857년까지 전혀 없었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이렇게 기나 긴 태평양 항로를 소화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만화이며 가공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전자에서도 지적한 사실이지만 페리가 운행한 포경선이나 그외 양키들의 당시 고래잡이 포경선이라 해봤자 거의가 1,000톤 정도이고 미만이었다.이런 배들을 몰고 석탄보급소도 없이 북태평양으로 무조건 들어갔다고 하면 다 되는 역사이니 얼마나 황당한가.호놀룰루석탄기장이 아니라 오히려 브리티시와 지배가 겹쳐지는 버뮤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하지만 1880년대부터 미국(양키)은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좀 더 자체적으로 석탄 수급없이 먼 거리를 운행하기 위해 규모를 키우기 시작하였는데 이 대형증기함선 건조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1883년에 강철 방호순양함(Protected Cruiser)인 3,240 ton(톤) 애틀랜타호(USS Atlanta:1884), 3,240 ton(톤) 보스턴호(USS Boston:1884), 4,600 ton(톤) 시카고(USS Chicago:1885)가 건조되었고 그 이후 더 큰 함선장갑순양함(装甲巡洋艦:Armored cruiser)이 건조되는데 6,789 ton(톤) 메인호(USS Maine:1895), 2등전함(second-class battleship) 6,417 ton(톤) 텍사스호(USS Texas:1892), 9,043 ton(톤) 뉴욕(USS New York:1893), 6,694 ton(톤) 올림피아(USS Olympia:1895)와 같은 전함들이 줄줄이 건조된다.고래가 인간과의 만남 그리고 절멸 고래가 인간과의 만남은 한마디로 불행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미국자료를 보면 19세기에만 거의 236,000 마리의 고래가 포획되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였다.몸무게가 거의 100톤 이 되는 대왕고래 등이 처음 인간에게 버거운 것이 되었다가 증기선이 발명이 되고 엄청난 작살기가 만들어지면서 19세기부터 크고 작고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남획되었다는 사실이다.Since the 1982 moratorium on commercial whaling, few countries still operate whalers, with Norway, Iceland, and Japan among those still operating them. Of those, the Nisshin Maru of Japan's Institute of Cetacean Research (ICR) is the only whaling factory ship in operation. 1982년에 국제포경위원회(IWC:International Whale Committee)는 상업적인 포경에 대한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채택했지만 포경선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는 국가는 특별하게도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일본이다.이 중에서도 일본 수산청 소속 일본고래연구소(日本鯨類研究所)가 운영되며 1987년 건조된 8,145톤의 속력 29.6(km/h)인 니신 마루호(Nisshin Maru:日新丸)가 그 연구소에 의하여 현재까지 운항 중인 유일한 포경선이라 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인들의 비뚤어진 이기적인 골통 사고를 알 수 있는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고래를 포획할 수 없다고 하는 국제규범을 지키지 않고 관습이란 핑계로 고래잡이를 지속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모자라는 역사상식만큼 참으로 뻔뻔하고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연구는 한낱 치장에 불과한 것이다.그들이 관습이라고 주장하는 사실의 근거가 모호하기 짝이 없고 그들이 남에게 폐를까치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지극히 관습처럼 행동하지만 그것은 이익과 손해 사이에 아주 좋치 않는 독단적인 습성에 의한 가식에 불과하다.그것은 그들의 양식인 것처럼 하지만 가식만큼 역사인식도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일본인들의 어리석은 면도 있겠지만 2세계대전 후 조작된 일본을 존재하게 한 미국의 책임도 크다.지금까지 미국에 의해 생성된 일본인들은 스스로 어긋난 역사 간격이 매우 크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그러나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소수 정치인들의 음흉함과 간교함은 그들이 불리함을 느낄 때 더욱 그러한 속성이 강해진다는 것이 걱정이다오늘날 열도 일본인들이 고래에 집착하는 것은 그들이 역사와 맞추려고 하지만 절대 바람직한 행동이아니다.해양세력인 서양일본연합체라면 몰라도 1952년 4월 28일에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급조된 열도일본인들이 주장하기에는 스스로의 역사 인식이 너무나도 모자라는 것이 아닐 수 없다.글쓴이는 고래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다.그만큼 우리나라 한반도에는 고래고기가 일반적이지 않다.일본인들은 왜 달라야 하는가. 본 블로그 글 "범고래(鯱:Orcinus orca)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http://blog.daum.net/han0114/17050657 "에서 보았듯이 살인고래라고 알려져 있는 범고래는 1971년에 발견된 한반도 동해안 울산반구대의 고래암각화의 암면조각(岩面彫刻:petroglyph)에 나타나는 것처럼 범고래와 닮았다는 사실에서 한반도에 범고래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그외 수염고래, 작살맞은 고래, 귀신고래,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등도 존재했다고 믿고 있다. 우리의 전통 기와지붕의 치미가 범고래 등지느러미의 모양으로 만들어 올렸다고 하였고 그 칭호가 호와(鯱瓦) 즉 '범고래 기와'였다는 사실에서 한반도에 범고래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이야기 한 적도 있다.그러나 온갖 고래가 등장하는 조선영해 동해가 한반도 동해라는 착각은 우리가 할 수밖에 없다.한반도 지형의 동해는 가끔식 눈에 띄이는 고래 유영 항로인 것은 틀림없다.현재 해양탐구연구원들에 의해 발견되는 동해고래를 보면 대다수 일반적인 고래인 것으로 파악된다.그 종류가 참돌고래, 밍크고래, 낫돌고래, 상괭이 등인데 연구자들은 "4월과 5월 참돌고래 2000~3000마리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두세 바퀴 회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맛봤다"고 말하고 "지난해 12월에도 낫돌고래 300~500마리가 해상에 출몰해 장관을 연출했다"고 말하면서 학계에서는 동해를 중심으로 위와 같은 고래 종 1만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동해에 나타나는 고래들을 분류체계적으로 보면 참돌고래는 범고래속이 포함되는 참돌고랫과 참돌고래속(Delphinus)의 긴부리참돌고래(Delphinus capensis)이고 밍크고래는 귀신고래가 속하는 수염고래소목(Mysticeti)의 수염고랫과 대왕고래속(Balaenoptera) 북방쇠정어리고래(Balenoptera acutorostrata)이고 낫돌고래는 참돌고래과 낫돌고래속 낫돌고래(Lagenorhynchus obliquidens)그리고 상괭이는 참돌고래상과 (Delphinoidea)에 포함된 쇠돌고랫과 상괭이속 (Neophocaena) 상괭이 (Neophocaena phocaenoides)로 나뉜다.그러나 울산 암각화에 나타난다는 이 범고래의 생물학분류체계를 보면 고래하목(Cetacea), 이빨고래소목(Odontoceti), 참돌고래과(Delphinidae Gray, 1821)의 범고래속(Orcinus)으로 살인고래 혹은 오르카(killer whale:orca)하는 학명(Orcinus orca Linnaeus, 1758)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의 분류를 보면 1821년 영국생물학자 존 그레이(John Edward Gray:1800-1875)에 의해 향유고래(sperm whale)의 향고래과(Physeteridae)와 분리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무슨 이야기냐 하면 본래 항유고래와 분리시켰다는 것은 종이 다를 뿐이지 서식처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읽을 수있어야 하는 것이다.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본래 고대 로마시대에 사람들이 사용한 올카(Orc)는 추측이지만 고래 어원이 그리스어 오루크스(Orcus)에서 파생하였고 앵글로 색슨족에서 유래한 악마라는 의미라 하였으며 라틴어 오르카(Orca)는 로마인의 별칭(a Roman surname)으로 나타나고 고래속명 오루시누스(Orcinus)는 라틴어 저승의 의미를 가진 ‘Orcus’ 와 접미사‘-inus’의 합성어로 이미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이 범고래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상징인 바다포식자로 알려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특히 우리나라 고래토템숭배시대에는 '어른(魚人)'과 '어르신(魚人神)'의 어원이 어인(魚人) 즉 어른 또는 어인신(魚人神), 어른신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것도 고래를 사람들이 신성한 어신(魚神)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어서 전통적으로 고래사냥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일본연합체 소속 무역업자들은 본격적으로 17세기부터 포경선을 사들이고 고래를 사냥하기 시작하였는데 시기는 네덜란드라고 하는 더치인들의 고래잡이가 극성스러웠고 이어 양키들이 바톤을 이어 받게된다. 서양인들의 끝없는 물욕 고래가 상업에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주로 해양을 무대로 삼고 활보하던 서양인들에게 포획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바다에서 늘 상 생활하는데 고래가 특별해 보이는 것도 잠시고 어쨌거나 고래를 많이 잡아 떼돈을 벌고자 했던 것은 의심할바가 아니다.어쨌거나 서양세력들이 자신들의 역사문화 근원의 모토(motto)로 삼고 있는 고대 로마시대에 사람들 조차도 올카(Orc)라 하여 저승사자, 죽음의 상징처럼 여겼던 고래였고 동양오린엔탈 문화로 고래토템숭배사상을 중하게 여기며 숭앙했던 고래라 할지라도 장사꾼인 그들에게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오직 자본주들에 의해 상업용으로 보였고 많이 잡아 그들은 최대한 이윤을 남겨야했고 그래서 거대한 자본주가 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넘쳐나는 물욕을 고래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특히 고래는 환금성이 용이하고 이기의 재료가 되었으며 미식가들을 미혹하게 하고 더군다나 향유고래의 토사물과 배설물로 만들어진 용연향(龍涎香:Ambergris)은 고가의 거래가 되는 그야말로 황금, 노다지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앰버그리스(Ambergris)란 말은 옛 프랑스어가 라틴화된 것인데 '황색 그리스', 혹은 '회색 호박'에서 유래되었고 엠버라는 단어는 13세기 유럽발틱지역에서 화석화된 나무수지에 적용되어 왔다고 한다.옥스포드사전에는 왁스물질인 향유고래 창자 분비물인데 열대바다에 떠 있다가 발견되는 향수제조용이며 중기영어단어 '노란 호박(amber jaune)'에서 유래한 것인데 프랑스의 '회색호박'호박과 구별된다 하였다. 이것은 황색호박이라는 의미와 같다.2015년 9월 25일 영국 매클즈필드(Macclesfield)의 한 해변에서 발견된 1.1kg(2.4lb)의 용연향덩어리가 프랑스매수자에게 11,000파운드(GBP) 한화로 1,568만원에 팔렸다 하였고 호주해변에서 14.75Kg의 용현향이 발견되었는데 시가가 우리돈으로 7억원이 넘는다 하였다.그뿐만아니다.고래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부속물들은 더욱 부를 증가시키는 것들이다.이러한 환금성의 고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고래가 죽임을 당하게 만들고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래잡이는 17세기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본격적으로 고래가 상업용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는 것을 이미 전자에서 언급하였고 서양세력 중에서도 가장 큰 함선을 몰고 다니는 더치(Dutch) 즉 네덜란드 해양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음도 알 수가 있다.이렇게 시작한 고래잡이는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실행되었고 이어 19세기 양키로 이양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영국은 북극고래와 남방고래를 주로 포획하였다고 하며 고래의 소멸로 점차 줄면서 1859년에 영국 선박에서 나온 고래기름의 마지막 화물이 런던에 상륙했다고 하며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가 쇠퇴하면서 1790년 태평양에서 포경을 시작하였고 남양포경을 주로 하였지만 영불전쟁이후 세를 크게 잃어 마지막 포경선도 1868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고 하고 있다.이것을 보면 네덜란드 즉 더치의 포경활동이 끝나자 마자 미국 양키들이 대서양 영역의 고래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특히 향유고래는 오랜 상업적 이용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대규모 사냥은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매사추세츠주의 뉴베드퍼드(New Bedford)와 난투켓(Nantucket)에 근거지를 둔 북대서양에서 1712년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이곳은 네덜란드 포경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지금도 뉴베드퍼드(New Bedford)를 "an industrial port city in southeastern Massachusetts, on Buzzards Bay, a noted 19th-century whaling center" 매사추세츠주 남동부 버저즈만(Buzzards Bay)에 있는 산업항구도시이며 19세기 유명한 포경 집하장(whaling center)이라고 하고 또 난투켓(Nantucket) 역시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으로 18.19세기 중요한 포경 집하장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처음부터 포경활동에서 고기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용연향(ambergris)과 경뇌, 경랍(鯨腦,鯨蠟: spermaceti)만을 위해 무차별 포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그나마 작살기가 약할 때는 큰 고래는 엄두도 낼 수 없고 그대로 방치했지만 강력한 동력 작살기가 발명이 되면서부터 엄청난 고래가 학살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경뇌, 경랍유(鯨腦,鯨蠟:spermaceti)는 향유고래 머리 부분에 존재하는 기름을 냉각, 압축하여 얻어지는 황색의 비린내가 나는 고체랍이며 정제품은 백색 무취인 납과 비슷한 모양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다.이것으로 양초, 비누, 화장품, 기계유, 기타 특수 윤활제, 램프 오일, 연필, 크레용, 가죽방수, 녹 방지 재료, 그리고 많은 제약 화합물과 같은 다양한 상업적 응용에 사용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런 용도의 고래잡이는 1830년대에 정점을 이루었던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왕조실록 영조 23년 정묘(1747) 9월 12일(기해)기사에 서지수가 말한 ...경유(鯨油)의 이야기는 시장성으로 보았을 때 초반기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본 블로그 글 "알타이(altai)가 어딘가?-용연향(龍涎香, ambergris)http://blog.daum.net/han0114/17050533"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17세기부터 특히 향유고래 잡이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명나라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 몇몇 방사들이 용연향을 불사약 만세향병의 주요원료로 썼다고 하면서 소위 불사약은 실제로 춘리라 하여 조정에서는 전국에 명을 내려 이 용연향을 수집하도록 시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소문에 의하면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House of Stuart)가문의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재위:1660-1685)의 좋아하는 요리는 달걀과 용연향이라 했다.이것은 전통적으로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로 이용되었고 어떤 문화권에는 진통제로 사용되었으며 중세 유럽인들은 두통과 감기, 간질, 그리고 다른 질병의 약으로 용연향을 사용했으며 유럽의 흑사병기간동안 사람들은 용연향 환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공기 중 나쁜 공기를 차단하는데 사용했다고도 한다. 그러니 동서양 할 것 없이 이 용연향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고 쓰임새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16세기후반 17세기부터 고래잡이에 동원된 포경선들이 한마디로 난리가 난 것이 틀림없다.또한 본 블로그 글 "자포니즘(Japonism)의 해괴한 변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9 "에서 인용한 자료에 보면 고래는 당시 사람들에게 고기뿐만 아니라 많은 유용한 것들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16,17세기 땐 집의 기둥을 세우는데 필요한 고래 턱뼈가 필요했으며 18,19세기 땐 오일램프나 마가린, 비누를 만드는데 원료가 되는 고래기름(鯨油:Whale oil)과 나무대용, 우산대, 칼라 깃(Collar stay), 여성용 코르셋(corsets)과 크리놀린 스커트(crinoline skirts)와 같은 강도가 있고 유연성을 필요로 하는 제품의 원료로 고래수염(baleen)이 사용되었다 하였고 무엇보다도 부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고래배설물이며 세계 3대 향료이고 불사약 만세향병의 원료로 사용된 용연향(龍涎香:Ambergris)임을 알 수가 있는데 당시에 엄청난 고가로 팔렸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물론 명조 황제가 찾았으니 수요처(需要處)는 분명했고 서양 부르주아(bourgeois)들은 이것을 따라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그 후 자본주들을 튼튼하고 큰 선박을 구입하였고 서양 고래잡이 전문 사냥꾼들을 모집하여 무차별 포획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18세기 프랑스혁명에 이어 산업혁명과 더불어 수공업 기계자원의 활용이 넓어지고 생활이 풍족해짐에 따라 늘어나는 오일램프 연료 공급원으로 막대한 수급이 필요했다.18세기말엽부터 더치가 쇠퇴하자 프랑스와 영국의 이어 양키들에게 포경산업을 이어 받게 되었으며 산업혁명으로 자본을 축적한 양키 자본주들은 포경산업을 장악하고 고래를 잡는 기구와 모선을 더욱 발달시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러면서 윤활유, 오일램프나 마가린, 비누를 만드는 원료인 고래기름(鯨油:Whale oil)같은 것들이 더더욱 고래의 효용가치를 높게 했으며 인간들의 고래를 이용한 끝없는 탐욕은 석유가 등장하고 다른 대체 재료가 생산이 되면서 부터 고래수요가 감소되었고 20세기에 들어 1927년 미국의 포경선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조정기에 들어갔음도 알 수가 있다.양키의 등장우리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먼저보면 양키 포경함대지휘관인 '매슈페리'가 일본 '우라가'에 입항하던 년도인 1853년 1월에 미국의 포경선 606톤급의 사우스 아메리카(USS South America)가 부산 용당포(龍塘浦)앞바다에 표착했고 2년 후 1855년에 미국의 포경선 투브라더스호(Two Brothers)의 선원들이 표류한 것을 조선(朝鮮)에서 구해주었다는 사실에서 양키들의 많은 고래 포경선들이 조선(朝鮮)에 들락거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또한 이들은 1820년대부터 홋카이도에 포경선 전진기지를 세우고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했다고 알려지지만 이상한 것은 이미 1797년에 홋가이도에는 잉글랜드 북태평양 탐험선 프로비던스호(Providence:406톤)가 측량하던 적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국 즉 양키들이 홋가이도에 전진기지를 세우면서 잉글랜드와 특별한 마찰은 없었는지 내용을 찾을 길이 없다.어쨌든 1853년 일본 우라가(浦賀)에 입항하여 개항시켰다고 하는 미국인 포경함장 페리(Matthew C. Perry:1794-1858)의 일본방문은 홋카이도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리는 것이며 먼저 측량조사한 잉글랜드와는 관계없이 일본에게 근해 고래어업권을 요구하는 등의 제반적인 상황을 종합해볼 때 특히 이 시기에 미국양키 포경활동이 매우 번성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지만 처음부터 잉글랜드나 미국 양키나 동아시아대륙에는 절대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Definition of Yankee (Entry 1 of 2)a : a native or inhabitant of New England b : a native or inhabitant of the northern U.S. Word origin of 'Yankee'C18: perhaps from Dutch Jan Kees John Cheese, nickname used derisively by Dutch settlers in New York to designate English colonists in Connecticut.양키의 어원을 보면 여러가지 설이 있다. 기록에 양키를 처음 사용한 것은 17세기라고 알려지며 북아메리카대륙에 더치(Dutch)해적이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하고 더치 즉 네덜란드 사람을 존 치즈'Jonh Cheese'라고 부르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Jonh Cheese. 는 더치말로 'Jan Kaas(Jan Kees)' 인 것으로 이것이 영어 'Jan Kees'가 되었다는 설인데 그렇다면 더치인들을 양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코네티컷(Connecticut)의 영국 이주민들을 지명하기 위하여 뉴욕의 네덜란드 이주민들에 의하여 사용된 별명이라 하기도 하고 잉글랜드인들이 더치인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양키라 했다는 설도 있어 뒤죽박죽같은 별칭임을 알 수가 있다.영어사전에서는 뉴 잉글랜드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인들에게 붙여진 별명이라고 하며 양키들의 고향이라고 알려지는 곳은 매사추세츠(Massachusetts)라고 알려진다.매사추세츠의 역사를 보면 서양인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잉글랜드, 네덜란드인들인데 그들이 닿는 곳마다 질병이 따라다니고 그곳의 원주민 역시 전염병으로 약 75%가 죽었다고 되어 있다.그들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음에도 전염병에 약한 원주민들이 스스로 죽임을 당했기때문에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일게다. 그렇게 보면 매사추세츠는 1628년 프로테스탄트들이 도착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 세일럼(Salem)조직이되고 이것을 찰스1세(Charles I:1600-1649,재위:1625-1649)가 추인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으니 이것은 서양세력의 발판으로 볼 수밖에 없어 이들전체를 양키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래와 연관되는 것 중에 양키 캔들 회사(Yankee Candle Company)가 있고 이 양초회사에서 생산되는 고급양초는 고래기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여 고래를 잡는 전문사냥꾼들을 양키라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한 돈을 밝히는 이미지로 묘사 되는 것은 처음부터 더치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으나 미국인들이 축적된 자본으로 부각된 면에서 미국인들에게 경멸에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커 20세기 미국인들에게 자수성가의 상징인 엉클 샘(Uncle Sam:US)과 비슷하게 사용된 것은 아닌가 한다.어쨌거나 자본주를 상징했을 가능성이 크다.다시한번 더 인용하지만 본 블로그 글 "미국국명과 코리아(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5"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가 코리아(COREA)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밝혀 보아었다.1853년 1월[철종 4년(음력 1852년 12월 21일; 양력 1853년 1월 29일)]기사에, 미국의 고래잡이배가 부산 용당포(龍塘浦)앞바다에 표착했을 때 부산첨사 서상악(徐相岳)과 동래부사 유석환(兪錫煥)지휘한 훈도 김기경(金耆敬)과 별차 김정구(金鼎九)와 소통사 김예돈(金藝敦)등이 선원들의 국적과 입국한 경위 등을 조사했으나 언어불통으로 실패하였다 하고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그들의 두발이 고슴도치머리 같았고, 자신들을 가리키며 '며리계(㢱里界)'라고 여러 번 지껄였다고 했으며 그들이 쓴 글자가 여운여화(如雲如畵)로서, 전서(篆書)도 아니고 언서(諺書)도 아니어서 말과 글 모두가 불통했다"는 사실이 있다.며리계, 또는 미리계라 한 것은 일본인들이 '메리켕'이라 한 사실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들이 양키미국인인 것은 틀림없는데 조선에서는 언어불통이었음에도 일본은 이들과 다음해인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을 맺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통역이 가능했을 것이다.일본과 조선의 언가가 달랐겠지만 특히 이 미리계 즉 미국인들이 사용한 언어와 조선에 표착한 고래잡이선원이 사용한 언어와도 차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며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시 일본 자료를 보더라도 그들도 통역이 불가피하여 영어와 네덜란드어(더치) 두 개의 언어를 서로 섞어가며 통역을 했다고 알려진다.'며리계(㢱里界)'말이 영어가 아니라는 설과 네덜란드어가 일본어가 아니라는 설이 있지만 네덜란드어가 아닐지라도 더치어(Dutch language)일 가능성은 있고 더치와 며리계는 통했을 것이란 뉘앙스가 있다.양키들의 말과 더치어와 최소한 친숙했다고 하는 주장에서 보면 미국 8대 대통령이며 첫 네덜란드(Dutch)계인,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1782-1862)이 미국대통령이면서도 제1어가 영어가 아닌 네덜란드어였다고 알려진다.양키들은 더치(네덜란드)어와 영어로 대화가 되었을 것이란 짐작을 할 수밖에 없다.마찬가지로 9년 동안 언어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여송국(呂宋國)사람들의 경우와 동일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서양일본연합체가 구성되기전 밑바닥에서 기생한 이런 저런 이력도 없는 집합체가 모여 세상에 나타난 것이라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The success of a voyage When the New Bedford whaler, Benjamin Tucker, returned to home port in 1851, she carried: * 73,707 gallons of whale-oil; * 5,348 gallons of sperm oil; * 30, 012 pounds of whalebone (baleen).How the profits were divided After expenses, the net profit of the Benjamin Tucker’s voyage was $45,320. The usual share for the owners of a ship was between 60 and 70 percent. In this case, between $13,596 and $18,128 would have been left to be divided among the captain and crew for several years of work.When the Ship Milton returned to port in 1836, the captain received a lay of 1/17th or $5,882; the first mate 1/22nd or $4,545; the boatsteerer (harpooneer) 1/75 or $1,333; and the blacksmith 1/140th or $714. The best paid seaman earned $800, while the worst paid received $571. On another voyage of the Milton, one of the ordinary seamen earned only $10.10. 위 자료는 본격적으로 양키 포경산업자들에 의해 포경행위가 최고조에 달할 시기 1851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뉴 베드퍼드(New Bedford)소속 포경선 벤자민 터커(Benjamin Tucker)가 항구로 귀항하였을 때 이 배가 싣고 온 고래생산물(Whale products)과 그에 따른 수익분배상황, 그리고 중요한 그들이 사냥한 고래 종류(Varieties), 고래사냥하는 방법, 가공하는 방법 등을 기록한 항해일지의 일 부분인데 이를 기초로 다음 글을 연결해보려 한다.고래사냥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이 수익분배상황인데 먼저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귀항한 것을 전제로 이 배가 싣고 온 물품을 보면 73,707 갤런(gallons)의 고래 기름(whale-oil), 5,348 갤런(gallons)의 향유기름(sperm oil), 30,012 파운드(pounds)의 고려수염(whalebone, baleen)을 말하고 있다.이를 금전으로 환산하여 분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항해의 순이익은 45,320달러($), 일반적으로 선박 주인의 몫은 60~70% 라 하였으며 나머지 13,596달러($)에서 18,128달러($)는 수년간 작업을 한 선장과 선원 몫이라는 이야기다.그리고 다른 한 예로 1836년 밀턴(Milton)포경선이 항구로 돌아왔을 때, 선장은 1/17 또는 5,882 달러($)를 받았고 1등선원은 1/22 또는 4,545 달러($); 작살을 던지는 사람(harpooneer) 1/75 또는 1,333달러($); 대장장이는 1/140 또는 714달러($)을 받았으며 최고급 선원은 800달러($)를 받았고 최악의 선원은 571달러($)를 받았다고 나타난다. 밀턴 (Milton)의 또 다른 항해에서의 정규 선원 중 한 명은 단돈 10.10달러($)를 벌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A view of the New Bedford area in 1839매사추세츠주에 고래잡이 유명한 항구가 2곳이 있었는데 뉴 베드포드는 잘알려져 있지만 페어헤븐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나중에는 뉴베드포드를 지원하는 물자수급처로 전락했다.19세기 후반에, 고래기름은 미국에서 조명을 위한 연료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서양인들이 주도해온 포경산업은 200년 이상 동안 뉴잉글랜드 해안 지역사회에서는 경제 대들보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뉴잉글랜드 해안 보다 상대적으로 매사추세츠주의 해안은 좁다.매사추세츠주의 유명한 포경항 뉴 베드포드(New Bedford)는 페어헤븐(Fairhaven)에서 아쿠쉬네 강(Acushnet River)건너편에 있으며 페어헤븐(Acushnet River)역시 고래잡이 항구였고 1838년에, 페어헤븐에서 24척의 배가 고래잡이를 위해 항해하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고래잡이 항구였으며 모비딕(Moby-Dick)의 저자인 허먼 멜빌(Herman Melville:1819-1891)은 1841년 포경선 아쿠쉬넷(Acushnet)을 타고 페어헤븐 항을 떠나 처녀항해에 나섰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포경산업에서 상대적으로 뉴 베드포드의 우세가 명백해지자, 페어헤븐의 경제는 그것과 직접 경쟁하기 보다는 새로운 베드포드 경제를 보충하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조선공(shipwrights), 선구상(ship chandlers), 로프제조소(ropemakers), 통(barrels)제조(coopers), 그리고 돛을 만드는 사람(sailmakers)들의 도시가 되었다. 이 곳은 또한 선주(船主)와 선장(船長)들이 그들의 집을 짓고 아이들을 기르기 위한 보금자리가 되었다고 알려진다.벤자민 터커의 운명과 역사위치전자에서 말했듯이 벤자민 터커(Benjamin Tucker)는 매사추세츠주의 유명한 포경항 뉴 베드포드(New Bedford)소속의 포경선으로써 19세기 고래잡이 한창 피크를 이룰 때에 양키 포경선이다.PHOTOGRAPHS OF WHALING VESSELS: PART II Ships and BarksPLATE IXShip Benjamin Tucker, 348 68/95 tons. Built at Mattapoisett, Mass., and registered at New Bedford, 1839. Burned by CSS Alabama, 1862. This daguerreotype shows her at Honolulu, 3 November 1856, following a severe storm. Whaler Benjamin Tucker in Honolulu, by Dr. Hugo Stangenwald(독일인:1829-1899)English: [Whaler] "Benjamin Tucker" in Honolulu. Ambrotype, 1/2 plate, cased. New Bedford Whaling Museum. Bark Benjamin Tucker at anchor in harbor in Honolulu. On her return passage from the Arctic, Benjamin Tucker encountered a storm which damaged her rigging. Captain Spencer commisioned this ambrotype depicting the damage to send to the vessel's owners. It is one of the earliest known photographs of an American whaleship. Other ships can be seen on either side of photograph. 뉴 베드퍼드 포경박물관(New Bedford Whaling Museum)자료에서 포경선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의 설명을 보면 포경선 벤자민 터커는 약 348(68/95)톤(ton)의 크기이며 메사추세츠주(Massachusetts) 마타퍼세트(Mattapoisett)에서 건조되었고 1839년 양키들의 고래잡이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뉴 베드퍼드(New Bedford)에 처음 등록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규모의 포경선들이 당시 뉴 베드퍼드와 난투켓(Nantucket)에 자릴 잡고 있었다고 알려진다.포경선 벤자민 터커는 1851년 고래잡이 항해뿐만 아니라 그 후 여러 번의 항해를 거치고 귀항했지만 위 기록을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남북전쟁 당시인 1862년에 남부연합해군(Confederate States Navy)스팀엔진 프로펠러 슬루프 전투함 1,050톤 앨라바마(CSS Alabama)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기록에 나타난다.또 위 벤다민터커의 포경선 사진이 있는데 독일인 닥터 휴고 스타겐발트가 1856년 11월 3일 촬영한 것으로써 어느 북극인지 알 수 없지만 북극에서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났고 배의 삭구(索具:rigging)가 망가져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 호놀룰루(Honolulu)항구에 입항한 풍경을 촬영한 것이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호놀룰루를 당시 자꾸 하와이에 명칭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스펜서 선장(Captain Spencer)은 배 선주에게 피해를 입은 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촬영했다고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어떤 프레임에 짜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벤자민 터커가 호놀룰루(Honolulu)에 입항하였다 하였으니 지금의 하와이(Hawaii)라 인식되고 북극이라는 것은 북태평양의 북극인 것으로 알게 한다는 점은 매우 상황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다음 글에서 의문이 있다. CSS AlabamaExpeditionary raids(원정대 급습)All together, Alabama conducted a total of seven expeditionary raids, spanning the globe, before heading to France for refit and repairs: ㄱ)The CSS Alabama's Eastern Atlantic Expeditionary Raid (August–September, 1862) commenced immediately after she was commissioned. She immediately set sail for the shipping lanes southwest and then east of the Azores, where she captured and burned ten prizes, mostly whalers. 위 고래잡이 항해에서 돌아온 시점에서 약 1851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뉴 베드퍼드(New Bedford)에 입항하고 다시 출항하여 북태평양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폭풍을 만나 1856년 11월 3일 촬영한 것처럼 호놀룰루로 피난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그러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을 시점인 1862년에는 포경선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가 서대서양 아조레스 제도(Azores)동쪽에 위치하여 고래잡이를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위 '포경선 벤자민터커의 최후장소'그림자료를 보면 남부군 해군소속 앨라바마호가 북군 원정대를 급습한 공격이 7차례 있었고 그러한 활동에 의해 포경선 '벤자민 터커'가 불태워졌다고 하며 '벤자민 터커'가 불태워졌다고 하는 1862년 동안에 발생한 7번의 급습 중 첫 번째로 ‘CSS 앨라배마’가 동부 대서양 북군 원정대를 급습(1862년 8월~9월)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이 같은 사실에서 좀 더 들어가 보면 1050톤(ton)앨라바마호(艦船)신임선장 라파엘 셈머즈(Raphael Semmes:1809-1877)에 의해 이 함선이 취역되자마자 1862년 8월 13일 리버풀을 떠나 그해 8월 20일 테르세이라 섬(Terceira)에 도착해 1862년 7월부터 1863년 9월까지 보급선인 아그리피나(barque Agrippina)가 가져온 각종 군수품과 350톤의 석탄으로 재정비를 하여 1862~64년 사이에 600만 달러 이상의 값어치가 나가는 82척의 북군 선박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키고 불태우는 등 여러 차례 눈부신 활약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그때 아조레스 제도(Azores)동쪽 항로를 향해 출항하였고 그곳에서 10척(隻)의 전리품(prizes)을 나포하거나 불태웠다고 하였는데 이 때 선박 대부분이 포경선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어 포경선 벤자민 터커의 최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하지만 1862년에 주로 고래잡이 포경선이 활동한 지역은 태평양이 아니라 바로 대서양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물론 1851년 포경활동을 하고 귀항할때 고래들의 종류를 보더라도 대부분 대서양에 서식하는 종임을 알 수가 있다.하여튼 태평양북국고래를 포획한 것은 그로부터 한 참 뒤에 이야기며 대서양의 고래잡이가 시들하기 시작하면서 범위를 넓혔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앞에서 호놀룰루(Honolulu)항구에 정박한 사실에서 북극(On her return passage from the Arctic-北極:Arctic)이라 한 것은 북태평양 북극이 아니라 대서양 북극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이 당시 양키들의 포경선들은 대부분 대서양 북극에 원정하였고 남쪽으로 내려와 남부군 해군 앨라바마호를 만난 아조레스제도에서 주로 고래를 포획하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호놀룰루(Honolulu)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그 명칭으로 불리던 곳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때문에 지금의 하와이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게 진단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물론 근세기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이러한 지명이 조작되고 뒤바뀌는 현상은 비일비재하였다 하겠지만 호놀룰루(Honolulu)까지 그렇다는 것은 정확히 태평양을 서쪽으로 고스란히 옮겼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이것은 따로 양키 고래잡이 현황의 글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예정이다. There were only a few recorded catches during the first few decades (1709–1730s) of offshore sperm whaling. Instead, sloops concentrated on Nantucket Shoals, where they would have taken right whales or went to the Davis Strait region to catch bowhead whales. By the early 1740s, with the advent of spermaceti candles (before 1743), American vessels began to focus on sperm whales. The diary of Benjamin Bangs (1721–1769) shows that, along with the bumpkin sloop he sailed, he found three other sloops flensing sperm whales off the coast of North Carolina in late May 1743. On returning to Nantucket in the summer 1744 on a subsequent voyage, he noted that "45 spermacetes are brought in here this day," another indication that American sperm whaling was in full swing. 위 온라인백과사전[free encyclopedia]자료에 의하면 북아메리카대륙 근해 향유고래 사냥 처음 수십년(1709–1730s)동안 기록된 어획량은 극히 적었다고 하고 있다. 대신 슬루프선(船)은 난투켓 모래톱(Nantucket Shoals)에서 고래를 잡았거나 데이비스해협(Davis Strait)지역으로 가서 고래를 잡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1740년대 초반에 경랍(鯨蠟:spermaceti)이 양초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양키)선박은 향유고래 포획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벤자민 방스(Benjamin Bangs:1721-1769)의 일지는 그가 범킨 슬루프(bumpkin sloop)와 함께 항해하면서 발견한 것은 1743년 5월말 노스캐롤라이나 연안에 떨어진 곳에서 향유고래의 가죽을 벗기고 있는 다른 3척의 슬루프선(船)을 발견했다고 하였다.1744년 여름 후속 항해를 위해 난투켓으로 돌아온 그는 "오늘은 향유고래(spermacetes)45마리가 이곳에 들어온다"고 말했고 또 미국(양키)향유고래 포획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 또 다른 징후가 보인다고 상황설명을하고 있다.물론 18세기 상황이지만 양키들이 본격적으로 고래사냥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연안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Sperm whales have a long history of commercial exploitation. Large-scale hunting began in 1712 in the North Atlantic, based at Nantucket in America. They were not widely hunted for their meat, but for ambergris and spermaceti. Ambergris is a substance that collects around the indigestible beaks of squid in the stomach of the whale, and was highly prized for use as a fixative in the perfume industry. Although artificial alternatives are now available, some perfume makers prefer to use ambergris today. 또 다른 자료를 보면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향유고래는 오랜시간동안 상업적으로 이용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였고 대규모 사냥은 미국의 난투켓에 근거지를 둔 북대서양에서 1712년에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들은 고기를 얻기 위해 포획된 것이 아니라 용연향과 고래기름만을 위해 포획되었다 하였으며 용연향은 고래 위장에서 가장 소화가 잘 안 되는 오징어 부리 주변에 물질로, 향수산업에서 치료제로 이용되어 높이 평가 받았고 비록 인공적인 대체품들이 현재 사용되고 있지만, 몇몇 향수 제조업자들은 오늘날에도 용연향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연안 난투켓은 양키 고래잡이의 근거지임이 확인 된 것이다. View Source Articles & Credits on EOL According to Waring et al. (2009), results of multi-disciplinary research conducted in the Gulf of Mexico during the first decade of the 21st Century confirm speculation that Gulf of Mexico Sperm Whales constitute a stock that is distinct from other Atlantic Ocean stocks(s). Sperm whales were commercially hunted in the Gulf of Mexico by American whalers from sailing vessels until the early 1900s. In the northern Gulf of Mexico (i.e., U.S. Gulf of Mexico), systematic aerial and ship surveys indicate that sperm whales inhabit continental slope and oceanic waters, where they are widely distributed. Seasonal aerial surveys confirm that sperm whales are present in at least the northern Gulf of Mexico in all seasons. The best available estimates indicate a population of around 1,500 Sperm Whales in the northern Gulf of Mexico. (Waring et al. 2009 and references therein:Soulanille, Elaine)또 다른[View Source Articles & Credits on EOL] 고래잡이 워링(Waring)외 연구진(2009년)에 따르면 21세기 첫 10년동안 멕시코만(灣:Gulf of Mexico)에서 실시된 다분야 연구 결과에서 멕시코 향유고래가 대서양 어장 종(種)과 전혀 다른 종(種)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향유고래는 1900년대 초까지 멕시코 만에서 미국 포경선들에 의해 상업적으로 사냥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멕시코 북부 걸프(즉, 미국 멕시코만)에서 체계적인 대기환경 및 선박조사는 정어리 고래가 널리 분포되어 있는 대륙사면(대륙붕과 심해저 사이의 급경사면)과 해양수역에 넓게 분포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계절적인 대기환경조사는 향유고래가 모든 계절에 최소한 멕시코 북부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가장 가능한 추정치는 북부 멕시코 만(灣)에 약 1,500마리의 향유고래가 서식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위 세 문장의 영어자료에서 보더라도 최소한 대서양 내에서 향유고래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19세기에 발생한 동아시아진출설에 대한 반증으로 한반도 역사나 그외 친 서양 역사자료가 말하는 역사진실이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것이며 1853년 일본 우라가에 양키 페리가 입항했다고 하는 것은 전부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양키들이 사냥한 고래종류와 분포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은 17세에서 19세기까지의 고래잡이 사냥 장소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최소한 20세기까지는 태평양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였다.주로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멕시코 만(灣)을 중심으로 향유고래가 포획되었고 나머지 수염고래 역시 대서양 북극과 대서양 남부 그리고 카리브 해(海)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위 자료들을 통해 알 수가 있다.이러한 패턴은 적어도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지속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그러나 19세기 초부터 증기선이 발명이 되고 연안용 외륜선(外輪船:Paddle steamers)이 출현하여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연안으로 접근하는 고래사냥은 지협적으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20세기에 들어 선박이 배수량 만 톤 이상으로 커지고 발전된 프로펠러(propeller)엔진기관과 철갑선이 등장하였고 무엇보다도 위험을 상쇄시킬 수 있는 보험제도가 생기면서 그동안 기존 태평양 횡당 등 접근이 불가하던 해양의 악조건들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었고 태평양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고래사냥도 가능했다고 믿을 수 있다.오히려 열도일본인들은 2차세계대전(二次世界大戰)이 끝나자 패전국이란 입장과 다르게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앞세워 태평양전체를 휘접고 다니면서 특히 값비싼 향유고래와 수염고래등을 싹쓸이 할 정도였다고 자료에 나오고 있으니 그들의 고래사냥에 대한 남다른 취향을 가졌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서양인들의 고래잡이 습성을 그대로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여기에 더하여 서양 포경꾼들이 주로 포획을 한 주요 고래 종(種)을 살펴보고 그것들의 근원지가 어디며 네덜란드라고 하는 더치(Dutch)의 고래사냥 장소와 그 바톤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양키(Yankee)들의 고래사냥이 정말로 동아시아대륙 소속인 태평양이 맞는지 알아 보아야 한다.이것을 파악하기위해 전자에 참고한 뉴 베드퍼드 포경박물관(New Bedford Whaling Museum)자료 중 포경선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가 포획한 고래의 종(種)들을 세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고래(鯨)의 생물학분류체계를 보면 우제목(偶蹄目:Artiodactyla) 경우제류(鯨偶蹄目:Cetartiodactyla), 경하마형아목 (鯨河馬形亞目:Whippomorpha)에서 고래하목(Cetacea Brisson, 1762)으로 분류되고 여기에 포유류의 총칭으로, 수염고래류(Mysticeti)와 이빨고래류(Odontoceti)으로 나누고 있다.전체 고래류의 특징은 유선형 몸체에 수평 꼬리지느러미 및 머리 꼭대기에 분수공이 있는 매우 큰 해양 포유동물이며 앞다리는 지느러미로 진화하였고 뒷다리는 퇴화하였는데, 척추에 연결되어 있지 않고 몸 속에 작은 흔적이 남아있다고 알려지며 꼬리지느러미는 수평방향이고 몸에 털이 거의 없으며 두꺼운 피하지방이 체온을 보호하며 폐호흡을 하고 자궁 내에서 태아가 자라는 것과 배꼽이 있는 것 등 포유동물의 대부분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암컷은 하복부에 한 쌍의 젖꼭지가 있다고 설명된다. Cetacea (n.)order of marine mammals containing whales, 1795, Modern Latin, from Latin cetus "any large sea creature" (whales, seals, dolphins), from Greek kētos "a whale, a sea monster," which is of unknown origin, + -acea.고래하목의 어원을 보면 1795년 근대 라틴어 세루스(celus)의 큰 바다 생물(고래, 바다표범, 돌고래)등을 나타내는 말이고 그리스어 케토스(kētos)의 고래, 바다괴물(해양포유류)이란 의미로 쓰이고 이것에 동물접미사-acea 붙인 것이다. 鲸下目 (学名:Cetacea)旧称鲸目科学分类 界: 动物界 Animalia 门: 脊索动物门 Chordata 纲: 哺乳纲 Mammalia 目: 偶蹄目 Artiodactyla 演化支: 全撰类 Artiofabula 演化支: 鲸反刍类 Cetruminantia 演化支: 鲸凹齿形类 Cetancodontamorpha 亚目: 河马形亚目 Whippomorpha 演化支: 鲸形类 Cetaceomorpha 下目: 鲸下目 Cetacea Brisson, 1762 小目 Ⓐ수염고래소목(鬚鯨小目:Mysticeti)Ⓑ이빨고래소목(齒鯨小目:Odontoceti)(소멸)†古鯨小目 Archaeoceti(并系群) 그렇다면 19세기 양키 포경선들이 주로 포획한 고래들의 종(種)들을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A)향유고래 Sperm Whale (Physeter macrocephalus):(B)흑고래 Black Whale ①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북대서양참고래Eubalaena glacialis(Müller, 1776)②Southern right: Eubalaena australis 남방참고래; Eubalaena australis(Desmoulins, 1822)③North Pacific right: Eubalaena japonica 북태평양참고래Eubalaena japonica(Lacépède, 1818)(C)활머리고래, 북극고래 Bowhead Whale (Balaena mysticetus)Balaena mysticetus Linneus, 1758 (D)회색고래 Gray Whale (Eschrichtius robustus)귀신고래 Eschrichtius Gray, 1864 Eschrichtius robustus (Lilljeborg, 1861) Rorqual Whales수염고래과(E)혹등고래 Humpback Whale (Megaptera novaeangliae) 흑고래속 Megaptera novaeangliae (Borowski, 1781) (F)대왕고래 Blue Whale (Balaenoptera musculus)Balaenoptera musculus (Linnaeus, 1758)(G)큰고래, 지느러미고래 Fin Whale (Balaenoptera physalus)Balaenoptera physalus (Linnaeus, 1758) 등이다. 포경선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가 기록한 항해일지에 나타난 고래의 종(種)열거된 순서가 위와 같고 이것을 생물분류체계적으로 구분을 해보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가 있다. Ⓐ수염고래소목 Baleen Whales(鬚鯨小目:Mysticeti) 참고래과 (Balaenidae)북극고래속(屬:Balaena), 종(種) (C)북극고래:활머리고래 Bowhead Whale (Balaena mysticetus, Linnaeus 1758)참고래속(屬:Eubalaena), 종(種) (B)Black Whale(①북대서양참고래 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 ②남방참고래Southern right: Eubalaena australis, Desmoulins 1822; ③북태평양참고래 North Pacific right: Eubalaena japonica, Lacépède 1818: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대왕고래속(屬:Balaenoptera)의 종(種) (F) 대왕고래 Blue Whale(Balaenoptera musculus, Linnaeus 1758)와 종(種) (G)큰고래 Fin Whale(Balaenoptera physalus, Linnaeus 1758)흑고래속屬(Megaptera), 종(種) (E) 혹등고래 Humpback Whale (Megaptera novaeangliae, Borowski 1781)수염고래소목(Mysticeti) 귀신고래과 (Eschrichtiidae)귀신고래속屬(Eschrichtius), 종(種) (D) 회색고래:귀신고래 Gray Whale(Eschrichtius robustus, Lilljeborg 1861) Ⓑ이빨고래소목Toothed Whales(齒鯨小目:Odontoceti) 향고래상과(Physeteroidea) 향고래과 (Physeteridae, Grey 1821) 향고래속屬(Physeter), 종(種) (A)향고래 Sperm Whale (Physeter macrocephalus, Linnaeus 1758) 이제부터 양키 고래사냥꾼들이 포획한 고래를 (A), (B), (C)...순서대로 고래가 어디에 분포하는 것인지원 분포지를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Physeter macrocephalus Linnaeus, 1758 Video footage: Sperm whale go down Physeter macrocephalus Azores Island, Pico, Atlantic ocean 먼저 Ⓑ이빨고래소목 Toothed Whales(齒鯨小目:Odontoceti), 항유고래(sperm whale, cachalot)이다. Sperm Whale (Physeter macrocephalus):* Grows to up to 60 feet long, weighs up to 63 tons; * Follows its food supply through the world’s oceans – is generally found in colder seas in summer and in temperate and tropical waters in winter; * Feeds on small fish, squid, giant squid: * Dives to depths of at least 3,300 feet — deeper than any other marine mammal; * Holds its breath while submerged for up to 90 minutes; * Displays enormous teeth on its lower jaw; * Was the principal prey of the nineteenth-century American whale-fishery; * Haunted Captain Ahab in the classic American novel, Moby-Dick. (A)향유고래란 Ⓑ이빨고래소목(Odontoceti)으로 분류하고 그 하류분류에서 a)강돌고래상과(Platanistoidea), b)참돌고래상과(Delphinoidea), c)향고래상과(Physeteroidea), d)부리고래상과(Ziphioidea)로 나누며 다시 그 향고래상과에는 향고래과(Physeteridae)와 꼬마향고래과(Kogiidae)로 분류된다.수염고래소목의 고래에게 있는 수염 대신 향유고래는 이빨을 갖고 있으나, 이빨을 이용해 먹이를 먹지는 않고 삼키며 S자 모양의 분수공(blowhole) 1개가 머리 앞 왼쪽에 있다.미국자료에는 향유고래(Sperm Whale)의 길이가 60피트(feet)까지 자란다 하였고 무게는 63톤(tons)이라 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74톤(ton)까지 자라는 것으로 나타난다.세계의 해양에 먹이들이 있는데 작은 물고기, 오징어, 대왕 오징어(Giant squid)라고 한다.이 오징어만 하더라도 동양에서는 ‘Architeuthis japonica, Pfeffer 1912’ 하여 어김없이 일본을 종명으로 하지만 서양에서는 ‘Architeuthis dux, Steenstrup 1857’라 하여 Origin-Mid 18th century (denoting the leading voice or instrument in a fugue or canon): from Latin, ‘leader’.후자의 라틴어 의미가 리더인데 바로 대왕오징어와 의미가 일치한다.학명명명시기도 빠르지만 대부분 북대서양을 분포지로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원종이라는 것이다. 향유고래는 일반적으로 여름에는 차가운 바다, 겨울에는 온대 및 열대바다에서 발견된다. 다른 해양 포유류보다 더 깊은 최소 3,300피트(feet)의 깊이까지 잠수하고 최대 90분 잠수하는 동안 숨을 참는다고 알려진다. 아래턱에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며 자료에서는 19세기 미국(양키)의 주요 포획대상이었다고 하고 있다.이빨고래류 중에 가장 큰 종(種)으로 이빨을 가진 동물로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종(種)보다도 크고 머리에 밀랍으로 가득찬 경랍기관을 가지고 있고 거대한 사각형 머리가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백경(白鯨:Moby Dick)에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우리나라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2004년 동해안에서 70년 만에 발견된 바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상적인 동선이 아니라는 뜻이다.즉 한반도 동해안에 향유고래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라 할 수 있다.하지만 양키들의 고래서식처를 이 잡듯이 훑어 버리는데 그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해 대서양이다.그리고 그에 따른 주요서식처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은 학명은 Physeter macrocephalus(대서양)이지만 이에 물타기식의 /Physeter catodon(태평양)을 이야기 한다. 면밀하게 따진다면 양키들의 고래잡이 종은 대서양의 향유고래인 것이 확실하다. 抹香鯨(学名:Physeter macrocephalus)又称巨抹香鲸、卡切拉特鲸,是世界上最大的齒鯨。科学分类 编辑 界: 动物界 Animalia 门: 脊索动物门 Chordata 纲: 哺乳纲 Mammalia 目: 偶蹄目 Artiodactyla 下目: 鲸下目 Cetacea 科: 抹香鲸科 Physeteridae 亚科: 抹香鲸亚科 Physeterinae 属: 抹香鲸属 PhyseterLinnaeus, 1758 种: 抹香鲸 P. macrocephalus 二名法 Physeter macrocephalus Linnaeus, 1758 이것도 미심쩍다고 하여 그렇다면 이 향유고래의 주요 먹이의 분포지도 알아보고자 한다.EOL 자료에 의하면 향유고래의 주요 먹이로 4가지를 들 수 있다.ⓐ보로 아틀란틱 오징어(Boreoatlantic Armhook Squid) 학명:Gonatus fabricii(Lichtenstein 1818), ⓑ북대서양대구 (coalfish)또는 미국에서 폴락(pollock)이라 칭하는 학명:Pollachius virens(Linnaeus 1758), ⓒ두족류(頭足類:Cephalopoda)라고 하는 학명:케팔로포다 큐비에르[Cephalopoda Cuvier 1797], ⓓ큰 종(種)의 ‘갈고리 오징어’라고 하는 학명:Kondakovia longimana Filippova 1972 가 있고 끝으로 ⓔ대왕오징어가 있다.그런데 ⓐ번째 먹이, 보로 아틀란틱 오징어(Boreoatlantic Armhook Squid)는 It occurs in the northern Atlantic Ocean from Canada to the Barents Sea. 즉 북대서양에서 생성되어 캐나다에서 노르웨이해 옆 바렌츠해역까지 분포되고 있다 하였다.속명(屬名) 보레오아틀란틱(Boreoatlantic)은 고대 그리스어로 북부(northern)를 의미하는 ‘Boreo[Βορέας (Boréas)]’와 대서양을 의미하는 ‘-atlantic’의 합성 어원임을 알 수 있어 이것은 바로 대서양북부지역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의심없이 북아메리카대륙 권이다. ⓑ번째 먹이, 북대서양대구 또는 검정대구(coalfish)라 하거나 미국에서는 폴락(pollock)이라 하는 어종(魚種)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북대서양을 근원으로 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번째 먹이, 두족류(頭足類:Cephalopoda)라는 것인데 학명:케팔로포다 큐비에르(Cephalopoda Cuvier 1797)이며 마찬가지로 별칭으로 여러 개의 앞 발(head-feet)로 설명된다. Brief squid have large eyes and several arm-like tentacles extending from the head. 짧은 오징어는 큰 눈과 머리에서 뻗어 나오는 팔 모양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바다생물이라 담수(潭水)에는 견딜 수 없지만 남부대서양에 있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연안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에서 발견된 단형 오징어(brief squid) 롤리군쿨라 브레비스(Lolliguncula brevis, 1823) 즉 대서양 단형 오징어(Atlantic brief squid:柔魚:望潮魚), 혹은 대서양 나비 오징어(Atlantic thumbstall squid)종이며 이것은 특별하게 기수(汽水:brackish water)에 내성이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였다. 두족류 동물은 복잡한 생화학적인 제약 때문에 민물 속에서 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4억년(億年)이상 생존하는 동안 완전하게 민물서식지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 이에 대한 증명이다. 두족류 동물은 심해평원(深海平原:abyssal plain)에서 바다 상층부 표면까지 범위로 넓고 바다의 깊숙한 곳 대부분에 서식한다. 이들의 다양성은 적도부근에서 가장 크며(다양성 연구에 의해 11°N에서 그물로 회수된 40종(種)표본) 극(極)지방에서는 감소된다. ⓓ번째 먹이, 콘다코비아 롱기마나(Kondakovia longimana Filippova 1972)는 학명시기가 최근이라는 단점이 있으며 별칭으로 ‘거대한 사마귀 오징어’, ‘긴팔 문어 오징어’로도 알려져 있고 ‘큰 종(種)의 갈고리 오징어’라고도 한다. 최소 길이가 85cm이고 약 1.15m이상의 덮개(遮蔽物)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종(種)들의 가장 큰 완벽한 표본에서 총 길이가 2.3m 인것이 2000년에 남극(南極)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종(種)은 남대양(南大洋)의 표해수층(epipelagic zone)과 중심해수에서 서식하며 이것의 범위는 남극과 남극대륙 극지부근일 수 있지만, 사우스조지아 섬(South Georgia:남대서양, 포클랜드제도 동남쪽 약 1,290km지점에 있는 영국령)과 태즈먼 해(Tasman Sea: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와 뉴질랜드 사이의 바다)까지이며 북쪽으로 뻗쳐 있다.특히 이 오징어는 주로 상어와 남아메리카대륙의 신천옹(信天翁:albatross), 향유고래, 펭귄 등 남대양의 포식자들에게 먹이가 되는데 특히 상어는 잠꾸러기상어(Somniosidae:sleeper shark)와 비악상어(porbeagle:Lamna nasus)이며 이들이 두족류 생물체의 각각 21%와 19%를 차지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잠꾸러기 상어 역시 학명 시기가 가장 빠른 북대서양 북극지역에 분포지의 그린랜드 상어(Greenland shark), 학명 Somniosus microcephalus Bloch & J. G. Schneider, 1801를 들 수 있고 비악상어(Lamna nasus Bonnaterre, 1788)역시 북대서양 북극을 분포지로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자에서 향유고래의 먹이로는 ⓔ대왕 오징어(Giant squid)라고 하였지만 이 대왕오징어 역시 분포지는 거의가 대서양 북부와 서부 남부로 나타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이상에서 향유고래 먹이 분포지를 살펴 본 결과는 향유고래가 대서양을 범위로 하여 북부와 서부 그리고 남부까지 폭 넓게 서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더치와 양키에 의해 17세기부터 고래사냥의 주 타킷이 된 향유고래의 포획 포경지는 바로 대서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양키 고래잡이들이 포획한 Ⓐ수염고래소목 Baleen Whales(鬚鯨小目:Mysticeti)의 종들이다.ⒶBaleen Whales (suborder Mysticeti)Baleen whales do not have teeth. Instead, they are distinguished by baleen, which hangs in strips from the roofs of their mouths. Baleen is composed of keratin, a substance found in nails, claws, horns, and hoofs. It looks like hairy, vertical venetian blinds. The whale uses it to strain out krill (masses of small shrimp-like crustacea that float near the water’s surface) from sea water.Ⓐ향유고래의 이빨고래소목(Odontoceti)과는 다르게 수염고래는 이빨이 없다. 대신 입천장에 매달린 발린(baleen:수염)으로 구별된다.수염은 손톱, 발톱, 뿔, 발굽에서 발견되는 물질인 각질(角質:keratin)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은 털이 많은 수직 베니션 브라인드(Venetian blinds)처럼 보이고 고래의 이 수염은 수면 근처에 떠있는 작은 새우 같은 갑각류, 크릴새우를 걸러내기 위해 사용된다고 설명하고 있다.수염고래류에는 수염고래소목(Mysticeti)으로 분류되고 그 하류분류에 참고래과 (Balaenidae),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 귀신고래과 (Eschrichtiidae), 꼬마긴수염고래과 (Neobalaenidae)가 있다.일반적으로 이빨고래류의 고래보다 몸집이 큰 것으로 나타나며 2개의 분수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대부분 연안에서 생활하며 때문에 인간의 포경산업의 주요 포획대상이 되기도 했던 고래이며 대부분 온순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 먼저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귀신고래의 경우는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다. (B)Black Whale : Growing up to 60 feet long and weighing up to 100 tons, these animals provided the backbone of the American commercial whale fishery from their early colonial shore-side exploitation until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Commonly termed “black whales” by American whalers, their hunt was called “right whaling” for their marketable baleen, similar to the great right whale of European commerce, the bowhead whale. These little-understood animals were also called Nordcapers or sletbacks and were seldom hunted by Europeans who considered them commercially inferior to bowheads. They made less oil, had coarser baleen, fought viciously, and frequently sank when killed. With a relatively small population in the North Atlantic, Eubalaena glacialis numbers were quickly reduced by colonial whalers who took advantage of their regular migratory routes. The southern species and the North Pacific species, however, provided sustained commercial advantages through heavy exploitation for many decades. Today, Eubalaena glacialis and Eubalaena japonica are the most threatened great whales on earth. The unreported killing of North Pacific right whales by Soviet commercial whalers in the twentieth century almost completely extirpated the species. Around 400 individuals currently make up the population of North Atlantic right whales which face threats from marine traffic, pollution and entanglement in fishing gear. (B)흑고래-Ⓐ수염고래소목 Baleen Whales(鬚鯨小目:Mysticeti) 참고래과 (Balaenidae) 참고래속(屬:Eubalaena), (B)흑고래(Black Whale)종(種)은 북대서양참고래 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 그리고 남방참고래 Southern right: Eubalaena australis, Desmoulins 1822; 마지막으로 북태평양참고래 North Pacific right: Eubalaena japonica, Lacépède 1818:등 크게 3종으로 다시 나뉜다.그러나 학명시기만 놓고 보면 흑고래라는 것은 북대서양참고래인 것으로 판단된다. 길이 60피트(feet)까지 자라고 무게가 100톤(ton)에 달하는 이 동물은 미국의 상업적인 고래 어업에서 19세기 말까지 일찍이 식민지동부해안에 대한 개발에 근간을 제공했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상당한 흑고래가 희생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일반적으로 미국(양키)고래잡이들이 "검은 고래"라고 부르는 이 포획은 유럽 상거래의 큰 수염고래, 즉 북극고래(bowhead whale)와 비슷한 시장성 있는 "고래잡이"라고 칭 하였으며 거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little-understood)이 포유류들은 얼음고래(Arctic whale or icy whale)혹은 칠칠맞지 못한(sletback)것이라 하여 상업적으로 북극고래보다 못하다고 하였고 유럽인들은 거의 포획하지 않았던 고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인이라고 하여도 대서양으로 넘어와 고래잡이를 했던 것은 숨길 수가 없다.이러한 것들은 북극고래를 선호했다고 하지만 유럽 특히 터치같은 서양포경선들은 흑고래 중에 북대서양참고래를 포획했다고 추정된다.그것들은 기름 채취량이 적고 거친 수염을 가졌으며 잔인하게 싸우고 죽으면 종종 가라앉아 버리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는 말이다. 북대서양에서 개체수가 비교적 적은 북대서양참고래(Eubalaena glacialis)는 규칙적으로 이동이 가능한 항로를 이용하는 식민지동부해안에서 포경하는 사람들에 의해 빠르게 감소되었고 남부종(southern species)과 북태평양종(North Pacific species)은 수 십 년 동안 심한 개발에 의해 상업적으로 유리하다고 하여 지속적으로 포획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북대서양참고래(Eubalaena glacialis)와 북태평양참고래(Eubalaena japonica)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협받는 거대 고래라고 알려져 있고 특히 북태평양참고래(North Pacific right whales)는 20세기에 소련의 상업적인 포경선들에 의해 알려지지 않는 포획행위는 거의 멸종을 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20년경 부터이다.우리가 궁금해 하던 일본은 2차세계대전 전까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와 중앙아메리카대륙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을 관할 했다고 할 때 특히 일본인들에 의해 북태평양참고래는 아마도 쏘련 못지 않는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현재 400 마리정도 개체 수량의 북태평양참고래가 해양교통, 공해, 어류장비로 인한 멸종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물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8.19세기에 더치나 양키들의 고래잡이에 대상이 된 것은 바로 북대서양참고래(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라는 사실을 알 수있어야 할 것이다. (C)Bowhead Whale (Balaena mysticetus): * Grows to about 60 feet in length and weighs 100 tons or more; * Prized by whalemen for quantity and quality of its blubber and baleen; * Carries the thickest blubber of any whale (20-28 inches), an adaptation to the icy Arctic waters in which the species lives; * Possesses longest (10- to 14 feet) and largest number (600) of baleen plates.(C)북극고래-Ⓐ수염고래소목 Baleen Whales(鬚鯨小目:Mysticeti) 참고래과 (Balaenidae)북극고래속(屬:Balaena), (C)북극고래:활머리고래 Bowhead Whale (Balaena mysticetus, Linnaeus 1758)종(種)은 길이 약 60피트(feet)로 자라고 무게는 100톤(ton)그 이상이다. 고래 기름과 수염의 양과 질은 고래잡이들이 상품으로 평가한다. 고래의 지방두께 20~26 인치(inch)를 가지고 있는 것은 차가운 북극 얼음물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고 긴 것은 10~14피트(feet)길이와 가장 많은 600개의 수염판(baleen plates)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다. The bowhead whale has been hunted for blubber, meat, oil, bones, and baleen. Like the right whale, it swims slowly, and floats after death, making it ideal for whaling. Before commercial whaling, they were estimated to number 50,000.Commercial bowhead whaling began in the 16th century when the Basques killed them as they migrated south through the Strait of Belle Isle in the fall and early winter. In 1611, the first whaling expedition sailed to Spitsbergen. By mid-century, the population(s) there had practically been wiped out, forcing whalers to voyage into the "West Ice"—the pack ice off Greenland's east coast. By 1719, they had reached the Davis Strait and, by the first quarter of the 19th century, Baffin Bay. 북극고래는 송곳니, 고기, 기름, 뼈, 그리고 수염 때문에 특히 서양고래잡이들에 의해 사냥되어 왔다. 참고래처럼, 천천히 헤엄치고, 죽은 후에 가라앉지 않고 떠다니기 때문에 고래잡이에 이상적이라고 하였고 상업적인 고래잡이가 성행되기 이전에는 개체수가 5만(萬)마리로 추정되었다.물론 번식에 의해 상당량이 늘어났겠지만 무차별 포획으로 인해 이것도 멸종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상업적인 포경은 잘 알다시피 포르투갈, 스페인 남만무역에 의해 16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진다. 그 때 남유럽 피레네산맥의 양사면인 에스파냐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거주하는 부족인 바스크족(Basques)들이 가을과 초겨울에 북대서양 벨 섬의 해협을 통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을 포획했다고 알려지는데 포르투갈 예수회 공동창시자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Francis Xavier)역시 이 이 바스크부족이다.벨섬의 해협(Strait of Belle Isle)이라 함은 캐나다 동부의 래브라도반도(Labrador Peninsula)와 뉴펀들랜드섬(Newfoundland) 사이의 벨섬해협(Strait of Belle Isle)이다.그런데 스페인지배로 몰락한 유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들은 캐나다 동부지역이며 대서양 북극 지역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일반적인 상황임을 알 수가 있다.물론 포르투갈인들의 인도양과 말라카해협의 활동 범위에서 크게 벗어난 이야기지만 상업적 포경이 이때부터 실시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엄밀하게 따진다면 유럽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은 대서양에 묶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하지만 이러한 동선 위치는 15세기부터 대해양시대라 하여 목표로 한 인도양과 말라카해협 및 더 나아가 동아시아대륙이란 서양사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17세기 1611년, 첫 번째 고래잡이 탐험은 더치(Dutch) 즉 네덜란드인에 의해 발견된 스피츠베르겐 섬(Spitsbergen)이었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아는 상식인데 역시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유럽대륙의 근원을 애써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그러나 이 북극고래는 20세기 중반까지, 개체수가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던 포경선들로 하여금 그린란드 동쪽 해안의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 "서빙(西氷)"이 되도록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은 시초가 대서양 북극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1719년까지 그들은 대서양 북극지역인 데이비스해협(Davis Strait)에 도착했고 19세기 1/4분기(1825년)까지 배핀만(Baffin Bay)에 도착했다고 한다. 사실상 이곳들도 자세히 보면 일찍이 유럽인들에 의해 모두 탐험되었다고 하는 곳인데 그들의 거처가 분명하게 들어나 있다는 사실을 서양사는 교묘히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즉 무수히 많은 유럽 서양고래잡이들이 북대서양에서 포획활동을 했다고 이해해야 마땅 할 것이다. (D)Gray Whale (Eschrichtius robustus):* Grows to up to 48 feet long, weighs from 25-30 tons; * Migrates 12,000 miles roundtrip — longest migration of any whale species – from the frigid waters of the Bering and Chukchi Seas, where it summers, to the warm lagoons of Baja California, where it winters; * Considered ferocious by whalemen, who called it “devil fish.” Present almost affectionate interaction between whale watching humans and gray다음은 (D)회색고래이다.Ⓐ수염고래소목(Mysticeti) 귀신고래과 (Eschrichtiidae) 귀신고래속屬(Eschrichtius), (D) 회색고래:귀신고래 Gray Whale(Eschrichtius robustus, Lilljeborg 1861)종(種)을 보자.귀신고래라고도 하는 회색고래(Gray Whale)는 최대 48피트(feet)길이까지 자라고 25~30톤(ton)까지 무게가 나가면서 수명은 50~70년이다. 왕복 12,000 마일(miles)을 이동하며 회색고래의 가장 긴 이동 거리는 따뜻한 캘리포니아 바자(Baja California)유호지에서 겨울철의 혹한수의 베링과 추크치해(Chukchi Seas)까지 이동하며 악마의 물고기라고 고래잡이들은 칭하고 흉폭하다고 하는 것은 고래를 관찰하는 인간과 귀신고래(회색고래)사이에 애정 어린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고 있다.물론 거칠기는 하지만 수염고래 특성상 온순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회색고래의 학명은 덴마크(Danish)의 동물학자, 생리학자, 해부학자인 에스크리크트(D. F. Eschricht:1798-1863)의 이름을 따 명명한 것이다.회색고래는 에스크리크티우스(Eschrichtius)유전자에서 유일한 종(種)이며, 귀신고래과(科:family Eschrichtiidae)의 유일한 유전자이다. 이 포유류는 3천만년 전 점신세(漸新世:Oligocene)의 초기에 나타난 포유동물로써 입 속에 있는 여과장치를 이용하여 다량의 먹이생물을 한꺼번에 포식하는 형태 고래(filter-feeding whales)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North Atlantic populations were extirpated (perhaps by whaling) on the European coast before AD 500 and on the American coast around the late 17th to early 18th centuries. 그러나 제일 주요하다고 여겨지는 북대서양개체는 AD500년 이전 유럽해안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에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유입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18세기 북대서양에서 멸종되었다고 하고 있다.사실상 현재 회색고래(귀신고래)라고 하는 속과 과 모두 유일하다고 하는 학명(Eschrichtius robustus)의 분포지는 북태평양을 나타내고 있다.때문에 발트해(Baltic Sea), 와덴 해(Wadden Sea), 세인트 로렌스 만(Gulf of St. Lawrence), 펀디 만(Bay of Fundy), 허드슨 베이(Hudson Bay) 및 팜 리코 사운드(Pamlico Sound)를 포함한 대서양의 양쪽 해안 연안으로의 계절적으로 이동개체군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 등 유럽 해저나 연안의 화석에서 방사성탄소연대가 이를 확인시켜주고 위 분포지 가능성을 말하고 있으며 1997 년 프랑스 몽펠리 부근의 남부 라타라(Lattara) 고대항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 된 로마시대의 유물들에서도 대서양 회색 고래들이 바덴해(Wadden Sea)에서 유럽 해안을 오가며 이동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하고 있다. 고대 유전자(DNA)바코딩과 교원질(膠原質:collagen) 관련 펩티드(peptide) 근원의 지문채취를 이용한 2018년 연구는 지브롤터(Gibraltar)해협 동쪽에 있는 로마시대의 고래 뼈들이 한때 지중해까지 서식했던 것을 확인시켜주는 회색고래(북대서양긴수염고래:North Atlantic Common Rorqual)라고 밝혔다.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류과 유럽대륙 북극와 북대서양을 말하는 것이다. 비슷하게, 미국 동부 해안 지하 화석의 방사성 탄소는 최소한 17세기 동안 그곳에 회색고래가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며 이 개체는 1675년부터 최근까지 적어도 뉴욕사우샘프턴(New York Southampton)에서 플로리다주 주피터섬(Jupiter Island, Florida)까지 다양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1835년 난투켓 섬(Nantucket Island)의 역사에서 오벳 메이시(Obed Macy)는 1272년 전 식민지 초기에는 덴마크어로 죽검(Danish skrog:hull, carcass)이라고 발음과 비슷한 "스래그(scragg)"라고 불리는 고래가 항구에 들어와 정착민들에게 쫓기고 죽임을 당했다고 썼다는 사실과 네덜란드 학자 안톤 부데베인 데인스(Anton Boudewijn van Deinse:1885-1965)는 1725년 브리티시 법관이며 해양생물학자인 폴 더들리(Paul Dudley)가 초기 뉴잉글랜드 포경선들에 의해 사냥된 종들 중 하나로 묘사한 "크래그 고래"가 거의 확실히 회색고래였다고 지적했다는 사실을 자료가 말하고 있다.Journal of Mammalogy, Volume 58, Issue 2, 31 May 1977, Pages 237–239,Robert L. Brownell, Jr., Chan-il Chun Probable existence of the Korean stock of the gray whale(Eschrichtius robustus) Two geographically lsolated populations of gray whales, Eschrichtius robustus, ard knownin the North Pacific-the eastern Pacific or California stock, and the western Pacific or Korean stock(Rice and Wolmah, 1971: Tomilin, 1967). The range of the Korean stock is from the Sea of Okhotsk to the southern shores of the Republic of Korean(Tomilin, 1967: Andrews, 1914).Rice and Wolman(1971) reviewed the history of commercial exploitation of the Korean stock. Mizue(1951) reported that the last catch from this stock was a singlle whale taken in 1933 off the eastern coast of Korea, and concluded that the stock was extinet.문제는 이 종(種)에서 우리나라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태양신(神) 신화인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에서 주인공 부부가 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하는 그 바위가 귀신고래였다는 설이 있어 실제로 동해에 귀신고래가 많았다는 사실이다.하여 아래 같은 자료가 발견되는데 현재 유일한 귀신고래 학명 분포지가 북태평양을 지정하고 있기 때문에 오호츠크해(Sea of Okhotsk)와 동해(東海)를 오가는 ‘북서태평양귀신고래’라 하여 이것을 ‘한국계 귀신고래’라고 1912년 미국인 탐험가 로이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1884-1960)가 ‘Korean stock of gray whales’ 라는 명칭을 붙이기 까지 하였지만 현재는 학계에서 쓰지 않는 비공식 명칭이라 하는데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위 북아메리카대륙 대서양개체성이 더 높다 할 수 있다.즉 지금의 유일종으로 알려지는 학명의 명명시기가 (Eschrichtius robustus, Lilljeborg)1861년이라는 점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귀신고래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한 사실등을 묶어 볼 때 진성 귀신고래의 학명이 지금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Synonyms Balaena gibbosa Erxleben, 1777Eschrichtius gibbosus 1861Agaphelus glaucus Cope, 1868Rhachianectes glaucus Cope, 1869유일종의 별칭인 위 4가지 학명을 분석할 필요성이 있고 그 중에서도 제일 명명 시기가 빠른 학명 "Balaena gibbosa Erxleben, 1777"가 의심되나 분류학상 속(屬)이 북극고래속(Balaena)이며 북극고래또는 활머리고래(Balaena mysticetus Linnaeus,1758)와 같이 취급될 수밖에 없다.거의 고래하목(Cetacea)에 속하는 전체 과(科)를 분류한 존 그레이(John Edward Gray)는 분명히 알 것이지만 그는 살아있지 않다.이에 대한 문제제시를 보면 The subfossil remains of now extinct gray whales from the Atlantic coasts of England and Sweden were used by Gray to make the first scientific description of a species then surviving only in Pacific waters. 영국(England)과 스웨덴(Sweden)의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멸종된 회색 고래의 하위 화석 유적은 그레이 존 그레이(John Edward Gray)가 과명을 명명할 때 태평양의 물에서만 살아남은 종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설명을 하기 위해 사용하였다고 한다. 대서양개체와 태평양개체 사이의 정체성은 해부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하겠지만 한 종이 멸종된 상황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할 수 있다.물론 이것의 결과는 세계능력있는 생물학자들이 밝혀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에서 주인공 부부가 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하는 한국 귀신고래, 삼한 귀신고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그리고 진짜 귀신고래가 서식한 곳이 북아메리카대륙 동해 즉 대동양이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긴수염고래(rorquals Whale)(E)Humpback Whale(Megaptera novaeangliae): * Grows to up to 50 feet and weighs up to 50 tons; * Does not have a hump but arches its back when it dives, which may account for the name; * Displays huge flippers, which are nearly as long as one third of its body; * Breaches dramatically, propelling its huge body almost entirely out of the water and diving back in with an enormous splash; * Noted for complex, repetitive vocalizations. The Humpback was one of the five species normally hunted by the Yankee whalers, although it was the least desirable since it sank about half the time after being killed and its baleen was useless.(E)혹등고래는 Ⓐ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 흑고래속屬(Megaptera), (E) 혹등고래 Humpback Whale (Megaptera novaeangliae, Borowski 1781)종(種)이다.최대 50 피트(feet)까지 자라며 무게는 최대 50 톤(ton)이다. 혹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깊이 잠수할 때는 등을 아치모양으로 둥글게 구부리고 앞으로 회전하여 꼬리가 물과 수직이 되게 물속으로 들어가며 특징적인 것을 묘사한 것이며 몸의 1/3 정도에 해당하는 거대한 가슴지느러미가 있다. 물속에서 몸을 물 밖으로 거의 완전히 밀어내 배를 위로 하고 솟구쳐 올라 등 쪽을 활 모양으로 구부린 후 머리를 먼저 물속으로 처박는 재주넘기를 하면서 큰 마찰음과 포말을 내기도 하고 15 m가 넘는 대형 고래가 자기키만큼 뛰어오른다고 하였으며 복잡하고 반복적인 발성은 5~35분간 계속되기도 하며 소리는 신음소리나 울음소리에서부터 윙윙거리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알려진다. 혹등고래(Humpback)는 보통 양키들의 포경선들에 의해 사냥된 다섯 종(種)들 중 하나이지만 죽은 후 약 반시간 동안에 가라앉기 때문에 별 쓸모가 없어 별도 선호하지 않는다고도 알려진다.Humpback whales were hunted as early as the 18th century. By the 19th century, many nations (the United States in particular), were hunting the animal heavily in the Atlantic Ocean and to a lesser extent in the Indian and Pacific Oceans. The late-19th-century introduction of the explosive harpoon allowed whalers to accelerate their take. This, along with hunting in the Antarctic Ocean beginning in 1904, sharply reduced whale populations. During the 20th century, over 200,000 humpbacks were taken, reducing the global population by over 90%. North Atlantic populations dropped to as low as 700 individuals.혹등고래는 18세기 초부터 사냥되기 시작했고 역시 19세기까지 특히 미국(양키)들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은 대서양에서 그리고 더 적은 범위의 인도양(카리브해 예상)에서 이 고래를 사냥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폭발성 작살이 도입되었고 포경선들은 포경행위의 도약을 가속화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1904년에 시작된 남극해에서의 사냥과 함께 고래개체수를 급격하게 줄이게 하였으며 20세기에는 20만(萬) 마리가 넘는 혹등고래가 포획되어 전 세계 개체수의 90% 이상 줄었다고 말하고 있다. 북대서양 혹등고래의 개체수는 700 마리까지 줄어들었다. (F)Blue Whale (Balaenoptera musculus): *Grows to a length of 100 feet and weighs up to 150 tons * the biggest creature that ever lived. Because of intensive whaling in the 20th century, the Blue Whale has been left as one of the most endangered species. It was never hunted by the Yankee whaleman because it was considered too fast, too big, and because it invariably sank when killed.(F)대왕고래는 Ⓐ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대왕고래속(屬:Balaenoptera)의 (F)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 Blue Whale(Balaenoptera musculus, Linnaeus 1758) 종(種)이다.현존하는 동물은 물론, 역사상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동물로서 100 피트(feet)길이로 자라며 최대 150 톤(ton)까지 나간다. 평균적인 길이는 25m에서 33m정도이며 발견된 개체 중 가장 긴 고래는 길이 33.58m이고 가장 무거운 고래는 무게 190톤(ton)이라고도 한다.20세기의 집중적인 고래잡이 때문에, 푸른 고래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너무 빨랐고, 너무 크고, 죽으면 반드시 가라앉았기 때문에 양키고래잡이(Yankee whaleman)에 의해 사냥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를 잡거나 죽이기는 쉽지 않다고 하고 그들의 유영속도와 힘에 의해 고래잡이들이 초기에 향유고래나 참고래를 대상으로 포획하는 동안 거의 추적되지 않았다고 한다.너무크고 빨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1864년 노르웨이 고래사냥꾼 스벤 포인(Svend Foyn:1809-1894)에 의해 큰 고래를 잡을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작살(harpoon)이 발명되고 이를 증기선(steamboat)에 장착하면서 목적을 이루었고 곧 노르웨 북부의 핀마크(Finnmark)해안에 몇 군데의 고래잡이 집하장을 설치했으나 지역어부들의 분쟁으로 인해 1904년 폐쇄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왕고래가 사냥되기 시작했는데 1883년에 아이슬란드(Iceland), 1894년 덴마크 자치령 페로제도(Faroe Islands), 1898년 뉴펀들랜드(Newfoundland), 1903년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에서 사냥되었다고 하고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최초로 남대서양에 있는 산이 많은 불모의 섬, 조지아 남부(South Georgia)에서 포획되었다고 하고 있다. 1925년까지 그곳 조선소에 설치된 선미(고물) 조선대(造船臺)출현과 증기로 작동되는 고래 작살기는 대왕고래와 수염고래 전체적인 어획량을 늘렸고 남극과 남극대륙에서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1930년에서 1931년 두 해 동안 남극에서만 29,400 마리의 대왕고래가 포획되었기 때문에 이후로 물론 개체수가 현격하게 감소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이러한 개체수 감소현상 때문에 1946년에 고래의 국제무역을 제한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으며 역사성이 있는 모든 아시아연안 대왕고래 개체집단들은 일본의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에 벌어진 산업수렵정책에 의해 단기적으로 거의 멸종될 위기에 몰렸고 한 때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동중국해로 이동하였다고 하고 있지만 전부 멸종되다 시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사냥은 국제포경위원회에 의해 1966년에 금지되었고 소련에 이어 러시아에 의한 불법포경은 1970년대에 마침내 중단되었으나 그 때 북반구에서는 33만(萬)마리의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가 포획되었고 남극대륙, 남반구에서 3만(萬) 마리가 잡혔다고 알려진다. 남극에서 개체수가 360 마리로 줄어든 것은 초기 숫자의 약 0.15%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어 이를 계산해보면 초기에 약 24만(萬)마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G)Fin Whale (Balaenoptera physalus):* Grows from 60 to 85 feet long and weighs up to 80 tons; * Considered one of the fastest of marine mammals, swimming at estimated speeds of up to 25 miles per hour; *Not hunted by whalers in the age of sail — harpoons became dislodged due to its swimming speed and, like its close relative, the blue whale, it usually sank when killed.(G)큰고래는 Ⓐ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대왕고래속(屬:Balaenoptera) (G)큰고래 Fin Whale(Balaenoptera physalus, Linnaeus 1758)종(種)이다.길이 60~85피트(feet)길이에 80톤(ton)까지 자라는데 대왕고래 다음으로 큰 해양 포유류이다. 두 가지 분명한 아종이 북대서양과 남극에 있고 전 세계의 대양, 극지방, 열대지방에 걸쳐 분포하지만 극지방의 빙산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개체 밀도는 온대지방에서 가장 높다. 무리 지어 다니는 작은 물고기 및 오징어, 크릴새우 같은 갑각류를 먹고 시간당 최대 25 마일(miles)의 유영 속도로 예상되는 해양 포유류 중 가장 빠른 것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유영하는 동안 포경원들이 포획을 하지 않는 것은 작살은 유영 속도 때문에 빗나가고 가까운 친척 인 대왕고래와 같이 죽임을 당하면 보통 완전히 가라앉기 때문이다.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어 국제포경위원회(IWC: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에서 포경 제한하고 있지만 최근 아이슬란드와 일본에서 임의로 이들을 다시 포획하고 있으며 일본의 마구잡이 포획으로 개체 수가 줄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많은 큰 긴수염고래(rorquals)처럼 큰고래(fin whale)는 세계적인 종이다. 가장 높은 개체밀도는 온수와 차가운 물에서 나타나고 가장 따뜻한 적도인 지역에 덜 밀집되어 있다. 북대서양 큰고래는 멕시코 만과 지중해, 북쪽으로는 배핀만(Baffin Bay)과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까지 분포가 넓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큰고래는 대략 30°N 위도에서 흔하지만, 브라이드고래(Bryde's whale:Balaenoptera edeni)와 큰고래를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30°N 위도 남쪽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해 상당한 혼란이 발생한다. 광범위한 선박 조사를 통해 연구원들은 서부 북대서양에 있는 큰고래의 여름 먹이 범위가 해안에서 1,000 fathom(수심단위:1.83m)까지 주로 41°20'N과 51°00'N 사이라고 결론지어졌다.19세기에,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는 가끔 배를 탄 포경선들에 의해 사냥되기도 했지만, 비교적 안전했던 것은 유영속도가 빨라 그 당시 범선들을 쉽게 앞지를 수 있었고 종종 죽임을 당했을 때 가라앉기 때문에 애써 고래를 쫓는 시간은 낭비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증기선(steam-powered boats)과 큰 고래를 포획하기에 적합한 작살들이 나타나 그들을 한 껏 포획하고 산업규모로 대왕고래와 보리고래(sei whale:balaenoptera borealis)와 함께 확보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다른 고래종들이 과도한 수렵을 겪으면서, 포경산업은 그러한 공간 대체물로 여전히 육질이 풍부한 큰고래로 눈을 돌렸다 하였고 그것은 주로 송곳니, 기름, 그리고 발린(수염)때문에 사냥되어졌다. 약 704,000 마리의 큰고래들이 1904년에서 1975년 사이에 남극의 포경 작전에서만 잡혔다고 알려진다. 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 대왕고래속(屬:Balaenoptera)①브라이드고래(Bryde's whales:Balaenoptera edeni)②보리고래(sei whale:balaenoptera borealis) 마무리 이미 벌써 완성 된 글을 올릴 수도 있었다.한편으론 독자들에게 미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블로그에 올려놓고 정리단계에서 그만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안타깝게도 텍스트파일, 그림파일 할 것 없이 전체적으로 랜섬웨어(Ransomware)에 공격을 받아 어렵게 확보한 자료들을 순식간에 다 잃어버리고 새롭게 재차 자료를 구해 올리는 과정에서 글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위험을 예상하고 평소에 외장하드를 사용하고 기존 자료를 확보한 것 때문에 중요한 자료들은 상당수 보존할 수 있었다.랜섬웨어공격을 두번째 크게 당하는 입장이라서 조심을 극도로 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고 어쨌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죽을 고생을 하고 찾아 놓은 괜찮은 자료와 그와함께 정리해놓은 글까지 깡그리 잃어버리는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번째 난감한 입장에 놓였다는 것은 앞으로 자료를 관리하는데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최근에 올리는 3가지의 글이 모두 그렇게 늦어진 것이다.지금까지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생물학적으로 분석한 것 중에 가장 자료가 광범위하게 수집되고 그것을 참고로 하면서 짧지 않는 글을 긴 시간과 작지 않는 공력으로 정리하여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마침내 블로그에 올리게 되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오늘날 근세사와 고래잡이의 역사는 어쩐지 닮은 것 같기도 하다.실제로 16세기부터 고래잡이가 성행된 것은 상업적으로 포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상업적이라는 의미는 사고파는 행위를 통하여 이익을 얻는 것인데 그 속에는 자연보호나 환경보호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더욱이 역사는 그들의 기록이 말해주는 것으로 정리되고 실증적인 것이 되어서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 느낌을 받는다.고래가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어찌보면 사람과 비교하기는 힘들어도 서양인들이 발이 닫는 곳은 고래뿐만아니라 사람도 그와같은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서양인들이 가는 곳은 늘 상 학살이 따라 다닌다.서양인들이 가는 곳은 늘 전염병이 돌아 쑥대밭이 되고 만다.고래사냥이 초창기에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음에도 망망대해에서 목숨을 걸고 고래와 씨름을 하기를 몇날 몇일을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 고래가 항복하면 동시에 바다에 그냥 가라 앉는 고래를 아쉬움으로 달래면서 애초 포기하거나 아예 공격하지 않지만 숨이 끊겨도 가라앉지 않는 고래는 바로 올라타 배를 싣을 수 있도록 난도질하여 조각을 내고 주요분위를 분해하여 올려 놓는 과정은 고래잡이 포경원들에게 결코 쉽지 않는 사투인 것이 틀림없다.기록들을 보다보면 특히 포경선원들의 선상생활은 그야말로 참혹한 것이고 사람이 목숨을 붙이고 사다는 의미가 새롭게 각인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생활이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선주의 지시를 받은 산장은 선원들을 재촉하고 고래를 잡을 수 있을만큼 포획할 것을 명령한다.여기서 고래잡이 선원들의 참상은 나중에 기회있을 때 하자.재차 말하지만 서양인들의 고래잡이의 주 활동범위는 그들의 본거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야기다.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이미 그들이 포획한 고래 종들의 분포지를 살펴보고 충분히 밝혀 알았다.글쓴이가 서양인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동양사에 자주 등장하는 서양인이며 이는 일반적으로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유럽인들과 별개로 구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크다.유럽인들이라고 하여 다 선문영인이고 선지식꾼들이 아닌 만큼 적어도 15세기부터 18세기사이에 역사를 조작한 세력, 바로 해양세력으로써 종전 해적행위를 일삼던 무리라고 정리하고 싶어진다.그들의 활동범위를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그들은 태생적으로 대서양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보고 크고 작은 섬, 정크선을 숨길 수 있는 작은 만(灣)같은 한적한 곳, 다도해(多島海) 즉 대서양을 포함한 각 해안, 카리브해(Caribbean Sea)연안과 남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을 근거로 했다는 것은 별로 의심할바가 아니다.아시아역사, 신중국역사, 그리고 한반도와 열도를 배경으로 하는 태평양에서 17세기부터 그들 서양세력들에 의해 고래잡이가 성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코메디같은 이야기다.이런 가당찮은 주장은 2차세계대전 후 미군군정하에서 그들이 뿌려놓은 주입식 교육프로그램으로 인해 기정사실화된 것으로써 상당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와 열도만 겪었던 일이 아니라 아시아전체가 이런 역사수렁이 속으로 빠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종전 글에서도 주장한 사실이지만 아무리 무모하고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망상에 빠진 해양세력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결코 이익이 되지 않고 그들의 삶이 제대로 보장되지 것에 무조건 동조하거나 협조할 턱이 없으며 만약 기대에 여의치 않다면 냉정하게 판단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영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부터 동아시아대륙 홋가이도까지 혹은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주 노퍽(Norfolk)에서 동아시아대륙 열도일본 우라가(浦賀)까지 돛2개 아니면 3개짜리의 500톤도 되지 않는 소형 범선을 끌고 자그만치 30,000 km가 넘는 항해거리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죽음을 담보하고 수개월동안 실행한다고 생각해보라.당신이라면 하겠는가.서양인뿐만 아니라 누군들 목숨과 일순간 인생을 종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택할 사람이 있겠는가.마찬가지로 17세기때 툭하면 서양인들은 그러한 논리로 식민제국을 건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럴때 글쓴이 뿐만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들이 말처럼 특별한'그들의 신(神)'이 있어 지켜주는 것이라고도 생각했을 정도였다.이것을 서양세력들이 모를 턱이 없다.이런 취약점은 일본을 이용하고 그것을 타겟으로 유럽역사를 만들고자 했던 것도 사실이다.이것에 출발점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예수회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동아시아에 일본이 존재했다고 하는 것은 서양세력들이 동서양사를 분리하면서 생성된 역사프레임을 조작키 위한 수단이며 삼한역사를 동아시아에 가두어 둘 수 있는 조건을 동시에 만드는 것이며 서양역사의 실증적 자료를 확보하기 위함이다.때문에 동아시아의 일본은 서양문화 즉 유럽역사의 산파역할을 했다.오히려 유럽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 자포니즘 현상이 바로 그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증거이다.이것을 위해 그들은 적당하게 포장해야 했고 짜집기하여 진짜처럼 만들어야 했으며 오늘날 서양사가 완성이 될 수 있도록 2차세계대전에서 최종 마무리 진 것은 그들에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그렇게 보면 서양인들의 동양사의 진출사는 반드시 일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이번 주제 글인 고래잡이가 북아메리카대륙 해안이나 더 나아가 대서양을 대상으로 성행했다는 것은 그들의 최소한의 근거지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유럽사 모순만큼 크다.그러나 서양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래잡이를 태평양을 중심으로 아시아대륙 한반도와 열도를 기착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들의 완성된 유럽사의 실증적 역사를 표본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이야기가 아니다.해양시대를 개척했다고 하는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1460-1524)가 인도양을 거쳐 인도에 들어간 것이 3차간에 1524년이 마지막 년도이고 1534년 8월 15일에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1491-1556)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가 주도하여 일본과 관계설정을 맺게되는데 예수회 공동창시자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1506-1552)는 1549년 8월 카고시마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어쨌던 간에 일본과 유럽역사는 이렇게 엮이게 된다.그것들은 결코 전통성의 순응의 역사가 아니다.우리가 의혹스럽게 바라보는 예수회 생성과 역할 만큼 혼란스러운 것이다.유럽역사의 바탕이 되는 해양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마치 오늘날의 발달된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지구 곳곳에 누비는 상황을 그대로 적용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은 당시 서양세력들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다.그럼에도 그러한 역사에 대해 비판도 없고 아무런 방해나 장해가 없었다는 사실은 2차세계대전 후 세계질서를 손아귀에 틀어 쥔 힘이 평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는 것이다.누가 이러한 역사를 거부할 것인가.거부할 힘과 여력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아마도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그렇듯 이러한 모순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투쟁한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없이 감쪽같이 사라졌음은 물론이다.그렇다. 지금까지 이 긴 글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해양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세들이 처음 고래잡이를 시작한 장소는 절대로 태평양이 될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한반도 또는 열도에 도착한 서양인들도 실제사실이 아닌 전부 허구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 수 있어야 한다.즉 독도 지명이 되어버린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De ancourt)가 처음으로 한반도 동해안에 들어와 이를 발견했다고 한 사실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물론 그렇게 본다면 일본 열도 우라가에 입항했다고 하는 양키 고래잡이 선장 페리의 정체도 허구이거나 행적을 따져보면 모호질 수밖에 없다.이러한 주장엔 절대 무리는 없다.이것이 글쓴이가 파악한 분석에 의한 상식이며 펙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16세기부터 해양시대의 대주자 더치(Dutch)라고 알려진 네덜란드에 의해 본격적으로 포경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더치(Dutch)가 17세기 후반부터 잉글랜드와 대립되면서 점차 인도를 거점으로 세력을 키우던 잉글랜드세력에게 압도(壓倒)되었고 1799년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해산되면서 이때부터 고래잡이의 터전과 그 구성원들이 양키들에게 그대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인데 자본이 자리를 이동하게끔 크게 움직인 것이 틀림없다.더치가 새로운 자본주로 변신한 양키인가하고 의문도 가질 수 있다.잉글랜드는 불쑥들어갔다가 다시 튀어나오는 스폰치 또는 봉봉볼 같은 느낌이 드는 역사개체이다.그들은 북아메리카대륙 뉴잉글랜드를 깃점으로 하고 버지니아주가 그들의 본거지라는 점도 인식한다.정확하게 18세기후반 19세기 초부터 고래잡이 바톤(baton)을 더치에 이어받아 20세기 초까지 고래잡이는 양키에 의해 지속되었고 그들이 북아메리카대륙 북대서양 주요한 고래의 씨를 말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미국이 고래에 대한 책임을 느껴서인지는 몰라도 1946년 12월 2일 워싱턴 D.C.에서 국제포경규제협약(1948년 11월 발효)이 채택하였고 국제포경위원회(IWC)설립하여 1982년 남획으로 인한 멸종을 우려하면서 결국 상업포경을 금지할 것을 결의했으며 이어 1986년부터 세계적으로 포획이 전면 금지를 선언했다.그럼에도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더치(Dutch), 양키(Yankee) 이 두 세력들의 포경활동의 주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북아메리카대륙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의 뉴베드퍼드(New Bedford)와 난투켓(Nantucket)은 고래잡이 근거지로 동일하게 사용한 흔적이 이글에서도 발견된다.실제 포경활동에 대한 사실들을 현재 뉴베드퍼드에 있는 포경박물관(New Bedford Whaling Museum)자료를 통해 일련의 사실과 궁금한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일부분이라도 분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것 틀림없다.그러나 많은 포경선 중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의 자료만을 참고로 하였다는 사실에서 스스로 자료의 부족함을 느끼지만 당시 19세기 초반 고래잡이의 극적인 상황과 포획된 고래가 생물학적 관점으로 어떤 종(種)이 주류이었는가를 파악하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들어가면 19세기 미국(양키)의 주요 포획대상이었다고 하고 있는 향유고래(Sperm Whale)의 서식지가 북아메리카대륙 동해 대서양이라는 확고한 사실과 향유고래의 주요 먹이로 4가지가 분류되는데 첫째먹이 보로 아틀란틱 오징어, 둘째먹이 북대서양대구(coalfish), 세째먹이 두족류(頭足類:Cephalopoda), 네째먹이 큰 종(種)의 ‘갈고리 오징어’, 다섯째먹이 대왕오징어까지 분포지가 전부 북아메리카대륙을 깃 점으로 나타나고 북아메리카대륙 동해라고 할 수 있는 대동양 즉 대서양 전체에서 서식하던 것임을 알 때 이 향유고래를 포획하고자 하던 서양해양세력들은 대서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판단을 하게 했다.두 번째 종(種)에서수염고래소목에 분류된 흑고래 역시 북대서양참고래(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가 주종을 이루었고 당시 유럽대륙에 거주한 유럽인이라고 하여도 대서양으로 넘어 북아메리카대륙 북극에서 고래잡이를 했던 것은 숨길 수가 없는 사실이며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에서 일찍부터 포경하는 서양 사람들에 의해 빠르게 감소되었다는 사실과 17세부터 포경을 시작했던 더치(Dutch)나 양키(Yankee)들의 고래잡이에 주요 대상이 된 것은 바로 북대서양참고래(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이도 첫번째 종(種)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그리고 세 번째 종(種)으로 수염고래소목의 북극고래 혹은 활머리고래가 무게 100톤(ton)이상의 고래에서 채취되는 기름과 수염의 양과 질은 고래잡이들이 상품으로 평가했다는 사실과 송곳니, 고기, 기름, 뼈, 그리고 수염을 얻기 위해 특히 서양고래잡이들에게 적극적인 포획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고 참고래와 마찬가지로 사냥하기 좋도록 천천히 헤엄치고, 죽은 후에 가라앉지 않고 떠다니기 때문에 고래잡이들이 선호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이 종(種)의 주요 서식처가 북대서양 북극이며 위치적으로는 캐나다 동부의 래브라도반도(Labrador Peninsula)와 뉴펀들랜드섬(Newfoundland)사이의 벨섬 해협(Strait of Belle Isle)인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 이 역시 위 두 종(種)과 동일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네 번째 종(種)인 수염고래소목의 회색고래(귀신고래)는 워낙 남획이 심해 절멸되었다고 하는 종(種)인데 이 종(種)을 한국귀신고래라 했다는 사실도 밝혔다.북대서양귀신고래가 절멸하는 대신 잔존하고 있는 북태평양귀신고래가 한국귀신고래로 변신하려다 그 마저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당시 빈곤한 한국의 위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이 귀신고래는 3천만년 전 점신세(漸新世:Oligocene)의 초기에 나타난 포유동물로써 입 속에 있는 여과장치를 이용하여 다량의 먹이생물을 한꺼번에 포식하는 형태 고래(filter-feeding whales)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북대서양개체라고 하는데 서기(AD)500년 이전 유럽해안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에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초 사이에 유입되었다고 설명하고 18세기에 북대서양에서 멸종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스페인에 의해 몰락한 바스크부족에 의해 1372년부터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귀신고래를 포획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주요서식처가 북극 발트해(Baltic Sea), 와덴 해(Wadden Sea), 세인트로렌스 만(Gulf of St. Lawrence), 펀디 만(Bay of Fundy), 허드슨 베이(Hudson Bay) 및 팜 리코 사운드(Pamlico Sound)를 포함하고, 대서양의 북극, 양쪽 해안과 연안으로의 계절적으로 이동개체군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 개체는 1675년부터 최근까지 적어도 뉴욕사우샘프턴에서 플로리다주 주피터섬(Jupiter Island, Florida)까지 움직임이 다양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역시나 1835년 난투켓 섬(Nantucket Island)의 역사에서 오벳 메이시(Obed Macy)는 1272년 전 식민지 초기에 덴마크어(Danish skrog:hull, carcass)껍질과 죽검; 목졸라 죽이다는 의미의 "스래그(scragg)"라고 불리는 고래가 항구에 들어와 정착민들에게 쫓기고 죽임을 당했다고 그의 글에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네덜란드 북해 해양표본을 수집하던 동물학자인 안톤 부데베인 데인스(Anton Boudewijn van Deinse:1885-1965)는 1725년 브리티시 법관출신이며 해양동물학자인 폴 더들리(Paul Dudley:1675-1751)가 초기 뉴잉글랜드 포경선들에 의해 사냥된 종(種)들 중 하나로 묘사한 "크래그 고래(scrag whale)"가 거의 확실히 회색고래였다고 지적했다는 사실 등은 비록 멸종이 되었지만 북아메리카대륙 특히 대서양 서부연안에 분포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그것과 함께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태양신(神) 신화인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작품에서 주인공 부부가 귀신고래(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 설화는 옛부터 동해안에 귀신고래가 많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동아시아대륙의 오호츠크해(Sea of Okhotsk)와 동해(東海)를 오가는 고래를 ‘북서태평양귀신고래’라 하고 이것을 ‘한국계 귀신고래’라고도 칭한 1912년 미국인 탐험가 로이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1884-1960)가 ‘Korean stock of gray whales’ 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것은 원래 명칭을 옮기고자 했던 것이지만 이마저도 현재는 학계에서 쓰지 않는 비공식 명칭이라 하고 있다.이런 사실에서도 보면 답답하게 여긴 미국 학자가 한국귀신고래라고 명칭을 붙여 넘겨주었음에도 이조차 못 받아먹는 것이 한반도 생물학자들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할 이야기다.1977년 5월 31일 58(卷:Volume)포유동물학 저널(Journal of Mammalogy)에서 회색고래(귀신고래)는 한국고래일 가능성을 말하였다.지리적으로 고립된 두 종(種)의 회색고래(gray whales:Eschrichtius robustus)가 하나는 북태평양 개체의 캘리포니아 고래자리(Cetus)(California stock)와 다른 하나는 서태평양 개체의 한국고래자리(Cetus)(Rice and Wolmah, 1971: Tomilin, 1967)으로 구분하였는데 어쨌거나 태평양에서 동서구분되는 것이다.물론 이것의 근거로 한국고래자리(Cetus)의 범위를 오호츠크 해부터 한반도 남해안까지(Tomilin, 1967: Andrews, 1914)를 말하였고 이 고래를 상업적으로도 이용된 사실을 밝혀 최종 1933년에 한반도 동해안 벗어난 곳에서 마지막으로 이 귀신고래가 포획된 사실을 말하면서 그러한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물론 이 보고서는 한반도 귀신고래가 동해안에서 마지막으로 1933년에 포획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지만 기실 '한국귀신고래'라 함은 지금은 멸종이 되어버린 북아메리카대륙 동해 대동양(大東洋)에 존재해야 하는 즉 대서양개체 바로 그것일 것이란 확신이 있다.이런 이야기는 이제는 상식이다.그리고 양키들에게 포획된 고래 다섯번 째 종(種)은 수염고래소목(Mysticeti)의 혹등고래(Humpback Whale)이다.이 혹등고래 역시 울산반구대의 고래암각화의 암면조각(岩面彫刻:petroglyph)에서 등에 빗줄기처럼 무늬로 표시된 고래가 이 혹등고래라고 여겨지는데 18세기 초부터 사냥되기 시작했고 역시 19세기까지 특히 미국(양키)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은 대서양과 그리고 더 좁은 범위의 인도양(카리브 해 예상)에서 이 고래를 사냥하고 있었다고 알려지며 19세기 말, 폭발성 작살이 도입됨과 함께 발전된 포경선에 의해 혹등고래 잡이가 가속화되었고 이것은 1904년에 시작된 남극해에서의 사냥과 함께 고래개체수를 급격하게 줄이게 만들었으며 20세기에는 20만(萬) 마리가 넘는 혹등고래가 포획되어 전 세계 개체수의 90% 이상 줄었다고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혹등고래도 위 네 가지의 종들과 서식처가 물론 다르지 않다.여섯번 째 종(種)은 수염고래소목의 대왕고래이다.역사상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동물이며 무게가 190톤(ton)가량 이라고도 한다.19세기 중반부터 사냥되기 시작한 상황에서도 몸집이 거대하면서 유영속도가 빠르고 죽으면 반드시 가라앉았기 때문에 19세기 초기만 하더라도 양키고래잡이(Yankee whaleman)에 의해 사냥되지 않았지만 1883년에 아이슬란드(Iceland), 1894년 덴마크 자치령 페로제도(Faroe Islands), 1898년 뉴펀들랜드(Newfoundland), 1903년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에서 사냥이 점차적으로 진행되었고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최초로 남대서양에 있는 산이 많은 불모의 섬, 조지아 남부(South Georgia)에서 포획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1925년까지 그곳 조선소에 설치된 선미(고물) 조선대(造船臺)출현과 증기로 작동되는 고래 작살기는 대왕고래와 수염고래 전체적인 어획량을 증폭시켰고 특히 남극과 남극대륙에서 포획을 증가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양키가 포획한 마지막 종(種)으로 수염고래소목의 '큰고래' 종(種)인데 알려진 길이는 27.3 m(89.6 ft) 최대 체중 추정치는 114 ton(톤)으로서 이 종의 가까운 친척 인 대왕고래와 같이 19세기 중기부터 본격적인 포획이 시작되었고 북대서양 큰고래는 멕시코 만과 지중해, 북쪽으로는 배핀만(Baffin Bay)과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까지 분포가 넓게 나타난다고 하고 있다.살펴본 바대로 양키들이 19세기에 사냥한 고래의 종(種)이 7종(種)을 살펴보았지만 이것들의 분포지가 하나같이 전부 대서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긴 시간을 왔다.보시다시피 더치와 양키들의 포획활동은 결론적으로 대서양이다.결국 그들이 16세기부터 동아시아대륙에 감히 넘나들었다고 하는 것은 유럽역사를 만들기 위한 허구이다.한반도 근세사, 열도일본근세사, 더나아가 신중국과 아시아제국역사가 허구란 사실말고는 이 글에서 답할 것이 없다.이를 어떻게 아니라고 하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반구대 암각화" rel="tag" target="_blank">반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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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가리로 보는 삼한역사
******************************쏘가리로 보는 삼한역사 글쓴이:한부울 1)들어가기2)동아시아용 쏘가리 구분3)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꺽지류와 쏘가리류는 대서양 열대성의 물고기4)고전 역사가 말하는 쏘가리5)만다린 피시라고 하는 진짜 쏘가리을 찾아라.6)진짜 쏘가리 페르시과(河鱸科:Percidae)다.7)쏘가리의 천적(天敵:natural enemy)8)마무리 1)들어가기 쏘가리는 민물고기이며 '맛잉어'라고 알려져 있다.한국어류대도감에 따르면 쏘가리를 금린어(錦鱗魚), 궐어(鱖魚), 금문어(錦文魚), 궐돈(鱖豚), 수돈(水豚), 자어(滋魚), 석계어(石桂魚), 강쏘가리, 금영어, 천잉어, 쏘래기, 황쏘가리, 맛잉어, 화즉어(華鯽魚)등으로 소개된다.허균(許筠)의 문집의 성소부부고에서는 서울 동서쪽에서 많이 나는데 속칭 염만어(廉鰻魚)라고 했다.신중국자료를 보면 궐돈(鳜豚), 수돈(水豚), 석계어(石桂鱼), 계어(蘮鱼), 금린어(锦鳞鱼), 계어(桂鱼), 계어(鯚鱼), 오화어(鳌花鱼), 모저각(母猪壳) 등으로 칭한다고 되어 있다.이명 즉 다른이름들에서는 돈(豚) 즉 돼지가 많이 나타난다.두산백과를 참고하면 이만영(李晩永)의 재물보[才物譜:1798]에는 물고기 살 맛이 돼지고기처럼 좋다하여 수돈(水豚)이라고도 하였고 이시진(李時珍:1518-1593)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대어(臺魚), 석계어(石桂魚)라 하였는데 석계는 붓순나무(莽草:Illicium)로 '따뜻한 남쪽나라의 나무'라는 사실을 대입할 수 있다.대어(臺魚)의 대(臺)자가 대만과 관계할 수 있는 역사문제도 있다.근원적으로 쏘가리는 따뜻한 남쪽 대(臺)에서 서식하던 종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역사성을 따지면 이 쏘가리를 영어로는 만다린 물고기(mandarin fish)라 하거나 궐이라 하여 옛 중앙정부 벼슬아치처럼 귀한 의미가 있고 또한 자료에 따르면 예로부터 한국과 중국의 문인들 사이에서 쏘가리의 외모가 아름답다고 하여 준수한 것으로 궐어의 궐(鱖)자와 궁궐(宮闕)의 궐자 음이 같아서 귀하게 받아들인 것 같으며 시문과 도자기, 회화 등에 흔히 쏘가리가 등장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가 있다.만다린물고기이라한 것에서는 서양인들에게 친숙하게 불렸을 만큼 유명했다는 점도 알 수가 있고 만다린(mandarin)이란 명칭이 등장한 것은 서양인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포르투갈어의 명령하다(mandar)에서 유래한 것이며 중조의 표준관화(官話:北方話)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운향과의 관목에 딸린 귤 종류의 총칭그러니 시기적으로는 금조가 북송을 멸하고 중도(中都)에 천도하고수도를 설치말하는데 지금의 북경이다.또한 자어(滋魚)라 한 것은 번식을 잘하여 종(種)이 많다는 의미가 붙어 있고 특이한 것은 계어라 하여 소리 음(音)이 같은 계어(蘮鱼)의 계(蘮)가 산형과의 두해살이풀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탕이나 음식에 곁들이는 미나리계통식물들을 더불어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계어(鯚鱼)의 계(鯚)는 입 부리가 날카롭고 비늘이 작아 미끈한 물고기의 이름을 말하며 오화어(鳌花鱼)라는 것은 먹이 갑각류의 물고기로 풀어 볼 수 있고 또 모저각(母猪壳)은 암돼지의 얇은 껍데기 등으로 풀어볼 수가 있어 맛과 관계가 있는 이름임을 알 수가 있다.쏘가리의 음식으로는 궐어구(鱖魚灸)라 하여 쏘가리를 저며서 양념을 발라 구운 음식이 있고 궐어전(鱖魚臇)은 고추장 물이나 장물에 쇠고기, 무, 파를 넣고 끓이다가 쏘가리를 넣고 흠뻑 끓인 음식이라 하였으며 궐전유화(鱖煎油花)라는 것은 '쏘가리저냐'라고도 하는데 쏘가리의 껍질을 벗기고 저며서 소금을 뿌렸다가 밀가루를 묻히고 달걀을 씌워서 기름에 지진 쏘가리 전이라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쏘가리 회와 쏘가리 탕(鱖魚湯)이 있다. 형태적으로는 쏘라기가 몸길이 20cm 이상으로, 몸은 긴 편이라 하였고 옆으로 납작하고 비늘이 작고 입은 크고 아래턱이 위턱보다 약간 길며 옆줄이 있고 몸은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띠며, 몸 전체에 둥글고 불규칙한 검은색 무늬들이 빽빽이 나 있다 하여 어두운 색상을 말하고 있다.머리와 지느러미에는 몸통의 것보다 조금 작은 흑점이 흩어져 있고 몸은 작은 둥근 비늘로 덮여 있으며, 지느러미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고 하였는데 점을 의식한 것은 이름에서 금문어라는 명칭의 영향이 있는 것 같다.그리고 언뜻 보기에는 바다볼락과 비슷하며, 다른 민물고기와는 생김새가 다르고 하였다.서식하는 곳은 하천 중류의 물이 맑고 바위가 많은 큰 강에서 서식한다 하였고 큰 돌이나 바위 틈에서 떼를 짓지 않고 단독으로 생활하고 육식성으로서 작은 물고기, 수서 곤충류, 갑각류, 새우류를 잡아 먹으며, 바위 그늘에 머물고 있다가 먹이가 눈에 띄면 순식간에 튀어나와서 삼키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다 하였다. 어릴 때에도 살아있는 먹이만 먹고 화가 나면 몸을 부풀어 올리는 습성이 있고 돌 밑에 잘 숨는다고 습성을 말하고 있다.쏘가리 중에는 바탕색이 누런 황쏘가리가 있는데 이는 쏘가리와 같은 종으로 검은 색소를 만드는 유전자가 없어진 돌연변이종이라 하고 있다. 우리나라 한반도의 압록강을 비롯한 황해와 남부 연해에 흐르는 여러 하천의 중·상류 수계에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주산지(主産地)는 한강(漢江)과 대동강(大同江)이라 하였고 낚시로 잡으며, 초봄에서 가을까지가 제철이이라 하였는데 봄에 수온이 올라감에 따라 활동을 개시하여 먹성이 활발한 덕에 비대해진다고 하였다.두산백과사전에서 설명하는 쏘가리의 자연환경은 담수계(淡水契)에 서식하고 있는 몇 안되는 농어과 어종(魚種)이라 하였으며 살아있는 생먹이 공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양식이 힘든 반면 수요가 늘어, 무분별한 어획으로 최근에는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하고 있다.한편 1995년 충청북도 내수면개발시험장에서 처음으로 인공부화에 성공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고 그와 함께 2010년 6월 18일부터 변경어족자원의 보호를 위해 전북·전남·경북·경남에서는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그 외의 모든 지역에서는 5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 어획을 금지하고, 18cm 이하의 어린 고기는 잡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2)동아시아용 쏘가리 구분 그렇다면 현재 동아시아용으로 굳어진 한반도와 신중국에서 쏘가리에 대한 생물학적 근거는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자. 斑鳜(学名:Siniperca scherzeri)为輻鰭魚綱鱸形目鱸亞目真鱸科鳜属的鱼类,俗名花鲈、火烧桂、乌桂、黄花桂。在中国,分布于鳜(学名:Siniperca chuatsi)是鳜属下的一種鱼类,俗称鳜鱼、花鲫鱼、桂鱼、桂花魚、季花鱼等。科學分類 界: 動物界 Animalia門: 脊索動物門 Chordata 綱: 輻鰭魚綱 Actinopterygii目: 鱸形目 Perciformes亞目: 鱸亞目 Percoidei科: 真鱸科 Percichthyidae 屬: 鱖屬 Siniperca種: 鳜鱼 S. chuatsi二名法 Siniperca chuatsi Basilewsky, 1855 異名 Actenolepis ditmarii Dybowski, 1872Perca chuatsi Basilewsky, 1855Siniperca chuatoi Basilewsky, 1855 Actenolepis Dybowski [B. N.] 1872:210 [Verhandlungen der K.-K. zoologisch-botanischen Gesellschaft in Wien v. 22; ref. 1170] Fem. Actenolepis ditmarii Dybowski 1872. Type by monotypy. Synonym of Siniperca Gill 1862 -- (Kottelat 2013:325 [ref. 32989]). Current status: Synonym of Siniperca Gill 1862. Sinipercidae. 우리나라에서는 쏘가리를 일명 반궐(斑鳜)이라 하고 학명을 시나이페르카 세르제리(Siniperca scherzeri, Steindachner, 1892)라고 하며. 궐어(鳜鱼)라 하는 신중국쏘가리는 시나이페르카 추아치(Siniperca chuatsi, Basilewsky, 1855)라는 학명을 붙이고 있다.Etymology: Siniperca: Latin, sino, sina = from China + Greek, perke = perch (Ref. 45335 ) . Siniperca Gill, 1862 위 영어자료에 보면 둘다 공히 'Siniperca' 즉 라틴어 중국 시나이'sini'를 접두에 붙인 '페르카(perca)' 즉 퍼치의 속명(屬名)을 가지고 있다.농어목, 농어상과(鲈总科:Percoidea ), 페르카과(Percidae Rafinesque,1815)의 11개속, 204종에서 페르카Perca (Perches)가 있다. Latin Etymology[edit]From Ancient Greek πέρκη (pérkē, “perch”), from Proto-Indo-European *perḱ- (“spotted, speckled”), 얼룩무늬가 있는, 반점이 있는, 얼룩덜룩한, 퍼치의 어원을 보면 고대 그리스어 페르케[πέρκη (pérkē, “perch”)]는 고대인도유럽어 페르크(perḱ) 즉 얼룩이 있는, 반점이 있는 의미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퍼치(perch)가 속한 페르카과(河鱸科:Percidae)에는 농어목의 페르키크티스과(真鱸科:Percichthyidae)에 속한 것으로 따뜻한 온대기후의 퍼치로써 11속(屬) 약 40개종(種)임을 알게 하고 이 속에 시니페르카(Siniperca)가 있게 만들었다.여기에는 페르카 플루비아틸리스(Perca fluviatilis)와 페르카 플라베스켄스(Perca flavescens)의 2종(種)의 어류(이들 2종은 때때로 페르카 플루비아틸리스 1종으로 간주됨)가 있으며 페르카 플루비아틸리스는 유라시아(European)의 담수에서, 페르카 플라베스켄스는 북아메리카(North America)의 담수에서 각기 발견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They belong to the order Perciformes, the perch-like fishes. The name Percichthyidae derives from the Latin perca for perch and Ancient Greek ἰχθύς, ichthys for fish. 위 영어자료를 보면 농어목(Perciformes)에 속한 페르키크티스과(真鱸科:Percichthyidae)의 퍼치피시(Perch fish)와 같은 종(種)이라 하였다.즉 한반도와 신중국에서 쏘가리라 하는 속명들은 동아시아대륙에서 발견할 수가 있지만 이것은 근원적으로 익투스(ἰχθύς)는 고대 그리스어(헬라어)로 물고기(생선)의 의미를 가진 퍼치(perch)와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농어목(Perciformes), 페르카과(河鱸科:Percidae)의 퍼치물고기(perch fish)에서 유럽종 페르카 플루비아틸리스(Perca fluviatilis)와 북아메리카대륙 종 페르카 플라베스켄스(Perca flavescens)는 둘 다 잘 알려져 있으며 식용·낚시용 어류로 인기가 있으며 이들은 등지느러미가 2개인데, 첫번째 것은 가시줄로 되어 있고 2번째 것은 여린줄로 되어 있다.쏘가리와 마찬가지로 퍼치물고기도 육식성이며 고요한 연못과 호수·개울·강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은 봄에 산란하는데 암컷은 얕은 물의 수초나 나뭇가지 사이에 알을 낳는다. 유럽종 페르카 플루비아틸리스(Perca fluviatilis Linnaeus, 1758)는 몸이 녹색인데, 측면에 짙은 색깔의 수직무늬가 있고 하부의 지느러미들은 붉은색이나 오렌지색의 색조를 띤다. 최대 약 3㎏까지 자라며 그 이상인 것도 있다.페르카 플라베스켄스(Perca flavescens Linnaeus,1758)는 북아메리카 동부가 원산지이며 태평양 해안지방에 도입되었는데, 페르카 플루비아틸리스와 유사하나 더 노랗다는 사실과 이 종은 길이 약 40㎝, 무게 1㎏까지 자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그리고 마지막 발하슈퍼치(Balkhash perch)는 페르카 스랜키(Perca schrenkii Kessler, 1874)는 중국명칭으로 이리로(伊犁鱸)라 하는데 바로 중국 신장성(新疆省)신장위구르의 이리를 말하는 것으로써 이리로 이어지는 톈산 북로(天山北路)의 요지로 알려졌으며, 여러 유목 왕국들이 활동하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그밖에 퍼치고기와 비슷하고 'perch'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어류로 망상어류(surfperch)등이 있다. 한반도에서의 분류체계를 보면 척삭동물문(Chordata), 조기어강(Actinopterygii), 농어목(Perciformes),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 쏘가리속(Siniperca)으로 나뉘고 있지만 신중국에서는 척삭동물문(Chordata), 조기어강(Actinopterygii), 농어목(鱸形目:Perciformes), 농어아목(鱸亞目:Percoidei), 페르키크티스과(真鱸科:Percichthyidae)의 쏘가리속(鱖屬:Siniperca)으로 분류되고 있다.다 같은 쏘가리속이지만 한반도는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인 반면, 신중국은 농어아목(鱸亞目:Percoidei)의 페르키크티스과(真鱸科:Percichthyidae)라는 것이 다르다.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는 a family of fish or the order Perciformes including robalos 를 포하한 농어목(鱸形目:Perciformes)이다.반면 페르키크티스과(Percichthyidae)는 온화한 기후의 퍼치(Temperate perch)농엇과 민물고기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때문에 현재 동아시아종으로 굳어지고 만다린 피시라고 하는 시니페르카 추아치(Siniperca chuatsi Basilewsky, 1855)는 퍼치와 깊게 연관된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물론 종은 근원적으로 다를 것이다.동일한 종을 인위적으로 양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문제는 역사성이다.역사성에서는 현 동아시아대륙을 근원으로 하는 시니페르카 추아치(Siniperca chuatsi Basilewsky,1855)가 일치하지도 않고 맞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특이하게도 한반도의 쏘가리속(Siniperca)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는데 1859년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어류학자이고 파충류학자였던 피터블레커(Pieter Bleeker:1819-1878)의 작품 동아시아의 어류(네덜란드 동인도의 아틀라스 어류:Atlas Ichantologique des Indes Orientales Néêrlandaises)에 의해 검정우럭목(Centrarchiformes)으로 분류되면서부터 혼란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것으로 인해 검정우럭목(Centrarchiformes), 검정우럭아목(Centrarchoidei)에서 분류하여 다시 쏘가리과(Sinipercidae)에 속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일본학계의 계통으로 카타야마(Katayama)에 의해 1959년에 다시 분류된 것으로써 이는 동아시아와 베트남 북부지역에서 발견되는 어류로 정리되고 있다.완전하게 헤쳐놓은 것이다.즉 농어목의 페르키크티스과(真鱸科:Percichthyidae)에서 분류된 시니페르카 세르제리(Siniperca scherzeri, Steindachner, 1892)의 기존 분류체계와는 다르게 검정우럭목에 속하는 쏘가리과(Sinipercidae Katayama,1959)로 분류하여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로 2속 14종으로 분류되었고 그 2속(屬)에는 꺽지속(Coreoperca)과 쏘가리속(Siniperca)이 있고 이 쏘가리속에 한반도 쏘가리(Siniperca scherzeri Steindachner, 1892)학명을 힘들게 찾을 수가 있다.신뢰가 가는 과학자료에 보면 한국의 이러한 데이터에서는 꺽지류와 쏘가리류를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에 소속시켜 놓았고 이 과의 한국명을 “꺽지과”라 하는데 이것은 2017년 3월 확인 기준이라 하며 이는 한국 생물학계가 아직 업데이트를 시켜놓지 않은 결과라고 하고 있다.때문에 또다시 새로운 과(科) 이름 시니페르케과(Sinipercidae)로 변경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조셉 S. 넬슨(J.S. Nelson:1937-2011)은 그의 2006년 4판 “Fishes of the World” 저서에서 Coreoperca 속(꺽지류)과 Siniperca 속(쏘가리류)은 Centropomidae과로 분류되기도 하고 Percichthyidae과로 분류되기도 하여 혼선이 있어 왔으며 1993년에는 Roberts, C. D.가 이들 두 속을 따로 독립시켜 과(科) 이름을 Family Sinipercidae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말하면서 3가지 과 중에서 C.D. Roberts가 주장하는 방식이 적절하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세밀하게 관찰해야하는 것은 역사성이다.어찌되었던지 네덜란드 학자 피터블레커에 의해 동아시아대륙 어류로 분류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이야기다.무엇때문일까?소위 그가 분류한 검정우럭목(Centrarchoidei),쏘가리과(Sinipercidae)에는 꺽지속(Coreoperca)과 쏘가리속(Siniperca)이 있다 하였는데 분류체계가 동아시아대륙 종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혼란 그차제임을 알 수가 있다.양 속명(屬名)에서 하나같이 '페르카(perca)' 즉 퍼치의 속명(屬名)을 접미에 존재하는 것자체가 퍼치와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3)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꺽지류와 쏘가리류는 대서양 열대성의 물고기 꺽지류와 쏘가리류를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에 소속시켜 놓은 것에 대한 사실에서 한발 더 나아가보면 다음과 같은 자료가 나타난다.family Centropomidae 출처: 워드넷 a family of fish or the order Perciformes including robalos robalos [NOUN] [, pl -los,-lo] any percoid fish of the family Centropomidae, occurring in warm and tropical (mostly marine) waters. Some of the larger species, such as the snooks, are important food fishes and many of the smaller ones are aquarium fishes 꺽지류와 쏘가리류를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에 소속시켰다는 것은 즉 농어목(鱸形目:Perciformes)에 로발로스(robalos)가 포함되었다는 사실과 이 로발로스는 온대 및 열대 대부분 해양에서 발생하는 가족 내 모든 농어아목의 어류(percoid fish)라는 사실이고 스누크(snooks)와 같은 큰 종(種)들은 중요한 식용 어류이고 작은 어류들 중 많은 것들이 수족관 관상어류들임을 알 수가 있다. [Distribution map of common snook (Centropomus undecimalis)] [Collins English Dictionary]Word origin of 'robalo'Sp róbalo or Port robalo < Catalan llobarro; ult. < L lupus, wolf, also a kind of fish: see wolfSpanish, probably changed from lobaro (unattested), from lobo wolf, from Latin lupus[New World College Dictionary]Word forms: plural snook or snooksany of a family (Centropomidae) of percoid fishes of warm seas; esp., a large game and food fish (눈볼개,鋸蓋魚:Centropomus undecimalis) of the tropical Atlantic OriginLate 17th century: from Dutch snoek (see snoek).Compound of zee (“sea”) + snoek (“pike”). 창고치어종zeesnoek m (plural zeesnoeken) 위 콜린스 영어사전과 웹스터영영사전을 보면 로발로(robalo)는 어원이 에스파냐 북동부에 있는 지방 카탈로니아의 로발로 항구에 근거하고 있지만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의 종들은 모두 농어아목의 어류로써 따뜻하거나 열대지역 해양에서 서식하는 포식자 울프 같은 종의 물고기라고 설명하고 있고 스누크(snook or snooks)의 어원에서도 작은 상어 또는 작은 배라는 의미가 있어 창고지물고기로 표현되며 따뜻한 해양의 농어아목의 어류(percoid fish)로서 열대 대서양에서 큰 교접이 이루어지고 약 50cm-1.5m의 식용 물고기(눈볼개:Centropomus undecimalis)라고 정리하고 있다.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꺽지류와 쏘가리류는 대서양 열대성의 물고기임을 알 수가 있다. Familia Centropomidae - Snooks 자료를 보면 오목한 코를 가진 퍼치 같은 민물 물고기가 아메리카와 대서양( Americas and Atlantic Ocean)에 분포한다고 나타난다.그리고 최대의 길이가 1.4m짜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Etymology New Latin, from Centropomus, type genus (from Greek kentron sharp point + pōma lid) + -idae Greek, kentron = thorn, sting + Greek, pomas, -atos = cover ( Ref. 45335). 또한 꺽지과라고 분류된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의 어원을 보면 위와 같은데 꺽지과(Centropomidae)어원은 그리스어의 켄트론(kentron), 가시(thorn) 찌르다(sting)와 그리스어 포마스(pomas)는 -atos = cover 사다, 가리다, 덮다Centropomidae, a fish family widely distributed from southern Florida (Gulf of Mexico) to southern Brazil (Rio Grande do Sul State) (CERQUEIRA, 2005), have opportunistic habits since they feed on what is available in the environment.명확한 것은 이 과는 플로리다 남부(멕시코 걸프)에서 브라질 남부(Rio Grande do Sul State, CERQEIRA, 2005)까지 널리 분포된 어족인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ae)는 위와 같은 환경에서 이용 가능한 것을 먹고 살기 때문에 기회주의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는 어종임을 알리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는 열대성 꺽지과이고 신중국은 피치의 농어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골든 만다린 피시(Golden mandarin fish) 또는 레오파드 만다린 피시(Leopard mandarin fish)라고 하는 한반도 시나이페르카 세르제리(Siniperca scherzeri, Steindachner, 1892)의 학명자인 프란츠 스타인다흐너(Franz Steindachner:1834-1919)는 오스트리아 동물학자이며 어류학자이고 파충류학자이면서 1868년 하버드 대학의 비교 동물학 박물관에서 자리를 수락하도록 초대받았고 20세기에는 이베리아 반도, 홍해, 카나리아 제도, 세네갈, 라틴 아메리카 등 여러 곳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광범위하게 여행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방문한 사실은 없다.이 사람에 의해 한반도 쏘가리가 정해졌으니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중국쏘가리 시나이페르카 추아치(Siniperca chuatsi, Basilewsky, 1855)의 학명자인 러시아 어류학자이고, 선교사이면서 의사인 스페판 바실루스키(Stephan Ivanovich Basilewsky:18?-1867)이다.Bogutskaya, N.G. and A.M. Naseka, 1996. Cyclostomata and fishes of Khanka Lake drainage area (Amur river basin). An annotated check-list with comments on taxonomy and zoogeography of the region. Zool. Inst. Russ. Acad. Sci. :89 p. (Ref. 13397)Siniperca is a genus of temperate perches native to freshwater habitats in East Asia and northern Vietnam, but the majority of the species are entirely or largely restricted to China.이 러시아학자 역시 주로 한카호수(Khanka Lake)에서 아무르유역(Amur river basin)배수구에서 바탕으로 바다에 서식하는 원구목(圓口類:Cyclostomata)어류와 물고기에 대한 표본연구를 하던 사람이다.그러나 그의 이력과 다르게 시나이페르카(Siniperca)는 동아시아와 북베트남의 담수 서식지에서 서식하는 온대성지류의 어종이고 대부분 신중국대륙에 국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근본적으로 동아시아종으로 구분되는 쏘가리속(屬) 시나이페르카(Siniperca)는 상당히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동아시아 쏘가리라고 하는 한반도 쏘가리, 시나이페르카 세르제리(Siniperca scherzeri, Steindachner, 1892)와 신중국쏘가리, 시나이페르카 추아치(Siniperca chuatsi, Basilewsky,1855)를 명명한 두 사람 다 행적을 보았을 때 동아시아대륙 쏘가리 어류에 대한 학명자라고 여기기가 힘든다. 이상에서 당조때부터 역사성이 있다고 알려지는 쏘가리가 동아시아종(種)으로 굳어진 것은 속명(屬名) 시나이페르카(Siniperca)의 명명자가 스미스소니언협회 회원으로 알려지는 시어도어 니컬러스 길(Theodore Nicholas Gill:1837-1914)은 미국 어류학자이고, 포유동물학자, 연체동물학자, 도서관의 사서일을 하였으며 뉴욕시에서 태어나 개인 교사로 교육받은 길은 일찍이 자연사에 관심을 보이면서 1863년 스미스소니언연구소(Smithsonian Institution)에서 일하였으며 워싱턴 D.C.로 떠나기전에 희귀동전 수집가인 J. 카슨 브레보르트(J. Carson Brevoort)와도 연관되었다. 그는 다른 동물 주문에 숙달되어 있지만 특히 포유류, 어류, 연체동물을 분류했으며 그는 스미스소니언의 사서와 의회도서관의 수석 보좌관이었고 조지 워싱턴 대학의 동물학 교수와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메가트럼 클럽(Megatherium Club)회원과 1897년 미국과학진흥협회의 회장에 역임했다고 알려진다.이 사람은 유대인 연구소라고 알려지는 스미스소니언협회의 회원이었다는 사실은 생물학계전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한다.그가 무엇때문에 동아시아대륙 종인 쏘가리에 관심을 가졌을까? 근원적인 의문이 있다. 사실상 이 속명을 따로 분리하게 되면 본래 원종을 찾을 길이 없다.때문에 속명을 따로 정해놓고 이것을 동아시아종 즉 동양역사성을 그대로 연결하고 그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여도 무방했다는 사실이다.그러한 일을 미국인 스미스소니언협회 회원이었던 어류학자 시어도어 니컬러스 길(Theodore Nicholas Gill)이 맡았던 것이다.설마 그러한 엄청난 짓을 했겠는가 하겠지만 세계생물학계를 주물리던 그들이 못할 일은 없다. Centropomidae, occurring in warm and tropical (mostly marine) waters.어쨌든 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ae)는 대다수 대양이며 따뜻하거나 열대의 기후에서 서식한다.꺽지류와 쏘가리류에는 그 소속과의 분류가 (1)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 (2)페르키크티스과(Percichthyidae), (3)시나이페르케과(Sinipercidae)이 3가지 과(科) 사이에서 불안정 상태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4)고전 역사가 말하는 쏘가리 성소부부고 제26권 / 설부(說部) 5 도문대작(屠門大嚼) 鱖魚。京東西多產。而俗名廉鰻魚궐어(鱖魚) : 서울 동서쪽에서 많이 나는데 속칭 염만어(廉鰻魚)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 【토산】 밤[栗]ㆍ앵도(櫻桃)ㆍ사과[林檎]ㆍ칠(漆)ㆍ자초(紫草 지초 뿌리는 염료(染料)로 쓰인다)ㆍ수철(水鐵)ㆍ석회(石灰)ㆍ실[絲]ㆍ목화[綿]ㆍ삼베[麻]ㆍ자기(磁器)ㆍ도기(陶器)ㆍ은어[銀口魚]ㆍ잉어[鯉魚]ㆍ낭어(𩷕魚 숫게)ㆍ쏘가리[鱖魚]ㆍ누치[訥魚 잉어과에 속하는 민물 고기]ㆍ쏘가리[錦鱗魚 아름다운 물고기]ㆍ밀어(密魚 망둥과에 속하는 물고기) 압구정(押鷗亭) 앞 강에서 산출된다. 위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 :1569~1618)의 시문집 성소부부고 도문대작(屠門大嚼)에 궐어(鱖魚) 즉 쏘가리는 서울 동서(東西)쪽에서 많이 나는데 속칭 염만어(廉鰻魚)라고 한다.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6권 경기(京畿)편에 보면 광주목(廣州牧)에 토산으로 쏘가리[錦鱗魚]가 바쳐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물론 지리적으로 볼 때 서울 동서와 경기 광주목을 지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어 경기와 서울지방에 쏘가리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오늘날에도 산출되는 지역을 압록강과 황해와 남부 연해에 흐르는 하천 그리고 한강(漢江)과 대동강(大同江)이라 하고 있다. 다산시문집 제7권 / 시(詩) -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練帶亭十二絶句] 연대정에서 12절구 수를 읊다藍子洲邊折脚鐺 남자주가에 다리 부러진 솥을 걸고서 / 靑泥芹共鱖魚烹 미나리를 가져다 쏘가리에 넣고 끓이어라 / 是知西塞山前叟 이에 알건대 서쪽 변방 산전의 늙은이가 / 只管浮家度一生 배 안에서만 살면서 일생을 지내는구려 / 다산시문집 천진소요집, "연대정에서 12절구를 읊"에 보면 미나리를 가지고 쏘가리 매운탕을 해먹는 이야기 중에 그 사건 장소가 놀랍게도 남자주라 하였는데 남자주를 일부 학자들이 제주도라 하고 있는 것에 반해 독가시칫과에 속한 바닷물고기가 많이 나는 모래톱(섬)을 말하고 있다. 계곡선생집 제6권 / 서(序) 23수 북창ㆍ고옥 두 선생의 시집 서문[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전하고장지화(張志和)는 서새(西塞)의 노래를 한 가락 읊었는데, 장지화가 읊은 ‘어부가(漁夫歌)’, 즉 “서새산 앞으로 백로가 날고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졌도다.[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라는 시구를 말한다. 위 조선 중기 문단을 대표하는 계곡(鷄谷) 장유(張維,1587-1638)의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에서 당조(唐朝)의 은자(隱者) 장지화(張志和)의 어부가(漁父歌)에 서새산 앞으로 백로가 날고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졌도다 하는 것은 봄에 수온이 올라감에 따라 활동을 개시하여 먹성이 활발한 덕에 비대해진다고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조선의 시인 정약용이나 당조때 시인 장유도 마찬가지로 이 쏘가리 맛에 풍미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중국과 조선이 공히 쏘가리가 서식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생태적인 역사 사실에서 영어자료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중국에서 태곳적부터 알려진 쏘가리는 당조(唐朝:618-907 A.D.)때 매우 유명했고 많은 시인들은 그것의 색깔과 맛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고 설명하고 있다.맛은 돼지 고기 맛이라고 알려지는 것과 색깔이라는 하는 것은 노란색을 바탕으로 하는 지느러미에 붉은 색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하지만, 동양의 기록과 그리고 현재 상황을 그대로 들여다 보면 이상하게도 번식력도 강한 쏘가리가 특별하게 집중적으로 포획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지 않음에도 불과하고 현재 절멸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아무래도 본래 근거지의 쏘가리가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중국쏘라기라 하여 만다린피시라 하였다면 중국에서 이 쏘가리가 엄청난 개체수를 나타내고 있어야 마땅하다.사실상 이 쏘라기의 명칭 중 궐어라 한 것은 맛도 있거니와 일반사람들은 귀한 어종이라 하여 함부로 먹지 않았음도 알 수가 있다.그런데도 중국에서조차 20세기 적어도 신중국이 생성될 시점까지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할 수밖에 없다.때문에 생태적인 역사사실과 현재 상황이 크게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만다린 피시를 인위적으로 이동시키려 했거나 본래 종을 번식이 불가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인공적으로 기르고 번식시키기 위하여 양어가 시작되지만 그 야생에서 포획한 수정난(wild-caught seed)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1950년대라 하였으니 한참 늦은 시기까지 동아시아대륙과 한반도에서 쏘가리의 정체를 확실하게 구연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하지만 역사판짜기가 완성되려면 그냥 그렇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기에 역사를 위한 적합한 종(種)임을 발견했다 하였고 후에 일부 중국 양식처(養殖處)에서 수정난(受精卵)을 양식하기 위해 연구를 지속했지만 이 수정난은 약 10-15일 동안만 살아 남았을뿐이라고 적고 있다.인위적으로 이동이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그런 년후에 마침내, 1975년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의 시립 농장(Suzhou Municipal Farm)은 유도번식을 통해 각각 평균 375g에 달하는 482마리의 만다린어(mandarin fishes)를 생산했다 하였고 그때부터, 통제된 환경하에서 이 종의 양식작업은 점점 더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문제는 과연 이것이 당조때나 조선시대때의 쏘가리가 맞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두산백과사전에서 설명하는 쏘가리의 자연환경은 담수계(淡水契)에 서식하고 있는 몇 안되는 농어과 어종이라 하였고 양식이 힘들다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도 멸종상태에 이르러 1995년 충청북도 내수면개발시험장에서 처음으로 인공부화에 성공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원종과는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본래 금린어(錦鱗魚), 금문어(錦文魚)라는 비단 같은 비늘, 비단같은 무늬라 하였거나 궐어(鱖魚), 궐돈(鱖豚)이라 하여 귀한, 귀중한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황쏘가리의 노란색이 띈다는 사실과 화즉어(華鯽魚)라 한 것에서도 빛나다, 찬란하다, 화려하다의 잉엇과의 민물고기 붕어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즉 쏘가리가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위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금은 비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란 황금색일 가능성이 많고 이것은 만다린피시란 명칭과도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성소부부고에서의 속칭 염만어(廉鰻魚)라 한 것에서도 의미가 저렴하다던가 소박한 의미가 있어 뱀장어과의 민물고기라기 보단 鰻(장어 만)=魚(물고기 어)+日(날 일)+四(넉 사)+又(또 우), 하루에 네번을 먹어도 또 먹고싶은 물고기라는 의미가 커 대중적으로 상당한 인기가 상당했던 물고기임을 알 수가 있다. 5)만다린 피시라고 하는 진짜 쏘가리을 찾아라.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판단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즉 농어목(Perciformes)에서 (1)켄트로포마스과(Centropomidae), (2)페르키크티스과(Percichthyidae), (3)시나이페르케과(Sinipercidae)로 나누어진 3가지 과(科) 사이에서는 분명하게 분류학적으로 불안정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다.이것은 동양사와 서양사가 구분해 분리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인 접근방법에서 역사성이 뚜렷한 쏘가리가 생물분류체계상이 불안정한 상태를 발생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이다.즉 무리하게 (3)시나이페르케과(Sinipercidae)를 나누었을 개연성을 들여다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중국이란 라틴어 상징어 시니"sini-" 를 제거한 페르시과(Percidae)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자료 피시베이스(fishbase)자료에 보면 한반도의 쏘가리나 신중국의 쏘가리는 모두가 농어목(鱸形目:Perciformes), 농어아목(鱸亞目:Percoidei), 페르키크티스과(真鱸科:Percichthyidae)로 구분하여 The members of the family Percichthyidae are known as the temperate perches. They belong to the order Perciformes, the perch-like fishes. 이 페르키크티스과의 종들은 온대기후의 퍼치(농엇과의 민물고기)로 알려지고 그들은 퍼치와 비슷한 물고기인 농어목(鱸形目:Perciformes)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페르키크티스과의 약 11-12속(grouped in 11–12 genera)에서 온대성 지류의 일종인 꺽지속(Coreoperca Herzenstein,1896)과 쏘가리속(鱖屬 Siniperca Gill,1862)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것은 다분히 동아시아종으로 분류시켜 놓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아시아종으로 엮어 놓은 쏘가리속(鱖屬:Siniperca)을 1862년에 분류한 시어도어 니컬러스 길(Theodore Nicholas Gill:1837-1914)은 미국 어류학자이자, 포유동물학자이며, 연체동물학자 및 도서관의 사서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는 뉴욕시에서 태어나 개인 교사로 교육받았던 길은 일찍이 자연사에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나이 26세때인 1863년에 스미스소니언연구소(Smithsonian Institution)에서 일하기 위하여 워싱턴 D.C.로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희귀동전 수집가이면서 곤충학과 어류학에 대한 수집도 병행한 J. 카슨 브레보르트(J. Carson Brevoort:1818-1887)와 연관되었으며 다른 동물채집에 숙달되어 있지만 특히 포유류, 어류, 연체동물을 분류했다. 또한 의회도서관의 수석 보좌관이었으며 조지 워싱턴 대학의 동물학 교수였고 그는 또한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메가트럼 클럽(Megatherium Club)회원이었다. 동료 회원들은 그의 허영심을 조롱했다고 알려지는데 상당히 돈을 밝혀 결국 그가 채집한 자료들은 모두 요청해 의한 것이 아닌가도 의심되는 측면이 있는 인물이다.특히 동아시아대륙 온대성 지류의 일종으로 분류한 꺽지속(Coreoperca Herzenstein,1896)의 명명자 미하일 헤르젠슈타인(Mikhail Yakovlevich Herzenstein:1859-1906)도 러시아제국 제1주(First State:Delaware)의 하원(Duma)으로 입헌민주당(Constitutional Democratic Party)으로 선출된 기독교로 개종한 러시아계 유대인이었고 핀란드 대공국(Grand Duchy) 테리조키(Terijoki)에 있는 그의 여름 별장에서 흑인 수백 명의 반유대 테러 단체(Black Hundreds antisemitic terrorist group)에 의해 의회권한(his parliamentary mandate)이 끝나기 전에 암살되었다는 인물이다. 이 두 인물은 공교롭게도 스미스소니언협회에 가입한 것이라면 유대인일 가능성이 높다.그리고 헤르젠슈타인은 자료에서 유대인으로 밝혀져 있다.즉 일루미나티에 의한 용역을 받았던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하여튼 지난 역사라 할지라도 무리하게 인위적으로 그렇게 동서양을 구분하고 동아시아대륙을 구분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을뿐더러 아메리카대륙자체가 이미 아세아란 사실이 밝혀져 있는 사실에서 볼 때 동아시아대륙을 동양역사의 근원지라고 구분짓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모순이라는 것이 본 블로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이야기다. 본 블로그 글 "아세아(亞細亞:ASIA)란 무엇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6" 에서 아세아(亞細亞)는 땅(亞)과 땅(亞) 사이(細)를 연결하는, 북아메리카대류과 현재 아시아대륙을 전체를 아세아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의 역사가 테두리에서 하나의 체제에 의해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형태의 정치적인 구조에서 각 사방에 변방 4개 이족(四夷)들을 구분하고 이들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 천자에게 조공하는 체제질서 구조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 조선황제(朝鮮皇帝)이란 체제 내에 중앙정부, 중조(天朝, 中朝)에 천자가 거하고 있는 형태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 이전에는 중앙정부의 힘이 곧 체제란 인식에서 이를 역사적으로 각 분리하여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중조(天朝, 中朝)란 의미자체가 중국이란 독립적 국가로 오인된 원인이 크다 할 것이다.물론 조선(朝鮮)이 황제(皇帝)를 중심으로 이를 통합하고 하나의 체제를 구연한 것까지 좋았지만 중국이란 실체가 서양인과 직접적인 접촉이 많아지면서 타켓이 되었다는 점이며 서양인들에 의해 이 중국만 점령하면 모든 것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착각속에서 인위적으로 구분짓기 시작하고 삼한체제와 전혀 관계 없는 독립적인 동양제국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무일한 지배체제로 각인시켰다는 것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6)진짜 쏘가리 페르시과(河鱸科:Percidae)다. FishBase lists 204 species in 11 genera, arranged in three subfamilies위[FishBase]자료는 3개의 하위 과(Percinae Bonaparte, 1831)에 11개 속명(屬名)을 분류하고 204종(種)을 배열하고 있다.3개 하위 아과(亞科:Subfamily)는 에데오스토마시네(Etheostomatinae), 루시옾르시네(Luciopercinae), 페르시네(Percinae)이다.그 중에서 페르시네아과(Percinae)에 Crystallaria (2 species), Gymnocephalus (Eurasian ruffes) (4 species), Perca (Perches) (3 species), Percarina (2 species)가 있고 페르카속(鱸屬:Perca)에는 또 다시 3개의 종(種)이 있는데 (ㄱ)농어(鱸, 河鱸:Perca fluviatilis), (ㄴ)이리농어(伊犁鱸:Perca schrenkii), (ㄷ)황농어(黃鱸, 金鱸:Perca flavescens)바로 그것이다.신중국에서는 페르카(perca)를 농어(鱸)라고 하고 있다. Latin Etymology[edit]From Ancient Greek πέρκη (pérkē, “perch”), from Proto-Indo-European *perḱ- (“spotted, speckled”), 서두에서 퍼치의 어원을 밝혀본 것처럼 퍼치(perch)는 얼룩무늬가 있는, 반점이 있는, 얼룩덜룩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퍼치는 소위 우리가 찾는 쏘가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첫번째 이유가 바로 왜 동아시아대륙 소속 종(種)이라고 하는 쏘가리에 라틴어 "sini"를 붙여 만다린(중국:mandarin)이란 상징을 더하고 이것을 '쏘가리'로 분류할 수밖에 없었는가 대한 의도성을 엿볼 수 있기때문이다. 그래 놓고 정작 북아메리카대륙 종인 페르카(perca)를 농어(鱸)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 모순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 하나 종(種)을 따져 들어가 보니 동아시아 종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형태적이 것이나 생태적으로도 당조때나 조선시대 학자들이 이구동성 싯귀(詩)를 통해 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농어(鱸, 河鱸:Perca fluviatilis)為鱸屬的一種魚,俗名五道黑、欧罗巴鳜鱼、欧罗巴桂鱼、歐洲河鱸、科学分类 编辑 界: 动物界 Animalia 门: 脊索动物门 Chordata 纲: 辐鳍鱼纲 Actinopteri 目: 鲈形目 Perciformes 科: 河鲈科 Percidae 属: 鲈属 Perca 种: 鱸 P. fluviatilis 二名法 Perca fluviatilis(Linnaeus, 1758) 첫째 농어(鱸, 河鱸:Perca fluviatilis)를 보자.(ㄱ)The European perch (Perca fluviatilis)鱸(Perca fluviatilis):又稱河鱸。 is found in Europe and Asia. This species is typically greenish in color with dark vertical bars on its sides with a red or orange coloring in the tips of its fins. The European perch has been successfully introduced in New Zealand and Australia, where it is known as the redfin perch or English perch. In Australia, larger specimens have been bred, but the species rarely grows larger than about six pounds.이 페르카 프루비아틸리스를 유럽퍼치(The European perch)라 하는데 이 종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발견된다. 이종은 일반적으로 지느러미 끝에 빨간색이나 주황색이며 옆면에 어두운 수직막대기 무늬와 함께 초록색을 상징성이 있다. 유럽퍼치는 뉴질랜드와 호주에 성공적으로 도입되었으며 뉴질랜드에서는 지느러미가 붉은 각종 담수어라 하여 레드핀 퍼치(redfin perch) 또는 잉글리시 퍼치(English perch)라고 알려져 있다. 호주에서 더 큰 표본이 번식했지만, 그 종(種)은 약 6파운드(pound, 2.7kg)보다 더 크게 자라는 경우는 거의 없다.유럽퍼치의 범위는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유럽 전역의 민물분지를 포함한다. 이 지역범위는 시베리아의 동쪽 끝 콜리마 강(Kolyma River)까지로 알려져 있고 발트해의 몇몇 강물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유럽퍼치는 도입 후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도되면서 널리 소개되었고 유럽퍼치는 천천히 흐르는 강, 깊은 호수, 연못에 산다. 차갑거나 빠르게 흐르는 물을 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떤 표본들은 이 서식지에서 번식하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물을 꿰뚫는다. fluviātilisadjectiveof or belonging to a river 이 종명의 라틴어 fluviatilis의 의미가 강(river)이다.또 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를 보면 철갑상어 라틴어 종명(種名) 풀베슨스(fulvescens)를 1.yellowing, yellowish, tawny 노란색, 누르스름한, 황갈색의 의미와 현재 철갑상어 이종은 오대호와 미시시피강(江)상류에 서식 것으로 나타나며 앨라배마(Alabama)와 미시시피(Mississippi)주 남쪽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유역에서 발견되는 것에서도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파악한 바로는 이 강은 양쯔강일 수가 있고 또는 장강일 수가 있는 곳이며 또한 중앙아시아의 제강일 수가 있는 곳이라고 주장한 사실을 상기하길 권한다.때문에 물론 유럽종이라고 하였지만 기실 이 종 역사 북아메리카대륙 산일 가능성이 높다. The Balkhash perch (伊犁鱸:Perca schrenkii)科學分類 界: 动物界 Animalia門: 脊索动物门 Chordata綱: 輻鰭魚綱 Actinopterygii目: 鲈形目 Perciformes科: 河鲈科 Percidae屬: 鲈属 Perca種: 伊犁鲈 P. schrenkii二名法 Perca schrenkii(Kessler, 1874) (ㄴ)The Balkhash perch (伊犁鱸:Perca schrenkii) is found in Kazakhstan, (in Lake Balkhash and Lake Alakol), Uzbekistan, and China. It is very similar to the European perch, and grows to a comparable size.두번째 종으로 이리농어(伊犁鱸:Perca schrenkii) 즉 페르카 쉬렌키는 현재 아시아 카자흐스탄 동부에 있는 발하슈 호(Lake Balkhash)와 염호 알라콜 호(Lake Alakol), 그리고 우즈베키스탄(Uzbekistan)과 중국에서 발견된다 하였지만 이것은 소위 동아시아대륙 만들기에 따른 조작된 장소이다.이 이리란 지명은 다 알다시피 18세기에 청조가 있었다고 판단되는 북아메리카대륙 뉴욕주 북쪽에 위치하는 오대호 중 온타리오호(Lake Ontario)와 이리호(Lake Erie)에서 후자 이리호를 명명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이것은 글쓴이의 또 하나의 굉장한 사실을 밝혀내는 것인데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이로쿼이어(Iroquois)로 온타리오호를 미려호(美麗湖) 혹은 섬광호(閃光湖)로 불리고 이리호(Erie)역시 이로쿼이어로 긴 꼬리(long tail)로 불린다.온타리오호에서 경계가 무사하게 진행되었지만 이리호 가운데 경계선을 긋는데 서로 충돌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즉 대조선(大朝鮮)이 양키(Yankee)미국북장로회(PCUSA)에 의해 무너지는 1881년에 러시아와 청조사이에 체결된 국경영토분쟁의 이리조약(伊犁條約)은 지금보면 주 경계를 사이에 두고 온타리오주와 뉴욕주간에 충돌이었다고 보여지고 그곳은 지금의 동아시아대륙 중국 신강위구르(新疆 維吾爾)가 아니라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뉴욕주와 온타리오주 경계, 양 호수가운데를 경계로 하는 즉 미국과 캐나다 경계지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이것을 페테르부르크 조약(Petersburg:1881)이라고도 하는데 옛 고구려 북쪽의 땅, 안시성(安市城)일 가능성이 높은 온타리오주(安省:Ontario)의 피터버러(Peterborough)인 것으로 나타난다.이러한 것들은 구러시아제국이 붕괴되고 난 후 1920경 신중국 지역을 영어 '이리(Ili)'로 표기하고 북아메리카대륙 이리호를 'Erie' 로 표기하여 다르게 만든 것이 틀림없다.북아메리카대륙에 셈어족에 속하는 이슬람계 아라비아어(Arabic)를 사용했던 지역이 바로 미시간주(Michigan)이다.이곳에 러시아팽창정책으로 세개의 한국(汗國)이 존재하였다고 보여지고 우즈베키스탄의 돌성, 석성(石城)으로 알려진 사마르칸트(Samarkand)와 부하라한국(Bukhara汗國:1500-1920), 히바한국(Khiva汗國:1511-1920) , 코칸트한국(Kokand汗國:1709-1876)등이 있었다고 보여지는 곳이다. 뉴욕주와 청조라고 판단되는 언어군 지도(그림) 黃鱸(Perca flavescens):又稱金鱸。科学分类 编辑 界: 动物界 Animalia 门: 脊索动物门 Chordata 纲: 辐鳍鱼纲 Actinopteri 目: 鲈形目 Perciformes 科: 河鲈科 Percidae 属: 鲈属 Perca 种: 黃鱸 P. flavescens 二名法 Perca flavescensMitchill, 1814 異名 Morone flavescens Mitchill, 1814Perca acuta Cuvier, 1828Perca americana Schrank, 1792Perca fluviatilis flavescens Mitchill, 1814 (ㄷ)황농어(黃鱸, 金鱸:Perca flavescens)The yellow perch, smaller and paler than the European perch, is found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In northern areas, it is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lake perch. This species is prized for its food quality and has often been raised in hatcheries and introduced into areas in which it is not native. Yellow perch are almost identical in appearance to European perch, but have a more yellow coloring. These fish typically only reach a size of about 15 in and 2.2 lb (1 kg).세번째 종은 황농어, 황색퍼치(The yellow perch)이다.유럽퍼치 보다 약간 작고 흐릿한 색상의 황색퍼치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견되고 북쪽지방에서는 때때로 호수퍼치(lake perch)라고 불린다.이 종(種)은 맛의 질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종종 부하장(hatcheries)에서 길러지고 토착지가 아닌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황색퍼치는 유럽퍼치와 생김새가 거의 동일하지만, 더 많은 노란색을 가지며 일반적으로 크기에서 약 15인치(38cm)와 2.2파운드(1kg)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미국 황색퍼치(American yellow perch)라 하거나 모로네 플라베센스(Morone flavescens)라 한다.발견지는 미시간호, 슈피리어호, 이리호, 휴런호, 노르만 호, 토치 호, 등이다.황색퍼치는 북극과 대서양과 미시시피강을 포함한 로키산맥의 동북쪽 지역에 있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원종의 분포는 미시시피강에서 빙하가 녹으며 활동하고 본토로부터 널리 퍼져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 동부와 캐나다의 다른 지역으로의 분포지가 넓혀지고 낚시용으로 상업적인 어류로서 그것의 대한 인기가 많다.현재 미국에서 토착원종과 분포지는 미주리 북부, 서부 펜실베니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메인 주 북쪽까지며 대신 소개된 지역은 현재 북아메리카대륙 외지로는 확장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황색퍼치(Yellow perch)는 크고 작은 호수 모두의 후미지역에서 흔히 발견되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강과 개울, 강물, 그리고 연못에서도 서식한다. 사람들의 인위적인 이동으로 인해 현재 많은 인공 호수, 저수지, 그리고 강둑에서 발견되고 황색퍼치는 따뜻하거나 시원할 수 있는 호수에서 가장 풍부하며, 다른 포식자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한 지배할 수 있는 작은 호수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생태적으로 살펴보면 주로, 나이와 몸의 크기가 황색퍼치의 식단이 결정된다. 동물성 플랑크톤은 어린 유충의 주요식량원이다. 한살때는, 그들은 작은벌레와 모기같은 무척추동물로 이동한다. 크게 성숙한 퍼치는 무척추동물, 어류 알, 가재, 작은보리새우, 그리고 어린 물고기를 먹는다. 그들은 주로 물고기를 먹지만 경우에 따라 동족을 먹는 습성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무게 32g(1.1oz) 이상의 황색퍼치 식단의 약 20%는 작은 물고기로 구성되고 최대 급식은 어둡기 직전에 발생하며, 평균 몸무게의 1.4%를 먹는다.그들의 미소서식환경은 보통 갈대와 수생 잡초, 부두, 그리고 다른 구조물들 사이에서 해변을 따라 있다. 그들의 선천적인 환경은 수생 식물 내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곳을 선호하지만 진흙, 자갈 또는 모래바닥이 있는 작고, 잡초가 많은 수역을 선호한다. 그들은 깊고 깨끗한 물이나 비생산적인 호수에는 드물다. 강에서 괴어있는 밑바닥, 느슨한 물, 적당한 식물 서식지를 자주 찾는다. 그들은 여름 동안 지표수를 자주 다닌다. 거의 모든 차고 따뜻한 물에는 포식어류종들이 있는데 북미대륙산(産)강창꼬치속(屬)의 물고기인 북부 파이크(northern pike), 북미산(産)의 식용어 강늉치고기의 일종인 머슬런지(muskellunge), 농어인 베스(bass), 북미산 개복치 선피시(sunfish), 미국 5대호 지방산 크래피(crappie), 눈알이 큰 월아이피시(walleye), 송어(trout), 그리고 심지어 다른 황색퍼치와 같은 육식 어종들은 황색퍼치의 포식자들이다. 그들은 Walleye (월아이) 학명: Sander vitreus 의 주요 먹이로, 북부 호수에선 0세의 58%, 1세의 47%를 소비된다. 그러나 얕은 자연 호수에서 블랙배스(largemouth:Micropterus salmoides)는 황색퍼치 집단의 질적 형성과 개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네브라스카(Nebraska)의 샌드힐 호수(Sandhill lakes)에서 황색퍼치의 평균 무게와 품질은 무척추동물의 풍부함과 관련이 없지만 입이 큰 북미산(産) 송어의 일종 블랙베스(largemouth bass:Micropterus salmoides)풍부함과 관련이 있다. 품질 좋은 튀김용 민물고기(panfish) 개체수에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주요 요인은 포식자, 먹이, 환경이다.북미 동부지역에서의 황색퍼치는 쌍갈기가마우지[角鸕鶿:double-crested cormorant (Phalacrocorax auritus)]와 같은 새들에게 매우 중요한 먹이 공급원이다. 가마우지는 특히 황색퍼치를 주된 먹이로 삼는다. 독수리, 청어 갈매기, 매, 잠수 오리, 어미, 왜가리, 물떼새, 방목제, 흰 펠리컨 등도 황색퍼치를 잡아먹는다. 높은 추정치는 가마우지가 3살 개체의 29%를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캐나다에서, 황색퍼치는 높은 온도를 견디어 내는 성질 내열성(耐熱性)때문에 미국 5대호 산 호수의 송어와 다른 토종 물고기들에의한 계절에 따라 포식으로부터 벗어나는데 효과적이다. 황색퍼치의 기생충과 질병은 종종 북미 동부 호수에서 연어와 공유된다. 몇 가지 예는 뇌 기생충 아가미부식병(Flavobacterium columnare), 붉은 지렁이 에우스트롱이일데스 투비펙스(Eustrongylides tubifex), 넓은 촌충 광절열두조충(Diphyllobothrium latum), 기생적 갈대류 에르가시루스 셉(Ergasilus spp)이다.황색퍼치의 가장 빠른 속도는 54cm/s(12.08mph)였으며, 각각의 물고기는 그 속도의 절반 이하로 헤엄친다. 7)쏘가리의 천적(天敵:natural enemy) 일본사람들은 이 쏘가리(Mandarinfish)를 아름다운 생선(美しい魚)이라 하였다.물론 이 일본사람들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사는 17세기 이후의 양키들이다.이 양키들은 대체로 손재주가 좋았던 모양이다.힘든 고래잡이를 하면서 항해 중 수많은 시간을 이용해 고래뼈에 조각을 한다든지, 섬유에 수를 놓는다든지, 어려운 일을 쉽게 한다든지, 특별히 돈을 밝혀 장사술이 좋았다든지, 유대인처럼 고리대금을 한다든지, 비밀스럽게 작업을 하여 뜻밖에 것을 만든다든지 그런 특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때문에 "자포니즘"이란 산업예술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진다.본 블로그 글 "요코하마가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3 " 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 걸개에 대해 말하길 Fine Japanese Large American Eagle and Stars and Stripes Silkwork Textile Picture, Circa 1885-1900.1885년부터 1900년 사이에 제작된 거대한 흰 독수리의 문양을 실크섬유질로 작업한 상징물 비단 걸개 설명에서 “fine Japanese”라 한 것은 스스로 자포니스들이 이 섬세한 작업을하였고 이 "재퍼니스"는 US(미합중국)란 국호가 붙기 이전 미국양키들의 국호였다고 볼 수 있다얼마나 아름답길래 쏘가리를 아름다운 생선이라 했을까?앞에서 퍼치의 그림을 보면 정말 아름답다.퍼치의 노란 붉은 알록달록한 쏘가리의 모습은 그렇게 찬탄한 사실에서 짐작이 가능하다.물론 외형적으로도 한반도쏘가리나 신중국쏘가리는 이에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그렇다면 이 쏘가리에게 천적은 없었을까?그리고 그 천적이 가지는 원산지가 어딘가를 밝혀보면 확연하게 정리가 될 것이라고 본다.그러나 한반도 쏘가리는 이러한 문제에서 의심만 증폭될 따름인데 삼한역사서나 동아시아대륙사에 그토록 아름답다고 찬탄한 쏘가리의 천적이 한반도에는 왜 존재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긴다.이 천적들을 밝히기 위해 위에서 살펴본바대로 쏘가리의 천적들을 세밀하게 밝혀보면 전부가 북아메리카대륙이나 미국을 근거로 하는 동물성 포식자들임을 알 수가 있다.물론 한반도에서는 이들 포식자들은 모습조차 찾을 수 없는 희귀한 동생물들이다.먼저 천적 일번타자로 등장하는 북부 파이크(帶紋狗魚:northern pike,American pickerel)는 북미대륙산(産)강창꼬치속(민물꼬치고기속:狗鱼, Esox屬)이며 이것은 현존하는 민물꼬치고기과(Esocidae)의 유일속이고 약 6600만 년 전부터 2300만 년 전까지의 고제3기(古第三紀) 또는 팔레오기(Paleogene, Palæogene)시기부터의 북아메리카와 유럽, 유라시아 지역의 토착 어류라 했다.또 파이크와 비슷한 종류로써 미국강꼬치고기(American pickerels)라 하고 식용어 강늉치고기의 일종인 머슬런지(北美狗鱼:muskellunge)는 학명 "Esox masquinongy Mitchill"로, 1824 북아메리카 토종인 크고 상대적으로 희귀한 민물고기의 일종이며 이것은 가장 큰 파이크족인 에소키아과(Esocidae)이다.학명자 새뮤얼 라담 미칠(Samuel L. Mitchill)은 1764년 뉴욕 롱 아일랜드에서 출생했으며 그는 주 의회 의원과 미합중국 하원의원 및 상원의원으로 봉직했고 그는 역사학자, 언어학자, 어류학자, 식물학자, 지질학자, 편집자, 화학자, 물리학자, 및 외과의사 겸 릿거스 의과대학 부학장을 역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 퀘이커(Quaker)교도이다.The word bass comes from Middle English bars, meaning "perch".베스(bass)의 어원은 중기영어 "bars" 에서나온 것으로 의미는 농엇과의 민물고기 퍼치(perch)와 같다.이것은 농어목(鱸形目:Perciformes)일종인 북미산 개복치 선피시(sunfish)라 하여 북아메리카 원산 태양과(太陽魚科:Centrarchidae Bleeker, 1859), 태양어속(太陽魚屬:Lepomis)의 어류이며 The type genus is Centrarchus (consisting solely of the flier, C. macropterus) 이 유형의 유전자는 센트라추스(C. macropterus)만 해당된다 하고 있다. 입이 큰 북미산(産) 송어의 일종인 베스(Micropterus salmoides Lacépède, 1802)는 윗부분이 검은 회색이고 아래는 그보다 엷은 회색이며 아래턱은 눈보다도 더 뻗쳐 나와 있다.이 큰 입베스(largemouth bass)는 length of 29.5 in (75 cm) and a maximum unofficial weight of 25 pounds 1 ounce (11.4 kg)길이 29.5인치(75cm) 최대 비공식 무게 25파운드 1온스(11.4kg)라 하고 극단적인 경우 거의 1m(3.3ft)에 이른다고 보고되고 있는 거대한 동물성 물고기다.태양과 검정우럭과 선피시과(太陽魚科:sunfish family Centrarchidae)의 북아메리카대륙 민물고기속 포모시스(Pomoxis屬), 두종이 있는데 흰 크래피[white crappie (Pomoxis annularis)]와 흑크래피[black crappie (Pomoxis nigromaculatus)]가 있다.노란 파이크라고도 불리는 눈알이 큰 월아이피시(walleye)는 캐나다와 북미의 민물담수어이다. 또한 아가미 주위에 붉은 반점이 있는 송어(cutthroat trout)를 컷스로트송어(Oncorhynchus clarkii Richardson, 1836)라고 하는데 북아메리카대륙 송어의 역사를 보면 1541년 스페인 탐험가 프란시스코 드 코로나도(Francisco de Coronado)가 뉴멕시코 주 산타페(Santa Fe)근처의 켄터키(Kentucky)에서 발원하는,페코스 강(Pecos River)에서 송어를 처음보았다고 하고 이를 최초의 신대륙의 송어라고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오대호(五大湖)를 분포지로 하는 아종(亞種:subspecies)으로는 (a)Alvord cutthroat trout, (b)Bonneville cutthroat trout, (c)Humboldt cutthroat trout, (d)Lahontan cutthroat trout , (e)Whitehorse Basin cutthroat trout, (f)Paiute cutthroat trout 그것이다.무지개송어(Oncorhynchus mykiss Walbaum, 1792)라는 것은 북미산으로 대한민국에서는 1965년부터 미국에서 수입하였다고 알려진다.도대체 역사서에도 나타나는 한국토착종인 송어나 쏘가리는 다 어디로 도망간 것일까.그외 쌍갈기가마우지[角鸕鶿:double-crested cormorant (Phalacrocorax auritus)]가 있는데 이것 역시 내륙 수로를 따라 해안지역과 마찬가지로 분포하며, 알래스카의 알류시안 섬에서부터 플로리다와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북미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그밖에 포식자들을 보면 독수리(eagles)는 북미전역에서 분포하는 흰머리수리(Haliaeetus leucocephalus)와 황금독수리(Aquila chrysaetos)가 있다. 황금독수리는 종종 다양한 식물로 특징지어지는 낮은 구릉지대에 있는 목초지, 참나무 사바나, 초원에 서식하고 이 종은 한때 아팔래치아 고원(Appalachian Plateau)에서 개울, 개방된 습지, 초원, 늪, 호수 근처에 널리 번식했던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미국재갈매기라 하는 청어 갈매기(American herring gull), 미국에 분포하는 붉은꼬리매(red-tailed hawk), 잠수오리(diving ducks)는 미국에 분포하는 긴꼬리오리(long-tailed duck)를 말하며 , 물총새과의 킹피셔(kingfishers), 북미를 분포지로 하는 왜가리(herons:Great blue heron), 물고기를 먹는 비오리(mergansers:red-breasted merganser), 북아메리카대륙의 아비(loons:red-throated loon), 그리고 미국흰펠리컨(American white pelican)가 그것이다.이렇게 보면 진짜 쏘가리는 참으로 있을 곳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명확하게 들어나는 사실은 무엇으로도 부정하기 힘든다.8. 마무리이 쏘가리에 대해 특징적으로 볼 것은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왜 근본적으로 서양인들이 쏘가리를 만다린피시라 하였는가에 대한 정확한 풀이가 있어야 하고 또한 쏘가리의 매우 주요하다고 판단되는 생물학적 분류에서 기필코 동서양으로 구분 작업이 필요한 경위와 역사성이 있는 쏘가리를 전부 동양종으로 만들어야 하였던 당시 서세의 철두철미한 작업방식이나 환경에 대한 것이다.동서양을 구분함에 있어 당시 동양 쏘가리속(鱖屬:Siniperca,1862)의 학명 명명자 시어도어 니컬러스 길(Theodore Nicholas Gill:1837-1914)과 동아시아대륙 온대성 지류의 일종으로 분류한 꺽지속(屬:Coreoperca Herzenstein,1896)을 명명한 미하일 헤르젠슈타인(Mikhail Yakovlevich Herzenstein:1859-1906) 모두 스미스소니언협회(Smithsonian Institution)에 소속이거나 유대인이라는 특별한 점이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무엇때문에 분류 페밀리(科)를 한참 지난 현대 1959년 일본인에 의해 분류된 동양 쏘가리과(Sinipercidae Katayama,1959)로 분류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의문이다.이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분명 억지스러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꺽지속(屬)도 쏘가리속(屬)에서 라틴접두어에 시나이"sini"를 붙인 것처럼 라틴접두어 코레오"coreo"를 붙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시나이"나 "코레오"는 서양학자들에게 동일게 오리엔트문화호칭으로 불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검정우럭아목(Centrarchoidei)은 검정우럭목(Centrarchiformes)에 속하는 조기어류 아목의 하나이며 전통적으로는 농어목의 농어아목에 속하는 농어상과(Percoidea)에 포함시켜 분류했다고 말하고 있다.사실적인 어종(魚種)과는 관계 없이 학명만 맞춰 한국꺽지와 동양쏘가리를 동아시아종으로 구분했던 것이나타난다.농어아목 또는 페르카아목(Percoidei)에서 전통적인 분류는 농어상과 (Percoidea)분류이고 검정우럭과(Centrarchidae)와 페르카과 (Percidae)의 구분이라고 보아야 맞는 것은 검정우럭과에는 동양쏘가리가 포함되어 있고 페르카과에는 북아메리카대륙 퍼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만다린에 대한 어원이다. mandarinnoun [ C ]/ˈmæn.dər.ɪn/mandarin noun [ C ] (FRUIT) ipicture of mandarinalso mandarin orange a small, sweet type of orange that has a thinner, looser skin Definition of mandarin (Entry 1 of 2)1a : a public official in the Chinese Empire of any of nine superior grades b(1) : a pedantic official (2) : bureaucrat c : a person of position and influence often in intellectual or literary circles especially : an elder and often traditionalist or reactionary member of such a circle 2 capitalized a : a form of spoken Chinese used by the court and the official classes of the Empire b : the group of closely related Chinese dialects that are spoken in about four fifths of the country and have a standard variety centering about Beijing 3 [ Swedish mandarin (apelsin) mandarin (orange), ultimately from Portuguese mandarim mandarin; perhaps from the color of a mandarin's robes ] 첫째로 설명되는 것은 얇고 관피성(寬皮性) 껍질을 가진 작고 달콤한 형태의 오렌지를 말하고 있다.그 다음 만다린의 정의로 중국제국의 9품관료를 말하며 지식계나 문학계에서 지위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하고 그러한 조직에서 원로나 전통주의자 또는 체제를 유지 또는 회복하려는 입장이나 정치행동 취하는 보수적인 구성원을 말하고 서양에서는 보통 포르투갈어의 명령하다(mandar)라는 뜻에서 유래한 만다린(Mandari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관화(官話), 북방어(北方語)를 말하는 것으로 7억 3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표준 문학적 및 공식적 형태의 중국어라고 설명하고 있다.스웨덴의 오랜지(apelsin)색 주황색이나 포르투갈어 만다린(mandarim mandarin)의 만다린의 관복 색(color of a mandarin's robes)을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이를 종합적으로 보면 만다린은 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18세기 후반 프랑스 만다린에서 유래한 만다린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추측에는 과일의 색깔을 말하는 것으로 관료들의 노란 예복에 비유된다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북아메리카대륙 황농어(黃鱸, 金鱸:Perca flavescens) 즉 "yellow perch", "American yellow perch" 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황쏘가리의 천적을 살펴보았지만 이 황농어라고 알려진 미국 노랑 퍼치("American yellow perch")의 천적은 거의 모든 포식자들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서식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이고 진리가 아닌가 한다.이러한 사실을 놓고 누가 거부하고 부정하겠는가. 임진강, 한탄강, 남한강, 북한강 그 외의 지류에 속한 오늘날 한강수계에 서식하는 '황쏘가리'는 천연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된 어종(魚種)이라 한다.학명은 "Siniperca scherzeri Steindachner, 1892" 이다. 즉 한반도 쏘가리라는 이야기다.한반도 쏘가리는 위에서 보았지만 황색이 아니다.그렇지만 과학계에서는 색상의 아름다움과 희귀성 및 그 유전자원을 보전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고 알려진다.그러나 이 희귀성이 존체가 불가능할 정도라는 것으로써 절멸에 가깝다고 인식되어 왔다.무엇때문인가.무자비한 난획(亂獲)의 원인도 아니다.명확한 것은 시나이퍼치(屬:Siniperca)가 아니라 퍼카(屬:Perca)속에서 찾아야 한다.한반도 과학자들은 노란색의 황쏘가리는 알비노(albino), 색소결핍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황쏘가리는 알비노현상이 아닌 루시스틱(leucistic), 색소변이의 돌연변이 종(種)이라고 말하고 있다.과연 그런 것인가.진짜 황쏘가리는 엉뚱한 곳에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본 블로그 글 "전어(箭魚:Gizzard shad)로 본 CORE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6" 의 소제'4.충청도(忠淸道)참 의미' 에서 말하길 청(淸)은 삼수변(氵(=水, 氺)의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맑다"란 뜻이 강하고 물 수(水)변을 뺀 청(青)은 생(生)과 물감을 들이는 원료 단(丹)이 합(合)하여 이루어진 단어로 "맑고 푸르다"는 의미가 강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물의 수원(水原:The Gathering of Waters)이라고 하는 지역, 허드슨베이(Hudson Bay)에서 오대호(五大湖)사이지역에서 흘러내려 미시시피강이 되듯이 오대호의 빙하수(氷河水:glacial water)를 가득 머금고 있는 수원(水原)으로서 맑고 푸르다는 의미가 강하며 그 수원이 스며드는 초(草), 풀과 싹이 융성한 대초원을 이루는 지대를 곧 청(淸)이라 이르니 충청은 16세기 서양인들이 태평양 거대한바다라고 착각한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중심으로 한 수원 지역을 통칭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소제 "4)고전 역사가 말하는 쏘가리"에서 성소부부고 도문대작(屠門大嚼)에 궐어(鱖魚) 즉 쏘가리는 서울 동서(東西)쪽에서 많이 난다는 사실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6권 경기(京畿)편에 광주목(廣州牧)에서 토산으로 쏘가리[錦鱗魚]가 바쳐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또한 비록 농어라고 하고 있지만 쏘가리가 농어상과에 속한 것임을 알 때 농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전제한다면 이 농어[鱸魚]는 세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수원도호부에 토공(土貢)으로 나타나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이 농어가 토산(土産)으로 나타나는 지역이 거의 전국적이라 할 수 있다.다른 곳은 몰라도 분명한 것은 경기도 수원도호부를 중심으로 비록 농어가 민물배스라고 하여도 분명한 것은 쏘가리의 천적인 포식자이므로 농어가 많다는 것은 쏘가리가 많다는 사실과 연계할 수 있으니 쏘가리도 많았을 것이란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서울과 경기 광주목, 수원도호부에는 쏘가리가 서식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고 그곳과 가까운 곳에 분명 수원이 존재하여 그 수원은 서울과 경기도 광주로 이어진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물론 이것은 한반도 지형으로 보면 전혀 감이 잡히질 않을 이야기다.오대호의 빙하수(氷河水:glacial water)를 가득 머금고 있는 곳이 곧 수원(水原)이다.즉 진짜 황쏘가리라고 판명되는 미국 황색퍼치(American yellow perch)가 발견되는 곳도 바로 본 블로그에서 말한 수원지역으로 태호(太湖)라 했던 미시간호(Lake Michigan), 슈피리어호(Lake Superior), 발하슈호(Lake Balkash)라고 판단되는 이리호(Lake Erie), 휴런호(Lake Huron),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노르만호(Lake Norman), 미시간주의 토치호(Lake Torch)등이다.황색퍼치(yellow perch)는 북극과 대서양과 미시시피강을 포함한 로키산맥의 동북쪽 지역에 있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지한 사실을 참고할 수 있고 원종의 분포는 미시시피강에서 빙하가 녹으면서 활동하고 본토로부터 널리 퍼져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 동부와 캐나다의 다른 지역으로의 분포지가 넓혀지고 낚시용으로 상업적인 어류로서 그것의 대한 인기가 많다.현재 미국에서 토착원종과 분포지는 미주리 북부(North Missouri), 서부 펜실베니아(West Pennsylvania),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메인 주 북쪽(Maine North)까지며 대신 소개된 지역은 현재 북아메리카대륙 외지로는 확장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토착원종의 분포지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기때문에 만약 황색퍼치가 쏘가리라고 확정한다면 결국 서울과 경기지역을 가늠할 수가 있다. 한반도 생물학자들이 황쏘가리라 하는 것은 혹 만다린피쉬(Mandarin fish)라고 하는 진짜 황쏘가리를 한반도에서 기대하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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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큰사슴 포(麅)는 무스(Moose)이다.
*************************************조선시대 큰 사슴 포(麅)는 무스(Moose)이다. 글쓴이:한부울1. 해동역사 제26권 / 물산지(物産志) 1 총론(總論) ○ 조선에는 날짐승으로는 꿩, 비둘기, 참새, 메추리가 많고, 들짐승으로는 고라니, 사슴, 노루, 포(麅)가 많다. 해산물로는 곤포(昆布), 해의(海衣), 여방(蠣房), 거오(車敖)가 있고, 생선으로는 금문(錦紋), 이항(飴項), 중진(重唇), 팔초(八梢), 잉어, 붕어 등이 있다. 특이한 물산으로는 필관(筆管), 산장(酸漿), 자근(紫芹), 백호(白蒿), 수료(水蓼)의 싹, 당귀(當歸)의 싹이 있고, 과일로는 배, 밤, 대추, 감, 개암[榛], 잣[松], 살구, 복숭아, 밀감[柑], 귤, 매실, 오얏, 석류, 포도가 있고, 가죽으로는 호피(虎皮), 표피(豹皮), 균피(麕皮), 녹비(鹿皮), 호피(狐皮), 학피(貉皮), 예피(皮), 초피(貂皮)가 있고, 꽃으로는 장미, 철쭉, 작약, 모란, 도미(酴釄), 정향(丁香), 산반(山礬), 앵두꽃, 오얏꽃이 있다. 위 해동역사 물산지 총론에 조선에는 포(麅)가 많다 하였다.도대체 포(麅)가 무엇인가. 해동역사 제58권 / 예문지(藝文志) 17 중국 문(文) 5 봉사록(奉使錄) 고려해도일록(高麗海道日錄) [서긍(徐兢)]조선부(朝鮮賦) 명나라 홍치(弘治) 원년(1488, 성종19)에 동월(董越)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지은 것이다. 본디 자주(自注)가 있었으나 그 자주는 모두 다른 지(志)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은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동월(董越)]禽多雉鳩雀鷃 날짐승으로는 꿩 비둘기 참새 메추리가 많고 / 獸多麋鹿麞麅 들짐승으로는 고라니 사슴 노루 포가 많네 / 소주(小註)에, “포(麅)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다. 산에서는 포가 나지 않는다.” 하였다.포(麅) : 큰 사슴을 말한다. 《조선부》 자주(自注)에, “포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다. 산에서는 포가 나지 않는다.” 하였다. 위 기록 사서를 보자.조선 말기에 실학자 한치윤과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를 역사를 기전체로 기술했다는 해동역사(海東繹史:1823)인데 특히 한반도 지리사정과 매우 동떨어진 기록들이 많은 사서(史書)중에 하나로 꼽인다.이 사서 역시 친일사학자 이병도(李丙燾)등이 소속이 된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1925)와 진단학회(震檀學會:1934)에 의해 일제 병탄기 동안 원초적으로 조작된 사서(史書)라 볼 수 있지만 그 나마 남아 있는 사서(史書)중에 해동조선(海東朝鮮)을 알 수 있는 자료 중에 하나인 것은 틀림없다.해동역사 제26권 / 물산지(物産志) 1 총론(總論)과 예문지 17,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시(詩)귀에 수다미록장포(獸多麋鹿麞麅)라 하여 '들짐승으로는 고라니, 사슴, 노루, 포(麅)가 많다'하였다.소주(小註)에, “포(麅)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다. 산에서는 포(麅)가 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고 번역원 해설에서 마찬가지로 포(麅)는 큰 사슴을 말한다하였으며 자주(自注)에는 “포(麅)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다. 산에서는 포(麅)가 나지 않는다.”하여 이러한 내용에서 보면 필요이상으로 소주(小註)를 달아 무엇인가 다르게 해석을 첨가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이다.역사 마찬가지로 한국고전번역원에서도 소주를 그대로 옮겨적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해석에 반하여 동월의 조선부(朝鮮賦) 원전이 이야기 하는 포(麅)는 뿔이 한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하게 유추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정리를 해보면 포(麅)를 큰 사슴이라 하였고 또는 노루와 같다 하였으며 대신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다 하였지만 특히 산에서는 이 포(麅) 즉 큰 사슴이 나지 않는다고 정리된다.즉 산이 아니라 넓은 초원이나 숲이 있는 들판이라고 풀어 볼 수 있다. 狍子 번체 麅子 1.노루의 일종2.노루의 한 종류[포]큰 사슴(麠屬); 노루(鹿屬) (麃와 同字) 鹿(사슴록) + 包(쌀포) [ 복사용 문자 : 麅 ] 5획 (총16획) elk ホウ·しか páo 麅鹿賞(포록상) 淸代, 每年 12月에 王이 大臣 등의 三品 이상된 者에게 賞䁑하는 賞與를 말함. 麅 (radical 198 鹿+5, 16 strokes, cangjie input 戈心心口山 (IPPRU), composition ⿸鹿包)1.roe deer, Capreolus, a small spotted deer found in N.China한자 사전에는 포를 사슴이라 하였고 큰 사슴 속(麠屬)으로 분류함을 알 수가 있지만 온통 노루가 아니면 고라니로 설명하기가 바쁘다.그러나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아시아인들의 상식을 깨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위 한어사전에 보면 포자(麅子)가 노루 일종이지만 큰 사슴이라고도 하였고 이 큰 사슴이 바로 엘크“elk”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그렇다, 현재 한반도는 물론이고 신중국이나 열도일본 용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엘크가 나타난 사실이다.큰 사슴이라는 것은 바로 엘크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동사강목 제12하 을미년 충렬왕 21년(원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 1295) 윤4월 사신을 원에 보내어 제주(濟州)에서 나오는 특산물을 바쳤다.모시ㆍ목의포(木衣脯)ㆍ멧돼지가죽[獾皮]ㆍ삵괭이가죽[野猫皮]ㆍ족제비가죽[黃猫皮]ㆍ사슴가죽[麅皮] 등의 물품을 바쳤다. 조선후기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고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를 다룬 역사책 동사강목(東史綱目)제12하에서 보면 제주에서 나오는 특산물을 바쳤다고 되어 있는데 사슴가죽이라 하여 포피(麅皮)라 하였다는 것은 제주(濟州)에도 이 큰 사슴이 자랐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명사(pl. elk 또는 elks)(英) 엘크(북 유럽이나 아시아에 사는 큰 사슴. 북미에서는 moose라고 함) (美) 동의어 wapiti 2. 백두산사슴은 와피티이며 캐나다사슴이다.그렇다면 엘크(elk)는 어떤 짐승인가.위 백과사전을 잠시 보면 엘크는 북아메리카 산(産) 큰사슴 와피티(wapiti)라고 하고 있으며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이를 무스(moose)라고 하는 사슴과(鹿科:Cervidae)동물이라고 밝히고 있다.그러나 엘크와 무스와 다른 종으로 표현하면서 현재 자료에서 엘크(elk)는 북 유럽(Northern Europe)이나 아시아(Asia)에 사는 큰 사슴으로 알려져 있고 북미에서는 큰사슴을 무스(moose)라 한다고 되어 있다.즉 큰사슴을 말하되 유럽종과 북미종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lk or wapiti (Cervus canadensis Erxleben)] [Cervus elaphus canadensis - North American Elk] [ Cervus elaphus elaphus - European Red deer] [Cervus canadensis sibiricus-Altai maral=Altai wapiti]특히 영어자료를 보면 와피티사슴(wapiti)과 엘크(elk)를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며 학명(學名)으로 세르부스 케나덴시스(Cervus canadensis Erxleben,1777)라 하여 '캐나다사슴'이라 하였으며 현재 한반도에서는 이를 대록(大鹿)이라 하거나 놀랍게도'백두산사슴'이라 한다고 하면서도 삼명법(三名法)을 사용하여 아종명에 산토파이구스(xanthopygus)를 붙여 아종(亞種:subspecies)과 변종(變種)으로 처리하고 붉은사슴의 한 아종으로 "동아시아와피티"라고도 하고 있다.즉 '백두산사슴'을 한반도용(아종이나 변종)으로 처리고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무엇때문에 한반도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생물에 대한 근원지 지리명에서 백두산이나 한라산, 지리산 그밖에 유명한 백산이나, 천산, 금강산 등에서 수많은 생물 분류에서 보았을 때 원종은 거의 없고 대다수 아종이나 변종으로 처리되고 있는 실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그러나 한반도가 아닌 열도를 근원지로 하는 생물종들은 거의가 근원종으로 처리되었다.이러한 사실에서도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한반도 더 넓게는 동아시아용으로 처리되는 생물분류는 의도적으로 아종이나 변종으로 처리하여 기존 유럽종과 구별하고 들어내지 못할 것은 깊이 감추려는 것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불공정한 분류체계가 오늘날 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때문에 한반도 생물분류체계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않으면 안된다.해동역사 소주(小註)에, “포(麅)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으며 산에서는 포(麅)가 나지 않는다.”는 해석에서 단순하게 본다면 뿔이 하나인 포가 과연 어디에 무엇인가를 되묻지 않으면 안된다.솔직히 외뿔(한개의 뿔)을 찾기가 더 어렵다.이런식의 감추기가 도를 넘치니 나중에는 중국 고서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는 신비스러운 가상의 짐승으로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이렇게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포(麅)는 우리에게 중요한 동물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백두산사슴을 큰사슴으로 인식하게 하여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서 말한 포(麅)가 엘크라고 할 때 거의 조선 백두산(白頭山)에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만 분명하게 산에서 자라지 않는다 하였으니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무스에는 결코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그렇다면 무스가 아니면 엘크인데 엘크와 무스의 칭호가 동일선상에 있어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더라도 백두산사슴은 캐나다엘크 즉 와피티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어쩌면 유럽붉은사슴이라고 하여 헷갈리게 한 와피티(wapiti)가 백두산 사슴일 가능성이 높다.또한 그러한 의심은 현재 과학자들도 이 엘크(elk)란 동물을 두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사실이고 유럽대륙에 존재하여야 할 엘크 개체들이 사라진 지금 존재성에서 자료만 있을 뿐이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과 이것에 더하여 북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 동일한 종(種)이 서식한다는 사실, 또한 똑같은 엘크를 '붉은사슴'이라 하고 이를 유럽 종(種)이라 규정하면서 사슴속(鹿屬:Cervus)중심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 등이 혼란을 주는 것이지만 산에서 살지는 않지만 백두산 근처 엘크, 와티피가 서식한다 할 때 이를 캐나다사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위 그림에서 보듯이 '붉은 사슴'이라는 것은 '유럽붉은사슴(European Red deer)'을 말하는 것인데 학명 라틴어 붉은사슴(red deer)의 의미인 에라푸스(elaphus)를 붙여 "케루스 에라푸스 에라푸스(Cervus elaphus elaphus)"라고 분류하고 있다.이런 여러가지 의문점들은 이 엘크라는 동물에서 존재하지만 근원적으로 서식한 곳은 유럽이나 동아시아보다는 북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동시에 동아시아대륙의 큰 사슴이라고 하는 와피티 종들은 아종을 만들어 20세기에 인위적으로 이식 또는 번식했을 가능성은 오히려 백두산사슴의 존재성을 의심케 하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 유럽대륙에서 서식했다고 하는 '붉은사슴' 역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이식되었던 것으로 유럽대륙의 존재성까지 의심하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3.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보면 우리나라 해동역사란 사서(史書)에서 큰 사슴이라고 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제일 큰 사슴'이라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엘크'는 사슴과에서 말코손바닥사슴(Alces alces Linnaeus,1758)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종(種)이라는 사실이 단정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즉 조선사서에서 말한 '큰 사슴'은 와피티라고 하는 엘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엘크는 일반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와피티(wapiti)사슴 즉 '캐나다사슴'이라 하고 유럽의 붉은사슴(red deer:Cervus elaphus)과 매우 흡사하다고 하였지만 2004년의 미토콘드리아 (DNA)연구를 통해 서로 다른 종(種)임이 밝혔다고 말하고 있다.즉 다르지 않다고 하면 더욱 의심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Cervus elaphus maral Gray,1850Cervus elaphus Linnaeus, 1758 RED DEER Wapiti; ElkAdult total length: 6 3/4 - 9 3/4 ft. (203 - 300 cm)Tail: 3 1/8 - 8 3/8 in. (80 - 213 mm)Height at shoulder: 4 1/2 - 5 ft. (137 - 150 cm)Weight: 450 - 1,089 lbs. (203 - 495 kg)'와피티'라고 하는 엘크와 다른 또 하나의 엘크 즉 '유럽 붉은사슴'과 다른 종을 강조하고 있다.와피티 수컷은 어깨높이가 약 1.4m이고, 몸무게는 500kg까지 나가며 커다랗고 구부러진 뿔이 특이하고, 완전히 자란 뿔은 너비가 1.5m 이상 벌어진다 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수컷 루즈벨트 엘크의 무게는 약 300~544kg(661~1,199lb)이며 어깨높이가 1.3~2.1m 반면 유럽붉은사슴은 어깨높이 1.37~1.5m, 몸무게 203~495kg으로 나타난다.와피티 보다 유럽붉은사슴이 훨씬작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형태적으로는 동일한 면이 있다.와피티의 뿔은 해마다 봄에 떨어지고, 여름에 새로 자라고 암컷은 뿔이 없다고 되어 있다. 북반구의 온대림에서 풀·사초류·지의류·곰팡이·나뭇잎을 먹고 살며 평소에는 암수가 떨어져 생활하다가 짝짓기 철이 가까워지면, 수컷이 암컷 무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싸움에서 이긴 수컷이 여러 암컷과 짝짓기하며 짝짓기 철이 지나면 수컷은 다시 암컷 무리를 떠나게 되는데 봄이 오면 암컷은 새끼를 낳기 위해 무리를 떠나고 새끼가 어미를 따라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무리에 다시 합류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와피티(wapiti)Cervus canadensis科學分類界: 動物界 Animalia門: 脊索動物門 Chordata綱: 哺乳綱 Mammalia目: 偶蹄目 Artiodactyla亞目: 反芻亞目 Ruminantia科: 鹿科 Cervidae亞科: 真鹿亞科 Cervinae屬: 鹿屬 Cervus種: 加拿大馬鹿 Cervus canadensis二名法Cervus canadensis Erxleben,1777Johann Christian Polycarp Erxleben:1744-1777 was a German naturalist from Quedlinburg. [Cervus canadensis Erxleben,1777]와피티 즉 캐나다사슴의 위 학명자를 보면 쿠데를린부르크 태생의 독일 동물학자이며 괴팅겐대학 물리 및 수의학교수인 요한 크리스티안 에릭슬레벤(Johann Christian P. Erxleben)이라고 나타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독일출신 괴팅겐 교수가 미국을 다녀간 기록이 없는데 미국독립전쟁시기인 1777년에 북미유일 종인 엘크를 캐나다에서 탐사하고 표본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든다.그렇다면 독일이라고 하지만 북아메리카대륙 엘크가 밀집된 곳에서 머지 않는 곳에 독일거주지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1.(North America) moose, (British) elk캐나다 엘크는 유럽붉은사슴종으로 만들었다면 당시 과학자들은 어떤 작업을 했을까?그는 결코 독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독일인들이 밀집하였다고 의심되는 곳이 있는데 과거 영어가 아닌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언어(Most commonly spoken language other than English)를 사용하였던 지도에서 들어난 것처럼 북미대륙 노스 다코타(North Dakota)에서 유일하게 독일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될 수가 없다.이곳은 지리적으로 캐나다사슴이 서식한 장소와 매우 가까운 곳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그곳에서 옛 게르만 독일인들이 활동했었다고 할 때 유럽과 북미를 따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전제하면서 아래 밝히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다 아는 바와 같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무스(moose)라고 하고 유럽에서 특히 브리티시(British)에서는 엘크라 한 사실에서 이것이 정상적인 대륙구분으로 마무리 할 수 없는 지식의 모순이 그대로 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엘크(Cervus canadensis Erxleben)의 생물분류체계를 보면 척삭동물문(脊索動物門:Chordata),포유강(哺乳綱:Mammalia),우제목(偶蹄目:Artiodactyla),반추아목(反芻亞目:Ruminantia),사슴과(鹿科:Cervidae),사슴아과(真鹿亞科:Cervinae),사슴속(鹿屬:Cervus)으로 분류된다.Early European explorers in North America, who were familiar with the smaller red deer of Europe, thought that the larger North American animal resembled a moose, and consequently gave it the name elk, which is the common European name for moose. 위 영어자료를 보면 유럽의 '작은' 붉은 사슴에 익숙했던 초기 유럽탐험가들은 북아메리카의 '큰 동물'이 무스(moose)처럼 생겼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무스(moose)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듣기에는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동일하게 신중국자료에서도 초기 탐사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엘크(Cervus canadensis)라고 하는 "와피티"를 발견했을 때 체형이 유럽엘크(歐洲馬鹿)보다 훨씬 컸었다고 말하고 있다. 컸지만 이것이 유럽엘크와 같은 분류에 넣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어원(語原)에서 보면 'elk'는 라틴어로 알체스'alces'이며, 옛 노르딕어의 'elgr', 스칸디나비아어(Skandinavien)의 'elg', 독일의 엘히'Elch' 등과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고 했으며 엘크의 또 다른 명칭 와피티(wapiti)는 '하얀 엉덩이'(white rump)를 뜻하는 캐나다 중부에 많이 사는 북미 원주민 인디언 쇼니족어(Shawnee Indian word)와 크리어(Cree word)의 와피티'waapiti'에서 유래됐다고 말하고 있다.와피티의 학명 라틴어 에라푸스(elaphus)의 의미가 붉은사슴(red deer)이라 했다.하얀 엉덩이와 의미가 차이가 난다.Alces: the genus of mammals (order Artiodactyla) comprising the moose and the European elk History and Etymology for AlcesNew Latin, from Latin, elk, of Germanic origin; akin to Old Norse elgr elk OriginMid 16th century; earliest use found in Thomas Elyot (c1490–1546), humanist and diplomat. From classical Latin alcē from the Germanic base of elk.엘체스는 16세기 중반 라틴어로 쓰던 관례를 영어 산문체로 쓰도록 주장한 브리티시(British)행정가이면서 고전학자인 토머스 엘리엇(Thomas Elyot:1490–1546)에 의해 처음사용되었는데 독일어 기초 'elk'에서 라틴어 'alcē'가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무스(moose)와 유럽엘크(European elk)가 포함된 우제목(偶蹄目:Artiodactyla) 포유류의 명칭으로 나타나고 독일어는 옛 노르틱어 'elgr' 'elk' 와 같다라고 하고 있다. 한편으로 유럽엘크를 아시아(亞州)에서는 카스피안 붉은사슴(Caspian red deer:Cervus elaphus maral)으로 알려져 있지만, 멸종된 마당에 실체를 알 수 없으며 이것은 붉은 사슴의 아종(亞種)이라 하고 있다. Altai wapiti, Tian Shan wapiti, Manchurian wapiti and Alashan wapiti.또한, 몽골에는 '캐나다 사슴'을 뜻하는 알타이 큰사슴(Altai maral(wapiti):Cervus canadensis sibiricus)이라 하며 이것을 시베리안 와피티(Siberian wapiti)혹은 시베리안 엘크(Siberian elk)라고 하고 있다.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주와피티를 알타이 큰사슴이라고 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이것들은 엘크 원종을 파악하는데 영향을 줄 수 없는 종이다. Conventions internationales : Cervus elaphus maral (wikispecies)Anglais : maral (en), Noble deer (en), Caspian Red Deer (en)Chor : сыын (*)Kazakh : марал (kk) maralMongol : марал (mn) maral동양종이라고 알려진 학명 카스피안 붉은사슴은 학명 "Cervus elaphus maral Gray,1850" 인데 북미 엘크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브리티시 동물학자(British zoologist), 존 에드워드 그레이(John Edward Gray:1800-1875)에 의해 명명되었고 공교롭게도 이 사람은 본 블로그 글 "멧토끼(산토끼:Korean hare)와 아메리카대륙 http://blog.daum.net/han0114/17050015 "에서 캘리포니아멧토끼(Lepus californicus Gray,1837), 중국멧토끼(Lepus sinensis Gray,1832)그리고 아종(亞種:subspecies)으로 '한국멧토끼'가 포함된 멧토끼아속(Subgenus Eulagos)을 1867년에 존 에드워드 그레이(John Edward Gray:1800-1875)가 명명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 붉은사슴 종(種)도 그렇게 했을 가능성과 근원적으로 분류체계의 신뢰성을 주지 못하는 한계를 보고 있다 할 것이다.결국 본 블로그 글에서는 결론을 맺기를 '섣달토끼'라는 것은 지금 '눈덧신토끼', 또는 '눈토끼'라 한 것과 절대 다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즉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지리지에 기록된 강원도 "섣달토끼"는 바로 "눈토끼"이거나 "눈덧신토끼"이며 이것의 학명은 바로 "북극토끼(Lepus timidus Linnaeus,1758)"이거나 "아메리카산토끼(Lepus americanus, Erxleben,1777)"란 사실임을 확언할 수 있다 하면 또 하나의 세계삼한역사연구에 획을 그었다.마찬가지로 독일출신이었던 요한 크리스티안 에릭슬레벤(Johann Christian P. Erxleben)역시 동일한 년도 1777년에 '아메리카산토끼(Lepus americanus, Erxleben,1777)'를 명명한 것은 그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근거하고 거주하면서 표본을 습득했을 것이란 추측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니 만큼 이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공히 조선(朝鮮)에서 서식한 생물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이를 볼 때 한국멧토끼 사정이나 '백두산사슴' 원산지도 동일한 이치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할 것이다.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에서 천산(天山)은 북아메리카대륙 로키산맥에 있어야 할 지명 매킨리 산(Mount McKinley:6,144 m)을 지정하면서 별도로 가지고 있는 명치 데날리(Denali)란 뜻은 애서배스카어(Athabaskan language)로 위대한 사람(the great one) 또는 높은 사람(the high one)이란 뜻으로 우리말로 '머리산'이라 할 수 있다 하여 이곳을 백두라 한 사실과 백(白)은 곧 신(神)이고 환인이시니 흰산(白山)은 같은 뜻이라고 할 때 백산의 의미인 히말라야(Himalayas)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매킨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맥이라 하였던 적이 있으며 티벳(Tibet)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4. 리처드 리데커(Richard Lydekker)가 인도북부란 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무스가 서식한 장소이다.위 사진은 영국의 자연사학자, 지질학자, 그리고 자연사에 관한 수많은 책의 저자였던 리처드 리데커(Richard Lydekker:1849-1915)의 저서 "The deer of all lands(1898)"에 실린 그림인데 여기서 이것을 The deer of all lands(1898) 이것을 엘크 흰 배경(Elk white background)이라는 제목이다.듯 유럽인들이 보았다고 하는 엘크가 이런 모습이다.즉 사슴아과(真鹿亞科:Cervinae)과 아니라 노루아과(空齒鹿亞科:Capreolinae)이다. 특히 이 작가의 활동영역이 이상한데 그는 1874년 인도(印度:India)의 지질조사에 참여하여 북부 인도의 척추동물 고생물학에 대해 연구하였고 1881년 아버지가 임종할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고 되어 있다. 즉 그가 연구한 것은 유럽인들이 엘크라고 하는 무스이다.즉 무스는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만 서식하는 유일종이라 할 때 그가 북부인도라고 하는 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 캐나다 전역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즉 인도는 오늘날 인도아대륙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을 말한 것이다. [말코손바닥사슴(Alces alces Linnaeus,1758)] 그러나 지금까지 엘크와 캐나다사슴, 와피티(wapiti)를 보았지만 분명 조선시대 포(麅)가 '큰 사슴'이라 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세계에서 '가장 큰 사슴은 바로 말코손바닥사슴(Alces alces Linnaeus,1758)바로 그것이다.이것을 유럽인들은 엘크라고 한 것이다.서두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위 엘크 또는 북아메리카산(産) 큰사슴 와피티(wapiti)와는 다른 종이 틀림없고 사슴과에서 말코손바닥사슴(Alces alces Linnaeus,1758)제일 크다른 것을 확인했다.그렇다면 동월 조선부에서 이야기 한 큰 사슴은 와피티(wapiti)라고 하는 엘크가 아니라 이 "말코손바닥사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駝鹿的名稱取意於其肩高於臀,與駱駝相似。又稱堪達罕、犴达罕、犴,均來自滿語“ᡴᠠᠨᡩᠠᡥᠠᠨ”(转写:kandahan)。駝鹿在北美洲稱為「moose」(源於東阿布納基語的「moz」),而在歐洲稱為「elk」(「elk」在北美洲被用來稱呼加拿大馬鹿)。위 중국자료를 보면 마찬가지로 말코손바닥사슴을 타록(駝鹿)(Alces alces L.)이라 하는데 그것의 대한 설명으로 어깨가 엉덩이보다 높다는 뜻이라 하였고 감달한(堪達罕:kāndáhǎn]), 한달한(豻達達:hāndáhān), 豻(간), 만주어로“ᡴᠠᠨᡩᠠᡥᠠᠨ”(kandahan)'칸다한' 이라 하였으며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이를 "무스(moose)"라고 하였고, 유럽에서는 이를 "엘크(elk)"라 하는데 엘크(elk)는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사슴을 말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즉 유럽붉은사슴과는 다르다는 사실에서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유럽인들은 기어코 북아메리카대륙은 무스, 유럽대륙의 사슴은 엘크로 구분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즉 무스와 캐나다사슴도 다른 종이 틀림없다.앞에서 물론 '캐나다사슴' 즉 '와피티'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했다.그렇다면 사슴과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말코손바닥사슴은 어느정도 큰 것일까?몸길이 2.5-3m, 어깨높이 1.4-1.9m, 몸무게 360-640kg에 달하며 700kg을 넘는 개체도 존재하고 몸빛은 회색을 띤 갈색이며 수컷에는 손바닥 모양의 큰 뿔이 있는데 해마다 겨울에 떨어지고, 봄에 새 뿔이 돋으며 한 쌍의 뿔은 벌어진 사이가 1.5-2m이고, 뿔 무게는 40kg이나 되는데 특징적으로 암수 모두 목에 큰 혹이 한 개씩 있다고 설명된다. 즉 캐나다사슴 즉 와피티와 비교할 때 길이가 6 3/4 - 9 3/4 ft.(203-300 cm), 어깨높이가 약 4 1/2 - 5 ft.(137-150 cm), 몸무게는 약450 1,089 lbs(203-495 kg) 정도로서 이미 몸무게에서 엄청차이가 난다.세계에서 가장 큰 사슴인 말코손바닥사슴(Alces alces Linnaeus,1758)의 생물분류체계를 보면 척삭동물문(脊索動物門:Chordata),포유강(哺乳綱:Mammalia),우제목(偶蹄目:Artiodactyla),반추아목(反芻亞目:Ruminantia),사슴과(鹿科:Cervidae)까지는 캐나다사슴 와피티(wapiti)와 동일하지만 그 다음 분류에서 사슴아과(真鹿亞科:Cervinae)가 아니라 노루아과(空齒鹿亞科:Capreolinae)로 분류되고 있으며 1821년 브리티시 동물학자 그레이가 큰 사슴속(駝鹿屬:Alces)으로 분류하면서 일찍이 린네(Carl Linnaeus:1707-1778)가 명명한 "말코손바닥사슴(駝鹿:Alces alces Linnaeus,1758)"이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어쨌던 이 말코손바닥사슴조차도 유럽종으로 바꾸려 시도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그러니 사슴아과에서 노루아과로 바꾸면서 하는 수 없이 다른 종으로 취급되도록 했겠지만 말코손바닥사슴과 연결하고 있는 것은 사슴아과에서 유럽엘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즉 아무리 노루아과로 나누고 새롭게 큰 사슴 속(屬)으로 분류했다고 하지만 근원적으로 "큰 사슴"은 바로 "무스(moose)"인 것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스(moose)가 큰 사슴 동월(董越) 조선부(朝鮮賦)에 등장하는 포(麅)가 맞는가. 駝鹿 A. alces科學分類 界: 動物界 Animalia門: 脊索動物門 Chordata綱: 哺乳綱 Mammalia目: 偶蹄目 Artiodactyla科: 鹿科 Cervidae亞科: 空齒鹿亞科 Capreolinae屬: 駝鹿屬 Alces Gray,1821 種: 駝鹿 A. alces二名法 Alces alces(Linnaeus,1758) 북아메리카의 무스[moose (North America)]나 엘크[elk(Eurasia)]라고 하는 학명 알체스 알체스(Alces alces)는 신대륙 사슴 군락의 일원으로 사슴과(鹿科:Cervidae)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현존하는 종(種)이라 반복하고 있다. 무스는 수컷의 야자과 나무(palmate)와 같이 또는열린 손 모양(open-hand shaped)뿔로 구분되며 사슴의 다른 일가족은 수지돌기[樹狀突起:dendritic]-비틀림형(twig-like)을 가진 뿔을 가지고 있다라고 정리되어 있다. 무스는 전형적으로 온대림과 온대 넓은 잎(broadleaf) 그리고 온대북반구의 혼합된 숲(mixed forests)에 서식한다고 한 것에서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포(麅)가 산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무스(moose)의 예전 서식지가 소개되었는데 현재 대부분의 무스들은 캐나다(Canada), 알래스카(Alaska), 뉴잉글랜드(New England), 스칸디나비아 반도, 콜라 반도, 카리알라, 핀란드 지역 그리고 발트제국(Baltic states), 러시아(Russia)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무스(moose)의 서식지는 북아메리카대륙임은 먹이사슬 천적에서도 찾을 수 있어 크게 의심할바가 아니다.그들의 식단은 육지 생물 및 수생식물(terrestrial and aquatic vegetation)이며 천적인 먹이사슬에서 가장 흔한 무스 포식자는 곰(bear)과 인간과 함께 회색늑대(Gray wolf)라 하였는데 이리나 말승냥이라 하는 회색늑대(Canis lupus Linnaeus,1758)는 특징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밝혔던 바다. 본 블로그 글 "회색늑대(Canis lupus coreanus)를 모계로한 진돗개와 딩고(澳洲野犬,dingo) http://blog.daum.net/han0114/17048784" 에서 한국늑대(Canis lupus coreanus)는 북아메리카 대륙 북부지역에 남아 있는 바로 학명 카니스 루푸스 찬코(Canis lupus chanco)와 같다 하였고 본 블로그 글 "한국호랑이와 조선호랑이 찾기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7 " 소재 "호랑이 먹이사슬"에서 호랑이와 회색늑대의 먹이사슬 호저(豪猪:porcupin)의 포식자들은 거의 대부분 북아메리카대륙을 서식처로 하는 동물들이라고 결론 내렸다.그렇다면 이러한 무스의 포식자 역시 북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대부분의 다른 사슴 종(種)들과 달리, 무스(moose)는 소떼를 형성하지 않고 고립동물이며 암소가 발정기가 될 시점, 보통 새끼 출생 후 18개월까지 모유와 함께 남아 있는 새끼 무스를 제외하고 수컷은 어린 새끼를 쫓아낸다고 설명된다. 일반적으로 느리게 움직이고 앉아있지만, 무스는 화가 나거나 놀라면 공격적이 되고 빨리 움직이며 가을에 짝짓기를 하는 계절에는 암컷을 위해 경쟁하는 수컷들 사이의 활발한 싸움을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무스 두번째 그림]라틴어 학명 말코손바닥사슴(駝鹿:Alces alces Linnaeus,1758)의 별칭 무스(moose)란 어원을 보면 북미 영어에서는 '무스(moose)'로 불리고 영국 영어에서는 '엘크(elk)'로 불린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앞에서도 이야기 한 사실이지만 이러한 설명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북미 영어의 "엘크"라는 단어는 완전히 다른 종(種)의 사슴인 캐나다사슴(Cervus canadensis)를 가리키고 이것은 또한 와피티(wapiti)라고도 불린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그렇듯 헷갈리게 한다.성숙한 수컷 무스를 일반적으로 황소(bull)라 불리고, 성숙한 암컷 소는 카우(cow)라고 불리며, 미성숙 무스를 송아지(calf)라고 불린다는 사실도 퍽 이채로운 것이다. Proto-Algonquian 형식은 *mo·swa'무스'라는 단어는 1606년에 처음 영어로 입력되었고 북미 알곤킨어(Algonquian languages語)에서 따온 것으로, 초기 출처에 따르면, 이 언어들은 무수(moosu)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서로 간에 서로 강화시키는 아래 참고자료와 같이 북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여러 언어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Proto-Algonquian/mo·swaEtymology[edit]Literally "it strips", referring to the way the animal eats (by stripping bark off trees). 나무껍질을 벗겨내듯(stripping bark off trees)동물이 먹는 방식을 가리킨다. Noun[edit]*mo·swa 1.mooseDescendants[옛것에서유래하는 것]Plains Algonquian: possibly Cheyenne mō'e (“elk”); compare mehe (“cow, doe (female buffalo or deer)”)알콘킨평원:샤이엔족의 모에mō'e (“elk”); 사슴이나 버팔로의 암컷:암소Central Algonquian: Cree-Montagnais-Naskapi: Cree: Plains Cree: ᒨᓴᐧ (mōswa)중부알콘킨:캐나다 중부에 많이 사는 북미 원주민 크리족, 프랑스의 산지사람(mountaineers in French)치페와이언족 사람들, 퀘벡북부사람-북아메리카 동북부에 퀘벡에 거주하는 이누(Innu)인족, 이누인족들은‘위대한 강’이라는 뜻의 ‘미시타시푸(Mishtashipu)’라 부른다. 세프일레(Sept-Îles) 근처 세인트로렌스강(Saint Lawrence River) 북쪽 연안의 래브라도(Labrador) 경계 근처근거Woods Cree: ᒨᔁ (mōswa)East Swampy Cree: ᒨᐢ (mōs)West Swampy Cree: ᒨᔁ (mōswa)Atikamekw ᒧᔅ (mos)Montagnais-Naskapi: East Cree: Northern East Cree: ᒨᔅ (muus)Southern East Cree: ᒨᔅ (muus)Montagnais: ᒧᔥ (mush)Naskapi: ᒧᔅ (muus)Menominee: mo·sEastern Great Lakes: Ojibwe-Potawatomi: Ojibwe: moozo, mooz, moonz Algonquin: mòz 동부대호수:오지브웨-포타와토미족:무조, 무즈, 문즈, 알콘킨:모즈Ottawa: moozWestern Ojibwe: moozoPotawatomi: mozoFox-Sauk-Kickapoo: Fox/Sauk: môthwa, possibly also meshêwêwaMiami: moohswa (“deer”)Eastern Algonquian: Abenaki: mozPenobscot: mosMalecite-Passamaquoddy: musMassachusett: moos, mwsNarragansett: moosMohegan-Pequot: mosMahican: mo-oseLenape/Delaware: Unami: musMunsee: móos→ English: moose (from one of the Eastern Algonquian languages) 위 무스의 어원자료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나라칸세트의 무스(Narragansett moos)와 동부아베나키의 모스(Eastern Abenaki mos)를 비교할 수 있고 이른 출처에 따르면, 아마도"옷이 벗겨지다(he strips off)"는 것을 의미하는 무수(moosu)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어쨌든 전부 어원들이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캐나다를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무스(moose)의 역사를 보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훨씬 전인 청동기시대(Bronze Age)에 브리튼(Britain)에서 무스(moose)는 멸종되었다고 알려진다. 다만 화석 어린 뼈(youngest bones)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발견되었고 대략 3,900년 전의 이야기인데 "엘크"라는 단어는 유럽대륙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계속 사용되었지만, 참고할 수 있는 살아있는 동물이 없는 상태에서 "엘크"를 "큰 사슴"이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대부분의 영어 사용자들에게 의미가 모호하게 들리고 어딘가 모르게 모순을 안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는 하다. 18세기의 사전들은 단순히 "엘크"를 "말 만큼" 큰 사슴이라고 묘사했다고 알려진다.어쨌거나 "엘크"라는 단어는 북아메리카에서 캐나다사슴(Cervus canadensis)를 가리키며 이것은 또한 알곤킨의 고유명칭인 "와피티(wapiti)"로 불린다. 브리티시라고 하는 영국은 17세기에 미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종류의 흔한 사슴을 발견했다고 알려지는 것도 무엇인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와피티(wapiti)는 훨씬 더 크고 빨갛지 않았지만 유럽의 붉은 사슴과 매우 유사하게 보였다는 이유다. 그 사슴은 식민지이주민들에게 다소 이상하게 보이는 사슴이었고, 그들은 종종 두 마리 모두를 지역 이름으로 채택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 식민지화 초기에는 와피티(wapiti)를 회색 무스(grey moose)라고 불렀고, 무스(moose)는 검은 무스(black moose)라고 불렸지만, 동물들의 초기 매우 다양한 색상만으로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다.와피티(Wapiti)는 행동이나 유전적으로 뚜렷이 다르지만 표면적으로는 중유럽과 서유럽의 붉은 사슴과 매우 유사했다는 사실만을 강조한다. 그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유럽지역을 대체적으로 캐나다를 말한 것이라고 규정하게 만든다.북미의 초기 유럽 탐험가들, 특히 무스가 없는 버지니아의 탐험가들은 덩치가 크고 유럽종인 붉은사슴(Cervus elaphus Linnaeus,1758: 欧洲马鹿,是屬於鹿科的一种,又名紅鹿、赤鹿、八叉鹿)만 알고 그것처럼 친숙하게 생긴 사슴과 닮았기 때문에 와피티 "엘크"라고 불렀다 하였고 실제로 큰 사슴인 무스(moose)는 영국 식민지이주민들에게 덜 익숙한 '독일 엘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독일엘크가 무엇일까?조선에서 북방민족들을 보면 여진과 흉노, 말갈, 만주, 몽고가 있고 게르만을 거란(契丹:Khitan)하고, 몽골을 대비달자 아라사라 하는 것들은 모두 북방에 나타나는 민족이다.게르만족이 거주한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 노스 다코타는 매우 흥미로운 지역인 것은 틀림없다.본 블로그 글 "한국호랑이와 조선호랑이 찾기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7" 에서 호랑이 육회를 독일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인데 이를 스테이크 타르타르(steak tartare)와 흡사하며 특히 독일인들이 많은 노스 다코타(North Dakota),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위스콘신(Wisconsin) 및 미네소타(Minnesota), 미주리(Missouri)에 특산물이면서 이 음식의 원조는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의 클라크(Clark)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과 일치하며 특히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주 브라운카운티(Brown County)에 애버딘(Aberdeen)과 케슬러(Kessler's)식료품 가게에서 호랑이 육회 즉 스테이크 타르타르를 지속적으로 공급한다고 했었다.타타르가 대조선인 반면 최후 몽고(蒙古)를 내속하고 있는 것이라면 몽고가 거란을 점령한 여진을 복속케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종족 동화, 복속 흐름과 다르지 않다.그것을 유럽인 게르만, 또는 독일이라고 한 사실과 맞추어 볼 수 있을 것이다.몽고는 아라사(愕羅斯)이며 대비달자로 불리었다는 사실과 또한 그 속에는 거란(契丹)이존 재하였다.본 블로그 글 "어르쇠 흑요석(黑曜石)과 아라사(愕羅斯)정체http://blog.daum.net/han0114/17050711" 에서 몽고(蒙古)의 종락(種落)은 이 흑룡강 북편에 있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어르쇠"가 있는 곳은 대비달자, 아라사(愕羅斯)가 있었던 곳으로 추리가 가능하다 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이곳도 역시 흑룡강(黑龍江)를 끼고 있는 노스 다코타(North Dakota)를 지정했다.무스는 오랫동안 어떤 종(種)도 공식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다양하게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결국, 북미에서는 와피티(wapiti)를 엘크(elk)로 알려졌고, 무스(moose)는 북미원주민(Native-American)의 이름으로 보존했다고 말하고 있다.유럽인들은 나그네다.그러니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북미 분포지 역사를 보면 북미 북동부 지역에서, 동부 무스(Eastern moose's)의 역사는 매우 잘 기록되어 있다. 수세기 전 북미 원주민(Native Americans)들의 식단에서, 무스 고기는 종종 주식이 되었다는 것은 서두에서 해동역사(海東繹史:1823) 소주(小註)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게 “포(麅)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다"라는 표현과 동일하다 할 것이며 오늘날 해안 붉은 섬,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를 점령한 부족들이 그 동물에게 독특한 이름을 지어주었고, 미국 영어(American English:British English)로 채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종종 모스 가죽을 말린 고기로 만든 일종의 비상 식품으로 원래 북미 인디언들이 만들었던 페미컨(pemmican)의 재료로 사용했는데, 페미컨은 겨울이나 장거리 여행에서 생계 수단으로 사용되는 건조된 육포의 일종이며 다 아다시피 옛 훈족(The Huns) 추장 아틸라(Attila:375-476)가 부족들과 함께 바싹 마른 육포를 씹으며 말위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과 몽고군이 원정시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식품이 바로 육포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동부 부족들은 또한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원래 북미 원주민들이 신던 납작한 신 형태의 모카신(moccasins:과 다른 물품들의 공급원으로 무스 가죽을 소중히 여겼다고 알려진다.이 '모카신'의 발음 역시 우리나라 말 발에 신는 '신'과 같다.그러니 근원적으로 무스의 역사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 아종(subspecies)의 역사적 범위는 퀘벡(Quebec), 마리 타임스(Maritimes), 동부 온타리오(Eastern Ontario)남부로 확장되어 뉴 잉글랜드(New England)는 서쪽의 펜실베니아(Pennsylvania)북동쪽 끝에 마침내 끝나고 남쪽의 허드슨 강(Hudson River)입구 근처의 어딘가에서 차단되었다는 사실과 무스(moose)는 북아메리카대륙 식민지시대의 서식지의 과도한 사냥과 파괴로 인해 미국 동부의 많은 지역에서 150년 동안 멸종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17세기 더치(Dutch), 프랑스(French), 영국(British)식민지에 서식개체는 메인(Maine)남쪽으로 현재의 맨해튼(Manhattan)에서 100마일 이내에 있는 지역에서 17 세기 중반까지 무스가 존재했음을 증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0 년대에 이르러서는 아주 먼 숲 속에서 이 지역 전체에 소수의 무스(moose)만 존재했고 적절한 서식지의 20% 미만 만이 남았다고 알려진다.무스(moose)는 1878년과 1904년에 극북동 뉴펀들랜드(Newfoundland)에서 번성했고 그 곳에서 무스(moose)는 현재 가장 지배적인 유제류(소·말처럼 발굽이 있는 동물)가 되었으며 세인트 로렌스만(Gulf of Saint Lawrence)의 안티코스티 섬(Anticosti Island)에서는 침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5.끝으로 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에 어떤 종류의 무스가 서식했는지를 살펴보자.북아메리카대륙 무스(moose)는 크게 5종(種)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유라시아 코카서스 산맥 서식지 감소와 과도한 사냥으로 인해 멸종되었다고 알려지는 코카서스 무스(Caucasian moose:Alces alces caucasicus)가 있다.둘째, 상당히 작은 체형의 아종으로, 암컷은 평균 270kg(595lb)이고, 수컷은 365kg(805lb)이고, 황소(Bull)는 어깨에서 약 2m(6.6ft)까지 길이라고 하며 동부 온타리오, 퀘벡 전 지역, 대서양 지역을 포함한 미국 동부 캐나다 메인, 뉴햄프셔, 버몬트,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뉴욕 북부를 포함한 미국 북동부 지역에 개체수가 존재하는 동부 무스(Eastern moose, Alces alces americana)이다.세째, 브리티시 콜럼비아(British Columbia)에서 서부 온타리오(Wester Ontario), 동부 유콘, 북서부 지역, 남서쪽 누나부트, 미시건(상위 반도), 북부 위스콘신, 미네소타 북부 및 노스 다코타 북동쪽에 서식하고 암컷의 경우 평균 340~420kg(750-926lb)이고 수컷의 경우 450~500kg(992~1,102lb)인 중간규모인 웨스턴 무스(Western moose:Alces alces andersoni)가 있다.네째, 백두산이 존재할 것 같은 알래스카와 서부 유콘 준주(Yukon), 북미에서 가장 큰 아종인 알래스카 무스(Alaska moose:Alces alces gigas)가 있었으며, 다섯째, 콜로라도, 아이다호, 몬타나, 오레곤, 유타 워싱턴, 와이오밍, 북미에서 가장 작은 약 230-344 kg(507-758 lb) 아종(亞種)인 시라스 무스(Shiras moose:Alces alces shirasi)가 그것이다.위 다섯가지 종 중에 가장 무스가 크다고 하는 알래스카와 서부 유콘 준주(Yukon)에는 북미에서 가장 큰 아종인 알래스카 무스(Alaska moose:Alces alces gigas)가 있다 하였다.그곳에 북아메리카대륙 로키산맥에 있어야 할 지명, 머리산, 즉 백두라고 할 수 있는 매킨리 산(Mount McKinley:6,144 m)을 중심으로 무스가 잘자라는 환경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곳의 무스는 바로 해동역사(海東繹史:1823) 가 말하는 “포(麅)"라 할 수 있다.이 한 문장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자료와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알래스카무스는 포(麅)다.아마도 이를 '백두산사슴'이라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게 한다.왜냐하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백두산을 멕켄리로 보았다는 사실과 그 주위인 알래스카라 할 때 그곳에서 서식하는 무스는 포라 하면서 별칭으로 백두산사슴이라고 했을 가능성도 높다.결국 유럽엘크(Moose or Eurasian elk)라 하는 것도 무스을 기준으로 작은 것은 엘크 큰 것은 무스라고 보았다는 설명이다.북아메리카대륙 종(種) 보다 작은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상 유럽대륙에도 이러한 무스 또는 엘크가 서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이 남기고 싶어하는 생물학분류체계는 완성될 수 있는 문제가 있다.이것만으로도 유럽대륙사가 얼마나 허구인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다.유럽역사는 캐나다를 중심으로 대조선이 차지하지 못하고 있던 지역 옛 여진족(女眞國), 살마아한(撒馬兒罕), 몽골지역 돌궐국(突厥國)이 존재하던 땅에서 기생한 세력으로써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지역과 미국 중북부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믿어 볼 수 있다.우리가 대비달자(大鼻獺子), 악라사(鄂羅斯)라고 하는 종족을 타타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타타르 속에는 현재 러시아 및 독일 즉 옛 게르만민족과 노드릭민족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 " 에서 발트해(Baltic Sea)가 허드슨만(Hudson Bay)이라 하였듯이 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발트3국)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그리고 노르딕 3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이 여기 포함되어 한다.스칸디나비아(Scandinavia)의 노르딕국가(Nordic countries)라 함은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Galicia–Volhynia), 체르니고프 공국(Chernigov), 블라디미르수즈달공국 (Vladimir-Suzdal), 모스크바 대공국(Grand Duchy of Moscow:1283-1547), 루스 차르국(Tsardom of Russia:1547-1721)까지로 16-18세기 동안 존속하였고 발트3국, 노르딕3국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이렇게 하면 북유럽국가는 거의 정리된다.본 블로그 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4" 에서 1차세계대전은 유럽전쟁이라하지만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의 노르딕국가(Nordic countries)세력과 기존 영국계가 충돌했다는 것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하였으며 위치적으로 따진다면 동 프로이센과 영국계가 충돌한 것일 수 있는데 놀랍게도 역사위치는 북아메리카대륙의 중북부와 북동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했다.발트 독일인이라하고 러시아의 동물학자이자 탐험가라는 인물들이 북아메리카대륙 미주리강 중심에서 중북부지역을 탐험하였다는 사실들은 독일인과 러시아가 마구 뒤섞여 나타남을 알 수가 있다.이것은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풀어 본 결과이기도 하다.사실상 독일이라고 하는 명칭은 근세기에 나타난 것이며 제국주의 독일은 미국인들과 상관되어 별도 형태로 출현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물론 이 독일계들은 미국자본을 끌어들여 제국화했다는 근원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미국 거대자본주들에 의해 독일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나치당의 히틀러와 파시즘의 무솔리니가 등장하였던 것이라고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미국과 정 반대되는 로선을 택했고 그것의 이념을 독일은"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이탈리아는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정치화하면서 대중 앞에 등장하였고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거대자본주의 기업독점적 횡포를 막았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최종 마무리하면 이 엘크 즉 무스를 파악함에 있어 모두가 북아메리카대륙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유럽역사가 어딜 근거로 하는 것인가도 알았다.물론 본 블로그에서 그동안 수많은 생물들을 탐구한 결과가 이렇듯 마구 꼬일대로 꼬여 풀기조차 어려울 것 같은 근원적인 문제를 좀 더 손 쉽게 풀 수 있었다고 판단되는 것도 고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즉 이러한 생물들을 바탕으로 힘들고 어렵지만 인내하면서 자연 과학적인 이치로 탐구해야만 한다는 것은 근세기 역사 혼란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이렇게 접근하지 않으면 진실 역사를 우리가 근원적으로 알 수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바스크(Vasco)귀족 가문 출신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Sanctus Ignatius de Loyola,1491-1556)가 만든 예수회가 주도한 유럽역사 만들기가 시작되면서 꼬일대로 꼬인 역사가 매우 치밀했다는 사실도 새삼알게 하는 것이다.사실상 해양세력이었던 앨비언(Albion)들이 버지니아(Virginia)를 점령하고 근세기에 선진문화종족으로 행세하면서 그곳에 그들의 거처를 마련하면서부터 북아메리카대륙의 혼란을 시작되었고 이들 세력이 급기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으로 잉글랜드화하면서 부터 역사는 서양세력에 의해 모든 것이 한자의 오차도 없이 그들의 목적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물론 2차세계대전의 승자가 미국이 중심이 된 연합세력이 아니라 나치 독일 히틀러가 장악했다 하더라도 우월주의의 서양중심적인 역사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란 짐작이 간다.하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민족의 자존을 이처럼 상하게 하는 역사가 아닐 것이란 바램도 없지 않다.인류가 가진 세계역사의 근원적인 문제까지 그들이 부정할 수 없었다고 볼 때 지금보다는 훨씬 더 정확한 역사와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현재 독일인들이 우리의 역사를 깊이 알턱도 없고 우리의 역사를 그들에 의해 보존할 수 있다는 기대역시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세계삼한을 통치한 코리아역사와 대조선의 역사는 우리 근원에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란 판단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너무나도 역사찾기가 힘들고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가 받아야 하는 참담한 모욕감과 절망감은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다 지나간 이야기라 하겠고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 하겠지만 우리는 옛 역사의 오점을 바로잡아 이제는 역사트라우마에 의한 피해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이미 우리의 역사는 세계유일무일의 역사인 것은 틀림없다.언제까지나 하릴없이 바로천치같고, 무지리같은 열도일본정치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역사에 매달려 보상, 사과타령이나 하고 허망함과 절망감을 달래야 하는지 이러한 자학적인 행태는 도저히 세계삼한역사자존으로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현재 열도 일본인들은 그들의 역사자체를 알지못하는 무지랭이들이다.그들을 붙잡고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비굴감 말고는 얻을 것이 없다.후손들에게는 이제 비굴감말고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역사사실을 물려 주고 우리 기성세대가 깨끗이 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그리고 우리세대가 못하면 다음세대라도 많은 인재들이 진실된 역사를 바로알아 그들로 하여금 북아메리카대륙을 샅샅이 디져 가며 우리가 모르던 역사를 하나하나 꿰 맞추고 정립해야 할 그날을 위해 스스로 자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더불어 우리 다 같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동월의 조선부(朝鮮賦)" rel="tag" target="_blank">동월의 조선부(朝鮮賦)</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엘크(elk 북미에서는 moose라고 함)" rel="tag" target="_blank">엘크(elk 북미에서는 moose라고 함)</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와피티 wapiti" rel="tag" target="_blank">와피티 wapiti</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사슴과(鹿科:Cervidae)" rel="tag" target="_blank">사슴과(鹿科:Cervidae)</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유럽붉은사슴 Cervus elaphus elaphus - Eu" rel="tag" target="_blank">유럽붉은사슴 Cervus elaphus elaphus - Eu</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알래스카 무스(Alaska moose:Alces alces g" rel="tag" target="_blank">알래스카 무스(Alaska moose:Alces alces g</a>,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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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내(axillary odor)
********************암내(axillary odor) 글쓴이:한부울 겨드랑이에서 나는 노린내를 암내라 하고 이를 호취(狐臭) 또는 액취(腋臭)라고도 하며 그 외 호취(胡臭), 아취(鵝臭)라고도 했다. 연산군(燕山君)12년 병인(1506)3월 26일(병오) 취홍원의 흥청악인 완화아가 액취가 있어 운평에 내려 두게 하다 ○傳曰: "(字)聚紅院興淸樂院花兒有腋(狊)〔臭〕 , 降置運平。"전교하기를,“취홍원의 흥청악인 완화아(浣花兒)는 액취(腋臭)가 있으니, 내려서 운평에 두라.”하였다. 뇌영원(蕾英院)전국에서 선발된 기녀(妓女)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서 임시로 거쳐하던 곳연방원(聯芳院)궁중의 음악과 무용을 맡아보던 관청취홍원(聚紅院)선발된 귀녀들이 교육을 받으며 거쳐하던 곳 위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조(朝)에 보면 궁중에서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을 연방원(聯芳院)이라 하고 전국에서 선발된 기녀(妓女)들을 연방원의 가흥청과 운평 등에서 부(符) 즉 증표(證票)에 나이와 입원한 연월, 사는 고장, 신체의 장단, 용모의 살찌고 마른 것을 새겨 차고 출입하게 하였으며 운평에서 분류되면 제2등급 가흥청(假興淸)에 오르고, 가흥청에서 임시 처소 뇌영원(蕾英院)에 오르고, 뇌영원에서 여악(女樂) 흥청악(興淸樂)이 거처하던 취홍원(聚紅院)으로 오르는 것으로 등급을 삼았다. 연산군 시대때 처용무(處容舞)를 비롯한 가무(歌舞)에 능한 악공(樂工)과 기녀(妓女)들로 구성되었던 3악(三樂)을 두었는데 그것이 흥청악(興淸樂)·운평악(運平樂)·광희악(廣熙樂)이다. 또 이런 기록도 있다.취홍원, 뇌영원(蕾英院), 함방원(含芳院), 진향원(趁香院)등 각처에 자색(姿色)이 곱지 못하고 의상이 남루한 자를 가려내어 연방원(聯芳院)에 따로 두고, ‘집람원(集藍院)’이라 부르도록 하여 아름다운 모습과 얼굴빛 자색(姿色)을 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연산군과 동침한 여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고 하고 동침하지 않은 여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고 하고 동침을 했는데도 연산군이 흡족하지 못하면 반과흥청(半科興淸)이라고 연산군이 직접 분류하여 이름을 짖고 그들을 삼청(三淸)이라 차별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취홍원(聚紅院)의 의전삭료(衣纏朔料)를 전비(典備)로 하여금 맡게 하되, 달마다 천과흥청(天科興淸)에게는 정포(正布) 3필, 백저포(白紵布)1필, 주(紬)1필을, 지과흥청(地科興淸)에게는 정포 2필, 백저포 반 필, 백면포 반 필을 그 인수(人數)에 따라 과(科)를 분간하여 제급(題給)하라.”한 기록도 있는 것을 볼 때 연산군이 직접 전교하길 “취홍원의 흥청악인 완화아(浣花兒)는 액취(腋臭)가 있으니, 내려서 운평에 두라” 한 것은 흥청여악 완화아(浣花兒)가 암내가 심히 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암내에 대한 궁중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조선 중기의 의관(醫官)이며 명종(明宗)의 어의(御醫)였던 양예수(楊禮壽:?∼1597)가 편찬한 역대 의학자들의 전기(傳記)인 의림촬요(醫林撮要)에는 특이하게 암내 치료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의림촬요(醫林撮要) 제10권 액기문 111 부록:칠공취〔腋氣門 百十一 附七孔臭〕 [병론〔論〕] 액기(腋氣)는 일명 호취(胡臭), 일명 아취(鵝臭), 일명 액취(腋臭)라고 한다. 겨드랑이 아래 진한 땀이 흐른 것을 깨끗이 씻어내 주지 못하면 오래 지나 이 병이 된다. 그 외에 저절로 액취가 생기기도 한다. 치료법은 좋은 녹반(綠礬)을 반은 날 것을 반은 달군 것을 써서 가루 내고, 다시 경분(輕粉)을 조금 넣어 곱게 가루 낸 다음 매번 반돈씩 목욕 후 생강즙(生薑汁)에 개어 문질러 주는데 충분이 열이 나고 아플 정도로 해주면 액취가 멎는다. 혹은 생강즙으로만 문질러도 된다. 마늘즙도 좋다.○다른 처방. 독한 식초를 한 가지 위의 방법대로 문질러 준다.○호분(胡粉)을 늘 발라주는데, 사향[麝]을 조금 넣으면 더욱 좋다. 또 다른 처방. 3년 묵은 식초에 석회(石灰)를 개어 붙인다.○또 다른 처방. 복룡간(伏龍肝)ㆍ모향(茅香)을 가루 내어 매일 겨드랑이 아래에 바르면 좋다.○또 다른 처방. 청목향(靑木香)을 독한 식초에 담갔다가 겨드랑이에 낀다. 반석(礬石)을 불에 달구어 겨드랑이에 끼어도 좋다.○또 다른 처방. 우렁이 1개 속에 사향 조금을 넣고 땅에 묻어서 천지의 기운을 쏘이는데, 비는 맞히지 않고 7ㆍ7일(49일)이 지난 다음 꺼낸다. 먼저 환부를 잘 씻고 닦아 말린 뒤 먹으로 문지르고 다시 씻어내면 검은 색이 남아 있는 부위가 있는데, 바로 액취가 나오는 구멍[窺]이다. 이 곳을 앞의 우렁이 즙으로 씻어주는데, 두 번이면 액취가 바로 낫는다.○일곱 구멍에서 나는 냄새를 치료한다. 침향(沈香) 5냥, 고본(藁本)[蒿本]3냥, 백과판(白苽瓣) 반 되, 정향(丁香) 5홉, 감초(甘草)ㆍ당귀(當歸)ㆍ천궁[芎藭]ㆍ사향(麝香) 각 2냥을 꿀[蜜]에 반죽하여 콩알 크기[大豆大]의 환을 만든 다음 식후에 5환씩 복용한다.○겨드랑내가 여우냄새보다 지독한 것을 치료한다. 고백반[白礬枯]ㆍ황단(黃丹) 각 1냥, 청반(靑礬)ㆍ철분(鐵粉)ㆍ웅황(雄黃)ㆍ이분(膩粉) 각 1돈. 위의 약들을 가루 내어 매일 밤 먼저 조각(皂角)달인 물로 씻은 뒤 침으로 약 가루를 개어 붙인다.○또 다른 처방. 고백반[白礬枯]ㆍ경분(輕粉)ㆍ합분(蛤粉)ㆍ밀타승(蜜陀僧)ㆍ사향 같은 양. 위의 약들을 가루 내어 고루 섞고 매번 조금씩 환부에 뿌려준다. 또 다른 처방. 잘 찐 떡 속에 밀타승 가루를 뿌려서 겨드랑이에 끼고 있다가 식으면 버린다.○또 다른 처방. 감수(甘遂) 가루를 돼지고기에 뿌려서 하룻밤 겨드랑이에 끼고 있다가, 다음날 아침 감초탕(甘草湯)을 복용한다. 【이 두 조목은 《기효양방(奇效良方)》〔良方〕에 나온다.】 ○또 다른 처방. 뜨거운 소변으로 늘 겨드랑이를 씻으면 코를 대지 못할 만큼 냄새가 심한 검은 피가 나오는데 바로 구석진 곳에 파묻는다.지주산(蜘蛛散)암내가 풍겨서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을 치료한다.큰 거미 【1개, 황토진흙에 적석지(赤石脂)를 조금 넣고 찧은 다음 소금을 조금 넣고 절구로 짓찧어 오목한 둥지를 만들어 그 속에 거미를 넣어 불에 벌겋게 달군 다음 식으면 쪼갠다.】 위의 한 가지 약을 가루 내어 잠잘 무렵 경분(輕粉) 1자(字)를 넣고 독한 식초에 개어 고약을 만들어 겨드랑이에 붙인 뒤 다음날 아침 화장실 가면 반드시 검은 즙을 설사하는데 그 냄새를 맡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멀리 구석진 곳에 파묻어 사람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효과가 매우 좋다. 【《득효방(得效方)》〔得效〕에 나온다.】 육물산(六物散)누액이 겨드랑이, 손바닥, 발바닥, 음부, 사타구니에 늘 땀처럼 흘러 옷을 젖시는 것을 치료한다.말린 구기자 뿌리〔乾枸杞根〕ㆍ말린 장미뿌리〔乾薔薇根〕ㆍ감초(甘草) 【각 2냥】, 호분(胡粉)ㆍ상륙뿌리〔商陸根〕ㆍ활석(滑石) 【각 1냥】.위의 약들을 가루 내어 식초 조금과 반죽하여 붙이면 땀이 조금 나는데, 옷을 갈아입고 다시 붙인다. 불과 3번 붙이지 않아서 바로 낫는다. 혹 1년이 지나 재발하면 다시 붙인다. 【《득효방(得效方)》〔得效〕에 나온다.】 의방유취(醫方類聚) 권1/ 총론(總論)1○ 《간이방(簡易方)》○腋者, 掖也. 手三陰之脉與足少陽之脉, 循腋上下. 故爲病則腋多腫痛.○액(腋)은 겨드랑이〔掖〕이다. 수삼음경맥(手三陰經脈)과 족소양담경맥(足少陽膽經脈)〔足少陽〕이 겨드랑이 위아래를 순행(循行)한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질병에 걸리면 대부분 겨드랑이가 붓고 아프다.靈樞經曰, 手太陰之脉, 從肺系橫出腋下. 手少陰之脉, 從心系却上肺, 出腋下. 手厥陰之脉, 循胷出脇上, 出腋下. 足少陽之脉, 則從缺盆下腋, 循胷中, 過季脇. 凡此四經, 或橫出腋下, 或循腋上下別行, 各有其道也.《황제내경영추(黃帝內經靈樞)》〔靈樞經〕에서는 말하였다.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手太陰〕의 맥은 폐계(肺系)로부터 겨드랑이 아랫부위로 옆으로 나온다〔橫出〕.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手少陰〕의 맥은 심계(心系)로부터 이어져 폐(肺)로 올라갔다가, 겨드랑이 아랫부위로 나온다.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手厥陰〕의 맥은 가슴〔胸〕을 순행하여 옆구리 위쪽으로 나왔다가, 겨드랑이 아랫부위로 빠져나온다.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足少陽〕의 맥은 결분(缺盆)으로부터 겨드랑이로 내려와서, 가슴속을 순행하다가 옆구리 밑〔季脇〕을 지난다.” 무릇 이 네 가지 경맥이 어떤 것은 겨드랑이 아랫부위에서 옆으로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것은 겨드랑이의 위아래로 순행하다가 나뉘어져 움직이기도 하지만, 각각 자신의 통로는 있다.人有患胡臭漏腋者, 古方共爲一病, 以理攷之, 其證不一.사람이 호취(胡臭 겨드랑이의 암내)와 누액(漏腋 겨드랑이에 땀이 흥건한 병증)을 앓는 경우에 고방(古方)에서는 모두 동일한 질병으로 여겼지만, 이치로 따져보면 그 증상은 똑같지 않다.胡臭者, 多因勞逸汗漬. 以手摸而嗅, 致淸氣道中受此宿穢, 吸上泥丸, 散入百脉, 多相沾染. 忌之爲得.호취(胡臭)는 대부분 과로하거나 나태함으로써 겨드랑이에 땀이 배서 생긴다. 손으로 훔쳐서 냄새를 맡게 되면, 청정한 기운이 흐르는 통로에 이 쾌쾌한 냄새가 스며들게 됨으로써 위로 니환(泥丸)에 흡입되었다가 흩어져서는 모든 맥〔百脉〕에 침입하면서 서로 전염시키는 경우가 많다. 손으로 땀을 훔치는 행위는 안 하는 것이 좋다.漏腋者, 由食啖五辛太過而有所發, 致湊理不密. 其汗則自腋下泄出, 浥又而濕, 汚衣數重皆透. 臭不可近.누액(漏腋)은 섭취한 오신(五辛)이 너무 과도해서 발생하는데, 결국 피부〔湊理〕가 성글게 된다. 그 땀이 겨드랑이 아랫부위로 나오면서 축축하게 젖어서, 여러 겹의 옷을 적시다가 완전히 배어나온다. 그 냄새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夫胡臭漏腋皆腋中之疾, 雖不傷人命, 而害人身. 奉親事君, 乃至交遊, 皆非所宜. 脩身之士務爲淸潔者, 偶得此患, 不可不思有以去之.무릇 호취와 누액은 모두 겨드랑이 질환으로 목숨을 빼앗지는 않지만 몸을 해롭게 한다. 부모님을 모시고 군주를 섬기는 것 내지 친구와 교류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좋지 않다. 몸을 수양하는 사인(士人)〔士〕은 청결에 힘쓰면서, 우연히 이 질환에 걸리는 경우에는 이것을 없앨 궁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 의방유취(醫方類聚)는 세종의 명으로 1437~39년에 북경에 사신과 역관(譯官)이 파견되어 〈내경 內徑〉에서부터 당(唐)·송(宋)·원(元)과 명초(明初)까지의 의서(醫書)들을 폭넓게 수집(蒐集)하여 1442~45년에 집현전의 김예몽(金禮蒙)·유성원(柳誠源)·민보화(閔普和)·김문(金汶)·신석조(辛碩祖)·이예(李芮)·김수온(金守溫) 등과 의사인 전순의(全循義)·김유지(金有知) 등에 의해 365권으로 편찬·완성되었고 그 후 세조의 명으로 성종(成宗,재위:1469-1494)대에 이르기까지(1465~77) 양성지(梁誠之)의 주관 아래 유신(儒臣)과 의관(醫官)이 함께 교정해 도합 266권으로 간행된 왕실의서(王室醫書)이다.그러니 본래 원본(原本)을 찾을 수가 있다면 당시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여러 의술을 뛰어넘는 귀중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한다.그러나 현존하는 의방유취(醫方類聚)는 국내본이 아닌 일본판(日本版)이라고 하는데, 이미 이것은 동양일본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다른 문화재와 함께 약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다른 보관본은 불에 타 없어졌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이를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풀어보면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수많은 조선(朝鮮)의 귀중한 의서(醫書)들이 강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한반도 역사에서는 오직 도자기 도공(陶工)들만 혈안이 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문화적 가치는 이렇게 강탈당한 의서(醫書)에 기록된 선진 의술(先進醫術)이었을 것이 분명해진다.자료에 의하면 의방유취(醫方類聚)는 허준(許浚:1546-1615)이 동의보감(東醫寶鑑,1610)을 집필하는데 가장 중요한 참고서가 되었다고 하며 5만종(萬種) 이상의 처방이 수록된 이 방대한 의학 자료가 없었다면 동의보감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또한 이 의서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려이전의 의서(高麗醫書) 중 고려시대 태의(太醫)들이 사용한 궁중 비방서 어의촬요(御醫撮要)의 많은 내용을 기록해 두고 있다 하며 특히 이 의서(醫書)에는 중국(中國)에서도 이미 없어진 고서 원문(古書原文)그대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원서를 수집하거나 복원하는데 주요하게 이용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이 밖에도 이 의서(醫書)에는 국내는 물론 동양의학계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처방서인 작자미상인 비예백요방(備豫百要方)도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해부학에서 동양의술에는 해부학적 개념이 없다고 서양인들이 말하고 있지만 이 의서는 해부학을 전공하지 않고서는 기록할 수 없는 지식들도 넘쳐난다고 말하고 있다.이를 전적으로 서양사에 의한다 하더라도 1346년~1353년 사이에 흑사병(黑死病:Black Death)이 절정에 달해 전체인구의 60%인 최소 7천5백만명(75–200 million)의 사상자가 발행하여 경제적 침체를 더욱 가공스럽게 하고 세기말적인 것으로 만든 대재난을 겪게 되고 난 후 서양인들에게 이 무시무시한 질병에 대한 공포심은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일본 즉 서양해양세력들이 운집한 지역인 멕시코에서 살모넬라 대장균(Salmonella enterica:腸道沙門氏菌)이란 대유행성전염병이 발생하여 1545년~1548년 사이에 약 5백만에서 천5백만 명(인구 80%)의 사상자와 1576년에 2백만–2백50만(인구의 50%)의 사상자가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발생하는 시점에서 해양세력들에게 이러한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Oddly enough, from 1538 through 1544 medical classes were taught at the Santa Cruz monastery, where medical teaching had medieval traditions, as noted earlier (Rodrigues, 2005).당시 서양의 의학수준은 동양의학수준에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된 것이 아닌가 한다.포르투갈이란 국가의 주체가 왕이었는지 아니면 예수회였는지 서양사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어쨌던 1538년부터 1544년까지 의학 교습이 중세 전통이 있는 산타크루즈 수도원(Santa Cruz Monastery)에서 교육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의술이 서양인들 스스로 뛰어났다고 말하고 있지만 종교가 낳은 의술을 전통적인 동양의술에 비할바가 아니며 스스로 종교가 가진 한계 이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포르투갈은 8세기 이슬람(무어:新羅)의 지배를 받았을 때 그들에게 선진 의술(先進醫術)이 전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이 근대 서양의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하며 포르투갈 의학사가 또한 서양의학으로 인해 동양으로 전파된 경로를 파악할 때 특히 각별한 역사적 의미를 그들이 갖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서양식 알메이다 병원(Almeida Memorial Hospital)을 일본규슈 오이타현(大分縣)에 1557년 바로 포르투갈인 예수회선교사이며 무역상인인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이 세운 것인데 이것은 초보단계에 수준이 아니었겠는가 한다. 역사꿰맞추기를 잘하는 능력이 타고 난 것이니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의욕을 가지고 병원을 세웠지만 이것은 그들이 부족한 조선의 선진의술이 필요했다는 것도 동시에 알 수 있는 것이다.지금은 그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서양의술이 지배하는 것이지만 그 근원은 그들에 의한 것이라고 어떻게 단정을 할 수 있겠는가.그렇지 않으면 임진왜란 시 조선의 전통적인 의서를 강탈해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특히 서양 최초의 근대 의학박물관은 18세기 후반에 설립된 해부학(解剖學:anatomy) 박물관으로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조선의서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물론 이러한 선진의술 강탈은 포르투갈만 해택을 받았다고 할 수 없고 서양국가들 전부가 이에 동참하거나 그 결실을 가졌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다시 돌아가 위 조선왕조실록 연산(燕山)왕조 때 상황을 보면 조선시대에서 백성들 일부라고 하겠지만 암내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Pharmacogenetics of human ABC transporter ABCC11: ABCC11 유전자(ABC 수송체 유전자)의 약물 유전학new insights into apocrine gland growth and metabolite secretion아포크린샘(離出分泌腺:apocrine gland)의 성장과 대사물 분비에 대한 새로운 통찰Author(s) Ishikawa, Toshihisa; Toyoda, Yu; Yoshiura, Koh-ichiro; Niikawa, Norio작가 이시카와 토시히사, 토요다, 유, 요시우라, 고이치로, 니이카와, 노리오 그러나 우리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들여다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적어도 조선시대에 백성들은 오늘날 한반도인들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 논문을 전부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중요한 핵심사항만을 발췌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진다.즉 겨드랑이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는 한자로 표현하자면 겨드랑이 액(腋)자를 써서 액취(腋臭)라고 하고 겨드랑이, 사타구니를 비롯하여 여성의 경우 유두 등엔 통상의 땀샘인 에크린 샘(eccrine gland) 외에 아포크린샘(apocrine gland)이라 불리는 특수한 땀샘이 분포하여 이 땀샘에서는 지방산이 함유된 땀이 분비되고 배출 초기엔 여느 땀 냄새에 가까우나 성분인 지방산이 유기물질인지라 곧 균에 의한 분해가 발생하며 특유의 악취가 풍겨나게 되는데 거의 썩은 냄새를 발산하는데 비슷한 냄새를 표현하면 우유에 식초를 섞어 며칠간 상온에 방치했을 때 냄새 또는 음식 쓰레기가 부패하는 냄새와도 유사하게 나타난다.특이하게 인종적으로는 백인의 암내보다 더 독한 축에 들어가는 암내는 인도인과 아랍인이라는 사실이다.황인종보다 백인, 흑인이 심하다는 것이 정설이다.또한 여자 쪽이 남자보다 몸에 아포크린샘(apocrine gland)도 많이 분포해 있어 더 심하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남성의 약 175%가량이라 한다.이러한 냄새를 해결하기 위해 데오드란트(deodorant)를 사용하는데 서구 국가들의 데오드란트 사용비율은 동양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특이하게도 데오드란트(deodorant)를 쓸 필요가 없도록 한국인들의 몸에서는 암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논문으로 밝혀져 있다. 위 일본인들의 연구논문에서 아래도표를 보자.Table 2 | Frequencies of ABCC11 genotypes and allele c.538A among different ethnic groupsFIGURE 2. Schematic illustration of ABCC11 protein structure and hitherto known non-synonymous SNPs. ABCC11 has a total of 12 transmembrane (TM) regions and two intracellular ATP-binding cassettes. Asn838 and Asn844 residing in an extracellular loop between transmembrane helices TM7 and TM8 are N-linked glycosylation sites in the ABCC11 WT protein. Locations of hitherto reported non-synonymous SNPs and ∆27 (a rare deletion mutation) are indicated in the putative structure of ABCC11. G180R and ∆27 are related to the formation of dry-type earwax.[www.frontiersin.org] TABLE 2암내 유전자겨드랑이에서 나는 냄새는 귀지와도 관련이 있는데, 귀지가 젖어 있을수록 이 냄새를 다루는 아포크린샘이 활성화되어 있는 사람이다. 젖은 귀지는 대립형질 538G가, 마른 귀지는 대립형질 538A가 관여하는데 인종별로 두 유전자의 분포가 매우 다르다. 한 논문에 따르면 한국인(대구광역시 주민)의 538A의 발현은 무려 100%로 모든 국가 중에서 제일 높다.테이블2/의 표는 서로 다른 민족 집단들 사이에서 ABCC11 유전자형과 대립형질c.538A의 빈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Ethnic groups/Tribes or inhabitants/No of individuals with genotypes/Number of individuals genotyped/Frequency of allele "A".민족집단별/종족 또는 거주지역별/유전자형을 가진 개체[AA(frequency), GA, GG]/유전자형개체수량/대립형질"A" 발생빈도율을 나타낸 통계수치이다.여기서 각 민족집단이나 거주지를 중심으로 대립형질"A" 발생빈도율이 크다는 것은 바로 에크린 샘(eccrine gland)이나 아포크린샘(apocrine gland)이 그 만큼 지방산이 유기물질에서 균에 의한 분해가 적다는 의미이다.때문에 암내가 그만큼 발생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민족별로 보면 제일 적게 나타나는 민족그룹이 한국인이며 그 뒤로는 아시아인으로 중국인, 몽골인, 일본인, 베트남인, 태국인, 인도네시아인, 말레이지아인, 대만인이며 바로 그 뒤가 아메리카원주민이인데 빈도율이 50:50 딱 중앙이다.그렇더라도 한국인에 비해 상당히 높은 암내를 발생시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제일 심한 민족분류는 흑인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그다음이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 미국인, 이베리아인, 베네주엘라인, 유럽계미국인, 우크라이나인, 아쉬케나지 유대인, 헝가리인, 안데스민족, 프랑스인, 러시아인으로 암내가 약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Earwax type/Genotype at ABCC11 538G>A/Axillary osmidrosis patients귀지 타입/유전자형ABCC11 538G>A/겨드랑이 액과 취한증 환자를 알 수 있는 도표인데 보다시피 귀지가 건조일 때 대체로 암내가 거의 발생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젖은 귀지는 암내를 발생시키는 538G 타입이 크고 겨드랑이 액과 취한증의 환자가 많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FIGURE 3. The allele frequencies of the wild-type (WT; Gly180) and 538G > A (Arg180) variant of human ABCC11 among different ethnic populations (A) and inter-continental migration of Homo sapiens (B). Data are from Yoshiura et al. (2006) and Toyoda et al. (2008).[www.frontiersin.org] "G형 대립유전자(Allele G)"가 많을수록 몸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한다.그림에서 "G 타입"은 냄새를 유발하는 것이고 "A 타입"은 냄새가 적은 대립형질(allege)이다. 유전자의 분포는 아프리카 인종과 유럽 인종에서 특유의 체취가 많이 나는 주요 근거가 되며 반면, 한국, 일본, 중국, 몽골 등 동아시아인들은 상대적으로 냄새가 덜 난다는 것을 위 도표가 말해주고 있다. 위 도표를 종합적으로 정리를 하면 암내가 많이 나는 민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그 다음은 아프리카인, 라틴아메리카인, 서유럽인, 태평양의 섬 주민, 동유럽인,카자흐족, 아메리카원주민 그다음이 일본인, 동남아시아인, 몽골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이 가장 적게 암내가 난다고 도표는 말하고 있다.이러한 인종적 차이 때문인지 동아시아에서는 암내를 특수 질환으로 여기지 않고 그냥 나이 먹으면 다들 나는 냄새라 여기고 그다지 암내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서양인들에게 이것은 매우 거북스러운 것이어서 그중에서도 더욱 심한 암내를 발산하는 사람들은 가히 공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는 사회적 차별성이 아닐 수 없다.특히 서양 여성들은 이 암내를 감추기 위해 여러모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데오드란트(deodorant)에 대한 사회적 비용도 무시못하는 것임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의림촬요(醫林撮要), 의방유취(醫方類聚)에서 보면 유난히 액기(腋氣) 즉 호취(胡臭), 또는 아취(鵝臭), 액취(腋臭)라고 하는 겨드랑이 땀 냄새에 대해 그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을 광범위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백성들이 한반도인처럼 근원적으로 암내가 많이 나지 않다면 이렇게 기록이 구체적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즉 한반도인인 한국인만이 아닐 것이란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다.암내는 다른 명칭으로 호취(胡臭)라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그런데 호(胡)가 주는 의미가 크다.본 블로그 글 "호(胡)는 북아메리카 대호(大湖)를 지칭한 것? http://blog.daum.net/han0114/17050603"에서 호는 우리가 서양인으로 알고 있는 한자 호인(胡人)도 푸른 눈동자(靑眼), 벽안(碧眼)을 가졌다고 알려지고 북호(北胡)는 흉노(匈奴)를 말하는 것이며 서호(西胡)는 서역(西域)사람을 지칭하면서도 그냥 호(胡)라고도 하였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호(胡)가 붙으면 서역(西域)과 연결되고 또한 천축국(天竺國)과 연결되며 인도(印度)와 연결된다.또는 동사강목에서나 한서에서 옛 진번(眞番) 조선호국(朝鮮胡國)이라하였으며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조선의 왕을 호왕(胡王)이라고 했다는 사실과 고구려를 구려호(句麗胡)라 했다는 사실 등이 있고 본 블로그에서 살펴본 결과 호(胡)는고려(高麗)을 상징하였다고 여겨진다.때문에 조선 왕실에는 상당히 많은 인도인, 서양인들이 존재했을 것이란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이 두 의서(醫書)가 왕실 중심으로 기록된 자료라는 점에서 궁중에 거처한 사람들의 인종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며 다인종이 조선왕실 궁중에 거처했다면 상식적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암내를 발산하는 질병에 노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더하여 일반 조선(朝鮮)백성들도 다 인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라면 기녀들을 선출할 때 심한 암내를 풍기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어 조선왕조실록 연산군(燕山君)12년 병인(1506)3월 26일 기사에서 취홍원(聚紅院) 여악 완화아(浣花兒)가 암내, 액취(腋臭)가 심하여 운평에 두라 한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여하튼 암내때문에 왕이 직접 이 기녀를 소위 하급기관으로 좌천시켰다는 것은 상당히 진기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역사 기록이라 할지라도 한 개인입장에서는 매우 애석한 이야기겠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들여다 볼 때 당시 조선시대때 왕실이나 사회구성원들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한국인 뿐만아니라 암내가 많이 나는 다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프리카인, 라틴아메리카인, 서유럽인들이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결론내린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암내" rel="tag" target="_blank">암내</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귀지 Earwax type" rel="tag" target="_blank">귀지 Earwax type</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ABCC11" rel="tag" target="_blank">ABCC11</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538G" rel="tag" target="_blank">538G</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대립형질 538A" rel="tag" target="_blank">대립형질 538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겨드랑이 액취와 취한증 환자" rel="tag" target="_blank">겨드랑이 액취와 취한증 환자</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의방유취(醫方類聚)" rel="tag" target="_blank">의방유취(醫方類聚)</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의림촬요(醫林撮要)" rel="tag" target="_blank">의림촬요(醫林撮要)</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흥청악(興淸樂)" rel="tag" target="_blank">흥청악(興淸樂)</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광희악(廣熙樂)" rel="tag" target="_blank">광희악(廣熙樂)</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뇌영원(蕾英院)" rel="tag" target="_blank">뇌영원(蕾英院)</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연방원(聯芳院)" rel="tag" target="_blank">연방원(聯芳院)</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취홍원(聚紅院)" rel="tag" target="_blank">취홍원(聚紅院)</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포크린샘(離出分泌腺:apocrine gland)" rel="tag" target="_blank">아포크린샘(離出分泌腺:apocrine gland)</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에크린 샘(eccrine gland)" rel="tag" target="_blank">에크린 샘(eccrine gland)</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데오드란트(deodorant)" rel="tag" target="_blank">데오드란트(deodora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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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니즘(Japonism)의 해괴한 변신
*****************자포니즘(Japonism)의 해괴한 변신 글쓴이:한부울1)서론2)자포니즘(Japonism)이란 무엇인가.3)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자포니즘 화가4)자포니즘과 양키일본5)미농화지(美濃和紙:Mino washi) 6)고려종이(高麗紙) 닥나무(Broussonetia)근원7)포르투갈,더치와 왜 양이(洋夷)8)마무리 1)서론 자포니즘(Japonism)은 상업주의 요소가 가장 큰 것으로 안세이불평등조약(安政五カ国条約,Ansei Five-Power Treaties:1858)주도국인 미국(양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의 당시 서양우월주의를 위한 상품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그러니 열도동양일본인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님을 단정지울 수 있다.서양인들이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우월주의를 내세우기위한 방편이기도 했다.미국의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1935-2003)의 1978년 저서[오리엔탈리즘]에서 주장하길"서양인들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사고양식"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서양인 스스로가 동양인과 구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성된 동양오리엔탈리즘이란 사상은 어찌 보면 그에 대한 무한의 열등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세계사 전체를 아우러보면 절대로 동서양이 분리될 수 없었던 역사문화인 것이 틀림없다.왜냐하면 같은 동일한 문화를 추구했다는 역사본질에서 한쪽으로 쏠리면 한쪽은 너무 빈약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기어코 분리시킨 것을 보면 다분히 해양세력이었던 서양역사문화의 열등의식이 저변에 깊게 깔려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물론 그러한 상태를 그들이 애써 감추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알 수가 없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제로게임과 같기 때문에 충분하게 유추가 가능하다.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유럽대륙역사를 온전히 장악했던 것도 아니고 비주류로써 대서양 주변도서를 배회했을뿐 마땅한 거처도 없이 헤매이는 해양시대를 갈구했던 이력 말고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종족들이다.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실은 맞다.기존 주체세력들이 이들을 제거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의 고정된 거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그들이 아프리카남단을 거쳐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정복하고 인도네시아전체를 식민지하는 등의 사실들은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것일뿐 어느하나 검증되거나 실증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때문에 현재 세계사는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그들은 15세기때도 그렇듯 전세계 해양을 계획적으로 누빌 수 없는 항해기술은 초보적인 단계였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콜롬버스 착각지도 등이 그것을 증명하는 수준이었다.서인도인지 동인도인지도 알 수 없는 한마디로 머저리였다는 것이다.그들이 준동하기 전 아랍 즉 무슬림세력이 유럽대륙전체를 차지하고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고 그 동쪽편 전체가 18세기까지 대타타르(Great Tartary)가 지배한 유라시아대륙이다.본 블로그 글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최소 1799년까지 푸른 눈, 검은 얼굴의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악라사(鄂羅斯)가 그 지역을 전부 점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확인했는데 "지역이 매우 커서 동서가 3만여 리, 남북이 2만여 리가 된다. 동남쪽에는 유구와 안남(安南)이 접해 있고, 동북쪽에는 몽고가 접해 있고, 서남쪽에는 크고 작은 서양(西洋)이 접해 있다"한 것이다.즉 남쪽에 접해 있어야 할 거대한 인도(印度)는 아예 존재자체가 없었고 유럽대륙에는 작은 서양(小西洋)이 접해있다고만 했는데 이 소서양(小西洋)도 인도양 뿐만아니라 지중해도 포함시켜 이야기 한 사실을 전제할 때 유럽대륙에 서양세력이 있을 만한 공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때문에 명확하지 않지만 무슬림으로 구분되는 남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서아시아의 회교권의 아랍계나 베르베르족의 후손인 무어족(Moors)과 투르크족(Turks)의 상황 묘사가 중세적인(Medieval), 르네상스(Renaissance), 바로크 예술(Baroque art)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예단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생각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이것들은 19세기말엽에 그들이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뒤바꾸려는 욕심이 생겼고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공격성향의 예수회가 주도하여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유럽인 주도의 중세문화를 생성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역사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어쨌던 이를 비켜나가야 할 새로운 궁리가 그들에게 필요했다.본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의미는 진보된 순수한 동방(東方)문화라는 틀에서 시작된 어원인데 해가뜨는 곳, 북아메리카대륙을 말한 것이며 그곳을 또한 아시아라 한 것이 틀림없다.본 블로그 글 "아세아(亞細亞:ASIA)란 무엇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6"에서 asia, It is of Greek origin, where it means 'sunrise'. It is also of Assyrian origin (a form of 'asu') and it means 'east'. 실제로 아시아(asia)의 영어의 본뜻은 그리스말로 “sunrise” ‘태양이 뜨다’, ‘일출’, ‘해돋이’라 하였고 아시리아어(Assyrian)로는 'east' 동쪽, ‘동방’을 뜻하는 단어로 나타나고 있으며 일본어로 아사(asa:あさ:明日:朝)도 ‘아침’이라는 의미이다.그리고 오리엔트(Orient)역시 라틴어의 오리엔스(Oriens)에서 기원했으며, ‘해돋이’ ‘해가 뜨는 방향’이란 뜻이다.때문에 인도 시성(詩聖)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는 그의 시(詩)에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라고 읊었던 것인데 이것을 현재 조작되어 굳어진 유라시아대륙을 말하고 있다.얼마나 굴곡진 이야긴가.아시아는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하고 그곳에 코리아가 존재했어야 한다는 말이다.그러나 19세기 식민지제국들에 의해 오리엔탈이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동양편견주의, 그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조작된 허구가 이를 부추겨 지금의 아시아대륙으로 옮겨지면서 본의가 크게 훼손된 것이다.이를 엄밀하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자면 세계삼한역사를 공중에 부양하게 만들고 그 부양한 자리에 서양인들이 창작한 유럽사를 안전하게 안착시켰다고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서양인들은 그러한 왜곡을 멈추지 않았고 유럽대륙을 차지하고 난 후 오리엔트를 유럽대륙 지중해를 경계로 만들고 그 동쪽을 가리키는 지리적 용어로 근동(近東), 중동(中東)이라 하여 그곳을 유럽대륙의 경계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이집트문화를 유럽역사 산실로 만들었다.왜곡 되지 않은 역사라면 현재 이집트, 페르시아제국, 중동제국들은 모두가 지금보다 동쪽에 있어야 하고 그곳은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정확한 역사위치가 된다. 이것은 유럽역사가 아랍역사를 품고 독창적(?)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바람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한 일간신문에 이런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오리엔트에서 파생된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이란 말에는 서양인들이 요구하는 오리엔탈 정체성이 숨어 있고 세계의 중심세력인 서양(西洋)을 중심으로 동양 또는 아프리카를 계몽, 교화해야 할 대상이라고 한다는 사실에서 "신입생 교육"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하였는데 참으로 섬뜩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서양인들의 지나친 우월감은 이런 신입생교육에서도 어긋나고 있는 것이다.얼마나 열등의식이 지나쳐 이렇듯 무리를 할까도 생각해본다.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해적질을 일삼던 해양세력일 수밖에 없고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따질 근본이 있을 수가 없다.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다가 수중에 돈이 생기자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음이고 돈을 무기로 그동안 쌓아왔던 한을 그런식으로 어긋나게 푼 것이다.이러한 못된 발상은 바로 식민주의에서 나온 것으로써 그들의 기본정책 활동에서 식민지자원, 노동력,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시장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식민주의를 곧잘 정당화하는데 쓰이는 주장이 식민지배자가 피식민자보다 뛰어나거나 우월하여, 식민지지배는 근대화에 필요한 것이며 경제기반, 정치기반을 발전시키는 것에 목표가 있으므로 피식민자들에게 결국 이익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된다.이것이 오늘날 한반도 친일파들의 식민지근대화론이기도 하다.동방, 동양역사에 비해 열등한 강박관념을 가졌던 서양세력들은 해적이란 오명을 벗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렸다고 본다.산업혁명이후 기기의 발달을 이용하여 해상일지를 만들고, 그림과 삽화를 그리며, 또한 후일 증거를 위해 사진을 마구찍어대면서 역사증거물을 수집하기에 혈안이 된 것도 사실이다.거처도 없이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었던 해양세력이라는 취약한 정체성은 그들을 쉬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진보된 동양역사문화에 비해 현실적으로 열등한 심리가 주는 폐배의식을 바탕으로는 식민주의 자체가 바로 설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깊이 자각한 탓일게다.때문에 그럴듯한 논리와 우월한 신종교를 앞세우고 계몽과 교화가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필요했던 것임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프랑스혁명이후 그들이 주장하는 계몽과 교화를 위한 교육이 그들에게 왜 굳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서양 천주교가 조선의 관습을 무시하고 내부적으로 체제를 혼란시키려고 하는 위협이 가해지자 1801년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禁壓令)이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로부터 내려진다.그러나 1798년에는 군사혁명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의 휘하장군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Alexandre Berthier:1753-1815)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교황 비오 6세(Pope Pius VI,1717-1799,재임:1775-1799)를 사로잡아 감금하였고 결국 프랑스군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그리고 1801년 비로소 나폴레옹에 의해 정교조약(政敎條約)이 맺어지게 되지만 천주교는 많은 제약을 받게 되는데 공권력을 인정하고 국가권력에 충성 서약까지하게 된다.조선(朝鮮)순조(純祖)가 내린 1801년 금압령은 유럽역사와 비교되는데 하노버왕조의 벽파와 대립하였던 부르몽왕조의 남인, 시파를 숙청하는 사건이다. 특히 야당인 남인(南人:프랑스,南越)중에서 천주교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805년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영향을 받은 청조(淸朝)에서도 제사를 금지한 천주교회를 중국의 전통을 파괴하는 무리로 보고 천주당(天主堂)과 신학교를 파괴하고 탄압을 가했고 그 이후 교황 비오 9세(Pius PP. IX,1846-1878,재임:1846-1878)는 1854년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손상된 천주교의 입지를 다시 구축하게 되었으나 정상을 찾기는 15년이 지난 1869년에 비오 9세(Pius PP. IX)에 의해 실시된 바티칸에서 공의회(公議會:Concilium)개최이며 떨어진 천주교회 권위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해진다.그렇지만 조선에서는 1866년 초 체제를 어지럽히고 신도수가 증가함에 따라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를 체포, 탄압하자 강화도(江華島)침범으로 이어지는 병인양요(丙寅洋擾:1866)가 발생한다는 것이 천주교 탄압에 대한 세계사적인 연대이다.하지만 여기까지 보면 실제로 조선과 프랑스가 엮어있는 듯한 느낌에서 일체의 역사 사건들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한반도에 무엇이 있다고 선교사들이 대거 들락거리겠는가.그 만큼 조선은 엄청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국가이며 체제였기 때문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기를 사고 달려든 것이다.조선 말 선교사가 대거 등장하는 것도 한국인들이 조상대대로 거처로 삼던 곳이지 한반도가 아니다.선교사 어느누구도 순수한 종교교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제국들의 첨병역할을 했다는 것은 양심있는 역사학자들이 하나같이 비난하는 이야기다.앞에서 식민주의를 이야기 했지만 14세기경 유라시아 대륙의 작은 나라들에 불과했던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 중국, 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특이한 경쟁심을 말하고 있고 앞선 과학지식, 민주주의선도와 의학기술, 주체할 수 없는 소비주의 그리고 직업 윤리의식 등 여섯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서양의 관점에서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가져다 준 혜택을 설명하는 것도 동양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지배자들은 정작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고 느슨한 국가정책을 펴 서양인들에 의해 경쟁에서 밀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들에 의해 결국 정치, 사회, 경제 전반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도 그들의 우월주의에 의한 책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마치 보리밥에 간장 반찬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무고한 동양사람들의 재산을 억압으로 강탈하고 착복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이문을 남기고 잉여자본으로 본래 강탈한 재산 주인에게 이밥과 고기반찬을 사주어 이득을 준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이 정당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는 법치주의를 벗어나서는 설 곳이 없다고 하는 법리를 향상 내세우지만 그들 스스로가 법리를 먼저 따지고 합당한 법치를 따르는 적이 있었던가.자본주의사회가 법치를 생명으로 여겨야할진데 아무 이유도 없이 강압적으로 남의 사유재산을 강탈하고 죄의식조차 갖지 않는 것은 악날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식민지근대화론이란 얄팍한 이론을 앞세워 그들의 무도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한 그들의 추악한 이력을 어떻게 한순간에 지울 수가 있겠는가.마땅히 범죄행위에 대한 단죄(斷罪)가 필요했던 것이지만 서양인들은 그것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서양해양세력의 겉껍데기인 열도일본 정치인들도 이와같은 행위를 닮아 아무렇지도 않게 항변하는데 마치 그들이 서양인 인냥 행세하는 모양새는 가히 뻔뻔스럽고 가소롭기가 짝이 없다.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뻔뻔스럽게 만들었을까?거짓역사는 양심의 보루조차 잃어버리게 만든다.바로 자포니즘 따위를 잘못해석한 것이며 일찍이 서양세력들이 일본을 동양일본으로 만든 것도 동양인들에게 근대화를 이룬 일본을 본보기화 하려는 것이며 그래서 서양우월성을 느끼게 하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매우 교활한 수법이 아닐 수 없다..19세기 말엽에 서양우월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만년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인도 붐바이(Bombay) 출신인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1865-1936)같은 영국 저널리스트겸 문인조차도 "야만적인 흑인과 황인종을 개화시키는 것은 힘들고 고되지만, 그들에게서 보답은 커녕 원망과 비난을 받을지라도 고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며 유색인들을 문명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라는 의견을 펼쳤다. Oh, 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그리고 그는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 절대 서로 어울릴 수 없다고도 말하여 철저한 분리주의를 고수했다.그림:존 불(John Bull:잉글랜드정부), 엉클 샘(Uncle Sam:US,미국정부)은 세계 유색인종들을 문명세계에 인도하는 '백인의 책무(키플링의 정당성)'을 견디어 낸다.(저지잡지, 1899년 4월 1일)위 사진을 보면 저절로 쓴웃음이 나온다.그래서 느낀 바대로 몇자 서사시(敍事詩)처럼 적어본다.미개하지 않았음에도 미개하다고 하고 그것을 대응하는 문명을 요구하니 참으로 어줍잖은 이야기다.오리엔탈문화에 문명이 없었던가.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문명이 있었다.그토록 인간이 진보되지 않으면 역사란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일만년 오리엔탈 문화역사는 서양우월주의 사회다윈주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진보했다. 그들은 시민(citizen)에 대한 시비스'civis'와 시비타스'civitas'만 알고 도덕과 윤리는 왜 모르는가.cīvis=citizen, civitas=condition or privileges of a (Roman) citizen도덕(道德:Morality)과 윤리(倫理:ethics)를 던져버린체 오직 사욕(邪慾)에 의한 물질풍요와 절제되지 않는 쾌락만이 문명(civilization)이란 말인가.탐욕과 오만의 문명이란 틀을 세우고 그곳으로 밀어넣는 압제는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가. 백인들이 요구하는 문명이 아니더라도 충분한 문명, 문화를 만끽하고 부족함을 모르던 오리엔탈 시민들이 아닌가.악덕(vice),노예(slavery),무지(ignorance),살육(brutaltity),미신(superstition),압제(oppression),야만적인행위(barbarism)는 누가 만든 것인가.그들이 만든 것임에도 마치 오리엔탈시민에 의한 것처럼 호도하는 것도 고약하지만 짐(burden)을 지도록 시키지도 않는 수고를 하고자 자임하고 나선 그들에게 수고 보답으로 식민지착취 이외 무엇이 더 필요할까어울리지도 않는 존경과 칭찬이 필요한가.아니면 열등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우월심리가 필요한가.식민지착취로 풍부한 물질을 얻고 정신적 위안까지 요구하는 것은 백인종족들의 지나친 욕심이고 뻔뻔스러움이 아닌가.[한부울 지음]다시 백인들의 우월상황을 영어자료에서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발견된다.White supremacy has ideological foundations that date back to 17th-century scientific racism, the predominant paradigm of human variation that helped shape international relations and racial policy from the latter part of the Age of Enlightenment until the late 20th century'백인우월주의는 17세기 과학적 인종차별주의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념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계몽시대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국제관계와 인종정책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인간 변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Sociologist Stephen Klineberg has stated that U.S. immigration laws prior to 1965 clearly declared "that Northern Europeans are a superior subspecies of the white race".미국뉴욕출신이며 사회학자 스티븐 클라인버그(Stephen Klineberg:1940~)는 1965년 이전의 미국 이민법에서 "북유럽인들은 백인종에서 우월한 아종"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White supremacism has been depicted in music videos, feature films, documentaries, journal entries, and on social media. 수많은 뮤직비디오, 장편영화, 다큐멘터리, 저널리스트, 소셜미디어 등에 백인우월주의가 그려졌다. In an editorial about Native Americans in 1890, author L. Frank Baum wrote: "The Whites, by law of conquest, by justice of civilization, are masters of the American continent, and the best safety of the frontier settlements will be secured by the total annihilation of the few remaining Indians."1890년 미국 원주민에 대한 사설에서 미국뉴욕출신이며 작가 프랭크 바움(L. Frank Baum:1856-1919)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백인들은 정복의 법칙에 의해, 문명의 정의에 의해, 미국 대륙의 주인이며,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인디언들의 완전한 멸망에 의해 국경 정착지의 최고의 안전이 확보될 것이다."라고했다.In 1937, Winston Churchill told the Palestine Royal Commission: "I do not admit for instance, that a great wrong has been done to the Red Indians of America or the black people of Australia. I do not admit that a wrong has been done to these people by the fact that a stronger race, a higher-grade race, a more worldly wise race to put it that way, has come in and taken their place." British historian Richard Toye, author of Churchill's Empire, said that "Churchill did think that white people were superior."백인우월주의자이기도 한 윈스턴 처칠은 1937년, 팔레스타인 왕립 위원회에서 말하길"예를 들어, 나는 미국의 레드 인디언이나 호주의 흑인들에게 큰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 강한 인종, 더 높은 등급의 인종, 그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위한 더 세속적인 현명한 인종이 들어와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에 의해 백인들에게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 했다.19세기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편의 탐닉성과 독성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여 황색인종에게 가장 강하다는 것을 규명했으며 이는 아편전쟁까지 치르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는 골자는 서양우월주의극치를 말하는 것이다.이것은 마치 20세기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731부대(関東軍防疫給水部) 마루타(丸太:まるた,マルタ)생체실험(生體實驗)을 떠 올리기에 충분한 이야기며 이것이야 말로 자기합리화(Self Justification)이고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Cognitive Dissonance)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인간실험을 한 결과 동양인에게 아편의 약효가 가장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아편을 주입한다면 약효가 빠르다는 것이고 중독성이 강해 아편전쟁을 자신하게 만들었다는 소리이다.서양세력들은 늘 이런식이었다.그러나 언제나 힘의 교합은 늘 파멸을 불러왔다.때문에 서양인들의 이런 우월주의정책으로 인해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대량살상을 유발시킨 거대한 두 차례(1, 2차세계대전)의 큰 전쟁이 발생하게 만들었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서양인들은 우월한 종교관념 뿐만아니라 난데없이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이론을 앞세우기를 좋아하지만 론(論)의 기본은 반론을 전제로 삼는 것이고, 다른 대안이 나오면 대체될 것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논제가 재고(再考)된 적이없고 일방적이었다.과학이란 이름을 빌어 그들은 우월주의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는데 동원하였고 이론적, 학술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론(論)은 겁도없이 신(神)의 경지境地)를 넘나들고 필요에 따라 이러한 것들이 대량 양산되면서 과학의 본질을 훼손시켰고 수많은 오류를 뒤로한체 그들의 목적은 멈추질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마땅히 양심이 있고 인류적인 문제를 생각한다면 과하자나 역사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왜소해지는 동양학문에서 실증적 검증을 했어야 했지만 사실적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아시타비(我是他比), 내가 한 것은 무조건 옳고 남이 하는 것은 무조건 부정하는 짓을 산업혁명이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進化論:Evolutinary theory)을 등장시켜 생물이 자연진화하는 것을 당장 서양우월주의에 접목하면서 힘의 지배는 정당한 것처럼 사회기류가 형성되게 만들었으며 마치 열등종족을 유색인종이라고 못을 박고 신(神)의 섭리에 의한 것처럼 호도하고 전 세계를 상대로 식민제국(植民諸國)을 건설하는데 혈안이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사실상 힘의 논리이고 합리적인 지배라고 하지만 속물적 소유욕의 풍족이며 인류애와 최소한 인간성을 찾을 수 없는 폐악질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강탈의 의한 식민지근대화가 총칼과 강압이 아니라면 이것도 신의 섭리하고 떠 벌릴 것이다.기가 찬 것은 영국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 영국의 성직자이며, 인구통계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1766-1834), 영국의 인류학자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1822-1911)같은 자는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Social Darwinism)이란 괴변을 만들어 서양우월주의의 도구가 되게 하고 저질 스러운 진화론은 사멸적 악행의 방편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미화하고 덧칠하더라도 그것이 바탕이 된 서양역사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절대로 미래 역사에서도 인정받기가 힘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할 것이고 그러한 행위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연기처럼 사라졌겠는가를 생각해야 마땅할 것이다. 2)자포니즘(Japonism)이란 무엇인가. 자포니즘의 자폰(Japon)에서'-ism'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사상, 이념으로 볼 수 있다.그렇다면 서양우월주의의 상업브랜드라고 하는 자포니즘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이것도 분명 동방문화에 반하여 생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그 발흥의 시대가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란 용어가 비등할 때이다.동방문화의 어떤 기류에 반한 것일까?17세기 부터 유럽귀족사회에 불어닥친 중국양식(中國樣式)의 사조(思潮) 시누아즈리(chinoiserie)이다.시누아즈리는 중국골동품이라고 근세 유럽 미술에 나타난 중국풍의 기법. 또는, 그러한 공예품. 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는 어원'rocaille(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온 로코코(Rococo)와 융합하여 실내 장식·가구·벽걸이·도자기 등에 많이 이용되었다. 이 시누아즈리(chinoiserie)란 영어단어는 음식을 갈거나 거르는데 사용하는 조리기구 쉬느와즈(chinois)를 인용한 것 같으나 기어코 chinois의 단어인 "중국어"를 바탕으로 한 프랑스어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Chine (“China”) + -ois (“-ese”) 자포니즘을 백과사전에서는 사조(思潮)라고 풀이하는데 어떤 시대나 계층에 나타나는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사상의 흐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그러나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란 용어 따위는 대중적인 것이 아니다.자폰이라는 명칭은 한반도 옆, 길게 세로로 늘어서 있는 열도(列島)일본을 지칭말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일본국명은 삼한 백제가 지어준 것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나며 우리는 동양한문으로 일본(日本)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Japan' , 프랑스어로는 'Japon'이라 하는데서 연유을 찾을 수 있다.근세기 서양세력들이 큰 두 차례 전쟁에서 이긴자의 승전 전리품을 두둑하게 챙겨 역사본질이 가려져 있다 하더라도 본 블로그에서 들어날 것은 이미 다 들어난 상태이다.19세기 말엽부터 신흥자본국가로 등장한 양키와 그 외 세력들이 서로 얽혀 어느 것이 진짜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삼한역사에 기록된 왜구(倭寇)역사와 현재 들어나고 있는 동아시아의 열도일본역사는 상당한 괴리를 가지고 있어 맞지 않으며 과거 해양세력들 전체가 공동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일본이 가진 생물학적 역사위치는 때로는 열대지방, 온대지방기후, 그리고 북방기후까지 폭넓게 형성된다.무엇인가에 의해 일본이 모든 면에서 매우 부풀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개체들이 모두가 명확한 인물묘사나 정확한 스토리 전개가 없이 뭉뚱그려 사실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크다.이것들은 본 블로그에서 판단하길 인물이 가공되었을 가능성과 때문에 사건묘사가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모순들이 현재 한반도, 열도, 동아시아의 전체 역사가 한결같다는 사실에서 공통적으로 짜집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한다.동양역사를 풀어 볼 때 거의 일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희멀거래 하며 개성도 없고 색상도 없는 무미건조하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매우 단편적인 형태를 가졌다는 느낌을 매번 받는데 이것은 근세기에 짜맞춘 것이라고 수백번 되뇌인다.현재 중국이라는 역사를 보면 한인(漢人)편중 역사일 뿐만아니라 몽골리안 일색(一色)의 역사이다.일단 중국이라 함은 다문화적인 요소가 크고 동양서양할 것 없이 모든 문화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그렇지만 변함없이 모든 인물들의 삽화가 동양수채화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과 도대체 서양역사 인물화상을 보면 그들이 해양개척시대라고 주장하는 15세기부터 마치 사진같은 세밀한 회화들이 넘쳐나게 존재하지만 동양역사 인물들은 거의가 붓으로 먹칠을 하고 전통적인 기법이라고 하지만 마치 대충그려놓은 듯한 것으로 이를 동양화(東洋畵)라고 하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서양화와 동양화가 그렇듯 갈려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동양에서 건조하였다고 함선과 서양에서 건조했다고 함선의 생김새 차이를 보라.어찌그리도 다를까?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 "에서 세세하게 지적한 것이지만 달라도 너무다르다.동양에서는 주로 먹을 사용한 그림이 산수화, 수채화일 수밖에 없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동양사람들은 특히 화가들은 아름다운 형형색색, 사실적 표현은 관심없이 보기에도 우중충한 마음의 색깔만 담으려 애를 썼을까 하는 의문이 곧바로 생긴다.왜 서양인물사진처럼 화려하지 않고 절제된 색감만을 나타내며 진실된 내면세계의 표현을 하려하고 전신사조(傳神寫照)만을 고집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불교의 불화를 보면 오히려 동양화가 더 화려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이것은 중국역사도 그렇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다양한 인종이 섞여 각자의 삶을 꾸려나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 역사에서는 전혀 그러한 느낌조차 받을 수가 없다.간혹 검은 얼굴도 있을 것이고 백인도 있을 것이며 코가 낮은 황인종도 있을 것이다. 위 그림은 프랑스화가 생 소뵈르 자크(Grasset Saint-Sauveur, Jacques:1757-1810)의 수채화로 그린 구리판화 작품 코리아 남성과 여성(homme et femme de Coree)이란 작품인데 여성에 품에는 아기도 있다. 코리아인(한국인)이 동양계 몽골리안인가.아니다.본 블로그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 "과 "붉은바다거북과 귀부(龜趺)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6 "에서 말했듯이 조선(朝鮮)사람에는 갓을 쓴 벽안(碧眼)의 백인(白人) 코카소이드(Caucasoid)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했고 강한 색깔의 흑인이 아닌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의 사람들은 얼굴이 검고 코가 높은 서양인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어 이와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 적 있으며 또한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이라도 하는 메티스(Metis)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그리고 본 블로그 글 "한국인 유전자와 북아메리카 연결-Haplogroup C3 (Y-DNA)http://blog.daum.net/han0114/1705057 "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들에게 하플로 그룹은 "haplogroup Q(Y-DNA), Haplogroup R1(Y-DNA), Haplogroup C3(Y-DNA)"이 주로 검출되고 그 중에서도 "Haplogroup R1(Y-DNA)"을 가진 인디언들은 백인 통혼 이전 사진을 보아도 안와상융기(眼窩上隆起, supraorbital torus)가 발달하였고 코가 좁고 높은 형질이 많이 보이는 백색인종, 유럽인종을 이르는 코카소이드(Caucasoid)적 특징이 있다고 밝혔다.그렇지만 한반도사관이 제시하는 조선시대 인물들을 보면 동양계몽골리안이 전부이고 화상에 나타나는 얼굴은 그 인물이 그 인물이라서 도대체 개성은 찾을 수 없고 누가 누군지 도대체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그래서 언듯 기억에 없는 그냥대충 그려놓은 듯한 기막힌 맹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이러한 현상과 비교가 될 수있는 서양 인물화는 그렇지 않다.이것이 서양역사와 동양역사의 차이점이다.현재 역사로 보면 동양역사는 어둡고 침침하여 볼 품없고 서양역사의 기록들은 빛이 넘쳐난다고 표현할 수 있다.이러한 차이점은 서양우월심리가 깔려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할 정도이다.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1866-1946)가 1920년에 세계사강(世界史綱:The Outline of History)을 출판한 시점까지 동양역사의 모든 자료는 별의미없이 취급되었을 가능성과 서양역사와 비교하기위해 갑작스럽게 볼 품없이 만들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강하다.형편이 이러니 이미 역사기록전반에 걸쳐 인위적으로 차이가 나게 한 것이며 바로 서양근대화 주장과 일치하게 하여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다.위 일본인 사진들은 이탈리아태생의 영국사진작가 펠릭스 비토(Felix Beato)가 1860년경에 촬영한 것인데 그는 1863년부터 21년간 요코하마에서 살았고 동아시아의 사진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작가 중 한 명이라 한다.명치유신시대 때 실제로 미개인 같은 복장을 한 일본만 하더라도 서양근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산업근대화를 이루고 급속하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들 역시 서양우월주의에 취해 마치 그네들이 서양인이 된 것처럼 으시댄다는 점도 있지만 이를 위해 음양으로 서양세력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서양세력들이 아시아정책에서 우선적으로 일본을 지정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가 깔려 있다 할 것이다.물론 왜구일본문화라고 무시되거나 그 자체를 폄하해서는 안된다.워낙 삼한역사가 거대한 것이어서 비교가 될 수밖에 없지만 왜구문화가 다시말해 서양문화이다.워낙에 노략질과 침략을 일삼던 왜구(倭寇)역사이기에 자포니즘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자포니즘이란 단어에서 'japan' 이 아니라 'japon' 으로 발음 하는 것은 이 사조 발흥이 프랑스와 관계가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자포니즘(Japonism)이란 말은 1872년에 프랑스 미술비평가 필립 뷰르트(Philippe Burty:1830-90)가 최초로 사용한 것이라 한 사실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보면 프랑스와 당시 일본은 지형적으로 거리가 가깝거나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일본이 근대화하면서 프랑스에 견문, 견학을 한다든지 군사적으로 근대식 교육을 받는다든지 매우 밀접하게 엮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First Sino-Japanese War) 당시에도 전쟁비용이 2억 엔[60억 달러: 5조4천억원]이 소요되었던 바 프랑스로부터 전쟁자금을 급하게 지원받아 전쟁을 치뤘다는 사실도 그러한 관계를 진단할 수 있는 배경이다.이와같이 그들의 빈곤한 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의 청년학파(Jeune Ecole)주의 즉 북양함대의 대형 함선에 대항하여 소형의 빠른 전함를 사용하는 것을 따랐다는 이야기다.그것을 현재 근세사에서는 일본이 당시 프랑스 흉내를 내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프랑스 스스로가 한 짓을 일본이라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본 블로그 글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에서 풀어 본 이야기는 이렇다.모든 중국문헌에도 갑오지역(甲午之役:1894)시기에 일본이라 하지 않고 그냥 왜(倭)라고 만 칭했다.당시 청일전쟁 때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가 삽화그림을 보면 일본군인들의 모습에서 나폴레옹모자를 착용한 서양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그것은 동인도회사 성격인 서양일본과 양키와는 같은 연합체로써 경제신흥국이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말할 수 있고 1858년 발생한 안세이불평등조약(安政五カ国条約,Ansei Five-Power Treaties)의 주도5국[미국(양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중에 프랑스가 포함되고 있다.서양사에 따르면 전통유럽역사를 가진 프랑스는 고대 로마시대때부터 유럽남부에 존재한 프랭크족의 후예라 한 사실을 본 블로그 글 "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796" 에서 남월국(南越國)이 한무제(武帝:BC111)에 의해 멸망했다고 하는 동양역사를 이야기 하며 로마공화정(羅馬共和國:BC509-BC27, AD235)시기에 의해 멸해진 게르만족의 일파인 캘트족(Celts)을 원주민인 갈리아(Gallia:Gaul)와 동일하게 보아야 하며 갈리아족을 프랑크족과 연결시킬 수 있고 현대 국명 프랑스라고 결론 짓는 사실등에서 남월국은 뉴올리언즈를 중심으로 하는 조지아주와 플로리다주를 포함하고 그곳을 영주(瀛州)라 하였으며 또는 제주라 하였다는 사실까지 밝힌바가 있고 이곳을 베트남(越國)이라는 설도 보태진다.왜냐하면 월국은 베트남과 엮이기 때문이다.이상하게도 베트남을 식민지통치(11864-1948)한 프랑스가 여기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가정해 본다면 프랑스는 유럽대륙에 속한 것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존재하였고 서양 일본은 안세이5개국을 다 포함한다고 할 때 이를 표면적이던 아니던 더치(네덜란드)를 보함한 양키라고 할 수 있으며 양키가 미국이 될 때까지 북아메리카대륙이란 동일한 영토내에서 같이 존재했다고 하는 틀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이와같이 안세이5개국이 공히 자포니즘(Japonism)을 환영한 것은 새로운 가공제품들을 상업프레임화하고 선전을 이롭게 하여 가공업자, 부르주아들에게 상당한 이윤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자포니즘의 사조가 프랑스인에 의해 활성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상업주의가 산업번영에 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고 때문에 프랑스파리에서는 만국박람회가 수시로 개최되었다는 사실들은 당시 프랑스정권을 잡은 공화주의자와 상부상조할 수 있는 환경에서 부르주아들에게도 황금시대나 마찬가지였다고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공화주의자 시대라고 불리는 프랑스 제3공화국(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1870-1940)시기에 공화주의자와 부르주아는 협력자라 할 수 있고 프랑스에서 상업주의 사조들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정부의 정책적인 받침도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자포니즘은 나폴레옹 3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1808-1873,재위:1852-1870)때인 1867 년에 개최된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de 1867)에 일본 채색화가들이 제작한 100 여점의 작품을 전시한 것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에 의해 당시 19세기 중후반(1863-1890)사이의 자포니즘 사조속에 프랑스의 사회 모습을 담아내려 하였으며 서양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印象主義:impressionism)화가들이 이를 받아 적극적으로 모방하거나 그것으로 창작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정리되고 있다.실제로 자포니즘 화가들 중에는 정치적으로 실력자가 있었다.바로 석판 인쇄공출신인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이다. 때문에 필립 뷰르트(Philippe Burty)는 정계의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던 외젠을 이용하면서 대중화를 노려 낭만학파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의 편지를 잡지를 통해 발표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외젠이 화가로서의 생애 동안, 보호받았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루이필리프 왕(king Louis-Philippe)과 친부로 의심되며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1754-1838)에 의해 보호받았고, 후에 탈레랑(Talleyrand)의 손자인 찰스 오거스트 루이 조셉(Charles Auguste Louis Joseph)과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1808-1873)의 이복형이자 프랑스 하원의장 모르니 공작(Duc de Morny)에게 보호받았다고 알려진다.사회적으로 막강한 비호세력을 자포니즘 또한 업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프랑스의 사회집단은 노동자, 프티 부르주아 공화주의자, 공화파 부르주아, 왕당파 부르주아등으로 구성되었다.프랑스는 일반적으로 근세유럽역사에서 정치 및 문화, 예술적인 가치와 선두적인 입장에 있었고 영국(England)보다 앞서 있었던 중세유럽역사에서 주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쪽에서보면 그 영향력은 지대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유럽중세 르네상스문화의 꽃은 프랑스에서 만개했다고들 한다.그만큼 프랑스는 유럽역사 문화예술의 대명사처럼 근세역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프랑스대혁명 역시 이러한 역학관계에서 발생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서양세력에서 주도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자본주의 요소라 할 수 있는 부르조아계급의 상징성 또한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가치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자포니즘은 상업주의에 의한 부르주아계급속에서 잉태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자포니즘 화가 [그림]자포니즘 화가들의 특성 자포니즘화가들의 부모직업을 보면 개신교집안이나 부르주아들이 대다수이다.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는 개신교중산층,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프랑스정치인, 귀스타프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는 군수섬유사업상속자이며 상업법원판사이고, 메리 카사트(Mary Cassatt)는 주식투자자, 은행고리대금업자이며, 폴 세잔(Paul Cézanne)은 카톨릭신자이며 금융회사공동설립자이고,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는 은행원, 제임스 죠셉 띠쏘(Jacques Joseph Tissot)는 휘장사업상인,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는 상류층 외교관딸이며,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는 철도기술자,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는 정통적부르주아집안으로 세르현수석행정관리자,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는 성공한 포르투갈계 유대인상인이고,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는 재봉사,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는 실크사업가,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는 개선교목사,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는 귀족집안이고,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역시 부유한 부르주아이며,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금화공기술자의 자식 등이다. 부르주아(bourgeois)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을 일컫고 중세 유럽에서, 성직자와 귀족에 대하여 제삼 계급(第三階級)을 형성한 중산계급(中産階級)의 소위 시민이란 명칭이 있으며 부자(富者)라고 하는 자본가(資本家)를 말한다고 정리되어 있다.공교롭게도 이들 세력은 잉여자본력을 소유함으로써 삼부회(三部會)등장과 권력 중심부에 등장하였고 왕권주의가 약해지면서 입헌적(立憲的) 법치주의(法治主義)생성과 함께 새로운 권력계층인 법조계를 장악하고 자리잡는 사회적 또하나의 파워집단이라 할 수 있다.당시 유럽사회에서 부르주아 부자가 권력을 사고팔고 하는 것은 당연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상업적으로 잡다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법률관리를 그들이 장악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게 와 닿는다.법조계를 주름잡는 것은 권력중심부에 있는 것과 같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렇게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예를 들어 계몽주의 시대의 프랑스 정치사상가 몽테스키(Montesquieu:1689-1755)는 개신교 아내를 둔 사람으로써 저서 <법의 정신Esprit des Lois,1748>을 통해 자유주의 입장에서 권력분립에 의한 법치주의를 제창하였으나 그는 부르조아출신이며 백부의 작위와 봉토를 계승하여 제2대 몽테스키외 남작(Baron de secondat Montesquieu)이 되었으며 당시 백부가 맡고 있었던 보르도의 지방법원의 원장직을 계승할 수 있었지만 세습하여 물려받은 그의 법원 원장직을 경매로 처분하고 파리로 이주하여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즉 법치주의라고 하지만 법을 제정하고 관리하는 법원 원장직을 경매로 사고 팔고가 가능했다는 사실은 삼권분립을 무색하게 하는 당시 자본의 위력이며 그 자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여기서 자포니즘(Japonism)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부르조아 즉 자본가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속성(社會的屬性)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어쩌면 유럽역사의 주체는 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것을 미화시키고 더욱 부르주아 가치를 상승시키는 도구로 이용된 것이 바로 자포니즘이 아닐까 한다.어쩌면 서양위주의 상업적 가치를 최대한 효과를 나타내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시대적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어쩌면 개인 공업기술에 한정될 수 있는 자포니즘이 정치적으로 확대되어 국가의 제국주의(帝國主義:imperialism)로 발전하게 된 촉매제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잉여자본은 부(富)를 잉태하고 권력을 창출하지만 또 다른 식민주의를 양산시키는 수단이 된다.제국주의는 다른 민족, 국가의 영토를 침략하여 국가의 지배권을 확대시키려는 정책 행위라 하였고 패권보다는 영역의 지배를 확대하는 정책 또는 사상을 가리킨다고 정리되어 있는데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다.즉 자본을 축적한 서양제국들은 월등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증대시켜 지배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착취세력으로 등장하였고 독일어의 제국(帝國)이란 단어가 "라이히(reich)가 부(富)" 이듯이 제국이라 함은 자본력이 충부한 부유한 세력집단인 동시에 지배권을 확대할 목적의 집단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즉 당시 자본력은 개인이거나, 일반 조직이거나 또는 주식회사이거나, 국가이거나 할 것 없이 법률을 이용한 강권, 압박, 권력남용, 무력행위 등을 이용하여 지배력을 확장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다는 것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지배권을 소유하기 위함이다.이것이 19세기부터 자리잡은 부르조아나 제국주의의 적나라 한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돌아가, 자포니즘(Japonism)어원에서 찾아보면 또한 더치(네덜란드)의 영향력도 컸다고 보인다.자폰은 17세기부터 일본역사에서 중간 매개체 역할과 야누스(Janus)와 같은 역할을 한 더치어(Dutch language), 네덜란드어로 '야폰(japon)'이라 하고 그것은 '남성들이 집에서 입는 편한 옷' 또는 '여성복'이란 의미도 있으며 '드레스[조례복(朝禮服)]', '가운'이란 뜻도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이것은 현 일본인들이 즐겨 입는 화복, 와후쿠(和服)를 말하는 것이며 일본인 남자는 몬츠키하카마(紋付袴), 여자는 후리소데(振袖)라 하는 기모노(着物)를 말하여 그것을 마치 오랜 된 열도일본인들의 고유복장인 것처럼 우리는 인식하고 있지만 실상은 오랜 더치의 관습적 용어임도 알 수가 있다.또한 기모노에 무늬가 다양해지고 화려해 진 것은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인과 더치(Dutch)인의 방문으로 새·꽃·사람 등의 무늬를 여러가지 빛깔로 날염한 천인 사라사(更紗)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자료가 보이는데 의복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남만(南蠻)이란 세력들의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남만(南蠻)인들이 일본인처럼 화려한 색상을 즐겨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자포니즘이라고 하는 작품을 보면 전부 이런 화려한 형태의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많다.즉 이것은 오늘날 산업미술, 산업디자인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가 상품이며 당시 사람들에게 제품자체가 화려하게 각인되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바로 현대적으로 이야기 하면 당시 생산된 일반 소비재, 장식품등 소비자의 소비욕을 촉진시키는 현대적인 산업미술, 디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많은 소비욕을 자극하여 판매를 증가 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사실상 이것이 자포니즘 가치의 핵심적인 이야기다.새, 꽃, 사람 등으로 묘사된 열도일본인들의 19세기 삽화들은 열도일본인들의 고유창작물이 아니라 이미 상업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소비욕을 자극시킬 수 있는 디자인들을 이용하여 만든 상품들은 포르투갈이나 더치 상인들에 의해 전달된 상당히 서구화된 도식적 작품이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 에서 밝혀보았지만 일본의 다양한 색상의 목판화인 네덜란드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의 "탕기(Tanguy) 할아버지"작품의 배경으로도 쓰였던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풍의 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활동을 하였다고 알려지는데 여기서 네덜란드가 일본일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으며 어쩌면 빈센트 고흐가 우키요에의 대가이었을 수도 있다. 상업을 중심으로 세력화된 유럽인 즉 서양해양세력들은 주요고객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소유욕을 북돋우기 위해 상품을 최대한 아름답게 디자인해야 하는 것에서 우키요에 판화법이 적용되었던 같다.그렇다면 선진중상주의를 표방한 서양인들에게 그 전에는 이러한 사조가 없었던 것일까?여기서 동양적 사조의 존재성이 들어난다.이미 자포니즘이 활성화되기 훨씬 이전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절대적인 고객이었던 유럽 귀족 사이에 생성된 또 하나의 사조 시누아즈리(chinoiserie)가 있다.앞에도 이야기 했지만 자포니즘과의 차이점은 바로 고객이 봉건주나 귀족들이라는데 있고 주체가 중국이라 점과 자포니즘은 서양인이 주체라는 사실이 다르다.생각컨데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난 후 조선사회의 진상과 중국이란 체제특이성등이 알려지고 이것이 호기심으로 다가 간 것이라고 풀이된다.중국풍 취미가 한껏 유행되어 소위 17세기 유럽, 18세기 독일과 남아메리카에 유행을 한 바로크(Baroque)예술이나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인 로코코(Rococo)양식의 미술공예품에서 특히 많이 볼 수 있었고 대표적인 예가 베르사유 궁(Château de Versailles)의 정원에 만든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의 이궁(離宮)에 중국의 청화자기(靑花磁器)를 본딴 도기(陶器)와 도판(陶板)으로 내외를 장식한 ‘자기(磁器)의 트리아농(Grand Trianon)을 1687년에 해체해서 세우게 했다고 알려지며 그 이후 각국의 궁전(宮殿)이나 별궁(別宮)의 정원에 시누아즈리(chinoiserie)의 파고다(塔婆:pagoda, Stupa)나 키오스크(亭子:kiosque)가 세워졌다고 알려진다. 로코코(Rococo)어원은 프랑스어로 로카유(rocaille)와 코키유(coquille)인데 이는 ‘정원의 장식으로 사용된 조개 껍데기나 작은 돌의 곡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1422년 세종조(世宗朝)에 일본에서 조선왕을 천제(天帝)라고 칭한 사실과 함께 연못을 조성하는데 바닥에 수마석(水磨石)을 깔아 장식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자포니즘은 인쇄기술자, 판화가, 전위화가(前衛畵家)들에 의해 대중적으로 크게 방향성(方向性)이 있었던 반면 시누아즈리는 궁중 공예기술자나 건축가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는데 대중이 아니라 특수한 봉건주나, 귀족사회란 한정된 계층이라는 것이 다르다. 이 수마석을 오늘날 테라조(Terrazzo)라고 하며 이러한 장식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으로부터 인데 1890년대 말엽(末葉)이라고 한다.19세기말엽에 부유해진 양키들에게 신흥귀족처럼 동양사조 시누아즈리를 받아들여 옛 동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이러한 중국식 양식은 18세기에 유행한 영국식 정원의 일부로도 보급되면서 그들은 중국 또는 동양풍의 이국적인(exotic) 인물, 풍경, 문양 등의 장식 주제를 애호했으며, 그 범위는 실내장식, 가구, 도자기, 직물, 장식 등을 위시하여 널리 회화나 판화에까지 미쳤다고 알려져 이미 회화(繪畵)나 판화(版畫)는 중국풍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다.당시에 이렇듯 유럽인들에게 중국 도자기(陶瓷器)가 최고의 상품으로 가치를 얻으며 인기를 누렸고 이에 자극받은 유럽인 스스로 이를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때문에 포르투갈이나 더치(Dutch)무역상인들에 의해 설치된 동양관문인 나가사키 무역상관은 중국상품을 수급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했다는 사실과 당시 일본에서 도자기의 기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을 발생시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당인(唐人)이라고 칭하던 조선인 도공(朝鮮人陶工)들을 포로로 납치하여 노예로 삼고 도공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한반도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다.포괄적으로 조선 내에 존재한 중국이라는 곳은 특히 장사아치 서양인들이 들락거릴 수 있는 시장 공간으로 중앙행정관청이 있는 곳이며 도공(陶工)들이 도자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조선영내(朝鮮領內)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이러한 수요측면에서 볼 때 유럽귀족고객들이 요구하던 자기(瓷器)들을 무한정 수입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선진기술을 습득하고자 노력했던 것은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임진왜란을 발생시키는 원인으로도 작용했을 것임을 동시에 추정할 수가 있다.임진왜란이 종결되고 난 후 주범들을 처리하고 수습이 되면서 유럽인들은 도자기 제작방법을 자체적으로 습득하여 상품화할 수 있었고 유럽각지에서 중국도자기를 모방하여 각종 화려한 도자기를 생산하게 이르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오랜시간 동안 제품질이 떨어져 귀족들의 소유욕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많다.그만큼 조선도공(朝鮮陶工)기술은 유럽인들이 흠모할 만큼 우수한 선진기술이었음이다.18세기말에 발생한 프랑스혁명은 귀족사회를 붕괴시켰고 19세기 초엽사이에 발생한 산업혁명은 수많은 생활용품이 유럽인들에 의해 대량 생산되면서 대량공급으로 인해 가격이 싸지면서 이런 값싼 소비재를 통해 새롭게 부상한 부르조아계급들의 생활은 점차 귀족화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경쟁적으로 점점 화려한 것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증가하게 되자 좀 더 화려하고 소비욕을 자극할 수 있는 상품디자인 판화기술이 우키요에 화법으로 인정되며 그러한 판화기술과 인쇄술이 융합되어 자포니즘이란 사조가 생성된 것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 의해 1862년 런던만국박람회(1862 International Exhibition)와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1867)를 통해 일본 도자기와 차, 부채, 우키요에 판화등이 서양인들에게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고 서양인들에게 일본의 문화 및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정확하게 연결된다. 4)자포니즘과 양키일본 자포니즘의 산실이라고 하는 일본은 유럽인들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생산기지이었을 것이다.이것과 맥을 같이 하는 중요한 역사사실이 인디언의 삶을 노래한 음악에서 발견된다.1971년 폴 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Paul Revere & the Raiders) 5인조그룹이 원곡을 리메이크하여 부른 인디언 보호지구(Indian Reservation)란 음악은 글쓴이에게도 매우 친숙한 노래이다.이 노래 가사에서 보면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 are nowadays made in Japan~우리가 손으로 꿴 구슬들은 지금은 일본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네."이다.여기서 일본(Japan)이라 함은 바로 백인이주민 양키를 지칭하는 것이다.즉 체로키족(Cherokees)들이 떠난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동남부지역에 일본인들이 거주한 사실이 밝혀진다.그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무조건 양키라고 하면 안된다.그곳은 옛 프랑스인들이 개척했다고 하며 프랑스를 위해 미시시피 강으로 배수된 영토라고 하는 루이지애나준주(Louisiana Purchase:1682–1762)영역이다.본 블로그 글 연속시리즈편 " (1)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 , (2)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 , (3)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7" 에서 조선(朝鮮)과 프랑스가 밀접하게 엮이는 시기를 1661년부터 1800년까지라 주장한 것이니 만큼 이것 역시 루이지애나 준주(準州)의 지속시기와 놀랍게도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루이지애나준주(Louisiana Purchase:1682–1763, 1801-1803, 1804-1812)우선적으로 유럽역사 즉 서양역사가 주장하는 사실에서 진의를 밝혀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자포니즘이 생성되기 전부터 이곳에는 일반 수공업에 의한 상공업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완성되고 더하여 산업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는 회화기술이나 판화기술, 인쇄술이 높아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시대환경임을 앞 글에서 확인했다.당시 파리박람회를 찾았던 관람객만도 천오백만명(Visitors:15,000,000)이었으며 참가국 42개국의 판매전시자(Business)가 52,200 개소이었다는 사실에서 신흥 중산층계급의 부르주아들이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들에 의해 대중적으로 상당한 소비욕구가 생성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값싼 소비재들과 화려한 도자기들은 신흥 중산층들에게 새로운 소비유행을 만들었고 이러한 것들을 새로운 취미생활로 이어지면서 도자기 그릇, 찻잔, 장식장, 가구등을 집안에 장식하거나 수집하면서 마구 사들이는 신흥부르조아들이 넘쳐났다는 것을 의미한다.이것을 당시 공예(工藝)의 혁명이라고 하니 오늘날 3D 프린트기술 혁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그렇게 볼 때 19세기말엽에 유럽인들의 생활패턴을 바꾸고 소비욕을 증가시켰다고 하는 자포니즘과 선조격인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봉건주와 유럽귀족들에게 불어닥친 시누아즈리(chinoiserie)의 영향력도 역사적으로 상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인디언 보호지구(Indian Reservation:1979)-노래:올랜도 리바 사운드(Orlando Riva Sound)-앤소니 문과 라이너 피치(Anthony Monn and Rainer Pietsch) They took the whole Cheroke nationput us on this reservationTook away our ways of lifetomahawk and the bow and knifeTook away our native tonguetaught their English to our youngAnd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are nowadays made in JapanCherokee people, Cheroke tribe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그들은 체로키 땅 전부를 가져갔네우리를 이 보호구역에 쳐박아두고우리의 생활 방식 , 돌도끼그리고 활과 칼 마저 가져가 버렸네우리의 모국어도 빼앗고우리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네그리고 우리가 손으로 꿴 구슬들은지금은 일본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네체로키 사람들, 체로키 부족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위 음악 가사는 전자에 이야기하였던 인디언 보호지구(Indian Reservation:1979)란 서정적인 노래의 가사이다.1979년 올랜도 리바 사운드(Orlando Riva Sound)는 "Lady, Lady, Lady"와 함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독일을 대표하기 위한 경쟁에서 5위를 차지했다. 그 해, 그들은 폴 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Paul Revere & the Raiders)의 히트곡인 "Indian Reservation"으로 또 한번 히트곡을 냈다. 5인조그룹 폴 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에 의해 1971년 7월 24일 빌보드 핫100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백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였던 이 곡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원주민)들의 한 부족인 체로키(Cheroke) 족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픈 현실을 노래하고 있는데 특히 가사 중에 체로키족이 생계로 이어가고 있는 꿴 구슬조차 양키일본(Japan:nation개념)에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요코하마가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3" 의 소제 재퍼니스(Japanese)와 흰독수리 상징의 역사에서 말한 사실과 같이 일본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양키들이다.이 양키는 특별하게 국가나 민족개념이 없고 오직 개신교를 바탕으로 하는 집단인데 이들의 정체성도 모호한 것으로 대체적으로 이주민 백인을 지칭한 명칭이다.물론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역사는 신대륙(新大陸)이란 모호한 명칭아래 서양세력들이 유럽에서 이주한 16세기 전에 역사는 깡그리 무시되고 있어 서양자료만 보고 우리가 본질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현재 미국인들이 개척시대라 하여 동양계나 혼혈계, 아프리카계, 타타르계, 기타 미국시민 귀화한 계층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조선왕조실록에 야인(野人)으로 기록된 인디언들만 개척의 대상이 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물론 미국시민으로 귀화하지 않고 남아 있던 인디언원주민 이외 사람들은 거의가 추방령으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는데 다음 사진이 말해 주고 있다. 엉클 샘(Uncle Sam:US,미국정부)추방법(Indian Removal Act)과 미국이외 지역으로 소개령(疎開令)인디언 체로키족(Cherokee)에 대해 역사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들이 북아메리카대륙을 점령하기 시작한 16세기부터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 역사에 대해 바르게 알 수가 없다.그렇다고 하여 인디언이란 개체만을 놓고 우리역사전체로 보는 것도 무리가 있는 사실이다.16세기에 양키(이민자, 정착지없이 떠돌아다니는 백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북미대륙의 동부(東部)에서 남동(南東)쪽 걸쳐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유역에 체로키족이 살고 있었고 프랑스, 영국, 미국간에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1754-1763), 앵글로 체로키 전쟁(Anglo-Cherokee War:1758-1761)과 치카모가 전쟁(Chickamauga Wars:1776-1794)에서 조상의 영토를 지키고자 체로키족은 노력 하였지만 결국 열세을 면치못하였고 1794년 양키와 사이에 텔리코블록하우스조약(Treaty of Tellico Blockhouse)이 체결된 후, 문명화의 길을 용감하게 걸었다고 하고 있으며 그들은 치카소(Chickasaw), 무스코기부족연합(Creek:Muscogee),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과 5대 부족의 연합을 결성하고, 백인의 문명을 받아들여 서양교육제도, 관공서, 공장같은 백인사회 구조 등을 도입하는 등 문명화된 움직임이 있었지만 결국 그곳마저도 금(gold)이 산출된다는 이유만으로 쫒겨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체로키 원주민 공동체의 서구화는 미개해서 서양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렸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그만큼 사회역사성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1830년대에 조지아주(Georgia)의 골드러시(gold rush)로 인해 양키들이 그들의 토지에 난입해 왔고 켈트족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이며 붉은머리 소유자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1767-1845,재임:1829-1837)대통령은 취임직후 1830년 제정된 ‘인디언 추방법(Indian Removal Act)’에 따라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6만명의 "5대 부족" 인디언들을 1838년 아칸소(Arkansas)와 오클라호마(Oklahoma)의 ‘인디언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체로키 족들은 이에 대항하여 저항 전쟁을 벌였고, "세미놀 전쟁" 등의 인디언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제1차 세미놀 전쟁(1817-1818), 제2차 세미놀 전쟁(인디언의 베트남(南越)전쟁:1835-1842), 제3차 세미놀 전쟁(1855-1858)이다.1853년에는 미국 동인도 함대를 인솔하여 일본 방문했다고 하는 페리의 흑선(黑船)사건도 있었다.5대부족에 대한 강제 원주민 이주는 도보로 진행되었고 이를“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불렸으며 당시의 기록은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의 노파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걷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이런 가혹한 강제 이주는 체로키족만 8천명 가까운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5대부족이었으니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테네시, 켄터키, 일리노이, 미주리, 그리고 아칸소주 전역에서 800마일[1,287(km)]이상 떨어진 곳까지 걸었고 결혼을 한 사람들은 질병, 유해한 환경노출, 기아로 고통 받았으며 4,000명이 사망했다고 했으며 체로키인(Cherokees)들은 노예를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흑인노예들을 데리고 갔다는 말도 있다. 다른 기록에는 미국정부의 강제이주정책으로 한겨울에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1900km나 떨어진 인디언 보호구역에 강제이주되었으며 헐벗고 굶주린 체로키 원주민들은 무려 4천명이나 저체온증이나, 영양실조로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인디언보호구역'에 갇힌 체로키원주민(Cherokees)들은 약간의 보조금을 받으며 기념품 장사를 하여 겨우 살았지만 북아메리카원주민인 인디언들은 앞날에 대해 희망을 가지거나, 세상을 바꾸려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았다고 하였다. 노스캐롤라이나주를 비롯해 동부에서, 남동쪽에 있었던 체로키 족(Cherokees) 일부는 백인의 도움으로 산 깊은 곳에서 숨어 강제 이주를 피해 현재 “동부 체로키 족”(인구 약 1만명)의 시조가 되었다고도 한다. 체로키 족(Cherokees)이 사라진 조지아 등 남부의 광대한 토지는 추점에 의해 양키들에게 그냥 나눠 주었고 나중에 면화산지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체로키 족은 크게 서부와 동부로 분단되게 되었다. 1971년에 히트했던 곡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은 그러한 나라와 언어를 강탈 당했던 체로키 등 원주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잘 표현한 노래이다.이것을 연장하여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서양세력에 의해 취해진 강제이주의 역사는 고려인(高麗人)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인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공화국으로 추방되는 대대적인 강제이주(deportatsiya)가 1937년 겨울철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이 바로 본 블로그가 말한 "1937년 10월 29일자에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고려송환완료? http://blog.daum.net/han0114/17050102" 로 나타난다.본 블로그 글 "북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9 "에서 밝혔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기존체제의 구성원들을 추방시킨 일지를 보면 (1)1830년 제정된 ‘인디언 추방법(Indian Removal Act), (2)1882년에 발효된 중국인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 그리고 (3)10년 후 1892년 게리 법(Geary Act)에 의해 갱신되었고 (4)1902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 의해 추방법이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는 사실, (5)1917년부터 1920년과 1947년부터 1957년동안 사회주의자와 미국건립역사에 반하는 세력 추방운동 등 고립정책에 의한 추방정책은 미국내에서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여기에는 동양계 아시아인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다.위 그림은 1902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 의해 추방법이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근거하는 그림인데 1904년부터 인위적으로 코리아를 만들고 노랑색 즉 황인종만을 코리아 땅으로 소개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그림이고 더하여 동양인을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부류와 사화주의를 추종하는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다는 글을 찾을 수가 있다.사실상 붉은 괴물은 어떤 주체를 말하는 것일까?두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 유색인종들을 문명세계에 인도하는 '백인의 책무'을 짊어진 존 불(John Bull:잉글랜드정부)과 엉클 샘(Uncle Sam:US,미국정부)이다.고려인이라고 하면 한반도역사에 일치하는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고려인에도 수많은 다른 종족도 포함되었다고 해야 맞다.다만 한글이나 한문으로 고려인(高麗人:Korea)이라고 하는 사람만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고려인(高麗人)들은 본래 거주하던 원동(遠東)에서 이주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고려인들이 말하는 원동(遠東)은 현재 블라디보스톡(海蔘威:Vladivostok)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만약 원동을 연해주라고 하면 본 블로그 글 "연해주(沿海州)와 쌍성雙城)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http://blog.daum.net/han0114/17050581"에서 밝힌 연해주는 캐나다 동부 중 뉴브런즈윅(New Brunswick)주, 노바스코샤(Nova Scotia)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주 전체를 가리키는 마리팀즈(Maritimes)이며 연해주가 아니고 먼동쪽이란 단어 원동(遠東)이라고 하면 바로 체로키족이 추방당하기전 미시시피강 동부에 위치한 고려인들이 존재한 영토 지명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당시 소련 비밀경찰 수장 예조프(N. Ezhov)내무인민위원은 몰로토프(B. Molotov)인민위원회 위원장(총리)에게 보낸 같은해 10월 29일자 서한에서 모두 171,781명의 한인을 “송환” 완료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Bugai,159-160),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넘어오는 과정에서 고려인 에리트 수천명이 사살된 상태였기 때문에 정확한 진의를 알 수도 없고 미국과 쏘련 정치인들에 의해 상당한 역사사실이 숨겨지고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그리고 양키들에 의한 추방법으로 이민족의 소개(疏開:내쫓음)가 마침내 마무리 되었다는 사실은 마침내 서양세력들에 의해 역사짜집기가 완성되었다는 것과 같다. 5)미농화지(美濃和紙:Mino washi) HOLLAND JAPONISM Dutch artists x Mino Washi send message of Beauty to the world Japonism has its origin in the early 17th century Holland and has influenced European artists in the 19th century.In 1609 de Liefde (VOC) headed for Japan at the risk of their lives. They encountered beautiful Japanese paper and took some back to Europe.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is one of the famous artist in the 17th century the Netherlands. He liked using beautiful Japanese paper called GANPI in his works.Even though each part of history seems to be disconnected from each other, actually history is an accumulation of small DNAs.Then Japonism spread throughout Europe in the 19th century.In the 21st century, Japanese paper goes beyond space-time and lives on to bring beauty around the world.Now this paper is handed back to Dutch artists again, for them to work on it as an homage to History.Holland JaponismA new history of Japanese paper has just started. 자포니즘이란 주제로 정신없이 마구 달려왔다.이제 일본 종이라고 하는 미농화지에 대해 생물학적 근원와 원산지를 살펴보자.미농화지는 우리가 미농지(美濃紙)라고 하는 것으로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질기고 얇은 종이이며 묵지(墨紙)를 받치고 글씨를 쓰거나 장지문 따위에 바르는 데에 쓰는 종이라고 정리된다.일단 특징은 얇고 질기다는데 있다.위 영어자료는 네덜란드의 자포니즘역사에 대한 자료이며 여기서도 미농지를 말하고 있다.내용을 보면 더치(Dutch)의 화가(畵家)와 미농화지(Mino Washi)가 아름다움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했다고 하면서 더치의 동인도회사(VOC)소속 함선 데리푸데호(De Liefde)가 1609년에는 히라토(平戶)에 상관을 설치하고 화지(和紙)를 얻어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으며 이것을 감피, 간피(Ganpi) 또는 화지(和紙)라 하거나 미농지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7세기 더치 출신 화가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1669)은 그의 작품에서 윤기가 나고 매끌매끌한 간피(Ganpi)란 아름다운 일본종이(Japanese paper)를 사용하기를 좋아했고 이러한 역사의 작은 DNA의 축적이 유럽전역에 19세기에 자포니즘이 생성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참고:조엄(趙曮),해사일기(海槎日記); 金健瑞,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世界大百科事典 第2版の解説(http://kotobank.jp/dictionary/sekaidaihyakka/) みのがみ【美濃紙】미노가미岐阜県美濃市で漉(す)かれている和紙の総称。書院紙ともいう。古代において,美濃国は最も製紙の盛んな国であった。日本最古の紙は702年(大宝2)の美濃,筑前,豊前の戸籍用紙であるが,そのなかでも美濃の紙は純コウゾ皮を原料としたので,繊維が均等に絡みあって,漉きむらがなく優れている。古代の美濃紙は国府(不破郡垂井町)を中心として,揖斐(いび)川流域で漉かれたものと想像される。中世になって,美濃紙の技術はさらに向上し,各種の紙を漉き出すようになった。위는 또 미농지에 대한 열도일본자료이다.내용을 보면 기후현(岐阜縣) 미노시(美濃市)에서 생산되는 일본 종이라 하였고 고대 미농국(美濃國)은 제지(製紙)가 성한 지방이었다고 하였으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는 702년의 미농(美濃),축전(筑前),풍전(豊前)지방의 호적용지(戸籍用紙)라 하였고 그 중에서도 미농지는 삼지닥나무(=かみのき·かぞ)카미노 키카조 껍질을 원료로하여 섬유가 균등하게 얽혀있어 기복이 없이 우수하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의 미노가미(美濃紙)는 소재지(후와군 다루이초)를 중심으로 이비강(揖斐川)유역에서 손으로 가둠뜨기한 것으로 추측되며 중세가 되면서 미농지의 기술은 더욱 향상되고 각종 종이를 양산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일본 종이 미농지를 다른 명칭으로 서원지(書院紙), 농전(濃牋), 농주지(濃州紙), 미농화지(美濃和紙)라고도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왜지(倭紙)라 하고 이것이 곧 화지(和紙)의 한 종류이며 특히 희고 반들거리며 질긴 편이라 하였다. 재질에서 일치한다.우리 사서(史書)들을 보면 이 미농지는 일본 측에서 조선(朝鮮)사신들에게 주었던 예물 가운데 하나라 말하고 1763년 정사 조엄(趙曮),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등 통신사 일행이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이듬해 태수의 근족(近族)인 가즈사(上總) 오타키번(大多喜藩) 번주 마쓰다이라 마사하루(松平正溫)가 조선사신에게 답례로 미농지를 주었다고 기록이 있으며 또한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권5, 지(志)편에 일행이 받은 사예단(私禮單)에 태수근족(太守近族) 중 4인이 보낸 각각의 미농지(美濃紙)가 300첩이라고 하고 있다. Wikstroemia ganpi Maxim. = Daphne ganpi (Sieb. & Zucc.) J.J.Halda = Diplomorpha ganpi Sieb. = Passerina ganpi (Sieb. & Zucc.) Sieb. & Zucc. = Stellera ganpi (Siebold & Zucc.) Meisn. = Stellera ganpi Sieb. & Zucc. = Wikstroemia canescens var. ganpi (Sieb. & Zucc.) Miq. = Wikstroemia lasiocarpa Nakai 미농화지를 8세기부터 만드는데 일본자료에는 사용되어 온 일본 관목은 윅스트로우미아(蕘花屬:Wikstroemia)라 말하고 있다.간피(雁皮:ガンピ,Gampi:Ganpi)라는 것은 참닥나무를 뜻하는 [식물]안피나무; 삼지닥나무을 말한다.즉 현재분류체계에서 간피(Ganpi)를 종명(種名)으로 학명 윅스트로우미아 간피[Wikstroemia ganpi(Siebold & Zucc.)Maxim]를 말하고 있지만 이 학명은 본 블로그에서 밝힌 근세기에 식물분류체계를 이용하여 세계삼한역사 자취를 없애버린 장본인으로 가장 많은 의심을 받고 있는 독일인 지볼트와 주카리니(Siebold & Zucc)가 1851년에 명명(命名)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나중에 러시아인 막시모비치(Karl Johann Maximowicz:1827-1891)의 이름을 학명에 달고 있는데 본 블로그 글 "한반도 분류학체계의 문제점 http://blog.daum.net/han0114/17050489"에서 밝혔지만 이 사람역시 조선생물분류체계가 생성되는데 채집한 표본을 바탕으로 한반도가 근원이라고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종(種)은 동아시아와 일본에 정확하게 원산지로 포진하고 있다.이를 한반도 생물학계에서는 산덕나무속(屬)에 넣고 이것을 왜저(倭楮)라고 하면서도 또한 근거도 없이 "거문도닥나무"라고까지 한다.그러나 열도일본산과 다르게 한반도는 산닥나무[Wikstroemia trichotoma(Thunb.) Makino]라 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식물학의 아버지” 또는“열대지방에 있는 일본의 린네"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스웨덴식물학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가 명명한 학명 뒤에 조선사람이 아닌 일본인 식물학자 마키노(牧野富太郎:Tomitaro Makino,1862-1957)가 버티고 있다.열대지방 일본이 어딜까?멕시코와 카리브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일본화지의 재료를 거문도닥나무라 한 것은 이 종(種)들이 한반도 남부에 재배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맞추기 위함이다.그러나 애초부터 거문도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다.산닥나무속(Wikstroemia)왜저(倭楮)(산닥나무와 거문도닥나무)요화속(荛花属:Wikstroemia)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未分级) 被子植物 Angiosperms(未分级) 真双子叶植物 Eudicots目: 锦葵目 Malvales科: 瑞香科 Thymelaeaceae屬: 荛花属 Wikstroemia GampiGampi or Ganpi are a group of Japanese shrubs, members of the genus Wikstroemia, some of which have been used for making paper since the 8th century. It is used to make the high quality washi paper, as are kōzo and mitsumata trees. 세종 12년 경술(1430)8월 29일(정유) 예조에 전지하여 대마도에서 왜저를 구해오게 하다 예조에 전지하기를,遣人于對馬島, 求得造冊紙倭楮以來。“대마도(對馬島)에 사람을 보내어, 책 만들 종이 왜저(倭楮)를 구해 오게 하라.”하였다. 세종 16년 갑인(1434)8월 3일(정미) 경상도 동래현과 경기 강화에서 재배하는 왜닥의 작황상황을 감사가 보고하게 하다 예조에서 전지하기를,慶尙道 東萊縣及京畿 江華, 栽植倭楮, 未有考察培養之條, 恐將絶種。 令監司每年夏秋, 開具榮枯之狀以聞。 “경상도 동래현과 경기 강화에 왜닥[倭楮]을 재배하였으나, 가꾸는 것을 고찰하는 조문(條文)이 없어서 장차 절종(絶種)이 될까 두려우니, 감사로 하여금 매년 여름과 가을에 잘되고 못된 상황을 갖추어 아뢰게 하라.”하였다. 세종 21년 기미(1439)1월 13일(임진) 조지소에서 왜닥씨를 태안ㆍ진도ㆍ남해ㆍ하동에 나누어 심게 할 것을 아뢰다 조지소(造紙所)에서 아뢰기를,○造紙所啓: "江華所種倭楮之實, 請於海氣相連忠淸道 泰安、全羅道 珍島、慶尙道 南海ㆍ河東分種。" 從之。“강화(江華)에 심은 왜닥 씨[倭楮種]를 바다 기운이 서로 연해 있는 충청도의 태안(泰安), 전라도의 진도(珍島), 경상도의 남해(南海)ㆍ하동(河東)에 나누어 심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 7년 신사(1461)8월 20일(정해) 군사 김영전을 파직하고 국문토록 하다 ○丁亥/先是, 有僧信云啓全羅道 靈光 時兒島有倭楮, 卽馳書于觀察使, 令培養之, 至時信云訴于司憲府曰: "郡事金永湔 ‘以僧啓楮木産處, 煩擾郡民’, 拘留海島, 且加大杖, 欲致於死, 適遇濟州船, 潛逃(而)而來。" 憲府啓之, 命罷永湔職, 令拿來鞫之。이 앞서 중[僧] 신운(信云)이 전라도(全羅道)의 영광(靈光) 시아도(時兒島)에 왜저(倭楮)가 있다고 아뢰므로, 곧 관찰사(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여 가꾸어 기르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신운이 사헌부(司憲府)에 호소하기를,“군사(郡事) 김영전(金永湔)이, ‘중[僧]이 닥나무[楮木] 나는 곳을 아뢰어 군민(郡民)을 번거롭게 한다.’고 하여, 바닷섬에 구류(拘留)시키고 또 큰 매로 쳐서 죽음에 이르게 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제주(濟州)의 배를 만나 몰래 도망쳐 왔습니다.”하므로, 사헌부에서 아뢰니, 명하여 김영전을 파직(罷職)하고 잡아 와서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세조 8년 임오(1462)11월 12일(임인) 전라도 관찰사에게 영광 거두산에서 나는 왜저(倭楮)를 조사ㆍ간수케 하다 ○承政院奉旨馳書全羅道觀察使曰: "道內靈光 巨頭山東麓産倭楮, 守令匿不以聞, 甚不可。 倭楮條數親審以啓, 且定看守人, 嚴加禁防。"승정원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치서(馳書)하기를,“도내(道內)의 영광(靈光) 거두산(巨頭山) 동쪽 산기슭에서 왜저(倭楮)가 나는데, 수령이 숨기고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매우 옳지 못하다. 왜저의 조수(條數)를 친히 살펴서 계달하고 또 간수(看守)하는 사람을 정하여 엄하게 금방(禁防)을 가하라.”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토산】『신증』 왜저(倭楮)경상도(慶尙道) 울산군(蔚山郡)【토산】『신증』 왜저(倭楮)경상도(慶尙道)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토산】왜저(倭楮)경상도(慶尙道) 거제현(巨濟縣)【토산】왜저(倭楮)경상도(慶尙道) 고성현(固城縣)【토산】왜저(倭楮)자란도(自卵島)에 심는다.황해도(黃海道) 풍천도호부(豐川都護府)【토산】왜저(倭楮)이 왜저라 하는 산닥나무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경상도와 황해도에 토산(土産)으로 나타난다.일본에서 자라는 원종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일본을 서양연합체로 볼 때 일본인들의 본거지는 애매할 수밖에 없다.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카리브해 연안과 멕시코 지역의 중앙아메리카대륙,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이라고 정리되었다.하지만 이러한 수종이 조선땅에 자생할 수 있었다고 하여도 남쪽지역인 한반도 경상도는 이해가 되지만 황해도에 나타난다는 것은 한반도 지형사정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구도이다.이러한 토산지가 말하는 지형은 경상도와 황해도가 근접해야 한다.물론 이런 상황만 보더라도 한반도 지형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위 영어자료에서 일본종이 화지(和紙)인 감피(Gampi)라고 하는 종(種)들의 설명을 보면 전부 산닥나무 요화속(荛花属:Wikstroemia)으로 설명되고 있다.하지만 이 종들이 거의 전부가 아시아용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판단할 때 이 종(種)은 진짜 미농지 종(種)이 아니다.또한 영어자료에 꾸지나무(構樹)와 삼지닥나무(三椏:結香,Edgeworthia papyrifera)라 하였다.지금은 이 삼지닥나무 (Edgeworthia chrysantha)역시 지볼트와 주카리니(Sieb. & Zucc)가 명명했고 일본열도를 정확하게 지정하고 있다.지볼트와 주카리니(Siebold & Zucc)가 이 학명을 명명하고 난 2년 후 1853년에 동인도함대를 인솔하고 일본 방문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고 하는 페리의 흑선(黑船)사건이 이와같이 존재하는 것이니 만큼 손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본 블로그 글 "오매(烏梅 Fructus Pruni Mume) http://blog.daum.net/han0114/17049765"에서 밝혔지만 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지볼트와 주카리니가 1851년경에 있었던 곳은 다름이 아닌 멕시코와 카리브해 지역이라는 사실인데 한 살 적은 주카리니(Joseph Gerhard Zuccarini)는 지볼트가 일본에서 수집한 식물들을 분류하는 것을 도았고 나중에 멕시코 등지의 식물저술도 함께 했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식물을 채집한 곳은 현재 동아시아대륙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임을 알 수가 있다.산닥나무는 목안피(木雁皮)·요화(蕘花)·황안피(黃雁皮)등으로 나타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왜저(倭楮)’도 산닥나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며 1769년(영조 45년)에 간행되고 유형원(柳馨遠)의 17세기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고 있는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래종의 닥나무보다는 일본에서 가지고 온 왜저가 종이의 질을 좋게 하므로 인조 때에 일본으로부터 종묘가 수입되었고, 주로 우리나라 남쪽 해안지방에서 재배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상한 것은 한반도에서 충청도 경기를 뛰어넘어 황해도(黃海道)에 구태어 재배했어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이 나무를 이용하여 일본 미농화지를 만들었고 이를 닥나무(楮:KOHZO), 안피나무; 삼지닥나무(雁皮:GANPI), 미츠마타(みつまた:MITSUMATA:三椏)라고 일본인들은 호칭하고 있는데 닥나무와 산닥나무는 다른 종이다. 또한 일본에 제지기술이 전래된 것은 610년 무렵이고,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18년 봄 삼월 고구려왕에게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이 채색을 가한 종이와 먹, 아울러 수대(水碓:물레방아)로 움직이는 맷돌인 연애(碾磑)와 연애의 뚜껑을 만들어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를 통해 종이와 먹, 맷돌의 원료 및 제조법에 관한 것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일본이 일정한 수준의 제지술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하지만 유럽자료에서는 불교승려들이 점차 일본에 미술을 전파되면서 제지기술이 일본에 전해졌으며 때문에 목판인쇄(木版印刷:block painting)술이 일본인에 의해 사용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751년에는 중국인들이 아랍에 포로가 되어 제지기술 초지법(抄紙法:종이뜨기)을 전수하였다 하였고 종이기술이 아랍세계를 거쳐 유럽으로 전달되는데는 약 400년이 걸렸다고 말하고 있다.1150년 당시 에스파냐를 점령하고 있던 무어인(Moor)에 의해 제지용 물레방아(paper mill)가 만들어졌다고 한다.서기 1250년에는 이탈리아가 주요 종이 생산국이 되며 파브리아노(Fabriano)는 13세기부터 유럽에서 산업규모로 고급 종이를 만든 가장 초기의 장소 중 하나였다고 말하며 다년간 유럽 시장을 지배했다 한다. 1348년에 프랑스 수도승들은 성서를 위한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고 1411년 독일 최초의 제지공장은 이탈리아인의 도움을 받아 제분공장(製粉工場)을 개조하였다.비로소 영국(England)은 1588년 자신의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고 1680년에 새로운 세계 최초의 제지공장이 멕시코(Mexico)의 수도 근처에 있는 콜와칸(Colhuacan)에 스페인인에 의해 설립되었다.북아메리카대륙에는 독일 이민자 윌리엄 리튼하우스(Willian Rittenhouse:1644-1708)에 의해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설립되었다.고구려(高句麗)는 서기 610년 3월에도 승려 담징(曇徵:579-631)과 법정(法定)을 보내기도 하였다는 사실이 있어 이것은 고구려가 유럽에 처음 종이제조 기술(技術)을 전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우리나라에서 화지(和紙) 사용 기록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전기에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온 왜저(倭楮)를 충청도 태안, 전라도 진도, 경상도 남해와 하동 등지에서 재배하였다 하였고 그것을 재료로 한 왜지(倭紙)를 생산하기도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세종9년 정미(1427)때에는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강목통감(綱目通鑑)을 왜지(倭紙) 9백 59첩(貼)으로 인출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다른 기록에서 화지(和紙)의 원료로는 닥나무나 삼지닥나무, 대마(大麻, Hemp)나 저마(苧麻, Ramie)가 이용된다 하였고 제작법으로는 이러한 나무껍질의 내피(內皮)를 물과 융합되도록 저은 뒤 섬유의 엉킴을 풀어주고 이후 부유하는 섬유를 발을 사용하여 건져내는 방법으로 제작되는데 문제는 중국과 조선에서는 섬유와 섞였던 물을 자유롭게 흘려보내는 흘림뜨기(외발뜨기)방식을 주로 이용하지만 일본에서는 섬유를 틀 안에 채워 수직 방향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가둠뜨기(쌍발뜨기) 방식을 이용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고 백과사전에서 말하고 있다. 특히 위와 같은 가둠뜨기 방식을 이용하면 소량의 재료로 매우 얇은 종이를 여러 번 뜰 수 있고 종이의 질(質)을 균일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작은 구멍을 형성하는 성질 다공성(多孔性)때문에 먹을 이용하여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적합하지 못하는 반면 치밀하고 단단한 경도 때문에 펜글씨에는 적합하다고 말하고 있다.사실상 그림을 그리는데 적합하지 못하다고 하고 있는 사실과 판화 인쇄는 괜찬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네덜란드 이야기와는 다르다.6)고려종이(高麗紙) 닥나무(Broussonetia)근원그렇다면 요화속이 아닌 닥나무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즉 동양종으로 알려지고 있는 산닥나무, 삼지닥나무, 안피나무등은 요화속(蕘花屬), 윅스트로우미아(Wikstroemia)으로 정리되지만 닥나무를 구수(構樹)라고 하고 학명이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로 파악되는 종은 동아시아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의 원산지가 북아메리카대륙 남부를 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본 블로그 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에서 말한 것처럼 고려에서 만든 종이의 재료 닥나무이다.이를 계림지(鷄林紙), 삼한지(三韓紙), 고려지(高麗紙), 조선지(朝鮮紙)등으로 불렸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경기(京畿) 바다 가까이에 있는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경상도(慶尙道) 동래현(東萊縣) 대마도(對馬島),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우도(牛島)가 토산지라 하고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과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하는 닥나무 분포지도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남부전역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 남동부지역을 지정하고 있다이것으로 역시 일본종이, 화지(和紙)를 만든다고 나타난다.네덜란드가 말하는 미농지의 원료가 어떤 것이고 그 원료가 되는 식물은 어떤 종류이며 또한 그 식물의 근원지가 어딘지를 밝혀 알아보아야 하는데 이 역시 닥나무를 말하고 있다.서양일본연합체가 제조한 미농화지 감피(Gampi)나 간피(Ganpi)라는 일본미농화지(美濃和紙)는 정확하게 구수(構樹)라고 하는 닥나무다.こうぞ 楮 (닥나무)1. (カミソ(紙麻)의 音便おんびん) 닥나무(학명;Broussonetia kazinoki 그냥 저 라는 것으로 小構樹)2. 뽕나뭇과(학명;Moraceae) 낙엽 저목(低木)3. 서일본(西日本:にしにほん)의 산악지대에 자생하며 섬유 작물로서 각지에서 재배4. 높이 약 3m에 달한다5. 잎은 뽕나무와 비슷하나 성질은 조금 얇고 거칠다그러나 한반도에서 말하는 닥나무는 일본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Broussonetia kazinoki 라 하는 것으로 이는 하위종으로 소구수(小構樹)라고도 한다.그러나 이것도 한반도에는 학명;Broussonetia kazinoki 라 하여 이것을 닥나무라 하는데 이것은 하위종이며 그냥 저(楮) 라는 것으로 작은구수나무(小構樹)이다.닥나무를 구수(構樹)라고 하고 학명이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Broussonetia is a genus of four species of trees in the family Moraceae, native to eastern Asia. One of these is the paper mulberry (Broussonetia papyrifera), whose bark fiber is used to make high-quality paper, in China, Korea and Japan. This species has been widely introduced and has become invasive in some areas. 영어자료에 보면 변함없이 브루소네티아(Broussonetia)는 동부아시아가 원산인 뽕나무과의 4개의 종이 있는 속명(屬名)이라고 하였고 이 중 하나의 종(種)은 나무껍질 섬유가 질 좋은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종이뽕나무(paper mulberry)라고 하였으며 이 종(種)이 넓게 알려지는 것은 일부지역에 침습종(invasive species)이라고 설명하고 있다.Broussonetia kaempferiBroussonetia kazinokiBroussonetia kurziiBroussonetia papyrifera 위 브로수네티아속 4사지 아종 중에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만이 다르다. 이것을 고려종이 닥나무 재질로 보았다.Five fossil fruits of †Broussonetia pygmaea have been extracted from borehole samples of the Middle Miocene fresh water deposits in Nowy Sacz Basin, West Carpathians, Poland. 폴란드 서부 카파시스(Carpathians)의 노비송치(Nowy Sacz)분지에 있는 민물 퇴적물 시추공에서 중기 마이오세(middle Miocene)시기의 멸종(†Broussonetia pygmaea)된 표본 화석 5개가 추줄되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그것을 보면 구지나무가 원종임을 알 수가 있다.꾸지나무(構樹)의 분류체계를 보면 속씨식물군(被子植物:Angiosperms), 진정쌍떡잎식물군(真雙子葉植物:Eudicots), 장미군(薔薇類植物:Rosids), 장미목(薔薇目:Rosales), 뽕나무과(桑科:Moraceae), 닥나무속(構屬)의 학명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로 분류하는 종이뽕나무(paper mulberry)혹은 타파 천 나무(tapa cloth tree)라고도 한다.한어자료 당조(唐朝)사람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구수(構樹)라 하였고 명대사람 주숙(周肅;周定王)의 구황본초 (救荒本草)에는 저도(楮桃)라 하였으며 청(淸朝)사람 오기준(吳其濬)의 식물명실도고(植物名實圖考)에는 저(楮), 서진(西晉)사람 육기(陸璣)의 시소(詩疏)에는 곡상(谷桑), 춘추시대 시경(詩經)에는 곡수(谷樹)라 하였다.构树(学名:Broussonetia papyrifera、paper mulberry、 tapa cloth tree)是一种桑科构属的植物,也叫楮树或穀樹(穀音構),在臺灣又俗稱鹿仔樹。构树一名出自《酉阳杂俎》,别名有楮桃(《救荒本草》)、楮(《植物名实图考》)、谷桑(《诗疏》)、谷树(《诗经》)等。 그림 Paper Mulberry - Broussonetia papyrifera (View 80cm)科学分类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蔷薇类植物 Rosids 目: 蔷薇目 Rosales 科: 桑科 Moraceae 属: 构属 Broussonetia 种: 構樹 B. papyrifera 二名法 Broussonetia papyrifera(L.) Vent. 異名 Morus papyrifera L. 用途構樹其葉可以供作猪、牛、羊、兔、鹿的飼料,故在臺灣島民間又俗稱鹿仔樹。树皮可以造纸,或做成樹皮衣,是漢皮紙(桑皮紙)、和纸和韓紙的造紙原料之一。 構樹果实味道香甜好吃,有點類似草莓,然而不能到市场上出卖,因为太軟、易爛。 构树是一种优良的先驱植物,分布广、适应性强、抗逆性强,能大量吸滞粉尘和吸收二氧化硫等有毒物质,非常耐烟尘,自生繁衍能力强,速生,因此可以作为工厂和矿山区的绿化用树。构树在中国大陆广泛应用于城市园林绿化、工矿企业绿化,效果十分理想,也是三北地区的防护林和山区大力推广种植与封育成林的好树种。 위 한어자료에서 보면 구지나무라 하는 닥나무(構樹)의 잎은 돼지, 소, 양, 토끼, 사슴의 사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대만사람들은(臺灣島民) 록자수(鹿仔樹)라고 하고 이 나무껍질은 종이를 만들거나 갖옷을 만들며 이것은 한피지(漢皮紙,桑皮紙), 화지(和纸)와 한지(韓紙)의 원료라 하여 중국, 조선,일본 종이의 재료라고 말하고 있다.닥나무열매는 달콤하고 맛이 있으며 딸기와 같은 맛이 조금 있지만 시장에 내다 팔수가 없고 나무를 조성하는 것은 분포지가 넓고 적응성이 뛰어나며 분진(粉尘)과 이산화황(二酸化黃)과 같은 유독물질을 많이 흡수하여 매우 내연진(耐煙塵)에 좋고 자생적으로 번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생속도가 빠르며 중국대륙에서 도시원림녹화, 광공기업(工矿企业)녹화에 널리 활용되어 효과가 매우 좋으며, 삼북지역의 방호림과 산간지역에서 재배와 봉육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기에 좋은 수종(樹種)이다.It is a significant fiber crop in the history of paper. It was used for papermaking in China by around 100 AD. It was used to make washi in Japan by 600 AD. Washi, a Japanese handcrafted paper, is made with the inner bark, which is pounded and mixed with water to produce a paste, which is dried into sheets.위 영어자료를 보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구지나무라고 하는 닥나무는 종이 역사상 중요한 섬유작물이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서기 100년경에 중국에서 종이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AD 600년까지 일본에서 화지(和紙:Washi)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고 하고 있다. 일본의 수공예 종이인 화지(和紙:Washi)는 안쪽 껍질을 찧고 물과 섞어 반죽해 종이로 말리는데 제작법은 수직 방향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가둠뜨기(쌍발뜨기) 방식과 같다. 7)포르투갈,더치와 왜 양이(洋夷) 본 블로그 글 "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0 "와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 http://blog.daum.net/han0114/17049532"에서 더치(네덜란드)와 일본은 동일한 체제라는 것을 알았고 더하여 양키와 일본 역시 같은 부류라는 것도 알았다.더하여 더치(네덜란드)와 양키가 또한 같은 세력이라는 사실 또한 밝혔다.때문에 삼단논법으로 더치(네덜란드)와 양키 그리고 일본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자포니즘이란 사조(思潮)에서 이 미농지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라고 네덜란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17세기초 서양문물이 들어 올 시점에서 생성된 일본의 독특한 문화가 난학(蘭學)이라 하였고 이것을 일본인들은 서양문화라고 하면서 더치 즉 화란(和蘭)문화임을 알렸다.그때부터 동양과 서양문화가 다르다는 공식이 성립된 것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그것의 역사장소는 남방지역인 나라현의 아스카 촌(飛鳥村)을 중심으로 생성된 대화국(大和國:AC250-710)으로 놀랍게도 그곳은 열대지방이다.그곳이 진정 아시아대륙이란 말인가.아시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와 일본이 연결되는 듯하지만 양키와는 무관하다.어쨌던 난학을 화(和)문화라 하였고 이것을 스스로 열도일본문화의 상징처럼 알리려 하였지만 동서양이 구분되지 않는 체제에서는 별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통해 알렸다. 열도일본인들은 네덜란드 즉 서양문화의 첨병인 것처럼 또는 그들 스스로가 네덜란드인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이역시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일본발음 또한 화(和)가 와(わ)로 발음되고 우리 말 음인 왜(わ[倭])와 같고 일본에서 왜(倭)를 '와(wa)'로 발음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즉 화(和)와 왜(倭)가 동일하게 쓰였으니 같은 계통의 언어이다.1683년(숙종 39년) 동래부사와 대마도주가 왜관(倭館)의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禁制條項) 다섯 가지를 제정하고 비석으로 세운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에 일본인을 화인(和人)이라 표기하였다.또한 네덜란드를 한자표기로 화란(和蘭)이라 하였다면 약조제찰비에서 언급한 일본인은 네덜란드 즉 더치이며 서양인이 확실한데 더치인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결국 조선땅 왜관에 기거하고 조선관리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는 이야기다.위 사진들을 보면 일본의상을 착용하고 있지만 모두가 어색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아주 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본 블로그 글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지는 열도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8 "에서 말하길 1923.9.15자 보도사진인데 시카고에서 열린 일본관동대지진 피해에 대한 모금운동 광경으로 당시 미국정부의 적극적인 독려와 함께 기모노를 착용하고 손에는 들고 다니는 제등(提燈)을 갖춘 미국소녀들이 보이고 이 소녀들은 시카고거리를 모금하기 위해 행진했다고 보도되고 있다.그런데 글쓴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 기모노와 제등은 동양인 한국, 중국, 일본인들의 문화인 것 확실하지만 생김새가 모두 미국 백인계 서양인 소녀들이고 일본을 위한 지진피해자 모금이라 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주인공인 피해자 동양계 일본인의 모습들은 이 행사에 일체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때문에 미국인이지만 관습적으로 이들은 기모노를 입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마도 더치 즉 네덜란드계미국인라고 추측하였다.즉 일본인 스스로가 화인(和人)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더치 혹은 네덜란드와 동일하고 동양인이던 서양이던 간에 조선관리(朝鮮官吏) 눈에는 같은 부류에 속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이와 같은 사회에서 열도일본인들의 입지는 어땠을까?칼을 잘 쓰는 무사들은 용병(傭兵)으로 포르투갈이나 더치인들에게 고용되었을 것이고 일본동양계 백성들은 하층민으로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했을 것이다.대화국 즉 야마토 시대부터 최소한 14세기까지 서양계 예수회해양세력들이 이 나라에 접근하지 못했지만 예수회가 생성된 이후부터 준동(蠢動)이 시작되었다고 하고 백제가 망하고 아스카시대 백제유민들이 영토가 없어 헤매다가 고려(高麗)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이와같은 사실은 본 블로그 글 "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미시시피강상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6"에서 밝혔지만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新羅,B.C57~A.D935) 기간인 A.D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나타나 오늘날 에스파니야의 핵심왕국이라 할 수 있는 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1037-1230)의 페르난도1세(Ferdinand I, ?-1065)가 포르투갈세력에게 영토를 그저 주었다고 한 사실과 페르난도는 고려시대의 송조(宋,960-1279), 영종(英宗,재위:1063-1067)과 동일한 계보라고 밝힌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때문에 에스파니아를 송나라와 결부시키는 것에 남송(南宋)이 피해 달아난 곳이 바로 여송(呂宋)이었고 이 여송을 스페인이 차지한다는 결과라고 말했다.하지만 스페인 역시 오늘날 서양인들에게 사용된 명칭이기 때문에 사실상 에스파니아(Hispania)와 또 다른 해양세력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본 블로그 글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2" 에서 잉글랜드인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또한 왜(倭: Wa)와 웨기(waggie)라 한 것을 그대로 음에 따른 것이라 할 때 네덜란드 사람들을 화(和:Wa)라 하고 '와'라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때문에 세계삼한에서는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동일하게 왜(倭: Wa)라고 통칭했다.이것들의 옷을 화복(和服わふく), 종이를 화지(和紙わし)라 하고 이 또한 일본문화를 별칭하는 것이며 “왜(倭)라는 옛지명을 ‘야마토(大和)’로 읽으며 여기에도 화(和)가 있다.또한 왜(倭) 스스로가 조선의 벼슬아치가 되고 싶어 임진왜란 이후 조선(朝鮮) 남방(南方)에서 반(班)을 반(盤)으로, 번(番)으로 바꿔 불렀다고 하고 이것이 조선사회에 알려져 말성이 되고 세력화란 기류가 흐르자 조선지식층, 사대부에서 이를 남만(南蠻)이라고 했다. 대조선사회 내부로부터 남반들을 기피하고 꺼려하는 현상이 생성되어 점차적으로 반(班)이라는 본래 의미가 사라지는 현상까지 있었다고 하였다.어쨌거나 반(班)은 대조선 사회에서 존경받던 중추 관료 사대부(士大夫)선비들에게 붙이는 존칭이었음에도 왜(倭)가 스스로 반(南班)이 되고 싶었던 것이며 조선(朝鮮)사회에서 체제에 녹아들여 애를 쓴 것도 사실이지만 근원적으로 물욕이 과했고 물질에 집착한 나머지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도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선사회에서 남만 즉 서양해양세력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크다 할 것이다.본 블로그 글 "담배(南草, 西草, 煙草, Nicotiana:Tobacco) http://blog.daum.net/han0114/17049492 "에서 포르투갈을 왜(倭), 만이(蠻夷), 남만(南蠻)이라 할 사실을 밝혔고 이것은 임진왜란 이전 포르투갈이 나가사키를 통해 전달한 서양학문을 남만학(南蠻学) 또는 만학(蠻学)이라고 하였다는 사실과도 같은 이야기다.때문에 고종13년(1876)에 최익현(崔益鉉)이 서양 왜를 조심해야 한다는 상소문에서 5가지의 주의사항을 적시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我不備畏怯而求和, 則目前姑息, 而向後谿壑之慾, 何以充之? 所以亂亡者一也。우리가 대비하지 못하고 두려워서 화호를 구한다면, 당장은 편히 넘어가겠으나, 앞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어떻게 채워 주겠습니까.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첫째입니다. 彼之物貨, 皆淫奢奇玩, 而我之物貨, 民命所寄而有限者也。 不數年東土數千里, 無復支存, 國必隨亡, 此亂亡者二也。저들의 물건은 다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기이한 노리개인데, 우리 물건은 백성의 생명이 의지하는 한정이 있는 것이니, 몇 해 못가서 우리 땅 수천 리가 더 지탱하지 못하고 나라가 따라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둘째입니다.彼雖托倭, 其實洋賊, 和事一成, 邪學傳授, 遍滿一國, 此亂亡者三也。저들이 왜인이라고는 하나 실은 양적(洋賊)이니, 화호하는 일이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기독교)이 전수되어 전국에 두루 찰 것입니다.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셋째입니다. 彼欲下陸往來, 築臺而居處, 以講和無說拒之, 若任之, 則財帛婦女之攘奪, 惟意所願, 此亂亡者四也。저들이 뭍에 내려 왕래하며 대(臺)를 쌓아서 있으려 하는데, 강화(講和)를 거절할 말이 없다 하여 버려둔다면, 재물과 부녀의 약탈을 바라는 대로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넷째입니다. 倡爲此說者, 引丙子南漢事, 曰講和後彼此交歡, 至今若盤石, 今日與彼, 何獨不然? 彼徒知貨色, 無復人理, 眞是禽獸, 與禽獸和好, 不知其何說, 此亂亡者五也。이 말을 앞장서 하는 자는 병자년 남한(南漢)의 일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강화한 뒤에 피차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이제까지 반석(盤石)과 같은데, 오늘날 저들과 만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 저들은 재물과 여색을 알 뿐이고 다시는 사람의 도리가 없으므로 참으로 짐승이니, 짐승과 화호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다섯째입니다라고 하고 있다.최익현은 조선말 서양해양세력들에게 비유하길 짐승(與禽獸)이라 하였다.조선사회에서 불신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렇게 볼 때 임진왜란 후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스스로 개혁코저 한 것으로 파악되는 더치(Dutch) 역시 노력은 했겠지만 우리조상들은 이들을 왜(倭)라 한 것이 틀림없다.지금까지 한반도 사관의 한계 때문에 왜구(倭寇)라 하면 몸집작고 단신이라 하여 열도일본인을 지칭한 것으로 한정하여 알고 있었지만 기실 당시 해양세력인 서양인 전체를 지칭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만큼 조선관리나 사대부학자들이 왜의 문화, 역사, 학문 모두를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왜라 하는 지칭으로 알 수가 있다.일본(日本)이어야 하는 네덜란드에서 미농화지에 대해 말하길 세계에 아름다움을 전한 메시지라 하면서 자포니즘(Japonism)은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자포니즘이 매우 부풀려져 있다는 이야기다.즉 열도일본인들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고 전부 해양세력인 더치인이나 유럽인들에 의해 자포니즘이 생성되었으며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정리할 수 있다.이것은 스스로 네덜란드가 일본연합체 소속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과 같다.또 미농화지는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Nara period,AD710-794)에 처음으로 고품질 종이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일본자료와도 다르지 않지만 그렇게 보는 이유가 원래 종이 일부가 나라(奈良)의 보물창고 정창원(正倉院:Shōsōin)에 보존되고 있었다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이는 남방지역인 나라현의 아스카 촌(飛鳥村)을 중심으로 생성된 대화국임을 알게 하지만 정창원은 2차대전후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때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즉 정창원이 어디에 실제로 있었던 장소에서 아스카촌이 있어야 하고 원래종이가 보존되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그럼에도 지금 현 역사가 동양과 서양으로 두쪽으로 분리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글쓴이는 이런 현상이 마치 나가사키 짬뽕같다고 생각된다.본래 나가사키 짬뽕은 중국의 볶음국수 초마면(炒碼麵)과 일본(日本)의 찬폰(찬펑:ちゃんぽん,Chanpon)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짬뽕이라는 의미는 해물과 닭, 돼지고기 등 남은 재료를 가지고 마구 잡탕으로 섞어 볶아 만든 국수를 말하는 것이라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나가사키(長崎)의 역사처럼 짬뽕같은 역사혼란과 같다고 생각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서양과 동양을 혼입하여 마구섞어 놓은 것 같은 역사가 바로 오늘날 열도일본역사란 사실에 새삼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나가사키 짬뽕, 어원(語源)의 유래를 백과사전에서 찾아 보면 복건성(福建省)사람들의 ‘식사 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이었던 취판‘吃飯’의 발음인 샤뽄(シャポン) 또는 셋뽄(セッポン)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고 현실적으로 잡다하게 여러가지 재료를 섞는 모습을 옛날 나가사키(長崎:ながさき)의 방언인 ‘찬폰(ちゃんぽん)’으로 표현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중국인을 ‘찬(チャン)’, 일본인을 ‘폰(ポン)’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인데 일본(日本)의 쇄국시대(鎖国時代)였던 에도시대(江戸時代:1603-1867)에 일본의 유일한 개항지였던 나가사키에서는 외래문화를 흡수하여 나가사키만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키곤 했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성을 배경으로 나가사키 짬뽕(長崎ちゃんぽん)은 일본과 중국의 식문화가 합쳐져 개발된 요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더치인들이 관리하는 나가사키에서 외래문화(外來文化)라 함은 바로 중국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치(네덜란드)전통적인 물고기 수프(Dutch Fish Soup)와 중국의 국수면(湯麪)이 혼합되어 나가사키 짬뽕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한다.8)마무리자포니즘으로 본 일본 문화라는 것은 서양해양세력들의 문화이다.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 역시 세계삼한역사의 백제문화이다.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시대에 포르투갈을 백제유민들의 국가체제로 보는 관점에서 그렇다.일본 기모노를 화복(和服)이라 한다는 것은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이 종식과 더불어 17세기 초기 더치가 차고 앉기 전까지 포르투갈문화가 그것을 차지했겟지만 그 이후에 더치(Dutch)는 포르투갈과 달리 일본 사회모든 것에서 영향을 끼쳤고 교육이나 문화에 발전을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주도한 것은 틀림없이 더치인들이다.그것이 오늘날 까지 일본사회에서 난학(蘭學)으로 문신처럼 남아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다시말해 자포니즘이라는 것은 네덜란드 즉 더치인들의 일상적인 문화창작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같은 유명화가들이 우키요에 판화에 흠취되어 자신의 작품까지 품어 확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것은 전통적으로 늘 접했던 기법이기에 고흐에게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겉옷 기모노, 조례복(朝禮服)을 칭하는 사실에서도 독창적인 디자인을 바탕으로 하는 전위예술 또는 회화, 조각, 건축, 공예 등의 공간적 예술을 총괄하는 조형예술이라고 하는 유럽의 아방가르드 패션(avant-garde fashion)으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이 더해지며 이것이 서양패션 산업을 리더했다고 볼 수 있고 각 종 무늬가 화려하게 그려지고 작품화 또는 상품화되기까지의 과정은 바로 자포니즘이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열도일본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근원적인 역사사실을 비추어 볼 때 동양인 열도일본인이 아닌 서양부르주아들의 연합체 성격을 띤 예술성이 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열도일본인들과는 무관한 이야기다.화복의 새겨진 문양들은 지금도 네덜란드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그런데 문제는 이런 독특한 디자인으로 하여금 산업화가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사실과 해양세력으로 가장 부흥을 이루던 더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전부 양키(Yankee)문화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와 닿는다.그렇다면 현재 "japan"이라고 하는 것은 더치(Dutch)가 아니라 영어화된 명칭인 양키(Yankee)세력들로 이동하여 결국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의 상공업과 수공업산업을 장악하고 주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더치(Dutch)와 양키가 17세초엽부터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서 친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하고 서양해양세력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양키(Yankee)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생성되었을 것이란 짐작도 가능한데 열심히 부지런히 작품에 또는 산업활동에 집중했다고하는 면을 그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물론 이러한 연합체의 명칭이 다소 오늘날 비하 명칭으로 알려져 불명확하게 이런 저런 의미를 다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일본이란 명칭은 북아메리카대륙 이주민들 사이에 양키만큼 친숙하게 호칭되던 것이 아닌가도 한다.다시 정리하면 일본 즉 '자폰'이란 명칭은 당시 서양해양세력들의 집합체, 또는 상업경제체제 등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까지 미농지(美濃紙)의 근원지를 생물학적으로 위에서 밝혀보았지만 구지나무(構樹),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의 근원지가 대체로 체로키족(Cherokees)이 소개된 조지아주(Georgia)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도 의미가 크다.양키문화는 곧 더치문화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본 블로그 글 "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0"에서 일단 살펴본 사실이지만 재차 양키(Yankee)어원을 보면 더치(Dutch)어 'Jan' 'ki' 로 부르던 것이니 만큼 분명 현재 네덜란드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양키는 서로가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상용한 호칭이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어쨌든 네덜란드 이주민 즉 더치인들이 미국독립전쟁이전까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 상권과 경제권을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곳들을 네덜란드식민지라 하기 때문이다.자료에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 뉴잉글랜드의 이주자(protestant)들을 양키라 하여 'Yankee Doodle' '양키 멍청이'라 하였다는데 이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사용한 지칭이라 하였고 또한 양키들은 손재주가 많았다고 알려지는 것과 동시에 인디어보호지역(Indian Reservation)이란 노래에서도 발견되지만 양키 즉 일본(Japan)은 체로키족의 수공업인 꿴 구슬까지 빼앗아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손재주가 많았다는 것은 결국 수공업산업이 발달 할 수 있는 인적기반이 아니겠는가.이것에서 일본은 분명 아메리카대륙의 "japanese"와 연결되어야 하며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지역에서 수많은 수공업을 영위하고 그들만의 경제권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손재주가 많은 적극적인 경제활동에서 발단된 것임도 알 수가 있다.북아메리카대륙의 경제는 기계산업을 주도하던 영국과 다르게 가내 수공업이 발달하여 일상적인 생활용품들을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판매한 것으로 나타나며 이것들을 상품화하고 고급스럽게 만들기 위해 자포니즘같은 판화기술로 디자인화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런식의 가내수공업 제품들이 프랑스 부르주아(bourgeois)들에게 어필이 되어 활성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한 자취들이 오늘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고흐박물관(Van Gogh Museum:1973)의 한 전시실에는 고흐가 평생 수집해놓은 2백여 점의 우키요에가 상설 전시되어 있고 또한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톤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1870)에만 공식적으로 약 5만점의 우키요에 판화와 7백여점 이상의 육필화(肉筆畵)가 소장되어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키노예를 배경으로 한 탕기영감 작품을 그렸다.탕기영감이 일본인이 아님에도 일본 풍으로 그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작가의 의도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모순된 이야기다.오늘날 양키라고 불리우는 미국인들이 세계 제1의 경제국가가 되어 세계를 호령하는 근본 에너지가 어디에 있었을까를 근원적으로 따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미국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한 19세기말 도금시대(The Gilded Age:1873-1893)를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재벌들이 양산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석유업의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석탄과 강철업의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 강철업의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석유와 철도업의 조지 F. 베이커(George F. Baker), 석유와 철도업의 윌리엄 록펠러(William Rockefeller), 석유업의 에드워드 S. 하크니스(Edward S. Harkness), 운송업의 J. 오그덴 아모어(J. Ogden Armour), 자동차업의 헨리폰드(Henry Ford), 철도업의 밴드빌트(W.K. Vanderbilt), 금융업의 에드워드 로빈슨 그린(Ed. H.R. Green), 철도업의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E. H. Harriman), 부동산업의 빈센트 애스터(Vincent Astor), 목화와 금융업의 제임스 스틸먼(James Stillman), 수송과 담배제조의 토마스 F. 라이언(Thomas F. Ryan), 광산과 제련업의 다니엘 구겐하임(Daniel Guggenheim), 강철업의 찰스 M. 슈왑(Charles M. Schwab), 금융업의 J.P.모건 주니어(J.P. Morgan Jr)등 거대한 자본주들은 거의가 19세기 말엽에 활동하던 인물들이다.이러한 거대한 산업에 밀알같은 존재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결국 유대인의 대자본주가 이를 완성시켰다고 하겠지만 이러한 거대한 자본주의 고용아래 수많은 소가내공업과 생활용품업자들이 활동했을 것이고 그들이 나름대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기반을 튼튼하게 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사실상 2차세계대전은 유대 자본주들이 상거래 독점과 카르텔을 점유하여 소상공인과 그 외 자영업자들을 핍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며 그러한 악영향을 받은 국가체제에서 잘못된 이단적인 사상이 생성되게 하는 잘못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오죽했으면 엉클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가 1890년 셔먼 독점금지법(Sherman Antitrust Act)을 부활시켜 7년 동안 43개 독점기업을 제소했겠는가.때문에 기존 중상주의를 접목한 독일계, 오스트리아계 사람들은 독점적 거대자본의 행포때문에 심대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반대로 양키경제협력체들은 유대인의 거대한 자본주와 협력 또는 결탁하여 미국만의 고립정책이 가능하도록 했다는 비판이 있다.그것은 결국 세계1차대전, 그리고 세계2차대전을 촉발시키게 된 것으로써 독점, 과점적인 잉여자본에 의한 돌이킬 수 없는 인류적 대참사가 발생되어 그것을 셀 수조차 없는 인명들이 살상되거나 부상하는 비극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그러한 질서는 변함없이 지속이 되어 21세기 냉전시대까지 낳았고 그 영향아래 역사가 부당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상기해야 할 이야기다.어쨌던 독점, 과점적인 자본형성은 거대한 자본주를 만들고 그러한 잉여자본형성시켰다는 사실과 이와 동시에 식민제국주의가 팽배하고 사회진화론같은 서양우월주의를 극단적으로 생성케 했다는 잘못이 분명존재하다.그러한 과정에서 자포니즘의 영향도 컸다고 믿어진다.양키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유대인 자본주의 고용이 된 상태에서 비난을 받았고 19세기 남북전쟁 당시에는 남부군(南部軍)이 북군 병사에 대한 모멸적 칭호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앞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현재 열도일본인들은 스스로도 네덜란드(和蘭) 즉 화인(和人)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야마토(大和)를 말하는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는 것과 역사의 근원은 서양DNA 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즉 열도일본인 스스로가 "우리는 네덜란드인이요"하는 것과 같다.1885년 이미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부르짖을 때부터 해양세력들의 역사는 어긋나기 시작한 것인데 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나 유럽대륙으로 이동하기 위한 구호락도 볼 수 있다.때문에 자포니즘은 일본사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네덜란드 즉 더치(Dutch)에서의 그 원류를 찾는 것이 더 현명하고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대륙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때부터 유럽대륙역사는 아랍역사가 아닌 서양해양세력들의 역사로 탈바꿈하는 것이다.문화적인 유행(자포니즘)속에서 일본풍으로 만들어진 서구 물건의 스타일을 자포네스크(Japonesque)라 하는데 Japan(일본)+esque(식의)이다.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1853-1890)의 작품 중 우키요에(浮世繪)를 닮은 그림들이 많고 이것을 혹자들은 일본의 우키요예작품을 모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천만에 말씀, 오히려 본인의 작품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우키요에(浮世繪)는 '덧없고 허무하다', '부질없다' 등의 의미로 서민생활을 기조로 하여 제작된 회화(繪畫)의 한 양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일반적으로는 목판화(木版畵)라고 하며 인물을 사실적표현보다 회화(繪畫)한 것으로 풍자(諷刺)면이 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즉 네덜란드와 일본이 다르지 않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와 우키요에를 만든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만든다.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동양인 일본 우키요에의 사진을 찾으면 분명 동양계 인물사진이 등장할 것이다.하지만 우키요에를 처음만든 사람은 아시아 동양계일본인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일본인일 가능성이 더 크다.위 우키노예에 영향을 받은 그림들을 보면 모두가 자연스러운 서양인모델로써 동양일본 문화라고 도저히 여길 수 없는 것들이다.뒤집어 이야기 한다면 네덜란드계 일본인이 만든 회화성 기법이라는 이야기다.빈센트 반 고흐도 더치(네덜란드)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포니스(일본인)도 된다.그리고 이 사람은 개신교(프로테스탄트)목사의 아들이다.자포니스들은 개신교인들이다.그러나 이상한 것은 현재 동양계 열도 일본에는 개신교신자들이 많지 않는데 약 1%정도이다.인도(印度)역사의 본거지라 하는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역시 불교신자들은 전 인구에 0.8%란 사실과 같다.네덜란드인은 켈트(지금의 에스파냐부터 다뉴브 강까지의 광대한 지역에서 살던 민족)와 게르만 족(현대의 독일인의 조상)사이에 살던 까닭에 두 민족의 혼혈이라고도 한다.고대 갈리아에서는 이들을 '벨기에'라고 불렀다.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벨기에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도 음양으로 더치인들의 도움이 크다.자포니즘이란 핵심적 이야기는 서양인들이 동양 일본 문화에 취하여 그 사조가 만들어지고 유럽사회와 미술가들에게 엄청난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고 하지만 이것을 서양역사관점에서 푼다면 엄청난 모순을 안고 있다.그 시기는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서양우월주의 즉 사회다윈주의가 팽배했을 때이다.결국 문화적으로 선진 동양 일본을 만들고 그것의 문화, 역사 전반적으로 서구영향이 지대했다는 것을 알리고 서양우월주의를 말하고 있지만 상업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인들의 당시 사고가 과연 동양 오리엔탈 문화라고 하는 일본문화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은 의문을 낳게 만드는 것이다.17세기 부터 유럽귀족사회에 불어닥친 중국양식(中國樣式)의 사조(思潮) 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비교되지만 당시는 서양사회에 우월사고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이고 서양역사 전반에 나타나는 열등의식이 존재할 때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19세말 서양인들의 사고는 동양역사문화를 배척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즉 식민지주의를 바탕으로 한 모든 사상(思想)과 사조(思潮)를 조정한다고 할 때 일본 우키요에 판화 인쇄술이 미각적으로 뛰어나우수한 문화라고 인정되더라도 그들의 식민주의사상과 크게 배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그것은 일본이 동양인이었을 때 이야기다.양키서양문화이며 서양우월주의와 물질문명, 시티즌문화의 산물로써 총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오늘날 세계경제를 지배하며 세계강자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아메리카제국" 이 자포니즘에 클로즈업되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자포니즘(Japonism)" rel="tag" target="_blank">자포니즘(Japonism)</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구수나무Broussonetia papyrifera" rel="tag" target="_blank">구수나무Broussonetia papyrifera</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 rel="tag" target="_blank">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공의회(公議會:Concilium)" rel="tag" target="_blank">공의회(公議會:Concilium)</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금압령(禁壓令)" rel="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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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 조선(朝鮮)의 흩어짐과 참역사의 가르침
***************************4개 조선(朝鮮)의 흩어짐과 참역사의 가르침 글쓴이:한부울1).한글 보급에 대한 의문2).1920년 5월의 칼럼3).조선이 4.5등분된 이유4).조선인(朝鮮人)은 대의(大義)에 서야 한다.5).마무리 1).한글 보급에 대한 의문우리는 동인조선(東人朝鮮), 서인조선(西人朝鮮), 남인조선(南人朝鮮), 북인조선(北人朝鮮) 즉 4대조선(四大朝鮮)에 대해선 몰라도 파당에 의한 사림파(士林派)제거의 무오사화(戊午士禍:1498), 폐비윤씨(廢妃尹氏)사건의 갑자사화(甲子士禍:1504), 혁신파 조광조(趙光祖)몰락의 기묘사화(己卯士禍:1519), 대윤(大尹),소윤(小尹)의 을사사화(乙巳士禍:1545) 등 4대 사화(四大士禍)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바로 파당, 분당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전투구 정치형태라 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반도 사관을 신봉하던 친일역사학자들이 침이 마르도록 가르친 결과이다.그러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것은 한반도 역사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조작된 역사로써 소위 인물 중심으로 편집된 집약된 사건들의 이야기란 사실이다.실제로 옛 조선에서 벌어진 붕당사건들은 정책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체제내 각자 인종별 민당, 지역별 민당, 종교별 민당, 문화적 민당등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추구하는 정책과 이해관계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할지라도 또한 각자 처해진 입지나 정치적인 환경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이러한 면을 포괄적, 다원적, 다문화적으로 종교, 인종, 민족 간 첨예한 갈등의 분출이라 볼 때 여기서 발생되는 상황은 한반도 역사론 그 자체를 수용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들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겠다는 이야기다.한반도 역사는 단일민족, 단일문화, 단일사상등이 지배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포괄하여 수용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으며 결코 실행하기 극히 어려운 이야기며 이와같은 상황전개에 아마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 수밖에 없다. 아래 게시하는 글은 켑처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동아일보(1920.05.20) 정언생(鼎言生)선생의 칼럼기사로써 이것은 한글을 알고 있는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류층인 지식인(知識人)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써 관어(官語)인 한문(漢文)을 기본으로 사용하면서 한글은 일부 대명사, 접속사, 조사 및 동사만에 사용하고 한문한글 혼용의 사건 신문기사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현재 우리가 당시 신문들을 그대로 읽어 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한문 옆에 한글 음(音)을 붙인 것은 알기쉽게 하기 위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첨가한 것이지만 의미가 붙어있지 않다.당시 상황을 보면 총독부에 의해 1920년부터 시작된 한글보급운동차원에서 신문발행에 초점을 두고 이것에 의한 보급효과를 노렸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한문이 주가 된 바탕에는 당시 신문에 관여한 인물들이 한문에 능통함은 물론이겠지만 신문을 받아 읽는 독자 역시 한문에 능통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때문에 특별히 한문 의미를 첨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본 블로그 글 "2.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4) 코리언학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0 "에서 지적했듯이 1950년 한국 전쟁당시 한국 군인들의 문맹률이 70% 정도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이다.그것과 함께 놀라운 사실이 또 발견되는데 사실상 신문발행이 허용되던 1920년 이때부터 총독부에 의해 한글보급운동이 시작되었고 전국적으로 빠른 속도로 야학(夜學)이 확산되었다고 하였으며 이듬해인 1921년에 마침내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창립되었다는 사실이다.즉 1920년부터 한문과 별도로 한글보급운동이 전 조선백성을 대상으로 전개된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한문보급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그것은 이미 체제내 지식자들에게 기본으로 사용되는 문자가 한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놀랍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한반도에 들락거렸던 선교사를 포함한 유명 서양인들 중에 한글을 능통하게 사용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 수 있었던 사실이다.도대체 한글은 한반도 한국인을 위한 글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동서양 가릴 것 없이 포괄적으로 사용하던 글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혹 한글은 한반도 한국인이 아닌 어딘가에 존재했던 조선인을 위한 한글이었을 가능성을 상당히 비중있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동아일보의 한문과 병용한 한글도 한반도인을 위한 한글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를 위한 글임을 알 수 있는 것은 한글도 못 읽는데 한문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 수 있겠는가.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 때 조사를 보면 당시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의 문맹율(文盲率)은 거의 90%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이때 조선백성은 혹 한반도 인들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역사장소에 존재하던 조선인을 말하는 것일까?이것 조차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물론 한반도가 아닌 곳에 조선인들의 구성원은 동서양 가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결국 1920년부터 한글 보급 운동을 했지만 9년이 지난 후에도 별 무 소득이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이것은 당시 한반도 한국사회에서 한글 토대가 제로상태였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반포한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하신 것이다.그로부터 50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한글 보급에서 실제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그래서 사용하게 만들었지만 일반백성들은 이래저래 힘들었다는 이야기로 일부계층에서만 사용되던 한문과 진배 없었다는 말이 된다.한문은 서양인들이 말하길 조선사회에서 고급언어로 문서와 관공서, 서체에 쓰이는 글이라고 말했다.한반도에 한정된 역사조건이라면 한글 보급이 그렇게도 힘들었을까?아니다.한반도가 아니라 세계전역을 가름할 지배체제였기 때문에 보급이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여기서 조선전체란 범위적인 문제와 오늘날 한반도로 한정하여 볼 수밖에 없는 시각의 간격이 보인다.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때 조선에 와서 청일전쟁 직전에 중국으로 돌아간 이른바 조선통이라고 하던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을 지낸 원세개(袁世凱,1859-1916)는 중국 사람들이 어려운 한자 때문에 문맹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선의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서 글자를 깨우치게 하자고 주장했다가 기존 세력들의 반대로 불발되었다는 말이 있다. 기존세력들은 왜 일반 중국인들에게 한글 보급을 꺼려 했을까?특수계층들이 장악하고 전유물처럼 인식되던 고급정보확보가 일반화되면서 일반백성과 공유함을 염려했을 것이고 한글 보급으로 급격히 대중화될 수 있는 여론을 의식해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청조(淸朝)말엽에 조선과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90%에 달했기 때문에 '한자불멸중국필망(漢字不滅中國必亡)'의 구호를 외치며 문학가 노신(魯迅,1881-1936)등 지식인들이 한자 폐지를 주창하고 나섰다는 이야기도 이와 같은 형태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이처럼 밝혀지는 내용들을 종합할 때 당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사신문 같은 민족신문들은 거의가 지식인을 독자로 한 신문이며 동일한 조건 속에서 보도기사를 실고 신문발행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때문에 이 당시의 대의란 의미도 전체백성을 대상으로 할 수없다는 점과 사회전반적으로 상당히 제약된 상태에서 민의가 해석되고 여론이 조성되었다는 사실도 우리가 인식해야 할 이야기다.즉 글을 모르는 90%의 국민은 풍문이나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으로만 듣고 정세와 세상물정을 알 뿐임을 인지할 수가 있다. 아래 켑처(capture)하여 게시한 동아일보 컬럼 기사(記事) 원본(原本)을 보아서 알겠지만 현재 우리들도 이러한 옛 한문(漢文)위주의 기사내용을 받아들이기가 지극히 난해한 것이므로 글쓴이는 이를 읽기 편하게 현재 우리말과 비슷하게 편집하였고 내용을 일부 보충하여 작성한 글을 토대로 당시 칼럼작가가 지상에서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진의를 그렇게라도 풀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과 대신 그 본질을 글쓴이가 훼손치 않으려 노력했다는 점도 감안해주었으면 하는 바다.2).1920년 5월의 칼럼 자 그럼 본격적으로 동아일보 보도에 몰입해 들어가보자. 과연이천만인(果然二千萬人) 정언생(鼎言生)1920.05.20. 동아일보 1면 사회기사(칼럼/논단) 제목에서 보면 과연 이천만인(二千萬人)이 맞는가 하는 의문형을 다는 문제에서 수치적인 문제라 보면 간단하게 생각되던 논제이다.즉 칼럼작가는 조선(朝鮮)인구가 이천만인(二千萬人)이라는 수치에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러한 인구가 역사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고 더 나아가 왜 그러한 인구수치가 생성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옛 정치적 환경을 이야기하면서 역사적으로 탐구해야 할 문제와 이를 대의적(大義的)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하는 논제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칼럼발행 시기가 1920년 5월이니 총독부가 문화통치(文化統治)의 일환으로 조선민간신문으로 지목되었던 동아일보 및 시사신문, 조선일보 등 3 개 민간신문들의 발행을 허가 한 시점이다.총독부의 이러한 조치는 순화(純化)정책이라기 보다 오히려 검열을 강화하고, 기사삭제를 조건화하면서, 최후 정간, 폐간 등의 조치를 이용하여 친일언론화(親日言論化)를 염두에 두면서 최종적으로 기사 내용까지 조작하여 언론을 지배하겠다는 기획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실제로 식민통치 말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많은 민족 신문이 친일화 되었다고 알려진다.상지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부 박용규 교수의 주장을 보면 1919년 극에 달했던 조선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총독부는 1920년에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고, 그런 신문을 통해 민심을 파악하거나 여론을 조작하려고 했다며 총독부는 분열과 경쟁을 유발하기에 적절한 신문의 수(數)까지 따져보고 전체적인 구도를 짜서 신문발행을 허가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양한 조선인집단이나 개인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의도 등을 갖고 신문발행 허가를 신청했고 이에 총독부는 적극적 협력세력 중에 2개, 소극적 저항세력 중에 1개의 신문발행을 허가했다고 말한다. 협력세력 중에는 동화주의(同化主義)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펼쳤던 국민협회(國民協會)에게 <시사신문(時事新聞)>을 허가했고, 내선융화(内鮮融和)를 표방하며 사교활동을 했던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에게 <조선일보(朝鮮日報)>를 허가했으며 저항세력 중에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타협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인 세력에게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발행을 허가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그 중에서는 동아일보가 민족신문에 가깝다는 것이다.이럴때 동아일보의 칼럼이니 민족적 자존에 대한 논제가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그러나 칼럼 작자인 정언생(鼎言生)의 약력에 대해선 나타나는 것이 없고 이분에 대해서 현재까지 알 져는 것이 없다.3).조선이 4.5등분된 이유 본문으로 들어 가보자. 하루 종일 통곡(痛哭)을 하여도 어떤 사람이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이 나는 이미 조선(朝鮮)에 태어난 지가 30년 세월이 지난 금일인데 조선인(朝鮮人)이 과연 몇 천 몇 만(幾千幾萬)인 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로다.내가 듣기론 일정(一定)한 토지(土地)와 일정(一定)한 민중(民衆)과 일정(一定)한 주권자(主權者)는 국가성립(國家成立)의 요소(要素)라 말하였도다.이러한 즉 하나의 국가가 국가로써 성립된 이상은 그러한 영토(領土)가 몇 평(幾坪)이며 그러한 국민이 몇 명(幾人)이고 주권자(主權者)가 누구임을 옳게 알아야 함에도 국민(民)은 나라의 근본(邦本)이라는 국가(國家)의 성질상(性質上) 그 국민(其民)의 수(數)를 알지 못하고서 어찌 치국(治國)의 바른 길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즉 조선인(朝鮮人)은 참으로 몇 천 몇 만(幾千幾萬)명이라 하느냐란 물음에 묵은 책장(冊章)에 고민할 필요가 없고 해가 바뀐(日移事去) 금일(今日)에 있어 과거정치(過去政治)를 격렬하게 논(痛論)할 필요가 없겠으나 여하튼 무책임이 극심(極甚)하였고 또한 불성의(不誠意)함이 너무 지나쳤다. 조선(朝鮮)은 역사가 시작(有史)된지가 반만년(半萬年)이라 하나 이와 같은 반만년 역사(半萬年史)를 다스리거나 말거나(或治或亂)의 주체(主體)가 되었든지 간에 국민(國民)의 통계(統計)를 알기가 힘든다는 것이 사실이다. 묻노라, 조선인(朝鮮人)이 과연 이천만인(二千萬人)인가. 문헌비고(文献備考)에 기재된 호구(戶口)를 살피면 정종조(正宗朝)때에서 태종조(太宗朝)때까지의 각대통계(各代統計)는 보통(凡一), 531,365(戶)호로 7,356,785(人)명이라 하였다.그러나 이것은 때가 옛날일 뿐만아니라 그것의 조사하는 과정상 정확(正確)함을 믿기 어려운 것이다. 작가가 고려 말기의 문신 이방과(이芳果) 정종(定宗,1357-1419,재위:1398-1400)에서 고려문신이었던 이방원(李芳遠)이 등극한 태종(太宗,1367-1422,재위:1400-1418)때까지 20년간에 문헌비고(文献備考)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18세기,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国文献備考)를 바탕으로 한 증보문헌비고(増補文献備考)는 조선이 생을 다했을 무렵인 1908년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이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전체적으로 조작되었을 확률이 대단히 높은 사서(史書)라 말할 수 있다.그러니 1920년에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 한 인구통계역시 실체인 거대한 세계 조선(朝鮮)이 4.5등분으로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 인구가 분명히 아님을 알 수 있다.이어지는 다음 글을 또 보자. 근래(近來)에 서양인(西洋人) "옷팔트"氏(씨)의 조사는 조선인 인구를 15,000,000이상(以上), 16,000,000이라하며 "부아레"氏(씨)는 16,000,000이상(以上), 18,000,000 이라하고 일본인(日本人)은 17,000,000 이라하며 우리는 20,000,000 동포(同胞)라 한다.조선인(朝鮮人)은 통계수자가 이와같이 제각기 달라(甲左乙右) 정확(正確)한 것을 상세히 알기가 힘든 것이나 이를 장점을 제거하여 단점을 보완하는 계산안(拆長補短的計算眼)으로써미루어 짐작할 때 15,000,000 이상(以上), 20,000,000 이하(以下)의 인구임을 확실하게 여긴다 하리오.아아! 우리는 20,000,000 명 미만(未滿)이라 함을 한(恨)치 말며 우리는 20,000,000에 부족(不足)함을 원(怨)치 말지니라.정신생활(精神生活)이 종합되면 그것의 수천만인(數千萬人)이 한사람이 되고 정신생활이 이산되면 한사람이 천만인(千萬人)이 된다.이러한 즉 나는 이천만인(二千萬人)이 못 됨을 한(恨)하는 바가 아니고 진정 그것이 한사람이 못됨을 한(恨)하는 바며 나는 이천만인(二千萬人)에 부족(不足)됨을 원하는 바가 아니고 진정 한사람이 못됨을 원(怨)하는 바이다. 사실상 그는 1920년경에 서양인인류학자나 통계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선인구수에서 결국 15,000,000명에서 20,000,000명 사이가 될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고 했다.1920년 기준으로 인구를 보면 러시아 101,408,000. 독일 62,126,000. 영국 42,388,400. 프랑스 39,000,000. 미국 106,021,600. 네덜란드 6,754,000. 스페인 21,303,200. 일본 55,963,100.으로 나타난다.일본만 하더라도 55,000,000명이다.그러나 그는 다음 글에서 왜, 이렇게 작지도 크다고도 할 수 없는 인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에 대한 원인과 그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였는데 그 핵심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슬프다, 시대의 사정은 지금과 옛날(今古)이 멀리 떨어져 있고 인사(人事)의 잘못됨은 심성(心性)이 각각 다르니 지금 가타부타(可耶否耶)를 새롭게 논할 필요는 없기는 하나 역사가 시작된 이래(有史以來)로 모든 일에서 인륜의 대도(大道)를 갑자기 깨부수고(忽然打破) 동서남북을 말하고(曰東曰西曰南曰北), 청남탁남(淸南濁南)과 소북대북(小北大北)으로 우리가 파별을 만들고 당(黨)을 이루게 하여 서로 밀치락달치락(互相軋轢)이 장차 삼백년(三百年)의 긴 세월을 소비 할 때부터 조선인(朝鮮人)이 비록 소수라 하나 20,000,000에 근접하여 지극히 소수가 아니며 조선인이 비록 미약하다 하나 20,000,000에 가까운 힘이 또한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없거늘 동인(東人)은 동인(東人)으로써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었고 서인(西人)은 서인(西人)으로써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었고 남인(南人)은 남인(南人)으로 북인(北人)은 북인(北人)으로 각각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朝鮮)은 동인조선(東人朝鮮)과 서인조선(西人朝鮮)이 되었으며 남인조선(南人朝鮮)과 북인조선(北人朝鮮)이 되었다.이로써 조선 땅(朝鮮地)의 면적(面積)을 측량(計之)하고 조선인(朝鮮人)의 수(數)를 셈(算之)할 새 조선 땅(朝鮮地)은 몇 백 평(幾百坪)에 불과 하였고 조선인(朝鮮人)은 몇 십 인(幾十人)에 불과했다.이와같이 같은 조상, 같은 자손(同祖同孫)으로써 스스로 이족(異族)을 만들었으며 같은 국가, 같은 국민(同國同民)으로써 스스로 다른 민족(異民)을 만들었기 때문에 땅이 가난하고 사람이 가난(地貧人貧)함을 자초한 것이며 본 블로그 글 “2009년 조선시대 붕당(朋黨)은 당쟁으로 보아야 하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081 ”에서 처음으로 당쟁(黨爭)을 대륙사관점으로 살펴보았다.당쟁을 한반도 사관으로 읽을 때 우리에게 노예같은 식민지인의 신세가 어쩜 마땅했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그러나 본 블로그 글에서 말하길 붕당(朋黨)정치는 다원적(多元的), 다문화적(多文化的)인 국가일체주의(國家一體主義)에서 인종(人種)과 지역(地域), 극단적 종교(宗敎)갈등으로부터 국론을 조정하면서 나라 통합에 지장이 없도록 유효적절하게 타협(妥協)하고 봉합(縫合)하며 조절기능으로 존재한 균일적(均一的)조정 장치제도로 충분한 정치적 가치를 다 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였고 다문화적 갈등과 분쟁을 최소화하고 국론통합(國論統合)을 이어가는 삼한(三韓)전통적 정치제도형태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삼한역사문화는 어쨌거나 하나의 체제아래 통제되고 지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때문에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난맥상에 빠질 때 극한적 갈등과 불만에 의한 대립을 낳고 상방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게 하여 급기야 서양역사가 말하는 크고 작은 전투, 전쟁 즉 내란(內亂)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서양역사는 소소하던 아니던 그것을 전부 전투(戰鬪:battle), 전쟁(戰爭:War)이라 말하고 있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충돌(衝突)이고, 반란(叛亂)이며, 내란(內亂)이다.왜냐하면 체제아래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내부통제적 해결법이 강구되었던 것이다.이러했기 때문에 분당(分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4대 사화(四大士禍)는 조직간 충돌이거나 거의 내란(內亂)이라고 보아야 맞다.2012년 본 블로그 글 “프랑스 왕실 상징 플뢰르 드 리스(Fleur-de-lys)에서 본 대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7 "에서 조선(朝鮮)이란 거대한 정치사회에서 붕당(朋黨)이라고 하는 서인(西人), 남인(南人), 노론(老論), 소론(少論), 그리고 시파(時派), 벽파(辟派)가 서로 충돌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였고 특히 시파, 벽파가 생성된 1801년 이후부터 프랑스도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사태가 공교롭게도 정치, 사회, 문화전체가 조선(朝鮮)과 일치한다고 했다. 프랑스는 종교적 갈등이 매우 심했던 나라인 것처럼 신교(新敎:프로테스탄트)가 바탕이 된 부르주아혁명(Bourgeois revolution)을 막지 못해 권력이 부르몽왕가(House of Bourbon)에서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로 이동되는 과정도 결국 거대한 부르주아세력인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이전되는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또한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2015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 ”에서 조선말기에 나라가 흔들린 이유 중에 하나가 세도정치라는 문제로 들어가면 먼저 정조(正祖,1752-1800,재위:1776-1800)를 옹립한 일루미나티(光明會:Bavarian Illuminati)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바이에른 풍산홍씨(豊山洪氏) 홍국영(洪國榮:1748-1781)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정조(正祖)때 풍산홍씨를 업은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득세가 있어 그것은 결국 부르조아 세력들이 준동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도 했다.그러나 작가는 이와같이 같은 조상, 같은 자손(同祖同孫)으로써 스스로 다른 민족(異族)을 만들었으며 같은 국가, 같은 국민(同國同民)임에도 우리스스로 다른 국민(異民)을 만들었기 때문에 땅이 가난하고 사람이 가난(地貧人貧)함을 자초한 것이라 하였다.이로써 조선 땅(朝鮮地)의 면적(面積)을 측량(計之)하고 조선인(朝鮮人)의 수(數)를 셈(算之)할 새 조선 땅(朝鮮地)은 지금처럼 몇 백 평(幾百坪)에 불과 하였고 조선인(朝鮮人) 또한 몇 십 인(幾十人)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不啻) 임금(君父)이 “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다/조정 신하들은 이날 이후에도/동인이니 서인이니 나누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痛哭關山月/傷心鴨水風/朝臣今日後/寧腹各西東)”라 한 선조어작(宣祖御作)의 분노가 치밀어 원통하고 슬프기 한이 없는(慷慨無量) 시(詩)의 어제(御製)가 되게 한 자(者), 우리가 아니고 누구(誰)이며 이와 같게 한 시(詩)를 백성(臣民)이 된 자(者)로써 그리고 이글을 비통한 마음으로 읽게(拜讀)한 자(者)가 누구이며, 또한 그 후(其後) 임금(君父) 인조(仁祖朝)때 남(南)으로 삼백여리(三百餘里) 긴 길 바깥에(長路外) 쌍수산성(雙樹山城)을 향하시게 하였고 서(西)쪽으로 바다 건너 외딴 섬(隔海孤島)의 삼랑성(三浪城)을 오르게 한 자(者)가 또한 누구인가.무릇 국가가 있는 이상(以上)은 선량(善良)한 정치(政治)를 요(要)하며 정치(政治)의 선양여부(善良與否)는 오직 국민(國民)이 판단(判斷)하며 깨닫게(覺悟)하는 것으로 민당(民黨)이 발생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리(事里)와 형세(形勢)인지라 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민당(民黨)이라하는 것은 무엇이던가. 한국고전종합자료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용만서사(龍灣書事)에 선조(宣祖,1552-1608,재위:1567-1608)가 황망(慌忙)하게도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그 해 4월 30일 법전(法殿)을 버리고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몽진(蒙塵)하여 6월 20일 그곳에 도착하여 읊은 위 시(詩)귀중 미련(尾聯)10자, 朝臣今日後/寧腹各西東 “조정 신하들은 이날 이후에도/동인이니 서인이니 나누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하면서 통절하게 경계하고 엄하게 꾸짖으신 뜻이 글의 표면에 가득히 넘쳐 드러나서 당시의 신하들을 감동하여 울게 하기에 충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한반도 조선인만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이미 동조동손(同祖同孫), 동국동민(同國同民)의 조선조정(朝鮮朝廷)에는 많은 수의 다른 민족(異族), 다른 나라(異民)의 동인과 북인, 남인, 서인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그들을 이질적으로 만든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다.또한 인조(仁祖) 5년(1627) 2월에 후금(後金)의 군사를 피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는 수모를 말하는 것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말한다.서인(西人)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朝鮮)에 대한 주전(主戰)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으로써 명(明)으로 인해 조선과의 경제단교(經濟斷交)가 되었고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한 후금입장에서 불가능했던 이러한 충돌에 의한 마무리로 조선(朝鮮)과의 무역교역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여기서 보면 명조(明朝)말 무장 모문룡(毛文龍:1576-1629)은 후금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평안도 철산 앞바다 가도에 머물다가 이것이 단초가 되어 후금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그동안 조선이 명을 지키는 것으로 역사에 나타나지만 실은 명이 조선을 보호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조선(朝鮮)과의 교역은 곧 그 나라의 사활에 대한 문제였던 것으로 풀이 되는데 바꾸어 말하면 조선의 거대한 경제적 시장성이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인식되는 면이다.결국 그러한 임금의 수모는 신하들의 아집과 자신의 영달 그리고 이익을 위해 파당을 만들고 아귀다툼을 하였을 뿐이며 국민의 권리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을 표방하고 나서는 민당(民黨)은 결코 아니었다는 말이다. 널리 평등하게 한뜻이 되게 하는(同仁同德)것은 국가(國家)가 하는 전쟁(戰爭)에 용감한 자(者)이고 사사(私事)로이 싸우는(私鬪)것에 용감한 자가 결코 아니며 국가 일(國務)에 힘쓰는 자(者)이며 개인적 이익(私利)에 몰두(奮)하는 자가 결코 아니다. 고로 나라를 위한 옳은 일 국시(國是)로써 가장 완전(完全)한 이상(理想)으로 나아가며 학문(學問)이나 예술(藝術)의 발전(發展)하는 운수(運數)는 이로써 높고 높은(隆高)곳으로 성취하게 하여 백년대계(百年大計)를 하루일과 같이 나라를 안정되고 평화롭게 다스리는 것이니 요순(堯舜)의 성스러운 정치(聖治)는 여덟 명의 선량한 사람과 여덟 명의 화합(和合)한 사람(八元八凱黨)이 서로 조심하여 공사(公事)를 봉행하고 마음을 합쳐 공경을 다(同寅協恭)하여 공적이 빛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희랍(希臘)의 문치(文治)는 "소론"당(黨)이 교화(敎化)의 적합하게 하여 문화만고(文化萬古)의 시조(鼻祖)가 되었으며 불국(佛國) "로베스피어르"의 과격공화당(過激共和黨)은 인권해방(人權解放)의 제일막(第一幕)을 열었고 독일(獨逸)의 "루터" 신교당(新敎黨)은 가교신성(家敎神聖)을 천하(天下)에 선전하였다.이러함이 국가(國家)의 정치와 사회의 문화는 어떤 것을 불문하고 만인(萬人)이 당을 만든 후 만선(萬善)을 종합하여 널리 평등하게 한뜻이 되게 하는(同仁同德)으로 갈고 닦아(磨之琢之)야 하며 자르고 갈아(切之瑳之)하야 성덕지선(盛德至善)에 노력하는 그사이에 있어야 한다.슬프다. 우리는 4색 당(四色黨)의 무익한 이전투구로써 우리의 이익과 행복(利福)을 강구(講究)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문화(文化)에 진력(致力)할 여유가 없었으니 이를 공정(公正)한 의사(意思)와 불편(不偏)한 언론(言論)으로 사료되는데 우리의 선조(先祖)는 과거시대의 대위인(大偉人)이었고 우리의 선조(先祖)는 과거시대의 문화인이라 이와 같이 한 웅지대략(雄志大略)으로써 그것에 대한 오해(誤解)가 길다(長)함이 삼백여년(三百餘年)에 건넘(亘)이 어찌 우리들(吾等)로 하여금 오늘날 유감(遺感)되게 하는 것이고 어찌 우리들(吾等)의 오늘날 이상함(不思議)이라 하지 않으리. 나라가 필요한 민당(民黨)이라 함은 파당이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와 사회, 문화 어떤 것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민당(民黨)을 만든 후 최고, 최선을 위한 것이며 널리 평등하게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훌륭한 품덕(品德)과 지극한 선(善)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역사는 4색 당(四色黨)의 무익한 이전투구로써 우리의 이익과 행복(利福)을 강구(講究)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문화(文化)에 진력(致力)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우리의 선조(先祖)는 과거시대의 대위인(大偉人)이었고 우리의 선조(先祖)는 과거시대의 문화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를 풀 수 있었던 시간이 300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은 생각해도 매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라 했다.4).조선인(朝鮮人)은 대의(大義)에 서야 한다. 고로 당시를 회고(囘顧)하여 회개(改悔)의 매우 감격하여 눈물(感淚)를 흘리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의 회개(改悔)를 가깝게 하여 현재(現在)로부터 더 잘 진행되도록(促進)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하물며 이날 이때(此日此時)는 험준한 산을 사다리를 타고 넘고 거친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는(梯山航海) 것으로 육주오양(六洲五洋)은 항구의 출입구(港門)을 크게 열고(大開) 서구동아(西歐東亞)에 제민족(諸民族)이 섞여 살며(雜居) 생존(生存)을 서로 이겨내고(相鬪) 우열(優劣)을 서로 경쟁(相爭)하여 대민족(大民族)의 대활동(大活動)이 있는 것이 다사추(多事秋)하다 할 것이다.이러한 때 우리는 육체와 정신을 공유하는 동기동혼(同氣同魂)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동성동음(同聲同音)으로 우리의 앞길이 험악(險惡)하고 우리의 입지(立地)가 곤란(難苦)함을 거울(鑑)로 행동할 바와 멈출 것을 크게 부르짖지(大呌)않을 수 없는 것이다.조선인(朝鮮人)은 참으로 20,000,000 인(人)이되며 이 20,000,000인(人)은 나아가 한사람이 될지어다.우리는 과거를 회고(囘顧)하여 회개(改悔)의 매우 감격하여 눈물(感淚)를 흘리며 회개(改悔)하는 것이며 이 회개(改悔)로써 선량한 백성(良民)의 역사를 만들고자 하는 이때 이어날 어느 쪽의 검은 천사(何方黑天使)의 명(命)으로써 안으로는 4색혼(四色魂)이 아직도 없었지지 않고 밖으로는 그것을 개명파(開明派)라 하면서 나는 완고파(頑固派)라하며 혹은 유교(儒敎) 혹은 야소교(耶蘇敎) 또는 불교파(佛敎派)라 하여 새로이 5색(五色) 혹은 6.7색(六七色)을 이룩코저 함이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그러하는지 알 수 없음(抑何心情)이 아닌가.조선인(朝鮮人)은 대의(大義)에 서야 한다. 지금은 비로소 육주오양(六洲五洋)은 항구의 출입구(港門)을 크게 열고(大開) 서구동아(西歐東亞)에 제민족(諸民族)들이 대민족(大民族)의 대활동(大活動)을 하고 있어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때 육체와 정신을 공유하고 같은 목소리를 내며 과거 잘못을 거울삼아 가야할 방향과 가지 말아야 할 방향을 잘 판단해야 하고 조선인 20,000,000명은 한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그럼에도 아직까지 4색혼(四色魂)이 남아 있고 새로이 5색(五色) 혹은 6.7색(六七色)을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억하심정인가 말하고 있다.끝으로 그는 정리하길 옛 대성인(大聖人)과 대교조(大敎祖)라 하는 선철제현(先哲諸賢)은 베품(德)으로써 똑같이 보며 종족(種族)의 구별이 없었으며 어짐(仁)으로써 똑같게 인식(同認)하면서 동서(東西)의 구별이 없었기 때문이며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이치를 나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하는 것이며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권선징악(勸善懲惡)도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자기는 면하는 것이 아닌 즉 이해(利害)를 계산함이 아니며 영욕(榮辱)을 산정함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리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동서남북 4.5분 분리되지 않았을 거대한 대조선시기에 4색혼(四色魂)은 전체가 한사람이 되지 못한 결과이며 지도자가 어느 한 쪽을 편애하거나 편중하여 종족(種族)을 구분하고 지역을 차별하며 믿음을 강요하는 것 따위가 존재했고 대성인과 대교조가 주장하는 덕(德)과 인(仁)이 모자랐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5).마무리 지금까지 정언생(鼎言生)선생의 칼럼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위에서 말한 제어(諸語)와 같다.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동서남북의 조선인들을 떼어주기 전에 온전한 대조선의 모습을 어떤 것이었을지 솔직히 궁금하기 짝이 없다.현재 글쓴이 뿐만아니라 재야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틀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지만 이러한 대조선의 진짜 모습에 근사치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그 모습은 세계사를 보는 것과 같다고 확신한다.때문에 글쓴이는 한결같게 세계삼한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생각해보라.동인(東人)은 동인(東人)으로써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지 않았다면 또한 서인(西人)은 서인(西人)으로써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남인(南人)은 남인(南人)으로 북인(北人)은 북인(北人)으로 각각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조선(朝鮮)은 동인조선(東人朝鮮)과 서인조선(西人朝鮮), 남인조선(南人朝鮮)과 북인조선(北人朝鮮)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면 조선은 실제 어떤 모습의 역사이었겠는가.상상하기조차 벅찬 것이다. 칼럼 작가는 그러했기 때문에 현재 조선 땅(朝鮮地)은 몇 백 평(幾百坪)에 불과 하였고 조선인(朝鮮人)은 몇 십 인(幾十人)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모습이다.같은 조상, 같은 자손(同祖同孫)이었지만 우리스스로가 이족(異族)을 만들었고 같은 국가, 같은 국민(同國同民)이었지만 우리스스로 다른 민족(異民)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땅이 가난하고 사람이 가난(地貧人貧)함을 자초한 것이라 하였다.그것의 단초는 지도자가 덕(德)과 인(仁)이 부족했고 파당을 만들어 사익을 위해 이전투구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육주오양(六洲五洋)은 항구의 출입구(港門)을 크게 열고(大開) 비록 분리되었지만 온전한 모습인 서구동아(西歐東亞)에 제민족(諸民族)들이 서로 어울려 대민족(大民族)의 대활동(大活動)이 있으며 이를 다사추(多事秋)라 하였는데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그 때가 1920년이다.즉 우리 역사의 잘못된 판단을 칼럼작가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았고 합체된 대조선의 모습을 오늘에서야 비현실적으로 대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19세기 시작과 동시에 대조선 붕당(朋黨)의 하나로서 예측할 수 있는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1714-1901)가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엮인다는 사실에서 과연 붕당이란 것이 반도역사가 주장하는 관리들의 단순한 자중지란(自中之亂)에 이어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맞는가에 대한 문제도 위 칼럼이 말한 불가사의한 관점으로 풀어야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전자적 한계라 하고 이를 빌미로 서양식민제국세력들만의 얄타회담(Yalta Conference:1945.2.4-2.11)에서 미국인들이 말하는 조선인 자치성의 결여란 딱지는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주홍글씨로 남고 말았다이것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등의식은 얼마이던가.조선인들은 모래 알 같다는 스스로의 자학도 이때부터 기인한 것일게다.과연 반도역사에서 그토록 조선 붕괴의 원인을 붕당이라 하고 일반 신하의 당파싸움으로 인한 것처럼 몰아붙인 이유가 조선인은 모래알 같다는 서양식민제국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붕당을 옹고집 관리들의 이전투구 아귀다툼 난장판 당파싸움 인자로 보았다는 것은 기존 역사학자들의 역사적인 인식이 결여되어 스스로 왜소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한문으로 붕당(朋黨)의 붕(朋)은 벗, 동무, 친구를 의미하고 특히 마음을 같이 하다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에 절대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만 볼 수가 없다. 또한 붕(朋)은 두 개 월(月)자의 파자(破字)를 가지고 있고 화폐단위에 기초가 되는 조가비(貝殼) 2개, 또는 5개를 뜻하는 것이라 했으니 이것이 재화집합(財貨集合)이라 보아 자본화(資本貨)가 된다는 것이며 자본 세력(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에 의한 각 당리에 따라 합쳐진다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어 조선말기에 파당이 심화된 이유 중에 하나가 유대자본이나 유대세력의 생성과 관련이 깊은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럼에도 이것을 2차세계대전을 끝으로 일제는 교묘하게 엮어 한반도에 엉뚱한 역사를 심고 그것도 모자라 마치 한반도인들은 모이면 이전투구 밖에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매도, 호도하게 만들어 조선역사에서 폐악적으로 그려놓고 이를 재해석되고 있다는 점은 우리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니 어찌 이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위 칼럼작가도 이야기 했듯이 본래의 취지는 역사발전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생산적인 민당(民黨)이고 거대한 영토 국가체제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안전장치적인 정치제도이다.다문화, 다원적인 여론을 수렴하고 균등하고 평등하게 정책을 마련한다는 취지에 대의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조선말기에 나라가 흔들린 이유 중에 하나가 세도정치라는 문제로 들어가보면 먼저 정조(正祖,1752-1800,재위:1776-1800)를 옹립한 일루미나티(光明會,Bavarian Illuminati)와 연결되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바이에른 풍산홍씨(豊山洪氏) 홍국영(洪國榮:1748-1781)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정조 때 풍산홍씨를 업은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득세가 있어 부르조아 세력들이 또아리를 틀고 준동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이어 19세기초 순조때 이르러 세도벌열(勢道閥閱)들의 각축과 함께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면서 정치·경제·외교·문화와 행정까지도 협의에서 결정하는 비변사(備邊司)를 장악한 노론시파(老論時派)의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조순(金祖淳:1765-1832)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세도정치체제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한반도 역사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이들이 결국 자본 세력과 결탁되지 않았던 것인지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미국에서는 영국과 똑같이 1834~1860까지 반 프리메이슨(Anti-Masonic)정당으로 휘그당(Whig Party)이 존재했다.하지만 영국의 양당제에서 정당인 휘그당(Whig Party)과 토리당에서 근원적으로 볼 때 휘그당의 "휘그(Whig)"는 스코틀랜드어의 "whiggamor"에서 유래되어 "모반자"라든지 "말 도둑"란 뜻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반대당 역시 "토리(Tory)"라 하는 것도 아일랜드어에서 "불량", "도적"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모두 정권탈취세력들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이들은 역시 대조선(大朝鮮)을 갈라놓지 못해 안달하는 세력들이라고 알 수 있을 것이고 대의(大義)를 앞세운 반동들일뿐 결코 민당(民黨)일 수가 없는 것이다.안동김씨 순원왕후김씨(純元王后:1789-1857)는 헌종(憲宗)과 철종(哲宗)을 섭정하였으며 다시 조만영(趙萬永,1776-1846)에 의한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세도정치가 신정왕후(神貞王后:1809-1890)까지 이어졌고 철종(哲宗,1831-1864,재위:1849-1864)보위를 마무리한 것을 보면 결국 조선왕족직계보까지 세도정치가 만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철종대(哲宗代)에서 계보가 단절되는 비운은 이것에 의한 것이 틀림없고 그 주 원인은 자본 세력들에 의해 자중지란 속에서 벌어진 해체적 진상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정확히 이 시기가 대조선의 운명을 쇠락(衰落)길로 접어들게 만들고 반대로 서양세력들은 분기탱천시기로서 세력분기점으로 나타나는 큰 갈래 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바로 깃 점이 1864년이다.철종이 절명하면서부터 서양세력들의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철종은 자본 세력의 사주를 받은 무장집단에 의해 왕가일가 참살이 벌어졌다는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는 역사사실이다.본 블로그 글 "벽려(薜荔, Ficus pumila)는 동아시아대륙이 아니라 아메리카가 원산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에서 언급하였지만 니콜라이2세(Aleksandrovich Nikolai II,1868-1918)의 일가족 황후를 포함한 1남4녀 모두가 1918년 7월 17일 유대인 출신의 스베들로프(Sverdlov)일당들에 의해 예카테린부르크(ekaterinburg)에서 집단 처형된 사실과 흡사하다고 해야 맞다.유대인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테러를 밥먹듯이 하던 종족이었다.이미 그 이후의 계보(系譜) 발생은 대조선 역사와는 틀을 달리하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논할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실록 역시 철종(哲宗)까지 조선조 정식계보로 인정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종과 순종실록이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편찬됐기 때문이며 이것은 1927년부터 시작되어 1935년 3월 25일, 이왕직(李王職)에 의해 고종순종실록(高宗純宗實錄)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후 멈추어진 철종(哲宗)에서 계보가 다시 세도에 의해 방계(傍系)로 이어지고 이상하게도 신정왕후를 이은 흥선대원군에서 부계가 아니라 모계로 이어지는 여흥민씨(黃驪,驪興閔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계속되었고 결국 파행을 맞이한 것이라고 풀어 볼 수 있지만 방계로 이어지는 것은 또한 안동김씨라고 판단되는 빅토리아시대와도 정확히 연결된다고도 하였는데 본 블로그 글 "1890년에 영국인들이 말한“COREAN”시대(Era)라고 한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8 "에서 밝힌 사실들과 같다.때문에 영국여왕 빅토리아(Queen Victoria:1819-1901), 그리고 청정부의 이홍장(李鴻章:1823-1901)과 같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과 연결되는 조선, 영국, 청조까지 3개역사개체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히게 하는 실로 기이한 도플갱어(Doppelgänger)를 바라볼 수가 있다.글쓴이는 이런 붕당들의 준동은 유대자본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 과정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실예를 들면 하노버왕가에 속한 김조순(金祖淳:1765-1832)이 장악한 비변사는 사실상 성종(成宗,1457-1495,재위:1469-1495)때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여진(女眞)과 왜구(倭寇)를 퇴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라 하였고 바로 일본이라 할 수 있는 앵글계(angle) 서양해적 무리들이 끊임없이 대조선 북쪽과 남쪽영역에 침입하였기 때문에 이를 퇴치하기 위한 기구임을 알 수가 있다.즉 반 서양세력퇴치 기구였고 다른 자료에는 이를 오늘날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국무회의, 국회의 기능이 통합된 기구라고 한다.김조순이 1800년에 정순왕후의 힘을 빌어 이렇게 막강한 비변사(備邊司)제조당상(提調堂上)이 되어 장악하였다는 것은 본래 서세들을 견제하는 목적이 사라질 수밖에 없고 서양해적 무리들은 그 이후 거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오그라진다.비록 타의 에 의해 한반도로 이동되었다 하더라도 제국식민지 신세가 아니라 세계삼한역사를 살릴 수만 있었다면 지금처럼 우리가 역사에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자학하면서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안타까움과 비통함이 있다.그래도 이 글로 그나마 마음을 달래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본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동조선, 서조선, 남조선, 북조선을 계속하여 과학적으로 살펴볼 것이다.**************************<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쌍수산성" rel="tag" target="_blank">쌍수산성</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몽진(蒙塵)" rel="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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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율(黃栗)과 역사비밀
********************황율(黃栗)과 역사비밀 글쓴이:한부울1) 황율에 대한 사서(史書)의 기록 황율(黃栗) 즉 '누런 밤'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는 일반적으로 건율(乾栗) '말린 밤'이라고 알고 있다.그것은 허준(許浚:1546-1615)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나타나는 한방(韓方) 약제로 알려지는데 설사 증상이 있을 때나 허리와 무릎이 시큰거리고 아플 때에 쓴다고 되어 있다. 세종 지리지(世宗地理誌) 공물[貢]황밤[黃栗]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부세(賦稅) 누런밤[黃栗]이 황율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조선(朝鮮)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에서 자라는 과수열매인데 공물(貢物)로 바쳐졌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럼에도 우리는 이 황율에 대해 명확하게 잘 모른다.실제로 세계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조선시대의 모든 생물학적 기록이 이렇듯 왜소화된 것은 물론이고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쪽에서 볼 수 있다.물론 이 황율 뿐만아니라 무수히 많은 생물개체구분에서 세종지리지에 기록된 명칭과 더불어 디테일한 개체정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한반도 역사가 지니고 있는 역사사실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역사기록과 정보소통이 가능한 실체를 파악함에 있어 매번 이러한 난해한 문제에 봉착되고 있지만 세종지리지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모든 것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실망스러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엄연히 일반 백성들이 지방관리를 통하여 황율(黃栗)을 임금에게 공물로 조공한 사실에 기초할 때 분명한 것은 이 누런 밤, 황율(黃栗)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방 약제 말린밤 건율(乾栗)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그렇다면 황율을 어떤 밤일까? 일반적으로 밤(栗)이라고 하면 견과의 일종으로, 가시가 난 송이에 싸여 있고 갈색 겉껍질 안에 얇고 맛이 떫은 속껍질(보늬:the inner skin)이 있으며, 날것으로 먹거나 굽거나 삶아서 먹는데 생물학적으로는 참나무과의 낙엽(落葉) 활엽(闊葉) 교목(喬木)으로 설명된다.특히 밤(栗)은 전통적으로 제사상에 올려지는 제물(祭物)의 하나이기도 한데 지방과 집안마다 제사나 차례상을 올리는 풍습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꼭 제사상에 오르는 것이 바로 껍데기를 제거한 깎은 밤이다.물론 식용이 가능해야 한다. 옛 조상님들이 밤을 제물로 사용하는 이유를 보면 밤나무의 씨앗(열매)이 땅 속에서 위아래로 줄기와 뿌리를 자라게 하면서도 형태를 유지한다는 특성을 신성하게 받아들인 것이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나무 밑에 생밤인 채로 오래오래 그냥 달려있는 것처럼 자손들이 조상의 뿌리를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고 자기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옛 부터 밤나무 열매를 까서 각을 쳐 공손하게 제사상에 올렸다는 사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그렇듯 어려운 것이 아님도 알 수가 있다.조율이시(棗栗梨柿)의 진설차례에서 왼쪽편에서 첫째는 후손들의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대추이며 이어 두번째로 놓이게 되는 것이 밤이다.여기에 끝이지 않고 또한 윗 조상님들은 땅속에서 형태를 유지하는 상징성의 밤나무로 된 위패(位牌)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알려지며 밤껍질은 자식을 보호하는 부모가 되고 나중에 자라 열매가 열리면 자식들이 독립하여 삶을 취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도 큰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밤에는 우리가 한반도 역사사실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밤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또 한가지는 하나의 깍정이(殼果:밤송이)속에 씨알이 세 톨이어서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실과 더불어 밤나무의 종(種)에 따라 밤 깍정이 속에는 1~3 혹은 5개의 열매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며 때문에 밤이라고 하면 무조건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깍정이(殼果:밤송이)속에 밤톨이 일률적으로 3 개가 있는 것도 아님을 알 수가 있다.그래서 세종지리지 뿐만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찾아보았는데 일반 밤(栗)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 일본밤(日本栗)이 재배되었고 전라도(全羅道)익산군(益山郡)에는 삼률(三栗)이라고 하는 밤나무, 특히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에는 적률(赤栗)과 가시율(加時栗)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님들은 황율(黃栗)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을까?마찬가지로 제물(祭物)로 사용했다.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7일 丁丑 5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예조에서 〈산릉의〉 개토·참토 제의(開土斬土祭儀)를 〈제정하여〉 아래와 같이 계하였다○禮曹啓開土、斬土祭儀曰:次設祭器實饌具。 籩八在左, 爲三行右上, 【第一行, 形鹽在前, 魚次之。 第二行, 乾棗在前, 黃栗、榛子次之。 第三行, 菱仁在前, 芡仁、鹿脯次之。】 豆八在右, 爲三行左上。 【第一行, 韭菹在前, 醯醢次之。 第二行, 靑菹在前, 鹿醢、芹菹次之。 第三行, 兔醢在前, 笋菹、魚醢次之。】 簠簋各二在籩豆間, 簠在左, 簋在右,【簠實以稻粱, 梁在(藉) 〔稻〕前, 簋實以黍稷, 稷在黍前。】 爵在簠簋前。 設尊於神位東南, 北向, 又於東南設盥洗二, 北向。 【獻官洗在東, 執事洗在西。】제기(祭器)와 찬(饌)을 진설(陳設)하는데, 변(籩) 여덟 그릇을 왼편에 석 줄로 놓되 오른편으로부터 놓는다. 【첫 줄은 형염(形鹽)을 앞에 놓고, 생선포를 다음에 놓으며, 둘째 줄은 마른 대추를 앞에 놓고, 황률(黃栗)과 개암[榛子]을 다음에 놓으며, 셋째 줄은 능인(菱仁)을 앞에 놓고, 검인(芡仁)과 녹포(鹿脯)를 다음에 놓는다. 】 두(豆) 여덟 그릇은 오른편에 석 줄로 놓되, 왼편으로부터 놓는다. 【첫 줄은 달래 김치를 앞에 놓고, 젓갈을 다음에 놓으며, 둘째 줄은 무우 김치를 앞에 놓고, 사슴 젖과 미나리 김치를 다음에 놓으며, 셋째 줄은 토기 젖을 앞에 놓고, 죽순 김치와 생선 젖을 다음에 놓는다. 】 보(簠)·궤(簋) 각 두 그릇은 변과 두 사이에 놓되 보를 왼편에, 궤를 오른쪽에 놓는다. 【보기에는 벼와 기장[粱]을 담는데, 기장을 벼 앞에 두며, 궤에는 메기장[黍]과 피[稷]를 담는데, 피를 메기장 앞에 둔다. 】 작(爵)은 보와 궤의 앞쪽에 놓고, 준소(樽所)는 신위 동남쪽에 북향으로 진설하고, 또 동남쪽에 북향으로 관세(盥洗)를 두 곳에 설치한다. 【헌관의 관세는 동편에, 집사의 세는 서편에 둔다. 】 위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보면 이 황율(黃栗)을 오례의(五禮儀) 즉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 중에 천(天)·지(地)·신명(神明))에게 올리는 제사가 주축인 길례의식(吉禮儀式)에서 친협 종묘의(親祫宗廟儀), 협향종묘 섭사의(祫享宗廟攝事儀)등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진설에는 둘째 줄에 마른 대추를 앞에 놓고, 황률(黃栗)과 개암[榛子]을 다음에 놓는다고 되어 있다.친협 종묘의(親祫宗廟儀)이라 함은 임금이 조상의 신주(神主)를 천묘(遷廟)에 함께 모셔 제사지내는 것이며 협향종묘 섭사의(祫享宗廟攝事儀)는 임금이 3년에 한 번씩 조상의 신주를 모두 태조(太祖)의 사당에 모셔 놓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이렇듯 조선땅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에서 자생하거나 산출되어 나라의 부세로 백성들이 임금에게 공물로 바치게 한 이 황율을 우리가 잘못알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서두에서 주지하였듯이 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밤나무에서 열매가 맺는 일반 밤(栗)이 전부가 아니다.하지만 현재 한반도에 자라고 있는 밤나무는 일단 개량된 밤나무로 변형된 일본밤나무(日本栗:Castanea crenata Siebold & Zucc.)이거나 중국밤나무 혹은 평양밤나무(板栗:Castanea mollissima Blume)라 하는 동양종(東洋種)으로 밝혀진다.즉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자생한 재래종(在來種)이 아닌 변형된 종(種)으로써 한반도에 이식(移植)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2) 일반 밤나무의 사서(史書) 기록세종지리지 경기(京畿) 토공(土貢)밤[栗]충청도(忠淸道) 공주목(公州牧) 은진현(恩津縣) 토의(土宜)밤나무청주목(淸州牧) 청안현(靑安縣) 토의(土宜)밤[栗]강원도(江原道)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이천현(伊川縣) 토의(土宜) 밤[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토산】밤[栗]경기(京畿) 여주목(驪州牧) 밤톨이 주렁주렁. 홀로 찾아감을 내 일찍 기억하니, 금탄환(밤알)이 땅에 떨어질 때로세.” 하였다. 경기(京畿) 과천현(果川縣)【토산】밤[栗]충청도(忠淸道) 연산현(連山縣)【토산】밤[栗]ㆍ경상도(慶尙道)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토산】 밤[栗] 율도추연(栗島秋煙) “누 앞의 10리 앵무주(鸚武洲)에는, 밤 꽃이 눈 같고 향기 넘치네. 늘어진 밤송이 별같이 많다. 앞 교외에 밤나무 숲이 있어 몇 리에 가득 찼는데, 해마다 수확이 매우 많고 그 품질 또한 좋아서 세상에서 밀율(密栗)이라고 부른다.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토산】밤[栗]경상도(慶尙道)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토산】밤[栗]경상도(慶尙道)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일본 밤[栗] 고려 원종(元宗) 때에 조양필(趙良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밤 열매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토산】삼률(三栗).하나의 밤송이 속에 알갱이 셋이 들어 있는 밤일년에 세번 꽃이 피고 결실을 했다는 삼률(三栗)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구실잣밤나무(Castanopsis sieboldii, Itajii Chinkapin 또는 Itajii)열매, 밤 적률(赤栗)ㆍ가시율(加時栗) 가시나무의 열매, 두어 종류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도(京都) :신주(神主)의 재목인 밤나무 생산지에 경차관(敬差官)ㆍ범철관(泛鐵官)을 보내는데, 경상도에는 식년(式年)마다 한번씩 채취하며, 충청도ㆍ전라도는 식년을 건너서 한 번씩 채취하고, 강원도는 국가 수요가 부족하면 간혹 별도로 베어 취하기도 한다.경상도(慶尙道)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 시내 양쪽 가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어서 층층의 푸르름이 어지럽게 펴지고 있으며, 정자 아래에는 벼 논과 보리밭이 있어서 봄이면 푸른 싹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누런 구름 같은 벼가 물결친다.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대체로 산 밑에는 감과 밤나무가 많고, 조금 위에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황해도(黃海道) 우봉현(牛峯縣) :"국청로(國靑路) 북쪽엔 밤나무도 많구나. 한 차례 더운 비 개고 나니, 가는 곳마다 훈풍(薰風)에 벌써 보리가을일세.” 하였다. 위 사서(史書) 세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조선초기에 밤이나 밤나무가 자랐던 곳의 지명들을 알려주고 있고 그곳에서 다.먼저 세종지리지에서는 밤이 경기(京畿), 충청도(忠淸道)의 공주목과 청주목에서, 그리고 강원도(江原道)의 회양도호부 이천현에 밤 또는 밤나무가 자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기(京畿)에는 광주목, 여주목, 과천현, 충청도(忠淸道)의 연산현, 경상도(慶尙道)의 밀양도호부, 청도군, 선산도호부, 창원도호부, 전라도(全羅道)에는 익산군과 제주목에 밤 또는 밤나무가 자랐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그리고 신주(神主)의 재목을 경차관(敬差官)과 범철관(泛鐵官)등의 관리들을 보내 채취하도록 하였는데 경상도(慶尙道),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강원도(江原道)를 가르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또한 경상도(慶尙道) 안도대도호부, 진주목, 황해도(黃海道) 우봉현에 국가가 밤나무를 계획적으로 채취하거나 관리하도록 하고 있었음도 알 수가 있다.조선(朝鮮) 시대에, 지방(地方)의 토산물(土産物)을 바치는 공물(貢物)인 토공(土貢)이라 하고, 그 지방 토질(土質)이 곡식(穀食)이나 과실(果實)나무를 심는데 알맞다는 토의(土宜)와 지방(地方)의 산물(産物)인 토산(土産)등으로 표시되고 있는데 정확한 문어(文語)는 토의가 가장 토착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즉 토질이 토산을 말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주로 토의(土宜)는 세종지리지가 말하고 있는 지방으로 충청도(忠淸道)와 강원도(江原道)이다.그렇다면 충청도와 강원도에는 적어도 토산 즉 재래종 밤나무가 존재해야 했고 1904년 북아메리카대륙 브롱크스(Bronx)뉴욕동물공원에서 발생한 밤나무줄기마름병(endothia canker)이 한반도에도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느정도 재래종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 맞다.그러나 어찌하여 재래종은 없고 일본종이나 중국종 밖에 존재할 수가 없었는가 하는 말이다.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그리고 최소한 신주(神主)재목으로 나라가 경상도(慶尙道),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강원도(江原道)에 밤나무를 관리하고 주기적으로 채취한 사실이 있는데 그럼에도 한반도에는 그러한 사실에서 명확하게 사라진 배경이나 환경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이것은 마치 미국, 북아메리카대륙의 사정과 닮아 있는데 20세기 초(初)까지만 해도 아름답고 우람한 밤나무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의 재래종 나무가운데 1/4을 차지했으나, 1904년 브롱크스(Bronx)뉴욕동물공원에서 밤나무줄기마름병(endothia canker)이 발생하여 이들 나무가 고사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현상이 관찰되었으며 10년후에는 밤나무가 전멸되다시피 하여 25년 후에는 완전히 멸종되었다 하였으며 공원수(公園樹)마저 상실하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이 급속하게 전파되어 1940년까지 캐나다 남쪽으로부터 멕시코만(灣:Gulf of Mexico)에 이르는 미국 동부지역의 미국밤나무 숲을 거의 황폐화시켰다 한 사실과 거의 동일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이다.생각해보자.기존 역사사실에서 한반도는 유구한 역사가 존재했다고 말하는 곳이다.신흥자본주의 국가들의 끊임없는 정복욕으로 인해 조선말부터 한반도에는 피할 수 없는 침략이 감행되었고 이어 일제식민지찬탈이 발생하여 이러한 이유로 무수히 많은 사건이나 역사사실이 배일에 쌓여지거나 감추어질 수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인간의 힘이 못미치는 하늘의 이치, 즉 천리(天理)가 작용하는 자연계(自然界)현상이 그토록 감쪽같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우리는 심각하게 갈등하지 않으면 안된다.조선시대의 사서기록에서 밤나무가 토의나 토산으로 조선 땅이라고 하던 한반도에 자랐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그럼에도 한반도에 밤나무 재래종이 아예 없고 일본종이나 중국종만 존재한다니 이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인가 하는 것이다.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판단해보면 이처럼 난해한 문제가 금새 풀린다.북미 동부는 조선시대의 강원도와 경기도를 말할 수 있고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오른쪽을 충청도에 동부남부는 경상도이며 멕시코만 부근은 전라도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예를들어 북미동부 재래종 밤나무가 밤나무줄기마름병으로 멸종된 사실에 대해 미국생물학자들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동양종 묘목이 동부로 수입되면서부터 그로인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으로써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 "에서 밝혔듯이 미시시피강을 태평양으로 보고 그 서부(西部)를 동양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한 바가 있다.즉 존 오버톤(John Overton:1640-1713)의 "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지도에서 중국해 혹은 인도제도(中國海,印度諸島:The Sea of China and Indies)는 바로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유역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인디즈(Indies)라 명칭했다는 것은 인도제도(印度諸島)를 말했다는 사실을 밝혔다.적어도 서양인들은 그렇게 인식했던 것이며 그것을 지금의 태평양(太平洋)으로 옮겨 모든 것을 동서양 구분을 하기 시작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그렇기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 횡단철도가 캘리포니아주의 세크라멘토(Sacramento)에서 늦은 1863년에 시작되어 2,826km 거리의 종착역인 네브래스카주(Nebraska州) 오마하(Omaha)를 잇는 완성된 시기가 1869년이며 그 이후 철도를 이용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수없이 왕래하면서 모든 생물들도 그렇게 이동했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도 알 수가 있다.때문에 동양종(東洋種)이라 하여 중국종(種)을 이야기 하지만 중국종(種)이나 일본종(種)은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서부(西部)에 존재한 품종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3) 밤나무의 종류 밤나무의 식물분류체계는 속씨식물문(被子植物門:Magnoliophyta), 쌍떡잎식물강(雙子葉植物綱:Magnoliopsida), 참나무목(殼鬥目:Fagales), 참나무과(殼鬥科:Fagaceae), 밤속(栗屬:Castanea)으로 분류된다. 밤속(栗屬:Castanea)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門: 被子植物门 Magnoliophyta綱: 双子叶植物纲 Magnoliopsida(未分级) 类真蔷薇分支 eurosids 目: 壳斗目 Fagales科: 壳斗科 Fagaceae屬: 栗属 Castanea type of tall tree native to western Asia, southern Europe, and eastern U.S., also the large "nut" that it produces, 1560s, from chesten nut (1510s), with superfluous nut (n.) + Middle English chasteine, from Old French chastain (12c., Modern French châtaigne), from Latin castanea "chestnut, chestnut tree," from Greek kastaneia, which the Greeks explained as either "nut from Castanea" in Pontus, or "nut from Castana" in Thessaly, but probably both places are named for the trees, not the other way around, and the word is borrowed from a language of Asia Minor (compare Armenian kask "chestnut," kaskeni "chestnut tree"). In reference to the dark reddish-brown color, 1650s. 밤속(栗屬)이라고 하는 카스타네아:Castanea의 어원을 [Online Etymology Dictionary]로 통해 살펴보면 서유럽, 남부유럽 및 미국동부에서 서식하는 키 큰 나무의 유형이며, 1560년대 밤나무(Chesten nut :1510s)에서 생산 된 큰 "너트"와 불필요한 너트에 더하여(+) 고대 영어의 중세 영어 체스트테인(chasteine) 그리스의 폰투스(Pontus)의 "Castanea에서 나온 열매"또는 그리스의 동부 지방의 테살리아(Thessaly)의 "Castana에서 나온 열매"로 묘사 한 것이며 그리스어 'kastaneia'의 라틴어 'castanea' "밤나무"에서 나온 chastain(12c. Modern French châtaigne:Castanea sativa)장소가 밤나무의 이름에 붙여진 것이다. 이 단어는 소아시아(Asian Minor)의 언어에서 빌려온 것으로(아르메니아어 kask "밤나무", kaskeni "밤나무"비교). 어두운 적갈색(dark reddish-brown color;1650년대)의 색상까지 참고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우선 참나무과(殼鬥科:Fagaceae)의 밤나무속(栗屬)에는 여러종(種)이 있는데 부쉬 친가핀(Bush Chinkapin)라 하는 총생밤나무(叢生栗:Castanea alnifolia Nutt.1818), 일본밤나무(日本栗:Castanea crenata Siebold & Zucc.1846), 미주밤나무(美洲栗:Castanea dentata(Marsh.)Borkh.1800), 진주밤나무(珍珠栗:Castanea henryi), 중국밤나무 혹은 평양밤나무(板栗:Castanea mollissima Blume 1851), 미주개암밤나무(美洲榛果栗:Castanea ozarkensis Ashe 1923), 미주왜생밤나무(美洲矮生栗:Castanea pumila Mill. 1768), 유럽밤나무(歐洲栗:Castanea sativa Mill. 1768), 모밤나무(茅栗:Castanea seguinii Dode.1908)등이 있다. a)총생밤나무(叢生栗:Castanea alnifolia Nutt.1818) b)일본밤나무(日本栗:Castanea crenata Siebold & Zucc.1846) c)미주밤나무(美洲栗:Castanea dentata(Marsh.)Borkh.1800)d)중국밤나무 혹은 평양밤나무(板栗:Castanea mollissima Blume 1851)e)미주왜생밤나무(美洲矮生栗:Castanea pumila Mill. 1768)f)유럽밤나무(歐洲栗:Castanea sativa Mill. 1768)g)미주개암밤나무(美洲榛果栗:Castanea ozarkensis Ashe 1923)위에서 열거한 종에서 유럽생물체계발달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명명된 미주왜생밤나무(美洲矮生栗:Castanea pumila Mill. 1768)와 유럽밤나무(歐洲栗:Castanea sativa Mill. 1768)를 발견할 수 있고 이 학명자가 바로 영국 식물학자 필립 밀러(Philip Miller:1691-1771)이고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브리티시식물학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 빠른 학명 중 미주왜생밤나무종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g)미주개암밤나무(美洲榛果栗:Castanea ozarkensis Ashe 1923)역시 카스타네아 푸밀라 변종(var.) 오자켄시스(Castanea pumila var. ozarkensis)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북미동부에 멸종되다시피한 상태에서 학명이 늦은 시기인 1923년에 생성된 것인데 오자크 산맥과 미주리, 아칸소, 오클라호마의 오와치타 산맥에서 자란다고 되어 있는데 이 종의 특성은 작은 식용 견과류를 가진 미국 남동부의 관목이라는 사실이다.특히 미주왜생밤나무는 열매가 작다.다음으로 특히 우리가 알아야 할 주요한 종(種)으로 일본밤나무라 하면서도 한반도에서도 이를 일반 밤나무라고 취급하는 종(種)이다.한국밤, 한국 카스타네아, 일본밤으로 알려진 카스타네아 세레나타(Castanea crenata)는 원래 일본과 한국이 원산지인 밤나무 종으로 알려지고 학명에는 바로 세계삼한역사 자취를 없애버린 장본인으로 가장 많은 의심을 받고 있는 지볼트(Siebold)와 주카리니(Zuccarini)이름이 붙어 있는 b) 일본밤나무(日本栗:Castanea crenata Siebold & Zucc.)가 바로 그것이다.일본에서는 달콤한 식용 넛트 대량 생산으로 주요하게 취급되고 있으며 큰 열매(넛트)를 위해 다양한 재배방법이 선택되었고 한반도뿐만아니라 중국 동부와 대만에서도 널리 재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밤나무줄기마름병(endothia canker)에 내성이 있어 북아메리카대륙에서도 이를 내성이 강한 잡종개발에 대입하고 있으며 일본밤에는 유럽종의 달콤한 넛트(sweet chestnut)특성이 있는 것은 유럽종과 일본종의 하이브리드 재배변종이기 때문으로 알려진다.위 그림사진을 보아도 (D)European × Japanese Hybrid Cultivars 의 열매크기가 잘 크다.이를 한반도 생물학자들은 그냥 밤나무로 명명하고 한편으론 재래종이라고 한다.그런데 위 분포지도를 보면 아시아대륙 일본과 한반도에 노란 표식이 집중되어 있지만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북부 코네티컷(Connecticut), 워싱턴DC(Washington D.C)에도 표식이 있다.이 일본종은 밤나무의 원종이 절대 아니다.더더군다나 한반도 즉 조선 밤나무의 재래종도 아니다.또 하나 동양종으로 알려진 것은 중국밤나무이다.중국의 호북성(湖北省)부근에서 생산된 것으로, 한국의 평안남도 해안지방의 일부에 들어와 함종(咸從), 성천(成川), 평양(平壤), 강동(江東), 순천(順川), 덕천(德川)등지와 황해도지방에 퍼져서 생산되며, 함종밤, 성천밤, 평양밤 및 약밤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양키라고도 하는 더치, 독일네덜란드(German-Dutch)의 식물학자(botanist)인 칼 루드비히 브룸(Karl Ludwig von Blume:1796-1862)이 명명한 '중국밤나무' 혹은 '평양밤나무'를 d) 판밤나무(板栗:Castanea mollissima Blume)라 분류되고 있다.다음편에 이야기 하겠지만 중국 밤나무는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재배되어 왔다 하고 있으며, 그것의 정확한 원래 분포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태평양을 구분하기 시작한 시기인 1851년에 명명된 이 종은 생태학적으로 일본종(C. crenata), 미국종(C. dentata), 유럽종(C. sativa)이 포함된 변종재배종으로 발전한 잡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904년에 미국동부 밤나무에 병원균을 옮겼다고 지목되는 종이며 미국자료에는 이 중국의 밤나무가 오랜 기간에 걸쳐 나무껍질 곰팡이 병인 밤나무 몸통이 마르는 병(Cryphonctria parasitica, Endothia parasitica)과 공존하여 진화해 왔다 하였으며 아마도 다른 어떤 종류의 밤보다 더 내성이 강해 밤나무 몸통이 마르는 병에 대한 저항력을 진화시켰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동양종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하지만 일본종이나 중국종등은 적어도 1940년 이후 이식되어 변종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미국자료가 이야기 하는 동양종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그림]밤줍기 Winslow Homer (American, 1836–1910). Chestnutting, 1870. Wood engraving, Sheet: 11 3⁄4 × 8 3⁄4 in. (29.8 × 22.2 cm). Brooklyn Museum, Gift of Harvey Isbitts, 1998.105.157 위 중국밤나무의 분포지 지도그림을 보면 일본종(種)과 마찬가지로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에 집중적으로 표식되어 있으나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북부 코네티컷(Connecticut), 워싱턴DC(Washington D.C)에도 표식이 있다.이것을 보면 어차피 하나의 종에서 파생된 변종들임을 알 수가 있다.다음에 설명할 종은 바로 c) 미주밤나무(美洲栗:Castanea dentata(Marsh.)Borkh.1800)라고 하는 종으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밤에 대한 풍속이 이 종으로 부터 그대로 미국이란 지형속에서 나타나는데 19세기말엽 미국에서는 구운 밤 냄새가 진동했다고 말하고 있다.그 만큼 밤나무가 많았고 그에 따른 밤 열매 수확이 엄청났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서두에서 언급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밤나무를 황폐하게 한 1904년 밤나무줄기마름병(endothia canker)이 이 미주밤나무(American Chestnut)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한다.북미원주민(Native Americans)들은 미국밤나무(American chestnut: Castanea dentata)를 백일해, 심장질환, 쓸려 벗겨진 피부병에 치료제로 사용했다고 알려지며 1888년 1월호에 실린 "Orchard and Garden"은 미국밤나무(American chestnut )의 질이 유럽에서 발견된 어떤 것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나무가 곧게 뻗고 튼튼하며, 톱질이 용이하여 잘 잘라지고 다른 대부분의 단단한 나무에서 발견되는 반지름 방향의 나뭇결이 없다 하였고 이 나무는 오크보다 빠른 속도로 자라기 때문에 특히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고 타닌(tannins)이 풍부하여 부패에 대한 저항성이 높으며, 따라서 가구, 목재 담장 펜스, 지붕널, 주택건설, 바닥재, 교각기둥, 합판, 제지용펄프, 전신주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가죽을 태닝(Tanning)하기 위해 나무껍질에서 탄닌을 추출하고 더 큰 나무는 더 이상 밀링을 할 수 없었지만, 많은 밤나무(chestnut wood)는 유서 깊은 창고에서 개조되어 가구와 다른 물품으로 다시 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미주밤나무, 아메리칸 체스트넛(American chestnut)은 견과류를 많이 생산하며 일반적으로 3개의 넛트가 각각 가시 녹색 깍지에 둘러쳐져 있고, 황갈색 벨벳에 줄 지어 있다고 설명된다. 위 게시한 지도사진에서 미국밤나무의 분포지를 보면 메인 주(Maine)와 남부 온타리오(southern Ontario)에서 미시시피(Mississippi)까지, 대서양 연안(Atlantic coast)에서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과 오하이오 밸리(Ohio Valley)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져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사서 기록인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밤과 밤나무를 토공(土貢), 토의(土宜)로 임금에게 바쳤다고 기록한 지역 경기(京畿), 충청도(忠淸道)의 공주목(公州牧)과 청주목(淸州牧) 그리고 강원도(江原道)와 그 범위가 일치한다고 해야 맞다.미국밤나무는 한때 미국 동부에서 가장 흔한 나무로 알려졌고 오래된 나무의 높이는 30m(98ft)와 지름은 3m(9.8ft)에 이른 것으로 보통 밤이 생산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나무 수령이 7-8년 되었을 때부터이며 종명 덴타나(dentata)는 라틴어 "toothed" 톱니처럼 생긴 이의 형상으로 구별된다.밤 열매는 늦여름까지 익어 첫 번째 가을 서리가 내릴 때 깍지가 열리고 땅에 떨어진다.마지막으로 소개할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e)미주왜생밤나무(美洲矮生栗:Castanea pumila Mill. 1768)와 f)유럽밤나무(歐洲栗:Castanea sativa Mill. 1768)이다. 전자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두종의 학명자가 동일하다는 것도 혼입되었을 가능성을 진단할 수 있으며 스코틀랜드 혈통의 브리티시의 식물학자이고 약용식물원인 첼시피직가든(Chelsea Physic Garden)의 종신정원사인 필립 밀러(Philip Miller:1691-1771) 역시 특이하게 식물표본을 직접 연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계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학명자를 삼았다는 점은 매우 드문 것으로써 이를 전적으로 믿기에는 과학적으로 의구심이 없지 않다.이것은 어쩌면 현재 잉글랜드 첼시의 위치가 다를 수 있고 또한 밀러 자신이 평생토록 정원사로 지냈다고 하는 첼시피직가든(Chelsea Physic Garden)의 역사위치 또한 의심케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그렇지 않다면 당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잉글랜드라고 하는 브리티시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왕조로써 역사명칭자체가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본 블로그에서 수차례 반복하여 이야기 한느 내용이다.4) 밤나무역사의 근원적 동일성미주왜생밤나무(美洲矮生栗:Castanea pumila Mill. 1768)는 다음 편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밤나무 종류에서 끝으로 미주왜생밤나무와 같은 근원종이라고 여겨지는 유럽밤나무(歐洲栗:Castanea sativa Mill. 1768)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달콤한 밤나무(sweet chestnut)로 알려지고 라틴어 사티바(sativa)는 "cultivated by humans",사람에 의해 경작된다라는 뜻의 종명(種名)을 가지고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스페인 밤나무(Spanish chestnut)", "포르투갈 밤나무(Portuguese chestnut)", 프랑스어로 밤나무란 뜻의"마론(marron)"등이 있다.유럽밤나무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보통 500~600년까지 수명하고 만약 재배된다면, 1000년 혹은 그 이상까지 자랄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하며 유전적 다양성과 재배 변종식물임도 알리고 있다.물론 단맛이 강한 이 종의 사용처가 다양한데 대한 분말식품, 스프용, 로스트용, 건조용, 사탕과자 혹은 나무로 다양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재배, 보호된다고 하였으며 어떤 재배 변종은 깍정이(cupule)당 큰 넛트 하나만 가지고 있는 반면 다른 것들은 3개 넛트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우리가 전자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종과 유럽종이 하이브리드 재배변종화(European × Japanese Hybrid Cultivars)하여 열매크기가 크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유럽밤나무는 좋은 성장과 좋은 열매수확을 위해 온화한 기후와 적절한 습기가 필요하고 늦봄과 초가을 서리에 민감하다는 사실과 석회토양에는 자랄 수가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는데 지중해는 백악((chalk:백색 연토질 석회암)토양이 대부분이라는 자료를 접할 수가 있다.그렇다면 카스타네아가 매우 산성 토양(acid soil)에서 자랄 수 있고, 선호되는 범위는 산도(pH 5.5-6.0)정도이다. 그것은 백악(chalk:백색 연토질 석회암)과 같은 알칼리성 토양(alkaline soils)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있다.대신 화강암, 사암, 또는 분화구에서 유래된 토양에서는 잘 자란다. 미국밤나무(American chestnut)와 마찬가지로 유럽밤나무의 두 가지 주요 곰팡이 병원균은 밤나무 줄기마름병(Cryphonectria parasitica)과 피토프토라 캄비보라와 피토프토라 시네마노미(Phytophthora cambivora and Phytophthora cinnamomi)로 인한 밤나무 잉크병(chestnut ink disease)이며 북미뿐만 아니라 남유럽에서도 20세기에 밤나무줄기마름병균(Cryphonectria parasitica)에 의해 대부분의 밤나무 개체들이 파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밤은 지중해 연안에서 3,000년 이상동안 재배되어 왔으며 현재는 유럽 전역에서 재배되고 있고 특히 지중해연안의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등에서 많이 재배 되고 있으며 유럽밤나무를 처음으로 재배를 시도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인들로 유럽밤을 원산지인 러시아 남부 흑해연안의 소아시아에서 터키를 거쳐 최초로 남부유럽과 북아프리카로 도입되었다고 알리고 있으며 로마 병사들은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이 밤죽(chestnut porridge)을 먹었다고 한다.밤나무속명 카스타네아(Castanea Mill. 1754)의 어원(etymology)을 보면[Ancient Greek word κάστανον (sweet chestnut). From Ancient Greek καστάνεια (kastáneia), from κᾰ́στᾰνᾰ (kástana) ]로 나타나 일단 그리스어(語)로써 달콤한 밤이라는 의미가 있다. 어원이 그리스어(語 이니 당연히 그리스는 밤나무 천국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그러나 좀 더 들어가보면 속명 카스타네아(Castanea)는 카스타니아(kastaneia)지방에서 자랐다고 이름하였다 한 것으로 습한 지중해 기후와 백악질토양(chalky soil)이 존재하는 그리스에서는 밤나무가 잘 자라지 않거나 귀했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위 f)유럽밤나무(歐洲栗:Castanea sativa Mill. 1768)의 분포지도를 보면 유럽대륙 전체를 표식하였지만 북아메리카대륙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 미국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의 체스터카운티(Chester County), 뉴저지주의 퍼스앰보이(Perth Amboy), 뉴욕주의 포키프시(Poughkeepsie), 매사추세츠주의 노스애덤스(North Adams)에도 노란 표식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물론 종명(種名) 사티바(sativa)라틴어 의미가 '사람들에 의해 경작되는' 이라는 것은 사실상 근원종(根源種)이라 할 수 없는 재배종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근세기에 미국밤나무와 억지로 분리시켜놓은 것일뿐 어쩜 같은 종(種)일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위 그림은 밤나무 특히 카스타네아 속명의 이동경로이다.아시아극동에서 유럽대륙으로 이동하여 대서양을 넘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로 진출한 도식이다.그러나 아무리 분리시켜보려고 하지만 근원적으로 카스타네아는 공통적인 하나의 조상이라는데 있다.한반도 밤나무(栗)의 역사는 2,000여 년 전 중국의 승려가 우리나라를 왕래하면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낙랑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20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그렇다, 항상 곤란하면 추정이다.임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고려시대 예종 13년(1118년), 인종 25년(1145) 및 명종(明宗)18년(1188)에는 뽕나무, 옻나무, 닥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등과 함께 농경지를 제외하고 토지의 특성에 따라 식재하도록 명했다 하며 조선시대 최초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1485]에 의하면 관리에게 식재관리를 시키고 이에 소홀히 한 사람은 처벌하였다 하고 옻나무, 뽕나무 등과 함께 밤나무를 벌채한 자도 처벌하였다 한다. 성종 23년(1492)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1744]에는 밤 생산 농민들은 국가에 제공하는 부역을 제외시켜 주었는데, 잡역이 면제된 곳들은 경기도 과천, 고양, 강화, 양주, 남양, 부평 등지로서 옛날부터 밤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라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480,1531) 및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3]에는 고려 원종 때 일본과의 교역 중심지인 의안현(현재 경남 창원)에 일본밤을 도입하여 식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말기 영조는 산업을 장려하였는데 율목경사관(栗木敬査官)에게 밤 산지를 조사시켰던 일도 있다 하였다.속대전[續大典]에는 밤나무 목재가 귀중하였으므로 이를 생산하고 보호할 목적으로 나라에서 밤나무 보호림(栗木封山)을 지정한 사실이 기록과,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밤나무의 목재는 오래 가고 성질도 좋으므로 귀중한 나무라 하여 식재가 장려되었다고 한다.태종 7년(1407)에는 법령으로 강변에 밤나무를 심도록 하였는데 경남 밀양의 수산리(守山里)숲, 경북 고령의 밤나무숲, 대구 금호강변의 밤나무숲, 청도의 상지율림(上枝栗林), 선산의 동지숲(冬至藪), 상주의 밤나무숲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한반도가 아니다. 다산시문집 제22권 / 잡평(雜評)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 檗溪在楚嶺之北。三淵金公昌翕所嘗棲隱也。泉石頗佳。南一園千樹栗。亦名村也。汕濕之水。舊會于藍洲之北。今會于藍洲之南。龍津在二水之間。萬曆壬辰。倭賊自驪州渡江。由楊根郡渡龍津。以犯京城。其後防禦使邊應星領三道僧軍。駐箚防守者數年。議欲築城而未果也。벽계(檗溪)는 초령(楚嶺) 북쪽에 있으니,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은거한 곳으로 천석(泉石)이 자못 아름답고, 남일원은 1천 그루의 밤나무로 또한 이름난 마을이다. 산(汕)ㆍ습(濕)의 물은 옛날에는 남주(藍洲) 북쪽에서 합류하였는데, 지금은 남주 남쪽에서 합류한다. 용진(龍津)은 이 두 물 사이에 있는데, 만력(萬歷) 임진년에 왜적이 여주(驪州)로부터 강을 건너 양근군(楊根郡)을 거쳐 다시 용진을 건너 서울을 침범하였다. 그 후 방어사(防禦使) 변 응성(邊應星)이 3도의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두어해 동안 머물러 방어하면서 성을 쌓으려고 의논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위는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경기 양평(陽平) 벽계(檗溪)남일원(南一源)은 1천 그루의 밤나무로 또한 이름난 마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이 자료는 중국밤나무 재배 역사를 3,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면서 산해경(저자 불명, BC400-250)에 밤의 기록이 나타나고 사마천의 사기(기원전 92-89년)에는 "안읍(安邑)수천그루의 대추나무, 연진(燕秦)수천그루의 밤, 촉한(蜀漢) 강릉(江陸)에 수천그루의 귤, 이것은 인구수가 전부 천호(千戶)와 같다" 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을 보면 기원전부터 밤은 대추, 귤 등의 과수와 함께 중요한 농작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고 알리고 있다.연(燕)은 현재의 북경을 중심으로 한 하북성(河北省)일대이고, 진(秦)은 협서성(陜西省)일대의 지역으로 중국의 북부 및 북서부에서 밤이 많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도홍경(陶弘景:502-556)의 명의별록(名醫別錄)에는 밤의 품질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회계(會稽:浙江省 紹興府)에는 크기는 대과(大果)이나 껍질이 두껍고 맛이 없는 밤이 생산되며, 섬(剡:浙江省 嵊縣) 및 시풍(始豊:浙江省 省天台)에서는 껍질이 얇고 단밤이 생산된다 하였는데 이것은 화중산(華中産)의 밤에 대한 기록이고 소송(蘇頌:1020-1101)의 도경본초(圖經本草:1062)에는 연주(山東省 西南部 滋陽縣) 및 선주(宣州:安徽省 東南部 宣城縣)의 밤이 가장 뛰어나고, 연산(燕山:河北 일대)의 밤은 열매가 작지만 가장 단맛이 풍부한 것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중국밤은 옛날부터 일본에 대량으로 수출되어 일본에서는 중국 단밤 혹은 천진(天津)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 북부일대 특히 하북성(河北省)북부산이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화북(華北)지방에서 생산되는 밤은 작고 단맛이 풍부하며, 화중(華中)지방의 것은 풍미면에서 화북지방의 품종에 미치지 않지만, 과실은 크고, 산동(山東)지방의 것은 과실의 크기, 풍미 모두 양자의 중간이다라고 하였다.이것은 마치 미주왜생밤나무, 유럽밤나무, 미국밤나무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About 2,500 chestnut trees are growing on 60 acres near West Salem, Wisconsin, which is the world's largest remaining stand of American chestnut. These trees are the descendants of those planted by Martin Hicks, an early settler in the area, who planted fewer than a dozen trees in the late 1800's. Planted outside the natural range of chestnut, these trees escaped the initial onslaught of chestnut blight, but in 1987, scientists found blight in the stand. Scientists are working to try to save the trees.또한 위 미국자료를 보면 1800년대 후반에 십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이 지역의 초기 정착민 마틴 힉스(Martin Hicks)가 심은 나무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아메리카밤나무 매장지인 위스콘신주 웨스트살렘(West Salem)인근 60 에이커(acres)에 2500여 그루의 밤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Around 300 to 500 trees were spotted in the George Washington National Forest near Augusta County, Virginia, in 2014. Over one dozen trees were at least 12 inches in diameter with several measuring nearly 24 inches in diameter. Only one of the larger trees was a seed and pollen producer with numerous pods and pollen strands lying on ground. The site did, however, have a high presence of chestnut blight, although the seed producing tree and several other large ones were relatively blight-free with minimal to no damage.또한 십여 그루의 나무는 직경이 적어도 12인치였고, 몇 그루의 나무는 직경이 거의 24인치정도까지 자란 밤나무 숲을 2014년 미국 버지니아 주 오거스타 카운티 인근 조지워싱턴 국유림에서 발견했는데 규모가 300-500여 그루의 밤나무 숲이라고 하고 있다.물론 1904년 기승했던 밤나무줄기마름병(endothia canker)에 피해를 그나마 받지 않고 무사했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은 당시 동부사정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하지만 이것들은 조선시대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서 나타나는 경기 양평(陽平) 벽계(檗溪)남일원(南一源)의 1천 그루의 밤나무 숲 기록사실과 중국사에 나타나는 연진(燕秦) 즉 하북성(河北省)과 협서성(陜西省)일대 수천그루의 밤나무 숲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무리일까?5) 황율(黃栗)은 어떤 종인가. 미주왜생밤나무(美洲矮生栗:Castanea pumila Mill.1768)는 일반적으로 앨러게이니 친카핀(Allegheny chinquapin) 또는 미국 친카핀((American chinquapin)이라 하는데 친카핀(chinquapin)은 미국 버지니아(Virginia)주의 인디언 추장인 파우하탄(Powhatan:1550-1618)에서 유래한 명칭이다.그것 이외 이 종(種)을 난쟁이 밤나무(dwarf chestnut) 즉 왜생(矮生)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 동남부의 토착 밤으로 알려진 종(種)이다. 기본 분포지 범위는 메릴랜드와 최단의 남부 뉴저지(southern New Jersey) 및 동남으로 펜실베이니아 남부(Pennsylvania south), 중부 플로리다(central Florida), 서쪽으로 텍사스 주 동부(eastern Texas), 북쪽으로는 미주리 주 남부(southern Missouri)와 켄터키 주(Kentucky)까지이다. 이 식물의 서식지는 건조한 모래와 바위투성이의 고지대, 그리고 오크나무와 단단한 나무 히코리(hickory)가 섞인 능선으로 햇볕이 잘 쬐이는 곳이거나 그늘이 부분적으로 있는 토양에서 가장 잘 자란다.미국친카핀(美洲矮生栗:American Chinkapin:Castanea pumila Mill)의 천연분포지역은 미국밤나무덴타타(美洲栗,American chestnut :Castanea dentata)보다 남쪽에 치우쳐 있다. 뉴저지주와 펜실베니아주에서 서쪽으로는 텍사스주 동부, 오클라호마주 동부, 오하이오주 남부지역, 남쪽으로는 플로리다주까지 분포한다. 수직적으로는 해면에서부터 남부 애팔래치아산맥에서는 1,350m까지 분포한다. 미국친카핀은 앨러게이니 친카핀(Allegheny chinkapin)이라고도 하며 변이가 매우 다양하여 학자에 따라서는 나무형, 잎의 형태 등에 따라 여러 종(種)으로 세분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에는 하나의 종(C. pumila (Linnaeus)Miller)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종(種)내 여러 변종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여러원종이 혼합되어 있을 수가 있다.수형(樹形)은 관목 내지 소교목의 형태로 수고(樹高)가 2-4m, 8m 정도이고 수간(樹間)의 분지가 심한데 예외적으로 통직하게 수고 20m까지 자라기도 하면서 건조하고 척박한 지역에 적응력이 높다. 껍질은 붉은 색 또는 회갈색이며 비늘모양의 판이 약간의 고랑을 만들고 잎은 심플하고 피침모양이며 위쪽은 황록색이며 아래 쪽으로 내려오면서 흐릿하면서 곱게 털이 나 있다. 각 잎은 7.5-15cm 길이로 3-5cm 넓이이며, 평행 측면 잎맥은 짧고 날카로운 톱니처럼 하고 꽃은 단성화(單性花)이고 초여름에 핀다. 수꽃은 작고 옅은 노랑에서 흰색으로 각 잎 기조에 길게 붙어 10–15cm곧추선 꽃차례 위에 피고 암꽃은 길이가 3mm 이고 일부 꽃차례의 밑부분에 위치해 있다. 열매는 지름 2-3cm 의 황금빛 깍정이로 많은 날카로운 가시가 있으며 가을에 익으며 각 깍정이에는 식용 가능한 한 개의 난형 진한 갈색 열매넛트가 들어 있다.바로 이 황금색 깍정이(殼果:밤송이:cupule)이다.이를 두고 우리 조상님들은 누를 황(黃)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열매 구과(毬果)의 크기는 1.4-4.6cm로 작고 구과(毬果)당 과실이 1개씩 달리며 크기는 0.7∼2cm(0.78-1.25g)로 아주 작아 식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조기결실성이 있어 실생 2-3년만에 결실이 가능하고 과실이 작지만 밤나무류 중에서 가장 향과 맛이 뛰어나다고 하고 있다.동부사람들은 이것을 훌륭한 약제라고 여긴다는 사실이다.6) 마무리산림경제 제2권 / 종수(種樹) 밤나무[栗] 種栗栗種。及時收之去外毛。於屋下着濕土埋之。須深毋致凍損。二月芽生種之。遇冬以草裹 之。至三月解放。仍用籬圍之三年。勿使人觸着。必用神隱 栗種。一房入三箇者爲佳。而必擇其居間者種之。若種居兩邊者及一房入一箇者。則所結之實。皆爲一房一箇。俗方 初種栗時。掘地鋪瓦。塡土其上而種之。則根不深入。便於移栽。秋冬間作坑。鋪糞覆土。而標記之。至明春。移栽坑中。則善活易長。俗方 種栗而不栽。栽者難生。纂要 種栗生活後。鼠取其種。人或掘食。則其栗永不結實。切宜忌之 俗方 종자로 쓸 밤은 다 익으면 따서 겉껍질을 벗기고 집 안[屋下] 음습한 곳의 땅을 파고 묻어둔다. 되도록 깊이 파고 묻어 겨울에 얼지 않게 해야 한다. 2월에 싹이 트면 묘상에 심고 겨울에는 짚[草]으로 싸 주어야 하며 3월에는 싸 주었던 것을 풀어준다. 울타리로 둘러 막아 3년 동안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 《거가필용》 《신은지》 종자 밤은 한 송이에 세 톨씩 들어 있는 것이 좋은데, 반드시 가운데 박혔던 것을 골라 심어야 한다. 만일 양쪽 가에 있던 것이나 외톨밤을 심으면 맺히는 송이마다 전부 한 톨씩만 여무는 외톨밤밖에 달리지 않는다. 《속방》 처음 밤을 심을 때 땅을 파고 기와쪼가리 같은 것을 깐 뒤 흙을 펴고 그 위에 심으면 뿌리가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아 옳겨 심기 편리하다.가을이나 겨울에 구멍이를 파고 인분을 퍼 넣은 뒤 흙으로 덮고 표시해 놓았다가 이듬해 봄 그 구덩이로 옮겨 심으면 잘 살고 빨리 자란다. 《속방》 밤나무는 씨로 심고 접붙이기 등은 하지 않는다. 접붙이기 등의 방법으로는 살리기 어렵다. 《속방》 종자 밤을 심어 싹이 돋아난 후 쥐가 그 밤을 파먹거나 사람이 혹 파먹으면 그 밤나무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않으니 절대로 범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속방》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지은 농서(農書)이자 가정생활서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보면 오늘날 재배변종만이 식재되고 있는 한반도 밤나무 환경과는 근원적으로 차이가 있다.서양식물학의 시조(始祖) 린네(Carl Linnaeus:1707-1778)가 식물의 종(種)를 발표하고 활동한 1753년 이전부터 조선에서는 이미 정확한 밤나무재배방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재배법에 따라 식재를 하였음을 알수가 있다.위 기록을 보면 현재도 재배농가에서 재배종 종자에서 얻은 대목(臺木:접붙일 때 바탕이 되는 뿌리 달린 나무)으로 접붙이기 하는 것을 막고 반드시 좋은 씨앗으로 종자재배할 것을 요구하는 사실에서 매우 과학적인 재배방법에 이미 익숙했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종자 밤은 한 송이에 세 톨씩 들어 있는 것이 좋다 하고 세 톨 중 반드시 가운데 박혔던 것을 골라 심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만일 양쪽 가에 있던 것이나 외톨밤(왜생밤나무)을 심으면 맺히는 송이마다 전부 한 톨씩만 여무는 외톨밤 밖에 달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지금까지 황율(黃栗) 즉 누런 밤을 살펴보고 있지만 사실상 황금색 깍정이(殼果:밤송이:cupule)에 쌓인 작은 밤은 외톨밤으로써 미주왜생밤나무와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또한 밤나무류 중에서 가장 향과 맛이 뛰어나다고 하고 있는 사실과 무엇보다도 북아메리카대륙의 동부사람들은 이것을 훌륭한 약제라고 여긴다는 사실에서 한반 건율(乾栗)이라는 설정과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황율이라고 판단하였다.그러나 실제로 이 황율이 밤나무 중에 가장 양질의 과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산림경제의 글에서 특히 종자로 사용할 밤은 한 송이에 세 톨씩 들어 있는 것이 좋고 그 중 가운데 위치한 밤톨이 좋다 한 것은 양질의 과실을 뜻하는지 아니면 한 깍정지에 세 톨의 밤이 맺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하지만 현 유럽대륙 지중해연안 특히 백악 석회토양이 많은 그리스지역에 유럽밤이 자랐다고 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를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고 많은 부분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서식하였다고 하는 미국밤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미국밤과 동일 종에서 나누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이것이 실제로 조선시대의 재래종이었는지 더 파악할 문제이지만 서식한 위치가 조선시대 경기, 충청도,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까지의 역사위치와 동일한 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달콤한 밤(sweet chestnut) 혹은 스페인 밤(Spanish chestnut), 포르투갈 밤(Portuguese chestnut), 프랑스어로 마론(marron) 즉 밤나무라 한 유럽산 밤나무의 학명 카스타네아 사바타(Castanea sativa)는 아마도 소아시아 터키 북부와 코카서스지역(Caucasus region)에서 철기시대(Iron Age)만큼 멀리 거슬러 올라가고 로마시대(Roman times)와는 거의 근접한다(Zohary et al. 2012)는 설명이 존재하고 이 밤 열매를 주로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것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Missouri Botanical Garden 2016]아시아에서는 일본종(C. crenata), 중국종(C. mollisima), 모율(茅栗,野栗子,毛栗,毛板栗:C. sequinii:1908)이 재배되고 이들 아시아 종(種)으로 만들었으며 이것들을 주요 교배재배변종(Hybrid Cultivars)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중국밤(Chinese chestnut)은 밤나무 몸통이 마르는 병의 저항력이 강하다(Missouri Botanical Garden 2016)고 알려진다.때문에 중국밤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밤과 동일성이 없다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미국밤(American chestnut:C. dentata)은 자연 그대로에서 수확되어 옛 애팔래치아 경제에 기여했다고 알려진다. 동부 대도시에서 사용과 판매를 위해 수확한 견과류는 물론이고, 가볍고 튼튼하며 썩지 않는(rot-resistant)목재는 가구, 통신재(posts), 기타 용도에 중요했다(Anon 2016a)고 말하고 있으며 밤나무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주요한 동부 낙엽성 삼림자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와같이 호황을 누리던 미국밤(American chestnut)과 많은 산업이 일본과 중국토종 밤나무(Japanese- and Chinese-origin chestnut trees)의 밤나무줄기마름병균[Cryphonectria parasitica (Murril)Barr]에 의해 초토화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그것은 북미대륙의 밤나무산업전체를 훼손시키고 1940년대까지 밤나무줄기마름병균으로 힌해 분포지로 구석구석 유포되어 미국밤 개체들을 심하게 훼손했다고 한다. 기존 사용하던 근계(根系)에서 균이 감염되지 않는 근맹아(根萌芽)(Anon 2016a)는 새싹이 몇 년 자라나면 감염되어 죽게 되고, 더 많은 맹아(萌芽)가 형성되었다 하였으며 이것은 북아메리카 동부 산림의 카스타네아(Castanea)생물 다양성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기도 한다. 밤나무마름병지역(Pre-blight range)은 앨라배마 북부(Alabama north)에서 온타리오 남부(southern Ontario), 서부에서는 테네시(Tennessee)와 켄터키(Kentucky), 인디애나 남부(southern Indiana), 오하이오(Ohio)로 확대되었고(Sargent 1905;Fernald 1950)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끔찍한 전염병 범위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는 설명도 있다.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각 역사 위치 주요 대륙에서 각가지 밤나무 고사시키는 병을 앓았다는 사실이다.북아메리카대륙은 1904년 밤나무줄기마름병(endothia canker)이 강타하여 궤멸시켰고 유럽대륙 역시이 밤나무줄기마름병과 밤나무 잉크병(chestnut ink disease)으로 전멸시켰다고 했다.우리나라 한반도는 무사했던가.아니다.1958년경부터 어리상수리혹벌(gall wasp)의 피해로 인한 학명, 밤나무혹벌(Dryocosmus kuriphilus)이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그 피해가 확대되어 전멸하기에 이르렀다 한다.이 병체도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지고 1951년에 현재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세계의 많은 다른 지역, 특히 북반구에서 유입된 종과 침입적인 원예 최악의 해충으로 알려지며 현재 한국, 네팔,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프랑스, 스위스 및 유럽의 다른 지역과 미국 남동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이 병원체들이 과연 대륙별로 따로따로 현 자료가 주장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발생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때문에 부랴부랴 1909년부터는 중국밤나무(C. mollissima)와 일본밤나무(C. crenata)를 교잡하여(Clapper1954;Huang 1996)저항성을 가진 재배변종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Clapper1954;Huang 1996)고 한다.결국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의 밤나무를 전멸시켜 황폐화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아시아종을 내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현재 미국종과 유럽종에 대한 진균 변이종을 만들고 밤나무를 고사시키는 병균에 내성이 강하고 저항력이 있는 종으로 배양하면서 적극적으로 근원종과 완전히 다른 변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이렇게 볼 때 문제는 세종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기록하고 있는 토산품인 밤나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우리나라 한반도에 밤나무 재래종이 존재하는가.재래종 금탄환(밤알)을 맺는 밤나무가 무수히 많았던 경기 광주목, 여주목, 과천현, 그리고 충청도 연산현, 경상도 밀양도호부, 청도군, 선산도호부, 창원도호부, 전라도 익산군의 밤나무와 우리가 현품을 확인할 수 없는 삼률(三栗)과 제주목에서 토산품으로 알려져 있던 구실잣밤나무, 적률(赤栗)과 가시율(加時栗)등은 다 어디로 가고 없을까?경상도 율도추연(栗島秋煙)에는 “누 앞의 10리 앵무주(鸚武洲)에는, 밤 꽃이 눈 같고 향기 넘치네. 늘어진 밤송이 별같이 많다. 앞 교외에 밤나무 숲이 있어 몇 리에 가득 찼는데, 해마다 수확이 매우 많고 그 품질 또한 좋아서 세상에서 밀율(密栗)이라고 부른다는 이 "밀율" 또한 찾을 길이 없다.그리고 경상도(慶尙道)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기록엔 "시내 양쪽 가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어서 층층의 푸르름이 어지럽게 펴지고 있으며, 정자 아래에는 벼 논과 보리밭이 있어서 봄이면 푸른 싹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누런 구름 같은 벼가 물결친다." 하였는데 안동대호부가 있었던 곳에 밤나무 천여그루가 지금도 변함없이 존재하는가. 그 많은 밤나무 숲은 어디가고 구름처럼 사라졌을까?혹 세계 최대 규모의 아메리카밤나무 매장지인 위스콘신주 웨스트살렘(West Salem)인근 60에이커에 2500여 그루의 밤나무단지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미시간 주 미서키 카운티(Missaukee County)의 시골지역에 약 0.33에이커(0.13ha) 크기의 미국식 밤나무 숲일 수도 있으며 미시간 주 랜싱에 있는 펜너 네이처 센터(Fenner Nature Center)에 있는 밤나무 숲일 수도 있고 펜실베이니아 북서부 앨러게이니국립 숲(Allegheny National Forest)일 수도 있으며 미국 버지니아 주 오거스타 카운티(Augusta County)인근 조지워싱턴국유림에서 발견된 300-500 여 그루의 밤나무 숲이 그것일 수 있다.더 나아가 보면 중국역사라고 하는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BC:109-91)에 연진(燕秦)의 수천그루의 밤나무일 수도 있을 것이다.그리고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의 무수히 많은 밤나무가 1904년 중국밤나무에 의한 밤나무줄기마름병균에 의해 초토화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그렇다면 동양밤나무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였다는 이야긴데 도홍경(陶弘景)의 명의별록(名醫別錄)에서 기록한 회계(會稽)껍질이 두껍고 맛이 없는 밤과 섬(剡:浙江省 嵊縣)과 시풍(始豊:浙江省 省天台)지역에서 생산된 껍질이 얇고 단밤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는 밤일 수가 있다.소송(蘇頌)의 도경본초(圖經本草)에 연주(山東省 西南部 滋陽縣)와 선주(宣州:安徽省 東南部 宣城縣)의 밤이 가장 뛰어나고, 연산(燕山:河北)의 밤은 열매가 작지만 가장 단맛이 풍부한 밤이라고 한 사실에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미국밤이거나 유럽밤나무일 가능성이 높다.중국밤이라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조선 경기 밤으로 옛날부터 일본에 대량으로 수출되어 일본에서는 중국(고려)단밤 혹은 천진(天津:제물포, 인천)밤이라고 추측이 가능하고 하북성(河北省)북부산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경기북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화북(華北)지방에서 생산되는 밤은 작고 단맛이 풍부한 것은 지금의 미주왜생밤나무일 가능성과 화중(華中)지방의 것은 풍미면에서 화북지방의 품종에 미치지 않지만, 과실이 큰 것은 미국밤나무일 수 있고, 산동(山東)지방의 것은 과실의 크기, 풍미 모두 양자의 중간이다라고 한 것은 어쩌면 유럽밤나무일 수 있겠다 싶다.그 외 무수한 종이 존재하였겠지만 이리저리 섞어 알 수가 없다.이러한 사실을 밝히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리고 과학적인 자료가 부족하지만 역사가 말하는 자연의 이치는 거부할 수 없다 할 때 글쓴이가 밝히는 사실들이 전부 허황한 것만이 아닐 것이라 굳게 믿고 싶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구실잣밤나무" rel="tag" target="_blank">구실잣밤나무</a>,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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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조선과 서조선 그리고 광동조선
********************동조선(東朝鮮)과 서조선(西朝鮮) 그리고 광동조선(廣東朝鮮) 글쓴이:한부울들어가며안중근의사 유해찾기거북선 찾기대조선(大朝鮮)은 다원적사회광동조선(廣東朝鮮)이란.동조선(東朝鮮)이란.서조선(西朝鮮)이란나오며들어가며한반도 역사가 왜 엉터린가.이런 비유를 해서는 안타깝지만 이순신장군의 거북선 찾기와 안중근(安重根)의사 유골 찾기는 한반도 역사를 그대로 들어내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두 건의 역사사건의 유물들을 그렇듯 찾고자 했지만 오리무중으로 남아 오히려 수수께끼같은 더 많은 의문만을 남기고 있다.이러한 사태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한반도 식민사관으로 인해 발생하는 폐해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글쓴이가 지금까지 분석한 결과 한반도 역사사실 무엇하나 지형적으로, 지리학적으로 또는 기후 환경적으로 기존 역사 사실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그만큼 한반도 역사가 불신을 하게 만든 것이다..때문에 한반도 역사를 진실이라고 믿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역사사실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처럼 사건장소가 다르고 주어진 공간이 그렇듯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그럼에도 이토록 역사 사실에서 수많은 괴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안중근의사 유해찾기우리가 안중근 의사 유골찾기에 연관될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 한다고 여겨지는 사건은 바로 1904년에 발생했다고 하는 바로 러일전쟁이다.일본에서는 일로전쟁(日露戦争)으로, 영어로는 "Russo-Japanese War"이라 한다.이 당시 서양세력들의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기문둔갑술(奇門遁甲術)을 우리가 들여다 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첫째 러시아란 국가의 실체가 무엇으로 둔갑했을까 하는 점이다.근대사를 인용하면 서기 862년 노르만인 류리크(Rurik:Rørik)가 속하는 부족 루스인의 이름을 따서 루소 또는 루시(Rus)로 불리게 된 러시아는 17세기 모스크바 대공국(Grand Duchy of Moscow:1283-1547)를 거쳐 그 영향권을 발트 해 부근까지 확장하였고 이반 4세(Ivan IV:1533-1584)때부터 차르국(Tsardom of Russia:1547-1721)이라 하여 로마조프왕조(House of Romanov:1613-1917)까지 이어지는데 이를 러시아제국이라고 한다 하였기 때문에 일단 북유럽 발트해 국가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루스(Kievan Rus)는 1240년 킵차크한국(金帳汗國:Golden Horde:1243-1502)에게 멸족당했다고 한 사실이 있어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그러나 이처럼 일찍이 사라지고 없는 종족을 지칭하며 이것은 마치 지금의 중국의 주요 종족이라고 하는 한족(漢族:Chinese)이 번족으로 인해 멸족당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현재 버젓이 한족이 수억명이라 하는 모순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멸족된 루스(Rus)를 러시아제국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러시아 "Russia" 단어의 "r" 앞에 "p"가 붙은 프로이센(Prussia:Preußen)과의 역사정체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것과 함께 연관지울 수 있는 역사명칭에서도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 1707)으로 사라진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 깃발(Saint Andrew's Cross)을 사용하던 스코틀랜드(Scotland)과도 엮여 있으며 이 깃발은 바로 러시아제국 해군깃발(Ensign of the Russian Navy)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4 "에서 말하길 "루소(Russo)"는 Russo is an Italian surname meaning red-haired. Another variant is Rossi (Central and Northern Italy). It is derived from the nickname "rosso", meaning red, 본 블로그 글 "홍모인과 일본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 "에서 홍모인을 알아보았듯이 이탈리아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붙는 성(姓)으로서 집안 대대로 붉은 머리를 지닌다는 뜻이있고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지역에서 "Rossi" 라 하는 것 역시 붉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르과이, 칠레, 프랑스에게는 로시가 일반적이라고 하였다.이것은 어쨌거나 북부사람임을 나타낸다.이것에 반해 주로 유럽남부에서는 일반적으로 "o"로 끝나기 때문에 북부에서는 일반적으로 "i"로 끝나는 것으로 나타나는 "Rossi" 와 다르고 유럽북부 루스 보트피플" Rus people"에게 쓰이며 키에프 루스(Rus)는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Galicia–Volhynia), 체르니고프 공국(Chernigov), 블라디미르수즈달공국 (Vladimir-Suzdal), 모스크바 대공국(Grand Duchy of Moscow:1283-1547), 루스 차르국(Tsardom of Russia:1547-1721)까지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의 노르딕국가(Nordic countries)로 알려진 지역의 이름이다.즉 로시"Rossi"는 1721년까지의 노르딕국가 발트제국의 역사주체들임을 알 수가 있다.그렇지만 루소 즉 일본인들이 말하는 루소"Russo"는 이탈리아계 남부를 말하는 것으로 사실상 로마노프왕가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러시아의 시원이라고 하는 루스는 보트피플출신들이며 "Rus"의 어원은 '노를 젓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대 노르딕어계통의 발트해제국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은 이와 같다.그렇다면 발트제국이라고 하는 프로이센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또한 러일전쟁이란 삽화를 보면 당시 일본병사들은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 아니라 금발을 하고 푸른 눈동자(靑眼), 벽안(碧眼)의 서양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이것을 역사서는 호인(胡人)이라고 하였고 호인은 청나라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상 백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열도 동양계 일본인이 어떻게 금발을 한 서양인이 될 수 있는가.일본은 또 어떤가. 스코틀랜드가 1707년 연합법으로 사라지고 난 후 모든 서양해양세력들의 역사를 주도하는 것은 바로 잉글랜드인데 이 잉글랜드왕실이 바로 일본의 왕실이라는 사실이다.최소한 1920년까지 조선황실이 존재한 사실이 알려지고 있지만 이때까지 영국이나 일본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왕실은 잉글랜드왕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의 상징적인 것이 바로 3차(1902, 1905. 1911)에 걸친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바로 그것이다.이 영어명칭에서 영국을 정식명칭 잉글랜드(England)라고 하지 못하고 당시협약서에 영어로 앵글로(Anglo)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스스로 국가체제가 갖추어지지 못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마찬가지로 본 블로그에서 미국 역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했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다.적어도 1902년에서 또는 1911년까지 영국이라 하여 "England"의 정식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상황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으며 1776년 미국독립전쟁당시의 식민지제국이었던 브리티시 역시 앵글로의 잉글랜드가 아니라는 사실도 동시에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이 잉글랜드 왕실은 유대인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가(Mayer Amschel Rothschild:1744-1812)에 의해 새롭게 세워지고 정치적으로도 유대자본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러일전쟁당시 일본군은 잉글랜드 왕실의 용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러일전쟁의 루소"Rosso"는 분명 북유럽 즉 발트 노르딕국가가 아닌 붉은 머리의상징을 나타내는 반란성의 상징성이 더해지며 북아메리카대륙 백인이민자로써 이탈리아인의 역사의 땅 시칠리아 섬을 본 블로그 글 "4.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7 대한제국(6편)[2]황금향 지팡구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에서 말하길 그곳에 1차려몽일본원정(1274)이 있었던 곳이라 하였고 루이지애나와 텍사스는 옛 스페인부왕령에 이탈리아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러일전쟁은 북아메리카대륙 남부를 백인이민자(미국)들이 침범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이들의 정체성은 바로 앵글로 잉글랜드 왕실이다.1904년 2월 8일에 발발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露日戰爭)의 시작은 아서항(Port Arthur)이라고 하는 여순항에 대기하던 러시아제국의 극동함대와 대한제국 제물포항의 정박한 러시아전함 2척을 일본해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장소가 현재 동아시아대륙 극동지역 요동반도의 요녕성(遼寧省) 대련(大連:Dalniy/Dairen/Dalian)이 아니라 영문명칭으로 포트아서(Port Arthur,Порт-Артур)라고 하는 여순항이기도 한 멕시코만(灣:Gulf of Mexico)과 그것에 인접한 군항 쿠바의 하바나(Havana)에서 공격을 감행한 택사스(Texas)의 제퍼슨 포트아서(Jefferson Port Arthur)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숨져 묻힌 여순 감옥이 존재한 곳은 지금의 요녕성의 대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거북선 찾기또 한 가지는 바로 거북선찾기이다.2011년 경상남도가 1천500億원 가량을 들여 추진했던 '이순신(李舜臣)프로젝트’에서 원형 복원은 고사하고 거북선(龜船)잔해 조차 찾지 못하고 이 사업 자체가 실패로 돌아갔다.그것은 실제로 거북선이 침몰했을 법한 장소에 잔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아 실체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한반도 역사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매우 단순하고 간단한 결과임에도 거북선 실체를 찾을 수 없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이야기며 한반도인으로써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결과이다.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한반도 역사가 말하고 있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은 분명 한반도에서 벌어져 마무리되었다고 하였고 일본군과 해전이 발생한 남해(南海)에 상당한 숫자의 거북선이 침몰하여 어딘지 간에 거북선의 잔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는 것을 당연한 일임에도 전혀 거북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틀림없다.어찌하여 거북선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일까?우리가 냉정하게 지형상황을 다시금 살펴 볼 때 한반도의 남해(南海)는 다도해(多島海)는 맞으나 솔직히 얕은 바다일 뿐이다.뿐만 아니라 서해(西海)라고 하는 황해(黃海)역시 전부가 대륙붕(大陸棚)에 해당되어 수심 100m에서 최고 깊이가 200m미만임을 알 수가 있다.동아시아대륙의 신중국과 한반도사이에 있는 바다 즉 황해(黃海)는 가두어진 만(灣:Gulf)으로써 내해(內海)라 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남해는 평탄한 대륙붕으로, 동지나(東支那)쪽으로 나아가야 대륙사면(大陸斜面:continental slope)이 나타나는데 최고 깊이가 228m 라고 자료에 나타난다.이 정도의 수심은 우리나라 해저탐사기술력으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영역임을 물론이다.수심이 이정도라는 것은 4,000m 내지 거의 10,000m 이상의 태평양해저와는 비교가 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유물을 이동시킬 수 있는 해류가 문제인데 한반도 사이의 해류는 거의 순환될 뿐 큰 바다로 나아가질 않는다.대만(臺灣)의 남쪽에서 시작(始作)하여 일본(日本) 열도(列島)의 근해(近海)로 흐르는 쿠로시오(黑潮:くろしお)난류와는 비교될 수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심이 얕은 남해에 침몰했다고 하는 거북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한반도 사람들은 신비롭기까지 하는 전설의 거북선 찾기에 대단한 기대가 있었음은 물론이고 이미 한반도 역사가 임진왜란이라 하여 사실화 한 역사사실이 증명되기만 하면 되는데 도대체 남해에서 거북선의 잔해조차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실로 날벼락인 것이다.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가.돌이켜 보면 1976년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 해역에서 발견된 신안보물선, 가칭 신안선(新安船)은 14세기 침몰한 중국 원나라 무역선으로 신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영파(寧波)항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던 배로 알려지고 1976년부터 1984년까지 10차례에 걸쳐 도자기를 포함한 중국 송(宋:960-1279), 원대(元代:1271-1368)유물 22,000여점이 발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신안선이 침몰한 시기가 1323년으로 알려져 당시 거북선 찾기 사업 년도 2011년을 기준으로 한다 하여도 688년이 지났지만 결과물을 우리가 목격했듯이 실제로 멀쩡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시기가 1598년이니 2011년을 기준으로 할 때 413년이 지나 산술적으로 신안적발견시점과 270년이란 시간 차이가 나 오히려 신한선이 더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700년이 지난 침몰선은 해저에서 멀쩡한 상태로 찾았지만 400년 남짓한 거북선 잔해를 남해전체를 그토록 샅샅이 뒤져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위 2가지의 역사유물찾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난맥상은 결론적으로 역사기록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다시 말해 거북선 침몰장소가 한반도 남해가 아니라 다른 역사장소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논리인 것이다.이것은 사실상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만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한반도 역사가 말하고 있는 임진왜란 해전장소가 한반도 남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우리나라 역사자체가 다 이런 식의 의문투성이의 난맥상에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다시 거론하지만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도 형편은 거북선찾기와 다를 것이 없다.모두 아는바와 같이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의 유해(遺骸)찾기는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요동반도의 요녕성(遼寧省) 여순(旅順)감옥, 즉 러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오늘날 대련(大連)이라고 알려진 장소에서 순국했다는 현대사(現代史)의 기록을 근거로 1980년대부터 동아시아대륙에 속한 신중국 여순(旅順) 즉 대련을 답사하며 유해 매장지역을 추적해왔고 마침내 여순(旅順)감옥 동쪽에 위치한 감옥묘지를 안중근 유해매장지역으로 확신하면서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을 요구해오다가 중화인민공화국정부(中華人民共和國政府)의 허락을 마침내 받아 2008년 4월에 발굴에 들어갔으나 묘역 추정지에 아파트공사가 진행되는데다 발굴과정에서 중국정부의 통제가 심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알려진다. 신중국정부는 왜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지 않았을까?신중국에서 안중근의사를 반일혁명투사라고 하여 오히려 우리보다 더 존경하고 받들어진다고 알려져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국 정부가 왜 안중국 유골찾기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지 않았을까?이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즉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던가. 아니면 알려지는 결과가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혹 조작된 사실에 대해 백일하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그것은 동아시아역사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요인으로 파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유해매장지가 여순 감옥 뒷산인지, 감옥 오른쪽의 동산파인지 조차도 파악할 수 없다는 실정임을 감안 할 때 이것은 신중국 정부가 방관하거나 방치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결코 안중국의사의 유골이 그곳 어디에 존재한다면 그들이 스스로 밝혀 내는 것을 마다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본 블로그가 추정한 사실과 아마도 일치한다는 것이다.역사진실 게임으로 넘어가는 자체가 두려운 것이며 동아시아역사뿐만아니라 세계사까지 진위논쟁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발굴을 막았다고 볼 수 있다.안타까운 일이지만 실제로 대련에서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된다.이것은 전자에 언급한 거북선 문제처럼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역사문제임을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대조선(大朝鮮)은 다원적사회 거대한 제국일 수록 다원적사회로 나타난다.지금부터 한반도 사관이 아닌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으로 조선(朝鮮)사회가 단일민족사회인지 아니면 다원적(多元的)사회인지를 밝혀 알아볼 필요가 있다.왜냐하면 한반도역사학자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단일민족사회가 확실하다면 한반도 역사가 주장하는 것이 맞을 수밖에 없다.하지만 만약에 조선사회가 다원적 사회라고 한다면 한반도 역사는 본래 역사와 다르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가 확실하고 지금까지 역사사실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해방(解放)후 70년이 흐른 현 시점에서 보면 단일민족 사회라고 주장하는 식민지사관은 이미 고착화가 되어 상식이 되었고 식민지역사 환경이 사회저변에 깔려 정체성에서 상당한 갈등과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단일민족체제에서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다.때문에 4개 조선(朝鮮)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놀라울 이야기가 아니다.단일민족사관이 실제로 조선역사에서 존재했었다면 4개 조선의 형성자체가 불가능하다.그러나 아래 대표적인 일제어용학자(日帝御用學者)들의 논조(論調)를 바탕으로 이를 간접적으로 진단해보면 분명 조선은 근원적으로 단일민족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식민사관에 의해 각인된 단일민족이라는 역사프레임를 벗어 던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한반도에는 단일민족, 단일문화, 단일 언어, 그 토대위에 중국이란 대국을 섬기고 중국의 문화라고 하는 성리학을 지식자와 관리들이 습득함으로써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을 키워 실리를 따지지 않고 정신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명분을 내세워 공리공론(空理空論)만을 중시하여 대의를 잃고 당파와 파벌싸움으로 체제를 약화시켰다는 논리는 친일파들의 공통적인 주장이며 이와같은 덧 씌우기가 바로 식민사관의 주류를 이룬다.때문에 5000년 역사가 비록 끊김없이 지속되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며 종속되어 조선국왕은 허수아비와 마찬가지로 허약했다는 주장은 덧 씌우기 뿐만아니라 터무니 없는 날조라는 사실이다.한반도 사관과 마찬가지로 당시 일제어용학자들도 조선은 하나의 민족인 단일민족이란 사실을 전제하고 위와 같은 논리 속에 특이하게도 혈관에 검푸른 피가 흐른다고 유전자(DNA)까지 거론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해도해도 너무 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아래 3명의 일본역사학자들이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설파한 내용에서 일률적인 주장들을 볼 수 있는데 즉 조선인들에게 정상적인 붉은 피가 아닌 특이한 검푸른 피가 흘러 식민지시대를 촉발하게 한 원인으로 유전적으로 분열과, 시기심, 질투하는 심리가 강하여 급기야 4대 당파를 낳았고 그것들이 서로 주야장천(晝夜長川)파벌싸움만 하여 나라가 허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누군가가 이를 바르게 제어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이 누군가의 제어가 바로 일제의 압제를 말한다.이런 주장을 한 3명의 어용학자들을 보면 첫째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한제국 학부참정관(學部參與官)으로 부임해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입안했던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1870-1953)가 있다.그는 1907년에 쓴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에서 말하길 "조선인의 오늘날의 작태를 이해하려면, 그 원인을 과거의 역사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역사적 사실의 근원으로 고질적인 것은 당쟁(黨爭)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라고 일갈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사람이 30세 나이 때인 1900년에 부임한 직책은 분명 대한제국(大韓帝國:1879-1910)에서 초빙(參與)한 3등 교육관리이다. 그럼에도 이런 소리를 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깍아 내리려 하는 것이 터무니 없어 보인다. 그의 주장은 지금의 한반도 식민지사관과 마찬가지로 민당(民黨)이나 붕당(朋黨)의 개념이 아닌 파당과 당파싸움으로 인한 정치적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근원이 일천한 것은 알지 못하고 이렇듯 망발하는 것은 근본을 망각한 왜구 한 학자의 주장치고 너무 도가 넘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또 한사람은 역사가 가와이 히로다미(河合弘民:1872-1918)라는 사람인데 그의 <붕당사화의 검토>라는 책에서 "나는 혈액이 굳어버린 채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朝鮮)사람의 혈액에 이처럼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다는 것도 조선(朝鮮)의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시비(是非)를 함께 궁구(窮究)해 둘 필요가 있다면서 여하간 대영웅도 하룻밤에 그 국민의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色), 눈동자의 빛을 바꿀 수 없고, 수천 년 수백 년에 걸쳐 육성된 인격 또는 국격(國格)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꾸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비록 검푸른 피가 흐르지만 굳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방은 아니더라도 시간을 두고 바꾸기가 어렵지만 노력하고 지속할 수 있으면 고쳐질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참으로 가당찮은 헛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이것은 일제가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면 붉은 피가 흐르게 만들 수 있다는 헛소리를 지꺼린 것이다.이런 식의 발언은 지금의 사이코 같은 열도정치인들의 릴레이식 망발과 흡사하다.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일본이 검푸른 피가 흐르는 조선인들을 식민지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무리 유능한 총독이나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쉽사리 본래 피는 새롭게 만들 수가 없을 것이란 주장에서 인간개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나 특이하게 “...대영웅도 하룻밤에 그 국민의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色), 눈동자의 빛을 바꿀 수 없고...”의 글에서 은연 중 다인종(多人種)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즉 그들은 조선(朝鮮)을 하등동물(下等動物)사회로 격하시켜 영구히 지배하길 원하지만 다원적 사회의 구성원들을 하루아침에 통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며 가능한 한 오래동안 통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마지막으로 1908년에 설립된 조선연구회(朝鮮硏究會)대표 호소이 하지메(細井肇:1888-1934)는 분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민족성이 당쟁의 원인이고 오랜 세월 내면화된 기질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다고 쐐기를 박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된 주장들은 거의가 비슷하고 당시 일본이 조선(朝鮮)사회를 단일 민족사회로 본 것이 절대 아님을 알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1900년대 초 대한제국에 건너온 일본 지식인들은 한국을 식민지로 전락시킬 방법으로 한국의 고서 원본을 수집, 간행하여 한국 전래의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였고 간행 서적 중에서 어려운 것은 일본어로 번역까지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특히 영국이 식민지 경영에서 투자를 한 것처럼 조선의 풍속과 민정을 알아야 하는 것은 식민지 경영의 시대적 요구라고 보았기 때문에 대한제국에서 초빙을 강제하여 스스로 이런 업무에 몰입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목전에 두고 있는 정한론의 최후 결과물을 만지는 것과 같다.그러나 글쓴이의 생각은 영국과 일본이 동일한 선상에서 많은 연결이 가능하고 결과적으로 영국과 일본은 종속관계를 가지며 조직적으로 조선에 접근했을 가능성이 높다.왜냐하면 이러한 이상한 흐름은 미국이 태동하기 전 1902년에 맺은 일영동맹(日英同盟:Anglo-Japanese Alliance)을 거론케 하는데 일본과 영국은 러시아제국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고 맺은 동맹이라고 하며 이것이 공교롭게도 1902년, 1905년, 1911년 3차에 걸쳐 도모한 것이 완성된 시점에서 새롭게 조약한 사실과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를 내세워 스스로를 크게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주요 갈등상황에서는 스스로 회피하여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대신에 일본이 이 상황에서 적극대처하는 개체로 나타나며 미국의 태동이 시작된 1920까지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한다.여기서 잠시 일본이란 실체를 파악하고 4개 조선으로 들어간다.일본으로 파악되는 영국은 사실상 지금의 잉들랜드 왕족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이 아님이 밝혀졌고 영국연방(英國聯邦:Commonwealth of Nations)을 영국(British)을 뜻하는 '브리티시'가 영어명에서 생략되었다는 것은 유대인 자금으로 만들어진 영국 또 하나의 왕족 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어쩌면 3차례의 걸친 영일동맹(1902, 1905, 1911)에는 같은 부류의 프랑스, 러시아, 독일이 반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럼에도 다시 10년 동안 영일동맹을 연장하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강대해진 미국에 의해 1921년에 워싱턴 회의(Washington Conference)에서 독일과 러시아가 빠진상태에서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이 체결한 동맹조약이 성립되면서 영일동맹은 폐기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즉 서세의 국가체제가 영일동맹으로 존속되다가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이 체결한 동맹이 되었다는 이야기다.이것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본과 영국이 동일한 체제 속에 존재한 공화국형태의 제정국가라는 것과 나중에 미국도 이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려와 조선을 포괄한 삼한대한제국이며 영국과 일본은 각각 분리된 황실로 존재하고 대신 1921년부터 미국이 주도된 국가체제로 나선 것이라고 풀어 볼 수가 있다.대신 1917년에 이은 1926년 11월 19일에 영국총리(1902-1905)를 역임한 아서 벨푸어(Arthur Balfour:1848-1930)가 유대인국가설립 선언에 서명한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으로 영국 귀족(Peerage) 로스차일드 남작(Baron Rothschild) 월터 로스차일드(1868-1937)의 자금을 지원받아 52개의 서세국가와 식민지로 형성된 연방국(Commonwealth of Nations)을 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이것은 대조선체제에서 동양계제정국가들이 몽땅 빠진 상태로서 서세들만의 연방이며 이와 별도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종주국(宗主國)의 지위는 1918년 사라진 러시아제국과 프로이센으로부터 미국이 이를 차지하여 일본제국으로 기문둔갑술을 부렸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한다.광동조선(廣東朝鮮)이란. 본 블로그 글 "4개 조선(朝鮮)의 흩어짐과 참역사의 가르침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5 "에서 충분히 밝혀 알아본 내용이지만 사실상 친일사관으로 찌들어 버린 한반도 구성원들 누구라도 동인조선(東人朝鮮), 서인조선(西人朝鮮), 남인조선(南人朝鮮), 북인조선(北人朝鮮)이란 명칭에 낯설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 지형에서 4개 조선(朝鮮)을 구분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을 이야기다.이 게시한 지도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 동서(東西)가 짧고 남북(南北)이 긴 한반도 지형에서 남조선(南朝鮮)과 북조선(北朝鮮)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겠지만 그것 동시에 동(東)조선과 서(西)조선을 넣고 구분하기가 순식간에 애매해져 버린다.본 블로그 글 "서변(西邊)의 의미와 오대해(五大海)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9 "에서 기존 역사와 한반도 지형이 얼마나 차이가 있고 근원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 알아보았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한계를 깊숙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이야기다.동서가 짧은 지형에 굳이 동조선과 서조선을 나눌 필요성이 무엇이었을까?광동조선(廣東朝鮮)도 만주와 시베리아를 합쳐 광동이라 하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이러한 사실들은 일단 1920년대 동아일보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사실상 한반도에서 동서를 구분하더라도 한반도 북부지역인 지금의 만주에 도달하여서는 동서가 구분이 될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것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긴지 알 수가 있다.만주지역이 북조선 압록강에서부터 두만강까지 포괄하고 있는 지금의 지형형태를 만주와 시베리아를 합쳐 동조선이라 하면 서조선을 도대체 어딜 말하는 것일까?서조선(西朝鮮)은 북경(北京) 하북성(河北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때문에 광동조선이라는 의미는 매우 센세이션(Sensation)할 이야기며 충격적인 것이다.도대체 지금의 신중국 대륙 남부 광동(廣東)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조선과 중국이 하나의 영역에서 또는 합체된 지형속에서만 가능한 지명이다.광동조선(廣東朝鮮)과 광동성(廣東省)의 차이1926년 6월 28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在廣東朝鮮革命軍人會)라는 것은 황포군관학교 재직자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한 군사조직인데 바로 만주(滿洲)와 서백리아(西伯利亞:西比利亞:Siberia)방면에서 비밀이 학생1,000명을 모집하고 광동조선북벌군(廣東朝鮮北伐軍)에 가담시키려한다는 보도내용임을 알 수 있고 광동조선은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포함한 지역임을 말하고 있으며 황포군감학교(黃浦軍監學校)의 교장인 장개석(蔣介石)의 양해를 얻어 재학 중인 조선인 장교와 학생120명으로 혁명군인회가 조직되어 광동북벌군에 가담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즉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감학교는 조선인들의 군사교육기관임을 알 수있는데 지금은 조선을 싹 빼버리고 국민당군사교육기관으로 알려진다.중국자료에는 본래 명칭이 1924년 6월 16일에 설립한 광동성(廣東) 광주(廣州) 황포(黃埔)의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中國國民黨陸軍軍官學校)라하고 1929년에 개칭하였는데 국민당혁명군황포군관학교(國民革命軍黃埔軍官學校)로 명칭하였고 황포는 번우현(番禺县)에 속했다고 하며 성도(省都:省會) 광주(廣州)역시 1921년에 건립되었다고 하고 있다.전설에 따르면 다섯 선인(仙人)들이 오색(五色) 옷을 입고 오색양(五色羊)을 타고, 한 줄기(一茎) 육출(六出)의 이삭(穀穗)을 들고 광주성으로 와서, 이삭을 성 안에 넘겨 준 뒤에는, 날아올라가서, 다섯 마리의 양(五羊)이 되었다고 전해진다.그러므로 광주도 줄여서 이삭(穗)이라고 부른다.고려(高麗)곡수(穀穗)는 화홍(火紅)이라 하였고 고려곡수(高麗穀穗)는 바로 본 블로그 글 "조선에서 아열대 작물인 수수(高粱Sorghum)가 재배되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549 "에서 밝힌 것과 같이 바로 수수(蜀黍:Sorghum bicolor)이다. 경기 / 광주목/금천현(衿川縣), 양주도호부 / 고양현(高陽縣), 함길도(咸吉道), 강원도(江原道)의 토의(土宜:唐黍)이다.광주는 양(羊)이 많고 수수가 많이 재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기후가 아열대의 메마른 땅이나 습한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경기도 광주(廣州)라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특히 양(羊;sheep)은 1607년에 북미 버니지아(Virginia)에 양을 수송했다고 알려지고 1662년에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의 워터타운(Watertown)에 처음으로 양털공장이 세워졌다고 주장한다.동아일보에서는 황포군감학교(黃浦軍監學校)라 하였지만 신중국 자료에는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中國國民黨陸軍軍官學校)라 사실과 차이가 있다.실제 황포군감학교가 황포에 설립된 학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광동(廣東)은 광동조선(廣東朝鮮)이라 하였으며 광동조선지역에 설립된 학교임을 알 수가 있어 장개석(蔣介石) 역시 국민당(國民黨)을 창건한 손문(孫文)과 함께 조선(朝鮮)내의 정치세력임을 알 수가 있다.이와같은 내용들은 현재 신중국 남부지역의 지명, 광동(廣東)과 관계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그렇다면 광동조선은 만주(滿洲)와 시베리아방면을 포함시켜 부르는 지명인데 현재는 신중국 광동(廣東)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러한 광범위한 동조선(東朝鮮)을 지금의 한반도지형으로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것이기에 이렇듯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한반도 지형으로는 애초부터 도저히 수용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4대조선의 생성역사에서 어떻게 4대 조선(四大朝鮮)이 조선에서 가능했던 것인가에 대해 근원적으로 알아보지 않으면 안된다. 동조선(東朝鮮)이란. 한반도를 조선(朝鮮)이라고 하는 한반도 역사에 따르면 실제로 동조선(東朝鮮)이란 1925년 2월 27일에 보도된 동아일보(東亞日報)기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실제로 그 이전부터 동조선(東朝鮮)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말해지는 것인데 한반도 지형 상 동조선(東朝鮮)은 어딜 말해야 하며 지도에는 어떻게 표시가 가능한지 도무지 판단이 안되고 또한 그렇게 구분짓기가 애매하다.솔직히 한반도 지형 형태상 그렇게 나눔 자체가 불가능하다.한번 보시라.아무리 쥐어짜도 한반도 지형은 동서가 짧은 형태이기 때문에 동조선(東朝鮮)이나 서조선(西朝鮮)을 나뉠 만한 지형의 규모가 아니다.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한반도는 가로 형태가 좁고 세로가 긴 지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서를 나눔자체가 곤란하기도 하고 표시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도 못느끼며 그럴 공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동서를 나누려는 영토를 보면 대체적으로 넓고 광역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동조선(東朝鮮)과 서조선(西朝鮮)을 기어코 나누는 이유는 동과 서가 너무 넓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형 환경상 행정적으로 나누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며 때로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민족과 인종, 언어적으로 현격하게 다르거나 종교 사회적 형태가 지역적으로 확연히 다를 수도 있는 조건에서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동조선사람, 서조선사람 식으로 호칭할만 환경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때문에 동인조선(東人朝鮮), 서인조선(西人朝鮮)이라 한 사실은 정말로 위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거대함을 우리가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더욱 정확히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동조선이나 서조선이라 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인종(人種)이나 민족(民族)간의 구분이 필요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아래는 1925.02.27. 동아일보의 원산 2대안 진정(元山二大案陳情)이란 기사제목의 기사내용이다. 원산 2대안 진정(元山二大案陳情)1925.02.27. 동아일보원산상업회의소(元山商業會議所)에서는 연구(硏究)중(中)에 있던 동조선(東朝鮮)과 일본(日本) 나고야(名古屋), 동경항로(東京航路)의 개시(開始)와 조선철도(朝鮮鐵道)의 화물운임제정(貨物運賃制定)의 2대 중요문제(重要問題)에 대하여 평의원회(評議員會)의 결의(决議)에 의하여 전자(前者)는 19일(十九日附)로 후자(後者)는 18일(十八日附)로써 관계관청(關係官廳)을 경유(經由)하여 제등총독(사이토:齊藤總督)에게 진정서(陳情書)를 제출하였다고 한다.(元山(원산)) 위 기사내용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먼저 원산(元山)은 동조선(東朝鮮)이라 했다는 사실이고 원산상업회의소(元山商業會議所)가 동조선(東朝鮮)과 일본(日本)나고야(名古屋)를 연결하는 동경(東京)항로(航路)에 대한 개시(開始)문제와 조선철도(朝鮮鐵道)의 화물운임제정(貨物運賃制定)의 관한 안건 등을 당시 3대 조선총독인 사이토 제등총독(齊藤總督)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하는 보도이다.이정도의 기사라면 분명 조선에 동조선이란 지명이 공식화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1]衰退(쇠퇴)?發展(발전)?1926.06.06. 동아일보 컬럼원주(原州) 1기자(記者) 지방논단(地方論壇)보는 것과 같이 현재의 원주(原州)는 정말 대원주(大原州)이고 장차 동조선(東朝鮮)의 대도시가 형성될만한 요소가 충분한 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시대(韓國時代)에도 강원도관찰사를 원주에 설치하였고 일한합병(日韓合倂)이후에도 수비대(守備隊)와 헌병분대(憲兵分隊)를 둔만큼 중요한 곳이다.20년 전에는 읍내(邑內) 호수(戶數)가 400정도에 불과하고 외국인(外國人)호수가 10정도에 불과하던 것이 현재까지 조선인(朝鮮人)호수(戶數)가 800정도의 4600명의 인구를 계산하고 일본인(日本人)호수가 40정도 호(戶)에 250명이며 중미불(中美佛)등 외국인 호수(戶數)가 50정도 호(戶)에 200명을 계산하는 영서(嶺西)의 유일한 대도시이다.또 그 뿐만아니라 건등면(建登面) 문막시장(文幕市塲)을 보면 원주읍(原州邑)의 호수 인구와 발전의 비례를 보면 그 증가율은 실로 등차급수(等差級數)로 급속함을 볼 수가 있다.10년전에 문막은 여지없이 50정도 호의 소촌락이었던 것이 현재는 400정도의 호에 달한다.이와같이 호수와 인구에 발전되는 근거가 무엇에 있는가 하면 원주(原州)는 지대(地臺)가 지대(地臺)이다.동(東)으로 천산물(天產物)이 집중한 강릉(江陵)이 있고 서(西)로는 경기도(京畿道) 남(南)으로는 충북(忠北), 북(北)으로 평야(平野)를 이룬 횡성(橫城)에 접하고 또 문막강(文幕江)이 한강상류(漢江上流)의 최고 원천(源泉)으로 도경(道境)을 이루어 항구(港口)가 되어 산미개량(產米改良)과 곡물검사소입상조합(糓物檢査所叺産組合), 수리조합(水利組合)등이 있어서 영서(嶺西)의 농산물이 대개는 이 강(江)으로 들어 경성(京城)으로 수출(輸出) 즉 실어서 내보내며 경성(京城)의 포목잡화(布木雜貨)는 원주(原州)를 거쳐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산배(散配)되는 동시에 해산물(海產物), 농산물(農作物),포목잡화(布木雜貨)등 상품이 시도 때도 없이 산적(山積)되어 경향(京鄉)사이에 대무역상가(大貿易商家)들은 끊이질 않고 운집(雲集)한다.현재 벌어지고 있는 수원(水原), 원주(原州)간 철도시설(鐵道施設), 수원(水原)에서 여주(驪州)까지의 기차선로(汽車線路)를 인취(引取) 즉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일, 구룡폭(九龍瀑)에 수력발전(水力電氣)를 시설하는 등 장래에 얼마나 전망이 있겠는가.(생략) 위 기사내용을 그대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1926년 시기의 원주(原州)는 정말 대원주(大原州)라 할 수 있고 장차 동조선(東朝鮮)의 대도시가 형성될만한 요소가 충분한 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다 하였다. 한국시대(韓國時代) 즉 대한제국시대에도 지방장관 또는 지방총독이라 하는 강원도관찰사를 원주에 설치하였고 한일합병(韓日合倂)이후에도 수비대(守備隊)와 헌병분대(憲兵分隊)를 둔만큼 중요한 곳이라고 설명한다.관찰사(觀察使)는 1895년 기존 8도(道)의 23부제(府制)개편과 이듬해(1896년) 13도제(十三道制)개편을 거치면서 계속 '관찰사'라 불렸는데 20년 전 즉 1906 년에는 읍내(邑內) 호수(戶數)가 400정도에 불과했고 외국인(外國人)호수가 10정도에 불과하던 것이 현재까지 조선인(朝鮮人)호수(戶數)가 800정도의 4600명의 인구를 계산하고 일본인(日本人)호수가 40정도 호(戶)에 250명이며 중미불(中美佛)등 외국인 호수(戶數)가 50정도 호(戶)에 200명을 계산하는 영서(嶺西)의 유일한 대도시라 하였는데 조선인의 호수가 배로 불어났고 외국인들의 증가는 거의 10배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일본인이 40정도 호수에 중미불, 즉 중국, 미국, 프랑스 등 외국인 호수가 50호정도라 하였는데 사실상 서세의 대표격이 영국 즉 잉글랜드가 빠져 있다.왜 영국이 빠졌을까?바로 일본이 영국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냉정하게 우리가 관찰해야 하는 것은 일본의 실체이다.또 그 뿐만아니라 건등면(建登面:沙堤) 문막시장(文幕市塲)을 보면 원주읍(原州邑)의 호수 인구와 발전의 비례를 보면 그 증가율은 실로 등차급수(等差級數)로 즉 복리계산으로 급속하게 나타남을 볼 수가 있다 하였고 10년전에 문막(文幕)은 여지없이 50정도 호(戶)의 소촌락이었던 것이 현재는 400정도의 호(戶)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이와같이 호수와 인구에 발전되는 근거가 무엇에 있는가 하면 원주(原州)는 지대(地臺)가 어떤 공통적인 특성으로 묶이는 일정한 구역 지대(地臺)라는 사실이다.동(東)으로 광산물, 임산물, 해산물 따위의 천산물(天產物)이 집중한 강릉(江陵)이 있고 서(西)로는 경기도(京畿道) 남(南)으로는 충북(忠北), 북(北)으로 평야(平野)를 이룬 횡성(橫城)에 접하고 또 문막강(文幕江)이 한강상류(漢江上流)의 최고 원천(源泉)으로 도경(道境)을 이루어 항구(港口)가 되어 산미개량(產米改良)과 곡물검사소입상조합(糓物檢査所叺産組合), 수리조합(水利組合)등이 있어서 영서(嶺西)의 농산물이 대개는 이 강(江)으로 들어 경성(京城)으로 수출(輸出) 즉 실어서 내보내며 경성(京城)의 포목잡화(布木雜貨)는 원주(原州)를 거쳐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산배(散配)되는 동시에 해산물(海產物), 농산물(農作物),포목잡화(布木雜貨)등 상품이 시도 때도 없이 산적(山積)되어 경향(京鄉)사이에 대무역상가(大貿易商家)들은 끊이질 않고 운집(雲集)한다 하였는데 위 글에서 현재 한반도 사정과 많은 것이 달라 보인다.당시 1926년에 신설되고 있는 수원(水原), 원주(原州)간 철도시설(鐵道施設), 수원(水原)에서 여주(驪州)까지의 기차선로(汽車線路)를 인취(引取) 즉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일, 구룡폭(九龍瀑)에 수력발전(水力電氣)를 시설하는 등 지금은 아니지만 장래에 상당한 전망이 있다고 하고 있다. 그외 동조선에 대한 기사들이 많은데 동아일보 1936.05.22 일자 기사를 보면 강릉군(江陵郡) 신리면(新里面) 주문진리(注文津里)는 세상이 다 아는바와 같이 동조선(東朝鮮)의 굴지의 배가 드나들거나 머무르기에 좋은 항구 양항(良港)으로 현재인구가 1000호(戶)에 가까운 도시라고 하였는데 시(市)도 아니고 주문진리(注文津里)의 가구호수가 1,000호라고 하면 한가구당 4.5인을 계상하면 약 4500명의 인구이다.그런데 이곳에는 홍수가 나면 배수가 곤란하고 각종 어류의 내장등 부하물에 의해 악취와 파리등이 증가하여 전염병의 매개물이 번식할 수 있어 기자는 하수구설치가 급선무라고 하고 면민(面民)의 주머니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어업조합(漁業組合), 수산조합(水産組合)등 제기관을 동원하여 예산을 만들고 하수구설치를 할 수 있도록 종용하는 기사이다. 1937년 4월 1일에 신리면이 주문진면으로 개칭되었고 1940년 11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 221호(1940년 10월 23일)에 따라, 주문진면이 주문진읍으로 승격되었다.또 1939.06.08 에 이런 기사도 있다.조선도렛지광업(朝鮮ドレッジ鉱業) 자본금 350만원과 동조선광업회사 자본금200만원은 3월 10일 각각 주주총회를 개최하고 합병을 결의하였으며 조선도렛지광업은 해산하고 자본금 550만원의 동만주관업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이런 기사도 있다.본 함흥부(咸興府) 홍원(洪原)의 지세는 동(東)은 북청(北靑), 서는 함흥(咸興), 북(北)은 신흥(新興)과 각가 산맥으로써 분계 되어 있고 남방일대(南方一帶)는 동조선(東朝鮮)해(海)에 따라 연(沿)하였으나 남북(南北)은 협(狹) 좁고 산맥은 대개 북(北)으로 부터 남(南)으로 내달았으며 동북부는 고악(高嶽) 높이 솟은 산이 병렬(竝列) 나란히 늘어섰다. 해안선은 경사가 완만하고 평지는 주로 동서(東西) 양쪽 대천(大川)의 유역과 바다에 잇닿아 있는 연해(沿海)지대에서만 볼 뿐이다.이러한 동조선과 서조선이란 명칭을 대한민국정부수립 후 1949.12.17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조선해협(朝鮮海峽), 동조선만(東朝鮮灣), 서조선만(西朝鮮灣)을 각각 대한해협(大韓海峽), 동한만(東韓灣), 서한만(西韓灣)으로 고처부른다고 하였다.서조선(西朝鮮)이란[2]發展(발전)?衰退(쇠퇴)?1926.05.01. 동아일보 컬럼사리원(沙里院) 1기자(一記者) 지방논단(地方論壇)보는 것과 같이 현재 사리원(沙里院)은 정말로 대사리원(大沙里院)이고 장차(將次)도 서조선(西鮮)의 하나의 큰 도시(都市)가 형성(形成)될 만한 요소(要素)가 충분히 보이는 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실례(實例)를 거론하면 지금으로부터 약(約) 20여년(餘年)전이다. 그때의 사리원(沙里院)이야말로 하나의 농촌(農村)에 불과하였다. 당시 호수(戶數)로 말하면 조선인호수(朝鮮人戶數)가 겨우 200~300백 호(戶) 미만이었고 외국인(外國人)이라고는 그림자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한적(閑寂)한 소사리원(小沙里院)이었던 것이 경의선철도(京義線鐵道)를 부설(敷設)코자 공사에 착수할 당시에 사리원(沙里院)과 영천(靈泉面) 수역포(壽域浦)간에 임시철도(臨時鐵道)를 부설(敷設)하고서 침목(枕木)등을 운반(運搬)하던 때부터서야 비로소 사리원(沙里院)이라는 곳이 점점발전 될 색채(色彩)가 농후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없던 당시(當時) 헌병대분견소(憲兵隊分遣所)로부터 경찰서(警察署)를 설치하기 까지 하였으며 동시에 봉산군청(鳳山郡廳)을 이전하는 등 장족(長足)의 발전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제법 도시(都市)의 기운이 떠돈다. 현재의 호수(戶數)만 보더라도 조선인호수(朝鮮人戶數)가 3,187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15,584명이고 일본인(日本人)의 호수(戶數)가 440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1,242명, 중국인(中國人)이 83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343명이다. 과거 20년전 호수에 비하면 물경(勿驚) 20배 이상의 대발전으로 근 4,000호(戶)에 달하는 도시(都市)가 되었다. 1926.05.01.기사 내용을 들여다보면 첫 번째로 사리원을 서조선(西朝鮮)이라 했다.현재 한반도 지형상 사리원시(沙里院市)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서부에 있는 시(市)이자, 도 소재지이며 행정구획 상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沙里院邑)에 속하며 서쪽 재령강(載寧江)연안에 위치하고 있다.기사내용을 보면 사리원(沙里院)은 정말로 대사리원(大沙里院)이고 장차(將次)도 서조선(西鮮)의 하나의 큰 도시(都市)가 형성(形成)될 만한 요소(要素)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대략 20여년 전 1906년에는 사리원(沙里院)이야말로 하나의 농촌(農村)에 불과하였고 당시 조선인호수(朝鮮人戶數)가 겨우 200~300백 호(戶) 미만이었고 외국인(外國人)이라고는 그림자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한적(閑寂)한 소사리원(小沙里院)이었으나 경의선철도(京義線鐵道)를 부설(敷設)코자 공사에 착수할 당시에 사리원(沙里院)과 영천면(靈泉面) 수역포(壽域浦)간에 임시철도(臨時鐵道)를 부설(敷設)하고서 침목(枕木)등을 운반(運搬)하던 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전에 없던 당시(當時) 헌병대분견소(憲兵隊分遣所)로부터 경찰서(警察署)를 설치하기 까지 하였고 봉산군청(鳳山郡廳)을 이전하는 등 장족(長足)의 발전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제법 도시(都市)의 기운이 떠돈다고 말하고 있다. 1926년 현재의 조선인호수(朝鮮人戶數)가 3,187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15,584명이고 일본인(日本人)의 호수(戶數)가 440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1,242명, 중국인(中國人)이 83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343명이다. 과거 20년 전 1906년에 비하면 20배 이상의 대발전으로 약 4,000호(戶)에 인구가 17169명, 호수 즉 가구당 4.29명의 도시(都市)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동조선의 원주 약 조선인과 외국인을 포함하여 약 900호 남짓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도시 규모임을 알 수 있다.이 경의선으로 인해 많은 거대한 도시가 생성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경의선(京義線)의 역사를 보면 1904년 러일전쟁(日露戦争:Russo-Japanese War)을 시작으로 일본은 서울(京城)~신의주(新義州)구간 군용 철도를 부설코저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였고 서둘러 1904년 3월 용산(龍山)~개성(開城)구간의 노반공사에 착수하여, 1905년 평양(平壤)~신의주(新義州)구간이 완공되어 용산(龍山)~신의주(新義州)구간에 직통운전이 시작되었으며,1906년 청천강, 대동강 철교가 준공되면서 전구간이 개통되었고 1920년대에 서울역(京城驛)을 기점으로 하여, 신촌(新村)을 지나 가좌동(佳佐洞)에서 합류하는 신선(新線)이 개통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이렇게 아여 1926년에는 소사리원에서 대사리원으로 발전되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그외 서조선의 보도를 보면 1922.09.05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서조선(西朝鮮)에 또 홍수(洪水:flood)라고 하여 작일밤부터 비가 시작되어 황해도(黃海道) 재령(載寧)지방에는 다시 홍수가 창일(漲溢) 물이 불어 넘쳐 재령군(載寧郡) 삼지강(三枝江)면과 봉산군(鳳山郡) 서종면(西鍾面)의 일대가 홍수에 묻혔고 재령과 사리원(沙里院)간의 교통은 전부 끊어지고 재령과 신천(信川)사이의 통로도 교통이 막혀 우편물도 전송이 정지되었다 하더라(재령특파원발전)1922.09.28 기사를 보면 조선(朝鮮)에서 제2의 평야(平野)라 지하고 서조선(西朝鮮)의 부고(富庫)라 칭하는 이 "나무리 평야"는 전술한바와 같이 최초(最初) 많은 개인들의 노력으로 개척하기 시작하여 점차로 개척한 범위가 확대되매 이에 촌락(村落)을 이루고 일편으로는 동(垌) 큰 뚝을 완축하여 토지와 주민의 안전을 보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척된 토지는 상당한 수확을 보게 되고 주민은 비로소 안락한 생활을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토지가 누구의 소유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겼다. 물론 현대 사람의 관념 같으면 또 현대의 사유재산제도(私有財産制度)같았으면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또 어떠한 방법으로 든지 이것을 가장 튼튼하고 또 완전(完全)하게 자기의 소유가 되도록 하였을 것이며 또 당연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의 관념으로는 토지소유제도(土地所有制度)가 아직 분명치 못한 당시의 형편으로는 그 토지를 왕족이 사는 궁가(宮家) 즉 육상궁(毓祥宮)에 위탁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 하여 그 토지전부를 동궁(同宮)에 위탁하게 되었다[연대미상], 그러나 소위 청백치 못한 양반이나 세력가라는 자들이 자기의 소유토지를 궁가(宮家)에 위탁하고 그를 빙자하여 모든 편의를 얻고 또 결세(結稅)를 면제(免除)케한 사실이 있고 또한 토지소유의 안전을 도모하는 대신 생산하는 일부를 도지(賭地)사용료, 토지명의 차료(借料)로 납부하면서 생산수익(收益)과 권리이전(權利移轉), 경작권(耕作權)까지 자기들의 자유로 처분하여왔기 때문에 궁가에 위탁하는 이 평야, 즉 개척한 토지들은 당연히 궁가와 경작자간의 관계로 보더라도 이 토지의 평야는 궁가와 그 개척자의 공유가 되어야 하지만 당시의 소유제의 불명확함과 궁가(宮家) 대 세민(細民)의 관계, 그들의 막강한 지위가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제도가 변하고 상리(常理)가 안전지 못하여 모든 지위가 한낱 일장춘몽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결국 대한제국(大韓帝國) 융희(隆熙) 2년(1908)에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이 설립되고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가 창립되면서 제실재산은 주식불입금으로 납입되어 이렇게 궁가와 개척자간의 남겨진 토지들이 모두 동양척식주식회사소유로 넘어가 버렸다는 기사이다. 이것이 대표적인 일제의 토지 갈취이야기다.그외도 상당히 많은데 나중에 기회 있을 때 올리도록 하고 위의 글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하면 사실상 일제(日帝)가 조선의 영토를 전쟁없이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위 기사내용을 보면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위 기사에서 안타까운 것은 조선인들이 서조선에서 거대한 평야를 개척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연대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이 매우 안타깝다.그러한 땅이 철도업자들에게 야금야금 잠식당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광활한 땅의 제실재산(帝室財産)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돈(화폐)으로 환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마치 1803년 완료된 루이지애나 매입에서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을 미국정부가 반란의 괴수의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로부터 2,147,000 km2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달러에 사들였던 사건이라 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했던 구매 중 하나라고 하면서 들어내는 상황과 같은 논리이다. 대대로 이어온 조상의 땅이며 당시 제정(帝政:imperial government)의 땅을 마음대로 팔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상대적으로 프랑스가 무력적인 면에서 약한 것도 아니다.또 한가지는 마찬가지로 18세기에 국가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미국이 대조선인 브리티시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는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서쪽으로 개척을 나간다는 설정인데 이때부터 서부는 무법천지의 세상이 되었고 그들은 꺼리낌 없이 강도질 즉 개척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물론 거대한 벽이라고 생각햇던 루이지애나 식민지 영역을 반란 괴수로부터 매입한 사실을 빌미로 역사적으로는 동부식민지 확대의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고 중부와 서부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말하고 있다.그리고 북미역사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하나의 체제의 비주류로 존재하던 아메리카원주민 땅을 빼앗는 것으로 설정하고 '서부개척시대'라고 만들었지만 전부 20세기초 독점자본으로 토지를 강매하게 만들거나 착취한 사실을 그럴 듯하게 풀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문제는 해양세력들이 주식회사제도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날개를 달았다는 사실인데 19세기부터 생성된 부르주아세력과 이은 도금시대(鍍金時代:Gilded Age) 자본제국주의 자들의 무차별적으로 벌어들인 추악한 자본을 이용하여 기발한 주식회사를 만들고 황실의 재정을 틀어쥐었으며 황실권한을 제압하면서 허수아비 황실을 만들었고 마침내 황실 즉 제실의 땅과 재산을 몰수하고 착취했던 사실이 위 기사에 고스란히 들어난 것임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http://blog.daum.net/han0114/17049956 "에서 어멀리 켐프의 ‘The face of Manchuria, Korea, & Russian Turkestan(1911)’ Korea is the fifth largest cotton producing country in the world, and now that it is opening up to trade, with fresh facilities of transport by land and sea, it is likely to make rapid progress.한국은 세계 5위의 면화 생산국으로, 육상과 해상에서 새로운 수송 시설을 갖추어 무역을 개방하고 있어, 급속한 진전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한 사실에 근거한 것인데 현대 과학자들은 자본주의 생성을 20세기의 주요한 제조업이었던 목화산업을 이야기 한다.즉 자본주의의 상징성을 목화산업 즉 면직물산업이라고 한 것이다.세계5위의 면화생산국이었던 코리아가 자본주의 생성 근원을 제공한 국가주체임은 분명하고 세계5위의 면화생국으로써의 생산성을 유지하려면 거대한 영토를 가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무엇으로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나오며위에서 보듯이 동조선은 원주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서조선은 사리원을 말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적어도 한반도지형에서 처럼 직선거리 229km 남짓하게 떨어져 있는 도시들이 아니며 동조선, 서조선이라 하였으니 상방간 도시의 방향이 정동서가 되어야 하겠지만 위 한반도 지형지도에서 보듯이 서북과 동남을 가르킨다.웃습지 않는가.어떤 독자의 표현대로 한반도 지형의 도시들은 어색함의 극치이다.최근 인터넷 신문을 보면 일본네티즌들은 스스로 '일본은 동조선(東朝鮮)'이라 하고 중국네티즌들은 스스로 '중국은 서조선(西朝鮮)'이라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2010년대 들어 일본 네티즌들이 자국을 비하하는 의미로 동조선(東朝鮮)이란 신조어를 사용하였고 이어, 최근 중국 네티즌들도 자국 비하의 의미를 담은 서조선(西朝鲜)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다고 기사화하고 있다.이런 신조어를 만드는 일본 혐저민(嫌儲民)들은 “일본은 열등국가이므로 동조선이란 표현이 어울린다”며 “일본에서 주장하는 일본해도 동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더 나아가 중국을 서조선(西朝鮮), 러시아를 북조선(北朝鮮), 미국을 미조선(美朝鮮) 등으로 지칭하고 또 한국은 세계의 중심이므로 중앙조선(中央朝鮮)으로 부르자는 주장까지 제기된다고 하고 있다. 한편 최근엔 중국에서도 혐한(嫌韓)성향의 중·일 네티즌들이 퍼뜨린 용어 ‘서조선(西朝鲜)’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물론 이러한 현상은 자국의 열등적인 면도 없지 않겠지만 한국을 혐오하는 세력들이 비아냥거리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그러나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지칭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명확한 사실은 이러한 지칭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대조선이 얼마나 크길래 이렇듯 4개조선이 존재했을까?그것을 근원적인 역사 사실로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왜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 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일제는 해양세력이어야 하고 서세이어야 하며 자본제국주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일제도 반자본주의 세력들에게 반란을 당했고 그러한 세력들은 정확하게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즉 일제는 철저한 자본주의체제의 정치조직이다.그리고 조선과 대한제국을 합병한 후로 특이하게 일제정치제도가 중국화가 되었다는 사실이다.역으로 이야기 하면 조선과 대한제국이 중국이었다는 말과 같다.사이토 마코토(齊藤 實)은 조선총독이다.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재임:1916-1919)가 3.1운동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그 뒤 잘 알려진 1920년 3개 신문발행 허가를 조치하는 조선(朝鮮)에서의 문화통치자로 알려진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1858-1936,재임:1919-1931)가 하세가와 후임으로 취임하여 1931년에 퇴임한다.당시 조선총독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보다 더 비중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도 참 특이하다.사이토 제등총독이 일본 내각총리에 인선되던 시점의 일본제국 정부사정을 보면 북아메리카대륙과 마찬가지로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장세인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로 촉발되어 전 세계로 확산된 1929년 세계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여파가 강타하여 일본 경기가 후퇴하고 기업도산이 잇따랐으며 사회 불안도 확대되는 와중에 내각에서는 중국환상에 빠져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정작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내각은 만주사변 실책까지 묵인하면서 동시에 1930년에는 런던 해군군축조약을 체결한 것과 맞물려 불만을 고조시켰으며 새롭게 취임한 호헌파의 중진 내각총리가 노골적으로 군의 축소를 지지하는데 큰 불만을 가지면서 총리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 禮次郞:1866-1949)가 수상에서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1855-1932)가 수상에 취임하자 1932년 5월 15일 일본제국 해군 내 극우 청년 장교를 중심으로 한 5.15 쿠데타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그러나 이 극우청년이라고 하였지만 그들의 해동은 반 자본주의 세력들이다.쿠데타 세력들은 경제공황을 발생케 한 재벌타도를 목표로 정우회본부, 경시청, 일본은행 등을 습격하고 총리관저에 침입하여 내각총리대신 쓰요시를 사살하고 체포되었다 하였으며 주모자 11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국적인 구명 운동과 35만 명의 서명으로 사면되었다고 당시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이것을 보면 국민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한 것과 같다.이러한 사건들은 늘 하는 이야기지만 북아메리카대륙의 미국(US)의 한 도시에서 벌어진 사건일 것이란 추측이 강하다.바로 워싱턴(Washington D.C) 또는 시카코일 가능성이 높다.조선총독부 출신이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추천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도 제3대(1919-1927), 제5대(1929-1931)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총독으로 근무한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1858-1936)는 제47대 외무대신, 제41대 문부대신, 제30대 내각총리대신, 제9대 태정관(太政官)의 내대신(内大臣)까지 역임을 하였고 온건노선에 호응하여 황족세력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1849-1940)와 중신들이 개별적으로 만나 회의한 결과 일제의 총리에 임명 된 것이라고 하였다.당시 일본제국 관직명에서 특이하게 훈독(訓讀)을 사용하였고 옛 중국이라고 하는 수당(隨·唐)에서 사용하였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 사실과 당명(唐名)과 중국의 품계제 위계(位階)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상 이러한 행위들은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스스로 중국체계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것은 대조선의 위치를 그대로 답습하고자 했던 것이다.본 블로그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612 "에서 일본에서는 주로 ‘고려개’라 하여 박견(狛犬)이라고 하지만 때론 '고양이'라 하여 박묘(狛猫)라고도 하며 또한 고려 박(狛)이 아닌 당묘(唐猫)라고도 하였다는 자료와 우리나라 사전에서도 박견(狛犬)을 고려견(高麗犬), 당사자(唐獅子)라고도 하고 고려(高麗)가 당(唐)이고 중국(中國)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본 블로그 글 "나가사키(長崎))항과 데지마(출도)는 어디에 있었는가?"에서 말하길 카라(から)는 한자(漢字)로 눈에 띄는 3가지가 바로 "韓, 漢, 唐"이라는 명칭을 훈독(訓讀)한 것이고 삼한을 카라(から)라고 하였으며 통일삼한을 당(唐)이라 한 사실을 밝혔다.다시말해 1910년 한일병합에 의해 일본제국의 이러한 율령제도와 품계, 위계사용은 그토록 소원했던 마침내 정한론(征韓論)을 실행한 것이 되었고 삼한을 다 가졌으니 바로 수당(隨·唐)과 같은 중국(中國)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이것은 극일을 위해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중국(中國)이란 타이틀을 놓고 장개석의 신중국과 일본제국이 마침내 치열한 전쟁을 벌렸다는 사실도 알수가 있는데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7년의 중일전쟁(中日戰爭:Second Sino-Japanese War)이다.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8 "에서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벌어진 청일전쟁(淸日戰爭, First Sino-Japanese War)은 고려(高麗)와 일본이 충돌한 전쟁이라는 사실도 상기 할 필요가 있다.근대사가 감추고 있지만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차례로 일본이 정복했다는 사실은 정한론을 성취한 것과 같다는 이야기다.그렇다면 옛 삼한을 통일한 고려(高麗)를 당(唐)이라고 하였으니 그들 스스로가 당명(唐名)을 사용하여 위계질서를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추정일 것이다.그런데 당시 훈독은 한자음 만의 훈독(訓讀)이라고 하겠지만 이것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독일어, 러시아어화하여 포괄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소위 옛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Prussia:Preußen)이 가졌던 유럽종주국 권한을 그대로 위임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때문에 일본제국은 유럽세력들의 중국(中國)이었던 것도 알 수가 있다.그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유럽은 빼버리고 용병들만 채워놓은 것이 오늘날 열도일본이다.그러니 삼한의 종주국이었던 대조선(indies, 大朝鮮)과 대한제국(COREA)은 세계유일한 통치국이며 세계 종주국으로서의 거대한 영토와 막강한 주권을 가졌던 역사체제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이다.우리를 정말로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은 대조선 체제내에서 벌어진 사건임에도 유럽종주국싸움이라고 하는 보불전쟁전쟁(Franco-Prussian War:1870∼1871)중 파리에서 폭동 일어나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든지 이후 프랑스의 제3공화정부가 입각하고 또한 프랑스인 학살과 기독교교회방화 등이 발생하였던 천진사건 즉 천진교안(天津敎案)이 발생하며 조선에서는 전국적으로 서원을 철폐하였다는 사실들을 접할 수 있어야 한다.세계사에서 이런 사건들을 분리키셔 독립적인 사건으로 만들었지만 이 사건들이 하나의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고 철폐되었다고 하는 이 서원(書院)은 유교서원이 아니라 바로 카톨릭교회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 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100여 년 전 안동에는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기독서원(基督書院)이 존재했고 윤치호(尹致昊:1865-1945)는 중국의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수학하면서 1887년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고 하며 무슬림교회 역시 서원(書院)이라 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종교교회(琮橋敎會)라 하였고 오래전부터 중국에서는 교회서원이라 하였는데 서학동점기(西學東漸記)에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국 전통 서원에서 ‘서원(書院)’이란 명칭을 멋대로 취해 설립한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구라고 설명하고 있다.서세들이 이런식으로 취한 것이라면 동양역사의 장점들을 그들이 씨도 빼지않고 그대로 삼켰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서구에서 이런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자 1871년 1월에 주체가 된 프로이센체제에서 독일제국(帝國)이 성립되고 빌헬름 1세(Wilhelm I. 1797-1888,재위:1861-1888)황제가 즉위하면서 신미양요(辛未洋擾:1871.06.01)가 발생한다.어쩌면 오늘날 프랑스는 철저한 선교사 집단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이것들은 동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 흐름이다.그렇게 되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국지적으로 청일수호조약(清日修好条規)이 맺어지는데 1871년 9월 13일에 천진(天津)에서 일본과 청조(淸朝)사이에서 처음으로 맺어진 대등한 조약이라 하는 것으로써 이 천진사건은 동양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조약사건이 아니라 유럽인들의 미래에 매우 전망이 어두울 수 있고 활동이 부자유스러워져 곤란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귀결 된다. 물론 이를 조정코저 한 청조는 바로 고려(高麗)의 명령을 하달받는 하부관리의 지배구조이다.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1871년 2월 26일 프랑스 제3공화국의 아돌페 티에르(Adolphe Thiers:1797-1877)와 독일제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1815-1898)가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 1871)을 맺게 되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승복하는 불평등 조약이다.아마도 이때부터 조선의 귀족사회계층간 심한 갈등을 가졌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일수호조규(清日修好条規)역시 조약당사자가 일본인 다테 무네나리(伊達 宗城,1818-1892)와 청조 외교관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라 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천진사태를 동서간 진정시킬 수 있는 하부관리의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사실 이런 구체적이고 광범위하게 풀어내야 하는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말하고자 하지만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보불전쟁전쟁(Franco-Prussian War:1870∼1871)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제국의 비스마크크 철상의 등장과 조선시대 대원군의 등장이 처해진 정치적상황과 체제속에 위치하는 권력입지와 상대적으로 대원군이란 지위 현황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으며 아마도 베르사유조약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의 입지를 강화하고 고려가 담당했던 북부 자유무역지역을 조선이 직접 관할 하는 조치가 아니었는가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이것이 바로 독일프랑스강화조약 체결이라고 하며 알자스와 로렌(Alsace-Lorraine)북부를 할양하는 것과 성격상 비슷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즉 고려의 권한이 그만큼 약해지고 조선에서 모든 통제가 가능하도록 권한 위임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풀어 볼 수 있다.또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1-1898)은 철종(哲宗:1831-1863,재위1849-1863)의 전가족이 몰살한 상황에서 이듬해 1864년부터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1866년에 천주교탄압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고 1871년 6월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자 1873년 11월에는 명성황후(빅토리아황후)와 유학자 및 신안동김씨(하노버왕족), 풍양조씨(호엔촐레른 왕가), 여흥민씨(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에 의해 축출당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마찬가지로 1862년 12월 1일에서 1866년 12월 31일까지 빌헬름 1세의 대리청정을 직무 수행하였고 수상 취임 후 첫연설에서 군비확장을 주장한 철혈정책(鐵血政策:Eisen und Blut)연설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 철혈정책에 따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비를 확장하여 1864년 덴마크를, 1866년 오스트리아를 제압하였고 이후 일으킨 프랑스-프로이센 전쟁((普佛戰爭:1870-1871)에서 승리하여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독일통일을 이룩하였다고 하는 인물이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1871년에서 1890년까지 독일제국의 제국수상(Reichskanzler)으로서 유럽외교무대를 주도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위해 노력했고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Russo-Turkish Wars)이 발발하자 베를린회의(Congress of Berlin)를 주관하여 '공정한 중재자' 역할도 하였다. 즉 국제조정자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중앙지배세력인 종주국의 재상(宰相)행위와 같다.국내적으로 1872년부터 남부독일의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한 문화투쟁을 벌였던 것도 흥선대원군의 카톨릭탄압과 동일한 것이며 1878년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를 억압하였다는 것은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진주농민항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개혁정책을 실시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비스마르크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걸쳐서 반(反)가톨릭과 반(反)사회주의 법률을 만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독일정치문화에 불신과 분열이라는 파괴적인 유산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비스마르크는 후두암(喉頭癌, Laryngeal cancer)에 걸린 빌헬름2세와 황후인 빅토리아공주와의 정책 갈등으로 사직, 정계은퇴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고종의 황후 명성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아 갈등한 사실과 같고, 1898년 7월 30일 사망했는데 대원군의 사망년도가 동일하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Victoria Adelaide Mary Louise:1840-1901)이라고 단언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고려와 조선에서 분리된 군주와 군후들이 존재했을 것이란 짐작이 들기 때문이다.코리아의 여왕의 사진들이 우리의 모습과 다른 것은 아무래도 고려와 조선인들의 사회가 다원적 사회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또 하나 우리가 비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시 정수리에 꼬챙이가 달린 투구 피켈하우베(Pickelhaube)를 한반도 역사에서 고종과 순종이라 한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투구는 1842년도에 프로이센이 채택한 군모이고 19세기와 20세기 독일의 군인이 사용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다.광동조선(廣東朝鮮)이라 한 것도 그렇다.광동의 있는 조선으로 불어 볼 수 있고 조선에서 광동지방의 조선을 말할 수도 있다.어찌되었던 모두가 동쪽에 존재했다는 의미이다.그렇다면 광동이라 하였으니 조선의 동쪽 영토는 매우 넓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한반도에서 그러한 징후는 찾을 길이 없다.무엇때문에 광동조선이라 했을까?한반도를 보면 절대로 광동조선이란 명칭이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은 바보천치가 아니면 알 수가 있는 이야기다.그러나 지금의 신중국 대륙 남부에 광동(廣東)이란 지명이 있다.이 광동과 광동조선은 다를까?왜 헷갈리게 역사지명을 이렇게 명명했을까?여러가지 의문이 든다.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이런 지명은 두개일 수가 없다.바로 하나이며 동일하게 볼 수밖에 없다.서두에서 이야기 했지만 동아일보 기사에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在廣東朝鮮革命軍人會)라는 것은 황포군관학교 재직자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한 군사조직인데 바로 만주(滿洲)와 서백리아(西伯利亞:西比利亞:Siberia)방면에서 비밀이 학생1,000명을 모집하고 광동조선북벌군(廣東朝鮮北伐軍)에 가담시키려한다는 보도내용임을 알 수 있다.조선 동쪽에 있어야 할 넓은 광역과 만주와 시베리아를 묶어 이야기 할 때 한반도 지형에서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그러나 황포군감학교(黃浦軍監學校)의 교장인 장개석(蔣介石)의 양해를 얻어 재학 중인 조선인 장교와 학생120명으로 혁명군인회가 조직되어 광동북벌군에 가담시켰다는 기사 내용에서 1924년 6월 16일에 설립한 광동성(廣東) 광주(廣州) 황포(黃埔)의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中國國民黨陸軍軍官學校)라하고 1929년에 개칭하였는데 국민당혁명군황포군관학교(國民革命軍黃埔軍官學校)로 명칭한 사실에서 이 학교가 분명 국민당을 이끈 장개석이었다고 중국자료에도 나타난다.황포가 번우현(番禺县)에 속했다고 하며 성도(省都:省會) 광주(廣州) 지명 역시 1921년에 건립되었다고 하고 있다.사실상 미국이 암묵적으로 등장하던 시기 1920년부터 모든 역사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장개석(蔣介石) 역시 국민당(國民黨)을 창건한 손문(孫文)과 함께 조선(朝鮮)체제 내의 정치세력임을 알 수가 있고 신중국 남부지역에 광동(廣東)이란 지명은 우리의 광동조선과 동일한 선상에서 판단해야 할 지명임은 물론이다.안중국의사 유골찾기, 거북선잔해찾기에 물음에서 한반도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이 없다.다원적인 체제에서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함께 공존했고 많은 종교를 포용하면서 서로 갈등이 없게 만들었고 수많은 언어체계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배려한 그야말로 파라다이스 같은 사회가 바로 우리 역사의 진정한 모습이었다.그 속에서 동조선, 서조선, 남조선, 북조선이 존재했고 또한 광동조선도 존재했다.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는 퍼즐을 맞추면 맞출수록 더 심한 안개가 덮어버리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그럼에도 우리는 진실을 향해 쉼없이 나아가고 또한 밝혀야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책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흥선대원군" rel="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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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상선기(商船旗)
***************************일본 상선기(商船旗) 글쓴이:한부울 A civil ensign is an ensign used by civilian vessels to denote their nationality. It can be the same or different from the state ensign and the war ensign (or naval ensign). It's also known as the merchant ensign or merchant flag. 위 영어자료를 보면 상선기(商船旗)를 영어로 시빌 엔사인 "civil ensign" 즉 '시민의 선상 깃발(船旗)'이라는 의미인데 이 시빌(civil)은 '문명화된 시민'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도시국가를 뜻하는 것이다.즉 해양세력의 무역사무소가 차려진 곳의 도시(city) 또는 소도시(town)의 읍(邑)을 표시하는 깃발이다.결국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 엔사인(Ensign)이다.시민의 함선깃발(civil ensign)은 민간 선박들이 그들의 국적(도시, 읍)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 하였고 그것은 국가의 깃발, 전쟁의 깃발(또는 해군깃발)과 같거나 다를 수 있다 하였다. 즉 그 깃발을 국기로 사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현재 거의가 그러한 상선깃발이 국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주장한 논리와 일치한다.그것은 또한 상인함선깃발(merchant ensign) 또는 상인 깃발(merchant flag)로도 알려져 있다.우리가 해양세력들이 깃발을 함선에 달고 해양을 누비고 다녔다는 것은 첫째 해적으로 보지 않도록하는 장치이며 어떤 체제가 인정하는 무역회사의 소속 함선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관리의 수단과 방법이 정해지게 하는 중요한 표식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다.그러나 모순은 현대에서 발생한 것인데 이러한 도시(city) 또는 소도시(town)의 읍(邑)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지금은 어마어마한 수많은 도시(city) 또는 소도시(town)의 읍(邑)을 포함한 국가로 발전이 아닌 변신둔갑을 했다는 사실이다.때문에 우리가 바라보는 근세기의 유럽국가, 아메리카국가, 아시아국가들은 전부 이런 형식에 의해 생성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취지이다.그러나 대한민국만은 오히려 크게 축소되어 다르다.인터넷 기학 학회(Flags of the World (FOTW))자료를 보면 조선(朝鮮:KOREA)에서 등대선에 사용하던 깃발을 볼 수가 있다. (1)(japanese)lightship flag used in korea.(2)Customs vessels used in korea.(3)Beacon control vessels in korea.[자료:Flags of the World] (1)번 깃발 그림은 (Japanese)lightship flag used in korea.등선(燈船:Light ship)이라 함은 항로(航路) 표지(標識)의 배를 가르키고 등대를 세우기 곤란(困難)한 하구(河口), 천해(淺海), 암초(暗礁)가 있을 곳에 정박(碇泊:渟泊)하여 두고, 그 선상(船上)에 높이 등화(燈火)를 걸어 놓고 항로(航路)를 알리어 주는 배를 말하는 것을 한국해안에서 사용했다고 보이는 기(旗)로서 일본(japanese)이라 하였지만 네덜란드사람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상태에서 더욱 활성화되고 특별대우를 받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그러나 제퍼니스(Japanese)는 미국이 대표하는 상업무역연합체 성격을 가진 조직체로 보아야 하고 조선 즉 한국의 해관에 의해 사전 등록된 것으로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즉 제퍼니스(Japanese)이라 함은 연합성격을 띤 상업무역업체 간판명칭정도의 역할을 하였고 조선에서는 이를 순수한 상업무역조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판단된다.놀라운 것은 외국선박의 안전을 위해 등대를 세우기 곤란(困難)한 하구(河口)나 해안선가까이에 대륙붕해역으로 수심이 대략 130~200m 정도의 얕은 바다 천해(淺海), 물속에 숨어 있는 바위 암초(暗礁)를 피하도록 미리 닻을 내리고 정박(碇泊:渟泊)하여 두었다는 것은 당시 선진국에서만 할 수 있는 대책이다.조선(朝鮮:KOREA)에서 사용하는 등대 역할의 작은 배에 세우는 등대선 깃발’이라는 설명을 우리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2)번은 Customs vessels used in korea.먼저 근세기 서양국기들은 거의가 이 선척기(船隻旗:vessels flag)에 의한 것으로 선척은 바다를 운행하는 거대한 배를 이른 것이며 상선(商船)등에 꽂아 식별을 하던 것들이 오늘날 국기가 된 경우가 많다. 한국(KOREA)이 세계산업의 중심지였다고 판단되며 때문에 온갖 함선들이 이런 식별표시를 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능했다는 것에서 우린 놀란다. 해관(海關)은 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로서 오늘날의 세관과 마찬가지이며 선척기는 선박에 표식하는 깃발이다. 즉 해관선척기(海關船隻旗)는 조선(朝鮮)1883(고종 20)년에 항구에 설치한 행정관아(官衙) 즉 세관(稅關)를 통과하기 위한 선박의 표식(標識)인데 이것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2)Customs vessels used in korea.의 깃발을 달지 않으면 통과 할 수 없다는 표식이다.‘Customs Vessel (Ensign)’ "used in korea"은 조선(朝鮮:KOREA) 출입하는 모든 선박은 이 깃발을 꽂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3)번 깃발 그림 비컨(beacon)이라 함은 안전 운행을 유도하는 신호등임을 알 수 있는데 한국(KOREA)영내에서의 항로표식(航路標識:Beacon)을 제어 관리하는 선박에 꽂는 깃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In korea 라는 것은 3가지 종(種)의 모든 깃발들이 세계에서 유일한 조선(朝鮮:KOREA) 연해관리 표식(標識)임을 알 수 있다.이런 사실에 대해 믿음이 필요하다.위 3가지의 연안선박 관리 표식깃발에서 상당히 많은 상업 선박들이 조선(朝鮮:KOREA)해안에 들락거려 이를 통제가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한국 해안을 출입하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박을 위와 같이 별도로 두어 관리를 편하게 하였으며 여러가지 상황에서 식별하기 위한 깃발까지 고안하여 게양하고 운행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인터넷 기학 학회(Flags of the World (FOTW))에는 위 3가지의 깃발표식을 사용한 시기가 1871년부터 1945년까지라고 하였다.물론 코리아가 조선(朝鮮:KOREA) 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910년에 끝나버렸다.그런데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어떤 세력이 이를 지속적으로 사용했을까?그것을 사용한 곳은 분명 한반도는 아니다.이 깃발을 처음 사용한 시기를 따진다면 조선에서 1870년 일본 외무서기가 헬타호(號)를 타고 부산에 입항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물러간 후 하는 수 없이 청조(淸朝) 여진 앵글로에 협조를 얻어 그해 청일통상조약(淸日通商條約)체결하면서 결국 최혜국 대우, 협정관세율을 서로 인정한다는 협약을 체결했다.이것은 숙종26년(1700)에 폐장된 중강개시(中江開市)와 중강후시(中江後市)의 재개가 아닌가 한다.그것은 바로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해양세력들이다.1871년에 마침내 조선에 압력을 주기 위해 신미양요(辛未洋擾:1871.6.1-6.11)를 일으키는데 이 해양세력들은 조선 영내에 입항하기가 지극히 곤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조선 해안에서부터 반드시 선박에 표시깃발을 게양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상선에 깃발을 게양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왜냐하면 무기를 적재한 상선을 동원하여 겁박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그 만큼 조선은 해양세력들의 무역 중심지로써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때문에 조선은 청조와 국경 사이에 특별무역관할지를 조성하여 그곳으로 해양세력들이 들나들게 하였고 그곳은 해양세력이었던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중국(中國)이며, 조선중앙정부의 관리하에 있는 무역 적법장소라는 것이다.요사이 기준으로 이야기 한다면 홍콩이나 싱가포르 그리고 뉴욕항 정도가 되었을 수가 있다. 日本国の商船旗は、1870年(明治3年)制定の太政官布告第57号商船規則によって日章旗と定められた。日本においてはこれ以後この商船旗が慣習的に国旗と扱われていたため、当然ながら日本の国旗と商船旗は同一である(のちの1999年に国旗及び国歌に関する法律として法制化)。また船舶法(明治32年3月8日法律第四十六号)においても商船などの日本の船舶には日本の国旗を掲げる事が明記されている。 第二次世界大戦後の占領下の日本では、連合国から日章旗の掲揚を禁止された期間においては国際信号旗の"E"の旗を基にした商船旗が用いられた。同様に、アメリカ占領下の沖縄では国際信号旗の"D"の旗を基にした商船旗(琉球船舶旗)が用いられた。 一方、現在の日本の自衛艦旗(軍艦旗)は旭日旗であり、商船旗と異なるデザインである。이제부터는 일본 상선기가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볼 차례이다. 위 일본 자료를 보면 일본의 상선기(商船旗:Civil ensign, merchant ensign or merchant flag)는 1870년(明治 3년)제정된 태정관 포고(太政官布告) 제57호 상선규칙(商船規則)에 따라 일장기(日章旗)를 정했다라고 되어 있다.이것은 일장기가 상선국기이지 국가 또는 왕을 나타내는 국기는 절대 아니라는 설명이다.즉 조선에서 해안 세관관리가 정해지고 난 후부터 이러한 상선에 깃발을 달게 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다.서두에서 언급했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결코 국가를 표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일본에서는 이후 이 상선기는 관습적(慣習的)으로 국기(国旗)로 다루어 당연히 일본의 국기와 상선기는 동일하다(후일의 1999년에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로 법제화)라고 만들었고 또 선박법(船舶法:明治 32년 3월 8일 법률 제46호)에서도 상선 등 일본의 선박에는 일본의 국기가 아님에도 일본국기를 단 것이 명기되어 있다 라고 하였다.제2세계 대전 후 미국이 점령 하의 일본에서는 연합국에서 일장기게양이 금지된 기간이 있었고 국제신호기의 "E"의 깃발을 바탕으로 한 상선기가 사용되었다고 알려진다. 마찬가지로 미국 점령하의 오키나와에서는 국제신호기의 "D"기를 기본으로 한 상선기(류큐선박기)가 이용되었다. 사실상 일본 국기가 일장기로 정해진 것은 1999년임을 알 수가 있다,문제는 이것을 군함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일뿐 역사사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開国以降、この日章旗は維新政府のもと1870年2月27日(明治3年1月27日)の「明治3年太政官布告第57号」で「御国旗(御國旗)」(=商船旗・軍艦旗)とされ、改めて日本の国旗として扱われるようになった。'1999년에 제정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 또는 '선박법(船舶法)'과는 다르게 그들의 근대사 기록에서 보면 "개국 이후 이 일장기는 유신정부아래 1870.02.27(명치3년 1.27) 명치3년 태정관 포고 제57호에 의거 어국기(御國旗)라 하였고 동시에 상선기, 군함기라고 부기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국기로 취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그리고 1834년 청일전쟁이나 1905년 러일전쟁 삽화에 나타나는 욱일기 따위는 명치시대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가 춘재년창(春斎年昌:1887-1894)이 1894년 9월 갑오지역(甲午之役)이라고도 하는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러일전쟁(1904)에 대한 전장 상황을 그린 것에서 나타나는데 후일 이런식으로 국기가 조작되어 나타났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8 "에서 보듯이 일본국기는 오늘날 상선기가 아닌 붉은 바탕에 가운데 흰 색 원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또한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시기 대동강(大同江)은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9 "에서 보면 욱일기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해군군함에 착용되는 군함기라 하면서도 욱일기는 온천지에 그럴듯하게 사용된 것처럼 그림을 조작하고 있다.청일전쟁 대동강 전투 지그재그 깃발(우키요에 화풍)은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各國旗圖의 해제적연구]위 서울대학교 연구자료에 나타나는 도안을 보면 이를 일본 측량정(測量艇) 즉 측량에 쓰이는 작은 보트에 매다는 깃발이다.이러함에도 마치 군대공격깃발 또는 국가의 육군깃발처럼 그려놓고 있는데 소위 일본이라는 군사실체는 해양세력들이며 상선의 승무원, 상선소속회사에 고용된 선원이라고 볼 수 있다. 被占領期に用いられた日本商船管理局旗(SCAJAP) 피점령기(1945-1952)에 사용된 일본 상선관리국기 위 깃발은 1945년 일본의 항복을 계기로 욱일기(旭日旗:rising sun flag)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배에는 SCAJAP(일본연합군사령부)의 깃발이 부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열도를 점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總司令部 GHQ:General Headquarters)는 일장기를 폐지하고 대신 SCAJAP(일본연합군사령부) 깃발을 대신 쓰게 했지만 1949년 1월 1일에 일장기의 게양을 다시 허가했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장기가 공식적인 일본의 국기가 된 것은 1999년 8월 13일이다.무슨 이유로 1949년 일장기 게양이 허가된 이후 바로 공식적인 일본 국기라 선언하지 못하고 1999년에서 비로소 하게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알 수 있으면 흥미로울 것이다. Japanese-owned ships with Japanese crews flew a blue and red pennant modified from international flag signal code for “Echo.” SCAJAP(일본연합군사령부) 깃발은 필리핀국기와 흡사하며 일본연합사령부는 일본소유선박들은 '에코(Echo)'의 국제기호에서 수정된 파란색과 빨간색 깃발을 게양하게 했다.또한 쿠바국기(Cuba)와 푸에르토리코기(Puerto Rico)와 비교해보면 SCAJAP(일본연합군사령부) 깃발을 180도 회전한 상태에서 볼 때 삼각 표시와 우측 파랑, 빨강색을 구분하고 있는 것과 아래 쿠바와 프에르토리코 국기 삼각에 별이 있는 것과 각자 다섯 줄의 색상이 파랑과 빨강으로 나뉘고 있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물론 쿠바는 1903년부터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푸에르토리코는 같은 조건에서 1898년부터 식민지가 되어 1917년 정식으로 미국소속영토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 영향이 묻어 있는 깃발이다.그리고 일본연합군사령부의 깃발로 그러한 식민지개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끝으로 여기서 덧 붙인다면 현재 열도에는 미군이 점령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즈, 베네주엘라등지에서 옮겨진 미국의 용병 또는 고용되었거나 오래전부터 미군에 의해 훈련되고 교육된 동양계 남방민족 또는 역사적으로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말기 전국시대(戰國時代:1336- 1573)에 서양해양세력인 영주에게 예속된 부자유민 농노(農奴:serf)로 구성된 일본이 아닐까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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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대한해협으로 역사바라보기
**************************한반도 대한해협으로 역사바라보기 글쓴이:한부울 1.머리말2.한반도 지명이 가지는 모순3.미국지도가 제작된 1920년대의 세계현황소제 : 제정러시아와 프러이센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4.유라시아(歐亞:Eurasia)와 아라사(愕羅斯)5.저지대 유럽제국생성과 시대상황6.저지대 유럽제국 프로이센7.베르사유조약과 유럽국가생성의 의문8.16세기 서양지도에 한반도는 없다.9.대한해협의 명칭10.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11.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12.마무리 1.머리말 우리나라 역사 지명(地名)은 우리 조상의 오래된 사고와 의지가 담겨지거나 생활모습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우리에게 귀중한 무형 유물, 문화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이를 들여다 보면 지명으로 하여 각 지역 주민의 언어·풍속·의식·도덕·종교 등의 역사발달과 특성을 볼 수 있다 하였고 지형에 붙여진 지명뿐만아니라 행정의 필요에서부터 생성된 법제지명도 개별적 가치와 문화성, 사회성,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때문에 세계 각국에서는 고대 지명에서 현대 지명에 이르기까지 그 근원과 역사성을 조사, 연구하여 자료를 축적하였고 그 결과 독립적 학문으로써 지명학(地名學:toponymy, toponomy, Ortsnamenkunde)이란 학문을 세워놓았다고 볼 수 있다.모든 역사지명에는 시대적 상황과 근원의 역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명 특히 한반도 지명에서 보면 시대환경이 타의에 의해 지배되던 일제식민지시대가 존해하였다고 하지만 1920년 미국에서 발행했다고 보이는 한반도 지형지도에는 일제가 관리했다고 여겨지는 법제 또는 행정 지명과도 동 떨어진 서양인들 시각으로 만든 지도에서 대한해협의 또 다른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놀라움과 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없게 하는 것이다.한반도 부산(釜山)과 열도의 시모노세키(下關:Shimonoseki) 사이를 대한해협(大韓海峽) 즉 "한국해협 (Korea Strait)"이라 한 것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익히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다.그러나 해협 중앙지점에 대마도(對馬國)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이라 하였고 남쪽에는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 하였다는 사실이 1920년 미국에서 발행된 지도에서 발견된다.이 지도는 안타깝게도 한반도 역사 정체성을 찾아 볼 수 없는 또 다른 한반도 역사의 민낯을 보는 듯하여 눈을 가리고 싶을 정도이다.대한해협은 왜 자주성조차 찾을 수 업는 신세가 되었는가.대한해협을 남북으로 나누어 북쪽을 칭한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은 당시 잉글랜드 귀족 탐험가의 이름으로 파악되고 남쪽의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는 것은 발트족 독일인 해군장교의 이름임을 알 수가 있다.그들이 한반도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도대체 이런 지명은 어떤 이유로 대한해협에 갖다 붙일 수밖에 없었을까?어떤 유래가 그들에게 있길래 1920년 당시 가장 부유한 신흥강국으로 세계에 등장하고 세계국가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하던 미국이 제작한 지도에 버젓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이것은 한편으로 한반도 역사정체성을 묻는 것이기도하다. 이 지도를 보고 있으면 한반도에 삼한역사가 5000년 역사를 자랑하며 존재했던 땅이 맞는가 하는 매우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의문이 든다.왜 고유의 전통적인 지명은 다 팽개치고 얼토당토하지 않는 서양인들의 지명이 붙여진 것일까?도대체 한반도 역사가 얼마나 우물안에 개구리식 역사이기에 이렇듯 서양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체 원래 해역 지명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이처럼 깜깜이 같은 지명을 우리가 목도해야 하는가.1920년대 미국은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하던 세력이기도 하지만 대한제국을 통제하던 세력이다.도대체 이들은 삼한역사의 5000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왜 무시할 수밖에 없었을까?다시말해 19세기 주종을 이루는 선교사를 중심으로하는 서양인들의 주장처럼 조선인들이 미개하고 부패한 관리가 쇄국하여 은둔의 암흑 역사이었기 때문에 한반도 역사는 미개한 역사라고 취급된 것이 사실일까?서양인들에게 지명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이미 수많은 서적과 여러 지식인을 통해 충분히 인지하고서도 의도적으로 어떤 불손한 목적을 위해 그들이 표기하는 지도에는 반드시 옛 조선의 원지명을 빼버리고 대신 현재 그들이 조작할 수 있는 지명으로 대체하여 지도에 표기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서양사에 바탕으로 되는 해양식민시대에서 전세계를 안방드나들듯 온천지를 누비고 다녔다는 그들의 일관 된 주장을 뒤받침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그야말로 한반도는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의 역사적 위치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5000년 역사를 유지하고 오히려 중국이라는 정복왕조보다 끈끈한 이어옴이 있는 조선사회에서 국가, 민족주의이념을 가지고 있던 역사학자나 지리학자, 지도제작자들이 그렇게도 없어 반대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인가 하고 구성원들의 활약이 그토록 미약했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든다.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이미 안타깝게도 좋은 인재들은 다 전향했다고 해야 맞다.왜냐하면 사라진 왕국에 버티고 있을 구성원은 일반 백성이나 보통사람들이며 그야말로 한반도 인으로 분리되었던 세력밖에는 없었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가 있다.때문에 미국에서 제작한 지도가 어떤 식이라 할지라도 이를 거부하거나 비판하여 수정토록 하고자 하는 조직이나 개인은 전무했다고 보아야 하고 묵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왜냐하면 그들도 사라지는 국가나 체제보다 현재의 그들의 미래에 대한 삶을 보장해주는 세력이 더 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어쨌거나 이러한 지도가 말해주는 한반도 역사는 외롭고 초라하고 볼 품이 없는 그야말로 역사 정체성이라는 것은 찾아 볼 수도 없는 안타까움 그 자체라 할 수 있고 1920년대에 한반도는 주인이 없는 무주공산의 땅이었을 가능성을 진단하게 하는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1차세계대전을 마치고 어디나 할 것 없이 혼란을 겪을 때이고 생존이 급할 때이기 때문에 이런 지도제작에 메달릴 수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2.한반도 지명이 가지는 모순 한반도 해안이나 해상에 나타나는 서양지명들은 전자에서 이야기 했듯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한반도에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내민(內民), 즉 구성원들이 한반도 해역으로 벗어나지도 못한체 그리고 본토에서 멀지도 않는 거리 가까이에 존재한 섬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뚜렷한 역사적인 지명도 없이 행정관할 밖이라 하여 내버려 둔체 방관했다고 생각하는가.서양해양세력들이 지들 마음대로 지명을 붙인 울릉도와 독도만 두고 보더라도 그렇다.그렇다면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512년 신라(新羅)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해 신라영토로 복속시켰다는 기록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뿐만아니다.1882년 조선 정부는 울릉도에 대한 그동안의 먼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정책 즉 공도(空島)정책을 버리고 개척령을 반포해 강원·경상·충청 등에서 모집한 사람들을 이주시켰다고 하였으며 울릉도의 본격적인 개척 이후 종래의 '우산도'를 '바위섬'이란 뜻의 '석도(石島)'라고 불렀는데 이를 훈독(訓讀)해서 '돌섬'이나 '독섬'으로 부르다가 '독도'로 변형된 것이라 하여 울릉도 어민들의 여름철 어업기지로 이용되었다 한다.우리가 역사지명으로 알고 있는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기록은 명확하다.18세기 해양세력 서구인들의 인명들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여 기존 역사지명을 무시한체 붙여야만 했을까?그들이 무슨 권한으로 배를 타고 해양에만 나아가면 무조건 그들의 영토이고 그들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남의 땅이라도 상관 없이 눈에 띄이는 족족 지들 마음대로 지명을 붙일 수 있다는 특권의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점유, 점령한 적도 없다.이런 짓거리가 세계어디라도 통했다고 한다면 분명 그것은 조작이나 날조을 위한 엉터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전술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런 지도가 제작될 수밖에 없는 환경은 1920년 경의 한반도가 본래 무주공산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또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지도를 제작한 회사가 동아시아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유럽대륙의 동유럽국가들도 한반도나 열도와 마찬가지의 처지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1920년 상황을 돌이켜 보면 당시는 한반도가 일제식민지상태였다는 것 밖에 없다.그리고 유럽대륙은 1세계대전으로 쑥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당연히 한반도는 정치사이코 아베왜구 조상들이 한반도 관리자이었고 총독도 왜구였으니 한반도 지명은 왜구 점령자들이 바꾸고 싶으면 바꿀 수 있는 환경이었을 것이다.어디라도 한반도 지명은 왜구 일본인의 언어 히라가나(平仮名:ひらがな), 가타카나(片仮名:カタカナ)일본식 한문으로 갖다 붙일 수는 있다.그러나 열도 일본어가 아닌 영국, 프랑스, 독일이라고 하는 서양어가 붙었고 이런 지명의 유럽국가들은 당시 발언깨나 하는 국가의 함대명이나 항해인들이다.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과연 한반도는 지금의 아베조상인 열도 일본인들이 식민지관리하에 있었던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즉 현재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사용하는 열도일본인이 한반도 역사를 통치한 일본제국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서술한 것이지만 한반도 동해섬에 한반도 영해에 속한 섬인 울릉도와 독도가 있으며 이 지명들은 19세기 지도에는 전부 서양선박명이나 서양인의 이름이 지명으로 나타난다.라 페루즈(La Pérouse)함대가 1797년 5월 25일 대한해협을 지나, 5월 27일 당시 서양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았던 한 섬을 발견하였고 이것이 울릉도(鬱陵島)라는데 프랑스의 시계공이며 천문학자인 조셉 르포 다즐레(Joseph Lepaute Dagelet:1751-1788)의 이름을 따서 다즐레 섬(Dagelet Island)이라 명명했다고 하였으나 예상밖으로 그들은 울릉도에 상륙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점유도 하지 않았으면서 도명한 것이다.그러면서도 악착같이 지명을 붙여 그들의 이름을 역사지도에 고스란히 남기고 싶었던 이유는 일개 공명심이 발동한 것일까?참으로 우리 입장에는 불편하고 불공평한 이야이다.독도(獨島)또한 상황은 동일하다.1849년 여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Liancourt)호가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다 독도를 발견하고 리앙쿠르 암초라고 하였고 그로부터 6년 뒤 1855년에 영국함대에 의해 독도가 발견되었으며 영국함대의 이름을 따서 호넷 암(Hornet Island)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1849년이나 1855년에조선이 망해버린 것인가.아니다,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이다.그들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남의 나라 전통지명은 깡그리 무시하고 변변치도 않는 그들의 이름을 감히 영토 지명에 올려 그것이 세계사에서 한반도 지명이 되도록 한 근거는 어떤 근거로 하였는지 묻고 싶다.지금이라도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세계역사학계에 이의를 달 필요가 있다.한반도 구성원이나 아니면 당시 식민지배하고 있는 조선총독부가 존재하여 자주권, 보호권이 발동될 수 있음에도 이러한 지도까지 버젓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한반도 실체와 조선총독부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이와같은 행위는 무슨 시장통에 장사꾼도 아니고 먼저 보는 놈이 장땡이라 하여 이것이 역사가 된다면 그야말로 껍질도 벗기지 않고 날로 삼키는 날도적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서양해양세력들의 습관적 관행이었다고 하더라도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남의 나라 영토를 방문한 것과 같은 것인데 그들이 생전처음 발견했다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함부로 지명에 오물을 던질 수가 있는가 하는 말이다. 본 블로그 글 "철종 6년 1855년에 호네트호가 들어 온 곳은 한반도 동해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19 "에서 밝힌 이야기지만 철종6년 1855년에 영국함 호네트호(HMS Hornet)와 프랑스함 비르지니(Virginie)호가 한반도의 독도(獨島)를 방문하고 동해안 일대를 측량하였다고 뚜렷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아예 나타나질 않는다.그러니 서양세력들이 주장하는 역사사실들은 거의가 자기 주장에 의한 것이다.그렇다면 몰래 접근하고 도망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후세 역사음모세력에 의해 사건을 빼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대수롭지 않는 사한으로 본 조선 정부가 이러한 사실을 기록에 남길 만큼 비중있기 보지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국제간의 영토와 영해를 함부로 넘나들면서 몰렴치하게 남의 영토 지명까지 도명(盗名)한 것이 되는데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한반도 지형에서 서양해양세력의 지명이 붙은 것에서 또 한 가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지명이 이 지도에 보인다.그들이 발견했다고 하는 울릉도에서 북쪽 위 38도선 바로 해상에는 현재 지도에 나타나지도 않지만 실제로 구글위성을 통해 살펴보아도 섬이랄 것이 없음에도 그곳에 그리스신화 아르고선(Argo)에 승선했던 50명의 영웅 아르고나우타이(Αργοναύται)을 의미하는 아르거놋 섬(Argonaut Island)이라고 붙여놓은 지명이다.그러나 당시 1920년에는 존재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스테리로 19세기까지 한반도 해상에 존재하던 섬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이것은 그들이 한반도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다른 자료에 보면 "Argonaut Island, real name Ulleungdo, a South Korean island" 라 하여 아르거놋 섬의 지명은 본래 한국섬 울릉도의 이름이라 했다.도대체 울릉도가 몇개나 되는가.위 1920년 미국에서 제작된 한반도 지형에서 동해쪽을 보면 분명 울릉도 위에 또 다른 섬 지명이 존재하고 있어 하는 말이다. 그래서 도대체 아르커놋(Argonaut)이라는 명칭이 무엇인가 알아보았다.이 명칭은 잉글랜드 해군 소속인 아르러놋호(HMS Argonaut)가 북아메리카대륙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과 연결된 린 헤이븐 만(Lynnhaven bay, Virginia)을 중심으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에서 거점(South East Coast of America Station:1838-1899)을 만들어 활동한 사실이 밝혀지며 이 지역은 브라질 노예무역을 위한 장소로써 1838년 태평양거점과 분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노예무역이 무엇인가.대항해시대 당시 유럽과 접촉한 전국시대 일본에서도 토착 일본인들은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갔다고 알려진다.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었던 일본이 긴 전쟁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이 다름 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서양인이라면 간이라도 빼줄 일본인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지 그것 역시도 궁금하다.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해양세력들이 주도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 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었던 사례가 아주 많았다고들 하고 있다.그러나 지금의 열도일본인들은 날조된 2차세계대전을 그들의 위대한 행적처럼 여기고 우리를 하찮게 보고 있으니 참으로 웃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삼한역사에도 나오듯이 벌거벗은 모습에 훈도시차고 옆구리에 단도를 끼고 설치던 열도일본인들을 무리배라 하여 인간취급조차 하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이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 "에서 특히 서양인들이 말하는 태평양(Pacific)은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서부 이편지역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또한 중국바다(中國海:The Sea of China)라 한 사실과 미시시피강유역 주위를 분명 인디즈(Indies)라 명칭했다는 사실을 밝혔다.이것은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동양역사가 펼쳐졌다는 이야기다.그리고 잉글랜드 별칭인 앨비언(Albion)은 지금의 버지니아(Virginia)를 뉴앨비언(New Albion)이라고 한 사실과 그들의 지속적인 거류지역, 또는 기지(Station)로 이용한 사실이 발견되고 1853년 일본 강호시대때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 Perry)가 일본 우라가(浦賀)에 입항했다는 사실 등에서 출발항구가 바로 버지니아 노퍽(Norfolk)이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가 있어 서양해양세력들의 전반적인 무역기지가 버지니아 해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때문에 버지니아주(Virginia)의 헤이븐만(灣:bay)을 종종 "브라질과 강변기지, 거점"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는데 브라질 강변에 설치던 세력들이 버지니아로 몰려든 것과 같다. 그러한 브라질 노예무역 기지를 아르커놋(Argonaut)섬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 버지니아 부근에서 찾아야 할 섬 지명이 한반도에 난데없이 붙여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 한가지 집고 넘어갈 이야기가 있다.당시 서양지리학자, 지도제작자, 또는 탐험가들이 얼마나 엉터린가 하면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이 발생한 시점인 16세기말엽까지 그들이 만든 동아시아대륙 특히 한반도는 지도에 그려 넣지 못했다는 사실과 이외로 그러한 서양지도가 많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그만큼 그들의 지도제작술이 형편 없었던 것이다.즉 16세기의 그들 지도에는 한반도 지형을 아예 표기조차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은 최소한 16세기까지 동북아시아를 방문조차 하지 않았고 방문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물론 일본 열도 역시 마찬가지다.그럼에도 열도일본인들을 끌어들였지만 대조선이 존재하던 한반도를 타겟으로 서양해양세력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임진왜란을 도발할 수 있었다 한다.얼마나 엉뚱한 발상인가.15세기부터 해양을 누비며 장사를 하던 세력들을 오늘날 자칭 서양해양세력이라 하는데 이들이 삼한역사에서는 왜구(倭寇)라 한 사실은 본 블로그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바가 있다.그들이 조선(朝鮮)을 침범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과학적이지 않고 그들의 지도가 엉터리라는 것을 감안할 때 얼마나 그들의 역사가 모순투성인지가 확연해 진다.아무리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16세말엽 서양세력들이 지도에 표기조차 할 수 없었던 한반도를 무단으로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럼에도 19세기 강력한 해양세력이었던 미국이 제작한 지도에 한반도 동해안 섬들을 서양인들의 이름을 지명으로 대체한 지도를 뻔뻔스럽게 제작한 동기가 과연 무엇인지 밝혀져야 한다. 현재 한반도인들은 자꾸 열도에서 왜구가 기생한 것처럼 알고 있고 또한 임진왜란이 현재 열도 왜구들의 소행이라고 여기지만 본래 일본이란 야폰(Japon)은 아메리카대륙 중부 카리브해에 존재한 사실을 이미 본 블로그를 통해 수차례 발힌 이야기며 그곳을 근거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진출한 세력임을 누차 침이 마르도록 일관하게 주장하였다.이들 세력들은 16세기 중반까지 세계삼한역사 주체들에게 상당한 핍박을 받았던 해양세력들로써 따져보니 이들은 바스크인(vascos:basques:basques)이며 통일신라시대때 사라진 백제유민으로 판단되고 그들이 주동이 된 것이다.고대 바스코네스(Vascones)족과 아키텐 이라고도 알려진 로마제국의 속주 중 하나인 아퀴타니아(Aquitania)족을 선조로 하여 한 번도 이들 종족은 통일정부를 가져본 적이 없고, 여러지역에 흩어져 살거나 프랑스(France)와 스페인(Spain)의 통치아래 살았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조선(朝鮮)으로 나타나지만 서양귀족과 부유층의 세력이고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 즉 고려의 서양귀족과 부유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이들이 위그노이며 부르주아들이다. 3. 미국지도가 제작된 1920년대의 세계현황소제 : 제정러시아와 프러이센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 대한해협과 울릉도, 독도가 서양인들의 인명으로 처리된 위 지도는 1920년 미국 뉴욕에 있었던 레슬리 주지회사(Leslie-Judge Company)에 의해 제작된 "1920 Leslie’s New World Atlas"란 제목의 지도이다. 그 제목속에 동아시아대륙의 특히 한반도와 열도지도가 보이고 "1920, Cenral and Western Europe"이란 제목의 유럽대륙국경지도가 눈에 들어 온다.위 한반도 지도전체를 파악하고 일단 글쓴이가 일일이 지명을 찾아 여러분들이 알기쉽게 한글로 명기하였지만 곳곳에서 한자명칭이 아닌 이상한 서양 명칭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것들이 전자에서 주지한 낮선 서양인들의 지명이라는데 관심을 가지고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지도가 만들어진 1920년은 국제적으로는 대격변기로 유래가 없었던 인류사상최대의 전쟁인 1차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World War I)이 발생하여 세계전역에서 파괴와 살육이 벌어지던 혼란 속에서 연합군(聯合國:Allied Powers)이라고 하는 거대한 산업자본가, 금융자본가들이 지원하는 서양해양세력들이 프랑스혁명으로 약화되었지만 그래도 세계질서를 지배하던 구체제 서양제정군주(帝政君主)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후 구체제가 소유하고 있던 다원적인 제정영토를 분할, 분열케하고 전쟁복구가 어느정도 실행되고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한편으론 유럽(西歐:Occident)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으로 사라진 구체제들을 보면 삼한제정군주(三韓帝政君主)체제하에 있었던 군주라고 볼 수 있는데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택하고 있는 홀슈타인-고토로프-로마노프왕가(Holstein-Gottorp-Romanov)의 제정러시아가 있고, 호엔촐레른가(House of Hohenzollern)프로이센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재위:1888-1918)가 폐위되었으며,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Habsburg-Lothringen)의 카를 1세(Karl I:1887-1922,재위:1916-1918)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해체, 그리고 오스만제국(Ottoman Turkish, Exalted Ottoman State)의 메흐메트 5세(Mehmed VI:1844-1918,재위:1909-1918)의 퇴위, 페르디난드 1세(Ferdinand I:1861-1948,재위:1908-1918)불가리아왕국도 사라지고 말았다.유럽대륙을 기준으로 할 때 서부에는 스페인, 포르투갈이 안착하고, 영국, 프랑스만 남겨두고 동부유럽국가들은 모두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유럽대륙의 또 다른 동서양면]위 지도와 같이 1차세계대전이 가져다 준 유럽대륙의 또 다른 동서양면이 조성된다.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동부유럽에서 사라진 러시아(로마노프왕조), 프로이센(통일독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그리고 오스만제국은 거대한 영토를 자랑했다.특히 러시아제국은 윌슨이 노린 것처럼 다원적 국가라는 사실인데 현 미국과 같은 조건이다.즉 다양한 인종 속에 수많은 민족과 종족, 그리고 다른 언어, 다른 종교, 다른 문화를 다원적 사회국가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동부유럽군에 속하는 러시아가 되었다면 산업후진성을 가진 지리적 환경때문에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결여되는 문제의 공간을 확보할 수가 없다.러시아혁명(1917)이후 1922부터 1927년까지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1878-1953,재임:1922-1953)체제가 되면서부터 현재 동유럽과 아시아대륙을 서서히 점유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는 북아메리카대륙에 있던 자본주의에 찌든 유학파들, 엘리트정치인들을 중심의 각개식(各個式)형태로 동유럽뿐만아니라 아시아대륙으로 너나할 것 없이 이동이 시작된 시기라 할 수 있다.이것을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1856-1924,재임:1913-1921)의 자결권(自決權:self-determination)제창에 영향이 있었다고 보이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던 자결권보장을 요구하던 불온세력들을 내쫓는 효과와 하나의 고립정책을 고수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보는 것이다.당시 스탈린 스스로가 소련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주요 자본주의 산업국가에 비해 50~100 년여 뒤쳐졌다고 강조한 사실은 유명하다.당시 동유럽군에 속해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1921~1922, 1932~1933 두 차례에 걸친 큰 기근으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 명에서 많게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소련 전체로는 그 이상의 엄청난 사람들이 산업인프라가 부족한 상태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역사가 깊었던 한반도 사람들은 왜 가난했을까?마찬가지다.열도는 인위적인 이동이 실시되었고 때문에 그것을 유도한 미국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나 현 신중국대륙보다는 삶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고 본다. 다원적 국가가 조성되는 것은 자본주의 요소가 극대화 한 상태에서 사회주의가 파생되는 경우이다.어쩌면 러시아제국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캐나다의 전신으로 1917년까지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그 이후부터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여했고 그러한 영토나 권한을 자연스럽게 인수한 것이다.독일제국(프로이센)이란 국가자체가 저지대 발트해를 기준으로 하는 게르만족이다.이것에서 러시아가 속해 있던 지역이 유럽대륙이 아니라 만약 북아메리카대륙이었다면 미국을 대신할 수 있는 국가체제임이 분명해진다.그리고 그 국경 남쪽에는 이미 권한이 없어진 조선왕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여러 본 블로그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즉 북부지역은 고려(지나), 남부지역은 조선이란 왕조가 존재하여 지나조선(支那朝鮮)이라 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솔직히 제정군주체제에서 두 체제가 서세의 거친 공격을 뒤로하고 그나마 1917년까지 존재했다는 것은 서로 밀접하고 긴밀하게 체제보호를 위해 협조가 가능했기 때문이며 서세들의 합체된 자본공격으로부터 최대한으로 방어적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요인은 고려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재정적인 힘이 컸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고려 역시 서양왕조, 귀족, 영주들이 과욕으로 인해 역린(逆鱗), 사오분열되면서 결국 합체된 서세자본주의세력에게 패전국이란 멍에를 덮어 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두 체제가 모두 다원적 사회체계를 가진 것은 틀림없다.그 사이를 비집고 틈을 만들고 파생적인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던 세력은 바로 부르주아 산업자본가, 금융자본가들이 지원한 제국주의 세력이었다.바로 승전국이라고 말하는 주요세력들을 보면 로얄왕조 조지 5세(George V,1865-1936,재위:1910-1936)는 1922년까지 누군가에 의해 권한이 축소되는 형태를 맞이 하고 그리고 다음으로는 프랑스식민제국(Empire colonial français)의 대통령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1841-1929)인데 조선의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고 러시아제국을 대신한 미국이 바로 그것이다.1차세계대전이 마무리가 되고 난 후 가장 두드러진 세계 현상은 기존 구체제라고 하는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despotic monarchy) 즉 절대왕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와 공화정(共和政: Republic)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사실과 기존 구체제가 가지고 있던 제정영토와 식민지영토들이 정치적으로 조각조각나는 발칸화 (Balkanization)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그것을 조정하던 세력이 놀랍게도 미국이다.이 미국이란 존재는 고립주의를 앞세우지만 들어날 수 없는 세력으로 1898년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에서부터 역사전면에 등장한다.이러한 역사상황은 글쓴이가 판단하길 1차세계대전 자체가 북미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제정군주국을 몰아내고 자본주의국가 창설에 바탕을 이룬 전쟁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렇듯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미국은 어떻게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멱을 캐나다로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다.이것은 로얄왕조가 가진 권한을 미국내에서 몰수하는 반면에 북쪽 러시아와 독일(프로이센)지역을 공여한 것이 아닌가 한다.프랑스의 나폴레옹전쟁(1803-1815)과 미영전쟁(War of 1812)은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전쟁이다.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는 자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한 것이다.북부 제정러시아와 발트세력 프로이센은 미국의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를 뛰어넘는 자본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철도 궤로 보는 북미삼한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2 "에서 말하길 당시 제정 러시아가 사용하던 궤(track gauge)가 광궤(1524mm)이었는데 이 광궤를 1748년 영국(Great Britain)의 와일럼에서 왜곤길에 건설되었고 미국 호레이쇼 앨런(Horatio Allen)이 1827년 이 광궤 사용을 규정하였으며 미국남부 철도에 채택되었다고 하였다고 알려지지만 명칭은 러시아궤(Russian gauge)라 한다는 사실은 제정러시아제국이 영국(Great Britain)과 미국(US)이 설치한 곳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물론 이 광궤는 러시아의 엔지니어 파벨 멜니코프(Pavel Melnikov)에 의해 미국의 철도 공학자 조지 워싱턴 휘슬러(George Washington Whistler)를 고용하여 러시아의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간 철도 건설에 대한 조언을 듣고 1843년 2월 14일 러시아차르 니콜라스1세(Nicholas I)에 의해 철도의 승인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선후가 갈리지만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이 광궤가 놓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다.그러나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of RussiaI,1868-1918,재위:1894-1917)는 2월혁명과 10월 혁명으로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어 퇴위되면서 유대인 볼셰비키혁명가에 의해 1918년 처형되고 만다.사실상 유대인 볼세비키혁명가들이 자본주의 국가체제인 미국에서 주로 활동해야 할 이야기지만 동부유럽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근대사는 동유럽의 러시아에서 그들이 볼세비티혁명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을 역사사실로 굳힌 것이다.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의회에 '14개조 평화 원칙(Fourteen Points)'을 제출한 것에서 비롯된 민족자결주의(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가 제정러시아의 다원적 제체의 분열을 촉진하는 신호탄이 되었다는 것인데 일찍이 1913년에 민족자결원칙과 분리권을 주장한 레닌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분리권을 주장한 것이다.이것들은 로마노프왕가의 지배력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과 다민족 국가로 한 체제이었다는 사실과 거의 일치하는 면이 많다.당시 미국은 어떤 제정왕조의 지배속에 경제권을 쥐고 있던 형태로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상황을 은근히 즐겼던 사람이 바로 미국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다.오죽했으면 역사비평가들이 1차세계대전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자신들이 가로채려고 만든 것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self-determination)라 하였겠는가.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혹은 민족자결권이란 것도 윌슨이 주장하기 1년 전 사회주의혁명가 유대인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yich Ulyanov,1870-1924)이 세운 러시아 혁명정부가 발표한 민족자결권 선언과 같았다는 사실과 반면 미국입장은 먼로주의(Monroe Doctrine) 즉 고립주의 정책을 고수했다는 사실에서 상당히배치되는 측면이 있다.미국이 취한 고립주의라 함은 간섭주의(干涉主義:Interventionism)에 대칭되는 용어로써 개인이나 체제를 상대로 하더라도 표면적으로는 국가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혹은 국제질서를 위해 다른 나라에 경제 혹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4.유라시아(歐亞:Eurasia)와 아라사(愕羅斯) 본 블로그 글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심전고(心田稿)에 나타나는 악라사(鄂羅斯:Great Tartary)의 영토가 유럽제국들이 서쪽 한 뼘의 땅이라도 여유가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고 때문에 유럽국가들이 거주했다는 역사적인 공간은 없었다고 해야 옳다.때문에 적어도 서양세력들이 득세하던 19세기 중반까지는 유럽대륙에 유럽제국들이 국가명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다.그러나 비극적인 인류사의 대전쟁인 1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식되고 난 후 부터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서양세력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작업에 유럽인들만의 영역으로 만들기를 작정하고 그 이후 판짜기에 광분했다는 사실과 근원적으로 역사사실에서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역사질서와 그에 따른 지도가 필요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새로운 역사와 새롭게 제작된 지도가 바탕이되는 세계사(世界史)가 필요했던 것이다.세계사(世界史)가 완성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웰스(Herbert George Wells:1866-1946)가 1920년에 역사대관(Outline of History,歷史大觀)을 출판했고, 2년이 지난 1922년에 그것을 요약하여 간추린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를 펴내 완성시킨 시점으로 볼 수 있다.18세기의 서양지도를 보면 유라시아 전체의 영역 주인은 바로 대타타르(Great Tartary)라 한 사실이 여기저기 흔하게 목격된다.그러나 아시아대륙 북부만을 대타타르(Great Tartary)라 한 사실은 서양세력들의 또 하나의 감춤이라고 보고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까지 대타타르(Great Tartary)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아래지도는 1754년에 프랑스지도제작자 장 팔레르(Jean Palairet:1697–1774)에 의해 제작된 아시아지도[Carte de l’Asie 1754]이다. 1754 Author:Palairet, Jean Publisher: Chez Mess. J. Nourse & P. Vaillant Publisher Location:London,La Haye Now compare to the description given by Wikipedia, "Tartary (Latin: Tartaria) or Great Tartary (Latin: Tartaria Magna) was a name used from the Middle Ages until the twentieth century to designate the great tract of northern and central Asia stretching from the Caspian Sea and the Ural Mountains to the Pacific Ocean, settled mostly by Turko-Mongol peoples after the Mongol invasion and the subsequent Turkic migrations." 위 지도에서 말하는 타타르(Tartaria) 또는 그레이트 타르타리(Tartaria Magna)는 중세에서 20세기까지 카스피해와 우랄산맥에서 태평양까지 뻗어 있는 북부와 중앙아시아에 사용된 이름이었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주로 몽골제국(Mongol Empire)의 바투(Batu Khan:1207-1255,1227-1255)가 1241년 폴란드 레그니차(Legnica)에 1차침공으로 시작된 후 부터 투르크 이주와 함께 투르크몽골(Turko-Mongol) 민족이 정착한 곳이라고 하고 있다. 왜 아메리카대륙과 아프리카가 나타나지 않는 아시아만의 지도를 서양인들은 그리려고 안달을 했을까?생각할 수록 궁금해지는 것인데 아시아란 영역을 만들고 확실하게 고정시키려고 했던 것이다.본 블로그 글 "아세아(亞細亞:ASIA)란 무엇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6 "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아시아(Asia,亞細亞,亞洲)의 원 뜻은 동쪽, 해뜨는 곳이라고 하는 태양 중심신앙에서 발단된 오래된 지명이다.그리스말로 “sunrise” ‘태양이 뜨다’, ‘일출’, ‘해돋이’라 하였고 아시리아어(Assyrian)로는 'east' 동쪽, ‘동방’을 뜻하는 단어로 나타나고 일본어로 아사(asa:あさ:明日:朝)를 ‘아침’이라는 뜻과 삼한조선이 생성한 땅으로써 태양이 뜨는 땅이라 하여 아사달(阿斯達)이라 하였고 이를 동국(東國), 대동(大東), 해동(海東), 동방(東邦)이라고 한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본 블로그 글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은 바다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 "에서 밝혔듯이 일본인(서양해양세력)이 만들었다고 하는 지구만국산해여지전도(地球萬國山海輿地全圖)에 대서양을 대동양이라 한 것은 아메리카대륙을 완전체 동쪽대륙으로 보았다는 이야기다.또한 서양역사에서 동쪽, 태양이 솟는 곳 일출"sunrise“를 그리스어 아나톨리니‘Aνατολή’, 동방을 그리스어 아나톨리코스(ανατολικός)라 한것은 바로 아나톨리아(Anatolia)반도를 소아시아(小亞細亞:Asia Minor)라 했는데 이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의 플로리다반도와 비견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시아(Asia:亞細亞)는 북아메리카대륙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당한 지명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이 서양지도제작들에의해 바꾸어져버렸고 18세기부터 지금의 아시아의 의미로 둔갑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서양지도제작자에 의해 지금의 아시아대륙 북부지역에만 대타타르(Great Tartary)영역이라고 한 사실은 역시흐름 자체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콜럼버스 착각지도(그림)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1451-1506)가 1492년 1차 항해하기 전에 그렸다고 판단되는 위 지도에는 일본이라고 하는 시팡구(Cipangu)가 카리브해(Caribbean Sea)에 있으며 특이하게도 아메리카대륙과 아시아대륙이 붙어 있는 대륙이라고 믿었으며 타타르(Tartary)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위치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이것을 콜럼버스의 착각지도(Mistaken Map)라고 하지만 바로 근원적으로 15세기에 서양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아시아(Asia:亞細亞)지도라고 할 수 있다.일본이 존재했다고 하는 시팡구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소속된 카리브해에 있는 것도 특이하지만 카타이 즉 중국이란 지명도 북아메리카대륙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과 특히 망기(Mangi) 만족이라는 지명이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그려져 있는 것을 남만(蠻, mong)이라 하였다는 사실과도 겹친다.이 남만 세력을 일본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 했다.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타타르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뿐만아니라 지금의 아시아대륙 전체를 포괄적으로 지배한 사실이다. 그러면 유럽대륙에 지금의 서구인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1차세계대전 후 제정러시아가 해체되면서 무주공산으로 존재하던 유럽대륙에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던 서양인들과 라틴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던 서양인들에게 유럽대륙으로 이주하면 특혜를 부여하고 세금을 면제 하면서 거대한 농토를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한다면 당시 이주를 거부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전자에서 이야기했지만 윌슨의 자결권(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제창도 한몫했을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몽고(蒙古)의 종락(種落) 또는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알려진 검은얼굴의 코가 큰 대비달자(大鼻㺚子)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밝혔다.이를 거란 또는 말갈족으로 볼 여지가 많고 이들이 또한 여진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은 여러 글에서도 언급한 사실이다.하지만 엄연히 이것과 다른 영역의 심전고(心田稿)에 나타나는 악라사(鄂羅斯)의 영토는 참으로 거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 그곳은 분명 지금의 러시아제국과 유럽인들이 차지한 아시아대륙이다.그리고 긴 난리통에 검은 얼굴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남아시아대륙에는 검은 얼굴의 인종들이 많다는 사실 또한 정확하게 연결되는 역사사실이다. 위키자료에 보면 이 타타르인들을 튀르크몽골인(Turco-Mongol)이라 하였고 14세기 초에 몽골제국(蒙古帝國:1206-1368), 특히 차가타이칸국(察合台汗國,Chagatai Khanate:1225-1680)과 킵차크칸국(金帳汗國,Golden Horde:1240-1502)의 지배층사이에서 발생한 문화적 융합으로 인한 전통성이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들 서방 칸국의 지배계급은 튀르크어(Türk語)를 사용하고 불교와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정치제도 및 법제도는 몽골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였으며 이후 많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이렇게 문화적으로는 튀르크적이고 정치적으로는 몽골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그리고 또 하나는 이런 중앙아시아계들이 이슬람과 연결되면서 이집트 문화까지 파고 들어가는 형태를 경계하고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에 나타나는 이슬람 문명과 이집트 문명은 분명 역사의 흐름상 정상적으로 보는게 맞는데 이것이 뒤틀려 있다.그 대표적인 것이 무슬림왕조 티무르제국(Timurid Empire:1370-1507), 70% 이슬람교인을 가진 카자흐칸국(Kazakh Khanate:1465-1848), 러시아에 소멸된 카잔칸국(Khanate of Kazan:1438-1552), 이슬람 노가이칸국(Nogay Horde:1440-1634), 이슬람 크림칸국(Crimean Khanate:1441-1783), 이슬람 왕조 무굴제국(Mughal Empire:1526-1540,1555-1857)등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들이 모두가 튀르크몽골인(Turco-Mongol)이라고 한 사실이다.그러나 무굴제국은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서 홍모번(紅毛番)이라고 하는 영길이국(英吉利國)에게 소멸되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어 무굴제국을 현재 중앙아시아와 인도아대륙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튀르크몽골인을 아라사(鄂羅斯)라고 정리할 수 있지만 2차세계대전까지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의해 조성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에 소속된 영토인 것은 분명한 것으로 나타나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제정러시아라는 사실도 근접하게 다가간 사실이다.일제는 제정러시아에게 한번 승리했다.미국은 스페인에게 승리했다.미안하지만 일제가 세상에 등장할 때 영국은 세계질서유지국에서 빠진다.이상하지 않는가.단지 일영동맹(日英同盟)이 존재할 뿐이다.어쨌던 검은얼굴의 구성원들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의 거대한 전쟁을 피해 남으로 이동했고 지금의 남아시아의 주요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서양계 코카소이드(Caucasoid)검은얼굴은 아라사(鄂羅斯)라고 판단된다. 물론 대한제국 역시 대조선과 마찬가지로 다민족, 다문화 체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이들은 악라사인은 서양인들로써 대체적으로 검은 얼굴에 코가 크고 눈이 벽안(碧眼)이라고 되어 있다.코카소이드(Caucasoid)의 피부색은 백색부터 담갈색(淡褐色)까지 다양하며 두발은 블론드 내지 진한 갈색,검정으로서 직상모(直狀毛) 내지 파상모이고 인종은 북유럽 인종, 지중해 인종, 알프스 인종, 디나르 인종, 동유럽 인종, 아리아인종, 아랍인종으로 나뉜다. 튀르크몽골인은 오스만 제국(Osman帝國:Osman Türk:1299-1922)의 바탕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1차세계대전 전까지의 이야기다.기원전 1천년(BC10C)경부터 몽골어(Proto-Mongolic)조어(祖語)와 투르크어(Proto-Turkic)조어(祖語)로부터 광범위한 어휘 차용과 유사성에서 공유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튀르크족과 몽골족의 혼합 전통자체는 매우 오래 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튀르크족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종교적으로도 양자 모두 단군(檀君), 당골래 탱그리신앙(天神:tengri)을 신봉하였다고 알려진다. 하나의 통치의 영역 내에 살고 있는 튀르크몽골인(Turco-Mongol)고용자들은 통치자로부터 음식, 음료, 옷으로 제공받았고 체제통제력과 군국주의적인 힘을 유지하는데 중요하게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은 군호위대 경호원 역할을 맡았고 또한 부족족장과 부족동맹에 의한 군대 일부였다고 알려진다. 후자 집단은 권력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이들 집단 내의 충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튀르크몽골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튀르크몽골 지도자들에게는 영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튀르크몽골 고용인들을 높은 권위를 가진 위치에 배치하게 하였다고 한다.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 하나의 정치적 전략은 외교적인 결혼을 통해서도 이루어졌고 전통적으로 유럽귀족사회에서도 유행한 정략혼(政略婚)그것이다.이 대타타르(Grand Tartary)의 구성원이 튀르크몽골인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속한 하나의 체제는 명확하게 어떤 세력인지 서양인들은 밝히지 않고 있다.분명한 것은 바로 1차세계대전으로 이 모든 체제 균형을 상실하면서 오늘날 유럽대륙이란 역사의 영역이 서쪽 귀퉁이에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기존 하나의 체제의 영역은 갈기갈기 찢겨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뼈 아픈 것이 되지만 그 속에는 그들이 들어낼 수 없는 역사비밀이 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물론 1차세계대전을 마치고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수많은 유럽인들이 강제이동, 또는 많은 혜택을 권유한 자발적 이동이 있을 수도 있으며 이렇게 이동한 역사구성원은 유럽대륙의 구성원으로 대체되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근원이 불분명한 게르만어족의 프로이센의 통일독일제국이나 투르크계열의 오스만제국, 또 하나의 게르만계의 오스트리아과 슬라브족의 헝가리, 그리고 후기 잉글랜드와 정략혼으로 연결되는 제정러시아제국의 로마노프왕가는 철저하게 북아메리카대륙 정치인들로부터 쫓겨나 유럽대륙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형국에서 만족해야 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예를들어 우랄족(Uralic peoples)이라고 알려진 헝가리(Hungarians)는 스스로 고구려후예 훈족(Hunor)과 마자르족(Magor)이라고 하지만 현재 그들의 정체성은 이상하게도 유목민이 아니라 대다수가 농민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모순이 존재한다.특히 유럽대륙에서 스페인과 프랑스를 제외한 그 외 지역인 동유럽은 거의가 1920년을 깃 점으로 새롭게 국가가 만들어졌거나 설정한 흔적이 존재하고 있고 이 지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새롭게 경계선이 만들어져 마치 오래된 국가가 존재한 것처럼 인식되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글쓴이 주장을 믿기가 쉽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무수한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분석하고 탐구한 역사상황의 결과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이처럼 새로 발견된 1920년 미국 뉴욕에 있었던 레슬리 주지회사(Leslie-Judge Company)에 의해 제작된 "1920 Leslie’s New World Atlas"란 제목의 한반도, 열도 및 동유럽변경지도를 보더라도 그러한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더군다나 이 지도는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세계사강(The Outline of History,世界史綱)의 출판시기와 일치하고, 2년이 지난 1922년에는 웰스가 간추린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를 다시 브리티시 출판사 카셀회사Cassell & Co, Ltd)가 출간하게 되는 과정까지 이것들은 오늘날 세계사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이러한 구도의 모습의 판짜기 지도가 완벽하게 완성된 시기는 물론 제2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전으로 최종 판이 완성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이 지도 제작사인 레슬리 주지회사(Leslie-Judge Company)는 1920년 프로젝트를 완성하여 출간하고 난 1년 후 1921년에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마침내 1927년에 폐업했다고 말하고 있다.이 회사가 갑자기 어떤 이유로 폐업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다만 이 지도는 제작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 조사로부터 자료가 수집되고 최신 지리적 연구결과들을 전시하는 물리, 정치, 역사적 지도시리즈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을 부첨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미국이란 신흥국가조직체의 국가적인 주요 사업이 아니었는가도 의심되며 그렇게 임무를 수행하고 난 후 폐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지도가 세상에 들어나는 과정을 보면 현재 유럽대륙의 역사상황과 동아시아대륙에서의 역사 상황이 그처럼 혼란스러웠던 것은 틀림없고 이러한 환경은 그들에게 무한의 자신감으로 차 있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적어도 역사사실에서 밝혀야 하는 것은 1920년을 깃점으로 서양세력들에 의해 역사구도가 상당히 변질되었다는 사실과 새판짜기가 비밀스럽게 기획된 것이 확실하며 유럽사와 유럽제국을 아라사 서쪽 영역에 집어 넣고 서유럽과 동유럽을 구분하여 그들의 역사를 새롭게 심고 생성되게 했다는 사실은 수많은 사실과 실체를 종합할 때 퍼즐을 맞춘 처럼 상황이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31개 연합국과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맺은 강화조약이 1919년 6월 28일 파리평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란 이름으로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조인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왜 독일만을 대상으로 연합국이 이런 조약을 맺었을까?통일독일(프로이센)의 영역이 유럽과 아시아대륙전체를 소유한 사실임을 알게 하지만 대한제국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무언가 이상하다.하지만 러시아는 영토(領土)와 구성원, 프로이센은 통치체제로 존재한 상황으로 풀어 볼 수 있다.바로 이중통치체제(二重統治體制)가 아닌가 한다.왜냐하면 요(遼朝)와 금(金朝)은 다른 성격의 영역를 지배하기 위해 거란족의 요(遼朝)는 한족(漢族)과 거란족을 남면관(南面官:南樞密院), 북면관(北面官:북추밀원)으로 나누어 통치했고, 여진족의 금(金朝)은 천호장(千戶長) 맹안 모극제(猛安謀克制)[300호를 1모극, 10모극]로 여진족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한 제도가 시행했었기 때문이다.게르만(Germanic)이 거란(契丹,Khitan:388–1211)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다.통일독일을 상대로 맺은 이 조약은 전체 440조항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지고 조약의 원본은 2차세계대전 때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에 의해 사라졌다고 설명되고 있다.혹 사라진 베르사유조약 원문에는 지금의 유럽대륙에서의 국가생성의 비밀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5.저지대 유럽제국생성과 시대상황 놀라운 사실은 바로 대한해협의 알 수 없는 두 개의 지명 중에 하나가 바로 저지대의 발트독일인(Baltic Germans)의 이름이라는 사실이며 이 저지대의 발트독일인 국가 프로이센이 독일통일제국을 세웠다는 사실 때문에 이 저지대 국가들이 주목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그러나 현 유럽제국들이 실제로 생성의 비밀스러운 곳 저지대(低地帶,lowland)를 보면 대단한 유럽국가들이 있어야 할 곳은 너무 영토가 협소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반면 북아메리카대륙의 북부 본 블로그가 발트해라고 주장한 곳을 보면 미국동부의 화려한 산업권과 연결된 북부지역에는 수많은 자원과 연계된 무역활로인해 부흥지가 되며 영토 또한 넓고도 넙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협소한 유럽발트해가 아닌 북아메리카대륙 발트해에서 존재한 국가가 맞다면 1.2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키고 주도했다고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실제로 저지대인 발트국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발트해(Baltic Sea)는 이미 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 "에서 충분히 밝혀본 사실로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지역, 특히 게르만어(Germanic languages)로 "Aust-marr"라 하여 동쪽호수(Eastern Lake) 혹은 동쪽바다(Eastern Sea)등으로 불리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고대 노르드어(Old Norse)로 "간드빅(Gandvik)"라 하였으며 백해(白海:White sea)라 하였고 또는 '위험한 바다'라 하여 '뱀 만(Bay of Serpents)'이라 하였으며 형태적으로도 "바다의 입구" 또는 "내해(inlet of the sea)"로 묘사하고 발트해(Baltic Sea)로 지목되는 허드슨베이(Hudson Bay)지역으로 판단한 것이다.이곳은 조선 관북지방 함길도(咸吉道:1416), 영길도(永吉道:1413), 영안도(永安道:1470), 함경도(咸鏡道:1509) 지명이 있어야 할 위치이기도 하다.이 허드슨베이지역으로 들어가는 수역들을 모두 합쳐 루퍼츠랜드(Prince Rupert's Land:Rupert's Land)라 명명하였는데 1670년 찰스 왕의 조카이며 찰스2세의 사촌인 루퍼트 왕자(Rupert of the Rhine:1619-1682)가 칙허회사 허드슨베이회사(Hudson's Bay Company:1670-)의 첫번째 총독이었기 때문에 이 지명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이때는 여진(女眞) 후금(後金:淸朝)에 의해 북쪽지방이 점령되고 있을 때이고 게르만을 선조로 하는 앵글로족의 잉글랜드가 아모이(廈門,Amoy)에 상관을 설치할 때이다.동시에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 역시 저지대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루퍼트 왕자의 이름에 라인(Rhine)이라는 명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이사람이 독일인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발트독일인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고 지금 유럽대륙독일영내 라인강(Rhine River)도 이 루퍼츠랜드(Rupert Land)에 있는 지명이거나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 저지대에 있는 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이 사람은 독일인임에도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써 잉글랜드내전(English Civil War,1642-1651)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화물선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신대륙 아메리카 식민지, 현재의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改新敎, Protestantism)들이 그곳에 거주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사실과 연관되며 본 블로그 글"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 "에서 동북지방의 생여진(生女眞)은 고려 함경도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을 말하는 것이며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주를 합하여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 하였다고 밝혔던 바가 있다.특히 저지대 국가인 프로이센(Preussen:Prussia)의 호엔촐레른왕가(House of Hohenzollern)빌헬름 1세(Wilhelm I.1797-1888,재위:1871-1888)는 군국주의로서 프로이센을 일등 국가로 만들려 했기때문에 독일의 통일을 꾀하였고 1864년 프로이센-덴마크 전쟁과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Franco-Prussian War)에서 차례로 승리한 뒤,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황제 선포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로 역사에서 유럽대륙 새로운 종주국의 위치에 섰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절대로 조선왕조와의 연결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유럽대륙만을 따로 떼어내고자 하는 설정이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프랑스의 붓꽃(Fleur-de-lys)문장을 사용하던 부르몽왕가(House of Bourbon)와 조선(朝鮮)이 연관되어 나타나는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루이시리즈"로 거론한 바가 있지만 당시 프랑스가 유럽국가들 중에 외교적으로 리더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서 보면 1870년 보불전쟁(普佛戰爭)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패퇴시키고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황제 선포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권한의 상징성을 프로이센이 넘겨 받았다는 의미가 되며 유럽역사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던져 주던 상징적인 사건이다.실제로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혹은 보불전쟁(普佛戰爭)은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공격하여 곤경에 빠뜨리고 명실공히 유럽제일제국이 되어 독일통일제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독일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유럽대륙 외교적으로 중심 국가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그런 나라가 저지대 발트해에서 생성된 국가이니 판단할 수 있는 이야기다. 본 블로그 글 "자포니즘(Japonism)의 해괴한 변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9 "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프랑스는 모든 예술적 활동에서도 중심이었고 예술가들이 파리로 몰려 들었다는 사실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문화적으로 보아야 할 단면이지만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성격이 매우 강해 자본주의집단임을 생각하게 한다.프로이센(Preußen)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한 1861년 동 시대에 국제정세를 보면 1861년에는 그리스에서 혁명일어나, 국왕 오토(Otto,Óthon:1815-1867)가 추방되었으며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산업주의자)와 남부(러시아제국 농노제 폐지에 의한 반발)가 서로 충돌하여 소위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1861-1865)이 발발한 시기이고 동시기에 조선에서는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1862), 삼란민란(三南民亂:1862), 제주민란(濟州民亂:1862)등 농민봉기와 반란에 의한 민란(반자본주의반란:사회주의반란)이 다발하였으며 이러한 소요로 인해 체제 자체가 극도로 혼란기에 접어들어 통제력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시기이다.또한 조선(朝鮮)이 결정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으로 1863년 금위영(禁衛營)군졸들이 받은 녹미(祿米)의 질 문제로 소요가 발생하였는데 수도 중심에서 발생한 훈련도감 금위영의 반란사건은 철종(哲宗1831-1863,재위:1849-1863)의 생명을 매우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해 철종14년(1863)에 철종왕가 일족이 몰살당하는 역사적인 큰 의혹이 발생한다.고래심줄처럼 이어지던 조선왕조계보가 완전히 단절이 되어 버린다.이후의 조선왕정은 통제력을 상실하고 지배력의 한계에 도달하여 권력누수가 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데 왕실 자체가 완전히 다른세력으로 바뀌는 모습이기도 하다.이시기에 체제불안은 여러 해양세력들의 준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1866년에는 조선(朝鮮)에 무단침범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USS Princess Royal,614톤)를 대동강에서 군민(軍民)들이 불태웠고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면서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는 이유로 프랑스함대가 양화진(楊花津)에 내침하여 소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한다.그러나 병인양요 사건에서 이상한 점은 프랑스가 새로운 강자 프로이센의 등장으로 불안한 형국에서 내외부적으로 자신들의 코가 석자인 긴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구둘레길이 40,192km 의 3/2가 되는 약 30,000km 거리에 있는 동북아시아 한국 즉 한반도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를 막겠다고 무모하게 침입하여 그들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체 쫓겨나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점은 국가전략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야말로 헛튼짓이 아닐 수 없다.물론 이러한 구도는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인도적인 문제가 무엇보다도 우선이라고 하고 더불어 상대적으로 무역개방요구라고 하지만 결국 그러기엔 그들이 너무 먼 거리에서 전력 소모가 되고 무장한 함대 몇 척으로 조선(朝鮮)을 제어하겠다는 발상자체가 역사 흐름이 매우 부자유스러워졌다는 이야기다.조선은 그들 주장처럼 은둔하지도 않았고 허약하지도 않았다.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 "이란 글에서 충분히 조선의 군사력을 알 수가 있었는데 바꾸어 생각할 때 이러한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조선(朝鮮)과 프랑스는 아주 가깝게 근접한 거리에 존재하였거나 프랑스의 병인양요는 오히려 조선(朝鮮)내의 어떤 세력적인 반발을 크게 확대하여 국가 대 국가 형태로 구도를 잡았다는 사실이다.그러한 것은 세계사를 꾸밀 때 하나의 체제와 역사를 서양과 동양으로 분리하고 역사도 분리한 결과이다.당시 프랑스라고 하였지만 천주교 단체의 조직적인 성격이 강했고 그들이 전자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유한 자본가들의 세격집단이라면 양화진에 내침한 함대는 조선체제가 부정하는 고용된 용병함선일 가능성도 높다.돈이면 무엇이든 해결된다는 사고에서 나온 발상일 것이다.아마도 천주교신자들을 피신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충돌하여 외교권이 넘어간 사실에 비출 때 프랑스는 자본력을 가진 집단으로 조선이란 하나의 체제아래 유럽(해양세력)왕실이나 영주 사이를 묶는 로비역할을 하던 위치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이것은 현재 근대사에서 프랑스식민지제국(Empire colonial français)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래 글은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시문집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에서 이 당시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를 한번보자.勉菴先生文集 제20권 / 기(記) 외성당기(畏省堂記)方今世級愈降。變亂層生。彼西鬼各種。交迹中國。汩陳五行。墮壞倫綱。𥚁患之大。憂慮之重。又非北胡黑水輩之比。則其弱彼強此。掃淸開廓之政。豈容一毫一息捨畏省二字而可以收功也。이 시문집의 시대적 상황은 조선(朝鮮)이 제일 혼란을 겪을 때인 1866년(高宗3) 병인양요(丙寅洋擾)때로서 이렇게 시작한다."오늘날은 세상이 더욱 말세가 되어 변란이 거듭하여 일어나서 서귀(西鬼)들이 중국(中國)에 횡행하며 오상(五常)을 어지럽히고 삼강오륜을 무너뜨려 화환(禍患)과 걱정이 크고 중하여 지난날 북호(北胡)[청(淸) 즉 을 가리킴]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거란(契丹:Khitan)에 속하면서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렸는데 이러한 사건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우려한다 하였고 그럼에도 오늘날 정치현황은 저들(西鬼)을 약화시키면서 우리를 강화시키고 더러운 것을 일소하는 정치를 해야 하지만 어찌 잠깐이나 털끝만큼이라도 외성(畏省) 즉 '두려워 반성하는'것은 없이 공효(功效, effective work)를 거둘 수 있겠는가."하고 있다.위 중국이라 함은 하나의 자유 무역소로써 조선(朝鮮)의 중앙조정(中央朝廷)이 있는 곳이며 서양해양세력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 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너무 안일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그리고 변란이 거듭된다 하였는데 이 변란은 국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볼 때 당시 유럽왕위계승전쟁, 보물전쟁, 영란전쟁, 그리고 위 기타 열거한 병란(兵亂)들도 이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시대상황이 그렇다.후금(淸)은 동여진, 흑수말갈은 서여진을 말하고 동여진의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서여진의 3차고려거란전쟁(993-1018)이라고 하는 거란지란(契丹之亂)의 그러한 성격이다.이것에서 병자호란은 대륙으로 보았을 때 동북쪽이며 거란전쟁은 서북쪽임을 알 수가 있다.선조때는 임진왜란이후 북호의 분탕질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임진왜란이 진압된 후 1599년 누르하치(老酋:1559-1626)는 해서여진(海西女眞)을 복속했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선조 32년 기해(1599)12월 12일(정해)기사를 보면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북호(北胡)가 분탕을 자행한 일에 대하여, 내년 봄에 눈이 녹고 길이 마른 때를 기다려 당사자인 변방을 지키는 신하.변신(邊臣)에게 영을 내려서 기회를 헤아려 만전의 계획을 도모하도록 회계하였다는 사실과 함경 감사 윤승훈(尹承勳)의 장계로 인하여 변장(邊將)들이 심사 숙고하고 기회를 보아 어떻게 계획을 짜는가에 따라 형세를 참작하여 처리하겠다"는 뜻으로 회계의 기록도 볼 수가 있다.흉노(匈奴)가 있는 중앙을 호(胡) 또는 북호(北胡)라 하고 오환(乌桓), 선비(鲜卑)가 있는 흉노(匈奴) 동쪽을 동호(东胡)라 하며 서역(西域) 각 종족이 있는 흉노(匈奴) 서쪽을 서호(西胡)라 하였다는 사실은 왕국웅(王國維)의저 관당집림(觀堂集林:1923)‧ 서호고상(西胡考上)의 기록이다.서역사람으로만 알고 있는 한자 호인(胡人)도 푸른 눈동자(靑眼), 벽안(碧眼)을 가졌다고 알려진다.바로 세계삼한역사적으로 볼 때 북방민족, 부족들의 공격적인 양상을 대비하여 크게 걱정하는 것인데 상대가 호인(胡人)이라는 사실에서 구려호(句麗胡), 조선호국(朝鮮胡國), 고려호(高麗胡)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이것을 북왜(北倭)라고 했거나 또는 서북왜(西北倭)라 한 것이며 또한 남왜(南倭)와 다르게 구분을 한 것임을 알 수가 있으며 서호(西胡)라 함은 고대 총령(葱岭)내외 서역(西域) 각 종족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총령은 본 블로그 글 "안식향(安息香)으로 본 삼한(三韓)영역http://blog.daum.net/han0114/17048871 "에서 밝혀보았던 티벳이 있는 로키산맥 북쪽을 가르켰다.북방지역에 역사기록을 보면 북호(北胡), 북저(北狄), 북로(北虜)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근대 여진족으로 정리되면 인종적으로는 튀르크몽골족인데 소위 독일(거란), 러시아(몽골)계통의 종족임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어르쇠 흑요석(黑曜石)과 아라사(愕羅斯)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1 "과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밝혔듯이 몽고종락(種落)이라 하는 것은 대비달자(大鼻獺子) 아라사(鵝羅斯)라고도 하며 이를 타타르(Tatar)라 한 것이다.진한(辰韓)의 흉노(匈奴), 동호지속의 선비(鮮卑), 거란(契丹)이며 이 또한 근동(近東)에 있으니 이것이 여진(女眞)과 달단(韃靼), 동쪽 회랑의 동량야인(東良野人) 삼한 게르만(Germanic peoples)으로 해석되어야 한다.이런 복잡한 종족간에 특히 18세기 유럽역사를 보면 왕위계승으로 인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이때는 유럽역사의 리더격이라 할 수 있는 발트해(Baltic Sea) 북유럽에서 넘어온 앵글로색슨(Anglo-Saxons) 잉글랜드(England)는 엘리자베스1세(Elizabeth I,1533-1603,재위:1558-1603)를 마지막으로 승계가 끊겼고 이들 종족은 조직이 와해되면서 카리브해로 몰려들었는데 1655년 카리브해 섬들 가운데 동쪽 끝에 있는 바베이도스(Barbados)에서는 잉글랜드의 인간 쓰레기들이 모두 카리브해로 모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였으니 그들의 발흥지가 어딘지를 명확히 알 수가 있다.이들이 모두가 최익현(崔益鉉)선생이 말했듯이 서괴(西鬼)가 아니면 왜구들이다.1603년부터 스코틀란드의 스튜어트왕가(House of Stuart:1150-1807)가 아니면 잉글랜드 왕가가 존속할 수 없었던 상황이 고스란히 들어난다.이런 이어 붙임이 사실일까?이렇듯 1653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병합하면서 1659년까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연방(聯邦:union)이란 이상한 관계와 국호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왕조국가체제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이러한 구도는 아마도 근세기에 역사짜집기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리저리 맞추다 힘들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다.진실로 이러한 지경의 현재 영국이라고 하는 잉글랜드(Kingdom of England)라는 국가는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한지 꽤 오래된 것으로 오늘날 세계사에서 영국이란 왕조국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역사의 바른 순리이다.본 블로그 글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http://blog.daum.net/han0114/17050765 " 에서 지적했듯이 러시아로마노프왕가의 해군기와 비슷한 국기를 사용하는 스콜틀랜드의 스튜어트왕가 힘을 빌어 동군연합(同君聯合)이라는 명목으로 왕가 명줄을 이었다고 보는 것이며 때문에 그들의 존속된 역사는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때문에 역사적으로 로마노프왕가와 잉글랜드왕가는 혈혼을 빙자한 문제가 있고 이것은 정확하게 튀르크몽골족의 정략혼(政略婚)이다.잉글랜드는 그러한 처지에서 볼 때 또한 유럽강국 프랑스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divine right of kings)을 바탕으로한 강력한 통치자 태양왕 루이14세(Louis XIV,1638-1715 재위:1643-1715)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되어 있는 것도 프랑스가 유럽세력들에게 가지는 권한이 어느정도인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그러나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1733-1738),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7년전쟁(Seven Years' War:1756-1763), 바이에른 왕위계승 전쟁(1778-1779)등이 발생한 이 기간동안 프랑스의 강력함은 유럽귀족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서 1763년부터 프랑스세가 꺾이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대신하게 됨을 알 수가 있으며 무엇인가 국가체제로써의 핵심적인 요소가 크게 망가졌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러한 사건들은 역사적으로 국가로 볼 수 없고 다만 체제내 봉건 왕가, 정원을 가진 영주의 문제라 보는 것이 옳다. 6.저지대 유럽제국 프로이센 북유럽 발트해 자그마한 저지대의 영역을 중심으로 군사대국 호엔촐레른왕가(House of Hohenzollern)의 프로이센(Prussia) 초대국왕 프리드리히 1세(Frederick I:1657-1713,재위:1701-1713)가 신데렐라처럼 등장하고 이 세력은 유럽의 강대국인 프랑스를 상당히 괴롭히게 된다.특히 네덜란드와 프랑스 개신교도 즉 위그노(Huguenot)들의 유입으로 새로운 산업과 땅의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면서 강대국의 역량을 키웠다고 되어 있는데 이 프랑스 인구의 10% 인 약 200만 명의 위그노들의 이동은 산업구도를 개편시켰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프랑스왕국의 서쪽과 남쪽지역에 80%가 집중되었던 위그노들은 장 칼뱅(John Calvin)의 지도를 따랐는데 귀족들과 도시 부르주아들이 대부분이라 한 이들은 상공업은 물론, 여러가지 기술을 지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본 블로그에서 서양사가 주장하는 이 또한 시민전쟁(Civil wars)이라 하였고 위그노전쟁(French Wars of Religion:1562-1598)기간에 임진왜란도 끼여 있는 것을 보면 수많은 반란 속에서 아마도 임진왜란이 최종적으로 조선군력에 의해 진압되고 마무리된 사건이 아닌가도 한다. 위그노(Huguenot)들이 전쟁기간 약 30년동안 활동한 것을 보면 카톨릭교회에 열광적으로 반대하여 사제, 승려, 수녀, 수도원, 수도원, 간판, 교회건물을 마구잡이로 공격하였고 위그노(Huguenot)가 점령한 대부분의 도시들은 교회에 있는 제단과 그림(회화)들로 이루어진 새롭게 새워진 우상들을 무너뜨렸고 때로는 건물들 자체가 허물어 뜨렸으며 고대 유물과 문자는 파괴하였고, 성인들의 시체는 발굴되어 불태워졌다고 한다. 중부에 있는 부즈주(Bourges), 남부의 몽토방(Montauban), 파리의 근접한 오를레앙(Orléans) 영어발음으로 올리언즈(Orleans)의 도시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위그노(Huguenot)는 그 후 정치운동으로 변모했고 개신교지도자들은 상당한군대와 가공할 기병대를 집결시켰는데, 이 기병대는 가스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제독의 지휘아래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이들을 스페인의 자치구 바스크(Basque:백제유민)의 일부인 나바르왕국(Regnum Navarrae)의 앙리4세(Henry IV)와 부르봉가(House of Bourbon)가 위그노(Huguenot)와 동맹을 맺고, 그 절정이었던 60개의 요새화된 도시까지 성장한 개신교세력에 부와 영토를 더하여 이후 30년 동안 가톨릭교황권(Catholic crown)과 파리에 진지하고 지속적인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를 종교간의 갈등이라고만 보지 않는다.종교간에 갈등인 것처럼 처리한 이유는 천주교가 교황제도를 세우려는 이유가 있고 개신교는 천주교를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한 이력의 역사만을 근거로 서양사 즉 해양세력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구도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판단한다.이것은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주장한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과 부합하고, 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것으로 1534년 8월 15일에 바로크귀족 출신이며 군인출신 로마 가톨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Ignatius of Loyola, 1491-1556)에 의하여 창설된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장난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신뢰성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860 Einzug der preußischen Gesandtschaft in Yedo-에도에 프로이센 공사관 입성 위 그림은 1860년 당시 에도(江戶, Edo)를 점령하고 있던 세력은 프로이센(Preussen)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그림이다.그러나 1918년 프로이센은 사라지고 반면 일본은 득세한다.위 그림이 말해주는 시기는 1860년 3월 24일 벚꽃이 많이 피어 있는 문밖 사쿠라다몬사건(桜田門外の変)사건이 발생하고 미일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1858)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면서 히토쓰바시(一ツ橋)파를 숙청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보좌역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1815-1860)의 행렬을 습격하여 암살한 사건이 발생한 동일한 년도이다. 이것으로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을 임명한 왕(朝鮮)을 높이고, 오랑캐(夷)를 배척한다는 의미의 존왕양이(尊王攘夷)사상이 당시 일본무사들에게 미토학(水戶學)으로 불리었고 신봉하던 때이다. 이 사상은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에 서주(西周)왕조의 천자(天子)를 세우고, 영내에 침입하는 이민족(남방의 楚)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인데 이민족이라 함은 남방쪽에 있었을 남만을 말하고 일본근대사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말한다.그러나 이것에는 자본력을 가진 프랑스인들도 포함되어야 맞다. 미일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1858)은 1899년 7월 17일, 일본에 대한 관세 부과의 확립에 관한 조약인 1894년 11월 22일 조약(Treaty of November 22, 1894)으로 대체되었다는 이유도 사실상 믹구이 주도하는 시스템에서 일본이 빠진 것이다.그렇다면 프로이센의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본 블로그 글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http://blog.daum.net/han0114/17049532 "에서 위 사진설명 "Einzug der preußischen Gesandtschaft in Yedo."은 1860년 프로이센왕국(Kingdom of Prussia:1701-1918)의 원정탐험대가 에도(Yedo:江戶)에 진주하는 모습의 그림이라고 하지만 이 시기는 프로이센(Prussia:普魯士,普魯西)이 군사대국으로써 발돋움하게 되는 1864년에 덴마크와의 전쟁, 1866년 오스트리아전쟁, 1870년 프랑스전쟁(普佛戰爭)등이 있기 전에 이야기다.이것은 바로 프로이센 군대가 일본이라고 하는 곳, 에도(오늘날 도쿄)에 원정대를 보내 행군을 하게 한 곳은 동아시아대륙 열도가 아니라 덴마크 또는 오스트리아, 프랑스에 존재한 장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물론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이 모두 체제내 핵심세력으로 소위 에도시대(江戶時代)의 무사집단 다이묘(영주:大名) 번(藩)이 아닌가도 한다.그때 유명한 다이묘세력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등이다. 일본의 에도시대부터 북유럽 발트해국가와 매우 밀접하게 엮이고 있다.이것들은 안세이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의 다이묘(영주:領主)들의 체제내에서의 합의가 아닌가 한다.다이묘들의 통치는 1871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적인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제도가 완성되면서 소멸되었다.이때부터 하나의 체제가 영토뿐만아니라 봉건 왕가, 즉 영주까지 독립적으로 각자 국가 건립에 중주적인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영주(領主:大名:다이묘)국가, 봉건국가가 생성된다는 것은 오늘날 유럽국가들의 생성을 보는 것이 아닌가도 한다. PrussianGerman name: Preussen[American]1. historical region of N Germany, on the Baltic 2. former kingdom in N Europe (1701-1871) & the dominant state of the German Empire (1871-1919): formally dissolved in 1947 1. 발트해에 있는 북부독일의 역사적 지역 2. 북유럽의 옛 왕국(1701-1871년)과 독일 제국의 지배국(1871-1919년) : 1947년 해산.[British]a former German state in North and central Germany, extending from France and the Low Countries to the Baltic Sea and Poland: developed as the chief military power of the Continent, leading the North German Confederation from 1867–71, when the German Empire was established; dissolved in 1947 and divided between East and West Germany, Poland, and the former Soviet Union. 프로이센(Prussia:1701-1918)은 발트(波羅,Balts)족의 일파인 프루사(Prūsa)에서 이름을 따고 한자문화권에서는 보로사(普鲁士), 보로서(普魯西), 품송(品松)이라고도 하는데 90개가 넘는 가맹도시들이 연맹을 한 한자(Hanse)동맹으로 부터 출발하면서 중세(中世)에 일어났던 게르만동방확장(German eastward expansion)과 동방식민운동(東方殖民運動:Ostsiedlung)도 역할한 것으로 통일독일제국설립에 역할을 한 왕조라고 설명된다.그러나 현재는 프로이센(Prussia)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독일제국이 남아 있을 뿐이다.자료설명을 보면 프랑스(France)와 저지대국가(Low Countries)에서 발트해와 폴란드로 확장된 북부와 중부 독일의 한 주(州)가 유럽 대륙의 최고 군사강국으로 발전하여, 독일제국이 성립된 1867-1871년부터 북부 독일연방을 이끌었으며, 2차세계대전 후 1947년에 해체되어 동독과 서독, 폴란드, 구소련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여러가지 설명에 부족한면이 많다.1867-1871년이라면 조선(朝鮮)이 프랑스에게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으로 당하고, 미국으로부터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를 당하면서 지속적으로 개방요구에 시달렸으며 서세들의 노골화된 압력을 감당하던 때이므로 조선과도 깊이 연관된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일본 다이묘 수준 즉 부(府)와 현(縣)의 형태로 1800년부터의 프랑스는 크게 보아도 베르사유의 부나 현 정도의 영주국가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이 영주국가는 다른 영주국가들을 리더하고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프랑스 국가(國歌) 라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역시 베르사유궁전에 의한 도시 또는 협의의 모티브가 강하다. 저지대(低地帶)유럽국가들을 보면 북해 연안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 구성된 지역에 있었던 국가이며 어떨때는 베네룩스(Benelux)라고 불리고 공동연합형태를 띄지만 적어도 4차영란전쟁(英蘭戰爭:1780-1784)까지는 네덜란드가 더치(Dutch)란 이름으로 독자적으로 해양력을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점도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이것만 보면 더치와 네덜란드가 다르고 네덜란드 명칭은 근세기에 더치와 바톤터치 한 명칭이다.이들 국가는 거의가 북아메리카대륙 저지대 동부와 연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다시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지역 형태를 보면 허드슨베이(Hudson's Bay)를 중심으로 래브라도고원(Labrador高原)를 지나 저지대라고 하면 북동부지역이 세인트로렌스만(Gulf of St. Lawrence)의 해안을 이야기 할 수 있고 아니면 캐나다 뉴브런즈윅주의 주도 프레더릭턴(Fredericton)해안 남쪽으로 마린(Maine),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코네티컷(Connecticut), 뉴저지(New Jersey)등의 해안이 될 것이다.1871년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의 진본이 사라진 만큼 그 조약이 진행된 배경과 또한 사라진 이유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역사학자도 이에 대한 검증이나 확인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많은 의문을 남길 수밖에 없다.실제로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의해 현 유럽국가의 경계선 구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되겠지만 조약원문자체가 사라진 지금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어떻게 확인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좀 더 의문 꼭지점으로 올라가면 2차세계대전 시점에서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자신이 그들의 자랑스럽지 않는 과거사(1차세계대전패전)에 대한 조약이라고 기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또 하나의 추정은 그 후 명확하게 유럽대륙의 수많은 국가의 국경선이 정해지는 배경이나 바탕이 되는 이 조약의 원본이 존재할 때 지금의 세계사가 온전하게 보호되었다는 보장이 없다.사망확인조차 여러 낭설이 있는 히틀러의 음모설을 제쳐 두더라도 혹 유럽제국을 만들려고 혈안이 된 최익현(崔益鉉)선생이 말한 서괴(西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움켜 쥔 서양세력 즉 승전국이었던 연합국의 소행일 것이란 의심도 사라지지 않는 미스테리이다.어쩌면 히틀러의 소행으로 몰아붙이고 있지만 기실 유럽역사의 생성자체를 생각하면 당시 1차세계대전 후 조약의 조항들은 현재 연합국 세력들에게 들어내지 못할 어떤 불리한 사실들이 기록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7.베르사유조약과 유럽국가생성의 의문 제1차 세계대전 말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1919.6.28)이후 아래 게시한 중서유럽의 지도(1920, Cenral and Western Europe)에는 철도, 운하, 주요 도시(都市:city) 및 각 국가의 수도(首都)등과 새로운 조약에 의해 세워진 국가 경계선, 제안된 새로운 주(州)의 경계선, 그리고 나름대로 각 국가의 당시 국민투표에 의해 주권(主權)이 설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포함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이러한 이야기를 보면 유럽대륙에서 국가 별 경계선이나 각 주요한 이해관계설정상 간단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이 지도에는 독일군(獨逸帝國:Deutsches Kaiserreich)에 의해 해체된 요새화지역, 알자스-로레인 영토, 애게해(Aegean Sea)와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사이의 중립 영토가 포함되었고 중서유럽, 국경, 정치, 역사, 교통, 국가 경계, 카운티 경계, 주요 정치 세분화, 역사적 사건, 해양, 위치, 내륙수역, 경계 등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아시아대륙에는 특이하게 한국(韓國:Koeaa)과 일본(日本:Japanese)을 그렸고 신중국이라고 하는 동아시아대륙의 중국지도는 미처 정리가 되지 않았는지 다 그리지 못해 시늉만 한 것으로 나타나 미완성적인 지도이지만 한반도와 열도에 대해 나름대로 세부적으로 지명을 표기하고 국가 면모를 세우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신중국의 지도가 완성되기 시작한 것은 다른 자료에서도 말했지만 1931년 3월 22일에 장려화(臧勵龢)등에 의해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이 출간되던 시점이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라고 보고 본 블로그 글 "동조선과 서조선 그리고 광동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8 "에서 광동조선에 대한 1926년 6월 28일 동아일보기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체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때문에 1926년까지 중국생성은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1920, Cenral and Western Europe-1920년 미국 뉴욕에 있었던 레슬리 주지회사(Leslie-Judge Company)에 의해 제작된 "1920 Leslie’s New World Atlas"란 제목 속에 있는 유럽국경변경지도 위 지도를 보면 특히 유럽대륙에 서부에 토대를 북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 형태를 나타내는 것처럼 스페인과 프랑스의 위치방향과 거의 흡사하게 대륙에서 서부지역에 스페인, 중부에는 프랑스가 자리잡고 그 이외 국가들은 새롭게 짜여지는 느낌을 받는데 이들 국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Netherlands)의 국경이 새롭게 그어지고 덴마크(Danmark)의 슐레스비히(SCHLESWIC)가 설정되었으며 장차 해체되어야 할 요새화지역(FORTIFICATIONS TO BE DISMANTLED)이 설정되었고, 에스토니아(ESTHONIA), 리보니아(LIVONIA), 쿠를란드(COURLAND), 클라이페다 지역(MEMEL CEDED BY GERMANY), 단치히 자유시(FREE GITY OF DANZIG), 동프로이센(EAST PRUSSIA), 리투아니아(LITHUANIA), 폴란드(POLAND), 독일(GERMANY), 벨기에(BELGIUM), 로렌(LORRAINE), 프랑스 동북부의 지방으로 독일과 접한 알자스(ALSACE), 우크라이나(UKRAINE), 오스트리아(AUSTRIA), 헝가리(HUNGARY),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 제네바(GENEVA), 스위스(SWITZERLAND), 이태리(ITALY), 유고슬라비아(JUGOSLAVIA), 알바니아(ALBANIA), 불가리아(BULGARIA), 루마니아(ROUMANIA), 큰 그리스(GREATER GREECE), 터어키(TURKEY), 중립지역 영토(NEUTRAL TERRITORY)등이다. 즉 유럽대륙에서 스페인과 프랑스를 제외한 동부유럽국가들은 모두가 새롭게 생성된 것 같은 지도의 기록들이 난잡하게 표시되어 있다.두 차례의 거대한 세계전쟁을 발발시켰다고 하는 독일역시 새롭게 국경이 정해졌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물론 패전국이었으니 무슨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그러나 그러한 구도와 무엇인가 다른 새롭게 형성되거나 생성된 느낌의 구도라는 것이다.북아메리카대륙의 윌슨대통령은 서반구의 구(舊)스페인 식민지에 간섭하고자 하는 유럽제국의 동향 등의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미국 대통령 먼로(James Monroe,1758~1831,재임:1817-1825)가 표명한 원칙적 주장이며 이를 '루스벨트의 먼로주의 수정안'으로 하여 남아메리카 내 후진국의 내정문제에서 비(非)아메리카인의 개입을 금지하고, 미국이 해당지역, 국가의 치안을 보장하고 이들 나라에 의한 국제조약의 준수, 해당 국가내 유럽 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책임지겠다는 것이 먼로주의(Monroe Doctrine)라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이 아메리카대륙전체를 관할하고 유럽대륙으로 이동한 유럽인들은 더 이상 아메리카대륙에서 관심을 끊으라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윌슨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 것이다. 즉 유럽대륙에 유럽인들이 거주하고 국가별 나눔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지만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인들은 완전히 사라져 달라는 것과 이렇든 저렇듯 관섭을 불허한다는 내용이다.1차세계대전은 유럽전쟁이라고 하였지만 유럽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음에도 유럽인들이 상당수가 남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보이고 스페인식민지가 북아메리카대륙서부에 존재한 것과 프랑스식민지가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전체를 차지한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인들이 실제적으로 분리하여 국가형태를 이루고 싶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때문에 1차세계대전은 미국윌슨의 먼로주의를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 유럽대륙을 기준으로 먼로주의(Monroe Doctrine)와 '루스벨트의 먼로주의 수정안' 등에 의해 북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추방되었다고 할 수 있고 그 외 다른 국가들도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 존재했던 소규모의 분체국 또는 유럽역사를 주도하는 도시국가(都市國家:city state)들이며 고대그리스 또한 로마, 아테네, 카르타고와 르네상스시대의 여러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산재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를 대그리스(Great Greece)라 하여 영역을 넓혀 확장시켰다는 것도 생각할 수가 있다.즉 유럽역사는 도시국가체제를 벗어나질 못했다는 사실밖에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그러나 그리스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옛 고구려의 넓은 영토와 문화의 역사를 간직하는 국가로 남았다는 사실도 고구려 영토가 어마어마했다는 것과 일개 도시국가가 아니었음이 밝혀지는 셈이다.또한 터어키라고 하는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1299-1922)역시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국가가 축소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한 상태이다.원래 아랍어 이름 오스만[ʿUthmān(عثمان)]은 고려의 군사 방(房)과 동일한 명칭으로 14세기에 오스만의 부족 추종자들을 가리켰고, 이후 제국의 군사행정 엘리트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고려 무신정권의 사조직 중방(重房), 도방(都房)과 같은 성격의 명칭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때문에 제국의 명칭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투르크(Türk)는 아나톨리아 농민과 부족 인구를 가리키는 말로 보통 낮추어 부르던 용어이며 도시거주 터키인들이 자신을 오스만리족이나 투르크족으로 지칭하는 것을 꺼리고 발칸(Balkan)과 아나톨리아(Anatolia)에서 옛 비잔틴 제국(Byzantium Empire:395-1453)의 영토의 거주자를 의미하는 루미족(Rumi) 또는 "로맨"으로 지칭한다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루미족은 문자 그대로 '로마(Roman)'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차용된 단어로서, 로마는 비잔틴제국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단순히 아나톨리아와 관련된 사람이나 사물에 관련된 것을 가리킨다고 되어 있다.오스만제국이라 함은 옛 아랍국가를 통괄하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모자라는 것이 보이고 이 역시 서양세력들의 입김이 작용한 명칭이며 통일신라(統一新羅,Later Silla:668-935)를 대체하는데는 이집트역사가 포함되어 이것에서 유럽사가 생성되는 바탕역할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즉 아랍(Alab)과 유럽(Eurb)을 동일하게 보았던 사실이 있다.또한 유럽국가 중 리보니아(LIVONIA)는 생소한 국가 이름인데 이것은 미국 미시간(Michigan)주 동남부, 디트로이트(Detroit)부근의 도시로 지금도 자리잡고 있다.이처럼 도시국가들이 유럽대륙의 영토를 어떤 식으로든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를 더한다.동프로이센(EAST PRUSSIA)역시 전에는 독일제국 동북부의 주의 이름었지만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에 의해 독일과 분리되어 있던 고립 영토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왜 이런 갖다 붙일 수밖에 없는 형태의 역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까?중요한 것은 17세기 일본과 깊은 관계가 있는 네덜란드(Netherlands), 러시아와 쌍심지를 켜고 으르렁되었던 폴란드(POLAND), 오스트리아(AUSTRIA), 헝가리(HUNGARY)역시 유럽영역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갈등의 소지가 있는 국가들은 모두가 유럽대륙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다. 수많은 도시국가를 거느린 이태리(ITALY)도 이 범주속에 있다.이 지도는 미국 정부 조사로부터 수집되고 최신 지리적 (地理的) 연구 결과들을 전시하는 것으로써 물리, 정치, 역사적 지도 시리즈(NY: C. S. Hammond & Company, 1920)로 제작 된 것임을 알 수가 있어 그래서 더욱 놀랍다. 8. 16세기 서양지도에 한반도는 없다. 서양인들이 만든 제작지도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가.그들이 만든 지도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이것은 바로 대한해협의 나타나는 이상스러운 지명을 밝히고자 이렇게 긴 길을 달려 온 것이다.즉 이러한 과정이 없으면 도대체가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럽대륙을 보았고 이제는 아시아대륙에서 한반도와 열도를 볼 차례인데 어떻게 이 지도는 지명을 처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차례이다.일단 열도는 관심을 두지 않겠다.시간이 허락하면 이 지도가 말하고 있는 열도를 재검토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겠다. 이 지도에 나타나는 한반도 지형 명칭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존 한반도 역사가 반세기(半世紀)년을 말하고 있는 것에 반해 비록 1920년 서양인이 만든 지도이지만 역사를 근거로 하는 명칭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물론 하나 둘 정도는 그럴 수가 있다 하겠지만 특히 해안과 바다선상에 있는 섬들은 그들 차지가 되었고 서양세력들이 크고 작은 함선을 이용하여 들락거렸을 가능성이 있는 해안과 섬은 거의가 서양이름으로 칠갑(漆甲)하고 있다.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그들이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곧 식민지라는 못된 사고가 발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더라도 한반도 역사의 사정상 이름도 근거도 모르는 서양해적선이나 고래잡이어선들이 함선이란 명목으로 무단으로 들어와 해안을 측량을 하고 해안조사를 하는 등 상당한 주권 침해의 짓을 자행했음에도 그것에 대한 반성의 그림자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다.모든 것은 그들이 발길이 가는 곳에는 식민지가 생성되고 지도에 옮겨지는 형태를 아무런 꺼리낌 없이 자행하고 무차별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은 그들을 정상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라고 도저히 볼 수 없는 행태이다.만약 그곳이 실제로 반만년 역사를 가진 왕권나라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깡그리 무시하고 식민지라 했을 것이 뻔하다.지금처럼 해안을 함선들이 무선을 타전하여 경계하고 중앙으로 보고하는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에서의 그들이 해상침범은 해적들이 하는 짓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일반 서양인 개인이 나서 그렇게 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일이지만 해적들은 조직을 만들고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치고 달아나면 그뿐이다.그러한 해적들의 행동때문에 서양사에서도 골머리를 아프게한 사실이 발견된다.만약 치고 달아난 해적집단들이 동해상에 나타나 그들의 이름을 지명을 남겨 오늘날 지도에 기록되고 제작이 되어 버젓이 역사지도로 탈바꿈하는 형태가 그려지지만 그것조차 우리들은 역사라고 침을 바르고 있으니 어찌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어쨌던 상황이 그렇다.그러한 면에서 다시 한번 더 마구 찍어내듯 양산했던 서양지도를 살펴보자.아래"1575 Asiae nova descriptio"의 지도를 보면 놀랍게도 아예 한반도가 표시되지 않고 있다. [1575 Asiae nova descriptio]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1527-1598)란 네덜란드(Dutch)플랑드르의 지도 제작자이자 지리학자인데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Phillips II,1527-1598,재위:1556-1598)의 궁정 지리학자로 임명되었던 사람이다. [1598 Asia Partiu Orbis Maxima MDXCVIII] [위 지도에서 한반도의 위치를 확대시켜 본 지도] 마티아스 쿼드(Matthias Quad:1557-1613)는 퀼른(Cologne)판화사 겸 지도제작자인데 네덜란드(Dutch)에서 태어나 판화를 배웠고 쿼드는 Johann Bussemacher 협력하여 유럽 4절판 지도책(quarto atlas)을 출판했다. 이러한 현상은 "1609 Abraham Ortelius : Asiae Nova Descriptio" 에 까지도 나타난다. 최초의 현대 세계 지도인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의 테아트룸 오르비스 테라룸(Theatrum Orbis Terrarum:Theater of the world)에서 나온 아시아 지도이다. 명색이 오르텔리우스는 스페인 국왕의 궁정지리학자이다.이런 자가 그린 지도를 가지고 필리핀을 방문하고 필리핀을 식민지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색하고 불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이처럼 뻔한 거짓말이 역사가 된 세상이다.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나 같은 부류의 서양해양세력이고 이 지도가 탄생할 시기인 16세기 말엽에 그들이 아시아대륙 지도에서 그려넣지 못한 한반도 코리아에 임진왜란이란 명칭의 사건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해양세력이란 탈을 쓴 무식한 왜구일 뿐이다.어떻게 지도조차 그리지 못한 곳을 그들이 전략적으로 공격을 감행한다 할 수 있을 것인가.그들은 놀랄 것이다.왜 서양인 우리가 한반도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그것조차 몰라서야 되겠는가.지금의 열도일본에 있는 사람들을 서양인들의 용병이고 노예들이며 일반적으로 농사를 짓게 하여 군량을 거둬드리는 도구라고 생각하던 사람일 뿐이다.서양인들은 임진왜란을 그들이 저질렀던지 아니던 간에 동아시아대륙에 16세기까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모두 알 필요가 있다.일본인들이 왜 서양인이 되고싶어 난리일까?그들이 서양 노예신분이었던 세월을 돌이켜보면 서양인만큼 존경스러웟던 것은 없었을 것이다.지금 열도 사이코 정치인 아베가 트럼프에게 녹아나는 것은 그러한 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9.대한해협의 명칭 위에서 본 지리상황을 참고로 또 다시 1920년 레슬리 주지 회사(Leslie-Judge Company)의 "1920 Leslie’s New World Atlas"지도를 다시하번 보자.이 1920년 제작한 지도이니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라고 한 것은 지도제작자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일게다.그것을 지금의 한반도 잣대로 친일미국인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하지만 대한해협(大韓海峽:Korea Strait)의 명칭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동해만 보더라도 한국해(韓國海)라 해야 하지만 우리는 한국해라 하지 못하고 그껏 동해(東海)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17, 18세기의 특히 프랑스가 만든 지도를 보면 상당한 수의 지도에는 '한국해(韓國海)' 즉 'Mer de Coree', 'COREA SEA' 라고 표시된 지도가 너무나도 많다.글쓴이가 보관하고 있는 지도에만 하더라도 수십종이 된다.즉 알게 모르게 그들은 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지도는 코리아해라고 규정지은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수로기구(IHO:國際水路機構)의 초대 회원국이었던 일본이 한국보다 우선권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리고 열도인들이 실제로 식민지배를 하지 못했음에도 식민제국처럼 행세하여 마침내 동해(東海)를 그들의 입맛대로 '일본해'라고 공식화 하고 이를 국제수로기구에서까지 인정했다는 사실과 미국과 영국 그외 서양세력들은 이를 묵인한 것이다.이것은 본 블로그 글 "IHO로 본 세계삼한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8 "에서 잘 살펴보았지만 결국 서양세력들이 장악한 모든 국제환경적인 면에서 우리는 일본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맞다. 한국해(韓國海) 주제는 다음 또 다른 기회에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고 대한해협으로 들어가 보자.본 블로그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 "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 "두 종의 글에서 현재 한반도와 열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바가 있다.한반도 부산(釜山)과 열도의 시모노세키(下關)사이에 분명 대마도(對馬島) 즉 쓰시마섬이 있음에도 이 쓰시마섬과는 전혀 관계없이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에 해협을 대한해협(大韓海峽)이라 한 것에 대해 전기에 언급한 내용과 다르지 않다.즉 대한해협의 영어 명칭은 바로 "KOREA STRAIT" 이다.이것이 조선해협일 수도 있지만 코리아 지협으로도 생각할 수가 있다.굳이 'COREA' 를 'KOREA' 로 바꿔 사용했다는 문제를 여기서 재론할 생각은 없다.하지만 지난 역사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공부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미 19세기말엽 미국에 의해 한국이란 명칭은 "KOREA" 로 굳어져 버렸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의심이 간다.북아메리카대륙 미국내에서 무엇때문에 19세기 말엽 홍보아닌 홍보를 메스미디어로 유별나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존재하고 "COREA" 라 칭하여 적어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를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이라 했던 삼한역사에 대한 주체를 인정해야할 소지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 미국 땅에서 19세기말까지는 "COREA"란 용어는 지속적으로 오르내렸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가 있다.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와 매우 친숙한 역사명칭은 영어라고 하지만 "KOREA" 보단 "COREA"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명칭으로부터 세계삼한역사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는 사유가 된다.만약 'Korea'란 명칭으로 굳어져 버린다면 우리는 한반도 역사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목적의식과 동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즉 찬란했던 'COREA' 는 이제 모습을 감추어버렸고 결코 우리나라의 국명으로써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식으로던지 서양세력들로 인해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라고 사료된 것이다.왜 한반도 역사를 서양세력과 대칭적으로 해석하려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 "에서 지적한 내용이지만 "COREA"란 명칭사용은 1878년 5월 서양나팔수 또한 황색언론이라고 하던 선대이메거진(Sunday Magazine)에 의해 마지막으로 지칭한 것으로 나타나고 미국 각종 자료에서도 공통적으로 이와 같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이후부터 현재 사용되고 있는 “Korea”란 명칭을 대신하여 한반도에서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블로그 글 마다 이야기 한 적이 있다.그러나 우리는 현재 대한(大韓)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큰 대(大), 한국 한(韓)을 사용하는 한 그자체가 바로 'COREA'이며, 이를 큰 한국, 위대한 한국이라고 통칭하고 영어로 그리이트 코리아(GREAT COREA)라고 하여 자존을 세웠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이러한 문제도 다음 이야기하기로 하자. 대한해협의 거리를 수리적으로 보면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의 거리가 되는데 225km며, 부관페리(關釜)가 보통 시속12.5노트(1 knots는 1.852km)로 달리면 대략 10시간 소요되는 거리로써 선박이 1시간에 1해리 혹은 마일(nautical mile)로 1,852m 항해하는 속력이다.그러나 놀랍게도 1920년에 작성된 "1920 Leslie’s New World Atlas (New York City, New York: Leslie-Judge Company, 1920)"지도를 보면 대마도(対馬島)를 중심으로 부산과 대마도 사이를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라 하였고 아래 대마도와 시모노세키 사이의 해협을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도대체 이 명칭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백과사전에는 해협(海峽)은 육지(陸地)사이에 끼여 있는 좁고 긴 바다로 수도(水道), 목(項), 도(濤:渡), '샛바다' 라고도 한다라고 정리되어 있다.'샛바다'는 육지와 육지'사이 바다'라는 순 우리말이다.A strait is a naturally formed, narrow, typically navigable waterway that connects two larger bodies of water. Most commonly it is a channel of water that lies between two land masses.또한 영어자료를 보면 해협(海峽)은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좁고, 전형적으로 항해할 수 있는 수로(水路)로서 두 개의 더 큰 수역(水域)을 연결한다 하였고 가장 일반적으로는 두 개의 육지 사이에 놓여 있는 물의 통로라고 설명된다. Straits are the converse of isthmuses. That is, while a strait lies between two land masses and connects two larger bodies of water, an isthmus lies between two bodies of water and connects two larger land masses.그리고 해협은 지협(地峽)의 정반대라 하였고 해협이 두 개의 육지 땅 사이에 놓여 있고 두 개의 더 큰 수역을 연결하는 동안, 한 개의 지협(地峽:isthmus)은 두 개의 수역 사이에 놓여 있고 두 개의 더 큰 육지 덩어리를 연결한다고 되어 있다. 더하여 러시아어사전을 보면 스트로이티(стро́ить)라 하는데 (вин) 짓다, 건축하다; (возводить) 세우다, 수립(설립)하다, (cmену и m. п.) 쌓다, 구축(축척) 하다, (машины) 제작하다; (корабли) 건조하다 등으로 나타나 해협이란 의미가 상당히 인위적으로 새롭게 세워진다는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다시 풀이하면 해협은 언제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뉘앙스가 존재한다. 그렇다.가로 막혀 있던 육지를 가운데 뚫어 길을 터 바닷길을 만든다면 그것이 곧 해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여기서 해협의 본래 의미가 자연적인 해협과 인위적인 해협까지 설명이 가능해야 하지 않겠는가도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하여 인위적으로 해협 명칭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그렇다면 대한해협을 상하(上下)로 양분(兩分)하는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과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0.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 north coast of Vancouver Island, British Columbia, Canada,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은 위 영어자료에 보듯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밴쿠버 섬의 북쪽 해안을 말하고 있다. 이곳은 어떤 곳인가. 바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1799-1867)가 1867년까지 장악했던 곳이다.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니콜라이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1764-1807)에 의해 모피장사꾼들이 1799년에 설립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는 처음부터 알레스카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외 포트로스 캘리포니아(Fort Ross, California:1812-1841), 하와이의 포트 엘리자베스(Fort Elizabeth, Hawaii:1814-1817), 포트 알렉산더(Fort Alexander near Hanalei, Hawaii:1817), 포트 바실리 데 톨리(Fort Barclay-de-Tolly near Hanalei, Hawaii:1817)까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를 관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절대로 러시아가 아시아대륙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러시아를 앞세우고 있지만 결코 지금의 동유럽에 존재한 러시아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러일전쟁이 발발하게 한 주요한 원인으로 일본입장에서 보았을 때 러시아가 남하정책 운운하고 있지만 그것은 잉글랜드가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현 러시아가 존재하는 유라시아대륙에서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이야기다.물론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1877년 이야기다.러시아아메리카회사가 북아메리카대륙 서남부가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러시아가 존재하여 남부를 위협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에서 1904년 러일전쟁당시 러시아가 남하를 위한 정책을 하기 때문에 일본이 반발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했다고 하는 것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이후의 이야기지 결코 당시의 지형 위치상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이야기다. brought-on 1.(상품이) 타지역에서 들어온[만들어진].2.(사람이) 지역 사회에 속하지 않은, 타관 사람인.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의 브루턴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본래 영어사전에서 브루턴의 의미는 타지역에서 들어 온 것이라든지, 타지역에서 들어온 타지(他地)의 사람이라는 이방인(異邦人:Gentile)이라는 뜻이 큰데 유대인이 아닌 이교도를 지칭하는 말이라 했다.유대인은 이방인이 맞고 떠돌이가 맞으며 거주지 없이 돌아다니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인식이 유럽인들에게 강하다.(ㄱ)"The name Broughton is often derived from the Saxon “Broc”, which means brook or broken land; and “Tun”, the dwelling or town. 브러튼이라는 이름은 종종 '개울'이나 '부서진 땅'을 뜻하는 작센 "브록"과 주거(住居)나 마을을 뜻하는 "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ㄴ)Broughton may also come from an Old English word meaning 'stronghold'. It is also likely to be derived from “berg” (a hill), and “ton” (a town), both Saxon words. 브러튼은 또한 '강인함'을 의미하는 오래된 영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일 수도 있고 작센어인 '베르크'(산)와 '톤'(읍)에서도 유래될 가능성이 높다 하였다. (ㄷ)Broughton Island and the Broughton Archipelago, and Broughton Strait nearby, were all named in 1792 by Captain George Vancouver, for Commander William Robert Broughton, captain of HMS Chatham during his first tenure in British Columbia, and thereafter upon his return to the British Columbia Coast, of HMS Providence. HMS Discovery, Vancouver's ship, and HMS Chatham under Broughton were anchored off the south shore of this island on July 28, 1792.마지막으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밴쿠버 섬의 북쪽 해안에 브루턴 섬과 브루턴 군도, 그리고 근처의 브루턴 해협은 모두 영국탐험가 조지 밴쿠버(George Vancouver:1757-1798)선장에 의해 1792년 브리티시 컬럼비아(British Columbia)에서 처음 재임할 때 프리킷함 채텀(HMS Chatham:133톤)의 선장 윌리엄 로버트 브루턴(William Robert Broughton:1762-1821)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그 후 1793년 브루턴 선장의 프리킷함 프로비던스호(HMS Providence:406톤)가 브리티시 컬럼비아 해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름이 붙여졌다. 1792년 7월 28일, 브루턴의 휘하에 있는 디스커버리호(HMS Discovery:330톤)와 밴쿠버의 배(Vancouver's ship), 채텀호(HMS Chatham)는 이 섬의 남쪽 해안에 정박했다고 말하고 있다.브리티시 컬럼비아에 1774년 스페인배가 이 지역에 제일 처음 도착했고, 그 뒤를 이어 북서항로를 탐색중이던 브리티시(British)의 쿡 선장, 제임스 쿡(James Cook:1728-1779)이 도착했으며 영국과 미국의 모피상들이 최초의 개척자였고 밴쿠버 섬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지속되다가 영국의 독점권이 인정되자 영국은 밴쿠버 섬을 직할식민지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그렇지만 1841년 교회에 조시 밴쿠버의 위패( memorial)를 설치한 것을 보면 그 역시 허드슨베이 회사(Hudson's Bay Company)의 고용인이었음도 알 수가 있다.결국 1788년 건조되었고 1791년부터 1795년까지 조지 밴쿠버선장의 지휘아래 북아메리카 서부 해안 탐험에 관한 디스커버리호와 동행한 영국해군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프리깃함 채텀(HMS Chatham)의 선장 윌리엄 로버트 브루턴(William Robert Broughto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역시나 이사람도 부르주아상인집안 출신으로 윌리엄 로버트 브루턴(William Robert Broughton)의아버지는 함부르크 상인으로 나타난다.그리고 이사람의 국적은 태어날 때는 그레이트 브리튼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1-1801)이고 사망할 때는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United Kingdom:1801-1922)이다.이 두개의 왕국을 지금 잉글랜드왕가를 선조로 한다고 역사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솔직히 한 것 비해 그들은 너무야단스럽게 부풀린 것이 많다.돛대가 하나인 작은 범선, 슬루프(sloop) 프리킷함 프로비던스호(HMS Providence:406톤)를 1793년 윌리엄 로버트 브루턴(William Robert Broughton)선장이 이끌고 동아시아를 항해를 했고 1797년 5월 16일 오키나와 남부(south of Okinawa)의 미야코지마(Miyako-jima)에서 산호초(coral reef)를 들이받고 파괴되고 난파되었을 때 천우신조(天佑神助:providential)로 작은 스쿠너(schooner:돛대가 두 개 이상인 범선)를 구입했다고 말하고 있다.그런 후 브로튼과 그의 대원들은 이 스쿠너에 몸을 의지하여 임무를 계속하여 동북아시아를 탐험하였고 1799년 2월에 귀국했다고 알려지지만 실제로 이러한 경우에 자신의 목숨조차 구하기 힘든 상태에서 동해안을 항해하면서 울릉도를 발견했다고 하여 울릉도 지명을 그 난파된 선박 선장의 이름을 붙여 지도제작을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가당찮은 이야기다.생각해보면 웃기지 않는가.동아시아 한반도를 삼한의 본거지로 삼기 위해 지도를 만들어야 했고 그 지도에 마음대로 갖다 붙인 것이 오늘날 역사근거랄 것도 없는 프랑스함 라 페루즈(La Pérouse)함대가 발견하고 울릉도에 상륙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다즐레 섬(Dagelet Island)이라 명명했다던지 포경선 리앙쿠르(Liancourt)호가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다 독도를 발견하고 리앙쿠르 암초라고 했다고 하거나 그로부터 6년 뒤 1855년에 영국함대 호네트호가 독도를 발견하면서 호넷 암(Hornet Island)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사실까지 실제로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다. 또한 생각해보면 18세기말엽에 500톤 미만의 프리킷함의 해양조사선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대수인가 한다. 11.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 Krusenstern Strait (Russian: Пролив Крузенштерна) is a strait that separates the islands of Raikoke and Shiashkotan in the Kuril Islands, Russia. It is separated into two passages by the Lovushki Rocks and is 61.2 km (about 38 mi) wide. A strong northwest tidal current creates tide rips; eddies and whirlpools may also form at times. This strait was named after Russian admiral and explorer Adam Johann von Krusenstern.크루센스턴 해협(Krusenstern Strait)은 러시아 쿠릴 제도의 라이코크(Raikoke) 섬과 시아슈코탄(Shiashkotan)섬을 분리하는 해협이다. 로브시키 바위에 의해 두 개의 통로로 분리되며, 넓이는 61.2km(약 38mi)이다. 강한 북서쪽 해류는 조수간만의 파도를 일으키며, 때때로 파도와 소용돌이도 형성될 수 있다.이 해협은 러시아의 제독이자 탐험가인 아담 요한 폰 크루센스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본래의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t:Пролив Крузенштерна)은 한반도 대한해협이 아니라 오호츠크해 러시아 쿠릴열도(Kuril Islands)에서 중부의 무인도 화산섬인 라이코케 섬(islands of Raikoke:면적 4.6km2, 최고점 551m)과 시아시코탄 섬(Shiashkotan:면적 122km2,최고점 시나르카 봉 944m)사이를 구분하는 해협이다.서두에서 언급했지만 대한해협을 남북으로 나누어 북쪽을 칭한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은 당시 잉글랜드 부르주아상인집안의 탐험가 이름으로 파악되며 남쪽의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는 것은 발트족 독일인 해군장교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쿠릴열도의 시아시코탄 섬에서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라이코케 섬(Райкоке,雷公計島)은 과거 일본이 1875년부터 1945년까지 70년간 이 섬을 실효 지배하고 있다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에 소비에트연방의 영토가 되면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크뤼센슈테른 해협을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섬, 시아시코탄 섬(Shiashkotan:捨子古丹島)은 세베르기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동쪽에 하림코탄 섬(Kharimkotan)이, 남서쪽 약 9 km에 로브스키 암(Lowuschki Rock)를 사이에 두어서 각각 인접하고, 또 서북쪽에 예카르마 해협(Ekarma Strait)을 사이에 두고 약 5km 거리에는 예카르마 섬이 있다. 특히 로브스키 암(Lowuschki Rock 북위:48.33, 동경 153.54)에는 바다사자가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총 4개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는 로브스키 암(Lowuschki Rock 북위:48.33, 동경 153.54)에 의해 두 개의 구절로 분리되어 있으며 61.2km(약 38 마일)로 사이가 넓다. 강한 북서 조류가 조수의 거센파도를 일으키고 때때로 회오리와 소용돌이도 때때로 형성 될 수 있다. [Lowuschki Rock 그림] 특히 마치 독도와 같은 환경을 가진 이 로브스키 섬(Lovushki Islands)을 돌가야 바위(Dolgaya Rock)라고도 한다.Gaya is one of the best historical sites in India. Gaya is named after the demon Gayasur (meaning "the demon Gaya"). According to Vayu Purana, Gaya was the name of a demon (Asura) whose body became pious after he performed strict penance and secured blessings from Lord Vishnu. It was said that the body of Gayasura was transformed into the series of rocky hills that make up the landscape of Gaya.가야(Gaya)란 어원은 인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힌두교의 성전(聖典) 푸루나(purana) 기록에 엄격한 참회를 행하고 비슈누(Vishnu)신(神)으로부터 축복을 얻어낸 후 신체가 경건해진 악마(demon Gayasur)즉 가야 아수라(阿修羅)의 이름이라 하고 있다.또 가야의 풍경을 이루는 일련의 바위 언덕으로 변모되었다고 하고 석가가 기도한 구릉(丘陵)같은 곳이라고 하는데 위 로브스키 섬을 보면 돌 언덕, 돌 구릉같이 보인다.돌가야(Dolgaya)에서 돌(dol)은 순수한 우리말이며 돌석(石)구릉이다.물론 이것도 이동된 지명이라고 보이지만 한반도 동해 독도를 우리는 외로운 섬이라고 하지만 서양인들은 모두 암(岩)이라고 록(Rock)를 사용하는 것을 풀어보면 암(岩)은 嵓(암)의 속자(俗字)이고 山(산)과 石(석)으로 이루어 글자인데 바위(돌)의 산이다.이것은 본래 돌(dol)로 인식되던 독도의 역사 명칭이 아니었는가도 한다. 이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은 전자에서 풀어 보았듯이 쿠릴반도에 소속된 지명이다.마찬가지로 쿠릴반도에 이 지명은 러시아제독이며 탐험가인 아담 요한 폰 크뤼센슈테른(Adam Johann von Krusenstern:1770-1846)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이사람의 이력을 한번 살펴보자.아담 요한 크루젠슈테른은 발트 독일인(Baltic Germans)이다.과거 발트 독일인들은 현재 후손 중 가장 큰 집단으로써 독일과 캐나다에서 발견되는 민족인데 에스토니아(Estonia, Reval), 타르투(Dorpat), 리보니아(Livonia), 사레마 섬(Ösel), 히우마 섬(Dagö), 라트비아(Rīga, Livland, Kurland), 리투아니아(Lithuania) 등 발틱국가에 거주하는 일반독일인이 아닌 토착 농노에 대한 귀족, 지배계급을 구성하였고 이들 땅의 정부, 정치, 경제, 교육 및 문화를 그들이 통제하였으며 13세기부터 1918년까지 700년 이상 통치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동양역사에 적용해 보면 대금(大金)에게 멸망 단계에서 야율대석(德宗)이 서쪽으로 피해 서요(西遼:Qara Khitai, 1124-1218) 즉 대거란를 세우게 되지만 1218년 몽골계 나이만(乃蠻)에게 멸망당하였고 그때로부터 정확하게 700년이 1918년이다. 金史·本紀第二·太祖遼人以鑌鐵為國號,認為鑌鐵是很堅硬的。其實,鑌鐵雖堅,終究還是會變壞,只有金才能永遠不變不壞금사본기(金史本紀)에 보면 " 요(遼)는 빈철(鑌鐵:Damascus steel)로 호(號)를 삼았는데 그 견고함에서 취한 것이다, 철은 단단하지만 결국 변괴될 것이다, 그러나 금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 한 것이다.요나라가 취한 빈철은 탄소강(炭素鋼:carbon steel)을 말하는 것으로 탄소 함량이 0.02~2.11%인 것을 말하는데 이 철 재료로 만든 검이 다마스쿠스 검(Damascus blade)이라고 하며 비단 손수건을 칼 위에 떨어뜨리면 저절로 베어질 만큼 예리할 뿐만 아니라, 탄력성이 커서 바위를 내리쳐도 구부러지거나 부러지지 않았다고 한다.참고로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 워싱톤카운티에 다마스쿠스(Damascus, Washington County, Virginia, USA)가 있다. 표고 595 m에 있는 이도시는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 지역에는 체로키족(Cherokees)과 쇼니족(Shawnees)이 거주했고 18세기 중반, 헨리 모크(Henry Mock:1794-1892)와 그의 가족은 로우렐 크리크(Laurel Creek)과 비버댐 크리크(Beaverdam Creek)에서 합해 정착했다. 그 장소는 Mock's Mill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886년 존 대니얼 임버든(John Daniel Imboden:1823-1895)은 모크(Mock's)의 아들로부터 이 땅을 구입하여 다마스쿠스의 영어 이름인 다마스쿠스(Damascus)를 설립하였다. 임버든은 그 지역에서 철광산(iron mines)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유일한 퇴적물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이었다. 그 마을은 결국 목재산업(timber industry)에 의해 개발되었고 다마스쿠스(Damscus)는 1904년에 시(市)가 되었다.결국 다마스쿠스의 원래 지명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 "에서 밝혀 본 것처럼 고대 히타이트(Hittite)의 정확한 위치도 위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슈피리어호를 중심으로 고기 빅산지에서 우리가 찾을 수밖에 없다 하였고 미국에서 철강산업이 발전하는 주요한 원인으로서 첫째 원석(原石)을 확보할 수 있는 광산(鑛山:mine)이 가까이에 석탄이 있었다는 사실과 제련(製鍊)공정을 원활하게 하는 연로 즉 석탄산업(石炭産業:coal Industry) 또한 철강산업지역과 맞물려 공동발전을 이루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그곳은 바로 애팔레치아산맥에 포괄하고 있음도 밝혔다.제련 기술이 뛰어나는 것은 원광이 존재한 곳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마스쿠스 검Watered pattern(물결무니페턴)13th-century Persian-forged Damascus] 그러나 요(遼)를 멸망시킨 금나라에는 금이 많이 생산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했다는 사실과 금의 색깔은 백(白)인데, 완안부의 색깔 또한 백이다."하였다.金史本紀第一 世紀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里俱。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蓋自謂阿古乃之後。石土門、迪古乃,保活里之裔也。及太祖敗遼兵於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斡荅刺招諭渤海人曰:「女直、渤海本同一家。」금(金)의 시조의 휘는 함보이고,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나올때, 연령이 이미 60여 세였다. 형 아고내는 불(佛)를 좋아하여, 고려(高麗)에 머물며 나옴을 원하지 않고 말하길 "후세자손이 필히 서로 모이고자 하는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지 않겠다. 오직 동생 보활리를 데리고 함께 하겠다" 하였다.시조가 완안부(完顏部) 복간수의 물가에 거주하였고, 보활리는 야라에 거주하였다. 그후 호십문(胡十門)이 갈소관을 들어 태조(太祖)에게 돌아갔는데 스스로 말하길 그 조상 형제 3인이 서로 이별하여 갔으니, 대개 아고내(阿古乃)의 후손임을 스스로 일컫는 것이다. 석토문과 적고내는, 보활리의 후예다.태조가 경계에서 요병(遼兵)를 깨뜨림에 이르러, 야율사십(耶律謝十)을 붙잡고 곧 양복(梁福)과 알답자로 하여금 발해인(渤海人)을 항복 권유하여 말하길 여직(女直)과 발해(渤海)은 본래(本) 같은 집안이다.하였다.큰 형 아고래(阿古迺), 둘째 함보(函普), 그리고 막내 보활리(保活里) 이렇게 3형제다 여유당전서 第六集地理集第四卷○疆域考 金史世紀, 北路沿革續金之始祖函普。初從高麗來。與弟保活里。俱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居耶嬾。安僕幹水。當是吉州以北。耶嬾是咸興。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보면 함보(函普)가 갔다는 그 ‘완안부(完顏部) 복간수(僕幹水)’는 우리 땅 함북 ‘길주(吉州) 이북’이고, 보활리(保活里)가 갔다는 ‘야래(耶懶)’는 오늘날 함남 함흥이라 하였다.또 금조의 시조 완안함보(完顏函普)는 신라의 후손이라 하여 신라(新羅)의 김씨의 금(金)을 택한 것이라고 한다. 여진의 땅에 여진인들이 불렀다는 ‘신라산(新羅山)’에 대해 기술하고 있어 신라유민은 북쪽 만주지방의 완안부에 거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𤲟案漠北行程錄。自同州四十餘日。至肅州。東望大山。金人云。此新羅山。其中產人薓、白附子。與高麗接界。文止此。 其云。新羅山者。亦長白山之謂也허항종(許亢宗)이 펴낸 행정록(行程錄)에는 동주(同州)에서 40일을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산(新羅山)이다. 그 산속에서는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하며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바로 장백산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을 참고할 때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 "에서 살펴보았듯이 요(遼)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 철생산지이며 서부에서 발흥한 금조(大金)는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에서 위치한 것으로 판단된다.1710년 이후,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제국의 군사, 정치, 민간생활,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점점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 발트독일인들은 1918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러시아제국에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진다.1945년에는 대부분이 독일이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 조선이 누군가에 의해 해체되던 시점인 1881년 러시아의 발트지방에는 18만명의 발트인 독일인(Baltic Germans)이 있었으나, 1914년까지 이 숫자는 162,000명으로 감소했고 1881년 에스토니아에는 약 46,700명의 독일인이 있었다고 알려지며 1897년 러시아 제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라트비아(Latvia)에는 인구의 6.2%인 120,191명의 독일인이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독일인인가 하는 것은 의문이 남는다고 말하고 있다.발트 독일인의 역사와 존재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1939)의 체결과 그 후의 나치-소련 인구 이동에 따라 1939년 말에 막을 내렸다고 되어 있는데 절멸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사실상 발트지역은 현재 북유럽으로 정해져 있지만 이는 1920년 이후에 이야기며 그 이전 발트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 허드슨베이 지역이라 해야 맞다. 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 "에서 발트해(Baltic Sea)가 게르만어(Germanic languages)로 "Aust-marr"라 하여 동쪽호수(Eastern Lake) 혹은 동쪽바다(Eastern Sea)등으로 불리었다는 사실을 자료에서 알 수 있는데 현재 "유럽대륙의 발트"의 지명은 이와 같은 위치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고대 노르드어(Old Norse)로 "간드빅(Gandvik)"라 하여 백해(白海:White sea)라 하였고 또는 위험한 바다라 하여 뱀 만(Bay of Serpents)이라 하였으며 형태적으로도 "바다의 입구" 또는 "내해(inlet of the sea)"로 묘사하였다는 사실을 종합하여 발트해(Baltic Sea)가 있을 곳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허드슨베이(Hudson Bay)라 하였으며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대입하면서 이를 확신한 사실이다.본래 이 허드슨베이지역을 허드슨베이회사(Hudson's Bay Company, HBC:1670-)의 사유지라 한 것은 적어도 17(1670년)세기 이전까지 주인이 없었다는 이야긴데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반복되는 허황된 주장이며 이전 주인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 영역에서 함경도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참역사사실이다. 이것에서 이미 본 블로그 글 "해달(海獺:Sea otter)로 본 함경도http://blog.daum.net/han0114/17049995"와 "함경(咸鏡)의 빙하와 움푹들어간 땅, 끼어있는 바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767 "에서 충분히 살펴본 이야기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는 북방민족을 거론할 수밖에 없는 곳인데 당조(唐)때 돌궐(突厥)과 송조(宋)때 거란(契丹) 요(遼朝)이며 요조가 서요가 되었다가 금조에게 망했으며 동북부에는 동호에서 말갈(靺鞨)과 실위(室韋)를 이야기 할 수있으며 식신(息慎), 직신(稷慎), 주신(朱申) 숙신(肅愼) 읍루(挹婁), 어원은 ‘밝다’, ‘밝’은 ‘박’이나 ‘발’로 발음되는 ’발조선(發朝鮮),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만주족(滿洲族까지 이어진다.함경도 하중부 지금의 길주도 오랫동안 야인(野人)에게 점거(占據)되었다.우리 사서에 기록된 북방지역의 북인(北人), 야인(野人)이라고 하여 반도역사는 이것을 통칭 여진(女眞)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여진이 아니라 흑칠(黑漆)한 것처럼 몸이 검은 야인(野人)도 있었고 또한 동량야인(東良野人)이란 올량합이 바로 그것이다.이곳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아도 여진족들의 영역일 수 있다.본 블로그는 서부 여진은 현재 역사는 러시아제국 또는 고용된 주식회사로 그리고 있고 동부여진은 잉글랜드라고 하여 역사 접근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잉글랜드에는 게르만족(Germanic peoples)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발트 게르만족이 존재한 것으로 풀어 볼 수 있으며 여진족의 상업주의와 무역업의 발전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허드슨베이회사가 생성되고 그 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나타난다.어쩌면 이 허드슨베이회사 역시 조선왕실에서 허가 한 특허회사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려시기에 고려의 동북면과 연결된 갈라전(曷懶甸)일대에 거주하던 요(遼朝)의 여진부족들은 고려의 국경지대를 왕래하며 그들의 토산물을 부족한 생필품과 무역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부락의 추장들 중 일부는 고려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고려북방지역을 그래서 서양인들이 출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큰 무역시장이 있고 도성이 있어 서양인들의 시각으로 부르주아라고 보았으며 천자가 관할하는 중앙정부(中央政府)관리들이 있어 오래전부터 큰 시장(교역, 무역소)을 근거로 북경 또는 왕경(王京), 성경(萬戶盛京), 중국이라 하였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독일제국 동북부의 비슬라 강(Vistula)하구의 띠 모양의 지역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에 의해 독일과 분리되어 있던 고립 영토 동프로이센(East Prussia)과 리투아니아(Lithuania)에서 온 민족 독일인들은 문화적, 언어적, 역사적 친화성 때문에 발트 독일인으로 잘못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프로이센의 독일인들은 독일 북부의 왕국 프러시아(Prussian:1701-1918)를 생성시켜 보유하고 있었고, 1871년 이후에는 그들이 살았던 영토가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독일 시민권을 보유했다고 알려진다.리벤족(Lievens)과 같은 일부 귀족 가문들은 원주민 족장들로부터 독일여성(German women)들을 통해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리벤족의 독일 리보니아 기사단(Livonian Order)들 중 많은 수가 러시아 황제 이반 4세(Ivan IV:1533-1584,재위:1547-1584)때 러시아와 폴란드-스웨덴 사이에 벌어진 리보니아 전쟁(Livonian War)중에 많이 사상자가 발생하여 거의 사라졌다고 말하고 그 지역에 새로운 독일인들이 도착했으며 이 기간 동안 원래의 정착민들의 낮은 독일어(Platdeutsch)는 점차적으로 새로운 정착민들의 높은 독일어(Hochdeutsch)로 대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한해협 대마도 남쪽 해협에 명명된 아담 요한 크루젠슈테른(Adam Johann von Krusenstern:1770-1846)은 스웨덴(Swedish) 귀족가문 폰 크뤼센스트주르나(von Krusenstjerna)에서 이동한 발트족 독일인(Baltic German)가문으로 발트해를 접한 에스토니아(Estonia) 하리우주(Harju maakond) 하구디(Hagudi)에서 태어났다. 1710년 에스토니아 전체가 러시아제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이 전쟁으로 에스토니아 인구는 다시 초토화되었는데, 1712년의 인구는 15만170,000명으로 추산하였으며 러시아 정부는 발트 독일인들의 모든 정치적, 토지소유권을 완전히 회복시켜 틀어쥐었다.크루젠슈테른은 스웨덴 출신이면서도 스웨덴-러시아전쟁에서 러시아제국 해군으로 참전하고 1793년부터는 러시아아메리카회사가 생성되는 1799년까지 왕립해군(Royal Navy)에 복무한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이때는 영란4차전쟁(Fourth Anglo-Dutch War:1780-1784)시기에서 영국이 승리하고 영국이 네덜란드의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해양강국이었던 때라고 설명된다.그러나 앵글로(Anglo) 가 왕립해군(Royal Navy)을 가진 잉글랜드라는데는 의문이 많다.물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미국, 인도, 중국이라는 역사위치가 아메리카대륙이다. 그의 활동이력을 보면 남미의 남쪽 끝에 있는 케이프 혼(Cape Horn)과 남아공(South Africa)의 끝에 있는 희망봉을 지나 중국, 인도, 미국을 방문하여 마치 세계 전역을 돌아다닌 것처럼 말하지만 본 블로그 글 "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0 "에서 이미 알렸듯이 태평양을 횡단하지 못한체 대서양 범주와 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해안을 항해했을 가능성이 크다.그는 러시아와 중국사이의 직통통신(direct communication)의 이점을 지적하는 논문을 발표한 후, 인정을 받았고 그로인해 그는 차르 알렉산더 1세(Alexander I)로부터 아시아 극동 연안(Far East coast of Asia)으로 항해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임명되었다. 이때 위 1920년 미국에서 제작한 지도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한반도 동해안으로 항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상트페테르부르크출신의 백작 니콜라이 페트로비치(Nikolai Petrovich:1754-1826)와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1799-1881)의 후원으로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은 세계 최초의 러시아 세계일주항해(Russian circumnavigation of the world:1803-1806)을 이끌었고 이것의 주된 목적은 러시아아메리카(알래스카)회사와의 모피무역의 발전이라 했다.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은 1841년 마침내 러시아제독이 되었고, 1842년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그는 1846년 그가 1816년에 구입한 에스토니아 영주의 저택이 있던 킬시 마노르에서 생을 마치고 탈린 성당에 묻혔다고 자료에 나타난다.아마도 2척 원정선박은 러시아아메리카회사의 소속일 가능성이 높고 그들의 목표는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을 확립하고 남아메리카에서 교역을 촉진하며, 북아메리카 서부의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가능한 식민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이 두 척의 배는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의 지휘 하에 브리티시상선 나데즈흐다(Nadezhda:Hope, formerly the British merchant Leander)와 캡틴-리에리 유리 F. 리스안스키의 지휘 하에 있는 네바(Neva:formerly the British merchant Thames)가 1803년 8월 크론슈타트(Kronstadt)에서 출항하여 남미의 케이프 혼(Cape Horn of South America)을 둥글게 돈 후 북태평양에 도달하여 남아공의 희망봉(via the Cape of Good Hope at South Africa)을 거쳐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은 1806년 8월에 크론슈타트(Kronstadt)에 다시 도착했고 두 척배의 선원들은 그들의 항로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지도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물론 이 기록속에는 대한해협의 기록도 있다. 12.마무리 긴 글을 이제 마무리하게 되었다.우리의 역사가 순리적이고 반듯하게 존재한다면 이런 불필요한 긴 서술이 필요가 없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런 편하고 이치에 꼭 맞는 진실의 역사를 가지지 못했다.하여 글쓸때마다 긴 글이 되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기도 하다.지금까지 대한해협의 남북으로 구분하면서 북쪽은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이라 하고 남쪽은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 한 사실에 대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보았다.그리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서양인들이 마구잡이식이 붙이 지명들은 정립된 것이 아님을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다.캐나다 서부 밴쿠버 섬의 북쪽 해안에 브루턴해협이 존재하고 또한 쿠릴열도 라이코크섬과 시아슈코탄섬 사이에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도 존재한다.이와 똑같은 아시아일주탐사가 최초의 러시아 세계일주항해(Russian circumnavigation of the world:1803-1806)보다 이른 시기 1785년부터 1788년 3월 10일에 호주의 보타니 만을 떠난 뒤 신비롭게 사라졌다고 하는 프랑스 세계일주항해의 선박이다.이 지도에도 나타나지만 포항을 클로나르 곶(C.Clonard)이라 한 것은 당시 동해안 탐사를 시작한 아스트라베호(French ship Astrolabe(1781))의 선장이었던 클로나르(Robert Sutton de Clonard)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니 한반도에 섬뿐만아니라 해안 육지 명까지 그들이 마음대로 갖다 붙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무엇때문에 이런 행위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까?한반도는 숙명적으로 식민지 영토로 만들고자 했던 사실이 들어난다.클로나르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보면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인 백작 장프랑수아 드 갈롭(Jean-François de Galaup, comte de Lapérouse,1741-1788)이 루이 16세의 명을 받아 선원 220명의 배 2척을 끌고 태평양 탐험에 나선 그는 1785년 브레스트 항을 출발하여 대서양의 카나리아 군도, 칠레 남단 케이프 혼, 하와이 군도, 알래스카, 마카오, 필리핀 제도, 일본, 그리고 1787년 5월 정조 때 제주도를 지나 울릉도를 지나갔으며, 남해안과 동해안을 조사했고 동해를 지도에 일본해로 표기하였다 하고 캄차카 반도에는 1787년 9월 7일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 상륙하여 현지인들의 환대를 받았던 것으로 기록되며 그 이후 사모아, 호주 등을 거쳤고 호주 북쪽 바다 뉴칼레도니아 산타크루즈의 티코피아 섬에 이르러 좌초되어 행방불명되었으며, 이후 1826년에 그 선박의 잔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쟁적으로 프랑스와 러시아는 세계일주항해를 도모했고 프랑스 루이16세가 지시한 사실과 러시아 차르 알렉산더 1세(Alexander I)가 지시한 것과 취지가 같으며 프랑스는 시기가 1785년부터 배가 사라지고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1788년까지를 말하고 러시아는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에 의해 1803년 8월부터 1806년 8월까지 이루어진 최초 러시아 세계일주항해(First Russian circumnavigation)가 시작된 시기는 거의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이것은 하나의 체제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프랑스와 러시아는 동시대에 왕립해군과 해상권 다툼이 있었고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 즉 홍경래시대(洪景來,1771-1812)가 다가오는 시점이다.이들 모두가 중국과 해상무역 개방을 요구하고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이다.러시아 수학자 겸 신역사연구자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주장처럼 중국(中國)이나 아랍(ALAB)의 역사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것으로 중국이 서양인들로부터 관심이 최고조로 올라오던 시점이기도 한다.때는 조선왕조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시기로 정치적으로는 벽파(僻派)라 하는 안동김씨가 세력을 강화하던 때이며 서양사적으로는 하노버 왕가(House of Hanover)계보에서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의 조지 3세(George III, 1738-1820,재위:1760-1820)와 같은 시기이며 당시 왕립해군(Royal Navy)이 존재했을 때이다.홍경래는 정주성전투(定州城戰鬪:1811.12.30-1812.4.19)에 의해 소멸된다는데 상대는 러시아제국이다.최초 러시아 세계일주항해(First Russian circumnavigation)의 행선지를 잠시 보면 크론슈타트(Kronstadt)를 출항하여 발트해(Baltic Sea)와 대서양(Atlantic Ocean)을 횡단하고,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 브라질(Brazil)을 지나 케이프혼(Cape Horn)을 돌아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향해 출발하였고 마르케사(Marksas)와 샌드위치(Hawaiian)제도, 캄차카(Kamchatka)제도에도 정차하였으며 하와이(Hawaii)를 떠난 후 2척의 배는 서로 갈라져 리스안스키(Lisianski)는 러시아아메리카(알래스카)로 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스트3개짜리의 슬루프함 나데즈흐다(Nadezhda:1802-1808 Russian ship:430톤)는 알래스카의 시트카(Sitka)를 향해 출발하여 인도양의 중국과 마카오(China and Macao on the Indian Ocean)를 지나 항해한 다음, 아프리카를 돈 후 발트해(Baltic Sea)를 건너 크론스타트(Kronstadt)까지 돌아왔다. 그런데 인도양의 중국과 마카오란 한 사실은 이상하기 그지 없다.China and Macao on the Indian Ocean위 영문을 보자, 근대사가 만든 역사지명위치를 기준으로 할 때어떻게 중국과 마카오가 위치하는 곳이 인도양이 될 수 있는가.동서지나해라 해야 마땅하지 않는가.또한 하와이를 떠난 후 서로 갈라진 나머지 한 척의 배, 네바(Neva:1802-1812, 370톤)는 1804년 이스터 섬(Easter Island)을 방문했고, 그해 말 알래스카 시트카 전투(Battle of Sitka, Alaska)에서 틀링기트족(Tlingit)을 물리치는데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1805년 리스안스키(Yuri Lisyansky:1773-1837)는 마카오(Macau)에서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을 다시 만났으나 곧 헤어졌고 또한 1805년에 그는 현재 그의 이름을 가진 그 섬(Lisianski Island in the Northwestern Hawaiian Islands)의 하와이 승려(Hawaiian monk)를 처음으로 묘사했다고 말해진다.그리고 네바는 1806년 7월 22일 나데즈흐다(Nadezhda)보다 거의 한 달 전에 크론슈타트로 돌아왔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1785년부터 1788년 3월 10일에 호주의 보타니 만을 떠난 뒤 신비롭게 사라졌다고 하는 아스트라베호(French ship Astrolabe (1781))의 항해도 문제가 있지만 러시아의 항해 경로지를 보면 이 발트해가 매우 신경쓰이는 것은 사실이다.물론 이러한 기록은 러시아가 현 유라시아 대륙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발트해를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발트는 북유럽에 있어야 하고 그곳을 지나 대서양쪽으로 항해하는 설정이나 괜히 아프리카를 휘돌아 대서양으로 들어가 발트해와 크론슈타트로 입항했다고 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함이 있는 비합리적행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만약 캐나다 동북부 해안에 위치했더라면 카리브해와 대서양 남북전체를 한번 휘돌면 끝이다.특히 앞에서 잠시 서술한 이야기지만 중국과 마카오가 인도양에 속한 것처럼 지명처리가 된 것도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중국과 마카오가 인도양에 속하려면 카리브해와 대서양 남부를 인도양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고 대서양전체를 오르내렸으면 가능한 이야기다.그것은 더욱더 최종 입항지 크론슈타트(Kronstadt)가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그것은 본 블로그 글에서도 잠시언급한 내용이지만 남북전쟁을 앞두고 잉글랜드 세계금융조직에 의해 협박을 받고 있던 링컨대통령을 비호하면서 군사 원조를 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20세기초까지 러시아함대가 뉴욕항에 입항할 수 있었던 환경이 아니었는가 판단된다.그러나 결코 현재의 러시아가 뉴욕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던 제정주체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러시아 해군학교의 책임자으로서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은 많은 유용한 일과 해양부 과학위원회 위원이기도 했고, 나침반이 철기의 영향을 상쇄하기 위한 그의 고안은 해군에서 채택되었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어 그의 업적은 무시할 수 없다.하지만 그가 대한해협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 해협의 지명으로 지도에 나타나는 사실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지적하는 것이다.단 삼한의 군주국이 세계전역을 지배했다고 한다면 설령 한반도 지도에 나타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그렇다면 독도명칭으로 사용한 리앙쿠르, 호넷, 그리고 울릉도의 또 다른 지명 아르거놋 등의 함대는 대조선의 함선일 수가 있고 울릉도 지명이 된 프랑스의 다즐레, 여기서 지금까지 살펴본 대한해협의 브루턴과 크뤼센슈테른 또한 대조선인이라고 볼 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결코 이질적이라고 할 수 없다.문제는 그러한 역사가 우리가 이질적으로 느끼도록 감쪽같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그리고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이 1842년에 받았던 푸르르메리트(Pour le Mérite)훈장은 1740년에 프로이센왕국에서 제정된 훈장이며 크루젠슈테른이 받았던 이 훈장은 바로 프로이센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1795-1861,재임:1840-1861)재임때 수여된 사실에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러시아제국 차르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그의 공과가 프로이센의 명예훈장으로 연결괴고 있다는 사실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과연 그러한가.아니다.서두에서 언급한 바로 이중통치체제(二重統治體制)의 결과이다.요(遼朝)와 금(金朝)의 관계에서 요(遼朝)의 게르만 전통적인 역사 흐름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발트인으로써의 프로이센(Prussia)영웅으로 칭해졌겠지만 과연 발트해가 동북유럽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곳을 지배하고 하나의 일체세력으로 존재한 체제를 통한 연결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그 세력은 누구란 말인가.조선을 이은 대한제국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대한해협" rel="tag" target="_blank">대한해협</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앨비언(Albion)" rel="tag" target="_blank">앨비언(Albion)</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라사(愕羅斯)" rel="tag" target="_blank">아라사(愕羅斯)</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이중통치체제(二重統治體制)" rel="tag" target="_blank">이중통치체제(二重統治體制)</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요(遼朝) 금(金朝)" rel="tag" target="_blank">요(遼朝) 금(金朝)</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남면관(南面官:南樞密院)" rel="tag" target="_blank">남면관(南面官:南樞密院)</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북면관" rel="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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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은 세계통치국
************************조선(朝鮮)은 세계통치국 글쓴이:한부울1. 들어가기2. 근세사가 주는 의혹들3. 한반도 역사가 무엇인가.4. 삼한통합과 그 종주국5. 조대(朝代)와 조정(朝廷)6. 기록으로 본 만리지국의 조선강역7. 나가기1.들어가기2005년 글쓴이가 본격적으로 세계삼한역사연구 블로그에서 글을 시작하면서부터 따지면 거의 15년이란 세월이 흘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나름대로 글 중에는 지극히 아끼는 글도 많다 하겠지만 제일 가치를 느끼고 보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세계삼한역사라는 연구 구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이탈하지 않고 끊김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는데 가장 뿌듯함을 느낀다.일반적으로 자신있게 하던 주장이 가다보면 뒤틀릴 수가 있어 때로는 조정과 수정이 필요하였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맥을 짚고 예상한대로 끈기있게 진전할 수 있었다는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할 것이다.그러한 구도가 변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게 뒤받침한 것은 물론 완벽하지 않겠지만 생물학적판단과 지리학적판단, 기후학적판단을 바탕으로 한등 자연과학적으로 그것을 세세히 증명하고 기존 사서와 차이점등을 밝혀 맞추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 큰 핵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다시말하지만 삼한의 우두머리 조선은 세계통치국이었다는 사실은 본 블로그에 사실상 넘쳐난다고 해도과언이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벌어지고 있는 건방진 열도왜구정치모리배들의 의한 무도한 경제침략과 철면피 친일파들에 의해 잘못알려진 조선이 난자당한다는 안타까움과 100주기를 맞이하는 광복절에 대한 작은 헌작을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을 시작하도록 한다.본 블로그 글을 하나하나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게시된 글 속에 조선이 세계통치국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간단하게 본 블로그에서 밝힌 글들을 예시하면서 다시 한번 훑어보자.본 블로그 글 "4.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7 "에서 태고적부터 전통적으로 동방이라 불리었고 삼한역사에서 아사달(阿斯達)이라 하였으며 "아침의 땅"이라 하였고 이것을 조양(朝陽) 또는 조광(朝光)이라 하였으며 동방국가를 동국(東國), 대동(大東), 해동(海東)이라 하여 상징한 것으로써 조일광선(朝日光鮮)이란 의미의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만들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게 했었다는 사실은 본 블로그 글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는 화부(華府)와 미경(美京), 화성돈(華盛頓)으로 불렸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2 "에서 말하길 지금의 세계경찰국 미국 워싱턴DC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오벨리스크(obeliskos)워싱턴기념탑이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바로 고대이집트 왕조가 태양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기념비 방첨탑(方尖塔)이 주는 태양신(羅:Ra)을 숭배하는 상징의 의미라는 사실이다.이 한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또한 본 블로그 글 "기니피그(guinea pig)가 가리키는 천축(天竺)은 인도(indies)http://blog.daum.net/han0114/17050620 "에서 천축(天竺)에 대한 한어자료를 보면 <사기대완전>에 인도(印度)는 최초에 신독(身毒)이라고 하였고 <산해경>에는 서방에 천독국(天毒国)이 있다 하였으며 <漢書>에 동남쪽으로 따라가면 신독국(身毒国)이 있었다고 하여 수천리가 그들의 도시이라 하였고 <후한서서역전>에는 천축국(天竺国)은 일명 신독(身毒)이라고 하여 당나라 초기에 천축(天竺)이라 칭하였다라고 하였다. 천축은 페르시아어 힌두(Hindu)라 음역한 것이며 페르시아인들은 신두(Sindhu) 또는 힌도(Hindu), 그리스인들은 힌두(Hindu), 인두(Indu)라 하여 모두 인도(印度)가 되었다는 것인데 천독(天毒)이라는 말은 천축(天竺)을 말하고(古謂天毒即天竺), 곽박은 조선천독(朝鮮天毒)이라 하여 천독(天毒)이 천축국(天竺國)이니 서방천독국과 동방신독국이 모두 조선이라는 이야기다.그것뿐인가. 중천축국(中天竺國)이 삼만리(地方三萬里 )라는 것은 다섯(오)천축국을 다스리는 나라가 중(中)천축국(中天竺國)이라는 뜻이며 천축국은 동천축국, 서천축국, 남천축국, 북천축국, 중천축국을 합하여 삼만리(地方三萬里)였고 수십나라(數十國)가 있으며 모두 왕을 두어 나라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신독국(身毒國)이라 했다.즉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중앙정부가 다스리는 국가체제로 조선은 바로 인도이며 천독이고 3만리영토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런 역사사실만으로 조선을 감히 비하는 모든 벌레같은 잡배들의 입을 봉할 수 있을 것이다.선지식을 알면 무엇하나 엉터리지식만을 가지고 똥이 가득한 머리로 세상을 보려하니 옳게 보일 수가 없다.즉 중천독국은 옛 중원왕조가 세운 도읍이라고 보면 정확하다.그곳은 경사라고 칭했다.당후(唐虞) 즉 요순(堯舜)까지는 이런 호칭이 없다가 하(夏)부터 각호칭이 있었다 하여 춘추공양전(公羊傳)에서 '경사(京師)란 무엇인가' 하니 '천자가 거하는 곳이다' 하였고 또 '경(京)은 크다' 하였으며 '사(師)는 땅이라' 하였으니 천자가 거(居)하는 곳이니 필연적으로 땅이 컸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신라는 천자를 가진 나라인가.간단하지 않는가. 정복왕조라 하여 스스로 천자라 칭했다던 금(大金:1115-1234)시조 완안함보(完顔函普:941-960)가 신라가 부모의 나라라 한 것이나 청(淸)역시 황제들이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신라(新羅)를 잇고자 한 금(金), 청(淸)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자연스럽게 천자의 나라임을 알 수가 있다.신라 명칭에서도 보면 신로(新盧)-사라(斯羅)-사로(斯盧)-시라(尸羅)-시나(sina), 시노(Sino)-변형 지나(支那)로 나타남도 알 수가 있으며 일본인들이 청을 지나조선이라 한 사실을 풀어보면 신라조선과 같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그리스(Greece)를 희랍(希腊[Xīlà])이라 한데서 '실라', '시라'라 발음하였고 이것이 한문문서가 통일되고 있는 시점에서 신라(新羅)인데 신라는 로마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 "에서 천자(天子) 즉 황제가 있었던 곳을 시노(Sino)라고 하였을 것이고 이것을 지금까지 청(淸:Qing)이라 한 것이라 할 때 이 시노(Sino)는 프랑스어로 시노 sin(o), 라틴어로 시나, 시노, 시나이(sina-sino-sinai)등으로 발음되어 지나[支那(しな)], 시나[sina(シナ)]로 읽혔다고 할 수 있다.주로 서세들이 시노(sino)라고 부르는 것은 라틴어 시나(sina)에서 출발한 것으로 중국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고 대신 일본인들은 시나(sina)라 하여 한문 지나(支那)라고 표시하지만 기원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진단(震旦) 즉 옛날 인도인이 중국을 치나스타나(Chinasthâna) 또는 치니스탄(Chinistan)에서 나온 china, chini 등에서 보아야 하고 진단(振旦), 진단(眞旦)과 같이 쓰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지나"라고 하는 일본인들은 본래의 의미를 낮춰부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나'를 '지나'라 하였다는 사실이다.때문에 일본서기의 신라를 정벌했다고 하는 삼한정벌설도 신라 즉 중국을 주요타깃으로 하는 대한강박에 대한 조작역사임을 알 수가 있다.설명이 군더더기 없이 매우 샤프하지 않는가.고려는 어떤가.고려(高麗)가 천자국(天子國)이었다는 사실이 여러곳에서 발견된다.유럽왕실의 상징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라는 사실은 본 블로그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2 "에서 박견(狛犬)을 고려견(高麗犬), 당사자(唐獅子)라고도 하고 원형은 사자이며 옛 중국에서는 전한시대(前漢時代)부터 궁궐(宮闕)이나 묘실(廟室)앞에 수호신으로 석조 사자상(獅子像)을 안치한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사자가 고려의 상징이거나 천자의 상징임을 알 수가 있고 사자(獅子)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리며 동서고금 가리지 않고 왕권(王權)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면 이는 세계삼한역사관점과 같은 논리다.또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재위 918~943) 상(像)에서 황제의 조현복(朝見服)인 강사포(絳紗袍)에 쓰던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는 사실과 임진왜란시기에 명조선의 황제가 고려황제 즉 조선천자라는 주장도 있다.조선은 어떤가.본 블로그 글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 이라한 글에서 소위 정복왕조라는 청조가 명이 존재하는 강남을 섬멸하면 조선은 자기 주머니속에 들어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였으니 조선천자를 무너뜨리면 자연스럽게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한반도에 조선이 있는데 신중국 양자강에 있는 강남을 점령한다고 조선을 정복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한반도 역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역사가 이야기다.예를 들면 신중국을 조선영토라 할 때 강남은 조선정부가 아닌가.그러니 조선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니 조선이 힘을 잃고 그들의 주머니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다.성종4년(1473)에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면서 대조선황제폐하(大朝鮮皇帝陛下)라 하면서 신성한 모든 물이 조선(朝宗)을 따른다는 부상지수조종(扶桑之水朝宗) 즉 만수조종(萬水朝宗)이라 했다는 사실, 또 성종 5년(成宗 5年: 1474)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이 특별히 종무승을 보내 토의를 바치면서 황제폐하라 했던 사실, 중종 17년(1522) 세견선 허용에 관한 일본 사신의 상소문 에서 우리 성문신무(聖文神武)하신 금상황제 폐하(今上皇帝陞下)라 했다는 사실 등은 이러한 사실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본 블로그 글 "삼한(朝鮮)은 만방의 우두머리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382 "에서 성종 25년(1494) 유구국왕(琉球國王) 즉 중산부주(中山府主)가 조선국왕도 아닌 일개 예조대신(禮曺大人)에게 전하는 글을 보면이다. “유구국(琉球國) 중산부주(中山府主)는 조선국(朝鮮國) 예조대인족하(禮曹大人足下)에게 받들어 올립니다. 대체로 삼한(三韓)은 만방(萬邦)의 우두머리이니, 많은 백성들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덕택(德澤)은 사이(四夷)에게 두루 미치며, 인풍(仁風)은 이의(二儀)와 같으니, 크도다 만복(萬福)이 진중(珍重)함이여! "라고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 "에서 보면 일본이 '시나'라 한 것은 청나라를 말한다고 하였지만 위에서 신라(新羅)를 '시나'라 사실과 때문에 신라조선(新羅朝鮮)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1894년 5월(양력6월)이라고 적혀 있고 만국조천(萬國朝天)이 적힌 삽화를 그대로 인용하면 즉 세계 각국의 공사가 황제에 배알(世界各国の公使が皇帝に拝謁す)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만국조천은 누구겠는가.또한 본 블로그 글 "다시 찾아보는 금단의 땅 코리아(A Forbidden Land Voyage to the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6 "에서 유태인 장사꾼 함부르크(Hamburg)출신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이 본 조선(朝鮮)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The land of milk and honey)"이라고 표현한 사실도 있다.2. 근세사가 주는 의혹들실제로 우리역사실체가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 기록들만으로는 충분히 않다.한반도 역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외부세력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의한 전란 통에 화재로 인해 소각당하고 때론 약탈당했다고 하는 역사기술은 어디를 보아도 넘쳐난다.근대사에서도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해군에 의해 역사기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의궤(儀軌)와 도서(圖書)가 약탈당할 때 가져가지 못한 나머지 사서(史書)는 무엇인지도 밝히지 못하는 상태에서 불타 없어졌다고 하며 더더욱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제(日帝)에 의해 병합되던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자그마치 근 1년(年)간 고문서와 고지도 등 50여종(種) 200,000권(卷)이 서울 남산에서 소각되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볼 때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BC213-BC206)로서 일제(서양상업연합)들이 두려워할만한 우리의 역사가 근원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렇게 수많은 도서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고 한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바른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우리가 놀라 자빠질 정도의 진실의 역사가 묻혀버린 것이 되며 지금 현재 글쓴이가 밝히고자 노력하는 일연의 핵심사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란 판단의 증거들이 그렇게 사라졌을 것이란 추측만 할 뿐이다.실제로 1년간 소각했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서들이 통째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고 그러한 구도 속에 현재 우리가 만난고 접하고 있는 역사가 창조되었을 것이란 사실은 바보가 아니면 추정할 수 있는 이야기다.이러한 추단을 더 확실하게 하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하게 한 조선사편찬위원회,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의해 어떤 역사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한반도 역사라 할 때 이런 역사를 어떻게 신뢰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과연 우리나라 역사가 단일체제인가, 다원적체제인가 하는 국가체제성격조차 판단할 수도 없도록 한 것은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규모자체를 알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없어 역사전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2007년 한겨례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면 워싱턴특파원이 메트로폴리탄 한국실 관람을 하고 난 소감을 말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중국관과 일본관에 비해 한숨 섞인 초라함을 말하고 있다. 이 기사는 "사무라이 전시관까지 갖춘 널찍한 일본관 입구 통로에 옹색하게 자리잡은 한국실은 ㄱ자형 유리로 막은 벽면에 갓과 한복, 북한 화가가 그린 한국화 등 20여점이 전시물의 전부였다."라고 말하며 빈약한 한국실의 전경을 토로하고 있다.이런 상황은 아마도 미국뿐만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슴아픈 이야기다.생각해보라. 실제로 들어날 수 있는 역사를 깡그리 없애버린 그들이다.세계3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치있는 국보급의 한국유물이나 진귀한 역사물품들을 그들 스스로가 제대로 알리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고 본다.이와같은 행위가 미국인들에의해 중국이나, 일본보다 약소국이니 차별한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판단이다.왜 그들이 스스로 숨겨진 역사사실을 왜 억지로 밝히겠는가.또 생각해보니 어제 날짜 2019.08.14 자 국내신문등에서 19세기 프랑스 리옹 태생 사업가 에밀 기메(1836-1918)가 설립한 아시아 전역에서 출토된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기메 박물관(Musée Guimét)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 궁중 장식품으로 추정되는 반화(盤花) 2점과 목조여래좌상에서 직물로 짠 수정 염주가 발견되었다고 하는 뉴스가 눈에 띄였다.이 반화는 글쓴이가 보아도 정교한 공예작품임을 알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 없는 유물이며 반화 수반에는 금가루로 뒤덮인 고목이 꽂혔고, 뻗어 나간 가지에는 얇은 나무판을 오려 초록빛으로 물들인 잎들이 달렸으며 고목 주위에는 옥(玉)을 깎아 만든 난초와 콜라겐덩어리 교질(膠質:colloids)로 만든 꽃이 보인다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그러하니 우리나라에는 없는 삼한유물들이 유럽박물관과 미국박물관에서는 넘쳐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들이 우리 역사의 본래모습임에도 낯설어하는 웃지못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3. 한반도 역사가 무엇인가.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미국땅 전체를 한반도에 밀어넣고 궤 맞춘 것이다.북만주까지 뻗어나간 고조선까지 이야기 한다면 남북아메리카대륙, 그리고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대륙을 전체를 끼워넣은 것과 같다.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그러니 역사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요즘 시국에서 보면 한반도 역사의 이러한 불편한 오류가 낳은 폐해는 너무 심각하게 사회전반에 걸쳐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는 것도 우리는 눈만 뜨면 목격하게 된다.사회를 이끌 지도자나 지식인, 정치인 할 것 없이 모두가 변형 된 기형적인 형태로 나타나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든다.이들은 친일파라고 하는 인사들로써 과거 부끄러운 것도 알고 창피스러운 것도 알아 가능하면 대중앞에 나서지 않은 것이 그들에게 불문율처럼 여겨지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저런 친일파들이 국민을 기만하는 것을 밥먹듯이 하고 너덜너덜하게 넝마게 되어버린 이데올르기를 이용하여 갈등을 부추기며 노골적으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민족을 협박하고 핍박까지 하고 있는 작태는 실로 구역질이 난다는 표현도 부족하다.이에 더하여 찌꺼지 같은 열도정치모리배를 추종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헛소리 망언을 옹호하며 국민들의 아픈 정서를 마구 헤집어놓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몸부림을 치고 있다.이들은 일제에게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자기민족을 부끄럽게 여기고 하찮게 여기며 왜구시민이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때문에 일제를 추종하는 것을 넘어 또 다시 일제식민지 역사를 반복케 하려는 이완용이 같은 자들임을 금새 알 수가 있다.이들이 소위 서양문물에 취해 허접을 떨던 왜구분신들이며 정체성까지 팔아먹고 민족을 구렁텅이속으로 몰아넣는 개돼지 같은 종자들임을 어찌 모르겠는가.이들이 설치는 우리나라는 국가적으로 볼 때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글쓴이는 애국자라 할 수없다.하지만 역사를 통째로 서양일본세력들에게 빼앗겼다는 아픔만은 안다.그리고 반드시 빼앗긴 역사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하는데 목숨까지 받칠 각오가 되어 있다.빼앗긴 역사를 찾을 수 있는 국가가 어딘가.바로 대한민국이 아니겠는가.만약 외부의 적 특히 왜구로부터 실제로 대한민국이 무력 공격을 받아 국가가 매우 위태롭게 되었을 때 이들 철면피 친일파들은 반드시 총부리를 우리나라 쪽으로 돌릴 역적분자들이며 어떤 식으로 든지 왜구쪽에 붙어 우릴 내부적으로 혼란을 불러 일으켜 쓰러뜨리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힘들게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찾기 이전에 이들을 경계하고 위험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글쓴이의 판단은 실제로 한반도 역사가 주장하는 일제는 존재하지 않는다.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농단하고 빼앗은 일제는 지금도 존재하고 그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열도왜구정치모리배들임을 알 때 이들을 반드시 제거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한반도와 열도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조작된 역사가 실제존재한 것이 되고 그것들이 후세에 사실화하고 정당화하여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왜구노예신세가 된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어쩌면 이러한 사실까지 거대한 음모자가 지켜보고 있다면 우리입장에서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지만 제대로 노려 완성시키려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솔직히 역사전쟁은 우리 자손들의 미래가 달려있는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그저 왜소하게 만들 의도로 친일역사학자들은 반도역사, 이씨조선역사 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한반도역사가 어떤 것인지 한번보자.비록 5000년이란 긴역사를 가졌다고 하지만 한반도 역사가 흐르는 동안 언감생심(焉敢生心) 압록강 이북 대륙으로 진출조차 엄두를 낼 수 없었고 중국(中國)을 대국(大國)이라 하여 사대(事大)하면서 대대손손 때 맞추어 요구하는 조공(朝貢)도 마다 할 수 없었고 모든 문물과 문화는 수입하여 모방하거나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종속국(從屬國)마냥 대국에게 제대로 항거 한번 못하는 나약한 임금과 줏대없는 신하들만 세공(歲貢)을 축내면서 그것도 모자라 나라 안에서는 시시때때로 파벌을 만들고 당파(黨派)싸움에 날 저무는 줄 모르는 부패한 관리들이 나라의 근간마저 해치며 오직 가난에 찌든 어리석은 백성들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백성이 무식하여 나라일에 무관심하면서 오늘날 굴욕적인 한반도 식민지역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고 친일학자들은 이렇게 당위성까지 이야기한다.이러한 구도에 맞게 현재까지 우리에게 남겨져 정사라고 하는 역사사서 대표적으로 1145년 검은얼굴의 김부식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본래 고려사를 없애버리고 고려역사를 조선시대사람인 김종서가 편찬했다고 하여 대충 절단하여 만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되어 세계유일무일한 왕조실록이라고 자랑하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그 외 선대(先代)의 시문에 대한 비평과 시화를 엮어 편찬한 시화집 등 잡서(雜書)들은 하나같이 위 구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이러한 것들이 전부 모여 바로 한반도 역사를 만들고 이것을 우리의 식민지역사라고 버젓이 가르치며 그러한 과정에서 역사학 석사, 박사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안타까운 현실의 역사상황은 어찌 일반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그러니 대다수 한반도인들은 늘 상 우리의 역사는 조공(朝貢)의 역사이며 사대주의(事大主義),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만연한 역사이고 어느때도 침략을 받지 않는 날이 없는 피해역사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보면 일제가 한반도 역사를 우리에게 던져줄 때 우선은 일제 식민지정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 했겠지만 영원히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없도록 만들고 더하여 피해역사 위해 뿌리깊은 노예근성까지 생성케 하면서 그들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고자 했을 것이 분명하다.어쩌면 한반도 인들이 이런 피해역사가 숙명적인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것도 일제(日帝)가 뿌려놓은 치밀한 계획아래 소위 100교육지계라 하여 미래까지 계산하고 실행에 옮겼을 것이란고 판단된다.그들의 계획은 성공했다고 본다.왜냐하면 한반도에는 수많은 변형된 기형적인 친일파들이 기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이런 한반도 역사바탕아래 그들의 이질적인 지식자들의 출몰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물론 그들은 진실된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서양문물에 몰입되어 알고 있는 그들의 이론 철칙 즉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Social Darwinism)에서 "우월한 사회나 국가가 열등한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을 철저하게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즉 왜구가 우리보다 힘이 강했으니 강한 편에 서겠다는 이야기다.이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당연히 우리나라는 세계제1등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4. 삼한통합과 그 종주국서문에서 이야기했다.삼한을 통합한 신라가 근원도 없는 왜구에게 점령당할 군번인가.소위 친일역사학자들은 이를 추종한다.조선(朝鮮)은 중국(中國)을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겼고 열도일본서기(日本書記:720년)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소위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설(三韓征伐說)을 굳게 믿고 특히 한반도 경상도쪽에 쏠려 있는 신라(新羅)를 쳐서 점령했다고 헛소리까지 하면서 결국 삼한(三韓)은 왜구 종속국이라고 짖어된다.이런 헛소리때문에 서문에서 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이게 역사냐 쓰레기냐.그것에 더하여 친일학자들은 일제식민지 기간동안 조선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던 것을 고깃국에 쌀밥을 먹게했다고 떠벌리고 있는 것도 마치 지금의 열도왜구정치모리배들이 하는 소리와 똑같다.본래 조선인들은 헐벗고 굶주렸기 때문에 밥도 많이 먹고 일제가 조선인들을 먹여살렸다고 하고 있다.그렇다면 간단하게 몇가지만 생각해보자.일본인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조선과 대한제국을 왜 그토록 정벌코저 했을까.중국 속국이 된 것이 그냥 미워서?지금 왜구정신병자들처럼 혐한(嫌韓)을 그들의 전문인 성희(性戲)처럼 하고 싶어서?다시 한번따져보자. 자원도 없고 산악이 70%차지하여 농사짓을 곳도 없는 한지(閑地)또는 휴간지(休墾地)와 같은 한반도가 무엇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 기어코 정벌하려했겠는가 하는 물음이다.중국의 속국이니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것이라면 곧 바로 한반도를 경유하지 않고 대륙으로 치고 들어가 점령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한반도는 그들 차지가 되는데도 그들은 기어코 조선과 대한제국을 정벌하려 한다고 떠벌렸다.무엇때문에?16세기 임진왜란이 발생한 시점까지 외국 즉 서양인들은 한반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는 것을 알 때 조선이나 대한제국을 정벌하고자 한 세력은 지금의 열도를 근거로 한 종자들이 아니란 말이다.왜구들이 정조론이나 정한론을 떠벌린 것은 한반도와 열도 지형구도를 삼한 말한다면 그들은 정신이상자 아니면 전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중이 떠중이라는 이야기다.일본은 해상무역을 본업으로 삼는 장사꾼이다.그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없으면 이런 노림수를 처음부터 불필요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법칙이나 가치성에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그럼에도 얼빠진 인사들이 주워담는 것은 전부 거짓말만 주워담고 아는 것이 고작 거짓 역사사실 밖에 없으니 그런 소리를 한다하겠지만 역사를 보는 눈이 그 정도라면 더 이상 대중앞에서 잘난척하고 떠 벌리지 말하야 한다.장사꾼이 왜 쓸데없이 감정적으로 일을 그리치겠는가.서문에도 알기싶게 언급한 것처럼 신라가 그들을 포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사실은 깡그리 뭉게버리고 일제(日帝)가 만든 한반도 지형에 맞게 헛소리하는 것을 그대로 믿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알기는 알되 제대로 모르는 반풍수라는 소릴 들을 수밖에 없다.신라가 중국이니 마니보다도 김부식이가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삼한을 선진문물을 보유한 선진국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지만 그조차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중국을 모계로 하다기에 자주성이나 주체성을 상실한 이야기임은 더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시대적으로 체제내 혼란이 가중될 때 언제나 통합에 이르게 하는 삼한의 뛰어난 선견지명과 그에 따른 선진문물을 서양일본으로 전수하였다고 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에 틀림없다.5세기경 신라(新羅:AD57-AC935)는 오카야마(岡山, Okayama)에 제방과 성(城)을 쌓는 축제술(築堤術)을 전수했고 더하여 신라인 목수 저명부(猪名部)가 배만드는 조선술(造船術)을 전수한 역사는 그들이 고마워해야 할 역사가 아닌가.이런 문물 전수가 왜 그들에게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지 다음의 설명을 보자.그들이 나무가지 울타리의 담을 삼아 경계를 하다가 적으로부터 침략에 대비하고 방어할 수 있는 성을 쌓는 기술을 전수한 것은 그들에게 최대한 방어력을 갖출 수 있게 만든 것이다.그것은 존속성의 문제가 아닌가.물론 한반도 역사나 일본서기에서 축제술이라 하니 단순하게 제방쌓은 기술이라 하여 하찮게 여기지만 실제로 그들 종족을 보호하기 위한 성을 쌓게 하고 전쟁에 대비케 하였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역사가치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또한 그들에게 삼한(三韓)주위만을 배회하고 쓸데없이 노략질하지말고 스스로 먼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해상거래행위를 하도록 배만드는 기술을 전수한 것은 신라가 어줍잖아 이런 기술을 전수한 것이 아니다.스스로 왜구들을 계몽시키는 차원이며 선진문명을 전수하는 중국이라는 천자의 나라 신라가 할 의무이기 때문일 것이다.배를 만들게 하여 신라를 침략하게 할 정도로 신라인들이 바보란 말인가.말 같지도 않은 잡소리만 해되고 있으니 한반도 역사학자들은 반성을 해도 많이 해야 한다.삼한정벌설이라는 것은 애초 근거도 없은 그들만의 역사 만들기에서 동원된 허구이이고 조작된 것임이 틀림없다.이러한 신라의 배려에 의해 15세기부터 해양을 누빌 수 있었던 것이다.또한 백제유민들에게 통합한 신라나 승계한 고려가 땅을 떼어내어 백제유민들이 생활할 수 있겠금 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모른다.본 블로그 글 "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미시시피강상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6"에서 밝혔지만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新羅,B.C57~A.D935) 기간인 A.D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나타나고 오늘날 에스파니야의 핵심왕국이라 할 수 있는 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1037-1230)의 페르난도1세(Ferdinand I, ?-1065)가 포르투갈세력에게 영토를 그저 떼 주었다고 한 사실과 페르난도는 고려시대의 송조(宋,960-1279) 영종(英宗,재위:1063-1067)과 동일한 계보라고 밝힌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때문에 에스파니아를 송나라와 결부시킬 수 있는 것은 남송이 피해 달아난 곳이 바로 여송(呂宋)이었고 이 여송을 스페인이 차지한다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백제유민이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의 국가를 가지지 못했던 유민으로써 바스크족이라고 한다.그들이 삼한에게 적개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16세기에 절정이 되게 한 신구종교전쟁, 종교적인 갈등의 문제가 확대되면서 기존 보수종교와 충돌이 불거졌기 때문이다.왜구가 누군인가바로 서양일본해양세력들이며 엄격하게 따진다면 백제유민들이다.그들은 하나의 체제인 삼한통일국가체제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세상을 갈구했고 경찰경비나 제재(制裁:sanction)가 덜한 알려지지 않는 도서(島嶼)나 거친바다 해양 떠 있는 배에서 그들의 삶은 지켜졌다고 알려진다.이들을 우리는 해적이라고 한다.현재 열도왜구들은 서양인들이 이렇게 저렇게 조작한 역사 위에 앉아 노닥거릴 수 있다지만 그들은 이런 역사조차도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밖에 없는 역사좀비신세 말고는 더 언급할 것이 없는 종족이다.그럼에도 그들은 엉터리 역사만을 믿고 끝없이 왜구 엉터리 지식자가 양산되는 역사속임수는 체바뀌돌듯하면서 속으로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곪아가고 있을 뿐이다.역사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어쨌거나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종속국이란 프레임은 우리 역사에게 큰 멍에를 짊어지게 하는 것이다.신역사개념으로 간단하게 따져보더라도 이러한 허구의 사실은 금방 탄로가 난다.러시아 수학자 겸 신역사연구자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주장한 중국(中國)이나 아랍(ALAB)의 역사 모두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 사실에서 중국역사는 물론 아랍이나 유럽역사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중국이나 유럽 즉 아랍역사를 맹신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다.본 블로그에서 몇번이고 말하고는 것이지만 유럽역사는 아랍역사를 타고 생성된 것이다.이것은 백제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1540년 바스크(Vasco)귀족 가문 출신인 로욜라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1491-1556)에 의해 생성된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하나의 체제 삼한역사를 농단하기 위해 유럽역사 만들기 위한 전초적인 바탕깔기 작업에 일환으로써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다.그렇다면 식민지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선(朝鮮)이 중국에 종속국이라고 하는 사실은 명백한 거짓주장이 아닌가.존재하지도 않았던 중국의 속국이라는 주장은 어떤 근거로 하는 말인가.물론 일본서기가 주장하는 삼한정벌설도 그런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므로 삼한이 일본 종속국이라는 따위는 설명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같은 주장이며 오직 로욜라 이냐시오 같은 음모자들에게 삼한을 대칭한 일본역사가 존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날조한 것이다.실제로 일본역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연결되며 귀족과 다이묘를 호위하던 무사계급집단임을 알 수가 있다.일본역사에서 발생되었다고 하는 정조론이란 따위의 주장은 그들이 가진 열등의식에 대한 발로이며 이를 해소할 곳을 찾던 중 피해의식의 원인이라고 믿던 조선(朝鮮)의 역사를 축소시켜 모든 화살을 돌렸다고 볼 수 있다.5. 조대(朝代)와 조정(朝廷)신중국자료를 보면 중문의 조(朝)는 '아침'이라는 의미와 '금일'이라는 의미가 있다 했다.정치적으로 정권을 잡은 자의 정권이라는 뜻과 왕조가 말하는 한 개의 황실가족, 본래의 의미로 파생된 뜻인데 반대되는 자는 야(野)라 하였다. 臣前蒙陛下問及本朝所以享國百年、天下無事之故。等皆屬之。東漢末年之前,只有被視為正統之天下共主才敢稱朝。위 글을 해석하면 "신하들 앞에서 몽고폐하(蒙皇)가 묻길 본조는 군주(제후:享國百年)가 재위(在位)한 백년이다. 천하가 무사함이 오래되었다. 이러함은 동한말년(東漢:25-220)전과 같아 오로지 정통성으로 천하가 함께 높이는 주인을 보고 조(朝)라 칭해야 한다."라고 했다.조(朝)를 취할려면 정통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朝代」則指某「劃時代政權」執政之時代,可用做劃分該歷史時代之稱呼,可以是一個或多個政權之集合。例如,「魏晉南北朝」明顯不是一個政權,而是由三國、晉朝、南北朝等「子朝代」組成的複合詞,而南北朝又分南朝與北朝,各自皆自稱正統,南朝的宋、齊、梁、陳則各別都是以「朝」為劃分標準。春秋和戰國則不是朝代,而是東周朝的兩個時期,因為當時諸侯多名義上奉周天子為共主。 또 조대(朝代)를 말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정권이 집권하는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한 개 또는 여러개의 정권을 아우를 수 있는 역사시대를 칭할 수 있다 하였으며 예를들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는 분명히 하나의 정권이 아니라 삼국, 위, 진, 남북조등 자조대(子朝代)로 이루어진 복합어인 반면에 남북조는 남조와 북조로 나누어져 각각 정통성을 자칭하며 남조는 송(宋:420-479) 제(齊:479-502)양(梁:502-557), 진(陳:557-589)은 각각 조(朝)를 기준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은 조대(朝代)가 아니며 이것은 동주조(東周朝:BC770-BC256)는 두 개의 시기이며 당시 제후들이 주천자(周天子)를 명목상 공주(共主) 즉 주변의 나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자로 받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미국인독일계, 중국학자이며 역사학자인 카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魏復古:Karl August Wittfogel,1896-1988)은 하나는 한족이 세운 조대(朝代)를 중원왕조(中原王朝)라 하고, 다른 하나는 사방의 북방민족인 소수민족이 세운 조대(朝代)는 또 침투 왕조(滲透王朝)와 정복 왕조(征服王朝)로 나뉜다고 하였다.사실상 이사람은 漢族向為少數民族,早已被眾蕃包圍消滅 한족(漢族)이 주변의 여러 번(蕃)에 포위되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고 四千六百年歷史當中漢族被蕃族統治四千兩百年 "4,600년 역사에서 한족이 번족의 통치를 받은 것이 4,200년이라 하여 한족이 통치한 시간은 겨우 400년이다"라한 사실도 무시한 것이다.근원적으로 한을 종족이나 국가명이 아니다.한(漢)이란 글자가 옥편에는 국명(國名)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오로지 물이름(水名)으로 나와 있다.그래서 한은 한수(漢水)라 하는 것으로 한수는 바로 조선의 한강(漢江)을 말한다.그에 주장대로 중원왕조에는 화하왕조(華夏王朝)라 하는, 진(秦), 한(漢), 당(唐), 송(宋), 명(明)이며 정복왕조(征服王朝)는 요조(遼朝), 원조(元朝), 금조(金朝), 청조(清朝), 침투 왕조(滲透王朝)는 동한(東漢:25-220)말부터 서진(西秦:385-431)시기까지 흉노(匈奴), 갈(羯), 강(羌), 저(氐)와 선비 (鮮卑)등의 종족은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에 있는 요새로부터 이동하여 서진(西晉:265-316)말년 팔왕의 난(八王之亂:291-306)을 타고 중원에 국가와 조대(朝代)를 건국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많은 조대들은 실제로 스스로 도읍을 정하고 그들이 천자인 것처럼 하지만 신중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이라고 하는 천자가 따로 존재했다고 할 때 통치자는 바로 삼한연합체에서 지명한 조대이기 때문에 그곳에 천자라 할 수밖에 없다.이것은 명나라가 도읍을 둔 남경을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강남의 중심지 남경의 정치, 군사적 지위로 강남의 돈과 양식을 통제했다고 한다.때문에 도읍지는 모든 왕조가 그런 것처럼 중앙정부가 들어서는 곳이다.마땅히 조선천독(朝鮮天毒)이 중천축국(中天竺國)을 지배하는 것처럼 도읍지에 삼한연합체제가 존재했다고 해야 맞다.중원황조라고 하는 당(唐朝代)은 신라통치국체제이고 송(宋朝代)은 고려가 통치국이었으며 명(明朝代)은 만리지국 고려와 병립한 조선체제라고 할 때 모두 삼한통치지배체제임을 알 수가 있다.최두환선생의 글에서 보면 "한고조의 아들이 '영(盈)'이며 그가 한(漢)나라의 제2대 황제 '혜제(惠帝)'인데 이 혜제는 어려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고 그 어머니는 한고조 류방의 아내가 바로 '려후(呂后)'이다. 려후의 노력은 혜제를 조선왕(朝鮮王), 즉 그 원문은 "King of Tchaossien"으로 만들었다 하여 혜제가 조선왕이 되었으니[漢]=[朝鮮]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며 '漢'은 '漢朝鮮'이라 했다.즉 신중국 학자들이 중원왕조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한(漢)나라? 한조(漢朝代)의 혜제가 조선왕(朝鮮王)이 되고자 그의 어머니가 노력하여 결국 조선왕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다.일반적으로 중원왕조는 직접통치구역을 정하고 책봉(册封:봉작(封爵행위)을 하며, 굴레(羁縻) 즉 속박하여 제후국을 세우며, 토사(土司) 세습족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스리는 것으로써 변강(邊疆), 이것을 중화조공체계(中華朝貢體系)라 하여 통치한다고 되어 있다.때문에 19세기에 일본내에서 정조론(征朝論)이 생성되었을 때 스스로 조정(朝廷)을 공격하는 것이라 하여 그들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반대하였고 정조론 거론자체를 거북스러웠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그것은 조선(朝鮮)을 정벌한다는 주장자체가 정통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불경(不敬)스럽다는 이야기다.이런 사실을 철면피 친일파들의 굳어진 뇌를 열어 반드시 새겨넣어야 할 역사다.아다시피 1931년 국민당 소속 장려화(臧勵龢)등이 편찬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조대명(朝代名)이란 단어가 매우 많이 나타난다.위 신중국자료에 몽골황제가 스스로 후국이라 한 것처럼 현(縣)·군(郡)·부(府)가 나라[國]였고 제후의 나라 후국[侯國]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오히려 이것은 유럽의 도시국가체제를 설명하는 것이 되며 즉 만몽(滿蒙) 정복왕조는 그 지배자(统治者)자신을 중심으로 한 다원적 세계(多元世界)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어쨌던 조대(朝代)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정치체제에서 일원(一元)사회가 아니라 다원(多元)사회체제임을 알 수가 있고 이것은 바로 다인종, 다언어, 다종교, 다민족문화까지 포괄한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그러니 한반도 역사에서 우리나라를 배달민족이니 단일민족이니 하는 따위는 역사를 축소시키고 왜소하게 만들기 위한 수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삼한이 강한 것은 절대 단일, 일원, 단원적인 체제가 아닌 다원적체제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영토와 거대한 통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유럽역사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보지만 그들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봉건주(封建主)나 영주들이 모두 하나의 역사로 볼 수밖에 없는 것으로써 영지(領地)를 받은 귀족도 후작이라고 하지만 본 블로그 글 "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796 "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후국(侯國)이라 하는 것은 주군(主君)을 후(侯)라 칭(稱)하는 유럽, 즉 구라파의 작은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곳의 작위를 받는 귀족이라 하였으니 수많은 소국들은 하나의 체제 아래 공존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다.하여 삼한(三韓)의 한(韓)이 바로 만소봉(萬所封)이라는 사실과도 연관된다.한자(漢字) 한 자의 조대명(朝代名)은 중앙정부 조정(朝廷)이며 삼한천자가 대치(代置)한 또는 조치(朝置)한 조명(朝名)으로 풀이되어야 하며 곧 중원왕조, 침투왕조, 정복왕조라 칭하던 周, 殷, 商, 夏, 晉, 漢, 隋, 唐, 金, 遼, 元, 明, 淸 은 부족, 부락연맹의 명칭, 지금까지 창건자가 본래 사용하던 왕이 봉하여 내려 준 봉호(封號) 또는 작위(爵位), 창건자의 본래 정권통치하던 지역 명칭, 원래 종족(宗族)관계, 성(姓)과 본(本)이 같은 겨레붙이(같은 조상에서 태어난 자손), 그리고 좋은 속뜻을 담고 있거나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명칭등을 사용하게 했음도 알 수가 있다.조정(朝廷)은 바로 삼한천자가 통치하는 중앙정부이다.그렇다면 조선행정구조와 중앙정부행정구조는 어떻게 다른가.헌납(獻納)이란 관직은 조선시대 임금의 처사에 대해 충고하며 사회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고 건의하는 일을 맡은 관청의 관직으로 고려시대 헌납(獻納)과 같은데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소속으로 정5품 (正五品)관직임을 알 수가 있다.그런데 명대(明代)관직에서 육과급사중(六科給事中)이라는 것이 있어 도찰원(都察院)소속으로 조선과 마찬가지로 황제를 보좌하여 조칙을 처리하고 6과(科)사무를 관장하였는데 6과(科)를 나누고 각 과(科)에 도금사중(都給事中)한 명씩 두었고 품계가 정7품(正七品)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와 품계가 같다고 기록에 나타난다.이 급사중은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특권을 인정받아 실제적으로는 권한이 컸다고 알려진다.조선임금이나 황제를 가깝게 보좌하고 보필하는 직무가 같은 헌납과 육과도급사중에서 이상하게도 품계가 2품 차이가 난다.여기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중국이란 개념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본 블로그 글 "당리화(棠梨花)와 압록강 http://blog.daum.net/han0114/17049507 "에서 말하길 황제가 있는 명조(明朝)와는 달리 조선(朝鮮)에서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관직인 재상(宰相)을 두었는데 즉 상(相)은 정1품(正一品) 삼의정(三議政)이며, 재(宰)는 정3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이상으로서 마찬가지로 임금을 보필하여 국무를 처리하던 관직에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정작 한반도 역사에서 중국이라고 하는 명조가 오히려 조선보다 품계가 아래라는 사실을 지적했다.모든 행정적인 우위는 명이 아니라 조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삼한조선 황제를 섬긴다고 하여 그것을 사대주의라고 하면 한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명의 품계가 18위 품계인데 반해 조선시대 제24위의 품계(品階)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6품계가 더 많다.품계가 더 많다는 것은 권위가 작다고 할 수 없고 업무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만약 한반도 역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이 존재했다면 18품계에 비해 조선이 24위 품계를 가졌다는데 이의를 걸고 수정을 요구하지 않았겠는가.실제로 동월의 품계를 과(科)의 정7품(正七品)수장인 도급사중(都給事中)으로 보면 부사로 따라간 왕창(王敞)은 6부 중 공과(工科)의 종7품(從7品)인 우급사중(右給事中)신분임을 알 수 있어 비록 황제의 선생으로서 시강(侍講)한 사실이 있다지만 아무래도 조선 헌납에 비해 품계(品階)가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같은 임금과 황제를 보조하는 직책에서 이런 품계차이는 실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한어자료에도 과(科)의 정7품(正七品)이 6부의 문서를 검토했다고 하고 각 부의 정책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에 비해 하급 품계라는 것은 많은 것을 의심케 하는 사실이다.우리가 여기서 정리를 해야 하는 것은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중국(中國)은 바로 조정(朝廷)을 뜻하는 것으로써 허가업무를 처리하는 관직이 몰려 있거나 해외 모든 무역거래 사무를 총괄하는 곳이라고 풀어 볼 수 있다.그곳을 서양해양세력들은 무역거래의 편의성을 들어 중국(中國)이라 했을 것이 틀림없다.이에 더하여 역사에 능통한 모택동이 쓴 모전(毛傳)에도 "中國은 京師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오늘날 거대하게 커져버린 신중국 생성과는 대비되는 것이다.19세기초 잉글랜드(England)가 청정부(Qing Government)라고 호칭한 사실도 청조대 즉 조정(朝廷)를 뜻하며 정치적으로 중앙업무의 관계되는 현대 정부(government)개념 즉 행정관리 만다린(滿大人:मंत्री, mantri)들이 거주하는 지역개념으로 보아야 옳고 조(朝)라 불린 조선(朝鮮)품계 아래였던 것은 조선 행정업무체계 내에 속해 둔 것이 아닌가도 한다.6. 기록으로 본 만리지국의 조선강역 삼한역사기록을 먼저보자. 기언(記言) 제35권 외편 / 동사(東事) 4 高麗幷有三韓地。分爲關內,中原,河南,江南,嶺南,嶺東,山南,海陽,朔方,浿西十道。後改楊廣,慶尙,全羅,交州,西海,東界,北界。我太宗十三年。定京圻,慶尙,全羅,忠淸,江原,咸吉,平安,黃海八道。州,郡,縣因革不同。山川界別。邑里區分。百里不同俗。千里不同謠。南方多鳥。北方多獸。風氣使然也。山峽之俗。樸騃。機利之民儇急。習性然也。東方偏薄之氣。噪擾無常心。大體皆然。고려가 삼한 땅을 모두 차지하여 관내(關內), 중원(中原), 하남(河南), 강남(江南), 영남(嶺南), 영동(嶺東), 산남(山南), 해양(海陽), 삭방(朔方), 패서(浿西) 10개 도(道)로 나누었다가 뒤에 양광(楊廣), 경상(慶尙), 전라(全羅), 교주(交州), 서해(西海), 동계(東界), 북계(北界)로 고쳤으며, 우리 조선 태종 13년(1413)에 경기(京圻), 경상(慶尙), 전라(全羅), 충청(忠淸), 강원(江原), 함길(咸吉), 평안(平安), 황해(黃海) 8도(八道)로 정하였다. 주(州), 군(郡), 현(縣)의 변천하여 온 과정은 같지 않다. 특히 위 관내, 중원, 하남, 강남이라는 지명을 보면 현재 중국지명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조선시대부터 두었다고 하는 경기(京圻)이다.이 기(圻)는 땅의 경계, 지계(地界)라 하는 의미로 왕도 즉 경사가 있는 주위로 오백리 이내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이것은 고려시대때는 없는 행정관할 명칭임을 알 수가 있는데 즉 고황제(高皇帝) 즉 고려황제가 있는 곳을 구분했다고 볼 수 있다.이어보면 산천의 경계가 뚜렷하고 읍리구분이 되며, 백리마다 같은 풍속이 없고 천리마다 노래소리가 다르다. 남방에는 많은 새가 있으며 북방에는 많은 짐승이 있다. 예부터 전해 오는 관습이나 습관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산과 골짜기가 속되어 순박하고 어리석고 이기에 재빠른 사람은 습성이 그러하며 동방이 풍기가 얇고 박한 것은 소란스러워도 마음에 두지 않기에 대체로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위 기록은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시문집 기언집의 동사편인데 '高麗幷有三韓地' 고려가 삼한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는 기록에 나타나는 이야기다.특히 고려는 삼한(三韓)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을 전부 합쳐 통일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산천의 경계가 뚜렷하고 읍리구분이 되며, 백리(百里)마다 같은 풍속이 없고 천리(千里)마다 노래소리가 다르다고 한 것을 오늘날 한반도로 해석한다면 역사공부를 다시하는 것이 맞다.이것은 바로 하나의 민족이 거주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종족, 그리고 다문화적인 것으로써 언어와 종교가 다른 다원적 사회체제이었음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세계전체를 통일한 삼한의 통치국 고려(高麗)를 서양역사에서는 일찍부터 코리아(COREA)라고 하였던 것에서도 보면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 에서 밝혔듯이 7세기 독일계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시도르(Isidore:560-636)에 의해 저술된 어원백과사전(Ethymologiarum sive originum)에 갈리시아인(Galician)들이 켈트(Celts)혈통의 갈리아와 같은 흰 피부색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본 블로그 글 "충격적인 동방역사(東方歷史)에 들어가면서 http://blog.daum.net/han0114/17050378 "에서 주장하였듯이 갈리아(Gallia) 골(Gaul)은 바로 고구려, 고로(高盧)라 한 사실을 보면 알 수가 있다.백인이라고 알려진 갈리시안이나 포르투갈인이“CORREA”란 가문명(家門名)을 쓰면서까지 어쨌던 전통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생각할 때 중요한 이야기가 틀림없다.그리고 전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주(州), 군(郡), 현(縣)을 제후의 나라 후국[侯國]이라 하고 후국(侯國)이라 하는 것은 주군(主君)을 후(侯)라 칭(稱)하는 유럽, 즉 구라파의 작은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였다는 감안 할 때 주(州), 군(郡), 현(縣)의 변천하여 온 과정은 같지 않다는 것과 동일선상에 놓고 볼 이야기다.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Marco Polo,1254-1324)가 1271년부터 1295년까지 동방을 여행한 체험담을 수록했다는 동방견문록 [東方見聞錄]에서 이 "COREA" 이름이 발견된 것은 16세기초까지 스페인을 통일한 ‘카스티야 왕국’의 핵심부 즉 성지(城地)라는 뜻의 카스티야(Castilla)왕국(Kingdom of Castile:1065–1230)이 있었던 곳이라 하였다.때문에 서양해양역사에서도 주류였고 스페인 핵심역사의 카스티야역사에 "코레아(COREA)"가 차지하는 비중은 의미가 클 수밖에 없고 다문화적인 핵심적인 이야기가 의심을 가질 수없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없다.이 카스티야 자료에서 말하기를 “Corea”라는 성은 아주 오래 되었으며 이들이 신대륙에 건너간 것도 1534년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난 후이며 스페인의 ‘COREA’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본격적으로 정착한 시기는 19세기때라고 하지만 모든 자료에서 이미 그 이전부터 “COREA” 이름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북아메리카대륙 정착문제도 그 이전 시기에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영어자료에 보면 "CORIA 페밀리명"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서기1100년 이전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것이 가문(페밀리)이름으로의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기에 이루어졌으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시작한 것은 1500~1600년 사이로 알려지는 것으로 이 시기는 신대륙발견(1492~1504)과 연결되고 있으며 "CORIA 페밀리명"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처음 정착한 것도 이 시기라는 사실이다. 즉 고려의 유민들 속에는 여러 민족이 있었고 이들은 바다를 통해 이리저리로 이동이 가능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래 게시한 수산집(修山集)권14 의 동국여지잡기[東國輿地雜記]의 설명내용을 먼저 보자. 동국여지잡기[東國輿地雜記]는 우리의 강역에 대한 지리학적 변론(辯論)에 관한 글로, 고대 옛땅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희망이 담겨 있다. 삼한(三韓)의 지계(地界)를 획정하여 설명한 삼한지방변[三韓地方辨], 단군(檀君)이래의 옛 지명(地名)들을 현재의 위치로 비정하여 설명한 동방지명의변[東方地名之辨], 명(明)나라 때 조선(朝鮮)을 지방 삼천리(地方 三千里)가 아니라 육천리(六千里)라고 한 것이 옳다고 논변한 조선지방설[朝鮮地方說], 세조 때 명나라의 청병(請兵)에 응해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웠던 어유소(魚有沼)가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인 이곳을 우리나라에 떼어달라고 요청하지 못하였던 것을 애석해 하며 쓴 의여어유소장군서[擬與魚有沼將軍書], 세종 때 육진(六鎭)을 개척한 김종서(金宗瑞)가 두만강(頭滿江)이 아니라 선춘령(先春嶺)까지를 국경으로 삼지 못하였던 것을 애석해 하며 쓴 의여금공종서서[擬與金公宗瑞書]등과 권2에 서문(序文)이 실린 수경[水經]이다. 만필(漫筆)은 성몽정(成夢井),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왕수인(王守仁), 명(明) 태조(太祖), 명(明) 영종(英宗) 등에 대한 짤막한 인물평, 자경(自警)의 뜻이 담긴 글, 중국에의 불교(佛敎)유입을 논한 글 등이다. 또 정주(程朱)가 부식(扶植)시킨 정학(正學)을 육(陸)ㆍ왕(王)의 무리가 어지럽혔고 이에 경도되는 오당(吾黨)의 인사들이 있음을 애석해 한 글도 있어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인 시각을 살펴볼 수 있으니, 저자의 학문이 양주음왕(陽朱陰王)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일면으로도 보인다. 끝에 인시도심도(人心道心圖)와 도설(圖說)이 실려 있는데 도표를 위해 목판(木板)으로 인쇄되어 있다. 수산집(修山集)卷之十四 東國輿地雜記 1 三韓地方辨 2 東方地名之辨 3 朝鮮地方說 4 擬與魚有沼將軍書 5 擬與金公宗瑞書 6 擬丁卯後與執政書 7 水經 修山集卷之十四 / 東國輿地雜記(7항중)3항.朝鮮地方說中原廣袤。歷代史皆從邊角言之。如唐之東西以遼東安西言。南北以雲中交趾言。若從正東正西言。則當言沂海秦鳳。正南正北則當言幽州廣州。皆不滿萬里矣。我東地方正東正西。乃以寧海豐川。正北正南。乃以江界海南言。皆不滿三千里。皇朝萬曆年間十三省科道疏。言朝鮮大國。地方六千里。東人皆以爲華人未諳外國地界。然東人自不知而華人乃知之。何者。盖自義州楊下口。至江界府一千八十里。自江界至古茂昌四百五十里。至咸鏡道三水府二百二十五里。至甲山府六十里。自甲山府至虗項嶺二百九十里。虗項至茂山府二百二十里。茂山至富寧府七十五里。富寧至東海八十三里。統而言之則東西廣爲二千五百二十八里。穩城爲極北。自豆滿江至京城爲二千一百六里。海南爲極南。自南海上至京城爲一千七十三里。統而言之則南北袤爲三千一百七十九里。而我國廣袤合爲五千七百七里。擧大數則可以言六千里地方。而又况自海南越海九百里至濟州。州南至海又一百二十里。則並水陸路爲四千一百九十九里。所謂六千里又不足言矣。然則科道所論。果不爲無據。而向所謂東人自不知者。不其然乎。자 그럼 한번 세밀하게 들어가 보자.[東國輿地雜記:해석]중원은 넓디넓고 역대사 모두가 가장자리(귀퉁이) 변각(邊角)이라 하였다.이 귀퉁이라 한 묘사는 많은 혼란을 부추긴다.수학적으로 보면 가장자리(edge)는 둘레나 끝에 해당되는 부분, 어떤 사물의 바깥쪽 경계에 가까운 부분을 말한다고 되어 있고 2차원 도형의 둘레는 도형의 ‘가장자리’ 또는 경계의 길이를 말하고 보통 둘레는 각 변의 길이를 모두 더해서 계산하고 단순한 폐곡선(閉曲線)의 둘레는 그 길이로 측정한다라고 정리되어 있다.어찌되었거나 가장자리라 하는 변각(邊角)은 바깥쪽의 경계를 말하는 것인데 폐곡선을 그리면 처음과 끝이 열려있지 않고 맞닿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만약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라면 그 대륙 구석구석을 귀퉁이로 보고 폐곡선을 그리는 선의 길이 전체를 변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이 귀퉁이라는 변각이 말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대륙전체를 말하는 것이 된다.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긴가.본격적으로 조선지방이 육천리라는 사실을 알아볼 차례이다.[東國輿地雜記:해석]당(唐)과 같이 동서(東西)가 요동(遼東)에서 안서(安西)라 하였고 남북(南北)은 운중(雲中:평안북도 운산(雲山)의 옛 이름)과 교지(交趾:宋朝时始称安南)라 하였으며 만약 정동과 정서를 말한다면 곧 당연히 기해(沂海)와 태봉(秦鳳)이며 정남과 정북은 유주(幽州)와 광주(廣州)인데 모두 합해 만리(萬里)가 못된다고 하고 있다.여기서 만리(萬里)라 한다.한반도에서 무슨 놈의 만리란 말인가.북아메리카대륙 동서길이가 만리(萬里)이다.문제는 영토가 당(唐)과 같아 동서가 요동(遼東)에서 안서(安西)라 하였다.당(唐:618-907)은 전자에서 우리가 공부했듯이 삼한천자가 명명한 조정(중앙정부)을 대신한 조대명(朝代名)이라 한 사실이다.조대명의 당은 어떤체제의 중앙정부인가.바로 신라(新羅:Silla,BC57-AC935)이다.일본에서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한당(韓唐)이라 했다.한(韓)은 황(皇)인데, 황은 대(大)며, 대는 일(一)인데 우리가 대한이라 하는 것은 크고 또 크다는 의미이다.한(韓)을 만소봉(萬所封)이라 한 것은 만군데나 봉했다는 뜻이다. 봉은 흙을 수북히 모아 나무를 심은 모양이라 나무를 심어서 국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영토(領土)의 뜻이며 이는 천자가 사방오백리, 천리의 직할지 이외의 만군데(萬所)토지를 나누어주고 제후를 세우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그리고 한(韓)은 천지사방(天地四方)에 해가 비추이고 가죽(韋)옷을 입은 사람이 서있는 형상이라 했고 고대(古代)에 가죽옷을 입은 사람은 군인 이었거나 사냥에 종사하는 부류의 민족, 유목민의 후예일 것으로 생각했다.당(唐)은 길, 도로(道路), 통로(通路)를 말하고 크다, 넓다 의미도 있다.대한히 포괄적인 국명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지금의 동아시아대륙에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요동(遼東)사이에 거리가 얼마인가.위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충재어봐도 4,000km, 10,185.리(里)이다.당(唐)을 동아시아역사에서 수(隋:581-619)와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907-979)사이에 존재했던 중국의 왕조라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오래 존속한 신라와 고려(高麗:918-1392)는 그것의 잣대에서 빠진 것은 한반도 역사만들기에 일환임을 알 수가 있다.남북은 어떤가.위 지도를 보면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에서 북쪽 운중(雲中:평안북도 운산(雲山)의 옛 이름)과 남쪽의 교지(交趾:宋朝时始称安南)라 하는데 조선지방에서 남북은 운중과 교지라 했다.도대체 먼저 교지(交趾)가 어딘가.지금의 베트남 북부 통킹(Tonkin), 하노이 지방이며 옛날에는 남월(南越)이라 한 곳이라고 지정되어 있다.이곳은 프랑크족들의 본거지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해안지역이다.북부지역의 운중(雲中)은 평안도 운산(雲山)이라고도 하며 현재는 동아시아대륙 내몽골지역의 운중도호부(雲中都護府)로 지정되어 있다.지명의 운중이나 운산은 거대한 수원을 바탕으로 하는 늪지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구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지금의 내몽골지역은 그야말로 건조지대이며 안개가 피어 오를 정도의 수원지역이 전혀아니기 때문에 운중이나 운산 지명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하지만 지금 동아시아대륙역사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운중도호부와 남월 교지와의 거리가 약 2,600 km, 6,620.리(里)임을 알 수가 있다.이것은 조선지방이 육천리라 하는 것과 동일한 해석이다.위 게시한 변각(邊角)지도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영역으로 북쪽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 중남부 푸에블라 주 남서부의 마타모로스(Matamoros)까지의 길이 2,552 km와 거의 비슷한 거리임을 알 수가 있어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東國輿地雜記:해석]황조(皇朝) 만력년간(萬曆年間) 6과 급사(六科給事) 감찰어사가 소(疏)하길 조선은 대국(朝鮮大國)이며 지방 육천리(六千里)라 하였는데 동쪽사람(東人)들은 모든 화인(華人)들이 외국지계에 어둡다고 여겼으나 오히려 동쪽사람들이 모르고 화인(華人)들이 주장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인데 왜 그럴까? 되묻고 있다.즉 동쪽사람은 조선인을 말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그러나 만리인가 육천리인가 하는 물음이라면 솔직히 육천리라고 주장하는 화인(華人)보다 만약 만리라고 주장하는 동인(조선인)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친다.六科,中國古代朝廷的中央機構之一,即吏科、戶科、禮科、兵科、刑科與工科。在明朝,在體制上即為監察約制吏部、戶部、禮部、兵部、刑部、工部各部會的制衡機構。 위 문장에서도 보면 조대명(朝代名)인 명(明) 조정(朝廷)에서 6과(吏科, 戶科, 禮科, 兵科, 刑科與工科) 정칠품(正七品) 급사(給事)는 감찰업무를 관장하는 관리며 조선은 대국[皇朝萬曆年間十三省科道疏。言朝鮮大國]이라 하면서 지방 육천리라 하였다는 것은 바로 남북의 길이가 6000리(里)를 말하는 것이므로 어쨌던 명조관리가 조선지방의 거리를 6000리(里)라 정리한다는 것 자체만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상식(3000里)과 절대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런데 이 기록에서 동쪽사람의 동인(東人)은 누굴말하고 화인(華人)은 어떤 민족을 지칭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성된다.사실 당시에 살아보지 않았던 글쓴이 입장에서 여기저기 기록만을 근거로 이를 현실역사로 받아들이면서 구분하기란 여간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다.그래서 아래 게시한 김창집의 시귀에서 보면 동귀(東歸)라 하였는데 보통 동쪽으로 돌아간다고 해석이 되지만 이를 일반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임을 알기에 계주도중(薊州途中)이란 제목과 마찬가지로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계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즉 만리고려 나그네가 고향으로 간다고 한 사실에서 동쪽에 있는 중국의 수도 연경과 계주는 만리고려 소속의 것으로 인식되며 곧 중국인 즉 화인은 고려인이 아닌가 하는 사실까지 와 닿는다.우리가 흔히들 동국조선(東國朝鮮)이라 하는데 이는 또 거대한 만리조선을 축소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으로 조선은 동국으로 구도화했다는 의심 또한 많다.명조(明朝)의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睠彼東國 朝家外藩” 살펴보건데 저편 동국(東國)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라고 한 사실도 그렇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동국이란 표현도 그렇다.그렇지만 본 블로그 글 본 블로그 글 "만리조선(萬里朝鮮) 제비노정기와 제비(家燕 : Barn Swallow)http://blog.daum.net/han0114/17049629 "와 연(燕)나라와 제비(barn swallow)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0 "에서 연경(燕京)이 있다는 연(燕)나라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연경도 동쪽이며 조선도 동쪽이다.화인이라고 구분될 수 있는 구도가 없다.화인(華人)은 보통 한반도 역사나 동아시아역사에서 중국인(中國人), 또는 한인(漢人)이라고 풀이하는데 빛나다, 꽃피다, 아름답다, 화려하다 등의 의미말고 희다(白)와 흰가루(白粉)의 뜻이 있어 만약 사람을 말할 것 같으면 얼굴이 하얀, 백인(白人:Caucasian)을 나타내는 단어일 가능성도 있다.영조(英祖)시대 황조유민(皇朝遺民)이라 하여 화인록(華人錄)에 기록하여 우대한 사실과 고종 18년(1881)승정원일기에 보면 어머니가 풍산홍씨(게르만)인 우부승지 정원하(鄭元夏,1855-1925)가 이르기를 황성(皇城)에 와서 머무르는 양인, 왜인 그리고 화인과 뒤섞여 살고 있고 보이는 양관(洋館)이 곳곳에서 웅장하고 화려하여, 높은 누대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 형세를 알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동서양인, 왜인(서양해양세력), 화인(華人)과 구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1881년부터 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사실상 조선왕조실록정본(朝鮮王朝實錄正本)에서 빠진 고종실록(高宗實錄)은 철저하게 수정, 교정된 것으로 서양일본역사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 사실상 화인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동쪽사람을 동국조선인으로 한정하고 화인(華人)을 중국인이라고 하면 고려인은 갈 곳이 없어진다.고려는 이미 망한 나라고 하는 사람은 신중국 프레임에 사로잡혀 역사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다.고려인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는 이야기다.많은 것을 숨겨 찾아 볼 수 없는 처지의 한반도역사이지만 그래도 만리고려(萬里高麗) 혹은 만리조선(萬里朝鮮)이란 기록은 흔치 않게 가끔씩 다른 기록에 묻혀 나타난다.전자에 주지한 과 마찬가지로 본 블로그 글 "만리조선(萬里朝鮮) 제비노정기와 제비(家燕 : Barn Swallow) 과 연(燕)나라와 제비(barn swallow) "에서 북아메리카대륙에서만 서식하는 제비종"[2]Hirundo rustica erythrogaster"를 흥부가의 제비주인공으로 하여 월동지인 남아메리카대륙[winter:월동]에서 중앙아메리카를 지나 멕시코 거치고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정확하게 대입해 볼 수 있다라고 한 사실에서도 만리조선(萬里朝鮮)과 그 지역을 어디로 지정하는지도 찾아 볼 수 있었고 조선 숙종때의 학자인 노가재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시문 초고본 노가재집(老稼齋集) 연행훈지록(燕行塤篪錄)의 계주로 가는 도중(薊州途中)이라는 글 속에도 만리고려(萬里高麗)란 단어가 숨어 있지만 사실상 고려라고 하는 연경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도 알게 하는 것이다.이처럼 만리고려(萬里高麗)와 만리조선萬里朝鮮)의 만리(萬里)영토 공통분모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동아시아역사나 한반도역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거대한 삼한역사 사실이 꼭꼭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老稼齋集卷之五 / 燕行塤箎錄 薊州途中 萬里高麗客。東歸柳可鞭。燕鴻已滿野。薊樹自生烟。累却除詩卷。狂應費酒錢。山川與店舍。所過亦依然。위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연행훈지록(燕行塤箎錄)편 계주(薊州)로 가는 길에서 란 시귀를 풀어보면 만리고려(萬里高麗)나그네가 고향 산천을 찾아가니(東歸) 버드나무가 채찍질하고 연홍이 들판에 가득하다. 엉겅퀴나무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힘들여 쓴 시권(詩卷)을 주고 미친듯 술값을 지불하니 산천이 주막집이다. 이 지나침은 어떻게 할꼬.이 시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쪽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만리고려인은 대체로 어떤 규범에 구애됨이 없이 매우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연려실기술 제1권 /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개국 정도(開國定都) 임신년(1392) 가을 7월 16일 병신일에 태조가 송경(松京)에서 즉위하였다成石璘作詩送行曰 성석린(成石璘:1338-1423)이 시를 지어 송별하기를知子知臣睿鑑明 아들을 알아주고 신하를 알아주신 임금의 지감(知鑑)이 밝으시니畏天誠意爲生成 사대(事大)하는 정성은 우리 백성 위함이라 皆言萬里朝鮮慶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리 밖 조선의 경사가 在此炎霖跋涉行 더위 장마 무릅쓰는 이번 걸음에 있다 하네 또 위는 조선을 세우고 도시를 정한(開國定都)다는 시국인 1392년 가을 7월 16일에 고려말 신하 성석린(成石璘:1338-1423)이 시귀를 지어 보낸 내용을 보면 "소문에 만리조선에 경사가 났다 하여 더위와 장마를 무릅쓰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다" 라고 읊고 있다.물론 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내용과 조금 다르고 전해지는 의미 또한 다르지만 글쓴이가 보기엔 고려 신하 성석린은 진정하여 조선의 개국을 축하하고 성원을 하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그려볼 수가 있는데 조선이라고 하여 특별히 배척할 것이 없다는 정치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인데 이를 삼한인 입장에서 반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는 판단하기 따라 다른 것이다.실제로 고려가 한반도 역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공생공존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세조 1년 을해(1455)7월 5일(무인) 민심 수습ㆍ제도정비ㆍ강명ㆍ예법 등에 관한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문吾東方世居遼水之東, 號爲萬里之國。 三面阻海, 一面負山, 區域自分, 風氣亦殊。 檀君以來設官置州, 自爲聲敎, 前朝太祖作信書敎國人, 衣冠、言語悉遵本俗。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렀습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혀 있고, 일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區域)이 자연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풍토(風土)와 기후(氣候)도 역시 달라서 단군(檀君) 이래 관아(官衙)와 주군(州郡)을 설치하고 독자적인 성위(聲威)와 교화(敎化)를 펴 왔으며, 전조(前朝)의 태조(太祖)는 신서(信書)를 지어 국민을 가르쳤는데, 의관(衣冠)과 언어(言語)는 모두 본국의 풍속을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만리조선인 대국은 어떤 다문화적인 요소가 있었을까?세조 즉위년의 기록에도 풍토와 기후가 달라 의관과 언어는 모두 본국의 풍속을 준수하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의관은 관원이 입던 요새 말로 모자를 겸한 정장차림이다.이것은 한반도처럼 같은 종족, 같은 민족, 같은 습속을 가진 것이 아니라 종족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며 습속이나 풍속이 모두달라 언어 역시 다름을 알 수 있고 세조는 의관과 언어를 모두 본국 즉 조선의 풍속으로 준수하도록 통제하였다고 풀이 할 수가 있는 것이다.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한반도에는 본래부터 수많은 언어와 종족, 민족, 각 지방마다 다른 풍속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체계가 이루어졌어야 맞다.풍속과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한반도처럼 좁은 지역에 지방사투리가 많다고 하는 개념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물론 이러한 영토 조건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리지국(萬里之國)이어야 한다.과연 한반도 지형이 그러한가?그래서 아래 14가지의 지형척도가 나타나는 구들 지도를 게시하였는데 이를 기준으로 한반도 지형과 修山集卷之十四 /東國輿地雜記(7항중)3항.조선지방설(朝鮮地方說)기록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알아보자.[東國輿地雜記:해석] 기록에는 ①의주(義州) 양하구(楊下口)에서 강계부(江界府)까지 1,080리(里)라 하였는데 실제로 한반도 지형에서 이 지명간에 길이를 척도해보니 498리로 기록과 약 500리(里)가 부족하다. 즉 196km 가 모자라는 것이다.이 하나만의 사실만 보더라도 한반도 지형은 위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기록에는 ②강계에서 옛 무창(古茂昌)까지가 450리(里)이인데 반대로 837리(里)로 오히려 한반도 지형의 길이가 387리(里)가 더 많다.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기록에 강계에서 ③함경도 삼수부(三水府)까지가 225리(里)이라 하였는데 한반도 지형을 제어보니 318리(里)이다. 한반도 지형이 93리(里) 더 길어 역시 맞지 않는다. 기록에 강계에서④갑산부(甲山府)까지가 60리(里)이다. 그러나 한반도 지형상 거리는 374리이다. 길어도 314리(里)즉 123km 나 길다.기록에는 ⑤갑산부에서 허항령(虛項嶺)까지 290리(里)이다. 그러나 한반도 지형 길이는 119리(里)이다. 차이가 171리(里) 46km 거리가 부족하다.기록에는⑥허항(虗項)에서 무산부(茂山府)까지가 220리(里)이다.한반도지형상 거리는 307리이다. 오히려 한반도 지형길이가 87리(里), 34km가 더 길다. 기록에는 ⑦무산에서 부령부(富寧府)까지가 75리(里)이다. 한반도 지형은 115리이다. 역시 한반도 지형이 40리(里), 15km 더 길다.기록에는 ⑧부령에서 동해(東海)까지가 83리(里)이다. 반면 한반도 지형상 62리(里)가 되어 21리(里)가 부족하다. 맞지 않는다. 기록에는 ⑨총 즉 동서의 넓이(廣爲)는 2,528리(里), 993km이다. 광무(廣袤)는 넓이, 면적이라고 하지만 기록에는 계산상 길이(里)가 맞다.한반도 지형에서 동서길이가 가장 길다고 하는 북부지역을 제어보니 1,336리, 즉 525km 이다. 그래도 기록에서 말한 동서의 합계길이가 자그마치 468km가 부족하다.이 거리는 현재 서울과 부산간 거리(약400km)보다 더 긴 거리이다.그러니 이 기록만 가지고 보더라도 한반도 지형은 아닌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 동서길이가 적잖게 넓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미국 서북부 시카코(Chicago)가 기준이 되는 일리노이(Illinois)와 인디아나(Indiana)의 주 경계선 러셀빌(Russellville)과 메릴랜드의 주도 아나폴리스(Annapolis)간의 길이를 구글조 재어보면 959.41km (2,443리)이다. 즉 기록에서 나타나는 동서길이 2,528리(里), 993km 보다 부족한 거리다.미국동부지역 동서 간의 거리와 맞먹는 것임을 알수가 있다.기록에서 ⑩온성(穩城)은 극북(極北)이 되고 두만강(豆滿江)부터 경성(京城)까지가 2,106리(里)라 하였지만 한반도 지형으로 쟁어보면 1670리이다. 부족한 길이가 436(里), 171km이다.기록에는 ⑪해남(海南)이 극남(極南)이 되며, 남해상(南海) 위(上)에서 경성(京城)까지가 1,073리(里),421km 라 하였는데 한반도 지형을 재어보면 332.91km, 848 리(里)이다. 약 88km 가 부족하다.그래서 ⑩+⑪ 하니 기록에서는 ⑫총 남북의 넓이는 3,179리(里), 1,248 km 이라 하고 있고 실제로 한반도 지형에서 재어보니 1131km, 2, 882리(里)이다. 결국 차이 나는 길이는 297(里), 117km 생겨 어쨌거나 한반도 지형이 부족함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조선의 지방을 넓이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은 그냥 광무(廣袤)라고만 하였지 보(步) 또는 평(坪)이라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수치가 전부 리(里)로 통합되어 있어 수치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렵다.而我國廣袤合爲五千七百七里。擧大數則可以言六千里地方。⑬우리나라의 넓이(廣袤)는 합하여 5,707리(里)가 되니 대강 6천리(六千里)정도의 지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하였는데 이것에 모순은 동서길이와 남북길이를 그냥 곱하지도 않고 합쳐버린 것이다.계산상 모순이 아닐 수 없다.전자에서 주지했듯이 광무의 본래 의미는 넓이의 뜻이지만 이 기록에서 넓이 계산상 모순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넓이가 아니라 길이로 이해해야 맞다.때문에 이 기록에서 서두에 말한 것처럼 如唐之東西以遼東安西言。南北以雲中交趾言。당과 같아 안서와 요동이 동서가 되어야 하고 남북의 운중과 교지가 되어야 하는 것은 言朝鮮大國。地方六千里。조선이 대국이며 운중과 교지간의 길이가 육천리이므로 이것을 조선지방설로 가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결국 최종 아래 상황과 관계없이 결론을 내리면 동서길이가 만리(萬里)이고 남북길이가 육천리(六千里)되는 강역을 적어도 명(明) 조정(朝廷)때까지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그리고 여기서 끝이지 않고 기록은 바다 넘어까지 기술하고 있는데 ⑭해남(海南)에서 바다를 건너(越海) 900리(里)에 제주(濟州)가 있다 하였다. 900리가 얼마나 먼 거리인가.353km 이다.현재 한반도 지형상 거리를 재어보면 306 리(里) 즉 3분지 1 밖에 되지 않는다.이것은 어마무시한 차이가 틀림없다.어떻게 반만년의 역사에서 단절의 역사가 한번도 없었던 국가에서 이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단적으로 자연지형적인 변형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괴리 차이가 생긴 것일까?주남(州南)에서 바다까지 또한 120리(里)이니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아울러 4, 199리(里)이니 소위 6천리(六千里)는 또한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6과 급사(六科給事) 감찰어사가 말한 것은 그렇듯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니니 소위 동쪽사람이 몰랐던 것이다. 그렇지않는가 하고 마지막으로 묻고 있지만 전혀 아닐 올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조선의 지방이 6000리(里)이고 여기에 제주까지 900리(里)를 보태고 제주에서 다시 바다까지 길이 120리를 보태면 약 7000리(里) 즉 2,749km 가 된다.7. 나가기들어가기 부터 삼한체제를 이끌어온 신라, 고려, 조선은 과연 세계통치국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위해 무섭게 달려왔다.결과는 실로 놀라운 사실로 나타난다.실제로 세계통치국이 되려면 역사가 정통성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원이 풍부한 영토가 넓고 거대해야 하다는 것은 첫째조건일 것이다.그곳은 유대계 더치인 오페르트(Opperta)가 말한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위 제일 먼저 게시한 북아메리카대륙 변각의 지도를 보면 동서(東西)의 길이 즉 대서양해안과 태평양해안간의 거리가 4,105km, 10,452리(里)가 되고 있고 놀라운 사실을 밝혀주는 수산집(修山集) 동국여지잡기(東國輿地雜記)(7항중) 조선지방설(朝鮮地方說)에서 보면 동서길이 안서(安西)와 요동(遼東)간의 거리 4,057km, 10,331리(里)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남북(南北)거리 또한 조선지방설에서 운중도호부와 남월 교지와의 거리가 약 2,600 km, 6,620 리(里)라 하여 실제로 북아메리카대륙인 미국영역, 북쪽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 중남부 푸에블라 주 남서부의 마타모로스(Matamoros)까지의 길이 2,552 km와 거의 비슷한 거리임을 알 수가 있어 조선지방설에서 말하고 있는 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영토임을 알 수가 있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본 블로그에서 사실상 이런 해답을 얻기위해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이렇듯 생각지도 않는 기록에서 이와같은 엄청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이 아닐 수 없다.특히 수산지 동국여지잡기 조선지방설에서 이야기 하는 운중(雲中)도호부 또는 평안도 운산(雲山)의 옛 지명이라고 하는 곳은 안개같은 구름이 늘 덮혀져 있는 늪지대로 넓이규모로 따진다면 한반도가 220,748 km² 이니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 대초원웅덩이늪지대(Prairie Pothole Region)이라 하는 곳의 넓이가 715,000 km²이다.한반도의 거의 3배가 넘는다.이곳은 캐나다 3개주 서스캐처원(Saskatchewan), 매니토바(Manitoba), 앨버타(Alberta)주이고 미국 5개주는 미네소타(Minnesota), 아이오와(Iowa), 노스사우스 다코타(North and South Dakota), 몬태나(Montana)주가 포함되고 대초원 및 중초원의 깊은 웅덩이로 알려진 수천개의 얕은 습지를 포함한 지역으로 1만년전 끝난 위스콘신 빙하(Wisconsin glaciation)활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있다.물론 이같은 조건의 늪지대가 한반도 평안도 운중(雲中), 운산(雲山)의 옛 지명에 있을리가 없다.우리 조선의 영토가 이렇듯 어마어마하다.조선의 강역이 이것 뿐만아니다.예종실록 6권, 예종 1년(1469) 6월 29일臣竊惟本國, 表裏山河, 幅員幾於萬里, 戶數百萬, 兵一百萬, 堯與竝立, 周不爲臣, 元魏通好, 馮燕納款, 隋六師大敗, 而唐賓之, 遼隻輪不返, 而宋事之, 金稱父母之鄕, 元爲甥舅之國。 我大明高皇帝亦謂三韓, 非下下之國。여기서는 만리지국이라 하였지만 본 블로그 글 "산양호(山羊湖)는 고트레이크(goat lake)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1 "에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1469) 6월 29일 긴담장(長墻)을 세우는 논의 속에 세조가 ‘나의 제갈량’이라고 했던 조선초기 문신 양성지(梁誠之:1415-1482)의 상소문을 보면 본국 즉 삼한(三韓)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영토가 기만리(幾於萬里)이며 군세가 일백만(1,000,000)이란 대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기만리(幾萬里)라 하는 것은 적어도 '一(일)만리(萬里)'는 넘는 것이다.이 '기만리'라는 것은 곽박이 조선천독(朝鮮天毒)은 5 천축국을 거느리고 중천축국(中天竺國)이 되어 지방삼만리(地方三萬里)를 통치하였다는 사실과도 같다.이 얼마나 거대한 나라인가.계속풀어보면 요(堯)와 병립하고, 주(周)에 신하가 되지 않았으며 원(元)과 위(魏)와 서로 왕래하면 친분을 쌓았으며 풍연(馮燕) 또는 풍이(馮夷) 하백(河伯)에게 정성을 바쳤고 수(隋)의 육사(六師)를 괴멸하였고 당(唐)을 물리쳤고 거란(契丹)족의 요(遼:907-1125)는 우리 고려에게 대패하여 처참할 지경이었으며 송(宋)은 우릴 섬겼고 금(金)은 우리나라를 부모의 고향이라고 하였고 원(元)과 백숙(伯叔)형과 아우지 간이 되었다는 것은 천자대국을 백구(伯舅)라고 높여 불렀고 작은 나라는 숙구(叔舅)라고 불렀는데 본래 큰 나라에 딸을 주는 것이 통례인 것을 감안하면 딸을 받은 사위 고려가 대국임은 틀림없다.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소제 "조대(朝代)와 조정(朝廷)편"에서 당시 제후들이 주천자(周天子)를 명목상 공주(共主) 즉 주변의 나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자로 받들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어 주천자(周天子:BC1046-BC256)가 통치자였다는 사실과 삼한은 그럼에도 신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동등한 입장임을 말하고 있다.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한반도 역사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인 것이 틀림없다.벗어던질 수만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우선은 근원적으로 조선역사를 보는 시각적인 문제를 먼저 개선하고 우리스스로 올바른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그리고 그러한 모든 역사사실을 우리는 함껏 품을 수 있어야 한다.오늘날 철면피 친일파들이 양산된 것도 엄밀하게 따진다면 우리 두의 역사인식이 무지한 탓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그리고 여지까지 바른 역사를 몰랐다는 자성도 있어야 마땅하다.조선은 분명 한반도에 갇혀있었던 작은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만리지국이었으며 과거 삼한역사로 치면 3만리 강역을 가지고 있던 나라이다.풍부한 자원과 넓은 토지에 사시사철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과 풍요를 만끽할 수 있는 그야말로 화려금수강산 바로 그것이다.이런 환경조건이라면 조선이 세계통치국이었다고 어찌 믿지 않겠는가.아메리카대륙의 오늘날 미국 영토 전역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사실을 우리는 이 글에서 두 눈으로 명확하게 목격했고 또한 동국여지잡기(東國輿地雜記)(7항중) 조선지방설(朝鮮地方說)에서 밝혀 알 수 있었듯이 기록과 한반도 지형간의 거리까지 낱낱이 재어보고 대조해 본 결과, 한반도 지형과는 역사기록이 너무나도 딴판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비로서 한반도가 우리의 본거지가 아님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라도 엄청난 역사자산을 취득한 것이 된다.이 얼마나 경탄스러운 이야긴가.이 귀중한 기록이 비록 만력연간(萬曆年間:1567-1620) 즉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고 반란수괴를 효수하면서 반란을 깨끗하게 평정하고 난 후라고 판단되지만 그 때 분명 한반도가 아니었음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그 이후 조선에서는 1623년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 즉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4년뒤 1627년에는 여진족의 반란인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이은 1636년 병자노란(丙子虜亂)까지 발생하였고 중원왕조는 결국 여진족에게 점령되면서 고려황제 명 조대는 1644년에 망한다고 나타난다. 이때까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 명고려와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결국 신라후손이라고 하는 만주족에 의해 명고려가 망했지만 신라후손들은 조선을 어버이 나라라고 하여 극진하게 대우를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이를 다시 유럽사에 대입하면 곧 위그노전쟁(1562-1598)과 더치독립전쟁(1568-1648,) 그리고 30년전쟁(1618-1648)이라고 하는 개신교 종교전쟁 즉 구신종교간의 충돌이 자그마치 83년이란 기간을 소비했다.이시기에 역사전체로 보았을 때 종교전쟁으로 거의 80년을 넘게 소비했다는 것은 동아시아역사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인다.진실로 조선의 역사, 즉 세계삼한역사를 보려면 동양사(東洋史)와 서양사(西洋史)가 합체된 세계사(世界史:world history)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삼한이 본래 3만리지국, 고려, 조선이 만리지국으로 존재할 때 세계사건들은 모두 하나의 사건이며 하나의 배경이고 하나의 역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어진다.조선말기에 특히 고종실록에는 조선(朝鮮)에서 서양세력들을 양이(洋夷)라고 하였지만 사실상 대양(大洋)의 양(洋)을 사용하는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이라 할 때 양이를 구분한다는 것도 어렵다.양이는 동양에서는 없었을까?그렇다면 양이(洋夷)를 서양세력이라고 했던 순간부터 채울 수 없는 역사 공간적 모순이 생김을 알 수가 있다.서양세력이나 동양세력은 모두가 하나의 체제속에 존재한 역사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말한바와 같다.그러나 동양은 빼버리고 서양해양세력을 양이라하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현재 우리가 혼란을 느끼고 있는 문제는 본래 하나의 역사에서 분열로 제 각기 성질이 다르게 나누어졌고 역사 본질을 잃어버리고 기본이 되는 역사 실체가 사라진 상태에서 역사조각들을 정확하게 퍼즐로 맞출 수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동양이라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종구분에서 아시아인계만을 별도로 떼어서 그것만을 동양이라 하고 있다는 것도 모순이라는 것이다.즉 동양은 아시아라는 등식이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마찬가지로 서양유럽인들도 유럽대륙에 누군가에 의해 그대로 밀어넣은 것 같다.이러한 역사구도에서 따져볼 때 동서양 구분없이 애초부터 아시아계 몽골리안 만이 아닌 다른 타 인종 특히 미국계백인(white), 아프리카흑인, 유럽인 코카소이드(Caucasian), 검은피부를 가진 아리안계까지도 서로 부딪치며 다중공동체 생활을 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인도아대륙 남부 지역 검은 피부의 드라비다어족(Dravidian languages)에 속하는 7400만여명이 사용하는 타밀족(Tamil)의 언어가 한글 음과 거의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산스크리티어에 영향을 받았다던지 아니면 중기타밀어가 어쩌면 조선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다중공동체에서 서로 부딪히며 생활한 배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이야기다.아무리 맞춰보아도 한반도와 인도아대륙 남동부에 치우친 타밀족의 공통점을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그럼에도 한글음과 똑 같다는 것은 한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즉 검은피부라 할지라도 아시안계우리나라 황인종과 같은 다중공동체라는 것은 조선이 다원적 사회였기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조선이 위대하다는 것은 다원적인사회체제를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근 500년을 넘게 통치력을 발휘하며 문화부흥과 선진문명을 이어왔다는 사실이다.그러한 역사환경이라면 과연 유럽 즉 서양인들만이 독단적으로 서구화(西歐化:Westernization=Europeanization)를 이루었다고 당연시하는 것도 사실상 역사 흐름상 모순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만약 조선역사가 서구화의 발판이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나라 사람 누가 믿을 것인가.듣기는 좋은 소리이지만 공감을 얻기엔 아직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이제 마무리 짓자.조선이 세계통치국이었다는 사실에서 여러가지 할 이야기가 많지만 우선적으로 유럽르네상스운동과 종교개혁운동, 각종 시민운동, 그리고 우리가 잘아는 프랑스혁명, 그리고 산업혁명까지 굴직굴직한 사건들이 모두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면 어떻겠는가.그렇다면 서구화가 유럽인들의 독점물이라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인가.어느날 갑자기 하나의 체제를 지탱하던 이러한 주요 인적자원과 그것을 리더하던 주체들은 설령 애국심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작아질대로 작아진, 좁아질대로 좁아진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고 하여 힘이 빠진 조선이 이를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처지를 생각하게 한다.조선을 어느덧 대신하여 태동한 새로운 통치체제 속에 스스로 안전하게 녹아들 수밖에 없었고 전향과 귀화라는 새로운 페러다임 속에서 기존 조선인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아닌가.그것은 근세기에 집중적으로 발칸분열이 이루어지던 19세기말엽과 20세기초에 그리고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1차세계대전이 사람들을 황폐화시키며 전향을 촉진시켰을 것이고 거대한 전쟁속에서 공포속에 안정을 바라는 심리와 새롭게 정의된 국가의 개념들 사이에서 일소 갈등을 하였겠지만 하나의 체제 정체성이 무너져 버린 상태에서 그것을 고집할 조선인이 얼마나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어쨌던 한 때 세계를 통치하던 조선이라 할지라도 자연섭리를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며 그렇듯 거대한 국가는 다원적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했으므로 조선은 분명 거대한 통치국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듯 혼란기에 역사가 다른 민족과 다양한 인종, 그리고 다종교가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며 배타적이었다면 기존 환경에서 그들은 최후까지 얼마나 융합할 수 있었을 것인가.본 블로그 글 "동조선과 서조선 그리고 광동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8 "에서 밝혀본 것은 바로 조선은 단일사회체제가 아니라 다원적체제라고 하였고 일제어용학자들이 조선인들에게 정상적인 붉은 피가 아닌 특이한 검푸른 피가 흘러 식민지시대를 촉발하게 한 원인으로 유전적으로 분열과, 시기심, 질투하는 심리가 강하다고 한 것은 우리민족 한반도 구성원을 욕보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지금도 열도인과 친일파들은 우리 한반도 사람들을 은근히 그런식으로 비하를 한다.그래서 그와같은 심리적인 현상은 한반도에 갇혀 단일사회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조선인이 아니라 다원적체제에서 다문화적인 환경에 있었던 만리지국 조선인일때 각 인종간, 각 종교간, 민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를때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 했다.때문에 다원적사회를 통치한다는 것은 그렇듯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선은 근 500년을 그렇게 통치했다.반면 연방(聯邦:Union)이나 연합(聯合:Unite), 합중국(合衆國)이 주는 의미는 대체로 다원(多元:multiple), 다종(多種), 다양(多樣)한 개체들이 소속된 국가주체구성에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국가체제는 제어하기는 힘들어도 합체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오늘날 초강대국을 자랑하는 미국을 보면 알 수가 있다.수많은 이절적인 점들이 서로 충돌하고 반목하며 갈등하게 만들었고 종국에 가서는 분열하고 말았다.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세계통치국인 조선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서구문화가 아니고 조선체제에서 벌어진 사건들인 만큼 통치자가 가질 수 있는 고통은 우리 상상이상이었다고 생각 할 수가 있을 것이다.조선은 그냥 사라진게 아니다.세계역사 근대사에서 발생한 모든 힘든 사건들을 한데 모아 그것이 하나의 체제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생각해보라.어느 국가체제가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때문에 통치철학은 동양문화의 핵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반드시 통치자는 정통성과 함께 도덕적인 통치자에 의해 배타적이 아니어야 하며 내부적으로 포용, 배려하는 정책과 반목세력들을 평등, 공평하게 하면서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인심을 달래고 그래도 반하는 세력에겐 참혹하고 엄격한 제재(制裁)가 필요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본 결과는 실제로 놀라운 것이다.북아메리카대륙 미국영토를 기반으로 하던 만리지국 조선은 과연 어떤 식으로 500년이란 긴 세월동안통치했고 다원적체제를 어떻게 융합이 가능하게 했을까?궁금해지지 않는가.바로 단군께서 일찍이 교화하신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다스려 깨우치게 하는 재세이화(在世理化), 통치자는 하늘의 본성을 깨우쳐 밝게하고자 하는 성통광명(性通光明)의 정신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만리조선(萬里朝鮮)" rel="tag" target="_blank">만리조선(萬里朝鮮)</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세계통치국" rel="tag" target="_blank">세계통치국</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천독(天毒)" rel="tag" target="_blank">천독(天毒)</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신독(身毒)" rel="tag" target="_blank">신독(身毒)</a>,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천축(天竺)" rel="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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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bourgeois)와 조선의 요민(饒民)
*********************부르주아(bourgeois)와 조선의 요민(饒民) 글쓴이:한부울1. 들어가며2. 부르주아(bourgeois)의 실체3. 요민(饒民) 요호(饒戶)의 의미4. 부르주아와 요민과의 비교5. 나오며 1. 들어가며(한반도 역사로 인한 당치도 않는 굴종의 역사) 현재 열도에 존재하는 가짜 일본 정치세력인 아베(安倍晋三:1954-)를 중심으로 한 모리배(謀利輩)에 의해 2019.07.01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 핵심소재 3개 품목(레지스트, 에칭가스, 플로오린 플리이미드)에 대한 한국수출제재와 2019.08.01 에는 화이트 리스트(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시키는 연이은 공격이 일방적으로 계속되고 있다.물론 이러한 공격의 이유로 지난 2018.10.30 대한민국 대법원의 과거 일제시대 때 구 일본제철에서 강제 노역한 여씨와 신씨가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이춘식(98세)과 고인이 된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수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이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한 불만을 이와 같은 국가 대 국가 경제재제로 응답한 것이다.소위 일제강점기에 징용, 징병, 정신대 등으로 강제동원된 피해자 수는 국내외를 포함해 최대 780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753만 노동자들은 국민징용, 관 알선, 도내 동원의 방법으로 탄광, 군수공장 등에 끌려가 혹사를 당했지만 아예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물론 국제법으로도 이 사건을 국제노동기구(ILO)조약에 정하는 강제노동, 1926년 유엔의 노예조약에 기술된 노예제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ILO가 1999년 3월 펴낸 전문가위원회 보고서는 일본이 극도의 처참한 환경에서 일을 시키려고 한국과 중국의 노동자를 무더기 동원해 자국 산업시설에서 일을 시킨 것은 노동협약위반(violation of the Convention)이며 강제노동에 해당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일제 강점기 징용은 강제 노동을 규제하는 ILO의 29호 협약에 위반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그러나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청구권협정 2조'에 “양국 및 국민간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내용을 근거로 강제징용 문제도 해결됐다고 우겼지만 대한민국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징용 피해배상을 거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피해자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은 협정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판단을 하였다.마찬가지로 일본법원도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남아있다는 입장을 인정하고 있으며 1965년 당시 일본 외무성 내부문서에는 “청구권협정 2조는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이라면서도 개인청구권과는 무관하다는 내용이 남겨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그리고 노무현 정부시절인 2005년 6월 20일 한일정상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또한 “청구권협정은 채권채무관계 해결을 위한 것이며,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은 남아있다"는 사실도 우리정부가 확인한 바다.그럼에도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는 신일본제철에서 강제 노역한 고인이 된 여씨와 신씨가 낸 1997년 12월24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 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며 2001년 3월27일 1심, 2002년 11월19일 오사카고등재판소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고,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대로 확정했다.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50년을 장기집권한 자민당 일당주의와 일인 아베총리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은 언론과 삼권분립을 장악한 상태이고 반대목소리가 없으며 일본 법원은 아베정부의 지시대로 후한무치하게 패소판결로 뭉개버린 결과이다.역사적으로 과거 일본이 전범국으로써 가해자가 틀림없고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한마디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오만불손한 자세에서 나온 폭거(暴擧)라 할 수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국제적인 지탄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선적인 판단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이 독선적인 판단에는 우익정치모리배들에 의한 군구주의(軍國主義)부활이 있다.일본 현행헌법을 보면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하고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치 않는다."라고 되어 있고 1981년 헌법 제9조(日本国憲法第9条)가 허용하는 자위권 행사는 최소한의 범위에 국한되어야 하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그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인정되지 않는다고 유권 해석한 바 있다.하지만 일본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들어 2014년 7월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라에 무력공격이 발생해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에게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 최소한의 실력행사는 헌법상 허용된다"는 새 헌법 해석을 도입하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발판을 마련한 바가 있다. 물론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다.하여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규정한 안보법제를 2015년 9월 19일 새벽 참의원 본회의에서 야당의 항의를 무시한체 강압적인 방법에 의해 통과시켜 사실상 헌법 9조(条)를 무력화하였고 한반도 유사시에 자국 국민들을 보호 명목으로 자위대를 파견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이에 만족하지 않는 아베는 현재 평화헌법 헌번제9조(日本国憲法第9条)을 개헌하여 완전한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로 만들어 언제든지 한반도를 침략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해야 맞다.아마도 제일 먼저 공격목표가 독도(獨島)가 될 가능성이 높다.현재 열도 일본인들은 과거 그들의 전쟁범죄역사가 다른 이웃 국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에 대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한결같은 좀비스러움이 많다.특히 한발 더 나아가 현 자민당 아베정치모리배들은 전부터 한국정부를 위협하고 겁박하면서 내정간섭까지 하였고 그들의 의도는 과거 식민지역사에서처럼 한반도전체를 지배하려했다는 사실이 외교문서로 밝혀진 마당이다.노골적으로 침략의도를 내보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그들은 우리와의 관계를 선린이라 하지만 국가 대 국가가 취할 정치적으로도 동등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종속관계를 요구하고 그것을 원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이와같은 일련의 사실에서 보면 그들은 전쟁을 치루지 못해 안달하는 전쟁광으로 비춰진다.그러나 그들은 많이 착각하고 있다.그런다고 하여 쉽사리 그들이 취하고자 하는 음흉한 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겠지만 현재 열도를 지배하고 있는 모리배들과 추종자들은 마치 2차대전을 포함한 과거 역사가 그들의 역사인 줄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꿈엔들 어찌 알겠는가.그들은 기껏해야 20세기초까지 진짜 서양일본귀족들을 호위하던 무사계급의 자손들 또는 고용된 용병의 자손들이거나 서양귀족들 하인계급에서 퍼져 나온 식솔, 그리고 동양계 농노(農奴)후예들임을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다.열도일본인들이 왜 불쌍한가.역사를 바르게 기르쳐 줄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그들은 오래전부터 서양일본인들에 의해 언제든지 팔아버릴 수 있는 노예신분이었던 사실을 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왜노국[倭奴國:Wa (Japan)]왕 수승(帥升)이 후한(後漢)의 안제(安帝,94-125,재위:106-125)에게 노예 160명을 바친 기록이 있고 왜왕 비미호(卑彌呼,?-247.248)가 239년 위(魏)의 명제(明帝:226-239)에게 사절을 보내 남녀 노예를 바쳤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등 적어도 야요이시대(弥生時代:300-600)부터 노예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국시대(戦国時代)당시 농민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 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많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 노예상인들은 물론 서양일본인이다.그러니 15세기부터 서양일본인들은 동양계농노(農奴)일본인들을 아프리카원주민 노예 팔듯이 노예거래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현재 본 블로그 글 "자포니즘(Japonism)의 해괴한 변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9 "에 게시한 것으로써 이탈리아 태생의 영국사진작가 펠릭스 비토(Felix Beato)가 1860년경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훈도시만 차고 거의 벌거벗은 모습의 일본인들이다.당시 일본의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노들은 노예처럼 의복등에서 '노예상징'을 강요받는 등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고 여러자료에 나타난다.즉 옷을 입고 싶어도 입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횡포를 부리고 있는 아베에게 일본인 전체가 아무말도 못하고 따르는 것은 힘센 무사계급, 다이묘들에게 굴복하는 일본인들의 노예근성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말하고 싶다.그들의 역사가 그러하니 스스로 서양일본인냥 착각하고 있으면 곤란하다.이런 엉터리 역사를 그들의 역사인 것처럼 추종하면서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도 안타깝지만 결국 자신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며 이제 그들은 낯선 해괴한 변종(變種)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그들의 미래가 참으로 참담하기가 이를 때 없다고 하는 것이다.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그들 최고위층 고급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계층에서는 어느정도 알 수 있을 수도 있다.그러나 그들의 생성비밀은 미국CIA 비빌보고서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따지고 보면 현재 열도왜구들에게 제대로 된 올바른 역사란 것이 없다.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중히 여길 수도 없고 역사는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뜯어 고치는 것으로 잘못인식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열등의식에서도 과거 서양해양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생성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생태적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한마디로 그들은 역사적으로 감히 우리를 멸시하거나 핍박하여 수모를 줄 처지가 아니란 말이다. 2. 부르주아(bourgeois)의 실체하잘 것 없는 열도왜구들 때문에 본질에서 이야기가 벗어났다. 근세기에 시민(市民:citizen)이라는 의미는 어떤 식을 발전했을까?왜 시민운동이 서양역사만 있어야 했을까?이런 몇가지의 의문에서 부터 출발해보자.조선사회에서도 행정구역으로 부(府:city), 목(牧큰 고을), 군(郡:county), 현(縣)가 있었고 무역에 종사하며 재력과 무력을 모은 세력 호족(豪族)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서양사에서 말하는 시민운동은 1880년까지 제정체제로써 세계통치국이었던 조선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까?조선사회는 시민운동이라는 것을 몰랐을까?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 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근대사는 영국시민전쟁(English Civil War:1642–1651),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9)과 미국독립혁명(1775-1783)을 하나같이 시민혁명(市民革命)이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들은 체제 내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 사건들이다.왜냐하면 서구라고 하여 농본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하층계급인 농민을 부추긴 세력들은 호족이나 자본력이 있는 상업주의자인데 이들의 개인적 자유, 상업적 전망, 재산 소유에 대한 봉건적인 탄압과 왕실의 침해를 스스로 없애려는 부르주아(자본가)의 욕구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말하고 19세기에 부르주아 계급은 자유주의를 예언했고, 자신과 하층사회계급에 대한 정치적권리, 종교적권리, 시민적자유를 얻으려고 했고 결국 얻었다고 말해 서구역사에서는 이들을 완성한 주류로 평가하고 있다. 때문에 부르주아(bourgeois)계급은 서구사회에서 진보적인 정치적인 세력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체제에서는 이러한 진보세력이 없었다는 이야긴가?또한 서양세력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봉건제 또는 절대군주제를 타도하고 법률상 자유평등한 시민계급이 지배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정치적, 사회적 변혁에 중시세력이라고 하였다. 시민혁명은 시민이 중심이 되어, 특권을 가진 왕이나 귀족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정치제도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를 없애고, 모든 사람이 주인이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민주정치를 확립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하층계급이 95%였던 것을 감안하면 또 다른 제3의 귀족세력이 등장하는 것이며 그들이 또 다른 피지배민을 억압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고 사회적인 변혁은 언제나 또 다른 계급사회를 낳는다는 사회 모순적 상황도 이야기하는 것이다.때문에 시민혁명은 부르주아계급생성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계급을 등장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가 무엇인가.중세 유럽 도시에서의 중산계급의 시민을 말한다고 하였고 근대사회에서의 재산이 많은 지주, 자본가계급에 속하는 사람으로 `유산계급(有産階級)'이라 하였다.그러니 농민운동의 바탕인 소작농, 소상공인이나, 양민, 농노들은 여기에 포함될 수가 없다.이들을 하층계급이라 하는 것으로 95% 를 차지한다.그렇지만 부르주아들은 모든 사람이 주인이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신념을 바탕으로한 민주정치 확립의 목적이라 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서양인들이 즐겨사용하는 시민(市民:citizen)이라는 용어에는 중산층이라 의미가 있고 도시의 의미도 있으며 부르주아지는 프랑스어로 부르"bourg" 즉 성(城)을 뜻하는 것에서 유래한 어원으로써 부(富)를 축적한 사람이 가장 안전하고 윤택한 성내(城內)에 생활한다는 의미와 그렇지 못한 계급은 위험하고 척박한 성외에서 살았으므로 생긴 명칭이라 한 것에서 이미 차별적인 의미가 존재하고 있으며 산업이 발달함과 함께 성(城)이 도시(都市)로 발전했다고 하는 사실과 동시에 그 성에 사는 사람을 부르주아라 하였으니 부르주아는 시민(市民)이라는 자본계급에 대한 원초적인 모순이 그 자체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또 한편으론 부르주아(bourgeois)라는 현대 프랑스어는 부르그 burg(場이 서는 읍)가 유래한 구 프랑스어 burgeis(성곽 도시)에서 구 프랑크족의 버그(burg:읍).우리말 음(音)과 비슷한 업(urb)에서 유래했으며, 다른 유럽어에서의 어원이 프랑스어 부르주아(burgeis:walled city), 근대영어 버지스(burgess) 즉 시민, 공민, 자치시선출대의원, 하원의원 등으로 변천되었다고 한다.즉 지방 몰락한 중앙귀족, 상업자본재력을 가진세력, 군진(軍鎭)세력, 지방토착촌주(村主)등으로부터 시작된 어원임도 알 수가 있다.그것은 때때로 지식계급 지식인들"intelligentsia"과 동의어가 되며 문자 그대로, 고대 프랑스어로 부르주아(burgeis, borgjois)는 "소도시주민"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그러나 근대에 생성된 영어는 이를'중산층'이라 하고 '물질만능주의적인' 또는 '속물적인' 것으로 해석하며 '자본주의적'이라 표현한다.어쨌던 부르주아에는 애초부터 모든 사람이 아니고 특정한 시민(市民:citizen)이라는 기준에는 윤택하게 성(城)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 또는 부(富)를 축적한 사람, 중산층(中産層:middle class)상위에 위치한 사람으로 묵언적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다.시민이라는 단어 속에는 모든 사람을 범위 안에 둘 수밖에 없는 소작농(小作農)을 포함한 농민(農民), 소상공인(小商工人)을 포함한 노동자(勞動者:labor), 그리고 부자유민인 농노(農奴:serf), 무직(無職), 무능력자(無能力者)까지라고 하겠지만 그것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물질만능시대에 생성된 불편한사회조직으로써 상위계급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물론 이것 때문에 부르주아란 계급주의에서 고대 로마시대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자유민을 뜻했던 라틴어 'proletari'에서 유래한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무산계급)란 단어가 생성되었고 자본을 소유하지 않아 자신만의 노동(勞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권익(權益)을 보호하고자 했던 이론가 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의 자본론(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conomie:1867)이 이렇게 태동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칼 마르크스는 임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노동(勞動)의 산물을 자본가들이 도용(盜用)한다 하였고 노동력을 몰래 가져 쓰는 계급을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 하였다.부르주아지가 시민이라는 사실과 가난한 자유민들의 노동(勞動)을 이용하여 노동자가 생산한 몫(잉여가치)인 부(富)를 축적한다는 계급층을 시민이라고 한다는 사실자체가 얼마나 불편한 진실인가를 알 게 하는 것이다.같은 시민(市民:citizen)이라면서도 현격한 차이의 계층을 만든 것이다.시민혁명이후 사람들은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에 읍(urb)으로 도시로 몰려들었으나 기다리고 있는 건 혹독한 착취와 가난뿐이었고 이로 인해 읍(urb)에서, 도시빈민(都市貧民:urban poverty)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탄생했으며, 이는 훗날 사회주의 혁명의 불쏘시개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때문에 적어도 18세기 말엽 프랑스란 가칭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며 교역이 이루어지는 시(市)에는 일반적으로 자본을 소유하지 않아 자신의 노동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통칭되지만 결코 이들을 시민이라고 하지 않았고 차별했다는 사실도 암묵적으로도 알 수가 있다.이러한 서구역사의 잘 짜여진 흐름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과연 프랑스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체제였는가 하는 점이다.물론아니다.근대사에서 프랑스라 한 것은 부흥한 상업도시를 말하는 것이다.이것은 엄밀하게 따진다면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라 하여 구체제, 낡은 제도라 부르고 군주(君主)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자기 편익을 도모하는 성직자, 귀족들의 계급을 타파하겠다고 한 혁명에서 역사적으로 포괄적이지 못하면서 그들만의 혁명이라 한 것도 잘못된 이야기다.어째서 파리에만 이러한 시민운동이 있어야만 했을까?이러한 사회적인 문제점은 수많은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탈 제정주의의 대표적인 헤게모니 성격을 읽을 수가 있다.이것은 아래 이야기 하겠지만 조선시대 정조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을 읽을 수가 있었다.혁명이후 새로운 사회계급이 된 부르주아지들은 그들 스스로가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자유민들을 오히려 더 부려먹고 잉여자본을 생성케 하려고 혈안이 되어 구체제보다 더 냉정하고 냉혹한 자본계급을 만들어 노동을 착취하고 그 위에 군림했다고 하는 사실들이 정확하게 확인된다.어쩌면 현대 거대 상업주의 세력들을 탄생시킨 매개체역할을 한 것이 프랑스혁명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본 블로그 글 "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미시시피강상류http://blog.daum.net/han0114/17050776 "에서 말하길 프랑스혁명에 의한 체제변화는 1.85%의 봉건제의 왕족과 성직자에서 2.15%의 권력이 당시 부(富)를 축적한 상공업층 중산계급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였고 프랑스 혁명을 시민혁명이라고 하지만 시민은 농민이나 무산계급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다만 이들은 부르주아세력들로부터 동원되었거나 군중심리에 의해 발효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봉건제의 지주가 아니라 자본체제의 자본주를 택했다는 것이며 왕권에서 자본권으로 권력교체시대를 맞이 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역시 프랑스혁명은 억압되었던 무산계급층이 아니라 유대인에게는 사적인 해방이며 기회라 했다.이런 예만 보더라도 프랑스혁명은 포괄적인 역사가 아닌 자본주의를 생성시켰다는 하나의 상징성의 역사이다.그러나 저러나 95%는 제3, 제4신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부르주아를 신권력, 신계급이라 칭 한 것이다.18세기 중엽부터 100년간 산업혁명(1750–1850년)기간동안 부르주아계급의 큰 확대는 기업 활동과 경제 기능에 의해 그 자체 계층적인 계급화를 촉진시켰고 금융업자, 산업가의 오트 부르주아 계급(haute bourgeoisie)과 페티트 부르주아 계급(petite bourgeoisie), 모옌 부르주아(moyenne bourgeoisie)계급, 거대한 부르주아(grande bourgeoisie)계급으로 분리 되었다.특히 중간계급 또는 중산층이라고도 불리는 도시의 소생산자, 소상인, 농촌의 소농민, 무역업자와 화이트칼라노동자, 학자, 예술가, 의사, 변호사 등의 자유업, 또는 관리의 상층 부분이나 기업의 관리 직종의 사람들, 나아가 학생 등도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작은 부르주아(petite bourgeoisie)계급에 속한다고 분류된다.자본가 계급으로의 입신출세의 소망을 가지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파시즘(fascism)에 매혹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 계급과 협동하는 방향을 취하고, 노농동맹, 노동자와의 광범한 통일전선을 성립시키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부르주아 계급은 11세기에 중부유럽과 서부유럽의 버그(burg:소도시, 읍)가 상업에 전념하는 도시로 발전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현상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부상했고 이러한 도시 확장들은 상거래(商去來)의 독점(獨占)을 목적으로 하여 자주적(自主的)으로 조직한 패쇄적인 맹약단체(盟約團體)인 길드(Guild)에 대한 보호자 조직의 출현으로 인해 경제적 집중이 가능했고 이 길드는 개인 사업가(장공, 장인, 상인 등)가 이전에 합의했던 것보다 더 많은 임대료를 요구하는 임대 추구 봉건 지주(封建地主)들과 충돌하면서 생겨났다고 되어 있다. 이것들이 부르주아계급을 비호하는 정치적 세력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이 경우 중세기 말(1500년)까지 서유럽의 초기 국가 군주들의 잔혹함에 따라 부르주아계급은 사리사욕에 따라 행동하였고, 봉건영주들의 탐욕으로 인한 법적, 재정적 무질서에 맞서 국왕이나 여왕을 정치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시대조류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에 엥글라란드(Englaland: land of the Angles)와 더치(Dutch)의 부르주아(bourgeois)계급은 봉건질서를 무너뜨린 재정적인, 즉 정치적 세력이 되었고, 경제력은 정치의 영역에서 군사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수단과 방법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데 위그노전쟁과도 연결된다.물론 위그노들이 전부 칼뱅주의를 따르고 이를 개신교혁명과 합치되는 것이라 하여 이를 종교전쟁 한 부분으로 보지만 부르주아들의 준동이라고 해야 맞다.위그노 전쟁(French Wars of Religion:1562-1598)을 보면 개신교는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인 루터주의에 빠진 부르주아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고 이를 프랑스종교전쟁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다.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의 임진왜란(壬辰倭亂)과도 크게 겹침을 알 수가 있다.전자에도 언급한 이야기지만 프랑스는 조선시대의 남부에 존재하던 거대한 도시로 풀어보면 이야기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이미 이때부터 위그노가 가는 곳은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이 글을 다음 기회에 구체적으로 올리려 한다.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호이트(오뜨)부르주아(haute bourgeoisie)인데 이는 상층 부르주아지라고 하며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적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계급, 그 구성원들이 소유하는 대량의 생산적 자본과 그들의 기업에서 고용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에 의해서 소부르조아지(petite bourgeoisie)와 완전하게 구분되는 계급이다.이러한 세력들이 북아메리카대륙의 도금시대(鍍金 時代:Gilded Age:1865-1893)을 장악했다.이세력들은 인위적이든 아니든 1873년 세계공황과 1893년 세계공황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있고 이러한 혼란속에서 성장을 중단시켜서 사회상·정치상 격변을 유발시키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다. 급성장한 북아메리카 자본주의는 대조선이 해체되면서 체제간섭이 느슨해진 1880년대 독점자본의 형성이 진행되어 공업생산은 1894년에 세계 최고수준까지 발전했다고 알져지지만 각종 기업담합과 특히 트러스트가 성행했으며 대자본가가 행정부와 결탁하여 부패와 정치개입이 지속되는 등 독점자본의 폐해가 드러났던 시대라 하고 있다.이것은 조선이 근대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 역사모멘트의 중요한 부분이다.우리는 이러한 역사사실에서 할말이 없을 수가 없다.도금시대는 독점자본가들이 체제 자체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상황을 연출한 측면에서 알 수 있는데 한말 동양척식회사가 취한 것처럼 독점자본가들이 운영하는 부동산을 위시한 각종 난립된 회사에 의해 엄청난 황실재정손실을 안겼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예를 들어 조선의 황실 자산과 채권들을 그 유명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Oriental Development Company)에 의해 점유되거나 강탈된 사실은 너무나도 가슴아픈 이야기이자만 이 회사는 융희(隆煕) 2년(1908)에 일본이 한국의 경제를 독점하고 착취하기 위하여 서울에 설립하였던 국책 회사(國策會社)로써 명목은 한국산업자본의 조장과 개발을 위하여 설립한다고 하였으나, 토지매수에 힘을 써서 소작인(小作人)에게 농지를 빌려 주고 5할이 넘는 소작료(小作料)를 징수하는 한편, 영세농민에게 빌려 준 곡물에 대해서는 추수 때에 2할 이상의 고리(高利)를 현물로 받아들여 착취하였다고 되어 있다.이것은 허가낸 삼정문란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의 고리대금 수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1908년 이후부터 이러했다는 것은 그 이전부터 이런폭리가 자행되었다는 것이며 원금상황을 요구하거나 이자독촉으로 조정을 압박했을 것이며 1881년에 이러한 서양해양세력들의 압박으로 인해 조선황실과 정부가 모든 권익을 포기한 상태에서 해체되었다고 보지만 황실은 그대로 존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그 이후 조선황실에서는 이러한 독점자본가들의 손에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피하려 했을 것이 틀림없다.예를 들어 고종이 1903∼1906년 독일은행에 맡긴 비자금이 지금까지 알려진 50여만 마르크보다 두 배 많은 100만 마르크(재정경제부 추정 현재 가치 500억 원)는 1908년 일제가 전액 빼앗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요민(饒民) 요호(饒戶)의 의미 이제 서구쪽에서 넘어와 조선관점에서 이 부르주아를 보자.시민(市民)이라는 단어를 한자(漢字)로 풀어 보면 시(市)는 저자, 시가, 장사, 팔다 라는 의미가 있고 훈(訓)과 음(音)이 슬갑 불(市)이라고 하지만 저자 시(市)라고 하며 '조옥구 한자연구소장'의 글을 보면 추위를 막기 위해 바지 위에다 무릎까지 내려오게 껴입는 옷을 '슬갑'이라 하는데 '불'은 글자 모양이 땅 아래로 꽂인 모습에서 이를 '뿌리'로 본 이유라 하였고 이 '뿌리'는 '불'을 의미한다고 하였다.시(市)는 '저자' 옛 것의 시장을 말함인데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반찬거리를 사고팔기 위하여 열리는 작은 규모의 시장이며, 시원(始原)에는 나무를 베어낸 벌판에 깃대를 꽂아서 교역의 장소임을 표시했고 옛날 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곳에 시장이 들어선다 하였다.영국(英國)에서는 시(市)를 성당(聖堂)이 있는 영국의 모든 마을을 뜻한다(any town in the UK that has a cathedral)하였고 영국(British)왕으로부터 이 칭호를 받은 큰 도시: 보통 주교(bishop)가 있는 곳이라 하였다.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많은 집, 상점, 기업 등이 있으며, 마을보다 큰 곳을 말한다고 하였고 근세기에 와서는 영국에서는 은행과 국제증권거래소와 같은 영국의 주요금융기관을 포함한 런던의 비즈니스 및 금융 중심지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때문에 런던은 근세기에 만들어진 도시일 가능성도 높다."City comes from the Latin civitatem, "citizenship," or "community of citizens," from the root civis, "citizen" from Old French cité, from Latin cīvitās citizenship, state, from cīvis citizen 도시는 라틴어 시바테움인 "시민권" 혹은 "시민 공동체" 'civis'의 어원에서 유래한다.The word city and the related civilization come, via Old French, from the Latin root civitas, originally meaning citizenship or community member and eventually coming to correspond with urbs, meaning city in a more physical sense. The Roman civitas was closely linked with the Greek "polis"—another common root appearing in English words such as metropolis.도시(都市:city)라는 단어와 관련 문명은, 올드 프랑스어를 통해, 라틴어 뿌리 시비타(civitas), 공동체 의식을 가진시민, 공동체 구성원; 공동체 의식에서 왔는데, 원래 시민권이나 공동체 구성원을 의미하고 결국 업, 읍(urbs:시가지, 도회지, 도시)에 일치하게 되고, 이는 좀 더 신체적감각적인 의미에서 도시를 의미한다고 말하며 로마의 시비타(civitas)들은 그리스어 "polis"와 가깝게 연관되어 있었다 하여 즉, 대도시(metropolis)와 같은 영어단어에 나타나는 또 다른 흔한 뿌리라고 하고 있다.특히 an ancient Greek city-state; polis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업(urb)은 우리나라 말인 '읍'으로 들리고 이것을 영어사전에 보면 '읍내 읍, 도시, 도회지'등으로 해석하고 있다.(in Britain) a large town that has received this title from the Crown: usually the seat of a bishop또한 위 시티에서 생성된 "citizen" 의 의미가 서양에서 국가의 정책이나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국민이라 하였고 근대 서양 사회에서 봉건시대의 군주나 귀족계급에 대신하여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장악한 상공업 계층이라는 설명도 있다.그렇다면 요호(饒戶), 요민(饒民)이란 서양사의 시민(市民)이란 뜻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서양의 시민(市民:citizen)이라는 기준에는 윤택하게 성(城)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 또는 부(富)를 축적한 사람, 중산층(中産層:middle class)상위에 위치한 사람으로 묵언적으로 구분한다 하였다.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1818년(순조 18년)에 지방관을 비롯한 관리의 올바른 마음가짐 및 몸가짐에 대해 기록한 행정지침서로써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 16~29에 수록된 책,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요호(饒戶)란 자기 집에 저축한 곡식이 8식구가 먹고서도 남음이 있는 자라고 정리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행정적인 용어이다.목민관(牧民官)은 침기표(砧基表:전무(田畝)와 기지(基址)를 등재한 문부)를 쥐고서 백성들의 빈부(貧富)를 살피고, 또 공의(公議)를 채택하여 먼저 요호를 3등(상중하)으로 나눈다 하였으며 목민심서 진황(賑荒) 6조 에 보면 요호(饒戶)에는 저마다 형제가 있고 인척(姻戚)이 있고 이웃 동네가 있고 총호(塚戶:묘 수호하는 자)가 있으나, 마침 그 성품이 인색하여 주휼(賙恤)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관에서 이를 권면해서 곡식을 내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권분이라 한다 했다. 재물을 많이 가진다는 인색하다 했다.그 재물을 강제로 빼앗아 초월(楚越)처럼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어찌 사람이 즐겨 할 바이겠는가. 옛날 권분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으니, 명분을 돌아보고 의리를 생각하면 반드시 옛날의 도리에 합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권분(勸分)이란 흉년에 관내의 부잣집에 전곡(錢穀)의 의연(義捐)이나 대여(貸與)를 권유함을 말하며 흉년에 부자에게 양곡의 의연이나 대여를 권유하여 기민을 구제하는 일인데, 곡식 바치는 자에게 상으로 관작을 주는 일, 요호(饒戶)를 뽑아서 양곡을 바치게 하는 일 등을 고금의 사례를 들어 논술하고, 자기의 방안도 덧붙여 제시하고 있다.진대(賑貸)란 가령 권분(勸分)한 곡식 1천 석을 요호(饒戶)에게서 받아 가난한 집에 나누어 주었다가 추수 때에 이르러서, 도로 가난한 집에서 거두어 요호에 갚는 것이라 하였다. 목민심서 진황(賑荒) 6조 / 제3조 규모(規模)에는 이런 글도 있다.요호(饒戶)는 부요(富饒)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니 가장 부요한 자가 상등이 되고, 기구(飢口)는 주리는 것을 급하게 여기니 가장 굶주리는 자가 상등이 된다.다산필담(茶山筆談)에 이렇게 말하였다.가난한 선비와 궁한 백성으로 온 집안이 모두 어렵고 위급하면 한 집에 열 식구를 모두 기록한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고, 부촌(富村)과 요호(饒戶)는 온 집안이 근심이 없으면 한 동리 백 식구를 몽땅 뺀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목민관(牧民官)이 된 자는 평일에 먼저 침기표(砧基表)를 살펴서 가산의 허실을 두루 알아두고, 또 올해의 모내고 김맨 문부를 정밀히 만들어 농사 성적의 우열(優劣)을 밝게 알면, 어느 향(鄕), 어느 동리는 넉넉하니 진휼(賑恤) 즉 도와주지지 않아도 될 것이요, 어느 집안 어느 호(戶)는 외로워서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환하게 알게 될 것이다. 부자는 몇 동리를 진휼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고 빈민은 무더기로 많이 모여 진휼을 받아도 관리들이 편벽(偏僻) 즉 한쪽으로 치우치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린 사람이 진휼을 받게 하면 진정(賑政) 굶주린자를 먹이는 정책이 여기에서 공평해질 것이다. 매양 기호(飢戶), 기민(飢民)을 뽑는 날을 당하면 마땅히 먼저 이 뜻을 밝히고 형식적으로 하기를 마음으로 삼지 말아야 할 것이다.”먹을 것이 부족해서 굶는 집, 기호(飢戶)를 가리는 법은 목민관(牧民官)이 요호(饒戶)에 점을 찍는 날에 제향(諸鄕) 사람들을 잠자코 살펴서 이들과 더불어 일을 의논하고, 백성들의 사정을 물어서 이로써 그 인품의 높낮음을 시험한다. 매양 1향(鄕)의 4인 중에 마음속으로 2인을 고르되, 상족(上族)에서 1인, 중족(中族)에서 1인을 골라 성명과 거주지를 알아 둔다.이에 다른 날에 비밀히 상족에게 심복(心腹)을 보내어 기호(飢戶)를 뽑도록 부탁하여, 그 본향(本鄕) 안 여러 동리의 굶는사람, 기구(飢口)를 비밀히 뽑아 적되 본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그 향(鄕) 사람이 지정하지 못하게 한 다음, 아무 집 몇 식구는 마땅히 상등에 들어가서 진희(賑餼)군색한 백성을 구휼를 받아야 하고, 아무 집 몇 식구는 마땅히 중등에 들어가서 꾸어주는 진대(賑貸)를 받아야 하고, 아무 집 몇 식구는 마땅히 하등에 들어가서 구호 양곡을 싼값으로 내놓아 곤궁한 백성을 돕는 구호양곡, 진조(賑糶)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적도록 하고, 또 상등을 세 등급으로 세밀히 나누어서 비밀히 성책(成册)하여 심복인이 가지러 오기를 기다리게 한다.여기서 보면 기호를 심각한 정도로 상등 진희(賑餼), 중등 진대(賑貸), 하등 진조(賑糶) 삼등분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그러니 위 목민심서를 바탕으로 보면 요호(饒戶)란 자기 집에 저축한 곡식이 8식구가 먹고서도 남음이 있는 자이고 요민(饒民)은 부르주아 같은 부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살기가 넉넉한 백성. 요부(饒富)넉넉한 부자, 물자가 풍부하고 많이 소유한 자를 일컫음을 알 수가 있다.이것이 잠재적 부르주아이다. 목민심서에 나타나는 요호(饒戶)와 요민(饒民)이란 풀이에서 요(饒)의 한자를 보면 밥식변(飠(=食)먹다, 음식)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堯(요)가 합하여 이루어져 의미가 넉넉하다, 기름지다, 두텁다, 용서하다(容恕), 너그럽다 등으로 나타난다.대체로 넉넉하다는 말 이외 풍부하다는 것과 너그러워 덮을 정도로 뜻이 나타난다.한자에는 인색하고 이기적인 것이 없다.그리고 음(音)을 나타내는 요(堯)의 한자는 흙토(土)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垚(요)가 합하여 이루어지며 요(垚)는 흙을 수북하게 쌓는 모양이고, 올(兀)도 또한 높고 위가 평평(平平)한 모양을, 합하여 매우 높음을 뜻하는 지위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부자가 옛부터 높은 지위에 암묵적으로 위치하고 있음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요(饒)는 매우 존경을 받을 정도로 지위가 높다는 의미가 되어 베풀어 넉넉해서 존경을 받고 풍족해서 모든 것을 덮을 정도로 너그럽다고 해석도 가능하다.어디에도 착취한 의미는 찾을 수가 없다.때문에 조선의 요호나 요민이라 하면 부자(富者)정도에서 벗어나 베풀어 존경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용어풀이에서 알 수가 있다.이것은 유대인과 다르다는 의미일 것이다.목민심서 이외 우리나라 사서(史書)에서 요호(饒戶)나 요민(饒民)이란 용어를 찾아 보니 1935년에 이씨왕가(李氏王家)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의 주관으로 오다 쇼고(小田省吾)에 의해 만들어진 고종실록(高宗實錄)말고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어디에도 이 용어를 찾을 수가 없다.참으로 이상한 일이다.어쨌서 그럴까?그러나 대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나 일성록[日省錄]에는 꽤 많이 발견된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조선개국 초부터의 일기가 기록되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고 하고 현존하는 것은 1623년(인조 1)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270여 년간의 일기 뿐이며 일성록[日省錄]은 1760년(영조 36) 1월부터 1910년(융희 4) 8월까지 151년간의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는 일기 형식의 책이라 하였다.여기서 잠시 생각해보면 어째서 승전원일기는 인조반정이후에 것만 모은 것일까?또 하나는 왜 일성록은 1760년부터 기록되었을까?프랑스와 일부러 엮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처럼 보이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 누벨프랑스라 하여 식민지제국을 세우고 있었는데 7년전쟁으로 인하여 스페인과 영국에게 영토를 잃고 만다.그 시기가 1760년이며 1763년에 파리조약을 맺는다.그런데 이 요호와 요민의 용어가 정조 4년(1780)부터 정조 23년(1799)까지 집중되어 나타나는 일성록[日省錄]과 고종 5년(1868)에서 고종 29년(1892)까지 이 용어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다 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성록에 나타나는 시기가 정조 4년(1780)부터 정조 23년(1799)까지인데 이 시기는 다 아는바와 같이 그 유명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9)기간이다.본 블로그 글 "다시보는 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7 "에서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와 루이-페르디낭(Dauphin de France:1729-1765)가 동일인물이며 루이16세와 대립을 한 퐁파두르 백작 부인(Madame de Pompadour:1721-1764)과 정순왕후(貞純王后:1745-1805)가 그렇고 결론적으로 정조(正祖,1752년-1800,재위:1776-1800)와 루이16세가 정확하게 겹친다 하였다.그렇다면 정조시대 즉 프랑스의 루이16세 시대에서 프랑스혁명이 발생한 1789-1799 동안에 조선사회에서 요민이나 요호가 어떤 역할을 하였고 어떤 식의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일성록[日省錄:1760-1910]에서 프랑스혁명기간 동안의 기록을 살펴본다. 일성록[日省錄][1]정조 4년 경자(1780)6월 15일咸陽郡守 李殷昌。檢糴差任。縱吏徵賂。宜寧縣監 洪宣輔。饒戶多歛。猾吏是聽。咸昌縣監 兪漢鼎。方治亂繩。奈非利器。義興縣監 洪樂莘。官貿甚煩。倉屬多怨。禮安縣監 尹欽烈。倉任乖例。燔役奪農。泗川縣監 沈公協。旣懦且蠱。滯訴長奸。召村察訪 沈謹之。刑或違法。幷下。경상 감사 조시준(趙時俊)의 계본(啓本)에,함양 군수(咸陽郡守) 이은창(李殷昌)은, 적정(糴政)을 점검하고 향임을 차출하는 데 있어서 아전이 뇌물을 거두도록 놓아두었습니다. 의령 현감(宜寧縣監) 홍선보(洪宣輔)는, 요호(饒戶)에서 많이 거둬들이고 교활한 아전들의 말만을 듣고 있습니다. 함창 현감(咸昌縣監) 유한정(兪漢鼎)은, 바야흐로 엉망진창으로 어지러운 곳을 다스리는 데에 어찌 능력도 없는 자를 쓰겠습니까. 의흥 현감(義興縣監) 홍낙신(洪樂莘)은, 관무(官貿)가 매우 번거로워서 창속(倉屬)의 원성을 많이 사고 있습니다. 예안 현감(禮安縣監) 윤흠렬(尹欽烈)은, 창임(倉任)이 규례를 어겼으며 번조(燔造)하는 일로 농사철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사천 현감(泗川縣監) 심공협(沈公協)은, 이미 나약한 데다가 미혹되기까지 하였고 사송(訴訟)을 지체하여 간사함을 키웠습니다. 소촌 찰방(召村察訪) 심근지(沈謹之)는, 형벌이 더러 법을 어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상은 모두 하입니다.” [풀이][1]1780년 프랑스혁명 발생하기 9년전의 조선사회의 이야기다.경상감사 조시준(趙時俊)의 계본(啓本)에,경상도 햠양군수 이은창은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꾸어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서 받아들이는 관무인 적정(糴政)을 점검하고 하급관리를 임명하는 일에서 이서(吏胥)라고도 불리는 아전(衙前)을 시켜 뇌물을 거두도록 방치하였다는 이야기와 경상도 의령현감 홍선보는 요호(饒戶)에서 뇌물을 많이 거둬들이면서 이에 대한 귀를 막고 있었고 경상도 예안현감 윤흠렬은 창임(倉任)이 규례를 어기고 질그릇과 사기그릇 등을 구워서 만드는 일로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였으며 경상도 사천(泗川)현감 심공협은 민사소송을 지체하고 관이 책임을 회피하려 하였으며 역민관리, 역마보급, 사신접대 등 여러 임무를 총괄하는 경상도 소촌도(召村道) 찰방(察訪)심근지는 형벌을 법대로 하지 않는다고 서계(書啓)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지방현감들과 아전들의 뿌리깊은 부패는 대중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만들었고 행적의 불편, 국법을 마음대로 형법에 적용하는 등 아래부터의 불만과 원성이 들끓게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진휼(賑恤)을 위한 행정인 진정(賑政)에서 현감 수령들이 자비곡(自備穀), 사비곡(私備穀), 사진곡(私賑穀)의 수효를 늘리는데 이용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요호(饒戶)와 요민(饒民)에게 기근이나 흉년에 대처하기 위하여, 수령이 스스로 준비한 곡식이라 하거나 지방의 수령(守令)이 비상시에 쓰기 위하여, 준비한 곡식이라고 하지만 진휼이나 궁휼에 쓰지 않고 사재로 비축하거나 착복한 형태로 나타나 부패스러움에 원성을 샀다고 하는 기록들이다. [2]정조 17년 계축(1793)7월 5일의금부가 아뢰길陞戶抄上也軍保中擇其饒民八名成給勿侵完文捧錢四百五十兩依例資送自是邑規而近年以來抄戶之時京司及巡營申飭至爲嚴截屢定屢退生梗種種故資裝八名外別抄九名以備三三望逢點於羅州巡到所擇其中一入直爲上送其餘八名則卽地罷歸승호를 뽑아 올리는 것은, 군보(軍保)가운데 요민(饒民) 8명을 가려서 물침완문(勿侵完文)을 만들어 주고 450냥을 받아서 규례에 따라 자송(資送)하는 것이 본래의 읍규(邑規)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 승호를 뽑을 때 경사(京司)와 순영(巡營)의 신칙이 매우 엄하여 수차례 정했다가 물림으로써 갖가지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자장보(資裝保) 8명 외에 별도로 9명을 뽑아 삼삼망(三三望)에 대비하였다가 나주 순도소(羅州巡到所)에서 점검을 받고서 그중 한 사람을 가려 곧바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8명은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습니다. 縣居饒民朴昌吉自願納五十石租洪榮東亦納二十五石租故枚報營門後取用於四月終巡而朴昌吉入於賑啓洪榮東則旣有本縣施賞之營題故成給鄕所帖文而官賑外各面各里之出義氣捐財穀者抄出穀數尤多者十三人或以鄕所帖或以把總帖以酬其功亦以如是私賑之人如是施賞之意枚報현에 사는 요민(饒民) 박창길(朴昌吉)이 자원하여 조(租) 50섬을 바쳤고, 홍영동(洪榮東) 또한 조 25섬을 바쳤기 때문에 낱낱이 영문에 보고한 뒤에 4월 종순(終巡)에 가져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박창길은 진휼을 마치고 보고하는 장계에 넣었지만 홍영동은 이미 본현에서 시상하라는 감영의 제사(題辭)가 있었기 때문에 향소(鄕所)의 체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관진(官賑) 외에 각 면과 리에서 의기를 내어 재곡(財穀)을 낸 경우, 곡물의 수효가 특히 많은 13명을 뽑아 향소첩(鄕所帖)이나 파총첩(把摠帖)으로 그 공에 보답하고, 또한 이와 같이 사진(私賑)한 사람에게 이와 같이 시상했다는 뜻으로 진휼을 마치고 보고하는 장계에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어사가 캐물을 때 이른바 감진(監賑)했다는 감관이 엄한 곤장을 이기지 못하고 묻는 대로 대답하였는데, 13명 중 5명은 이미 승호(陞戶)의 일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머지 8명 및 박창길과 홍영동에게 모두 돈을 받았다고 거짓 자복을 하였고, 심지어는 허명으로 공초를 바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풀이]위 (2)항의 글은 프랑스혁명이 발생한 후 4년차 되던해의 조선사회 어지러운 감리감독상황을 말하고 있다.천민(賤民)의 신분을 올려 양인(良人)으로 삼는 승호(陞戶)를 뽑아 올리는 것은 현역에 나가는 대신 정군(正軍)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된 신역(身役) 8명을 가려 개개거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문서를 만들어 주고 재물로 돕도록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합법화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이런식으로 요민(饒民)이라 하던 소위 부르주아 자본가들이 벼슬과 신분을 상승시키는 계기로 삼았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지방관하에 부정부패를 적발하고 임금에게 서계하여 정사를 바로잡도록한 어사의 서계(書啓) 가운데 곡부(穀簿)의 허류(虛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요민(饒民) 박창길(朴昌吉)과 홍영동(洪榮東)이 각 조50섬, 조25섬을 바쳐 진휼을 하였고 관에서 진휼하는 것 이외 각 면과 리에서 재곡을 낸 사람 13명을 뽑아 향소첩 또는 파총청으로 보답하고 개인이 진휼한 경우 시상했고 보고까지 했지만 어사가 문초하면서 감독한 감관이 어사의 엄한 곤장을 이기지 못하고 묻는 대로 대답하였고 13명 중 5명은 이미 승호(陞戶)의 일에 들어갔기 때문에 받지 않았지만 나머지 8명 및 박창길과 홍영동에게 모두 돈을 받았다고 거짓 자복을 하였고, 심지어는 허명으로 공초를 바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탄원까지 하고 있다.또한 위 서계에 보면 진휼에 보탠다는 명목으로 매향매임(賣鄕賣任)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매향매임이라는 것은 돈이나 재물(財物)을 받고 향직(鄕職)을 시키던 일과 관직(官職)을 파는 행위을 말하는데 경제적 변동 속에서 부를 축적한 서얼들과 부민층이 매향(賣鄕)과 매임(賣任)으로 향안에 참여하고 새롭게 향촌질서를 주도하고자 했다고 말하고 있다.이 같은 움직임은 프랑스의 부루주아 못지 않게 부를 이용하여 호족으로 변신을 위해 관직을 사고팔고했다는 사실도 비교가 된다. [3]정조 20년 병진(1796)8월 9일(신사) 4개 도의 전선(戰船)과 방선(防船)을 개조(改造)할 때 부민(富民)을 대장(代將)으로 차출하고 백성들에게서 비용을 거두는 것 및 정채(情債) 등의 잘못된 규례는 각각 해당 도신에게 지시하여 과조(科條)를 엄히 세워 영구히 혁파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改造改槊時所入物力會減錢米及退船價中取用則設有不足方便拮據軍民之科外收斂代將之差出饒民永爲革罷成出節目而各邑儲置應下不相當於軍需錢之從優會減必以新結米上下而此有掣礙之端則各邑加分耗條中若千石量入劃給○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개조하거나 개삭(改槊)할 때 들어가는 물력은 회감한 전(錢)과 미(米) 및 오래되어 못 쓰게 된 배의 선가에서 가져다 쓰면 설령 부족한 경우가 있더라도 방법을 찾아서 꾸리고, 군민(軍民)에게서 규정에 어긋나게 거두거나 요민(饒民)을 대장으로 차출하는 것은 영원히 혁파하는 것으로 절목을 만들겠습니다. 각 고을의 저치(儲置)와 응하(應下)할 것이 넉넉하게 회감해 준 군수전(軍需錢)과 서로 맞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신결미(新結米)에서 지불하게 될 것인데 이는 방해되는 점이 있으니 각 읍의 더 분급한 모조(耗條)에서 약간의 섬을 들어가는 수량을 헤아려 떼어 주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풀이]경상(慶尙), 충청(忠淸), 경기(京畿), 전라(全羅) 전선(戰船)과 방선(防船)을 개조(改造)할 때 부민(富民) 즉 요민(饒民)을 대장(代將)으로 차출하고 백성들에게서 비용을 거두는 것 및 정채(情債) 등의 잘못된 규례는 각각 해당 도신에게 지시하여 과조(科條)를 엄히 세워 영구히 혁파하라는 내용이 보이며 즉 전투함선이나 방어함선 등을 개조하는데 부민 즉 요민들의 협조를 구해 백성들에게 비용을 거두는 행위나 청탁(請託)하고 관례적으로 정례(情禮), 인정(人情)으로 받던 절차비 조의 대가 수수행위등을 근절하라는 내용도 있다.그만큼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요민이나 요호들이 국가재정에 상당히 많은 보탬이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4]정조 23년(1799)기미 7월 16일의금부가 아뢰기를,饒戶之行賂倖免則渠雖無狀豈至於親自受賂而至若下吏之作奸何敢自保其必無單代及未捧事値兩年荒歉之捧糴旣有代穀之令則雖欲不犯單代勢無奈何至於倉穀發賣立本事또한 요호(饒戶)가 뇌물을 쓰고 요행히 군역을 면하였다는 말은, 제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어찌 직접 뇌물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러나 하리(下吏)가 농간을 부리는 것은, 어찌 감히 틀림없이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장담하겠습니까. 환곡을 단대봉(單代捧)하고 거두지 못했다고 한 일입니다. 흉년이 든 2년 치의 환곡을 상환하는 일은 이미 다른 곡물로 납부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아무리 단대봉의 죄를 범하고 싶지 않더라도 형편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풀이]프랑스혁명이 끝나는 시점인 1799년에 조선사회에서는 아직도 요호(饒戶)가 뇌물을 쓰고 요행히 군역을 면하였다는 말이 있다는 것은 상당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결과를 기록으로 보고 있다.사실상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에게 물품을 주어 구제하는 구휼(救恤)을 전제로 한다고 하지만 단대봉에 의한 뇌물수수가 끊임없이 관리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음이다.환곡(還穀)따위를 받아들일 때, 값을 쳐서 그에 상당한 값의 다른 물건으로 대신 바치게 하지 아니하고, 수량만을 따져서 다른 물건으로 바치게 하는 일인데 예를 들어 콩 1섬을 받아들일 것을 쌀 1섬을 바치게 하는 따위를 이른다고 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진황(賑荒) 6조 / 제2조 권분(勸分)편에 '요사이 보면, 수령(守令)이 술잔치를 벌여놓고 요민(饒民)을 널리 청해다가 본인으로 하여금 자기 손으로 몇 석(石)을 내겠다고 쓰게 하기도 하고, 관의 입(官口)으로 몇 석(石)을 내라고 강권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 의돈(猗頓)같은 부자라도 자기 집은 가난하다고 할 것이요, 위엄으로 억누르면 금루(黔婁) 같은 가난한 사람도 혹 곤경을 당할 것이니, 천하에 어려움이 권분(勸分)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였다. 4. 부르주아와 요민과의 비교 전자에서 언급하였듯이 부르주아 계급은 11세기에 중부유럽과 서부유럽의 버그(burg:소도시, 읍)가 상업에 전념하는 도시로 발전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현상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부상했고 이러한 도시 확장들은 상거래(商去來)의 독점(獨占)을 목적으로 하여 자주적(自主的)으로 조직한 패쇄적인 맹약단체(盟約團體)인 길드(Guild)에 대한 보호자 조직의 출현으로 인해 경제적 집중이 가능했고 이 길드는 개인 사업가(장공, 장인, 상인 등)가 이전에 합의했던 것보다 더 많은 임대료를 요구하는 그들의 임대 추구 봉건지주(封建地主)들과 충돌하면서 생겨났다고 되어 있다. 반면 신라 말 고려 초의 호족(豪族)은 지방에서 재산이 많은 세력자 및 그 일족을 가리키며, 토호(土豪)라고도 하였는데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일어나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호족은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몰락한 중앙귀족, 무역에 종사하며 재력과 무력을 모은 세력, 군진세력, 지방토착의 촌주(村主)출신 등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이들은 근거지에 프랑스어로 부르"bourg"라고 하는 성(城)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 일컬으며,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지배력도 행사하였다고 나타난다. 삼한을 통일한 신라 때의 호족세력은 당(唐)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골품제 두품층(頭品層)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6두품(六頭品) 출신학자의 지지를 받았는데, 당시 6두품 출신은 진골(眞骨)귀족이 중앙관제를 장악하고 있어서 관직에 진출할 수 없게 되자 지방호족과 연계하여 골품제를 비판하는 등 사회개혁을 추구하며, 후삼국을 건국할 때 사상적,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물론 당나라를 유학했다는 것은 한반도 사관이 주장하는 것이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중앙정부(中央政府) 또는 중앙조정(中央朝廷)에 가서 유학하거나 중앙 대도시가 있는 곳에서 유학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삼한을 연합한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각 지방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유력 세력으로 호족을 토호(土豪:landed proprietor)라고 하는데 호강(豪强)·호우(豪右)·호호(豪戶)·강호(强戶)·호협(豪俠)·세가(勢家)·거실(巨室)등으로 불렸고 경제적 지위로는 향곡부호(鄕曲富豪)·향족호부(鄕族豪富)·호부지류(豪富之類)등으로도 불렸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부르주아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세력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동일한 선상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호족의 특징으로 토착적 성격이 강하고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중앙의 귀족으로부터 때로는 멸시를 받기도 하였으며 그 지방에서는 일반주민들로부터 혈통상 존중되기도 하던 지방귀족이기도 하였다는 사실도 프랑스가 말하는 부르주아들과 거의 동일한 선상에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러한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요호부민(饒戶富民)은 조선후기 새롭게 등장한 사회세력의 하나인데 이것은 프랑스혁명의 주동자로써 왕권과 귀족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했던 세력과 동일하게 평가된다.흔히 토호층과 소빈민층의 중간적 형태로 묘사되며 요호·부민·요민·요호부민 등으로 불리던 농민계층으로 구분한다. 이들은 적어도 일정량의 토지와 농우를 소유하면서 고용노동을 이용하기도 했던 중농층 이상의 부농이었고 농업경영 방식은 주로 자작 겸 지주경영 방식을 택하며 임노동(賃勞動)을 이용한 부농경영을 영위하던 세력이다.그외에도 이들은 비싼이자놀이의 고리대(高利貸)등의 방법을 통해 부(富)를 축적하면서 향촌사회 내의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성장해갔고 이들의 신분은 대개 신분상승을 원하는 평민층이나 천민층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이들은 향촌사회의 변동에 편승하여 향촌지배 기구에 기생한 중간 수탈층으로 나타나지만, 한편 그러한 특권에서 소외되는 가운데 봉건권력의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어 몰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을 가진 요호 부민층(饒戶富民層)의 존재방식은 결국 각기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집중적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요민배(饒民輩)들은 19세기 중엽이후의 농민항쟁에 가담함으로써 봉건적인 수탈기구에 대항하는 세력이 되기도 했다라고 다음백과사전은 전하고 있는데 이미 이것에 대한 징조가 18세기 후반부터 나타났음을 알 수 있으나 우리나라 사서에는 이러한 사실을 중요하게 다루지도 않을 뿐더러 기사 자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의혹이다.한반도 역사가 이런 식이니 조선시대는 지구세상 밖에 동떨어진 별천지에서 세상 격량의 시대도 모른체 암흑시대를 살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과 서양의 부르주아이나 조선의 요민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고 어떤 식의 지배계층으로부터 압박과 사련을 겪었는지 동일선상에서 우리는 지켜볼 수 있었고 무엇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있었는지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파생했는지도 알 수 있었고 따져보면 오히려 서양역사보다 더 상세하게 사회변혁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자세가 수정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도 한다.우리 역사가 시민혁명이라는 대변혁을 맞이 한 사실에는 둔감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근세기에 일제가 만든 조선편수회에 의해 세계사적인 것을 배체시켜 한반도 역사만을 근거로 하여 역사를 조작하고 가공시킨 자들의 행태를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한다. 글쓴이가 이 글에서 하고싶은 주요한 골자이다. 유럽 영주(領主)들은 유럽의 봉건 사회에서 영지(領地)나 장원(莊園)을 소유하며 그 영역을 지배하던 사람을 말하는데 농민과 수공업 장인들에게 부역(賦役)과 공납(貢納)을 과(課)하고 재판권과 경찰권을 행사하며, 영지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조선체제의 후국(侯國)으로 주, 부, 군, 현의 책임자를 말하고 읍소재지 현감들의 권력형 비리는 어떤 사회에서도 공통적으로 발생하였던 문제인 것으로 알려진다.중세의 농부들에게는 군주보다 자기 고장의 영주(領主)가 훨씬 영향력 있는 존재였던은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부딪치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시 부르주아들이 봉건적 소유제를 완전히 폐지시켰다고 주장하고 이것은 기존 역사전체의 흐름을 차단한 것이며 새로운 소유제를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소유제는 또한 새로운 권력을 만들었고 새로운 권력은 새로운권력제도와 새로운자본주의국가체제를 생성케 하면서 결국 하나의 체제가 붕괴되는 원천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그것이 역사 순환에 의한 자연적인 흐름이라고 한들 어찌 하겠는가. 프랑스혁명전 프랑스에서의 특권계급(特權階級)은 농민에 대해서 여러 가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농민은 농노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영농민화되고 있었으나, 영주권(領住權)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서 농민이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에서 생산한 생산물로 납부하는 현물지대(現物地代)외에 여러가지 의무부담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관습적으로 경작권을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과하고, 토지의 상속, 양도에 있어서는 많은 허가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설명된다. 더하여 영주는 농민에게 반강제로 수차(水車)나 빵구이가마 등을 사용하게 하여 사용료를 징수했고 기타 도로세, 교량세, 운반 부역 등이 과(課)해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농민은 다시 교회에서 교구민(敎區民)에게 생산량의 십분의 일을 징수한 세금(十一租:tithe)를 지불하고, 11세기에는 다시 새로운 국세가 부과되는 상태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시민계급은 이러한 구제도(舊制度),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나아가 프랑스혁명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이러한 행태는 조선시대가 병폐라고 인정하는 삼정문란 그 자체이다.도결(都結)과 백지징세(白地徵稅)의 전정(田政),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 그리고 족징(族徵) 및 인징(隣徵)이 난행하던 군정(軍政), 번작(反作)과 긴 기간을 물리는 이자 장리(長利)와 허류(虛留)의 환정(還政)까지 지방관리, 영주(領主)들은 그들대로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도금시대라고 알려진 고종실록에 등장하는 폐단을 보자.고종실록 1권, 고종 1년(1864) 1월 18일 경신 3번째기사 대왕대비가 여사군을 공평하게 선발하라고 명하다大王大妃敎曰: "曾前轝士抄出之時, 每有不善察飭之歎。 饒戶豪民, 太半見漏; 貧窮殘獨, 偏被侵困。 此專由於京兆五部吏屬之作奸。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전에 국상(철종)때에 상여를 메기 위하여 동원하는 여사군(轝士軍)을 선발할 때에는 매번 감독을 잘하지 못하였다는 탄식이 있었다. 요호(饒戶)나 호민(豪民)들은 태반이 다 빠져버리는 반면에 가난하고 곤궁하거나 무력하고 고독한 자들만이 침해를 당해왔다. 이것은 순전히 한성부(漢城府) 오부(部)의 서리(胥吏)들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있다. 이미 도금시대(鍍金時代,Gilded Age:1865-1893)초반기부터 이러한 반전이 나타나고 본격적으로 부르주아들이 관을 매수하거나 결탁하는 행태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물론 봉건적 소유제는 많은 문제점을 낳았던 것은 분명하다.그러나 봉건주들이나 토호들에게는 토지를 이용한 댓가, 지대만을 의지했지만 상대적으로 새로운 소유제는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만들고 그것을 댓가로 농지경영을 시도했으며 때로는 고리대금으로 수많은 이윤을 남겼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기존 봉건적 소유제를 무참하게 삼켜버렸다는 것은 또 다른 논제의 핵심이다.기록을 보면 조선사회에서도 특히 집중적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요민배들은 19세기 중엽 이후의 농민항쟁에 가담함으로써 봉건적인 수탈기구에 대항하는 세력이 되기도 했다고 분명하게 나타난다.이러한 세력들이 부르주아들의 부추김과 자금지원으로 농민반란이 빈번하게 발생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데 조선에서는 농민(農民)이라고 하였지만 서양사에서는 이를 시민(市民)이라 한 사실이 다를 뿐이다.영주도 마찬가지이지만 지방관 토호(土豪)들은 관권(官權)에 대립적인 관계이다.또한 국가의 대민 지배의 범주밖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국가의 수취 기반을 불법적으로 침탈해 사적이득(私的利得)을 채우는 계층이 이들이다.군주를 정점으로 한 이러한 계층간의 불편한 계급서열이 바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라는 것이므로 이것은 동서양 공통된 문제였다.특히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에 보면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부터 1799년까지 꾸준하게 통치자나 통치 세력에 저항하여 통치권을 빼앗으려 한 난역(亂逆)의 기록들이 보이는데 주로 주모자를 탄핵하는 대상으로 한 상소문들에서 이러한 상황들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가 있다. 5. 나오며 본 블로그 글 "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6"에서 남월국(南越國)은 영남에서 탄생한 첫 봉건국가라 했기 때문에 영남은 애팔래치아 남쪽 미시시피주, 애리바마주, 조지아주라 하고 미시시피강 하류지역을 지적하였다.또한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서화가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시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을 보면 “해구(海颶)가 삼일 동안 법 없이 마구 횡행하여...”라고 기록되었는데 이 해구를 풀이한 것을 보면 “해중의 대풍(大風)으로 구풍(颶風)을 말함”이라고 되어 있고 남방 고대 민족사 연구에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 남조(南朝) 송(宋)나라 심회원(沈懷遠)가 지은 남월지(南越志)에 “구풍이란 사방 바람을 갖춘 것인데 항상 5~6월에 일어난다.”하였다.그곳을 본 블로그 글 "구풍(颶風)이 발생한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9 "에서 뉴올리언즈 지역을 중심으로 구풍지역을 찾아 알 수 있었으며 그곳은 바다와 맞나는 하구이기 때문에 엄청난 구풍이 매년 잊지 않고 찾아 드는 곳이라 하였다.미국 기상학자 존 슬레이트(Jon Slater)는 토네이도 통로가 생기는 이유는 서쪽으로는 로키산맥, 남동쪽으로는 멕시코 만과 관련된 위치 때문이라 하고 있다. 글쓴이가 특별히 남부 남월(南越)을 왜 주시하는가 하면 그곳은 프랑크족이 존재한 곳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이 프랑크는 구풍만큼 골치아픈 역사를 우리 역사에게 안겼다.병인양요의 외규장각 도서 의궤(外奎章閣圖書,les manuscrits coréens)강탈사건도 그렇지만 본 블로그에서 시리즈로 엮은 글 "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 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 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 에서도 살펴본 바 마찬가지로 이상하게도 역사적으로 조선과 매우 연결된 사실이 많다. 최근에 우리나라에도 없는 조선 궁중 장식품으로 추정되는 반화(盤花) 2점과 목조여래좌상이 기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많은 이런 의문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전자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지역은 남월(南越)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위그노전쟁(French Wars of Religion:1562-1598)과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을 겹쳐 볼 수 있는 발생지역으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미시시피강유역 하구에 프랑스 오를레앙이라고 하면 더 익숙할 것 같은 뉴올리언스(New Orleans)가 자리잡고 있는데 한동안은 이 도시를 뉴 파리(New Paris)라 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또한 1534년부터 식민제국(Empire colonial français) 뉴(누벨)프랑스(Nouvelle-France)는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1491-1557)가 세인트로렌스 강을 탐험하기 시작한 이래, 7년전쟁(七年戰爭:Seven Years' War,1756-1763)을 끝으로 1763년 프랑스가 누벨프랑스를 스페인과 대영제국에 할양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다시 이상하게도 프랑스는 비밀조약을 맺었다 하면서 미시시피강서쪽 영토를 되찾았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1769-1821)가 1803년에 미국에 양도(루이지애나 매입)를 결정하여 한반도 10배에 달하는 넓이 2,140,000 km2 땅을 1500만 달러($15 million)에 팔았다고 하고 있다.본 블로그 글 "석유(石油:petroleum)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7 "에서 바로 이 고로(高盧)가 석유생산지로 알려진 고노(高奴)와 같다 하였고 북아메리마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프랑스인들이 세웠다고 하는 도시 골(Gaul, Gol)은 강유역 멀지 않는 곳에 지금도 존재다고 하였으며 그곳은 프랑스인 시에르 드 라살(René-Robert Cavelier, Sieur de La Salle)이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 이서(以西)의 유역일대를 프랑스령이라고 감히 선언한 1718년부터 프랑스 지명으로 불리었고 프랑스란 국명이 붙어 서양역사에 포함되었다고 말 한 적이있다.이곳은 우리역사에서 관서(関西) 또는 서토(西土)라 하는 곳으로 평안도 서북출신 홍경래(洪景來, 1771-1812)가 서북인을 일반적으로 문무고관에 등용하지않았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 서북인을 평한(平漢)이라고 멸시하는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와 삼정문란(三政紊亂)에 대한 사회적 불만으로 안동김씨 세도정권 타도를 목표로 난을 일으켰다.본 블로그 글 "프랑스 왕실 상징 플뢰르 드 리스(Fleur-de-lys)에서 본 대조선http://blog.daum.net/han0114/17050527 "에서 영국의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가 안동김씨(安東金氏:영국왕실)와 엮인다고 하였다.이것은 본 블로그 글 "나폴레옹이 주는 단서(端緖) 캘리포니아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9 "에서 곧 영국 즉 잉글랜드를 공격하는 나폴레옹과 너무나도 닮았다고 했다.즉 홍경래가 서북이라는 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 이서(以西)지방임을 명확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관서(関西)는 애팔레치아(Appalachia)산맥을 기준으로 해야 맞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지주, 사상인 및 일부 몰락한 양반지식인 등이 광산노동자·유민·빈농을 동원해 일으킨 반봉건농민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어 부르주아와 요민은 같다해야 맞다.본 블로그 글 "조선(朝鮮)은 세계통치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1"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朝鮮)은 만리지국(萬里之國)의 세계통치국이라 했다.때문에 서구의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의 체제속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리고 한반도역사의 폐해와 피해역사 인식이 어떤식의 잘못인지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우리의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는 한반도 삼한이 아닌 세계삼한통치국으로 존재한 신라, 고려, 조선은 참으로 위대했다고 말하고 싶다.자본을 등에 업은 서양세력들의 무차별적인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여서도 의연하게 정통성을 지키며 그래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애를 썼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조선의 통치력은 그 무엇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지만 패자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고열가(古列加)단군이 홀연히 제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神仙)이 되신 것처럼 그저 온전하게 사라진 것은 세계인들은 인류영달을 위해 노력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기억할 것이다.다만 미래에 자산이 되려면 인류역사가 발전하면서 일순간 몰아닥친 물질문명의 파고가 순환적인 역사 흐름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처가 미흡했고 대변혁기가 도래함에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었던 정통성만을 고집한 체제의 아집은 두고두고 우리는 가슴의 아프게 할 것이다.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어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모두 위대했다.우리의 거대한 역사가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만리조선을 세울 수가 있었겠는가.그 오랜 억겁의 시간을 참고 인내하며 거대하게 만든 찬란한 역사는 우리를 잉태한 것이다.100억분지 1도 안되는 그나마 작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 후손들에게 위대한 역사임을 알게 하는 위대한 자존이 아닐 수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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