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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풍(颶風)이 발생한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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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풍(颶風)이 발생한 고려(高麗), 조선(朝鮮)글쓴이:한부울도대체 구풍이란 무엇인가?태풍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구풍(颶風)을 단순하게 “사나운 바람”이라 하여 태풍(颱風)이라 하고 있다.한반도 역사가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이런 해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안된다.백과사전에 의하면 먼저 태풍(颱風)이란 것은 북태평양 서쪽에서 발생하는 열대저기압을 말하는것으로, 분명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크로네시아(Micronesia)일부에 영향을 주는 폭풍우라고 되어 있다. 물론 협지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전체를 구도로 할 때 열대성저기압(tropical cyclone)은 열대지역인 5°와 20°사이 혹은 5°에서 25°사이 부근의 해면 수온이 약 27°이상의 따뜻한 바다위에서 가열된 공기가 가벼워져 위도(緯度)의 범위 내에 있는 해양 위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을 말하는 것인데 이미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누누이 주장하고 있지만 본래 이 명칭이 파생된 것은 하나의 체제가 존재하던 지역이었던 현 대서양 즉 인도양(印度洋)에서 발생하는 바람을 통칭해서 이야기했음이 자명하다.그러나 근세기에 서세의 상대적으로 파생된 역사우월의식과 못된 이기심에 의해 이것이 동서양(東西洋)이 나눠지고 인도(印度)를 아시아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에 집어넣어 만들어지면서 각각 다른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현재 서남아시아 인도양에서 부는 바람을 사이클론(cyclone)이라고 하고 위에서 말하는 지역인 남태평양에서 부는 바람을 태풍(typhoon)이라하며 카리브해와 동태평양에서 발생하는 것을 허리케인(hurricane)이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현재 미크로네시아(Micronesia)라 함도 오스트로네시아계·폴리네시아계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통털어 말하고 있으며 남태평양이다.본 블로그 글 "태풍인가 허리케인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7"에서 1936년 8월 11일 동아일보 호외(號外)기사를 바탕으로 태풍의 진로와 발생상황을 살펴본 결과 당시 충주에서 집중호우(集中豪雨)가 있었고 이어 한강홍수(漢江洪水)로 인한 위급한 상황 등이 맞이한 것은 바로 1936년 동태평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Eastern Pacific hurricane)의 영향을 받은 수해(水害)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적어도 1930년에 조선인(朝鮮人)들은 이 허리케인이 발생하는 지역인 북아메리카대륙 서남부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그렇다면 이 구풍(颶風)은 태풍과 어떻게 다르며 정체가 무엇인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이것을 밝히기 위해 사서(史書)들을 뒤져보니 조경남(趙慶男:1569-1641)간행한 고려공민왕 때부터 조선선조 사이의 명(明)과 조선(朝鮮)간의 외교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 역대요람(歷代要覽)에서 이 구풍이라는 단어가 발견된다.그러나 어김없이 한국번역원의 해석에서는“열대지방에서 발생하는 폭풍우의 총칭이라면서 기어코 태풍(颱風)을 뜻함”이라고 정리해두고 있다.역대요람(歷代要覽)홍무(洪武) 명(明) 태조, 공민왕(恭愍王) 17년(1368년)○六年。遣鄕試擧人金潛宋文中曹信等。赴京會試。在海途値颶風。金潛曹信賀正陪臣周英贊等俱渰死。再遣宋文中赴會試。명(明) 태조6년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 김잠(金潛)ㆍ송문중(宋文中)ㆍ조신(曹信) 등을 보내어 경사(京師)의 회시(會試)에 응시(應試)하러 가도록 하였는데, 해로(海路)에서 구풍(颶風 열대지방에서 발생하는 폭풍우의 총칭인데 태풍을 뜻함)을 만나 김잠ㆍ조신과 하정배신(賀正陪臣) 주영찬(周英贊) 등이 함께 빠져 죽었다. 다시 송문중을 보내어 회시(會試)에 응하러 가도록 하였다.어째서 열대지방전체에서 발생하는 폭풍우를 태풍이라고 정리하고 있는가.열대지방이라 함은 지구전체에서 위도 5°~25°사이를 말하는 것인데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이다.그것은 동서가 갈라지지 않는 하나의 체제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지 지금은 엄연히 구분되고 갈라져 있다.때문에 그냥 태풍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막연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그만큼 한반도 역사에 그대로 함몰되었기 때문에 역사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던 비정상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이렇게 막연한 해석에서 어떻게 과거 조선(朝鮮)이 동아시아지역에 있었는지 아니면 현재 서남아시아에 있었는지 또는 카리브해(Caribbean Sea)를 바탕으로 하는 허리케인 영향권지역인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있겠는가.물론 이와같은 침체의 해석은 현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학계의 몸부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위와 같은 번역원의 해석은 차라리 체념(諦念)에 가깝다.이런 방어책을 쓰는 그들에게 더 이상 어떤 역사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한반도 역사를 방어하기 위해 태풍을 동서(東西)지역 어디에도 통할 수 있는 명칭으로 어정쩡하게 해석한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완당전집(阮堂全集) 제4권 서독(書牘)기십일(其十一) 해구(海颶)가 삼일 동안 법 없이 마구 횡행하여 세상을 굴리는 풍륜(風輪)과 더불어 맞 어울렸으나 다만 섬 중에는 아직 농사의 손상은 없으니 아주 다행이구려.곧 계속 내려 주는 영감의 서한을 받들어 삼가 살핀바 무더위에 정무(政務) 나머지의 동정이 안온하시며 피부의 가려운 증세도 따라서 깨끗해지셨다니 마음에 흐뭇하여 치하를 드리외다.누인은 증세가 어제와 같으니 까라진 늙은 기운이 한번 떨어지면 졸지에 회복되기는 어려운 모양이지요. 스스로 슬플 뿐이외다.당액(堂額)에 대하여는 또 이와 같이 선뜻 고쳐 정해 주시니 아집을 버리고 남을 따르는 거룩함과 납오허수(納汚虛受)의 아름다움은 진실로 작은 양과 옅은 눈을 지닌 말세의 고집쟁이와는 날을 함께하여 말하면 안 될 것이외다. 우연히 이 한두 마디 지나가는 말로는 족히 그 뜻을 알차게 할 수 없으니 이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나머지는 별지에 기록해 있으므로 짐짓 의식을 갖추지 않으외다.[주D-001]해구(海颶) : 해중의 대풍으로 구풍(颶風)을 말함. 《남월지(南越志)》에 “구풍이란 사방 바람을 갖춘 것인데 항상 5~6월에 일어난다.” 하였음.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서화가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시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을 보면 “해구(海颶)가 삼일 동안 법 없이 마구 횡행하여...”라고 기록되었는데 이 해구를 풀이한 것을 보면 “해중의 대풍(大風)으로 구풍(颶風)을 말함”이라고 되어 있고 남방 고대 민족사 연구에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 남조(南朝) 송(宋)나라 심회원(沈懷遠)가 지은 남월지(南越志)에 “구풍이란 사방 바람을 갖춘 것인데 항상 5~6월에 일어난다.”하였다.또한 해구(海颶)는 바다가운데 큰 바람으로 구풍(颶風)을 말한다 하였고 구풍이란 사방 바람을 갖춘 것이라 하였다.사방의 바람을 갖추었다는 것은 “회오리성” 바람이라는 말하는 것이다.글쓴이가 남월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본 블로그 글 "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6"에서 남월국(南越國)은 영남에서 탄생한 첫 봉건국가라 했기 때문에 영남은 애팔래치아 남쪽 미시시피주, 애리바마주, 조지아주라 하고 미시시피강 하류지역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실제로 그곳은 허리케인과 토네이도가 수도 없이 많이 상륙하는 지역이다.조선왕조실록 태종 7년 정해(1407,영락 5) 7월30일 (신사) 충청도 병선 11척이 군산도에서 바람을 만나 파손되다 ○忠淸道兵船十一艘, 至群山島, 遭風傷敗。 忠淸道觀察使報: "水軍僉節制使盧仲濟、都萬戶宋琠等, 率兵船下海, 採救荒物件, 且搜探全羅道 倭寇, 至群山島, 遭颶風傷敗。"충청도 병선(兵船) 11척이 군산도(群山島)에 이르렀다가 바람을 만나 상패(傷敗)하였다. 충청도 관찰사가 보고하였다.“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노중제(盧仲濟)와 도만호(都萬戶) 송전(宋琠) 등이 병선을 거느리고 바다에 내려가 구황(救荒)할 물건을 채취하고, 또 전라도의 왜구(倭寇)를 수색하여 군산도에 이르렀다가 회오리바람[颶風]을 만나 상패(傷敗)하였습니다.” 어김없이 조선왕조실록 태종7년 기사에도 보면 회오리바람을 구풍(颶風)이라 하고 있다.그렇다면 한자 구(颶)의 의미를 살펴보자.구(颶)를 파자(破字)로 나눠보면 부(部) 바람풍(風)과 음(音) 구(具)가 합친 것을 알 수 있는데 구(具)를 돌개바람 형태의 상형문자라 할 때 나선(螺旋)같은 형태에서 회오리치면서 북상하는 급격한 바람과 같으며 갑자기 생긴 저기압 주변으로 한꺼번에 모여든 공기가 나선 모양으로 돌면서 일어나는 현상을 구로 나타냈음이 확인되고 또는 패(貝)의 모양에서도 나선형태의 소라를 생각하게 된다.핵심은 이것들은 남양(南洋) 즉 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에서 밝혀보았듯이 한 때 페르시아만이라고도 했던 멕시코 만(灣)에서 북진하는 따뜻하고 습한 해양성 기단이 저기압을 만들고 로키산맥에서 동진하는 한랭기단과 만나 에너지가 강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2014년 본 블로그 글 "토네이도(Tornado)로 본 유럽지명과 모스크바(Moscow)지명http://blog.daum.net/han0114/17050723"에서 보면 토네이도(tornado)는 미국 중남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회오리바람이라고 하였으며 대체로 봄과 여름(5월에서 6월)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먼저 지형지물이 높고 낮음이 있는 곳보다 지형지물이 없는 평원이나 평야에 많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봄과 여름(5월~6월)에 생성 된다는 사실은 심회원(沈懷遠)가 지은 남월지(南越志)에 “구풍이란 사방 바람을 갖춘 것인데 항상 5~6월에 일어난다.”하였던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미국에서는 로키산맥(山脈:Rocky Mts)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대륙성 한랭기단(寒冷氣團:cold air mass)과 앞에서 언급한 멕시코 만(灣)에서 북진하는 따뜻하고 습한 해양성 기단(海洋性氣團:oceanic air mass)이 지형적 장벽이 없는 미국의 대평원(Great Plains)에서 만나서 육상에서 발생하는 토네이도를 수시로 발생시킨 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물론 육상이지만 육상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에서 만나면 이것은 용오름 현상과도 맞먹는 형태의 토네이도가 발생한다.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토네이도 리스트 중 가장 두드러진 피해상황으로는 1925년 3월 18일 미주리·일리노이·인디애나 주를 통과하면서 695명의 인명 피해를 낸 것으로, 이동경로 350km, 폭1.5km, 시속100km/h 이었다는 규모는 세워진 집들을 전부 파괴하는 수준인데 이러한 규모의 토네이도는 북아메리카대륙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이 사실이며 당시 북아메리카 대륙인들에게 공포로 다가갔던 것이 틀림없다.같은 토네이도 현상에서 해상에서 발생하는 것을 용오름(Water Spout)이라고 한다.용오름 현상이란 물기둥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마치 용(龍)이 하늘로 승천(昇天)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이 역시 아래 그림사진을 보면 1948년에 북아메리카대륙 남월로 의심되는 뉴올리언즈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목격할 수가 있다. Twin waterspouts sharing a single cascade, off Grand Isle, Louisiana, May 19, 1948.[루이지애나 그랑 이슬(島)]위 그림은 이 용오름의 쌍둥이 현상인데 바로 루이지애나 그랑 섬에서 바라본 현상이다.[가]동아일보 1920.04.20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는 미국(美國)에서 구풍(颶風) 발생관한보도미국(美國)의 또 복구풍(復颶風) 거듭되는 토네이도라는 제목아래 일늬노이스주 동방일부, 오하요, 미조리, 인듸아나, 위스칸손, 쪼지아, 알나바마 각주에 구분이 대작(大作)하여 인명사상이 다(多)하였고 파괴된 가옥이 수천호이요 손해물이 수백만불에 달하였다더라(紐育發電) 이처럼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토네이도를 동아일보가 발 빠르게 보도한 것은 참으로 신기할 정도이다.동아일보가 보도한 1920년 4월 20일에 발생한 토네이도는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주(州) 클레이카운티(Clay County)와 앨라배마주의 매리언 카운티(Marion County), 로렌스 카운티(Lawrence County)를 강타하고 사망자 88명을 발생시킨 것으로 이것 역시 구풍(颶風) 토네이도이다.[나]동아일보 1923.05.17 쌀미(米)자를 쓰는 미국(米國)에서 발생한 구풍(颶風) 피해보도사상자다수(死傷者多數)라는 제목아래 미국(米國)의 구풍과 홍수, 텍사스주 콜로라도발전(發電)에 의하면 구풍과 홍수로 인하여 19명의 사망자들이 발생하였으며 또 알칸사스주 핫스프링스(Hot Springs)발(發)에 의하면 구풍과 화재와 홍수로 인하야 17명의 사망자를 발생하게 하였더라(桑港15日發)상항(桑港)은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말한다. 이 또한 토네이도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북아메리카대륙 1923년 5월 14일에 텍사스(州) 빅 스프링(Big Spring)에서 토네이도가 발생하여 사망자23명이 발생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다]동아일보 1924.05.03 쌀미(米)자를 쓰는 미국(米國) 남부지방 6개주에서 발생한 구풍(颶風) 피해보도 Southeastern United States(April 30, 1924)tornado outbreakLong-tracked tornado family killed seven people at a school in Horrell Hill, South Carolina. Multiple violent killer tornadoes struck the Carolinas and Georgia.(a)April, 29:오클라호마(Oklahoma), 아칸소(Arkansas), 루이지애나(Louisiana)에서 발생(b)April, 30:앨라배마(Alabama), 조지아(Georgia),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버지니아(Virginia)에서 발생당시 영어자료에 의하면 최악의 토네이도가 발생한 곳은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의 한 시골에서 치명적인 손상(Devastating damage)급인 "F4 "손상을 주는 상당히 긴 수명의 토네이도가 발생하여 일가족 53 명이 사망하게 하고 534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다]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이를 보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보도 그대로 인용하면 1924년 5월 3일자에 미국남부 6개주(州)에는 최고 격렬한 구풍(颶風)이 기(起)하야 사자(死者)수백명과 다수의 수상자들을 출(出)하였고 손해도 1,000여만불(萬弗)에 달하였다 하더라(뉴오린스1일發)라는 내용이다.당시 동아일보의 이런 보도는 매우 신속한 것으로 참으로 의아해지는 것이다.동아일보가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하기 때문에 미국 본토에서 발생한 토네이도 피해상황을 먼저 뉴올리언즈에서 5월 1일 보도가 되었다는 사실과 이 보도와 이틀의 시간차만 두고 5월 3일에 보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이 아니라 모든 사실적 관계에 비추어 불가한 것이다.불가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당시에도 태평양에 미국과 일본열도간에 케이블이 깔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전혀 아니올시다.이러한 보도체계는 물론 유선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선으로 받아 기사를 작성했다고 보아야 옳다.그렇다면 한반도에 당시 조선이 있고 동아일보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더군다나 당시 조선인이 한반도에서 식민지 상태에 있었다면 이렇게 빠른 미국소식이 왜 필요한가.인도주의적으로 가능하다는 말은 배부른 소리일뿐이다.이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에서 전보로 통신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맞다.참고로 본 블로그 글 "무선통신 역사로 본 뉴욕과 경성http://blog.daum.net/han0114/17050764"에서 살펴보았듯이 1915년 1월 25일에는 동부 미국 뉴욕과 서부 극단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4,700km의 대륙횡단 전화회선이 개통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결국 당시 동아일보는 샌프란시스코나 유선이 지나는 과정 장소에 있었다고 결론내릴 수가 있다.세계에서 처음 무선통신이 이루어진 시기가 1927년 1월 7일 뉴욕(New York)에서 런던(Lodon)간 무선전화가 개통된 것을 생각해보아도 이를 알 수 있으며 또한 1924년 늦은 시기에 무선통신실험하였고 1925년 실행될 수 있었다는 것에서 볼 때 한반도 조선에서 미국사정을 무선으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아마도 동아일보는 뉴욕에서 떨어진 유선통신으로 전보를 받을 수 있는 지역에서 보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단언할 수가 있는 것이다.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구풍(颶風)이라 함은 한반도 사서 번역자들이 주장하는 단순히 "사나운 바람"이 아닌 분명 토네이도(tornado)를 말한 것임을 확신할 수가 있다.[1]조선왕조실록 태종 6년 병술(1406,영락 4)7월22일 (기유) 사역원 판관 장약수가 표류해 온 명나라 사람들을 요동으로 데리고 가다 ○遣司譯院判官張若壽, 押浙江 觀海衛百戶楊茂等如遼東。 楊茂率軍人四十八名, 徒步至義州自言: "乘駕海船, 到太倉裝糧, 隨同摠兵官平江伯, 率領糧船一千三百隻, 欲往北京交卸, 忽遭風颶, 飄到海邊, 船破上岸, 飢餓至此。" 兵馬使鄭耕以聞, 命厚加慰勞, 給鋪馬、脚力以送之。사역원 판관 장약수(張若壽)를 보내어 절강(浙江) 관해위(觀海衛) 백호(百戶) 양무(楊茂) 등을 압령해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였다. 양무는 군인 48명을 거느리고 도보(徒步)로 의주(義州)에 이르러 스스로 말하기를,“해선(海船)을 타고 대창(大倉)에 이르러 장량(裝糧)하고, 동총병관(同摠兵官) 평강백(平江伯)을 따라 양선(糧船) 1천 3백 척을 영솔(領率)해 가지고 북경(北京)으로 가서 교역하고자 하다가, 문득 태풍[颶風]을 만나 해변으로 표류되었는데, 배가 부서져서 해안에 상륙하여, 굶주리다가 이곳에 이르렀다.”하였다. 병마사(兵馬使) 정경(鄭耕)이 계문(啓聞)하니, 명하여 후하게 위로해 주고, 포마(鋪馬)와 각력(脚力)을 주어서 보내었다.[2]조선왕조실록 세조 7년 신사(1461,천순 5) 6월8일 (정축) 병자년에 유구국으로 표류했던 양성ㆍ고석수를 유구국 사신이 데리고 오다 ○羅州住船軍梁成、錦山住私奴高石壽等十人丙子正月自濟州行船, 値颶風漂到琉球國, 其中八人曾已還來, 今者琉球國使僧德源帶梁成、高石壽以來, 請令禮賓寺供饋。 上引見梁成等, 問漂流緣由及地形、風俗, 謂左承旨韓繼禧曰: "細問見錄以啓。"나주(羅州)에 사는 선군(船軍) 양성(梁成)과 금산(錦山)에 사는 사노비(私奴婢) 고석수(高石壽) 등 10인이 병자년 1월에 제주(濟州)로부터 배를 타고 오다가 구풍(颶風)을 만나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도착하였는데, 그 가운데 8인은 일찍이 이미 돌아왔고, 지금 유구국 사신 중[僧] 덕원(德源)이 양성ㆍ고석수를 데리고 왔으므로, 예빈시(禮賓寺)로 하여금 공궤(供饋)하게 하였다. 임금이 양성 등을 인견(引見)하고 표류한 연유 및 지형(地形)ㆍ풍속(風俗)을 묻고 좌승지(左承旨) 한계희(韓繼禧)에게 이르기를,“자세히 묻고 갖추 기록하여 아뢰라.”하였다.[3]조선왕조실록 중종 4년 기사(1509,정덕 4)5월27일 (무오) 우승지 송천희ㆍ도승지 성몽정이 조선의 패몰에 대한 대책을 아뢰다 ○右承旨宋千喜啓曰: "朴元宗經筵所啓全羅道田稅推移輸納事, 何以爲之?" 仍啓曰: "臣聞漕船致敗, 專以大船重載, 遭風則難於運轉故也。 若私船則體小, 其容載不過三四百斛, 雖大洋颶風, 轉運甚便, 無敗覆之患。 今若依私船, 使之體小輕載, 則雖或遭風敗沒, 其所失之穀, 亦不多矣。" 都承旨成夢井啓曰: "漕轉時, 一差使員押領之船, 多至三四十餘艘。 其海上行船, 務令齊發齊止, 卒遇風波, 拘於號令, 不得各自爲便, 故易致敗沒。 若使漕船體小, 而多定差使員, 分運繼發, 則雖或遭風, 庶可預爲之圖矣。" 傳曰: "其收議于政府堂上、府院君及判書以上。"우승지 송천희(宋千喜)가 아뢰기를,“박원종이 경연에서 아뢴 바, 전라도 전세를 추이(推移)하여 수납(輸納)할 일은 어찌합니까?”하고, 이어 아뢰기를,“신이 듣건대, 조선(漕船)이 패몰된 것은 오로지 큰 배로 무겁게 실어서 바람을 만나면 운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선(私船) 같으면 선체가 작아 싣는 총량이 불과 3~4백 곡(斛)이어서, 대양(大洋)에서 구풍(颶風)을 만나더라도 운전하기가 매우 편리하여 패복(敗覆)할 염려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사선에 의하여 선체를 작게 하고 가볍게 실으면, 혹 바람을 만나 패몰하더라도 그 잃는 곡물이 또한 많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도승지 성몽정(成夢井)은 아뢰기를,“조전(漕轉)할 때 한 사람의 차사원(差使員)이 압령(押領)한 배가 30~40여 척이나 되어, 해상에서 행선(行船)함에는 될수록 일제히 출발하고 일제히 정지하게 되니, 갑자기 풍파를 만나면 호령에 구속되어 각자 편리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파몰되기가 쉽습니다. 만약 조선의 선체를 작게 하고, 차사원을 많이 정하여 나누어 운반하여 계속 출발하면 혹 바람을 만나더라도 거의 미리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정ㆍ부 당상, 부원군 및 판서 이상에게 수의하라.”하였다. [4]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27권, 선조 33년 7월 5일 丙午 8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비변사에서 태풍으로 인한 중국측 피해의 대책을 아뢰다○備邊司啓曰: "都司揭帖, 當以我邦之故, 許多天兵, 久戌絶島, 勞苦已多, 而颶風之變, 出於意外, 官兵渰死, 船隻破壞, 極爲驚駭。 前因杜副使移咨, 破壞船隻, 作急修補事, 慶尙觀察使處, 已爲行移矣。 以此措辭回答何如?" 傳曰: "允。"비변사가 아뢰기를,"도사(都司)의 게첩(揭帖)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일로 인해 많은 천병(天兵)이 오랫동안 절도(絶島)에 수자리하며 노고가 많은데, 태풍의 변고가 뜻밖에 생겨 관병(官兵)이 익사하고 선척이 파괴되어 극히 놀랍다. 앞서 두 부사(杜副使)의 이자(移咨)로 인하여 파괴된 선척을 속히 수리할 것을 경상도 관찰사에게 이미 행이(行移)하였다.’고 하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회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위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하나같이 구풍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냥 사나운 바람이 아니다.[1]태종 6년(1406)7월22일에 북경에 가서 교역하려던 명나라 사람이 구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의주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한반도 서해안 지금의 발해를 말하는 듯하나 그곳에 무슨 구풍이 발생한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물론 발해 역시 서해안 윗 발해만이라 할 수가 없다.그곳에는 북아메리카대륙 로키산맥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대륙성 한랭기단(寒冷氣團)이 없으며 또한 따뜻하고 습한 해양성 기단(海洋性氣團)을 만날 수 있는 지형조건이 안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한반도지형은 미국의 대평원(Great Plains)같은 지형이 없다는 명확한 사실이다.그럼에도 번역자들은 기어코 구풍(颶風)을 태풍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2]세조7년(1461)6월8일에 나주(羅州)에 사는 선군(船軍) 양성(梁成)과 금산(錦山)에 사는 사노비(私奴婢) 고석수(高石壽)등 10인이 병자년 1월에 제주(濟州)로부터 배를 타고 오다가 구풍(颶風)을 만나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도착하였다 한다. 역시 앞에서 지형환경조건이 불가한 상태라는 원칙에서 한반도 주변 전체를 적용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이 역시 제주에서 유구국까지 표류하는 장소를 현재 한반도와 열도 오키나와라고 할 수 없다.그곳은 바로 카리브해와 동태평양을 깃점으로 발달한 토네이도 형태의 폭풍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3]중종 4년(1509)5월27일에 우승지 송천희ㆍ도승지 성몽정이 운반선 조선(漕船)의 침몰 즉 패몰(敗沒)에 대한 대책에서 우승지 송천희(宋千喜)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조선(漕船)이 패몰된 것은 오로지 큰 배로 무겁게 실어서 바람을 만나면 운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선(私船)같으면 선체가 작아 싣는 총량이 불과 3~4백 곡(斛)이어서, 대양(大洋)에서 구풍(颶風)을 만나더라도 운전하기가 매우 편리하여 패복(敗覆)할 염려가 없습니다" 한 기사내용에서도 조선 땅에서는 늘 상 운반선이 떠다니는 강(江)이나 바다(海)에 구풍 즉 토네이도가 발생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4]선조33년(1600)년 비변사에서 태풍으로 인한 중국 측 피해의 대책을 아뢰는 글에서 우리나라의 일로 인해 많은 천병(天兵)이 오랫동안 절도(絶島)에 수자리하며 노고가 많은데, 태풍의 변고(而颶風之變)가 뜻밖에 생겨 관병(官兵)이 익사하고 선척이 파괴되어 극히 놀랍다. 앞서 두 부사(杜副使)의 이자(移咨)로 인하여 파괴된 선척을 속히 수리할 것을 경상도 관찰사에게 이미 행이(行移)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임금과 숙의하는 과정의 기사이다.이글에서도 조선에서는 구풍이 발생하는 지형임을 알 수 있고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사들이 구풍 즉 토네이도에 익사하고 선척이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 한반도 역사번역자들은 이를 태풍이라 하고 있음도 명확히 알 수가 있다.그러나 이 구풍에는 토네이도 뿐만아니라 허리케인발생도 사실도 감안해야 하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사건을 고정시켜 놓고 보면 그러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5]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 4월 6일 辛酉 3번째기사 1882년 조선 개국(開國) 491년 조미 조약(朝、美條約)을 체결하다。第三款, 美國船隻在朝鮮左近海面, 如遇颶風, 或缺糧食煤水, 距通商口岸太遠, 應許其隨處收泊, 以避颶風, 購買糧食, 修理船隻, 所有經費, 係由船主自備。 地方官民, 應加憐恤援助, 供其所需。 如該船在不通商之口, 潛往貿易拿獲, 船貨入官。 如美國船隻在朝鮮海岸破壞, 朝鮮地方官, 一經聞知, 卽應飭令將水手先行救護, 供其糧食等項, 一面設法保護船隻貨物, 竝行知照領事官, 俾將水手送回本國。 竝將船貨撈起一切費用, 或由船主, 或由美國認還。 제3관 미국 선척이 조선의 근해에서 태풍(颱風)을 만났거나 혹은 식량·석탄·물이 모자라고 통상 항구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졌을 때에는 곳에 따라 정박하여 태풍을 피하고 식량을 사며 선척을 수리하도록 한다. 경비는 선주가 자체 부담한다. 지방관과 백성은 가엾게 여겨 원조하고 수요품을 제공해야 한다. 당해 선적이 통상하지 않는 항구에 몰래 들어가 무역을 하다가 잡힌 경우에는 배와 화물은 관에서 몰수한다. 미국 선척이 조선 해안에서 파손되었을 경우 조선의 지방관은 그 소식을 들은 즉시 영을 내려 선원들을 우선 구원하고 식량 등을 공급해 주도록 하며, 한편으로 대책을 세워 선척과 화물을 보호하고 아울러 영사관(領事官)에게 통지하여 선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게 한다. 아울러 배와 화물을 건져낸 일체 비용은 선주나 미국에서 확인하고 보상한다.[6]고종실록 20권, 고종 20년 10월 27일 甲戌 7번째기사 1883년 조선 개국(開國) 492년 조선영국수호조약(朝、英修好條約)을 체결하다第七款: 一, 英國船隻, 在朝鮮海面, 如遇颶風失事及擱淺不測之虞, 朝鮮地方官, 應卽一面速行設法, 妥行往救, 竝保護被難人、船、貨物, 免致本地莠民肆行搶掠、欺凌。 一面速卽知照附近英國領事官, 竝將救護被難英民, 分別資送附近通商口岸。 二, 凡朝鮮政府, 所出救護英國難民衣食、解送及一切打撈、葬埋屍身、醫治傷病各資, 應由英國政府, 照數付還。 三, 撈救保護被難船隻及打撈該船貨物之費, 應將船貨交還原主時, 由原主照數付還, 不得向英國政府索償。 四, 朝鮮國所派官員及地方委弁巡役人等, 前赴英國難船失事處所及護送被難英民之員弁人等, 所用資費, 以及文函往來脚力, 均由朝鮮政府, 自行辦理, 不得向英國政府取償。 五, 英國商船, 在朝鮮左近海面, 如遇颶風, 或缺糧食煤水等需用之物, 無論是否通商口岸, 應許其隨處收泊, 以避狂颶, 兼修船隻, 購買一切缺少之物。 所有花費, 全由船主, 自行備辦。제7관1. 영국 선박이 조선 영해에서 사나운 바람을 만나 일을 그르치거나 좌초되어 뜻밖의 사고가 생겼을 때에는 조선의 지방 관원이 즉시 한편으로 속히 대책을 강구하여 가서 구제하는 동시에 조난당한 사람들과 배의 화물을 보호하여 줌으로써 본 지방의 불량배들이 멋대로 약탈하고 침해하는 것을 면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속히 부근의 영국 영사(英國領事)에게 통지하는 동시에 구해낸 영국 조난민들을 분별하여 여비를 주어 부근의 통상 항구로 보낸다.2. 조선 정부에서 내어 준 영국 조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의복, 식량, 호송비 및 건져낸 시체를 매장하고 상처와 병을 치료한 각종 비용에 대해서는 영국 정부가 그 액수대로 반환해 준다.3. 조난당한 선박에서 건져내어 보호한 비용과 그 배의 화물을 건진 비용은 배와 화물을 본 주인에게 반환할 때에 본 주인은 그 액수대로 반환해 주며 영국 정부에 보상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4. 조선국에서 파견한 관원과 지방에서 보낸 무관과 순시원, 인부들이 영국 조난선이 곤경에 빠진 장소에 갈 때에 쓴 비용 및 조난당한 영국 사람들을 호송하는 문관과 무관들이 쓴 비용, 그리고 문서가 오가는데 드는 경비는 모두 조선 정부에서 자체 해결하고 영국 정부에 보상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5. 영국 상선이 조선 부근의 바다에서 사나운 바람을 만났거나 혹은 식량과 석탄, 물 등 필수품이 결핍되었을 때에는 통상 항구든 아니든 관계없이 임의의 장소에 정박을 허락하여 사나운 바람을 피하면서 선박을 수리하고 일체 결핍된 물건을 구매하게 한다. 소비된 비용은 전부 선주(船主)가 자체 마련한다.또 한 가지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바로 고종실록(高宗實錄)기사에 등장하는 각국(各國) 통상수호조약(通商修好條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풍(颶風) 즉 토네이도(tornado)에 대한 두려움이다.물론 조약을 체결하는 모든 국가에서 조선 내에서 발생될 수 있는 토네이도로 인하여 피해가 발생할 시 조선에서 편의를 제공하게 한다는 조건을 조약항목 관(款)에 첨가해 놓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첫째 1882년 4월6일 체결한[5]조미조약(朝美條約) 제3관(第三款)의 내용을 보면 미국선박이 조선 근해에서 구풍(颶風) 즉 토네이도를 만나거나 식량, 석탄, 물이 부족할 때 곳에 따라 정박하여 토네이도를 피하게 해주고 선박을 수리가 가능하게 한다는 내용이다.마찬가지로 한반도 번역원들은 이 구풍을 태풍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앞전 조선왕조실록 기사 예와 같은 것으로서 한반도지형을 고수하고 있는 구질구질한 모습이다.두 번째 1883년 10월27일 체결한[6]조선영국수호조약(朝英修好條約) 제7관(第七款)의 내용도 보면 공통적으로 어긋난 번역은 바로 “사나운 바람”이라 하고 있다.이 사나운 바람이 다름이 아닌 구풍(颶風) 즉 토네이도(tornado)임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허리케인일 수도 있다.한반도 역사 번역자들이 구풍이란 뜻을 몰라 사나운 바람이라고 했겠는가.더군다나 위 역사기록물은 바로 국가대 국가가 체결하는 조약 내용이다.이를 다르게 번역하거나 해석한다고 할 때 얼마나 치명적이겠는가.마찬가지로 구풍을 토네이도라고 감히 할 수 없었던 사정은 한반도 지형사정을 고려한 것이다.한편으론 이렇듯 한결같이 숨길 수밖에 없는 번역자들이 참으로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기타 이외 국가들의 조약도 구풍에 대한 우려는 다 똑같다.조선독일수호조약(朝德修好條約)도 마찬가지고 조선과 이탈리아 조약(朝義大利國條約), 조선과 러시아 조약(朝俄羅斯條約)도 같으며 조법조약(朝法條約)도 같다. 그리고 조선과 오스트리아 수호통상조약(朝奧修好通商條約)도 모두 구풍에 대한 사후대책을 마련하고 있다.이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 고종 36년(1899)9월11일,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에도 구풍에 대한 내용이 있고 고종38년(1901)3월23일에 체결한 한비(Belgium)수호통상조약(韓比利時修好通商條約)도 같으며 고종39년(1902)7월15일에 체결한 한국과 덴마크간의 수호통상조약(韓丹國修好通商條約)도 이와 같은 것은 물론이다.당시 조선을 내방하는 선박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 구풍을 두려워하고 이에 대한 사후대책을 조선(朝鮮) 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요구한 것이다.이러한 기후변화에 의한 사후보장책은 거대한 조선내륙으로 조약국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항상 전제하였기 때문이다.조선이 20세기초엽에 힘이 다 빠졌다고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구풍(颶風) 즉 토네이도가 항상 발생하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다.한반도 주위지형사정은 구풍 즉 토네이도가 발생할 염려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에도 어떤 메스미디어 보도 상에 이 구풍, 토네이도가 발생했다고 보도한 사실이 없다.또한 우리가 엄청난 피해들 주는 토네이도 즉 구풍을 한반도에서 목격한 사실도 없다.어떤가.이래도 한반도 역사를 고집할텐가.끝으로 소중화에 대한 언급도 하고 싶다.위 역대요람(歷代要覽)에 보면 굳이 명과 조선을 나누고 조선(朝鮮)사람이 명나라에 관직에 입직할 것도 아니면서 회시(會試)에 응시하려는 집착 때문에 구풍(颶風)이 몰아치는 머나먼 대양(大洋)을 건너명나라로 가다가 향시(鄕試)에 합격한 우수한 인재들을 모두 익사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비통함이 극에 달하는 것이다.잘못된 역사해석은 이렇듯 아까운 인재들을 아무의미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다는 사실이다.회시(會試)라는 것은 고려(高麗)때 지방(地方)에서 뽑힌 향시합격자들이 국자감(國子監)에 모이어 다시 보는 시험(試驗)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조선내에서 다시 시험을 보는 것과 같다.어디가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라는 이야기다.다만 조선이 거대하니 바다와 같은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다.조선은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고 또한 지방임을 뜻하며 고려(高麗)는 중앙(中央)이라 하여 곧 중국(中國)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바르게 알면 얼마나 역사가 쉬운 것인가.조선(朝鮮)의 역사를 왜 우리스스로가 이토록 축소하고 나약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을까?오늘날 조선(朝鮮)을 소중화(小中華)라는 것은 미국을 소중화라 하는 것과 같고 뉴욕 또는 워싱턴을 중국이라 하는 것과 같은 논리임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샌프란시스코" rel="tag" target="_blank">샌프란시스코</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토네이도" rel="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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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燕)나라와 제비(barn swa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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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燕)나라와 제비(barn swallow)글쓴이:한부울머리말신중국과 한반도노정기의 불편한 상식제비원산지 파악과 흥부가 제비의 근원지 확인연나라와 삼한역사의 위치사서로 확인되는 연(燕)나라마무리머리말또 한 번의 8.15 광복절이다.광복절 태극기 대신 일장기, 욱일기를 개시한 사건(?)이 인터넷 기사를 장식한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연예인들이 개입된 사건이니 젊은 사람들에게 충격이 클 것이다.당사자 연예인들을 고용하고 있는 소속회사가 열도일본자본과 기획한 의도된 사건이라 할 때 이는 참으로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당사자들은 일단 이같은 의혹을 부정하겠지만 열도일본자본 노예들이 저지르는 것이라 할 때 파장은 일파만파가 될 것임도 예측되는 것이다.자본주의사회라 하여 국가관과 역사관을 무시하고 자본만을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물론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믿지만 이러한 열도일본식민지역사에서 앞으로도 꼴통들의 무분별한 야스쿠니신사참배같은 속 끊여야 할 일은 비일비재할 것인데 하필 광복절을 이용했다는 것은 열도일본우익들이 개똥같은 역사를 사실화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며 우리의 약점 즉 트라우마를 건드리고자 하는 돼먹지 않은 장난이라 할 수밖에 없다.매냥 같은 이야기지만 광복절은 위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민족에게 반복되는 트라우마(trauma)를 또 한 번 각인시키는 행사라고 생각되는 글쓴이의 특별한 상식에 있다.그 만큼 피해역사에 대한 강박관념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겠지만 바른 역사를 어느정도 안다고 해야 할 것이다.어느 민족이든지 크던지 적던지 간에 역사 트라우마는 공히 다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우리처럼 이렇듯 치유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트라우마는 아마도 세계민족 어느 민족에게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역사가 우리 것이 아닌 것을 부여안고 이렇듯 트라우마를 겪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 아닌가.열도일본인들은 지금 착각에 빠져있다.마치 대조선을 붕괴시킨 역사주체가 열도일본 그들인 줄 착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서양인들이 물려준 앨비언(Albion)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다.그것이 마치 동양사에서 대조선을 겁박하던 세력으로 비춰지고 스스로 도취된 사실도 알련지 모르겠지만 헛된 꿈에서 깨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열도일본인들도 따지고보면 95%정도은 정상안데 5%가 말썽이다.그중에 1%정도가 정치가의 세습으로 인한 권력자이거나 과거 자본주의 형식을 빌어 자본가들이 그세력을 차지하고 있다.나머지 4%정도는 군중심리에 의한 추종자일 것이다.자기역사도 아닌 것을 착각하여 자기역사로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명실공히 일제는 시어도어루스벨트가 존재한 미국이어야 한다.이것이 본질의 역사이고 우리가 그나마 트라우마를 가질 수는 조건의 역사이어야 맞다.열도일본인들은 아시아대륙 고려의 지배지영토로서 그 구성원들은 모두 고려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이 옳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 바른 역사적 정체성이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다.정체성(正體性)을 사전에 찾아보면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 유기적인 결합성을 깨닫는 성질에 의한 동태적(動態的)인 개념으로 정리되지만 영어 “아이덴티티(identity)”는 일체감과 일치성, 동질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자아(自我)가 생성되는 토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것은 개인차원에서 신원, 신분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협의의 역사라 한다.그렇다면 국가와 민족차원에서의 광의의 정체성은 어떨까?주체성과 자주성을 발효케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강한 애국(愛國)과 애족심(愛族心)이 생성된다.대한민국 정체성은 무엇인가.3.1독립을 깃 점으로 하는 1945년 이후의 정체성일 뿐이다.대한민국 정체성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희한하게도 근세기 독립이란 틀을 깔고 있다.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한반도인(韓半島人)들은 열도일본(列島日本)으로부터의 독립(獨立)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때문에 늘 상 열도일본인들을 상대로 역사 트라우마(trauma)를 겪고 있다.그렇다고 하여 이 말로 안되는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일반적으로 자랑스러웠던 과거 역사(歷史)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역사적 정체성이 한반도 역사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것으로서 식민지역사와 피해역사만을 인정한다는 희한한 문제가 있다.정치인들은 똑똑한 유권자(有權者)보다 어리석은 유권자(有權者)를 더 좋아하는 이치이다.자랑스러워해야 할 역사는 인정하지 않고 식민지역사와 피해역사만을 인정하는 대한민국, 대한민국 사람들이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할 수밖에 없다.이것으로서는 강한 애국심과 애족심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다.오히려 분열과 갈등만을 부추길 뿐이다.어찌할 것인가.열도일본인들을 흠모하는 친일파들만 늘어나고 그 잘난 친일파들은 부끄러운 것보단 떳떳하다고 여긴다.대한민국 정치토대로 더 이상 꿀릴 것이 없다는 말이다.이제 또 한 번 을사국치(乙巳國恥)같은 사건이 벌어지면 이완용과 같은 5적(賊)들이 넘쳐날지도 모른다.왜냐하면 전례를 빙자하여 그들은 추호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비록 식민피해역사, 강박의 역사가 조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대한민국이 힘을 잃고 정말로 열도일본인들에게 예속(隸屬)되거나 스스로 산산조각이나 존재자체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 뻔하다.이러한 사태를 사전에 막을 애국심과 애족심은 강요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자랑스럽게 하는 철저한 역사교육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걱정스러운 것은 식민지역사와 피해역사만을 알고 있는 그래서 결국 나라를 잃어버리고 유민처럼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불쌍한 후손(後孫)들이다.이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잠이 뻔쩍 깨인다.신중국과 한반도노정기의 불편한 상식연(燕)은 바로 제비를 말하는 한자이다.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제비와 정서적으로 매우 친밀하다고 여긴다.그것은 조선시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표상처럼 만들어진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 흥부전(興夫傳)에서 흥부와 놀부이야기 크라이막스(climax)에 선한 사람에게 복(福)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겐 징벌을 내리는 역할을 제비가 맡아 열연한 이유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약자입장에서 익조이고 길조인 것은 분명하다.그렇다면 과연 제비의 이러한 권선징악의 속설은 한반도 사람들에게만 국한 된 이야길까?그렇지 않다고 본다.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인식이었던 것이 분명하다.중국기록만 보아도 제비는 예로부터 익조(益鳥) 및 길조(吉鳥)로 여겨져 왔다. 연미복(燕尾服;swallow-tailed coat)이라고 알려진 남성복식 중 최고로 예를 갖춘 복장이라고 알려진 모닝코트(Morning Dress)가 바로 그것이다.일반적 또는 관습적으로 좋은 일을 가져온다고 여기던 조류인 것은 틀림없다.특히 봄에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해 준다고 하고 9월 9일(重九日)에 강남(江南)갔던 제비가 3월 3일(삼짇날)에 돌아온다고 하는 것은 제비의 강한 귀소성과 함께 "9"와 "3"은 숫자적으로 신앙적 믿음이 있으며 무엇인가 제비로 하여금 강한 희망과 이익을 전달받을 것 같은 인간의 절박한 소망들이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또 제비가 새끼를 많이 낳으면 농사가 잘 된다고 하여 이 새의 다산(多産)형태를 길조(吉兆)로 여겨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길조(吉鳥)로 환영을 받고 있으며 제비가 높이 날면 날씨가 쾌청하고 낮게 날면 비가 내릴 것이고 계속 지저귀며 낮게 날 때는 태풍의 예고라고 하여 기후변화의 지표로도 삼는다는 것은 한반도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세계 모든 옛 사람들에게 퍼져 있는 동물숭배사상(動物崇拜思想)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신앙적인 믿음이라 할 수밖에 없다.때문에 동서를 막론하고 추앙과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본론으로 들어가 그렇다면 흥부가에 등장하는 제비는 한반도가 귀소처(歸巢處)인가 하는 문제와 또는 한반도 제비가 신대륙 강남이라고 하는 양자강을 월동지역으로 삼았을까에 대한 의문이다.이러한 의문에서 답을 구하는 생물학적 근거가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제비의 종류도 많겠지만 일반적인 집제비라고 하는 종도 거의 북반구를 서식지로 삼기 때문이다.북반구라 함은 전 지구를 대상으로 삼을 때 확실한 근원지를 찾기란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다.한반도 제비가 날씨가 추워져 강남(江南)으로 월정(越征)간다고 하여 신중국대륙 양쯔강 이남(以南)이라는 것도 참 이상한 이야기다.제비는 멀리는 15,000km 를 이동한다고 되어 있다.이것은 캐나다에서 아르헨티나까지의 거리인 것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에서 날아 굳이 신대륙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필리핀이나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날아갈 수가 있다.흥부가의 노정기는 참으로 이해못할 이야기다.판소리 흥부가(興夫歌)에서 다리가 부러져 흥부가 정성스럽게 치료하였던 흥부 집 제비는 추위를 나기 위해 강남(江南)으로 갔다가 이듬해에 보은(報恩)의 박씨를 물고 만 리(萬里)길을 날아오는 내용의 제비노정기는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만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틀림없다.한반도 지형으로서는 여기서 말하는 노정을 그대로 애초부터 도저히 풀 수가 없는 난해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이미 본 블로그 글"만리조선(萬里朝鮮) 제비노정기와 제비(家燕 : Barn Swallow) http://blog.daum.net/han0114/17049629"를 통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해석해 보았지만 놀랍게도 북아메리카대륙의 지형에서 벌어진 사실임을 밝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물론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풀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이 흥부가는 특히 한반도인들에게 픽션이기 이전에 역사사실과 결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어찌보면 한반도 제비는 생리현상을 그대로 표출하지 못하는데서 매우 불쌍한 제비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한반도에는 한강말고는 특별히 강남이라 할 곳이 없다.때문에 신중국 양자강이남을 강남이라 하지만 기후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요소가 적지 않다.흥부가의 제비는 어쨌든지 중국 강남(江南)으로 매년 날아가야 하는 형편이고 보니 애처롭게 여길 수밖에 없다.어쨌든 남해를 건너도 열도가 아니면 필리핀까지 적지 않는 비행경로이다.때문에 한반도 역사를 만든 세력들은 아마도 신중국 대륙을 대상으로 하고 기어이 황해(서해안)를 건너게 하였을 것이다.그러거나 말거나 바다이든지 육지이든지 가리지 않고 한반도 제비는 용감하게 신대륙을 온통 휘돌아 귀소성(歸巢性)만은 절대로 망각하지 않은 체 만리(萬里)길을 거뜬히 휘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하니 그만해도 다행스런 것이다.길을 잃고 올 수 없었다고 가정하면 한반도인들이 얼마나 실망했겠는가.한반도까지 오기 위한 만 리(萬里)길을 이러니저러니 한들, 비현실적이니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니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는 문제는 이런 모순이 있음에도 한반도 구성원들은 이를 철석같이 믿고 그것에 의해 한반도 사관이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제비노정기를 취재한 어느 일간지의 기자님의 말씀은 이렇다.우여곡절 끝에 어찌하든지 서해안을 건너 강남으로 갔다가 다시 이듬해 강남에서 동정호(洞庭湖) 소주(蘇州)와 삼강(三江)지방의 여덟 곳 차례차례 구경하고 나서 남경누대(南京樓臺) 봉황대(鳳凰臺)에 잘 놀았으면 내처 동중국해(東中國海) 건너 조선(朝鮮)땅 지리산(智異山)향할 일이지, 엉뚱하게 갈지(之)자로(?), 내륙 유람에 날 가는 줄 모르고 호북성(湖北省)의 황학루(黃鶴樓), 안휘성(安徽省)의 계명산(鷄鳴山), 강서성(江西省)의 남병산(南屛山). 화중(華中)과 화북(華北)을 훌쩍 뛰어 생략하고는 만리장성(萬里長城)넘어 요녕성(遼寧省)의 갈석산(碣石山)까지 잘 오는가싶더니 도로 연경(北京)으로 내려와 장안(西安)과 낙양(洛陽)사이 동관(東關)까지 내려와서는 축지법 쓰듯 훌쩍 청나라 발상지로 알려진 흑룡강성(黒龍江省)의 영고탑(寧古塔)까지 올라갔다 그제야 압록강 건너 의주 통군정(義州統軍亭)에 다다른 것이라고 흥부가의 제비에게 투정을 한 것이다.어찌보면 상당히 희언(戲言)적인 표현이고 그가 신문기자라는 직업에 맞게 한담(閑談), 만담(漫談) 가십형태로 제비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듯 하지만 문제의 핵심에서 무척 혼란스러워 했던 것이 분명하다.왜냐하면 그는 한반도 역사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 소설의 마무리는 마침내 한반도에 들어와 흥부네가 살고 있던 곳에 안착했다고 하지만 한반도에 들어와서도 전라도 운봉(雲峰)과 경상도 함양(咸陽) 얼품(두 지역이 맞 닿은)지역에 이르기까지 괜히 쓸데없이 기자 말마따나 제멋대로 들락날락 제비 노정(路程)은 복잡기만 했던 것은 분명하다.이러한 평가들은 작가가 그린 노정 자체가 신대륙 중국지형이나 한반도 지형사실과 너무 동 떨어지면서 상식적이며 자연스러운 제비노정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갈지(之)자가 무엇인가.만취한 사람이 자신을 가누지 못해 흐느적거리며 걷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다.기자 말대로 “강남에서 동정호(洞庭湖) 소주(蘇州)와 삼강(三江)지방의 여덟 곳 차례차례 구경하고 나서 남경누대(南京樓臺) 봉황대(鳳凰臺)에 잘 놀았으면 내처 동중국해(東中國海) 건너 조선(朝鮮)땅 지리산(智異山)향할 일이지...” 쓸데없이 여기저기 올라갔다 내려갔다 노정자체가 신대륙 지형에서 이런 현상이 있다는 것은 신대륙 지형에 지명역시 이상하다는 뜻이다.한반도 역사가 그렇고 또한 동아시아대륙 역사가 그렇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충분하게 검토하고 입증한바대로 엉망진창인 것은 근세기에 지명 옮기기가 시작되면서부터 벌어졌던 예고된 혼란인 것이다.제비가 술에 취해 올라갔다 내려갔다 쓸데없이 시간 소모했던 것일까.펵션을 전제하고 소설을 쓰던 작가역시 상식적인 근거로 지명을 거명했을 것이다.실제로 제비가 비행하는 노정을 인간이 어떻게 일일이 그것을 식별하고 검증할 수가 있었겠는가.작가가 가지고 있던 지형적인 상식일 뿐이다.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현재에 이르러 각 거명되는 위치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작가의 오래된 지형상식이 갑자기 갈지자 노정으로 비춰진 것이다.픽션이니 작가마음이고 주인공인 제비 제멋대로 날라 다녔을 것이라고 하지마라.역사개념이 없다고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고 토로하는 것일 뿐이다.제비노정기는 픽션이기이전에 역사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갈지자의 노정이 동아시아대륙 역사가 되어 있고 한반도 역사로 각인되어 있다.한반도에 귀소, 즉 돌아오는 길에 굳이 북쪽 압록강을 건너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이것은 한반도 지형을 맞춰 보는 것일 뿐 실제로 압록강은 제비가 강남갔다고 돌아오는 길 과정에 있을 뿐이다.이상한 것이 전혀 없다.압록강(鴨綠江)은 절대로 겨울철에 영하(-)20℃∼(-)30℃ 로 내려가고 압록강 북쪽이 척박한 지역인 그것을 제비가 건너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어야 한다.흥부가의 제비가 강남으로 간 곳은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이남이다.제비원산지 파악과 흥부가제비의 근원지 확인이제 생물학적으로 제비를 들여다 볼 차례이다.생태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날개길이 11-12㎝, 꼬리길이 7-10㎝, 몸무게 12-22g 정도로 제비의 등은 금속성 광택이 나는 청색, 가슴은 밤색이며, 꼬리는 깊게 패여 있는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으며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름새로, 이동할 때나 번식 초기에는 암수 또는 단독으로 생활하나 번식이 끝나면 가족과 함께 무리를 짓고 거의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으로 설명된다. 날아다닐 때는 날개를 펄럭이기도 하고 날개를 멈추고 미끄러지듯이 날기도 하며 번식이 끝난 6-10월 사이에는 평지의 배 밭이나 갈밭을 잠자리로 하며, 해가 진 후 수천 또는 수만(數萬)마리가 무리를 지어 모여들며 인가 또는 건축물의 적당한 부분이나 다리 등에 둥지를 짓고 산다. 둥지는 보통 한 집에 한 개이고 매년 같은 둥지를 보수해서 사용하고 어쨌든지 귀소성이 강하여, 매년 같은 지방에 돌아오는 예가 많은 것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산란기는 4-7월경이며, 한배에 3-7개의 알을 낳고 연 2회 번식하며 2회째의 산란은 1회의 새끼가 떠난 후 12-16일경에 이루어진다.새끼는 알을 품은 후 13-18일 만에 부화하고 그 후 20-24일이면 둥지를 떠나며 암수가 함께 새끼를 기르는 것으로 해서 먹이는 파리·딱정벌레, 매미, 날도래, 하루살이, 벌, 잠자리 등의 날아다니는 곤충 등이며 일반적으로 월동지역은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남부, 인도, 동남아시아, 필리핀, 뉴기니, 남아메리카라고 알려진다.제비 연(燕)은 영어로 "barn swallow"라고 한다.이것을 가연(家燕)이라던가, 관음연(觀音燕), 졸연(拙燕) 등의 이름이 있다.생물학적 분류체계를 보면 조강(鳥綱:Aves), 참새목(雀形目:Passeriformes), 제비과(燕科:Hirundinidae)로 분류하여 아일랜드동물학자(Irish)이며 정치가인 니콜라스 비거스(Nicholas Aylward Vigors:1785-1840)에 의해 제비과가 명명되었다.이 제비과(燕科:Hirundinidae)에서 19속(屬:genera)의 83종(種:species)으로 나타나며 제비속(燕屬:Hirundo)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제비(Barn swallow)는 가연(家燕:Hirundo rustica)종(種)으로 분류된다. 이 제비속에는 제비(家燕) 이외 13종(種)이 있고 그 종류는 일반적으로 생소할 수밖에 없는 붉은가슴제비(赤胸燕:Hirundo lucida)외, 앙골란제비Angolan swallow(Hirundo angolensis), 태평양제비Pacific swallow(Hirundo tahitica), 喜燕welcome swallow(Hirundo neoxena), 白喉燕white-throated swallow(Hirundo albigularis), 에디오피아제비Ethiopian swallow(Hirundo aethiopica), 線尾燕wire-tailed swallow(Hirundo smithii), 흰턱받이제비white-bibbed swallow(Hirundo nigrita), 얼룩날개제비pied-winged swallow(Hirundo leucosoma), 흰꼬리제비white-tailed swallow(Hirundo megaensis), 진주빛가슴제비pearl-breasted swallow(Hirundo dimidiata), 푸른제비blue swallow(Hirundo atrocaerulea), 검적갈제비Black-and-rufous swallow (Hirundo nigrorufa)등이 있다.한반도에는 속명어원이 강뚝, 강기슭이라는 갈색제비속(Riparia)과 북반구 서식하는 일반 히룬도 제비속(Hirundo), 산간지대의 집이나 바위동굴에서 사는 흰털발제비속(Delichon)의 3속(屬) 4종(種)이 분포한다. 흰털제비는 린네가 1758년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라는 책에서 ‘Hirundo urbica’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술하였으나, 미국내과의사이며 동물학자인 토머스 호스필드(Thomas Horsfield:1773-1859) 와 브리티시 곤충학자 프레데릭 무어(Frederic Moore:1830-1907)가 1855년 이 새를 현재의 흰털발제비속에 두었다고 위키 자료는 말하고 있다. 家燕(Hirundo rustica),是在亞洲、歐洲、非洲和美洲常見的候鳥,屬於燕科燕屬。科學分類界: 動物界 Animalia門: 脊索動物門 Chordata綱: 鳥綱 Aves目: 雀形目 Passeriformes科: 燕科 Hirundinidae屬: 燕屬 Hirundo種: 家燕 H. rustica二名法Hirundo rustica Linnaeus, 1758 신중국 자료를 보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제비라 하는 것을 가연(家燕)이라고 하였다.이것을 학명(學名)으로 히룬도 루스티카(Hirundo rustica)이다.집제비라고 알려지는 린네의 흰턱제비(common house martin:Hirundo urbica)는 흰털발제비(Delichon urbica)이며 둥지입구가 터널형으로서 같은 집 제비(家燕:Hirundo rustica)의 사발형 둥지와 다른 종이다. [1]Hirundo rustica rustica Linnaeus, 1758 Eurasian Swallow[2]Hirundo rustica erythrogaster Boddaert, 1783[3]Hirundo rustica savignii Stephens, 1817 Egyptian Barn Swallow[4]Hirundo rustica transitiva (Hartert, 1910) Levant Barn Swallow[5]Hirundo rustica gutturalis Scopoli, 1786 Amur Barn Swallow[6]Hirundo rustica tytleri Jerdon, 1864 The barn swallow was described by Linnaeus in his Systema Naturae in 1758 as Hirundo rustica, characterised as H. rectricibus, exceptis duabus intermediis, macula alba notatîs. Hirundo is the Latin word for "swallow"; rusticus means "of the country".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학명 히룬도 루스티카(Hirundo rustica)를 일반적인 제비"barn swallow"라 하고 이것을 린네(Carolus Linnaeus:1707–1778)가 그의 저서 자연의 체계(自然系統:Systema Naturae)를 통해 1758년에 발표되었다고 알려지며 속명 히룬도(Hirundo)는 라틴어 제비(swallow)라는 뜻에서 가져온 것이고 종명(種名) 루스티카(rustica)는 국가 혹은 나라(of the country)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본 이야기의 주제인 연(燕)나라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고 있다.Barn swallows are a common group of birds, with six different subspecies found throughout the northern hemisphere (see range map above). Only one subspecies, Hirundo rustica erythrogaster, is found in North America; the others are distributed throughout Europe, Asia, and the Middle East. Most importantly for us, these different subspecies have evolved recently, perhaps as recently as the last 10,000 years (which is a very short time, evolutionarily speaking). 위 영어자료를 보면 제비는 북반구 전체에 걸쳐 발견되는 여섯 가지의 아종(亞種)으로 일반적인 그룹이라고 하였고 다만 한 가지 아종(亞種)인 “Hirundo rustica erythrogaster”는 북아메리카대륙(North America)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다른 것들은 유럽, 아시아, 중동지역에 걸쳐 분포한다고 하였다.제비 기원은 약 일만년(一萬年)을 말하고 있고 지금까지 수많은 아종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어쨌든지 제비의 생물학적 기원은 거의 10,000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제비는 인류역사와 함께 생활했던 것은 분명해진다.우리가 알고 있는 제비의 제비속(燕屬:Hirundo)종류들의 근원지, 네티브(Native)가 본래 아프리카대륙이라고 한 것은 인류생성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확장되어 아메리카까지 범위를 확대한다고 설명된다.그러나 글쓴이는 인류생성이 아프리카대륙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아래는 북반구 전체에 걸쳐 발견되는 여섯 가지의 아종(亞種)을 하나하나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1]Hirundo rustica rustica Linnaeus, 1758 Eurasian Swallow이것은 유라시아제비라는 별칭을 가지는 것으로 린네가 학명을 명명한 것이다.위 분포지도 채색된 그림을 보면 붉은 색이 유럽대륙과 유라시아지역 전체를 표시하고 있다.[2]Hirundo rustica erythrogaster Boddaert, 1783 Barn Swallow린네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명명된 것으로 이 시기는 분명 코리아 시대이며 코리아인에 의해 분류된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위 분포지도 채색된 그림에서 초록색으로 북아메리카대륙 툰드라지역을 제외한 전지역과 멕시코 어머니의 산이라고 하는 시에라마드레 산맥(Sierra Madre Occidental)이동지역까지를 경계로 한다. 어쨌든지 이 종을 제비(Barn Swallow)라고 한다.[3]Hirundo rustica savignii Stephens, 1817 Egyptian Barn Swallow이집트제비라는 별칭의 종으로 위 분포지도 채색된 그림에서 갈색으로 현 이집트 일부분만 조그맣게 나타내고 있다.[4]Hirundo rustica transitiva (Hartert, 1910) Levant Barn Swallow이것은 역시 채색그림에서도 볼 수 있고 학명 명명시기조차 근세기에 아루어진 것이라 존재감이 없다.레반트(Levant)라 하여 지역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 들어나는 근원지라는 개념보다 취약할 수밖에 없는 서양위주의 역사 근동(近東)의 팔레스타인(고대의 가나안)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를 상징하는 것으로 비춰질 뿐이다.[5]Hirundo rustica gutturalis Scopoli, 1786 Amur Barn Swallow굳이 이것은 동아시아지역 종으로 구분된 듯한데 분포지도 채색그림에서 푸른색으로 동아시아대륙전체를 표시하고 있지만 강남을 경계로 하는 양자강범위까지를 그려놓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글쓴이가 말한 흥부가의 강남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한다.[6]Hirundo rustica tytleri Jerdon, 1864마지막으로 분포지도 채색그림에서 보라색인데 북아메리카대륙 처럼 툰트라지역을 제외하고 유라시아지역와 아시아지역을 빼고 난 후 나머지지역으로 억지로 꿰 맞춘 듯한 느낌이다.이렇게 볼 때 실제로 가장 제비근원지로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종은 물론 북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하는 [2]Hirundo rustica erythrogaster Boddaert, 1783 Barn Swallow 임을 밝힐 수가 있다.gutturalis or saturataHirundo rustica gutturalis Scopoli(1786): East Himalayas to ne Myanmar, Japan, Korea; >n AustraliaHirundo rustica [saturata or mandschurica]: Northeast China; >SE Asiagutturális (gutturalis) 헝가리어=throatyGutturalis - German to English=guttural 목구멍, 인후의 소리한반도의 제비 종(種)은 왜 구체적이지 못할까?동아시아대륙에 묻혀 갈 뿐 흥보가가 알려지는 영향력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한반도에 서식하는 제비 속명을 세 가지라 하고 제비속(燕屬:Hirundo)을 말하고 있지만 동아시아대륙에 위 그림 자료에서 보듯이 가연(家燕:Hirundo rustica)종 중에서 히룬도 루스티카 구투랄리스“Hirundo rustica gutturalis”아종(亞種)에 대해 어디에도 구체적으로 밝힌 사실이 없다.아마도 북아메리카대륙 접근은 금기시 된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이다.이 종(種)은 이탈리아 내과의사 및 동물학자인 지오바니 스코포리(Giovanni Antonio Scopoli:1723-1788)가 1786년 명명한 것으로 그는 주로 아메리카대륙에서 서식하는 조류 등을 연구한 학자인 것 같지만 국적도 그렇지만 여러 자료에 나타나는 사실 또한 엉뚱한 곳에 그를 집어넣고 있다.그가 명명한 “Hirundo rustica gutturalis Scopoli(1786)”의 종명 구투랄리스(gutturalis)는 일반적인 라틴어 사용과 다르게 옛 헝가리어와 독일어로 나타나고 공히 목구멍과 인후를 말하고 있어 본 블로그 글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에서 이야기한 목구멍은 요해처로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중앙아메리카대륙 역사상징과 맞아 떨어지고 있지만 굳이 동양 종(種)으로 만들고 있으며 히말리아 산맥과 미얀마(Myanmar), 열도, 한반도, 인도(印度亞大陸)를 서식처라 하고 월동(越冬)지역 범위를 스리랑카에서 인도네시아, 뉴기니 섬과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포함시키고 있으니 아시아종으로서의 한계는 어쩔 도리가 없다.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아메리카대륙 알라스카 주(Alaska)와 워싱턴 주(Washington)까지 서식지를 확대하는 것에서도 의심을 크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분명 아시아 종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이것 이외 동양 종(種)으로 만주를 기원지로 하는 학명 "Hirundo rustica mandschurica 1934."가 늦은 시기에 또한 명명되었고 이 역시 유라시아제비(Eurasian Barn Swallow(Hirundo rustica saturata. Ridgway(1883))와도 섞이면서 혼란을 더하고 있다. 만주종이나 아무르종이 같은 법도 한데 굳이 나누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하여튼 서양세력들이 그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철저한 기획아래 역사새판짜기 농단을 실행했었겠지만 그들 역시 양심이 있었다면 인류사인 하나의 체제, 하나의 역사를 분리하는데서 갈등했을 것이 분명하고 수많은 모순을 동반한다는 사실에서 아마도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못하였음도 견지할 수가 있다.연나라와 삼한역사의 위치앞에서 속명 히룬도(Hirundo)는 라틴어 제비(swallow)라는 뜻에서 가져온 것이고 종명(種名) 루스티카(rustica)는 국가 혹은 나라(of the country)라는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이것에서 적어도 가연이라고 하는 일반적 제비, 학명 히룬도 루스티카(Hirundo rustica)가 서식하던 곳에 연(燕)나라가 존재하였을 것이란 또 하나의 역사사실을 유추할 수가 있다.라틴어 사전을 보아도 루스티쿠스(rusticus)는 형용사로 국가에 속하는(of or belonging to the country)으로 나타나며 명사로는 촌뜨기 또는 시골사람(a countryman)으로 정리되고 있다.때문에 분명 라틴어가 말하는 것은 제비의 종명 루스티카(rustica)가 나라를 뜻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한어 고서에서 연(燕)나라 한 사실과 일치하게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연(燕)나라는 기원전과 기원후 각각 존재하던 나라명칭이다.기원전 1046년이니 단군조선 26세 추로(鄒魯)재위 69년시기이며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동생 소공석(召公 奭)이 세운 나라로서 지금의 하북(河北)북부를 영토로 하고 북경(北京)을 수도로 하였는데, 기원전 222년에 진시황(秦始皇)에게 멸망하였던 역사 기록이 있고 후자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때, 선비족(鮮卑族)의 모용씨(慕容氏)가 건설한 나라로서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전연(前燕), 후연(後燕), 서연(西燕), 남연(南燕), 북연(北燕)이 있었다고 역사는 말한다. 번한세가 하편(番韓世家 下)을 보면 기묘년(BC222)에 번한이 교회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고 을유년(BC216)에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고 되어 있다.그러니 연나라는 조선의 후국일 가능성이 더욱 농후해지는 것이다.연(燕)은 북경(北京)을 대신하는 이름이라고 알려진다.이것은 주(周)를 전통적인 중국으로 보았고 또한 연나라 역시 중국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다.반면 한자“오래 고(古)”가 조선(朝鮮) 앞에 붙어 역사사실성을 현저히 훼손시켰다고 보고 있는 것은 고대조선(古代朝鮮)이나 현대조선(現代朝鮮)도 하나의 체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러 다민족(多民族), 대소(大小) 후국(侯國)들을 다 포함한 다국가(多國家)임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밝혀져 있기 때문에 이것들은 후세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먼저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하면 "오래 고(古)”를 조선 앞에 붙여야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선입견인지 알 수없지만 이병도 외 친일사학자들은 아마도 한반도 조선을 생성시키기 위해 당시 어떤 거대한 국가체제를 갈기갈지 찢어 나눠야 할 형편이었을 수도 있다.때문에 우선 명칭 부여가 곤란하기 때문에 모던조선의 명칭을 빌어 고조선이라 했을 것이다.왜햐하면 모던조선은 이미 중국 속국으로 충분하게 자료가 준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떠한 논리도 그들은 대비할 자신이 있었지만 고조선이라 명명한 시대는 워낙 역사가 간단하니 그들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란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고조선이란 명칭은 한반도 조선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서기1920년을 깃 점으로 아무튼 서양세력들에 의해 삼한역사가 축소된 것은 분명하다.1920년은 누차 이야기 한 것이지만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명 비평가이고 역사학자라고 하는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1866-1946)가 1920년에 역사윤각이란 풀이의 세계사강(世界史綱:The Outline of History)을 출판하였던 시기이다.그는 엄밀하게 따진다면 일개 소설가일 뿐이다.사회주의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회원이며 유대인들의 시온주의(Zionism)를 동조했으며 뉴 리퍼블릭(New Republic)은 근본적으로 세계연방(World federation)이 아닌 세계국가(world state)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대다수 비평가들은 시온주의를 서양인들이 주조하는 인종차별주의라고 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런 바탕아래 세계사를 출판하면서 영국인들은 본격적으로 서양사 기틀을 완성한 것이다.조선이 기존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았을 때 서양인들에게는 아마도 극복의 대상이었을 것이다.이것은 글쓴이의 매우 절제된 판단이지만 일단 고조선(古朝鮮)이라는 명칭은 당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고 하는 모든 개체들을 일거에 합칭(合稱)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심이 끊이질 않는다.이것을 분리하지 않으면 그들이 기독교 역사생성자체가 아마도 불가능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때문에 굳이 오래 고(古)를 붙였다는 것은 이러한 존재성을 고의적으로 훼손시키거나 약화시켰을 것이라는 판단이며 역설적으로 그들의 필요이상의 설레발 뒤에는 축소된 한반도 역사와 또 다른 우리가 감히 알 수 없고, 감히 근접할 수조차 없는 하나의 체제 역사가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거대하게 온 세상을 휘감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진단하는 것이다.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에서 밝혔듯이 우리민족의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이 하강한 땅을 태백(太白) 또는 새벽'샛별'이라고 하였고 사백력(斯白力)이라 하였다는 것과 삼위(三危)라는 것은 세 개의 태백(太白)이 모인 곳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처음 빛을 밝히신 천신(天神:indra) 환인(桓因)께서 온 천지(天地)가 흰색으로 뒤덮인 곳을 신성한 땅으로 여기시며 터전으로 삼았음은 물론이고 또한 평평하고 물이 맑아 물자가 풍부한 곳을 이전낙원(伊甸樂園)이라 하여 그곳을 흑수(黑水) 백산(白山)이라 칭하였다는 것을 알 때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 알라스카 데날리 국립공원(Denali National Park)내에 '대산(大山)'이란 뜻의 데날리(Denali) 또는 매킨리 산(Mount McKinley:6,144m)이 존재하고 이 의미가 애서배스카語(Athabaskan language)로 위대한 사람(the great one) 또는 높은 사람(the high one)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곧 우리말로 '머리산'과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으며 그것의 상징은 바로 환인을 뜻했음은 물론이다.태양신을 우리 곁에 두고 모셨던 것은 분명하다.이러한 나라가 또는 국가가 존재하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하나의 체제가 아니고서는 역사적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이것은 곧 인류시원의 역사이다.그러나 오늘날 성경에 활자화되어 서양 것이 되어버렸으니 잃어버린 것이다.하느님도 서양인들의 전유물이 되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임에도 잃어버린 것이다.정녕 인류시원지(人類始原地)가 이전낙원이니 환국(桓國)이며 환인께서 동시에 천계(天界)에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고 통솔하였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인류시원역사가 우리 삼한의 역사라는 사실에 감히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환국(桓國)은 7세(七世) 역년(歷年) 3301년을 존속하였고 건립연대가 BC7197년이라 한 것도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이 아니더라도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충분히 밝혀본 이야기다.그리스 고대도시 국가 아테네(雅典:Αθήνα)는 BC1500년이 건립 년대이고 유럽역사를 접목하고 있는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 BC3500년경부터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BC4500년경부터 조그마한 마을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BC3500년경에서야 비로소 도시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서양사는 말하고 있다.그렇게 볼 때 환국이 BC7197년에 건립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류시원이 어딘지가 분명해진다.그 이후 인류시원지(人類始原地)에서 점차 해뜨는 동(東)쪽으로 이동했던 것이 분명하며 이렇게 옮겨지면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까지 도달하여 전통적으로 동이계(東夷係)가 동국(東國)을 휘어잡을 수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하나의 체제가 영토를 옮긴 것이 아니라 지배자가 옮겨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근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시기에 서양교육에 몰입된 당시 얼빠진 역사학자들에 의해 고조선(古朝鮮)이라 하여 고(古)자 안에 이 모든 인류시원의 역사를 집어넣게 되면서 거대한 역사는 아예 생략하고 축소시켰던 것은 어디까지나 서양학자들이 그들의 종교생성역사, 유럽생성역사를 집어넣기가 곤란했던 것이거나 불편했을 것이 분명하다.그렇다 하더라도 비록 그들에 의해 모던(modern)조선(朝鮮)은 한반도에서 축소되었을망정 거대하기가 이를 때 없는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포함시켜 놓은 것은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이다.한반도에 집어넣기에는 무리가 따른 역사임을 그들이 어찌 몰랐겠는가.하지만 동아시아에 중국을 만들고 삼한을 만들어야 했다면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살펴보면 신라나 고려가 한반도 조선에 넣어질 만큼 작은 역사가 아니었다.고려(高麗)자체만 하더라도 유나이티드(United) 즉 연합, 연방국가 이었다는 사실이 본 블로그 글 "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연합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에서 충분하게 밝혔으며 미국인 역사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가 그의 저서[아시아역사:Asiatic history]에서 “United corea, or korai”라고 하였다는 것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이러한 연합, 연방은 마치 현재 영국을 영연방국가라고 부르는 것과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것으로 이를 이용했을 것이 틀림없다.사실상 이 “United” 란 의미는 서양인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것이고 이것을 그들은 지속적으로 모방하거나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청나라 말기인 1822년에 위원(魏源:1794-1857)이 지은 '해국도지(海國圖誌)'에 미국을 아묵리가(亞墨利加), 미리가(美理哥), 아미리가(亞美里加), 미리견(美利堅·彌利堅·米利堅)등 여러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나 1855년까지 화기국(花旗國)이라고도 했던 것은 실제로 미국인들에게 독립적인 국가명이 정립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이 독립 후 사실상 국가면모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United State"로 상당기간 동안 국가명칭으로 사용하였다는 것도 이와같은 이치에서 볼 수밖에 없다.익숙한 코리아가 들어가는 연합형식을 빌리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707년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와 동군연합하면서 지칭한 국명역시 브리튼연합“United Britain”,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다.코리아는 아마도 우리가 알 수 없는 형태에서 체제의 절정을 구가했을 것이다.고려(高麗)는 신성로마제국과 잘 비교되고 또한 1707년 잉글랜드 역사자체를 구하는 스코틀랜드로도 비춰진다.고려보다 빠른 시간대에 생성된 신라를 껴안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신라(新羅)가 어떤 역사이던가.신라에는 유럽인들에게 아마도 모체라고 느낄 수 있는 역사 DNA 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러각도에서 읽을 수가 있다.새신(新)의 신라(新羅)가 아니라 태양신의 신라(神羅)로 해석되기도 하고 이슬람국가 역사를 또한 상징하기도 한다.아랍역사가 곧 유럽역사이다.본 블로그 글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지는 열도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8"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산제국(Sasanian Empire:224-651)과 앞선 제국 파르티아(Parthian:BC247-AC224)와 연결되고 그 이전 셀레우코스제국(Seleucid Empire:BC312-BC63)과도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 때 실제로 한반도 인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역사인 것이 틀림없다.신라의 역사는 거의가 서양역사로 탈바꿈한 것이다.유럽여행가들의 여행기를 가끔씩 보게 되는데 어디가나 신라의 흔적이 묻어난다.그렇다면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은 세계를 포괄하며 시대별마다 추호도 흔들림이 없이 다민족, 다문화, 다인종들을 하나의 체제로 다스렸다는 것도 분명해진다.어쩌면 삼한은 연합, 연방의 상징적인 명칭일 수가 있다.그리고 신라, 고려, 조선을 이러한 상징성을 잘 나타내는 명칭으로 존재하게 했고 그래서 오늘날에 다만 동양어 명칭으로서 우리가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문제는 유럽사가 끼어들기 위해 이 삼한역사(三韓歷史)를 축소시켜 하나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역사흐름 속에 그들의 역사를 끼워넣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일게다.사서로 확인되는 연(燕)나라이제부터 연나라의 고서기록들을 살펴보자.특히 고조선은 지역으로 연(燕)나라에 가까웠다는 기록이 있다.연나라는 후국(侯國)이다.수많은 후국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사기소진열전(史記 蘇秦列傳)에 의하면 ‘燕東有朝鮮’ 연(燕)나라 동쪽에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이렇게 조선은 한낱 극동만을 차지하는 나라인 것처럼 호도하기 시작한 때의 기록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그러나 놀랍게도 아래 내용만 보더라도 동아시아대륙이 아니다.사기소진열전(史記 蘇秦列傳:BC 334년경)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呼沱易水地方二千餘裏帶甲數十萬車六百乘騎六千匹粟支數年。南有碣石、雁門之饒,北有棗栗之利,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此所謂天府者也。위 전국시대의 종횡가인 낙양(洛陽)사람 소진열전(蘇秦列傳)을 잠시 풀이하면 동쪽으로 조선(朝鮮)과 요동(遼東), 북쪽으로 임호(林胡)와 누번(樓煩), 서쪽으로 운중(雲中)과 구원(九原), 남쪽으로 물갈래 호타(呼沱)와 역수(易水)가 있다."라고 하였다.북쪽의 임호(林胡)라 함은 숲과 호수로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와 대초원을 생각할 수 있으며 누번(樓煩)은 옛날 산서성(山西省)이라 하였던 것은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을 말한 것이고 서쪽으로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은 서남지형방향의 멕시코와 운무림(雲霧林)이 가득찬 중앙아메리카를 말한 것이며 남쪽으로 호타(呼沱)라 하는 것은 물이 세찬 거대한 포구(浦口)를 말하고 역수(易水)는 일수(溢水)로서 물을 넘겨서 잠기게 하는 곳을 말하는데 사시사철 홍수로 넘쳐 흐르던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하류를 지목한 것이다.이 몇 구절 되지 않는 글 속에 이미 역사가 풀어져 해쳐진다.“연나라의 영토가 이천여 리(里)에 달했으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6백승(乘), 기병 6천기(騎)으로 수년을 버티었다”하였다. “남쪽에는 갈석(碣石)이 있고 불문(佛門)을 이르는 평안한 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의 수확이 있어 백성들이 비로 경작하지 않더라도 대추와 밤 수확만으로 충분할 것이니 소위 천혜의 땅, 땅이 비옥하고 천연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라 하였다.갈석과 불문(佛門)은 바로 만주땅을 이야기 한 것이다.본 블로그 글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에서 말했듯이 만주(滿洲)는 문수보살(文殊師利:Manjusri)을 신봉하던 민족이 사는 땅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원시불교(原始佛敎)시원의 땅일 것이라고 했고 기후가 덥고 따뜻한 곳일 가능성과 여름 과일처럼 달다, 묘하다, 훌륭하다란 뜻에서 복덕(福德)과 길상(吉祥)이 더해진다고 하였으니 만주(滿洲)는 천혜(天惠)의 땅, 물자가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가 가장 좋은 적합한 지역이라는 사실과 이런 지역을 토대로 고대인도(印度)가 발상(發祥)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했던 것을 기억할 때 갈석이나 불문은 동아시아대륙의 척박한 지역인 한반도 북쪽 요동(遼東), 즉 요하의 동쪽지방 요녕성(遼寧省)이라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현재 개간이 많이 되었다고 하지만 요녕성(遼寧省)은 대추와 밤이 생산되지 않는 척박할 수밖에 없는 땅이다.왜 이런식의 막가는 역사가 한반도인들에게 주워져야만 했을까.간단하게 보아도 밤나무는 산기슭이나 비옥하고 물 빠짐이 좋은 땅에서 잘 자라며 대추나무는 땅을 가리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토양층이 깊고 물이 잘 빠지는 땅에서 잘 자라고 해 빛을 많이 요구하므로 비탈진 땅의 동남쪽, 남쪽, 서남쪽의 바람이 적게 부는 곳에서 잘 자란다고 되어 있다.특히 동해(凍害), 겨울추위에 취약한 것이 바로 대추와 밤이다.좁게보아도 뉴멕시코지역이나 텍사스이다.이와같은 사실에 서글픔이 앞선다.지금까지 한반도 인들은 옛 연나라는 요녕성 주위에 있었다고 교육을 받았다.기원전260년 신중국지도를 보아도 소위 북경이라고 하는 옛 삽주 계(薊)를 수도로 하는 지금의 요녕성이 틀림 없다.참으로 복잡하지 않는가.결국 연(燕)나라가 실제로 위치한 곳을 알기 위해 앞에서 제비원산지를 밝혀보았다.역사는 십중팔구 반드시 생물학적 판단과 일치한다.연(燕)이라고 하는 제비의 본래 서식지와 대추 또는 밤의 생육 근원지는 이미 본 블로그에서 수많은 시간을 소모하며 탐구한 사실이며 이는 모두 아메리카대륙을 지정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들어난 사실 확인을 우리가 스스로 감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역사는 자연을 거스릴 수가 없다.이것은 철칙이다.위만은 기자(箕子)의 후손 기준(箕準)의 권력을 찬탈했다고 기록되었다.기원전 195년경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1000 여명을 이끌고 요동, 요녕성(遼寧省)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초대국왕이라고 알려진다.기자조선은 고조선을 좀 더 구체화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어도 위만조선은 도대체가 정체가 불명하다.사실상 환단고기에서는 기자조선자체를 불신한다.위만조선이 멸망 할 때 우거왕의 아들 장이 한무제(漢武帝)에게 투항하고 기후국(幾侯國)에 봉분되어 한무제가 연(燕)나라 지역을 다스렸다고 나타난다. 한반도 역사가 말 하길 연나라 사람들은 중국인이란다.때문에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는 점을 들어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일환으로 중국인(中國人) 위만(衛滿)이 고조선을 식민통치한 것이라 평하였던 문제가 여기에 있다.고조선도 중국의 식민지였으니 현대조선도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이다.이것으로부터 한반도역사는 속국(屬國) 또는 종속국(從屬國)이란 기구한 역사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위만조선이 실제 했었는가 어디에 물을 것인가.일제사학자들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코리아(KOREI, COREA)가 인류사 시발점으로부터 세계를 지배하던 하나의 체제에 따른 하나의 역사라고 전제하고 단언한다면 위만조선이라는 실체가 존재했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없다.아래는 조선왕조 정조실록으로서 어째서 삼한이 하나의 체제 즉 연합이나 연방형태의 국가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사실 확인을 위해 올려본 것이다.[朝鮮王朝實錄]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 12월 21일 갑진 2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상차하여 《흥왕조승(興王肇乘)》 4편(編)을 올리면서 아뢰기를,"洪惟我東方有國, 粤自邃古, 檀君首出, 箕子東來。 自玆以降, 分爲三韓, 散爲九夷, 及至羅、麗, 始得混一, 而其敎則儒釋相半, 其俗則華戎交雜。 然而地近燕、齊, 星應箕斗, 故檀氏之起, 竝於陶唐, 箕聖之封, 肇自周武。 蓋其風氣相近, 聲敎攸漸, 衣冠悉遵華制, 文字不用番梵, 或稱小中華, 或稱君子之國, 與夫侏𠌯左袵之俗, 逈然不同。 而第自王氏之世, 壤接靺鞨, 媾連蒙元, 故禮敎不興, 倫紀不明。 擊剌以爲能事, 叛亂殆無虛歲, 檀、箕之遺風, 漠然不可見矣。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고 그 풍속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습니다.그런데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제(齊)나라와 가까웠고 성수(星宿)를 보면 기성(箕星)과 두성(斗星)의 분야에 해당되었다는데, 옛적에 단군께서 나라를 일으키신 때는 도당씨(陶唐氏:요(堯)임금)때와 일치하고 기자께서 봉해지신 것은 주(周)나라 무왕(武王)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대체로 그 풍토가 중국과 서로 비슷한데다 중국의 교화를 점차로 입게 된 결과 의관(衣冠)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고 문자도 오랑캐의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혹은 소중화(小中華)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왜가리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깃을 다는 저 오랑캐의 풍속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그런데 다만 왕씨(王氏:고려)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말갈(靺鞨)과 국경을 접하고 몽고족(蒙古族)인 원(元)나라와 혼인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예교(禮敎)가 일으켜지지 않고 윤기(倫紀)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치고 찌르는 것을 능사로 삼아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단군과 기자께서 남겨주신 풍도를 까마득히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위 글에서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중국이라 번역했지만 실제로 화(華)이다.이 화(華)는 대체적으로 고려를 대변한 명칭임을 여러각도에서 살펴보았던 적이 있다.과연 이 화(華)는 단군을 윗대로 계율을 엄격히 규제하던 세력 중심으로 요(堯)와 주(周)가 모두 동이계(東夷係)임과 역사주체로서 존재가 확인되는 것으로서 화(華)는 고조선의 영향권에 있었던 사실이며 후대에 지방은 조선, 중앙은 고려로 계보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역사명칭이다.기자가 동쪽으로 건너 왔다는 표현은 서쪽에 있었던 엄청난 지배자가 동쪽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다.본래 서쪽은 인류발상지인 환국(桓國)이 있었고 또한 고조선의 발상지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4 "에서 풀어본 바에 의하면 아메리카대륙 전체가 환국이라 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위의 기록은 바로 하나의 체제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긴데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연합이나 연방형태에서 고도로 발달된 하나의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다는 사실 역시 하나의 체제에서 문화전반적인 것에서 통일을 추구하면서도 각자 종교적인 자유를 허용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이것이 바로 최초의 연합체 형태이다.풍속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한반도 역사에서 배운사실과 현저히 다른 다문화포용정책이다.선진문화와 후진문화를 동시에 수용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종교를 유석(儒釋)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서양유교(西洋儒敎)만이 아니라 동양유교(東洋儒敎)까지를 포함한 삼한종교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불교(佛敎)라 한 것도 용(龍)과 뱀(巳)을 모두 숭배하는 힌두교만이 아니라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을 포함한 종교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이 속에는 배화교(拜火敎:示天敎)라고 없을 손가.이것이 어찌 한반도 역사란 말인가.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왕족혼인에 의해 합병함으로서 연합코리아(UNITED COREA)가 되고 그때부터 예법과 도덕, 예교(禮敎)가 일으켜지지 않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즉 윤기(倫紀)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코리아란 삼한에는 이미 동서양의 혼인이 빈번하게 이루어진 것이 확인된다.하지만 머지 않아 서양인들이 추구하는 물질이 체제를 물들이면서부터 굳건하던 하나의 체제가 여러가지 복합적인 메카니즘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그에 따른 불만들이 증폭되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면서 밑바닥부터 혼란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현재 미국을 보라.마무리 [resident(거주), breeding(번식), winter(월동), migrant(이주)]이제 마무리를 짓자.연나라가 어디에 있어야 할까?그렇다고 하여 북아메리카대륙 전체를 이야기 할 수 없는 노릇이다.현재 북경을 옛 이름으로 유주(幽州), 유연(幽燕), 계현(薊縣)이라 하였다.번역원의 해석을 보면 석목(析木)이라함은 중국의 유연(幽燕) 지역을 가리킨다 하였는데 본디는 성차(星次)의 이름으로, 십이진(十二辰)으로는 동북(東北)방향의 인(寅)이고, 이십팔수(二十八宿)로는 미수(尾宿)와 기수(箕宿)의 사이에 속하는 것은 조선과 같다 하여 같이 접했다고 하며 이곳은 유연의 분야(分野)에 해당되므로, 유연 지방의 대칭(代稱)으로 쓰인다고 하였다.이것은 석진(析津)과 같다.더하여 현 신중국역사를 보면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高陽氏) 전욱과 고신씨(高辛氏) 제곡 두 씨족 부락이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이 교차하는 유연(幽燕)지역에서 살면서 모든 북방 민족들의 시조가 되었다 하였다.분명한 것은 조선과 중국이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신중국사 만들기는 중국을 조선과 분리시켜 동아시아대륙 전체라 하고 있다.우리가 왜 여태까지 제비 근원지를 살폈겠는가.일반적으로 제비"barn swallow"라 하고 사발형태의 둥지를 만드는 제비, 또한 흥부가에 등장하는 제비는 히룬도 루스티카(Hirundo rustica)라고 할 때 속명 히룬도(Hirundo)는 라틴어 제비(swallow)라는 뜻에서 가져온 것이고 종명(種名) 루스티카(rustica)는 국가 혹은 나라(of the country)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여기서 알고자 하는 연(燕)나라의 위치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근원지 밝힘에 있어 히룬도 루스티카(Hirundo rustica)중 6종류의 아종(亞種)에서 1783년 네덜란드 내과의사 및 동물학자 피터 보다르트(Pieter Boddaert:1730-1795)에 의해 명명된 학명 "[2]Hirundo rustica erythrogaster Boddaert, 1783 "는 일반적으로 제비(Barn Swallow)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것과 동시에 위 형태의 제비로서 신빙성이 상당하다.바로 북아메리카대륙 툰드라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과 멕시코 어머니의 산이라고 하는 시에라마드레 산맥(Sierra Madre Occidental)동쪽지역까지를 경계로 하면서 바로 강남이라고 할 수있는 지역으로 북쪽으로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이 흐르고 있다.이것은 동아시아의 양자강과 비교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The name "erythrogaster"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s "erythros" meaning red, and "gaster" meaning belly.이 학명의 종명인 “erythrogaster”에서 그리스어 “erythros”는 붉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gaster" 는 볼록한 배, 둥그런 부분, 블룩하다는 의미가 있어 전체의미는 붉은 배를 가진 제비로 이해되는 종명인데 위 [2]제비사진에 등장하는 제비의 배와 똑 같아 믿음이 더하고 있다.그렇다면 연나라는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다.서두에서 살펴본 신중국과 한반도 지형으로 전혀 일치하지 않던 제비노정기의 로정을 다시금 위 북아메리카대륙에서만 서식하는 "[2]Hirundo rustica erythrogaster"를 흥부가의 제비주인공으로 하여 월동지인 남아메리카대륙[winter:월동]에서 중앙아메리카를 지나 멕시코거치고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정확하게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처음 전라도일 수 있는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서 서남쪽으로 강남으로 갔다가 다시 이듬해 강남에서 동정호(洞庭湖) 소주(蘇州)와 삼강(三江)지방의 여덟 곳 차례차례 구경하고 나서 남경누대(南京樓臺) 봉황대(鳳凰臺)에서 호북성(湖北省)의 황학루(黃鶴樓), 안휘성(安徽省)의 계명산(鷄鳴山), 강서성(江西省)의 남병산(南屛山)를 거치고 이것에서 화중(華中)과 화북(華北)을 생략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며 다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을 수 있는 위치가 어딘가를 우리가 알 수 있어야 하고 조선과 경계에서 있었던 요녕성(遼寧省)의 갈석산(碣石山)에서 연경(北京)으로가 장안(西安)과 낙양(洛陽)사이 동관(東關) 즉 관동과 같을 수 있으며 이곳을 지나 흑룡강성(黒龍江省)의 영고탑(寧古塔)당도하고 그곳에서 가까운 압록강 건너 의주 통군정(義州統軍亭)에 다다른 것이 실제로 어딘가를 우리가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참고로 제비를 국조(國鳥)로 여기는 국가는 바로 오스트리아(奥地利:Austria)와 에스토니아(Estonia)라고 하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오스트리아는 멕시코 중심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중앙아메리카에서 찾아야 할 국명임을 알 수가 있다. 끝으로 오스트리아와 에스토니아를 굳이 아메리카대륙에서 찾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 좀 더 자세한 것은 다음 글에서 하고자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다음 글은 운남성이다.<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제비" rel="tag" target="_blank">제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제비노정기" rel="tag" target="_blank">제비노정기</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흥부가" rel="tag" target="_blank">흥부가</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연(燕)" rel="tag" target="_blank">연(燕)</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이덴티티(identity)" rel="tag" target="_blank">아이덴티티(identity)</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앨비언(Albion)" rel="tag" target="_blank">앨비언(Albion)</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트라우마(trauma)" rel="tag" target="_blank">트라우마(traum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만리조선(萬里朝鮮)" rel="tag" target="_blank">만리조선(萬里朝鮮)</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barn swallow" rel="tag" target="_blank">barn swallow</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히룬도 루스티카(Hirundo rustica)" rel="tag" target="_blank">히룬도 루스티카(Hirundo rustic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erythrogaster" rel="tag" target="_blank">erythrogaster</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번한세가" rel="tag" target="_blank">번한세가</a>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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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글쓴이:한부울1.영길이국 위치풀이2.운남성의 본질3..회민반란사건과 영면전쟁4.운남성 역사에서 찾은 모순들[1]원모인의 생활지로는 부적합한 호수 전지(滇池)[2]운남성 거리 수치문제[3]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북부 고원지대[4]운남성(雲南省) 북쪽 사천성의 대도하(大渡河)[5]안데스와 동방(東方)[6]곤련(昆連)과 곤륜(崑崙), 광남(廣南)5.서남이, 서이, 서중이라고 하는 대리국6.차마고도(茶馬古道)는 소금호수, 부도호(浮圖湖)로 가는 길이다.7.은(銀)광산이 주는 역사반전8.영길이국 위치풀이의 결론들어가기 전이 글이 완성되기까지의 집요한 노력의 결실 앞에서 모든 만감이 교차한다.솔직히 이 글을 쓸 수 있기까지의 블로그 작업을 시작한지가 2005년이니 근 10년이라는 시간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실로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가장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기후지리학적, 생물학적 근거를 찾아 헤메었던 시간이 얼마이던가.기득권 사학계에 책 잡히지 않으려고 수많은 자료를 찾고 또 찾으면서 논리적으로 대비하고자 한 세월이 또한 얼마이었던가.중간 중간 엉뚱한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블로거로부터의 생각지못한 방해에 직면했을 때 그리고 삶이 먼저라는 갈등 때문에 글을 쓰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그러나 오늘날까지 그러한 쉽지 않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이만큼이라도 결실을 볼 수 있었다는데 돌이켜 보면 참 다행스럽고 잘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기존 한반도 사관에 몰입되어 있는 기성세대뿐만아니라 자라나는 희망의 세대들에게 진실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또한 지금도 끊임없이 한반도 역사에서 탈피하여 본질의 역사를 정립하는데 애를 쓰고 있는 재야 사학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애써 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본다.그것이 글쓴이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수고의 가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찾게 해준 이면에는 두 할 필요조차 없이 본 블로그를 즐겨찾기와 친구를 신청해주시고 아껴주시는 600여명에 가까운 동지들의 성원이 컸던 것도 분명하다.이 분들은 세계삼한역사를 이해하고 긍정적인 발전을 추구하고 계신분들이니만큼 천군만마와도 같다.그동안 세계삼한역사관을 공감하고 지속적으로 본 블로그를 찾아 글을 읽어주면서 늘 조언을 아끼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 준 덕분에 이러한 결과물을 돌출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 결과물을 재야사학연구에 여념이 없는 동지들에게 바치고 싶다.한반도 역사가 비록 한 줄기 빛 조차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암흑같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이 처럼 수많은 시간을 소모하면서 끊임없이 조각조각 퍼즐을 맞추듯이 맞추다 보면 결국 번듯한 결과물을 찾을 수 있다는 과정을 제시한 것 같아 뿌듯한 것도 사실이다.중간에 나약하게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했더라면 이러한 결과물은 맞이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간략하게나마 역사반전을 생각할 수 있는 연구 결과물을 두고 솔직하게 느끼는 바를 적어본다.이제부터 고대하는 역사반전의 결과물로 들어가 보자.1.영길이국 위치풀이[1]부(附) 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에 임진년 7월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 불모도(不毛島) 뒷바다에 표류해 오자, 고대도(古代島)앞 항구에 끌어다 정박시키고, 충청감사가 장계하였다.영길리국(英吉利國) 선원들에게 묻길 너희나라에서 우리나라까지 길이 먼데, 그 사이에 몇 개의 나라를 지나왔는가?”“크고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서남쪽이나 동남쪽에”큰 나라로 하나는 법란(法蘭), 둘은 품송(品松), 셋은 아라사(鵝羅斯), 넷은 오지리아(奧地里亞)입니다.[2]조선왕조실록 순조(純祖)32卷, 32年(1832)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영길리국, 애란국(愛蘭國), 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리인데 법란치(法蘭治), 아사라(我斯羅), 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위 게시한 첫번째 기록은 1832년에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 서경보(徐耕輔), 부사 윤치겸(尹致謙)과 같이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6월 말부터 이듬해 4월초까지 9개월 여간을 기록한 연원직지(燕轅直指) 기문(記文)권1에 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부록편에 나오는 기록이며 두 번째 기록은 바로 조선왕조실록 순조32권인데 위 영길리국표선기와 같은 사건을 공충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의 장계에 나타나는 기록이다.이 기록에서 소위 잉글랜드라고 알려진 영길이국에 대한 당시 위치를 설명한 내용인데 한반도사관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던 부분이기도 하다.바로 "영길이국(英吉利國)에서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나 조선(朝鮮)까지의 거리가 똑같이 7만리(萬里)로 같다는 사실과 육로로 북경까지 거리가 4만리라는 사실, 그리고 그 지역의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한 사실이다.세 가지 정도의 의문점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야 하는 중차대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바다길이라는 것은 현재 유럽잉글랜드를 의식하고 중국북경과 조선을 동아시아대륙을 감안하여 7만리라고 하였겠지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도대체 육로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말이다.도대체가 대서양동북쪽에 섬으로 자리잡고 있는 잉글랜드를 영길이국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서양사가 고집하는 동아시아대륙에 중국이 있고 북경이 있으며 조선이 있다고 하더라도 육로길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한반도 역사학자들의 시발이 1945년부타라도 해도 지금까지 이를 궁금해하지도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이것은 영길이국과 북경간에 육로가 상식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다.도대체 유럽 바다가운데 있는 잉글랜드와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북경간에 어떤 육로가 가능한 것일까?이렇게 의문을 품고 들어간다.1832년경에 영길이국(英吉利國)이 존재하던 곳은 육지로 북경(北京)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정해져야 이 문제를 풀어갈 수가 있다.또 한가지 결정적인 의문은 동아시아대륙에 있었던 운남성에서 발원한 하류가 유럽 잉글랜드 섬 한 지방을 거쳐 큰 바다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이 지구가 아닌 딴 행성에서 벌어진 것 같은 헛소리같은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떡하니 기록된 것이니 수수께끼라도 이만저만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도대체 무슨이야길까?이것은 무엇인가 현재 근대사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모순이며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헛점인 것이 틀림없다.문제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우리가 그러한 모순을 애초부터 들여다 볼 수 없었다는 큰 약점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으면 안된다.바로 주요 핵심은 영길이국의 경계(境界)가 되는 주변 변두리의 땅에서 가까운 곳에 곤련(昆連)이 있다 한 사실에서 이 곤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그곳이 근대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운남성(雲南省)일까 하는 문제, 그리고 이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하는 한줄기의 하류가 무엇을 가르키는가 하는 문제 점, 영길이국(英吉利國) 즉 잉글랜드의 한 지방을 거쳐 큰 바다, 즉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한 사실에서 영길이국과 잉글랜드가 동일한 국명인가 하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해라고 하는 바다가 어떤 바다인가 하는 점 등을 우리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밝혀보지 않으면 이 수수께끼를 도저히 풀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이 문제점을 풀 수 있는 결과물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도 크나큰 변곡점으로 나타날 것임이 틀림없다.세계삼한역사관이 발전할 수 있는 분기점으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위 여러가지 문제점을 정리했지만 핵심은 운남성(雲南省)의 정확한 위치파악이다.만약 운남성의 정확한 위치만 파악된다면 위 문제점들이 저절로 풀려날 것이고 마침내 엄청난 역사모순을 베일로 가리고 있는 근세사의 부끄러운 면상 가죽을 완전히 발가벗겨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다가설 것이 불 보듯 뻔한 사실이기 때문에 글쓴이는 이 글을 쓰면서도 알 수 없는 어떤 흥분에 쌓여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손가락 단면으로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2.운남성의 본질운남성(雲南省)!한자의 운남은 구름 운(雲)과 남녘남(南)이다.구름이 가득한 남쪽 어디에 지명인 것은 분명하다.운(雲)은 뜻을 나타내는 비우(雨)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云(운)이 합(合)하여 이루어진 한자임을 알 수 있으며 雨(우)는 천체(天體)에 관계(關係)가 있고 云(운)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수증기가 하늘에 올라 자욱이 퍼지는 모양을 읽을 수가 있다 한 것이다.뜻으로는 구름, 습기(濕氣), 높다, 많다, 멀다의 의미로 나타난다.그래서 운남(雲南)이라 함은 일단 멀다란 의미가 강하고 습기가 가득찬 구름이나 안개가 자욱한 남쪽에 어떤 지명임을 알 수가 있다.오래전부터 조선 또는 고려천자(天子)가 보았을 때 남쪽 멀리 떨어진 곳에 구름이 많고 습기가 많은 곳을 지칭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언제부터 였을까?아마도 인류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여건에서 명명되었을 것이다.운남은 바로 운무(雲霧:cloud of dew)구름과 안개를 생각하게 한다.지리학사전을 보면 수증기의 함유량은 매우 미세하여 그 반지름은 1㎛(마이크로미터)보다 작은 입자들의 뭉침으로서, 80% 이상의 습도가 유지될 때 운무(雲霧)라 한다고 되어 있다.이러한 곳에서는 사람이 살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쾌적한 한반도날씨의 보편적인 습기가 50~60%라는 것을 감안할 때 80%이상이라는 습도는 매우불쾌한 후덥지근한 환경일 것이다.2011년에 본 블로그 글 "말라리아(Malaria, 瘧疾, 唐瘧)와 금계랍수(金雞納樹, 幾那, Cinchona, Quinine)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7"에서 이 장독에 대해 밝혔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관리들이 유배, 귀양살이 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장기(瘴氣)라는 전염병이 있다하였다.장기는 열대나 아열대 산림의 습하고 더운 공기를 말하고 이것에 노출 되는 것이 장독(瘴毒)이라는 질병인 즉 말라리아(Malaria)라고 하는 학질이다.이 장독은 풍토병이라 하고 습한 기후에 따른 부패와 주위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복합적인 질병이라고 여겨지는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관료들은 그들의 죄 값보다 귀양이나 유배를 당하여 이 장독이 있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면서 염라대왕처럼 여겼다는 기록이 무수히도 많다.그러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한반도 어디에도 이런 장독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코메디같은 답답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것이 한반도 역사의 치명적이고 부끄러운 민 낮이다.물론 당시 조선을 위주로한 동양의학이 서양의학을 능가했다는 사실과 함께 이미 동양에서 금계랍(金鷄蠟)이란 식물에서 학질 치료제를 만들고 처방하였다는 사실이 있으며 이것이 서양인들에 의해 1820년에“키나”에서 “키니네(quinine)”라는 물질을 분리하였고 이 물질이 바로 말라리아에 효과를 나타내는 물질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 키니네는 놀랍게도 남아메리카대륙 페루(Peru)와 볼리비아의 케추아족사람들이 이 키니네를 발견하고 쿠웨슈아(Quechua)나무에서 채취한 즙, 당분을 가미해 민간요법 해열제로 사용되었다고 한 사실들을 위 본 블로그에서 밝혔던 것이다.cinchona tree's medicinal uses were first discovered by the Quechua people of Peru and Bolivia여기서도 치료제의 본초가 남아메리카대륙 페루, 볼리비아를 말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지형적으로 이 장독이 성행할 수 있는 곳에는 끊임없이 구름이나 안개가 끼는 장소에 발달하며 높은 습도 때문에 식물학적으로 선태류나 착생 관다발식물이 두텁게 착생이 가능한 삼림(森林)이 우거진 소위 운무림(雲霧林:cloud forest)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고 이 운무림이 거대하게 이어지는 위치가 바로 정확하게 운남성(雲南省) 지명과 관계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그래서 세계운무림분포지를 살펴보았다. [세계운무림(雲霧林)분포지:Cloud forest world distribution]위 첫그림지도에 보면 놀랍게도 이 운무림(雲霧林)분포지에 현재 운남성이 위치하는 동아시아대륙은 표시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남아메리카대륙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붉은 색이 칠해져 있는 서부쪽을 가르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 붉은 색이 칠해진 페루와 볼리비아에 케추아족 사람임을 알 수가 있어 이곳에 키니네라는 식물과 함께 옛부터 장독이 무수히 성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동아시아대륙의 운남성의 운무림은 세계운무림 축에도 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결국 상황이 모든 것이 이러하다면 운남(雲南)이라는 지명이 붙어야 할 곳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하다.반면 동아시아대륙의 운남지역 대신에 아메리카대륙에서 중점적으로 많이 표시되고 있는데 중앙아메리카대륙의 멕시코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파나마에도 일부가 있으며 남아메리카대륙에는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그리고 볼리비아 중앙으로 이어지는 안데스산맥(Andes Mountains:7,000km)을 깃 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뿐만아니라 더 멀리 아프리카대륙 서부와 콩고동부, 이디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모잠비크 동부에 뛰엄뛰엄 분포지가 점으로 나타나고 그 외 마다가스카르동부, 그리고 서남아시아의 인도아대륙 남부, 말레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섬과 술라웨시 섬, 뉴기니로 분포지가 적도를 중심으로 나타나지만 아메리카대륙만큼 강한 표시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 수가 있다.위 세계운무림분포지 그림에서 가장 표시가 굵게 나타나는 곳은 바로 남아메리카대륙의 안데스산맥이 시작하는 북부지역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칠레지역 이듯이 이곳은 명실공히 운무림의 산지라고 할 수 있고 장독 즉 말라리아가 성행하였던 곳임에 틀림없다.놀랍지 않는가, 동아시아대륙 운남성이 아니라 그곳이 남아메리카대륙일 수 있다니...특히 안데스의 구름과 안개지역(Andes cloud and mist)으로는 볼리비아(Bolivia)에서는 융가스로드(Yungas Road)가 있는 지역, 라파스 주(La Paz Department), 차파레주(Chapare Province), 코차밤바 주(Cochabamba Department)가 꼽히며, 칠레(Chile)는 바스케이 데 프레이 호리해 공원(Bosque de Fray Jorge National Park)에 나타나고, 에콰도르(Ecuador)에서는 덴다야파(Tandayapa), 민도(Mindo)로 나타나고 있다.그리고 중앙아메리카에는 과테말라 이남으로 거의 운무림이 분포하는 곳으로서 특히 코스타리카(Costa Rica)의 몬테베르데 운무림 보호지구(Monteverde Cloud Forest Reserve)이 유명한 것으로 알려지는 것이며 고도 약 1,950m 지점(코스타리카 남서부 지대에는 1,470m)에 위치하는 운무림(雲霧林)은 연중 젖어 있는 이례적 풍경을 만들어낸다고 자료에 나타난다.이러한 설명에서 동아시아대륙사를 의식한 것인지는 몰라도 동아시아대륙 운남고원지대(雲南高原地帶)를 빼놓지 않고 위키자료등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운남성이란 지명이 붙어 지칭되어야 할 곳이 어딘가가 확실하다.3.회민반란사건과 영면전쟁근세사적으로는 어떨까?동아시아역사를 보면 현 운남성(雲南省)에서 1856년부터 1873년 사이에 회민(回民) 또는 이슬람교도 무슬림(穆斯林:Muslim)이었던 두문수(杜文秀)회민반란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회민들이 희생되었고 그 사건으로 인하여 회민수가 현격하게 감소되었다는 사건의 발생지라고도 알려져 있다.이것을 판데이 란(Panthay Rebellion:雲南回變又稱杜文秀起义)이라고 하는데 1853년에 주석광산(朱錫鑛山:tin mine)에서 일하는 회족(回族)과 한족(漢族)의 노동자의 대립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다음 해에 청조(淸朝)당국이 반란진압에 만주사람 지방 무장조직 단련(團練:淸代地方民兵制度)을 투입시켜 회족(回族)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 원인으로 나타난다. 만주가 어디라고 글쓴이가 했던가.중앙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날 수가 없다.1855년, 한족(漢族)광부들과 회족(回族)광부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운남 각지에서 회족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1856년 영창부(현保山市) 회족출신 두문수(杜文秀)는 몽화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대래(大理)를 공격하고, 함락시키면서 절정을 이루었다고 되어있다.하지만 청나라는 향용(鄕勇)이라고도 하는 무장조직 단련(團練:淸代地方民兵制度)을 투입시켜 인종차별을 단행하였고 끝내 수많은 회민 희생자를 낳으면 사건 마무리가 되었다고 기록된 것이다.동양인이 같은 동양인을 학살한 것이다.이것은 근대사를 서양인들이 주도한 것이라면 무엇인가 구도가 이상하다.향용(鄕勇)은 일련 보수세력들이다.물론 본 역사에서는 동서양인들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군사조직을 일컫는 말인데 청 정부의 정규군이었던 팔기병(八旗兵)이나 녹영병(綠營兵)등이 전투력을 상실하고 유명무실해지자 청조(淸朝)는 관위(官位)나 학위(學位)를 소지한 신분이 명확한 지방 신사(地方紳士)들에게 군사조직을 만들 것을 지시하고 여기에 응한 것이 소위 증국번(曾國藩)같은 사람이며 이 사람 자신의 고향이던 호남성(湖南省)에서 향용을 조직한 것처럼 호남성의 별칭이었던 상(湘)을 본 따 상군(湘軍)이라 불렀고 대표적인 향용으로는 상군 이외에 마찬가지의 군벌인 이홍장의 회군(淮軍)등이 있는데 사조직 사병 또는 용병의 범위를 벗어날 수없는 한계가 분명하게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세력군이다.이후 이 조직체가 해산하지 않는체 군벌(軍閥)로 세력화했던 것임도 알 수가 있다.하지만 이러한 역사사실들은 모두 하나같이 영국 즉 영길이국(英吉利國)과 관계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 본 블로그 글 "철종과 함풍제 그리고 쿠데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63"에서 역사혼입사실을 밝혀본 사실인데 청군벌 이홍장(李鴻章:1823-1901)은 1896년 영국 빅토리아왕실을 당시 이롭게 하였던 인물로 인정되어 영국여왕으로부터 빅토리아 훈장(Royal Victorian Order)을 받았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동양인으로서는 빅토리아훈장을 받은 인물로서 그가 유일한 것으로 나타나 글쓴이는 이 이홍장을 영국계 중국인이었을 가능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영국을 이롭게 한 것이 아니라 영국왕실을 이롭게 했다는 설명이 이채롭게 다가오는 것이다.또한 이홍장(1823~1901)과 조선의 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생몰년도가 3년의 차이를 두고 똑 같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에 글쓴이를 포함한 재야학자들로부터 도펠겡어(Doppelgenger)란 의혹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대원군이 1873년에 은둔함과 동시에 명성황후의 등장과 빅토리아여제 탄생이 겹친다는 알 수 없는 혼란의 역사가 있다.때문에 이홍장이나 이하응은 서양계 동양사서인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서양인들은 두문수회민반란사건을 판데이반란(Panthay Rebellion)이라 한다.판데이는 버마인(人)들이 운남성에 사는 이슬람교도를 가리켜 판데이(Panthay)라고 하며 버마로 이주한 중국의 무슬림 회족들을 말하는데 주로 북부버마(northern regions of Burma)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알려진다.공교롭게도 회민반란사건이 일어난 1853년 앞 1852년 이때 영국과 버마가 1차(1824~26)에 이어 2차 충돌이었던 영면전쟁(英緬戰爭)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무슬림회족 학살의 주체가 청나라가 아니라 영국왕실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1885년 제3차 영면전쟁(英緬戰爭)을 끝으로 판데이라고 하는 미얀마(Burma)를 영국(잉글랜드:英吉夷國)에 넘겨주면서 인도(印度)와 병합하게 하고 미얀마의 마지막왕조 콘바운 왕조(Konbaung Dynasty:1752-1886)는 마침내 최후를 맞게 되었다는 사실이 있다.미얀마(버어마)에서 영면전쟁(영국과 버어마전쟁)이 회민반란사건과 연결되고 합체한다는 사실은 영국(왕실)과 영길이국(청)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문제는 인도, 버마, 영국 등을 우리가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살펴보았지만 결코 아시아대륙에서 존재한 국명이 아님이 밝혀져 있다.이 판데이 반란사건으로 회교도 희생자 수가 기록에는 12,000,000명이라고 하며 진압비용이 청(淸)화폐가치로 2400만(萬)냥, 미화 27억 달러, 한화 2조 4천억원이 소요되었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손실임을 알 수가 있다.이 사건으로 본시 이슬람민족들이 피해가 막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신라계로 볼 것인가는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어쨌거나 1648년부터 1878년까지 230년간 청(淸)지역에서 회족(回族)과 위구르(回鶌:Uygur)등 이슬람 회교반란(回敎反亂)을 묶어 동간혁명(東干革命:Dungan revolt)이라 하는데 1648년 동간혁명이 최초 발생한 다음해에 병자호란 삼전도사건의 인조(仁祖:1595-1649,재위:1623-1649)가 죽고 효종(孝宗,1619-1659,재위:1649-1659)이 등극하며 이어 213년 후 철종(哲宗)이 1862년 섬서성과 감숙성에서 회민(回民)봉기가 발생한 다음해 철종뿐만아니라 황실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가 틀림없으며 1862년(철종13)에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사건과도 신기하게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삼남지방이라는 곳에 회민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어쩌면 힌두인뿐만아니라 회인들이 인도의 주요 구성원으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많다.이것들은 거의 하나의 역사일 것이 분명해진다.철종(哲宗,1831-1864,재위:1849-1864)이 내린 서원철폐령(書院撤廢領)은 회교도와 관계할 것이고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중앙에 설치되었던 군영인 금위영(禁衛營)반란이 발생되었다는 사실도 청(淸)군벌에 의한 쿠데타라는 것을 동시에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청은 곧 영길이국(영국왕실)으로서 세계삼한역사를 농단할 수 있는 깃점의 역사 현장이 아닌가도 한다.풀어보면 이렇듯 다 풀린다.이 당시 군벌을 장악한 서양세력은 과연 어떤 세력일지 생각해보면 잉글랜드(영국왕실)말고는 없다.물론 한반도역사는 일본이라고 하겠지만 단순하게 현재 열도일본세력일 수가 없다.이렇듯 교묘하게 동서양을 분리시켜 전혀 다른 역사인 것처럼 꾸민 것에 아둔한 우리가 끌려 다닌 것을 생각하면 너무 억울한 이야기가 된다.인도(印度)에서 발생한 최후의 세포이항쟁(sepoy:1857-1858)의 책임을 물어 영국(英吉夷國)이 1874년에 동인도회사를 해산시켰다는 것도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분명 1600년 영국왕의 칙허(特許企業:Chartered company)를 받아 조직되었으며 독점적인 무역기구로 탄생하게 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임에도 국왕의 권위를 손상하고 월권행위를 하였다고 하여 한순간 해산시켰다는 것은 그들의 설립동기만큼 이상한 것이다.이것은 어쩌면 본래 인도영내(印度領內)에서 벌어진 모태사건이 있었을 것이며 인도소유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를 영길이국(英吉夷國)이 군벌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그들의 소유라 만들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이 피해의 당사자가 철종(哲宗,章皇帝)인 것으로 파악되는 무굴황제 바하두르샤 2세(Bahadur Shah II,1775-1862,재위:1837-1857)일 것으로 추정하고 그는 버마(Burma)로 추방되어 1862년 11월 7일에 양곤(Yangon)에서 사망케 하였다는 사실 또한 철종사망시간과 시간대가 일치한다.이 모든 것들이 합치되어 서양세력들은 삼한역사를 장악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4.운남성 역사에서 찾은 모순들[1]원모인의 생활지로는 부적합한 호수 전지(滇池)[2]운남성 거리 수치문제[3]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북부 고원지대[4]운남성(雲南省) 북쪽 사천성의 대도하(大渡河)[5]안데스와 동방(東方)[6]곤련(昆連)과 곤륜(崑崙), 광남(廣南)지금부터는 왜 운남성이 동아시아대륙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 현재 운남성의 위치에 대한 모순점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본다.[1]원모인의 생활지로는 부적합한 호수 전지(滇池)다시 돌아가 운남성(雲南省)을 역사실에 의거하여 살펴보자.청조행정구획행성(淸朝行政區劃行省)을 보면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을 수가 있다.남북2경(南北二京)에서 남직례가 강남(江南)로 개칭 되면서 안휘(安徽)와 강소(江蘇)로 분리되고 협서(陝西)역시 협서(陕西), 감숙(甘肅)으로 호광(湖廣)도 호남(湖南), 호북(湖北)으로 분리되어 직례(直隷), 산동(山東), 산서(山西), 하남(河南), 절강(浙江), 복건(福建), 강서(江西), 광동(廣東), 광서(廣西),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등 18성(省)으로 편제되었다.물론 때로는 조선행정편제(朝鮮行政編制)가 포괄한다고 할 때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인 것을 인정하고 조선의 8도(道)개념과 완전히 별개로 볼 필요성이 있다 할 것이다.청 편제를 보면 강서(江西)는 있으나 강동(江東)이 없다.이것은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좌우가 아니라 상하의 세로로 흐르는 강(江)을 중심으로 하는 편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현 신중국대륙에는 이렇게 상하 세로로 흐르는 큰 강(江)이 없는 것은 물론이며 이것은 아마도 동아시아대륙이 중국 땅이 될 수 없다는 중요한 핵심적 증거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대륙 중앙을 세로 지르는 강(江)이 존재한다는 것은 강동(江東)이 존재하는 것으로 이 영역은 청(淸)영역이 아니라는 가설이 생긴다.마찬가지로 하남(河南)은 있으나 하북(河北)이 없다는 것도 가로 흐르는 하(河)를 중심으로 남쪽영역만을 이야기 한 것이니 신중국대륙에서는 황하나 양자강이라 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북은 청(淸)영역이 아닌 상황을 확인할 수가 있다.강동(江東)과 하북(河北)에는 어떤 개체가 존재하였을까?바로 코리아라고 하는 조선(朝鮮)이었을 것이다.서부지역 스페인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려신라(高麗神羅)를 청(淸)이란 명칭으로 동아시아역사에서 교묘히 짜집기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오늘날 청조(淸朝) 또는 중국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역사지도에 나타나는 상황을 스페인부왕령(Spanish east indies are part of the viceroyalty of New Spain)이라고 보면 한치도 오차없이 정확하다.현 동아시아대륙 운남성은 북쪽 운귀고원(雲貴高原)에 접하고 서쪽으로 버마(緬甸:Burma), 남쪽으로 라오스(老撾:寮國,Laos), 남동쪽으로 베트남(越南:Vietnam)과 접해있다.이와 같은 지형경계구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이 실제 과거 어떤 위치에 존재했다 하더라도 위 접한 역사개체 명들은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안된다.때문에 결국 운남성(雲南省)을 제대로 찾을 때 이와같은 국명들은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구도일 것이다.이러한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밝히면 이어 후차적으로 잉카제국도 다시 평가하거나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그렇지만 지금도 줄기차게 역사굳히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글쓴이를 매우 조급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동아시아역사 굳히기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움직임 중에 운남성에 관련 된 것으로 약 258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의 지질시대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시기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원모인(元谋人)화석이 1960년대에 철도 기술자들에 의하여 현 운남성에서 발굴되었다고 야단을 떤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기이후 1966년부터 신중국대륙에는 중국역사판짜기의 문화혁명이란 불씨가 시작된다.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 화석이라 하고 아프리카를 떠난 최초의 인간이 중국에 도착한 화석으로서 신석기시대에 중국에서는 여섯 번째로 큰 담수호인 전지(滇池,면적 297.9km²)부근에서 이 원모인들이 생활하였다고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원모인들이 생활했다고 하는 전지(滇池)는 참으로 우습고 보잘 것이 없는 작은 호수일 뿐이다.고어(古語)는 진남택(滇南澤)이라고도 하여 못으로 인식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평균깊이(Average depth)가 고작 4.4m 밖에 되지 않다는 것은 실망시키기에 충분하다.이런 규모의 호수가 중국 원모인의 생활터전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세계지구상에는 이와같은 허접한 호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인류가 생존했다고 하는 거창한 비유가 오히려 초라하게 여겨질 정도이다.북아메리카대륙 5대호 중 가장 작다고 하는 이리호(Lake Erie)의 표면적이 25,700km²에 평균수심이 19m이다.어디 비교나 될 수 있을 것인가.그리고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볼리비아의 티티카카호수(Lake Titicaca)는 58,000km²면적에 수심이 최고 281m 이다.이정도는 되어야 원모인 운운할 수 있지 않겠는가.[2]운남성 거리 수치문제운남성(雲南省)을 역사적으로 뜯어보면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곽창(郭昌)을 보내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였고 당시 버마와 인도를 상대로 한 무역관계를 확대하기 위해 한무제는 당몽(唐蒙)을 보내 오척도(五尺道)를 지켜 확장하도록 하고 그 이름을 서남이도(西南夷道)라고 하였다고 나타난다.바로 방향이 서남(西南)이다.宋書卷九十七 列傳第五十七夷蠻南夷、西南夷,大抵在交州之南及西南,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위 송서열전이만(宋書列傳夷蠻)에서보면 남이와 서남이는 교주(交州)에 있는데 남쪽과 서남쪽이다. 위치설명을 보면 대해가운데 대륙위에 거하고 거리는 혹은 3,500리(里)라 하고 멀리로는 2~3만리(里)라 하며 배를 타고 항해하여 거리의 리수를 알기가 불가하다. 외국 제이(諸夷)들의 리수는 정해지지 않는다.[한부울번역정리] 라고 해석할 수 있다.3500리(里)라 함은 1374km 이고 2~30,000리(里)라 함은 7800~11,781km로 환산된다.2-3만리라는 거리는 샌프란시스코나 덴버에서 칠레 남단 마젤란 해협에 있는 도시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까지의 육로거리와 비슷하다.그런데 현재 동아시아대륙 신중국 한나라 수도라고 하는 서안(西安)에서 서남이(西南夷) 운남성 대리국(大理國)의 직선거리가 고작 1,278km이다.그리고 해로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아니다.웃기지 않는가.현재 운남성의 대리가 대해(大海)가운데 대륙위에 거하는 것도 아니지만 거리가 최소기준을 맞춰보아도 턱없이 모자란다.[3]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북부 고원지대남이(南夷)나 서남이(西南夷)이라는 명칭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아야 할 지명이다.《史記·西南夷傳》西南夷傳身毒國。卽天竺也。所謂浮圖湖是也。서남이가 신독국(身毒國)이라 전하고 천축(天竺)이라 하였으며 소위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부도호(浮圖湖)가 있다.[한부울번역정리]한 것을 풀이하면 서남이(西南夷)는 화(華)에 대한 이(夷)의 종족 특히 중원(中原)의 서남쪽 혹은 파촉(巴蜀)의 서남쪽에 존재한 만이(蠻夷)집단을 총칭한 명칭이라고 어떤 연구자는 정리하고 있다.또한 신독국(身毒國)이라거나 천축(天竺)이라는 것은 바로 인도(印度)를 지칭하는 말이다.본 블로그 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의 소제 "조선(朝鮮)과 인도(印度)의 관계"에서 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함을 인도아 북부 고원지대를 가리킨다고 한 것을 대입하면 남아메리카대륙 북부를 인도(印度)라 했을 것이다.이글에서 무굴제국은 지속적으로 남쪽영역을 계속 넓혀 나가면서 6대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1618-1707,재위:1658-1707)때인 1707년경에 남부남단만 남기고 전부 영토 안에 넣는다고 되어 있다.도대체 이곳이 어디일까?실제로 보았을때 남단이라 함은 아르헨티나까지의 남부 영역이다.그러나 이런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가 사망하던 1707년때에 영국이라고 하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이 시작된 년도임을 적용할 수가 있다.물론 이때 잉글랜드자체가 소멸되고 없어질 상황에서 고려라고 판단되는 스코틀랜드로 하여금 존재를 유지하게 된 사실을 인정할 때 당시 잉글랜드라고 하는 세력이 인도를 어찌해보겠다는 식으로 막무가내 준동한다는 것은 생각하기가 어렵다.역사를 알고 보면 이슬람민족들이 대거 웅집하였던 곳이 아마도 남아메리카대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때문에 운남성에서 회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무굴 역대 황제들 중에서 정통 무슬림임을 자처한 아우랑제브(Aurangzeb:1618-1707,재위:1658-1707)는 가장 무자비한 정복자였다고 설명된다. 아리안족이 지배하는 남부 데칸(Deccan)이나 남인도 무슬림제국들을 정복하면서 아우랑제브황제가 강성의 어김없이 이슬람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힌두와 아리아인의 마라타제국(Maratha:1674-1818)의 힌두교도의 감정을 손상시켰고 고려인(그리스)과 신라인(페르시아)등의 혼혈로 된 아리아의 라지푸트족(Rājpūt)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으며 게다가 토지에 대한 재정적인 압박은 전체 행정체계를 왜곡했고 결국 그의 후계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자 제국은 붕괴되었다고 설명된다.그렇다면 남아메리카대륙에는 이때 이슬람인들을 우대하면서 오히려 힌두교인들이 소외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이 시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무굴제국은 점차 영토를 잃게 되었으며 반대로 영국(英吉夷國:잉글랜드)은 영국동인도회사(英國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를 확장하며 인도에서 상업권을 잡기 시작한 것이 1717년으로부터 1757년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1764년 북사르 전투(Battle of Buxar), 그리고 4차에 걸친 마이소르전쟁(Mysore Wars:1766-1799)에 승리하여 마침내 무굴제국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인도 전국적으로 발생한 세포이 항쟁(Indian Rebellion or Sepoy Rebellion:1857-1858)에 의해 결국 무굴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는데 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인도아(印度亞)북부 고원지대가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와 너무나도 흡사한 것이다.무굴제국 북부에는 페르시아인이 있었고 중앙에는 투르크인이 있었다고 나온다.그렇다면 중앙아메리카대륙은 페르시아와 투르크가 병립했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가 있어 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 "에서 페르시아만이 멕시코만을 가르키는 것에서 의문시 되던 점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근대사는 참으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막힌 비밀을 감추고 있었던 사실에 그저 놀랄뿐이다.[4]운남성(雲南省) 북쪽 사천성의 대도하(大渡河)B.C. 4세기 무렵부터는 철기시대가 시작되었고 한무제(漢武帝,재위:BC141-BC87)가 통치하던 이 시기에 운남(雲南)지역의 농업이 눈에 띄게 발전하여 한반도에 없었던 청동제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소, 말, 양, 염소, 돼지, 개들의 가축을 길렀다고 알려지며 이 사람들은 타이 샴족(Tai Siam)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이 타이 샴족(Siam)은 샴(Sham)','쉠(Shem)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지중해 동부 연안 지방을 샴이라고 하는데 동쪽에서 태양이 떠 오르는 곳(implying the rising of the sun in the east)즉 오늘날 비옥한 초승달(신월)지역(Fertile Crescent)이라고 알려지는 레반트(Levant)라 하며 이를 근동이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셈 족(Semites)이 거주하던 지역을 아라비아 반도라고 하고 근동에서 반월모양, 또는 초승달모양의 옥토지대를 근거로 하는 아랍인으로서 이곳에서 북쪽의 민족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서남쪽의 민족들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이주하였으며 북쪽으로 이동한 아카드인(Akkad)들은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켰다고 알려지는데 본 블로그에서 글쓴이가 몇번 주장했던 바다.이러한 사실도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한 것이다.이미 이때 운남(雲南)지역에는 청동기문화가 익숙하게 발달하여 모든 면에서 앞서는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근동역사와 겹쳐진다는 것도 따져보면 절대로 동아시아대륙 역사가 아님도 알 수가 있다.후한(後漢:25-220)이 몰락하기 시작했던 2세기 말부터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시대의 이곳을 남중(南中)이라 하였는데 사천성(四川省) 대도하(大渡河)이남(以南)과 운남(雲南), 귀주(貴州)를 포함한 명칭이라는 것이다.동아시아대륙이 아닌 사천성 대도하 이남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글쓴이는 남아메리카대륙 콜롬비아의 마그달레나 강일 가능성을 내다 보았다.마그달레나 강(Magdalena river)은 당시 콜롬비아가 차지하고 있던 파나마(Panama)에서 남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는 육상통로로 요충지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강은 산맥과 함께 요충지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때문에 서양인들은 마그달레나강 하구, 1629년에 건설된 바랑키야(Barranquilla)항구를 타고 내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아마도 이 때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아랍인 즉 회회인들이 수난을 겪은 것이 아닌가도 여겨진다.이 강은 콜롬비아 서부에서 카리브해로 흐르는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급격히 변할 수 있는 강(江)으로서 최고봉 5,364m 높이에 길이 1,023km의 코르디예라센트랄산맥(Cordillera Central)과 최고높이 5,410m, 길이 1,200km의 코르디예라오리엔탈산맥(Cordillera Oriental)의 분기점에서 발원하여 왼쪽에는 안데스산맥의 분계 코르디예라스(cordilleras)가 있고 오른쪽에는 시에라네바다 데 산타마르타(Sierra Nevada de Santa Marta)산맥이 있는데 그 가운데로 관통하며 카리브 해까지 흐르는 길이1,540km의 강이다. 위 지도 그림을 보면 지형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코르디예라산계(Cordillera山系)라 함은 아메리카대륙서부, 태평양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맥을 통틀어 이르는 것으로서 로키산맥, 시에라네바다산맥, 안데스산맥이 다 포함된다.이것들을 다 합하여 글쓴이는 태백(太白)이라고 감히 진단한다.콜롬비아는 기원전 약 1만년전,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부족이 오늘날의 보고타(Bogota)부근, 엘 아브라(El Abra)와 테켄다마(Tequendama)지역에 존재하였고 이들은 막달레나(Magdalena)강 계곡에서 살면서 서로 문화교류를 하였다고 알려지며 기원전 1천년경, 아메리카토착민 무리들은 카치케(cacique)라 불리는 우두머리의 지도로 하여금 피라미드구조의 정치체계인 카치카즈고(cacicazgo)를 발달시켰고 이 체계를 가진 카리브해 부근의 타이로나(Tayrona)문명과 보고타 부근의 고원 지역의 무이스카(Muisca)문명이 존재하였다고 자료에 나타난다.이것을 보면 고대로부터 정치체계가 완비된 국가체제가 존재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1863年,太平天囯的翼王石达开曾受困於大渡河,多次搶渡不成,“粮尽食及草根,草尽食及战马,兼之疟疾流行,死亡枕籍”,最後全軍覆沒。또한 신중국역사를 보면 1863년 태평천국의 익왕(翼王)석달개(石達開:1831-1863)는 사천성에 진출한 후 대도하(大渡河)남안의 자타지(紫打地)에서 청나라군과 그곳의 보수 반동 토사(土司)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 때 이 군사들은 잉글랜드 또는 영길이국의 왕족용병이었을 가능도 없지 않다.석달개 군사들은 물살이 빠른 대도하(大渡河)를 감히 건너지 못하고 식량이 떨어져 나무뿌리와 초근으로 군마(軍馬)들이 양식을 하였건만 병마들에게 말라리아(장독)가 퍼져나가자 베개를 깔고 죽어나갔으며 최후 청군과 토사들에 의해 전군이 소멸되어 마침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곳이다.대도하는 그 만큼 도하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명인데 험준한 협곡사이로 흐르는 강임을 정확하게 지형에서 알 수가 있다.마찬가지로 콜롬비아의 마그달레나강 역시 어마어마한 거대한 산맥 가운데로 흐르기 때문에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급격히 변할 수 있는 강이라 하였으며 이와같은 것은 오히려 사천성의 현 대도하보다 더 강력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5]레반트 동방, 안데스산맥과 동방(東方)운남(雲南)지역을 남중(南中)이라는 것은 북쪽 접하는 면은 익주(益州)라 하였고 남쪽 면을 교주(交州)라 하였으며 동쪽 면을 형주남부(荆州南部), 서쪽면 토번(吐蕃)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교주(交州)는 한나라 때 교지(漢交址), 당나라 때 교주(唐交州), 송나라 때 안남(宋安南), 명나라 때 교지(明交址)라고 불리던 곳, 그곳은 분명 안남(安南) 즉 남부베트남(Annam, South Vietnam)이다.서쪽이 토번(吐蕃)이니 티베트고원의 티베트왕국이 그곳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설명될 수가 있을 것이다.티벳(Tibet) 즉 토번이라 하지만 변형된 명칭이라 할 때 태백(太白)과 같은 음일 가능성이 있다.앞에서 제시한 송서열전(宋書卷九十七列傳)에 보면 남이(南夷)와 서남이(西南夷)는 교주(交州)에 있는데 남쪽과 서남쪽이라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또한 그곳을 남중(南中)이라 한 것으로서 바로 콜롬비아(Colombia)이다.이것은 나중에 한 번 더 이야기 하겠지만 중앙아메리카대륙에서 요해처(要害處)인 목구멍 내로우넥(Narrow Neck)을 멕시코를 통해 빠져 남행하면 바로 콜롬비아가 맞닿게 되는데 이곳을 남중(南中)이라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남중이 무슨 뜻일까.남중(南中)은 익주 남부 변군지역을 아우르는 공간개념이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어느 연구가의 설명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중심부에서 주변부를 바라보는 위치개념으로 변강(邊疆)혹은 변계(邊界)에 해당하는 변군(邊郡)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 한 것이다.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남이와 서남이, 남중등의 명칭은 중국에서 바로 볼 때 남쪽인 것은 확실하지만 현재 중앙아메리카대륙을 적용하면 서남쪽으로 특별하게 통로가 있고 그 통로가 남쪽에 도착하는 곳을 바로 남중이라는 명칭 사용을 했을 것이란 사실이기 때문에 그곳은 어김없이 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하며 파나마의 육지통로로 이어지는 곳 콜롬비아가 남중이라 할 수밖에 없다.서두에 게시한[2]조선왕조실록 순조32년(純祖32年:1832)기사에 공충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가 올린 장계에 영길리국(英吉利國)경계(境界)가 되는 주변 변두리의 땅에서 가까운 곳에는 곤련(昆連)이 있다 하였다.그렇다면 이 곤련(昆連)은 콜롬비아를 가로지르고 있는 바로 코르디예라스산계(la cordillera de los Andes)로서 최고봉 6,962m, 500km의 넓이로 7,000km 길이 세로(縱)로 이어지는 안데스산맥(Andes Mountains)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安第斯山脉的名稱來源尚不明瞭。通常認為其從奇楚亞語anti得名,意思是"東方"。例如Antisuyu(奇楚亞語"東區"之意),印加帝國其中一個組成部分。안데스(安第斯山脉:Andes)산맥이란 명칭의 기원이 불명료한 것으로 남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언어 케추아어족(Quechuan languages)의 안티(anti)라고 알려지는데 이것의 뜻은 동쪽(east)을 뜻한다고 설명된다. 즉 동방(東方)이다.이것 역시 근동지역의 레반트라는 의미와 같다.또 하나는 잉카제국의 4개 지역 중 동쪽지역(東區)을 가리키는 안티수유(Antisuyu)이라고도 한다. 만약 남아메리카대륙에 잉카제국이 존재했다면 동서남북을 나누었다는데 동쪽을 안티수유라 했다는 이야기다.이것을 보면 아메리카대륙 전체를 동(東)방으로 보았던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실제로 현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볼 때 안데스는 서쪽 편 가장자리에 현저히 편중되어 뻗어있다.그럼에도 안데스산맥을 동쪽이라는 것은 바로 본 블로그 글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은 바다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 "에서 밝힌 동방(東方)의 위치확인이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6]곤련(昆連)과 곤륜(崑崙), 광남(廣南)그렇다면 곤련(昆連)과 곤륜(崑崙)을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머리부수에서 메 산(山)을 생략한 것이 곤륜(昆侖)인데 이 역시 산 이름이다.우리나라 사서(史書)에서도 곤련(昆連)이라는 한자를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곤륜(昆侖)과 잇닿을 련의 산맥 련(連)을 의미하는 것임을 정의할 수가 있으며 때문에 음(音)에서 련, 륜, 란(난)은 같은 음이라고 전제 할 수가 있을 것이다.곤륜산맥(崑崙山脈)은 하늘을 지지하는 천주(天柱)라 한다.그만큼 신앙적인 욕소가 강하다.태백(太白)이라는 것은 티벳(Tibet)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스페인어 코르디예라산계(Cordillera山系)라 한 것임을 앞에서 글쓴이가 주지한 사실이지만 아메리카대륙서부, 태평양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맥을 통틀어 이르는 합칭의 말로 로키산맥, 시에라네바다산맥, 안데스산맥이 다 포함한 것과 같다고 앞에서도 이야기 한 사실이다.마찬가지로 스페인어 코르디예라(Cordillera)를 설명하는 것에서 보면 Conjunto de montañas alineadas a lo largo de un eje que forman una unidad.축(軸)에 따라 정렬 형성된 산의 집합단위를 말한다고 한 것과 같이 “la cordillera de los Andes; la cordillera del Himalaya” 안데스와 히말리아를 나타내는 의미라고 스페인자료에서도 분명히 하고 있다.그렇다면 글쓴이 추측대도 태백, 티벳, 코르디예라, 또는 곤륜과 같은 의미의 명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티벳에 대한 여러 설(說)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확실한 어원은 태백과 티벳은 음이 같다고 하는 사실에서 큰 테두리로 태백을 영어로 티벳이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진단되는 것이다.곤륜(昆侖)은 한나라 이후 남해(南海), 남양(南洋)에서 광동(廣東), 교지(交趾)에 내항한 권발흑신(卷髮黑身) 즉 머리털이 곱슬곱슬한 고수머리를 하고 있는 흑인을 일컫는다 했는데 곤륜노(崑崙奴), 곤륜선(崑崙船), 곤륜약(崑崙藥)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단어라고 이미 본 블로그에서 설명한 예가 있다.때문에 서남쪽의 곤륜(崑崙)민족들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이주하였다는 사실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海國聞見錄南洋記就安南接聯中國而言,海接廉州,山繞西北而環南,直至佔城,形似半月;名曰廣南灣。秦象郡、漢交址、唐交州、宋安南、明交址,陸接兩粵、雲南;風土人物,史典備載。後以淳化、新州、廣義、佔城謂廣南。因舅甥委守淳化,隨據馬龍角砲臺;北隔一水,與交址砲臺為界。自淳化而南至佔城,為廣南國,亦稱安南위 청조(淸朝) 옹정8년(雍正八年:1730)에 썼다고 하는 진륜형(陳倫炯:1687-1751)의 해국문견록(海國聞見錄) 남양기(南洋記)에 보면 이상한 내용이 많다.중국과 안남을 연결하는 말에 따르면 염주(廉州)는 바다에 접하고, 서북쪽의 산들은 남쪽으로 둥글게 포진하며 쭉 점성(佔城)까지 이른다. 이에 형상은 반월이다. 이것을 광남만(廣南灣)이라 한다. 진(秦)때 상군(象郡), 한(漢)때 교지(交址), 당(唐)때는 교주(交州), 송(宋) 안남(安南), 명(明)때는 교지(交址)라 했으며 육지로는 양쪽에 월(粤)과 운남(雲南)이 접한다고 하였으며, 순화(淳化), 신주(新州), 광의(廣義), 점성(佔城)이 광남(廣南)이다. 고로 순화를 외숙질간(舅甥)겹쳐지키는데 그곳에 마용각(馬龍角)포대가 있고 북쪽으로 떨어져 한 하천이 있으며 교지포대역시 경계에 있다 한 것이다. 그리고 순화(淳化)에서 남쪽 점성(佔城)까지 광남국(廣南國)이며 바로 안남(安南)이라 하였다.현재 염주는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의 합포현(合浦縣)으로 신중국대륙자료에 나타난다.하지만 위 남야기와는 다르게 광서장족자치구에서 보면 서북쪽 산들이 남쪽으로 베트남 점성까지 이어지는 것이 없다.또는 둥글게 포진하지 않고 반월현상을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도대체 어딜 광남만(廣南灣)이라 했단 말인가.5.서남이, 서이, 서중이라고 하는 대리국서기 621년, 당조(唐:618-907)는 운남(雲南)경내에서 요주(姚州)를 설치하였고 664년에 요주도독부(姚州都督府)를 설치하여 장악하나 현재 운남 대리시(大理市)북쪽에 엽유수(葉楡水), 서이하(西洱河:西二河)라 칭하던 이해(洱海)호수 즉 1960년에 원모인(元谋人)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택(못)의 남쪽 현 대리시(大理市)에 737년부터 조(詔)란 왕(王)을 의미하는 6조국(六詔國)을 세웠고 이 중 몽사조(蒙舍詔)가 가장 남쪽에 위치해 남조국(南詔國,大蒙國:653-902)을 건국하였으며 남조국은 중국 남서부 일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버마 북부까지 장악하였다고 한다. 902년 남조국 권신(權臣) 정매사(鄭買嗣)가 왕위를 찬탈하고 대장화국(大長和國)을 세움으로써 남조국(南詔國)이 멸망하지만 928년 양간정(楊干貞)이 다시 정권을 잡아 대의령국(大義寧國)를 세웠으며, 937년에는 통해절도사(通海節都使) 단사평(段思平)이 양간정(楊干貞)을 37개 부족들과 함께 공략하고 지금의 대리에 대리국(大理國:937-1254)을 세웠다고 알려진다. 대리국의 세력은 남조국(南詔國)이 가장 강성했을 때와 비슷해 북(北)으로는 사천성(四川省), 서남(西南)으로는 베트남, 그리고 북서(北西)로는 인도와 버마, 동(東)으로는 귀주성(貴州省)과 광서성(廣西省)의 일부까지 지배하였다고 하는데 귀주성은 정상흐름의 역사라고 볼 수 있지만 사천성(四川省)과 광서성(廣西省)의 위치문제가 분명하게 있다.특이한 것은 대리국(大理國)은 토번(吐藩)즉 지금의 티베트 보다는 송(宋)나라와 정치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알려진다.물론 송나라는 고려(高麗)로 보는 것이 옳다.그리고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 이곳은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출발지로 삼고 농업용수나 식용수 확보를 위해 이곳 이해(洱海)에 수도를 두었다고 추측하며 대리국(大理國)은 1254년 몽골제국이 쳐들어오자, 곧바로 항복하였다고 정리되고 있다.이 몽골제국은 바로 고려(高麗)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이때가 고려(高麗) 고종(高宗,1192-1259,재위:1213-1259)때이며 몽고(蒙古)는 몽케(蒙哥,1208-1259,재위:1248-1259)가 집권할 때이다.그러나 이 대리국을 세운 단사평(段思平:893-944)을 보면 백족인(白族人)이라고 하는데 과연 신중국사가 말하는 소수민족인 백족인가 하는 문제가 분명히 있다.이미 남이(南夷)든지 아니면 서남이(西南夷)든지 하는 만(蠻)은 남양(南洋)을 무대로 하는 서양인이란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충분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그렇다면 단사평(段思平)역시 서양인이라 할 수 있고 소위 백족인(白族人)이라 하는 것은 날 때부터 살과 털빛이 아주 하얀 코카시안(Caucasian) 즉 백인을 말하거나 아니면 백색을 좋아하던 포르투갈인의 한 종족이었을 것이란 판단이다.본 블로그 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에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1502년 1월에 포르투갈인 탐험가 가스파르 지 레무스(Gaspar de Lemos)가 브라질 남부 구아나바라 만(Baía da Guanabara)입구(湾口)에 도착하고 그 해안에서 벽을 희게 바른 집을 지어 살았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었을 가능성이 있다.현 신중국역사가 말하는 백족인을 바이족(白族)이라 하며 약 124만명의 화자(話者)를 가진 바이어(語)를 사용하는 종족이라고 하는데 통 역사성도 없고 신빙성도 없다.이 바이어(語)가 이족(彝族)이 쓰는 언어와 가깝다고 하고 분류되기는 중국티베트어족 티베트버마어파(Tibeto-Burman languages)에 속한다고 되어 있으나 솔직히 전통성이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소수민족일 뿐이다.한 때 백족은 남이(南夷)와 서남이(西南夷), 남중(南中)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되어있다.그러나 지금 바이족이라는 현실을 보라.너무 초라하지 않는가.1253년 11월 쿠빌라이의 여섯째 아들 후게치(忽哥赤:和克齊)을 운남왕(雲南王)에 봉하고 대리(大理), 선천(鄯闡), 다한장(茶罕章), 적독가아(赤禿哥兒), 금치(金齒), 교지(交趾)등지에 대한 난리를 평정하면서 민심을 가라앉히기를 명하였고 1276년 원조(元朝)는 정식으로 운남성(雲南省)을 편제화하였다고 기록에 나타난다.명대(明代)에서 주원장(朱元璋)은 전우덕(傅友德)과 목영(沐英)을 파견하여 단(段)씨의 협력받아 양왕국(梁王國)을 멸망시켰으며 이 지역에 특히 은(銀)이 많이 생산된다는 것에 주목하고 명(明)의 직할지역으로 결정하면서 운남포정사(云南布政使)를 설치하였으며 개간과 채광을 위하여 많은 한족(漢族)을 이주시켰다고 되어 있다.이것이 말로 계획적인 인구이동임을 알 수가 있다.그렇게 증가시킨 인구가 명(明)멸망시까지 120만명에 이른다고 하였다.그러나 명말(明末)시기에 명(明)의 유신(遺臣)들과 일부 반청(反淸)세력들이 합세하여 명(明)종실의 친왕(親王:朱常洵)을 황제로 옹립하였고 중국 남부지역에 남명(南明:1644-1664)을 세웠으며 그 중 후기 남명(南明)의 영력제(昭宗永曆帝:1625-1662)가 운남(雲南)으로 들어와 반청 저항의 본거지로 삼지만, 청(淸)의 오삼계(吳三桂:1612-1678)에 의해 1662년 버마에서 사로잡혀와 곤명(昆明)에서 명을 다하고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되어 있다.그 이후부터 운남(雲南)은 귀주성(貴州省)에 포함되어 나타난다.1413년 명 영락(永樂)11년에 호광(湖廣), 사천(四川), 운남승선포정사사(雲南承宣布政使司)로 분리되고 귀주승선포정사(貴州承宣布政使)로 배치되어, 예로부터 귀주(貴州)라 하였기에 귀주성(貴州省)라고 인증하였고 귀주성(貴州省)을 간칭으로 거무스름할“검(黔)” 혹은”귀(貴)”한 것을 보면 대체적으로 귀주성에 사는 사람들이 얼굴이 검었던 것으로서 흑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6.차마고도(茶馬古道)는 소금호수 부도호(浮圖湖)로 가는 길이다.위에서 운남성과 관계된 역사기록을 통한 모순 5가지를 살펴보았다.이제 운남성(雲南省)의 제대로 윤곽이 들어남을 알 수가 있다.좀 더 나아가보자.소금(鹽:salt)이다.!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소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지구에 생명체가 생성될 때부터 소금 역사가 시작되고 그 년대가 30~40억년이라고 한다.사람 혈액에는 90%의 염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소금이 있기 때문에 인류가 생성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는 설명을 과학자들은 매번 아끼지 않는다.인간이 이용해온 조미료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음식의 간을 맞출 뿐 아니라 영양이나 생리적으로 다른 물질로는 거의 대체시킬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주된 자료들의 하나같은 설명이다.그 만큼 인간들의 역사속에서 필수불가결(essential)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대 발생한 모든 전쟁들의 주 원인은 바로 소금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다.민간요업으로도 중요하다.명(明)때 누영(樓英)이 지은 의학강목(醫學綱目)에 갑자기 귀가 아픈 것을 치료하는데 소금 석 되에서 닷 되를 뜨겁게 찐 후 푸른 헝겊에 싸서 베개를 베고 식으면 다시 갈아주는데 바로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고 송나라 때 본초학의 대표작 당신미(唐愼微)의 증류본초(證類本草)에는 배가 그득하게 아프면서 가슴이 답답하여 죽을 것만 같을 때 아주 진하게 끓인 소금물 한 두 사발을 한 번에 마시고 토하면 진정된다고 한 기록을 백과사전에서 볼 수 있다.소금이 인간이나 동물에게 필수적인 식품임을 알려주는 기록들이다.옛사람들에게 소금의 위치는 거의 신(神)과 같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불교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위키 자료를 보면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서약을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안식일 빵에 소금을 더한다고 하였으며 카톨릭에서는 성수 축복에서 소금을 넣는 관습을 보존되고 있으며 부활성야라고도 하는 파스카 성야(Easter Vigil)의 성수 축복에도 소금을 넣는다고 되어 있다.물론 이러한 사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동서양(東西洋)할 것 없이 신(神)과 교통의 매개체가 소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그렇다면 실크로드뿐만아니라 솔트로드도 존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그러나 근세사에는 실크로드만 부각시켜 정작 소금의 중요성을 역사뒤전으로 밀쳐낸 것이다.실크는 옛 근세기에 삽화들을 보면 실크를 양산하는 뽕나무(桑田)가 동양에서 많이 식생(植生)한다고 알려져 누에고치로 생산되는 실크가 무역물품으로는 만연했다고 알려진다.그러나 소금이 실제로 인간에게 중요했다면 소금생산이 어마어마하게 곳을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소금을 얻기 위해 비록 수만리(數萬里)길을 간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감수해야 할 노고였던 것은 분명하다.소금은 인간이나 동물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또한 소금이 풍부한 곳에서 인류역사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바로 남아메리카 중앙부 볼리비아의 포토시 주(州)(Departamento de Potosí)에 위치한 살라르 데 우유니(Salar de Uyuni) 또는 살라를 데 투누파(Salar de Tunupa)라고 하는 우유니소금사막(Salar de Uyuni)은 참으로 희귀한 곳임에 틀림없다.이 포토시 주(州)는 이것이외 세계에서 가장 매장량이 큰 은(銀)과 주석(朱錫)이 스페인인들에게 발견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1853년에 운남성에 발생한 판데이 란(Panthay Rebellion:雲南回變又稱杜文秀起义)은 주석광산(朱錫鑛山:tin mine)에서 일하는 회족(回族)과 한족(漢族)의 노동자의 대립이 폭동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그 시건이 일어난 곳이 어디를 말하겠는가.이미 결론은 나 있다.당시 해적출신 서양인이 아니더라도 소금과 은, 주석을 보고 이를 탐내지 않을 사람이 있었겠는가.인도가 망한 것도, 고려가 유럽인들에게 그대로 쫓겨난 것도 아마도 이러한 탐욕의 물질들을 탈취하도록 내 버려둔 것이 잘못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곳을 찾기 위해 멕시코남부나 과테말라에서부터 로정 거리가 거의 5,000km 이다.바로 실크로드 또는 차마고도의 거리와도 똑 같은 거리이다.차마고도(茶馬古道)라 함은 차와 말을 교역하던 신중국의 높고 험준한 옛길로 인식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이며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이 오갔다고 설명되지만 차를 실을 말이 다니던 옛 길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차와 말(茶馬)를 밑천으로 하여 주 목적은 바로 소금(鹽:salt)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평균 해발고도 4,000m이상에 위치하여 신중국 서남부 운남성(雲南省)과 사천성(四川省)에서 티베트(Tibet)를 넘어 네팔과 인도까지 5,000여km에 달하는 장대한 거리로서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역하던 높고 험준한 옛길'이라고 하였지만 실체는 바로 소금구하기다.이 길은 한무제(漢武帝)때 장건(張騫)에 의해 서역개척이 이뤄졌고, 당(唐), 송(宋)시대를 거치면서 번성하였으며 이후 네팔, 인도, 유럽까지 연결된 문명, 문화, 경제, 육상교역이 바로 실크로드라고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지만 실크가 아니라 흰 소금일 가능성과 유럽인들은 당시 남아메리카대륙에 오래전부터 즉 그리스인과 아리아인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서 멕시코를 통과 하여 과테말라(Guatemala)부터 특히 운무림(雲霧林)이 왕성지역으로서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그리고 파나마를 거치고 콜롬비아에서 마그달레나 강(Magdalena river)과 시에라네바다 데 산타마르타(Sierra Nevada de Santa Marta)산맥만 넘으면 아마존강 상류를 거쳐 볼리비아까지 들어갈 수가 있다. 특히 티티카카 호(Lake Titicaca)는 바로 서남이(西南夷) 대리국이 건립된 대리(大理)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은 티티카카 호수는 약 258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의 지질시대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시기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원모인(元谋人)화석이 발견될 수 있는 매우 적합한 곳이라는 사실이다.볼리비아에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도로인 해발 4,300m의 융가스도로(Yungas Road)는 속칭 죽음의 길(Death road)이라고 하는데 수도 라파스(La Paz)에서 꼬로이꼬(Coroico)로 이어지는 유일한 도로라고 한다.보통 티티카카 호수에서 우유니소금사막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면 현 신중국대륙의 대리국이 건립되었다고 하는 지금의 운남성 북부에 있는 담수호인 전지(滇池:297.9km² 수심:4.4m)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티티카카 호(Lake Titicaca:8,135km²,최대수심 281m)가 바로 그것인데 그곳에 남단 동부에 위치하는 코파카바나(Copacabana)에서 출발하여 수도 라 파즈(La Paz)를 거치고 동남쪽으로 에콰도르의 통화 단위 명칭인 수크레(Sucre)도시를 통과하여 다시 서남쪽으로 은(銀)과 주석(朱錫)광산도시 포토시(Potosi)를 지나면 바로 소금 사막인 우유니(Uyuni)가 나타난다.이 길을 가서 소금을 얻기위해 그렇듯 험준한 길을 말과 함께 가고 또 가던 길이다.볼리비아의 남서쪽 모퉁이의 볼리비아 남서부 포토시(Potosí)주와 오루로(Oruro)주에 세계에서 가장 넓으며 건조호수 소금사막인 살라르 데 우유니(Salar de Uyuni)가 있는데 이 사막의 넓이가 10,582 km²에 이르고 3,650m 높이의 안데스 영봉과 가까운 곳에 있다.이곳이 아마도 운남성이 끝나는 곳일게다.소금사막 가운데에는 선인장으로 가득 찬'물고기 섬(Isla Incahuasi)'이 있으며 이와 비슷한 내용은 멕시코시티의 옛 이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이란 어원에서 “선인장(prickly pear)의 땅”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간들에게 종교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이 소금 사막에 저장한 소금량은 얼마나 될까?2012년 기준 세계소금 생산량이 2억(億)6천톤이다.우유니소금사막의 소금 총량은 최소100억(億)톤으로 추산되며, 두께는 1m에서 최대 120m까지 층이 다양하고 이 지역의 사람들은 오랜 전부터 이 소금을 채굴하며 생필품과 교환하는 등 중요한 교역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현재 2012년 세계소금 총생산량과 비교해보아도 약 50년간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규모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오래전부터 인간이 소금을 채취하였음에도 아직까지 50년을 더 사용할 수 있는 규모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참으로 경이스럽다 할 수밖에 없다.바로 이 우유니소금광산을 신(神)처럼 여겼다면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부도호(浮圖湖)라고 한들 부족할 것이 없다.《史記·西南夷傳》西南夷傳身毒國。卽天竺也。所謂浮圖湖是也。앞에서 언급한 사기(史記)서남이전(西南夷傳)에서 서남이(西南夷)가 놀랍게도 신독국(身毒國)이라 전하고 있으며 천축(天竺)이라 하였고 소위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 부도호(浮圖湖)가 있다 한 것이다.부도호란 무엇일까?부도(浮圖)는 뜰 부(浮)와 그림 도(圖)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부는 떠서 움직이는 의미화한 것으로 한량없다는 넘치다, 높다 등으로 쓰임을 알 수 있고 고승(高僧)의 사리나 유골(遺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이나 붓다(buddha) 혹은 탑을 말하는 스투파(stūpa)의 음사(音寫)로 알려진다.때문에 부도호는 불교와 관계하는 엄청난 불사(佛事)들이 물에서 뜰 수 있는 신(神)의 호수라는 것이다.신라(新羅) 박제상(朴堤上:363-419)이 지었다는 부도지(符都誌)에 의하면 마고(麻姑)는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중간인 짐세(朕世)에 팔여(八呂)의 음(音)에서 나왔다 하는 신인(神人)으로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城)인 마고성(麻姑城)에서 살면서 천부(天符)를 받들고 지키며,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 없이 두 딸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았다 하며 이 두 딸 역시 선후천(先後天)의 정을 받아 배우자 없이 자식을 낳아 네 천인(天人) 황궁(黃穹)·청궁(靑穹)·백소(白巢)·흑소(黑巢)와 동시에 네 천녀(天女)가 있게 되었다 한다. 이들은 성중(城中)에서 나오는 지유(地乳)를 먹고 살면서 네 천인(天人)은 진(律)을, 네 천녀(天女)는 여(呂)를 맡아보게 되었으나 후천(後天)의 운(運)이 열리면서 이 진여(律呂)가 부활(復活)하게 되어 음상(音象)을 이루니 성(聲)과 음(音)이 섞이게 되었다 하며, 마고(麻姑)가 마고성(麻姑城)과 나란히 있는 실달대성(實達大城)을 끌어당겨 천수(天水)의 지역에 떨어뜨리니 물 가운데 땅이 생기고 육지와 바다가 여럿이 나란히 벌여 서는 병렬(竝列)하며 산천(山川)이 길게 뻗어지게 되었다 한다.천지창조의 이야기다.이 부두지가 말하는 위치 또한 어디일까?물론 이 부도(浮圖)와 부도(符都)의 한문이 차이가 있다 하겠지만 음(音)이 같다는 것은 옛 역사에서 거의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놀랍게도 부도지(符都誌)에서 선천(先天)시대에 천인(天人)들을 먹이고 자라게 하던 신비의 젖 지유(地乳)가 있었다는데 이 지유, 즉 “땅 우유”가 바로 소금이라는 사실이다.바로 인간이 습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소금이다.율곤 이중재(李重宰)박사는 부도지(符都誌)나 당서(唐書)에 땅에서 우유가 나온다는 기록을 지유(地乳)라 하고 이 물은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라 한 것이다.곤륜산을 어딜 말하는 것일까?안데스산맥이다.우유니소금사막 지천에 안데스 영봉이 있다고 하였으니 틀리지 않는 말이다.본 블로그 글"천축주(天竺酒)가 난 곳은 남아메리카(南蠻)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77"에서 정리한 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천축주를 AD 800년 이전에 이미 아락(arack)이란 이름의 술로 밝혔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럼주(Rum)가 되었다는 사실로 정리했지만 이 글에서 천축(天竺), 천독(天毒)에서 축(竺)은 독(毒)과 통하는 글자이므로 천축(天竺)은 천독(天毒)이라 했고 불교에 관한 기록 중 천독(天毒)또는 천축(天竺)이라 함은 수미세계(須彌世界 :天國)을 의미하는데 산해경(山海經)에서 조선(朝鮮)을 천독(天毒)이라 칭하면서, 인도(印度)를 남천축(南天竺)이라 하고, 월지국(月支國)을 북천축(北天竺)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사달(阿斯達)과 연결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것을 보면 조선(朝鮮)전체를 천독이라 했음을 알 수가 있다.옛말의 천독(天毒)이라는 말은 천축(天竺)을 말한다(古謂天毒即天竺)라고 했으며 곽박이 말하길 조선천독(朝鮮天毒)의 천독(天毒)이라는 말은 천축국(天竺國)이라는 얘기다.이어 동서남북, 중앙까지 천축을 구분하였는데 중천축국(中天竺國)이 삼만리(地方三萬里)라는 것은 다섯(오)천축국을 다스리는 나라가 중(中)천축국(中天竺國)이라는 뜻이 포함된 말이며 천축국은 동천축국, 서천축국, 남천축국, 북천축국, 중천축국을 합하여 삼만리(地方三萬里)였고 수십나라(數十國)가 있으며 모두 왕을 두었고 그 나라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신독국(身毒國)이라했다 한다.천축은 후한(後漢)때 일컬어졌고, 즉 전한(前漢)시에는 신독국(身毒國)이라 했으며 월씨(月氏)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西南)으로 가면 서해(西海)에 이르고, 동으로는 반기(盤起) 즉 반월국(盤越國)이 있는데, 모두 신독국(身毒國)의 땅이라 했다.이것은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상황을 설명한 것이다.남천축국은 대해(大海)와 접해 있었으며 남아메리카이며 북천축국은 설산(雪山)가까이 있다하니 록키산맥을 끌어안고 있는 북아메리카대륙일 것이다. 동으로는 동천축국(東天竺國)이 있었는데 대해(大海)의 경계라고 했다는 것은 지금의 대서양으로서 대동양(大東洋)을 사이에 둔 유럽대륙을 지칭한 것이다.물론 서천축국은 지금의 아시아대륙으로 봄이 마땅하다.천축국(天竺國)은 가비여국(伽毗黎國)이며, 후한(後漢) 환제(桓帝) 5년에 월애(月愛)라는 파견사를 통해 상소를 받은 바에 의하면 천축국(天竺國)은 강과 바다가 접해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가비려(伽毗黎)는 기청세존(祈请世尊)의 의미가 있고 사리불(舍利弗,Shariputra) 또는 가비라바소도(迦毗羅婆蘇覩:Kapilavastu)이며 석가의 출생지를 이르는 말로서 이곳을 현재 네팔 타라이(Tarai)지방이라고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또한 곽박은 천축국(天竺國)은 서역(西域)에 있다고 했으며 한(漢)나라 명제(明帝, 東漢 즉 後漢,AD58-75)때 파견된 사신이 부처의 뼈, 불골(佛骨)을 맞이하는 땅이라고 했으나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원가(袁珂)는 천축(天竺)을 지금의 인도(印度)라고 했으며, 대륙의 서남에 있는 나라이며, 천독(天毒)은 동북에 있어 방위는 다르며 옛 왕씨(王氏)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고 했다.확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고려를 숨기기 위한 것이며 서남에는 인도가 있다는 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멕시코를 통한 남아메리카대륙을 말하는 것이고 동북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일 가능성이 있어 스코틀랜드를 기반으로 하는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근세사와 함께 이곳에 고려(高麗) 즉 코리아가 존재한 것이다.그렇게 볼 때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에서부터 인도(印度)가 거대하게 눈에 들어온다.7.은(銀)광산이 주는 역사반전전기한 운남성 역사에서 명(明)초 주원장(朱元璋)은 운남(雲南)을 직할지역으로 결정하면서 운남포정사(云南布政使)를 설치하였으며 개간과 채광을 위하여 많은 한족(漢族)을 이주시켰다고 되어 있는 것은 은광(銀鑛)과 주석(朱錫)이 운남성(雲南省)에서 대단위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라 했다.때문에 이 금속들을 얻기 위해 주원장이 한족을 거주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그러나 이 한족(漢族)이라고 하는 역사 정체성여부는 매우 희박한 것이 사실이고 대만학자 심건덕(沈建德1947~)의 주장을 빌리더라도[漢族向為少數民族,早已被眾蕃包圍消滅。]한족은 소수민족을 가리키면서 일찍이 주변의 여러 번(蕃)에 포위되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때문에 오늘날 한족(漢族)이 이런 소수민족임에도 13억명의 92%가 한족(漢族)이라는 것은 뻔한 허구임이 들어난다.뿐만아니다, 2010년 5월 12일 본 블로그에서 개진한 사실이지만 중국역사학강사 원승비(袁勝飛)가 주장하길 중국역사는 5%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전부 허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명조(明朝)때 은 광산(銀鑛産)으로 이주시킨 한족(漢族)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이 한족은 서양인과 동양인을 구분하기 전에 힌두인이나 이슬람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수가 있다.왜냐하면 남아메리카대륙에 이슬람인이라는 회회인들이 많았고 또한 힌두인도 많았다는 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본 사실이다.은(銀)의 역사를 보면 은(銀)광석에서 은(銀)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 이후로 여겨 은(銀)을 처음으로 분리, 생산한 초기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3000년경에 소아시아지역에서 납[鉛:Pb]광석으로부터 고온에서 용해하여 분리하는 회취법(灰吹法:cupellation process)을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하였으며, 기원전 6세기에 아리안계 리디아(Lydia:BC7∼BC6세기)왕국에서 처음 제조되어 그리스와 로마로 이어졌다고 하고 로마시대에는 연간 약 200톤의 은(銀)이 생산되었고 이것이 신대륙 발견 이전까지의 전 기간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의 은(銀)이 생산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One of the earliest silver extraction centres in Europe was Sardinia in early Chalcolithic.또는 은(銀)을 가장 먼저 유럽에서 추출한 것은 이른 금석병용시대(early Chalcolithic)로서 기원전 제5천년기(5th millennium BC)에 사르데냐(Sardinia)에 의해서라고 한다.In the Americas, high temperature silver-lead cupellation technology was developed by pre-Inca civilizations as early as AD 60–120.또 한편으론 아메리카스에서의 고온에서 용해하여 분리하는 회취법(灰吹法)은 고대잉카문명(pre-Inca civilizations) 단기 60년–120년 사이에 발견되었다고 한다.고작 12세기에 생성되어, 13세기 초 페루의 한 고원에서 기원하였으며 기원을 1438부터 1533년까지라 하고 스페인에게 멸망했다고 하는 근대사 설명에서 고대잉카제국이라 하면서 단기 운운하는 것도 마치 서양인들이 만들었다고 보는 고조선을 이야기하는 방식과 같다 할 것인데 여기서도 역사축소를 위한 편법이 사용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아니할 수 없다.남아메리카대륙에 청동기농기구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서양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오히려 줄기차게 유럽사를 앞세우려는 작태는 한이 없다.물론 청동기문화, 철기문화를 본 블로그가 탐구해 볼 것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인류사와 연결되기에 서양인들은 이를 언제까지나 고집할 수밖에 없다.솔직히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해적신분의 서양인들은 아마도 은(銀)을 만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이러한 주장들은 근원적으로 고대사 전체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Proto-Germanic *silubrą, whence also Old High German silbar, Old Norse silfr은(銀)의 영명‘silver’는 앵글로-색슨어‘seolfor’에서 어원(語源)을 찾을 수 있고 화폐원소기호(Ag)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아르젠타리우스(argentarius)는 형용사로서 돈(of money)를 뜻하며 아르젠타투스(argentatus)는 은(銀)도금한(plated with silver)것을 말하면서 아르젠네우스(argenteus)는 형용사 은(of silver)를 말하고 아르젠툼(argentum)은 명사 silver(銀)를 뜻하는 라틴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현재 남미 종단에 위치한 아르헨티나(Argentana)가 라틴어 은(銀)을 뜻하고 있음도 모두가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이처럼 은은 서양인들에게 별천지 세계를 가져다 준 금속인 것이다.더 나아가 그들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알 수가 있는데 역시나 해양세력으로서 아르게스테스(argestes)는 서쪽에서 부는 남서바람(the west-southwest wind)을 뜻하는 것으로 이 바람을 타고 정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아르헨티나의 어원도 그렇고 아르게스테스(argestes)라는 바람은 서양항해자들을 운남성(雲南省)으로 인도 했을 것이 틀림없다.금본위제도가 본격화되기전까지 은(銀)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본래 운남성(雲南省)은 은(銀)이 대량으로 생산되던 곳이다.한편으로 우리나라 사서(史書)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은(銀)의 제련은 신대륙발견과 같은 시기인 15세기 말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납[鉛:Pb]광석을 사용하여 은(銀)을 제련, 분리하는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을 사용하였으며 이 제련기술은 16세기부터 조선정부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시행되었고 이것이 바로 현재 통용되는 회취법(灰吹法)과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이렇게 제련된 단천(端川)은(銀)은 중국 은(銀)이나 일본 은(銀)보다 순도가 훨씬 높았다고 하는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물론 이곳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도 은(銀)이 발견된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해동역사 제26권물산지(物産志) 1 은(銀)○ 은은 각처에 모두 있으나, 괵주(虢州)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고려에서 첩(帖)을 만드는 자들이 이르기를, “은광(銀鑛)에서 나는 것이 아니나, 색깔이 푸르러서 괵주의 것만 못하다.” 한다. 《당본초(唐本草)》○ 은은 외국의 것으로는 네 종류가 있는데, 신라(新羅)의 은, 파사국(波斯國)의 은, 임읍(林邑)의 은, 운남(雲南)의 은이 모두 정련되어서 좋다. 《보장론(寶藏論)》○ 원 세조 지원(至元) 26년(1289, 충렬왕15)에, 고려국에 은이 많이 산출된다고 해서, 공인(工人)을 그 지역으로 파견하여 근방의 백성들이 제련하는 것을 도와 관부(官府)로 실어 보내게 하였다. 《원사》위 해동역사를 보면 신라(新羅), 파사국(Persia), 임읍(林邑:베트남), 운남(雲南)의 은(銀)이 모두 정련되어서 좋다라고 하였고 원(元:1271-1368)세조 지원(至元)기록에는 고려국(高麗國)에 나는 은(銀)이 많이 산출된다고 한 것을 볼 수가 있다.위 모든 국가들은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할까?바로 남아메리카대륙이다.신라와 파사국이 어찌 다를 것인가. 임읍과 운남은 남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동아시아대륙에서 생산되었던 신중국 산(産)이니 뭐니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사실상 은(産)은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와 남아메리카대륙에서 생산되었던 것을 스페인산이라 했음을 알 수가 있다.이것 전체를 묵은(墨銀)이라 하였고 멕시코산을 응양은(鷹洋銀)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 이것이 일본산(産)으로 돌변하고 스페인 산(産)을 본양은(本洋銀)이라 중국에서 칭한 것으로 나타난다.이때 일본은 미국용병들이다.네이버게스트에서 인용한 미국지질조사국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전 세계 은(銀)생산량은 23,800톤으로 추정하는 것에서 멕시코 4500톤(18.9%), 페루4000톤(16.8%)등으로 나타나며 그 외 중국은(銀)도 있지만 근세기에 개발되어 생산된 은광(銀鑛)이라 할 때 역사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역사적으로 별의미를 둘 수가 없다.3년 후 2014년 통계에서도 전 세계생산량 26,800톤에서 멕시코가 5,000톤 생산의 18.7%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 꾸준한 생산량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은(銀)의 역사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현재 신중국 대륙 서남쪽에 위치한 운남성(雲南省)에서의 광산역사를 따져보면 분명히 은(銀)과 주석(朱錫)이 세계적인 거대한 광산이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찾을 길이 없다.개구시(個舊市)의 주석광산이 유명하다지만 생산량이 미미하고 동천구(東川區)에 구리광산, 무정현(武定縣)에 철광산, 선위시(宣威市)와 개원시(開遠市)에는 석탄광산이 있을 뿐이다.이렇게 살펴보았던 결과 참으로 실망스러울 정도로 신중국사가 기록한 운남성(雲南省)의 역사기록과 너무나도 딴 판이다.때문에 분명 본래 운남성(雲南省)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실제로 근세사를 살펴보면 중국(中國)에서 운남성(雲南省)의 은(銀)광산은 참으로 유명했던 것 같지만 존재자체가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란다.물론 소량 생산되는 은(銀)광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적어도 2011년 기준 세계 은(銀)생산량에서 분명 멕시코(4500톤:18.9%)와 페루의 은(銀)생산량 4000톤(16.8%)의 수치가 600년 전 상황과 다름이 없는 사실과 같이 지금도 굳건히 세계 은(銀)생산량을 주도하는 것은 광산 역사 사실에서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다.이것이야 말로 운남성이 가져야 할 확실성이다.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운남성(雲南省)의 은(銀)광산현황과 생산현황은 그것들을 역사라고 할 수 없다.은광(銀鑛)의 역사는 지금도 각 자료에서 운남성(雲南省)을 말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생산되는 은(銀)이 품질 좋은 것으로 여겨져 19세기 때 중국 은(銀)을 높은 가치로 인정받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있다.그와같은 사실은 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에서도 확인한 사실이다.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때문에 중국 은(銀)이라 함은 청나라 은(銀)이라고 할 수도 없고 오히려 묵서가(墨西哥)은(銀)이라고 해야 하며 멕시코 은(銀)을 중국 은(銀)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그렇듯 잘나가던 멕시코 은(銀)이 갑자기 어느 날 사라지면서 일본 은(銀)으로 대체되는 역사를 보면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청일전쟁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결론에 이른다.이것을 미국계 잉글랜드라 한들 모자랄 것이 없다.그렇다면 은(銀)이 생산되던 운남성(雲南省)은 실제로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앞에서 6가지의 운남성에 관한 엄청난 모순과 역사사실을 비교하면서 결론에 이른 것은 바로 남아메리카대륙 운무림(雲霧林)이 왕성한 지역을 통철어 운남성이라고 해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물론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포토시주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다.잉카제국(Inca Empire:1438-1533)등 남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스페인은 1546년에 멕시코 사카테카스(Zacatecas)에서 발견했을 때와 같은 해 1546년 볼리비아지역의 포토시(Potosí)에서 거대한 은광을 발견했으며 광산촌이 세워졌고 광산에서 엄청난 부(富)가 창출되면서 포토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대도시 반열에 올랐으며, 인구도 200,000을 넘었다고 한다.공식 기록에 따르면 1556년에서 1783년 사이 포토시주(Potosi)부(富)의 언덕, 리치(rich)산이라고 하는 세로리코(Cerro Rico)에서 채굴한 순은(純銀)이 45,000톤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7,000톤의 은(銀)이 에스파냐 왕가로 들어갔다고 알려진다.점차 원주민(이슬람) 노동력이 줄어들자 이를 벌충하고자 1608년 식민지배자들은 마드리드의 왕가에 해마다 1500~2000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할 수 있도록 청원을 했다. 에스파냐(스페인)는 중앙·남아메리카에서 대규모의 금(金:gold)과 은(銀:silver)광을 개발해 막대한 양의 귀금속을 유럽으로 가져갔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국가가 아닌 왕실은 재정이 매우 풍부해졌을 것이다.1520∼1860년에 에스파냐에 수입된 은(銀)은 1만8000t나 되었으며, 금도 200t이 넘었다고 알려진다. 당시 유럽의 화폐는 금화나 은화이었지만 금은(金銀)등 귀금속이 대량으로 유입되자 유럽의 화폐가치는 곧바로 하락하였고, 이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으며 유럽의 물가는 16세기 동안에 평균 2∼4배 올랐기 때문에 가격혁명(the price revolution)이라 칭했다.이러한 가격혁명은 임금 노동자(賃金勞動者)나 고정된 지대(地代)로 생활하는 지주(地主)에게는 불리했겠지만 상인이나 수공업자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여 이들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대륙의 광대한 해외시장에서 상업혁명을 일으켜 시민계급과 자본주의 성장을 촉진시켰다고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서세(西勢)의 출몰이라 할 수 있다.이렇듯 원주민들을 착취하여 생산한 은(銀)은 스페인으로 흘러 들어가 막대한 부를 창출시켰고 해상세력들의 무적함대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한때 남미 최대의 도시로서 포토시는 세계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초기에는 남미 원주민들이 채굴하다가 인력 손실이 많아지고 반란(反亂)이 잇따르자 아프리카에서 사냥한 노예들로 채워졌고 노예해방 이후에는 하층민(下層民)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정리되고 있다.일단 이슬람인으로 보지만 남미원주민들의 실체가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안전장비도 없이 정련(精鍊)과정에서 생기는 수은 중독(水銀中毒:mercury poisoning), 코카 잎을 씹으며 환각상태에서 일 할 수밖에 없었던 작업환경으로 평균수명이 40세도 체되지 않았다고 한다.1500년대부터 수백 년에 걸쳐 과거 전 세계 은(銀)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던 은광 도시 포토시(Potosí)는 은(銀)이 고갈되기 시작하는 1900년대부터는 주석이 그 뒤를 대체하였지만 점차 채산성 악화로 도시 전체가 침체되어 갔다. 세로 리코(Cerro Rico)라는 높이가 4,800m인 포토시 산(potosi Mt)은 원래 5000m가 넘었으나 광산채굴로 곳곳이 깎여나가 지금처럼 낮아졌다고 하니 은과 주석의 산출량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8.마무리영길이국 위치풀이의 결론서두에 제기한 문제점을 밝힘에 있어 어쨌던 핵심요소라고 할 수있는 문제는 운남성의 위치였다.그리고 또한 운남성(雲南省)과 가까운 곤련을 찾는 일이었다.이 곤련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 역시 궁금했고 그 하류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한 사실에서 대해라는 것도 궁금했다.운남성은 안데스의 구름과 안개지역(Andes cloud and mist)의 상징적인 지명임을 알 수 있었고 볼리비아(Bolivia)에서는 융가스로드(Yungas Road)가 있는 지역, 라파스 주(La Paz Department), 차파레주(Chapare Province), 코차밤바 주(Cochabamba Department)가 그런 현상이 많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하였으며 칠레(Chile)는 바스케이 데 프레이 호리해 공원(Bosque de Fray Jorge National Park), 에콰도르(Ecuador)의 덴다야파(Tandayapa), 민도(Mindo)가 그런 지역이라는 사실을 세세하게 설명도 했다.이곳들을 운남성이라 결론 지울 수밖에 없다.1853년에 주석광산에서 일하는 회족(回族)과 한족(漢族)의 노동자의 대립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회교도 희생자 수가 12,000,000명을 발생케한 회민반란이 바로 북부버마라 하였으니 남아메리카대륙 북부로서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또는 베네수엘라까지를 포함하여 현재는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진전은 엄청난 것이다.그곳에서 1852년 영국과 버마가 2차 충돌이었던 영면전쟁(英緬戰爭)이 있었고 철종(哲宗,1831-1864,재위:1849-1864)이 내린 서원철폐령(書院撤廢領)은 회교도들을 자극하였을 것이고 때문에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중앙에 설치되었던 군영인 금위영(禁衛營)반란이 발생되었다는 사실도 이슬람인들이 많았던 당시 조선내 군사상황설명이 가능하다.이를 청(淸)군벌 세력에 의한 쿠데타라는 것을 동시에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쿠데타는 잉글랜드 왕실을 이롭게 한 사실임도 확인할 수가 있었다.이것이 영길이국으로 진단한다는 사실이다.철종(哲宗,章皇帝)인 것으로 파악되는 마지막 무굴황제 바하두르샤 2세(Bahadur Shah II,1775-1862,재위:1837-1857)를 버마(Burma)로 추방하여 철종사망시기와 거의 같은 1862년 11월 7일에 양곤(Yangon)에서 사망케 하였다는 것도 역사가 전부 합치가 되다는 이야기다.운남성 역사에서 찾은 모순들에서도 원모인의 생활지로는 부적합한 호수 전지(滇池)의 규모와 소금광산의 여건등을 살펴 그곳이 티티카카 호(Lake Titicaca)라는 사실과 이 티티카카호수 남부에 대리국이 건립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인이 가능하였다.운남성과 서안의 거리 수치문제 또한 이질적인 요소인 것이 틀림없다.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하는 북부 고원지대가 현재 남아메리카대륙 콜롬비아 산악지대로 비슷한 것을 그냥지나 칠 수 없었으며 조선(朝鮮)과 인도(印度)에서 힌두사탄(印度斯坦)이라 함을 인도아 북부 고원지대가 아니라 이제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임을 알 수가 있게 하는 것이다.운남성(雲南省) 북쪽 사천성의 대도하(大渡河) 또한 마그달레나 강(Magdalena river)이라는 사실에서 오히려 확신을 한다.그리고 안데스산맥의 어원이 동방(東方)을 뜻하는 것이라든지 잉카제국이 아닌 인도제국 역사가 함몰되어 마치 인도역사로 지칭되게 하는 문제가 의문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무엇보다도 곤련(昆連)과 곤륜(崑崙)을 동일하게 안데스산맥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때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풀리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그리고 우리가 차마고도(茶馬古道)라 함은 바로 티티카카 호(Lake Titicaca)에서 부도호(浮圖湖)까지 소금을 구하기 위한 고행길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었다.은(銀)광산이 주는 역사반전은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서 이치는 자연은 절대로 속이지 않는다는 철칙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현 동아시아대륙 운남성에 없는 대생산량을 보장하는 은광이 엉뚱하게도 남아메리카대륙 스페인인이 1546년에 발견했다고 하는 볼리비아지역의 포토시(Potosí)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혔던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와 닿는다.이것으로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이제 우리가 그처럼 알고 싶었던 영길이국 위치풀이의 결론은 남아메리카대륙에서 영길이국이 19세기 중반에서부터 존재한 사실은 버어마의 영면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이것은 바로 회민반란에 의한 회민학살의 역사현장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이 영면전쟁으로부터 옛 인도의 힌두인과 이슬람인을 상대로 무차별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가 있었다.이런 작업 후 자신에 차 있는 상태로 조선을 방문한 것이 바로 순조(純祖)32년(1832)이다.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 부록에 나타난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이라 한 것은 바로 안데스산맥이다.안데스산맥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페루(Peru)남부의 안데스산맥의 빙하호에서 발원하고 상류는 마라뇬 강(Río Marañón)과 우카얄리강(Ucayali江)이라고 불리는 하류(河流)가 모여 아마존강본류가 되며 이 본류가 동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간다.그렇다면 영길이국(英吉利國)은 페루와 아마존 상류에 위치 한 것임을 알 수 잇고 바로 지금의 브라질북부 전역을 확보해 나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며 대해는 바로 대서양 즉 대동양(大東洋)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이야기 했듯이 1577년 경 버지니아 주(Virginia)노퍽(Norfolk)에 도착한 앨비언(Albion)들이 여기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당부말씀:이 글을 쓰기위해 엄청난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아무쪼록 세계삼한역사 연구자들에게 이 글이 획기적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당부의 말씀은 미래역사발전을 위해 저작권 보호를 부탁드립니다. 모든 연구자들은 본 블로그에 게시한 사진과 내용들을 훼손없이 그대로 인용할 수가 있습니다. 글쓴이: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차마고도" rel="tag" target="_blank">차마고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운남성" rel="tag" target="_blank">운남성</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안데스" rel="tag" target="_blank">안데스</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우유니소금사막" rel="tag" target="_blank">우유니소금사막</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서중" rel="tag" target="_blank">서중</a>,&nb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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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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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글쓴이:한부울철(Fe)의 근원히타이트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에 있었다.철 기원지의 고찰철령(鐵嶺)과 철원(鐵原)철강산업 모순의 역사추적산업혁명의 진실철도산업와 자본주의마무리(뉴잉글랜드와 생여진)철(Fe)의 근원백과사전에서 철(鐵)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철은 지구를 이루는 가장 주요한 원소로 지구 중량의 32.07%를 차지하며 사람의 몸에는 모두 합하여 3~4g의 작은 못 1개 정도가 되는 소량의 철이 들어 있는데, 철은 혈액 내의 산소 운반을 담당하는 빨간색소인 헴(heme)과 단백질인 글로빈(globin)의 화합물헤모글로빈(hemoglobin)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미네랄 무기질(無機質:minerals)이라고 정리되어 있다.그 만큼 철은 혈액에 녹아 있듯이 인류에게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동시에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원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철의 생산 근원지가 서양인들의 얄팍한 이기심으로 기존역사를 어떤 식으로든지 파괴하려고만 하던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던 근세기의 혼돈을 통해 철저하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왜냐하면 철은 바로 산업혁명을 주도한 주요한 원소로서 무한 가치의 자원이기 때문이다.적어도 1900년부터라고 하여도 너나 내나 할 것 없이 1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철저한 서양교육을 습득한 동양, 서양 가릴 것 없이 우리는 지금까지 철생산기원을 이야기 할 때 근동(近東:Near East)을 이야기하고 로마를 생각하게 하였으며 유럽사를 인식하고 암기할 수밖에 없었다.그것은 우월한 역사, 백인만의 역사, 기독교만의 역사가 존재하였고 유럽서양인들의 역사 근원과 바탕이 근세기 동안 결국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의 역사를 끈으로 어떻게든 만들어져 버젓이 존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철의 기원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그러나 실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본 블로그에 여러번 이야기 한 적이 있다.The 5 Books In the Book of Mormon Making Claims of Iron In Ancient America.모르몬교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로서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근세기와 현대에 걸쳐 성황된 종교로 알려져 있다.그 종교의 성서와 함께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이 기록에서 역사사실에 대한(historical account)주장은 고대아메리카인디언들이 철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를 사기즉 날조된 것이라고 폄하했다는 사실들을 알 수가 있다.즉 서양인들의 주장에 궤를 달리하면 즉시 사기처럼 취급하는 형태이다.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서양역사학자 누구라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직접적으로 당시 시대를 정확하게 살았던 것이 아님에도 그러한 주장에 상당한 히스테리를 부린다.지난 과거 역사를 탐구할 때 각자 기존 나름대로 취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러한 역사를 예측하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한계가 있음에도 서양역사학자들은 주제넘게 3차원, 4차원 공간마저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이기적인 종교관에서 나타나는 골통적인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A 2,000-year-old mine has been discovered high in mountains in Peru. The find offers proof that an ancient people in the Andes mined hematite iron ore centuries before the Inca Empire, archaeologists say. [Mina Primavera Nasca ochre mine found in Peru]그러나 미국 인디애나(Indiana)주 웨스트라파예트(West Lafayette)에 위치하는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소속 인류학자 케빈 본(Kevin J. Vaughn)에 의해 페루남부에 있는 도시 나스카(Nasca) 산(mountain)에서 2000년 된 오랜 철광산(2,000-year-old mine, Ancient Iron Ore Mine)에서 적철석(赤鐵石:hematite)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밝히게 된다.이것은 한편으로 모르몬교의 주장을 뒤받침하는 것이다.솔직히 역사를 이치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오래된 적철광의 광산은 서양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동 어디에라도 존재해야 맞다.그러나 놀랍게도 서양인들이 극구부정하는 남아메리카대륙 페루 안데스산맥에서 인류가 철을 가장 일찍이 사용했다고 하는 증거인 적철광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볍게 바라 볼 수가 없게 만드는 것이 틀림없다.적철석이라 함은 '피'를 뜻하는 그리스어(Greek language)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광물이 적색을 띠기 때문이며 높은 철함량(70%)과 풍부한 철 산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철광석이라고 알려지고 있다.적철석의 가장 중요한 광상(鑛床:ore deposit)은 퇴적 기원으로, 또한 북아메리카의 슈피리어 호(Superior湖)지역과 같은 퇴적광상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된다고 알려지고 연간 약 7,500만(톤)규모라는 사실도 우리는 간과할 수가 없는 이야기다. 또 아메리카대륙에 다른 중요한 광상은 브라질 중동부의 고원 '광물이 있는 넓은 평야'라는 의미를 가진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 베네수엘라(Venezuela)의 중남부 고원 세로볼리바르(Cerro Bolivar), 캐나다의 래브라도 (Labrador)와 퀘벡(Quebec)에 있는데 모두 변성된 퇴적암에서 산출되는 것이기에 원천적으로 철의 기원은 아메리카대륙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철기시대부터 시작한 인류역사를 생각하면 철은 차라리 인류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이렇듯 혼미를 거듭하게 만들고 있다.철기시대!바로 철기시대(鐵器時代)는 고고학에서는 선사시대(先史時代)를 분류하는 세 단계 중 마지막 단계로서 인류역사의 태반으로 알려져 있으며 금속제련을 통하여 구리를 제련하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BC3300-BC600)를 끝으로 기원전1200년경에서 기원후 586년 혹은 700년경까지 철을 주로 사용하여 도구나 무기를 만들던 시대를 말하고 강력한 도시국가들이 태동했다는 사실들이 알려지고 있다. 참고로 서양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철기시대를 기원전400년에서 기원후 400년까지로 보고 있어 기원전 1200년부터 시작된 고대근동(古代近東:Ancient Near East)이나 인도(India), 유럽(Europe)보다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도 현재 한반도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물론 한반도 학자들은 이를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독보적인 철기문화를 이야기 하는 이중성도 존재한다.기원전 12세기 그리스와 고대 중동지역(메소포타미아 지역), 기원전 11세기 인도(印度), 기원전 8세기(중유럽)와 6세기(남유럽)에 걸친 코스대로 유럽지역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며 유럽중부로부터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지고 로마제국과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에서부터 기원전 30년 로마의 이집트 병합시기까지 헬레니즘(Hellenism)시대 혹은 북유럽 초기 중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475년)시기에 즈음하여 막을 내린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적인 의견인 것이다.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럽사는 철기시대를 껴안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철제품을 만들 때 최고로 정교한 금속가공법 개발되었던 시대라고도 칭할 수 있으며 쇠의 단단함과 높은 용해온도, 그리고 구리보다 저렴한 생산비용을 가지는 풍요한 철광자원을 바탕으로 철은 청동기를 몰아내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금속으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때문에 도시국가가 생성되면서 이로 말미암아 명실공히 인류부흥기가 시작되었고 이러한 철의 의한 발전은 18세기말 산업혁명으로 만개를 한 것이다.그러나 철의 근원적인 역사에서 이렇듯 유럽중심적인 개념은 결국 역사적인 오류를 낳고 말았는데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등 유럽인들에 의하여 개척되고 식민지화 된 지역 중에는 철기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예외적인 원칙이 세워져 버젓이 근대사를 지배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이것은 글쓴이가 판단할 때 교묘하게 그들의 유럽사를 독보적으로 만들기 위해 아메리카대륙 문화상황을 원천적으로 빼버렸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히타이트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에 있었다.그렇다면 실제로 철기문화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어딜까?지금까지 발견된 적철광의 오래된 광상이 있는 곳을 범위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인류가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을 도구로 사용하는 철기시대로 진입하는데 가장 큰 획을 그은 것은 고대국가 히타이트(Hittite Empire:BC1600~BC1178 )로 알려진다.인류가 최초로 만든 철기는 쇠를 녹여 만든 것이 아니라, 쇠와 탄소함유량이 극히 적고 불순물이 섞여 있는 스폰지 형태의 덩어리를 달군 다음 해머로 단조해서 만든 것인데 이를 해면철제조법(海綿鐵製造法)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방법으로 도구를 만드는 방법은 히타이트인들이 처음으로 창안한 것이다. 고대 터키 아나톨리아(Anatolia)지방에는 철광석이 풍부하게 분포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히타이트 제국이 현재 근동에 있었다고 할 수 없는 세계삼한역사관점이 존재한다.본 블로그 글 “황금곰(金熊:Golden Bears)과 함길도(咸吉道)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0”의 소제 “[2]부-시리아와 이집트의 위치 이중성”에서 기원전 722년에서 720년 사이 이스라엘 왕국을 함락시킨 앗시리아라고도 하는 시리안(Syrian)과 이집트(Egypt)역시 적어도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캘리포니아와 동홍해(東紅海)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더 나아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위치도 솔직히 현 근동(近東)에 존재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더 많다.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근세기 영국인들의 장난에 의해 근동(近東)이라는 말이 생성된 가장 큰 이유는 이집트문명을 유럽역사에 포함시키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가 없다.때문에 서양인들의 주장은 근동이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의 인더스강(Indus River)서쪽에서 지중해연안까지 펼쳐져 있는 지역이라 하였고 현재 이란(Iran),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시리아(Syria), 고대의 가나안이 살던 팔레스타인(Palestine), 아르메니아(Armernia), 소아시아(Anatolia) 및 아라비아(Arabia)와 이집트(Egypt)를 그 속에 과감하게 집어넣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물론 이러한 역사를 유럽사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근동(近東)은 아나톨리아와 레반트(Levant), 메소포타미아 등 유럽과 가까운 서(西)아시아 지역으로 정해져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야기다.또한 본 블로그글 본 블로그 글 "종려(棕櫚), 야자나무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49487" 에서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는 종려나무를 신성한 나무(神木:Divine Tree)라고 여겼다고 하는 사실과 앗시리아(亞述:Assyria)에서는 태양신 사마쉬(桓因, 蘇利耶:Shamash)를 부채 모양의 나무관 윗 쪽에 종려나무날개를 단 원반 모양의 형태로 묘사했다고 한 사실, 그리고 이집트(埃及:Egypt)에서는 손바닥 모양의 잎이 달린 종려나무 가지가 '장수', 혹은 '영원한 삶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장례식 행렬 때에는 종려나무가지를 손에 들었다는 것에서 종려나무의 근원지인 중앙아메리카대륙이 근원적으로 메소포타미아가 존재해야 할 곳임을 밝혔던 사실들을 모두 종합해 볼 때 의구심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 틀림없다.이에 더하여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에서 멕시코만(灣)을 한 때 페르시아만(灣)이라고 한 사실도 밝혔다.또한 놀랍게도 멕시코 만을 로마시대 때는 지금의 중동에 있어야 할 "카스피해"라고 불리었다는 사실을 일반사람들은 잘 모른다.이것에 대해 카스피해에 관한 이야기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이 정도 글쓴이의 탐구를 솔직히 누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그럼에도 우리가 당장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100년이 넘게 지속된 서양교육에 의해 세뇌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히타이트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걸쳐 있던 고대 제국이었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철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고 기원전 15세기경에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에 인간이 만든 철기가 등장하지만, 히타이트의 하티(Hatti)에서는 이미 기원전 18세기경에 사용한 철기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빠른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원전 2333년을 고조선 건국년대란 점을 감안할 때 기원전 18세기라는 것은 그 중심기간에 들어갈 뿐이다.히타이트 제국 초기에 철은 금보다 5배, 은보다는 40배나 값진 물건이었기 때문에 무기나 도구를 만들 때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도 자본주의 사상이 만든 아이러니한 주장이다. 철로 무기나 도구를 만든 것은 기원전 14세기경이며, 기원전 12세기경에 와서야 철제 단검이 등장했다고 알려진다. 히타이트 사람들은 아주 광폭하고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이집트인들은 히타인트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했다는 것은 유럽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이집트가 객관적으로 약소국가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문 철(鐵)의 의미 역시 잔인하고 난폭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대 이집트에서는 투탕카멘 시대를 전후해서 철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투탕카멘 무덤에 있는 철제단검은 히타이트에서 만든 것으로 봐야 타당하다고 한다. 기원전 1300년경 이집트의 강력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Ramses II,재위:BC1279-BC1213)는 히타이트 왕에게 철을 보내 줄 것을 부탁했지만, 히타이트 왕은 냉정하게 거절했고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이집트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Muwatalli II:1295–1272 BCE)는 기원전 1274년, 오늘날 시리아 근처에서 고대 중동 지역의 최대 격전 가운데 하나인 카데슈전투(Battle of Kadesh)가 발생되었다고 알려진다. 이 전투에서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무승부로 끝난 전투였고 16년 뒤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던 것으로 근세사는 정리하고 있다. 이집트에 철기가 전래된 것은 기원전 12세기(1200년경)람세스 3세(Ramses III,재위:BC1187-BC1156)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 년 동안 존재했다고 알려지는 이집트 역사는 너무 시대적으로 광범위하게 포괄적인 것이 문제라고 여러글에서 지적한 사실이다.이렇게 포괄된 역사존재 속에는 분명 삼한역사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추측을 했던 것이다.본 블로그 글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지는 열도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8"에서 밝히길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Ptolemaic dynasty:BC306~BC30)에 살았던 이집트의 역사학자 마네토(Manetho)가 기원전 30년 로마공화정(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BC508-BC27)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의 과거 3천년의 기간을 30개 왕조시대로 구분했다고 알려지면서부터 역사연속성이 무리하게 꾸며지거나 엮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이에 더하여 이 히타이트제국을 멸망케 한 초기에 아시리아(Assyria)라는 말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티그리스강(Tigris江)상류지역을 부르는 말이었으며, 고대 도시이자 수도였던 아수르(Assur)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며 놀랍게도 단군이 태동한 기원전 23세기에 맞춰 기원전 25세기 또는 기원전 24세기부터 기원전 605년까지 존재한 강성하였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아수르가 수메르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도시국가라 사실에서 수메르가 환단고기에서 12연방국가 중 하나라는 주장도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바로 세계삼한 역사가 그 이집트의 3천년이나 아수르의 2천년 역사속에서 충분히 존재하였거나 녹아들 수 있는 시대적 공간은 충분하다 할 것이다.히타이트는 세계삼한역사 속에서 멸망한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철 기원지의 고찰철의 기원지를 밝히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문명 4대발상지는 정확할까?본 블로그 글 "옥수수(玉米, 玉蜀黍, 粟米, 番黍:Indian corn)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5 "에서 미국 시카고 필드 박물관의 조너선 하스(Jonathan Haas)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약 5천년 전 지금의 페루(Peru)해안지역에서 옥수수가 활발하게 재배, 가공되어 주식으로 이용됐던 것으로 밝혔으며 당시 상황에서도 그렇듯 복잡하고 중앙집권적인 고대 안데스 문명(Andean civilization)을 일으킨 원동력에 관한 큰 숙제가 풀렸다고 발표한 사실을 사이언스 데일리와 BBC 뉴스가 보도했다는 사실은 기존 인류문명근원지를 의심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이 기사는 기원 전 3000년에 문화의 꽃을 피웠던 페루의 노르테 치코(Norte Chico) 아열대지역에서 주민들의 주식은 옥수수였음이 밝혀졌음을 밝히면서 이는 "남미의 초기 문화 역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인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농업에 기반을 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던바가 있다.이것을 카랄/카랄-수페(Caral-Supe)문명이라고 한다.이러한 역사주장은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 4대 문명 발상지인 BC 3000년께 황하(黃河)유역문명과 BC 3000∼2500년 사이의 인더스강 유역문명(Indus civilization), BC 3000년께 나일강유역의 이집트문명(Egyptian civilization),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을 나누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가 않다.이러한 주장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이 4대문명발상지는 근세기에 서양인들에 의해 주도되어 의도적으로 분리되게 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이것은 유럽사를 만들기 위함이다.때문에 서양인들의 엉터리같은 분리주의사상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볼 때 분명 최초 인류발상지는 세계전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북, 남아메리카대륙, 중앙아메리카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다.서두에서 이야기한 미국 인디애나(Indiana)주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의 인류학자 케빈 본(Kevin J. Vaughn)이 밝힌 페루남부에 있는 도시 나스카산(Nasca mountain)의 2000년 된 오랜 철광산(2,000-year-old mine, Ancient Iron Ore Mine)은 철의 시원광원이라 할 수 있는 적철석(赤鐵石:hematite)임이 밝혀진 사실과 동일한 사한이다.600 마일(1,000km)에 걸쳐 칠레 북부 바다 가장자리와 안데스산맥 사이에 끼어 자리 잡고 있는 아타카마사막(Atacama desert)을 북쪽으로 하는 노르테치코문명은 현재 리마(Lima) 북쪽 다섯개의 강, 찬카이강(Chancay River), 우아우라강(Huaura River), 수페강(Supe River), 포르탈레자 강(Fortaleza River), 파티빌카강(Pativilca River)계곡에 걸쳐 다양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페루(Peru) 북중부 해안 노르테치코 지방에 있던 30여개 도시로 이루어진 콜롬부스 이전 고대 문명이라 한 것이다.이것을 서양인들은 타완틴수유(Quechua:Tawantinsuyu)라 하여 콜럼버스 이전의 시대(Pre-Columbian era)의 불과 100년을 지탱한 잉카제국(Inca Empire:1438-1533)이라고 축소시켜 연결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본 블로그 글 "코끼리(象, Elephantidae, elephant)가 남미에 없는 이유http://blog.daum.net/han0114/17050586"를 바탕으로 한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4"의 소제목 (불의 발견과 또 다른 인류이동경로)에서 글쓴이가 주장하길 본래 인류이동경로가 현재 서양학자가 주장하고 있는 정례화된 경로와 다를 수 있다고 한 적도 있다.그것은 지금까지 줄기차게 일률적으로 글쓴이가 밝히고 있는 사실과도 철저하게 관계가 있으며 동시에 인류전반적인 즉 자연에 의한 흐름의 역사를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이렇듯 인류문명지 조차도 서양인들이 조작에 의하여 변질된 것이라면 철기시대 시원 따위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고대 30여개도시국가로 이루어진 카랄/카랄-수페 문명이라고 하는 노르테 치고(Norte Chico)문명이 고작 콜롬부스이전 잉카라고 하는 것은 역사 흐름연속성의 이치에 맞이 않는다는 이야기다.현대사회에서는 하잘 것 없는 식품이지만 본래 옥수수는 인류생존과 연결된 귀한 작물이었고 때문에 인류역사와 밀접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철광의 원천인 적광석이 근원적으로 존재하던 곳의 역사는 기필코 철기시대의 시원이라는 상징성이 분명하게 존재한다.이러한 의구심은 서두에서 언급한 사실에서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등 유럽인들에 의하여 개척되고 식민지화 된 지역 중에는 철기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예외적인 문제가 존재하기에 이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 히타이트가 지금의 중동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Norte Chico (Small North, Near North) 철령(鐵嶺)과 철원(鐵原)늘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오래전부터 불리었던 역사지명은 매우 축소된 것으로 깊이 보면 한반도사가 주장하듯이 그렇듯 단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물론 본 블로그에서 이 지명에 관계되는 사실들을 풀어헤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우리가 왜 철령(鐵嶺)과 철원(鐵原)이라는 지명에 그처럼 의문을 갖게 되는가 하면 분명 한문 개체글자는 물질근원을 말하는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며 금속 철(鐵)이 붙어 그것을 역사화하고 있지만 정작 이 지명이 붙어 있는 위치는 본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더욱 못마땅한 것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를 유럽지역보다 현저하게 늦춰 후진형태의 궁한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족쇄를 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지역적으로 한반도는 이러한 족쇄를 벗어날 수 없는 위치에 묶여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하겠지만 실제 삼한역사를 따져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들을 우리는 찾아 알 수가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역사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안착하고 있는 역사지형위치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릴 진실의 역사 앞에서 스스로 곤욕스럽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한반도에서는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기원전(BC)300년경부터라 하고 삼국이 정립된 서기(AD)300년경까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도 한반도 지형적인 위치라면 수긍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하지만 역사지명은 한반도가 아님을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러한 모순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냥 안주하고자 할 분만아니라 역사지명은 분명 우리에게 진실을 찾을 것을 명령하지만 실상우리는 식민사관에 빠져 개의치 않는 다는 심각성이 분명하게 있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철기시대는 삼한역사를 밟고 지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원칙이 존재한다.때문에 철령이나 철원이라는 지명이 용기있게 존재하는 것이다.근원적으로 철기 제품이 유럽으로 도입된 것은 소아시아에서 기원전 900~1000년 전으로 추측되는 유럽철기시대에서 말하길 그 근원이 러시아 북카프카스(코커서스)지역에서의 철기가 기원전 900년에서 800년경의 코반문화, 체르노고로프카와 보로체르카스크 문화와 함께 타르코 키메르족(Cimmerians)의 이주를 통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의 할슈타트 문화(Hallstatt culture)로 확산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사실도 따져보면 세계삼한역사와 밀접하다는 사실이다.중부유럽문화인 할슈타트 문화(Hallstatt culture)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철기시대초기인 기원전 900년까지 꽃피우던 것으로서 사실상 옛 고구려역사에서 광개토왕정벌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 2011년 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50402 "에서 밝힌바가 있다.또한 남미 아마존지역(Amazon Conservation)은 오래전부터 할슈타트문화에 영향을 주었던 이 키메르족과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남미역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도 유심히 관해야할 문제이다.키메르족은 기원전 7세기에 러시아 남부(코커서스)에서 소아시아로 이동해 온 종족으로 알려진다.그러나 그것은 역이동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이처럼 오늘날 세계사는 뒤죽박죽이다.문제는 한반도지형상 철기시대가 현저히 늦어질 수밖에 없는 위치임에도 왜 철기시대를 상징하는 철원이나 철령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은 당연하지 않겠는가.이것은 아무리 한반도사학자들이 부정을 하더라도 이 지명에 대한 의미는 속일 수가 없다.철령과 철원이 있었던 역시지명에는 반드시 철(Fe)이 생산되는 상징이라 아니라 원칙이 존재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한반도에 생산되는 철은 세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우리의 치부만큼 잘 알고 있다.한반도 지형사정을 볼 것 같으면 철 생산지도 아닌 곳에 그냥 이름만 붙여 놓은 것과 같다 할 수밖에 없다.철령이나 철원이 붙어 있는 지명 주위에 강력한 철 생산 근원지가 존재해야 한다.현재 철령은 북한 땅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과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 이 령(嶺)의 높이가 고작 685m 이며 고개의 북쪽을 관북지방(關北地方)을 말하고 동쪽을 관동지방(關東地方)이라 한다고 설명되고 있지만 구분이 그렇듯 쉽지 않다.사실상 동북지역의 생여진(生女眞)이라는 실체는 바로 고대영어를 사용하던 세력이라 했다.이곳이 북아메리카대륙이라면 뉴잉글랜드(New England)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같다는 것을 적어도 세계삼한역사관을 인정하는 분들에게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또한 철령이라는 지명문제는 한반도와는 격이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인데 특히 이 령(嶺)을 일명 ‘고개’라고 하고 ‘재’, ‘티’, ‘치’, ‘개’ 등으로 불리어 진다는 것도 축소된 의미가 상당하다.본래의 령(嶺)은 깊다, 깊숙하다라는 의미가 강하며 연속(連續)한 산(山), 잇닿아 뻗어 있는 산줄기를 말하기 때문에 큰 산맥(山脈)을 의미하는 것임도 알 수가 있다.정확하게 이곳을 북아메리카대륙 애팔래치아산맥이라 하여도 모든 조건상황은 더할나위 없이 정확하다 할 것이다.본래 고려(高麗)라는 뜻이 포괄적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고려가 한자 명칭에서 한반도 역사화되면서 작은 나라로 전락한 예와 같다.그렇다면 한반도역사를 근거하는 모든 역사사실들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축소된 형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쉽게 추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한반도 역사학자들은 철령을 마치 현 태백산맥의 한낱 고개인 것처럼 기만한 것이다.현재 동아시아대륙의 신중국(新中國)지명에서 보더라도 철령이란 지명의 의미는 한반도 처럼 작은 고개가 결코 아니다.신중국대륙 중부로 흐르는 양자강이라고 하는 장강(長江)과 남부 광동성의 성주 광주(廣州)로 흘러드는 주강(珠江:Pearl River)유역을 분수령으로 하면서 강서성(江西省)과 호남성(湖南省),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사이에 위치하는 대유령(大庾嶺:1000m), 월성령(越城嶺:2,142m), 기전령(騎田嶺:2009m), 맹저령(萌渚嶺:1730m), 도방령(都龐嶺800-1200m)을 합해 오령(五嶺)이라고 하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남령(南嶺)이라고 한다는 사실이 존재한다.南岭(南岭山脉;五岭、五岭山脉),由越城岭、都庞岭、萌渚岭、骑田岭、大庾岭五座山组成,故又称“五岭”。이와같은 것은 결코 령(嶺)은 고개 따위로 치부될 수 없는 지명이다.또한 놀라운 것은 옛 중국에서는 영남(嶺南)이라는 말이 결코 오늘날 한반도에서 사용하는 ‘고개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다.중국남부의 오령(五嶺) 즉 남령(南嶺)남쪽을 말하는 것으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그 범위가 참으로 방대한 것이다.그렇지만 이 령을 한반도 보다는 크게 말하고 있는 신중국역사라 할지라도 북아메리카대륙 보다 축소된 사실에서 피할 수가 없다.남령(南岭)이남을 영남(嶺南)이라고 한 지역설정에서 전체 대륙면적을 살필 때 영남이라 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너무 협소하게 설정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대륙역사를 재야학자 일부에서는 현 동아시아대륙 신중국대륙(新中國大陸)이라고도 하는데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그래봤자 1931년 국민당일원인 장려화(臧勵龢)등에 의해 급조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지형사정이나 마찬가지로 지명의 본래 의미를 찾을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솔직히 호남성(湖南省)과 비교하더라도 영남(嶺南)이란 의미가 축소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물론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중국이 말한 오령(五岭)이나 영남(嶺南)은 삼한역사에서 말하는 령이나 한반도에서 지명한 철원, 철령 등 이것들은 하나의 체제에서 하나의 지명으로 족해야 함에도 신중국대륙과 한반도에 중국과 삼한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이렇듯 상대적으로 똑같은 지명이 있어야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글자를 조금씩 바꿔 붙어놓았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하나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분리한 단면들이다.그래서 인지 알 수 없지만 한쪽은 남령이라 하고 한쪽은 철령이라 한 것만 다르다.대신 그 남쪽 모두가 영남이 되어야 하지만 어자피 지형 나눔이 어설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신중국(新中國)에 표시된 오령이라 할지라도 산맥이라 하기에는 여러면에서 부족함이 없지 않다.한반도 역사지명오류문제에서 한가지 더 지적한다면 한반도 철령(鐵嶺)을 중심으로 북쪽을 ‘관북지방(關北地方)’이라 한 사실에서도 그곳이 분명 고려 후기 몽골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명조의 안변 (安邊) 철령위(鐵嶺衛)가 설치 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여야 하지만 그럴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마찬가지로 철령(鐵嶺)동쪽을 ‘관동지방(關東地方)’이라 하였다는 것에서도 관동(關東)이라는 지명이 얼마나 축소되었는가를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사실상 관동지방이라는 것에서는 인구밀집도를 짐작케 하는데 본래 역사인구동향을 살펴볼 때 절대적으로 동부지방에 인구 밀집도가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인데 따져보자면 열도일본에서 관동지역에 도쿄를 넣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열도는 그나마 지명원칙을 지켰으나 한반도는 그렇지가 못하다.하나의 역사, 하나의 체제가 있었을 북아메리카대륙 애팔레치아산맥 동부 전체가 1776년 미국독립국 형태에서 13개주를 포괄하는 것과 같고 인구밀집도가 당시 북아메리카대륙 전체 인구와 비교케 하는 것으로 경제지역으로서의 역사 본거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경제력이 높으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많이 살려고 하고 거주 할 수밖에 없다.그런데 한반도 철령 동쪽에 그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대도시가 전혀 없다.한반도 역사의 큰 맹점이 바로 이것이다.역사는 인간이 만들기 때문에 역사환경이 인가사와 긴밀하고 밀접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한반도 동해안을 보라.인구밀집도가 높아 역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한반도 황해도는 어떤가.이곳을 철령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보편적으로 관서지방(關西地方)이라 한다.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우습게도 이를 해서(海西)라고도 하면서 이중적으로 불리는데 결코 관서라고 붙일 근덕지가 없다.황해도를 해서라는 것은 한반도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관서지방을 거쳐 중국 대륙으로 가는 길목이라 하였다.한반도 지형은 세로로 길게 뻩어있기 때문에 관서라거나 해서 지명은 거의 서해안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포괄적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어떤가.중국대륙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한 것도 좀 이상하지만 딱이 관서나 해서라고 지정할 곳이 못된다. 엄연히 해서 바닷길이었음에도 길목이라 한 것은 한반도 역사에서 최고로 헛튼 것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길목이라 전제 한 것에서 생각 해 볼 때 한정된 지형이거나 상식적으로 길목을 그릴 수 있는 지형형태를 한반도 황해도에 접목하기에는 곤란한 것이다.신중국대륙에서 지정한 영남과 관동, 관서지명의 범위들도 한반도 사정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들도 알 수 있는데 뒤죽박죽이기는 마찬가지이다.또한 한반도 역사에서 관북지방을 직할지(直轄地)로 명(明)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했다 하였는데 명나라가 만약 일본에 위치한 것이라면 몰라도 명나라가 현 신중국대륙에 있었다면 오히려 철령 북부가 아니라 황해도에 직할지를 설치하려고 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이치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 전혀 없다.철령위가 있었다고 판단되는 원산지역을 보자.현재 상황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만약 철령(鐵嶺)을 남령이라고도 하였던 오령(五嶺)이라 하였다면 중국에서 말하는 철령 남쪽을 영남(嶺南)이라 한 사실과 견주어 볼 때 한반도의 상황은 위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너무나도 지역할당이 빈약하고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철령 남쪽을 영남이라는 것은 강원도(江原道)전역이 그곳에 포함되거나 이어질 뿐이다.때문에 철령(鐵嶺)이라 함은 다섯 개의 령이라 하여 오령(五嶺)대신에 축소하여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남령이라 하였음도 알 수 있으나 남령이라 할 지형이 마땅치 않아 적극적으로 지명을 나타낼 수있는 공간이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단순한 고개나, 재 따위의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철(鐵:Iron)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에 근세기 한반도에 지명 붙이기 작업에서도 어용학자들은 알게 모르게 상당한 고충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솔직히 역사가 아니라 코메디같은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철원(鐵原)어떨까?철원은 한반도 행정구역상 현재 강원도 북서부에 있는 군(郡)으로 되어 있다.삼국시대에 고구려이거나 백제때의 모을동비(毛乙冬非) 또는 철원군(鐵圓郡)이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경덕왕 16년(757)에 철성군(鐵城郡)으로 개칭되었다가 904년(효공왕 8)에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고친 궁예는 905년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911년에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침으로써 이곳은 후삼국 시대의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되며 918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즉위하고 이듬해에 송악(松岳, 開城)으로 도읍을 옮김에 따라 동주(東州)라 하였는데 현재 한반도 위치로 보았을 때 동쪽 땅이라고 하는 동주(東州)라고 명명하기가 어중간한 위치가 된다.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남의 땅을 쳐서 빼앗아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라 하고 1434년(세종 16)에 기존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태종 13년 계사에 가평(加平)과 조종(朝宗)을 분할하여 경기에 이속(移屬)하였다는 것은 상당한 가치의 철(鐵)생산을 염두에 두고 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바로 철이 당시 도시의 가치를 상승시켰을 것이다.철원이라는 지명에서 원을 둥근 원(圓)을 쓰거나 혹은 언덕, 벌판, 근본을 나타내는 원(原)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철이 생산되는 지역을 크게 나타내고자 하는 지명인 것이 틀림없다.후삼국시대때 당(唐)나라의 상인인 왕창근(王昌瑾)이 오래된 거울을 얻었는데, 거기에 쓰여 있기를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청목 가운데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흑금 동쪽에 그림자를 드러내리라.[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現影黑金東]는 일설에서 이를 해석하길 “청목은 소나무이므로, 송악군(松岳郡) 사람으로서 용(龍)으로 이름한 자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임으로 왕건을 이르고 흑금(黑金)은 쇠[鐵]이니 지금의 철원(鐵原)으로, 이는 궁예가 이곳에서 일어나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징험이라고 한 사실이 전해지기는 하지만 이긴자의 역사가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나 왜 굳이 당나라 사람이 이런 언급을 했을까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당나라는 곧 신라인이기 때문에 신라인은 지배주체가 될 고려와 후삼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철원은 굳이 위의 전설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오래전부터 철(黑金) 즉 쇠가 나는 지역임을 지명에서 명확히 알 수가 있다.그러나 현 한반도 철원군은 관개 시설이 잘 갖추어져 강원도내 제1의 쌀 생산지대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은 희극이다.한반도 철원에서 사실적으로 자원을 보면 금성 부근의 유화철광, 중정석, 망간이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유화철광은 산골자연동(自然銅)이라는 것으로 이황화철(FeS2) 또는 산화철을 함유하는 것으로 철이 46.6%, 유황이 53.4%를 차지하는 사철등에 이용된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70%함유량을 가진 적철광보다 못한 것이다.다시말해 철을 제조할 수 있는 함철광물인 적철광(赤鐵鑛,Hematite: Fe2O3), 자철광(磁鐵鑛,Magnetite: Fe3O4), 능철석(菱鐵石, siderite), 갈철광(褐鐵鑛,Limonite: Fe2O3.nH2O)등이지만 이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그러하다면 한반도 철령과 철원은 이름값도 못하고 있다.아시다시피 남한의 철 광산은 신예미 광산(강원도 정선)이 유일하며, 현재 남한 수요의 대부분을 호주, 브라질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역사를 얼마든지 추단할 수가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 고로(용광로)를 사용하여 철을 생산하였기 때문에 덩이로 된 광석(鑛石), 괴광(塊鑛)의 적철광이 주로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적철광의 광상, 광원이 없는 한반도에서 철원이나 철령이란 역사지명을 사용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적철석(赤鐵石, hematite:Fe2O3), 적철광(赤鐵鑛)αιμα(blood)Ochra rubra=Red stone-ochre 붉은 빛의 황토(黃土). Reference List:Wallerius (1747): 259-266.Latin synonym of:HematiteName:From the Greek Αιματίτης = Blood-stone.Greek name for:Hematite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 (325 B.C.)]The System of Mineralogy of James Dwight Dana and Edward Salisbury Dana Yale University 1837-1892, Volume I: Elements, Sulfides, Sulfosalts, Oxides. 한반도에서 그나마 자원이 있다는 북한 철 광산의 단점은 철 품위가 낮은 자철광(Fe 30% 내외)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역사적인 문제에서도 시사한바가 큰 것이다.그러나 사서(史書)에서는 강원도 강릉대도호부를 본래 예(濊)의 고국(古國)이라 하여 이를 철국(鐵國)이라고도 하고, 예국(橤國)이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그 만큼 강원도(江原道)는 옛부터 철국(鐵國)이라 할 정도로 철의 생산지로 유명했음을 분명하게 역사기록은 밝히고 있다.일찍이 고려 예종 3년(1108)에 성을 쌓아 진(鎭)을 설치하고 방어사를 두었다고 하는 공험진(公嶮鎭)은 다 아다시피 고려 예종(睿宗1079-1122,재위:1105-1122)때 윤관(尹瓘)등에 의해 생여진(生女眞)이라 하는 동북여진(東北女眞)을 축출하고 개척한 지역에 쌓은 9성(九城)가운데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오늘날 한반도 역사에서는 공험진을 북쪽 소하강(蘇下江)강변에 있다고 하고 조선시대의 모든 관찬문서와 지리지 등은 공험진의 소재를 두만강 북쪽 700리(里:275km)에 두어 항상 선춘령(先春嶺)과 함께 기록하거나 주기한 것도 알 수가 있다.그러나 동북(東北)으로 흘렀다는 소하강(蘇下江)의 실체지명과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 지금까지 신중국, 한반도, 열도의 동양학자들의 연구가 그렇게 빈번하였음에도 이 지명에 대한 확실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아시아역사는 본래 역사라고 말할 수 없는 정도로 혼란상태에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것은 본래의 역사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만들어진 역사에 꿰맞추려 한것이니 이처럼 모든 문제에서 일치않는 이상문제가 빈번한 것이다.왜 이런 중대한 지명사실규명에서 엉거주춤 구렁이 담 넘어 가듯해야만 할까?기존 역사와 일치않을 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찾아 밝혀야 했다.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없다.아마도 그것은 한반도역사와 동아시아 역사의 한계라 할 것이다.공험진이란 지명 단어를 살펴보면 험준한 해상방어기지라는 의미가 강하다.또한 한반도 두만강에서 700리 북쪽이라 하였기 때문에 700리를 270킬로미터로 환산하여 구글 위성으로 재어보면 북쪽에는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한카 호(興凱湖,:Khanka Lake)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곳을 공험진(公嶮鎭)이라 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왜냐하면 공험진은 해상에 들어오는 적을 막으려 세운 해상방어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현 한카호는 상당히 해안과 멀어 그러한 실제적인 군사방어진지로 합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自汉代起就有東北的游牧民族的居住的紀錄,歷史上曾經為渤海國(当时称为湄沱湖)遼、金、元和清的領土清代時當地屬吉林將軍管轄地。兴凯湖在唐代称为湄沱湖,因湖形如“月琴”,故金代有“北琴海”之称,清代改为兴凯湖。"兴凯"是满语,意为"水从高处往低处流"之意위 이 한카호를 설명한 신중국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발해국(渤海國)영역내에 존재한 사실과 당시에는 미타호(湄沱湖)라 하였고 당나라까지 호수형태가 월금"月琴”같다하여 이 이름이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금(金)나라때는 북금해“北琴海”라 칭하였고 청(淸)나라때는 흥개호(興凱湖)라 하였는데 만주어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매우 물의 흐름 이치를 단순하게 보았지만 자연의 이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녹아있는 지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평균수심 4∼5m의 담수호(淡水湖:freshwater lake)라 하지만 습지대인 한개호가 스스로가 과연 물의 흐름을 이야기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동사강목 제5상 병오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부터, 을미 신라 경순왕(敬順王) 9년까지 170년간경술년 흥덕왕 5년(830, 당 문종 태화 4)에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나라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太白山)의 토끼와 남해의 곤포(昆布), 책성(柵城)의 콩자반, 부여의 사슴, 막힐(鄚頡)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顯州)의 포(布), 옥주(沃州)의 면(綿), 용주(龍州)의 명주, 위성(位城)의 철(鐵), 노성(盧城)의 벼[稻], 미타(湄沱)의 도미[䱶]등이다. 과일에는 구도(九都)의 오얏과 낙유(樂游)의 배[梨]가 있다. 그 나머지의 풍속은 대략 고려와 거란과 비슷하다라고 한 사실에서 발해 위성(位城)이란 곳에서 철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현재 동아시아 근대사는 발해를 현재 한카호를 중심으로 동북만 연해주영역을 만들고 있지만 어디에도 세계적으로 들어나는 철 생산지역이 아니다.도대체가 이상하지 않는가.해동역사 제27권물산지(物産志) 2 어류(魚類) 붕어[鯽]○ 발해의 풍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미타호(湄沱湖)의 붕어이다. 《신당서》○ 조선의 붕어는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것도 있다. 《조선부 주》위 해동역사를 보더라도 발해의 풍속에서 실제로 미타(湄沱)의 한자 의미는 미(湄)는 강기슭. 강변. 물가이며 타(沱)는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포구, 물갈래(강물이나 냇물 따위가 갈라져서 흐르는 가닥)등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카호가 발해에 속하고 그곳에 붕어가 유명하며 위성에는 철 생산이 유명했다는 사실과 현실문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즉 그곳은 강기슭이나 강변, 물가,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포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또한 그곳에 해상방어진지인 공험진(公嶮鎭)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난감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적어도 미타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호수가 아니라 포구이며 공험진 역시 해상방위진지이기 때문에 해안가까이에 설치될 지명이다. 때문에 공험진을 찾으려니 한카호가 나타나지만 종합해 볼 때 단순한 호수가 아니라는 결론이다.적어도 발해의 미타(湄沱)라고 하는 지명은 바다나 강 같은 것으로 강줄기가 나무 가지처럼 얽히고설키는 늪 같은 형태를 생각해 볼 수 있고 배가 왕래할 수 있는 포구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하는 지명이다.그러나 실제로 미타호라는 지명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한반도역사나 지금의 신중국역사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다.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밝힐 수 있을까.바로 세계삼한역사관이다.위 신당서(新唐書)의 발해전에서 보았듯이 발해에서 귀한 물품 중에 ‘위성(位城)의 철(鐵)’이란 기록이 있다.도대체 위성(位城)은 어디에 존재할까?이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철강산업 모순의 역사추적철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철강산업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현재 철강산업은 “산업의 쌀”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른 산업에 대한 연관효과가 지대하여 자동차, 가전, 조선, 건설, 기계 등과 같은 전방위 산업의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서두에서 이야기 한 것이지만 철의 역사만 놓고 보면 이상하게 본래 근원지라고 알려진 소아시아와 중동보다 아메리카대륙 쪽이 가깝고 타당하다.서양학자들의 주장에서 볼 때 전혀 철의 근원지가 될 수 없고 철기시대와 동떨어지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서 오히려 철강산업이 시작되었고 산업발전을 지속했다는 상황을 재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남미 페루의 노르테치코문명 혹은 카랄/카랄-수페(Caral-Supe)문명을 재고하지 않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突不燃不生煙이덕무(李德懋)의 열상방언(洌上方言)에서 굴뚝에 불을 지피지 않으면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말과 같이 결과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철강산업이 발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철기시대와 무관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미 미국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인류학과 교수 케빈 본(Kevin J. Vaughn)에 의해 기존 철기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서 2000년 된 오랜 철광산(2,000-year-old mine, Ancient Iron Ore Mine)을 페루 남부에 있는 도시 나스카 산(Nasca mountain)에서 적철석(赤鐵石:hematite)을 발견하고 이를 시초라고 하였다는 뉴스기사는 기존 철기시대 역사를 재고하기에 충분한 것이다.그렇다면 애초부터 철기시대를 감안하지 않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기존 주장을 역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철의 라틴어원을 가지고 있는 적철석(赤鐵石:hematite)의 근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특히 높은 철함량(70%)때문에 가장 중요한 철광석이라고 알려는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적철석의 가장 중요한 광상(鑛床:ore deposit)은 퇴적 기원으로, 북아메리카의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지역과 같은 퇴적광상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연간 약 7,500만t)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또 다른 중요한 광상은 브라질 중동부의 고원 '광물이 있는 넓은 평야'라는 의미를 가진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와 또한 베네수엘라(Venezuela)의 중남부 고원 세로볼리바르(Cerro Bolivar), 캐나다의 래브라도 (Labrador)와 퀘벡(Quebec)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그렇다면 고대 히타이트(Hittite)의 정확한 위치도 위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슈피리어호를 중심으로 고기 빅산지에서 우리가 찾을 수밖에 없다.그럼에도 끝까지 서양학자들은 소아시아와 중동을 이야기 하는 것은 정말 무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즉 북아메리카대륙의 변성된 퇴적암 중에서 특히 많이 산출된다는 특징이 있다.퇴적암은 지구에 대기와 바다가 만들어진 후에 생성되었다고 추정한다.철기시대부터 시작한 인류역사를 생각할 때 철은 차라리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케빈 본(Kevin J. Vaughn)이 칠레에서 적철석을 찾은 것은 이 철의 기원과 연결될 수 있는 철의 시원을 찾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현재 세계사는 아메리카대륙 보다 철의 기원을 아시아대륙으로 지정하고 기원전 12세기 그리스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중동지역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인도는 중유럽과 같은 기원전 8세기와 6세기에 걸쳐 유럽지역으로부터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였으며 로마제국과 헬레니즘 혹은 북유럽 초기 중세기 즈음에 철기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것에 학계의 공통적인 의견이라고 정리되고 있다는 것은 정말 혼란스러운 것이 틀림없다.더군다나 편협적인 문제도 지적되고 있는 것은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등은 유럽인들에 의하여 개척되었고 식민지화 된 지역이기 때문에 아예 철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괴변도 참으로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망발인 것이다.그들이 차지한 영역은 철기시대가 없다는 주장은 무슨 배짱인지 알 수가 없다.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철기문화발달의 기원을 진단할 수 있는 것은 퇴적암의 적철석(赤鐵石:hematite)이라고 본다면 공교롭게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인들이 식민지한 지역인 슈피리어호(Lake Superior)와 캐나다 동북부지역에서 광상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서양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모한 것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의 슈피리어호는 철의 기원과 매우 밀접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철기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아시아대륙 중동(中東:Middle East)에는 메소포타미아문명지에 근접한 북부에 흑해(黑海:Black Sea)와 내해(內海)라고도 하는 카스피 해(裏海:Caspian Sea)가 있는 구도에서도 북아메리카대륙 슈피리어호와 동일하게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근세기에도 그곳으로부터 철강산업이 집중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현재 중동지역은 그렇지 않다.영국이나 프랑스가 그곳에서 남진하는 러시아를 상대하여 그레이트 게임을 지루었다고 할 당시 19세기초기에 인구밀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던 곳이다.본래 인류문화가 발생한 땅에서 무엇때문에 인구가 분산될 수밖에 없었겠는가.기존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아나톨리아(Anatolia)반도를 근거로 하는 고대 히타이트(Hittite:BC18세기경-BC1180, BC8세기) 또는 히타이트 제국의 위치 역시 아시아대륙 중동 흑해와 카스피해 남쪽에 위치하는 방향구도 역시 동일하게 볼 수밖에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판단이 될 수 있는 주장이다.인류가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을 도구로 사용하는 철기시대로 진입하는데 가장 큰 획을 이룬 고대국가는 히타이트(Hittite)였다는 사실과 히타이트 제국은 하티(Hatti)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걸쳐 있던 고대 제국으로서 주위 철강석이 많아 아주 오래 전부터 철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철기는 쇠와 불순물이 섞여 있는 스폰지 형태의 덩어리를 달군 다음 해머로 단조해서 만든 것으로 이렇게 도구를 만드는 방법은 히타이트인들이 처음으로 창안했다고 알려지는 것들은 상대적인 지역인 북아메리카대륙을 충분히 철의 기원으로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그렇다면 근세기에 최초의 철강회사가 이곳에 설립되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자원이 고갈되었다고 하면 오래된 거대한 광산의 자취라도 존재해야 한다.어떠한 역사사실에서도 결코 큰 단절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중동지역이 과연 그러한가.또 하나 서양인들의 주장에서 보면 현재 중동지역이라고 하는 비옥한 반월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 역시 BC1600년경부터 1200년경까지 히타이트가 지배했고 BC1300년경 당시 히타이트제국은 쇠를 녹여 금속을 추출하는 야금(冶金:metallurgy)기술을 독점했으나 BC12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Anatolia)남부해안을 따라 밀려들어온 해양사람들에 의해 멸망했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해양사람들은 누굴 말하는 것일까?이러한 비정상적인 논법의 역사 뒤에는 바로 서양 유럽사가 은밀하게 숨어 있다.본 블로그 글 "압록강 자치(Korea taimen)는 갈색송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7"에서 유럽대륙 발칸지역인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를 근거로 해야하는 오흐리드송어(野鱒:Ohrid trout)가 오히려 북아메리카대륙 미네소타(Minnesota), 와이오밍(Wyoming), 콜로라도(Cologado), 몬타나에 복잡하게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도 유럽발칸반도 제국(諸國)과 아타톨리나반도제국(諸國)들이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 남쪽에 위치한 것임을 자연과학적, 또는 생물학적으로 밝혔다는 사실도 참고 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철강은 근대 산업사회의 전환기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며 또한 산업혁명의 토대를 이루는 핵심요소가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철기문화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현대문명으로 꼴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들어 섬나라 잉글랜드라고 하는 영국(英國)에서 산업혁명이라는 공업화 개혁이 시작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기계의 눈부신 발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요약되는 이 산업혁명은 먼저 면직물 공업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렇게 시작된 기계의 개량과 발명은 모든 산업 분야에 급속히 퍼져나가 천지개벽을 하게 만든 것이라고 설명된다. 이와 동시에 증기기관의 개량에 따른 동력 혁명이 일어났고, 더 나아가 제철업으로 이어지고, 석탄산업, 기계공업도 이렇듯 자연 순차적으로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709년 에이브러햄 다비(Abraham Darby:1678-1717)가 고안한 코크스를 이용한 용선법은 양질의 철강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적 토양을 만들었고, 1740년대에는 벤저민 헌츠먼(Benjamin Huntsman:1704-1776)이 도가니 제강법을 창안해 종전보다 우수한 강철을 짧은 시간에 싼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산업화인 것이다.1784년에 헨리 코트(Henry Cort:1741-1800)가 개발한 새로운 압연기술과 정련기술은 영국의 제철 산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지며 또 이즈음 철 생산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대기압 증기기관을 비롯한 새로운 동력기관이 탄생하였고 그 가운데에서 제임스 와트(James Watt:1736-1819)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운송기술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는 것은 어느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당시 증기기관차는 그 자체가 철을 상징하는 대명사였다고 하였으니 부족하지 않다. 이렇게 되자 철도가 가는 곳마다 철교가 생겼으며, 철도 건설 붐은 레일의 대량 수요를 창출하였으며 19세기 철강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어 영국은 철과 석탄의 시대를 맞이했는데 이 시기부터는 철(鐵)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바탕이 되었으며 국가의 국력을 좌우할 만큼 한 국가에 있어 철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으로서 즉 목탄에 의존하던 제철 산업이 석탄을 연료로 하는 제철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산업혁명의 극대화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현 잉글랜드 섬이라고 하기엔 무엇인가 찜찜한 것이 사실이다.지구상에는 철의 매장량이 77경 5천조톤 이상이라고 추정되어지고 있다.물론 현 잉글랜드 섬에서 철이 생산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1800년대의 연간 세계 철의 생산량은 50만톤에도 미치지 못하였지만 19세기 말에는 6~7배가 증가된 약 350만톤이 되었으며 현재 2000년에는 연간 약 8억-9억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을 정도로 철의 산출은 높아만 간다.19세기와 비교할 때 지구상에 뭍여 있는 철은 다대하다고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유럽에서는 14, 15세기에 수차송풍(水車送風)에 의 한 고로법이 출현하고 나서 용융선철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수차라 함은 바로 물레방아로서 성종19년(1488)에 최부(崔溥)가 물레방아라고만 알고 있는 수차(水車)를 만들었고 윤판(輪板)을 녹나무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무엇인 다른가. 같다.철을 제련하는 방법은 처음에는 광산에서 캐낸 철광석 덩어리 위에 장작을 태워서 얻은 열로 녹이는 단순한 방법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이다.그러던 것이 유럽인들에 의해 14세기 초에 처음으로 목탄을 사용하는 용광로로 이용하여 선철을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18세기에 비로소 목탄 대신에 코크스(Cokes) 즉 석탄을 사용하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 현 근세사의 이야기다.석탄을 사용하여 선철을 연하게 하는 교련법(Puddle Process)이 1784년 영국의 헨리 코트(Henry Cort)에 의해 발명되고 난 후 1856년에 영국의 베세머(Henry Bessemer:1813-1898)는 용해된 선철에서 강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전로(Converter)를 개발하였고 1864년에는 영국인 지멘스(Wilhelm Siemens:1823-1883, Friedrich Siemens:1826-1904)형제가 평로제강법을 특허로 얻은 것을 프랑스인 마틴(Pierre Martin:1824-1915)이 이를 더욱 발전시켜 19세기 후반에 1,600℃이상의 고온에서 정련된 강철(鋼鐵:steel)을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는 근대적 제련법의 기반이 확립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이런 제련 기술이 고려와 조선에서는 없었을까?아니다.위 수차를 발명한 시기가 유럽인들이 수차발명시기와 거의 같다.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임신(1392,홍무 25) 9월21일 (기해)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대사헌 남재南在:1351-1419)의 상서문 一, 前朝之季, 下令各道, 鍊鐵作兵器久矣, 聞西北面鍊鐵倍舊, 而軍器之數不加多。 願令都評議使司, 移文都巡問使, 每季月呈報, 考其一月所鍊鐵物, 所作軍器之數, 申聞勸懲。 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미 고려의 말기에 각도에 영을 내려서 쇠를 제련하여 병기(兵器)를 만들게 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였고 서북면에서는 쇠를 제련하는 것이 예전보다 배나 되는데도 군기의 수량은 더 많지 않다고 하면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도순문사(都巡問使)에게 공문을 보내어 매철ㆍ매달마다 정보(呈報)하게 하고, 그 한 달에 제련한 철물(鐵物)로써 제작한 군기의 수량을 상고하여 신문(申聞)하게 하여, 잘한 사람은 권장하고 잘못한 사람은 징벌하게 하라고 임금에게 상소한 내용이 있다.이 역시 유럽인들의 고로사용과 시대적으로 거의 같거나 빠르다.또한 조선 세종시기에 과학자로 알려진 장영실(蔣英實)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사서(史書)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은(銀)의 제련은 신대륙발견과 같은 시기인 15세기 말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납[鉛:Pb]광석을 사용하여 은(銀)을 제련(製鍊), 분리하는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을 일찍부터 사용하였으며 이 제련기술은 16세기부터 조선정부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시행되었고 이것이 바로 현재 통용되는 회취법(灰吹法)과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특히 이렇게 제련된 단천(端川)의 은(銀)은 당시 중국(고려)은(銀)이나 일본(멕시코)은(銀)보다 순도가 훨씬 높았다고 하는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산업혁명의 진실사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유럽인들의 신분이 완전히 탈바꿈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그들의 일천한 신분인 해적에서 해양사람으로 변천하고 대항해시대를 거론하는 선진문명인으로 신분이 상승하고 뒤바뀐 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 고려(高麗)라는 실체이다.고려는 동양아시아인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문명인들의 집합이라고 봄이 옳다.글쓴이는 세계삼한역사를 연구하고 있지만 절대로 동양인인 한반도인만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실제로 그렇다면 세계라는 명칭을 스스로 부여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그러나 고려(高麗)를 이끈 핵심세력이 반드시 백인 서양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확고함도 있다.고려의 금속활자발명과 종이발명에 대한 이야기를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 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에서 밝혔던 바가 있다.고려를 중국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근대산업문명역사 변천에서 가끔 기존역사에 마취되어 진의를 분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물론 엉터리 지식에 의해 각인되어 마치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하고 있는 것은 산업혁명이 서양인들의 전유물로 비춰게 한다는 사실이다.서양인들은 유럽인들이다.그러나 이러한 대입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절대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마찬가지로 미국독립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1775-1783)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상대로 치러진 것이 아니라 만약 동양문화주체인 조선(朝鮮) 즉 코리아(COREA:US)와 대결로 기록하게 했다면 현재 미국역사는 화이트(White)즉 서양위주의 역사로 만들어질 수가 있었을 것인가.해답은 간단하다.고려가 금속활자를 처음 발명을 했다는 사실은 서양인들도 공히 인정하는 바다.금속활자 발명은 종이 발명에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금속활자는 서양인 신분을 탈바꿈하게 한 도구 신문을 탄생하게 하였다.어떤가.바로 서양인들의 전유물이 된 기록이란 역사의 시초가 종이와 금속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를 고려라고 하지 않았을 만정 유나이트 고려(高麗聯邦)임에는 틀림없다.마치 고려는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하는 그레이트 브리튼이고 조선이 여기서 분리된 것과 같다.어쨌던 서양사에는 조선을 미국(美國:US)으로 처리한 것이라고 여겨진다.물론 시대적으로 고려가 조선의 상국임에 틀림없다.그러나 18세기에는 당시 조선(朝鮮)을 프랑스화 하였던 것으로서 고려는 그대로 존속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끊임없이 주장했던 것이다.영국이라는 틀은 무척 거대했다.여러가지 역사성에서 복합적인 문제가 모두 영국화되었다.동양문화역사까지 포괄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본 블로그 글 시리즈 "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글을 보더라도 분명 조선(朝鮮)은 프랑스(FRANCH)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들은 세계사에서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의 뒤섞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고려금속활자발명에 의한 인쇄술발달은 역으로 왕권 전제정치(專制政治:despotism)의 끝을 보게 했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여기서 고려가 퇴보하고 조선이 부각된 것이다.이것은 백인들만의 작품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인쇄술발달은 기계산업 발달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그렇다면 프랑스혁명(1789-1794)은 산업혁명(産業革命)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당시 부르몽왕실(House of Bourbon)의 비밀스러움이 수많은 종이 찌라시에 담아 적나라하게 노출되게 한 것이 바로 이 인쇄술 발달이 가져다 준 것임이 틀림없고 루이16세가 성불능자로 알려지거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요부로 그려진 그림들이 세상에 급속하게 퍼져나가 일시에 왕실의 위엄이 크게 실추되었다는 사실 등은 산업발달과 함께 나타나는 변혁이었던 것이다.이러한 사실을 접한 대중들은 기존 왕실에 대한 존경심보다 반감이 높아지게 되고 왕실을 보는 여론들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왕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대중적 비판 도마 위에 올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전제정치의 끝을 보게 만든 핵심이다.이에 더하여 갑자기 제왕보다 더 힘이 강해진 자본앞에서 재정고갈에 대한 책임은 노출된 제왕에게 모든 활살이 쏟아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이후 이러한 원인들이 프랑스혁명을 촉발시키고 반 작용하였다고 분명하게 근대사는 기록하고 있다. 숙종, 영조, 정조시대에서 기존 한반도사는 물론 소중화 사상에서 나온 문화가 배경이 되었다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 발전과 함께 질서의 변혁이 이루어지고 경세적(經世的)인 측면과 봉건수취체제의 변혁이 특징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때문에 이러한 인쇄물들은 어쨌거나 종전에 볼 수 없었던 고속능 금속인쇄기에 의해 인쇄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서양사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금속으로 이루어진 인쇄기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이것을 굳이 1795년경 영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실도 어찌 보면 영국을 산업혁명에 상징화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생각해보라.금속활자를 누가 발명을 했는가.고려(高麗)라는 역사주체를 서양인들이 배제하고 싶겠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로 심장(core)에 새겨져 있다.고려는 하나의 체제를 구가하는 “COREA”라는 사실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타고르가 부르짖던 고국이다.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COREA”는 스코틀랜드이어야 하고 로마노프왕가일 수 있으며 또한 스페인이라고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그러나 이런 왕가들이 현재 국가가 되어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는 사실에서 복잡한 문제가 있다.특이한 것인 유럽왕실이 국가로 나눠져 있지만 따져들어가보면 왕족들이 전부 먼 친척뻘이다.영국의 왕가의 계보가 끊겼을 때 스코틀랜드왕가가 대신 이어갔다는 것은 서양사에서도 잘 나타난다.이러한 삼한역사 사실들이 전부 백인계 영국화(西洋化)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사실상 잉글랜드가 영국(英國)이라는 것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다.신세계(新世界)와 신대륙(新大陸)역사를 전제하면서 1776년 태동했다고 하는 기독교와 백색인종만의 미국역사는 근세기에 급속하게 변질된 것이다.하나의 역사를 동양사와 서양사로 이분한 것은 명확하게 유럽사를 만들기 위함이다.동양사(東洋史)는 아시아대륙을 근거로 신중국과 한반도조선, 열도일본구도로 만들고 그 구도에서 마저도 삼한역사는 절대로 한반도 북쪽 압록강을 한계선으로 제한하고 영토를 넓힐 수 없도록 강제하면서 한반도역사에 가두어버렸고 대신 대항해시대부터 숙명적으로 열도주체들은 일본(日本)이란 아시아 국명을 사용을 허가하면서 그들의 민망스러웠던 민낯의 역사를 대신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유럽인들은 수학적 확률에 의한 한쪽의 이득과 다른 쪽의 손실을 더하면 제로(0)가 되는 제로섬게임(zero-sum game)방식을 세계사에 적용하면서 5천년 유구한 역사라 하지만 조공역사(朝貢歷史)로 떡칠하게 하였고 본래부터의 찬란한 자주성과 자립성을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그리고 더 나아가 한반도를 한계로 하는 왜구침탈역사를 만들면서 일본식민지를 정당화, 사실화하였고 노예근성을 심기에 혈안된 것도 사실이다.이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서세만의 우월역사 유럽사를 만들기 위한 삼한역사 빼기 작업이었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세계삼한역사이며 이 공간을 서세가 차지하는 제로게임의 핵심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이다.솔직히 오늘날 영국역사는 유럽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것들은 오리엔탈문화를 세계역사가 아닌 아시아대륙에 한정시키고 아시아역사화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영국경제학자이며 역사가인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1852~1883)가 프랑스혁명 후 100년이 흐른 시점인 1894년에 그의 저서 “18세기 영국에서의 산업혁명<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글에서 영국을 강조하였지만 스스로 영국 만들기의 일환에서 나타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주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실제로 프랑스학자들에 의해 가장 먼저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가 있다.이에 대한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사실이다.산업혁명의 파고가 마치 서양인들에 의해 18세기 말엽부터 조선(朝鮮)중심부로 들어간 것처럼 만들지만 실제로 그들이 거주한 곳이나 아시아 조선이라고 지칭한 곳은 아메리카대륙 동부(東部)에서 서부(西部)로 옮겼을 뿐이지 결코 그들이 이동한 곳은 현 아시아대륙이 아닌 것이다.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세계삼한역사가 존재하는 하나의 체제, 중심부로 들어간 세력일 뿐이다.과거 특히 본 블로그 글에서 18세기때 서양인들이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중국 땅으로 가는 태평양(太平洋)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바로"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이란 글이다.그만큼 낙후된 지도상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1667년에 지도제작자 존 오버톤(John Overton:1640-1713)이 그린 버지니아지도에 분명하게 중국바다와 인디즈(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라 하고 그것을 지금의 미시시피강(江)으로 표시하고 있었다는 사실들을 밝혔다.결국 그들의 활동지역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이다.서양인들은 이 미시시피강(江)을 거대한 바다(海)라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당시 수많은 이양선(異樣船)들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출몰했다고 조작한 것은 이와같은 것이며 그러한 이상한 역사착오가 현재 돌이킬 수도 없는 한반도역사로 둔갑했다는 사실을 이제 기억하고 명심해야만 한다.다시말하지만 한반도 역사는 서양인들의 우월한 유럽사를 만들기 위해 엮어놓은 축소된 역사이다.때문에 결론적으로 산업혁명이라는 것은 최소한 서세(西勢)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하나의 역사, 하나의 체제라고 하면 기존 토지가 불변성 하드 자본(immutability Hard capital)으로 취급되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한 농업과 수공업, 상업으로 이어지는 산업이 주류였을 것이다.하지만 기계발달에 의한 산업혁명(産業革命)이 발생하면서 유동성 소프트 자본(liquidity soft capital)인 공업과 기계를 사용하는 제조업 위주의 경제로 변화하는 과정은 종전에 생각 할 수도 없는 이문(利文)과 이문에서 생성되는 이자(利子)라는 개념에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을 서세들은 이용하였고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부(富)의 원천이 한정된 토지(土地)가 갖는 가치보다 그 토지를 헐값으로 매입하고 매장된 천연자원의 사용할 수 있는 무한의 권한을 확보함에 따라 기계를 이용한 상품(商品)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이윤(利潤)과 이식(利息)을 창출하고 거대한 부(富)를 축적한 자본주(資本主)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이 자본주들의 과거 제정왕권의 왕을 대신하는 구조로 사회권력구조가 변천되고 이것을 보호하는 법과 질서가 생성되면서 이는 새로운 제국주의 개념이 싹터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과거 제정왕권을 자본을 무기로 하면서 권력을 강탈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이러한 거대한 자본주의 출현은 안타깝지만 하나의 체제로서 굳건했던 세계삼한역사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었고 모든 권한을 위축되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자본에 의한 물질만능주의는 과거나 현재나 이기심을 자극하고 자기 것에 집착하게 만들면서 계층 간의 갈등, 집단 간의 갈등, 인종, 종교, 지역갈등 등 평소에 생각할 수 없었던 다양한 부분에서 이기주의 형태나 나타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것이 당시 국가관이나 역사관을 흩어 놓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으며 결국 하나의 체제에서 사회 각 계층 간 통합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부각되면서 체제의 소속감을 위축시키고 정신적 통합을 방해했던 것이 틀림없다.오늘날 대한민국의 분열된 사회상황에서 그것에 대한 어두운 단면을 충분하게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철도산업와 자본주의전기 했듯이 실제로 철강산업이 발달한 곳은 영국 잉글랜드섬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이라고 해야 맞다.그것은 현대 산업발달의 근원지가 어딘지 분명하기 때문이다.산업혁명을 이야기하고 각종 기계발달을 염두에 두는 것에서 현 잉글랜드 섬은 경제를 활성화하기에는 거대한 대서양이 가로 막아 운송문제와 이동문제로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그럼에도 잉글랜드 섬에서 증기동력발달이 시초하여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이전시켰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다시말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어디쯤 영국인들이 활동한 모든 역사를 잉글랜드 섬으로 가지고 들어갔을뿐이다.철강산업(鐵鋼產業)발달의 요인은 두 말할 것이 철의 수요가 급증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19세기 중반부터 바로 철도산업이 활성화된 이유를 찾을 수 있고 동시에 선박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것을 위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국제금융조직체들이 만들어졌고 그것에 의해 남북전쟁이 기획적으로 발발했다는 오해소지가 적지 않다.무기산업(武器産業)발달은 이러한 것들을 한꺼번에 완성시켜버린 것이다.때문에 산업혁명은 지금의 잉글랜드 영국에서 발단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이었다는 말을 되집어 볼 수 있어야 한다.무엇보다도 중요한 증거는 아래 아래 그림<북미 철 생사관 석탄 생산도>에서 뉴잉글랜드 내에 철 생산지가 폴리머스와 필라델리파에 표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곳은 뉴잉글랜드 지명 내에 속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잉글랜드가 오늘란 섬나라 잉글랜드로 탈바꿈한 것이다.철도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생성된 바로 골드러시(gold rush)라 할 수 있을 것이다.골드러시가 잉글랜드 섬에서 시작된 것은 결코아니다.본 블로그 글 “골드러시(gold rush)와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號)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6 “에서 밝혔듯이 북미대륙에서 처음으로 금(金:gold)이 발견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처음 1820년 말 영국인들의 개척지인 조지아주(Georgia)달로네가(Dahlonega)근처에서 금(金)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한 후 금(金)을 채굴하기위하여 토착인을 쫓아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였고 그것을 위해 가변성의 미국정부는 1830년에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을 강행하였다는 사실과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gold rush)는 본격적으로 동부에서 서부로 무한정 인구이동을 발생시켰다는 사실등을 알 수가 있다.당연히 이를 위한 운송수단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대륙횡단철도(大陸橫斷鐵道)와 바다로 항해가 가능한 철로 만든 선박이 필요했던 것이다.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 "에서 살펴보았듯이 골드러시가 발생하면서 이 서부의 소식이나 금(金)을 이송하는 수단으로 우편수송선이 인기가 있었고 1848년 윌리엄 헨리 애스핀월(William Henry Aspinwall:1807-1875)에 의해 초보적인 스팀선인 1,000톤급 규모의 사이드외륜선(side-wheel steamer)을 건조하면서 그것으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를 설립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운항로를 파나마(panama)와 오리건(Oregon)사이로 정하면서 우편배달과 기물 또는 금(金)을 수송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현재 한반도인들이 착가하는 것은 이 외륜선을 마구 대양을 넘고 횡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선박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도 문제이다.이 외륜선은 연안용에 불과하고 강을 횡단하는 규모일뿐인 것이다.그러자 금광소문이 동부에 이르고 육로보다 서부로 들어갈 수 있는 운송방법을 찾으면서 처음 파나마(Panama City)에서 콜론(Colon)까지의 파나마철도가 필요하였고 결국 1850년대 건설을 시작하여 1855년 1월 28일에 완성한 러시아궤(1,524mm)의 파나마 철도(Panama Railroad)가 부설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이 러시아궤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와 중앙아메리카 시설된 철도에서 주도된 것은 당시 러시아라고 불리어지는 로마노프왕가 즉 유나이트 고려(United Corea)가 주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동부에서 연안수송선을 이용하는 한계에 부딪치면서 마침내 캘리포니아(California)주의 세크라멘토(Sacramento)에서 네브래스카(Nebraska)주의 오마하(Omaha)를 잇는 길이 2,826km의 첫 대륙횡단철도가 1863년에 시작하여 6년간의 공사를 거쳐 1869년 완공되었다. 그렇게 되자 연안수송선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는 높은 수익이 반감되면서 새로운 해운사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문제는 서부에서 불어되는 골드러시는 많은 화이트를 이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185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금광이 발견되면서 금속화폐유통량이 1860년에는 2억5,300만 달러가 되었다고 한다.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자본은 미국연방국채의 46%, 주채권58%, 미국철도채권26%를 잠식하고 있었다고 알려진다.이것은 영토에서 생산되는 금(金)을 보유한 원인으로 작용하다.이때부터 영국자본이 바로 국제금융재벌이 되어 이 모든 자본구조를 좌지우지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유대인 금융재벌가인 로스차일드(제임스 로스차일드 아들)이며 그는 1859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남부와 북부를 충돌하도록 진두지휘했다고도 알려진다.여기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잉글랜드는 로스차일드의 개인소유의 섬처럼 인식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분명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를 비롯하여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을 터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고 영국자본이 이 골드러시를 지배했다고 알려진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국제금융이란 조직은 분명 영국자본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영국의 정체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때문에 영국의 본거지를 자꾸 잉글랜드 섬이라고 하니 이상한 것이다.그러나 국제금융과 영국자본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대륙 횡단 철도 노선을 둘러싼 북부와 남부의 오랜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남북전쟁이 일어남으로써 북부 노선의 채택으로 해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당시 미국정부는 철도 부설 부지로 엄청난 면적의 소유가 분명치 않는 모호한 국유지(國有地)를 철도회사에 주는 방식으로 도왔다고 하였으며 더군다나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나서 막대한 액수의 보조금과 융자금까지 철도회사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으로 자본을 무기로 한 영토 착취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우리는 본래 영토 소유권을 가진 역사주체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미국인가. 아니다.이 당시 철도회사들이 철도건설을 이유로 공여 받은 땅은 미네소타(Minnesota:225,181km²)주와 워싱턴(Washington:184,827km²)주 전체면적의 4분의1, 위스콘신(Wisconsin:169,639km²)과 캔자스(Kansas:213,096km²)주의 5분의1, 캘리포니아(California:423,970km²)의 8분의1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한반도 전체 면적이(220,847km²)이라 할 때 실로 어마어마한 넓이의 영토를 철도회사들이 좌지우지 했다는 사실도 더불어 알 수가 있다.그리고 이것에 더하여 착취한 땅에서 바로 매장된 금(金:gold)과 각종광석, 석탄, 삼림자원 등을 얼마든지 환금할 수 있는 자원이기 때문에 결국 전부 어부지리로 얻어 채굴하거나 탈취하여 철도로 이송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은 것이니 일개 회사가 아니라 거대한 자본제국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당시 어수한 경제환경인 것이다.이것들은 단순한 수치의 계산이 아닌 것이다.우리가 늘 의문스럽게 생각하던 삼한역사실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거나 순식간에 통째로 분해되어버린 것 같은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없고 조선 말기에 지속된 경제 불황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엄청난 재정압박이 동반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2016-03-02 서울신문]인터넷판에 따르면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가 펴낸 ‘조선 후기 왕실재정과 서울상업’(소명출판)이란 제목의 글에서 18세기 말부터 갑오개혁(1894년)을 거쳐 20세기 초까지 120년 동안 내수사와 궁방(왕실 조달기관)중 수진궁 등 1사 7궁이 작성한 회계지출장부 초본(草本)등을 데이터베이스(DB)화해 분석한 결과 왕실재정규모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상에 밝혔다.이러한 사실들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는 알 수 없는 내용으로서 조선말기 왕실은 정부재정의 20~30%를 차지하는 재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채무 불이행상태로서‘거대한 빚쟁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리고 있다.당시 미국(US)정부의 1895년 재정수입(Government Revenue in the US)을 보면 연방세수(Federal Revenue) $401.7(million)백만불, 주(州)세수(State Revenue) $134.0(million)백만불, 지방세수(Local Revenue) $603.0(million)백만불을 총합한 세수입 ‘$1,138.7’으로 나타나 11억3천8백7십만불($)임을 알 수가 있다.이것은 300조억원정도가 되는 어마어마한 경제구모라 할 수 있다고 풀이된다.오늘날 대한민국 1년 예산과 막먹는 것이다.이것의 20%가 왕실재정이라 할 때 당시 화폐기준으로 $227.54(million)가 되며 현재 위 뉴스기사내용에서 대한민국 예산을 기준으로 조선왕실재정규모를 60조원가량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이러한 사실들이 매우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재정규모임에 틀림없다.당시 조선이 미국정부재정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1895년 기준으로 현재 달러가치상승과 오늘날 달러와 원화환율을 적용해야 번거러움이 있어 생략한다.그렇다면 당시 최소한 미국연방정부차원에서 코리아란 개념을 우리가 알 필요성이 있다.위 전투깃발은 시대적으로 위 상황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소위 미국남북전쟁 동안 북부(Union’s)의 북대서양 봉쇄 소함대 함장이며 메릴랜드 출신인 존 로저스(John Rodgers)의 소유로서 로저스 소중대(Rodgers’ squadron)가 1861년 버지니아의 제임스 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서 그의 철갑선에 남부 동맹 군인(Confederate soldiers)들의 포탄 공격이 가해질 때 사용하던 깃발이라 하였으나 또 한편으론 현재 한반도 역사에 맞춰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시기에 북군 해병대가 한반도 강화도 공격 때 사용하던 깃발이라고 한다.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당시 “US”란 체제에서 북군이나 남군 모두가 코리아(COREA)란 명칭을 사용했을 것이란 사실이다.바로 위 그림사진처럼 US 국기에 코리아(COREA)가 새겨진 현실적인 내용을 먼저 풀 수 있어야 할 것 같다.생각해보면 미해병대가 신미양요에 한반도 강화도에 출현하여 공격할 때 사용한 깃발이라고 더 이상확대해석을 막고 있지만 국기에 새겨진 13개 별표식과 사이 공간에 촘촘하게 새겨진 코리아란 명칭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즉 위 국기 13개의 별과 같이 13주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코리아 왕실이 미국연방재정지원을 받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서 역설적으로 “COREA” 영토 내에서 자원이 될 만한 땅들은 모두 서양인들 손아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이러한 이윤문제와 이익문제에서 서양인들이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고 할 때 당시 서양세력들이 개입한 사건들은 모두 자본경제이치에 부합하는 원인이 제공한 것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어 남북전쟁 역시 어떤 국가주의적 충돌이 아니라 남북첨예한 경제논리에 의해 충돌이 야기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당시 미국자본주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으면 1890년에 휘그당(공화당)출신인 존 셔먼(John Sherman,1823-1900)에 의해 제정된 연방법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에서 들어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부당한 거래 제한을 금지’와 ‘부당한 독점을 금지’를 강제하는 법으로서 수평적 거래 제한(horizontal restraint) 또는 수평적 카르텔(horizontal cartel)이라 하여 상품가의 합의, 시장분할, 생산량제한, 또는 공동보이콧 등으로 공모행위를 정부차원에서 금지하는 것이니 만큼 고려연방정부가 이에 대한 출구찾기에 많은 고심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이법의 전반적인 요점은 자본주에 의한‘독점력’(monopoly power)에 제동을 걸고 독점력 자체가 불법이라는 기준을 마련했다는 의미가 큰 것으로 처벌을 보면 법인이라면 1,000만 달러 이하의 벌금, 개인의 경우에는 35만 달러 이하의 벌금 또는 3년 이하의 징역과 같은 강력한 형사처벌까지 가능하도록 한 것은 그만큼 독점력을 당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위험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누가 위험을 느꼈을까?자본주의에 물든 서양인이었을까?아니다.오늘날 한반도 경제사정도 이와 같은 것으로 재벌지배구조가 독점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재벌특혜와 순화출자를 허용하고 있는 것도 옛 시장형태와 다르지 않고 세습경영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재벌이 주는 사회전반적인 반작용의 문제가 얼마나 큰지를 새삼느끼게 하는 것이다.현재 대한민국은 그나마 보편적인 법이 존재한다.그러나 당시 자본주를 동원한 서양재벌들의 막후 로비활동을 감안할 때 이러한 법을 제정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던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물론 재벌과 지주들이 이 법에 반발했다고 알려지지만 이 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대통령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이란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그러나 루스벨트는 이 법으로 거대한 자본주인 당시 석유왕 록펠러(Rockefeller, John Davison:1839~1937), US스틸사의 모태인 카네기철강회사를 설립한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1835-1919), 그리고 금융황제 모건(J. P. Morgan:1837-1913)을 적극적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의 정치성을 보았을 때 역사주체가 받았을 불리함이 어느정도였을 것인지가 짐작이 가능한 것이다.본 블로그 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http://blog.daum.net/han0114/17050748"에서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당시 거대한 자본주 중 존 피어폰 모건(John Pierpont Morgan:1837-1913)의 예를 자료에서 빌리면 북군에게 카빈소총을 1정당 3.5달러에 사들여 다시 북군에게 1정당 22달러에 되팔아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알려지니 그에게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나 국가관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개성상인이 이와같을 것인지에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이미 재벌이라 함은 국가관을 그들에 기대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때문에 당시 루스벨트 재임기간인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동양사와 서양사 모두에게 이와같은 상황에 빠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이로 인해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발생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어쨌던 당시 미국사회(US)체제에서 이 같은 재벌제한법이 있었다는 것은 완전한 자본주의체제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밖에 없다.하지만 미국금융자본 (US, financial capital)은 그 만큼 당시 재벌에 의한 독점적 공모가 비일비재하였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따져보면 이와같은 불합리가 횡횡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미개척지가 많았던 만큼 영토와 영토 간에 이동 수단이 없었던 시대와 달리 그것들을 상호 연결시킬 수 있는 확실한 이동수단이 존재한다할 때 경제논리로 토지의 가치가 상승될 것이 뻔하다.노동자들이 선로를 닦으면 바로 기관차가 자재와 이주민을 실어 날랐을 것이 뻔하고 기관차정비공장과 터미널, 음식점과 호텔이 생겼으며 이러한 이동수단을 이용하여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은 인근 도시를 연결하는 지역철도를 연장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철로 옆에는 최첨단 통신수단인 전신주가 가설되어 이동수단발달은 물론이고 통신수단까지 몰라보게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 기존 토지가격이 상승하는 부분의 가치는 기존 토지소유자가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당시 미국정부가 할양한 토지는 선후가치가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그것에 의해 상승된 가치만큼 미국정부는 세금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고 재정이 급기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었을 것이며 재정고갈에 애를 먹던 하나의 주체도 그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우리가 남북전쟁이 일어난 1861년 사이 격변기간에 살펴보아야 할 것은 동서양 역사관계이다.첫째로 의문스러운 것은 1860년 분명 북경조약(北京條約:Convention of Peking or First Convention of Peking)을 체결케 한 영불연합국이 북경을 점령했다고 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나 철종이 1860년에 경희궁으로 천궁하게 된다는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같이 볼 수 있는 문제임에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질 않는다.북경이 어디에 있었던 간에 지배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었던 충분한 조건이다.이러한 현상을 예상치 못한 기존 토지소유주들은 미국정부가 주는 보상금만으로 만족해야 했고 자본체제에 따른 토지매매원칙에서 자연스럽게 기존토지들은 철도회사에게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시에 소유자가 교체된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후에 미국의회가 주도된 미국정부는 거둬들이 세금으로 다시 철도회사소유주들에게 영토를 환원 받는 수준에서 서부 개척시대를 용인한 것이라고 할 수밖애 없다.결국 상황이 이러하다면 솔직히 기존 영토개념이라는 것은 아무런 권리행사의 방어책이 없다.그리고 미국정부는 환원 받은 토지에서 각종 광석자원들을 확보하고 더욱 재정규모를 증대시켰을 것이란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특히 19 세기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이 영토를 취하는 것에서 보면 거의가 그냥 넘겨주고 넘겨받는 식의 할양(割讓)방법을 취하였다는 사실에서 상당한 의구심이 있었지만 이러한 구조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미국역사는 남북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남북전쟁 또한 각종 무기를 생산하고 철도를 이용하여 각종 무기를 이동시켰던 사실을 알 수가 있다.남부가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자, 미국(US;united states)의회는 1862년에 유니언 퍼시픽 회사(Union Pacific Railway)와 센트럴 퍼시픽 회사(Central Pacific Railroad)의 설립을 인가하였고 유니언은 네브래스카의 오마하(Omaha)로부터 서쪽으로 공사를 계속해 나가게 하고, 센트럴 퍼시픽회사는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Sacramento)로부터 동쪽으로 공사를 해 나가도록 하였으며 두 회사는 남북전쟁이 끝난 지 4년이 지난 1869년에 유타의 프로몬토리 포인트(Promontory Point)에서 만남으로써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되었다고 알려지는 것이다. 남북전쟁 전까지의 미국철도 총 길이는 약 30,000마일(48,280km)에 달하게 되었지만 1900년에는 거의 20만 마일(321,868km)에 이르면서 세계 철도의 40%를 차지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지구둘레의 길이가 40,075km 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지구둘레 길이의 8배가 넘는 철도를 개설하고 그것에 소요되는 철강을 생산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엄청난 철로가 필요한 철강이 얼마나 소요되었겠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철로를 달리는 기관차를 생산하기 위한 철강은 또한 얼마나 소요되었겠는가.참으로 어마어마한 산업규모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철강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련(製鍊smelting)이라 하였다.제련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광석을 녹는점 이상의 온도로 가열해야 하는 수단과 연료가 필요했을 것인데 미국에서 철강산업이 발전하는 주요한 원인으로서 첫째 원석(原石)을 확보할 수 있는 광산(鑛山:mine)이 가까이에 석탄이 있었다는 사실과 제련(製鍊)공정을 원활하게 하는 연로 즉 석탄산업(石炭産業:coal Industry) 또한 철강산업지역과 맞물려 공동발전을 이루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석탄산업 발달 역시 미국에서 가장 초기부터 발달된 곳은 바로 애팔레치아산맥 중북부이다.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오령(五岭)을 버지니아주 동부에 위치하는 로어노크벨리(Roanoke Valley), 뉴리버밸리(New river Valley), 홀스턴리버벨리(Holston river Valley), 테네시벨리(Tennessee Valley), 쿠사벨리(Coosa Valley)라고 보는 것은 무리일까?마무리(뉴잉글랜드와 생여진)뉴잉글랜드는 위 지도에 보듯이 매사추세츠 주, 코네티컷 주, 로드아일랜드 주, 버몬트 주, 메인 주, 뉴햄프셔 주의 6개 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령이라고 할 수있는 애팔래치아산맥(Appalachian Mountains) 동북부이다.바로 석탄(石炭:coal)생산지인 애팔래치아이다.서남부에 있었던 숙여진(熟女眞)과 동북부에 있었던 생여진(生女眞)은 바로 고대 잉글랜드(앵글족) 또는 게르만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숙여진은 오래전부터 거주했다는 명칭이며 생여진은 그후 새롭게 생성된 여진이라는 말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앞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뉴잉글랜드가 생여진(生女眞)이라 하였다.본 블로그 글 "여진어와 영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6"에서 여진어는 고대 영어라고 하였다.고대영어는 게르만어와 맥을 같이한다.2012년 본 블로그 글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는 화부(華府)와 미경(美京), 화성돈(華盛頓)으로 불렸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2"에서 북아메리카 미국 북동부지역에 있는 메인주(State of Maine)의 머리모양이 한반도 두만강 쪽 북부를 보면 닮은꼴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실제로 그곳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의 북부고원지대라 할 때 그 곳은 뉴잉글랜드라고 하는 지명과 함께 여진족이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아마도 동부해안은 유럽인(해적)들의 출몰이 잦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곳 어디에 윤관(尹瓘:1040-1111)의 동북 9성(東北九城)이 세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판단과 주장을 하게 하는 것이다.본래 여진족이라는 개념도 여진어가 거란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영어가 게르만어의 영향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고 영어 또는 프랑스어를 포함한 북게르만어를 사용하던 세력들이라고 감히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며 본 블로그 글 "흰 매(海東青 gyrfalcon)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5 "에서 요나라가 여진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고려(高麗)가 여진족을 동원하여 요(遼)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한바가 있기 때문에 동북 9성(東北九城)에 들어가는 공험진(公嶮鎭)역시 한반도 함경북도 모양과 닯은 꼴인 애팔래치아산맥 북부고원 메인주(Maine) 어디쯤에서 찾아야 할 것임을 얼마든지 생각할 수가 있다.그리고 뉴잉글랜드에서 생산된 철이 섬나라 잉글랜드가 되어 철생산을 주도했다고 알려진다는 것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위 그림 <미네소타 주 철 생산지>에서 생산되던 철 생산 비율이 미국전체에서 약 70~80%를 차지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철생산량과 이송상황을 알 수 있는 위 그림을 보면 주요광산이 (1)메사비산지(Mesabi range), (2)마켓산지(Marquette range), (3)메모미니산지(Menominee range), (4)고기빅산지(Gogebic range), (5)버밀리온산지(Vermillion range) 등이다.(1)메사비산지(Mesabi range)는 미국 제1의 철광산지이며 홍적세(世)의 대륙빙하에 의한 빙하호(湖)가 많이 있다. 광산은 메사비 ·버밀리언 등지를 비롯하여 매우 많으며, 철 함유량 55%의 적철광 광층의 두께가 최대 150m에 달한다. 1887년에 광맥이 발견되었으며, 1892년부터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2)마켓산지(Marquette range)는 1846년 부근의 산지에서 철광상(鐵鑛床)이 발견된 후로 철광석과 목재를 선적하는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1849년 우스터라는 촌락이 들어서고 이후 자크 마르케트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지명으로 바뀌었다. 1859년 읍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년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가 급속히 복구되어 1871년 시가 되었다.(3)메모미니산지(Menominee range)는 1796년 이곳에 모피교역소가 설립되었다. 제재업은 1832년 시작되어 1890년대 최고전성기를 맞았고 1930년에 끝났다.(4)고기빅산지(Gogebic range)는 철광과 키위노 구리광이 있으며 니켈과 은도 많이 산출, 1883년 인근에 있는 고기빅산지에서 거대한 철광석 매장지가 발견되면서 급속히 발전, 미국 철광 생산량의 75%를 차지하며, 고기빅은 이 지대 총산출량의 3.5%를 차지한다. 예전에는 주로 고품질의 적철석(赤鐵石)을 산출되었다. (5)버밀리온산지(Vermillion range)는 1835년 버밀리언 요새가 원주민과의 교역소로서 설립되었는데, 1859년 인근에 영구 거주지가 세워졌다. 1881년 홍수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마지막 광산은 1964년에 닫았다. 지명은 강변의 흙이 주홍빛(vermillion)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고 여기서 생산되는 천연안료는 중국에서 BC 3000년경에 이미 알려졌다고 하는 것이다.그리고 철의 이송방향이 전부 뉴잉글랜드 쪽으로 쏠려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한반도 철기 문화는 한나라 시대 이전 것으로 보이는 주조 철기가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기원전 3-4세기 무렵부터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였다. 그러나 고대 중국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는 것은 바로 ‘철기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즉 ‘철기’의 ‘철(鐵)’ 자는 금(金)과 동이의 이(夷)를 합쳐 만든 글자라는 사실이다. 철은 동쪽에 살고 있는 동이족이 생산했다는 말과 같다는 이야기다.그리고 후고려에서 이를 흑금(黑金)이라 한 사실도 검다, 검은 빛이 있고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히타이트(Hittite)민족이 잔인하고 난폭하다는 것도 철(鐵)에 의미에 포함된 것이다.철의 의한 금속주조가 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무기를 제조하여 전투가 가능했던 것이다.우리 민족은 중국보다 앞선 철기 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중국은 신중국으로 오인될 수가 있다.고려시대보타 조선시대가 철의 제련기술이 발달되는 것은 당연하다.유명한 ‘만리장성’도 중국 진나라 때 중국이 동이족과 흉노족의 공격을 의식해 쌓았다는 사실도 철기 제조 기술을 지닌 동이족이 중국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현재 중국이라 할 수 있는 중앙아메리카대륙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다.한반도의 철기문화는 가야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데, 가야국을 세운 김수로왕은 통치 기반을 갖추면서 벼농사 등 농업과 수산업을 비롯해 제철업을 일으켜 백성들이 풍족하게 생활하게 하였는 기록과 김수로왕을 비롯한 가야의 왕들은 양산, 동래, 마산, 진해 등지의 철광과 낙동강에서 나는 사철을 이용하여 철을 생산해 쇠도끼, 쇠창, 쇠화살촉, 쇠침, 철칼, 철 낚시바늘, 쇠갑옷을 만들어 완전한 철기시대를 열었다고 알려진다. ‘삼국지 변진조’에 보이는 마한, 예, 왜와 대방 등이 가야를 찾아와 철을 수입해 갔고 돈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은 이미 당시에 철 수출국으로 자리잡은 가야의 철 생산능력과 국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 가야를 어디로 볼 것인가는 앞으로 연구할 대상이지만 현재까지 미루어짐작하는 것은 바로 남아메리카대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또한 경북 고령군 지산동의 가야 시대 고분에서 발굴된 철제 투구와 갑옷을 봐도 철을 다루는 가야 사람들의 수준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반도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을 한반도에 국한한 것이다.또한 신라는 진한에 소속된 사로국에서 출발한 작은 나라였으나 풍부한 철광석과 철 생산시설을 바탕으로 7세기 삼국을 통일한다고 되어 있다. 철의 왕국인 가야를 합병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있는 저력은 한반도 신라에서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철기 문화의 발달이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황룡사 장륙존상‘을 들고 ’장륙존상‘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진흥왕이 왕권의 위엄과 야철기술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려고 만든 무게가 무려 21톤이나 나가는 동양 최대의 철불로 당시 인도, 중국, 동남아 국가 등도 거대한 불상을 만들려고 여러 번 애를 썼으나 모두 실패하고 신라만 성공했다 하였다. 장륙존상(丈六尊像)도 따지고면 고려 고종 25년(1238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皇龍寺)전체가 소실되면서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과 함께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기는 한지만 본질은 우리에게 머나먼 이야기다.그러나 사라지고 있던 없던 간에 당시 신라의 제철 기술이 동양 최고 수준이었다는 것을 자타가 증명하고 있으니 그것은 철강산업의 근원적인 역사를 증명해 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계삼한역사에서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생활용기나 무기 등으로 철기의 사용 범위가 확대되자 신라에서는 철기를 소유하는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부상하는 등 사회계층의 분화가 일어났고, 철기를 다루는 신라의 장인들은 철저한 골품제의 벽을 뚫고 어렵지 않게 4~5 두품의 신분을 확보하기도 하였다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철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철강산업을 계획적으로 육성하고 분야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국력이 강대해질 수밖에 없었다.그럼에도 한반도 역사는 한반도의 주인으로 만족해야만 한다고 선을 긋었다.그러나 한반도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이에 대한 유적과 유물보다도 더 많은 세계삼한역사관점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들은 우리에게 바른 역사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서 글을 맺는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산업혁명" rel="tag" target="_blank">산업혁명</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철강산업" rel="tag" target="_blank">철강산업</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흥개호" rel="tag" target="_blank">흥개호</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철도산업" rel="tag" target="_blank">철도산업</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철(鐵:iron.Fe)" rel="tag" target="_blank">철(鐵:iron.Fe)</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히타이트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부" rel="tag" target="_blank">히타이트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부</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철 기원지" rel="tag" target="_blank">철 기원지</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철령(鐵嶺)" rel="tag" target="_blank">철령(鐵嶺)</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철원(鐵原)" rel="tag" target="_blank">철원(鐵原)</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뉴잉글랜드와 생여진" rel="tag" target="_blank">뉴잉글랜드와 생여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케빈 본(Kevin J. Vaughn)" rel="tag" target="_blank">케빈 본(Kevin J. Vaughn)</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적철석(赤鐵石:hematite)" rel="tag" target="_blank">적철석(赤鐵石:hematite)</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마네토(Manetho)" rel="tag" target="_blank">마네토(Manetho)</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조너선 하스(Jonathan Haas)" rel="tag" target="_blank">조너선 하스(Jonathan Haa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노르테치코" rel="tag" target="_blank">노르테치코</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공험진(公嶮鎭)" rel="tag" target="_blank">공험진(公嶮鎭)</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한카 호" rel="tag" target="_blank">한카 호</a>

붕어(鯽魚)로 본 삼한역사(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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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鯽魚)로 본 삼한역사(1편)글쓴이:한부울1)들어가며2)고서(古書)에 등장하는 붕어3)유럽붕어에 대한 생물학적 판단4)아시아 종(種)과 한반도 종(種)5)참붕어의 진실6)붕어의 생물학근원7)마무리1)들어가며아래 자료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즉어(鯽魚)가 토산으로 전국각지에서 다 났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고 그 중에서도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에는 각기 폭넓은 지역에서 이 붕어가 서식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또한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1569~1618)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는 붕어[鯽魚]즉 즉어가 어느 곳에나 있지만 강릉의 경포(鏡浦)가 바닷물과 통하기 때문에 흙냄새가 안 나고 가장 맛있다고 하였고 명나라 홍치(弘治) 원년(1488, 성종19)에 동월(董越)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지은 것이라고 한 조선부(朝鮮賦)에도 잉어와 붕어는 조선(朝鮮) 내(川)와 못(澤)을 따라 대개 서식한다 하였으며 고려말 대학자이자 문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시집 목은시고(牧隱詩藁)에도 염주(鹽州)의 붕어[鮒魚]를 먹고 싶어 시 한수를 적는다 라고 하였다.그렇다면 고려와 조선 땅에서는 적어도 재래종이라고 할 수 있는 토종붕어가 서식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토산 (鯽魚)경도 상(京都上)경기(京畿) 여주목(驪州牧),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진위현(振威縣),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충청도(忠淸道) 부여현(扶餘縣), 석성현(石城縣), 충주목(忠州牧), 직산현(稷山縣), 임천군(林川郡), 은진현(恩津縣), 연산현(連山縣), 이산현(尼山縣), 면천군(沔川郡), 평택현(平澤縣), 덕산현(德山縣), 대흥현(大興縣), 신창현(新昌縣), 예산현(禮山縣), 당진현(唐津縣), 서산군(瑞山郡)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郡),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경산현(慶山縣), 하양현(河陽縣), 인동현(仁同縣), 현풍현(玄風縣), 영산현(靈山縣), 창녕현(昌寧縣),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 고령현(高靈縣), 함창현(咸昌縣), 초계군(草溪郡), 의령현(宜寧縣),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함안군(咸安郡), 칠원현(漆原縣) 전라도(全羅道) 전주부(全州府), 익산군(益山郡), 김제군(金堤郡) , 고부군(古阜郡), 만경현(萬頃縣), 임피현(臨陂縣), 부안현(扶安縣), 옥구현(沃溝縣), 용안현(龍安縣), 함열현(咸悅縣), 광산현(光山縣), 영암군(靈巖郡) 황해도(黃海道)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해주목(海州牧),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배천군(白川郡) 강원도(江原道) 인제현(麟蹄縣) 함경도(咸鏡道)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 평안도(平安道) 영유현(永柔縣), 철산군(鐵山郡), 박천군(博川郡)성소부부고 제26권 설부(說部) 5 도문대작(屠門大嚼) 鯽魚。八方皆有。而江陵府鏡浦通海波。故味最佳。無土氣。붕어[鯽魚] : 어느 곳에나 있지만 강릉의 경포(鏡浦)가 바닷물과 통하기 때문에 흙냄새가 안 나고 가장 맛있다.조선부(朝鮮賦) 명나라 홍치(弘治) 원년(1488, 성종19)에 동월(董越)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지은 것이다. 본디 자주(自注)가 있었으나 그 자주는 모두 다른 지(志)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은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동월(董越)]잉어와 붕어는 내와 못을 따라 대개 서식하고 / 鯉鯽隨川澤皆可以樔소주(小註)에, “청천강(淸川江), 대정강(大定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의 여러 물에 다 있다. 붕어[鯽魚]는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것도 있다.” 하였다.목은시고 제24권 시(詩) 得西海按廉金震陽書。云送乾鹿。然鹽州鮒魚。又所欲者。因賦一首以寄。서해 안렴사(西海按廉使) 김진양(金震陽)의 서신을 얻었는데, 노루포[乾鹿]를 보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염주(鹽州)의 붕어[鮒魚] 또한 먹고 싶은 것이기에 인하여 한 수를 지어서 부치는 바이다. 2)고서(古書)에 등장하는 붕어아래자료는 연세대 홍윤표 교수의 고서(古書)를 통한 지금까지 전해지는 <붕어>명칭 대한 시대별로 우리말 변천과정을 연구한 것이다.초성의 ‘ᅌ’이 앞 음절의 종성에 ‘ㅇ’으로 표기된 것으로 ‘붕어’가 ‘부’ 또는 ‘부어’로도 표기되었다는 주장에서 보면 부어는 부(鮒)<훈몽자회(1527년)>로 나타나거나, 부어 즉(鯽)<훈몽자회(1527년)>으로 기록되었고, 또는 부어(鯽魚) <동문유해(1748년)>, <몽어유해(1768년)>, <방언유석(1778년)>, <제중신편(1799년)>라 했거나, 부어(鮒魚) <왜어유해(18세기)>라 한 사실과, 또는 겸용한 부어鮒魚(鯽魚)<의종손익(1868년)>기록이 있으며, 부어찜<규합총서(1869년)>, 큰 부어랄<규합총서(1869년)>, 또는 늦은 시기에는 부어 부(鮒)<신정천자문(1908년)>, <초학요선(1918년)>으로 나타난다 하였다.또‘붕어’는 부어보다 늦은 시기 17세기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붕어(蝍魚) <동의보감(1613년)>, 금긔난붕어와 더온 국슈와 복숑아와<납약증치방언해(17세기)>, 붕어찜<진주하씨언간(17세기)>, 붕어(鮒魚)<몽유편(1810년)>, 붕어(鮒魚)<한불자전(1880년)>, 금붕어(金鮒魚)<국한회어(1895년)>, 붕어(鮒魚)<국한회어(1895년)>, 붕어(鯽魚)<광재물보(19세기)>, 붕어 부(鮒)<통학경편(1916년)>, 금붕어는<인향젼(19세기)>등으로 불리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정리하면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붕어를 과거 옛 사람들이 부어라 했다는 사실과 한문으로는 부어(鮒魚)와 즉어(鯽魚)라 했으며 또 다른 즉어(蝍魚)와 금부어(金鮒魚)라 했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1819년 저서 어원(語源)연구서 아언각비(雅言覺非)에 "부어를 '부응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그러나 왜 즉(鯽)과 부(鮒)라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위 열거한 사서들 중에서 가장 먼저 부어가 나타나는 기록은 훈몽자회(1527년)라 했고 이 기록에서 부(鮒)와 즉(鯽)으로 동시에 지칭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이 금부어라는 명칭은 소위 유럽붕어라고 하는 골드피시(Gold Fish)와 관계한다는 것을 미루어짐작할 수가 있다.이와같은 여러명칭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같은 붕어라고 하겠지만 종(種)이 달라 이렇게 다르게 불렀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당시에도 종(種)을 다르게 구분하여 인식하였다는 것이다.지금까지 글쓴이가 파악한바로는 현재 조선왕조실록이나 신증 또는 기타 잡서들에서 생물을 표기한 것을 보면 세부적이지 못하고 뭉뚱그려 그냥 포괄적으로 기록한 것이 태반이고 이와같은 빈약함은 동시대의 서양에서의 기록한 생물자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초라한 기록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때문에 글쓴이는 이와같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현재 한반도에 남겨진 사서들은 모두가 일단 손을 한번 거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이와같이 세부적이지 못한 것은 18세기들어 서양세력들이 알짜지식에 의한 자료를 탈취하고 나머지 보잘 것 없는 것만 취해 동양자료의 한계를 보여주게 한 것으로 소위 일제가 주도한 역사만들기에 동원된 어용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작업과 여러잡서를 생성시키므로 인해서 혼란을 부추긴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서양세력들이 보유한 생물학자료는 선진자료임을 부정하기 힘들만큼 세밀하였던 것은 분명하다.그렇다면 조선시대에서는 생물학분류체계가 없었던 것인가.1819년에 쓴 정약용의 어원(語源)연구서 아언각비(雅言覺非)를 본다면 이것은 여러 어원을 연구한 것인데 이러한 연구는 생물학체계를 세우는데 분명 필요했을 것이다.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총체적으로 한반도 생물학계가 난망이라는 것은 고려시대 목은시고(牧隱詩藁)에도 나타나며 조선시대 훈몽자회(1527년)의 기록이 발견되고 난 후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붕어에 대한 재래종조차 구분할 수 없다는 생물학 분류체계 난맥상태는 그야말로 한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수천년 역사 기록만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나.빈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것을...현재 서양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분류체계에서 조차 제대로 역할도 할 수 없고 명함도 내밀 수 없는 빈약한 현실은 우리나라 생물학계의 처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다.유구한 역사와 문화는 어디다 다 내버렸던 것인가.우리나라 고서에서 등장하는 부어(鮒魚)가 어떤 종인지 알 수 있는 길은 없다.붕어의 원종 또는 재래종이 무엇인지 아니면 즉어(鯽魚)가 원종인지 또는 교배종인지 또 지네 즉 자를 쓰는 즉어(蝍魚)가 어떠한 종류인지 도무지 기준조차도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황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어쨌던 동양 즉 아시아에서는 학명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를 아시아종으로 쓰거나 카라시우스 카라시우스(Carassius carassius)뭉뚱그려 지금까지 정리되고 이것을 정론화하고 있다.예를 들어 즉어(鯽魚)의 즉을 보면 해즉(海鯽)이라 하여 보통 바닷고기를 말하는 것으로 길이가 40~50cm, 타원형의 납작하고 붉은 빛을 띠는 각종 돔을 이야기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어형상 즉(鯽)이라는 것은 "타원형의 납작한 물고기"를 이르는 것으로서 담수어인 붕어만큼은 돔에 비할 만큼 특별했다라고 옛 사람들은 인식했을 것이고 귀하게 취급했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가 있다.앞에서 궁금했던 부(鮒)와 즉(鯽)에 관해 육전(陸佃)은 좀 더 세밀하게 설명하여 구별하게 하고 있다.時珍按:陸佃《埤雅》云:鯽魚旅行,以相即也,故謂之鯽。以相附也,故謂之鮒。위 자료는 이시진이 인용한 비아(搖雅, 陸佃著:1125)에 나오는 문장인데 “즉어(鯽魚)는 떠나 나다닐 때 하나로 합이되어 구별할 수 없는 것을 즉(鯽)이라고 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붙어있기(相附-互相依附:结合)때문에 부(鮒)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다시풀어 즉어는 서로 가까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어 유영, 이동하므로 가까이 무리지어 움직이는 물고기라는 뜻에서 즉(卽)이라는 글자를 가져다가 즉어라 이름하였다 하고 아울러 서로 가까이 모여 의지하므로 그 노니는 모습을 의미하는 글자인 부(附)자를 가져다가 부(附)라 이름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鯽:淡水鯽魚。身體側扁,頭部尖,背脊隆起,尾部較窄。陸佃《埤雅》云:“鯽魚,旅行以相即也,故謂之。”鯽喜偎泥,不食雜物,故能補胃。冬月肉厚子多,其味尤美。또 즉어는 담수어로서 몸은 옆면이 평평하다 하였고 머리는 뾰쪽하고 척추가 솟아오르고 꼬리부위가 비교적 좁다라고 되어 있으며 즉어는 진흙(부니)을 가까이 하고 좋아하며 잡물을 먹지 않기 때문에 위를 보호하는데 좋다라고 하였고 특히 음력 11월 동짓달에는 고기가 두텁고 알이 많아 맛이 좋다고 위 기록은 전하고 있다.一名鮒魚諸魚中最可食色黑而體促肚大而脊隆池澤皆有之○一種背高腹狹小者名䲙魚力差劣<本草>또 본초에는 일명 부어(鮒魚)라고도 하는데 여러가지 물고기 가운데서 제일 먹을 만한 고기라 하였고 빛이 검으면서 몸통은 체고의 비해 짧고 배가 크며 등이 두드러졌는데 못에는 다 있다라고 하였다.한 종류는 등이 높고 배가 좁고 작은 것도 있는데 이것을 절어(䲙魚:민물에 사는 몸이 납작하고 오렌지혹은 푸른색의 물고기)라고 하는데 힘이 못하다(差劣).䲙魚: a kind of fish; grown in fresh water; with flat body; orange color or blue colored pattern본초강목에 지금의 내 경험으로 보면 강에서 나는 놈은 금과 같이 누렇고 맛이 월등하며 저수지나 못에서 나는 놈은 검푸르며 맛이 순하다고 하였다.산림경제(山林經濟)제4권 치약(治藥)즉어(鯽魚) 붕어. 부어(鮒魚)라고도 한다. 池澤皆有之。色黑而軆促。肚大而脊隆。又一種。皆高腹狹小者。卽鯽魚。力差劣。 本草 諸魚皆屬火。惟鯽魚屬土。故能有調胃實腸之功。 入門 合蓴作羹。主胃弱不下食。作膾主久赤白痢。 本草연못과 수택에 모두 있다. 빛깔은 검고 몸은 짧다. 그리고 배는 크고 등마루는 높다. 또 1종(種)이 있는데 등마루는 높고 배는 협소(狹小)한 것으로 바로 붕어다. 효능은 좋지 못하다. 《증류본초》모든 고기는 모두 오행(五行 수(水)ㆍ화(火)ㆍ목(木)ㆍ금(金)ㆍ토(土))의 화(火)에 소속되었으나 붕어만은 토(土)에 소속되었다. 그래서 조위(調胃)하고 실장(實腸)하는 공효(功効)가 있다. 《의학입문》순채와 합하여 국을 끓여 먹으면 위가 약해져서 밥이 내려가지 않는 데 주로 좋다. 회(膾)를 만들어 먹으면 오래된 적백리(赤白痢)에 주로 좋다. 《증류본초》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계사(1593,만력 21)8월12일 (계사) 중화 사람이 바치는 산 붕어를 받고, 어공을 간소히 하라 전교하다 ○中和人金彦珍等八名, 路進生鮒魚十七尾。 傳曰: "此物, 若捧之, 則有傷事體; 若空過, 則似不領其精誠, 何以爲之?" 沈喜壽曰: "豈可不受?" 傳曰: "給某物賞之。" 卽以布四疋給之, 則皆跪辭。 중화(中和) 사람 김언진(金彦珍) 등 8인이 길에서 산 붕어[鮒魚] 17마리를 올리니, 전교하기를,“이 물건을 받는다면 사리와 체면인 사체(事體)에 손상됨이 있겠고 받지 않고 그대로 지나친다면 그들의 성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하자,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물건을 주어 상을 내리라.”하였다. 즉시 베[布] 4필(匹)을 주니, 모두 꿇어앉아 사양하였다. 전교하기를,“그대들의 정성이 지극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특히 중화(中和)사람 김언진(金彦珍) 등 8인이 길에서 산 붕어[鮒魚]17마리를 올리렸다는 기록도 보인다.중화인(中和)이라는 것은 단번에 고려인임을 알 수가 있다.그리고 바로 붕어에는 금부어(金鮒魚)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동아일보(1933.08.06)기사에 보면 금붕어의 원산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중국 강서성(江西省)이라는 설이 대다수라 하고 있으며 당시 현재의 중국 남방 석강(淅江), 복건(福建), 광동(廣東)각성에서 금붕어를 사육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있다 하였다.그렇다면 중국을 중화라 하였으니 곧 고려의 남방지방이다.이 지역에 임진왜란 당시 동남해안지대 중심으로 잦은 침략과 약탈을 일삼으며 창궐했던 왜구(倭寇)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사실도 정확히 알 수가 있다.금붕어는 야생골드피시(wild goldfish)를 닮은 유럽붕어로 나타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특별한 이야기다.(crucian carp:European carp closely resembling wild goldfish)그러나 한편으로 생각 할 때 우리가 금붕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관상용으로 울긋붉긋한 어류를 총칭하는 것이다.무엇이 다른가.우리가 금붕어라고 하면 관상용으로 알고 있듯이 금부어는 골드 금빛이 나는 부어인 것은 틀림없다.붕어원종은 금빛이 나는 물고기다.그런데 오늘날 골드피쉬는 와전된 측면이 많은 것은 관상용 금붕어가 반드시 금빛만 있는 것이아니라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등 색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붕어는 금부어라 하는 것으로 오늘날 유럽종을 이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왜 유럽붕어가 실려 있을까?왜 금부어라 하여 유럽붕어로 우리가 인식하게 만드는 것일까?궁금하기 짝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또한 국문을 한자나 한문으로 풀이한 말모음사전, 국한회어(國韓會語:1895년)에 수록된 금부어 즉 금붕어가 있다.금붕어는 우리가 지금까지 색깔과 생김새가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기르며 열대어라고 알고 있는 것과 사뭇다르다는 사실이다.때문에 이 금붕어가 유럽과 아시아종을 오가며 우릴 혼란을 시키고 있다.산란기는 4월에서 7월 사이이고 자연적으로나 인위적으로 변이(變異)가 일어나기 쉬운 물고기로 알려지며, 금붕어도 붕어에서 변화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붕어는 손쉽게 잡을 수 있는 곳에 많이 분포하기 때문에 식용으로 이용한 역사가 매우 길 것으로 생각되는 것으로 훈몽자회(1527년)보다 이른 시기 1469년(예종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의하면 어량(漁梁)에서 산출되는 어류에 부어가 들어 있다고 하였으니 훈몽자회보다 30년이 이른 시기에서 발견된 기록이다.산림경제(山林經濟) 산림경제 제4권 치약(治藥) 즉어(鯽魚) 순채(蓴菜)와 합하여 국을 끓여 먹으면 위가 약해져서 밥이 내려가지 않는 데 주로 좋다. 회(膾)를 만들어 먹으면 오래된 적백리(赤白痢)에 주로 좋다. 《증류본초》본 블로그 글 "순채(蓴菜:Brasenia)가 우리밥상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http://blog.daum.net/han0114/17049536"에서 순채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밀집되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는 사실도 여기서 대비해 볼 수 있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란 것을 알 수가 있다.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는 즉어가 약재의 하나로 올라 있는데 그 약효에 대하여 기술하기를 여러 가지 부스럼을 다스리며, 순채(蓴菜)와 함께 국을 끓여 먹으면 위가 약하여 음식이 내리지 않는 것을 다스린다 하였다.또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즉어는 일명 부어인데 여러 물고기 중에서 가장 먹을 만하다고 찬미하였으며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는 부(鮒)를 한글로 ‘붕어’라 하고, 이를 설명하는 가운데 그 맛에 대하여, 강천(江川)에 사는 것은 빛깔이 금처럼 누렇고 맛이 좋으며 지택(池澤)에 사는 것은 검고 맛이 좋지 못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담수호에 사는 붕어들은 검은 색을 띠고 있었음도 알 수가 있다.이규경(李圭景: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도 호서의 제천현(堤川縣) 의림지(義林池)의 붕어는 먹으면 비린 맛이 없고 맛도 제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며, 호남 전주부(全州府) 삼례역(參禮驛)의 붕어찜(鮒魚蒸)도 유명하며 또 관서 평양부(平壤府)의 붕어찜과 의주부(義州府)의 붕어 반찬은 전국에서 제일이라 하였다.또 서유구(徐有榘:1764-1845)의 전어지(佃魚志)에는 "흐르는 물에 사는 붕어는 등의 비늘이 노랗고 맛이 좋지만 연못이나 늪에 사는 것은 등이 검고 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관북의 경흥부(慶興府) 적지(赤池)의 붕어는 적색을 띠고 눈동자도 역시 적색으로서 청어 아가미가 혈색(血色)을 띤 것과 같은데 아주 큰 것은 거의 수척(數尺)에 이르고 또 맛이 극히 좋다고 하였다. 북새기략(北塞記略)에도 경흥부(慶興) 적지(赤池)에는 붕어가 많은데 길이가 2척(60cm)남짓한 것도 있으며 일읍(一邑)이 이를 그물로 잡아서 먹는데 다함이 없다고 하였다.2척의 붕어는 바로 유럽붕어크기와도 같다.이상에서 든 것 이외에 함경북도 번포(藩浦)의 붕어가 ‘번포붕어’라 하여 유명하였고, 수원 서호(西湖)의 붕어와 전주 덕진(德津)의 붕어는 맛이 있기로 이름이 나 있다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야생금붕어가 절강성 가흥[嘉與]의 남호(南湖)와 서호(西湖)가 발생지라 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수원 서호(西湖)의 붕어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게 한다.지금까지 고서에서 등장하는 붕어에 대한 기록을 순서없이 알아보았다.3)유럽붕어에 대한 생물학적 판단앞서 이야기 했지만 유럽붕어에 대한 의혹은 참 많다.향상 금빛청동색(Always golden bronze)이라 하는 유럽종을 한번보자.이것의 분류체계(分類體系:taxonomy)를 보면 조기어강(輻鰭魚綱:Actinopterygii), 잉어목(鲤形目:Cypriniformes), 잉어과(鲤科:Cyprinidae)의 붕어속(鲫屬:Carassius)으로 분류한다. 형태적으로 백과사전 설명을 보면 몸이 약간 길고 옆으로 납작[側扁하며 꼬리자루의 폭이 넓으며 커다란 비늘이 기와처럼 배열되며 머리는 짧고 눈이 작으면서, 주둥이는 짧고 끝이 뾰족하지 않으며 입은 작고 입술은 두꺼운 대신 입가에 수염이 없는 것이 잉어와 다르다 하였다.그런데 등지느러미살은 16~17개이며, 뒷지느러미살은 5~6개라 하였는데 본래 유럽종의 자료를 보면 외측선 비늘의 수가 33~36개라 하였으며 서식지에 따라 몸 색깔이 다르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등 쪽은 청갈색이고 배 쪽은 은백색 또는 황갈색이며 등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는 청갈색이고, 다른 지느러미들은 담색이라 정리된다.그리고 주둥이가 둥글며 어릴 때 꼬리에 반점이 있다가 점점 사라지고 등지느러미의 빛광이 약하며 등지느러미가 길며 볼록하고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꼬리지느러미는 뭉툭하고 엷다라고 되어 있다.유럽붕어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러한 설명들은 마구 섞여 있다.붕어는 호수, 늪, 하천 등에 널리 분포하며 잡식성으로 갑각류, 실지렁이, 수서곤충(水棲昆蟲)을 비롯한 작은 동물들과 식물의 씨, 잎, 줄기 등 거의 모든 유기물을 먹는다고 되어 있고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큰 물고기 중의 하나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특히 이 유럽붕어를 설명한 것을 보면 유럽이 원산이고 영국에서 동부 러시아까지 분포되면서 서식하는 곳은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n)나라 중심의 북극권에서 남부는 프랑스, 중부는 흑해(Black Sea)까지라 하였으며 호수, 늪이나 완만한 하천에 서식한다고 설명된다.중형의 잉어과 물고기로서 보통신장 15cm 체중 1.5kg 이고 최고 수컷에서 신장 64cm, 체중 3kg 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상당히 큰 편이다.성숙기간은 2~3년으로 체색은 금초록색이 빛나는(golden-green shining color)칼러이며 어린개체는 금빛 청동색이지만 성장하면서 어둡게 변하면서 등가장자리에 짙은 녹색, 올리브 농차색, 측부상반은 청동색, 측부하반과 배쪽은 금빛, 그리고 지느러미는 붉은색이나 오랜지색을 띠고 개체간의 변화도 볼 수 있다 설명된다.때문에 신중국자료에서는 이를 흑즉이라 한 것이다.독특한 특징으로 지느러미가 볼록하고 둥근 것과 오목한 지느러미를 가진 goldfish(or C. gibelio)교배종과 대비된다 하였으며 환경에 몇 가지 놀라운 생리적 적응을 나타낸다 하였는데 특히 카라시우스 카라시우스(Crassius crassius)의 주요 대사 부산물인 에탄올에서 겨울동안 상당 기간 무산소 호흡에 의해 생존 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고 척추 동물 중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하였으며 추운 조건은 신진 대사 속도를 낮출 수 있기 때문에 산소 결핍, 심지어 0 ° C까지, 가장 추운 물에서 가장 긴 시간을 견딜 수 있다 하였다.그리고 실험적으로 140 일 동안 무산소 조건에서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에탄올 수소화(hydrogenated) 탈 탄산반응 아세트알데히드(acetaldehyde)에 이어 젖산염에서 피루브산의 생성을 수반하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사실과 이와같은 대사작용은 산소가 없거나 산소의 농도가 아주 낮은 곳에서 살며 자라는 세균의 성질의 혐기성 해당 작용에 의한 치명적인 축적을 방지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뭄이나 수질 오염에 강한 편이라는 것이며, 약 1-3급수의 담수하천에서 볼 수 있다고 알려지는 것이다.하천 중류 이하의 유속이 완만한 곳이나 호소(湖沼) 또는 논에 살며, 수초가 많은 작은 웅덩이에도 잘 산다고 되어 있으며 겨울에는 활동이 둔해지며 깊은 곳으로 이동하고 봄에 수온이 상승하기 시작하면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얕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습성을 설명한다. 산란기는 4~7월이고, 산란적온(産卵適溫)은 수온 18℃내외이고 전장이 50~200㎜인 개체는 흔히 볼 수 있으나 350㎜ 이상 즉 한 자(一尺)이상 되는 개체는 매우 드물다고 나타난다. 학자에 따라서는 붕어의 학명을 'Carassius auratus'로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카라시우스 카라시우스(Carassius carassius)로 쓰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붕어 학명구분에서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존재한다.黑鲫(学名:Carassius carassius,俗名Crucian carp)为輻鰭魚綱鯉形目鲤科鲫属的鱼类。黑鲫分布于欧洲以及新疆北部额尔齐斯河水系等。该物种的模式产地在欧洲。습성:黑鲫棲息在水淺的池塘、湖泊,和具大量植物、流動緩慢的河。旱季時或在冬天期間居住在泥穴中,能容忍寒冷、有機的污染物質與低溶氧量。屬雜食性,以植物、昆蟲幼體與浮游生物等為食。科學分類界: 动物界 Animalia門: 脊索动物门 Chordata綱: 輻鰭魚綱 Actinopterygii目: 鲤形目 Cypriniformes科: 鲤科 Cyprinidae屬: 鲫属 Carassius種: 黑鲫 C. carassius二名法Carassius carassius, Linnaeus, 1758黑鲫英文翻译:crucian carp위 신중국 자료에서 볼 수 있지만 유럽붕어을 일단 흑즉(黑鲫)이라 하였다.말 그대로 검은 붕어라는 것인데 중국을 원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주 즉 유럽종(種)임을 알 수가 있다.The crucian carp (Carassius carassius) is a medium-sized member of the common carp family Cyprinidae. It occurs widely in northern European regions.이것을 유럽붕어[欧洲種:crucian carp(Carassius carassius)]라 하는 것은 위 자료를 보면 보통 잉어과(科)에서 중간 크기의 것을 말하는 것으로 분포지로는 북유럽지역(northern European regions)즉 유라시아(Eurasia)이며 학명은 카라시우스 카라시우스(Carassius carassius)라 한 것과 다르지않다.Carassius carassius is a widely distributed European species, its range spanning from England to Russia; it is found as far north as the Arctic Circle in the Scandinavian countries, and as far south as central France and the region of the Black Sea. Its habitat includes lakes, ponds, and slow-moving rivers. It has been established that the fish is native to England and not introduced.유럽붕어(카라시우스 카라시우스)는 넓게 분포된 유럽 종(種)이며 영국에서 러시아까지가 그 범위로 하며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북극까지 더 멀리 프랑스와 흑해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하였고 서식지는 호수와 연못이며 천천히 흐르는 강(江)도 포함하며 분명하게 영국 잉글랜드를 그 근원지라 하고있다.바로 아래 그림의 붕어이다.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검게 보이질 않는다.그러나 아래 자료 그림 금부어의 가능성은 온통 금빛(gold color)을 하고 있는 "Carassius vulgaris"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의 그림이다. crucian carp흑즉(黑鲫)- Carassius Carassius금부어 Carassius vulgaris Carassius auratus (Linnaeus 1758)carpa-Carassius vulgaris,1916carassius carassius-독일의 의사와 어류 학자 마르쿠스 블로크(Marcus Elieser Bloch:1723-1799)의 물고기의 일반자연사(Allgemeine Naturgeschichte der Fische)자료Prussian carp 의 대한 비교 [a]Carassius Giebelio-Prussian carp Carassius gibelio as comparison [b]Prussian carp Carassius gibelio as comparison[c]Carassius wild golden fish An orange coloured wild caught Prussian carp with goldfish like colouration.Goldfish in Fish Swimming Amid Falling Flowers by Liu Cai (cropped)-Three goldfish from Fish Swimming Amid Falling Flowers, a Song dynasty painting by Liu Cai (c.1080–1120)4)아시아 종(種)과 한반도 종(種)의 혼란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의학대사전에서 즉어(鯽魚)를 부어(鮒魚)라고 하면서 잉어과 물고기인 붕어 학명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 L.)라 하였는데 이것을 아시아종으로 정리한다.이 종명 아우라투스(auratus)는 라틴어(Latin root)근원인, “aurat”의 의미가 "금(gold)" or "황금빛(golden, gilded)”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소위 금빛이 나는 부어인 것이다.이 종은 맛은 달고 성질은 평하고 비경(脾經), 위경(胃經), 대장경(大腸經) 즉 소화기관에 작용한다 하였고 또한 비위(脾胃)를 강화하고 소변이 잘 나오게 하며 비위가 허약하여 식욕이 부진하고 맥이 없거나 이질, 부종, 임증(淋證), 옹종(癰腫), 궤양, 변혈 등에 쓴다 하였다.한약재로 사용되었다는 말인데 수십번 고쳐 적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나 일성록(日省錄:1752-1910)에 보면 종묘에 천신(薦新)하는 물품으로 말린붕어(乾鮒魚)과 8월령 붕어(鮒魚)라 한 것처럼 부어는 약재로 많이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또한 이 붕어를 끓여서 먹거나 말려 가루 내서 먹으며 외용약으로 쓸 때는 짓찧어 붙이거나 말려 가루를 내서 뿌린다고 되어 있어 치료약에서도 효과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또한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인용한 것처럼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이 물고기는 진흙을 먹기 때문에 비를 보하고, 위(胃)의 기(氣)를 기르는 효과가 있다 하였고 국을 끓여 먹거나 쪄서 먹거나 날로 회를 쳐서 먹어도 좋다고 되어 있다.학명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 L.)는 정말 아시아종인가.Hybridization of Cyprinus carpio and Carassius auratus, the first two exotic species in the lower Laurentian Great Lakes.예를 들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일본 농민들이 고이(コイ:Koi)라고 부르는 잉어 사이프러너스 카아피오(Cyprinus carpio)와 아시안붕어 또는 중국붕어라고 알려지는 학명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의 두 외래종이 오대호 세인트로렌스강에서 교잡한 잡종어들이 서식한다고 알려지고 있다.일본인이 고이라고 하는 잉어 사이프러너스 카아피오(Cyprinus carpio)는 유럽잉어(European carp)라고도 하는 것이다.참으로 희한한 이야기가 아닌가.일본인들이 오래전부터 애용한 잉어가 어찌 유럽잉어라 할 수 있고 이것들이 어찌하여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세인트로렌스강에 서식하는가.이러한 현상들은 생물학적으로 판단하여 인위적으로 이식된 것이 아니다.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은 이를 외래종이라고 하면 안된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토착종인 것이다. 카라센(carassin)St. Clair River, Lake St. Clair and tributaries, Detroit River, Lake Erie and tributaries, Niagara River, western Lake Ontario and tributaries, Thunder Bay (Lake Superior), Gillies Lake (Timmins)카라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바로 프랑스어로 붕어의 명칭이다.분명 위 지도를 보면 아시아종 또는 중국붕어라고 하는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가 위 지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세인트클레어강(St. Clair River), 세인트 클레어호(Lake St. Clair)의 지류, 디트로이트강(Detroit River), 이리호(Lake Erie)와 지류, 나이아가라강(Niagara River), 온타리오호수 서부(western Lake Ontario)와 지류, 슈페리어호(Lake Superior)의 선더베이(Thunder Bay), 온타리오주의 타민스 길리스호(Gillies Lake,Timmins)까지 서식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그들은 세계삼한역사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쉽지가 않다.전자에서 언급하였듯이 골드피시(gold fish)라고 하는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및 시베리아 흑룡강 수계 등에 널리 분포한다고 되어 있으며 아시아종으로 굳어진 것이다.그리고 향상 금빛청동색(Always golden bronze)를 가진 유럽붕어(欧洲種:crucian carp)는 학명 카라시우스 카라시우스(Carassius carassius)를 말하고 있다.그러나 브리티시의 동물학자(British naturalist) 조나단 코치(Jonathan couch:1789-1870)의 저서 브리티시 물고기의 역사(A History of the Fishes of the British Islands)에서 보면 Crucian carp is considered to be the European version of a fish with both a European and Asian fish with a ancestral home most likely around the Caspian Sea. The first British reference of “carrushens” is from 1744 when the fish was reported to be lately introduced. The fish was most likely introduced from Hamburg in Germany. 본래 유럽붕어라는 것은 카스피해주변이 근원지로서 유럽과 아시아붕어를 모두 유럽붕어로 간주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1744년 기록에 붕어를 카루센(carrushens)으로 처음 소개되었고 대부분 독일 함부르크에서 도입되었다고 하고 있다.그럼에도 영국을 원산지라고 근세 자료에는 나타난다.카루센(carrushens)을 여러각도로 찾아보면 오래전 식민지의 원 조상(Old Colony Ancestors)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혹 이와같은 서술은 아메리카인디언이 아닌 옛 삼한인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붕어속명(屬名) 카라시우스(Carassius)는 독일어 카라우체(karausche)와 그리스어(Greek) 코라키노스(korakînos)와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동시에 이는 고대삼한과 연결되고 있다.매우 의미 심장한 사실이다.유럽붕어 크루선(Crucian)은 독일어 카루제(Karusse)를 어원으로 하는 유럽잉어과(European cyprinid)의 물고기이라 하지만 카루센(carrushens)에서 기인한 용어이며 독일과는 함부르크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또한 학명:Carassius gibelio의 기벨리오붕어는 유럽붕어(Crucian Carp)속에 프로이센 잉어(Prussian Carp)라 한다.유럽종인 프로이센잉어(Prussian Carp)는 열대금붕어라고 알려짐과 동시에 또 다른 원종과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고 마찬가지로 유럽종인 카라시우스 불가리스(Carasius vulgaris)역시 게르만붕어라고 알려지면서도 보통 하급붕어로서 취급되었다. 이렇듯 아시아와 유럽 연결고리에서 산업혁명 당시 붕어역사에서 나타나는 중국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유스러운 기록과 더불어 독일과 깊이 연결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마찬가지로 아시아종이라고 하는 골드피시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는 중국으로부터 남대서양 섬(Island)인지 아니면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군(county)을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에 붕어가 소개되었고 이후 1728년에 영국으로 전해졌다는 사실과 유럽붕어가 1744년 이전에 함부르크에서부터 소개되었다는 사실들이 한꺼번 섞여 뒤죽박죽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볼 문제가 많다.1700년대 중반에 붕어가 영국에 도입되었으며 18세기 중엽 이후 유럽으로 붕어가 널리 퍼져 나갔다는 사실과 복잡미묘하게 혼입되어 나타나고 있음에도 한반도는 그렇던가 말던가 식민지사에 빠져 고집과 아집으로 자신을 옭아메고 있으니 옛 조선 영역 동부에서 무수히 서식하던 재래붕어, 토종붕어들을 도대체 어떻게 찾을 것인가.한반도에는 붕어서식종으로 "참붕어의 진실"에 서술한 것처럼 일반 피라미라고 알려진 토종붕어라고 하는 재래종 붕어와 더불어 일본으로부터의 이식 어종인 떡붕어(헤라부나:Carassius carassius cuvieri), 그리고 “희나리 붕어”라 부르는 종(種)의 세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모두가 근원적으로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 Carassius cuvieri Temminck & Schlegel, 1846 (Japanese crucian carp)일본으로부터 이식된 떡붕어의 학명 "Carassius cuvieri"를 1846년에 명명한 사람은 전자에 설명한 침입종(侵入種:invasive species)으로 소개되며 ‘깨피리’, ‘깨붕어’라 하고, 영어로 스톤 모로코(Stone moroko), 또는 톱마우스 거전(Topmouth gudgeon)라고 하는 우리나라 참붕어를 명명한 자이며 마찬가지로 동일한 년도에 이 떡붕어도 명명한 것이다.네덜란드(Dutch)귀족과 독일(German)조류학자의 신분에 두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동아시아종(種)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다.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그렇다면 피래미와 같은 스톤 모로코(Stone moroko)가 참붕어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또한 일본에서 들어온 떡붕어 역시 외래종인 것도 분명하지만 위 두사람에 의해 동아시아종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근세기 혼란의 역사상황적인 설명도 이 문제에서 제외될 수가 없다.나머지 "희나리 붕어"만 남는데 이것은 정확한 자료를 찾아볼 수가 없을 뿐만아니라 서양인들이 즐겨사용하는 분류체계적으로도 학명구분이 불가하다는 사실이다.대신 우리말 희나리는 '품질이 떨어지는 하품'이라는 뜻을 감안 할 때 유럽인들이 말하는 카라시우스 불가리스(Carasius vulgaris)'불가리아붕어' 또는 '게르만붕어'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Related Definitions for "Carassius vulgaris":European carp closely resembling wild goldfish불가리아붕어는 야생금붕어를 닮은 유럽붕어에 속한다 하고 있다.한반도 사람들에게는 이 물고기가 체고가 높고 몸이 은빛을 많이 띠면서 꼬리가 길다고 알려진다.이 은빛의 희나리는 아마도 잉어에서 변이된 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한반도에서는 희나리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는 이것을 칠곡군의 특산물이라 한다.그것은 현 한반도 낙동강을 비롯한 영남권 수계에 주로 분포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특히 낙동강의 김해, 밀양에 많다고 알려지는 것이다.현실적으로 한반도에서 서식하는 종에서 재래종붕어, 토종붕어, 또는 참붕어를 찾는데는 불가하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갈수록 더 힘들어질 것은 뻔하다.1961년에 한국어류학회에서 주최한 붕어심포지엄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으나 특히 희나리붕어는 그 이후 학계에서 논의가 없었고, 활발한 연구도 없었으며 학계에서는 '포괄적인 명칭 붕어와 학명이 있을 뿐이고, '희나리붕어'라고 하는 종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정확한 정보는 전무한 형편이다.국내 학계에선 1974년부터 개체를 밝히는데 비로소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알려지지만 떡붕어 유입시기가 1972년인 것을 감안하면 이미 많은 변이가 발생되었을 것이란 판단이 있을 수밖에 없고 고유의 재래종은 고사하고 한반도 토양에 맞는 재래종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다.더불어 볼 때 아직까지도 학계 내에선 희나리에 집착하고 이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가 이뤄진다고 하지만 우리의 옛 사서가 이야기 하는 토종붕어는 현재 어떤 종이며 재래붕어가 분류학체계적으로 어떻게 분류되어야 하는지부터 연구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은 당연한 이야기다.분명히 서두에서 보았듯이 조선시대 경도(京都)와 경기(京畿), 충청(忠淸道), 경상(慶尙道), 전라(全羅道), 황해(黃海道), 강원(江原道), 함경(咸鏡道), 평안도(平安道)등 전지역에서 토산어류로서 붕어 즉어(鯽魚)가 서식하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어찌 망각하고 식민지 역사속에 그냥 묻어버릴려 하는가.성소부부고에 강릉의 경포(鏡浦)가 바닷물과 통하기 때문에 흙냄새가 안 나고 가장 맛있다는 붕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척 할 수가 없다. 또한 명나라사신 동월(董越)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보았던 한 자(一尺)가 되는 붕어가 무엇인지 밝힐 수 있어야 하며, 또는 목은시고에 나타나는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한 염주(鹽州)의 붕어(鮒魚)의 실체가 어떤 종류의 붕어인지 낱낱이 밝혀 알려야 하는 의무와 책무가 한반도 생물학계에 있다 할 것이다.그래서 본래 역사속에 남겨져 있는 붕어 재래종과 토종붕어를 우리가 알 수 있어야 한다.5)참붕어의 진실전자에서 살짝 보았듯이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를 중심으로 하는 강, 호수, 늪에 중국종 즉 아시아종인 미국 현지에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가 번식했다고 난리고 이를 외래종(外來種:Exotic species)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에서 그것은 인위적인 이식이 아니라는데 글쓴이는 장담한다는 사실이다.이것과 비교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기가막힌 생물학적인 문제의 현실을 한번보자.우리말 "참"은 일부 동물 명사나 식물 명사 앞에 붙어, ‘품종이 좋은’의 뜻을 더하는 말 또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올바르고 진실된’의 뜻을 더하는 말로 취급되며 이것을 좀 더 정확한 설명은 이치와 논리에서 진릿값의 하나로 현대 논리학에서는 진위(眞僞)를 물어보는 명제(命題)가 곧 참이고 진리(眞理)라는 것이다.때문에 참은 진(眞)자와 같이 취급하고 뜻으로 전하고 있다.진(眞)은 진리(眞理), 진실(眞實), 본성(本性), 본질(本質)을 말하는 것이다.즉 근원과 마찬가지의 무게가 있다.우리나라 낚시꾼들이 말하는 참붕어는 진짜 붕어를 말함은 물론이고 소위 전통붕어, 재래붕어라는 뜻일게다.그러나 현재 낚시꾼이나 백과사전에서 “참붕어”라고 하는 개체는 놀랍게도 작은 피래미 같은 종이다.이것을 재래종(在來種)이라 하고 학명을 슈도라스보라 파르바[Pseudorasbora parva(Temminck et Schlegel,1846)]라 하는데 네덜란드(Dutch)귀족, 동물학자,박물관 관리자 콘라드 야콥 테민크(Coenraad Jacob Temminck:1778-1858)와 독일(German)조류학자 및 파충류학자 헤르만 슈레게루(Hermann Schlegel:1804-1884)가 1846년에 명명했다는 것은 적어도 15세기에 나타난 조선 붕어 근원을 말하기는 시기적으로 턱 부족하다는 말이다.슈도라스보라(seudorasbora)속명을 명명한 사람이 네덜란드 의사이며 어류학자, 파충류학자인 피터 블리커(Pieter Bleeker:1819-1878)인데 1862~1877사이에 출판한 네덜란드 동쪽 어류학지도"Atlas Ichthyologique des Orientales Neerlandaises"에서 동아시아 물고기라고 낙인 찍은 것이다.유럽에서 주장하는 생물학 근원은 린네(1758년)로 부터 기인한다 할 때 상당한 의혹을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네덜란드 동쪽이 어디겠는가.바로 뉴욕 동쪽 대서양이다.일반적으로 ‘깨피리’, ‘깨붕어’라 하고, 영어로 스톤 모로코(Stone moroko), 또는 톱마우스 거전(Topmouth gudgeon)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분류체계는 잉어과(鯉科:Cyprinidae)에서 갑자기 모래무지아과(鮑亞科:Gobioninae)로 분류되고, 이것에서 맥수어속(麥穗魚屬:Pseudorasbora)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체계적으로는 참붕어 스톤모로코(Stone moroko)라 하고 있는 현실이다.말도안되는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그것은 한반도에서 전통붕어 또는 재래붕어가 없었다는 것이며 처음부터 정립될 수 없었다는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이것은 동아시아, 신중국, 한반도, 열도와 시베리아(native to eastern Asia, including China, Korea, Japan and Siberia)등으로 원산지 표기가 되어 역시나 동아시아 종(種)으로 나타는 것으로 집약되는데 범위는 유럽 다뉴브강(Danube)과 중앙아시아까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하필이면 왜 이것을 한반도 사람들은 참붕어라 하였는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더군다나 유럽에서는 다뉴브강(Danube)에 나타나는 이물고기가 8cm를 넘지 않고 보통 2~7.5cm의 작은 물고기라고 취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것을 침입종(侵入種:invasive species)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가막히는 이야기다.백과사전을 보면 몸길이가 최대 13cm내외라 했고, 몸 옆에 검은 줄이 있으며 몸이 위아래로는 얇고 좌우론 살짝 넓다 하였는데 한반도 사람들은 몸 옆에 검은 줄이 있다 한 것만으로 이것을 참붕어라고 잘못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참붕어라 했을까.‘모샘치 또는 맥수어(麥穗魚)’라고 하고 또는 라한어(羅漢魚), 속명으로는 부수자(浮水仔) 즉 ‘물에 뜨는 새끼’라 하는 것으로 잉어목의 잉어과(輻鰭魚綱鯉形目鯉科的其中一種)인 것은 분명하다.모샘치-스톤 모로코(Stone moroko)科學分類界: 動物界 Animalia門: 脊索動物門 Chordata綱: 輻鰭魚綱 Actinopterygii目: 鯉形目 Cypriniformes科: 鯉科 Cyprinidae亞科: 鮑亞科 Gobioninae-모래무지아과(Gobioninae)屬: 麥穗魚屬 Pseudorasbora種: 麥穗魚 P. parva二名法Pseudorasbora parva 1846이 물고기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60년 다뉴브강(Danube)의 루마니아 듬보비차주(Dâmbovița County), 비호르 주(Bihor)의 누체트(Nucet)의 작은 못에서 소개된 것으로 기생충을 보유한 물고기로 알려진 것이다.그런데 이것을 참붕어라고 이름붙인 것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기생충을 보유한 물고기를 그대로 참을 붙여 한반도에 방치한 환경청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닐 수 없다.그렇다면 참붕어는 어떤 종일까? 궁금하지 않는가.6)붕어의 생물학근원근원적으로 붕어속명(屬名)은 카라시우스(Carassius)이고 이를 크루시언 카프(crucian carp)이라 하는 것은 잉어과의 붕어라는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크루시언(crucian)의 오리지널 어원은 18세기 독일어 카루제( from Low German Karusse)라 하였는데 '회전목마'로 인식되나 유럽으로 번역되었을 가능성이 더 많지만 특이하게 1840년부터 1920년까지 크라우제(Krause)란 이름을 가진 거주민들의 지역군이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를 중심으로 한 위스콘신, 일리노이,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그리고 뉴욕에서 가장많이 나타나고 있다. [Karusse, karass, karausche]물론 오스트리아와 독일(네덜란드)사람들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유럽 특히 독일인들이 거주하던 곳임을 알 수가 있으며 또한 붕어가 서식하던 곳임도 알 수가 있다.때문에 모래무지아과(鮑亞科:Gobioninae)와 분류되기전의 생물학적 판단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Gobioninae is a monophyletic subfamily of Eurasian cyprinid fishes.분명 모래무지아과는 유라시아 잉어과의 아종으로 단일 종이라 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나라 토종붕어인 참붕어라고 하는 것은 놀라 자빠질 이야기다.근원적으로 붕어는 유럽종이라고 못을 박고 있으며 잉글랜드가 원산지라고 하고 있다.본 블로그에서 글쓴이가 잉글랜드가 어디라 했던가.적어도 18세기 때까지는 북아메리카대륙 뉴잉글랜드이라 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오대호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카루사(Swedish)karussa, 카라우체(German)karausche, (French)carousse,-assin, corassin,(Late Latin)coracinus, Carassius: Latinization of, karass, karausche=coraCoraa name of Proserpine프로세르피나 ((Jupiter와 Ceres의 딸the pupil of the eye눈동자an ancient town of Latium 라티 움의 고대 도시5세기경 라티움 라티움(Latium)은 이탈리아반도 중부 서안에 위치한 곳으로, 테베레 강 유역, 아펜니노 산맥과 티레니아 해 사이에 있는 넓은 평야지대이다붕어속명(屬名) 카라시우스(Carassius)를 한번보자.속명 카라시우스(Carassius)의 어원(語原)은 위 자료와 같이 유럽어 카라우체(karass, karausche)라고 하는 붕어에서 라틴화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라틴어(Latin) 코라시누스(coracīnus)는 그리스어(Greek)로 코라키노스(korakînos)라는 것으로 이집트 나일(Nile)의 물고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즉 최초 붕어는 이집트 나일강의 물고기를 지칭한 것이다.이집트의 태양신-라(RA), 라(羅)라고 한 사실과 더불어 신라(神羅)를 떠 올릴 수밖에 없고 아폴론(Apollo:Απόλλων)으로 불리고 신화(神話)역시 그리스라고 인정되는 전통고려(高麗)의 신화라고 판단되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이것들이 이집트화되고 곧 유럽화 되었다는 등식의 논리는 본 블로그에서 수도 없이 주장한 사실이며 오늘날 유럽붕어(歐洲種)로 통용되는 것이다.European carp closely resembling wild goldfish 그리고 이 유럽붕어가 야생금붕어와 밀접하게 닮았다고 하고 있다.야생금붕어야 말로 금빛의 부어임이 틀림없다.그것은 위 금빛이 나는 붕어 사진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을 독일사람들은 [Karusse, karass, karausche]라 한 것이다.Auratus comes from the Latin root aurat, meaning "gold" or "golden" and is consequently used to designate species of this colour.때문에 1758년 린네(Carl Linnaeus:1707–1778)가 명명한 유렵붕어의 학명(Carassius carassius, Linnaeus,1758)은 이명으로 금붕어(Golden Carp)라고 했다고 하지만 라틴어 아우라투스(auratus)가 붙어 있는 삼명법의 학명“Carassius carassius auratus, Linnaeus,1758”가 진짜 금붕어가 아닌가 한다.Latin root aurat-, meaning "gold" or "golden"물론 똑같이 아우라투스 종명이 들어가는 것에서도 그렇고 아시아종에 이와같이 라틴어(Latin root)근원, “aurat”의 의미가 들어간 것은 "금(gold)" 혹은 "황금빛(golden, gilded)”뜻하는 참붕어가 아닌가 의심해 보는 것이다.그러나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아시아종을 검은 빛이 나는 것을 대체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오히려 신중국 자료를 보면 유럽붕어를 흑즉(黑鲫)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될 수가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는 모두 금붕어(goldfish)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정리할 수가 있다.반면 유럽붕어라고 하는 카라시우스 카라시우스(Carassius Carassius)는 이명으로 금붕어(Golden Carp)를 그냥 갖다 붙인 것이다.실제로 학명은 이렇게 달라지지만 금붕어라고 하는 붕어의 개체들은 오히려 유럽종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도 혼란을 더 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서 우리가 착각할 수 있는 것은 열대금붕어이다.이 열대어는 아래 2항을 보면 연못이나 수족관 물고기로 사용하는 유라시아의 작은 황금 또는 오렌지, 붉은 민물물고기를 말하고 있어 그들이 유럽붕어라 한 것은 본래 관상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Carassius - goldfish fish genus - any of various genus of fish1.Cyprinidae, family Cyprinidae - a family of fish including: carp; tench; roach; rudd; dace2.Carassius auratus, goldfish - small golden or orange-red freshwater fishes of Eurasia used as pond or aquarium fishes3.Carassius carassius, Carassius vulgaris, crucian carp - European carp closely resembling wild goldfish아니면 유럽붕어는 유럽이란 명칭이 근세기에 새롭게 생성되면서 같이 끌고 들어간 것이 아닐까도 한다.잉어과 사이프리니대(Cyprinidae)에서 유럽붕어라고 하는 학명 카라시우스 카라시우스(Carassius carassius)는 원래의 발생지가 카스피해(caspian sea)지역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는 스위스, 스페인, 이태리 남부, 핀란드를 제외한 전 유럽에 분포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과 달리 본 블로그 글"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 주장한 것처럼 카스피해(caspian sea)가 다름 아닌 멕시코만(墨西哥灣)이라는 사실도 참고할 때 우리가 모르는 상당한 오류가 분명하게 있음도 알 수가 있다.바로 아마존과 멀지 않아 열대성 금붕어가 탈바꿈한 것이 아닌가도 의혹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 현 아시아 계열의 붕어를 일방적으로 학명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라 하여 아시아종은 금빛 색이 아니라 검은 색을 가진 붕어로 정리되고 있는 문제도 재고해야 할 이야기다.A kind of European carp (Carasius vulgaris), inferior to the common carp; called also German carp. 특히 이 자료에는 유럽종인 카라시우스 불가리스(Carasius vulgaris)는 보통 하급붕어로서 게르만붕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카라시우스 불가리스(Carasius vulgaris)는 위 그림에도 볼 수 있듯이 너무나도 찬란한 금빛을 자아내고 있는 붕어이다.그리고 유럽의 다뉴브(Donau:Danube)강 일대에서는 붕어를 골드피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그렇다면 오히려 아시아종인 아우라투스가 유럽학명의 종명으로 쓰여 져야 하지 않겠는가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본래 금붕어의 원산지가 양자강[揚子江]하류의 절강성[浙江省]항주[杭州]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본초학자 이시진(李時珍:1518-1593)과 이자진(李自珍:1523-1596)의 혼란이 역사현실적인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과 별개로 백과사전에는 이자진에 의해 금어(金魚) 또는 금적어(金鯽魚)라 하여 당대(唐代)에 야생의 금붕어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송대(宋代)에는 상품화 되어 서민사회에 보급되었고 이것이 16세기초(初) 일본으로 16세기말(末) 영국으로 18세기 중엽 프랑스로 19세기 초(初)에는 미국으로 전래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열대어란 말인가.관상용 금붕어(Carassius auratus auratus)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품종이 사육되고 있으며 작은 어항에서 사육하면 수명은 10년, 몸길이는 5cm까지 자란다고 알려진다.어항이 크고 환경이 양호하다면 30년 이상 살고 몸길이가 30cm까지 자라며 새끼금붕어는 검은빛을 띠다가 성장함에 따라 어미와 똑같은 빛깔과 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물의 온도가 13℃ 이하가 되는 겨울에는 어항이나 연못 바닥에 가만히 움직이지 않거나 이 동안에는 먹이도 먹지 않으며 그러다가 봄이 되면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서 알도 낳는다.역사적으로 붉은색, 오렌지색,노란색 등으로 변이되기 시작한 때가 진왕조(Jin dynasty:265-420)라고 알려지고 당왕조(唐朝:618-907)때는 연못에서 잉어를 사육하였고 비로서 송왕조(宋朝:960-1279)때는 금붕어의 사육법이 정착되었고 명나라 왕조(明朝:1368-1644)시기에는 금붕어가 실내에 길러지기 시작하면서 1603년에 일본소개되었고 이어 난데없이 포르투갈을 거쳐 유럽에 소개되었다고 하고 있으며 1620년대에는 금붕어가 남부유럽에서 행운과 재산을 상징하였고 북아메리카 미국에는 1850년소개되었다고 한다.근세기역사가 그렇다고 한다.어쨌거나 금붕어는 아시아종에서 돌연변이가 시작되어 붉은 붕어를 연못에서 키우기 시작한 것이 금붕어 사육역사의 첫 시작라 하는 것이다.Goldfish were bred from Prussian carp(Carassius auratus gibelio) in China, and these usually olive green fish remain the closest wild relative of the goldfish.하여 금붕어는 중국에서 프로이센잉어(Carassius auratus gibelio)를 사육한 것으로서 나타나고 일반적으로 올리브그린 색의 붕어에게 비슷한 금붕어(goldfish)야생성이 남아 있다고 하고 있다.금빛이 아니다.7)마무리[1]Carassius carassius, Linnaeus, 1758(Golden Carp)[2]Carassius carassius auratus, Linnaeus, 1758(Common auratus, meaning gilded(황금빛) [3]Carassius gibelio(Bloch, 1782) Prussian carp, silver Prussian carp [4]Carassius vulgaris Nordmann, 1840[5]Carassius cuvieri Temminck & Schlegel, 1846 Japanese White Crucian Carp[떡붕어]Giebel (Carassius gibelio - (Silberkarausche, Carassius gibelio )reproduction activities on flooded trail after torrential rainfalls (directors cut)붕어 역사의 끝맺음을 하기 위해서는 글이 너무 길어진다.일단 이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다.위는 현재 잉어과의 붕어속 주요 학명들을 나열해 보았고 이것을 유명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생물학연구사이트에서 근원지를 세세하게 탐색해 보았지만 기존 근세사나 서양생물학자료에서 말하는 사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DNA 분석을 바탕으로 한 각 사이트의 근원지 지도를 살펴본 결과 [5]번 일본열도에 서식하는 것 이외 [1]~[4]까지 모두 주요근원지가 유럽대륙으로 나타나고 있다.그러나 글쓴이의 생각은 붕어는 삼한역사기록에서도 뚜렷이 나타나듯이 그리고 조선시대 영역에서 전국에서 토산으로 서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듯이 이처럼 독특한 역사가 있는 것과 더불어 근세기에 붕어 서식처인 근원지가 본질이 뒤바껴 이질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때문에 DNA 분석을 토대로 하였다는 유명 서양계 웹사이트 자료들을 살펴보았을 때 들어나는 사실들에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이런 유명사이트 근원지 지도자료 역시 날이 갈 수록 점점더 신빙성이 떨어지고 모호하게 근원지를 찾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다.하나가 아니라 여러 많은 곳을 비교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다.2009년 본격적으로 처음 글쓴이가 세계삼한역사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 각 종 생물학적 근원지를 밝힘에 있어 이러한 유명사이트가 제공하는 자료들은 솔직히 아무것도 없는 한반도 토양에서 연구진척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이러한 연구에 대한 것을 감지한 것처럼 몸을 도사리고 점차 희석시켜 진실을 알아 볼 수 없도록 특히 근원지 감추기가 시작되었다는 판단이 든다.그러나 그렇더라도 우회하면서 시간이 한없이 소모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밝혀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본질로 들어가서 붕어의 정확한 근원지가 숨겨져 있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이렇듯 역사적으로 독특한 어종의 붕어가 조기어류강(輻鰭魚綱:Actinopterygii), 잉어목(鯉形目:Cypriniformes), 잉어과(鲤科:Cyprinidae), 붕어속(鲫屬:Carasius)으로 분류체계가 세워져 있는데 독자적인 분류체계를 가지지 못한 이유가 궁금하다.두번째는 유럽붕어가 신중국 자료에는 흑즉(黑鲫)이라 하여 유럽종은 무조건 골드피시(Goldfish)라는 금빛의 붕어가 실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붕어속명(屬名)은 카라시우스(Carassius)라 하여 이는 유럽붕어의 크루시언 카프(crucian carp)라 하는데서 크루시언(crucian)의 오리지널 어원은 18세기 독일어 카루제( from Low German Karusse)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에서 1840년부터 1920년까지 크라우제(Krause)란 이름을 가진 지역군은 놀랍게도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를 중심으로 한 위스콘신, 일리노이,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그리고 뉴욕에서 가장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도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다.시기적으로도 영국이 근원지라 하기에는 부족하다.겨우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던 18세기때라 하는 사실과 당시 독일 함부르크에서 처음 붕어가 영국에 소개되었다는 시기는 1728년이라는 사실 등은 삼한 마지막 왕조인 조선시대의 붕어기록인 1469년(예종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보다 현저히 뒤 떨어진다는 사실이다.더나아가 고려말 대학자이자 문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시집 목은시고(牧隱詩藁)에도 염주(鹽州)의 붕어[鮒魚]를 먹고 싶어 시 한수를 적는다 라고 하였던 사실에서도 한참 뒤처진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또하나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의혹은 독일에서 영국에 처음소개되었을 때 붕어를 카루센(carrushens)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 살던 오래전 식민지의 원 조상(Old Colony Ancestors)을 부르던 것이라 한 사실이다.이것은 아메리카인디언이 아닌 옛 삼한인을 말한다고 글쓴이는 주장한 것이다.또 하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프랑스어 붕어를 카라센(carassin)이라고 하는데 이 붕어들이 서식하는 곳이 북아메리카대륙 세인트클레어강(St. Clair River), 세인트 클레어호(Lake St. Clair)의 지류, 디트로이트강(Detroit River), 이리호(Lake Erie)와 지류, 나이아가라강(Niagara River), 온타리오호수 서부(western Lake ontario)와 지류, 슈페리어호(Lake Superior)의 선더베이(Thunder Bay), 온타리오주의 타민스 길리스호(Gillies Lake,Timmins)까지 옛 프랑스령에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 지역을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인들이 외래종이라고 하는 아시아종 붕어 학명 카라시우스 아우라투스(Carassius auratus)의 서식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들이다.이와같은 사실에서 붕어의 근원지가 유럽대륙이라고 일방적으로 정리된 현재 자료들을 무조건 따를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붕어의 한문은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고전번역원에 등장하는 사서들을 총집합해보아도 약재로 설명된 부어(鮒魚)보다 즉어(鯽魚)라는 이름으로 토산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이것을 글쓴이는 붕어라 하여 포괄적으로 명칭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좀 더 확대해보면 어쩌면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 등장하는 즉어라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재래종으로 보아야 할 토산붕어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이것을 분류학적으로 이야기 할 때 속명으로 취급되었을 가능성도 농후한 것이다.鲫(Carassius auratus auratus)属鲤形目,鲤科,鲤亚科,鲫属。俗称:喜头、鲫拐子(湖北), 鲫瓜子(东北), 河鲫鱼(上海), 月鲫仔(广东):古称鰿、鲋、寒鲋。한편 위 자료에 나타난 신중국 자료를 보면 붕어는 여러명칭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희두(喜頭)라 하였고, 호북에서는 즉괴자(鯽拐子), 동북지방에서는 즉과자(鯽瓜子), 상해에서는 하즉어(河鯽魚), 광동지방에선 월즉자(月鯽仔)라 하였고 옛칭에는 적(鰿), 부(鮒), 한부(寒鮒)라 하였으며 또 다른 자료를 보면 속명으로 즉과자, 월즉자 이외 토즉(土鯽), 세두(細頭)라 하고 우리나라 고서에 등장하는 명칭과 똑같이 부어(鮒魚)라고도 하였으며, 추운 때에 잡히는 붕어라 하여 한부(寒鮒)라 까지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처럼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렸다는 것은 그만큼 붕어 종이 많았다는 설명일 것이다.그렇지만 우리의 처지는 어떤가.현재 한반도에는 재래종붕어가 무엇인지, 토종붕어가 무엇인지알 수 없는 그야말로 난맥상태에 있다.이것을 어찌 생물역사라 할 수 있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붕어의 생물학적 판단은 미흡하지만 여기에서 마친다.다음 글은 붕어2탄 "발해와 붕어 그리고 세계삼한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세계삼한역사연구의 가시적인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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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삼한역사연구의 가시적인 효과글쓴이:한부울아래는 연합뉴스[16.09.29. 12:11,조재영 김기훈 기자]보도의 기사 내용이다. 서기 1333년 로마 교황이 고려 제27대 충숙왕에게 보내는 서한의 필사본이 바티칸 수장고에서 발견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우광훈 감독)제작팀은 지난해 8월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이 서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29일 밝혔다.1333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고려의 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이 발행되기 44년 전이다.이는 1377년 직지가 인쇄되기도 전에 이미 고려와 유럽 간 교류가 이뤄졌음을 의미한다.양측 간 교류가 내내 지속됐을 것임을 전제한다면 고려의 금속활자가 1455년 활판 인쇄에 성공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성립케 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다큐 제작팀은 동양의 금속활자가 유럽으로 흘러간 흔적을 찾던 중 이 자료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라틴어로 된 이 편지는 교황 요한 22세가 쓴 것으로 '존경하는 고려인들의 국왕께'로 시작된다.이 편지의 전달 임무는 당시 니콜라스라는 사제가 맡았는데, 그는 베이징으로 향하는 도중 사라져, 편지가 최종적으로 충숙왕에게 전달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다만, 당시 교황청은 편지를 씀과 동시에 이를 기록, 보관하기 위해 필사본을 남겼고 이 필사본은 여러 필사본을 모은 서한집에 들어있다.특히 편지 내용은 당시 교황청 사제들이 고려에 직접 건너갔다는 점도 시사한다. 편지에는 "왕께서 그곳(고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대해주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지금까지는 1594년 임진왜란 때 스페인 출신 세스페데스 신부가 한반도에 온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록돼 있다.이 다큐를 만든 우광훈 감독은 "이 편지의 발견은 유럽인과 한국의 교류사를 261년 앞당겨 다시 서술해야 할 역사적 사건임은 물론이고 한국 교회사를 수정해야 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제작진은 "바티칸 비밀 수장고에는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고 서한 필사본도 양피지로 만들어져 700년 가까이 지났지만, 보관 상태가 양호했다"고 설명했다.이와 관련, 전북 전주에 본부를 둔 세계종교평화협의회도 지난 6월 말 바티칸기록원에서 고문서 담당 엔리코 플라이아니 박사를 만나 요한 22세가 고려왕에게 보내는 라틴어 서신을 확인하고 두 장짜리 사본을 확보했다고 밝혔다.세계종교평화협의회 관계자는 "지난달 바티칸기록원으로부터 우편으로 서신의 사본을 전달받았다"라며 "서신 내용은 현재 번역 중이며 앞으로 교황청과 협의를 통해 서신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한편, 다큐 제작진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동서양 교류를 통해 고려의 금속활자로부터 힌트를 얻었거나 기술 이전이 된 흔적을 찾기 위해 유럽 5개국, 7개 도시를 탐방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촬영 분량만 총 400시간으로, 200여명의 학자와 전문가, 시민의 인터뷰 등을 담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최근 후반 작업을 마쳤다.영화 '부러진 화살'을 감독한 정지영 감독이 제작을 총지휘했다.제작진은 이 작품을 국제 다큐멘터리에 출품하는 한편 내년 상반기 국내 극장개봉을 추진할 예정이다.2012년 1월 22일(일요일)에 작성한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에서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활자 설계, 활자 대량 생산 기술을 유럽에 전파한 사실로 단순하게 인정되고 있지만 그의 진정한 업적을 세부적으로 따져 들어가 보면 활자설계, 활자대량생산이란 기술과 적극적으로 유성잉크, 목판인쇄기 사용을 결합시켰다는 제작과정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는 활자 제작 재료로 합금을 사용하면서 활자 제작 방식으로 주조(鑄造)를 채용하였다는 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역사 지식에서 빠져 있는 것이라 하였다.그렇다면 분명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금속기술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프랑스 북부지방의 갈리아(Gallia) 골(Gaul)은 바로 고구려 고로(高盧)와도 연결된다고 하면서 이 갈리아 원 거주민은 인도유럽어족인 켈트족(Celts)이란 사실을 더하여 여러가지로 삼한 역사와 연계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어쩌면 갈리아(Gallia), 골(Gaul)과 가우리(Caule, Cauly)와 연결되고 나중에는 코레, 코라이(Cores, Core, Coray, Conray, Corie, Coria, Corai)로 이어지는 연관성을 제기해 보았던 것이다.켈트족(Celts)의 거주지이었던 마인츠(Mainz)는 1254년에 강력한 라인(Rhine)지방 도시 연맹의 중심지 상업도시로 발전하였고 1440년에는 여기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태어났던 곳으로서 특히 독일을 무대로 신교(改新敎:Protestant)와 구교(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 30년전쟁(Thirty Years' War:1618-1648)중 스웨덴과 프랑스에 점령되었던 굴곡이 많은 도시이며 1792년에는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 중 재점령했다고 알려지는 도시이다.구텐베르크가 1450년 인쇄소를 설치하고, 인쇄한 라틴어로 "번역된 출판"이라는 의미의 불가타(Vulgata)성경은 왠지 고려불경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하였고 동양한어로 불경이라면 서양어 특히 라틴어로는 마자린성경(Mazarin)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두 성서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란 추측까지 한 것이다.구텐베르크는 1453년경 작고 발전된 활자로 개량한 후, 2회에 걸쳐 42행의 신약 성서를 인쇄하였는데, 이 책에서 나타난 우수한 인쇄 품질로 그는 호평을 받았다 하였으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발명품으로 존재한 것을 언급하였고 기록이 사라지고 없어 확인 할 수 없다 하여도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의 태생 자체가 고려시대의 금속 활자 탄생과정과 연계되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이글에서 조심스럽게 개진 한 것이다.고려가 기록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금속활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고려인이 아닌 구텐베르크가 현재 모든 자료에서 철저하게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 없는 의문점으로도 제시하였다.단 이 글에서 오해소지가 있겠지만 불경이라는 것과 성경이라는 것을 같이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정확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섣불리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니다고도 한 것이다.만약 그렇다면 근세기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거대한 한 개의 역사를 두 개로 나누면서 고려와 독일로 분리 한 것이고 종교까지 분리한 것이라고 감히 내다 볼 수 있다 하였다.고려가 당시 유럽연합국이었다면 실제 지방자치제에 의한 독립적인 왕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독일도 그 구성원으로서 존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그리고 어쨌거나 현재 나타나는 제일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금속활자가 주는 가치와 역사흐름의 영향력이라고 하여 직간접적으로 동서양이 분리될 수 있는 기반이었던 프랑스혁명의 시발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금속활자의 가치를 볼 때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나 불가타(Vulgata)성경이나 마찬가지로 대량으로 인쇄하여, 성직자와 지식인들만 읽을 수 있었던 경(經)과 성서를 대중화시켰다는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고 당시 불란서성경이라고 할 수있는 불경(佛經)이나 성서(聖書:Bible)를 비롯한 책들은 전부 손으로 쓴 필사본이라 수량이 적어서 가격이 매우 비싸고 구하기가 힘들어 대중화가 못되었지만, 활판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쉽게 책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들 수 있다 하였다.이치적으로 따져 고려나 유럽이나 마찬가지의 기존 기득권세력과의 충돌시 가장 변화의 가치를 이를 이용하여 대중화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가치를 노리고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제작하였을 것이란 추리가 가능하다고도 하였다.때문에 중세기의 종교전쟁, 또는 프랑스혁명이 가능했다고 한 것이다.문제는 이 두 역사를 나눔에 있어 시기적인 문제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일텐데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만 볼 때 고려는 1377년이고 독일은 1453년이란 차이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위 기사를 보면 1333년 로마 교황이 고려 제27대 충숙왕에게 보내는 서한의 필사본이 바티칸 수장고에서 발견됐다는 주장에서 이미 종교지도자들은 기계화된 것이 아닌 금속활자를 사용한 것이 라 보인다.어쨌던 이 금속활자 발명은 고려나 유럽 모두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인데 서양인들이 차지한 유럽쪽에는 이에 대한 세세한 역사에서 확연하게 나타나지만 현 고려가 존재했다고 하는 한반도에는 그저 한반도 역사의 기록으로 모퉁이에 매우 초라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 다르다는 점도 강조한 것이다.물론 금속활자발명은 당시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으며 또한 프랑스혁명을 성공시킨 열쇠가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이 처럼 본 블로그에서 실행하는 세계삼한역사찾기에 이은 지속된 연구의 결과가 위 기사보도처럼 문화계에서 이미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그러나 좀 더 눈을 넓혀 고려연합이라는 광주리에 유럽사와 구텐베르크를 넣을 수는 없었을까?고려연합이라는 국가 속에 카톨릭이란 종교조직을 넣고 볼 수는 없었을까.그러한 역사계가 아닐지라도 사회문화적인 눈은 언제쯤 뜨이는 것일까?그렇더라도 한반도 역사의 질곡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그래도 이렇듯 발전하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붕어(鯽魚:carassin, carrushens)와 발해(渤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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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鯽魚:carassin, carrushens)를 찾으니 발해(渤海)가 보인다.글쓴이:한부울1.서두2.여와(女媧)와 여호와[Jehovah]3.진흙(腐泥)과 퇴적암(堆積岩)4.발해와 자자분(紫瓷盆)5.발해(渤海)에서 난 붕어(바이킹은 발해영역에서 활동한 세력이다.)6.염주(鹽州)와 디트로이트의 도시 소금광산7.결말1.서두뜸금없지만 종교(宗敎)란 무엇인가에 대한 잠시 생각을 한다.단편적으로 사전에 정리된 것을 보면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설명된다.문화체계(cultural system)는 특정한 근본원리에 의해 통일적으로 질서화한 사회 문화관계의 총체라고 또한 정리된다.현대적인 정리가 그렇다.종교에도 이제 규율과 체계가 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물론 인류태고적에도 인간들을 통솔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었을 것이고 그 사람이 제사장을 하였던 것은 분명하다.단군은 제사장을 의미하고,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종교 체계적인 면에서 단군왕검(檀君王儉)라는 체계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이런 현상을 제정일치(祭政一致)라 하는 것이다.유대교에서는 레위(Levi)지파에게 제사장과 예언자의 역할 뿐만 아니라 왕적인 지위까지도 부여했다고 알려진다.마찬가지로 브라만교(婆羅門敎:Brahmanism)가 힌두교로 발전하였는데 브라만(Braman)를 제사장이라고 하고 브라만(婆羅門)은 인도의 카스트제도 중에서 가장 상층의 계급으로 나타난다.십일조(tithing)역시 실제로 신(神)에게 가는 게 아니라 빈민을 돕거나 신(神)의 일을 대신하는 사제와 레위(Levi)에게 돌아간다고 되어 있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종교(宗敎)는 제사장을 위한 문화체계이다.국가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위험과 안전 그리고 전쟁의 공포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정치체계이다.종교는 나약한 인간 개인의 심리적 안정과 평화를 제공해 주는 체제이다.종교는 국가 창건의 기초라고 하였다. 국가는 메인이라고 보고 종교는 실제로 인간이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神)의 초월적인 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정리되기도 한다.때문에 종교(宗敎)는 인간생활과 삶에 대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울 수 있으며 때문에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제공받는 대신 물질적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가 있다.국가는 세금을 요구하는 대신 종교는 기부금이나 십일조를 구한다.현대들어 물질이 기하급수적으로 풍요해지고 잉여재산이 늘어나면서 믿음을 잉여물질로 대신하려는 심리가 묵언적으로 협의되어 있다는 것은 결국 원초적인 문제에서 물질은 인간에게 풍부해 질 수 있지만 인간이 느끼는 고뇌나 죽음과 같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의 절대자에게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욕구가 있을 것이다.사회에서 극한까지 경쟁에 내몰리는 가난한 인간들에게 닥치는 갖가지 문제 가운데 삶에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질좋은 삶이기 때문에 이것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욕망은 어느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일게다. 때문에 종교는 개인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이러한 인간이 가지는 원초적인 불안 심리에 의한 종교(宗敎)관념은 인류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정치와 종교는 아주 밀접한 연관 관계에 있다.그러나 물질이 풍족한 현대에 들어 이러한 인간들의 심리적 약점을 이용하여 종교에 대한 믿음(faith)을 강요하게 하고 종교관념자체가 완전체의 물질화되었으며 제사장을 자임하는 종교지도자들이 포화상태가 되어 인간의 순수한 믿음을 사유화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그리고 더 나아가 잉여재산의 달콤함을 맛본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완전체 물질에 이미 길들여져 믿음보단 종교를 이기심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각자 유리한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종교자체를 불신하는 위험에 도달한 것이다.오늘날 이처럼 종교가 불신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 그렇다면 신(神)은 존재하는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아인슈타인은 "개개인의 행동에 직접영향을 미치는 인격적인 신(神)은 상상할 수가 없다"라고 단언 하였으며 "인식할 수 없는 존재를 가정하거나 사실화하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한 것이다.그리고 우주적인 질서가 곧 신(神)이라 하였다.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우주에서 느낄 수 있는 종교적 감정이 불교에 잘 표현되어 있다고 믿었다고 알려진다.왜냐하면 '부처'는 스스로 마음에 존재한다 하였기 때문에 솔직한 감정표현이다.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다.그가 이런말을 감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태극이란 우주의 질서를 알 수 있는 과학자였기 때문이다.하느님이나 부처님은 형태가 없는 무(無)이며 우주의 오묘한 질서라고 정의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인식할 수 있는 형체가 있다는 유(有)가 무(無)에서의 거대한 우주속에 티끌정도 밖에 되질 않는다.유(有)는 인식됨과 보이는 것이며 한계이고 무(無)는 있고 없음을 따지지 않는 무한이다.마음 속에 하느님과 부처님은 우주질서를 담은 큰 그릇의 무(無)와 같은 것이니 형체의 우상을 세우지 말라는 본질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오늘날 종교는 물질탐욕에 변질되어 나타나는 유(有)를 한계로 하는 제사장을 위한 문화체계일뿐이다.2.여와(女媧)와 여호와[Jehovah]구약성서(舊約聖書)에 여호와[Jehovah]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2장7절)라 하였는데 이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유일신이라고 백과사전은 정리하고 있다.즉 이스라엘 유대인을 서양인이라고 할 때 서양인들의 하나님이라는 실체는 이스라엘 민족 신(神)이라는 뜻이다.늘 상 글쓴이는 이러한 사실에서 역사적으로 당혹스러워 할 때가 많다.동양인 몽골리안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가 유구한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닌 입장에서 무엇때문에 이스라엘민족 신(神)을 하나님이라고 하고 유일신(神)으로 받들어야 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그리고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원초적인 설명을 어느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다.엄연히 서양역사가 동양역사보다 시기적으로 후진이라는 역사사실을 전제하고서 볼 때 인종적인 이질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이다.더군다나 근대사라고 하는 세계사를 보면 분명 동양과 서양인을 구분할 뿐더러 절대로 하나의 역사속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분리시켰다는 원칙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주장들은 무엇인가 근원적으로 서양사는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반대로 본 블로그가 주장하는 모든 사실들은 하나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유일신(神)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애초부터 동서양인이 분리되지 않는상태에서 그것을 하나의 신인 하나님이 존재하였고 섬겼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그것은 서양인만의 유일신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 즉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신이 바로 각 종교와 정파를 뛰어넘는 하나의 유일 신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그것이 오늘날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여호와[Jehovah]라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고 이해할 수 있는 있다는 이야기다.그러나 그렇지 않다.기독교인 유대교 이스라엘의 신이 어찌 유일신이라 할 수 있고 더군다나 하나님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서양인의 모습을 닮은 하나님을 동양인이나 흑인이 어찌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형채가 없는 하느님, 곧 마음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과 부처님은 우주의 질서이며 자연의 법칙, 이치와 그것이 곧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진리라는 사실이다.이스라엘 민족신에서 출발한 우월한 종교와 우월한 역사관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한 것이다.사라진 역사, 일찍이 하나의 체제에서는 동서양, 백인종, 라틴계인종, 황인종, 흑인종 할 것없이 모두 유일신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받들 수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이것은 인간에게 하나가 되어야 할 세계종교관이기도 한 것이다.이러한 세계종교관과 유일신 하나님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나 절대로 그것이 현 기독교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다시 말하지만 인류역사의 시발점은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만 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때문에 서양사가 지배하고 있는 근세역사에는 여러가지 원초적인 의문이 깔려 있어 불신만 초래할 뿐이다.그렇다면 왜 우리의 세계삼한역사 속에 존재하던 삼한민족 신(神)은 세계신(神)이라 할 수 없는 것일까?여기서 할 수 있는 답은 한정될 수밖에 없고 근세기에 들어닥친 신물질문명에서 낙오된 것이라고 쉽사리 답을 할 수가 없는 갑갑함과 혼란이 없지 않다.왜 우리가 타민족의 신(神)을 하나님이라 해야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근세역사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이와같은 사실에서 수긍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러한 근원적인 종교적인 문제와 갈등은 세계삼한역사가 사라짐과 동시에 우리에게 갑갑함과 혼란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서두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종교는 나약한 인간들의 심리를 파고드는 속성이 있다.근세기 우월주의에 빠진 서양인들이 설치는 시대는 한편으론 세상 말기와 같았으니 민족이 다르다고 하여 그것을 유일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당시 절박한 상황들을 이해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할 뿐이다.돌이켜 보면 우리민족역사에서 창조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옛날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人間世上)을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매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환웅(桓雄)이 그의 무리 삼천 명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tibet) 신단수(神檀樹)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도시국가)라 이름하니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라고 신시본기(神市本紀)에 나타나는 기록이다.세계삼한역사의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 환웅(桓雄)시대때 여와(女媧)는 소호김천씨의 할머니이며, 중국의 삼황에 해당하는 태호복희씨와는 남매지간으로 중국의 전설상의 황제인 복희, 신농(神農)과 함께 삼황 중 하나로 알려져 있고 복희의 아내였다고 하는데 오늘날 재야학자들은 모두가 전한시대의 사마천(司馬遷)이 중국의 옛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환웅천왕의 배달국 역사를 빼버리고, 반고(盤固)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일견한다. 반고(盤固)는 환국의 우루국에서 대인 환웅을 따라 태백으로 오던 삼천무리중의 부장이었다. 글쓴이의 변할 수 없는 주장은 1910년 이후 혼란시대때 당시 국민당소속 사람들이 사마천을 빙자하여 근세기 신중국 만들기에 몰입하였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이완성된 것이며 이것을 사마천사기와 연결하면서 결국24사를 만들어내었다는 사실을 주장한 적이 있다.물론 전한시대의 사마천이란 인물은 생몰년대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존재한다.창세 여신, 여황(女皇), 여와(女媧)는 인류의 시조이자 모계사회의 수령이라고 알려진다.이스라엘 창세의 신 여호와[Jehovah]와 비슷한 음(音)의 "여와"는 사람의 머리에 몸은 뱀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전설 속의 인물로 성은 풍(風)이고 여황 또는 여명이라고도 불렀으며 이가 곧 인류의 시조로 알려져 있고 이 세상에 하늘과 땅이 막 생겨났을 때 이것을 본 여와가 너무나 쓸쓸히 여겨 누런 흙과 물을 섞어 진흙을 만들고 여기에 끈을 늘어뜨려서 잡아당기니 진흙 덩어리들은 모두 인간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 사실을 백과사전에서 읽을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여송연(呂宋煙, Cigar)으로 본 이상한 근대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417"에서 말하길 환단고기에 환국력년을 63,182년라 하였으니 이것은 인류가 태생되고 난 후부터 역사로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放射性炭素年代測定法:Radiocarbon dating)에 의하여 구분하는 구석기시대 126,000년 부터 11,700년까지의 타란토절(Tarantian)과 일치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신석기시대를 지질학상 약 1만 년 전이라고 보는 것과 동일하게 볼 수 있는 기록임을 알 수가 있고 또한 범어자료에는 환인천제가 지금으로부터 9,900년 전에 인드라(因陀羅:Indra) 석제환국(桓國),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Śakra Devānām-indra)을 세우고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썼던 구한족(九桓族)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다.풍(風)은 우리 선조 중에 바로 전기한 9900년 전에 환국(桓國)을 세우는데 주축이 되었던 풍이족(風夷族)이 있었다 하고 이들을 풍이(風夷)라고 하였으며 하화족(夏華族)의 역사에서는 풍이를 풍씨(風氏)라고 한 것이다.유태족(猶太族)은 서양인이 되어 풍이족(風夷族)의 뱀문화를 배척하였고 성경에 뱀을 사탄으로 기록하여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유태족이 주장하는 여호와는 풍족(風夷族)의 여와와 동일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근세기에 천지를 모르고 자만에 빠진 서양인에 의해 모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이렇게 볼 때 어느쪽이 과연 역사성이 있고 정통이라 할 수 있을까?여호와는 본래의 풍이족인 여와를 모사하여 그들의 신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그러나 북아메리카대륙에서 1776년 미국이 영국식민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 분명 방울뱀을 모든 군기에 상징화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지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3.진흙(腐泥)과 퇴적암(堆積岩)다시 붕어이야기로 돌아가자.본 블로그 글 "붕어(鯽魚)로 본 삼한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3"에 이어 붕어 2탄이라고 하는데 1탄에서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한 붕어 근원지를 밝히려 하는 것이다.진흙은 도토(塗土), 어니(淤泥), 이토(泥土)라고 한다.서두에서 이야기 했지만 진흙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창세의 신화와 함께 인간의 몸, 세포를 진흙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한다.그렇기 때문에 우화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물과 함께 짓이겨 곤죽같이 된 진흙을 생각할 때 이것을 감탕이라고 하는데 남녀가 점잖지 않게 온갖 음탕한 몸짓으로 잠자리를 하는 짓을 경멸스럽게 말할 때 ‘감탕질’이라 한다.진흙으로 만든 남녀이니 온갖 음탕이 뒤 섞여 감탕이 된다는 이야기다.우리말이 얼마나 창세설에 가까운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또한 붕어가 사람에게 좋은 음식으로 여겨지는 것은 진흙 먹고 사는 것으로 삼한의 전통철학사상인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토(土)' 땅은 만물의 근원이자 중심이라 하였으며 그리고 신체에서 위장(胃腸)과 비장(脾臟)에 해당한다고 하였다.진흙이 토(土)이니 사람이 태고적부터 보양음식으로 붕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鯽:淡水鯽魚。身體側扁,頭部尖,背脊隆起,尾部較窄。陸佃《埤雅》云:“鯽魚,旅行以相即也,故謂之。”鯽喜偎泥,不食雜物,故能補胃。冬月肉厚子多,其味尤美。위 신중국자료를 보면 즉어(붕어)는 담수어로서 몸은 옆면이 평평하다 하였고 머리는 뾰쪽하고 척추가 솟아오르고 꼬리부위가 비교적 좁다라고 하였다.송(宋)나라 관리이자 학자인 육전(陸佃:1042-1102)의 비아(埤雅)에는 즉어는 융합(融合)하여 일체(一切)하며 고로 설명하길 진흙(부니)을 가까이 하고 좋아하며 잡물을 먹지 않기 때문에 위를 보호하는데 좋다라고 하였다.특히 음력 11월 동짓달에는 고기가 두텁고 알이 많아 맛이 좋다고 위 기록은 전하고 있다.때문에 붕어는 생리적으로 진흙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진흙 과자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2010년 1월 12일에 규모 7.0의 강진이 아이티(Republic of Haiti)를 덮쳐 50만 명의 사상자와 18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연재해로서 이때 진흙에 물과 소금, 마가린을 섞어 말린 쿠키, 일명 진흙과자로 연명을 하였다는 보도를 우리가 접할 수 있었는데 우선 이것을 먹고나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항상 배가 부른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옛부터 구황식품(救荒食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그러한 예가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한 사실이 있는데 아래 조선 중기 학자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시문집 미암집(眉巖集)에 잘 나타난다.미암집(眉巖集) ○칠언고시(七言古詩) 남쪽 고향을 탄식하다〔南鄕嘆〕 南方連歲旱赫赫 남쪽 지방 해마다 가뭄으로 메말라 千里彤雲渾一色 천 리의 붉은 구름 온통 일색이네 泉枯井涸渴不堪 샘과 우물 메말라 갈증 견딜 수 없는데 況見西成稻與稷 더구나 벼와 기장을 추수하겠나 哀哉蒼生遇不淑 슬프다, 백성들 불행한 시대 만나 呼天不聞空昏黑 하늘에 외쳐보나 들리지 않아 깜깜하네 剝囓草木噉泥土 초목을 뜯어 씹고 진흙을 먹으니 當秋人面黃而黑 가을이 되어도 사람 얼굴 노랗고 검네 赤子飢啼不忍聞 아이들 배고파 우는 소리 차마 못 듣겠고 婦女啜泣分南北 아녀자들 눈물 흘리며 남북으로 흩어지네 우리나라 남쪽지방에는 해마다 가뭄때문에 곡식을 접할 수 없어 "초목을 뜯어 씹고 진흙을 먹었다"고 기록된 것이다.이런 지리적 환경적 상황이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역사 상황인가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수가 없는 것은 특히 남쪽지방이라 하였던 사실에서 전라도나 경상도라 판단할 수 있지만 기장은 인도가 원산지로 알려지는 재배작물로 역사적으로 함경북도 회령읍 오동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도 기장이 출토되었다는 사실과 주로 강원도나 경상북도의 산간지대에서 재배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재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참고로 한다면 지형적인 환경이 한반도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 계묘(1423,영락 21)4월21일 (신미) 황해도 봉산 서면의 백토를 굶주린 백성이 쌀가루에 섞어먹다 ○黃海道 鳳山西面白土、瑞興 南山白赤土味甘, 飢民堀取, 和米粉啖之 療飢。 황해도(黃海道) 봉산(鳳山) 서면(西面)의 백토(白土)와 서흥(瑞興) 남산(南山)의 백적토(白赤土)는 감미(甘味)가 있다 하여, 굶주린 백성들이 파서 쌀가루를 섞어 먹어 요기(療飢)하였다.또한 위 조선왕조실록기록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백토(白土)를 쌀가루에 섞어 먹어 요기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반도 황해도(黃海道) 봉산(鳳山) 서면(西面)에 백토가 난다는 소리는 처음듣는 이야기다. [White Butte in Slope County]唐 苏鹗 《杜阳杂编》卷下:“ 渤海 贡马脑樻、紫瓷盆。”《新唐书·北狄传·渤海》위 한어자료에 보면 당(唐) 소악(蘇鹗)이 지은 소설집 두양잡편(杜陽雜編)에 발해(渤海)가 당조에게 조공한 마노궤(馬腦:瑪瑙)와 자자분(紫瓷盆)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2012년 6월 21일에 작성한 본 블로그 글 "마노(瑪瑙, agate)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4"에서 북미 미네소타주(Minnesota)의 마노(瑪瑙)가 쓰임새 때문에 인기가 최고라 하였던 것도 사실상 지리적환경이 한반도가 아니란 점을 알기 위해 밝혔던 내용이다.백토(白土:White earth, terra alba)는 카올리나이트(kaolinite)와 하로이사이드(Halloysite)를 주체로 하는 백색점토(White Clay)로서 요업원료가 되고 탈색제(그림용 오일을 탈색),흡착력이 크기 때문에 백색 도자기의 원료로 쓰인다고 알려진 것이다. 그렇다면 백자기가 얼마든지 산출될 수 있었던 조건이다.다시 이야기는 돌아가서 이토(泥土)를 사전에 찾아보면 진 빛깔이 붉고 차진 흙이라 하고 질척질척하게 짓이겨진 흙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를 진흙이라 하는 것으로서 진흙의 색깔이 일반적으로 붉은색을 띄지만 회색을 띄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진다.진흙(mud)에 대한 지질학(地質學:geology)의 정의로는 암석이 풍화(風化作用:Weathering), 침식(浸蝕:erosion), 운반되어 생긴 암설 가운데 역(礫:gravel)이나 모래(沙:Sand)보다 작은 것을 말한다.실트입자(약 0.05~0.005㎜)와 점토입자(약 0.005㎜ 이하)그리고 모래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지질학적으로는 쇄설퇴적물(detrital deposit) 즉 기존 암석의 풍화작용에 의해 형성된 퇴적물인 것이다.크기는 1/16 mm(62.5μm)~1/256 mm(4μm)의 모래보다 미세한 것을 실트(微砂:silt)라 하고, 그 이하의 것을 점토(粘土:clay)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때문에 이것들은 도자기나 점토 세공에 쓰인다.질척질척하게 짓이겨 지는 흙으로서 찰지고 곱기 때문에 토양 중 가장 미세한 입자이며 화학적 교질작용을 하고 물과 양분의 흡착력이 크다는 것이 점토 세공재료으로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도토(塗土), 어니(淤泥), 이토(泥土)라 하거나 우리나라 방언에서 구개흑, 국개흘, 구캐, 국해, 날흑, 딜흙, 조오덕, 지덕흘, 지더구흙, 지덕, 진득, 찌돌, 찌득, 쪼대흘, 해치, 개흙, 지득 또는 조대흙이라는 등 여러가지 명칭이 존재 한다는 것도 지방싸투리를 감안할 때 진흙이 상당히 많이 산출된 것임도 알 수가 있다.퇴적암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물 속에 작은 고체 입자들이 서서히 쌓이면서 형성된다고 알려진다.수심이 얕은 바다가 건조한 대지 인근에 위치하고, 이 지역에 폭풍우가 자주 친다면 모래 입자들이 바다로 쓸려나가 조류와 중력에 의해 바닥에 쌓이게 된다. 이런 과정이 지속되면 각 모래층은 아래쪽에 있는 모래층을 누르고, 결국엔 몇천 년 전에 쌓여 있던 거대한 모래 덩어리를 눌러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북아메리카에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는 석탄기에 형성된 퇴적암이 지층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오대호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남부에 그러한 현상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자료에서 볼 수가 있다.시카코는 이명이 "Windy City"라는 별명이 있는 것처럼 본 블로그 글 "가평(嘉平)은 시카고(Chicago)이고 풍성(風城) 또는 지성(芝城)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8 "에서 밝혔듯이 풍성(風城)이라 한 것은 그 만큼 바람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가 있다.그 주위에 퇴적암의 강한 풍화작용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 알렸듯이 세계적인 주요철광산 (1)메사비산지(Mesabi range), (2)마켓산지(Marquette range), (3)메모미니산지(Menominee range), (4)고기빅산지(Gogebic range), (5)버밀리온산지(Vermillion range)가 밀집된 지역은 바로 슈피리어호(Lake Superior)서부지역과 미시간호(Lake Michigan)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했다.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저지대에는 광물연료가 다량 퇴적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석탄 퇴적 지역이 바로 애팔래치아 탄전 지역인데 켄터키주 동부, 웨스트버지니아주, 펜실베이니아 서부로 이어지는 이 탄전 지역이다.때문에 오대호는 중생대부터 신생대에 이르는 퇴적암류가 분포되어 있고 석탄, 철광, 석유등 연료광물자원이 주로 퇴적암층 내에 발달 부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또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물의 수원(水原:The Gathering of Waters)이라고 하는 지역 허드슨베이에서 오대호사이지역에서 흘러내리는 미시시피강은 늘 거대한 진흙(The Big Muddy)즉 황토물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근대사를 보면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프랑스가 켈트어로 '진흙'이란 뜻을 가진 부로몽왕가(House of Bourbon)의 앙리4세(Henry IV of France:재위:1589-1610)의 집권이 시작되는 1589년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비록 서양사에서 북아메리카대륙의 선점의 역사를 말하고 있을 망정 근원은 진흙으로 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처음 프랑스인으로서 미시시피강을 탐험한 사람이 루이 졸리에(Louis Jolliet:1645-1700)라 하는 것과 그와 함께 탐험에 나선 카톨릭선교사 자크 마르케트(Jacques Marquette:1637-1675)는 오대호에서 위스콘신 주(Wisconsin)와 일리노이 주(Illinois)를 통해 여행한 최초 서양인이라고 알려진다는 사실도 우리는 서양사의 빈약한 역사사실을 추리하게 하는 것이다.오늘날 동남아시아에 존재하는 국명 말레이시아어로 콸라(Kuala)는 해구(海口)란 뜻이고, 룸푸르(Lumpur)는 진흙이란 뜻에서도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푸르가 위치한 곳이 바다와 연결된 해구에 진흙이 많은 곳임을 알 수가 있는 것도 이와같은 역사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그리고 위스콘신(Wisconsin)의 어원에서 마이애미 일리노이스(Miami-Illinois)인디언 단어 메스콘싱(Meskonsing)즉 붉은의미, 붉은 사암, 물이 모이는 곳(where the waters gather), 붉은 돌 지역(red stone place), 위대한 바위(great rock)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지브웨이(Ojibwa)족 단어의 변종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지명이 지리적환경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단적인 예가 된다.때문에 위스콘신은 상징성이 붉다 할 수 있다.또한 백토(白土:White earth, terra alba)지역 역시 미국 미네소타주의 베커카운티(Becker County)의 화이트어스(White Earth)를 포함한 백토인디언보호지(White Earth Indian Reservation)가 있고 노스다코타주 마운트레일카운티(Mountrail County)에는 화이트어스(White earth)가 있으며 스로프카운티(Slope County)의 평원에 생성되는 고립된 외딴 언덕 1,069m의 화이트 뷰트(White Butte)가 솓아 있으며 퍼킨스카운티(Perkins County)에는 화이트힐(White Hill)이란 지명도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백색점토가 그것이다.또한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강으로 미네소타강(Minesota River)의 지류인 174km 길이의 블루어스강(Blue Earth River)은 다코타 인디언들에 의해 마카토 오사 와타파(Makato Osa Watapa)라고 불리었고 이것은 푸른 점토가 모여 흐르는 강(the river where blue earth is gathered)이라는 뜻으로서 이 강으로 모여드는 상류에는 푸른점토가 무한정 퇴적되어 있다는 이야기다.더군다나 오대호근방에서 그린색 토양까지 발견된다 하였는데 바로 약 24억 년 전에서 21억 년 전 휴로니안 빙기(Huronian Glaciation)에 퇴적된 것으로 캐나다 온타리오 인근 니피싱호(Lake Nipissing)화산시 용암(lava:熔岩)에서 그린색(green)이 분출되었다고 설명되는 귀한 자료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점토들은 옛부터 도자기를 만드는데 절대적으로 없어서 아니될 중요한 중요한 재료인 것이 분명하다.補脾. 此魚食泥, 故有補脾養胃之功. 作羹作蒸作膾皆佳[本草].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붕어는 진흙을 먹기 때문에 비를 보하고, 위(胃)의 기를 기르는 효과가 있다 하였으며 국을 끓여 먹거나 쪄서 먹거나 날로 회를 쳐서 먹어도 좋다 한 것이 보인다.즉 붕어는 이 진흙과 가까이하고 진흙을 먹고 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문제는 진흙이 있는 곳이 세계에 어디 한 두 군데인가 하는 물음이 있을 수가 있다. 하지만 현재의 오대호는 250만년전부터 1만년사이 플라이스토세(洪積世:Pleistocene)의 빙기 중 마지막 빙기 위스콘신빙기(Wisconsin glacial stage)에 형성된 일련의 호수들 중 마지막 단계의 호수라 하는 사실과 약 10억년 전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알려지며 오늘날의 오클라호마 지역에서 땅이 갈라지며 엄청난 화산 활동이 있었기때문에 그 과정에서 생겨난 고지대는 침식되고 마침내 침강하여 분지가 만들어졌고 그곳에 물이 채워져 슈피리어 호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대륙빙하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함에 의해서 그 지역의 지형을 변형시키고 거대한 계곡을 만들어 놓았다고 지질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이와같은 지질학적 변화가 미간호에도 상당히 밀려 퇴적암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때문에 독특한 퇴적암들이 형성했다는 사실을 추리할 수 있다. 이러한 형상들은 오대호의 저습지대에는 수생부식 부니(腐泥:sapropel)를 생성시켰을 것이며 붕어의 먹이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부식은 치환성 염기와 암모니아를 흡착하는 능력, 즉 염기치환용량(鹽基置換容量)이 크다는 것으로 이를 생태적으로도 뒤받침하고 있다. 4.발해와 자자분(紫瓷盆)이글에서 우리나라 기록에서도 보면 고려가 망한 후 조선인이 편찬했다고 하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영일현(迎日郡)에 마노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며, 정조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섭라(涉羅)에서 마노가 생산되었다 것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함길도(咸吉道)에 마노석, 강원도 삼척에서 마노가 생산되었다 한 사실, 그리고 연산군조에 경상도 경주에 화마노(火瑪瑙)와 백마노(火瑪瑙)가 생산되어 조공했다고 기록된 것은 마노가 당시 우리나라에 많이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마찬가지로 강원도 삼척과 경상도 울산군에 마노가 생상되었다는 것을 알려 조선왕조실록과 다르지가 않다.그런데 발해 영역에서도 이 마노(瑪瑙:agate)가 생산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한반도가 역사성에 의해 결정되는 지리적 환경에서 강한 의혹을 낳게 하는 것이다.전자에서 이야기 했지만 자자분이 생산될 수 있는 토양이 분명 오대호를 중심으로 서부와 남부에 널려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마노 역시 미네소타에서 생산되는 것이 쓰임새가 커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견주어 볼때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사실과는 현격하게 다른 지리적 환경에서 발해가 어디에 포진했을 것인가를 얼마든지 짐작이 가능한 이야기다.참고로 자자분(紫瓷盆)은 순수한 자줏빛색으로 5말(90.195ℓ)정도 들어가는 크기에 안팎이 투명하고 두께가 1촌(3cm)정도가 되어 마치 기러기 깃털을 드는 것처럼 가벼웠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얇디 얇은 자주빛의 사발이라는 짐작이 가능한 것이다.깃털처럼 가벼웠다고 하니 그러한 도공술이 얼마나 섬세했는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다.앞에서 위스콘신은 오지브웨이(Ojibwa)족 단어로 붉은 의미(紅, 赤石之地)와 붉은사암(砂岩)이 모여 있는 곳임을 알 수 있고 더군다나 미네소타주 블루어스강(Blue Earth River)은 상류에서 모여드는 푸른 점토가 만든 색깔이라 할 정도로 푸른점토가 풍부했음을 알 수가 있다.붉은 사암가루에 푸른점토를 섞으면 자줏빛이 나타날 것이 틀림없다.그러나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가 있었다고 하는 아시아동북지역에 이런 토양의 환경이 존재하는지 한반도 역사학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한 낱 일개 촌부가 이렇듯 역사사실을 밝히고 있음에도 어찌하여 내노라 하는 한반도 역사학자들은 이런 관찰력조차 없고 기존 식민지역사 늪에서 허우적 거리고만 있을까 짜증나는 이야기다.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 "에서 노스다코타주 리치랜드카운티의 와페턴(Wahpeton)까지 이어지는 북쪽 레드강(Red river:캐나다와 미국국경경계선지점)에서 흔히들 중국역사처럼 인식하고 있는 적벽(赤壁)을 찾을 수 있다 하였고 캐나다 민요 홍하의 골짜기(Red River Valley)의 무대가 위니펙 호수(Winnipeg Lake)란 사실에서 미네소타강으로 들어가는 상류지역임을 알 수 있었는데 여기가 곧 적벽(赤壁)을 연상케 한다는 사실까지 밝혀었다.동서양 역사가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오대호를 중심으로한 지역들이 모두 붉은 색의 지질이 지형형성을 만들고 있음을 알 수가 있으며 적철광(赤鐵鑛)이 발견되었다는 곳이다.이것은 적어도 발해가 이 도기, 자자분(紫瓷盆)를 제조하는데 토양적환경이 충분히 조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기러기 깃털을 드는 것처럼 가벼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감히 다른 종족들이 도전할 수 없는 도기의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으며 때문에 소위 중국 역사기록에 남겨져 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자자분(紫瓷盆)과 같은 도기(陶器)를 만드는 회령소(會寧燒)의 기원을 보면 아주 옛날 1500년 혹은 2000년 전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였으니 기원후부터 기원후(AC) 500년 사이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특히 함길도(咸吉道)일대의 땅은 팽해(澎海)땅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 중세기말 여진족이 점령하여 청(淸)나라와 연결되는 듯 하였지만 청나라는 근세기에 분열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보아 뉴잉글랜드 즉 생여진으로 풀었던 것이 바로 어제와 같다.이러한 역사사실에서 인종을 별도로 구분하여 따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언제 글쓴이가 말했지만 생여지는 새롭게 등장한 여진이며 숙여진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종족을 일컫는 것임을 설명한 바가 있다.이렇게 간단한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이란 뜻조차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기존 역사계가 어느정도 함몰해 있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는 것이다.결국 조선 함길도(咸吉道) 팽해(澎海)에 회령소(會寧燒)가 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본래 이곳은 고려(高麗)의 땅이었으며 속칭(俗稱) 오음회(吾音會)라 하였는데, 고려말 호언(胡言)으로는 알목하(斡木河)라 했던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에서 도기소(陶器所)가 두 개소가 있어 매우 우수한 도기가 산출 되었다는 기록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팽해(澎海)라고 하면 물 부딪히는 소리가 나거나 물이 튀는 파도가 치는 바다를 뜻하는 지명(地名)임을 알 때 지리적환경을 설명한 것이라면 적어도 이곳은 거대한 바다 북해(北海)와 맞닿는 곳에 해안, 연안의 지명으로 빙하가 녹아드는 과거 허드슨베이를 북해라고 했던 사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5.발해(渤海)에서 난 붕어바이킹은 발해영역에서 활동한 세력이다.[신중국자료]自汉代起就有東北的游牧民族的居住的紀錄,歷史上曾經為渤海國(当时称为湄沱湖)遼、金、元和清的領土清代時當地屬吉林將軍管轄地。兴凯湖在唐代称为湄沱湖,因湖形如“月琴”,故金代有“北琴海”之称,清代改为兴凯湖。"兴凯"是满语,意为"水从高处往低处流"之意한카호의 한어자료를 보게 되면 발해국(渤海國)당시에는 미타호(湄沱湖)라 하였고 당나라까지 호수형태가 월금"月琴”같다하여 이 이름이 이어졌고 금(金)나라때는 북금해“北琴海”라 칭했으며 청(淸)나라때는 만주어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흥개호(興凱湖)라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해동역사 제27권물산지(物産志) 2 어류(魚類) 붕어[鯽]○ 발해의 풍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미타호(湄沱湖)의 붕어이다. 《신당서(新唐書)》○ 조선의 붕어는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것도 있다. 《조선부 주》본 블로그 글 "붕어(鯽魚)로 본 삼한역사(1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3"에서 붕어의 특성과 붕어가 우리나라 역사에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 그리고 현 한반도에서 말하는 붕어의 생물학 분류체계를 전체적으로 돌아보고 결국 아시아 종(種)과 한반도 종(種)을 나눔에 있어 근원적으로 부자유스러웠던 불편한 사실들을 밝혀보았으며 무엇보다도 알고 싶어하던 재래종인 토산붕어에 대한 진실과 문제점을 밝혀 생물학적면으로 현 역사상황을 전체적으로 풀어보았다고 할 수 있다.사실 붕어를 밝혀보고자 했을 때 중심되던 욕심은 반드시 밝혀져야 할 발해(渤海)를 추적이었음을 이제사 고백한다.발해(渤海)가 과연 한반도 역사와 동아시아역사가 주장하는 현재 아시아대륙 동북삼성 북쪽에 자리하고 현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영역인가에 대한 의문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결국 고민 하다가 붕어생태와 환경과 발해가 결부되는 점을 중요시하고 이를 검토한 결과 확신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이어 2탄 연속의 붕어편을 시작하게 되었던 동기를 감히 언급하고 있다.발해를 찾으면서 지금까지 글쓴이가 하나하나의 모든 글들은 정확하게 연결되고 이를 뒤받침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그렇다면 지금까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풀어 본 결과는 명실공히 이제 하나 하나 전부 사실로 입증되기 시작하였으며 결실로 다가옴을 느낄 수가 있다.단언적으로 이야기 하면 발해가 있었던 곳의 붕어에 근거하고 그것이 근원이다 말할 수 있다.발해(渤海)는 시작, 시동, 시발을 뜻하는 것으로 물이나 바다가 시작하는 곳을 이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곧 수원지(水源地)를 생각할 수가 있다.우리나라 지명 수원(水源)역시 바로 이러한 자연이치의 지명이어야 맞는 것이다.전자에서 진흙 즉 부니(腐泥:Sapropels)이 발생되는 지질학적 원리와 현재 진흙 생성이 오래전부터 축적 될 수 있었던 곳을 정확하고 면밀하게 알아보았다.그리고 현재 북아메리카대륙의 오대호는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할 수가 있을 만큼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붕어가 왜 발해와 결부될 수밖에 없는가.해동역사 물산지에 붕어[鯽]편을 보면 24사(二十四史)가운데 하나인 신당서(新唐書)기록에 발해 영역인 미타호(湄沱湖)의 붕어가 귀하다고 한 사실에서 오늘날 아시아대륙 동북 연해주 내륙에 있는 흥개호(興凱湖)라고 하는 한카호는 이 미타호(湄沱湖)를 가르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그러나 현 동아시아 동북에 있는 한카호를 보면 지리학적으로 오대호처럼 수백만년 동안 빙하의 움직임이 없었던 곳이고 쇄설퇴적암(碎屑堆積巖)이 생성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그리고 전자의 발해가 자자분(紫瓷盆)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 도기재료인 다양한 색상의 점토를 토양환경적으로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점이다.이미 발해찾기를 염두에 두고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를 완성한 상태에서 볼 때 동북 9성(東北九城)에 들어가는 공험진(公嶮鎭)역시 한반도 함경북도 모양과 닯은 꼴인 애팔래치아산맥 북부고원 메인주(Maine) 어디쯤에서 찾아야 할 것임을 밝혔듯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발해의 위치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지점이라는 것을 얼마든지 추정이 가능하다.동북9성을 여진과의 강화(講和)에 따라 되돌려 주었다는 의미를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당시 정치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오늘날 바로 뉴잉글랜드(New England)생성된 이치와 거의 같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어차피 그들 서양인들은 남의 땅에 터전을 세운 것이 그들의 근원이다.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공험진을 알기 위한 두만강(豆滿江)의 위치를 메인 주(Maine)와 뉴브런즈윅(New Brunswick)사이 경계로 있는 세인트 진 강(Saint-Jean River)이라 했고 그 위 북쪽에서 동북(東北)쪽으로 흐르는 세인트로렌스강(Saint Lawrence River)을 소하강(蘇下江)이라 했던 것이 이러한 관점에서 파생된 것이다.이제 여기서 밝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1편에서 정리하지 못한 붕어의 근원지를 밝혀야 하는 일이며 그 근원지 또는 원산지는 바로 발해(渤海)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 동시에 밝히는 것이 된다. 지난 2백만년동안의 지질학적 기간 제4기(第四紀:Quaternary period)동안 형성된 물과 식물 그리고 동물과 미네날(Mineral)들이 혼합된 유기체 퇴적물이 호수나 늪에 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遺骸)가 진흙과 함께 물 밑에 쌓인 지층으로 남아 있는 것을 부니(腐泥:Sapropels)라 하는 것으로 지구 자원을 부분적으로 재생시킬 수 물질이라 하는 것이다.이 퇴적된 부니가 바로 진흙이라 하는 것으로 가장 조밀하게 형성되고 축적되어 있는 곳으로는 아시아와 유럽 온대기후존[temperate climate zones]으로 나타나고 대표적인 지역은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반도, 프랑스, 독일, 폴란드, 발트해,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이며 무엇보다도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와 미국의 오대호지역(Great Lakes Region)이라는 것을 위 영어자료에서 알 수가 있다.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에서 주장했듯이 발트해가 있을 곳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허드슨베이(Hudson Bay)라는 사실과 고대 노르드어(Old Norse)로 "간드빅(Gandvik)"라 하였는데 이를 한편으론 백해(白海:White sea)라 하였고 또는 위험한 바다라 하여 뱀 만(Bay of Serpents)이라 하였으며 형태적으로도 "바다의 입구" 또는 "내해(inlet of the sea)"로 묘사한 것과 일치한다고 하여 허드슨베이를 발트라 하였던 적이 있다.이에 확신을 더하는 것은 발트를 동해(東海)라고 칭하였던 언어군에서 네덜란드어(Oostzee), 노르웨이어(Østersjøen), 덴마크어(Østersøen), 독일어(Ostsee), 스웨덴어(Östersjön), 아이슬란드어와 페로어(Eystrasalt) 그리고 핀란드어까지의 이들 종족 또는 민족들은 근원적으로 허드슨 만 서쪽에 포진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때문에 그들 언어로 발트를 동해(東海)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그러나 이러한 어원은 오늘날 북유럽 국가들의 근원지를 의심케 하는 것이 분명하다.현 북유럽에서의 생존역사를 어찌 믿을 수 있을 것인가.북아메리카대륙 허드슨 베이는 그들에게 발트가 될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북유럽국가들은 모두가 발해에 소속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이것은 북유럽의 바이킹 역사까지도 의심케 하는 것으로서 바이킹의 활동지역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허드슨베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으며 더 나아가 현재 미국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바이킹 유물과 유적이 난데없이 허드슨베이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혈통적으로는 게르만족 노르드인(Norsemen)이고, 언어적으로는 노르드어(Old Norse)를 구사한 바이킹(Viking)은 9~11세기에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습격하고 약탈행동을 일삼아 식민지로 만들었던 세력이다.6.염주(鹽州)와 디트로이트의 도시 소금광산 [주요 소금광산과 북미에서 건조 소금 생산 현황]붕어의 원산지가 어딘지를 이제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붕어의 원산지는 자연스럽게 발해가 될 수밖에 없다.그곳은 다름아닌 오대호가 250만년전부터 1만년사이 플라이스토세(洪積世:Pleistocene)의 빙기 중 마지막 빙기 위스콘신빙기(Wisconsin glacial stage)에 형성된 일련의 호수들 중 마지막 단계의 호수에서 완전히 빙하권에 있었던 슈피리어호(Superior Lake)가 첫째이며 두번째는 미시간호(Michigan Lake)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동역사 지리고(地理考) 9 발해(渤海) 염주는 본디 발해의 용하군(龍河郡)이다. 옛 현은 4개로 해양현(海陽縣), 접해현(接海縣), 격천현(格川縣), 용하현(龍河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예(穢), 맥(貊)의 옛 지역을 동경(東京)으로 삼고는 부의 이름을 용원부(龍原府)라고 하였으며, 또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였는데,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를 관할하였다. ○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한 염주(鹽州)는 용하군(龍河郡)이라는 곳으로 발해 62주 중의 하나라고 알려진다. 발해는 그 지역을 나누어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설치하였다.○ 염주성(鹽州城)이 개주의 서북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염주는 개주에서의 거리가 140리로, 본디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용하군이라고도 한다목은시고 제24권 시(詩) 得西海按廉金震陽書。云送乾鹿。然鹽州鮒魚。又所欲者。因賦一首以寄。서해 안렴사(西海按廉使) 김진양(金震陽)의 서신을 얻었는데, 노루포[乾鹿]를 보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염주(鹽州)의 붕어[鮒魚] 또한 먹고 싶은 것이기에 인하여 한 수를 지어서 부치는 바이다. 위 해동역사에 보면 발해에 본디 용하군(龍河郡)이라고 하는 염주라는 지방이 있었다는 사실과 이를 동경이라 하였으며 또 용원부(龍原府)라 하였다.고려말 대학자이자 문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시집 목은시고(牧隱詩藁)에 염주(鹽州)의 붕어[鮒魚] 또한 먹고 싶은 것이기에 인하여 한 수를 지어 보낸다 한 기록에서 염주의 붕어 또한 맛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염주(鹽州)는 어딜 말하는 것일까?염주(鹽州)란 바로 소금도시이다.북아메리카대륙 미시간호 미시간주에는 소금도시 디트로이트(Detroit)가 있다.본 글 파트 제일 위 그림지도를 보면 오대호 주변에 고드리치(Goderich), 디트로이트(Detroit), 오지브웨이(Ojibway), 클리블랜드(Cleveland), 페어포트(Fairport), 햄프턴코너스(Hampton corners), 랜싱(Lansing)등 7개의 소금 암맥광산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리고 그 암맥은 표면 300m(1000 feet)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즉 도시 아래에 암맥이 널려 있다는 말이다.The Onondaga New York Salt Works (1654 - 1926)Salt Production in Syracuse, New York ("The Salt City")and the Hydrogeology of the Onondaga Creek Valley미국 소금 역사를 보면 1654년 뉴욕의 오넌다가족(Onondaga族)들이 염류천들로부터 끓인 소금물에 의해 소금을 처음 제조하였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주민들이 1755년에 웨스트버지니아의 흰돌이 있는 곳의 뜻을 가진 캐너와카운티(Kanawha County)에서 소금을 제조하였고 루이지애나, Michigan, 오하이오주, 펜실베니아,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 그리고 미주리에서 1790년과 1860년 사이에 소금을 용광로 끊여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1882년에 미시간주(Michigan) 세인트 체어(St. Clair)에서 처음 암염 광상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곳은 디트로이트시와 근접한 곳이다. [The Giant Salt City 1200ft Beneath Detroit]거대한 소금도시는 디트로이트 지하 365.76m에 있는 모습을 우리는 위 그림 디트로이트 암염갱(Detroit salt mine)이 떤 모습인지 알 수가 있다.디트로이트 도시 지하에 이 암염갱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다.약 4억년전, 소금 예금들의 대단한 팽창은 디트로이트시를 포함하여 미시간(Michigan)호수 아래에서 암맥이 생성된 것이다. 오랫동안 침전물들은 증발하여 수평으로 소금 침대들로서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을 소금의 지하 도시라고 하는 것이다.1914년까지, 암염갱은 매개월 8,000 톤의 암염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에서 제일 큰 암염 산지 중의 하나가 도시의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은 특이한 형상이다.옛날 바다였다가 육지가 된 곳의 경우 지하에 소금이 굳어 돌이 된 소금광산이 생성된다. 이를 캐거나 광산 안에 물을 집어넣어 녹인 소금물을 채취하여 정제하는 방법이 있고 암염 역시 전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심지어 디트로이트처럼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암염광도 있다.세계에서 가장 큰 소금광산 중 하나가 디트로이트시 지하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만약 발해가 오대호를 영역내에 두었다고 한다면 염주(鹽州)는 디트로이트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7.마무리위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근원지 분포지도 자료 Discover Life 의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유럽종, 유럽붕어라고 하는 학명 Carassius carassius, Linnaeus, 1758 의 분포지도가 보다시피 유럽대륙이 아니라 분명히 일리노이주(Illinois)에서 시카코 아리아(Chicago area)를 정확하게 가르키고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결과이다.이것은 유럽붕어의 근원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일리노이주에는 유럽이주민 독일인 즉 게르만인이 많이 거주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참붕어의 진실에서 보았듯이 한반도에서는 이제 재래붕어를 찾기엔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었다.즉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는 재래종이라고 하는 참붕어가 사라지고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대신 우리가 실망할 것도 없이 그렇게 찾고 싶어하던 발해(渤海)를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사실에서 전하는 붕어들을 만날 수 있는 큰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글쓴이는 이것을 재래종이라고 하고 싶다.붕어를 본 사실에서 적어도 발해(渤海)는 오대호(Great Lakes)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 동부에 연해주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해동역사 속집 제9권 지리고(地理考) 9, 발해(渤海)편을 보면[신당서]발해열전을 인용하길“동경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하였는바, 그 지역은 지금의 조선동쪽 경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뉴잉글랜드와 일치하는 것이다.물론 현재 동아시아 역사(신중국, 한반도, 열도)에 들어나고 있는 정례화된 서술들은 다분이 아시아대륙에서 동아시아국가 만들기와 열도에 일본만들기에 일환이라 볼 수 있어 대비조차 하기 싫지만 현재 발해를 오대호를 중심으로 본다 할 때 일본의 본질은 바로 뉴잉글랜드의 거주민이라는 사실을 대입하면 일본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이를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 "에서 뉴앨비언(New Albion)이라 주장했던 사실에서도 쉽게 알 수 있는 이야기로서 사실상 일본은 거주지가 없이 해적신분으로 떠돌이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종족으로서 현재까지 밝힌 바로는 서양인이라고 하는 해적들이 본래 거주한 곳은 남아메리카대륙 동부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물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시작된 본래 거주지는 아프리카 서해안이라 해야 맞다.솔직히 서양역사는 애초부터 동양역사만을 그대로 걷어내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곧 탐욕의 상징인 일본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지가 않다.때문에 영국역사와 일본역사는 근세기에 더욱 동질성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또한 발해의 연해주에 대해서 이미 2012.10.26에 올린 본 블로그 글 "연해주(沿海州)와 쌍성雙城)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1"에서 밝혔던 사실이지만 연해주(Maritimes)란 용어가 고유명사처럼 취급되는 바다의(of the sea)란 의미를 가진 마리팀즈(Maritimes)명칭 내에 바다와 접하고 있던 캐나다 동부 중 뉴브런즈윅(New Brunswick)주, 노바스코샤(Nova Scotia)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주가 고스란히 들어가 연합형태 영역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글쓴이를 한 번 놀라게 한바가 있다.이를 적용할 때 이 글을 적용한다면 발해영역과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동시에 알게 된다.그러나 현재 서양사가 이야기 하는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이곳은 서양인들이 들이닥치기전에 근 3000년동안 아메리카원주민이라고 알려진 미크맥족(Mi’kmaq)과 맬리시트족(Maliseet)의 영토였다고 하고 이 평화로운 곳을 방해한 세력이 1524년에 프랑스의 왕에 의하여 의뢰받고 항해한 이탈리아 탐험가 지오반니 베라자노(Giovanni Verrazano:1485–1528)에 의해 발견되어 그때부터 프랑스 이주민들이 정착했다고 알려지며 그곳의 지명을 풍요한 곳(a place of abundance)이란 의미인 아카디아(Arcadia)라 했다는 기원이 있으나 글쓴이는 이를 그대로 믿지 않는다.이것을 프랑스로 아카디(Acadie)라 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이 어언의 기원 역시 미크맥족(Mi’kmaq)의 언어라 알려지고 있다.실제로 서양인들의 역사는 뿌리가 없는 사상누각이라는 사실이다.그러나 이 아카디의 본래 의미는 대서양 해안전체를 나타나는 명칭이라는 설도 있어 삼한역사와 깊이 관계되는 명칭이 아닌가도 한다.문제는 프랑스인으로 알려지면서 역사와 그 구성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다.1604년 프랑스인들을 구성으로 아카디아(Acadia)에 들어와 점점 늘어나고 이들을 아카디안이라 하였는데 프랑스와 인디안전쟁 ( French and Indian War:1754-1763)에서 승리한 잉글랜드에 의해 이원적인 주권으로 있던 상황을 변화시키면서 수많은 아카디아[Acadia(French: Acadie)]주민들이 곳곳에서 체포되거나 살해되었고, 프랑스나 영국 또는 더 남쪽에 있는 식민지로 배에 태워져 추방되었다고 알려지며 그 이후 1763년부터 이 모든 지역이 잉글랜드에 의해 관리되었다고 근세사는 이야기하고 있다.한편으로는 대서양 해안 북쪽으로 옛날 그리스 명칭"Arcadia(Ἀρκαδία)"을 적용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 것은 근원을 말하는 것 같으며 이 명칭은 이상낙원인 유토피아(Utopia)의 뜻이 있다고도 하는데 문명에 손상되지 않는 자연속의 낙원임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어쨌던 지금까지 긴 밝힘의 길에서 보았다 시피 결코 발해는 발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바로 북유럽군을 그대로 역사속에 간직하는 역사로서 통째로 증발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때문에 발해는 아마도 근세기 서양인에 의해 철저하게 역사가 조작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왜냐하면 그들의 또 하나의 역사, 바이킹 역사까지 발해가 가지고 있을 확율이 높기 때문이다.바이킹은 9세기에서 11세기에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과 같이 발해역시 698년부터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존속하며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라고 알려진다.시기적으로 동일한 역사장소라면 중복되는 역사이다.상당히 진척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지속적으로 다시 찾을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바이킹" rel="tag" target="_blank">바이킹</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여와(女媧)" rel="tag" target="_blank">여와(女媧)</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붕어(鯽魚:carassin carrushens)" rel="tag" target="_blank">붕어(鯽魚:carassin carrushen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발해(渤海)" rel="tag" target="_blank">발해(渤海)</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여호와[Jehovah]" rel="tag" target="_blank">여호와[Jehovah]</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자자분(紫瓷盆)" rel="tag" target="_blank">자자분(紫瓷盆)</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염주(鹽州)" rel="tag" target="_blank">염주(鹽州)</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디트로이트의 도시 소금광산" rel="tag" target="_blank">디트로이트의 도시 소금광산</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백토(白土)" rel="tag" target="_blank">백토(白土)</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일본도(日本道)" rel="tag" target="_blank">일본도(日本道)</a>

전어(箭魚:Gizzard shad)로 본 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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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어(箭魚:Gizzard shad)로 본 충청도글쓴이:한부울1.들어가면서2.전어의 사서 기록3.생물학적 분석[A]조선전어속(鰶屬:Clupanodon)[B]무늬전어속(斑鰶屬:Konosirus)[C]참전어속(真鰶屬:Dorosoma)4.충청도(忠淸道)참 의미5.나가면서1.들어가면서식민지사관은 우리나라 한반도 사람에게 문신과 같아 쉽사리 지워지지도 또한 지워질 수 없는 것이다.오늘날 이토록 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구성원 모두가 이런 추악한 식민지사관에 빠져 모든 우리의 유구한 전통적 역사정체성을 잃어버린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아니 우리 스스로가 부주의에 의해 역사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작부터 알 수 없도록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말살되었다는 표현이 맞다.바른 역사보다 거짓역사를 알게되면서 진실과 바른 길이 무엇인지 조차도 구분할 수 없는 사회, 사술과 반칙이 우선하는 사회, 불신과 배반이 판치는 사회, 정의와 이치를 무시하는 사회, 근본을 부정하려는 사회, 깨끗한 마음보다 풍족한 물질이 우선되는 사회, 지존과 자랑보다는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에 의한 노예근성이 팽배하는 사회,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은 식민사관에 의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역사말살세력들은 이러한 결과를 노렸고결국 흡족한 결과물을 노획한 것이다.19세기 초엽부터 불손한 서양세력들이 우리역사 중심부로 들이닥치면서 장기적으로 포석을 깔고 철저한 기획과 관리에 의해 우리나라 역사를 이처럼 초라하고 보잘 것 없도록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본 블로그에서 확인된 사실이며 역설적으로 서세들의 이러한 행위가 모여 그들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그들의 우월성이 보장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근대사의 민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들의 전통적인 신분은 14세기부터 시작된 노략질 행위가 점철되고 살인과 강탈의 해적신분이 그들에게 존재했으며 동시에 탈취한 물질을 팔아 이문을 챙기는 장사아치로서의 비주류적 비겁함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늘 상 벼락출세를 노리고 주류가 되기 위해 갖은 음모와 사술을 부렸으며 투기꾼같은 범죄도 마다하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가 있다.때문에 그들의 이러한 신분을 감추기 위해 그들만의 종교가 필요했고 오늘날 특정종교이며 더하여 선교사란 직책은 이런 비주류적인 신분을 감추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 틀림없다.19세기때 한반도 역사책에는 서양세력들이 특정종교를 앞세우고 선교사라 하면서 개방(開放)을 이야기 하였으며 계몽(啓蒙)을 주장했다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개방과 계몽이 무엇인가.개방(開放)은 도적에게 문열어주면 즉시 빼앗긴다는 의미가 있으며 계몽(啓蒙)은 스스로 우월주의 자만에 빠져 기존 역사의 일말의 존경심도 없이 내부로부터 체제를 흔들고자 한 것이다.그러나 저러나 속셈은 그들의 역사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당시 조선은 어마어마한 자원왕국으로서 문을 열면 그들이 나서 독점적으로 뺏다싶이 할 것이 천지였고 이것을 가공하거나 재생산하여 다시 되팔아 이문을 남기며 이러한 이문은 또 다시 거대한 자본으로 축적되어 그 축적된 자본으로 다시 더 큰 자원을 취득하고 종국에는 체제전체를 지배하겠다는 불온한 심사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어렵지 앟게 예측이 가능하다.어리석고 부패한 조선관리들은 순수하게만 이를 받아들였을 것이고 오늘날 처럼 부패한 관리들은 무사안일주의, 복지부동(伏地不動) 안일한 자세로 개방이나 개몽에 동조하여 그들과 함께 더불어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오늘날 삐뚤어진 관리들의 행태적인 것을 볼 때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한 이야기다.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조선말 우리나라의 물질자원은 얼마나 충족했을까.아마도 대단했을 것이다.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대단하였기에 그들이 극복하려고 애를 썼을까.아시다시피 세계삼한역사가 아닌가.그들이 말한 것처럼 미국 출신 목사이며 동양학자인 그리피스는 꼬레아,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라 하였고 1886년 미국인 외교관 로웰은 조선: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A Sketch of Korea)라 하였던 것처럼 그들에게 도대체가 미움을 살 아무런 건덕지가 없음에도 왜 그토록 악착같이 개방이나 개몽이니 하면서 그들이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상식적으로 한반도에 무슨 특별한 자원이 있었길래 이토록 그들은 집착했겠는가.그럼에도 뻔질나게 한반도에 들락거렸다는 것은 자원빈민국의 한반도가 아니라 자원이 말할 수 없도록 풍요한 지역에서 역사터전을 잡고 전통적으로 이어온 나라와 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언제쯤 우리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인지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본 블로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역사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이라고 생각해보자.왜 서양인들이 19세기초엽부터 그토록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쉽세 알 수가 있다.때문에 그 어렵던 문제가 고스란히 죄다 술술 풀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유태인(猶太人)이 AD 135년에 반란일으켰다가 패망하여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시기로부터 근 2000년 가까이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2차세계대전후 서세의 대표격인 영국의 시온주의(Zionism)옹호정책에 힘입어 마침내 1948년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독립하게 됨으로서 비로소 이스라엘국가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한반도 역사와는 철저하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한쪽은 서세의 철저한 도움으로 새로운 나라 건립할 수 있었고 또 다른 한쪽인 존재하던 역사마저 다 없애버리고 한지인 한반도에 조그마하게 축소하여 가두어버린 것이다.그렇다,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은 근세기까지 나라도 없는 신세에 있다가 근동(近東), 중동(中東)이라고 하는 유럽사의 모태지역을 만들고 그곳 중심지역에 자리를 틀었으니 명실공히 서세의 상징이라 할 수밖에 없으며 핵심적인 특정종교의 뿌리로서 튼튼하게 안착시켰다고 할 수밖에 없다.대신 극동(極東)이라 하면서 오리엔탈이라 하였고 자원도 없고 한지 같은 한반도에 유럽전체의 역사를 대칭할 수 있는 신라를 만들고 아메리카대륙전체를 가름할 수 있는 고려를 만들며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조선까지 더 하여 삼한이란 역사를 왜소하게 축소시켜 만들었으니 이것이 서양인들이 우리에게 준 역사선물이다.이러한 역사고 공평할리가 없다.왜 이런 대칭적인 역사가 서세에게 필요했을까.분명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볼 때 코리아(COREA:COREE)란 이름자체만 생각해보면 세계 어느 나라 민족도 가질 수 없는 인류사의 근원의 역사를 가졌고 때문에 최소한 한반도 역사가 생성되기 전까지 우리 삼한역사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높은 역사긍지와 자랑이 우리 동양얼굴의 한국인 뿐만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하지만 그 자취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오늘날 한반도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러한 자존과 긍지의 역사를 꿈엔들 알리가 없다.때문에 잘못 알려진 역사는 우리 한반도 사람들에게 멍에이고 덤과 같은 것이다.무엇인가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다.근원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당장 서양인 언어라고 하는 틀에서 COREA, COREE 가 생성된 어원의 역사를 한번 보자.찾아보니 어원은 역시“CORE”이다.이것을 굳이 한문 음으로 나타내면 고리(高離)와 고려(高麗)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본 블로그 글 "충격적인 동방역사(東方歷史)에 들어가면서http://blog.daum.net/han0114/17050378"에서 고구려(高句麗)시기 때 북프랑스지방에 고로(高盧)가 태동했다는 사실은 곧 골(Gaul, Gol)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코리아는 라틴어(語), 그리스어(語)를 모두 보아도 “CORE”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코레는 본 블로그 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에서 설명하길 고대프랑스어로 마음(cuer)즉 "heart"라 한 사실과 라틴어(cor)로는 심장, 영혼으로 나타난 것이며 또는 육체(body)로 해석되었다는 사실을 말했고 현재 영영사전에 나타나는 “CORE”의 어원에서 보면 라틴어로 cor(heart, body)의 '마음'이고 '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의 몸'과 '인체'를 말하고 결국 '주검'까지 상징하는 것으로 '영혼'을 포함한 인류 전체를 온전하게 그대로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것보다 중요한 단어가 세상에 있겠는가.우리나라 한반도인들은 어쨌거나 이 "COREA" 란 명칭만 보존하여도 서양인들은 무언속에 주눅이 들 것이 틀림없다.코레(CORE)는 고대그리스 기원전 6세기후반에서 기원전 5세기 초라고 추측되는 시기에 처녀 조각상(像)을 말하고 있다.그대로 인정하더라도 처녀, 총각이 가지고 의미가 있다.희망이고 미래이며 젊음이고 인간이 가장 신성한 꽃을 피울 시기로서 마치 CORE 의 어원이 그렇다.즉 인간이 가장 활력을 가질 수 있는 시기의 역사로부터 생성된 것이다.그래서 이것을 진정한 인간의 힘이라 하지 않겠는가 한다.시대적으로 볼 때 서양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헬레니즘시대(Hellenistic period :BC323- BC146가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그리스 당시시대는 인류사의 부흥기였던 것이 틀림없다.또한 그리스(Greece)를 동양역사로 대입하면 고구려(高句麗)라 할 수 있는데 본 블로그 글 "코라이(korai)는 그리스(Greece)에 어떤 의미로 존재했을까?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3"에서 밝혔던 것으로 현재까지 그리스(Greece) 도시에서 존재하고 있는 코라이(korai)라는 도로명(道路名)은 곧 유럽인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의 역사성과 같다고 주장한 사실이 있다.때문에 유럽인들은 코라이 또는 코리아란 이름을 지속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근원은 굳이 한나라의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포괄적 의미에서 바라 볼 수밖에 없던 것으로 연합, 연방형태의 국가상징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때문에 그리스와 함께 코리아라는 명칭에서 유럽인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족쇄와 같은 것임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그렇다, 코레, 코리아는 곧 유럽과 같은 것이다.전자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미국인 역사가인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는 옛 역사 고려(高麗)를 유나이티드 코리아(United Corea) 혹은 코라이(korai)라 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눈치챌 수 있는 이야기며 고려연합의 또 다른 명칭은 코라이(korai)였음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또한 한가지 예를 더 들면 동양사상이라고 하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서 볼 때 중앙(中央)을 토(土)라고 하여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바로 중심(中心), 핵(核)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곧 코레(core)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키고 있다. 세계중심이 되던 땅(土:land)의 상징이 곧 고려(高麗)라는 사실에서 의심할 수가 없다.고려는 한반도 영역세 쳐박혀 있던 조그만 나라를 말하거나, 보잘 것 없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일반적으로 유럽에서는 후국을 작은 나라라고 한다.이런 식의 수많은 크고 작은 후국(侯國)을 포함한 거대한 연합(United)이라 할 수 있다.신중국인들에게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발음에서 가우리高丽[Gāolí]가 있다.가우리(Caule, Cauly)는 신중국(新中國)사람들이 고려(高麗)를 호칭한 것이 틀림없다.신채호(申采浩:1880-1936)선생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천하의 가운데 중심’, 가우리(Caule)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은 바로 core 에서 변형된 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때문에 이 모든 것에서 이렇듯 일치하는 것은 코리아(COREA)가 그냥 한반도에 쳐박혀 식민지역사만을 껴안고 트라우마를 겪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명칭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이 명칭에는 크나큰 수난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서양세력들이 한창 설칠시기 1878년 5월에 서양나팔수 또한 황색언론이라고 하던 뉴욕선대이메거진(Sunday Magazine)에 의해 마지막으로 지칭할 때까지 동서양인들이 하나가 되어 끊임없이 호칭하던 칭호였음도 알 수가 있다.아마도 이때까지 코리아란 명칭아래 서양인들도 하부 구성원으로 존재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한 이야기다.이후 “COREA”는 서양인들에 의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백인우월주의자인 미국 토머스윌슨(Thomas Woodrow Wilson,1856-1924,재임:1913-1921)대통령 임기때 대한제국(朝鮮:COREA)의 자결권을 무시하고 일제의 손을 들어 준 장본인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때부터 알파벳 “C” 가 “K”둔갑하여 신문지상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축소된 "KOREA" 가 서양세력에 의해 본격적으로 생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무엇때문에 본래 COREA 혹은 KORAI 가 아니라 KOREA 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을까.물론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서양인들이 그렇게 호칭했다는 것이 오늘날 굳어진 것이니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C”는 하나의 체제(전 세계인)로서의 거대한 역사 가치가 스펠링에 존재한다.하지만 “K”는 식민지역사로 오그라들어 있으며 서양동양이 아니라 동양 한반도용으로 맞춘 스펠링이 존재하니 조그라든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언제가는 거대한 역사의 상징성인 C 를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C 가 가지고 있는 CORE 의 역사는 세계삼한역사가 자랑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2.전어의 사서 기록전어는 연근해에서 출어되는 청어과(靑魚科:Clupeidae)에 속하는 바닷물고기이다.옛 문헌에는 '화살 전'자를 사용해서 전어(箭魚)로도 표기하였다. 어감만 보면 화살처럼 빠른 물고기임을 알 수가 있다.그리고 이 전어는 아주 작은 물고기를 말하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전어소소어(箭魚小小魚)라 하였다. 또한 전어가 상당히 풍부했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정조 17년(1793)의 기사를 보면 같은 청어과 물고기 소어(蘇魚)즉 밴댕이 대신 생전어(生錢魚)를 잡아 대신 임금에게 봉진(奉進)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밴댕이 보다 전어가 당시 풍부하게 잡혀 흔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이런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소어젓보다 전어젓이 더 많이 생산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다.한국향토문화사전에 보면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큰 놈은 한 자(약 30㎝)정도로 몸이 높고 좁으며 검푸르고 기름이 많고 달콤하다고 하였으며 또한 조선 후기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전어는 기름이 많고 맛이 좋아 서울에서 상인들이 파는데 귀족과 천민이 모두 좋아하였으며 사는 사람들이 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어(錢魚)라고 하였다”라는 기록들이 나타난다. 전어는 예로부터 “음기를 보충하고 기를 북돋우며 해독하는 효능이 있어 음이 부족하여 내열이 생기거나 식은땀에 열이 나는 증상, 잘 낫지 않는 부스럼 등을 치료한다”라는 설명이 있고 전어는 맛과 영양이 풍부해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 하여 ‘가을 전어 머리엔 깨가 서 말’,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가던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고 정리된다.형태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전어의 몸길이는 15~30㎝라 하고 눈 주위의 표면을 덮고 있는 지방질의 눈까풀이 있지만, 동공에는 홈이 있어 노출되어 있고 입은 비스듬히 경사지며 위턱의 뒤끝은 눈의 앞 가장자리를 지나며 아가미뚜껑을 이룬 뼈, 새개골(鰓蓋骨)의 가장자리는 완만한 형태이고 등지느러미는 몸 중앙에 있으며 몸의 바닥이 되는 부분 기저(基底)의 길이가 짧고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이룬 연한 뼈, 연조(軟條)가 매우 길게 연장되어 꼬리지느러미 근처까지 뻗어 있다.가슴지느러미는 배 쪽에 치우쳐 있고, 배지느러미는 등지느러미 기저의 중앙보다 아래에 있다 하였으며 또한 몸은 비교적 큰 둥근 비늘로 덮여 있으나 탈락되기 쉽고, 머리에는 비늘이 없으며 주둥이 앞부분에는 2쌍의 콧구멍이 있고 경계 지점에는 얇은 막이 있다고 하였다.이것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참전어속(Dorosoma)의 모습과 비슷하다.참전어라고 하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생소하다 할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참전어속(Dorosoma)이 존재한다.일성록에 정조15년 신해(1791,건륭 56)기록에 수원(水原)의 유생과 무사의 응제인(應製人)에 대해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는 제목에서 차상이(次上二)를 맞은 유학 신희조(申熙朝), 차상삼(次上三)을 맞은 생원 권지성(權之聖), 차상을 맞은 유학 신백현(申百顯)ㆍ박주양(朴周陽)ㆍ심의진(沈毅鎭)ㆍ윤성렬(尹聲烈)ㆍ김주진(金胄鎭)ㆍ홍낙영(洪樂韺)ㆍ심형진(沈逈鎭)에게는 각각 민어염(民魚:鰵魚醢) 1미, 전어염(箭魚醢) 2미, 소어염(蘇魚醢) 2급씩을 시상하였다 했다는 기록에서 전자에서 주지한 것처럼 전어를 젓(醢)으로 만들어 임금이 유생과 무사에게 선물도 했음을 알 수가 있다.전어내장으로 담근 젓은 전어속젓이라고 한다. 내장 가운데 모래주머니 모양의 위(胃)만을 모아 담은 젓은 전어밤젓 또는 돔배젓이라 하는데, 매우 비싸게 팔렸다고 알려진다. 또한 전어를 사서에 보면 희귀하게 한문 단맛의 전어(餞魚)라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기름이 많고 달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다. 강릉에서는 새갈치, 전라도에서는 되미, 뒤애미, 엽삭, 경상도에서는 전애라고 불리는 것으로 크기에 따라 큰 것은 대전어, 중간 크기의 것은 ‘엿사리’라고 하며, 강원도에서는 작은 것을 ‘전어사리’라 부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가을 전어 머리엔 깨가 서 말’,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가던 며느리도 돌아온다’라는 것은 9월은 전어가 뼈가 부드러워지면서 기름이 많아진다는 사실도 알 수 있어 맛이 그 만쯤에 있다는 것은 일부러 하는 괜한 이야기가 아니다.보통 수심 30m 이내의 연안에 주로 서식하는 것으로 6∼9월에는 만(灣) 밖으로 나갔다가 가을이면 다시 만(灣) 안으로 들어오는 시기와 일치한다.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는 이 전어(錢魚)가 유독 충청도(忠淸道), 공주목(公州牧) 서천군(舒川郡), 비인현(庇仁縣)과 홍주목(洪州牧) 태안군(泰安郡), 해미현(海美縣), 결성현(結城縣)에서 토산으로 서식한 것으로 나타난다.승정원일기 인조 26년 무자(1648, 순치5) 어제 봉입한, 경상도에서 3월에 올리는 제철 물산은 세자궁에 진상한 말린 전어(錢魚) 40마리, 소금을 뿌린 생복(生鰒) 4두(斗)라고 선장(膳狀)에 적혀 있고, 단단히 봉하여 표지를 붙인 흔적이 뚜렷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토산경기(京畿)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안산군(安山郡)충청도(忠淸道) 홍주목(洪州牧), 서천군(舒川郡), 서산군(瑞山郡), 태안군(泰安郡), 면천군(沔川郡), 비인현(庇仁縣), 남포현(藍浦縣), 결성현(結城縣), 보령현(保寧縣)경상도(慶尙道) 울산군(蔚山郡), 동래현(東萊縣), 영일현(迎日縣), 기장현(機張縣)전라도(全羅道) 옥구현(沃溝縣)함경도(咸鏡道) 정평도호부(定平都護府)위 사서들에서 전어가 토산으로 서식한 지역을 찾아 본 것인데 조선초기 세종지리지에는 충청도(忠淸道)만 표시하였다.그런데 한반도 충청도는 분명 서해와 맞닿어 있으면서도 내륙이며 바다로 따진다면 지형적으로 한정되어 있다.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어떻게 전어가 서해안 전체이면 몰라도 충청도지역에만 유독 전어가 토산으로 어획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또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자료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충청도·경상도·전라도라 하여 서해, 남해, 동해를 말하고 있는 듯하고 함경도에서도 전어가 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도 한반도 지형으로 따진다면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를 편찬 할 시기 보다 영토가 늘어나는 형태를 생각해볼 수 있고 점차 전어가 어획되는 상황을 기록으로 점차 확대되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영조 때에 편찬된 읍지들을 보면 황해도를 제외한 전 도에서 생산되고 있다고 기록된다.왜 한반도 황해도에는 전어가 잡히지 않았을까.궁금해지는 것이 사실이다.3.생물학적 분석전어(gizzard shad)는 특이하게 영어 대표별명으로서 모래주머니청어(靑魚)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특징적으로 아가미 뚜껑 뒤에 큰 검은 반점이 있으며 등 쪽 비늘에는 검은 점이 있어 가는 세로줄 무늬처럼 보이며 배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모(돌기)비늘(綾鱗:keeled scale)이 발달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모비늘은 꼬리부근에 수술자국처럼 생긴 딱딱한 뼈를 말한다.모래주머니청어(靑魚)라는 별칭은 위(胃)가 새의 모래주머니를 닮았다 하여 모래주머니청어라 했으며 전자 사서들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이 모래주머니로 담은 젓갈 전어 밤 젓이 유명하게 알려진다.그리고 등지느러미의 실같이 늘어져 있는 연조(軟條)이다. 본격적으로 분류체계를 보면 동물계(动物界:Animalia), 척삭동물문(脊索動物門:chordata), 조기어강(條鰭魚綱:Actinopterygii), 청어목(靑魚目:Clupeiformes), 그리고 청어아목(靑魚亞目:Clupeoidei)에서, 청어과(靑魚科:Clupeidae)로 나누고 청어과(鲱科)아래에 총 64개속(個屬)으로 분류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그러나 청어과에는 6개의 별도 아과(亞科)로 나누는데 눈퉁멸아과(Dussumieriinae:1963), 청어아과(Clupeinae:1817), 알로사아과(Alosinae), Pellonulinae아과, 도로소마아과(Dorosomatinae), 그외 분류 불확실(incertae sedis)한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분류가 불확실한 이 종에는 준치(Ilisha elongata)와 밴댕이(Sardinella zunasi), 그리고 정어리(Sardinops melanostictus)가 포함된다.이 아과(亞科)중에 우리가 현재 알고 싶어 하는 전어는 바로 도로소마아과(Dorosomatinae:1861)에 모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청어과(鲱科)下分64個屬本科魚類為小到中型銀色魚。各鰭皆無硬棘。背鰭單一而小,其後沒有脂鰭。體臘腸形,切面卵圓,且腹緣鈍圓,無稜鱗;或體高而短,強度側扁。腹緣銳利,具稜鱗;或體長橢圓,側扁;腹緣銳利或鈍圓,通常有稜鱗,有時且有銳棘。鱗片完整易脫落。大部分魚種沒有側線,若有且細小。科學分類界: 动物界 Animalia門: 脊索动物门 Chordata綱: 辐鳍鱼纲 Actinopterygii目: 鲱形目 Clupeiformes亞目: 鯡亞目 Clupeoidei科: 鲱科 Clupeidae G. Cuvier, 1817장 레오폴 니콜라 프레데리크 퀴비에(Jean Léopold Nicolas Frédéric Cuvier:1769-1832)프랑스의 동물학자이자 정치가이다.[1]도로소마아과(Dorosomatinae) (A)조선전어속(鰶屬:Clupanodon)Lacépède1803a)조선전어(盾齒鰶:Clupanodon thrissa Linnaeus,1758)又稱꽃전어(花鰶)(B)무늬전어속(斑鰶屬:Konosirus)D. S. Jordan & Snyder,1900a)둥지무늬전어(窩斑鰶:Konosirus punctatus Temminck & Schlegel, 1846)又稱무늬전어(斑鰶)(C)참전어속(真鰶屬:Dorosoma)Rafinesque,1820a)멕시코참전어(墨西哥真鰶:Dorosoma anale)Meek, 1904 (Mexican river gizzard shad)b)아메리카참전어(美洲真鰶:Dorosoma cepedianum)Lesueur, 1818 (American gizzard shad)c)니카라과참전어(尼加拉瓜真鰶:Dorosoma chavesi):又稱蔡氏真鰶。Meek,1907(Nicaragua gizzard shad)d)날가지참전어(佩坦真鰶:Dorosoma petenense)Günther, 1867 (Threadfin shad)e)태평양참전어(太平洋真鰶:Dorosoma smithi):又稱史氏真鰶。C. L. Hubbs & R. R. Miller, 1941 (Pacific gizzard shad)[A]조선전어속(鰶屬:Clupanodon Lacépède1803)이다.조선전어속(朝鮮錢魚)本魚分布西北太平洋區,包括中國、越南沿海海域。本魚體呈銀白色,背部顏色較深,體側無任何細小斑點及斑塊。鱗片大型而薄,易於脫落。背鰭無硬棘,軟條17至21枚,最後3枚軟條延長呈細絲狀,長度較短,只達臀鰭後緣上方。臀鰭有軟條20至25枚。體長可達26公分。科學分類界: 动物界 Animalia門: 脊索动物门 Chordata綱: 辐鳍鱼纲 Actinopterygii目: 鲱形目 Clupeiformes亞目: 鯡亞目 Clupeoidei科: 鲱科 Clupeidae屬: 鰶屬 Clupanodon種: 盾齒鰶 C. thrissa二名法Clupanodon thrissa Linnaeus,1758 異名첫 번째로 청어아과(Clupeinae)에서 도로소마아과(Dorosomatinae)로 나누는데서 조선전어(盾齒鰶:Clupanodon thrissa Linnaeus,1758)란 명칭의 종(種)이 있다.이 종명은 우리에게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이 속명은 1803년에 프랑스동물학자이며 프리메이슨 회원인 베르나르 제르맹 라세페드(Bernard Germain de Lacépède:1756-1825)에 의해 명명되었고 이 사람은 프랑스혁명 가담자였으며 후 의회에 법률을 제정하는 의원을 맡았지만 테러 정치시대때 발생한 9월 학살(September Massacres:1792.9.2-6)이 자행되어 파리를 떠났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9월학살은 물론 코리안들의 학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황적으로 틀림없이 코리안들의 희생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본 블로그 글 "코리언(corean)학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0"에서 프란시스코 고야 (rancisco Goya:1746-1828)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이 그림은 1808년 5월 3일의 학살(The Third of May)이란 제목의 코리안들을 학살하는 장면이라 하였고 당시 나폴레옹은 하나의 체제에 반기를 든 반란자로서 스페인이라고 하는 고려(高麗)를 침략한 것으로서 학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코리아영역에 있는"코리아안"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이와같다면 프랑스혁명의 배경도 그렇지만 9월학살의 대상은 코리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1798년에 물고기에 대한 "Histoire naturelle des poissons"의 제 1권을 간행하고, 1803년에 제 5권을 간행하였으며 1804년에 고래지(Histoire naturelle des cétacées)을 간행하였다.이것의 신중국자료의 형태적인 설명을 보면 체색은 은백색이며 배 쪽이 얼굴과 비교할 때 진하고 측면에는 대단히 가늘고 작은 반점과 피부나 점막 표면에 생긴 얼룩점이 있고 비늘은 대형으로서 얇고 쉽게 떨어져 나가며 등지느러미의 등뼈가 없고 지느러미를 이룬 연조는 17~21매라고 하였으며 맨 마지막에 3매의 연조가 늘어져 가르다란 실상태가 되며 이 길이는 짧고 다만 뒷지느러미 가장자리가 위에 있다 하였고 뒷지느러미에 연조는 20~25매이며 몸길이는 26cm로 정리되고 있다.하지만 아래 조선전어의 그림을 보면 측명 큰 반점이 4개가 같은 간격거리에 가로로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그 아래 그림은 실제 조선전어인 것 같은데 측명 반점이 8개 가량 같은 간격으로 늘어 있음도 알 수가 있다.문제는 분포지이다.사전에 보면 조선전어(朝鮮錢魚)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설명을 보면 전어과의 물고기라 하였지만 청어과(鲱科), 청어아과(Clupeinae)의 도로소마아과(Dorosomatinae)로 나타나는 것은 같다. 설명은 전어와 비슷하며 양쪽 위턱이 완만한 둥근형이라 하였으며 분포지가 한국의 서남연해,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등지에 분포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위 분포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조선전어임에도 분포지가 한반도 서해와는 멀리 떨어진 위치 중국남지나해란 사실이다.그렇다면 본래부터 조선전어라 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을 현재 신중국대륙을 삼한이라 하면서 대륙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좋은 자료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조선전어속(鰶屬:Clupanodon)의 조선전어“Clupanodon thrissa”는 또한 별칭으로 중국전어(Chinese gizzard shad)라 하였으며 또한 일부에서는 무늬전어속(斑鰶屬:Konosirus)에서 학명 Konosurus thrissa 종(種)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있는데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Etymology: Clupanodon: Latin, clupea = sardine, derived from Clupeus = shield; doubtless a reference to the scales covering the body of the fish물론 속명(屬名) 크루파노돈(Clupanodon)의 어원을 보면 위 라틴어 크루페아“clupea”라 한 것에서 "a kind of very small river-fish"라 한 것은 매우 작은 강(江)물고기로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상당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왜 리버피쉬라 하였을까.분명한 것은 전어는 강(江)물고기가 아니라 바닷물고기다.위 지도에도 나타나지만 주 분포지가 아시아남해안, 남지나해이며 바다물고기가 틀림없다.그리고 종명(種名)“thrissa”란 단어는 불확실성이 많아 살필 수가 없다.그러나 원천적으로 조선전어라고 알려지는 이 속명을 프랑스인에 의해 명명되었다는 사실이다.왜 조선전어 또는 중국전어라 하면서 1803년 프랑스혁명시기에 프랑스생물학자가 이 학명을 명명할 수밖에 없었을까.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프랑스생물학자가 거주한 곳이며 그곳은 현재 유럽프랑스가 아니라 과거 하나의 체제가 존재한 북아메리카대륙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프랑스혁명은 자코뱅파(Jacobins)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자코뱅파는 주로 프리메이슨(Freemason)이란 중세의 숙련 석공(Mason)길드(guild)에서 파생된 결사체로서 일루미나티(光明會:Illuminati)의 중심세력이다.1786년에 미라보 후작(侯爵:Marquis de Mirabeau:1715-1789)은 자코뱅 파리 대학에 프리메이슨 종단(宗團)을 세우게 되면서 프랑스혁명의 전초기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미라보 후작은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영지(領地)를 받은 귀족도 후작이라고 하지만 본 블로그 글 "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6"에서 지적하길 후국(侯國)이라 하는 것은 주군(主君)을 후(侯)라 칭(稱)하는 유럽, 즉 구라파의 작은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였다.즉 미라보 후작(侯爵)은 작은 서양인의 제후국을 다스리는 왕이었다는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프리메이슨이 장악한 정치 클럽 자코뱅(Jacobins, Jacobin Club)은 프랑스 혁명기에 급진세력의 정치 분파로서 1793.6월부터 1794.7월까지 혁명정부를 장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좀 더 프랑스대혁명에 들어가 보면 이들은 소위 제3신분의 세력이다.당시 인구의 98%를 차지했던 제3신분 즉 도시민과 농민 등 평민계층이 주도한 시민혁명이라고 하지만 프리메이슨(Freemason)유대인상인들이 주도한 것으로 보아야 함이 옳다는 것은 본 블로그 글"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에서 이야기 한 사실이지만 신진자본주인 신흥계급 부르주아(有産者:bourgeoisie)세력은 당시 전 인구의 8% 정도였음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이 8%를 빼고나면 98%가 아니라 90%가 농민과 평민이 될 수밖에 없다.이것은 기존 역사 기득권의 왕족과 귀족들을 합해 2%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인데 피지배계급인 농민과 평민은 이러한 저러나 왕족과 귀족의 자리 싸움에 신흥세력이라고 하는 부르주아가 차지했다는 결론이다.따져보면 이러한 서양역사가 말하는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의미와 가치가 제정체제(帝政體制)를 순수하게 무너뜨렸다는 사실보다 지배수단으로서 제정으로부터 생성되는 권력보다 물질욕구에 의해 생성되는 권력의 유혹이 더 강렬했다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설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때문에 시민혁명이라는 말 자체도 신흥세력 즉 부르주아에 한정된 명칭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이러한 일개 신진계급의 의한 반란은 결국 세계삼한역사가 안타깝게도 정체(停滯)를 맞이한 것이라고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또한 일본자료를 보면 조선전어(Clupanodon thrissa)를 중국포름마술청어(Chinese formic Wizard Shad)라 하여 라고 하고 있으며 위 지도에도 알 수 있듯이 이 어종의 분포지역으로 북서(北西)태평양지역인 중국, 베트남 남쪽(south to Viet Nam)으로 표시되며 생물표본은 태국의 푸켓섬(Phuket Island)에서 채취하고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고 한다.그러나 이것들에 대한 불명확한 사실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본래 조선전어(盾齒鰶:Clupanodon thrissa Linnaeus,1758)란 정체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본래 1758년에 생물아버지라고 통칭되는 린네(Carl Linnaeus:1707–1778)가 조상(Parent)이라 할 수 있는 학명"Clupea Linnaeus, 1758"이며 이종은 생장환경이 바다(marine)이다.그러나 위 라틴어 크루페아“clupea”라 한 것은 "a kind of very small river-fish"매우 작은 강(江)물고기로 나타나는 것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일반적인 명칭 "Clupanodon thrissa (Linnaeus, 1758)"의 서식환경은 바다(marine), 기수성(汽水性:brackish), 담수(淡水:fresh)지역으로 나타난다.기수성과 담수지역을 말하는 것은 강 물고기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중국자료는 이것을 꽃 전어(花鰶)라 하고 특징적으로는 배주위에 모(돌기)비늘(綾鱗:keeled scale)이 있다 하였는데 위 중국자료에서 조선전어의 생태적 구조 설명에서는 모비늘이야기가 없다.그 외 이명으로 아래 학명들이 있는데 학명 "(1)Clupea thrissa Linnaeus, 1758"과 "(2)Clupea triza Linnaeus, 1758 "이다.두 종류의 확실한 정체성이 불명확하다.1807년 프랑스 생물학자에 의해 명명된 속명은 동아시아 종(種)으로 전락시키면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문제는 린네가 명명한 Clupanodon thrissa (Linnaeus, 1758를 조선전어라 할 수 있는데 기수성과 담수지역에 서식하는 전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B]무늬전어속-斑鰶屬(Konosirus)窩斑鰶(学名:Konosirus punctatus)又稱斑鰶,俗名扁屏仔、油魚、海鯽仔,為輻鰭魚綱鯡形目鯡科的其中一種。本魚分布西北太平洋區,包括日本、台灣、中國東海、南海、香港等海域科學分類界: 动物界 Animalia門: 脊索动物门 Chordata綱: 辐鳍鱼纲 Actinopterygii目: 鲱形目 Clupeiformes亞目: 鯡亞目 Clupeoidei科: 鲱科 Clupeidae屬: 斑鰶屬 Konosirus種: 窩斑鰶 K. punctatus二名法Konosirus punctatus Temminck & Schlegel,1846 Konosirus punctatus Richardson, 1846두 번째로는 무늬전어속(斑鰶屬:Konosirus)이다.조선전어와 마찬가지로 청어과(鲱科), 청어아과(Clupeinae)의 도로소마아과(Dorosomatinae)에서 무늬전어(斑鰶)라고도 하는 둥지무늬전어(窩斑鰶:Konosirus punctatus)라는 어종이다.사실 이 종(種)은 생물학적인 분석에서도 뚜렷하게 나눌 가치를 못느끼에 한다.전자에서 일찍이 조선전어를 처리한 것보다 더 노골적인 것이어서 이 학명은 애초부터 세계삼한역사의 본래 위치를 감추기 위한 동아시아 토속종으로 꾸몄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지금의 열도를 일본(Japanese)으로 하면서 일본열도에서 집중적으로 생물학 표본을 수집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독일의사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1796-1866)는 매우 의혹이 깊은 인물이다.이 사람은 일본 근대문화발전에 영향을 끼쳤던 선구자라고 알려지고 서양의학을 일본에게 전달한 사람으로서 일본열도에 서식하던 생물학표본을 수집하여 유럽으로 전달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하지만 이 사람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현 일본열도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때문에 지볼트가 일본에서 표본을 수집하고 그것을 네덜란드 귀족이며, 동물학자 겸 박물관관장이었던 콘라드 야콥 테민크(Coenraad Jacob Temminck:1778-1858)에 전달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때문에 1846년에 나란히 독일조류학자이며 파충류학자인 헤르만 슈레게루(Hermann Schlegel:1804-1884)과 함께 명명한 Konosirus punctatus Temminck & Schlegel,1846 역시 일본열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잠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과연 18세기라 할지라도 유럽대륙으로부터 출발한 이들 과학자들이 당도한 것은 어마어마한 거리의 동아시아이다.대충 구글위성으로 거리를 재어보아도 유럽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말레카해엽 그리고 인도네시아를 거치면서 동아시아 일본열도 나가사키(長崎:Nagasaki)까지 항해길이는 약 27,000km이다.서양근대사가 말하는 15세~16세기때 툭하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는 거리 20,000-30,000km를 아무런 위험성도 없이, 항해가 손쉽게 이루어졌다고 모든 기록에서 막힘없이 주장하는 것은 당시 모든 여건과 조건을 무시한체 과대포장한 것임을 우리가 반드시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본 블로그 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에서도 지적한 사실이지만 예를 들어 서양인들의 항해시대의 시초라고 알려진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끌고 간 선대 4척이 고작 200톤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일엽편주(一葉片舟)같은 범선이며 이것으로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거리가 20,000km가 넘는 인도아대륙 캘리컷에 도착했다고 하는 것이나 좀 더 세월이 흘러 산업혁명 이후 1853년에 매슈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1794-1858)가 흑선(Blackship)이라 칭하기도 하는 2,450톤급의 전장길이 78m, 폭14 m, 홀수6.25m, 스팀엔진(Steam engine)장착에 속력 10knots(19km/h)로 북아메리카, 서인도 함대(North America and West Indies Station)소속인 프리깃함 미시시피호(USS Mississippi)를 몰고 동부 버지니아주 노퍽(Norfolk)에서 남아메리카대륙 혼곶을 돌아 태평양을 횡단하여 열도 우라가(浦賀)까지 거의 30,000km 넘게 항해하여 입항하고 함포사격을 가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한마디로 만화 같은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본 블로그에서 기회될 때 마다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19세기 중엽에 스팀선이라는 것은 연안용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이 연안용은 육지해안이나 연안에서 머지 않는 곳까지 해안에 항구를 휴항지로 하여 운행하는 것으로 결코 긴 거리의 해양(海洋)을 횡단한다는 의미의 선박이 아니다.이 스팀선으로 30,000km의 항해거리도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휴항지가 곳곳에 있지 않으면 배가 열에 못견디어 엔진이 과열되어 타버리기 쉽상이다.태평양을 감히 횡단했다고 하는 서술이나 주장들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그러나 서양인들은 지들 마음대로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사실화하고 있다.독일인 지볼트는 절대로 일본열도에 오지 않았다.그럼에도 1910년 늦은 시기에 미국어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1851-1931)과 존 오터바인 스나이더(John Otterbein Snyder:1867-1943)에 의해 명명되었다는 사실과는 달리 지볼트가 주동이 되어 둥지무늬전어(窩斑鰶:Konosirus punctatus Temminck & Schlegel, 1846)를 일본열도에서 표본을 만들어 당시 박물관장이었던 콘라드 야콥 테민크(Coenraad Jacob Temminck)에게 전달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픽션이 아닐 수 없다.Etymology: Konosirus: Japanese, konoshiro, a fish eaten in Kumihama City, in the Sea of Japan . 1846년에 명명한 속명의 어원을 보면 일본해에 쿠미하마시(Kumihama City)에서 서식하는 이 물고기를 일본인들이 코노시로(konoshiro)라 한 것을 어원으로 삼고 있다.또한 우리 한반도에서 보통 전어(錢魚)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바로 이 둥지무늬전어(窩斑鰶:Konosirus punctatus)학명을 말하고 있다.좀 더 들어가면 이를 1910년에 속명을 명명한 미국어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1851-1931)은 특이하게 우생학의 인종개량론자(eugenicist)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 우생학의 선두주자는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 (Francis Galton:1822-1911)에 의해 1883년에 발표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1882)은 그의 배 다른 외사촌 형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인종개량론자는 인종차별주의자라 할 수밖에 없다.즉 동양인과 서양인을 분리하거나 구분하여야 하고 우량적인 인종을 개량하고자 한 인종분리자임이 틀림없다.그러한 인물들이 동서양을 분리하기 시작한 것에 집중한 것은 별로 이상하지가 않다.그런 결과 이 둥지무늬전어(Konosirus punctatus)는 동아시아의 연안에 분포한다고 되어 있다. 특징적으로 보면 종명 풍타투스(punctatus)는 라틴어로 작은 반점(斑點)이 있는 의미하는 것이다.가까운 바다에 서식하며 그다지 큰 회유는 없으며, 일반적으로 6~9월에는 만(灣)바깥에, 10~5월에는 내만에 많다 하였고 보통 수심30m 안팎의 다소 얕은 곳에서 서식하며 산란기는 3-6월 무렵이고 규슈 남부 아리아케(Ariake Sound(south Kyushu)에서 산란한다고 알려진다.초여름 무렵 떼를 지어 내만(內灣)으로 들어와서 개흙을 먹으며, 연안의 얕은 바다에 알을 낳게 된다.몸길이는 15–30cm 정도이고 한국에서는 남해(南海)와 황해(黃海)에 많고, 일본, 중국, 인도, 폴리네시아에 분포한다고 되어 있다.참으로 이상한 것은 오히려 조선전어(朝鮮錢魚)보다 일본열도를 근원지로 하는 점선전어(Dotted gizzard shad)라고도 하고 둥지무늬전어라고 하는 이 어종이 한반도에 더 많고 많이 잡힌다는 사실이다.Indo-West Pacific: coasts of Japan from about 38°N southward; Sea of Japan north to Vladivostok on mainland; also Yellow Sea, including Gulf of Pohai and East China Sea south to Taiwan Island and Hong Kong)위 영어자료에서도 보듯이 분포지는 인도와 서태평양사이의 일본해안과 일본해안에서 북쪽으로 블라디보스톡, 일본해 남부쪽으로 대만과 홍콩, 동중국해의 발해(渤海)만을 포함한 황해(한반도 서해안)를 포함하고 있다.[C]참전어속(真鰶屬:Dorosoma)아메리카참전어속-美洲真鰶為輻鰭魚綱鲱形目鲱科的其中一種,分布於北美洲及墨西哥灣的淡水流域,體長可達57公分,棲息在河川、湖泊、沼澤,成魚偶而會出現在半鹹水水域,以浮游生物為食,可做為食用魚。科學分類界: 動物界 Animalia門: 脊索動物門 Chordata綱: 輻鰭魚綱 Actinopterygii目: 鲱形目 Clupeiformes亞目: 鯡亞目 Clupeoidei科: 鲱科 Clupeidae屬: 真鰶屬 Dorosoma種: 美洲真鰶 D. cepedianum二名法Dorosoma cepedianum Lesueur, 1818 a)멕시코참전어(墨西哥真鰶:Dorosoma anale)Meek, 1904 (Mexican river gizzard shad)b)아메리카참전어(美洲真鰶:Dorosoma cepedianum)Lesueur, 1818 (American gizzard shad)c)니카라과참전어(尼加拉瓜真鰶:Dorosoma chavesi):又稱蔡氏真鰶。Meek,1907(Nicaragua gizzard shad)d)날가지참전어(佩坦真鰶:Dorosoma petenense)Günther, 1867 (Threadfin shad)e)태평양참전어(太平洋真鰶:Dorosoma smithi):又稱史氏真鰶。C. L. Hubbs & R. R. Miller, 1941 (Pacific gizzard shad)끝으로 바로 참전어속(真鰶屬:Dorosoma)이다.이 종도 마찬가지로 청어과(鲱科), 청어아과(Clupeinae)의 도로소마아과(Dorosomatinae)에 속하는 것으로 특이하게도 참전어라 하여 참 진(眞)자가 붙어 있다.본 블로그 글 "붕어(鯽魚)로 본 삼한역사(1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3" 5)참붕어의 진실 소제[小題]에서 우리말 "참"은 일부 동물 명사나 식물 명사 앞에 붙어, ‘품종이 좋은’의 뜻을 더하는 말 또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올바르고 진실된’의 뜻을 더하는 말로 취급되며 진위(眞僞)를 물어보는 명제(命題)가 곧 참이고 진리(眞理)라는 했으며 진(眞)은 진리(眞理), 진실(眞實), 본성(本性), 본질(本質)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즉 근원과 마찬가지의 무게가 있다는 뜻이다.이 속명은 1820년에 터어키 식물학자 콘스탄티누스 라피네스크(Constantine Samuel Rafinesque:1783-1840)에 의해 명명되었고 그는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태어난 박식한자로서 프랑스에서 독학했다고 알려지며 메소아메리카 언어학인 마야 문자를 해석하려고 했던 인물로 알려진다.1875년에 명명한 호수철갑상어(Lake Sturgeon)가 그렇고 1817년 학명 Cynomys Rafinesque의 흙 쥐(土鼠)-프레리도그(Prairie dogs)도 그가 명명했으며 1820년 체로키인에게 감기와 두통을 치료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는 미국제비꽃(堇菜:Viola)도 명명했으며 1810년에 명명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에 서식하는 대구과(鱈科:Gadidae) 역시 그가 명명한 것이다.이 속에 종명들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a)멕시코참전어(墨西哥真鰶:Dorosoma anale), b)아메리카참전어(美洲真鰶:Dorosoma cepedianum), c)니카라과참전어(尼加拉瓜真鰶:Dorosoma chavesi), d)날가지참전어(佩坦真鰶:Dorosoma petenense), e)태평양참전어(太平洋真鰶:Dorosoma smithi) 등 이렇게 다섯 종(種)이다.이 속명(屬名)“Dorosoma”의 어원을 보면 Greek, doris = lance + Greek, soma = body Doro=meaning lanceolate; soma=body 그리스어 도리스(doris)는 작살(lance), 또는 끝이 뾰족한(lanceolate) 의미로 나타나고 그리스어 소마(soma)는 몸(body)으로 나타난다.이 속명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어종(魚種)은 바로 b)아메리카참전어(美洲真鰶:Dorosoma cepedianum)이다.아메리카참전어라...별칭 미국전어 또는 아메리카전어(American gizzard shad)라 한다.이 종명은 속명명명시기보다 2년빠른 시기인 1818년에 프랑스 탐험가이며 동물학자인 샤를 알렉상드르 르쉬외르(Charles Alexandre Lesueur:1778-1846)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나타나 당시 프랑스인들은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 상류에서 하류까지 탐험을 했다는 사실들을 대입할 때 그들의 기록과 일치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사실 프랑스라는 사람들의 정체가 분명하지가 않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의혹이 많다는 것이다.Northwest Atlantic: North America and Gulf of Mexico drainage (southeast South Dakota and central Minnesota, Great Lakes drainage, i.e. in Lake Erie, southern parts of Lakes Huron and Michigan, Lake Ontario basin; not Lake Superior; southernmost New York southward to the Mississippi system and to Gulf southward to RÃ&shy;o Pánuco, Mexico.북서대서양 :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멕시코배수만 사이로 사우스다코타의 동남쪽, 미네소타 중부, 오대호(이리호, 미시간호와 휴런호의 남부, 온타리오 호수 유역, 슈피리어호는 아니고 뉴욕남단에서 남쪽으로 미시시피강 시스템과 멕시코 만 남쪽으로 파누코 강(Pánuco river)까지의 범위가 나타난다.This species' range includes St. Lawrence-Great Lakes, Mississippi River, Atlantic, and Gulf drainages from Quebec to North Dakota and New Mexico, south to southern Florida and Mexico; introduced outside native range 이 종의 범위는 세인트 로렌스 -오대호, 미시시피 강, 대서양, 퀘벡만 배수로부터 노스다코타까지 그리고 뉴멕시코 남쪽에서 플로리다남부까지 그리고 멕시코 외부까지를 원산지역이라 하고 있다.4.충청도(忠淸道)의 참 의미 조선초기 세종지리지에 충청도(忠淸道)만이 전어(錢魚) 토산지로 기록되어 있는 문제가 있다.한반도 지형만을 보면 충청도만이 토산으로 기록된다는 사실에서 쉽사리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사실상 한반도에는 충청도 뿐만아니라 북쪽에서부터 보면 평안도, 황해도아래 경기도가 있고 충청도, 전라도를 끝으로 서해안과 매우 각 도마다 서쪽에 일정한 면으로 접해 있어 한 특정지역에서만 어종이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는 경우이다.때문에 한반도 지형적인 문제와 더불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역사기록들은 솔직히 따로 따로 노는 형태이다.이것을 어찌 역사라 할 수 있겠는가.한반도 역사주장을 인용하더라도 5000년 역사 생성한 장소가 한반도라 하였고 때문에 어떠한 역사사실도 이 자연생물학적, 지형과 지리학적, 기후학적, 토양, 토질학적문제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원칙이 전혀 맞아들지 않는다는 것은 본래 역사발생위치가 한반도가아니라는 결론이 이미 나 있는 것이다.역사사실이 발생주의에 입각하여 시간, 장소, 공간등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이를 우리는 역사가 조작되었다고 하고 엉터리 역사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사실들을 본 블로그에서 무수한 글로 밝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현실적인 역사고민이 분명 존재한다.무엇때문에 생물인 전어가 충청도에만 한정된 지역에 나타나 매일 바다로 나서는 서해안 다른 지방의 어민들을 속타게 했을 것인가.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또한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현 서해안은 발해만이라고도 하지만 갇혀 있는 바다이다.갇혀 있는 바다는 어종이 한정될 수밖에 없고 어종의 변화가 한 군데 집중적으로 나타나기도 힘든다.물론 수온의 차이가 다소 있다 하겠지만 이 수온의 차이가 특히 남쪽으로 위치하고 있는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가 세로 종적으로 아래로 늘어서 있기 때문에 모두 같은 환경조건이라 하여도 무방한 것이다.그럼에도 충청도만 전어(錢魚)가 조선 초기 세종지리지에 토산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좀 처럼 이해가가 힘드는 사실이다.한반도 지형을 놓고 보면 이렇듯 혼란스러운 것이 틀림없다.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북아메리카대륙 중앙부 대초원지역인 미시시피강 유역을 놓고 보면 왜 충청도에만 전어(錢魚)가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이런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 금방 알 수가 있다.즉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할 때 하류에 멕시코만과 접해있고 미시시피강 상류에는 오대호와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세인트로렌스 강(Saint Lawrence River)과 이어져 대서양으로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러한 지역에 기수지역과 담수지역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그렇더라도 우선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전어(錢魚)는 바닷고기라는 편견이다.왜냐하면 한반도에는 기수지역과 담수지역이 흔하게 없는 것도 있지만 대다수 일본전어 또는 남지나해 전어가 서해안으로 입만한다던지 한반도 남해로 입만하기 때문에 이렇게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물론 초기 조선전어(朝鮮錢魚)의 속명(屬名)이 크루파노돈(Clupanodon)이라 하는데 생물학분석에서 언급했지만 원종이 아니라 원종은 라틴어 크루페아“clupea”란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이것이 원명 "clupea"가 크루파노돈(Clupanodon)속명으로 바뀌면서 변질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라틴어 크루페아“clupea”라 한 것은 곧 "a kind of very small river-fish"라 하여 강(江)의 아주 작은 물고기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때문에 기수지역이나 담수지역에서 어획됨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1814년 정약전(丁若銓)이 저술한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전어를 한자로 전어(箭魚)라고 쓰고 그 속명도 같다 하였으며 또 “큰 것은 1척 가량이고 몸이 높고 좁고 빛깔은 청흑색이다"라고 한 사실에서 크루페아의 사진을 보면 완전 청흑색(靑黑色:Bluish-black)이다.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자료이다.위 기록을 보면 141번 그림을 한편으론 중국전어(Chinese gizzard shad)라 하였는데 이것은 곧 조선전어(Clupanodon thrissa)이었음을 전자의 소제 "생물학적 분석"에서 언급한 내용이다.위 그림에는 통을 만드는 사람들이 보이고 이 통의 쓰임새가 청어나 전어에 소금을 넣고 절이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이 그림은 1804년 바이에른 기독교목사 겸 동물학자로 알려진 고틀리프 빌헬름(Gottlieb Tobias Wilhelm:1758-1811)의 자연사백과사전에 나타난 인공착색동판조판(Hand-colouring copperplate engraving)이다.그리고 그림에 나타는 사람들이 담뱃대를 물고 있으며 전립(戰笠)모자를 하고 있다.조선사람이다.그러나 이러한 그림에서는 원산지가 설명되지 않고 있다.특이하게 위 사진의 설명을 보면 인도-태평양 타폰(Indo-Pacific tarpon)이라 한 사실이 눈에 들어오고 140번 그림의 어종을 풀잉어과(Megalopidae)의 유일속인 풀잉어속(Megalops)의 메갈롭스 싸이프리노이데스(Megalops cyprinoides)라 한 것이 보인다.그렇다면 조선전어 역시 이 메칼롭스 이프리노이데스와 같은 원산지일 것이 틀림없다.인도-태평양 타폰(Indo-Pacific tarpon)은 일반적으로 옥스아이청어(oxeye herring)혹은 청어(靑魚:herring)라 하는 것으로서 신중국에서는 이를 해암(海菴)이라 한다.이 어종은 대형 바닷물고기로 나타나고 이 풀잉어과에는 대서양(Atlantic)종과 인도태평양(Indo-Pacific Oceans)종을 나누고 있으며 대서양종은 대서양 해안로부터 버지니아에서 브라질까지 대서양의 해안 전역에 걸쳐서 서식하고 멕시코만(灣:bay)과 서(西)카브리해에서 발견되며 동 대서양해안에서도 발견된다 하였지만 범위 지역을 좁혀보면 주로 멕시코만, 플로리다주, 그리고 서인도제도에서 서식하고 환경조건은 따뜻한 연안 해역에서 발견된다 하였다.이 어종(魚種)들은 특히 강주위, 호수, 저수지, 범람원(flood plains), 운하등에서 서식한다는 사실과 조선전어가 서식했다고 하는 기수역과 담수역의 환경조건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인도-태평양(Indo-Pacific)이란 지역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 "에서 주장하길 존 오버톤(John Overton)의 1667년 지도에 첨가된 "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라 한 "중국바다와 인디즈"를 당시 비주류였던 서양인들의 지도해석능력이 뒤 떨어진다는 면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어 서양인의 지도를 그대로 해석할 때 면적이 2,981,076㎢ 달하는 현 미시시피강유역을 충분히 서양인들이 바다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 것이다.때문에 "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 와 마찬가지로 "Indo-Pacific"의 의미를 해석하면 현 인도아대륙의 인도가 있어 인도양이라 한 것과 현 동아시아에 있는 신중국을 묶어 태평양이라 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본래 인도가 존재한 지역이라면 바로 서카리브해와 대서양을 동쪽바다로 했다는 사실들을 알 수 있어 "Indo-Pacific"이란 본래의 위치는 미시시피강 범람원 내 호수, 저수지를 포함한 전체 유역임을 알 수가 있다.However, they have not been found to breed in the Pacific Ocean.그리고 위 영어자료에 나타나는 것처럼 타폰이 태평양에서 번식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이와같은 사실은 비록 타폰(tarpon)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만 청어과(鲱科:Clupeidae)의 중국전어가 조선전어라한점을 감안할 때 마찬가지로 미시시피강 범람원 유역을 중심으로 정확히 충청도를 대입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이것은 지금까지 생물학적분포지를 살펴본 결과 충청도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한다.충청도(忠淸道)란 명칭은 현재 모든 역사가르침에서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에서 연유한 이름이라 하였는데 글쓴이의 해석은 다르다.충(忠)자는 파어로 심방변(忄(=心, 㣺)이라 중세기 프랑스어 "core"와 같은 마음, 심장을 나타내며 음(音)을 나타내는 中(중)은 역시 가운데를 뜻하기 때문에 이것을 합(合)하면 정확하게 가우리와 코레를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정신적으로 충(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근본이라 할 때 세계삼한역사 정체성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순수한 말로 참이라 의미과 같은 것이다.그리고 다음 글자 청(淸)도 삼수변(氵(=水, 氺)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맑다"란 뜻이 강해지며 물 수를 뺀 청(青)은 음(音)을 나타내는 살아 있는 생(生)과 물감을 들이는 원료 단(丹)이 합(合)하여 이루어진 단어로 "맑고 푸르다"는 의미가 살아있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중앙에 위치하는 오대호의 빙하물이 수원과 같이 맑고 푸른다는 것이며 그 수원이 스며드는 초(草), 풀과 싹이 융성한 대초원을 이루는 지대를 충청도라 한 것이 틀림없다.[2016.10.31정리] 북아메리카의 로키산맥 동부에서 미시시피강(江) 유역 중부에 이르는 온대 내륙에 넓게 발달한 초원을 프레리, 대초원(prairie)이라 함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1675-85; < French: meadow < Vulgar Latin *prātāria, equivalent to Latin prāt (um) meadow + -āria, 대초원을 뜻하는 프레리의 어원을 위에서 보면 중세기 프랑스어(語)목초지 어원과 통속 라틴어의 'prātāria'라 하여 마음을 뜻하였고 'pratens(green)'과 'pratensis(growing or found in meadows)'푸른 목초지가 자란다는 의미가 여기에 내포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똑 같은 이야기다.또한 'prāt(지혜)'와 'āria(a Persian province between Hyrcania)'에서도 그 의미를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은 본래 페르시아제국의 한 주(州)를 히르카니아(Hyrcania)라고 하였는데 카스피 해 동남쪽 또는 남안(南岸)이라 한 것과 현 멕시코만을 카스피해라 했던 사실도 우리가 알 수 있어야 한다.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 밝혔듯이 멕시코 만을 로마시대 때는 지금의 중동에 있어야 할 "카스피해(Caspian Sea)"라고 불리었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더욱더 충청도는 북아메리카대륙 중심부를 차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이곳에 세종지리지에서 말한 전어(錢魚)토산지 충청도(忠淸道), 공주목(公州牧) 서천군(舒川郡), 비인현(庇仁縣)과 홍주목(洪州牧) 태안군(泰安郡), 해미현(海美縣), 결성현(結城縣)이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1814년 정약전(丁若銓)이 저술한 자산어보(玆山魚譜)에 빛깔은 청흑색이라 한 이 전어는 기름이 많고 맛이 좋고 짙다하였고 흑산도에 간혹 있는데 육지에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는데 즉 흑산도는 바다 가운데 섬이라면 분명히 당시 전어가 육지에 가까운 기수(汽水)지역이나 담수(淡水)지역에 서식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어 위 조선전어가 활동한 지역인 미시시피강 범람원을 중심으로 이 전어(箭魚)가 잡혔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현재 중국전어라고 하거나 조선전어라고 알려진 청흑색의 전어는 어종도 감쪽같이 변종이 되어 있지만 사실상 남지나해에서 서식한다는 사실은 역사생물학적 판단에서 볼 때 매우 답답한 것이 틀림없다.5.나가면서지금까지 나름대로 전어를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규명해보았다.조선전어가 현재는 중국전어라고도 하고 있지만 어느 명칭이 정확한 것인가는 우리의 세계삼한역사가 확실하게 정립됨과 동시에 참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가 있다.그러나 현재 까지 알려진 사실,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생각해볼 때 중국이 이미 고려라는 사실이 밝혀진 상태에서 고려와 조선을 동시대에 놓고 볼 때 "COREA"와 융합되고 있으므로 "코리아 전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이것은 세계중심의 역사임을 강조하고 싶은 추정이다.우리 한반도 사람들에게 알려진 일본전어라고 하는 무늬전어속(斑鰶屬:Konosirus) 코노시루스를 보면 아래 "조선시대전어토산 한반도 이상한 지형도"에서 보다시피 한국해(韓國海:Mare Di Corai)의 쿠미하마시(Kumihama City)가 보이는 곳 해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전어이다.이것은 한반도 남해와 황해에서 많고 일본, 중국, 인도, 폴리네시아에 분포한다고 알려진다.몸체는 은백색이며 특히 꼬리지느러미가 노란색을 나타내고 있다.독일의사 필립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가 표본을 수집한 것으로 나타나고 네덜란드 귀족출신이며 박물관관장이었던 콘라드 야콥 테민크(Coenraad Jacob Temminck)에게 전달하였다고 하고 있다.1846년에 명명한 속명의 어원을 보면 일본해에 쿠미하마시(Kumihama City)에서 서식하는 이 물고기를 일본인들이 코노시로(konoshiro)라 한 것에서 어원으로 찾고 있어 현 열도일본의 쿠미하마시(Kumihama City)를 근원지라 하고 있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독일의사 지볼트가 열도일본에 올 수 없었다는 점을 적용하면 이 어종역시 변질된 것이라고 파악할 수밖에 없다.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할 것은 참전어속이다.이 참전어속은 매우 특이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참전어라는 명칭이 북아메리카대륙을 원산지로 하는 지역의 종이라는 사실에서 여러가지 의문을 낳고 있다.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조선전어를 참전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그리고 조선전어가 서식한 지역과 범위가 대서양 서해안이라고 짐작할 때 청어과에 속하는 이 종 역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식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참전어속(真鰶屬:Dorosoma)에는 5가지의 종(種)이 있고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학명(學名)이 정해진 시대순으로 보면 1818년 아메리카참전어(美洲真鰶:Dorosoma cepedianum)이고 1867년 날가지참전어(佩坦真鰶:Dorosoma petenense)이며, 1904년에 멕시코참전어(墨西哥真鰶:Dorosoma anale)로 나타난다.나머지 니카라과참전어(尼加拉瓜真鰶:Dorosoma chavesi)는 1907년이고 태평양참전어(太平洋真鰶:Dorosoma smithi)는 1941년에 명명되었다.아메리카참전어(美洲真鰶:Dorosoma cepedianum)의 학명 명명자는 프랑스 동물학자이며 탐험가인 샤를 알렉상드르 르쉬외르(Charles Alexandre Lesueur:1778-1846)이다.프랑스인들의 활동은 곳곳에서 조선역사와 대칭된다.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에 처음 유럽인들이 도착한 기록으로는 1541년 금(gold)을 찾기 위해 미국 미시시피 강에 도착한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1496-1542)란 스페인 출신의 탐험가인데 이 인간은 아주 몹쓸 짓을 한 악질이다.거의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악행에 못지 않다.그 다음으로는 프랑스 선교사이며 탐험가인 루이 졸리에(Louis Jolliet:1645-1700)와 자크마켓(Jacques Marquette:1637-1675)에 의해 1673년에 미시시피강이 탐험되었다고 알려지는 시기인 만큼 영조(英祖:1694-1776)대와 얽히고 있다.이때에 편찬된 읍지들을 보면 황해도(黃海道)를 제외한 전도(全道)에서 전어가 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미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과 같은 것에서 편찬시기때부터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으로 영토가 확대된 것임은 물론이고 그곳에서 전어가 생산되는 사실들을 기록으로 옮긴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왜 황해도에는 전어가 나지 않았을까?한반도 지형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이와같은 사실에서 적어도 프랑스인들은 미시시피강에서 거주했다고 볼 수 있고 후에 아메리카참전어(美洲真鰶:Dorosoma cepedianum)를 명명한 프랑스 동물학자이면서 탐험가인 샤를 알렉상드르 르쉬외르(Charles Alexandre Lesueur)역시 이 같은 부류의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이들을 당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의 역사주체와 어떤 관계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많다.다시 언급하지만 이 참전어속은 조선전어와 밀접해야 할 이유가 많다.그리고 조선전어가 활동한 지역과 이 참전어속(真鰶屬:Dorosoma)의 아메리카참전어(美洲真鰶:Dorosoma cepedianum)의 근원지가 동일한 지역군을 이룬다는 사실이다.아래 모든 분포지가 이를 말하고 있다.물론 초기의 강과 호수, 저수지등에서 서식하던 전어와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동부전역에 서식한 참전어속은 돈 전(錢)자를 사용하는 전어(錢魚)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서유구(徐有榘:1764-1845)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그 맛이 좋아 사는 사람이 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어(錢魚)라고 “서남해에서 난다 하였으며 등에는 가는 지느러미가 있어 꼬리까지 이른다.”라고 하였고 상인은 염장(鹽醬)하여 서울에서 파는데 귀천(貴賤)이 모두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다.위 한반도 지도그림을 보면 붉은 선을 중심으로 동남해와 서남해가 나누어지는데 한반도에서 서남해(西南海)는 매우 한정된 해역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가 있다.한반도 남해에서 서남해에 서식하는 전어가 동남해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이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서남해와 동남해 사이에는 거대한 가리막의 지형적인 형태가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바로 아래 지도그림처럼 북아메리카대륙 멕시코만과 대서양을 가르고 있는 플로리다반도(Florida Peninsula)가 존재했던 것이다.상기 미국지질조사국의 천연자원의 대한 분포지도를 보면 아메리카참전어(美洲真鰶:Dorosoma cepedianum)가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을 다 표시하고 있다.그러나 북아메리카대륙을 대입할 대 서남지역은 바로 멕시코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 멕시코참전어(墨西哥真鰶:Dorosoma anale)Meek, 1904 (Mexican river gizzard shad)임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이것의 분포지역을 보면 North America: Mexico (Río Papaloapan in southern Veracruz and Oaxaca) southward to northern Guatemala (Río Ucumacinta basin). Reported from Belize.북아메리카대륙 멕시코남부 베라크루즈와 오악사카에서 파팔로아판강, 그리고 과테말라의 우수마신타 강(Usumacinta river)유역, 벨리즈(Belize)지역이다.북아메리카대륙 원산지인 아메리카참전어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토산지로 알려진 경기(京畿)의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안산군(安山郡) 그리고 충청도(忠淸道) 홍주목(洪州牧), 서천군(舒川郡), 서산군(瑞山郡), 태안군(泰安郡), 면천군(沔川郡), 비인현(庇仁縣), 남포현(藍浦縣), 결성현(結城縣), 보령현(保寧縣), 그리고 경상도(慶尙道)의 울산군(蔚山郡), 동래현(東萊縣), 영일현(迎日縣), 기장현(機張縣), 전라도(全羅道)의 옥구현(沃溝縣)과 함경도(咸鏡道)의 정평도호부(定平都護府)가 그곳에 있지 않았을까 한다.그렇다.왜 CORE 인가.인류핵심적인 세계역사를 가진 강력한 역사주체였기 때문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마음" rel="tag" target="_blank">마음</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심장" rel="tag" target="_blank">심장</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참" rel="tag" target="_blank">참</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카스피해" rel="tag" target="_blank">카스피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CORE" rel="tag" target="_blank">CORE</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전어(箭魚:Gizzard shad)" rel="tag" target="_blank">전어(箭魚:Gizzard shad)</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조선전어속(鰶屬:Clupanodon)" rel="tag" target="_blank">조선전어속(鰶屬:Clupanodon)</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무늬전어속(斑鰶屬:Konosirus)" rel="tag" target="_blank">무늬전어속(斑鰶屬:Konosiru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참전어속(真鰶屬:Dorosoma)" rel="tag" target="_blank">참전어속(真鰶屬:Dorosom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충청도(忠淸道)" rel="tag" target="_blank">충청도(忠淸道)</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中(중)" rel="tag" target="_blank">中(중)</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인도-태평양 타폰(Indo Pacific tarpon)" rel="tag" target="_blank">인도-태평양 타폰(Indo Pacific tarpon)</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해암(海菴)" rel="tag" target="_blank">해암(海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생(生)단(丹)" rel="tag" target="_blank">생(生)단(丹)</a>

석유(石油:petroleum)로 본 새로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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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石油:petroleum)로 본 새로운 역사글쓴이:한부울1)석유에 들어가며2)충청도와 북아메리카대륙 중심부 초원지역3)수천리(數千里)라는 산술적 의미4)맹화유(猛火油)란 정체5)맹화유와 그리스의 불6)신라는 비잔티움이다.7)나아가며 1)석유에 들어가며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나라 역사사실에서 놀랍게도 석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중국사서기록들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놀랍다고 하기 보단 오히려 충격적인 사실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것은 실제로 한반도 어느 곳에서도 석유가 단 한 방울로 나오지 않는 엄연한 사실을 현재 우리가 직접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기존 사학자들이 역사가 어떠니 저떠니 하지만 한반도에 석유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확한 사실이다.실제로 점차 들어나는 역사기록처럼 석유가 난다는 사실이 우리역사에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옛 우리나라의 영토는 석유생산지 이었음이 틀림없다.과연 그러한 역사영토가 한반도였는가 하는 점이다.실제로 이러한 사실을 한반도 지형상 맞출 수가 없기 때문에 현재 한반도사람들이 신봉하는 한반도식민지역사 어디에도 이러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며 기존 강단역사학자 누구도 이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용기있게 나서 명확하게 말할 사한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명실공히 역사가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꿀먹은 벙어리 신세는 하나같다. 이처럼 한반도 지형사정과 맞지 않는 이러한 역사모순들은 한반도 역사가 안고 있는 대표적인 병폐이며 설령 이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어긋난 사실자체가 일반인들에게 너무나도 큰 괴리감으로 다가갈 것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리고 명색이 해방 전까지의 기록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기에 무시되어야 하지만 그것도 역사라고 한다고 가정하더라도 해방 후 각종 지하산물기록과 산업통계 분석자료 등에서 이에 대한 명확한 정보 또한 얻을 수 있는 것이 전무하다.한반도에 석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허접한 유전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어야 하지만 전무하다는 것은 역사기록과 실제현실자체가 이처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세계 어느 역사에도 흔치 않을 것이다.이것을 기괴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없는 것이다.그렇다면 그나마 이렇게라도 남아 있는 세계삼한역사의 자취이며 흔적인 사서 기록들을 무시하고 모른 척하고 말 것인가.비록 잡아당겨 끊어질 썩은 새끼줄이라 할지라도 강박의 역사를 가진 우리는 당겨보지 않을 수가 없다.본문에 들어가서 세부적으로 말하겠지만 이에 대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역사기록들을 보면 하나둘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남송조(南宋朝) 낙양인(洛陽人) 강여지(康與之)이가 쓴 작몽록(昨夢錄)과 명조(明朝) 남해인(南海人) 황충(黃衷)의 해어(海語), 그리고 호북기주인(湖北蕲州人)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이것들의 공통적인 기록에서 보면 “맹화유(猛火油)가 고려의 동쪽 수천 리(里)밖에서 나며 해가 돌을 뜨겁게 달구면 나오는 액체이다.”란 기록이 명확히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의 가슴을 흥분속에 뛰게 하지만 정비례하여 의문은 산처럼 쌓인다.비록 간단한 한 개 문장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이 문장 속에는 고려가 석유생산지라는 것 이외 휘발성, 가연성이 높은 나프타(naphtha)가 생산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추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기록자체가 단순할 수가 없다.이것은 우리가 유럽역사에 등장하는 비잔틴제국의 필살기 무기로 알려진 그리스의 불(Greek Fire)을 떠올리게 만들고 또한 송나라의 무기로 알려진 맹화유(猛火油)를 담은 맹화유궤(猛火油櫃)를 생각하게 한다는 사실이다.그리스의 불은 유럽서양인들의 역사이기 때문에 상상이 어렵다고 치고 그렇다면 같은 동양사인 송나라의 맹화유궤는 고려라고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고려냄새가 진동을 한다.왜냐하면 송나라때 사람 강여지(康與之)이가 쓴 작몽록(昨夢錄)에 분명 맹화유가 소문에 고려 동쪽 수천리 밖에서 난다 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맹화유로 무기를 만든 송나라 땅이 아니라 고려 땅에 이 맹화유가 난다 했으니 말이다.이러한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세계삼한역사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고려와 송나라를 다르게 볼 수가 없다.지금까지 성분분석을 토대로 말하고 있는 실제사실들을 종합할 때 특히 고려에서 났다고 하는 이 맹화유(猛火油)는 맹렬하게 불이 붙는 기름이라는 의미로 매우 깨뜻한 정제유(精製油)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즉 휘발성과 가연성이 높은 질 좋은 나프타(naphtha)라는 의미이다.물론 한반도식민지 역사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추리조차 어색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사대사상(事大思想)이나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중국사서(中國史書)에서 고려에 맹화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그렇다면 이러한 명확한 기록에 대해 기존 강단사학자들은 왜 입을 닫고 있는 것일까? 찾을 수 없어 몰라서일까.굳이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중국사서까지 들먹여 스스로를 곤란하게 할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다.어줍지 않는 지위나 신분 때문에 그들만의 일제식민지사를 보호해야 하는 가당찮은 의식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며 역사기득권 챙기기와 밥그릇 챙기기에 따른 공익보단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입을 봉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이 석유기록을 한반도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래서 결론이 돌출되어야 했다면 기존 한반도 역사는 그야말로 천하에 불필요한 것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땅에 묻어야 하는 쓰레기로 전락할 가능성을 아마도 크게 두려워했을 것이다.우리나라 한반도식민지역사는 애초부터 진실과 진리와 담을 쌓은 것이다.이것들은 실제로 역사농단으로 이어진 것이니 부연할 것이 없다.형편이 이러하니 재야학자들은 이를 밝히기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고 기껏 대입한다는 것이 아시아의 신(新)중국 대륙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또 하나의 한계를 돌출하고 말았던 것이다.그것이 대륙조선사이다.그러나 이러한 대륙영토에 대입하는 것도 구체적으로 들어 가보면 이것 역시 의문투성라 할 수밖에 없다.신중국대륙에 존재하는 유전들은 전부 1949년 이후 모택동(毛澤東1893-1976)정부가 들어선 후 채굴된 것이라는 사실에서 적어도 역사연속성과 지속성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게 하며 그와 더불어 예를 들어 대륙조선사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집약하면 고려동쪽이라 하니 현 신중국대륙 동쪽을 고집하게 되고 이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사실이다.그런데 실제로 신중국대륙에서 유전 발굴 역사가 전부 1950년대 이후라는 점이다.1950년대 말에 발견되어 1958년에 시추하기 시작한 동부3성(省)부근의 대경유전(大慶油田:5,562(年萬噸))과, 그리고 1961년에 발견된 산동승리유전(山東勝利油田:3355.19(年萬噸)), 1958년에 발견한 수증기공법의 요하유전(遼河油田:1550(年萬噸)),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 석뇌유(石腦油)편에 숙주(肅州), 부주(鄜州), 연주(延州), 연장(延長)과 비교할 수 있는 감숙성 부근의 장경유전(長慶油田:2000(年萬噸))도 중공정부가 들어선 후 1950년에 발견하고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빨라야 1950년대이다.이것이 소위 진실 펙트(fact)이다.무엇보다도 우리가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 것은 고려시대와 같은 송조(宋朝)때 이미 이러한 사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고려기록에는 없는 것이 송조기록에 남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가 없다.왜 고려사를 고려사절요만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까?무수히많은 전장과 난리 통에 소각당해야 했다면 전장과 난리가 삼한인들에게만 존재한 것일까?마찬가지로 많은 전쟁과 난리가 존재하였던 다른 나라 역사는 그대로 손상이 되지 않고 있는데 유독 유별나게 삼한역사기록만 화마나 전장의 피해를 입었다고 이해해야만 할까.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무엇인가.고려역사를 대충 절단하고 무엇에 맞게 꾸민 것이다.때문에 정작 고려자체 역사에 남아 있어야 할 기록들이 송나라라고 하는 송조(宋朝)역사라 하여 그곳에 심어둔 것 뿐이다.이를 무엇으로 반박하려는가.동시에 송조가 동아시아대륙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위 주요유전들이 오래전부터 유전 또는 유정의 흔적이나 증거가 남아 있어야 한다.그러나 1950년대 이후에서야 이루어진 유전발견들은 지금까지 정사라고 우기고 있는 중국사와도 현재지형에 맞지 않는 아주 생뚱맞은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이것은 글쓴이가 주장하는 세계삼한역사가 바탕이 되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적 접근이다.반면 동아시아와는 다르게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지역인 뉴 햄프셔(New Hampshire) 하노버(Hanover)에서 유대인 어머니 밑에 태어나고 교사와 신문기자를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던 비셀(George Bissell:1821-1884)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최초 석유를 발견한 사실이 나타난다.그는 이를 발견하고 곧바로 연료사용으로 발전시켰다.1853년에 펜실베이니아 지역에 휴양(休養)차 갔다가 석유의 가치에 주목하면서 펜실베이니아 주 타이터스빌(Titusville)의 인근 하천지명이 ‘기름 냇물’의 뜻을 가진 ‘오일 크리크(oil creek)’로 오래전부터 불리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그는 석유가 오래전부터 존재한 것에 대한 확신과 본격적으로 이를 생산할 수 있다는 힌트를 얻은 것으로 파악된다.유대인들의 상업성 피는 속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때문에 역사지명도 그렇지만 모든 역사의 근원은 역사지속성과 연속성은 원초적인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매우 당연한 이치적인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글쓴이가 역사의 원천을 알고자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원리도 이와 같은 자연이치이다.때문에 이러한 근거들은 석유근원지의 규명에 대단히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북아메리카대륙 지명인 오일 크리크(oil creek)를 굳이 오늘날 동양역사언어로 남길 수 있엇다면 한문(漢文)으로 유천(油川)또는 화천(火川)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혹시나 하였지만 우리나라의 사서에 기름내천을 의미하는 유천이란 단어자체를 애초부터 찾을 수 없었고 한반도 맞춤역사의 기록이라 할 때 실제로 그런 지명이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러나 화천이란 지명(地名)이 남아 있는데 연풍현(延豐縣) 이화천(伊火川), 공주목(公州牧) 곡화천(曲火川), 아산현(牙山縣) 봉화천(烽火川)등 모두 충청도(忠淸道)에 있는 지명임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어조사가 붙어 이곳이 불의 천(川)을 뜻하는 이화천(伊火川), 구불구불한 내천에 불이 붙은 곡화천(曲火川), 봉화처럼 한 봉화천(烽火川)들은 모두 불이 붙어 흐르는 내천의 의미가 있다.이 지명들은 북아메리카대륙 오일 크리크(oil creek)와 대입할 수 있다고 감히 단정한다.기름내천, 유천(油川)은 언제나 검은 기름띠가 떠다녔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라는 설명이 존재하고 지형상황으로도 보면 당시 이 펜실바니아주(Pennsylvania)의 오일 크리크(oil creek:75.2 km)처럼 남쪽에 있는 앨러게이니 강(Allegheny River:523km)에 합류되어 다시 서남(西南)으로 흘러 거대한 오하이오 강으로 합류되면서 기름에 불이 붙어 오하이오 강 유역에서 수십키로(km)에 걸쳐 불꽃으로 덮이는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니 실로 이 지명(地名)이 주는 내력은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석유의 존재가 유대인으로부터 발견되고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존재성은 미미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부족했을 것이다.때문에 석유의 중요성만큼 가치성이 떨어져 역사기록에 명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미국도 마찬가지였다고 판단되는 것은 이때까지 석유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상황까지 가질 못했던 것은 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들이 석유를 약용으로 쓰고 있었다는 기록이 동양사와 같고 당시 구토제나 피부에 종기가 났을 때 석유를 데운 후 헝겊으로 적셔서 환부에 바르는 것으로 치료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인류가 석유를 사용한 것은 기원전 약 3200년경으로 중동지역이 메소포타니아, 페르시아 등지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나 극히 소량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오하이오 강 유역에서 수십키로(km)에 걸쳐 불꽃으로 덮이는 장관은 석유보다 소금이 더 경제성이 있었기 때문에 18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소금제조업자들이 염수(鹽水)를 찾다가 석유를 발견하였고 이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면서 기름이 수면에 뜨는 원리를 이용하여 저수조(貯水槽:water storage tank)의 상부에 모아두었다가 근처의 강으로 흘려보내면서 하천에 불이 붙어 장관을 이룬 현상이라 할 수 있다.이것이 서양인들이 말하는 최초 산업용 석유발견의 역사이니 사람에게 유용하게 와 닿은 것은 실제로 그리 오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2)충청도와 북아메리카대륙 중심부 초원지역앞에서 한문(漢文)으로 유천(油川)또는 화천(火川)이란 지명(地名)이 연풍현(延豐縣) 이화천(伊火川), 공주목(公州牧) 곡화천(曲火川), 아산현(牙山縣) 봉화천(烽火川)등 모두 충청도(忠淸道)에 있는 지명이라 한 사실에서도 결국 충청도는 어떤 거대한 영역에서의 중앙(中央), 중심(中心)지역임이 분명해진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지리지에 등장하는 화천(火川)지명들이 충청도에 고스란히 모여 있는 곳은 사실상 북아메리카대륙 중앙부이며 대초원지역으로 비록 영어지명으로 오일크리크라 하고 있지만 원천적인 것은 위 화천이라 지명과 곧바로 일치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이 주장이 억지소리인가.이미 본 블로그 글"전어(箭魚:Gizzard shad)로 본 COREhttp://blog.daum.net/han0114/17050806" 의 소제'4.충청도(忠淸道)참 의미'에서 분명히 언급한 내용을 간단하게 보면 본래 충청도(忠淸道)란 명칭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에서 연유한 이름이라 하였지만 글쓴이의 해석은 충(忠)자는 파자로 심방변(忄(=心, 㣺)이라 중세기 프랑스어 "core"와 같은 마음, 심장을 나타내며 음(音)을 나타내는 中(중)은 역시 가운데를 뜻하기 때문에 이것을 합(合)하여 정확하게 가우리(Gauri, Caule)와 현대영어 축인 코레(core)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모두 가운데 축, 중심(中心)을 말하고 있다고 갈파한 사실에서 근거하는 것이다.이것이 골(Gauls)과도 연유된다.충(忠)은 곧 중국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가운데나라’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이 주장한 ‘가우리’가 바로 고려(高麗)를 뜻한다는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여기에 더 할 것은 라틴의미와 중세영어등의 의미도 같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청(淸)은 삼수변(氵(=水, 氺)의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맑다"란 뜻이 강하고 물 수를 뺀 청(青)은 생(生)과 물감을 들이는 원료 단(丹)이 합(合)하여 이루어진 단어로 "맑고 푸르다"는 의미가 강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물의 수원(水原:The Gathering of Waters)이라고 하는 지역 허드슨베이에서 오대호사이지역에서 흘러내리는 미시시피강이 되듯이 오대호의 빙하수를 가득 머금고 있는 수원(水原)으로서 맑고 푸르다는 의미가 강하며 그 수원이 스며드는 초(草), 풀과 싹이 융성한 대초원을 이루는 지대를 곧 청(淸)이니 충청은 16세기 서양인들이 태평양 거대한바다라고 착각한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중심으로 한 수원 지역을 통칭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에 더하여 본 블로그 글 “가평(嘉平)은 시카고(Chicago)이고 풍성(風城) 또는 지성(芝城)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8” 에서 시카고는 바람의 도시 즉 풍성(風城)이라는 "Windy City"라는 별명이 있다 한 것과 같이 경기도 가평을 시카고(Chicago)라 한 적이 있으며 또한 춘전시(春田市)는 영어로 스프링필드(Springfield)라 하는데 이는 대초원의 상징적인 명칭이라 할 때 미국 일리노이주(Illinois州)의 주도가 스프링필드이며 미주리주(Missouri州)에도 있다 한 것이다.전부 대평원지대이다. [Midwestern and Great Plains States]대초원(Great Plains)은 중북부의 저평한 구조평야(構造平野:structural plain) 또는 침식평야로 중부에서 서부까지 이어지는 대초원(大草原)지대를 말함을 알 수 있는데 북아메리카대륙 중앙부 대초원지역인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 서부에 노스다코타(North Dakota),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미네소타(Minnesota), 네브라스카(Nebraska), 아이오아(Iowa), 캔사스(Kansas), 미조리(Missouri)등이 있고 동부에는 위스콘신(Wisconsin), 미시간(Michigan), 일리노이(Illinois), 인디아나(Indiana), 오하이오(Ohio)가 있다.이곳을 충청도(忠淸道)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수천리(數千里)라는 산술적 의미이제 본격적으로 중국사서가 말하고 있는 석유실체에 대해 알아보자.서두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석유가 고려(高麗)에서 났다고 하는 기록들은 중국사서(中國史書)란 점도 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동아시아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를 다시 써야 하는 충격적인 이야기이기에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그러한 기록들을 열거해보면 대표적으로 남송조(南宋朝) 낙양인(洛陽人) 강여지(康與之-生卒年不詳)의 작몽록(昨夢錄)이 있고 명조(明朝) 남해인(南海人) 황충(黃衷:1474-1553)의 해어(海語)가 있으며, 그리고 호북 기주인(湖北蕲州人) 이시진(李時珍:1518-1593)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이를 말하고 있다고 서두에서 이야기 했다.아래는 청나라 진원룡(陳元龍)의 격치경원(格致鏡原) 50권[卷五十(日用器物類二)]油[附膏], 기름 고약 편에 나오는 송조(宋朝) 낙양인(洛陽人) 강여지(康與之)의 작몽록(昨夢錄)을 먼저 살펴보자.格致鏡原 卷五十(日用器物類二)○油[附膏]昨夢錄 南宋 康與之西北邊城防城庫皆掘地作大池,縱橫丈餘以蓄猛火油,不閱月池上皆赤黃。又別為池而徙焉,不如是則火自屋柱延燒矣。猛火油者,聞出于高麗之東數千里,曰初出之時,因盛夏曰力烘,石極熱則出液,他物遇之即為火,惟真璃璃器可貯之。中山府治西有大陂池,郡人呼為海子,餘猶記郡師就之以按水戰試猛火油。池之別岸為虜人營壘,用油者以油涓滴自火焰中,過則烈焰遽發,頃刻虜營淨盡,油之餘力入水,藻荇俱盡,魚鱉遇之皆死。서북변 방성고에 땅 전체를 가로세로 한 장(丈:3.33m)남짓 파 큰 못을 만들어 맹화유(猛火油)를 저장하였는데 한 달을 보내지 못해서 그 못의 흙이 모두 적황색(赤黃色)으로 변하였다. 다시 못 을 파서 옮겼으나 아니한 만 못하였으니 집 기둥까지 불길이 번져 타들어갔다. 맹화유는 소문에 고려 동쪽 수천리 밖에서 난다 하였는데 태양이 처음 나오는, 한창 더운 여름 태양열(太陽熱)이 내리 쬘 때 돌이 뜨겁게 달궈지면 액(液)이 나오면서 다른 물질과 닿고 불이 붙으므로 진짜 유리그릇에만 담을 수 있다. 중산부(中山府)서쪽에 거대한 연못(大陴池,大埤池,池上大埤)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해자(海子)라고 부른다. 여기서 군사(郡師)가 물을 막아 전투할 때 맹화유를 사용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못가 언덕에 포로 영루가 있었는데 사용하던 기름 방울에 불꽃이 일어 맹렬한 화염되었고 눈 깜박할 동안 병영이 깨끗이 타버렸다. 남은 불씨가 물속에 들어가 수초들이 말라버렸으며 물고기와 자라가 전부 죽어버렸다.[한부울 정리]이 기록에서 우선적으로 우리가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문장이 있다.바로 “猛火油者,聞出于高麗之東數千里” 맹화유는 소문에 고려 동쪽 수천 리 밖에서 난다” 는 기록이다. 도대체“고려 동쪽 수 천리 밖”이라는 문장을 어떻게 풀어야만 할까?현 한반도 지형사정으로는 도저히 이 문언을 속 시원하게 풀 수가 없다.한편으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모습과 다른 한국인이 있었던 것처럼 역사적으로 우리는 무엇인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분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한반도에서는 아예 석유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다는 사실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그럼에도 이러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이을 접하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며 이를 쉽사리 납득할 수가 없게 한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위 중국사서가 말하는 고려에서 석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당시 고려의 동쪽 수천리란 위치는 도대체 어디가 될까?근대산업혁명의 주요자원 역할을 한 인류의 또 하나의 자원, 철에 대해 이미 심층적으로 분석한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지하자원 개발문제에서 동아시아대륙과는 근원적으로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던 바가 있다.뿐만 아니라 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와 함께 충청도(忠淸道)의 참 의미도 밝혔던 글"전어(箭魚:Gizzard shad)로 본 CORE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6"에서 현대 산업발달을 이룩하게 한 주요 지하자원의 근원지가 다른 곳이 아니라 아메리카대륙이란 사실이 명명백백 밝히며 알렸던 사실이 본 블로그 글 곳곳에 존재한다.기존 역사가 수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사실에서 우리가 東아시아대륙사(大陸史)를 냉정하게 보아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931년 국민당 일원인 장려화(臧勵龢)등에 의해 급조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등장이 키포인들이고 이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유럽사만들기에 혈안이 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신중국 만들기에 일환으로 전개되고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이것을 토대로 기존 중국사라 하여 집체하고 24사(史)가 편찬되었고 이를 마치 정사(正史)처럼 만든 것은 이런 서양세력에 의해 추진된 신중국 만들기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서 이것에 의해 현 한반도사관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부연해도 부정할 수 없는 원칙과 같은 것이다.근본적으로 동양역사가 생성되어야 했던 것은 이러한 하나의 역사를 분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임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이것은 아래 이야기 하겠지만 고려연합체에서 존재하던 하나의 교회가 사분오분되는 것과 같다.이 같은 일련의 일은 곧 유럽서양사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과 동일한 프레임 위에 놓고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어쨌거나 중국사서가 말하는 고려 석유의 정확한 위치분석은 한반도의 지형적인 한계를 이미 벗어나 도저히 검증이 불가한 것이다.때문에 이 한 줄의 문장“猛火油者, 聞出於高麗之東數千里”을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풀어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지금까지 대다수의 번역문을 보면 “소문에 맹화유라는 것은 고려 동쪽 수 천리 밖에서 난다”라는 해석이 대다수이었다.그러나 글쓴이의 해석은 “맹화유라는 것은 듣기에 고려(高麗)의 동쪽 수 천리(數千里)에서 난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고려 동쪽에는 넓은 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할 수가 있는 사실이다.물론 한반도 영토로는 대입자체가 불가하다.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밖”이라는 자립 명사가 한문 원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고 동시에 한반도란 좁은 영역에서 수 천리 밖이란 말이 온전하게 성립이 될 수 없는 이상한 표현을 바르게 고쳐 풀이 한 것이다.결코 원문에 밖이란 단어가 삽입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거리가 아니라 범위나 폭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동쪽 수 천리범위에서 맹화유가 나고 생산되었다는 말이 됨을 알 수 있어 석유가 고려 동쪽 수천리 범위에 포진하여 곳곳에 난다는 말로 해석되어야 이 기록이 바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즉 중국사서에 기록된 원문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밖이란 한문“外, 城外, 外地, 外邊”따위의 한자어는 눈을 까집고 봐도 찾을 수가 없는 매우 단순한 표현이다.때문에 무작정 한반도지형에 억지로 끼어 맞추려고 하여서도 안된다.결코 웃을 수도 없지만 한반도 지형에서 기존 번역문을 대입하고 밖이란 사실을 풀어보면 한반도에 존재한 고려(高麗)라는 나라를 실제로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는 난맥상에 빠진다. 이를 수치적으로 따져 보자면 수천리라고 하는 것은 적게는 2000(里)에서 많게는 4000(里)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각각 킬로미터(km)로 환산하면 800km에서 1600km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이런 일방적으로 적용 가능한 가로, 폭으로 따지자면 작게는 황해도 장언군 서쪽 귀퉁이에서 강원도 고성군 동쪽 해변까지의 거리가 317km 임을 알 수 있고 더 많게는 서단 신의주(新義州)에서 여러해살이풀 학명 고려조릿대(Sasa coreana Nakai)가 자생한다고 하는 신의대보호구인 함경도 화대군 목진리 운만대 해안까지의 동단 최대거리가 480km(1,222리(里))가 됨을 알 수 있어 폭이 겨우 천리를 넘고 있을 뿐이다.천리가 아니라 수천리라 하였으니 천리를 조금 넘는 한반도의 가로 공간은 수천리라 할 수 없는 공간이다.이러한 수치 대입이 불가한 것은 한반도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는 사실임이 더 이상 변명이 필요없는 것이다.한마디로 한반도 지형 적용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서 가당찮다는 것이다.짧게 적용하면 동쪽으로 벗어나 동해 바다 한가운데가 될 수밖에 없고 멀게 적용한다 하여도 4000리(1,600km)밖이면 동으로 열도를 넘어 서태평양 해저8,412m깊이의 일본해구(日本海溝:Japan Trench)가 될 수밖에 없다.이러한 비교는 부질없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짓이다.어디까지나 한반도지형을 기준으로 풀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얼토당토하지 않는 결과 앞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결국 석유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당시 고려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분명 고려(高麗)땅에 육지 유전(油田)이나 유정(油井)이 존재했다고 중국사서에서는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만 한반도 지형상황은 도무지 이를 소화시킬 수가 없음이다.역사가 이런 지경이니 참으로 기괴함이 아닐 수 없다.그렇다면 위 원문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대로 설명하게 되면 수 천리라 함은 멀리 나아가는 거리가 아니라 고려(高麗)내의 영역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범위나 석유가 나오는 폭 또는 넓이 형태임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고려 동쪽 거리가 아니라 넓이이고 범위라는 이야기다.고려 땅 동쪽 수 천리(里)에 맹화유(猛火油)가 틀림없이 생산되었다고 한 것은 바다가 아니라 육지인 것이 틀림없고 한반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 기록을 대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그래서 아래 본 블로그 글 수많은 분석에 따른 세계삼한역사의 근원지인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석유매장지를 대입할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석유매장지 범위지도]위 북아메리카대륙 석유매장지 범위지도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석유매장지 범위 길이가 놀랍게도 수천리(數千里)임을 알 수가 있다. 고려 땅 동쪽에 수 천리를 범위로 하여 길게 가로나, 또는 세로의 넓은 지역으로 퍼져 맹화유가 곳곳에 났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석유가 한곳에만 나는 것이 아니라 수 천리를 범위로 곳곳에 맹화유가 났다고 풀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4)맹화유(猛火油)란 정체특히 13세기 무렵 송조(宋朝)기록에는 이 맹화유(猛火油)가 많이 보인다.당시 맹화유(猛火油)라는 석유는 이름처럼 사납거나 맹렬하게 타오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할 때 정유기술이 없었던 시절이니 본래 생성적으로 화력이 상당히 거셌거나 발화가 쉽게 될 수 있는 매우 깨끗한 정제된 석유를 생각할 수가 있다.원유(原油)는 불순물도 포함하고 있으며 유전산지(油田産地)에 따라 성상(性狀)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유정(油井)에서도 유층(油層)의 깊이에 따라 성상이 변한다고 알려진다. 때문에 현재 정제시설로 정제한 것보다 자연스럽게 기화되는 성상자체가 특이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상식적으로 기화(氣化)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외부에서 일정량의 예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점은 태양 열기에 뜨거워진 암석 또는 바위에 자연 발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때문에 맹화유는 아마도 양질의 원유로 정제가 어느 정도 자연에서 완성된 상태에서 인간들에게 발견된 것이 아닌가 하며 이러한 원유가 곳곳에 난다고 할 때 이어지는 문장처럼 “소문에는 고려 동쪽 수 천리(東數千里)밖(x)이 아니라 동쪽 수 천리 곳곳에 난다”라고 풀어 볼 수 있으며 곳곳에서 화염이 붙어 열기를 뿜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이와같은 현상은 우리가 상상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충청도에 화천(火川)지명 역시 불이 붙어 끝없이 흐르는 하천의 뜨거운 광경을 그릴 수가 있다.이러한 광경들은 오늘날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 근방 무수히 많은 유정(油井:oil well)과 펜실베이니아주의 타이타스빌 근처에 있는 오일크리크(Oil Creek)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글쓴이는 그곳들은 본 블로그에서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나라 발해(渤海:698-926)가 존재한 땅이라고 갈파했다.본 블로그 글 "붕어(鯽魚:carassin, carrushens)와 발해(渤海)http://blog.daum.net/han0114/17050804"에서 염주(鹽州)는 디트로이트의 도시 소금광산이라 했고 또한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 발해국(渤海國)영역 내에 존재한 미타호(湄沱湖)가 한 카호(興凱湖:Khanka Lake)라 하였고 한카오는 동북연해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 생산 비율이 미국전체에서 약 70~80%를 차지하고 있는 슈피리어호(Lake Superior)나 호수형태가 월금(月琴)같다하여 금(金)나라때는 북금해(北琴海)라 칭했다는 모양과 비슷한 미시간 호(Lake Michigan)를 대입한 것에서 발해가 그곳에 존재했었다면 고려가 그곳에 못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다.발해 때 염주라고도 판단할 수 있는 미시간 주(Michigan)의 디트로이트(Detroit)는 조선행정구도의 충청도 북부인 셈이다.전자에서 이야기 했지만 충청도는 대륙의 중심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만약 송조기록에 고려 동쪽이라 한곳을 따져보면 고려의 수도 개성(開城)이 캔사스시티(Kansas city)라 할 때 그곳에 중국정부가 있었다고 보면 송조라 할 수 있어 펜실베이니아주 석유분포지는 고려 동쪽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위 지도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일 크리크 지역에서 펜실베이니아까지 석유생산지(Petroleum fields)범위가 약 800km(2,037里)를 이것을 수천리(數千里)라고 한들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그리고 서두에서 맹화유는 휘발성과 가연성이 높은 나프타(naphtha)라 하였던 것처럼 실제로 오일크리크(oil creek:75.2 km)는 남쪽에 있는 앨러게이니 강(Allegheny River:523km)으로 들어가면서 기름에 불이 붙어 수십키로(km)에 걸쳐 불꽃으로 덮이는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고 있지 않는가.물에서도 잘 꺼지지 않는 성분의 결과이다.전자에 게시한 청나라 진원룡(陳元龍)의 격치경원(格致鏡原)에 기록된 송조(宋朝) 낙양인(洛陽人) 강여지(康與之)의 작몽록(昨夢錄)에 적시된 내용을 보면 처음 솟아나는 맹화유를 저장하기 위해 못을 파고 그 속에 저장하였으나 얼마지 않아 흙이 적황색으로 변했다는 것은 맹화유가 자연스럽게 침전이 되었다는 사실이며 다시 옮겼을 때는 어느 정도 정체된 상태로 어떤 물질만 결합되어도 쉽게 불꽃이 일어 거세게 타올랐다는 사실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이어지는 내용도 보면 역법(曆法)에서 정오(正午)를 일초(日初)라 하였으니 “정오 태양이 뜰 때 또는 한 여름처럼 태양이 강열하게 내리 쬘 때 돌에 매우 심한 열이 가해지며 액체가 흘러나면서 다른 물질과 결합하고 동시에 불꽃이 되는데 오직 진짜 유리그릇에만 담을 수 있다”한 것은 맹화유의 휘발성을 적절히 표현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COil Lamp Receptacle, Lamp, Hurricane Glass, Glass Globe, ca. 1880. Porcelain; glass, Oil lamp and receptacle]실제로 물에서도 잘 꺼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강렬한 상태의 휘발유가 아니었는가 한다.석유(石油)를 고려에서 맹화유(猛火油)라 한 것은 의미로 보아도 매우 활성화된 기름이다.이 밖에 석유를 강목[綱目]에서 석유(石油), 웅황유(雄黃油), 류황유(硫黃油)라 하였고 십유[拾遺]에서는 석칠(石漆)이라 하였음을 알 수가 있으나 석칠(石漆)은 아스팔트라고 하는 역청(瀝靑:bitumen, asphalt)을 말하는 것이다.아마도 맹화유는 가장 질 좋은 원유(原油)이었을 것이며 현대 산업발달에 한 몫을 차지했던 것이 틀림없다.양질의 원유가 나온 곳이 바로 고려(高麗)땅이었다.本草綱目石腦油 [编辑](宋《嘉 》)【校正】並入《拾遺》石漆。【釋名】石油(《綱目》)、石漆(《拾遺》)、猛火油、雄黃油、硫黃油(《綱目》)。時珍曰︰石油所出不一,出陝之肅州、鄜州、延州、延長,廣之南雄,以及緬甸者,自石岩流出,與泉水相雜,汪汪而出,肥如肉汁。土人以草挹入缶中,黑色頗似淳漆,作雄硫氣。土人多以燃燈甚明,得水愈熾,不可入食。其煙甚濃,沈存中宦西時,掃其煤作墨,光黑如漆,勝於松煙。張華《博物志》載︰延壽縣南山石泉注為溝,其水有脂,挹取著器中,始黃後黑如凝膏,燃之極明,謂之石漆。段成式《酉陽雜俎》載︰高奴縣有石脂水,膩浮水上如漆,采以膏車及燃燈。康譽之《昨夢錄》載︰猛火油出高麗東,日烘石熱所出液也,惟真琉璃器可貯之。入水涓滴,烈焰遽發;餘力入水,魚鱉皆死。邊人用以御敵。此數說,皆石腦油也。國朝正德末年,嘉州開鹽井,偶得油水,可以照夜,其光加倍。沃之以水則焰彌甚,撲之以灰則滅。作雄硫氣,土人呼為雄黃油,亦曰硫黃油。近複開出數井,官司主之。此亦石油,但出於井爾。蓋皆地產雄、硫、石脂諸石,源脈相通,故有此物。王冰謂龍火得濕而焰,遇水而燔,光焰詣天,物窮方止,正是此類,皆陰火也。[번역]이시진은 석유 생산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곳으로 섬서성의 숙주, 부주, 연주, 연장, 광동성의 남웅, 그 외 면전(緬甸)에서 난다. 석암(石巖)으로부터 흘러나오는데, 샘물과 서로 뒤섞여 솟아나오며, 미끄럽기가 고기 기름과 같다. 그 지방 사람들(土人)이 풀에 적셔서 배가 불룩하고 목 좁은 아가리가 있는 질그릇 속에 보관한다. 색이 검어서 자못 옻칠(漆)과 같으며 석유(石油:雄黃油)를 만든다. 그곳 사람들(土人)이 대부분 이것으로 등불을 밝히는데, 아주 밝다. 물과 만나면 더욱 맹렬하게 타며, 먹을 수가 없다. 그 연기가 아주 짙어서 심존중(沈存中)이 환서(宦西)때 그을음을 긁어모아 먹(墨)을 만드는데, 광택이 나면서도 옻처럼 검어 송연묵(松烟墨)보다 낫다 하였다.3세기 진(晉)나라 사람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에 '연수현 남산의 샘물이 흐르는 도랑 물위에 기름이 뜨고 그것을 퍼내어 그릇에 담으면 처음엔 누렇다가 나중에 검게 되면서 고약처럼 굳어진다. 불을 붙이면 매우 밝아 이것을 석칠(石漆)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당조(唐朝) 제주(齊州) 임치(臨淄)사람 단성식(段成式:803-863)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고노현(高奴縣)에 석지수(石脂水)가 있는데 물위에 기름이 뜨는 것이 칠(漆)같아 이것을 채취하여 수레에 바르고 연등을 켠다.”라 하였다.강여지(康與之)의 작몽록(昨夢錄)에 "맹화유(猛火油)는 고려의 동쪽 수천 리 밖에서 나는데, 해가 돌을 뜨겁게 달구면 나오는 액체이다. 이것은 오직 진짜 유리로 만든 그릇으로만 저장할 수가 있다. 물에 들어가면 물방울이 일어나면서 세차게 불꽃이 일어 발화하며 타고 남은 불꽃이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가 모두 죽는다. 변방 사람들이 적을 막는데도 쓰는 등 이와같은 다수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석뇌유(石腦油)"라 하였다.우리 조(명나라) 정덕(正德) 말년에 가주에서 바닷가 웅덩이를 파다가 우연히 이 기름물을 발견하였다. 밤에 밝혀보니 그 빛이 보통의 등보다 배는 밝았다. 거기에 물을 끼얹으면 화염은 더욱 심해지지만 재를 뿌리면 끌 수 있다. 웅류기를 띄므로 원민들은 그것을 '웅황유' 또는 '유황유' 라고 부른다.근래에 또 몇 군데의 웅덩이를 파고 있는데 관에서 이를 주관하고 있다. 이것도 석유지만 우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느 것이나 땅 속에서 생성된 웅황, 유황, 석지 등 각종 암석들의 원맥이 상통하여 이 물질이 만들어진 것이다.왕빙(당나라 때 <황제내경>을 주석한 인물)이 '용화(龍火)는 습해지면 불붙기 시작하고 물을 만나면 불타서 광염이 하늘에 치솟고 그 물질이 다해야 비로소 멎는다'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류다. 모두 음화(陰火)에 속한다.황충(黃衷)의 해어(海語)猛火油猛火油樹津也一名泥油出佛打泥國大類樟腦苐能腐人肌肉燃置水中光燄愈熾蠻夷以制火器其烽甚烈帆檣樓櫓連延不止雖魚鼈遇者無不燋爍也一云出髙麗之東盛夏日初出時烘日極熱則液出他物遇之即為火此未必然恐出樹津者是也황충(黃衷)의 해어(海語)에도 맹화유(猛火油)고려의 동쪽 수천 리 밖에서 나는데, 해가 돌을 뜨겁게 달구면 나오는 액체라 하였다.5)맹화유와 그리스의 불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석유역사를 가늠할 때 19세기 중엽 이전만 하더라도 석유가 그다지 알려지거나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필요성에 의한 경제성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다만 기록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역사 기원성에 가치가 있다하겠지만 오히려 역사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던 것은 석유보단 소금이었고 무엇보다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요소적 물품으로 취급되어 확보쟁탈전은 인류기원부터 수많은 전쟁을 유발시켰으며 근세기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면에서도 필요성에 의한 가치를 말한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실제로 소금은 육류나 기타 식료품의 저장 수단으로 사용되고 또는 가죽의 보존이나 부드럽게 만드는데 필수불가결한 물품이었기 때문에 수천 년 전 고대 중국에서부터 지속되면서 끊임없이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1"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소금이 인간이나 동물에게 필수적인 식품임을 알려주는 기록들은 널려 있을 정도로 많이 발견된다.옛사람들에게 소금의 가치는 거의 신(神)적인 존재와 같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종교적으로도 위치가 확실하게 정착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가 있다.불교는 물론이고 위키 자료를 보면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서약을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안식일 빵에 소금을 더한다고 하였으며 카톨릭(Catholic)에서는 성수 축복에서 소금을 넣는 관습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고 부활성야라고도 하는 파스카 성야(Easter Vigil)의 성수 축복에도 소금을 넣는다고 되어 있다.그러나 이에 비해 석유는 그렇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불필요하게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그렇게 볼 때 석유의 역사 가치는 근세기 이전 상황에서 논하기가 쉽지 않다.비로소 경제성의 가치를 확인한 것은 공교롭게도 유대인 상업가들에 의해 밝혀지고 시작된 것으로서 1859년 처음으로 그들의 의해 유전이 발견되었고 산업화한 것으로 북아메리카대륙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는 바로 근세기 석유탄생의 상징적인 의미로 남게 된 것이다.이곳은 바로 고려의 동쪽영역이라고 감히 주장한다.중국이라고 하는 송조(宋朝)가 존재한 곳이 추측컨데 캔자스시티(Kansas City)일 가능성이 높다고 앞에서 말했다.왜냐하면 중국이라는 의미가 현재 상태에 이른 것은 적어도 1930년 이후라고 보기 때문이며 중국이란 실체를 모택동전서를 인용하면 경사(京師)라고 하였으니 천자가 거주하던 중앙 정부가 있던 도시정도로 정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본 블로그 글 "멜론(甜瓜:melon)은 조선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이 최상품이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686"에서 세이트 루이스(St. Louis)에서 약 400km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캔자스시티(Kansas city)가 있는데 이곳을 개성(開城)이라 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개경에 송조 천제가 거처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곳 동쪽에 펜실베이니아가 위치한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야기는 신중국(新中國)이 차지하고 있는 현 동아시아대륙에서 대규모 유전개발이 된 시기가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전 개발된 1859년보다 한참 늦은 1950년대 이후라는 사실은 산술적인 의미를 떠나 근원과 시발이라는 역사성이 동아시아대륙이 한참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모순정도를 유럽사만큼이나 가지고 있는 동양사를 생각 할 때 글쓴이가 도저히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석유역사에서 중국자료에서 분명 언급한 사실들은 세계에서 가장 최초의 유정(油井:Oil well)을 발견되었다 하였고 구체적으로 347년에 약 240m의 깊이에서 대나무에 날을 달아 굴착했으며 그 과정에서 생산된 석유(石油)는 오히려 소금(鹽:salt)생산을 위한 소금물을 끓이는 에너지에 사용했다고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현 신중국(新中國)대륙에서의 발견된 유전상황과는 시기적인 문제에서 너무나도 동 떨어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글쓴이가 지금까지 생물 근원지를 밝힘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역사의 근원에 의한 연결성과 지속성을 바탕으로 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오늘날 세계사를 돌아볼 때 과연 중국(中國)이 동아시아에 실제로 존재했다면 유전발견이나 근대산업의 활성화가 북아메리카대륙보다 빨라야 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며 이러한 대입은 뿌리가 없는 모래성과 같은 것을 강압적으로 믿으라 하는 것과 진배없다고 보기 때문에 원천의 역사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더하여 현실적으로도 북아메리카대륙보다 현저히 경제적으로 낙후된 것이 사실이었고 19세기부터 동아시아대륙은 미개발지역으로 알려져 서양세력들에게 먹이 감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그것을 현 북아메리카대륙의 경제력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은 희망사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때문에 문화적으로 앞선 고려나 송조(宋朝)가 동아시아대륙에 존재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그렇다면 송조(宋朝)의 무기로 알려진 맹화유(猛火油)를 담은 맹화유궤(猛火油櫃)는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만 할까?정말로 신중국 땅이 되어버린 동아시아(東亞細亞大陸)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더불어 고려에서 났다고 하는 맹화유(猛火油)와 송조의 맹화유궤(猛火油櫃)는 어떤 관계설정이 가능할까?아니면 글쓴이가 예측하는 것처럼 송나라의 맹화유궤(猛火油櫃)란 무기는 송조(宋朝)가 만든 것이지 송(宋)나라가 아니라 주체는 고려(高麗)인 것은 아닐까?이른바 송 고려(宋高麗)가 바로 그것이다.고려 목종(穆宗)때 설치된 군기감(軍器監)은 고려시대 때 병기(兵器), 기치(旗幟), 융장(戎仗) 등의 제조를 맡아보던 관청이라고 분명하게 백과사전에 나온다.군기감(軍器監)은 고려 목종때 처음 설치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민부(民部)에 병합되었다고 하며 반면 송나라 때 병기를 제조하는 군기감(軍器監)이 존재한 사실과 그 조직산하에서 마침내 고려에서 생산되는 맹화유를 이용하여 맹화유작(猛火油作)기관을 설치하고 무기로 제조한 것이 바로 맹화유궤(猛火油櫃)이라는 사실이다.맹화유를 이용한 무기를 만든 기관을 별도로 명화유작이라 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이 맹화유궤가 만들어진 시기를 송나라가 태생한 960년이후라고 하여 그리스 불(Greek fire)이 사용된 시점(AD673, 674)과 괴리가 있다고 설명하지만 글쓴이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무엇보다도 고려와 송조가 똑같이 군기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분명 맹화유는 고려 땅에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원료로 특수한 발화물질을 생산하였고 이것이 나프타형태의 강력한 화염방사기(火焰放射器:flame thrower)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런 강력한 무기는 중앙정부에서 관리하고 철저하게 보안으로 비밀화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결론은 비잔티움제국의 그리스 불(Greek fire)은 곧 고려 화염방사기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나프타(naphtha)라고 알려진 맹화유(猛火油)가 고려(高麗)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7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함대가 아랍 함대를 공격할 때 사용한 '그리스의 불'은 그리스의 통일이 아니라 신라를 제어하고 비로소 통일고려를 잉태케 한 강력한 무기로 존재한 것이 틀림없다.고려의 중앙정부인 송조(宋朝)의 지시로 강력한 무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은 바로 고려(高麗)동쪽에서 생산된 맹화유(猛火油)를 원료로 무기 제작한 것임을 최종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조광윤(趙匡胤)이 세운 북송(北宋:960-1127)시기에 맹화유작(猛火油作)이라는 기관을 설치해서 석유를 정제하여 사용했고 군사용으로도 응용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나 고려에서도 병기를 제조하는 정부기관인 군기감(軍器監)에 맹화유 제조를 전문으로 하는 맹화유작이라는 기관을 두었다고 알려지는 것은 위 언급한 사실들과 합치되는 이야기다. 맹화유(猛火油)를 사용한 화염방사기 같은 무기를 ‘맹화유를 담는 궤짝’이라고 알려지지만 성벽에 달라붙어 기어오르는 병을 물리칠 때나 수상전에서 적의 배를 불사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실감이 나는 이야기다.어쩌면 이것에 의해 고려가 강력한 무기국으로 천하의 연합체제가 가능하에 하였던 것이라고 믿고 싶다.만약 고려 이전 신라(新羅:BC57-AD935)가 “그리스 불”을 개발하고 고려가 이를 취했다면 인용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동로마(東羅馬)라고 하는 비잔틴 제국(Byzantium Empire, Byzantine Empire)의 필살기로 알려지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υγρόν πυρ)을 동양사 한문으로는 이를 희랍화(希腊火), 라마화(羅馬火), 해양지화(海洋之火), 류동지화(流動之火), 액체화염(液體火焰), 인조지화(人造之火), 방비지화(防備之火)등으로 불리지만 핵심은 맹화유와 같은 휘발성과 가연성을 가지 액체 탄화수소 혼합물로 만들어진 원료가 주도한 것이 사실이다.이 화기를 만드는 비법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일급비밀로 간주되어 워낙에 비밀이 철통같이 잘 유지되었던 탓에 현재까지도 그 정확한 성분을 알지 못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덧붙이고 있는 것은 동서양 구분을 하기 위한 과도한 조치가 아닌가 하며 비슷한 무기를 중국이라고 하는 송나라에서 맹화유궤(猛火油櫃)를 만들었다고 하면서도 제작자나 이력 등이 구체적이 않고 맹화유작이란 기관만을 내세웠지만 반면 비잔티움제국의 “그리스 불”은 유대지방(Syria)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출신, 시리아 망명자이며 건축가이자 화학기술자인 칼리키누스(Kallinikos)라고 했다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언듯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는데 당시 신라(新羅)사람들의 한문식(漢文式)이름을 라틴어로 풀어보면 어떨까?아마 흥미가 있을 것이다.비잔티움제국이 신라라는 사실은 이미 본 블로그에서 많은 글을 남렸지만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본 블로그 글 "밀라노(Milano, Milan)는 신라(新羅)의 성시(聖市)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467"에서 신라 서란전(瑞蘭殿)을 당시 밀라노의 상징적인 건물 밀라노대성당(Milan Cathedral)이나 바실리카(Basilica)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 적이 있다.그와 함께 바로 신라와 비잔티움의 지배자들에 대한 일체성을 말한 적도 있다.신라 소성왕의 어머니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가 이레네 아테네이아라고 판단하였던 것인데 이레네 황후는 비잔티움제국 이레네 아테네이아(797-802)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e VI:771-797,재위:780-797)섭정을 하였으며 그 후 이레네는 결국 아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붙잡아 오는데 성공하고 8월 15일 오후 3시 황궁에서 아들 콘스탄티누스의 두 눈알을 뽑아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공교롭게도 신라 소성왕(昭聖王:798-800)의 어머니 성목태후(聖穆太后)도 799년 8월에 태후로 추봉되었으며 아들 소성왕이 즉위 2년만인 800년에 죽는다.신라는 그해 상스럽지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는 것인데 4월에 하리케인 폭풍이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와를 날려 보냈으며, 서란전(瑞蘭殿)에 쳤던 발(簾)이 날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였으며 임해문(臨海門)과 인화문(仁化門) 두 문이 무너졌다 하였다.요사이 현대정치사도 그렇지만 역사 기록자인 사서들이 권력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사건 그대로 전달하지 못할 때 자연재해를 인용한 경우라면 비잔티움제국 이레네 황후처럼 극악한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것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6)신라는 비잔티움이다.전자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약간의 시차가 있다하겠지만 권력에 눈이 먼 극성스러운 모후의 극악한 정치참여는 자식을 살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동로마(東羅馬)의 콘스탄티누스6세(Constantine VI:771-797,재위:780-797)와 신라의 소성왕(昭聖王:798-800)이 모후에 의해 살해당하는 결과를 기록에서 똑같이 볼 수가 있다.물론 소성왕의 몰(歿)시기가 동일한 상황을 추측케 하는 것이다.이것은 동서양 별도의 역사기록이라고 하기보다는 동일한 사건에 의한 동일한 인물임을 부정하기가 힘든 그야말로 삼한역사가 유럽사로 그대로 옮겨간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로마(東羅馬)와 신라(新羅)는 같은 하나의 역사주체라 하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이후 신라가 고려에 통합되고 난 후 동로마(東羅馬)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高麗)와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본 블로그 글 "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494"이란 글에서 밝혔듯이 글쓴이는 동경의 반란(高麗東京叛亂) 또는 경주민란은 고려19대 명종(明宗,1131-1202,재위:1170-1197)시기 때인 1190년부터 약15년에 걸쳐 1205년까지 이어졌고 경상도 지방에서 발생한 이 민란(民亂)중심지가 고려의 동경(東京), 곧 경주(慶州)였다는 사실에서 바로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이었다는 사실과 반란의 민중들이 부르짖었던 기치가 신라 재흥(再興)이었으므로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물론 고려가 장악한 시대였으므로 신라(新羅)를 복고(復古)시키고자 했을 것이 틀림없다.하지만 이 신라라는 의미를 우리가 명확하게 풀이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바로 새로운 태양신(新羅)이다.새로운 태양신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당시 고려는 연합체제의 형태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글 "엉겅퀴(Cirsium:薊)와 스코틀랜드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6"에서 밝혀듯이 엉겅퀴의 대부분이 북아메리카대륙을 근원지로 하였다는 사실과 결국 스코틀랜드와 연결되며 본 블로그 글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5"에서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Saint Andrew's Cross)문양은 공통적으로 스코틀랜드의 함선에 게양한 해군 깃발로 사용한 사실과 러시아의 로마노프왕가의 문양과 같다고 한 주장에서 러시아의 역사 기원인 키예프루시(Kievan Rus:882–1283)가 또한 연결되어야 하며 고려 태동과 맞물려 있는 시기 968년부터 키예프루시와 비잔티움제국 즉 동로마가 충돌하면서 동로마의 영토가 크게 넓혀졌다는 사실과 함께 보면 동(東)으로는 아르메니아, 서(西)로는 남부 이탈리아,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일부지역을 병합했으며, 소아시아 남부 안티오케이아(Antiovceia)에서 이집트 침략군을 궤멸시키는 등 거대한 연합국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당시 고려가 연합국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아랍지역에서 술탄국(sultanate)인 룸 셀주크(Sultanate of Rûm:1077–1307)가 고려와 또한 연결된다고 본 블로그에서 말한 적이 있다.당시로 보았을 때 고려는 어마어마한 제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본래 고려는 코라이 등의 연합형태의 국가 이름이다.우리는 여기서 종교상황을 유심히 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려 연합체제에서 주 종교를 보면 키예프 루시의 영향을 받은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Eastern Orthodox Church)가 존재하였고 때문에 1054년 하나의 교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를 중심으로 한 네 개의 교회 연합과 로마교회가 분리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하나의 교회에서 다양한 종교를 허용한 것이다.이 하나의 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원시불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윤회사상을 가진 조로아스터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고려의 동경민란과 연결하여 유럽역사를 보면 이 민란의 축을 고려민란이 발생한 시기와 거의 동일한 1202년부터 시작하여 1204년까지 발생한 제4차 십자군(十字軍)으로 규정하였고 마찬가지로 복고운동의 결산인 “라틴제국”을 세운다는 기록으로 십자군에 의한 기독교를 발판으로 하는 유럽역사생성을 정확하게 합리화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결국 종교관을 바탕으로 삼한역사로 풀어보면 원수정(元首政:Principatus)이 지배한 서로마(BC27-476)역시 신라(新羅)라는 이야기로 이해되어야 하며 ‘라틴제국’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고려(高麗)와 신라(新羅)가 적대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신라의 문화를 고스란히 침해하지 않은채 고려(高麗)는 하나의 교회로 통합하는 종교를 중시했던 것이 아닌가도 여겨지는 것이다.고려연합체제에서 신라인들은 구(舊)종교, 즉 원시불교라고 할 수 있는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복고 움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때문에 고려연합체제는 서로마와 다른 체제에 동로마(東羅馬)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체제가 다른 국가로 변모한 것은 키예프 루시와 충돌 때부터임을 알 수가 있고 키예프 루시는 러시아의 로마노프왕가(House of Romanov:1613-1917)의 근원이며 아라사(愕羅斯)로 대타타르(大韃靼:Great Tartary)로 연결되지만 그 이전 북부지방에서 남하한 켈트(Celts)족의 스코틀랜드역사와도 병합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서로마(西羅馬)는 새로운 태양의 신을 말하는 신라(新羅)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태양신을 숭상하는 신라(神羅)이거나 또는 구 백제(百濟)세력이거나 비기독교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마치 이런 세력들로부터 십자군이 생성된 것처럼 말하지만 역사연속성으로 볼 때 십자군은 유럽사와 기독교역사로 의도적으로 변형시켜 나타난 서양인의 역사, 즉 유럽역사의 줄기라고 여겨지는 한계가 없지 않다.현재 기독 카톨릭(로마 카톨릭)은 여러 가지 음모설이 존재하지만 기존 역사사실과 다른 무엇인가 서양역사에 옮겨져 진위가 상실되면서 역사 끼워 넣기가 가능하게 한 것으로서 깊이 들어가 보면 오리엔트문화의 어떤 결정적인 역사사실을 은폐하거나 삭제하여 본질을 전혀 알 수 없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이러한 의구심은 글쓴이만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에서 한 주장한 사실과 일맥하는 것으로써 예수회의 유럽사 만들기 일환에 의한 중대한 핵심적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로마카톨릭의 예수회가 고려연합체제로 비친 비잔티움제국 시기때 하나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었던 종교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왜냐하면 예수회가 생성될 때인 1540년에 스페인 신도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1491-1556)가 주동이 되었고 또한 에스파냐 신도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1506-1552)가 보조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한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그것이라고 하는데 하필 십자군 구성원인 프랑크족이라는 사실이 저변에 깔여 있다.또한 당시 비잔티움제국(Byzantine Empire:330-1453)이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정교(Greek Orthodox Church)와 로마카톨릭이 대립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리스정교가 지향하던 삼위일체교리와 주일성수교리와는 다르게 성모신앙과 성상(聖象)을 받드는 사실에서 같은 기본적으로 기독교란 범주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교리자체가 상당한 서로 벗어나 있음도 알 수가 있다.또한 예수회를 건립한 주요 신도 두 사람의 국적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스페인과 에스파냐가 동일한 국가나 혹은 조직이 아닐 것이란 판단에서 또 다른 역사배경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인데 실제로 스페인과 에스파냐는 별개의 국가나 조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를 통해 밝혔던 바가 있다.이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난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출신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을 스페인인이라고 하고 카스티야 연합왕국(Corona de Castilla)출신인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1475-1519)를 에스파냐인이라고 하는 사실과도 같다.이들은 백제출신이라고 추측한다.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기간인 A.D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나타나며 오늘날 스페인의 핵심왕국이라 할 수 있는 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1037-1230)의 페르난도1세(Ferdinand I, ?-1065)가 포르투갈세력에게 영토를 그저 주었던 것이다.이것은 본 블로그 글 "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미시시피강상류http://blog.daum.net/han0114/17050776"에서 밝힌 것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패퇴시키고 난 후 신라에서 일부잔존세력들에게 거주지를 확보해주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십자군이 부르짖던 라틴제국이라 함은 본래 BC1000년경에 남하하여 이탈리아반도에 침입한 인도유럽어족 중의 이탈리아인 일파인 라틴인을 구성원으로 하는 것으로서 로마(Rome)동남방에 위치한 알바롱가(Alba Longa)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행정적 언어로 라티움어(Latium)를 사용하던 세력을 말하고 당시 십자군으로 구성된 프랑크인과 서부 에우로파(Europa)는 비잔티움이라고 하는 동로마에서 로마니아제국(Imperium Romaniae:1204-1261)을 건립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통일신라 후 대연합국인 고려에서 벌어진 이야기다.십자군에 편성된 주 세력인 프랑크족(Franks)은 5세기때부터 고대로마가 지배한 땅을 차지하였고 오늘날 프랑스의 모태로 발전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상하게도 본 블로그 전반적인 글에서 남부 월국(月國)과 상관하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17세기 때인 숙종(肅宗,1661-1720재위:1674-1720)이후부터 조선 왕족(朝鮮王族)과 정확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이러한 사실도 본 블로그 글"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등 3편의 루이시리즈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또한 오늘날 유럽연합이라고 하는 에우로파(Europa)는 그리스신화에서 페니키아(Phoenicia)왕녀를 제우스가 겁탈하려고 하자 피해 소로 변해서 도망간 곳이 지중해를 건넜다고 하고 지금의 시리아(Syria)연안의 고대 국가로 설명되는데 삼한역사의 백제를 연상케 한다.포르투갈은 1415년 지브롤터해협(Strait of Gibraltar)을 건너 아프리카 북부극단 세우타(Ceuta)를 정복하였고 아프리카대륙서부에서는 15세기~16세기에 걸쳐 포르투갈 사람들의 본격적인 탐험지역으로 알려졌다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도 했다.이러한 동서역사의 판도 판단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물론 신라부흥이라고 하였지만 구 신라세력들은 백제를 흡수한 형태이기 때문에 백제세력들도 함께 했을 것이란 가정 또한 생긴다.이것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포르투갈을 생각할 수가 있다.그렇다면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누어지는 지형적인 방향위치에서 보자면 오늘날 그리스 영토가 과연 비잔티움이라고 하는 동로마(東羅馬)제국이 존재한 것이 사실일까?지형적으로 맞지 않는 형태이다.그리고 서양문화의 보루가 될 수 없는 위치임에도 근동이라 하여 오리엔탈문화의 중심적 지역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서양사의 부끄러운 민낯이 고스란히 들어나는 역사라 할 수밖에 없다.근세기에 서양인들의 히스테리적 열등사고는 바로 오리엔탈문화이었던 것이 사실이다.이것은 19세기부터 생성된 서양인들에 의해 마구잡이식으로 오리엔탈 문화가 거침없이 파괴되었고 서양우월역사 유럽사로 무작위로 편입되면서 세계사를 근원적으로 변형을 초래했던 것이 사실이다.동로마는 오리엔탈문화의 결정판이라고 해야 맞다.그러나 오늘날 서양문화가 판을 친다.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려에서 생산된 맹화유기록과 함께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7)마무리수많은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하지만 석유로 보는 세계삼한역사관점의 이야기는 이제 여기서 줄일 수밖에 없다.과거 삼한역사의 시발이라 할 수 있는 고구려때 고국양왕(故國壤王:재위384-392)이 실행한 수용 종교는 조로아스터교(拜火教:Zoroastrianism)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라는 마니교(摩尼教;Manichaeism)이며 백제의 네스토리우스교(景敎:Nestorian)를 수용했다고 본 블로그에서 밝혔다.네스토리우스교(景敎:Nestorian)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독립성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결합된 2개의 인격이라고 주장했고 '동방의 교회' 또는 '페르시아 교회'가 대표적인 네스토리우스 교파라고 백과사전에 정리되어 있다.이것들은 하나의 교회라는 범주내에 존재했을 종교분리의 결과이다.인류가 복잡하지 않는 세상을 갈구했을때는 하나의 체제, 하나의 교회는 당연한 이야기다.오늘날 수많은 국가가 분리되고 인종과 문화가 분열되면서 종교역시 분열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그것의 문화적 바탕은 바로 오리엔탈 문화가 되어야 맞다.코라이(korai)는 그리스(Greece)에서 수많은 지명이름으로 남아 있다.코라이는 연합형태의 이름이다.즉 오늘날 COREA 란 명칭도 근원적으로 보자면 연합, 연방체제의 국가명이다.이것을 유럽인들은 가로채고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콘스탄티노폴리스를 왜"새로운 로마(Nova Roma)라 하여 한자어로 신라마(新羅馬)로 번역될 수밖에 없었을까.새로운 태양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왜 로마(Rome:羅馬)라 했을까?자료를 보면 특별한 뜻은 없는 것 같다.전부 성경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 이외 별 다른 것이 없다.예수교의 세력(strength, vigor)을 나타내고 거대하다(colossale)란 뜻도 있다.차라리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배회하다, 방랑하다란 뜻인 롬(Roam)이나 룸(Rûm)은 아랍어로 로마를 뜻하는 것을 볼 때 로마는 아랍의 문화성격이 짙다.또한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를 키예프루시같은 전통 슬라브족(Slaves)들은 "짜리그라드(Tsargrad)" 즉 "황제의 도시(皇帝之城)"라 하였고 바이킹(维京人)은 노르웨이고어(Miklagarð)로 "위대한 성(偉大之城)"이라 하였으며 그 외 도시들의 여왕(Queen of Cities), 거대한 도시(the Great City)등으로 불리었다.대연합국의 도시로서 상징을 더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이를 우리는 동경이나 경주로 볼 수 있다.아랍 투르크인들이 붙였다고 하는 이스탄불(Istanbul:伊斯坦堡)은 상징적인 의미보다 "저 도시, 도시에서, 도시로"등으로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일단 주인이 아니다.또 한 가지는 호천(胡天)이라 단어가 있다.호는 신라와 고려가 연결되는 단어이다.호는 삼한과 관계되는 단어이다.전자에서 언급한 고려연합체제에서 하나의 교회라 했던 것은 원시불교일 가능성을 말했다.바로 이 호천은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광명(光明)의 신(神)이라 한 것이다.미국 상징이 된 자본주의조직체 알루미나티라고 하는 광조파나 광명회(光照派,光明會:Illuminati)를 생각하게 하는데 유럽인들에게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나타나는 깨우침,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바로 그것이다.광명의 신으로는 켈트 신화에 나타나는 싸움의 명수 루 라바다(Lugh Lámhfhada)가 있으며 그리스신화의 아폴론(Apollon)이 있고 이를 바로 태양신(太陽神)이라 하였다.고려때 역사서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불전(佛典)에 근거하는 제석신(帝釋神)이라 하여 환인(桓因)이 있으며 힌두교의 수리야(Surya)와 아디트야(Āditya)가 존재하고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태양신 샤마쉬(Shamash)가 있으며 수메르 신화의 태양신 우투(Utu)가 있다. 그리고 이집트 신화에 나타나는 태양신이 바로 라(羅:Ra, Rah, Ré)가 중심에 있다.조로아스터교는 서양종교의 모태라고 알려지고 마즈다교(Mazdaism) 혹은 배화교(拜火敎)라 하며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으로 시대적 범위가 넓어 모든 종교의 기원이라 알려지고 특히 이 종교는 동방이라고 하는 지금의 중동 박트리아 지방에서 조로아스터(Zoroaster)에 의해 세워진 종교라고 설명된다.물론 오늘날 중동개념과 근동개념은 상당히 변질된 것이라고 볼 때 우리는 지형적 위치문제에서 이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또한 이 종교를 인도이란어파에 속한 아베스타어(Avestan)로는 ‘자라투스트라’라 하고 독일어로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라 하며 독일철학자 니체(F. W. Nietzsche:1844-1900)의 고전 철학소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에서 풍자적으로 도덕이 오류라고 인식하면서 ‘신(神)은 죽었다’고 탄식한 최초의 인간이름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로아스터교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종교역사에서 근원적인 깊이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더군다나 니체는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에 매우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불교가 말하는 윤회전생(輪廻轉生) 즉 영겁회귀(永效廻歸)로 순환되는 삶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왔고, 그 순환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나찌(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1933-1945)의 심볼과 불교의 만(卍), 십자(十)모양의 문양 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조로아스터교의 4대 원소(elements)인 지수화풍(地水火風)에서 근거한 것이며 호(胡)의 입구(口) 위에 십자(十)도 완성의 근원을 일깨우는 것과 원리와 같은 이론으로서 곧 인간 육신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때 인류가 갈망하고 갈구한 근원적인 것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고로 호천(胡天)은 삼한역사종교의 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하나의 교회로 고려연합체제에서 존재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서재영 불광연구원은 하늘과 땅은 나와 더불어 같은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관점으로 자연을 바라봤다라고 풀이한다.그렇다면 조로아스터교를 시발로 하는 불교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와 다를 가능성이 없는 것인가.하나의 종교를 서양기운이 있다 하여 동양종교로 맞추려 애써 감추어버렸던 것은 아닐까.아마도 이 호천은 모든 종교의 뿌리인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마지막으로 마무리해야 할 이야기는 바로 고려에서 생산되었다고 하는 맹화유의 실제 근원지는 어딜까를 밝히는 일이다.위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석뇌유(石腦油)편 번역에서 당조(唐朝) 제주(齊州) 임치(臨淄)사람 단성식(段成式:803-863)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고노현(高奴縣)에 석지수(石脂水)가 있는데 물위에 기름이 뜨는 것이 칠(漆)같아 이것을 채취하여 수레에 바르고 연등을 켠다.”는 기록에서 고노현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역사명은 글쓴이가 세계삼한역사관을 통해 바로 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프랑스 북부지방의 갈리아(Gallia) 골(Gaul)은 바로 고구려 고로(高盧)와도 연결된다고 하면서 이 갈리아 원 거주민은 인도유럽어족인 켈트족(Celts)이란 사실을 본 블로그 글 "세계삼한역사연구의 가시적인 효과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5"에서 최종정리한 바가 있다.그렇다면 고구려의 장수 아틸라가 유럽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고 로마까지 쇠퇴하게 만들었던 훈족과 연결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켈트족은 게르만에 쫓겨 이동한 유민으로 볼 수 있고 이 골은 고로(高盧)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바로 이 고로(高盧)가 석유생산지로 알려진 고노(高奴)와 같다.북아메리마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프랑스인들이 세웠다고 하는 도시 골은 강유역 멀지 않는 곳에 지금도 존재한다.본 블로그 2011년에 올린 글 "충격적인 동방역사(東方歷史)에 들어가면서http://blog.daum.net/han0114/17050378"에서 골의 위치를 신중국 역사를 인용하면서 현 유럽대륙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동아시아대륙사에 의한 것이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고구려(高句麗)시기 때 북프랑스지방에 고로(高盧)가 태동했다는 사실은 곧 골(Gaul, Gol)을 말하는 것이라 우리는 접근을 해야만 한다. 그곳은 프랑스인 시에르 드 라살(René-Robert Cavelier, Sieur de La Salle)이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 이서(以西)의 유역일대를 프랑스령이라고 감히 선언한 1718년부터 프랑스 지명으로 불리었고 프랑스란 국명이 붙어 서양역사에 포함되어버린 것이다.때문에 특히 그 지역사람들이 꿩의 꽁지 털을 묶어서 그 기름을 채취하여 항아리에 담을 정도로 석유가 넘쳐나는 곳임도 알 수가 있다.그 부근들은 전부 고려 땅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그렇다면 수천리(數千里)라는 산술적 의미로 따져본 "북아메리카대륙 석유매장지 범위지도"에 표시된 지역이라 할 수 있고 조선왕조실록과 대비하면 충청도의 화천(火川)이 붙은 지명이며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 근방 무수히 많은 유정(油井:oil well)과 펜실베이니아주의 타이타스빌 근처에 있는 오일크리크(Oil Creek)가 바로 그러한 역사성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과연 이곳은 현 서양역사가 말한데로 서양인들만의 땅일까?온바른 역사성은 고려연합체제의 영토라 해야 맞을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신라" rel="tag" target="_blank">신라</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충청도" rel="tag" target="_blank">충청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유전" rel="tag" target="_blank">유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비잔티움" rel="tag" target="_blank">비잔티움</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대초원" rel="tag" target="_blank">대초원</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수천리(數千里)" rel="tag" target="_blank">수천리(數千里)</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맹화유(猛火油)" rel="tag" target="_blank">맹화유(猛火油)</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석유(石油:petroleum)" rel="tag" target="_blank">석유(石油:petroleum)</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콘스탄티노폴리스" rel="tag" target="_blank">콘스탄티노폴리스</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경주 동경" rel="tag" target="_blank">경주 동경</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작몽록" rel="tag" target="_blank">작몽록</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격치경원" rel="tag" target="_blank">격치경원</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화염방사기(火焰放射器:flame thrower)" rel="tag" target="_blank">화염방사기(火焰放射器:flame thrower)</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맹화유궤" rel="tag" target="_blank">맹화유궤</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그리스 불(Greek fire)" rel="tag" target="_blank">그리스 불(Greek fire)</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나프타(naphtha)" rel="tag" target="_blank">나프타(naphth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소성왕(昭聖王)" rel="tag" target="_blank">소성왕(昭聖王)</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콘스탄티누스6세" rel="tag" target="_blank">콘스탄티누스6세</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호천" rel="tag" target="_blank">호천</a>

박하(薄荷:Men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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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薄荷:Mentha)글쓴이:한부울1.유럽사가 뒤섞여 있는 삼한역사2.신라박하(新羅薄荷)와 유럽박하3.서양박하 페퍼민트4.일본박하 이야기5.개박하 이야기6.결어정리1.유럽사가 뒤섞여 있는 삼한역사본 블로그 글 "석유(石油:petroleum)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7"에서 분석하고 정리하였듯이 신라는 비잔티움역사와 동일한 선상에 있었음을 밝혔다.그리고 삼한역사에서 신라를 합병한 고려는 비잔티움역사를 그대로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거대한 연합, 연방형태의 체제국가로 발전시켰음을 알 수가 있다.이것은 고려시대를 범위로 할 때 수많은 중국 정복국가명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삼한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세계사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인의 유럽사는 이러한 고려 연합이나 연방체제의 역사는 물론 문화 영역에서까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사실임을 확증한 것과 다름이 없다.때문에 유럽사는 문화를 포함한 삼한역사를 근원을 깔고 있을 가능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좀 더 들어가 보면 이것은 마치 제로섬게임에서 1-1=0 가 되어야 한다는 공간법칙에 따른 이론으로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주장이다.하나가 아닌 상태에서 두 개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역사공간이라는 말이다.다시 말해 삼한역사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유럽사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며 반대로 유럽사가 존재하였다면 더 이상 세계삼한역사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한반도역사에 몰입되어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것은 삼한역사는 곧 유럽사라 해야 맞다.우리에게 익숙한 영어 명칭 “COREA” 혹은 "KORAI"는 유럽사의 상징이었다고 보는 것은 바로 근세기에 미국인 역사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가 그의 저서[아시아역사:Asiatic history]에서 고려의 년도표기를 “United corea, or korai, 960-1392 AD”라 하였다는 것은 명색이 삼한의 최종 상속자로 밝혀진 우리가 비록 그동안 한반도식민사에 몰입되어 그런 역사를 속속들이 알 수 없었던 무능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상황은 미국역사가가 스스로가 그렇게 표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에 상응한 역사상황이 분명 연합이나 연방체제의 국가이었던 것이 틀림 없고 "석유로 본 새로운 역사"에서 언급하였듯이 유럽사와 동일선상에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거의 신라, 고려역사가 유럽사와 같이 전개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삼한역사와 유럽사가 동일 선상에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반도에 코라이(KORAI)이란 지명이 무수히 명명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고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신뢰 또한 존재하기때문에 결코 신라와 고려가 비잔티움이라는 본 블로그의 주장이 그렇듯 황당하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유나이트 코리아(United Corea)는 코라이(korai)로 병용되었던 것과 같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비잔티움제국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도시국가를 포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가벼이 볼 수는 없다.어쨌거나 기록으로 보았을 때 신라 스스로가 어떤 프레임에 빠져 완성할 수 없었던 것을 고려가 대신 이루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은 종교를 포함한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 아우를 수 있는 연합체제나 연방체제였다는 사실이 틀림없다.아마도 신라는 고대 원시종교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매개로 정책을 꾸렸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에서 심층분석하였듯이 신라승려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三聖紀全)상편 원문에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이라 하여 옛 조선(朝鮮)이 개국할 때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명이 흑수(黑水) 백산(白山)땅에 내려왔다"는 기록에서 흑수를 말하는 것이나 단군시대를 우리입장에서 단기(BC)2333년부터 기산하는 것에 의하고 동시에 유럽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이집트 역사를 나일강 지역(Nile River region)을 범위로 이집트 고(古)왕국(Old Kingdom of Egypt :BC2686–BC2181)이 존재하던 시기를 단기2686년으로 시작하는 것과 같이 시간적으로 동일선상에 볼 수 있어야 하고 당시는 단군 탱그리(Tengri)와 같은 위치의 이집트 태양 신(神) 호루스(Horus)가 동일한 의미인 나르메르(Narmer)왕이 되어 이집트를 통일한 시기로 알려지는 것과 동시에 아랍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있는 피라미드 건설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시기 역시 같아 이러한 동서양 역사상황등도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물론 우리의 단군역사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한 것으로 단군연대를 기록으로 참작할 수 있지만 유럽사는 이러한 기록이 전무하기에 1949년 미국의 물리학자 윌리아드 리비(Willard Frank Libby:1908-1980)가 개발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放射性炭素年代測定法:Radiocarbon dating)에 의해 밝혔다고 하는 것이 고대 이집트역사 연대라고 정리되며 이것을 현대 과학적 분석방법이라고 호도하는 것도 사실이다.솔직히 유럽사만들기에 동원된 근세기의 여러가지 행태를 보면 이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한 측정년대가 유럽사만들기에 동원이 되어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된 역사개연성과 연속성, 그리고 지속성을 그들에 의해 원초적으로 파괴되고 대신 과학을 매개로 하는 수단이 담보가 되었다는 것은 굳이 음모설 등을 들추지 않더라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모순들이 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지금까지 본 블로그가 실시한 분석에서 그러한 중대성은 무수히 밝혔던 사실도 존재한다.설명이 길어지지만 산업혁명이후부터 약 200년간 실시된 서양교육과 그것에 의해 재생산된 지식 근간으로 볼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서양인들의 역사주장을 그대로 검증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오히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역사기록이 여러가지 음해설이 있다지만 이것이 서양인에 의해 파괴되고 남은 마지막 진실 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200년간 지속된 서양학습의 뿌리가 견고하다 하겠지만 기존 유럽사를 지탱하고 있는 근간을 확실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라면 이런 의혹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때문에 오늘날 유럽사는 그들만의 역사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특별한 검증도 없는 일방적인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수많은 모순과 맹점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역사현실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자본을 앞세운 서양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하는 과학적 지식은 오히려 글쓴이가 주장하는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오리엔트 문화에서 기초하고 근간을 세운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본 블로그 글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2"의 소제목"3)실증주의와 끼워 넣기한 유럽사"편에서 실제로 러시아학자들에 의해 폭로된 사실에서 보면 “1954 stonehenge being built”제목에 따른 사진과 함께 영국에서 스톤헨지(stonehenge) 데코레이션(decoration)작업이 진행되었던 사실이 백일하에 노출되어 논란이 되었던 것처럼 당시까지 유럽사만들기에 혈안이 된 상황을 말해주고 있으며 분명 영국의 치밀한 계획과 주도아래 이렇듯 세계역사지명과 유적 옮기기가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장면이다.이것과 관련하여 볼 때 수많은 유적들이 산산이 조각나 있는 상태로 나뒹굴고 있는 그리스와 로마의 유적들이 과연 온전한 제자리에 존재했던 유적들이 맞는가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이러한 의심을 글쓴이만 하는 것일까?물론 그들이 이러한 광경의 유적들을 과연 어디서 옮긴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하겠지만 필연적으로 태고적 인류역사가 움턴 곳 북아메리카대륙일 가능성이 높다.이것만 보더라도 유럽사만들기에 혈안이 된 서양인들의 무도한 역사 끼워 넣기가 얼마만큼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진 것인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현실적으로도 이러한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 중에 유럽사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서 보더라도 서양인의 역사라고 하는 유럽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역사성에서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인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특히 현재 유럽대륙에 모여 있는 유럽제국들의 역사근원적인 문제의 바탕이 매매모호하다는 지적과 왠지 모를 민족성이결여 등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의심하게 하고도 남는 것이다.때문에 과연 유럽역사는 애초부터 아랍문화를 포함한 오리엔트의 진실 된 역사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또는 독립적인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묻지 않을 수가 없다.지금까지 본 블로그를 통해서 글쓴이가 애써 생물학적, 지리학적, 기후학적으로 분석해본 결과에 따르면 고구려, 신라, 백제를 총칭한 삼한(三韓)이란 역사 프레임 자체가 너무 방대하다는 사실이며 이러한 역사바탕이 실체라면 결코 동양사에 국한하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유럽사에 존재하고 있는 세세한 데이터가 부족한 일면이 있지만 스캐일자체가 삼한역사전체를 볼 때 마치 세계사를 보는 듯했다는 것이 글쓴이의 느낌이다.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유럽사와 삼한역사의 공통점이랄까 또는 늘 글쓴이가 하는 주장 중에 하나인 하나의 체제에서 발생될 수밖에 없는 사건들, 실체가 혼입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역사증거들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러한 지적을 부정만 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전자에서 언급했지만 글쓴이는 역사기원을 찾을 때 진실된 역사개연성과 연결성, 그리고 지속성을 따지면서 마지막으로 자연결합성을 따져 결국 제일 꼭대기는 하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를 숫자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반복한 것이다.그것이 삼한역사로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놀라워 했던 것이 사실이다.이를 무엇으로 밝힐 것인가.능력을 의심하고 한스러워했던 것도 사실이다.첫째로 현실적인 문제에서도 거리상 한반도와 유럽대륙의 거리가 서로 독립적 관계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이쪽이든 저쪽이든 하나는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세계삼한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서로 극과 극에 존재하던 아랍과 신라가 어우러져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어떻게 자연스럽게 통국(通國)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산처럼 쌓이는 것도 이와같은 지리여건상 거리가 원만한 이해를 막고 있다는 사실이다.이것은 현대 들어 초고속여객기 같은 운송수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 역사에서 이동을 무심코 흘러버릴 수 있는 맹점이 사람들 내면에 존재하고 이를 그렇겠지 하면서 포기하거나 등식화 해버리는 것이다.그러나 태고적 아시아대륙과 유럽대륙을 횡단하여 동(東)과 서(西)극단까지의 인간의 수단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거리임이 틀림없고 더군다나 무역으로 해소했다는 것은 경제이윤원칙을 따질 때 상식을 벗어나는 주장이라는 사실이다.솔직히 장사에 이윤을 전제하지 않을 때 어떻게 여행목적만을 가지고 행보가 가능하겠는가.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아시아대륙과 유럽대륙을 합해 극동에서부터 소아시아까지 20,000리(里)되는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단번에 희석시킬 수 있는 대안이 바로 20세기 초부터 집중된 교육수단이다.이시기는 자본제국들이 역사를 한쪽으로 치우쳐 볼 수밖에 없는 편협적인 현대 인간들의 사고를 건드리고 시작했고 결국 그것을 쉽게 용인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이러한 문제를 보는 비판적 시각은 현재도 전무하다.19세기 산업발달에 의해 급속히 진보한 금속운송수단의 상황들은 그 이전 역사에 별 검증도 없이 그대로 대입시킬 수 있었고 유럽역사전체에 흐르는 맹점들을 일거에 합리화시키고 정당화한 단적인 예가 바로 15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라는 것이다.유럽대륙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동아시아 열도의 나가사키 데지마(Nagasaki:長崎出島)상관까지 구글어스로 재어본 단순항해거리가 30,000km 가 넘는다.이런 거리 안에는 죽음을 위협하는 한류(寒流)나 난류(暖流), 사막에서 불어대는 열사풍, 짙은 안개나 이상강수(異常降水), 갑자기 일어나는 해무(海霧)현상과 강풍, 모든 것을 삼키려 하는 소용돌이와 폭풍이 일어나는 곳이 한두군데도 아닐 것인데 버젓이 기록 상단에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1498년 인도양탐험을 시도했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끌고 간 선대를 살펴보면 기함인 산 가브리엘 호(São Gabriel:length 27m, width 8.5m)가 178톤, 산 라파엘 호(São Rafael:Length:25.7m, Beam:8.5m,Draft:2.3m)가 100톤, 팔리오 호(Bérrio)역시 100톤, 그리고 식량 운반선 산 미구엘(São Miguel)이 110톤 또는 200톤등 모두 4척이라 하였다.불과 200톤 미만의 소형 갤리온(Galleon)의 범선(帆船)을 이용하여 인도양을 탐험하고 인도를 발견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다.언젠가 이런 반복적인 도전은 가능했겠지만 그것이 왜 하필이면 서양인들이 역사전면에 등장하는 데뷰무대구실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15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와 예수회가 주도한 유럽사만들기가 시작된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점도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또한 대조선의 임진왜란 발생시기와도 겹쳐 있다.이를 곧이 곧대로 우리는 믿어야 했고 때문에 유럽인들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대륙횡단에서도 그나마 연결이 가능한 북아메리카대륙을 비교하자면 동서4000km(10,185里)정도가 되어 흔히들 만리(萬里)정도가 되는데 이곳도 미시시피강을 횡단한다는 자체가 태평양과 상응하게 반응한 서양인들 입장에서 로키산맥이란 해발 4,000m 정도의 험준한 산등성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단히 넘어 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왜냐하면 서양인들이 북아메리카대륙에 들어온지가 1500년이라면 거의 대륙횡단철도가 1869년에 가능했던 것을 보면 거의 400년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인간이 사용하던 원시 이동수단으로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묘사는 언제든지 가능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렴움이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에서 실제로 운송회사들이 태평양을 마음놓고 횡단하였다고 볼 수 있는 시기는 대체로 1914년 8월 15일 파나마운하(Panama Canal)가 완성되고 난 후부터라고 했다.서양인의 역사 전반에는 자연의 무서운 힘을 너무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때문에 현재 지형을 바탕으로 신라를 대입하면 소아시아에서 한반도까지의 거리가 20,000리(里)(8000km)가 되며 유럽 포르투갈에서 한반도까지의 거리 25,000리(里:10,000km)가 됨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었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는 도저히 도식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이렇듯 난해한 문제가 있자 그때 그때 마다 물길을 타고 옮겨갔다고 둘러 된다.10세기 통일신라 때, 아랍과의 통교가 가능했던 기록을 보면 본 블로그 글 "알타이(altai)가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3"에서 아랍의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Muḥammad Ibn Aḥmad al-Maqdisῑ)의 “창세와 역사서(966)”에 나오는 기록에서“중국 동(東)쪽에 신라(新羅)가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이 공기가 맑고 재부(財富)가 많으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이 또한 양호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내용과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라고 한 기록을 인용한바가 있다.즉 금이 대량으로 생산되던 곳이다.대량이라는 잣대는 바로 산업혁명의 발단이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골드러시의 역사상황이 바로 진실 역사의 표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야 역사를 바르게 풀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때문에 이 글에서 알타이를 글쓴이는 로키산맥이라고 결론지었다.Turkic languages altin means gold and dag means mountain. "alt" (gold) and "tai" (suffix - "with"; the mountain with gold) "Altai" means "Gold Mountain" in Mongolian알타이는 몽골어로 금산(金山;gold with, mountain)이다.본 블로그 글 "금산(金山)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의 지명역사사실http://blog.daum.net/han0114/17050531"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샌프란시스코의 옛 지명이 금산(金山)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아랍인들이 중국이라고 하는 설명에서 굳이 주석을 달아 동아시아대륙의 신중국을 강조해야 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중국의 동쪽이라 한 사실에서도 현 동아시아대륙을 배제 하면 지형방향이 분명치 않다는 사실과 천자가 거했다는 큰 도시정도의 역사 인식에서 중국이 결코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점도 우리는 인식해야 할 문제이다.때문에 현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이 존재하는 곳을 대입하면 혼란만 생긴다.근세기에 의도적으로 서양역사학자들이 중국의 실체를 부당하게 확대시켜 동양 역사자체를 가늠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어쩌면 삼한역사를 대체용으로 부각한 면도 없지 않다.이러한 역사프레임은 바로 삼한역사가 동아시아대륙 한반도에 고착시켜야 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본 블로그 글 "무열왕과 문무왕은 칼리프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392"와 사산왕조(Sassanid Empire)의 두 여제와 신라(新羅)의 두 여왕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8" 글에서도 아랍통일이 곧 신라통일로 비춰진다는 사실을 알렸고 당시에 비잔티움제국에서의 연합이나 연방형태에 있었다고 볼 때 무열왕이 통일신라를 구축했던 제왕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과 알리(Ali ibn Abi Talib:656-661)가 아랍제국을 통일한 사실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였으며 사산왕조의 푸란도흐트 (여제)와 아자르미도흐트(여제)가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진덕여왕(眞德女王)과의 동일인물이라고 한 사실에서도 결코 동아시아대륙 존재설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때문에 신라와 아랍이 통교가 가능했던 것은 하나의 체제라는 의미이다.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이와같은 설명은 단번에 아랍과 신라가 같은 체제의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몇몇 자료에 보면 서양역사(western history)를 학자들 간에 고전고대시대이니 중세시대이니 따위처럼 시대구분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이 유럽역사의 근원적인 문제를 들어내는 것이고 17세기 유럽이니 18세기 유럽이니 하는 것과 같이 세기별 구분을 할 수밖에 없다거나 1, 2차 세계대전과 같이 현재 큰 사건주제로 나누어 시대를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등은 유럽역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사가 무엇인가 허술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세계사에서 오리엔트문화라는 것은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집트문화, 그리스문화와 로마문화전부가 그 범주내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유럽사 기원을 세울 수 있었던 바탕이 되고 서양인의 보루라고 알려진 그리스문화와 로마문화역사에서 중요한 끈은 오리엔트역사에서 찾았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지금까지 유럽역사를 정리한 것을 보면 먼저 고대이집트(Ancient Egypt:BC3100-BC332)를 발판으로 그리스문화를 그 중심에 넣었고 그 다음 고대그리스(Ancient Greece:BC1100-BC146)를 이어가고 지금의 이탈리아반도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제국(Ancient Rome:BC8-AD1453)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본 블로그 글 "사산왕조(Sassanid Empire)의 두여제와 신라(新羅)의 두여왕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8"에서 지적한 사실이지만 서로마(西羅馬)는 백제(百濟)와 계보가 동일선상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과 또한 본 블로그 글 "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494"에서 동로마 비잔틴제국은 통일고려라 하였던 것에서 중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왜 이런 역사현상들이 겹쳐 지적될까.바로 유럽사와 삼한역사가 겹쳐질 수밖에 없는 역사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유럽사의 시발이라고 하는 고대이집트의 시작년도가 기원전 3100년이라 하는 것도 이 시기가 삼한역사로 따진다면 신시시대(神市時代:BC3897-BC2333)10대 독로한(瀆盧韓) 갈고(葛古:BC3071-BC2971)시대이나 신시시대의 시작년도는 그보다 약 800년 정도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신시시대자료를 보면 갈고(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환웅은 배달국의 10대 환웅으로 기원전 3,171년에 등극하였으며 갈고 환웅은 서쪽 변경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충돌이 끊이지 않음을 염려하면서 갈고 환웅은 사신을 보내 신농씨(神農氏)를 문책하자 사죄하였고 제후국으로 조공을 바치면서 유웅국(有熊國)의 승인과 자치권을 요구하자, 특사를 파견하여 공상(空桑)을 국경으로 하도록 승인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공상협약(空桑協約)이라 하며 이 공상의 동쪽이 우리 쪽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北山经》:“空桑之山,无草木,冬夏有雪。空桑之水出焉,东流注于滹沱。” 空桑之山产琴瑟之材。북산경에는 "공상은 산으로 초목이 없으며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눈이있다”라 하였고 "공상에서 물이 나는데 동쪽으로 흘러 호타(滹沱)에 쏟아진다."하였고 "공상의 산에서 생산되는 것은 금슬의 목재이다."라 하였는데 금슬(琴瑟)을 거문고와 비파라 하는데 비파를 호금(胡琴:비파)이라 하는 것은 삼한의 악기이며 유럽인들이 즐겨사용하는 바이올린이나 비올라로 변천된 것이 아닌가 한다.본 블로그 글 "가문비나무-서양관악기의 재료가 된 고려운삼(高麗雲杉)http://blog.daum.net/han0114/17050074"에서 밝혔듯이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콘트라베이스 등 악기의 재료가 가문비나무(雲杉)를 말하는데 바로 고려운삼(高麗雲杉:Picea orientalis (L))의 생산지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펜실베이니아 체스터(PENNSYLVANIA CHESTER)와 코네티컷의 페어필드 카운티(Fairfield County)이다.델라웨어 강(Delaware River)과 허드슨 강(Hudson river)을 나일강과 비견될 수 있지만 우리가 잘 살펴야 할 이야기다.이어 공상협약은 이후 350여년간 잘 지켜졌으나 헌원(軒轅)의 반란으로 인해 무산되었다고 알려지는 것이다.신중국사는 헌원황제(軒轅黃帝)를 하화(夏華)족의 시조라 하는 것이며 이를 유럽사에 대입하면 이때가 고대이집트의 하(下)이집트지역의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를 진압했다는 사실에서도 갈고 환웅(桓雄)이 당면했던 사실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다.이러한 대입적 사실에서 보면 당시 지상에서 신(神)을 대신한다는 의미인 파라오(Pharaoh)라 한 것이나 이 파라오를 또 다른 명칭으로 '라(Ra:羅)즉 태양신의 아들'이라 한 사실, 그리고 신시시대 환웅과 비교하더라도 존엄성이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유럽역사는 정사이고 우리의 삼한역사는 신화라고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이야기다.환웅역시 태양신 탱그리의 지상 아들이 아닌가.다시금 논하지만 유럽사의 근원적인 문제를 지적한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에서 주장한 사실을 반드시 감안해야 할 이야기로 고대이집트, 고대그리스, 고대로마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것으로 이러한 역사들은 15세기 바로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만든 음모라 한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글쓴이는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본 주제 박하에 대한 생물학적 근원을 찾아 들어가고자 한다.2.신라박하(新羅薄荷)와 유럽박하고려 때의 박하를 이두향명(吏頭鄕名)으로는 방하(芳荷)라고 했고 이것을 영생(英生), 야식향(夜息香), 번하채(蕃荷菜), 인단초(仁丹草), 구박하(歐薄荷), 금전박하(金錢薄荷), 남박하(南薄荷), 승양채(升陽菜), 오발활(吳菝活), 발활(菝活)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가 있는데 현재 나타나고 있는 박하에 대한 총체적인 이름들이다.「蔢」字在《康熙字典》的解释【申集上】【艸字部】蔢【唐韻】薄彼切,音婆。蔢蔢,草木盛貌。又【集韻】步臥切,音𠴸。【玉篇】蔢𦽅,藥名。○按薄荷,見《本草綱目》。詳荷字註。其薄字或作菝,或作番,或作蔢,或作𦽮,皆方書傳寫之譌,不必拘泥也。 백과사전을 보면 박하(薄荷)는 고려시대에는 향기롭다고 방하(芳荷)라고 불렀고 인도 지역에서 ‘파하’라고 부르는 것은 산스크리트어(Sanskrit)에서 유래한다고 했으며 15세기 초[사성통해(四聲通解)]에서는 영생이란 우리말이 기재되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의[훈몽자회(訓蒙字會)]채소편에서는 다시 박핫 파(蔢), 박핫 하(𦽅-초(艸) 두가 있는 하(閜)자)자로 기재했다라고 설명된다. 현재 신중국 베이징 발음은 박하를 보-거[bò‧he]에 가깝다.발음상 산스크리트어가 오히려 우리나라 발음과 더욱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여튼 이렇게 이름이 다양했다는 것은 그 만큼 옛 생물학적 분류에서 종류가 많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며 분류학적으로도 매우 민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산림경제 제4권치약(治藥) 박하(薄荷) 영생이 圃中種蒔。可生啖。亦可作茹。夏秋採莖葉。暴乾入藥。本草포전(圃田)에 모종하여 심는다. 생으로 씹을 만하며 또한 나물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여름과 가을에 줄기와 잎을 채취하여 볕에 말려 약에 넣는다. 《증류본초》해동역사 제26권물산지(物産志) 1 초류(草類) 박하(薄荷)○ 신라의 박하는 줄기와 잎이 깨와 같은데 뾰족하면서 길며, 겨울을 나도 뿌리가 죽지 않는다. 여름과 가을에 줄기와 잎을 채취하여 햇볕에 쬐어 말린다. 신라 사람들은 이를 차(茶)로 만들어 마신다. 《본초도경(本草圖經)》위의 산림경제와 해동역사에 나오는데 먼저 산림경제는 박하를 영생이라 하였고 생으로 씹을 수 있고 나물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하였으며 해동역사에서는 신라박하가 있어 줄기와 잎이 깨와 같은데 뾰족하면서 길며 겨울에 뿌리가 죽지 않는다고 설명되며 신라사람들은 이를 차로 만들어 만신다고 기록되어 있다.이 깨와 같다는 내용은 신라박하의 특성을 말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물론 이 깨는 우리가 차조기라 하는 것이다.또한 박하를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 보면 재배하는 약재(藥材)라 하여 영생이[薄荷]이라 하였고 조선(朝鮮)땅 경기(京畿), 충청도(忠淸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에서 약재로 생산된다고 기록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세부적으로 각 지방으로 들어가 고을, 마을지명을 살펴볼라치면 더 이상의 들어갈 수가 없다.즉 세부적인 고을 마을 상황은 사라지고 없다.아예 세종지리지를 편찬하면서 빼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세종실록 지리지 상황이 그렇다.때문에 1454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 현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원본이 아니라 근세기 동양사가 만들어지면서 새롭게 짜집기하거나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문이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다.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조선왕조실록 지리지의 각종 생물자료들이 이렇게 기초가 부실하다는 것은 자료통계라는 관점에서 정확할 수 없다는 명확한 한계를 알리는 것이다.글쓴이가 지금까지 생물학적 분석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가장 기록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하는 조선왕조실록의 명제는 여기서 거론치 않더라도 왜 세종지리지가 서양 생물분류체계만큼의 세밀함을 따라 갈 수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어떻게 생물학적 토종식물들을 파악함에 있어 고을 현(縣), 마을 동(洞)단위의 정확한 데이터가 없이 그 보다 상위인 도(道)단위의 데이터가 완성될 수 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이것만 보더라도 조선왕조실록 지리지를 포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등 사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는 듯하고 실제론 한반도에 적용될 수 있는 것만 추려 간추린 것이라고 보지않을 수 없다.그런데 한치윤(韓致奫;1765-1814)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를 서술한 역사서 해동역사(海東繹史)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초류(草類)편 박하 기록에는 놀랍게도 신라박하(新羅薄荷)라는 이름이 나타난다.이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위해 본초강목을 살펴보니 분명 아래 신라박하의 설명이 있다.[本草綱目]時珍曰︰按蘇恭注薄荷云︰一種蔓生,功用相似。蘇頌《圖經》云︰胡薄荷與薄荷相類,但味少甘,生江浙間,彼人多以作茶飲,俗呼為新羅薄荷,《天寶方》所用連錢草是也。據 二說,則積雪草即胡薄荷,乃薄荷之蔓生者爾。又《仙庚辛玉冊》云︰地錢,陰草也。生荊、楚、江、淮、閩、浙間,多在宮院寺廟磚砌間,葉圓似錢,引蔓鋪地,香如細辛,不見 開花也。[번역풀이]말하길 안소공(按蘇恭)이 박하라는 것은 일종 덩굴식물과 기능이 비슷하다 하였다. 소송(蘇頌) 도경[圖經]에서 이르길 호박하(胡薄荷)는 박하와 비슷하다. 단맛이 적다는 것이 구별되고 강소(江蘇)와 절강(浙江)사이에 자라며 많은 사람들은 차를 만들어 마시는 것으로 이것을 예부터 신라박하(新羅薄荷)라고 칭했다.[天寶方], 소위 연전초(連錢草)와 같이 사용된다. 그것의 두 가지 근거는 즉 적설초(積雪草)가 호박하(胡薄荷)로서 박하는 덩굴식물이다. 또한 선경신옥책[仙庚辛玉冊]에 축축하고 습기가 많은 땅에 자라고 그늘에 돋아나는 풀이다. 형(荊), 초(楚), 강소(江蘇), 회수(淮水)와 회하(淮河), 복건(福建), 절강(浙江)사이에 나고 궁궐, 내전, 절이나 관청 또는 사당의 벽돌과 섬돌사이에 많다. 둥근 잎은 동전과 같고 지면에 덩굴을 펴고 세신(細辛)의 향기와 같고 꽃이 피는 것은 볼 수 없다.명대(明代) 이시진(李時珍:1518-1593)이 저술한 의서(醫書)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의 박하편에 나타나는 한 문장을 풀어보면 “당대(唐代) 소공(蘇恭)에 따르면 박하는 식물의 줄기가 덩굴져 나는 종류로 효용이 서로 비슷하다 하였고 도경(圖經)에서 말하길 호박하(胡薄荷)도 박하와 비슷하나 맛이 조금 달고 강소(江蘇), 절강(浙江)간에 나며 많은 사람들은 이를 차를 만들어 마시는 것으로 민간에서 부르기를 신라박하(新羅薄荷)라 한다.”한 것이 보인다.송나라 소송(蘇頌:1020-1101)의 저서 도경(圖經)에서 호박하(胡薄荷)라 한 것은 바로“신라박하”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해동역사 기록과 마찬가지로 신라 사람들은 박하를 차(茶)로 만들어 마신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서양 즉 유럽인과 생물수준이 거의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이 호박하(胡薄荷)란 무엇인가.호박하의 호(胡)가 유별나게 눈에 들어온다.본 블로그 글 "호(胡)는 북아메리카 대호(大湖)를 지칭한 것http://blog.daum.net/han0114/17050603"에서 호의 파자가 월지국(月支國), 또는 달지국(達支國)에 이어 초승달 문양의 아사달(阿斯達)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서 동쪽을 뜻하는 의미가 강하고 본 블로그 글 "석유(石油:petroleum)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7"에서 호천(胡天)을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광명(光明)의 신(神)이라 한 것과 같이 신라를 호라 한 것이나 아랍을 흡수한 유럽을 호라 한 것이나 같고 아랍의 신이 태양신을 믿는 것과 같이 태양이 뜨는 동쪽 하늘을 말하는 것은 모두 같은 종교적 신앙적인 문제가 존재한다고 정리한바가 있다.세부적으로 찾아보니 호박하(胡薄荷)는 바로 유럽박하라고 하는 학명 멘타 풀레기움(Mentha pulegium)이고 이를 별명으로 페니로얄(Pennyroyal)이라고 한다.놀랍게도 호(胡)에 공통적으로 상징되는 것은 유럽임을 알 수가 있다.이 호박하(胡薄荷)는 모든 자료에 유럽박하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Greek)와 로마(Rome)에서 역사적으로 생육한 식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또한 명확히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이름 자체만으로 신라와 유럽이 강하게 충돌하고 겹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唇萼薄荷(学名:Mentha pulegium),又称普列薄荷(Pennyroyal)、除蚤薄荷、胡薄荷它也是一种传统的烹饪调料、草药和堕胎药。科學分類界: 植物界 Plantae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目: 脣形目 Lamiales科: 脣形科 Lamiaceae屬: 薄荷屬 Mentha種: 唇萼薄荷 M. pulegium二名法Mentha pulegium(L.) 위 학명 분류상황은 바로 호박하라고 하는 학명 멘타 풀레기움“Mentha pulegium”의 신중국자료인데호박하(胡薄荷)라 하고 유럽박하로 알려지고 있는 이 종(種)을 일반적으로 페니로얄(Pennyroyal)이라고 하며 다른 이름으로 순악박하(唇萼薄荷), 제조박하(除蚤薄荷)라 하고 전통적으로 요리의 향신료, 약초(허브)와 낙태 유도하는 월경촉진제(Emmenagogue) 또는 인공 임신 중절약(Abortifacient)으로 쓰였는데 흥분을 상승시키고 발한을 촉진하는 가정의학품으로 사용되었다고 기록에 나타난다.백과사전에 의하면 박하의 주요 성분 박하유(薄荷油)가 해열(解熱), 소염(消炎), 건위(健胃), 담즙분비(膽汁分泌) 촉진(促進) 및 위장(胃腸) 평활근(平滑筋)억제, 호흡기도(呼吸氣道)의 점액분비(粘液分泌)증가, 중추신경(中樞神經)흥분, 자궁수축(子宮收縮)등에 약리작용이 있다고 모든 자료에서 설명된다.이 종(種)은 1758년에 생물아버지라고 통칭되는 린네(Carl Linnaeus:1707–1778)가 학명을 부여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린네는 박하에는 한 가지 종(種)밖에 없다고 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가 있고 만약 한가지 종이 이 멘타 플에기움이라면 호박하(胡薄荷)는 실제로 많은 박하종 중에 원종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된다.그러나 호박하가 적설초라 하는 점과 꽃이 피는 것은 볼 수 없다 한 점이 이상하다.호박하의 종명(種名) 플에기움'pulegium'은 벼룩이라는 뜻의 라틴어인 풀레스'pulex'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벼룩을 물리치는데 최고 puleium+regium(called as being good against fleas)라는 뜻의 합성어로서 옛날부터 구충제로 널리 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Pennyroyal /Pen`ny*roy"al/, n. [A corruption of OE. puliall royal. OE. puliall is ultimately derived fr. L. puleium, or pulegium regium(so called as being good against fleas), fr. pulex a flea; and royal is a translation of L. regium, in puleium regium.] (Bot.)An aromatic herb (Mentha Pulegium) of Europe; also, a North American plant (Hedeoma pulegioides) resembling it in flavor.[1913 Webster]본래 박하의 속명인 멘타(Mentha)는 그리스의 여신 멘테(Menthe)가 박하식물로 부활한 것이라 하여 박하 학명에 멘타(Mentha)를 사용한다고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유럽인들의 박하와의 상징성이 매우 강하게 부각되고 있으며 그리스 신화에서도 지옥의 신, 하데스(Hades)가 왕비인 페르세포네(Persephone)의 눈을 피해 하데스(Hades)는 요정이었던 민테(Minthe)를 달콤한 향기가 있지만 볼품없는 꽃을 가진 식물로 만든 것이 박하라고 전해지고 있다.이 모든 이야기들이 박하가 그리스신화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위 분포지도"Discover Life" 자료는 남북아메리카대륙과 유럽대륙, 그리고 오세아니아대륙을 점으로 표시하고 동아시아대륙에는 열도에만 유일하게 표시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물론 한반도는 표식이 없다.반면 북아메리카대륙 미국영토를 기준으로 호박하(胡薄荷)가 자생한 곳을 표시하고 있는 곳은 동부의 노스캐롤라이나, 펜실베니아, 매릴랜드, 델라웨어, 뉴저지로 나타나고 서부는 오리건, 워싱턴, 캘리포니아, 애리조나로 표시되고 있는데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캘리포니아이다.그렇다면 기존 DNA 분포지도가 세밀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호박하가 애용되었던 유럽을 어디로 볼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유럽박하라고 하는 호박하(胡薄荷)가 유럽대륙의 로마와 그리스를 중심으로 기원하였다는 사실을 전제 할 때 현재 여러기관에서 발표한 "DNA 분포지도"에는 로마가 있었던 이탈리아반도와 그리스(Greece)가 있었던 발칸 반도 지역에 멘타 플에기움(Mentha pulegium)분포표시가 다른 유럽제국들과 비교하여도 미미하게 나타나고 아예 나타나지 않는 극단적인 면이 없지 않다.이것은 로마와 그리스의 존재한 위치가 잘못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의심케 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물론 이런식으로 대입에 무리가 있다 하겠지만 본 블로그에서 식물의 근원지는 찾아 대입해 본 결과 이런 이상한 점을 무수한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과 이와같은 결과는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오히려 현재 유럽대륙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을 대입한다면 로마와 그리스는 호박하의 분포지도를 참고 했듯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와 동부로 확실히 양분되어 뚜렷하게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지하지 않으면 안된다.이것이 바로 글쓴이의 매우 중요한 세계삼한역사분석의 결과다.이를 진실역사와 절대적으로 부합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겠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수많은 과학적 분석에서 그렇게 비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가 있다.호박하이며 유럽박하라고 하는 식물분류체계를 보면 피자식물문(被子植物門:Magnoliophyta), 쌍자엽식물강(雙子葉植物綱:Magnoliopsida), 꿀풀목(脣形目:Lamiales), 꿀풀과(脣形科:Lamiaceae), 박하속(薄荷屬:Mentha)으로 나눈다.전자에서 속명 플에기움의 어원풀이 "puleium+regium" 에서 발견된 유럽페니로얄과 다른 미국산 페니로얄이라고 하는 박하종류가 있는데 학명 "Hedeoma pulegioides"이다.호박하라고 하는 유럽페니로얄의 분포지가 대부분 유럽대륙을 표시하고 있는 사실에서 볼 때 특정구역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포괄적인 형태로 나타나 진위를 밝히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그만큼 유럽이란 지역을 나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그러나 한편으로 학자들간에 박하의 분류체계가 정립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페니로얄 학명 "Hedeoma pulegioides"이 해답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아래에 적시한 미국페니로얄이 그것이인데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분포지로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어쩌면 세종지리지가 언급한 경기(京畿), 충청도(忠淸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에서 약재로 생산되었다고 하는 분포지와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하지만 이 학명은 이상하게도 애초부터 우리나라 식물백과사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미국페니로얄[American pennyroyal]Hedeoma [genus name] is a corruption of Greek hedyosmos (mint) which itself is derived from Greek hedy- (agreeable, pleasant, delightful, sweet) and -osme (smell, fragrance) components with reference to the leaves. [See Hedeoma.]Hedeoma pulegioidesKingdom: Plantae (unranked): Angiosperms (unranked): Eudicots (unranked): Asterids Order: Lamiales Family: Lamiaceae Genus: Hedeoma Species: H. pulegioides Binomial nameHedeoma pulegioides(L.) Pers. Hedeoma pulegioides distribution.png SynonymsCunila pulegioides L.Melissa pulegioides (L.) L.Ziziphora pulegioides (L.) Desf. 헤데오마(Hedeoma:屬,1806)란 속명은 1806년 유럽중부 폴란드 포메라니아(Pomerania)의 균류학자 크리스티안 페르손(Christiaan Hendrik Persoon:1761-1836)이 명명한 것으로 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hedyosmos] "박하"라는 의미가 있고 그리스의 [hedy] "쾌적한, 상쾌한, 유쾌한, 향기로운" 의미와 [osme] "냄새, 향기"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향기로운 냄새란 뜻이다.이 또한 그리스와 연결되고 있다.특히 크리스티안 페르손은 본 블로그 글 "배롱나무-백일홍(百日紅, Lagerstroemia) 의미하는 인도위치 http://blog.daum.net/han0114/17049525"에서 그가 남겨놓은 식물학 자료가 특별한게 없다는 것과 대체로 린네가 1758년 명명한 학명을 후순위에서 명명한 사실이 많은데 북아메리카대륙의 식물들을 아시아지역으로 근원지를 변경한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이 헤데오마속명 또한 1806년에 명명했고 헤데오마(Hedeoma)를 다른이름으로 가짜 페니로얄(mock pennyroyal), 북미인디언 여자박하(squaw mint), 금계국(tickweed), 고약한 향(stinking balm), 모기초(mosquito plant), 거짓 페니로얄(false pennyroyal), 미국 거짓 페니로얄(American false pennyroyal)등으로 불리며 화학식[C10H16O]의 무색기름 풀레곤(pulegone)성분이 풍부한 에센셜 오일이 추출되는 것으로 상쾌하며 강한 허브향과 민트향의 향기를 가진것으로 설명된다.특히 이 종은 독성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는데 풀레곤 성분은 에폭시드(epocide)로 대사되어 간에 독성이 작용함을 알 수 있고 페니로얄 복용과 관련된 사망 사고들이 보고 되었으며 풀레곤 24g에 상당하는 양을 복용한 후에 사망한 18세 여성의 경우에서 이 여성은 혼수상태 또는 떨리는 증상을 반복했고 메스꺼움과 복통으로 괴로워했으며, 대량의 간 조직 괴사와 신장기능 부전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native to eastern North America, from Nova Scotia and southern Ontario west to Minnesota and South Dakota, and south to northern Georgia and Arkansas.미국레니로얄이라고 하는 이 종(種)의 분포지로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의 노바스코샤(Nova Scotia), 온타리오남부(southern Ontario), 서부의 미네소타(Minnesota),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남부로는 조지아북부(northern Georgia), 아칸소(Arkansas)로 나타난다.미시시피강의 이동쪽이다.3.서양박하 페퍼민트백과사전을 보면 박하의 원산지를 중국으로 보고 태고시대에 중국에서 인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된 것을 서양박하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이것은 동아시아대륙 박하가 유럽박하도 아니고 서양박하가 되었다는 이상한 설명이 된다.물론 서양박하와 유럽박하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우리가 보기에는 명칭이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서양박하를 페퍼민트(Peppermint)라 하고 페니로얄(Pennyroyal)을 유럽박하라 한다.이 유럽박하를 신라박하 또는 호박하(胡薄荷)라 한 것이다.아무리 감추려 하지만 호(胡)가 가진 역사의미가 "UNITED"를 등식하고 그렇다면 연합이며 연방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유럽역사가 탈취하고 있는 세계삼한역사의 중심적인 것을 숨길 수가 없다.어쨌던 현재 분류체계에서 서양박하는 페퍼민트(Peppermint)라 하는 학명 멘타 피페리타[Mentha piperita(L.)]로 정리된다.한문으로는 랄박하(辣薄荷) 또는 호초박하(胡椒薄荷)라 하는 것으로 수생박하(水薄荷:Mentha aquatica)와 녹양박하(绿薄荷:Mentha spicata)의 교잡종으로 알려진다. 페퍼민트(Peppermint) [Mentha ×piperita L. Georgia Clarke Athens] water mint[수생박하(水薄荷:Mentha aquatica L.)] Spearmint[녹양박하(绿薄荷:Mentha spicata L.]수생박하(水薄荷:Mentha aquatica)와 녹양박하(绿薄荷:Mentha spicata)의 교잡종이라는 것은 잡종(雜種)과는 다른 것으로 동일 종 내에서 서로 다른 품종이나 재배종 사이의 교잡종을 말한다.수생박하의 원산지는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남아시아로 나타나며 발트해 스웨덴과 핀란드의 지역이 기원이다.녹양박하의 원산지는 [native to much of Europe and Asia (Middle East, Himalayas, China etc.)]유럽과 중동, 히말리아 그리고 아시아로 통칭된다.위 박하 세 그림 중 제일 상위 표본그림은 페퍼민트(Peppermint)이며 그 아래 두 그림은 수생박하와 녹양박라 하는 것으로 각각 어떤 형태의 박하인지를 알 수 있게 게시한 것이다.특히 제일 상위표본 서양박하인 학명 멘타 피페리타(Mentha piperita(L.))는 박하표본 지역이 놀랍게도 북아메리카대륙 조지아주(Georgia) 클라크카운티(Clarke County)의 군소재지 아테네이다.바로 그리스 아테네란 지명이 나타난다.그러나 지금은 아테네라 하지 않고 '애선스'라 발음하는데 이것 역시 의심받을 만한 자료이다.이것은 미국인을 포함한 서양인들이 실제 아테네를 감추려고 무슨 짓을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클라크 카운티는 미국도시가 그러하듯 그 이전 역사는 인디언 역사라 하여 깡그리 무시되고 생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카운티가 1801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면서 선을 긋고 있으며 그 이후역사는 다 아다시피 미국독립전쟁과 연결시켜놓고 있다. 이곳은 공교롭게도 아편전쟁(阿片戰爭:Opium Wars:1839-1842)이 일어나던 시기 1841년에 철도가 건설되었고 북부군인들은 이곳에 1866년 초까지 주둔하였으며 1871년 11월 24일에 주 군 소재지가 왓킨스빌(Watkinsville)에서 아테네(Athens) 즉 애선스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애선스는 곧 아테네(Athens)라 생각되기도 하다.린네가 이 페퍼민트(Peppermint)라 하는 학명 멘타 피페리타[Mentha piperita(L.)]를 하나의 종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페퍼민트는 현재 교잡종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점이 린네가 말하는 하나의 종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렇다면 린네가 말한 하나의 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辣薄荷(学名:Mentha × piperita,又名胡椒薄荷,英语:Peppermint)唇形科年生草本植物,是一種被廣泛種植的杂交薄荷,原产于欧洲,可用於食物的調味料。这个薄荷品种是由绿薄荷(Mentha spicata,英语:Spearmint)与水薄荷(Mentha aquatica,英语:Watermint)杂交而成的.科學分類域: 真核域 Eukarya界: 植物界 Plantae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目: 脣形目 Lamiales科: 脣形科 Lamiaceae屬: 薄荷屬 Mentha種: 辣薄荷 M. × piperita二名法Mentha × piperita L. 위는 서양박하라고 하는 페퍼민트(Peppermint)의 DNA 분포지도이다.글쓴이가 처음 서양자료를 통해 밝혔던 것들은 그래도 감추려 하지 않았을 때 데이터라 솔직히 건질 것이 많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이러한 역사찾기 움직임을 마치 인식하듯이 얼마전부터 초기의 자료들을 명형시켜 명확한 사실과 지리적 상황을 알 수 없도록 랜덤(random)처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현재 3-4년전에 보는 자료와 많이 다르다.위 지도를 보면 중국에서부터 넘어들어간 것이 서양박하라 하였던 것과는 달리 중국대륙과 인도아대륙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와 유럽전체가 빽빽하게 밀집상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와같은 현상에서 과연 중국과 인도가 현재 위치가 맞는지 의심하는 세계삼한역사관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박하는 옛부터 설사약으로 달여 먹는 풍습이 있었고 습기가 적은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점으로 보아 아주 오래 된 작물로 나타나며 BC1000∼600년경에 이미 이집트에서 재배한 흔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4.일본박하 이야기Mentha arvensis(L.) – corn mint, wild mint, Japanese peppermint, field mint, banana mint野薄荷也称土薄荷、玉米薄荷,是薄荷属下的一种。其范围遍及环北方带,在有湿润土壤的欧洲、西亚、东亚都有分布,东至西喜马拉雅山脉和西伯利亚的东部,以及北美科學分類界: 植物界 Plantae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目: 脣形目 Lamiales科: 脣形科 Lamiaceae屬: 薄荷屬 Mentha種: 野薄荷 M. piperita二名法Mentha arvensis(L.) 일본박하는 한반도 박하와도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수많은 변종을 가지고 있다.백과사전에서는 변종들의 명칭을 야식향(夜息香), 번하채, 인단초(仁丹草), 구박하(歐薄荷)라 하는데 구박하라는 것은 오늘날 구(歐)를 유럽이라 하기 때문에 또 하나의 유럽박하인데 위 페니로얄(Pennyroyal)과 혼란이 있을 수 있는 이름이다.그러나 글쓴이가 찾아본 결과 구박하(欧薄荷)는 학명 "Mentha longifolia (L.) Huds.(syn. Mentha sylvestris)"로 나타나고 말민트(horse mint)별칭이 붙어 있는데 분포지가 아프리카북부와 남부로 나타나며 이를 유라시아 야생 박하(longifolia)라 하는데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로 귀화한 식물로 나타난다.위자료는 멘타 어벤시스(Mentha arvensis)의 분류자료와 분포지도이다.멘타 어벤시스는 일본박하라고 알려지는데 실제로 현재 열도를 일본이라 하기 때문에 일본열도용은 학명 M.arvensis var. piperascens Malinv. ex L. H. Bailey 이라 하여 자연적으로 변이 된 학명에 var. 가 붙어 변종(變種, variety)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이것은 어쩌면 근대에 들어 동아시아품종(種)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 것이다.특히 백과사전을 보면 한반도(韓半島)에서는 박하를 이 한 종(種)만을 선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일본박하(Mentha arvensis L.) 또는 그 종간잡종(種間雜種)등을 말하는 것도 이상하며 이것의 지상부(地上部:above ground)를 사용한다고 되어 있으나 확실치 않다.마찬가지로 일본은 일본박하((Mentha arvensis Linné var. piperascens Malinvaud ex Holmes.1882)를 정식으로 사용하며, 중국은 신중국 대륙만의 중국박하(Mentha haplocalyx Briq.1914)를 사용한다고 백과사전에 정리되어 있다.중국박하의 학명은 제네바(Geneva)와 베를린(Berlin)에서 자연과학 교육을 받았고 꿀풀과의 털향유(鼬瓣花屬:Galeopsis)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 스위스식물학자 겸 음악가 존 브리케(John Isaac Briquet:1870-1931)에 의해 1914년에 명명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을 박하의 세계최초 기원지라고 설명되는 것과 괴리가 있다.때문에 적어도 1914년까지 중국박하의 학명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일본박하 이외 명칭으로 이를 야박하(野薄荷), 토박하(土薄荷), 옥미박하(玉米薄荷)라 하고 다년생(多年生)초본식물으로서 습윤(濕潤)토양의 유럽, 서아시아, 동아시아와 동서(東西)히말라야산맥, 시베리아동부 그리고 북아메리카대륙을 분포지로 하는 이 종은 1758년 린네가 명명했던 것이 분명한데 무엇때문에 일본박하라 하였는지가 궁금하고 전자에서 설명했지만 현재 열도일본종은 놀랍게도 일본박하의 변종인 것을 말하고 있는데서 적지않는 혼란이 있다.실제로 일본은 열도에 존재하는 일본이 맞는데 어찌하여 일본박하의 변종을 열도일본에 지정하고 원종은 오히려 북아메리카대륙을 분포지로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궁금한 것이다.그렇다면 실제로 일본은 열도일본이 아닌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가 의심스러운 것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이를 밝혀야 할 책무가 있다 할 것이다.arvensis[adjective]a Latin word meaning ‘of the fields’, used in many genetic names of plantsmentha arvensis[n]European mint naturalized in United States원칙적으로 일본박하의 종명(種名) 어벤시스“arvensis”의 라틴어 의미는 들판이며 많은 식물의 유전자 이름으로 나타나는 멘타 어벤시스(Mentha arvensis)를 일본박하라고 하는 것은 곧 유럽박하(European mint)를 말하면서 나아가 미국 귀화식물이라고 하는 뜻이 더 보태져 있다.유럽박하라 하니 페니로얄과 같이 취급되겠지만 이와는 다른 유럽이주민들의 박하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보면 근원적으로 유럽에서 북미(北美)대륙으로 귀화하거나 또는 이주해 들어간 이민자들에 의해 이식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실제로 미국이주민 즉 유럽인들을 일본(日本)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글쓴이는 일본이란 명칭이 근세기에 유럽인과 미국인들에 의해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근세기들어 워낙 역사전반에 걸쳐 뒤바꿔치가 이루어져 감추진 실체를 찾으려는 힘이 들 수밖에 없다.현재까지의 판단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이민자를 일본이라 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사실상 처음 유럽이민자들은 기존 거주민들의 낯선 이방인들에게 특별한 견제심이 있어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배타적으로 변해 거주민들에게는 험오스러움이 뿌리깊게 각인되었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하며 때로는 거주민과 충돌을 자행했다고 보여진다.실제로 임진왜란은 대조선으로부터 자치형태의 정부권한을 승인받고자 이러한 이주민들의 결집된 반란에 의해 발생된 것으로 그것에 대한 대조선의 강제한 제약이 매우 강했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가 있다.예를 들어 2차세계대전시 영국과 미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잽(jap)이라 하고 경멸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주류로서의 자세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역사주체는 그들이 아니라는데 있다.그럼에도 그들은 일본인들을 경멸한 것이라고 하였을 때 역사주체권에서 오래전부터 각인된 정서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JAP'은 본래 유대계 부유한 여자(Jewish American Princess)를 칭하던 명칭이었으며 이것과 비슷한 정서가 우리 삼한역사에서도 뿌리깊게 남아 있는 일본인들의 습성을 질타하는 일본 놈, 왜놈 같이 지칭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아마도 동서양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부터 관습적으로 습성이 경멸스러운 행위를 하던 도적이나 해적들을 대상으로 칭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인데 역사주체입장에서 거류민들을 대상으로 이런 경멸적인 호칭사용이 가능 했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가 있다.잽(JAP)이라고 하는 의미는 남의 뒤퉁수를 치는 사람을 칭하던가 또는 미국속어에 나타는 것과 같이 'pull a ∼' '갑자기(숨었다가)기습하다로 나타난다.마치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독특한 습성이다.근세기들어 영국(?)인이 가장 경멸적으로 사용했던 것이 열등하고 모자라다(an epithet of inferiority)라고 하는 더치:dutch란 호칭이다.이것은 네덜란드(dutch)와 북아메리카대륙의 주인이 된 미국(米國)을 지정했던 것이라고 판단한다.특히 네덜란드는 프랑스 앙리4세(Henri IV de France,1553-1610,재위:1589-1610)와 잉글랜드 제임스 1세(James I:재위:1603-1625)로부터 배척당하던 종족 위그노(Huguenot)족의 피난지였다는것을 알 수 있어 위그노족의 본거지가 아니었는가 하며 위그노 전쟁(Huguenot Wars:1562-1598)시 위그노인 최대 약 4백만명이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로인해 약 25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상공업자)들이 네덜란드, 영국, 신대륙의 식민지, 프로이센으로 빠져나갔고 그러한 여파로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48)이 발생하였음을 알 수가 있는데 이러한 전반의 요인들이 함께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임진왜란 후 정치적 정리 단계였던 1608년의 기유약조(己酉約條)와 마주친다.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조상이 위그노유민이었다는 사실과 위그노 신자(Huguenot)인 어머니의 특별한 교육은 삼한역사와 깊은 악연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있다.현재 한반도에서 일본박하의 변종을 지정하는 것이나 신중국대륙에서 중국박하(Mentha haplocalyx Briq.1914)를 지정하는 모양들은 근원적으로 동아시아역사 존재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여러가지 역사상황에서 나타나는 이야기다.또한 근원적으로 일본박하(Mentha arvensis)의 영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을 뜻하는 옥수수박하라고 하는 콘민트(corn mint)라 하거나, 야생박하(wild mint), 들판박하(field mint), 바나나박하(banana mint)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지대를 말하고 있다.그리고 최종적으로 백과사전에서는 이 종의 분포지를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산(産)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인해야 할 것이다.5.개박하 이야기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바로 개박하이다.백과사전을 보면 박하 잎을 이용한 채유(採油)를 목적으로 재배가 시작된 것은 1750년경이며 독일은 1770년, 미국은 1812년, 일본은 1817년으로 나타나고 한반도의 경우는 호남지방에 개박하라는 재래종이 있었으며 이 종도 중국을 거쳐 약용으로 매우 오래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나 채유 목적으로 재배가 시작된 것은 1910년경이라 하는 것은 한반도 박하 역사는 그렇듯 오래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이 개박하는 꿀풀과(唇形科:Lamiaceae)의 형개속(荊芥屬:Nepeta)의 캣트민트(Catmint) 즉 고양이박하라고 하는 학명(Nepeta cataria L.)인데 본래 박하속 멘타(Mentha)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貓薄荷(學名:Nepeta cataria L.),又稱貓穗草、荊芥科學分類界: 植物界 Plantae門: 被子植物門 Angiosperms綱: 雙子葉植物綱 Eudicots目: 唇形目 Lamiales科: 唇形科 Lamiaceae屬: 荊芥屬 Nepeta種: 貓薄荷 N. cataria二名法Nepeta cataria L. 개박하는 묘박하(貓薄荷:CAT-MINT, Catnip;Catmint)라 하는데 위는 이것에 대한 DNA 분석 분포지도와 분류체계자료이다.DNA 분석에 의한 분포지도를 보면 동아시아대륙 보다 북아메리카대륙과 유럽지역에 밀집되어 나타나지만 백과사전에는 유럽과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가 원산지이며 프랑스,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재배한다고 설명되고 있으며 묘박하 즉 '고양이박하'에는 고양이가 흥분하게 하는 물질 네페탈락톤(nepetalactone)이 포함되었다고 한다.개박하(Nepeta cataria)는 독일어 켓츠민츠(Katzenminze)Botanik: Pflanze der Gattung Nepeta aus der Familie der Lippenblütler.라하고 박하 꿀풀과(Lamiaceae)의 형개속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멘타속과 다르다.이 학명자료가 칼 폰 린네(Carl von Linne:1707-1778)가 1753년에 발표한 식물의 종(Species Plantarum)에 나타나지만 이미 1738년에 부제(不齊)수상화서[interrupted spike]형개속이라 묘사했었다는 사실을 별도로 설명하고 있다.혹 그는 이 종을 이미 박하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그렇다면 이미 서양박하니, 유럽박하니 일본박하니 하는 따위보다 앞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마치 호박하를 적설초라 하는 것과 같은 종이 다른 박하인셈이다.한국식물생태보감, 자연과생태를 참고하면 고양이에게 물려서 상처 난 곳에 박하를 짓이겨 즙을 바르면 낫는다고 기록했고 박하의 또 다른 한자명 묘박하(猫薄荷)라 한 것과 의미가 같다 했으며 고양이가 박하 종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동서양 모두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을 말하며 특히 개박하 즉 영어명칭 "캣닢(catnip)"이란 단어가 공교롭게도 우리말 '깻잎'과 같다라고 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상해 했다.물론 이것은 깻잎이라고 우리가 호칭하는 것과 관련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캣닢(catnip)을 ‘박하 향이 나는 야생 박하 종류’를 통칭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개박하(Nepeta cataria)와 함께 박하 향이 풍부한 박하속(Mentha)과 인접하는 분류군으로 나누지만 동일한 종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즐겨찾는 깻잎은 분명 들깨(Perilla frutescens var. japonica)의 잎이라고 하는데서 또 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들깨에 대해 본 블로그 글 "차조기(紫蘇:Perilla frutescens)와 북미동부 http://blog.daum.net/han0114/17049661"에서 밝혔지만 페밀라 자소(紫蘇:Perilla frutescens)라고 하는 것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가 원산지라 했다.만약 영어 캣닢(catnip)이 깨잎 즉 차조기와 혼입된 것이라면 어떤 이유에서 의도적으로 분류체계를 다르게 꾸몄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그리고 이 또한 동일하게 개박하 역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가 기원지로 나타난다는데 이상함이 더한다.사실 이와같이 기존 분류체계에서 학명 박하속(Mentha)과 다른 형개속(荊芥屬)의 개박하가 오히려 박하보다 상위 근원지 종(種)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호박하(胡薄荷)를 신라박하라 하고 유럽박하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Greek)와 로마(Rome)박하라 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천보방(天寶方)에서 사용하고 있는 연전초(連錢草)가 그것이라 한 기록과 이 이설(二說)에 의하면 적설초(積雪草), 즉 호박하(胡薄荷)로서 박하(薄荷)의 만생(蔓生)하는 것을 지칭(指稱)한 것이 이것과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연전초나 적설초는 글쓴이가 파악해본 결과 박하속과 같은 꿀풀과(脣形科:Lamiaceae)의 병꽃풀속(活血丹屬:Glechoma)으로 나타나고 이것을 혹은 금전박하(金錢薄荷), 연전초(連錢草)라 하거나, 그 외 활혈단(活血丹), 금전애(金錢艾), 파동전(破銅錢), 적설초(積雪草), 마제초(馬蹄草)라 하는 등 다수의 다른 이명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를 학명 Glechoma hederacea(L.)라 하며 결국 형개속(荊芥屬)과는 다른 종이다.[ground-ivy, gill-over-the-ground, creeping charlie, alehoof, tunhoof, catsfoot, field balm, and run-away-robin.]어쨌든 박하는 유럽과 로마, 그리스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상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혹은 남부로 나타난다.그럼에도 자꾸 유럽을 이야기 하고 서남아시아를 원산지라 하면서 북아메리카대륙에는 이민자들에 의해 귀화식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 따져 들어가면 북아메리카지역 로키산맥(Rocky Mountains)을 근원지로 나타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물론 박하종이 수많은 종류가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지금의 서남아시아, 히말라야, 티벳, 중앙아시아 등은 아시아대륙으로 남아 있고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나타나고 있음도 역사위치관계상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비록 학명 분류에서 속(屬)이 다르지만 박하와 같은 가족이라 하는 병꽃풀속(活血丹屬:Glechoma)도 호박하와 다르지 않고 엄밀하게 따진다면 분류체계적으로 속명이 다른 형개속(荊芥屬)개박하와도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유럽고대국가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서 생성되었고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신라박하라고 하는 전통적인 명칭이 유래하였다 한다면 무리한 접근일까?6.결어정리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토대로 생각해보아도 유럽역사에 포함되고 있는 이집트역사, 그리스, 로마역사전체가 삼한역사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무시될 수가 없다.이러한 본 블로그의 역사사실 주장은 생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기존 편협적인 역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진실가치를 세세하게 밝혀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이다.호박하(胡薄荷)라 하고 유럽박하 또는 페니로얄(pennyroyal)은 상식적으로 우리가 알기론 한반도 역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다.어떤 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박하 향기는 툭!~ 건드리면 머리를 맑게하거나 싱그러운 박하 향기, 상쾌한 향, 아이스크림, 박하사탕, 껌, 담배와 같은 현대인 기호식품의 첨가물로도 쓰인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우리 삼한역사와 깊게 연관되었다고는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사람들이 이 박하를 요리의 조미료, 술의 첨가재료, 허브차, 아로마(Aroma)등에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우리와는 별천지에 이야기인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그러나 박하로 인한 모든 인간 삶의 자취가 놀랍게도 서양인이나 유럽인을 한정시킬 수 없는 그 바탕에는 깊이 삼한역사가 자리잡고 이루어진 삶의 일 부분이라는데서 글쓴이 역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리스신화 헤르메스신(Hermēs)의 아들인 엘레우시스 신의(神儀:Eleusinian Mysteries)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쓴 호메로스(Όμηρος:BC 8C)의 데메테르 찬가[Hymn to Demeter]에 의하면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Demeter)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지상을 헤메다가, 그녀를 친절히 대해주는 사람에게는 농업의 지혜를 주고, 불친절하게 대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렸다고 하는데 가뭄이 든 아티카(Attica)의 엘레우시스의 왕비 메타네이라(Metanira)집에 왔을때 데메테르는 키케온((kykeon)을 대접받았다는 죽이 바로 박하로 만든 죽이다.'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글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비로운 종교의식이었던 엘레우시스 비밀스러운 의식(Eleusinian Mysteries)을 설명하는데 "~비의(秘儀)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사제들을 통해 데메테르 여신에게 봉헌물을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텔레스테리온 성전에 들어서 제일 먼저 입구에 있는 코레 상에 걸어둔 청동 대야에 담긴 정화수에 손을 씻고 입장했을 것이다. 비의(秘儀) 입문의식은 이틀 밤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째 밤에는 신입 신도들인 미스테(Myste)를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들은 하루 동안 금식을 했다가 물, 귀리, 박하로 만든 키케온(kykeon)이라는 죽 같은 음료를 마셨다. 이어 사제들이 가져온 바구니 속의 성물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나서 의례적인 구절을 소리 내어 외었고 사제들을 따라 신성한 노래를 불렀다."다고 되어 있다.또한 고대 아테네 에클레시아(Ecclesia) 도시국가의 시민회의에서 키케온을 마셨다고 되어 있다.그렇다면 키케온은 신라박하로 만든 것일게다.특히 삼한역사 명칭인 코레에 대한 상징성과 일치하는 것은 엘레우시스비의가 치루어진 텔레스테리온(Telesterion)신전(神殿)은 4방 약 55m의 정방형이며 7열7본, 합계 49개의 기둥을 세운 넓은 방으로서 입구에 입상인 코레 상과 그곳에 걸려 있는 청동 대야가 상상된다.코레 상은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봉납된 시원(始源), 태고(太古)를 뜻하는 아르카익기(期)의 제작된 소녀상(少女像)으로 페플로스의 코레(Peplos Kore)라 하는 것이다.이 소녀상이 그리스 신화의 신전 텔레스테리온(Telesterion)입구에 장식되었다는 사실과 그 상에 걸어둔 청도대야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 정화수를 붓고 손을 씻어 정화했다는 것은 매우 신성스럽게 여겼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삼한천신이다. 이미 코레(Kore)에 대해 본 블로그 글 "코라이(korai)는 그리스(Greece)에 어떤 의미로 존재했을까?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3"와 "양배추(Cabbage)는 고려채(高麗菜)라 하였다http://blog.daum.net/han0114/17049610", 그리고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 등 에서 충분하게 개진한 내용이다.이런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고 인류의 삶과 터전에서 녹아 있는 신라박하가 유럽박하라는 사실은 아무리 부정해도 그리스 역사는 결코 삼한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신라박하라 하는 기록이 명대(明代) 이시진(李時珍:1518-1593)이 저술한 의서(醫書)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나타난다는 사실과 이를 뒤받침하듯 숙종때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엮은 농서 겸 가정생활서 산림경제(山林經濟)와 한치윤(韓致奫;1765-1814)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를 서술한 역사서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도 이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한반도 역사에만 국한 시키고 보았으니 문제라는 것이다.본초강목에서 신라박하(新羅薄荷)라고 하는 호박하(胡薄荷)는 지금까지 앞선 분석에서 유럽박하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곧 페니로얄(Pennyroyal)이며 이 페니로얄은 유럽페니로얄과 미국페니로얄로 나뉘어지는데 유럽박하 분포지가 로마나 그리스 지역보다 그 외 유럽대륙 다른 곳에 넓게 퍼져 나타난다는 것은 생물학적 판단에서 유럽박하란 역사 근원성이 현 로마와 그리스 위치와 상반되는 이상한 괴리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오히려 미국페니노얄이 신라박하의 근원찾기에서 근접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위에 게시한 분포지도는 물론이고 여타 여러 분포지도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므로 본래 근원지가 북아메리카대륙임을 은밀하게 알리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또한 이것에 더하여 본초강목에서 천보방(天寶方)을 인용하길 적설초(積雪草)가 호박하(胡薄荷)라 한 사실에서도 이를 분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인데 가짜 페니로얄(mock pennyroyal), 북미인디언 여자박하(squaw mint)등으로 불리는 미국가짜페니로얄(American false pennyroyal) 학명 헤데오마 풀레기오이데스"Hedeoma pulegioides"로 나타남도 알 수가 있었다.바로 박하속과 거의 같은 성질의 페밀리 꿀풀과(脣形科:Lamiaceae)의 병꽃풀속(活血丹屬:Glechoma)이며 이를 천보방에서는 활혈단(活血丹), 금전애(金錢艾), 파동전(破銅錢), 마제초(馬蹄草)라 이름한 것으로 이를 묶어 분류체계에서 박하속과 다른 병꽃풀속으로 나뉘었다는것을 알 수가 있고 이 헤데오마속(Hedeoma)의 주요 분포지 또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임이 들어난다. [Sinkholes east of Bowling Green, in the Pennyrile region of western Kentucky, U.S.]페니로얄 분포지에 대표적인 곳이 바로 켄터키주(Western Kentucky)서부의 페니로얄고원(Pennyroyal Plateau)이 그곳이다.반면 미국가짜페니로얄과 종이 다른 학명 글레코마 헤데라체(Glechoma hederacea)라 하며 이를 별칭으로 조선광대수염 혹은 덩굴광대수염, 둥근 잎과 작은 보라색꽃(rounded leaves and small purplish flowers)의 박하, 포복식물, 장군덩이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반면 한문명칭은 적설초(積雪草), 금전애(金錢艾), 금전박하(金錢薄荷)라 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의 분포지는 현재 기록에서는 유럽과 서남아시아라고 하지만 북아메리카대륙 록키산맥 이외의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글레코마(Glechoma)속의 한 종을 조선광대수염(Glechoma grandis)이라 하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지만 현재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에 정확하게 분포표식이 밀집되어 나타나는 것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Europe and southwestern Asia but has been introduced to North America and is now common in most regions other than the Rocky Mountains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동부는 페니로얄이 대세였고 서부는 글레코마 헤데라체로 나뉜다.물론 페퍼민트라고 하는 서양박하도 별도로 존재하고 이에 더하여 일본박하도 있어 살펴보았지만 현재 동아시아대륙에서 생장하고 있는 박하들은 전부 변종이거나 이식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현재 박하식물 대다수가 교잡종으로 나타난다.본래 박하 잎을 이용하여 채유 박하기름을 얻기위해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 개박하는 유럽박하라고 하는 페니로얄과 또 다른 것이며 꿀풀과(唇形科:Lamiaceae)의 형개속(荊芥屬:Nepeta)의 캣트민트(Catmint)라고 하지만 이것은 깨잎의 발음과 같다 하여 북아메리카대륙 동부가 원산지인 페밀라 자소(紫蘇:Perilla frutescens)까지가 그대로 연결되는 신기함도 없지 않다.이러한 현상들은 따로 따로 분리될 것이 아니라 같은 범주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아무리 현재 변종이나 교잡종들이 분열되어 이것인지 저것인지 구분이 불가할 정도로 수많은 종들이 이합집산하였다고 하지만 최소한 린네가 처음 박하식물을 분류한 것이 1738년이라는 사실에서 이때까지 박하의 토종은 하나였지 않겠는가 한다.field mint, Mentha arvensis (European mint naturalized in United States) 영어사전에서 보면 토종박하(field mint)를 일본박하라 하였고 이 일본박하는 유럽박하가 미국에 귀화한 식물 종이라고 정리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우리는 여기까지 온 마당에 토종박하는 현재 열도일본종이라고 하면 안된다.결코 이 모든 식물들은 북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과 또한 역사적으로도 삼한역사와 깊이 관계한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페니로얄과 페퍼민트기름은 주로 천연 살충제로 사용되었다는 사실과 향긋한 향기는 수면을 도와 사람의 피로를 제거하여, 정신을 맑게 하면서 안정을 취해주고 차로 마셔 두통 감기를 났게 하고 해독, 위를 튼튼하게하며 소화촉진하는 등 민간의약으로도 넓게 사용되었던 박하는 오래전부터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의약품으로 취급되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동양 한방에서는 박하잎을 말려 발한, 해열, 진통, 건위, 두통, 인후통, 피부염, 해독제등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데 이런 사실에서 동양자료와 서양자료가 따로 있다 하여 분리된 역사라고 단정지울 수없다는 사실이다.서양에서는 잎을 주무르거나 갈아 으깨서 박하소스, 박하젤리에 사용하고 양고기요리 등에는 빼놓을 수 없다 하였으며 특히 아랍의 여러 나라에서는 일상적인 음료로서 박하차를 마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사람과 거의 같은 습관이다.이렇게 만든 차를 그리스어 티산니[πτισάνη (ptisanē)Pearl barley]라 하거나 영어로는 티잔(tisane:茶劑)약용음료로 보리차와 비슷하게 인식되는데 어쨌거나 이것들은 박하 차이다.버지니아에서 이주민들은 해충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건조한 박하를 사용하였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박하를 장례식 의식들에 사용되었다고 하였다고 하였다.그러나 한반도 역사는 박하가 신라사람들에게 차로 애용되었다는 간접적인 기록말고는 이러한 사소한 이야기는 아예 사라지고 없다.그러니 한반도 역사가 실체가 없는 구름 같은 것이다.오늘날 에센셜오일을 이용하여 아로마 테라피에 사용되는 것과 같이 그리스신화로 알려진 박하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탈취제라 하였다.기원전 1550년께 이집트에서 재배했다는 기록과 함께 기원전 1200~1600년대에 고대 이집트의 오래된 무덤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신라박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쟁 중에 박하를 먹거나 심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박하가 몸을 차게 하고, 군인의 용기와 정신도 냉각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것들을 종합할 때 현 박하 기원이나 분포지를 바탕으로 중국기원을 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중국을 신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신라를 합병했던 고려로 볼 것인가만 남아 있는 것이다.실제로 유럽역사를 신라나 고려와 비교하면 더욱 본 블로그가 주장하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역사에 접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고려가 연합이나 연방을 뜻하는 것은 서양 잣대로 이해된 것이겠지만 동양으로 보았을 땐 이것을 중국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의미가 도시국가들을 통합하거나 연합하여 연방체제국가를 만든 것은 이민족들을 침략하여 하나의 체제밑에 둔 중앙집권체제 중국이라 한들 무엇이 차이가 있겠는가.본래 고구려, 고려(高麗)를 '가우리'라 하는 것은 가운데를 의미하고 중앙을 나타내며 고려를 영어로 'COREA '라 하는 것은 중세영어가 "CORE"가 어원이라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속, 중심부, 핵심으로 나타나듯 중국의 지명인 가운데 중(中)을 의미하는 것이니 삼한의 고려가 중국이라 판단하는 것은 그렇게 무리가 아니라는 말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서양박하" rel="tag" target="_blank">서양박하</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호박하(胡薄荷)" rel="tag" target="_blank">호박하(胡薄荷)</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신라박하(新羅薄荷)" rel="tag" target="_blank">신라박하(新羅薄荷)</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유럽박하Mentha pulegium(L.)" rel="tag" target="_blank">유럽박하Mentha pulegium(L.)</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페니로얄(Pennyroyal)" rel="tag" target="_blank">페니로얄(Pennyroyal)</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미국페니로얄[American pennyroyal]" rel="tag" target="_blank">미국페니로얄[American pennyroyal]</a>,&nb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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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변(西邊)의 의미와 오대해(五大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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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변(西邊)의 의미와 오대해(五大海)글쓴이:한부울우리가 지난 역사를 냉정하게 따져볼 수 있는 것은 그래도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서(史書)를 기준으로 하는 검증밖에 없다.도대체 한반도 서변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한반도에서 서쪽변방이라고 하면 떡 하니 가로 막고 있는 서해(西海)라는 바다 말고 경계를 두고 접해 있는 지역이랄 것이 없다.2009년에 본 블로그글 "서쪽변방[西邊]-위화도, 대마도 조선서쪽변방?http://blog.daum.net/han0114/17049695 "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1776년 이전에 완성시킨 것으로 알려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별집 제18권 변어전고(邊圉典故) 서변[西邊]편에 나타나는 기록을 참고하여 개진한 결과 한반도 서변에 위치한 역사명칭들이 제각기 따로 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위 기록이 전하는 지명들을 하나하나 보면 압록강은 아시다시피 약간 기울어져 있지만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라서 서변이라는 한정된 지역에 들어갈 수가 없다.그럼에도 지금까지 한반도 역사학자들은 이를 서변이라 취급하고 알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놓기가 일쑤였다.한반도 압록강을 어떻게 서변에 위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한반도 지형 특성상 서변이라 할 수있는 공간이 없다.압록강은 북변이다.우리나라 한반도에 경계하고 있는 압록강이나 두만강 모두가 서변이라 할 수 없는 북변이다.만약 한반도 서쪽에 존재하는 서해(西海 혹은 黃海)가 없고 신중국대륙과 육지가 이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곳 어디쯤에 경계가 있을 것이고 압록강이 세로로 흐를 때 가능한 이야기다.또한 이 기록에서 말하길 서변에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이란 지명이 있고 그곳에 1406년(태종6) 서북시장 무역소(貿易所)를 개설했다 하였지만 두만강을 중심으로 국경 무역이라 한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정확하게 북쪽에 위치하는 것이 사실이다.이곳을 서북이라는 설명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또한 압록강 내에 위화도(威化島)위치가 서변이라는 사실 또한 따져보면 앞에 설명한 압록강과 같은 이치에서 철저하게 어긋난 것이며 또한 서변이라는 공간도 없음에도 마치 서변에서 들락거렸던 중국인들이 넘쳐나는 것처럼 조선인과의 관계 설정을 이야기 하는 것도 현 한반도 위치로는 설명이 불가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서변에는 일본이라고 하는 왜국(倭國)이 존재했다고 하니 어찌 황당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위 지도에도 명기하였지만 온통 한반도 서남쪽 목포지점에서 서변을 가늠할 수 있는 공간이랄 것이 없다.모두 바다가 아닌가.그럼에도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대마도가 서변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에 더하여 일본통신사가 서변으로 들락거렸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현재 오키나와라고 하는 유구국(琉球國)역시 대조선(大朝鮮)서쪽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니 한반도 지형상황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한 것이다.한반도가 마치 밀가루반죽처럼 수시로 이렇게 저렇게 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참으로 해괴망측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그래도 이러한 역사기록들이 그나마 아직 남아 있어 한반도 역사가 엉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을 감쪽같이 숨기고 한반도에 억지로 꿰어 맞추려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이런 상황임에도 지금까지 한반도 식민지역사를 광변하고 있으니 기존 강단역사학자들이 어찌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 손가.이런 형편이니 어찌 내나라 역사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것이다.재차 이야기 하지만 한반도 지형으로서는 서변이라는 설정자체가 불가한 것이다.그렇다면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1776년 이전에 완성시켰다고 하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엉터리란 말인가.전체 흐름의 역사 사실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어찌 지형과 자연이치를 배반하면서까지 엉터리로 기록할 수가 있겠는가.위에 열거한 서변에 존재했다고 하는 압록강, 위화도, 서북무역소, 중국인이라고 하는 고려의 참위치, 그리고 일본이라는 왜국, 대마도, 일본통신사가 출입한 곳, 그리고 현 오키나와가 유구라고 하는 유구국의 위치등은 결국 한반도 서쪽 서해(西海, 黃海)의 한 가운데에 있을 수밖에 없다.말문이 막히는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러한 지적은 여태 누구도 지적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한반도 역사 펙트논쟁에서의 종결자라할 수 있을 것이다.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서변에 존재했다고 하는 왜국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다시 세밀하게 기록에 접근해보았는데 놀랍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日本)은 왜국(倭國)이라 하면서도 서로 독립적으로 동서(東西)에 분리되어 존재했을 가능성을 위 기록에서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이러한 것은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데 하나는 고려동쪽에 있었던 왜(倭)와 조선 서변에 있었던 왜(倭)가 존재했다는 것이며 고려와 조선이 동시대에 존재한 것이라면 분명 왜국이 동서 두 곳에 존재한 것이 된다.혹 동서 모두를 일본으로 불리었을 가능성과 아니면 한쪽만 일본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다.동시에 왜국으로 불리었을 것이란 가정이 있지만 왜란 명칭에는 많은 종류의 서양세력들이 내재된 것으로 종교, 문화, 언어, 종족 또는 민족별로 최종 분리되어 존재하였지만 대조선에서는 통칭하여 왜 또는 일본으로 불리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아다시피 유럽국가들이 근세기에 우후죽순처럼 생성된 국가명들이 이러한 틀 속에서 생성된 것이다.이제 조선과 일본의 지형을 말하는 것을 살펴보자.조선 비변사가 편집한 비국등록(備局謄錄:1617-1892)에 일본이 우리나라 동쪽에 있는데 비스듬히 뻗은 지세가 우리나라 동해와 서로 맞먹는다(日本在我國之東 橫亘之勢與我東海相値)했고 횡단(橫亘)이란 단어를 기존 번역에서 비스듬하게만으로 번역했지만 횡단의 바른 뜻은 가로 걸쳐(橫亘)있다는 것이며 횡으로 누워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한반도와 열도 지형세라 할 수 없는 것이다.그리고 우리나라 동해와 서로 맞먹는다 하여 비슷하게 바로 서있다고 꿰맞추었지만 상치(相値)라 함은 서로 겹쳐있다거나 어긋난다는 의미로서 삐딱하게 누워있다는 이야기로 풀어 볼 수 있다.즉 한반도가 남북이 곧바른 지형이라면 열도는 대칭적인 것을 벗어나 삐딱하게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어긋나게 있다는 의미가 더 보태져야 하는 것이다.결국 한반도와 비교하면 위 그림에서 일본위치방향을 그렸듯이 역 방향이어야 맞다.이와같이 방향에서 볼 때 북아메리카대륙을 기준으로 한다면 쿠바 섬의 방향과 거의 같은 것이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대마도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면 대마도의 머리는 부산에 접해 있고 꼬리는 거제도 등의 땅과 마주 대하였다(對馬島首接釜山 尾對巨濟等地)라 하였으며 바람이 세게 불고 약하게 부는데 따라 어떤 때는 영남에 정박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호남에 정박하기도 하여 배를 대는 곳이 일정한 곳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기록된 사실에서도 냉정하게 풀어보면 현 대마도의 지형에서 머리가 부산에 접했다고 할 수 없고 거제도와 꼬리가 마주대하였다고도 할 수 없는 한반도 지형과 현 대마도를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없고 또한 전혀 부합되지 않는 기록임을 알 수가 있다.태풍이 불어 불시에 정박할 사정일 때 현재 지형상 대마도가 영남지역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영남지방에 정박이 가능하지만 호남지역까지 가기에는 상대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에 같은 조건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어느것도 일치하는 것이 없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전하는 기록들이 현재 지형과의 동떨어진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역사 근원이 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삼한역사가 이토록 지형 설명이 엉터리라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기존 역사기록과 일치해야할 한반도와 열도의 지형관계가 이렇듯 어긋나 있다는 것은 현 위치가 그 기록이 말하는 진정한 역사장소가 아니라는 말이다.다시말해 역사위치가 잘못되어 기록이 따로 놀고 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다.때문에 결론적으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말하고 있는 역사장소는 현 한반도가 아니며 서변에 존재했던 왜국이나 대마도가 열도에 있었다고 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허목(許穆:1595-1682)이 편찬한 미수기언(眉叟記言:1674)에는 흑치(黑齒)라는 일본의 왜(倭)가 창해(滄海)동쪽 발해(渤海)밖에 있다(黑齒者 東海蠻夷之國 在滄海東渤海外 亦曰日本之倭)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본 블로그 글"붕어(鯽魚:carassin, carrushens)를 찾으니 발해(渤海)가 보인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804"에서 발해는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를 중심으로 동쪽에 치우쳐 있었다 하였고 발해 동쪽 밖이라면 메인주가 소속이 된 뉴잉글랜드라 한 것이다.해동역사 속집 제9권 지리고(地理考) 9, 발해(渤海)편을 보면[신당서]발해열전을 인용하길“동경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하였는바, 그 지역은 지금의 조선동쪽 경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동경용원부라 함은 뉴욕주정도가 될 것이다.본 블로그 글"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 동북지방의 생여진(生女眞)은 고려 함경도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을 말하는 것이며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주를 합하여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 하였다고 밝혔던 바가 있다.이것은 지극히 고려를 추종하던 여진세력으로써 잉글랜드 생성과 맞아떨어진다.이를 왜국이라 하거나 나중에 일본이라 하였을 것이다.그렇다면 대조선 서변의 왜국과는 동일하게 볼 수가 없다는 것으로 또 하나의 왜국이 존재했음도 알 수가 있다.소위 서남지방에 살던 여진을 숙여진과 생여진의 구분이다.왜기(倭記)에 기록을 보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왜국(倭國)이 조선과 그 사이에 오대해(五大海)가 막혀 있어서, 4천리(1,632키로)나 된다고 하였으며 만약 크고 작은 계절풍인 신풍(汛風)을 만나면 5일이면 갈 수가 있다 하였다.(倭與朝鮮隔五大海 名四千里 若逢大小迅風 五六日可至)는 이야기가 있다.왜국과 조선을 막고 있는 것은 현재 동해라 알고 있는데 도대체 이 오대해가 무엇이겠는가.바로 오대호(五大湖:Great Lakes)이다.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지금까지의 글쓴이의 노력이 헛것이 아니라는 결론이다.치밀한 분석에 의해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생여진이었다.이 생여진은 발해를 찾게 만들었고 이어 뉴잉글랜드가 생여진임을 알게 되었으여 비로서 오대해(五大海)가 정확하게 왜국과 연결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현 한반도와 열도의 지형 관계를 보면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할 수밖에 없음에도 이렇듯 꿰맞추다보니 백일하에 탄로가 나버렸다.괜히 어렵게 찾을 수밖에 없었던 한반도 역사 모순의 이유가 이렇듯 식민지역사의 무리한 꿰맞추기와 역사조작이 이루어진 결과로서 우리에게 전혀 불필요한 난해함과 혼란만을 주었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한반도를 기준으로 하는 식민지사(植民地史)가 이렇듯 어디에서 맞지 않는 모두 엉터리라는 사실이 명명백백 밝혀지고 말았다.글쓴이는 대조선의 서변이라고 하는 서쪽 경계와 동쪽, 양쪽에 일본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이를 일본이라 하지 않고 왜라 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를 한편으론 중세기 영어를 사용하던 여진이라 했을 것이다.그리고 왜는 오히려 일본보다 폭넓게 사용했을 것이며 나중에 점차 조직이 국가로 변모해가면서 왜국이나 일본으로 불리며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분명하게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근세기에 인종, 종교, 문화, 언어별 수많은 국가가 생성될 때 서양국가라는 것들은 모두 왜(倭)명칭에 자유로울 수가 없는 세력으로 인식하는 것이 정확한 세계삼한역사관일 것이다.그렇다면 동쪽에는 뉴잉글랜드로 통칭될 수 있고 서쪽이나 남쪽에는 멕시코 또는 네덜란드계 독일, 오스트리아일 가능성이 높다.그렇더라도 그곳은 전부 코리아의 영역이다.또 한가지 더 참고할 것은 신유한(申維翰:1681-1752)이 쓴 해유록(海游錄:1715)에 따르면 수(隋)나라 대업(大業)연간에 왜황(倭皇)이 사신을 보내 국서(國書)를 전했다는데, 그 국서에, “해 뜨는 곳의 천자는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隨大業中 倭皇通使書云 日出處天子 致書于日沒處天子)”라 하여 왜황(倭皇)이 동쪽에 있었음을 강조한 것으로 즉 일본왕은 동(東)쪽에 위치하였고 서(西)쪽에는 수(隨)나라가 위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열도를 해뜨는 곳이라 하고 동아시아대륙 신중국 땅을 해지는 서쪽이라 했다는 말은 현 역사에서조차 그러한 언급자체가 없는 것이어서 대입자체가 불가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좀 더 확대해보면 해뜨는 쪽이 북아메리카대륙만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기에 남아메리카대륙 동부가 본래 해양세력들의 본거지라 할 때 대입이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은 결국 동아시아대륙 역사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이렇게 따져보니 기존 역사가 참으로 우스운 것이 아닐 수 없다.어찌하여 오늘날 역사가 이토록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는지 진리와 정의가 무엇인지 참으로 의심케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마무리를 하기위해 간단하게 서변(西邊)을 바르게 정리가 필요가 있다.현재 황해나 대한해협처럼 바다가 아니라 육지나 강(江)에 접변해 있는 것을 말하는 서쪽 변방이라는 서변은 서쪽의 변두리, 서쪽 부근 근접해 있는 장소라 할 수 있을 것이고 한반도 처럼 서쪽에 큰 바다와 같은 넓은 경계지역을 두고서 서변이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대마도" rel="tag" target="_blank">대마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압록강" rel="tag" target="_blank">압록강</a>,&nb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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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라고 한 행채(荇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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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라고 한 행채(荇菜) 글쓴이:한부울1.머리말2.대전 소제호에서 난 씀바귀처럼 쓴 개나리3.씀바귀 행채(荇菜)는 노랑어리연꽃4.우리가 알고 있는 행채란.5.노랑어리연꽃의 생물학 정체6.북아메리카대륙의 노랑꽃 행채7.마무리1.머리말본 블로그를 애독하시고 공감하시는 분들께서 걱정하고 염려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세계삼한역사관(世界三韓歷史觀)을 어떻게 설득하고 원만하게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현실적인 당면과제에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것은 역사혼란에 의한 상대적인 괴리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런 문제에서 글쓴이 역시도 자유스럽지가 못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본다.정확하게 1945년 미군정으로부터 시작된 서양역사 위주의 교육과 자학적인 사관인 식민지사관이 뿌리가 내리고 그것을 마치 참 역사인 것처럼 신봉하는 한반도 역사풍토는 철벽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거의 70년 넘게 그렇게 길들여지고 철저한 상식이 된 마당에 아무리 논리적이라 한들 세계삼한역사를 이해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은 실제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틀림없다.그 만큼 굳어져 있는 우월주의의 서양역사가 버티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반도 식민지사관을 극복하기란 참으로 힘든 것이며 설령 그들보다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치나 논리가 바탕이 된다 할지라도 굳어지고 오랜 시간 동안 특화된 사고방식과 인식의 틀, 페러다임(paradigm)을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설령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삼한역사를 부정하고 거부당하고 배척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이것은 이미 100년간 진행되면서 강압적으로 주입된 기존 역사상식들이 그만큼 굳건하다는 뜻일게다.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적으로 거대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뜻있는 분들이 온 정열을 바치고 있는 사실에서 이런 노력 마저 부정당하고 배척당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힘빠지는 일이 틀림없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이 한반도사관과 너무 큰 역사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원리적으로 따진다면 제로섬게임과 같은 것으로써 상대적으로 한쪽의 역사관을 전면 부정하게 하거나 극단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갈등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쩜 몇 세동안 해결이 불가능한 난제인 것이 틀림없다.때문에 이러한 논쟁의 해결점은 현실적으로 특별한 방법이 없다.방법이 있다면 서양세력들이 뿌려놓은 엉터리 역사근거를 자체를 깨부실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하고 그들이 19세기 초부터 열성을 부렸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100년이 안되면 200년을 투자해서라도 공들여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새로운 역사 교육을 통하여 각인시켜 나가는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지 않겠는가.급하지만 당장 어떤 성과를 수확하겠다는 것은 무리며 분에 맞지 않게 과욕을 부리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밝힘의 역사작업은 지속되어야 하고 당장은 아니겠지만 설득하고 계몽해 나가면서 올바른 역사정립에 최선을 다할 때 좋은 성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다.19세기부터 어쩔 수 없게 만들어진 비주류의 역사 멍에는 큰 짐이다.우리가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현재 재야학자들이 보물처럼 여기며 추종하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예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이야기다.조선말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으로 사학자로 알려지며 태백교도(단군교)인 계연수(桂延壽, ?-1920)선생이 1898년에 단군세기(檀君世記)와 태백유사(太白遺史)등을 간행하였다.이어 1911년에 저술한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이러한 세계삼한역사 사실을 토대로 저술하였겠지만 오늘날 역사처지가 바뀌는 바람에 오히려 위서(僞書)로 취급되고 기존 사학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하고 있는 상황을 들더라도 암울한 환경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현실이 이렇다는 것을 우리는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글쓴이는 근세기 한반도 역사에 올라가 있는 사건들에서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하지 않는 이방인들의 사건일 수 있고 사건자체를 왜곡시키거나 과장시켜 한반도 역사에 맞게 조작 편집되었을 가능성과 실제로 발생한 장소가 현재는 우리가 알 수 없도록 변모 되어 알 수 없거나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금성이나 경주와 다른 일본 동경이라고 하는 곳도 뉴욕이라고 할 때 받아들이는 감정들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근대자본주들이 모여 활동하던 뉴욕에서 30만명의 상비군(常備軍:standing army)을 신설하는 것과 맞물려 그렇게 태동한 세력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 때가 일제 침략기라 하여 우리나라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문사의 창간발행한 시기에 맞춰 1920년부터 우리역사에 불리하게 진행된 천동지변이 진행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그렇듯 암울했던 시기 그해 공교롭게도 발생한 환단고기 저술자 계연수의 암살사건 전말도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없도록 뒤틀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그 무엇이든 진실과 이치에 맞지 않게 변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고 충분히 예단 할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 "에서 언급한 앞에서 언급한데로 동아일보 창간지에 미국(米國)은 뉴욕시(紐育:紐約,New York)에 육군 상비병원을 300,000명 정하기로 국회에서 결의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성립 조건에서 군사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크다 할 때 미국(米國)이 그동안 상비군조차 없어 1920년 비로소 의회에 결의를 거쳐 군대조직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국가로서의 자격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당시 일제가 조선에서 존재했었다면 이런 형편을 우리가 명확히 감안해야 한다.1920년 계연수 선생이 만주(滿洲)에서 일제(日帝)의 밀정에게 살해되었다고 하는 사실들을 우리가 그대로 믿을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인가는 순전히 우리 몫이지만 결론적으로 들어난 사실 모두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아직도 만주를 한반도 북쪽 동부삼성이라고 믿는 사람은 각성해야 한다.잘 생각해보면 이 당시 한반도 역사를 만들려고 하는 세력이 존재했다면 한반도 역사를 기존 아시아대륙을 근거해야 할 터인데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서술하고 있는 12연방국의 위치가 북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한다고 할 때 계연수 선생은 이런 음모세력에게 큰 방해자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언제나 주요인물의 암살은 역사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4 "에서 적극적으로 풀이한 사실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글쓴이의 세계삼한역사관(世界三韓歷史觀)은 인류사의 시발이 북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사실은 조금도 비켜나갈 틈이 없다.인류사 태동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에서 유일체제 즉 하나의 체제(One dominant system)가 기반 한다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총판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서양세력들이 추구한 역사는 오리엔탈문화와 역사를 거점으로 유럽역사를 만들었고 오리엔탈문화와 역사 근거를 현 중동으로 옮겨 놓아 유럽역사가 자연스럽게 이동반경에 접하도록 역사 여건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견주어 볼 수 있어야 한다.인류사가 시작된 일 만 년의 유구한 역사는 명확히 세계삼한역사를 말하는 것이며 만년(萬年:10,000)이란 역사사실 말고도 더 놀라운 사실이 계연수(桂延壽)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정확히 수록되어 있는데 원동중 삼성기 전 하편(三聖記 全 下扁)과 환국본기(桓國本紀)에 나타나고 이것에 따르면 환국(桓國)은 7세에 전하여 존속기간이 역년 3301년간(年間)이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63,182년간(年間)을 말하고 있는 것도 서양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즉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범위에 들어가는 년간(年間)으로서 인류시원(人類始源)역사라고 글쓴이는 감히 주장했던 것이다.현재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실체는 위서라는 논쟁이외 일본인 손에 들어감에 따라 상당히 본질이 훼손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데 일본인들의 열도역사가 존재하려면 아시아대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글쓴이가 현 환단고기가 일본인 손에 들어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계연수 선생에 의해 1911년 출간된 판본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원본이 모든 관련 자료와 함께 유실되었다가 이유립이 기억을 되살려 복원했다고 하는 점, 이유립은 박창암을 통하여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鹿島曻)와 접촉하여 직접 원본을 전달하였다는 점, 그리고 1982년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는 점과 이어 1985년이란 시기에 뒤늦게 한반도에서 한글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환단고지조차 온전할 수 없다는 점이다.이러한 점들은 계연수 선생의 원문이 일본인에게 전달됨과 함께 본질과 다르게 훼손되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인데 북아메리카대륙의 근거가 사라졌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본 블로그 글 "환국(桓國)의 강역(疆域)"에서 세계삼한역사의 강역을 밝혔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이러한 모든 의혹과 사실을 정립시키기 위해서라도 시급하게 “인류시원의 땅”이 어딘가를 확실하게 밝혀볼 예정이니 기대해도 괜찮을 것이다.조선(朝鮮)에서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밀려들 때 재위기간을 가진 고종(高宗)이 혼혈계인 타타르인(韃靼人:Tatars)을 닮았다든지 아니면 명성황후가 백인으로 백(白)러시아인 즉 벨라루스인(Belarus)을 닮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서양인들이 선교사란 미명아래 대거 조선으로 들어 닥칠 때 코리아(COREA)사회에서는 갓을 쓴 백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등은 현재 한반도인(韓半島人)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한반도에 왠 헛 묘들이 그렇게 많을까?한반도에 건물들은 왜 200년 이상 된 건물이 없을까?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에 등재된 1만여 명의 조선 유명 인사가 대동보에 수록된 1913년 편집된 시기임을 감안할 때 한반도에 성씨(姓氏)들이 과연 전통적으로 온전한 것이었을까?알고보면 역사 난제들이 산재되어 있다.초대인도(印度)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1889-1964)수상이 간디여사에게 써준“세계사편력(Glimpses of World History)”에서 선교사들은 식민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주장한데서 특히 19세기에 한반도라고 하는 코리아 땅에 선교사들이 무수히 드나들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고민을 할 수 있어야 한다.우리가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서양인들이 설치던 시기에 갑자기 대조선의 위세 높은 왕족들 모두 한꺼번에 몰살되는 사실과 함께 철종(哲宗1831-1863,재위:1849-1863)재위가 끝나던 1864년 1월 16일은 인류사의 위대한 역사의 등불이 한꺼번에 꺼지는 날이라고 할 정도로 괴상한 변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당시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중앙에 설치되었던 군영인 금위영(禁衛營)반란이 발생하고 1860년에 경희궁으로 천궁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런 끔직한 역사사건이 발생했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가 있다.먄약 금위영 주축이 서양인이었다고 본다면 어떤 일이 발생되었겠는가.이러한 역사의 재판이 바로 러시아황제일가족 몰살사건이다.그 이후의 조선제왕들은 허수아비 노릇을 하던 별 의미가 없는 역사 흐름이 아니었는가 한다.공교롭게도 철종이 생을 다할 때 그리스의 오톤왕(Otto,1815-1867,재위:1832-1862), 청조의 함풍제(咸豊帝,1831-1861:재위 1850-1861), 인도의 바하두르샤 2 세 (Bahadur Shah II,1775-1862,재위:1837-1857)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임종을 맞이 한다.역사 개연성이 이와 같음에도 한반도인들이 사실을 알려하지 않고 부정만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못해 실로 암담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2.대전 소제호에서 난 씀바귀처럼 쓴 개나리향토례찬내고을명물(九(구))(四(사)) 湖南要衝(호남요충)의歡樂塲(환락장) 萬病水(만병수)의自由塲(자유장) 1926.12.03. 동아일보 5면 사회 기사(텍스트)얼마전까지도 우리것의 자유탕이 지금와서는 남주고 비러쓰는 약탕 ◇大田名物儒城溫泉(대전명물유성온천)...[생략]내고을명물투고이온천은 몇해까지도 자유온천이었으나 어느듯 눈 밝은 일본인들의 소유가 되고 말았지요. 유성온천을 말하던 끝이니 이와 비슷한 것을 좀 써보겠습니다.우리고을에서 동으로 약 사오정(町)가량가면 우암(尤菴)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본택이며 회덕송씨(懷德宋氏)의 근거지인 소제(蘇堤)라는 마을이 있다는데 이 마을 앞에는 삼사석직(石直)이 가량 되는 큰 못이 있습니다. 이 못은 곧 소제방죽(蘇堤湖)이라는 곳으로 이 방죽은 경치가 좋으며 지대가 한가함으로 으슥한 달밤에 산보하기 좋기로 둘도 없는 재미있는 곳이지요. 그리고 조선에서 " 개나리" 나는 곳은 이곳 한군데 밖에 없는데 이른 봄에 물이 살을 에이는 듯할 적에 소제근처의 부녀들은 독특한 복장을 입고 "개나리"를 뜯는 모양은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두르고 소름이 끼칠 지경이지요.겨드랑이까지나 올라오는 물에 들어가서 발가락으로 떠서 물 위로 띄워서는 손으로 모아가며 덜덜 떤답니다. "이것도 먹고살려고 하루 몇 십전이나 벌고"싶어서 하는 것이지요.이 개나리라는 것을 멋 모르고 회덕명물이라고 집어 잡숫다가는 진저리를 칠지니 쓰기가 씀바귀에 비교할바 아니지만 일명 송채(宋菜)라고 해서 송씨는 선천적으로 잘 먹는 모양입니다.이 방죽은 물천량, 고기천량, 개나리천량이라고 하여 삼천량이라니 땅 값까지 합하면 굉장할 것이외다.◇投稿者大(투고자대) 田(전) 申(신) 哲(철) ◇薄(박) 謝本報購讀券三個月分(사본보구독권삼개월분)땅 넓이의 단위. 1정은 1단(段)의 10배, 곧 3,000평으로 약 9,917.4㎡위는 발행일자 1926.12.03. 동아일보 5면 사회판 기사인데 놀랍게도 대전(大田)에 1926년에 소제호(蘇堤湖) 즉 소제방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고 동시에 그 호수에서 “개나리”라는 수생 침수식물이 자생하였으며 그것을 채취하던 모습이 기사화 되었는데 주요내용이 다음과 같다.추위가 가시지 않는 이른 봄에 부녀들이 독특한 복장을 한 체 개나리를 뜯고 있는 모습과 이 개나리란 채소가 씀바귀처럼 쓴 맛의 회덕명물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또한 조선(朝鮮)에서 오직 소제호에만 이 '개나리'가 났다고 한다는 사실 등이다.도대체 이 개나리가 무엇인가.우리가 알고 있는 개나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그리고 대전의 경치가 좋고 지대가 낮아 달밤에 산보하기 좋다고 하는 일명 소제방죽이라고 하는 소제호(蘇堤湖)의 정체가 궁금한데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일제강점기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궁금증이 폭발한다. [중국 절강성 항주시 서호서부(浙江杭州西湖西部)의 소제(蘇堤)] [대전 소제리의 소제방죽 또는 소제호(蘇堤湖)]위 오래된 사진 두 장은 대전 소제호의 모습이란다.소제호(蘇堤湖)라는 명칭을 풀어보면 소주(蘇州)의 방죽 또는 둑이라는 뜻이고 소제가 있는 호수란 이야기다.홍수로 인해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쌓아올린 방죽이나 둑 형태가 있는 호수일 것 같다.이 지명은 마치 중국의 옛 지명 오현(吳縣)이라고 하며 곳곳에 호수, 강, 운하가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수향(水鄕)이라고도 불리고 농산물과 수산물이 풍성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고도 불렸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를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아니면 절강성(浙江省) 항주시(杭州市)의 서호(西湖:전장길이2.8km)서부에 있는 소제(蘇堤)를 말하는 것 같은 소제방죽이라 하니 한반도 대전(大田)에 있었던 것이 믿겨지질 않는다.실제로 위 게시한 두 장의 사진에서 희미하지만 옛 소제호에 대한 사진영상이 남아있다.하지만 호수 전체를 나타내는 사진은 없고 일부 식별이 정확하지 않는 호수와 맞닿은 불분명한 농지 하천 부지와 같은 명확한 사진 영상뿐이다.사진들이 왜 이렇듯 명확하지 않을까?왜 호수 전체의 영상은 없을까?의문은 쌓여만 간다.동아일보 기사를 참고하면 이 소제호의 크기가 삼사석직이라 하였다.일제강점기 소제호를 찍은 사진엽서에는 무성한 연꽃이 있는 모습을 식별이 안되지만 대충 볼 수가 있다. '역사를 찾아(태허)'의 자료를 참고하면 둘레 2,618척(尺)793m, 동서 882척(尺)267m, 남북 850척(尺)257m이라 하였으며, 회덕군(懷德郡)에서 가장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이공갤러리 자료에 의하면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소제호의 둘레가2,618척((尺)793m), 깊이는 5척((尺)1.5m)이라했다 하고 면적으로 계산하면 50m²로 적혀 있는데 너무 작은 숫자에 놀라지만 앞의 기록을 참조하면 꽤 큰 호수였다 하고 넓이를 계산하면 약 20,000평(坪)의 넓이로 추측된다. 그리고 조선환여승람(朝鮮寏輿勝覽)에는 “소제의 물은 깊고 거기서나는 고채(苦菜)는 맛이 아주 좋다”라는 기록이 나오기도 했다 하는 것은 동아일보 기사와 똑 같다.‘삼사석직’이라는 단위가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크기를 상상하기가 싶지 않았지만 위 자료에 의해 소제호 넓이가 20,000평정도인 것으로 작지 않는 호수다.어쨌던 1927년 소제호가 메워지고 대동천(大東川)이라는 인공하천이 생기기 전까지는 대전(大田)의 명소를 소개하는 신문과 잡지에는 ‘소제공원(蘇堤公園)’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하였으며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통적인 삶의 공간이라고 표현 하였다.그 만큼 사랑받던 소제호가 갑자기 일제에 의해 사라지게 된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과연 1927년에 무슨 일이 발생하여 소제호를 매립하고 대동천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가?바로 일제식민지시대 때인 1927년에 일본인 거주지의 홍수 피해를 막는다는 이유로 대전 동정소제호(東町 蘇堤湖)를 매립하고 철도관사촌(鐵道官舍村)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이유는 홍수이다.즉 일본인들을 위해 전통적으로 사랑받던 대전명소를 사라지게 했다는 말이다.얼마나 홍수가 거대하였기에 20,000평 정도의 호수를 매립할 수밖에 없었을까?1927년에 한반도에 거대한 홍수가 발생했다는 이야긴데 솔직히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현재 대전 상황을 보면 대전을 관류하는 갑천(甲川)은 금강 상류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옛날에는 이를 중류라 한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다가오는 것도 있지만 상류, 중류, 하류가 존재했다면 큰 홍수가 날 수 없는 조건이다. 강수량이 많을 때야 어디든지 범람의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대청호(大淸湖)가 만들어진 것은 대전시에서 비켜나 있고 금강하구의 범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정확한 이야기다.대전 갑천이 중류에 있었다 하지 않는가.금강 상류에 위치한 현 대전은 근원적으로 금강에서 역류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금강 하구의 범람위험성과는 차별될 수밖에 없다.그렇더라도 한반도 금강(錦江)에서 발생한 대홍수에 대해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 바라 볼 때 피해액 4억~10억불이 발생했다고 하는 미시시피주 대홍수(Great Mississippi Flood of 1927)는 1926년 여름부터 미시시피의 중부유역에서 많은 양의 폭우(暴雨)가 내리기 시작하여 9월에는 캔자스(Kansas), 아이오와(Iowa)의 미시시피의 지류(支流)가 범람하였고 1927년 이른 봄까지 진행되면서 피해지역 94%가 아칸소 주(Arkansas), 미시시피 주(Mississippi), 루이지애나 주(Louisiana)에 집중된 대홍수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1927년에 미시시피 강의 다른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긴 제방 및 방수로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1928년 미시시피 강 지류에 대한 홍수대책법령(Flood Control Act)이 발효되었고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재임:1933-1945)는 1928년부터 시작된 대공황(大恐慌)을 극복을 위하여 취임하지마자 대규모 공공사업인 뉴딜정책(New Deal:1933-1936)으로 경기 부양책까지 마련한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한반도 홍수의 기록이 전무한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이미 본 블로그에서 충청도(忠淸道)를 북아메리카의 로키산맥 동부에서 미시시피강(江)유역 중앙부에 이르는 온대 내륙에 넓게 발달한 초원을 프레리, 대초원(prairie)지역이라 한 사실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고 본 블로그 글 "전어(箭魚:Gizzard shad)로 본 CORE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6"의 소제 4.충청도(忠淸道)참 의미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 중앙에 위치하는 오대호의 빙하물이 수원과 같이 맑고 푸르다는 의미와 그 수원이 스며드는 초(草), 풀과 싹이 융성한 대초원을 이루는 지대를 충청도라 한 것이 틀림없다.[2016.10.31.정리]라고 정리하였던 바와 같이 북아메리카의 로키산맥 동부에서 미시시피 강(江)유역 중부에 이르면서 온대 내륙에 넓게 발달한 초원을 프레리, 대초원(prairie)을 포괄적으로 충청도라 했을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파한 적이 있다.3.씀바귀 행채(荇菜)는 노랑어리연꽃지금까지 소제호(蘇堤湖)의 정체를 어느정도 알아보았다.그렇다면 소제호에서 생장되었다고 하고 씀바귀처럼 쓴 맛의 침수식물인 개나리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볼 차례이다.1927년 보도된 동아일보에서 말하는 침수식물 개나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다음 2013.04.01.일자의 금강일보 독자위원 칼럼에서 “행채(荇菜)를 아세요?”라는 자료를 참고하여 본다.“100여년 전 대전에는 풍광이 아름다운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는 중국 ‘소주(蘇州)’의 빼어난 호수와 견줄 만할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웠다 해서는 ‘소제호(蘇堤湖)’라 불렸다. 동방의 공자가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조선 순조(純祖)임금이 해좌궐리(海左闕里)라는 현판을 내렸던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선생이 살았던 곳이며 지금의 대전 소제동 소제마을 앞에 있었던 소제호(蘇堤湖)가 그것이다. 1904년 경부선이 부설되고 대전역일대가 신흥도시로 본격적으로 건설을 시작하면서 유교전통마을인 소제마을에 1907년 식민지 제국주의의 제례공간인 신사(神社) ‘태신궁(太神宮)’이 건립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소제호(蘇堤湖)는 1927년 인공적인 대동천이 건설되면서 매립되었다. 소제호(蘇堤湖)가 매립되면서 함께 사라진 것이 있다. 회덕의 명물이라는 행채(荇菜)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로 전통사회와 함께 사라진 대전의 맛, 행채(荇菜)의 단서는 ‘소재방죽에서 3~4월에 산출되는 약간 쓴 맛이 난다’는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실린 것이 유일한 공식적인 기록이다.(생략)...행채(荇菜)는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수초인 노랑어리연꽃을 소제마을 사람들이 나물로 해먹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이 자료에서는 위 동아일보 기사칼럼에서 알 수 없는 사실들이 많은데 대전의 소제호는 중국 ‘소주(蘇州)’의 빼어난 호수와 견줄 만할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웠다 해서는 ‘소제호(蘇堤湖)’라 불렸다 하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더 나아가 동방(東方)의 공자(孔子)가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조선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임금이 해좌궐리(海左闕里)라는 현판을 내렸던 대유학자 우암(尤菴)송시열(宋時烈:1607-1689)선생이 살았던 곳이라 한 사실이다.이것은 동아일보에서도 언급한 사실이다.특히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마을은 궐리촌(闕里村)이라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강좌와 해좌에 대해선 낮선 것이다.풀어보면 현자들을 칭송할 때 중국에서는 죽림(竹林)을 앞에 붙였지만 고려에서는 강좌(江左)와 해좌(海左)라 하였다는 것이 특이하지 않을 수가 없다.죽림이라면 대나무로 구성된 숲을 말한다.하지만 강(江)이나 해(海)는 거대한 영토를 전제하는 것이다.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晉)나라 초기에 노장(老莊)의 무위(無爲)사상을 숭상하며 죽림에 모여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를 말했다지만 고려 후기, 청담풍(淸談風)의 일곱 선비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를 강좌칠현(江左七賢) 또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 하였는데, 중국자료를 찾아보면 강좌(江左)라 함은 강소(江蘇)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고려칠현들이 강소(江蘇)에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 된다.이것은 즉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와도 관계된다는 이야긴데 어쩌면 대전의 소제는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에 있는 호수(湖水)의 제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이것은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고려(高麗)와 중국(中國)은 매번 합치되는 경우를 낳고 있다.물론 강좌칠현(江左七賢)과 해좌칠현(海左七賢)을 우리 역사에서 동일하게 본다지만 해좌(海左)는 강좌(江左)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와 순조임금이 현판을 하사한 해좌궐리(海左闕里)의 뜻은 해석하기에 따라 중국과 버금가는 상당한 의미를 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어쨌던 우암 송시열 선생을 동방의 공자라 했던 것인지 아니면 강소성을 전제한다면 우리가 모르는 현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실제로 동아일보에서도 회덕송씨(懷德宋氏)의 본택이 이 소제호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송씨(宋氏)의 나라를 송나라라 하였던 기존 역사를 빗대은 글쓴이의 냉철한 상상력처럼 동아일보에서도 개나리를 송채(宋菜)라 한 역사는 또 다시 ‘송나라 채소’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싶으나 역사나 혼란스러운 것은 같아 우리가 탐구의 골짜기에 빠지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이 자료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동아일본 칼럼에서 대전 소제호(蘇堤湖)에 아낙네들이 살을 에는 듯한 날씨에 발가락으로 떠서 올려 손으로 잡는다는 채소를 '개나리'라 하는 것과 금강일보 독자위원 칼럼에서 이 채소를 행채(荇菜)라 하였고 말미에 이를 노랑어리연꽃이라 한 사실이다.개나리, 행채, 노랑어리연꽃 이것들이 무슨 연관인가.행채(荇菜)는 중국사서나 한반도 번역사서에서 곧잘 ‘마름 풀’로 번역되면서 우릴 이해시키는 것인데 한자 행(荇)역시 ‘마름 행’으로 정리된다.參差荇菜 左右流之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찾네窈窕淑女 寤寐求之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깨나 그리네求之不得 寤寐思服 구해도 얻을 수 없어 자나깨나 그 생각뿐悠哉悠哉 輾轉反側 부질없는 이 마음 잠 못 이뤄 뒤척이네 위는 2500년 전의 중국고서인 시경(詩經)에서 찾을 수 있는 기록이다.‘흰 줄기를 삶아서 식초에 담그면 무르고 맛이 좋아 안주로 삼을 만하고, 어린잎은 국을 끓이기도 하며 민간에서는 열매를 해독제나 위암에 사용한다.’고 하였으며 또 위 시경(時經)첫 장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쓴 한편의 애틋한 사랑의 시에서도 행채(荇菜)를 따며 열심히 일하는 서민 여인의 모습을 시적 분위기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인데 이는 동아일보에서 개나리를 뜯는 모습과 같고 어쨌든지 행채(荇菜)를 마름풀이라 하였다는 사실이다.홍재전서(1799) 제2권 / 춘저록(春邸錄) 시(詩) 회상전(會祥殿) 춘첩(春帖) 曉日千門綵勝懸 새벽부터 일천 문엔 채승을 달았는데 紅梅初放玉欄前 붉은 매화는 옥 난간 앞에 처음 피었네 齊宮警寢瑤簪脫 제궁에선 잠 경계하여 옥비녀를 벗었고 唐殿觀蠶寶箔宣 당전에선 누에 살피어 잠박을 펼치었도다 髹盤荇菜傳嘉瑞 검은 칠 쟁반의 행채는 상서를 전하고 寶酌椒花祝永年 술잔의 초화송은 장수를 축원하였네 聞道徽音遍八域 듣자하니 훌륭한 명성 팔방에 두루 퍼져서 家家含哺樂堯天 집집마다 배불리 먹고 요임금 성대를 즐긴다네 위 시편은 정조(正祖)의 홍제전서(弘濟全書)에 등장하는 1775년 작품 경희궁(慶熙宮)의 회상전(會祥殿) 춘첩(春帖) 즉 ‘봄에 적은 쪽지’란 시다.휴반행채전가서(髹盤荇菜傳嘉瑞) 검은 칠 쟁반의 행채는 상서(좋은일)를 전하고 /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은 행채(荇菜)를 수초(水草)의 일종으로 식용하는 야채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옛날 입춘일이면 춘병(春餠)과 생채(生菜)를 만들어 먹었던 데서 온 말이라 하였고 춘병(春餠)이라 함은 봄에 나는 채소들이나 고기, 새우 등을 밀전병 등에 싸먹는 중국 음식이라 풀이하였다.이와 같이 행채를 대체적으로 번역을 마름풀이라 한 것인데 이를 순채라 하는 것도 이상하다.아래는 신중국자료 식성기(食城記)의 지식(知食)에서 행채를 순채(莼菜)라고 하는 자료이다.同为水生草本,莼菜的被提及率不及诗经里“参差荇菜,左右采之”里的“ 荇菜(莕菜)”。莼菜多产于中国苏浙一带,是浙江杭州的一道特色菜品,为不少慕名而来的旅者所必点之菜。其常见菜品有:“莼菜羹”、“西湖莼菜汤”等,大多以汤、羹为主。莼菜经春季移栽后,秋季成熟,故又为中秋时令菜。其性甘,有解毒、利水、清热、消肿的功效。口感似蚕菜,滑爽舌尖。순채는 수생초본이며 시경을 들어 참치행채(参差荇菜) 들쑥날쑥 하는 행채 좌우채지(左右采之) 이리저리 뜯네라 해석하고, 이 채소가 마름 행채라 하고 있는 것이다.행채라고도 하는데[荇菜(莕菜)]순채가 많이 생산되는 곳은 절강성 일대이고 절강(浙江) 항주(杭州)에 특화채소상품이며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순채갱, 서호순채탕 등 거의 탕과 갱이 주라 하였으며 순채는 봄에 이식하고 가을에 성숙하는 것으로 절기가 가을 채소를 말하고 있다.성질이 달고, 해열과 이뇨, 해독 등의 효능이 있고 부기를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으며 데치면 혀를 부드럽게 하는 입맛이 있다라고 해석된다.조선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윤휴(尹稶:1617-1680)의 백호전서(白湖全書)제41권/잡저(雜著) 독서기(讀書記) 고시(古詩)편 관저(關雎) 집전(集傳)에는 하(河)는 북방에 흐르는 물의 통칭이라 하고 참치(參差)는 길고 짧은 것이 가지런하지 않은 모습으로 행(荇)은 접여(接余)이니 뿌리가 물 밑에서 나고, 줄기는 비녀다리와 같고 위는 푸르고 아래는 희며, 잎은 자주 빛 붉은 색이면서 너비는 한 치 남짓하며 물 위에 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런데 꽃의 색깔이 나타나지 않는다.4.우리가 알고 있는 행채란.본 블로그 글 "순채(蓴菜, Brasenia)가 우리밥상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536"에서 알아보았지만 순채(蓴菜)를 마름 풀이라고도 하는데 식물분류학체계적으로 1789년 조한 본 슈레버(Johann Christian Daniel von Schrebe:1739-1810)에 의해 명명된 수련목(睡蓮目:Nymphaeales) 순채과(蓴菜科:Cabombaceae) 순채속(蓴菜屬:Brasenia Schreb)으로 분류되며 숙근성 다년초로 수생식물이라 한 것이다.그런데 이 마름풀 순채(蓴菜)의 꽃잎 색깔이 자주 빛이라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은 동아일보에서 개나리라 한 것을 보면 꽃잎 색깔이 노랑색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리고 또 성미(性味)가 동아일보에서는 씀바귀처럼 쓰다(苦)하였고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유일한 공식적인 기록에는 행채가 약간 쓴 맛이 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이와 다르게 마름풀의 약성(性味)을 전부 하나같이 달다(甘)한 것이다.이래는 한국에서 다른 식물로 인식되는 중국문학 속의 식물이란 제목의 글인데 참고 할만하다.중국문학에 등장하는 식물명들이 한국에서는 중국과 다르게 인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관련이 있는 양치류식물 고비 미(薇)를 한국에서는 ‘고사리’ 또는 ‘고비’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 ‘薇’는 사실 중국에서 야완두(野豌豆)라고 부르는 갯완두라 하는 살갈퀴, 콩과의 두해살이 풀이다. 《詩經》에 보이는 행채(荇菜)라는 식물도 한국에서는 ‘마름’ 또는 ‘마름풀’로 알고 있으나, 이 또한 노랑어리연꽃을 오해한 것이다. 그리고 중양절(重陽節)과 관련된 식물인 수유(茱萸)를 한국에서는 산수유(山茱萸)로 간주하지만 이것 역시 중국에서 식수유(食茱萸)라고 부르는 ‘머귀나무’를 가리키는 것이다. 부추 잎의 이슬이 사라지기 싶다는 의미의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노래 해로가(薤露歌)의 염교 해(薤)를 한국에서는 ‘부추’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락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염교(藠子:Allium chinense)’라는 식물이다. 한국에서 잣나무로 알고 있는 백(柏)도 측백나무 계통의 나무를 오인한 것이다. 한국중국어문학회(수록지정보 : 중국문학.81권.107~123p) 글쓴이가 좀 더 보충하였지만 위자료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핵심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있는 듯하나 어쨌거나 중국이라고 하는 동아시아대륙의 사정이나 그 분들이 시답잖아 하는 한반도 사정이나 매 일반 역사 근원적인 뿌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여기서 관심있게 보아야 하는 것은 시경《詩經》에 보이는 ‘荇菜’라는 식물도 한국에서는 ‘마름’ 또는 ‘마름풀’로 알고 있으나, 이 또한 노랑어리연꽃을 오해한 것이라고 정리한다는 사실이다.이것은 노랑 개나리를 생각하면 일치하는 설명이다.동아일보에서 말하는 개나리라고 한 것은 노랑 꽃잎에서 노랑어리연꽃이라는 사실이 더 확실해 진다.일단 잎은 마름모꼴의 삼각형으로 빽빽하게 나와 있는 마름(마름풀)은 도금양목(桃金孃目:Myrtales), 마름과(菱科:Trapaceae), 마름속(菱屬:Trapa)의 능각(菱角)이라고 하는 기괴한 모양의 모서리가 뾰족뾰족한 송곳과도 같다하는 마름(菱)열매가 열린다.이것은 아니다.순채는 식물학 분류체계가 수련목(睡蓮目:Nymphaeales) 순채과(蓴菜科:Cabombaceae) 순채속(蓴菜屬:Brasenia Schreb)으로 분류되지만 노랑어리연꽃이라 함은 국화목(菊目:Asterales) 조름나물과(睡菜科:Menyanthaceae)의 행채속(莕菜属:Nymphoides)으로 분류됨을 알 수가 있다.5.노랑어리연꽃의 생물학 정체어리연꽃속(Nymphoides)은 조름나물과의 한 속으로 약 50 종(種)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자에서 언급했듯이 국화목(菊目:Asterales) 조름나물과(睡菜科:Menyanthaceae)의 행채속(莕菜属:Nymphoides)으로 분류체계가 나타낸다.莕菜属(学名:Nymphoides)是睡菜科下的一个属,为浮水草本植物。该属約有50多個种,分布于热带和温带的淡水中科學分類界: 植物界 Plantae(未分级) 被子植物 Angiosperms(未分级) 真双子叶植物 Eudicots目: 菊目 Asterales科: 睡菜科 Menyanthaceae屬: 莕菜属 Nymphoides(Ség)1754행채속(莕菜属:Nymphoides)의 학명은 프랑스고고학자, 금석학자, 천문학자 겸 식물학자인 쟝 프랑수아 세귀에(Jean-François Séguier:1703-1784)가 1754년에 명명했다.꽤 이른 시기이다.프랑스 파리 식물원(Jardin des Plantes)에서 근무하였다지만 실제로 그의 주거지가 어딘지가 확인되지 않고 그가 미국 미시시피 강 주변에서 연구 활동했다는 글쓴이의 추측과 정황은 있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검증이 불가하다.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대조선(大朝鮮)은 다문화적 체제의 나라였다.오늘날 대조선 역사가 왜 그토록 초라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주요 원인은 바로 이질적인 다문화적인 요소가 강했고 이것이 근세기에 산업혁명과 함께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분리화가 되면서 역사 모태 겉껍데기가 거추장스럽게 되자 하나같이 스스로 거부하고 부정하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 이유라 할 수 있다.과거 프랑스라 함은 산업혁명전에 대조선(大朝鮮)역사 지류로 보아야 하며 실제로 유럽대륙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과 관계설정은 불분명한 것이어서 근세기에 서양역사가 완성되는 것과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역사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는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다.프랑스인들은 루이제왕(Louis)의 이름을 딴 미국 루지지애나주(Louisiana)를 거점으로 했다던지 하는 것은 서양위주의 역사가 확실하고 근세기에 거대한 자본가들에 의해 생성된 미국은 정치적인 것보다 경제적인 면에서 우선하였으며 그 결과 유럽전쟁(European War)이라고 불렸던 1차세계대전(世界大戰)은 넘쳐나던 미국자본으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로 충돌한 사태를 관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질 못했다.때문에 근세기 역사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아래 열거한 행채속(莕菜属:Nymphoides) 5(種)중 동아일보에서 이야기한 ‘개나리’상징성에 근접한 종(種)은 꽃을 노란색으로 한정지울 수밖에 없을 것인데 첫번째(1)황화행채(黃花莕菜:Nymphoides aurantiaca (Dalzell) Kuntze, 1891)종(種)과 (5)노랑어리연꽃 학명 Nymphoides peltata (S.G. Gmelin) Kuntze Revis. Gen. Pl. 2: 429, 1891의 종(種)을 들 수 있다.나머지 3종(種)은 꽃의 색이 전부 흰색이다.(1)황화행채(黃花莕菜:Nymphoides aurantiaca (Dalzell) Kuntze, 1891)는 분포지도에서 오스트레일리아(호주:Australia)에 전부 표식이 나타나 실제로 글쓴이가 찾는 장소가 아니다.(2)좀어리연꽃(小莕菜:Nymphoides coreana (H. Lev.) H. Hara J. Jap. Bot. 13: 26, 1937)(흰꽃)하라 히로시(原廣司,Hara Hiroshi:1936-)は、日本の建築家。東京大学名誉教授위 학명의 종명(種名)이 "coreana"라는 것은 한국의 특성이 강하다는 것인데 꽃의 색깔이 흰색이라는데 제외될 수밖에 없고 또한 정서적으로 거슬리는 것도 일본인 하라 히로시(Hara Hiroshi)가 학명을 명명하였다는데 있고 명명시기 또한 1937년이라면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는 때라 더치 공화국(dutch)네덜란드 계열의 사병과 민병들이 고려(高麗)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라 할 수 있다.2001년에 시작된 미국 통합 분류학 정보 시스템(Integrated Taxonomic Information System, ITIS)을 매개로한 2000여종의 생명카탈로그(Catalogue of Life)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어쩌면 현 열도일본인들의 작품이 아닐까도 한다.주로 얕은 연못에 살며 어리연꽃에 비해 전체가 소형이라 ‘작은 행채’라 했다.잎은 심장형이며 잎자루가 길고 지름 2~6cm이고 6~8월 개화하여 꽃의 지름은 8mm 가량이라고 자료에 나타난다.(3)龍骨瓣莕菜:Nymphoides hydrophylla (Lour.) O. Kuntze 1891 흰 꽃이 종(種)은 꽃의 색깔이 흰색이다.떠 있는 볏 심장(crested floatingheart), 흰어리연꽃(white water snowflake), 흰 눈송이(white snowflake)의 별칭이 있는 아시아 종으로 주로 대만의 메이눙구(美濃區), 가오슝 시(高雄市)에서 야생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관상용 수경 정원에 쓰이는 것으로 알려지고 플로리다주(Florida)에서는 성가신 잡초(nuisance weeds)로 여기며 사우스캐롤라이나주(South Carolina) 매리언 호수(Lake Marion)에서 빙점이 가까운 추운날씨에도 죽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4)印度莕菜:Nymphoides indica (L.) Kuntze Revis. Gen. Pl. 2: 429, 1891 金銀蓮花, 어리연꽃(흰꽃)역시 꽃의 색상이 흰색이다.바나나 초목(banana plant), 억센 습지초목(robust marshwort), 물 눈송이(water snowflake)등의 별칭을 가졌으며 못이나 흐름이 느린 물에 나는 여러해살이 수초로서 잎은 심장형이고 물위에 뜨며 지름은 7~20cm이고 8월경 개화가 가능하며 꽃의 지름은 1.5 cm가량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10개 정도의 꽃대가 하루 한 개씩 물속에서 올라와 핀다고 되어 있다. 분포지를 보면 세계 모든 대륙, 곳곳에 퍼져 생장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아래 노랑어리연꽃까지 포함하여 절대적으로 작센왕국의 라이프 치히(Leipzig)출신인 독일 식물학자 오토쿤츠(Otto Carl Ernst Kuntze:1843-1907)의 영향력을 지대했다고 보여진다.그의 이력을 보면 미국식물학자 알렉산더 브라운(Alexander Brown;1843–1906)과 독일식물학자 폴 아세르슨(Paul Friedrich August Ascherson:1834-1913)과 동행하면서 식물을 채집하고 1867년에 베를린에서 라이프치히의 식물편람(Taschen-Flora von Leipzig)을 출간하였으며 독일의 블랙베리의 품종 개량(Reform deutscher Brombeeren)집필, 산딸기속(Rubus)정의하였고 1867년 정유공장을 설립하고 5년후 은퇴하면서 식물학연구에 전념했다 하였다. 1874년부터 1876년까지 카리브해, 남미,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를 여행하고 7700가지의 표본을 채집하였다. 1881년에 세계일주(Um die Erde)출판하고 1878년 박사학위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에서 취득하였으며 1886년 러시아중부, 1887년 카나리아제도를 방문하고 1891년에 2권의 식물의 종류의 일람(Revisio generum plantarum)과 남아메리카의 식물연구본을 집필 출판하였으나 당시 대부분의 식물학자들은 그의 분류를 부정하였다.1894년에 독일 식민지 남아프리카를 여행하였으며 비로소 그의 나이 61세 죽기 3년 전인 1904년에 사모아와 하와이, 미국 방문하였다고 한다.그의 식물연구서들이 당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아마도 대조선의 생물학과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 하며 역설적으로 추리를 하게 한다.사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사실상 독일이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 북부지방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러시아 중부라는 것은 결코 현 러시아대륙으로 볼 수 없음이고 카나리아제도(Islas Canarias)가 어딘가.대서양에 있는 군도로, 북서아프리카 본토에서 108㎞ 이상 떨어져 있고 시간적으로 휘 돌았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마지막으로 (5)노랑어리연꽃(Nymphoides peltata (S.G. Gmelin) Kuntze Revis. Gen. Pl. 2: 429, 1891)은 바로 톱니처럼 째진 수련(fringed water-lily), 떠 있는 노란 심장(yellow floatingheart), 물 술 장식(water fringe)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고 유럽이 원산지며 7~9월 개화하고 물의 흐름이 느린 하천이나 연못에 나는 여러해살이 물풀로 뿌리줄기는 물 밑의 진흙 속에 가로로 뻗고 줄기가 끈 모양으로 길면서 굵다고 설명된다.이것의 속명 “Nymphoides”의 의미는 그리스어 “nympha”에서 요정(nymph)과 “oides” 뜻 닮다(resembling)란 의미의 ‘요정같다’라는 합성어이다.종명 펠타타 peltata 는 라틴어 펠타투스(peltátus)반달 모양의 방패로 무장한 방패라는 뜻이 강하다.이것은 아마도 잎의 모양을 따서 붙인 것이 아닌가 한다.식용식물로서 잎은 줄기, 꽃을 함께 삶아 데쳐 요리에 쓰는데 줄기는 겉을 벗기고 사용하며 씨앗은 다른 요리에 사용하고 신선한 잎은 두통치료에도 쓰이며 일반적으로 장식용으로 정원에서 볼 수 있다 하였으며 특이한 자료가 눈에 보이는데 1920년 설립된 미시간 자연자원국(Michigan Department of Natural Resources)에서는 유해 잡초로서 가장 많이 찾는 수생 침입종(Most Wanted Aquatic Invasive Species)으로 규정하고 씨앗이 물 흐름을 통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물리적으로 손으로 뿌리를 뽑아 제거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1927년 기사 동아일보에서 개나리를 물속에서 아낙네들이 발가락으로 뽑아 올려 손으로 모아 쥐는 것 같은 상황이 그려진다.이런 설정을 보면 동아일보 기사를 비추어 볼 때 당시 살을 에이는 듯한 날씨에 물속에 들어가 개나리를 뜯는 작업하는 아낙네들이 먹고살려고 하루 몇 십전이나 벌고 싶어서 하는 짓이라 한 것을 감안하면 당시 대 홍수로 인해 댐, 제방 등 건설기간산업이 늘어나면서 공공근로사업 식으로 이렇게 작업을 할 수 있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많은 물’을 뜻하는 인디언 말인 mishi-gami에서 유해한 미시간 주(State of Michigan)가 어딘가오대호 남부 미시간 지방을 처음으로 방문한 유럽인이 프랑스인 에티엔 브륄(Etienne Brule)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특히 이 종(種)은 신중국(新中國)자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지금까지 학명들의 근원지를 알기 위해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이 제공한 분포지도와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한 분포지도를 동시에 비교하면서 표식이 명확하다고 볼 수 있는 디스커버 라이프 분포지도를 중점적으로 게시한 것을 여러분들은 볼 수가 있다.그러나 동아일보 1926.12.03 향토례찬내고을명물에서 이야기하길 개나리라는 것을 멋모르고 회덕명물이라고 집어 잡숫다가는 진저리를 칠지니 쓰기가 씀바귀에 비교할 바 아니지만 일명 송채(宋菜)라고 해서 송씨는 선천적으로 이 쓴 것을 잘 먹는 모양이라 한 사실과 최근 보도물인 금강일보 독자위원 칼럼에서 대전의 맛, 행채(荇菜)의 단서는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실린 것이 유일한 공식적인 기록이라 하면서 ‘소재방죽에서 3~4월에 산출되는 약간 쓴 맛이 난다’는 사실을 뒤 받침 할 수 있는 근거를 아직 찾지를 못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동아일보에서 이야기 한 조선(朝鮮)에서 "개나리" 나는 곳은 이곳(소제호)한군데 밖에 없다는 사실 등이다.Nymphoides peltataYellow floating heart(노랑 떠 있는 심장)Synonym(s):Limnanthemum peltatum S.G. Gmel., Menyanthes nymphoides (L.), Nymphoides flava Druce, N. nymphaeoides (L.) Britton, N. orbiculata Druce위 자료를 보면 노랑어리연꽃(Nymphoides peltata (S.G. Gmelin) Kuntze을 일명 노랑 떠 있는 심장(Yellow floating heart)이라 하고 동일종의 분류에 이명(異名)으로 학명 “Menyanthes nymphoides (L.)”를 꼽고 있다. Menyanthes trifoliata L. Sp. Pl. 145, 1753 조름나물여태 우리가 어리연꽃속(Nymphoides)만 살펴보았는데 몰랐던 새로운 종(種)을 발견하였는데 노랑 꽃의 원조는 조름나물속(屬Menyanthes)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조름나물과(Menyanthaceae)에는 이 조름나물속(睡菜屬:Menyanthes)과 전자에 열거한 어리연꽃속(莕菜屬:Nymphoides)으로 나눠지고 조름나물속(屬)의 학명부여 시기가 어리연꽃속보다 1년 빠른 1753년에 생물의 아버지란 린네(Carl Linnaeus:1707–1778)에 의해 명명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이것이 단일종(種)이라는 점과 일생동안 단 1회만 개화하는 단개화식물(單開花植物:monocarphic plant)이라는 사실이다. 속명(屬名)멘얀데스‘Menyanthes’는 그리스어(Greek words), 멘야인menyein(disclosing)과 안도스anthos:άνθος(flower)의 합성어로 꽃이 들어나다. 밝혀지다 등의 의미이다.북아메리카대륙에서 종종 M. trifoliata var. minor Michx 라는 종을 볼 수 있으며 이를 영어명이 bogbean수채엽(水菜葉)과 조름나물(buckbean)라 하였다.조름나물속이라 할지라도 현재 잘 알려진 학명“Menyanthes trifoliata”이 어긋나게 삼출잎을 가진 수평선상의 근경이지만 흰 꽃 직립형 꽃차례인 것이 찝찝하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종명 트리폴리아타 trifoliata 는 삼출잎을 나타내는 명이다.이것은 아시아, 유럽 및 북아메리카대륙의 습지와 늪지에서 생장하는 것으로 때때로 빽빽한 뿌리와 함께 큰 늪에 생장하며 독특하고 강한 쓴맛이 있기 때문에 독한 술 네덜란드 진(schnapps)에 사용된다 한다.이러한 사실은 동아일보에서 말하는 씀바귀처럼 쓰다(苦)한 사실과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유일한 공식적인 기록에 행채가 약간 쓴 맛이 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자료이다.Accepted M WCSP[World Checklist of Selected Plant Families](in review) 2012-03-23 The Plant List includes 17 scientific plant names of species rank for the genus Menyanthes. Of these 1 are accepted species names.위 채택된 식물군의 세계점검표(WCSP)에도 제공된 자료에 Menyanthes 속 17종(種) 중 유일하게 승인된 종(種)이 바로 조름나물속(屬)의 종명(種名) “trifoliata”가 붙어있는 학명 멘얀데스 트리폴리아타‘Menyanthes trifoliata L’.라고 하지만 꽃 색상이 흰색이기 때문에 글쓴이가 찾고자 하는 종이 아니며 종명(種名) “trifoliata”는 중국 삼엽 야생 오랜지등에 붙이는 종명인데 여기세 붙어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Trifoliata is derived from the Latin tres meaning ‘three’ and folium meaning ‘leaf’.종명(種名)트리폴리아타“trifoliata”는 라틴어 트레스"tres"의 의미, 삼(three)과 포리움"folium"뜻 잎(leaf)의 합성어로서 삼출잎을 나타내고 있다.동양성격이 강하고 무엇인가 종명의 의미가 부족함을 느낀다.일단 조름나물속(屬)의 다른 종명(種名)을 찾아야 하는 지경에 몰렸다.[그림]Fringed buckbean, Limnanthemum nymphoides(Menyanthes nymphoides). Handcoloured copperplate engraving after a drawing by James Sowerby for James Smith's English Botany, 1794. (Photo by Florilegius/SSPL/Getty Images)U.S. Habitat: Slow-moving, still, shallow bodies of water including ponds, lakes, reservoirs, swamps, rivers, and canals, usually at depths of 5 feet (1.5 m) or less. Unlike other species in this genus, which are all tropical/subtropical plants, yellow floating heart occurs in moderately cold temperate areas and has been found in a number of northern states in the U.S. However, this species is restricted to well-buffered, alkaline lakes with sufficient calcium for producing its floating leaves (maximum likelihood of occurrence at 188ppm CaCO3) and grows best in mineral soils (e.g., clay).놀랍게도 1794년의 동판조각 식물학 채집그림을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노랑색 꽃잎의 린네가 명명한 학명“Limnanthemum nymphaeoides(Linnaeus)”과 동일한 조름나물속(屬)에 종명(種名)“nymphoides”이 붙어 있는 또 다른 학명“Menyanthes nymphoides”을 새롭게 발견한다.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 L”는 정확히 잎 모양이 들쭉날쭉 참치행채(參差荇菜)임을 알 수 있고 생태적인 것은 느리게 움직이는 얕은 물이나 연못, 호수, 저수지, 늪지, 강 및 운하를 포함하여 1.5 피트 (45.72 cm)이하의 깊이에 생장하며 적당히 추운 온대지역에서 자라고 미국 북부 여러 주(州)에서 발견되면서 잘 완충 된 알칼리성 호수(188ppm 탄산칼슘[CaCO3])에 떠다니는 잎을 볼 수 있으며 충분한 칼슘을 가지고 점토 무기질 토양에서 가장 잘 자란다고 되어 있다.Nymphoides peltata was first named Menyanthes nymphoides by Linnaeus in 1753, revised to Limnanthemum peltatum in 1770 by Gmel., and further revised in 1891 to its current accepted scientific name, Nymphoides peltata (S.G. Gmel.) Kuntze. N.peltata is synonymous with N. flava Druce and N. orbiculata Druce. Limnanthemum cordatum Dunn, described from a specimen collected in northeast Guangdong, China, is probably also synonymous with N. peltata (eFloras, 2009). 최종적으로 위 자료를 참고로 아래와 같이 정리 할 수 있다.1754년 프랑스 식물학자인 쟝 프랑수아 세귀에(Jean-François Séguier)의해 흰 꽃의 학명 님포이데스 펠타타“Nymphoides peltata”가 명명되었던 실태를 위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처음 1753년에 린네(Linnaeus)가 노랑꽃 조름나물속(睡菜屬:Menyanthes) 학명 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를 제일 먼저 명명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결국 조름나물속(屬)의 종(種)이 현재 모든 분류체계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분류체계 상위에 있는 어리연꽃속(莕菜屬:Nymphoides)의 흰 꽃 학명은 1년 늦게 생성된 종(種)임을 알 수가 있었다.이것이 실제로 1년인지 그 보다 더 늦은 시기에 명명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Samuel George Gottlieb Gmelin (1744-1774)was a German physician, botanist and explorer.이어 1771년에 사무엘 그멜린(Gmel)에 의해 1770년에 “Limnanthemum peltatum”으로 개정되었으며, 비로소 1891년에 현재의 학명 Nymphoides peltata (S.G. Gmel.)Kuntze으로 개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N.peltata는 N. flava Druce 및 N. orbiculata Druce와 동일종이며 “Lnnantumum cordatum Dunn”은 광동성(廣東省) 동북부에서 채취 한 표본에 의한 것으로 아마도 님포이데스 펠타타“Nymphoides peltata(eFloras, 2009)”와 동종(同種)으로 별칭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그렇게 보자면 원조는 바로 1753년에 린네에 의해 명명된 학명 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물론 이글에서 처음부터 글쓴이가 찾고자 한 것에 일단 합치된다.1926년 기사 동아일보에 등장하는 개나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으로서 소위'노랑꽃 행채'라 할 수 있으며 단맛이 아니라 '씀바귀처럼 쓴 맛'의 행채를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 종(種)의 정확한 분포지가 모두 멘얀데스 트리폴리아타(Menyanthes trifoliata)에 의해 가려져 찾을 길이 없다.사라진 것이다.6.북아메리카대륙의 노랑꽃 행채 [Menyanthes trifoliata 분포지도]In some cases, individual species maps will have multiple colors regarding nativity [e.g.,Chenopodium album, dark olive green (native), orange (native historic), teal (adventive), and also dark navy blue (exotic)]. This map suggests that in various U.S. states, at least one infraspecific taxon of the species complex is native, another is exotic, a third is adventive and a fourth show as rare. 다행히 미국 자료에서 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의 포괄적 분포지도를 확인할 수가 있다.이 지도를 보면 경우에 따라 개별 종(種)지도에 출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색상이 나타나며 예를 들어 짙은 올리브 그린(native), 주황색(native historic), 청록색(adventive), 어두운 짙은 파랑(exotic)등으로 나타나는데 미국 각주에 다양한 복합성의 분류체계에서 최소 하나의 종(種)을 찾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원산지, 다른 이국종, 토착이 아닌 외래종, 그리고 희귀종까지 볼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1753년 린네가 명명한 조름나물속(屬Menyanthes)의 원조 종명을 정확하게 찾기란 어려운 것 같다.위 지도를 세부적으로 보면 골드색(species not present in state)주(州)에 존재하지 않는 종(種), 노랑색(species present and rare)희귀종(種), 진초록(species present in state and native)토착종(種), 그린색(species present and not rare)희귀하지 않는 종(種)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에서 노랑색은 본 블로그에서 주장한 소성(蘇城:Sioux city)과 남소성(南蘇城)이라 한 아이오와주(Iowa) 수시티(Sioux City)가 있는 곳에서 네브래스카주(Nebraska)서쪽으로 넓게 퍼져 있음도 알 수가 있다.동아일보에서 조선(朝鮮)에서 나는 곳이 오직 소제호(蘇堤湖)뿐이라 했던 사실에서 이처럼 분포지가 넓게 나타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미시간 자연자원국(Michigan Department of Natural Resources)에서 이 행채가 유해 잡초로서 수생 침입종(Most Wanted Aquatic Invasive Species)으로 규정했던 주 이유가 흐르는 물에 씨앗이 이동할 수 있어 번식이 급속도로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특히 대전이 존재했었다고 믿어지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캔사스주(Kansas) 허친슨(Hutchinson), 일리노이주(Illinois) 토즈 포인트(Todds point), 미주리주(Missouri) 아이론튼(Ironton), 미주리주(Missouri)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 캐나다 온타리오주(Ontario)의 오타와(Ottawa), 뉴욕주(NY) 유티카(Utica), 그리고 올버니(Albany), 코네티컷주(Connecticut)의 하트퍼드(Hartford)등으로 나타나는데 원산을 정확히 구분하고자 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A triterpenoid glycoside from Menyanthes trifoliata[1990]Janeczko, Z. Sendra, J. Kmiec, K. Brieskorn, C.H. (Department of Pharmacognosy, Medical Academy of Krakow, 31-065 Krakow (Poland))또 하나 행채에 대한 성분을 분석한 것을 보면 씀바귀처럼 쓴 맛을 동반하는 것은 도라지나 인삼에도 포함되었다고 하는 트리테르페노이드(Triterpenoids)라는 성분이 학명 “Menyanthes trifoliata”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노랑어리연꽃에 대한 인터넷에서 성분, 기미, 효능, 주치, 용량 등을 나타내고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며 절대적으로 노랑어리연꽃이라 할 수없음도 우리는 주지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7. 마무리 이제 한반도 대전에 1926년까지 존재했다고 하는 소제방죽을 왜 소제호(蘇堤湖)라 했을까 자꾸 원천적인 물음이 생긴다.옛 중국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와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서호(西湖)가 현 동아시아대륙에 지명되어 있고 서호 서쪽에 있으면서 어중간하게끔 남북으로 이어진 2.8km의 제방을 분명히 소제(蘇堤)라 하고 있는 것과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근세기 적어도 1945년 이후의 역사 농단세력들이 이렇게 만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본 블로그 글 "만화석초(滿花席草,燈心草:Rush)가 난 조선(朝鮮) http://blog.daum.net/han0114/17050685"에서 주장하길 소(蘇)는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 수우족(Sioux)의 음(音)을 딴 것이라고 보이고 로키산맥(Rocky Mountains)에서 발원하여 미 대륙 중북부를 흐르는 미주리강(Missouri River)에서 놀랍게도 소성(蘇城:Sioux city)과 남소성(南蘇城)이란 지명을 찾을 수 있다 하였다. 따져보자면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수 시티(Sioux City)의 서쪽에 맥쿡호수(McCook Lake)가 있고, 남쪽에 크리스탈 호수(Crystal Lake), 크리스털 코브 공원의 호수도 보인다.만약 도시 소주에서 호수가 있었다면 하나 둘이 아니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는 이야기다.그렇다, 이제는 노랑 개나리라고 하였던 행채(荇菜)를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것처럼 우리가 겪고 듣고 있는 역사 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 너무 많다. 한반도 사람들이 노란 개나리라 하던 행채(荇菜)를 낯설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본래 노란 꽃의 수생식물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혹 흔하게 볼 수 있는 흰색 꽃의 어리연꽃이라 하면서 이를 행채라 하거나 또는 마름풀이라 하고 더욱이 순채라고 하는 것에서 잘못이라고 알기까지 너무 많은 것을 극복해야 했으며 어렵사리 그것을 알기 위해 앞으로도 무수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실이다.아무리 귀중한 역사사실이라 할지라도 근원적으로 역사가 잘못 기록되면 후세들이 이를 알턱이 없다.그래서 그러한 논쟁이나 시비가 그렇듯 간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서두에서도 얼핏 이야기 한 것이지만 역사를 바르게 안다는 확실한 체계적인 비판에 의한 역사 프레임이 우리에게 전혀 없었다.존재했다는 것은 그저 읽고 외우는 것 밖에 없었다는 안타까움이 있을 것이다.때문에 혼란에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과거 대전에 소제호(蘇堤湖)를 직접 보았던 사람이 없었으니 알 수 없다 하겠지만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소제호가 틀림없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물론 빛바랜 사진 속에서라도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다 하겠지만 영상이라 해봐자 상태가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다.지금 서호에 있는 소제(蘇堤)는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항주(杭州) 자사(刺史)로 있을 때 토사를 쌓아 제방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인데 정말 소동파가 만든 소제가 신중국에 존재한 것이 사실일까.동아일보가 소제호 기사를 쓸 시기 1926년 적어도 기억에 남아 있는 세대를 치자면 최소 7~8살 이후부터 계산하면 지금 나이로 97~8세가 되는 신분의 노인들이다.실제로 그런 기억을 하고 계신 분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대전에 있었다고 하는 소제호(蘇堤湖)단면 지도의 제방모습 역시 그림에 보듯이 왜 오늘날 항주(杭州) 서호(西湖) 소제(蘇堤)의 제방과 비슷하게 나타날까? 자꾸 의심이 생긴다.오히려 서호에 있는 소제는 동쪽으로 치우쳐 제방이 되어있는 것이 매우 불안정하지만 대전의 소제호 사진의 모습은 제방 나뉨의 공간은 완전이 균등하다.그리고 솔직히 한문 명칭의 글자도 똑 같지 않는가.우리가 눈을 감으면 감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왜 현 대전에 소제호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이 아니면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그토록 유명하고 풍광이 뛰어나다면 남아 있음직한 사진이 없다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당시 행채를 뜯는 아낙네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추운 겨울 물속에 들어가 발가락으로 뜯어 올리는 수고를 감수했겠는가.이를 후세인 우리들이 잊어버리다니 말이 될 말인가.일제라 하지만 일제 정체까지 모호한 것을 감안하고 풍광이 정치성을 가지는 것도 아닐터인데 왜 소제호에 관한 자료들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또한 개나리라고 하는 행채(荇菜)는 정확한 요리방법조차 남아 있지 않은 채 식재료를 구한다 하더라도 당시의 맛대로 다시 맛보기란 쉽지 않다고 하는 유명인의 푸념도 마치 사라진 역사의 운명처럼 받아들여 당연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가 가련하기 그지없다.역사가 그대로 지속적으로 존속한 것이 사실이라면 절대로 이런 어처구니의 공백이 존재하지 않아야 맞다.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 전개된 역사사실이 마구 꾸겨진 자락위에 우리는 힘들게 걸터 앉아 있는 것이다.조선 순조 29년, 기축년(己丑年), 1829년 10월 3일 회상전(會祥殿) 경희궁 차비문(差備門)안의 화재로 융복전(隆福殿), 흥정당(興政堂), 정시합(正始閤), 집경당(集慶堂), 사현합(思賢閤), 월랑(月廊)등 여러 부속건물이 반 이상 소실되었다고 하는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April 24, 1829, Great Fire of Bunsei, 文政の大火하지만 우리 한반도 역사보다 더욱 찌질하고 정확할 수 없다고 하는 일본역사에 놀랍게도 에도시대 문정기(文政:1818-1829)인 1829년에 대화재라는 제목과 함께 조선에서 화재가 난 시기에 똑 같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가 있는데 이 또한 복잡한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여기서 우리가 추측 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의 경성과 같은 지역에 일본의 수도, 애도가 존재했다는 것으로서 일본인자치주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물론 월 까지는 맞지 않겠지만 이러한 역사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이와 같이 풀어보면 희한한 이야기들이 많다.개나리라고 하는 행채(莕菜)의 꽃잎 생긴 모양을 백과사전의 설명을 보면 대다수가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톱니가 있다고 되어 있는 것에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마치 천 조각을 잘라 헤쳐 놓은 듯 너덜거려 보이는 모양을 말한 것인데 실제로 위 멘얀데스 님포이데스“Menyanthes nymphoides”노란 꽃을 보면 그렇다.이를 노랑어리연꽃(荇菜)이라 하고 학명을 님포이데스 펠타타“Nymphoides peltata”로 정리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정확히 어리연꽃속(屬)이 아니라 조름나물속(屬)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 식물에 대해 설명을 하여도 부족한 것은 실제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제일 크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도 어림짐작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백과사전에 보면 노랑어리연꽃은 6월부터 늦으면 10월까지도 꽃을 피우는 식물로 번식력도 강해 우리나라가 원산지지만 냉온대와 대륙성아열대를 이야기하거나, 만주, 중국, 혼슈 이남의 일본, 아무르, 우수리, 몽골, 그리고 유럽 등의 유라시아 전역까지 포괄적으로 서식하고 있다 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정립될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알 수가 있고 지금까지 생물학계가 이런 종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평하는 것이 지극히 옳을 것이며 그러니 어쨌거나 본질을 감추려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양심을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미 우리의 역사는 한정된 역사가 아님을 알았다.예를 들어 앞에서 열거한 것 중에 행채속(莕菜属:Nymphoides)(2)좀어리연꽃(小莕菜:Nymphoides coreana (H. Lev.) H. Hara J.1937)(흰꽃)도 일본인 하라 히로시(原廣司,Hara Hiroshi)작품이라는데 일단 놀라지만 종명(種名)이 "coreana"가 붙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한국의 특성이 강하다는 것으로 풀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역시 꽃의 색깔이 흰색이라는데 이미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개나리 행채가 아니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그 만큼 역사 지식이 진보한 것이다.즉 이 작은 행채라고도 하는 (2)좀어리연꽃(小莕菜:Nymphoides coreana)은 2001년에 시작된 미국 통합 분류학 정보 시스템(Integrated Taxonomic Information System, ITIS)을 매개로한 2000여종(種)의 생명카탈로그(Catalogue of Life)에 조차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코리아나’라고 종명을 일본인이 명명 하였지만 이미 근거가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의미에 더하여 어쨌던 이 ‘코리아나’의 종명을 사용한 일본인은 한반도 이동 이전에 북아메리카대륙 어디에서 야생한 또 하나의 행채를 표시하고 싶었겠지만 현재 미국에서는 허용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미국인들이 코리아나를 북아메리카대륙에 근거한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이 조치 속에 있을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개나리" rel="tag" target="_blank">개나리</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노랑어리연꽃" rel="tag" target="_blank">노랑어리연꽃</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미시시피강" rel="tag" target="_blank">미시시피강</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마름" rel="tag" target="_blank">마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송시열" rel="tag" target="_blank">송시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순채" rel="tag" target="_blank">순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행채(荇菜)" rel="tag" target="_blank">행채(荇菜)</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뉴욕상비군" rel="tag" target="_blank">뉴욕상비군</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소제방죽" rel="tag" target="_blank">소제방죽</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소제호(蘇堤湖)" rel="tag" target="_blank">소제호(蘇堤湖)</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대동천(大東川)" rel="tag" target="_blank">대동천(大東川)</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해좌궐리(海左闕里)" rel="tag" target="_blank">해좌궐리(海左闕里)</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강좌칠현(江左七賢)" rel="tag" target="_blank">강좌칠현(江左七賢)</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해좌칠현(海左七賢)" rel="tag" target="_blank">해좌칠현(海左七賢)</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송채" rel="tag" target="_blank">송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해로가(薤露歌)" rel="tag" target="_blank">해로가(薤露歌)</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회덕읍지(懷德邑誌)" rel="tag" target="_blank">회덕읍지(懷德邑誌)</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조름나물속(睡菜屬:Menyanthes)" rel="tag" target="_blank">조름나물속(睡菜屬:Menyanthe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어리연꽃속(莕菜屬:Nymphoides)" rel="tag" target="_blank">어리연꽃속(莕菜屬:Nymphoides)</a>

화기삼(花旗蔘)은 고려인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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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삼(花旗蔘)은 고려인삼인가.글쓴이:한부울1.화기삼(花旗蔘)에 대한 지형적 고찰2.고려인삼과 아메리카인삼의 동일한 역사 위치 개마고원(蓋馬高原)을 찾아3.재배인삼 아메리카인삼의 역사 배경4.금강산인삼(金剛山人蔘)이란 무엇일까?5.아메리카인삼과 금강산인삼의 가변성6.각종 인삼의 근원지와 학명의 모순7.아메리카인삼과 고려인삼의 대체성8.마무리1.화기삼(花旗蔘)에 대한 지형적 고찰화기삼(花旗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백과사전을 보면 화기삼(花旗參)을 동양삼(東洋參) 또는 관동삼(關東參)이라 하고 이것을 외국삼이라 명하면서 또한 서양삼(西洋蔘)이라 하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여겨진다.동양삼이라 하고 동시에 서양삼이라 하는 것은 현 동서양 구분하는 역사상황아래 과연 가능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할 정도이다.화기삼은 꽃의 깃발을 사용한 국가나 단체의 소속된 인삼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명칭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하지만 화기삼을 서양삼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도대체 광동삼이라 하고 동양삼이라 했다는 사실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글쓴이가 오래전부터 기존 근대사를 의심하고 보는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산재되었다고 보기 때문인데 서양인들의 지나치게 삐뚤어진 서양역사 위주의 이기적 판단이며 오리엔탈리즘을 폄훼하는 저변에 깔여있는 그들만의 우월주의식 개념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오리엔탈리즘은 현 아시아민족 즉 동양인들에게 존재하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서양인들에게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반론적인 명칭이기도 하다.서양역사를 보면 오리엔탈리즘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듯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들에겐 족쇄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서세들이 만든 근대사가 생성되고 난 후 서양인(西洋人)들은 불필요할 정도로 오리엔탈역사문화를 배척하고 폄훼하거나 존재가치를 무시하고자 했던 것이 사실인데 이것을 글쓴이는 그러한 족쇄가 그들에게 상존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던 사실이다.역설적으로 그러한 삐뚤어진 생각들은 동양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이 강했거나 아니면 서양역사 역시 동양 즉 오리엔탈문화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특히 서양인들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란 용어에 상당히 민감하고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서양문화가 우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미국의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1935-2003)의 1978년 저서《오리엔탈리즘》에서 언급하였듯이 "서양인들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사고양식"이라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동양문화를 필요이상으로 깍아내려 그들 발밑에 두려 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이러한 사실들은 글쓴이가 처음부터 서양역사전체를 의심하고 보는 것과 같고 세계삼한역사연구에 결과에서도 이와같은 그들만의 맹점을 밝혀 알 수 있었듯이 글쓴이의 주창한 것과 결론이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즉 서양역사가 태동하는데 동양역사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으며 동양역사가 아니면 그들 역사가 완성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보기 때문에 서양역사학자들은 이런 면에서 상당한 열등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가 된다.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화기삼을 관동삼(關東參), 동양삼(東洋參)이라 하면서 서양삼(西洋蔘)이라고 동시에 명칭한 사실은 무엇인가 뚜렷이 서양삼이라 할 수 없었던 근본 원인이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어쨌거나 위 여러가지의 이질적인 명칭들이 “하나의 인삼”을 지칭하였다는데 일단 놀랄 수밖에 없다.어떻게 이것이 기존 근대사를 바탕으로 하는 생물학적 판단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솔직히 현 동아시아역사만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물론 글쓴이가 주장하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본다면야 불가능할 것도 없다.하나하나 풀어보자.먼저 광동삼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동양적이며 중국영역적인 문제의 지명이다.마찬가지로 관동(關東)이라는 지명역시 지극히 동양사학적인 요소가 많다는 사실에 집중해본다. 여기서 한가지 전제 할 것은 관동(關東)은 발음상, 표의(表意)상 기준점이 역사변천으로 급속하게 변하면서 근세기에 지명이동과정에서 광동(廣東)으로 왜곡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할 수가 있다.현재 신중국의 지명에서 광동은 넓다는 의미와 동남으로 바다가 둥글게 감싸 안은 것처럼 모습이며 또한 광(廣)은 주로 인명(人名)에 쓰인다 했으며 폭이 넓다, 수량으로 넓이 등으로 쓰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만 두고 보면 동아시아대륙의 광동과 북아메리카대륙의 광동의 모양이 거의 대칭적인 면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다시 돌아가 관(關)은 특히 한반도에서는 령(嶺)과 같이 사용하는데 거대한 산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타당할 역사적 관념일 것이지만 왜그런지 알 수 없지만 작은 고개 등으로 축소시켜 적용하는 것도 원래 지명의미와 비교해 볼 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 관이 쓰이는 것은 어디를 가거나 왕래할 때에 반드시 지나는 길의 경계 문(門)빗장이라고 하는데 이설이 없다.령(嶺)을 한반도 지형에 맞게 '고개'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은 분명 넓은 영토에 적용하던 것임에도 한반도와 같이 동서가 좁은 곳에 적용이 되면서 의미가 축소되어 나타나고 있다는데 문제의 소지가 큰 것이다.이러한 점은 누차 본 블로그에서 지적한 문제이다.관의 본질은 연산(連山) 혹은 잇닿아 뻗은 산줄기로 해석하는 것이 절대적인 가치이고 또한 산맥이 아니면 제대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글쓴이가 수차 이야기 했다.예를 들어 관동대지진이란 명칭에서의 관동(關東)이라 함도 이와 같은 것으로서 현재 일본열도 동부 즉 동경(東京)서쪽에 무질서하게 운집해 있는 산들을 기준으로 지칭하는 관(關)이라 하고 있지만 무엇인가 꿰맞춘 듯하고 지형 모양에서 연산이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며 선이 굵게 들어나는 산맥 같은 것을 그곳에서 근본적으로 찾을 수 없다는 문제가 명쾌하게 지적되는 사실이다.신(新)중국대륙에서도 보면 동쪽의 중원으로부터 서쪽의 협서(陝西)관중(關中)으로 통하는 관문이라 하였는데 중원이라 함은 천자의 직할령과 그 주변 사방의 봉건제후 영지 기(畿)까지를 말하는 것으로써 전통적으로 황하(黄河)의 중류(中流)와 하류(下流)지역을 찾을 수 있고 그리고 지금의 하남(河南)성 대부분과 산동(山東)성 서부(西部) 및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성 남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라 하고 있지만 현 신중국 지형인 동아시아대륙을 엄밀하게 따진다면 산맥이 북쪽으로 몰려 있는 것과 평지가 동쪽으로 치우치면서 황하강이나 양자강의 횡 폭을 넓게 만들어 강의 횡 폭 넓이 만큼 강남(江南)을 모호하게 만들고 명확하게 지명을 찾기가 힘드는게 사실이다.중원과 강남은 실과 바늘 같은 지명이라 할 때 현재 강남을 강남이라 하지 않았다면 과연 강남지명을 제대로 찾을 수가 있었을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이야기다. 이와같은 사실을 기존 재야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륙사관에도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볼 이야기다.우리나라 역사에서 말하는 관동(關東)을 보면 고구려(高句麗)로 귀속된 예맥(濊貊)땅이라 하였고 강원도(江原道) 횡성(橫城)이라한 삭주(朔州)와 강릉(江陵)이라하던 명주(溟州)를 말하고 있으며 더 세밀하게 영서(嶺西)와 영동(嶺東)이라했고 고려(高麗) 성종(成宗)때는 서울 경기를 관내도(關內道:995-1106)라 하면서 이동[以東]지역의 땅을 강원도(江原道)를 말하면서도 관동(關東)이라 하였던 것에서 중간에 관서(關西)가 어중간하게 뭉쳐 있음도 알 수가 있다.뭉쳐 있다는 말은 지명들이 한반도 횡폭이 좁기 때문에 겹쳐 있다는 말이다.한반도 지형이 왜 역사서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은 이러한 지형 한계점이 곳곳에 상존하기 때문이다.특별한 예를 들어보면 바로 우산국은 명주(강릉)에서 정(正)동쪽에 있는 해도(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라 하였지만 우산국을 울릉도라 할 때 정동(正東)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울진(蔚珍)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전혀 맞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관(關)을 태백산맥(太白山脈)을 경계로 하더라도 동쪽을 영동(嶺東), 서쪽을 영서(嶺西)라 한 것이라면 그나마 이해가 되겠지만 강원도 강릉시(江陵市)와 평창군(平昌郡)사이에 있는 고개, 대관령(大關嶺)을 기준으로 동쪽을 영동이라 하고 서쪽을 영서라 하는 것은 급한대로 만든 것에 불과할 뿐이다.때문에 동아시아대륙에 존재하는 한국, 중국, 일본 모두는 관(關)이라고 하는 실체의 지명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우가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한마디로 억지스러운 것이다.역사문제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입각하여 바라 볼 때 관(關)은 거대한 산맥을 통과하는 관문을 말하며 앞에서도 설명한 것과 같이 관(關)은 빗장, 잠그다, 막다 등으로 국경이나 국내 정치, 문화, 교통, 군사 따위의 핵심이 되는 곳 요지(要地)의 통로에 두어서 외적을 경비하며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이나 화물 등을 조사하는 곳으로 예부터 이런 목적으로 쓰였다는데 중대성이 있다.한반도에서 지명이 잘못 쓰이고 있는 문제는 여러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도 지적했지만 고려(高麗)때는 지금의 철령에 관문 철령관(鐵嶺關)이나 행정기구 명칭의 직할지(直轄地)인 철령위(鐵嶺衛)를 두었다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점령주체가 그곳 자원이나 인적이동량이 풍부했거나 요지의 땅이기 때문에 이을 관할하고자 한 것임에도 현 한반도 지형상황은 이와 같은 역사사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 형태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무엇보다도 철령(鐵嶺)이라는 지명에서 살펴보았듯이 근원적으로 철광석(鐵鑛石:iron ore)이 무진장 생산될 수 있는 지역이라야 하지만 한반도에 지정된 곳에는 풍부한 자원이랄 것이 없는 곳이다.명조(明朝)때 기록은 어떤가.압록강 상류(上流)라 함은 험준한 산맥이 빽빽이 들어서 물살이 급속한 곳임을 알 수 있고 압록강 서안이라 하는 것은 강 흐름이 현 한반도 지형처럼 가로, 횡이 아니라 상하, 세로로 흐르는 강을 말하는 것인데 압록강 서안일대(西岸一帶)에 철령(鐵嶺)을 두었다 함은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공간 속에 요동이존재하며 철령 서쪽에 또 다른 물길 요하(遼河)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유추할 수가 있다.역사적 현실문제에서 반드시 감안해야 할 지형 상식 중에 당조(唐朝)를 지나 원조(元朝)에 이르러 원조(元朝)의 영토가 압록강을 넘어 남방까지 도달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남방이라는 지역을 오늘날 동서(東西) 폭이 좁은 한반도에 적용하게 되면 꼼짝없이 평양(平壤)이나 한성(漢城)까지 지척거리에 있어 이 때문에 온통나라가 늘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된 듯 오해가 따른 것이다.실제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허허벌판 또는 대초원이었을 가능성과 압록강 남쪽에 곧바로 내려가면 평양이나 서울을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없는 역사상황에 대한 대사고전환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이처럼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한반도 역사가 아닌 역사를 충분히 읽을 수가 있다.만약 세계삼한역사전체가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한반도 역사에 들어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피해역사, 자학역사는 애초부터 우리 상식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이와 같은 몇 가지의 지명만 가지고도 기존 역사와 완전히 다른 진단이 가능하다.1388년 3월 명조(明朝)에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관할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鐵嶺衛)설치를 통고하였으나 이에 맞서 고려에서는 본국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최영(崔瑩)이 중심이 되어 요동정벌론(遼東征伐論)을 제기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 만큼 중앙정부가 철령위를 차지하고자 한 중대성이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이성계가 최영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과연 중화사대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중앙정부의 위엄과 권한을 보호하려 했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우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이러한 역사위치문제에서도 명확히 해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요동(遼東)땅의 위치를 추측하게 하는 것은 당시 활에 입힌 젤라딘 성분 아교(阿膠:Donkey-hide gelatin)가 녹을 정도로 기후가 덥고 습해 명확하게 아열대지역임을 알 수 있어 이를 한반도 압록강 이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하게 볼 수 없는 것으로써 기후학적(氣候學的)으로 보면 몬순기후(monsoon)임을 알 수 있다.본 블로그 글 "요동(遼東)이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2"와 연이은 글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에서 기존 동아시아 역사 만의 고착적인 문제점을 지적했고 역사 위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하고 또 설명을 했다.어차피 역사가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거대한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에서 우리가 패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때문에 그 이후의 역사는 삼한역사편이 아니었다.최후 1945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시점부터 한반도 역사가 만들어지고 심각한 조작행위가 있었으며 위에서 언급한 관이나 령을 바탕으로 하는, 관동(關東), 관서(關西), 영동(嶺東), 영서(嶺西), 관내도(關內道)등의 지명 위치를 한반도 지형상황에 맞게 만든 것임을 알 수가 있다.한반도 내에 철령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일본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나(池內宏:Ikeuchi Hiroshi:1879-1952)가 의도적으로 함경도 남부지역을 이야기하였고 반도사학자들은 이를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현 강원 고산군과 회양군의 경계에 있는 높이 685m의 고개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도 참으로 어처구니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일본인들이 말하면 그것이 역사가 되던 세상이다.우리는 정보왕조라 하면 무조건 중국이라고 하고 이를 조공정치를 한다하여 속국처럼 이야기 하지만 알고 보면 정치체제가 하나의 체제였기때문에 특수한 관계설정의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당조와 원조가 그랬던 것처럼 명조(明朝)역시 고려나 조선의 영토를 확보하려는 욕심이 없었다는 사실은 중앙정부 조정이 고려 혹은 조선을 근거로 정치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즉 동일한 역사체제속에서 움직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식민지 역사는 기어코 이 관계를 종속관계를 만들어 놓고 있지만 오히려 근세기에 삼한정치체제를 보고 서양역사학자들이 놀라며 당혹케 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체제속에서 서로 상대개체들을 존중하는 보완관계였을 것이란 사실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만약 식민지역사를 고집하는 한반도 역사처럼 정복왕조라 하여 무조건 종속관계가 지속되었다면 이미 삼한역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라진 정복왕조처럼 처지가 똑 같았을 것이 틀림없다. 본래 관내도(關內道)라는 것은 경사 즉 서울이나 경기일대를 지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동쪽을 관동이라 했다는 이야기는 한반도 지형으로 이상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서울경기라 하는 관내도 경계 밖에 기준이 될 만한 산맥이 없고 태백산맥을 지정한다고 해도 관동과 관서의 나눔의 기준으로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과 령(嶺)이 있어 그것을 관(關)의 기준으로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하는 사실들이다.턱 봐도 우스운 것은 위 한반도 조선행정지도를 나타낸 그림사진에 경기도 지명에서도 좌도(左道), 우도(右道)라 하지만 오히려 방향에서 남도(南道)와 북도(北道)라고 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방향이 뒤틀어져 있다.또한 관내도(關內道)란 역사지명 역시 좌도와 우도라 한 이상한과 같이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령(嶺)의 기준점이 도대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문제 등 열거하기 부족할 정도로 엉망진창이다.기존 삼한역사를 보면 끊이지 않고 제시되는 관(關)을 중심으로 관북(關北)과 관서(關西) 그리고 관동(關東)이란 지명이 나타나지만 사실상 이것의 구분은 이름 뿐이며 한반도 지형상 삿갓에 양복을 입혀 놓은 것 같이 지형이 지명을 전혀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실체의 비극이다.그렇다면 글쓴이는 이 관(關)의 지명을 어디를 근거로 하는 것인지를 밝히지 않을 수가 없다.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애팔래치아산맥을 관(關)으로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면 정확하게 우리나라 사서(史書)가 말하는 지명들과 거의 일치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애팔래치아산맥 이동(以東)쪽에는 미국의 독립본거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근대사가 화려하게 꾸며진 산업경제가 활성화된 지형 공간이기 때문에 모든 자본이 집중되었던 곳이다.그곳에 18세기 중엽부터 산업자본주들이 대거 생성한 곳이며 미국독립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13개주가 있고 미국의 경제성장을 선도하던 거대한 도시들이 여기저기 존재하였기 때문에 삼한역사의 서울경기가 그곳에 있었다 한들 이상할 것이 없는 한 나라의 중심지임은 물론이고 북아메리카대륙의 산업혁명지형에서 보다시피 근대 경제가 최고로 활성화된 지역임을 알 수가 있다.더하여 애팔래치아산맥을 중심으로 온갖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뒤받침하는 것과 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곳임을 통계자료까지 확인 할 때 이와 같은 글쓴이의 주장은 허황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때문에 예부터 비교적 낙후되었다고 하던 관서(關西)지역에서 몰려드는 인구 이동을 최대한으로 막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한반도에서 관서(關西)라 함은 경기와 서울이 됨과 동시에 어중간하게 해서(海西)라 할 수 있는 황해도까지 얽혀 있어 소외지역인 관서라 하기에는 맞지 않는다.1624년 관서(關西)지방에 도원수(都元帥) 이괄이 난(李适─亂)과 1811년 관서병란(關西兵亂)의 정주성전투(定州城戰鬪)와 관서괘서사건(關西掛書事件)의 주인공 홍경래가 바로 관서 또는 서북면 출신으로써 반란의 주요원인이었던 지역적인 차별과 중앙진출에서 소외받았던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러던 곳이 바로 관서이다.한반도역사 지형은 결국 관을 철령관으로 할 때 철령관 서쪽이 관서라면 서울이나 경기가 모두 관서로 오해되어도 할말이 없다.고려 성종 때의 행정구역인 관내도 서쪽 지역이라는 의미도 무색하게 만든다.그러니 현실적인 문제에서 보더라도 이런 역사사실들에서 그저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라는 것은 누가 뭐래도 상업이 발달할 수 있는 지역이며 분명한 것은 관은 서울과 경기를 보호하는 지명임을 알 수 있어 근대산업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요지임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때문에 관서가 그러하듯 관동은 서울 경기지역이다.반면 한반도의 관동지역은 산간지방이라 하여 경제적으로도 제일 낙후한 지역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모순을 입증하는 것이다.거짓 역사이지만 일본 지형을 보면 한반도와 반대로 관동지역에는 버젓이 동경(東京)이 존재한다.동경이 무엇인가.고려(高麗)사경(四京)중에 하나인 경주(慶州)이고 낙양(洛陽)이며, 장안(長安)이다.옛 명 동경이었던 경주는 무려 17만 8936호(약 90만 명)의 인구가 존재했고 당나라 초기에 낙양 인구역시 100만을 넘었다고 했다.그 만큼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북아메리카대륙 관동지역인 13개주에 초창기 미국의 인구70%가 존재했다는 설명이 있다.반면 관동이라고 하는 한반도 사정을 보라.단번에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고려(高麗)의 역사를 그대로 놓고 보면 한반도에 있기가 아까울 정도이다.고려는 문화선진국이었고 우리의 자학적인 인식과 달리 글쓴이의 판단으로 세계제일의 문명국가 이었다는 확신이 있다.세계 정치, 문화, 교통, 군사적으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과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란 글에서 핵심적인 이야기를 이미 세세하게 설명하였지만 근세사가 하나같이 숨기는 것이고 이중으로 엮은 것이며 오늘날 금속활자발명을 유명서양정치인조차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역사진실, 역사사실 그대로 말하지 않는 것은 고려가 당시 선진문명국이나 선진문화국이었던 사실을 알 수 있고 서양문화가 바로 고려문화를 바탕으로 했음을 그대로 인정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이러한 사실들이 서양인들에게 의도적으로 동양오리엔탈리즘을 깍아내리게 한 것이 틀림없다.때문에 글쓴이는 서양인들이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상징적인 존재가 바로 "COREA"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아마도 서양인들은 19세기후반까지 COREA 자체역사를 경외했을 것이다.분명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문화적인면에서나 과학의 진보적 발달과 아울러 물질적으로도 상당히 뛰어나 우월했을 것임을 알 수 있고 때문에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체제가 흔들리기 전까지 그렇듯 뛰어나 선도적인 역할하지 않았다면 비록 흔적, 자취로 남아 있는 거룩하고 훌륭한 이러한 역사기록이 남아 있을리가 만무한 것이다.지금까지 관(關)에 대한 설명에서 이렇듯 글이 길어진 것은 현 동아시아대륙은 천하없어도 본질의 역사 지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며 화기삼이 광동삼이라 했다는 사실에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했다고 본다.비록 광동(廣東)이라 했지만 결국 다량의 인삼생산의 위치가 관동(關東)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다는 것과 즉 북아메리카대륙 애팔래치아산맥을 기준으로 하는 관(關)이라 할 때 광동(廣東)이나 관동(關東)은 절대적으로 위치가 다를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또한 고려인삼(高麗人蔘)이 동서양인 모두에게 귀했다고 할 때 밀무역이 성행했을 것이란 사실은 불 보듯 뻔하고 관리들이 관(關)을 통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값어치가 있는 물건에 대해 급속도로 증가하는 밀거래를 막으려했음도 알 수가 있다.결국 인삼을 사고팔고 하는 상업자들은 인구밀집도가 높은 곳에서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고 사람들이 귀하게 찾는 고려인삼이라면 더욱 그러한 곳에서 이를 찾을 것인데 고려인삼과 대적될 수 있는 인삼 그것은 서양인들이 오매불망하던 실체로서 그들에게 호기의 상품일 수 있는 것이다.그것을 서양인들은 화기삼이라 하고 독립화했을 것이다.2. 고려인삼과 아메리카인삼의 동일한 역사 위치고려인삼이 귀했다고 하고 삼국시대부터 인삼무역이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자연 인삼 즉 산삼(山蔘)만을 가지고 그러한 수요를 충당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그렇다면 언제든지 반드시 재배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한반도에 남겨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나 그 외 잡(雜)사서(史書)들 마저도 찾기가 힘든다.아예 인삼에 대해 사실을 전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맞다.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전부 중국역사를 인용한 것일뿐 한반도 역사자체 사서에는 아예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낀다.상술이 뛰어났다고 하는 일본에서 조선 생근(生根) 종자를 받아 1727∼1728년경에 재배를 하기 시작했다던 사실에 비교하더라도 역설적으로 고려인삼이 유명했던 만큼 본국 정책이 이러함을 외면할 턱이 없고 최소한의 고려나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재배했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이것이 한반도 역사의 돌이킬 수 없는 취약성이랄 수밖에 없다.宣和奉使高麗圖經 第23券 雜俗2 土産-人參之榦。特生,在在有之。春州者。最良。亦有生孰二等。生者。色白而虛。入藥則味全。然而涉夏。則損蠹。不若經湯釜而孰者。可久留。舊傳形匾者。謂麗人。以石壓去汁作煎。今詢之。非也。乃參之孰者。積垜而致爾。其作煎當自有法也。館中。日供食菜。亦謂之沙參。形大而脆美。非藥中所宜用。又其地。1123년(인종원년)에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가서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당시에 이미 홍삼(紅蔘)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示唆)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고 알려지는데 “인삼의 줄기[幹]는 한 줄기로 나는데 어느 지방이고 있으나, 춘주(春州) 것이 가장 좋다하였고. 또 생삼(生蔘)과 숙삼(熟蔘)두 가지가 있는데 생삼은 빛이 희고 허(虛)하여 약에 넣으면 그 맛이 온전하나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쩌서 익혀 오래 둘 수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란 내용이다.명확한 내용이 아닐지라도 읽어 상황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하다.다른 나라의 사서(史書)가 되어버린 고려도경을 통해서만이 이러한 간단한 사실 조차도 빌려 확인해야만 할 처지이니 우리의 역사가 온전하다 할 수가 결코 없다. [동아일보 1922.02.20 일자 컬럼]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고려인삼에 대한 우리 사서의 기록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그러나 위 사진은 1920년 2월 20일자 동아일보 컬럼기사인데 여기에 고려인삼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여 참고겸 이를 풀어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世界一(세계일)의高麗蔘(고려삼) 專賣局高武事業課長談(전매국고무사업과장담) 1922년 02월 20일인삼(人蔘)은 옛날부터 중국의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영약(靈藥)으로 성대하게 사용하였고 세계인삼(世界人蔘)의 소비지로 유명하지만 일본(日本), 미국만주(米國滿洲)의 인삼은 일반한약(一般漢藥)으로 재배하는 것이고 조선산(朝鮮產) 소위 고려인삼(高麗人蔘)은 일상음료증답용(日常飮料贈答用)으로 부호대관(富豪大官)사이에 상비되는 것인바 지금(今)에 중국(中國)의 수용상태를 보면 미국산(米國產) 수출량16만근, 1근이 20원(圓)내외이고 일본산(日本產) 수출량14만근, 1근5원(圓)내외이며 조선산(朝鮮產) 수출량3만근, 1근 150원(圓)내외이며 만주산(滿洲產) 수출량16만근, 1근의 8원(圓)내외 우(右)와 같아 수출량의 보면 최하위이나 가격으로 말하면 즉 기 품질(品質)과 공히 세계제일(世界一)이라 이와같이 그것은 이름이 높은 것에 반하여 한편 부정상인(不正商人)이 미국(米國) 또는 만주(滿洲), 일본산(日本產)으로 소위 고려인삼(高麗人蔘)이라 하여 판매하는 염려가 있어 융희2년[隆熙二年(1908)]즉 명치41년(明治四十一年) 이후 당국은 이를 관영으로 하고 개선하여 대정9년(大正九年:1920) 홍삼전매령(紅蔘專賣令)을 발하여 경기도(京畿道)개성군(開城郡), 장단군(長湍郡), 황해도(黃海道) 김천(金川), 평산(平山), 서흥(瑞興), 수안(遂安), 황주(黃州), 봉산(鳳山)과 평남(平南) 중화군(中和郡)의 각 주요산지에 이를 적용하였으니 개성(開城)에 홍삼제조소를 설치하고 홍삼생산량(紅蔘產額) 3만근(三萬斤)을 제조하여 약 이백만원(二百萬圓)과 홍삼분말(紅蔘粉末) 그리고 삼정(蔘精)의 소량을 얻었으며 기타 함경북도(咸鏡南北)를 제외하고 전매구역(專賣區域)외의 생산을 합할 때 약 삼백만원(三百萬圓)의 수확이 있을지며 또한 전매국(專賣局)은 홍삼제도 원료가 되지 않는 所白蔘(소위백삼)은 개성삼업조합(開城蔘業組合)에 판매하게 하여 판매자는 근거지인 개성은 물론이고 조선내 전부(朝鮮內全部)와 일본은 동경(東京)을 필두로 대판(大阪), 나고야(名古屋), 북해도(北海道), 사국(四國), 구주(九州)에 판로를 있게 만들었는데 홍삼(紅蔘)은 1910년(明治四十三年) 이후 삼정(三井)과 특약(特約)이 성립되어 현재 삼정(三井)의 총판(總販) 즉 독점판매(都庫)가 되었는데 최근 이미 삼정(三井)은 판로확장을 잃어버린 상태임으로 이밖에 경작평수(耕作坪數)를 넓히지 아니할 것이지만 원래 그치지 않는 상인들의 견제책(牽制䇿)이었음으로 이익(利益)은 칠팔십만원(七八十萬圓)가량 이겠지만 어찌하였든 삼정(三井)으로 상해(上海) 즈푸(芝罘:煙臺), 광동(廣東), 반곡(盤谷) 랭군(Rangoon:蘭貢), 대북(臺北各地)에 분투하는 것은 이제까지 약학적효능(藥學的効能)의 증명이 불가능했지만 전통적으로 기 정력(精力)을 증강시키거나 혹은 엑쓰(X) 외과적효능을 인정함에 따라 모르던 사람도 상당히 이해가 있어 하지만 아직 수출되지 못한다고 한다.[정리 한부울:2017.07.05]본래 인삼(人蔘)은 옛날부터 중국의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영약(靈藥)으로 사용되면서 중국이 세계적인 생산지가 아니라 소비지(消費地)로 유명했다고 말하고 있어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이것은 중국이란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국가가 아니라는 의미가 있고 그저 하나의 도시 정도로 축소되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다.인삼 종(種)에는 일본인삼(日本인삼)과 미국만주(米國滿洲)인삼은 일반한약(一般漢藥)으로 재배하고 조선산(朝鮮產) 소위 고려인삼(高麗人蔘)은 일상음료로 서로 주고받는 선물용으로 부호대관(富豪大官)사이에 일상적으로 상용되는 것이라고 명확히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여기서 축약 할 점은 일본인삼, 미국, 만주인삼은 재배인삼임을 알게 하고 고려인삼은 그런언급이없어 자연산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위 기사는 특별하게 1920년경 구체적으로 인삼물동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미국산(米國產)은 수출량이 가장 많은 16만근(萬斤)인 반면에 가격은 1근이 20원(圓)내외이고, 만주산(滿洲產)은 수출량16만근에, 가격이 1근의 8원(圓)내외이며, 일본산(日本產)은 수출량14만근에 가격은 1근 5원(圓)내외로 나타나 비교적 재배인삼으로 상당량을 수출하였음을 알 수가 있고 1근당 가격은 이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 미국산(米國產) 20원이라 하였다.이와 비교하여 고려인삼이라고 하는 조선산(朝鮮產)은 수출량이 3만근(萬斤)으로 비교적 작은 규모이나 1근당 가격은 미국산 약 7배보다 높은 가격인 150원(圓)내외라 한 사실을 알 수 있어 조선산(朝鮮產)은 소량의 수출에서 수요가 많아 어마어마하게 높은 가격으로 거래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때문에 부호대관들의 선물용으로 귀하게 취급되었다는 것이다.이것은 역시 세계제일의 인삼을 고려인삼임을 인정하고 나타내는 것이다.고려인삼(高麗人蔘)을 조선인삼이라고 하면서 일제는 1928년부터 브랜드(brand)화하여 고려인삼 상표를 붙여 판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930년대 삼정(三井)무역회사 고려인삼광고]장사꾼들은 이를 이용해 미국산, 일본산, 만주산을 고려인삼(高麗人蔘)이라 속여 팔기 때문에 1920년부터 홍삼전매령(紅蔘專賣令)을 발효하였고 경기도(京畿道) 개성군(開城郡)외 주요산지에 이를 적용하면서 개성(開城)에 홍삼제조소(紅蔘製造所)를 설치하여 주요산지에서 인삼 유출을 막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려인삼 즉 조선삼(朝鮮蔘)의 수삼으로 만든 홍삼은 본래 1895년(고종 32년)에 포삼(包蔘)법을 공포하였고 이미 전매법(專賣法)에 대한 바탕이 되었는데 대신 홍삼으로 쓸 수 없는 백삼(白蔘)은 개성삼업조합(開城蔘業組合)에서 조선과 일본내지까지 판매하게 하였다는 것도 자료로 통해 알 수 있다.아래는 고려인삼을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한 신중국 위키자료이다.高丽参自古就有“一根高丽参如一串宝石”和“百草之王”的说法。高丽参含有34种人参皂苷成分远高于花旗参(13种)和三七参(15种)。另外人参皂甙 Ra、Rf、Rg3、Rh2为高丽参独有成分。예로부터 한 뿌리의 고려인삼은 한 꿰미의 보석과 같다 하였고 동시에 온갖 풀의 왕(百草之王)이라 하였다.从土中挖出的新鲜高丽参含有很多的水被称为“水参”是高丽参加工的原料。加工好的高丽参分为红参、白参和太极参三种。흙속에 채취하는 신선한 고려인삼에 물이 포함되었다고 칭하길 이를 수삼(水蔘)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려인삼 즉 홍삼(紅蔘)의 원료라 한다.红参是将水参热蒸、烘干后呈现红褐色的人参。高丽红参是人参皂苷含量最高的高丽参。如果不加说明,高丽参一般指代高丽红参。홍삼은 수삼을 뜨겁게 열처리하는 것으로 불에 말리면 홍갈색으로 나타나고 고려홍삼은 인삼에 가장 높은 진세노사이드가 함유되었다고 알려지지만 설명이 불가하다 하였으며 성분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高丽参含有34种人参皂苷成分远高于花旗参(13种)和三七参(15种)。另外人参皂甙Ra、Rf、Rg3、Rh2为高丽参独有成分고려인삼에는 인삼이 함유하고 있는 사포닌(Saponin)성분을 34종(種)이나 가지고 있으며 화기삼(花旗参)은 13종(種), 삼칠삼(三七参)은 15종(種)이고 그밖에 Ra, Rf, Rg3, Rh2 사포닌(Saponin)화합물은 고려인삼만이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다고 하고 있으니 그 만큼 화기삼이나 중국인삼보다 약효가 월등하다는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按照大小和质量,高丽参可以分为“天参”、“地参”、“良参”、“切参”和“尾参”五个等级。“天参”外形好,呈人型,有两个明显的粗支根,内部组织细密,是高丽参最高的等级。“地参”是仅次于“天参”的等级,外观呈人型有1-3个支根。“良参”外观略像人型,支根不发达,横切面有中心白或镂空。“切参”是高丽参主根切成的片。“尾参”是高丽参的支根。按照大小“尾参”可分为“大尾”、“中尾”和“细尾”。약효가 이와 같아 품종을 세분하였는데 고려인삼의 등급에서 크기와 질에 따라 천삼(天参), 지삼(地参), 양삼(良参), 절삼(切参), 미삼(尾参) 5등급으로 나누는다.천삼(天蔘)은 전체적 외형이 인체를 닮아 뿌리가 2가닥 또는 3가닥으로 다리를 연상시키는 것이 특징이며 X Lay 투시에서 내용조직에 구멍이 없고 치밀(세밀)하고 이것을 고려삼의 최고 등급이다 했으며 지삼(地蔘)은 1-3개의 뿌리가 좀 가늘고 외형이 인체를 닮아 조직의 치밀성도 천삼보다 못한 것이고 양삼(良蔘)은 외형에 흠집(뿌리가 덜 발달되고 횡단면중심이 희거나 누공이 있는 것이 있고 지삼보다 약간 품질이 떨어지는 것이며, 절삼(切蔘)은 뿌리를 떼버리고 몸통을 2등분한 것이고 미삼(尾蔘)은 홍삼제조과정에서 떨어진 뿌리를 말하는데 이를 나누길 대미(大尾), 중미(中尾), 세미(细尾)라 하였다.이상 우리나라 자료가 아닌 거의 다른 나라 자료에서 그나마 고려인삼의 품질을 확인 할 수가 있다.개마고원(蓋馬高原)을 찾아그렇다면 과연 고려인삼이 생산된 역사적인 지역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한국생활사:김용만]자료에 따르면 537년에 양나라 숙자현이 쓴 남제서(南齊書)‘고려전(高麗傳)’에는 “고구려에서는 은산(銀山)에서 은(銀)을 채취하여 재화로 삼았고, 인삼과 담비가죽 또한 그러하다.”는 기록으로 고려인삼이 세상에 알려진 시기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렇듯 오래전부터 역사적으로 우수했던 고려인삼의 원산지 문제를 따져보면 우리가 이해 못할 이야기가 많다.여기서 한가지 더 부연할 것은 바로 담비가죽인데 고려가 대표하는 담비가죽의 원산지가 어디라 했던가.본 블로그 글 "담비(貂:Martes)로 본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위치http://blog.daum.net/han0114/17049856"에서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라고 알려진 현재 캐나다 영역 동에서부터 서쪽까지 지역이라 하였다.이를 가만히 돌아보면 서양인들이 최초로 만주라 했던 곳이 아닌가 한다.만주에 대해 따로 이야기 하겠지만 만주는 근대적 지명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과 청나라 생성과 맞물려 있다.즉 여진터전이 곧 만주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수조(隋朝) 한원(翰苑)의 고려기(高麗記)에는 마다산(馬多山)에 인삼이 많이 산출된다는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과 일반적으로 고려인삼의 자생지는 한반도를 비롯하여 만주, 연해주일대라 한 사실에서도 마다산을 현 개마고원(蓋馬高原)이라 하지만 이를 글쓴이 만큼은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한반도 지붕이라는 蓋馬(개마)고원을 또 다른 이름으로 마다산이라 한 것을 보면 말이 많은 산, 즉 말이 뒤 덮여 있는 고원이라고 해석될 수가 있는 것이다.조선 중기의 학자 허목(許穆:1595-1682)의 시문집 기언[記言] 제30권 잡편 / 변새(邊塞)편에 보면 東女眞。靺鞨遺種。高句麗部落。地方三百里。東極于海。西至蓋馬山。南接于長,定二州地。本句麗舊地。라 하였는데 "동여진(東女眞)은 말갈(靺鞨)의 후손으로 고구려(高句麗)에 속한 마을이었다. 땅이 사방 300리로,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고 서쪽으로는 개마산(蓋馬山)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고을을 접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이다."라 하여 동여진과 대해를 이야기하고 있다.그곳에 개마산이 있었고 또한 마다산이라 한 것이다.만약 개마가 정말 백두산의 또 다른 이름이라면 1945년 이후 한반도에 만들어진 지명임을 알 수 있고 옛 개마에 대한 위치는 분명 동쪽과 대해에 맞닿는다 하였으니 조선 서북쪽에 있어야 할 백두산이라 하는 것과는 맞지 않는 설명이다.한반도 백두산 지명을 붙이기 위해 개마고원을 끌어들였던 것이고 이 글에서 고려기(高麗記)에는 마다산(馬多山)에 인삼이 많이 산출된다는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말이 많은 산이라는 의미가 본 블로그가 증명한 것처럼 훨씬 더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백두산의 또 다른 개마라는 것은 엉터리다.개마고원이라 함은 바로 마다산이라 하였으니 말이 많은 산이다.캔터키주 동부 애팔래치아산맥(Appalachian Mountains of Eastern Kentucky)에 접해 있는 고원으로 여기서 마운틴 플레저 호스(The Mountain Pleasure Horse)란 말이 존재하는데 애팔래치아산맥의 원시 동물 유형으로서 밝혀지고 유전자테스트 결과 테네시보행말(Tennessee Walking Horse)과 로키산맥말(Rocky Mountain Horse)이 섞여 승마용인 아메리칸 새들브레드(American Saddlebred)로 나타난다 하였으며 이 혈통은 현재 180년 이상 추적이 가능하다라고 한다.이상에서 알단 보더라도 고려인삼의 근원지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분명 한반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새롭게 인지해야 할 것은 바로 개마고원의 실체이다.개만고원은 바로 마운틴 플레저이다.또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기존 중국사에 나타나는 기록에는 일반적으로 1500년전부터 고려인삼의 주요산지가 개성이라 하였으며 개성인삼(開城人蔘)을 고려인삼(高麗人蔘)이라 한 사실과 서긍(徐兢: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보면 고려 인삼의 줄기는 한줄기로 자라나며, 어느 지방에나 있는데, 춘주(春州)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한 것과 청주(清州)의 상당산성(上黨山城)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늘상 중국 사서로 보고듣고 있는 산서성(山西省)의 인삼이 좋아 상당삼(上黨蔘)이라 한 것과 역사성이 결코 다를 수가 없다는 것이며 이것들을 동일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상당삼(上黨蔘)은 비록 당조(唐朝)때 절멸했다고 하고 현재 이를 만삼(蔓蔘)이라 하면서 인삼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의혹이 짙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7세기 초 고구려(高句麗)는 현 조양시라 하는 요동성(遼東城) 유성(柳城)지역에는 한번에 2만 명의 돌궐 상인단(商人團)을 맞이할 수 있는 거대한 국제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고구려에 인삼원산지가 그로부터 가까웠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현재 한반도 동북부와 만주, 그리고 연해주일대라고 얼버무리는 꼴을 보게 된다.실제로 그곳에는 인삼이 많은 곳이 아니다.때문에 실제의 위치를 감추려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처음에는 동아시아대륙에서 고려인삼을 보았다 하면서 나중에 캐나다 동북부에서 그와 똑같은 인삼을 발견하고 그것을 오늘날 아메리카대륙 인삼이라 하고 마치 고려인삼이 북미에도 자생되는 것처럼 만든 과정이 이빨 맞추듯 하였다는데 짙은 의혹을 가중시키는 것이다.이런 명확한 내용을 보면 1714년 중국의 천문학자이며, 예수회 선교사 프랑스인 자르투(Pierre Jartoux:1680-1720)신부가 중국(中國) 동북부(東北部) 조선(朝鮮)국경이었던 달단지역(韃靼:韃僤)인 만주(滿洲)에 들어가 고려인삼의 자생지를 지도까지 작성하였고 그것을 런던왕립학회(Royal Society of London)에 전달하면서 보고하였다.그런데 난데 없이 캐나다 퀘벡주(Québec州)에서 선교활동 하던 프랑스 인종학자이며 선교사였던 라피토(Joseph François Lafiteau:1681-1746)신부가 이 보고를 접하고 원주민들을 통하여 수소문 끝에 몬트리올(Montreal)근교의 산지에서 고려인삼과 똑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인삼을 발견하였고 이를 린네(Carl von Linné:1707-1778)에게 전달하면서 결국 학명(學名) 파낙스 퀸퀘폴리움(Panax Quinquefolium L)이란 명칭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의 기록으로 말하고 있지만 마치 소설같은 이야기로 엮어 놓았다는 의혹이 짙은게 사실이다.동아시아 동북부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로 건너 뛸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이것을 오늘날 고려인삼 효능과 버금가는 북미인삼, 즉 아메리카대륙인삼이라는 그것이다.이것을 화기삼(花旗参:Panax quinquefolius)이라 한다.이러한 사실에서 우리의 고려인삼은 어떻게 변질되었을까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결국 무한정으로 채취된 인삼들은 소비지인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하고 인삼상인들이 캐나다로 몰려와 본격적인 인삼(人蔘)채취 경쟁이 벌어지면서 엄청난 량(量)의 산삼(山蔘)이 시장으로 유출되었고 채취량이 줄어들자 미국정부(美國政府)는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인삼재배(人蔘栽培)를 활성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때문에 1920년 2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보듯이 미국산(米國產)은 수출량이 가장 많은 16만근(萬斤)인 반면에 가격은 고려인삼의 7/1수준 밖에 되지 않는 20원(圓)내외였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일본산(日本産)이나 만주산(滿洲産)보다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다.당시 고려인삼이 가격이 높았다는 것은 수삼을 가공한 홍삼(紅蔘)이었기 때문이었을까?이러한 고려인삼의 높은 값어치 때문에 1920년 일제 총독부에 의해 전매령(專賣令)이 시행되면서 일본무역회사 삼정(三井)에게 독점권을 부여하였지만 수삼(水蔘)으로 만든 홍삼(紅蔘)의 약학적 효능(藥學的効能)이 당시에 잘 알려지지 않아 명성만큼 판로가 확대되지 못했음을 알리고 있으며 삼정(三井)의 독점권은 오히려 판로확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고 보면 당시 같은 시장에서 가격이 비록 낮지만 질이 떨어지는 것이 비록 재배인삼이라 할지라도 고려인삼과 진배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고려인삼이지만 고려인삼이 아닌 것 같이 만들어야 했을 서양자본주들은 삼한인삼과 종(種)이 다른 것으로 분류했고 고려인삼은 홍삼이라고 한계 덧 씌워 도태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결국 실제로 미국인삼이라고 알려진 화국삼은 물론이고 동양삼, 서양삼, 광동삼이 삼한인삼이 아닌 듯이 떨어져 나갔으며 모두 역사가 같은 삼한 인삼임에도 분리시켜 그들의 말초적인 물질욕만을 채웠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3.재배인삼 아메리카인삼의 역사 배경그렇다면 끝까지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메리카인삼이라 하고 북미인삼, 그리고 화기삼(花旗蔘)이라 한 변이된 실체를 생물학적 판단이 가능하도록 근원을 살펴본다.Hellenistic Greek πάναξ, variant of ancient Greek πάνακες.New Latin, from Latin, a plant, panacea, from Greek panak-, panax, from panakeiaThe English pronunciation derives from a southern Chinese reading, similar to Cantonese jên shên (Jyutping: jan4sam1) and the Hokkien客家 pronunciation "jîn-sim".[정리:한부울] 인삼속(屬:panax)의 어원은 헬레니즘 그리스어 파낙스(panax:πάναξ), 고대그리스어 파나케스(pánakesπάνακες)의미 '만병통치약' 또는 '모든 것을 치료한다'란 파나케이아(panacea)가 어원이라 하였고 진생(ginseng)은 차이니스어(Chinese語) 렌센'rénshēn' 인삼(人蔘)을 말하는 것으로써 렌(Rén)의미의 사람"man"과 센(shēn)의미의 초(草)뿌리"plant root",의 합성어로 '사람을 닮은 뿌리'라는 의미를 담아'사람의 다리가 갈라진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영어 진생(Ginseng)이라는 발음은 중국남부지방 광동어(廣東語)발음 젠센jên shên(Jyutping: jan4sam1)과 복건어(福建語:Hokkien)발음 진심"jîn-sim"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된다.과거 광동과 복건지방에 장사아치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들이 부지기수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들에 의해 그렇게 불리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고 이들 세력들이 동서양분리되면서 동양인 객가로 변신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가 있다.동양인 객가들의 조상을 따져보면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의 피가 연결되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생각할 점이 많다.이것은 결국 서양인들에 의해 중국화된 남부발음이라고 했지만 글쓴이가 지금까지 설명을 한 관동의 남부지역과 일치한다는 언어적, 지형적인 근거가 상당히 존재한다.花旗参(學名:Panax quinquefolius)是人参的一种。美国旧称为花旗國,花旗参由此得名,又称洋參、西洋参、野山泡参、广东人参,為粉光參的一種。原產於美國北部到加拿大南部一帶,以威斯康辛州為主。通常照產地分成(一般所稱的)花旗參與加拿大參;兩者雖然同種,但因為氣候影響,前者的參面橫紋比後者更明顯。 服用後有提神活血增智的效果,可用來作為日常保健用的食品。위 신중국 자료에 보듯이 화기삼은 인삼(panax)의 일종이라 하고 미국의 옛 국가이름을 화기국(花旗國)이라 칭한 것에 따른 것으로 이 화기삼(花旗參)이란 명칭이외 양삼(洋參), 서양삼(西洋参), 야산포삼(野山泡参), 광동인삼(廣東人参)등으로 나타나며 이에 더하여 분광삼(粉光參)이라고도 하였는데 분광삼이라 한 것은 대만에서의 속칭(臺灣俗稱)즉 민간에서 칭하였던 것으로 재배삼(栽培蔘)을 말하는 것이며 아마도 대만(臺灣)역시 역사지형이 관동 남부에 존재한 지명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대만은 플로리다주가 의심되는 지역이다.대만은 우리 역사의 제주와 매우 흡사하게 엮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야산포삼이라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야산에 생성하는 자연산 산삼을 일반적으로 포삼(泡參)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동아시아 동북지방이 아니라 캐나다 퀘벡주(Québec州)에서 채취한 사실과 일치하고 재배인삼을 분광(粉光)이라 하는 것과 미국정부가 재배를 권장했다는 사실과 닮아 있는데 이것은 대체적으로 철령관이라고 판단하는 애팔래치아 산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남부에서 상당수가 생삼과 함께 재배삼도 여러 이름으로 거래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때문에 화기삼은 산삼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재배삼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어 해석의 폭이 상당히 넓어 단정적으로 ‘이것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다.이러한 넓은 해석은 동, 서양을 동시에 나타내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고 고려인삼을 말 할 때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북미인삼에서 통산 산지(産地)를 나누는 것을 보면 화기삼(花旗參)과 캐나다삼(加拿大參)으로 나눔을 알 수 있다.캐나다삼과 동남부인삼이 헷갈리지만 같은 것으로 동종(同種)으로 취급되는 것인바 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 하면서 전자는 인삼(人蔘)제품 면에 횡문(橫紋)이 있어 특수성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후자는 약효에만 설명이 되고 있는 것으로 일시적으로 단적인 예가 몸이 나빠졌다가 좋아지는 현상인 명현(明顯)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면서 복용 후 기운을 차리게 하여 인체 내 혈액순환을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일상 보건용 식품으로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설명되는 것은 공교롭게도 고려인삼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加拿大目前是全球西洋參最大的生產國,平均年出口約2000噸,其中85%來自安大略省,15%來自卑詩省。安大略省之土壤、氣候、環境 都適宜培育西洋蔘,所以目前最廣為人知且推崇的是加拿大花旗參。而目前美國所出產的花旗參有多達95%來自威斯康辛州的馬拉松縣。粉光參的價格以威斯康辛的花旗參為最高價,加拿大多倫多西洋參次之,然後是溫哥華西洋參。캐나다는 지금 전 세계 서양삼(西洋參)의 최대생산국이며 년 평균 약 2000(噸:ton)중 85%가 온타리오주(安大略省:Ontario州)에서 생산되며 15%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주(卑詩省:British Columbia)인데 이곳은 토양, 기후, 환경에서 서양삼(西洋蔘)재배에 매우 적합한 것으로 이야기 된다.이곳을 한 때 서양인들에 의해 만주라고 통칭되었을 것이다.이 만주는 캐나다 영토의 동서전체를 가늠하는 것이다.대조선 남부에 거주하던 남만(南蠻)들이 근세기에 북아메리카대륙 북부로 이동하여 활동한 것으로 모든 것에서 알려지는 것과 같이 만(蠻)을 만(滿)으로 서양인들이 해석하고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을 또한 강하게 유추할 수 있다.만(滿)은 본래 의미가 따뜻한 기후, 온화한 기후의 땅으로 물자가 풍부한 곳임을 알 수 있다.현재 최대 넓은 지역의 사람들이 떠받드는 것은 캐나다의 화기삼(花旗參)이라고 확실히 하고 있다.이 캐나다 화기삼은 거의 조선 동북부 지방과 비슷한 인삼이 자생한다는 이야기다.현재 미국에서 생산되는 화기삼(花旗參)의 95%가 위스콘신주 마라톤카운티(Marathon County)에서 나온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이것의 위치가 고려의 청주(清州)이거나 산서성의 상당삼(上堂蔘)을 재배한 것으로 추측된다는 사실에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곳이다.그리고 이 재배삼이라고 하는 분광삼(粉光參)의 가격은 위스콘신(Wisconsin)주 화기삼(花旗參)이 최고가로 나타나고 그 다음은 캐나다의 토론토(Toronto)의 서양삼(西洋參)이며 그다음이 밴쿠버(Vancouver)의 서양삼(西洋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이것을 굳이 화기삼이라고 하면서도 서양삼이라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지만 화기삼은 그래도 종자의 근원이 고려인삼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확율이 높다.그렇다면 위치적으로 남과 북처럼 위치가 분리되는 지형적인 의미에서 만주와 다른 광동삼(關東參)이라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광동삼은 관동삼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고 애팔래치아산맥을 기반으로 하는 재배삼일 가능성이 높다.또한 본초도경(本草圖經)에서 인삼 중에 하북(河北)이나 민절(閩浙)에서 온 것을 신라삼(新羅蔘)이라하였는데 민(閩)’은 오늘날의 복건성(福建城)에 해당하고, ‘절(浙)’은 절강성(浙江省)이라 하였으니 이 지명들이 그곳에 있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서두에서 화기삼이라 함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소산(所産)이라 하였다.그렇다면 서두에서 언급한 서양삼이라고 하고 화기삼(花旗參)이라 하던 광동삼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관동(關東)이나 광동(廣東)이라 한 지역에 인삼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이러한 의심은 거의 고려인삼이라고 하는 조선삼(朝鮮蔘)이 중국사서에 한반도 동북지방에 다량 자생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면서 북미대륙 퀘백지방에서 이를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채취하게 만든 두 선교사의 이상한 역할에서 동일한 성질의 것임을 충분하게 예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삼 속 사포닌이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스테로이드(steroid)계 화학 합성물로서 신체 내에서와 뇌에서 호르몬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정도다.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는 아직 불명이지만, 신경세포 접합부분인 시냅스(synapse)속에서 아세틸콜린(Ach)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와 대사를 촉진한다는 보고 있으나 인삼의 알려진 효능이 너무 광범위하고, 정확히 어떤 효과가 존재하며 어떤 원리로 그 효과가 발생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은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할 정도로 미완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어 동서양 학자들이 공동으로 이를 연구가 진행 될 때 혹 역사적인 근원문제가 제기될 가능성도 글쓴이는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4.금강산인삼(金剛山人蔘)이란 무엇일까?우리는 고려인삼만 알고 있다?그런데 금강산인삼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한 재배삼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好評(호평)받는 金剛山人蔘(금강산인삼) 1935.09.13. 동아일보 4면 사회 기사(뉴스)【外金剛(외금강)】외금강온정리(外金剛溫井里) 유지(有志)의 발기(發起)로 6년전(六年前)에 금강산인삼재배조합(金剛山人蔘栽培組合)을 조직(組織)하고 삼종(蔘種)을 재배(栽培)하기 시작한바 금년(今年)부터 채취를 시작한다고 하는데 그 성적(成績)이 양호(良好)하여 약의 효능이 우월(優越)하므로 벌서부터 각지에 복약가(服藥家)는 추풍악(秋楓岳)을 탐승(探勝)할 겸사하여 통신(通信)이 환지(還至)한다는데 탐상일자(探蔘日字)는 금월(今月) 십오일(廿五日)이라하며 가격(價格)은 장래사업발전(將來事業發展)을 도(圖)키 위(爲)하여 특별염가(特別廉價)로 제공(提供)한다고 한다[정리:한부울]위 그림과 기사는 1935년 9월 13일자의 동아일보의 컬럼으로 분명 금강산인삼(金剛山人蔘)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이 기사를 보면 금강산인삼은 재배삼임을 알려준다.금강산을 영산(靈山)이라 하고 봄에는 금강(春金剛), 여름에는 봉래(夏蓬萊), 가을에는 풍악(楓岳), 겨울에는 개골(皆骨)이라 하였는데 외금강(外金剛) 온정리(溫井里)의 유지(有志)들의 발기(發起)로 1929년에 금강산인삼재배조합(金剛山人蔘栽培組合)을 조직하고 금강산인삼을 재배하였으며 1935년 비로소 채집을 시작했다고 하면서 가을 금강산 방문기에 맞춰 각지의 부호대관(富豪大官) 복약가(服藥家)들이 금강산의 경치(景致)를 구경할 시 겸사하여 금강산인삼도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기사이다.우리는 금강산인삼(金剛山人蔘)이라는 존재자체가 희미하다.그것은 역사가 한반도(韓半島)에서는 1945년 좀 더 늦게 본다면 1948년 분단이 현실화 되면서부터 아마도 남한쪽의 사람들은 금강산을 잊어버렸고 그곳에서 재배되었던 인삼을 까맣게 잊을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한 어려운 환경 때문에 불행하게도 금강산인삼에서 강(剛)이 빠져버리고 금산인삼(金山人蔘)이라 하여 70년대 다시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것을 금강산인삼이라 했다는 사실에 대해 명확할 수가 없다.그럼에도 어쨌든 명칭에서 본래 금(金)이 아닌 비단 금(錦)을 사용하는 지금의 충남 금산(忠南錦山)을 위주로 한반도 남쪽에서 유일한 인삼재배지로 알려졌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무엇때문에 금산인삼(錦山人蔘)이라하고 금강산인삼이라는 온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그 의문과 함께 민족상잔에 의한 분단의 아픈 역사를 떠 올리게 하는 것이지만 개성과 금강산이 북한에 존재하는 현실문제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현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한반도인들은 스스로 부정하고자 하겠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대조선이 붕괴될 시점이었던 1871년 신미양요부터 시작하고 최종 끝이 1953년 동족상잔을 마지막으로 겪게 한 큰 틀에서 이렇게 주도한 세력이 누구일까 궁금해 했던 것이 사실이다.지금까지의 결론은 서양인, 특히 미국인들의 의해 주도된 역사라는 것을 최소한 글쓴이 만큼은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그들은 왜 이토록 철저하게 우리 역사를 유린하고 농단할 수밖에 없었을까?다시는 날개를 펼 수 없도록 날개 쭉지를 꺽어놓고 그것도 부족하여 역사 뿌리마저 이처럼 철저하게 망가뜨린 이유가 분명하게 있을 것이 아닌가.같은 동양인에서 일본과 우리 한국을 미국인 시각으로 비교해볼 때 일본은 미국인들과 태평양전쟁을 직접적으로 치열하게 치뤈 종족임에도 오늘날 미국은 일본인들을 상대적으로 우대한다.우리나라 역사가 왜 이토록 가혹한 처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1871년 이전 과거 역사환경에 대해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현재 일본은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개체이다.일본은 없었던 역사도 만들어 버젓이 자국국민에게 홍보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는 본질조차 감추고 어두운 역사만을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이런 현실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그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져 볼 이야기다.아래 한국일보 기사는 그렇더라도 현 충남 금산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결국 금강산 뿌리 인삼임을 애잔하게 알리고 있다.한국일보 2006.09.14.[금강산의 뿌리 인삼]의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9월이면 어두운 그늘에서 몇 년을 꼼짝 않고 땅의 기운을 뽑아 여물은, '신비의 약초' 인삼을 캐는 계절이라 하고 금산은 국내 3대 약령시 중 하나로 전국 인삼 거래량의 80%가 유통되는 인삼의 메카라면서 경제의 80%는 인삼, 약초와 연계된다고 하는 금산...예전 인삼 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소쿠리에 '개똥이네'등 이름표를 매달아 그날 인삼을 캐는 밭주인의 마당에 져놓는다. 오후 늦게 인삼을 캐온 주인은 인삼을 100개면 100개, 200개면 200개 씩 소쿠리에 담아놓는다. 마을 사람들은 삼이 든 소쿠리를 가져가 밤새 식구들과 껍질을 벗기고 잔뿌리를 다듬는다. 밭주인이 내준 푸짐한 밤참을 곁들여 가며 정다운 이야기꽃을 피운다. 다음날 새벽, 마당에 멍석을 펼쳐놓고 이웃들이 손질해 가져온 인삼을 부려 숫자를 확인하고는 개당 2, 3원씩 품값을 쥐어준다. 인삼을 캔 밭은 동네사람들 차지다.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호미 들고 밭으로 가서 속에 남은 '인삼이삭'을 줍는다. 인삼밭을 지고 있지 않더라도 인삼 철이 되면 집집마다 삼껍질과 잔뿌리가 수북하게 쌓이는 것이다. 당시 인삼 수확기에는 전국의 엿장수들이 금산으로 몰려들었다고 하며 삼껍데기와 엿 바꾸러 오는 금산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또 다른 기사를 보면 인삼거래가 활발했던 금산시장(錦山市場)은 1935년부터 성황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당시 금삼증(錦蔘證)이란 인삼판매허가증이 위조가 많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알려진다.해방 후 금산군(錦山郡)에 인삼재배면적이 가장 많던 때가 1973~1975년까지라고 알려지는 만큼 위 금산의 풍경은 아마도 그 때쯤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70년대의 세상이 그렇듯 각박하지 않았을 때이니 참으로 정겨울 정도로 순박한 광경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유명했던 재배삼, 금강산인삼의 이름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금강산인삼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솔직히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과거 금강산인삼에 대해 현재 연구하는 단체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로 왜 금강산인삼(金剛山人蔘)이 일반인들에게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를 우리는 지금시점에서 명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다.5.아메리카인삼과 금강산인삼의 가변성그렇다면 미국과 연계되는 역사만큼이나 끈끈한 아메리카인삼이 가지는 많은 명칭에서 역사 가변성을 이야기 할 수가 있다.즉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시장 수요적으로도 일정한 조건에서 변할 수 있는 성질은 그 많은 명칭에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왜 아메리카인삼은 그렇게 많은 명칭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까?아마도 조선인삼을 흉내 내었을 것이다.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어떤 주체적인 인삼을 대신하려고 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본 블로그 글 “동청(冬靑)과 금강산(Blue Mountain)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2”에서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이 제공한 분포지도를 살펴본 결과 강원도(江原道)가 동쪽이며 동청(冬靑)이란 감탕나무, 붉은 열매나무를 뜻하는 것으로써 이것들이 위 분포지도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라는 사실과 함께 동부에 존재하는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강원도 금강산이라 함은 바로 이 애팔래치아산맥을 말한 것임을 충격적으로 밝혔다.또한 본 블로그 글 "금강초롱꽃과 북미초롱꽃 http://blog.daum.net/han0114/17049707 "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위의 사실과 결코 다를 수가 없다.실제로 금강(金剛)이란 명칭은 다이아몬드처럼 산이 날카롭게 삐쭉삐쭉한 형태를 나타내어 마치 찬석(鑽石)이라고도 하는 금강석(金剛石:Diamond)을 말 하는 것처럼 지명에서 강한 이미지가 존재하고 또한 애팔래치아산맥 중 실제로 다이아몬드(Diamond)가 다음 자료가 알려주듯 생산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 이와같은 글쓴이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뒤받침 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금강석(金剛石)이 들어있는 암석을 킴벌라이트(kimberlite), 램프로아이트(lamproite)라고 부르며 다이아몬드를 함유하는 운모원석(雲母,Mica) 감람암(橄欖巖)을 킴벌라이트(kimberlite)라 하고 칼륨함량(potassium content)이 높은 화산암(volcanic rocks)을 램프로아이트(lamproite)라 하는데 100만년(萬年)전 대륙성 빙하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지형이 바로 버지니아(Virginia),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 캐롤라이나 남북지역(North and South Carolina), 켄터키 동부(eastern Kentucky), 테네시주(Tennessee), 조지아주(Georgia), 앨라바마(Alabama)가 포함되고 있으며 바로 이 지역 전부가 애팔래치아산맥을 지형적으로 접하거나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이 이 행정구역의 모습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애팔래치아산맥을 기준으로 관(關)이 형성될 곳을 보면 웨스트버지니아 동부일대와 버지니아의 경계가 그렇고 캔터기 동부 경계에 관(關)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테네시 동부와 노스캐롤라니아 서부의 주 경계가 그런 관(關)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들의 주 경계가 애팔래치아산맥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실제로 다이아몬드의 발견 기록을 보면 노스캐롤라이나주(North Carolina)에서 1800년 중반에 13개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고 알려지고 1924년에는 상당히 서부 쪽으로 떨어져 있는 아칸소주(Arkansas) 머프리스보로(Murrayreesboro)에 소재한 프레리 크리크 파이프 광산(Prairie Pipe Mine)에서 40.23캐럿의 엉클 샘 다이아몬드(Uncle Sam Diamond)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4년 후인 1928년 4월에 애팔래치아산맥에 갇혀 있는 듯한 웨스트버지니아주(West Virginia)의 피터스타운(Peterstown)에서 발견된 34.43캐럿의 펀치 존스 다이아몬드(Punch Jones Diamond)가 애팔래치아 산맥 충적층(alluvium:沖積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애팔래치아산맥은 본래 부루(blue)색이 강조되는 금강산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때문에 이 애팔래치아산맥을 중심으로 자생되는 인삼을 채취하거나 그 종자를 빌어 인삼재배에 들어갔다면 그 인삼을 금강산인삼(金剛山人蔘)이라 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동아일보[1929.08.26]의 “과학인삼(科學人蔘)은 어떠한 것인가”제목의 칼럼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내용이 있다.한나라 말기에 완간된 본초학서 명의별록(名醫別錄)에는 지금으로부터 1800년전 중국의 산서성(山西省) 낙안(洛安)과 남만지방(南滿地方)에서 산출한다 하였고 위진(魏晋)시대 오보(吴普)의 오씨본초(吴氏本草)에는1500년전 직예성(直隸省), 광평지방(廣平地方)과 조선중부(朝鮮中部)에서 북부(北部)에서 산출된다 하였으며 5대(五代) 후촉(後蜀)사람 한림학자 한보승(韓保昇)이 편찬한 촉본초(蜀本草)에는 대행산맥(大行山脈), 산서성(山西省), 직예성(直隸省), 사주성(泗州省), 산동성(山東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였고 도경본초(圖經本草)에는 산동직예(山東直隸), 산서(山西), 복건지방(福建地方)에서 산출된다 하였는데 일본고기(日本古記)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繪:1712)에 보면 대행산맥(大行山脉)에서 산출하는 인삼(人蔘)에 대해 “功不如朝鮮自然生者” 라고 하여 “조선(朝鮮)에서 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한 사실도 있다.즉 대행산맥에서 나는 인삼 상당삼이 좋지만 조선(朝鮮)에서 나는 인삼(人蔘)보다 못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의 고려인삼 즉 조선삼(朝鮮蔘)을 신봉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고려인삼과 조선인삼을 통칭한 것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닌가 한다.위 예를 든 사서들이 한시대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중복될 수 있다고 볼 때 조선(朝鮮)의 중부와 북부지방은 산서성 낙안과 직예, 광평 지방이 포함될 수 있고 또한 대행산맥 뿐만아니라 산동(山東)까지도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산동(山東)이란 태산(泰山:1,533m)을 경계로 구분된 지명이라는 사실과 애팔래치아산맥 중 가장 높은 미첼산(Mount Mitchell:2037m)을 기준으로 할 때 산동(山東)이란 지명도 마찬가지로 관동과 구분이 되겠지만 역사 위치적으로 보면 동일한 범위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이러한 지명방식의 혼란은 여러 역사를 나눔에 있어 발생한 어쩔 수 없는 것일게다. 또한 동아일보[1934.05.11]일자 컬럼을 보면 인삼산지(人蔘産地)에 의한 명칭에서 고구려산(高句麗產)을 고려삼(高麗蔘)이라했고 현재 고관대작들이 모여 있던 중앙조정이었던 인삼 소비지 옛 중국이라 한 곳에서 조선인삼(朝鮮人蔘)을 아직도 고려인삼(高麗人蔘)이라고 호칭 한다 한 것은 고려영역과 조선영역을 같이 취급하거나 관할지가 동일하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요삼(遼蔘)은 요동인삼(遼東人蔘)을 말했다 하였으니 이것 역시 조선인삼이며 이것을 만주산(滿洲產) 인삼(人蔘)이라 하면서도 신라삼(新羅蔘)이라 하거나 백제삼(百濟蔘)이라 하였다는 사실이 실로 어지러울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가 계속된다.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양인들에게 붙여진 만(蠻)에 대한 혼란이다.백제와 신라 두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중국에서는 명대(明代)까지 이 명칭이 남아 있었다고 알려지는 것은 결코 중국이라는 곳이 그처럼 넓지 않다는 것으로써 오히려 백제나 신라의 영역 더 넓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아니면 중국이 신라나 백제 속에 들어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때문에 도시정도의 역사지명이 변한 것이며 그것을 현재 중국이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천자가 있었을 대도시이니 소비층이 대단했을 것이며 그곳의 소위 고관대작 유지들이 많았다는 것은 분명하다.요동은 고구려 땅이며 고려 땅이고 조선(朝鮮)이 지배하던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근대까지 남조선(南朝鮮)에서 산출되던 인삼을 라삼(羅蔘)이라 하였다는 사실도 바로 신라삼(新羅蔘)을 말 한 것으로써 새로 신(新)자가 붙은 신라는 한반도 용 신라일 뿐이다.포르투갈 귀족들은 COREA 라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사실도 새길 필요가 있어 돈 주고 관직을 매관하였을 시라면 그들은 아마도 역사적으로 자랑스러운 것을 택했을 것이다.이것이 오늘날 광동삼이란 명칭의 근원일 수도 있다.상당삼(上黨蔘), 로삼(潞蔘), 자단삼(紫團蔘) 전부 산서성(山西省) 태행산맥(太行山脈)일대에서 산출되는 것인데 특히 자단삼(紫團蔘)은 신라삼으로 나타나며 이것들이 오대(五代)때 탐하고 마구잡이 거두어들이는 짓과 산림개간(山林開墾)으로 감소되고 명조(明朝)에는 절멸하였으나 너무 유명한 결과 아직도 이름이 남아 있다 한 것은 지구 어디에서든지 간에 삼한역사는 지속적으로 존속되었다는 증거로서 똑 같은 다양한 인삼 종(種)이 산출되었다고 볼 수 있고 일본인삼이라고 하는 회진어종인삼(會津御種人蔘), 출운인삼(出雲人蔘)역시 조선인삼(朝鮮人蔘)이라고 일본 스스로가 정리하고 있는 상황들을 종합할 때 결국 산지를 따지면 인삼 모두가 거대한 삼한영역의 인삼이며 이것들은 지금까지 세계 어느 곳이든지 간에 삼한의 영역에서 산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물론 이렇게 저렇게 역사가 바뀌어 나타나고 있지만 하나의 체제에서 관리된 것은 분명하다.6. 각종 인삼의 근원지와 학명의 모순이제부터 총체적으로 인삼의 생물학적 판단을 위해 분류체계에 들어간다.[1]Panax L., 1753 Ginsengs(Chinese ginseng; Korean ginseng; Ginseng)[2]Panax ginseng C.A.Mey.1843, 亞洲蔘、紅蔘、生晒蔘、山曬山蔘、石柱蔘、朝鮮蔘、野山蔘、人銜、鬼蓋、土精、神草, 在中国东北土名 봉추(棒槌) 아시아인삼이라고 하지만 분포지는 북아메리카대륙 동서부 다 나타난다는 것이 혼합종의 모습이다.(Asian ginseng, Chinese ginseng, Korean ginseng, Asiatic ginseng, Oriental ginseng)[3]Panax japonicus (T.Nees) C.A.Mey. Panax bipinnatifidus 죽절삼(일본)[4]Panax notoginseng (Burkill) F.H.Chen /San Qi 전칠삼(田七蔘) 삼칠삼(三七蔘)중국 남부지방(운남성)에서 생산되는 인삼의 한 종.[5]Panax pseudoginseng Wall. 假人参Nepal ginseng, 히말라야삼, 네팔삼[6]Panax quinquefolius L. (American ginseng)花旗参(學名:Panax quinquefolius)是人参的一种。美国旧称为花旗國,花旗参由此得名,又称洋參、西洋参、野山泡参 、广东人参,為粉光參的一種。[7]Panax trifolius L.삼엽삼(三葉蔘): 북미 동부지역 인삼중, 국운남동 미국왜삼(美國倭蔘:Dwarf ginseng)북아메리카 북동부 및 애팔래치아 산맥의 저지대 중습지(中濕地, mesic woods)에서 발견된다.늦은 봄에 흰색의 꽃이 산형화서로 핀다.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약용하였다위 분포지도를 보면 아시아종 이외 모두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표식하고 있다.인삼의 본래 근원지라는 이야기다.위 총 8가지의 학명분류를 보면 린네가 명명한 인삼의 대표 인삼속(人蔘屬) 학명[1]Panax L., 1753,과 그 다음 아메리카인삼(花旗参)인 학명 [6]Panax quinquefolius L., 그리고 미국왜삼(美國倭蔘:Dwarf ginseng)이라고 하는 학명[7]Panax trifolius L.등 3종(種)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생물의 아버지란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유럽생물학자 린네가 명명한 사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학명 명명시기가 가장 빠르다는 사실도 동시에 감안한 것이다.이를 판단할 때 린네(Carolus Linnæus:1707–1778)가 명명한 3가지 종(種)은 자연산으로 산삼(山蔘)일 확률이 높고 그 외 다수는 근세기에 산삼의 종자(種子)를 이용하여 번식시킨 재배삼(栽培蔘)일 가능성이 높다.반면 아시아삼(亞洲蔘) 또는 홍삼(紅蔘), 생쇄삼(生晒蔘), 산쇄산삼(山曬山蔘), 석주삼(石柱蔘), 조선삼(朝鮮蔘), 야산삼(野山蔘), 귀개(鬼蓋), 토정(土精), 더군다나 신초(神草)라고 하고 중국동북원산지명에서 봉추(棒槌)라 하여 마치 고려인삼의 근원종인 것처럼 만들었지만 글쓴이가 보기에는 아시아 역사가 생성되고 난 후 본래 역사에 등장하던 인삼명을 마음대로 붙인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이 종을 명명한 시기가 1843년이며 이때 러시아 귀화한 독일인 칼 안톤 폰 메이어(Carl Anton von Meyer:1795-1855)가 명명한 학명[2]Panax ginseng C.A.Mey.과 동일한 인물로 몇 가지의 의문점이 들어난다.사실상 일본인삼은 누가 뭐라해도 스스로가 조선인삼을 모방하거나 그 종자를 빌어 재배하였다는 사실 말고 근원이라고 할 만한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그리고 그가 실제로 조선 동북부지방에 방문하거나 탐험한 사실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그의 소재를 파악해보면 1821년에 발트해(Baltic Sea)를 방문하고 1826년 몽고의 알타이산맥(Altai Mountains)과 카자흐스텝을 탐험 한 사실과 1829년 코카서스산맥(Caucasus Mountains)와 카스피해(Caspian Sea)서안(西岸)을 탐험하였다는 사실 말고는 북아메리카대륙을 방문했다든지 또는 그렇게 흔하게 서양인들 기록에 나타나는 한반도이야기는 발견할 수가 없다.과연 그가 한반도동북부지방까지 와서 탐험한 사실이 있는가에 대해 확실한 것이 없다.1844년에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과학 아카데미의 식물박물관의 임원으로 일을 하기 전인 1843년에 이 학명을 명명했다고 하는 것은 거의 그의 탐험이 마감되고 난 후 정리하였을 과정이라 할 때 더 이상 반문의 여지가 없다.그가 19세기 중엽(中葉) 고려인삼 즉 조선인삼에 대한 학명(學名)을 명명했다는 것은 분명 조선(朝鮮)북동부지역에 방문하고 초본을 채취하였다는 이야긴데 그의 탐험지가 전부 중앙아시아로 귀착되어 현 한반도 동북부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중대한 변곡점 즉 기존 역사사실과 다른 반전의 카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글쓴이는 냉정하게 이러한 모순점을 찾아 반문하고 있다.바꾸어 이야기 하면 그가 북유럽 발트해와 코카서스산맥, 카스피해, 그리고 카자흐스탄, 알타이를 탐험했다고 하는 것은 이동경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지만 한반도 북동부와는 거리가 있어 어떻게 조선인삼의 초본을 채취했을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그렇지 않다면 가는 곳마다 조선인삼이 깔여 있었다는 이야기다.이것이 근세기에 엉망진창으로 나타나는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좀 더 들어가 보면 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 "에서 북유럽의 발트해(Baltic Sea)가 있을 곳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허드슨베이(Hudson Bay)라 한 사실에서 똑 같이 1826년에 키르기스 초원(Kirghiz Steppe)과 알타이산맥(Altai Mountains)을 과학 탐험하였다는 알렉산드르 번지(Alexander Georg von Bunge:1803-1890) 역시 발트 게르만계 식물학자(Baltic German botanist)이며 바로 조선금대화의 대칭적 종(種)인 금대화(錦帶花)라고 하는 학명 “Weigela florida (Bunge) A. Dc 1839”를 명명했던 사람인데 두 사람 모두 유럽 발트해를 방문했다고 하지만 결국 그곳은 북아메리카대륙 허드슨베이(Hudson Bay)이었음이 밝혀졌고 또한 좀 더 이른 시기겠지만 칼 안톤 폰 메이어(Carl Anton von Meyer)도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방을 탐험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그들은 애초부터 북아메리카대륙에서만 활동했지 아시아대륙으론 오지 않았다.그는 한반도 동북부에 방문하고 탐험한 것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를 탐험하고 초본을 채취한 것이다.7.아메리카인삼과 고려인삼의 대체성 전자의 분류학적 판단에서 학명자들의 활동지역이 불분명하거나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그것은 무조건 아시아대륙으로 몰아 근원적인 인삼토산지를 감추려는 행위임을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이것은 인삼이 자생되었던 지역이 결코 이렇게 저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장소가 북아메리카대륙이고 위치가 역사사실과 일치하지만 동서양 역사가 분리되면서 이렇듯 혼란을 가중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실제로 서양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알면서도 오리엔탈리즘을 훼손시키려 의도를 엿볼 수 있다.결국 동, 서양을 근본적으로 갈라놓고 이분적인 역사도식을 만들어 서양인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도 동시에 알 수가 있는 상황이다.이미 서양인들이 이런 식의 엉터리 작업을 한지가 100년이 넘었다면 아직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진실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만 그렇더라도 본래의 하늘의 자연이치가 존재하는 생물학적인 역사가 살아 있고 그것이 변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할 것이다.무엇보다도 자연의 이치는 변할 수 없는 철칙이다.특히 이 인삼의 문제에서 만큼은 워낙 특수성이 있는 것이니 서양인들 마음대로 그렇듯 무를 자르듯이 단절을 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 분명하게 있고 동시에 역사를 찾아 헤매는 글쓴이에게나 우리모두에게 큰 다행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위 DNA 바탕으로 한 디스커버리 라이프의 분포지도를 참고하면 인삼속(人蔘屬:Panax L., 1753)에서 근원지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워싱턴 주에 나타나거나 캘리포니아 주에 조금 나타나는 현상을 볼 수가 있다.그 다음으로 고려인삼이라고 할 수 있는 학명 인삼(Panax ginseng C.A.Mey.1843)의 분포지는 한반도와 미얀마에 조금 나타나고 나머지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의 뉴욕주(New York)의 뉴욕(New York City),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메이컨(Macon), 중부의 미주리주(Missouri)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 City) 서부의 캘리포니아(California) 앨러미다(Alameda), 워싱턴(Washington)의 킹(King)으로 나타나고 중국인삼(Panax notoginseng (Burkill) F.H.Chen /San Qi)은 신중국과 한반도 열도에는 정작 분포지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반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뉴욕주(New York)의 뉴욕(New York City)에는 나타나는 모순이 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종이 남았는데 아메리카인삼(Panax quinquefolius L.)이라 하고 화기삼(花旗参), 광동인삼(廣東人蔘)라 하는 것으로 분포지도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집중되고 있고 애팔래치아산맥과 메인주, 뉴헴프셔, 버몬트,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와 서부로는 위스콘신과 미네소타, 미시간와 인디애나에 넓게 퍼져 나타난다.마지막 종(種)으로 미국왜삼(Panax trifolius L)이며 삼엽삼(三葉蔘)으로 불리는데 분포지도에서 보면 북미 동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북아메리카 동북부 및 애팔래치아 산맥의 저지대 중습지(中濕地)에서 발견되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위스콘신, 미시간, 오하이오, 웨스트버지니아동부, 펜실베이니아, 뉴욕, 델라웨어,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 남부로서 이것도 비교적 넓게 퍼져 있다.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집중적으로 원산지가 나타나는 아메리카인삼은 왜 수많은 명칭을 가졌을까?전자에서도 언급했지만 답은 역사가 장소가 같으므로 해서 중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930년대를 기준으로 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인삼이 알려지고 그것이 애용되기 시작한 후로부터 1500년에서 1800년이라 하였는데 이 인삼이 자생하던 곳이 세계 유일 무일하게 삼한 땅이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변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고 철칙이다.진시황이 탐낼 정도로 신비스럽고 영험이 있는 불로초가 삼신산(三神山)에 있어 서복(徐福)이 동남동녀(童男童女)오백명을 데리고 간곳이 영주(瀛洲)라는데 그곳을 동방(東方)이라 하였으니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불로초라 하는 것은 바로 인삼(人蔘)일 확률이 높다.이것이 오늘날 동서양인(東西洋人)을 가릴 것도 없이 무수히 많은 부호대관(富豪大官)과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오매불망 애타게 찾던 영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을 고려인삼이라는데 세계인들이 주목하였을 것이 틀림없다.근세기에 서양인 자본주들에 의해 브랜드화 되었다는 사실과 현재 표면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전매권행사를 감행하였다는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때까지 어쨌든지 유명세가 1800년 동안 끊이질 않고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장수(長壽)는 인간에게 하늘이 내리는 복(福)이라 했으니 돈만 가지고 있던 나약한 인간들은 너도나도 이에 집착을 하지 않았을 수 없었다는 것이며 덩달아 고려인삼의 유명세는 하늘로 치솟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지금도 그러하지만 의학이 그렇듯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니 오죽했겠는가.그것이 탁월한 효능의 인삼이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삼한 땅에서 자생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류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지나간 역사를 명쾌하게 다 알 수 없다 하겠지만 기존역사에서 인삼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우리는 고려인삼이라고 하니 그저 그러하였겠지 할 정도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역사성으로 따지면 실로 엄청난 것이다.이러한 현실에서 근세기에 고려인삼의 가치를 알게 된 서양인 장사아치들은 어떤 식으로 이에 달려들었을지 상상이 간다.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 그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마지막 계급 신분일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혁명도 신분제도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에 의한 것이라 하지만 당시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 상인(商人)이라 할지라도 신분은 제3신분에 해당하던 세월과는 그들이 대처하는 자세가 달랐을 것이다.근세기에 고려나 조선이 옛날과 같지 않아 얼마든지 부패로 썩어 빠진 관리들을 그들이 마음대로 돈으로 주무를 수 있고 궁극적으로 고려인삼을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이것을 반강제적으로 빼앗아 이윤을 착복했을 것이 뻔한 것이다.언제까지라도 그러한 이익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였겠는가.아메리카인삼, 즉 미국인삼(American ginseng)과 고려인삼이라고 하는 조선인삼의 생태적, 형태적으로도 동일한 영역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이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본 블로그 글 "신라인삼(新羅人蔘)은 아메리칸 인삼(American ginseng)http://blog.daum.net/han0114/17050124"에서 이미 이에 대한 사실을 명확하게 밝혔던 이야기이지만 다음과 같이 형태적인 사실에서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즉 미국인삼이 오엽삼(五葉蔘:literally ‘five-leaved ginseng)으로 나타나고 오엽삼이라 함은 바로 신라인삼(新羅人蔘)을 말하며 이를 광동삼(廣東蔘)이라 했던 것이며 또 다르게는 조선오엽삼(朝鮮五葉蔘)이라 했던 것은 남조선(南朝鮮) 즉 조선남부에서 자생하는 것을 라삼(羅蔘)이라 했다는 사실과 거의 호칭의 과정이 일치한다. [오엽삼]어쨌든지 본래 인삼(人蔘)이라 하는 것은 생태적으로나, 형태적으로 도저히 삼한역사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성이 있다.그러한 사실들을 한반도 사서가 아니라 중국 사서에서 알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운 것이다.고려인삼(高麗人蔘)을 조선인삼(朝鮮人蔘)이라 하는 것도 사실상 따지고 볼 때 수많은 종(種)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것이 현 상황처럼 수많은 종(種)으로 변한 것이라 할 때 원종을 밝혀 안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희고 단단하며 둥글어서 백조삼(白條蔘)이라고 하고 속칭 양각삼(羊角蔘)이나 요동삼(遼東蔘)이라 하는 백제삼(百濟蔘)이 현재 감쪽같이 없어지고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실제로 신라삼(新羅蔘)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지도 않다는 사실까지 궁금한 것은 한도 끝도 없다.상당삼과 버금간다고 한 발해삼(渤海蔘)도 이름조차 온데간데없는 상태다.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밝혀볼 것인가.생각해보면 조선인삼(朝鮮人蔘)을 홍삼(紅蔘)이라고 하는 것도 맞지 않는 지칭이다.마땅히 고려인삼(高麗人蔘)을 홍삼(紅蔘)이라 하는 대칭적인 명칭도 재고되어야 하는 것이다.왜냐하면 가치의 폭을 스스로 좁히고 있기 때문이다.어디까지나 홍삼(紅蔘)은 본래 인삼효능을 변하지 않게 하거나 오히려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술적인 문제로서 엄밀하게 따진다면 보존 방법에 의한 명칭일 뿐 자연에 의한 것은 아니다.이것으로 서양인과 자본주의제국 권력자들은 충분히 편법으로 이용하였을 수도 있다.고려인삼은 서양삼에게 이관시키고 본질을 훼손하고 변질되게 한 것은 고려인삼이란 브랜드를 약화시키는 것이며 그 공백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넘어가도록 만든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그렇더라도 본질의 인삼은 그들이 차지하였기 때문이다.때문에 현재 우리에게 홍삼만 남고 우리의 진짜 고려인삼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도록 변했다는 것은 역사농단에 의한 또하나의 비극이다.그들은 고려인삼의 생물학적 위치를 빼앗기 위해서 중간에 홍삼(紅蔘)을 부각시켜 의도적으로 상품화하였지만 당시는 과학발달이 지금처럼 진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효능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효능 자료가 희소한 관계로 음복자인 부호대관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해 인기가 없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이 때문에 고려인삼이란 고유의 우수한 브랜드가 엄청나게 훼손되었던 것은 분명하다.동시에 미국인삼의 효력은 고려인삼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부각되면서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도 역설적으로 생각 할 때 고려인삼이라고 하던 홍삼이 별 인기를 끌지 못하면서 생약(生藥)에서 미국인삼에게 밀려 났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아래는 미국인삼을 현재 과학적 기법으로 분석한 내용인데 오히려 고려인삼(高麗人蔘)보다 더 우수하다는 내용이 가득하다.미국인삼에는 담마란계 배당체[dammarane-type ginsenosides]혹은 사포닌(saponins)을 주요 생물 활성 성분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20(S)-프로토파낙사다이올(PPD) 및 20(S)-프로토파낙사트리올(PPT)의 두 가지 분류를 포함하는 것으로 미국인삼은 연구에서 고려인삼보다 높은 Rb1, Rd(PPD 분류), Re(PPT 분류)배당체 진세노사이드(Ginsenoside)를 함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고려인삼으로 보았을 때 매우 혼란스러운 이야기다.일반적인 약물역학(pharmacodynamics)으론 PPD형 진세노사이드는 대부분 구강 내 세균(혐기세균)에 의해 PPD모노글루코시드인 20-O-β-D-glucopyranosyl-20(S)-protopanaxadiol(M1)로 대사된다고 알려지고 인간은 PPD형 인삼사포닌 섭취 후 7시간 프로토파낙사다이올(M1)이 혈장에서 검출되며 섭취 후 12시간부터 소변에서 검출되고 이러한 결과는 프로토파낙사다이올(M1)이 프로토파낙사다이올(PPD)유형의 진세노사이드(Ginsenoside)의 최종대사 산물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면서 성분 작용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더하여 캐나다(Canada) 앨버타주(Alberta州) 에드먼튼(Edmonton)에 본사를 두고 있는 아페사 라이프 사이언스(Afexa Life Sciences Inc)에서는 감기에 특효가 있다는 콜드 에프엑스(Cold FX)가 북아메리카 인삼(North American ginseng:Panax quinquefolius)뿌리에서 파생 된 산물이라고 단정하였지만 확정적으로 테스트되거나 검증이 된 적이 없다고 하는 정도에서 평가한 만큼 그들 영역에서 자생하는 인삼이 얼마나 우수한 것인지를 알리려고 애를 쓰는 단면이다.신중국 위치자료에서 고려인삼에는 인삼이 함유하고 있는 사포닌(Saponin)성분을 34종(種)이나 가지고 있으며 화기삼(花旗参)은 13종(種), 삼칠삼(三七参)은 15종(種)이고 그밖에 Ra, Rf, Rg3, Rh2 사포닌(Saponin)화합물은 고려인삼만이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다는 사실과 예로부터 한 뿌리의 고려인삼은 한 꿰미의 보석과 같다 하였고 동시에 온갖 풀의 왕(百草之王)이라 하였다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다.그러나 이에 반해 실제로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인삼 중에 과거 고려인삼처럼 우수한 효능을 가진 인삼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홍삼이 우수하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하지만 파급력이 옛 고려인삼만 하겠는가. [애팔래치아와 오자크(Appalachia Ozarks)]결국 지금까지의 모든 밝힘 속에서 오엽삼(五葉蔘)의 신라인삼(新羅人蔘)도 린네(Carl von Linne:1707-1778)가 명명한 근원종(根源種)인 아메리카 인삼이라고 하는 학명 "Panax quinquefolius"과 동질의 것으로 파악된다.이것은 만주삼을 고려삼이라 하는 것과 고려삼에는 백제삼이나 신라삼이 포함되어 나타나고 더 하여 발해삼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늘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이를 명확하게 구분지울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사실에서 이것을 또한 화기삼(花旗參)이라는데 부정할 아무런 방법이 없다.화기, 꽃의 깃발을 사용하던 곳에 나는 인삼이니 화기삼이라 한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시비 걸 수 있겠는가.또한 과거역사야 어찌되었던 지금은 미국 영토가 아닌가.위 분포지도에 나타나지만 화기삼이라 하고 미국인삼이라 하는 것은 미국의 동부와 중부 그리고 일부 캐나다 남동부(southeastern)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기록을 참고 할 수 있고 특히 미국의 애팔래치아지역(Appalachian)과 오자크지역(Ozark regions)의 낙엽활엽수(deciduous forests)숲 속, 그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는 점들은 아마도 고려인삼이 발견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지는데 미국 내 근원지에서도 인삼이 절멸이라는 글자와 함께 위태롭게 보인다.결국 이렇게 삼한의 인삼역사가 종결되는 것이구나 하니 글쓴이의 글 놀림이 그저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든다.서서히 줄어드는 개체에서 특성적으로 보면 매우 한정된 성장환경이라 하고 상업시장에 의한 수요로 인해 일부지역에서는 멸종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걱정스러움이 자료에서 함께 묻어난다.비록 미국인삼이라고 하지만 근원종의 관리상황을 보면 절멸위기(endangered)에 있는 주(州)는 동북부의 한반도 함경도 같은 메인주(Maine), 로드아일랜드주(Rhode Island)로 정하고 관리하고 있다 하였으며, 취약지역(Vulnerable)으로 인식한 주(州)는 뉴욕(New York),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주이고. 위험직면(Threatened)에 처해 있는 주(州)로는 오대호남부 미시간(Michigan), 뉴햄프셔(New Hampshire)를 꼽았으며 특별관심(Special Concern)지역으로는 코네티컷(Connecticut),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그리고 중남부지역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와 테네시(Tennessee)등이다.노스캐롤라니아주와 테네시주는 애팔래치아산맥을 주 경계선으로 두고 있는 그야말로 관(關)형태를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다.결국 고려인삼, 조선인삼의 약효가 다 해가고 있다는 암울한 이양기다.그렇더라도 이 지역들은 옛 조선 동북부지역으로 내 눈에 비춰지니 어떻게 하겠는가.8.마무리서두에서 화기삼의 정체를 알기 위해 먼저 화기삼(花旗蔘)명칭이 품고 있는 관동(關東)이란 역사지명을 좀 더 깊숙하게 이치적으로 풀어 고찰하였다.결국 한반도 지형상 역사기록에서 말하고 있는 관(關)과 령(嶺)을 스스로 품기에는 지형적인 한계가 분명하게 있고 실제로 가로 횡(橫)폭이 너무 좁아 엉터리없이 이리저리 억지로 꿰맞춘 조악한 역사의 지명상황을 객관적으로 풀어보면서 한숨도 지어보았다.고려(高麗)때는 철(鐵:Fe)이 많이 생산되던 철령에 관문 철령관(鐵嶺關)을 설치하거나 행정기구 명칭의 직할지(直轄地)인 철령위(鐵嶺衛)를 두었다 하는 것은 자원이 풍부하거나 요지(要地)의 특수하게 관리할 수 있는 땅을 관할하고자 한 의미가 있었다는 할 수 있을 것인데 현재 한반도 지형상황은 이러한 역사이치를 제대로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란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 사실이다.한반도는 우리가 알다시피 가로 횡(橫)의 거리가 불과 약330km(840里)미만으로 짧아 우리역사서에서 말하고 있는 해서(海西)나 해동(海東), 그리고 관서(關西)나 관동(冠童), 그런 형편에 더 하여 영서(嶺西)와 영동(嶺東)까지 들어가야 하는 것을 수용할 수가 없다.그러니 한반도 역사는 어지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위는 고려사 26권(高麗史 五十六券)에 나오는 고려 건국(高麗建國)시 영토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위 기록에서 우리가 한자도 빼놓지 않고 전부 우리 머릿속에 암기하여야 할 이야기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고려영토를 설명한 것을 보면 3면이 바다로 막혀 있고 한쪽 모퉁이에서 육지가 잇닿는 거리의 폭이 만리(萬里)라 한 사실이다.이 길이는 북아메리카대륙 동과 서를 가름하는 길이이다.한반도 사관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또 하나는 옛 고구려 땅에 신라와 백제가 있었고 신라(新羅)를 항복시켰으며 백제는 당(唐)나라가 아니라 고려(高麗)가 멸망시켰다고 하였다.즉 당(唐)이 고려(高麗)였던 것이다.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지명들이 있는데 바로 관내(關內), 중원(中原), 하남(河南), 강남(江南), 산남(山南), 양광(楊廣)등이며 지금까지 본 블로그의 통해 설명하고 있는 관, 령 바로 선춘령(先春嶺)은 애팔래치아산맥 북단(北端)을 이야기 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위 열거한 지명들은 중국사서에 나올 법한 지명들이다.본 블로그에서 글쓴이가 주장하길 옛 역사지명은 함부로 마구 멋대로 붙여 짓는 것이 아니라 했다.태고적부터 내려오는 전설이라던가 아니면 자연의 이치와 섭리 등을 전부 종합하고 자연철학을 모아 그야말로 신중하게 지명을 지어 중복됨이 없이 독창성이 강한 지명이 될 수밖에 없다.지명에 대해서는 서양에서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펜실베이니아 주 타이터스빌(Titusville)의 인근 하천지명이 ‘기름 냇물’의 뜻을 가진 ‘오일 크리크(oil creek)’로 오래전부터 불리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고려의 영토가 만리라고 하니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시 본 블로그 글 “만리조선(萬里朝鮮) 제비노정기와 제비(家燕 : Barn Swallow) http://blog.daum.net/han0114/17049629“와 ”산양호(山羊湖)는 고트레이크(goat lake)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1“을 보면 조선(朝鮮)초기 세조(世祖)때 문신 양성지(梁誠之:1415-1482)의 상소문에 ”조선의 영토 폭의 거리가 약 만리(幅員幾於萬里)“라 하였던 기록이 있다.서두에 게시한 한반도 조선(朝鮮)역사행정지도를 보면 이 기록과 비교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대체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 행정지도를 보면 좌도(左道)라 하고 우도(右道)라 하였는데 우리의 일반적인 지도를 보는 방향 상식에서 완전히 비껴나 있고 거꾸로 볼 수밖에 없는 형태가 되어있으며 소위 한반도 모화사관(慕華史觀)이나 조공사관(朝貢史觀)으로 중국이 한반도 북방에 있었다고 가정하고 방향을 틀어 북쪽에서 보는 관점이라 할지라도 경기도(京畿道)에 좌도(左道), 우도(右道)의 구분은 오히려 남도(南道)와 북도(北道)가 합당할 정도의 행정지도형태가 일률적인지 못하면서 무엇인가 어거지로 갖다 붙여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삼한역사의 바탕이 되고 본거지라 하는 한반도의 지형상황이 이러한 형국이니 더 이상 할말이 없다.어쩌면 근거도 없는 이야기가 한반도 사관에 묻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왜곡되고 긴 시간이 흘러 그런 사실들이 이제 상식화되고 정당화가 되었지만 결국 우리가 바르게 각성하지 못할 때 영원히 식민지역사의 종속이 될 수밖에 없고 불필요한 자학과 피해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다.마찬가지로 서두에서 언급하였지만 되풀이 해보면 요동(遼東)은 우리역사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영역으로써 대고구려가 존재할 때부터 고유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한 도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중국이란 주체가 말하길 요동은 고려와 조선의 땅이라 하였고 멸망해버린 백제와 신라 땅이라 하였으나 그 요동이 한반도 지형상황에서는 도저히 들어갈 공간이 없는 관계로 어중간하게 지금은 요동성(遼東城)말하고 요동반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요(遼)가 있으려면 요하(遼河)가 있어야 하는데 요동만으로 들어가는 요하는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강이 아니라 오히려 남과 북을 가르는 것이어서 역사사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지명으로 존재할 뿐이다.앞으로 신중국세력들에 의해 동북공정에 빌미를 제공할 뿐 우리에게 실로 암울한 것일 수밖에 없다.당시 고려말기 요동정벌(遼東征伐)을 생각하면 요동에 무엇인가 고려를 위협하던 역사주체가 존재했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요동정벌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이성계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요하의 동쪽편인 요동 땅으로 들어갈 때 군사들의 활에 입힌 젤라딘 성분 아교(阿膠:Donkey-hide gelatin)가 열에 녹을 정도로 기후가 덥고 습했다는 사실에서 이것을 기후학적으로 보아도 금방 아열대기후 지역임을 알 수 있지만 그러한 기후환경이 지금은 추위가 엄습하고 찬바람이 겨울 내 불어대는 척박한 곳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늘 상 우리 조상님들은 서양인들을 왜라 하여 한사코 경계했다.한반도 압록강을 넘으면 그곳에 더운 날씨가 전개되는 요동이 있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스러운 이야긴가.본 블로그 글 "당리화(棠梨花)와 압록강 http://blog.daum.net/han0114/17049507 "에서도조선부(朝鮮賦) 글에서 보면 동월(董越)은 황제의 특채된 사신으로 조선 한성 궁궐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길을 떠나 추운 북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따뜻한 남쪽으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리화가 남쪽에서 피는 꽃이며 동월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당리화가 피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실제로 압록강은 한반도 북쪽에 있는 압록강처럼 강을 넘으면 추운 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지형환경이 아니라 강이 종으로 세로로 흘러 남북의 구분이 있을 수 없으며 동월이 압록강을 건넌 곳은 남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압록강을 건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한반도 지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이야기다.그곳에서 서남쪽으로 들어가면 실제로 조선선비들이 귀양살이를 하게 된 지역으로 늘 상 공포의 전염병인 장려(瘴厲) 즉 말라리아를 옮길 수 있는 장기(瘴氣)가 성행하던 곳이라는 것을 사서기록들을 참고 하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물론 한반도 지형으로는 이를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때문에 요동정벌에서 활의 아교가 녹는 것을 여름철 장마기라 하면서 실제의 아열대기후를 숨기고 덮어 버리는 역사의 왜곡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실제로 고려인삼은 선교사들이 무수히 조선 땅에 들락거리던 시절 조선 동북부(東北部)에 무수히 자생하였다고 하였지만 한반도 동북부 함경북도에 인삼이 그렇게 많이 자생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만주 연해주라고 하지만 그곳도 이와 같이 고려인삼이 무수히 자생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그렇다면 어떻게 정리되고 결론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화기삼이 무수히 자생하는 곳, 그곳이 조선의 동북부이고 또한 아메리카인삼이 재배되는 곳이라고 감히 말할 수밖에 없다.또한 그것이 바로 고려인삼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초롱꽃" rel="tag" target="_blank">초롱꽃</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메리칸 새들브렛 American Saddlebred" rel="tag" target="_blank">아메리칸 새들브렛 American Saddlebred</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화기삼(花旗蔘)" rel="tag" target="_blank">화기삼(花旗蔘)</a>,&nb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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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우라 하는 사탕무(Sugar Beet), 첨채(甜菜)가 재배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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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우라 하는 사탕무(Sugar Beet), 첨채(甜菜)가 재배된 곳글쓴이:한부울사탕무 필요의 역사베를린과 제네브라(Genevra)사탕무(sugar beet)의 생물학적 원산지 파악조선사서(朝鮮史書)에서 말하는 사탕무현대자료 동아일보에 나타나는 첨채마무리사탕무 필요의 역사음식은 현재도 그렇지만 그 이전 시기에는 보존이 생명이었다.인류가 생성되면서부터 발생한 딜레마가 모든 음식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그렇게 볼 때 우리가 현재 선조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모든 저장식품들은 음식을 오래 보존하고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가 있다.물론 오늘날 냉장고라는 문명의 이기(利器)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때문에 서양사에서 말하길 설탕은 음식을 오래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유럽인들은 과일의 과육을 으깨어 설탕을 많이 넣고 졸여 만든 저장 식품인 잼(jam)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로인하여 유럽인들에게 설탕이 널리 알려지면서 수요가 급증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서양사를 가만히 뜯어보면 결국 소비는 유럽인들이 하였다는 이야기다.무슨 연유로 이런 아집이 존재할까?그들이 자본주의제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라는 자만일 것이다.설탕의 소비는 문명의 척도라는 말이 있듯이 일반적으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설탕 소비량이 많아진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는 그들만의 연결임을 알 수가 있다.이것만 보더라도 비록 과거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유럽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가끔 의문이 드는 것은 서양사말대로 한다면 결국 동양인들은 그런 소비욕도 가지지 않는 무지렁이란 말이다.아마도 그러한 주장 속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인간이 필요에 의해 파생되고 생성되는 모든 것들은 동 서양을 가릴 이유가 없고 아마도 서양인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진 것 중에 어느 하나도 동양문화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역사사실을 조금도 감안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상당히 우스운 이야기다.16세기까지 유럽에서 설탕은 사치품으로 남아 있어 설탕은 아주 귀한 의약품이나 향신료로 여겨졌다. 왕은 식탁 위에 설탕 사발을 올려놓는 것으로써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으며 영국에서는 4파운드(1.5kg)의 설탕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하니 설명이 더 이상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설탕의 가치가 굉장했던 것도 알 수가 있다.모름지기 설탕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전에는 아마도 특별하게 취급되었을 것이란 추측은 가능한 것이다. 설탕을 만들기 위해 두 가지의 원료가 있는데 사탕수수와 사탕무이다.사탕수수는 줄기를 세세하게 부스러뜨려 즙을 짜고 그 즙의 불순물을 침전시켜 액체를 꺼내 끓임으로써 결정체를 만들고 사탕무는 뿌리를 채로 썰어서 따뜻한 물에 담그고 당분을 녹여 그 당액을 끓여서 여과하면서 불순물을 없애고 진공상태에서 당액을 농축시켜 결정체를 만든는 것이니 일단 제조방식이 다르다.1920대의 동아일보의 자료를 보면 사탕무 역사에 대한 자료가 보인다.사탕수수에서 뽑은 감자당(甘蔗糖)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사치품이라 하여 부자들의 식도락같이 알았기 때문에 사탕수수 즉 감자(甘蔗)를 한냉(寒冷)한 지역에 이식(移植)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자연히 열대지방의 사탕수수에서 생산된 설탕이 독점(獨占)되어 구라파(歐羅巴)까지의 수송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이에 대한 대안을 찾기 시작했고 17-8세기 차(茶), 커피(珈琲), 코코아와 같은 초콜릿(chocolate)제조에 필요한 설탕 수요가 급증하여 감미제가 차지하는 독점적 위치를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당시 상업적으로 설탕의 위치가 어느정도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이것에 대안이 바로 사탕무였던 것이다.참고로 1927-1928년에 설탕소비는 일인당 지나(支那)가 2.2kg 독일(獨逸) 25.5kg 영국(英國) 45.0kg 미국(米國) 49.5kg 통계에 보듯이 엄청난 소비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부유함에 따라 설명소비가 많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렇디만 영국과 미국이란 국가체제는 상업을 위주로 하는 집단구성체제이었음은 알아야 한다.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사람들로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첨채(甜菜)의 감미(甘味)성분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고 18세기중엽 1709년 베를린궁정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난 프로이센 화학자 마르그라프(A. S. Marggraf)가 이를 발견하여 1747년 학계에 발표하게 되었는데 첨채(甜菜)에는 완벽한 당분(糖分)이 있다 한 것이다.이것을 첨채당(甜菜糖)이라 하였다.이것에 대한 추출방법을 그의 제자인 프란츠 칼 아카드(Achard, Franz Karl:1753-1821)가 개발했고 그는 180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1770-1840)의 원조를 받아 프로이센의 실레지아(Silesia)의 슈타이나우(Steinau)근처에서 첫 번째 사탕무정제소를 열었다고 되어 있다. 1802년에 이 정제소에서 4(t)의 효율로 400(t)의 사탕무를 가공했다 하였으니 비율적으로는 1%이다.그러나 이 정제소는 1806년에 나폴레옹 군대의 침입에 의해 전소되었고 1810년에 재건하였으나 1816년에 재정난으로 파산하고 말았다고 정리되어 있다.당시 각국의 첨채재배지면적을 보면 독일(獨逸) 약50만(萬)ha(5000km²), 불국(佛國) 약25(萬), 체코 약25(萬), 기타구주(歐洲) 약63(萬), 미국(米國) 약31.5(萬)이라는 면적을 말하면서 이시기에 유럽은 완전히 감자당(甘蔗糖)예속에서 벗어났다는 사실과 동시에 이때부터 설탕은 사치품에서 대중식료품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전자에 기술한 것처럼 사탕무를 이용한 제당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였는데, 그 동안 프랑스의 설탕공급지였던 지금의 아이티(Haiti) 생도맹그(Saint-Domingue)가 1796년에 떨어져 나가고 제해권(制海權)마저 영국에게 빼앗겨 사탕수수 수입길이 막히는 바람에 사탕무 재배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1805년 12월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에서 승리하여 정치연방인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게 만들었고 1806년 7월 나폴레옹은 독일 남서부에 있는 16개국을 지원하여 라인동맹이 결성하고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 프로이센(Preussen)을 압박하자 1806년 8월 라인연방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철수를 프로이센이 요구하면서 충돌이 시작되었는데 프로이센군은 1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라인연방국에 분산 배치되어 있는 프랑스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전쟁의 소극적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1770-1840)의 의중을 간파한 프랑스는 독자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는 군단을 중심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예나전투(Battle of Jena)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수도 베를린까지 점령하였다.이에 프로이센(Preussen)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옛 칼리닌그리드이며 프로이센 수도인 폴란드 동북쪽 "왕의 산"이란 의미를 가진 쾨니히스부르크(Königsberg)까지 도망가서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이것은 꼭 선조의 몽진(蒙塵)같은 느낌이다.이런 과정에서 프란츠 칼 아카드(Achard, Franz Karl)가 설립한 사탕무정제소가 전소하게 되었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분명한 것은 나폴레옹은 설탕무에서 설탕이 생산된다는 사실에 상당히 고무되었던 것은 분명하다.그는 어찌보면 대단한 장사꾼이었던 같다.프로이센 실레지안(Silesian)의 사탕무는 곧 프랑스에 소개되었으며 나폴레옹은 이 식물연구를 위해 특별학교를 개설했으며 또한 새로운 사탕무재배에 2만8천ha(280(km²):28,000정보)를 투입 할 것을 명령했다고 알려진다. 물론 이러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기간 동안 영국의 사탕수수설탕 봉쇄에 대한 대비책으로 유럽설탕 사탕무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도모했고 1840년에 세계설탕의 약5%가 사탕무에서 의존했으며 1880년에는 이 수치가 10배 이상으로 증가하여 50%차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때문에 캘리포니아 주 알바라도(Alvarado)에 있는 농장에서는 1879년 처음으로 상업적인 생산을 시작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니 어딘가에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는 유럽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사탕무 설탕의 등장은 왕정과 노예반대 운동가 모두를 고무시켰다고 되어 잇다. 왜냐하면 사탕수수 농장에서 벌어지는 노예수급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며 왕정에서는 서양인들에게 강탈당하지 않는 농장들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과 사탕무농장을 개설하고 설탕을 충분히 확보 할 수 있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이들은 물질적인 차원에서 또한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도 사탕무 설탕생산을 적극 후원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사탕무, 설탕의 급속한 발달에는 나폴레옹의 역할이 컷다는 것이 이와같은 이유가 있다. 전쟁 중의 유럽봉쇄는 사탕무 설탕산업의 발전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영국의 유럽봉쇄에 맞서서 나폴레옹은 영국과 통하는 대륙의 모든 항구를 폐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영국은 미안스럽게도 미국 대륙에 수출을 하고 있엇다고 하는 사실에서 이러한 봉쇄조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서양사에 몰입된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설탕소비가 많은 유럽은 설탕이 필요했겠지만 서인도제도 설탕의 통로는 영국에 의해 막혀버렸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정치생명을 걸고 사탕무 설탕을 적극 지원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시기에 사탕무 정제기술은 급격히 발달했다고 기술되고 있다.만약 유럽제국 군집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존재했다면 프랑스가 멕시코 북부와 텍사스만 봉쇄해도 육지로 사탕수수가 들어갈 수가 없다.이것은 나폴레옹이 북아메리카대륙 남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 글쓴이의 독특한 생각이다.글쓴이는 본 블로그 2014년 글 "올방개(荸荠:Eleocharis)와 발해(渤海) http://blog.daum.net/han0114/17049848"에서 말하길 유럽 베를린의 지명이 북아메리카대륙 캘리포니아주와 겹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고 특히 학명 "Eleocharis montevidensis"를 명명한 독일식물학자 칼 쿤트(Carl Sigismund Kunth:1788–1850)가 1820년부터 1829년까지 9년간 베를린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그 이후 1829년부터 3년간 유럽대륙에서는 멀고 복잡하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가까운 남아메리카대륙 칠레, 페루, 브라질, 베네수엘라, 중앙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를 방문했다는 사실과 유럽 베를린에서 당시 운송수단이 대양을 횡단하는데 불리한 범선이라는 한계와 거대한 풍랑을 견딜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극복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바다기후환경적인 문제점으로 인하여 섣불리 유럽에서 대양을 횡단하고자 할 수 없다거나 남아메리카대륙으로 갈 수 없었던 점과 캘리포니아에서 가면 가깝지만 남아메리카대륙을 휘돌아 칠레나 페루 그리고 중앙아메리카를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볼 때도 그렇지만 일단 전자와 같은 기록들의 활동범위 내에 캘리포니아주가 주 활동무대라는 점 등에서 베를린은 캘리포니아 어디의 지명임을 추정할 수가 있다고 진단하였던 것인데 그러한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의 주요식물 학명 분포지도에도 캘리포니아주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과 캘리포니아주에 옛 베를린지명이 존재하였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Berlin, California, the former name of Genevra. Genevra (formerly, Berlin and Genevra Station) is an unincorporated community in Colusa County, California. It lies at an elevation of 98 feet (30 m). The place was named Berlin in the 1870s by officials of the Southern Pacific Railroad on whose tracks it was established. The post office was established in 1876, and renamed from Berlin to Genevra during World War I; the post office closed in 1934.위 영어자료를 보면 분명 베를린은 캘리포니아의 제네브라의 옛 명칭이라 하였다.1870년에 남부태평양철도 관리들에 의해 베를린이란 명칭이 생성되었고 우체국 또한 1876년에 설립되었으나 1차대전 중에 베를린이 로만슈어 제네브라(Genevra)로 교체되었다는 것이며 우체국 역시 1934 년에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현재 이 지명에서 사라지고 없다는 문제는 이러한 글쓴이의 주장을 더욱 신빙성있게 하는 것이다.우리는 세계삼하역사관점으로 이러한 근원적인 역사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글을 읽는 동지들은 이런 사실들을 세세하게 살펴볼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아래에서 자세하게 생물학적으로 첨채 즉 사탕무에 대해 설명하겠지만 종전에는 사탕무를 가축의 먹이쯤으로 여기던 지역까지 사탕무 설탕이 전해지고 당시 유럽대륙 곳곳의 보편적인 산업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사탕무 설탕산업은 나폴레옹의 정치적인 집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때문에 글쓴이는 나폴레옹은 정치인이라기 보단 장사꾼이라는 것이다.이에 더하여 보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본 블로그 글 “나폴레옹이 주는 단서(端緖) 캘리포니아http://blog.daum.net/han0114/17050659”를 감안하더라도 나폴레옹은 결코 유럽대륙에 있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 중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것이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이란 사건이다.1803년에 미국정부가 프랑스로부터 2,147,000km²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萬)달러에 사들였던 사건을 말하는 것인데 당시 아무리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자국이 차지한 귀중한 영토를 헐값에 영구히 팔아 남의 영토가 되게 하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다.나폴레옹이 정치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그렇다고 1803년이 나폴레옹에게 위기의 시기가 아니다.위에서 말한 것처럼 프로이센제국을 공격하여 승리는 쟁취하던 때이다.나폴레옹이 매입대금으로 받은 1500만불이라 하는 것은 요사이 환율로 따져 약 171억원 남짓하는 가격일 것인데 한반도 넓이(228,000km²)의 약 10배에 달하는 땅을 그런 가격에 팔았다고 하는 사실은 미친 짓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이러한 짓은 그가 한 나라의 관리나 장군이라는 사실조차도 의심하게 한다.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을 배반하고 영토를 무단히 팔 수 있는 것은 그가 프랑스국민이 아니거나 프랑스국민이라 할지라도 몇 푼의 그의 가치도 팔 수 있는 천하에 둘도 없는 무도(無道)한자이거나 양심도 없는 양아치같은 장사아치일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다.솔직히 글쓴이가 나폴레옹이 평안도 출신 평서원수(平西元帥) 홍경래(洪景來,1771-1812)와 같은 인물이라 하였지만 홍경래가 이러했다면 민중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은 다 허울 좋은 개살구이고 오직 자신의 안위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 수 있는 자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미국입장을 놓고도 이러한 문제에서 당치도 않는 사실의 관계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미국이 나폴레옹에게 매입한 시기가 1803년이라면 1803년부터 1804년까지 본관이 신안동(新安東金氏)인 노론(老論)시파(時派)인 장인 김조순(金祖淳)이 섭정 하던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대이며 오늘날 영국, 즉 잉글랜드라 하는 브리티시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으로부터 독립한지가 겨우 30년 남짓한 시기이다.생각해보라.겨우 독립한 세력들이 무슨 자본이 있어 매입을 도모할 것이며 서부개척이라 할지라도 당시는 횡단철도가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냥 줘도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땅이며 미국인자신들이 그럴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 글쓴이에 판단이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사실은 거짓에 불과한 것으로서 미국(米國)은 영불독(英佛獨)에게 80억(億)불($)의 채무국으로 존재한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미국자체가 국가로서 엄두도 낼 수 없는 이야기임을 우리는 명확히 진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미국(米國)이 남북전쟁과 유럽대전(歐洲大戰)이라 하는 1차세계대전(一次世界大戰)으로 막대한 자본의 이익을 챙기고 해외채권국으로 변모한 것은 무기를 공급하고 남긴 이문이 굉장했다는 것인데 이때 해외채권액만 300억(億)불($)이 넘었다 하였고 이때부터 황금국(黃金國)이라 이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나폴레옹에게 루이지애나 땅을 헐값으로 매입했다는 시기에는 그들이 결코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며 때문에 이러한 주장들은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근세기 역사의 믿을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고도의 프로드 메카니즘(fraud mechanism)에 의한 조작인 것이 틀림없다.결국 나폴레옹이란 인물은 프랑스란 이름과 함께 프랑스인들의 활동무대였던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중심으로 서부지역에 존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의 정확한 신분정체는 정신 나간 장사꾼이거나 게르만일파인 프랑크인(Franks)들이 경영하는 회사(會社)라고 하는 조직체 수장에 불과했을 것이다.어떻게 유럽국가 프랑스의 영웅이라는 인물이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받고 엄청나게 넓은 광활하고 그야말로 자체가 황금인 귀중한 영토를 일거에 팔아넘길 수 있는지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이야기다.서양역사의 주장들을 그대로 따진다면 나폴레옹은 프랑스인들에게 일고의 가치가 없는 매국노이고 반역자일 뿐이다.그렇다면 나폴레옹이 사탕무가 설탕이 된다는 것을 알고 사탕무에 집착하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사탕무의 재배지까지도 미국에 헐값으로 팔아 넘겼을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사탕무를 사랑한 나폴레옹이라는 것은 장사꾼이란 설명이다. 사탕무(sugar beet)의 생물학적 원산지 파악甜菜-비트(beet)(甜菜:Beta vulgaris、英文:Beetroot)又名菾菜或紅菜科學分類界: 植物界 Plantae(未分级) 被子植物 Angiosperms(未分级) 雙子葉植物 Dicotyledons目: 石竹目 Caryophyllales科: 莧科 Amaranthaceae亞科: 甜菜亚科 Betoideae族: 甜菜族 Beteae屬: 甜菜屬 Beta種: 甜菜 B. vulgaris二名法Beta vulgaris L.1753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몸달아 하던 설탕무의 원산지나 근원지가 과연 어디로 나타날까?학명“Beta vulgaris”가 처음 알려진 것은 1753년 칼 린네(Carl von Linné:1707-1778)의 저서(著書) 식물의 종(種:Species Plantarum)에 의해 발표된 것이며 동시에 베타(Beta) 속명(屬名)이 명명되었다.당시는 축산사료용으로 사용되던 만젤우르젤(mangelwurzel)은 구분되지 않았고 사탕무(beet), 근대(chard), 붉은 사탕무(red beet)만 구분되었다.그러다가 1762년 식물의 종(種:Species Plantarum)두 번째 판에서 바다사탕무(sea beet)를 자체적인 종(種)으로 보고 베타 마리티마(Beta maritima)라 하였으며 베타 불가리스(Beta vulgaris)는 재배용 사탕무(cultivated beets)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오늘날 바다 사탕무(Beta maritima)와 재배용 사탕무(Beta vulgaris)는 잡종과 변종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같은 종(種)이라 간주한다. 위 학명에서 야생(野生)조상(祖上) 종(種)으로 3가지 아종(subspecies)으로 구분된다.(1)Beta vulgaris ssp. adenensis (2)Beta vulgaris ssp. maritima, (3)Beta vulgaris ssp. vulgaris, ssp.[subspecies]는 아종(亞種)말하는 것이다.[subsp 혹은 ssp.(subspecies)]이 “vulgaris” 아종(亞種)은 뿌리채소 내지는 잎채소로 수천년(數千年)간 품종(品種)이 개량된 결과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알려지는 것이다.첫째 터키식물학자(Adil Pamukçuoǧlu:1929- )가 명명한 학명 (1)Beta vulgaris subsp. adanensis 는 동남부 유럽(그리스)와 서아시아(키프로스, 이스라엘, 서부 시리아 및 터키)의 교착된 서식지와 대초원에서 자생하며 두 번째는 린네가 일찍이 명명한 학명(2)Beta vulgaris subsp. maritima 는 바다사탕무(Sea beet)라 하고, 모든 재배 한 사탕무(all cultivated beets)의 야생조상으로 그 분포지역은 서유럽과 지중해 연안에서 근동 및 중동까지 이른다. 세 번째는 린네가 명명한 학명 (3)Beta vulgaris subsp. vulgaris는 설탕무(Sugar beet)인데 아종(亞種)이며 이것의 동의어(Syn.), 다른 명칭으로 Beta vulgaris subsp. cicla(L.)Arcang.와 Beta vulgaris subsp. rapacea(Koch)Döll 가 있다.사탕무의 조상인 바다사탕무(Beta vulgaris subsp. maritima)가 지중해연안을 따라 번식했다고 알려진 것은 이집트의 테베(Thebes)에 있는 제3왕조의 사카라(Saqqara)피라미드에서 사탕무 유적지가 발굴되었고 네덜란드의 아르츠보트(Aartswoud)신석기 지역에서 생육된 4종(種)의 사탕무뿌리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의한 것이다.하지만 이것들이 사람들에 의해 재배되었거나 야생형이라는 베타 불가리스(B. vulgaris)인지는 확실하게 판명되지 않았고 이슬라엘 식물학자 조하리(Daniel Zohary)와 독일 식물학자 홉프(Maria Hopf)는 사탕무뿌리(beetroot)가 "언어학적으로 일찍이 알려져 있다"라고 언급하였으며 사탕무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8세기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고대왕국 바빌로니아(Babylonia)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리스의 소요학파라고 하는 페리파토스학파(Peripatetic)의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BC371~BC 287)는 사탕무를 후에 일반 무와 닮은 것으로 묘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BC384~BC322)역시 이 식물을 언급했다고 알려진다.이와같은 것은 주로 사탕무의 잎이 많은 품종들만 역사기록에서 재배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소위 잎을 식용으로 하는 근대(chard)라 하는 것으로 이것들은 시금치가 도입됨에 따라 인기를 잃었다 했다.고대 로마인은 사탕무를 중요한 건강식품이자 최음제로 간주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으나 그렇듯 활성화가 되지 않았음도 알 수가 있다.백과사전을 보면 사탕수수에 이어 설탕의 원료로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식물인 사탕무(sugar beet)는 쌍떡잎식물 명아주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이라 하였고 감채(甘菜) 또는 첨채(甛菜)라고도 하며 설탕을 만드는 데에는 뿌리를 이용한다고 되어 있고 뿌리의 자당 함량은 15~20%로 10~20%인 사탕수수보다 조금 높은 편이라고 정리되어 있다.상기에서 알아 본 결과 베타 마리티마(Beta maritima)와 베타 불가리스(Beta vulgaris)는 같은 종으로 취급되고 베타 마리티마(Beta maritima)는 바다사탕무(Sea beet)라 하는데 야생조상 종(種)으로 분포지가 서유럽과 지중해연안 그리고 근동과 중동을 말하고 있다. 5개 그룹(Group)잎사귀를 이용하는 재배종B. v. ssp. v. convar. cicla. var. ciclaB. v. ssp. v. convar. cicla. var. flaviscens (근대:莙薘菜)덩이줄기를 이용하는 재배종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crassa (사료용 비트)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altissima (사탕무:糖用甜菜)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vulgaris (채소용 비트)B. v. ssp. v. convar. cicla. var. ciclaB. v. ssp. v. convar. cicla. var. flaviscens (근대:莙薘菜)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crassa (사료용 비트)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altissima (사탕무:糖用甜菜) 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vulgaris (채소용 비트)위 학명들은 근대와 첨채를 구분할 수 있는 학명들이다.5개의 재배종군(cultivar group)중 알티시마 그룹(Altissima Group)에 B. v. ssp. v. convar. vulgaris var. altissima(사탕무)가 있는데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1747년에 이것 뿌리가 설탕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후 프로이센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A. S. Marggraf)에 의해 고농축(highly enriched)된 사탕무에서 설탕이 분리되면서 1.3~1.6%의 농도로 발견되었으며 이후 설탕을 추출하는 방법이 18세기 후반에 독일에서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러한 사탕무는 1850년경에 독일 이주민을 통해 칠레에 소개되었다고 하고 있다.사탕수수가 열대지방에서 잘 자라는 것과 달리 사탕무는 더운 곳에서는 병충해를 입기 쉬워서 온대나 냉대지방 같은 서늘한 지역에서 잘 자라고 뿌리가 살찌고 설탕을 듬뿍 저장하는데 가장 적합한 온도는 20℃ 정도라 한다.공식적인 원산지 학명 Beta vulgaris subsp. vulgaris var. altissima 의 원산지는 동부지중해 연안과 중앙아시아라고 되어 있고 더 나아가 근동과 중동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원산지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의 위치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왜냐하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도 그렇게 볼 수밖에 없지만 현재의 세계생산지가 과거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사탕무 재배지역과 일치해야 하지만 현재 생산량으로 따져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그 다음은 프랑스, 3위가 미국이며, 4위가 독일, 5위가 터키, 6위 신중국, 7위 우크라이나, 8위 폴란드, 9위가 이집트이며 10위가 영국이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10위 권 내에 중앙아시아의 국가가 나타나질 않는다.아무리 지형 생태적으로 세월이 흘러 변했다고 하지만 본래의 원산지나 근원지가 한꺼번에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역사의 연속성이라 할 수밖에 없다.때문에 이것은 서양생물학기록들이 모순을 낳고 있고 본래 원산지에 대한 조작까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또한 지중해라 하였지만 지중해에 속한 국가는 위 10권내 프랑스, 터키 그리고 이집트 밖에 없다.APG II 속씨식물(Angiospermae)분류 체계에 따르면 쌍떡잎식물계(雙子葉植物界:Dicotyledons), 석죽목(石竹目:Caryophyllales), 비름과(莧科:Amaranthaceae)는 명아주과(藜亚科:Chenopodiaceae)를 포함하는데 이 명주과의 첨채속(甜菜屬)에 첨채(甜菜)라 하며 영어로는 비트(Beet)라 하는 식물이 바로 사탕무라 한다.사실 이와같은 생물학적 분류체계가 서양인들에 의해 체계화가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동양역사에서 이를 동의어로는 첨채(菾菜), 홍채두(紅菜頭), 당라복(糖蘿蔔)등으로도 알려지는 것은 동양에서도 이를 다양한 종류가 존재했음을 알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위 당나복에 대한 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의심을 하는 것은 본 블로그 글“나복(蘿葍)이 난 나주(羅州)는 캘리포니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2 "이란 제목에 글에서 우리 사서(史書)에는 그냥 무[蘿葍]라고 하는 것도 정작 알고 보면 나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이것은 서양인들이 말하는 정원무(Garden Radish)라 하는 것이며 또는 경작무, 재배무(Cultivated radish)라 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무와는 딴판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원산지가 캘리포니아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적잖게 놀란 적이 있었다.이처럼 우리의 사서에 등장하는 식물들을 세종지리지에서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자세하지 않고 뭉뚱그려 놓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형태와 성질을 알 수 없을뿐더러 자세하게 알고 보면 모두가 원산지 문제가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이것은 일찍이 조상님들이 즐겨 드신 식품들이 분명할 것인데 이렇게 저렇게 오늘날 우리에게 잘못 알려져 어리석게 알지 못하는 잘못이 비일비재한 것도 사실이다.이 나복의 토산지를 추적하여 결국 나주(羅州)가 곧 캘리포니아를 말한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역사는 우리스스로를 바보, 천치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도대체 한반도는 우리에게 무엇이란 말인가.다시 한 번 절망감과 함께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야기다.다음에는 실제로 한반도에서 첨채가 재배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조선사서(朝鮮史書)에서 말하는 사탕무그렇다면 우리나라 사서에는 이 첨채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김시습(金時習)의 梅月堂詩集卷之六 > 詩甜菜단무우甜菜滿沮洳。綠莖大如股。春風雨露均。百草含滋煦。奈何山中人。逢春年又老。老大不足道。恨不收功早。朝負巖上薪。暮鋤庭前草。短歌臥蓬廬。我生何潦倒。山僮報我起。美茹已爛熟。淡味愈勵操。一飽萬事足[번역]단무우가 물기가 많은 늪에 가득하니 푸른 줄기가 큰 것이 넓적다리 같구나. 봄바람에 비와 이슬도 알맞아 온갖 풀이 따습게 풍성하게 자라는데 어찌하여 산중의 사람은 춘년(春年)을 넘어 늙어만 가는가. 늙는 것에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만 후회하지 않게 명예를 얻었다네. 아침엔 가파른 언덕 위에 섶을 지고 해질 무렵 뜰 앞의 풀을 매며 단가로 빈거(蓬廬)에 누웠다 하여 나의 생애가 어찌 초라할 손가. 산 아이(山僮)가 나에게 알려 일어나 맛이 좋게 이미 푹 익은 담담한 맛에 이끌려 한번 배불리 먹으니 만사가 족하도다.[한부울]상기의 기록은 김시습의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권지6(卷之六)의 첨채(甜菜)란 시(詩)다.첨채를 고전번역원에서 단무우라 번역하였는데 단무우라 하니 당근의 한 종류라 하고 노랑 다광의 단무지가 생각나며 또 단무우라 하니 내복(萊菔), 만청(蔓菁), 나복(蘿蔔)등이라 한다.혼란인 것이다.이러하니 어찌 우리가 슈가 비트 즉 사탕무(sugar beet)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아마도 지금까지 위 시를 접하면서 위와같은 생각으로 느꼈을 것이다.그러나 분명하게 조선 초기의 학자 김시습은 사탕무를 보았고 그 사탕무가 재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본관이 강릉(江陵)이며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 비극적인 패도정치의 극치를 보고 더 이상 공부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김시습은 스님이 되어 방랑길에 올랐으며 서른한 살 되던 해, 김시습은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에 정착하면서 그는 이곳에서 서른여섯살까지 머물면서[금오신화(金鰲新話)]를 저술했다 한다. 이때가 대략 1471년경임을 알 수가 있다.공교롭게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이 사탕무가 재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위 북아메리카대륙 사탕무재배지 지도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물론 서부에 대대적인 사탕무의 농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위 지도로 확인할 수가 있다.어쨌던 1471년경 이미 사탕무라고 하는 소위 단무우, 첨채를 조선(朝鮮)경주에서도 재배하였다는 사실이다.또 한편으로 첨채에 대한 기록은 허균(許筠:1569-1604)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유일한 농서(農書)인 한정록(閑情錄)제16권 치농(治農)편에 “7~8월경에 하종(下種)했다가 9월에 둑을 짓고 나누어 심은 다음 자주 거름물[糞水]을 준다 하면서 서풍(西風)이 부는 날이나 고초일(枯焦日)에는 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라 하고 이와 같은 농작법의 작물로 갓(芥菜), 배추(白菜), 단무우[甜菜], 오송채(烏松菜), 함채(葴菜)등을 열거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시습의 시나,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첨채를 정작 정확하고 세밀해야 할 한반도 사서 중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는 찾을 수가 없고 더군다나 토산지(土産地)내역이 전무하다는 것이 참으로 한 숨이 나오는 것이 아닐 수 없다.허균이나 김시습의 기록에 나타나는 첨채라는 채소가 왜 조선대표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을까?질문하고 또 질문해보지만 허공만 칠뿐이다.더불어 생각해보면 위 허균의 농사재배방법을 기록한 작물 중에 “갓”이라고 하는 개채(芥菜)역시 위 한반도 사서(史書)어디에도 토산물(土産物)의 기록을 찾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이런 식의 허술한 대표적인 사서가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는 것도 마땅치 않지만 이러한 사서가 현재 당연하게 조선역사를 대표하며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이 더 걱정을 하게 하는 것이다.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과는 관계없이 전라도 음식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특유의 향식품인 갓김치를 애용하는데 이러한 식성이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한반도 역사를 바라보는 심각성이 있다.현대자료 동아일보에 나타나는 첨채현재 네이버사이트에는 1920년 이후부터 보도된 원본의 동아일보 기사가 있어 누구나 볼 수가 있다.참으로 바람직한 것은 지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등 전반적으로 궁금했던 것이 이를 통해 어느정도 알 수 있다는 점이다.때문에 세계삼한역사를 연구하는 글쓴이 입장에서도 적잖게 도움이 된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카테고리(Kategorie)에는 이러한 기사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놀랍게도 1927년부터 조선지역에서 영어로 비트(Beet) 즉 첨채(甜菜)라는 사탕무를 재배한 사실에 대한 기사가 이르게는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수차례 연속해서 보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일제조선총독부에 의해 1920년부터 조선인이 아닌 한국인의 신문발행이 허가된 3개 일간지 중 동아일보의 기사는 분명 한반도를 근거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이 첨채재배 기사는 참으로 낯선 것이 아닐 수 없다.신문기사에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현실성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생각해 볼 때 과연 이러한 기사보도가 실제로 한반도에서 발생한 이야긴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그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나 서북부에서 사탕무 즉 슈가비트(Sugar Beet)첨채가 재배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해괴한 이야기가 틀림없다.분명한 것은 사탕무를 한반도에서도 시험재배를 시도하였지만 경제적인 재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고 첫째 재배지 확보가 곤란하였으며 넓은 적합한 조건의 농장형성이 되지 않으면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후문제도 더우면서 시원하고 건조한 날씨를 요하는 최적의 20℃기온을 유지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여름이 습한 한국의 기후 조건과는 맞지 않는 결과에서 한반도에는 사탕무 재배 역사가 전무했다는 사실이다.그럼에도 아래 동아일보 기사의 보도들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그래서 내용을 한 기사 한 기사 분석해 보았다.[1]西朝鮮(서조선)에 甜菜栽培(첨채재배) 1927.02.16. 동아일보6면 경제기사擴張(확장)을計劃中(계획중) 二毛作(이모작)으로成績(성적)을擧(거)치못하는西朝鮮主(서조선주)로黃海道平南兩道(황해도평남양도)의甜菜栽培計劃(첨채재배계획)에就(취)하야는曩者平壤(낭자평양)에서道當局當業者(도당국당업자)는勿論總督府(물론총독부)에서도石塚技師其他(석총기사기타)가會合(회합)하야將來(장래)의擴張面積奬勵方法(확장면적장려방법)을頗(파)히權威(권위)잇게𤍠心(𤍠심)으로協議(협의)한바日糖平壤工塲長三浦主計氏(일탕평양공장장삼포주계씨)는數日來入京(수일내입경)하야그促進方法(촉진방법)에對(대)한細目(세목)을協議中(협의중)이더라1927년에 이미 한반도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에서 첨채재배를 계획했다고 한다.서조선(西朝鮮)이라 하는 것도 낮선 것이지만 서조선(西朝鮮)에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도 있고 평안북도는 왜 없다는 것일까?하고 의문도 가져 보지만 한반도의 지형을 대비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임을 새삼느끼게 하는 것이다.한반도의 서쪽을 서조선이라 하였다면 한반도 황해와 맞 닿은 서변 모두가 그러한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황해도,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그리고 평안남도뿐만 아니라 평안북도까지 서쪽 황해에 접(接)해 있기 때문에 서조선(西朝鮮)이라 해야 맞지만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서조선이라 하지 않는다.서조선(西朝鮮)은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 대초원 지대를 비교하면 그야말로 이설을 달 것이 없어진다.어쨌던 1927년에 이미 황해도와 평안남도에 첨채 즉 비트(사탕무)재배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이야긴가. [2]甜菜(첨채)의 實收量(실수량) 昨年中增加(작년중증가) 1931.03.05. 동아일보8면 경제기사平南道及黃海道(평남도급황해도)의特用作物(특용작물)이甜菜(첨채)는 年年增收(연연증수)하는바 昨年中(작년중)에는 作付反別887町8反(작부반별팔백팔십칠정팔반)그收穫高1,744萬7,280斤價格408,302圓反當收穫1,955(수확고일천칠백사십사만칠천이백팔십근가격십사만팔천삼백이원반당수확천구백오십오)斤(근)으로 前年(전년)에比(비)하야作付反別(작부반별)은 40町8反(사십정팔반)에减少(감소)이엇스나收穫高(수확고)는4,774,712斤(사백칠십칠만사천칠백십이근) 價格40,585圓反當收穫高(가격사만오백팔십오원반당수확고)는 600斤(육백근)의 各增加(각증가)이다 尙且此道別(상차차도별)은 黃海道作付反別343町3反(황해도작부반별삼백사십삼정삼반)7,096,200斤(칠백구만륙천이백근) 60,318圓反當收穫二千六十七斤(육만삼백십팔원반당수확이천육십칠근) 平南道作付反別544町5反(평남도작부반별오백사십사정오반) 10,351,080斤(일천삼십오만일천팔십근) 87,984圓(팔만칠천구백팔십사원)反當收穫1,901斤(반당수확일천구백일근)인대最近五個年間(최근오개년간)의作付反別及收穫高(작부반별급수확고)는알에와갓다위 기사는 1931년도 보도인데 평안남도와 황해도의 특용작물이라 한 첨채는 매년 증수(增收)가 되어 계획(計劃)보다 많이 수확했다는 사실을 수치로 알리고 있다.사탕무를 특용작물로 허용하는 것은 가공과정이 끝나면 부피와 무게가 현저히 적어지거나 가격은 높아지며, 수송력과 저장능력이 좋아진다는 이유에서 보통 특용으로 하는 경우이다.1927년에 계획한 첨채재배가 시행되었고 비로소 1931년에는 계획보다 많이 수확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3]咸北平野(함북평야)에 甜菜(첨채)가有望(유망) 1933.07.25. 동아일보4면 사회기사【나남】함북도당국에서는 소화四(사)년이래 무산(茂山(무산))오지에 잇어 농작물 생육상태 실지조사를하기위하야 무산 三(삼)장면 농사동과 三(삼)사면 신덕동 또는 경성농사시험장에 위택시험소를 설치하야 각종의 작물에 대하야 시험한 결과 이지대는 무엇보담도 첨채(甜菜(첨채))(사탕원료)가 제一(일)유망한것을 발견하엿다 그런데 그시험의내용을보면 현재 서선지방보다단당 三(삼)천五(오)백근에 비하야 약천근을 증산할 수 잇는 사실을 발견한 결과도 당국에서는 벌서부터 증산게획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수립하려고 하는데 이소문을 들은 평양제당회사에서는 벌서부터 이에 착수하려고 획책중이라고 한다.1933년에의 보도를 보면 함경북도(咸鏡北道)평야에 설탕원료인 첨채(甜菜)가 유망한 것으로 판명하고 가능성을 발견하였다는 사실과 이와 함께 평양제당회사가 이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을 감안하여 반겨 착수하려고 한다는 보도이다.함경북도에도 첨채를 재배할 수 있는 여건을 파악한 것이다.[4]北朝鮮一帶(북조선일대)에 甜菜栽培着手(첨채재배착수) 1936.07.09. 동아일보8면 경제기사北朝鮮(북조선)에잇어서의 甜菜栽培(첨채재배)는氣候地味共(기후지미공)히 有望(유망)한것이 確認(확인)되엇는데 드디어 北朝鮮開拓地(북조선개척지)의拂下(불하)를受(수)하야 神谷農塲(신곡농장)에서 今年(금년)부터 本格的栽培(본격적재배)에 着手(착수)하기로하엿다 卽(즉) 神谷農塲(신곡농장)에서는 咸北茂山郡(함북무산군)의農事集團地(농사집단지)(面積約五千町步(면적약오천정보))의 開放(개방)을受(수)하야 이中(중) 二千七百町步(이천칠백정보)를 耕地(경지)로 甜菜栽培(첨채재배)에着手(착수)하고自家製糖(자가제당)을 兼營(겸영)할豫定(예정)인데 西朝鮮(서조선)의 甜菜栽培(첨채재배)가 褐班病(갈반병)으로 自然消滅(자연소멸)이엇는바 高地帶(고지대)에는 이念慮(염려)가없으므로 將來(장래)를期待(기대)하고잇다1933년 앞에서 함경북도에 첨채재배를 생각하고 계획한 것이 실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첫째 북조선(北朝鮮)의 첨채재배인 경우 기후지의 대한 맛이 월등하여 유망한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며 북조선(北朝鮮)개척지의 불하를 받아 신곡농장(神谷農塲)에서 1936년에 재배에 착수하고 함경북도 무산군 농사집단지 면적 약 5,000정도를 개방하면서 이 중 2,500정보는 경지로 첨채재배에 할당하고 나머지는 제당 즉 설탕제조회사를 만들어 겸영하겠다고 하였으며 때 마침 서조선(西朝鮮)에서의 첨채재배가 갈반병으로 인해 자연 소멸되었다는 사실이 있지만 고지대인 본 농사집단지는 그럴 염려가 없어 장래가 기대된다고 하고 있다.이와 같은 보도는 이미 서조선(西朝鮮)에서는 첨채재배가 본격적으로 실시하고 있었으며 갈반병으로 첨채재배농사가 곤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가 있다. 갈반병은 갈색누늬병이라는 것으로 잎에 흑갈색의 점무늬가 생기고 갈색으로 변하여 조기에 낙엽되거나 병이 진전됨에 따라 병반이 점차 확대되어 서로 합쳐지고 잎 마름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 당시에 조치로 석회유황합제(石灰硫黃合劑)를 살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5]茂山高地帶(무산고지대)에다 甜菜(첨채)를栽培(재배) 1936.07.25. 동아일보5면 사회기사【羅南(나남)】신곡(神谷(신곡))농장에서는무산군 농장리 집원리(茂山郡(무산군) 農塲里(농장리) 集園里(집원리))에 약五(오)천정보의 임야와 황무지를 대여받고 그중 二(이)천五(오)백정보에는 비이드(甜菜(첨채))를재배하려고 개간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엿다는바 동 농장에 생산되는 비이(甜菜(첨채))를 원료로 자작제당(自作製糖(자작제당))도 겸하야 경영할예정이라고 하는바 이비이드 재배에 잇어서는 전조선적으로보아 서선지방은 극히 성적이불양한 관게로 함북의 고산지대를 선택하엿는바 이 성적 여하에 잇어서는 함북의 고산지방도 점차 농업과 공업의 병진적으로 개발되리라고 일반은 대단한 관심으로 기대하고 잇다고 한다.위 기사는 [4]번 기사를 보충하는 기사로 1936년 7월 25일 무산(茂山)고지대의 신곡농장에서 비이드(甜菜(첨채))라 한 것은 즉 첨채 비트(Beet)임을 정확히 알리고 있으며 제당사업을 신곡농장에서 추진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앞 기사에서 보듯이 갈반병으로 서조선(西朝鮮)에서 힘들어 하는 문제에서 북조선은 이러한 병충해의 위험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첨채재배와 더불어 설탕제조공업까지 상당한 기대를 걸 수 있다는 보도이다. [병충해]사탕무根切虫(근절충) 大同郡(대동군)에發生(발생) 1928.07.12. 동아일보4면 사회기사當業者焦慮中(당업자초려중) 大同郡古平面文發(대동군고평면문발),上端(상단),中端(중단),下端等各面(하단등각면)에는最近(최근)에"사탕무"의뿌리를잘라먹는根切虫(근절충)이發生(발생)하야被害(피해)가莫大(막대)할뿐만아니라今年度(금년도)부터는"사탕무"의耕作(경작)은此(차)로因(인)하야全然無望(전연무망)함으로一般當業者(일반당업자)들은焦慮中(초려중)에잇다더라 (平壤(평양))1928년의 뿌리를 잘라먹는 근절충(根切虫)에 기사인데 앞 기사에서 1927년에 이미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에서 첨채재배를 계획을 세워 실시한 것임을 알 수 잇고 평양(平壤) 대동군(大同郡)에서 이 근절충이 발생했다는 기사인데 이로 인해 금년 사탕무의 경작이 기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어 이 때문에 업자들은 크게 걱정을 하고 있다는 보도이다.서조선(西朝鮮)에서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 그리고 평양(平壤) 대동군(大同郡)에서 첨채재배가 성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북조선(北朝鮮)함경북도(咸鏡北道)평야와 무산고지대(茂山高地帶)에서 신곡농장(神谷農塲)이 주도하여 사탕무(甜菜:Sugar beet)재배를 실시하고 설탕제조회사까지 경영하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위 북아메리카대륙 원산지와 농장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이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마무리첨채 즉 사탕무라 하니 언듯 생각나는 것이 동양에도 알려졌다고 하는 음식인 러시안스프(Russian Beet Soup)즉 라송탕(羅宋湯)인데 이를 보르스치(borsch)스프라 하는 것으로 유럽북부지역의 사람들이 우리 김치찌게처럼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이 붉은 색 요리에 사탕무(beet:Beta vulgaris)가 들어가는 모양인데 잎을 먹는 근대임을 알 수가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사실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가 확실히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사탕무 즉 슈가비트 첨채를 재배했다는 사실이다.물론 그곳은 한반도가 아니라는말이다.그렇다면 우리는 끝까지 바보스럽게 멍청할 필요가 없다.세계삼한역사관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은 이와같은 사실들이 하나둘이 아니라 폭 넓게 정확한 논리 스펙트럼을 북아메리카대륙에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런 현상을 가벼이 볼 수 없다는 말이다.첨채의 원산지 또는 근원지 파악에서 소위 서양사에서 유럽남부지역, 그리고 지중해연안, 근동과 중동이라 하였지만 정작 근동이라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세계첨채생산 10위권에 들지도 못했다는 역사연속성, 역사지속성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아이러니 현상이 존재한다.대신 유럽이라 하고 또는 지중해연안이라 하고 근동, 중동을 말하지만 결국 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할 때 결국 북아메리카대륙을 지정하지 않을 수 없다.결국 위 근원지 파악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첨채 즉 사탕무 재배지 지도를 보면 정확하게 서부라 할 수 있는 곳은 네브라스카(Nebraska), 콜로라도(Colorado), 와이오밍(Wyoming), 아이다호(Idaho), 오리건(Oregon)이 나타나고 북부라 할 수 있는 곳은 , 미네소타(Minnesota), 노스다코다(North Dakorta), 몬태나(Montana), 워싱턴(Washington)이 보인다.그렇다면 1927년부터 동아일보 기사 보도내용에서 말하는 첨채재배지와 일치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답만 남았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우리에게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서조선(西朝鮮)에서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남도(平南), 그리고 평양(平壤) 대동군(大同郡)에서 첨채재배가 성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북조선(北朝鮮)함경북도(咸鏡北道)평야와 무산고지대(茂山高地帶)에서 신곡농장(神谷農塲)이 주도하여 재배하였음을 정확하게 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이것은 글쓴이의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것에는 정확한 생물학적판단과 지리적인 근거, 그리고 확실한 일간지 신문 보도를 합하여 이러한 결과를 돌출한 것이니 만큼 우리에게 뚜렷이 나타난 이러나 이러한 대비상황은 앞으로도 서로가 부정키 어려울 정도로 명확한 분석으로 존재할 것이란 확신이 있다.특히 우리가 관심있게 보아야 하는 것은 1931년도 보도된 동아일보 내용에서 평안남도와 황해도의 첨채 즉 사탕무가 바로 특용작물이라 한 사실이다.또한 동서가 좁다란 한반도 지형에 도대체 서조선(西朝鮮)이라 한 것은 무엇이며 1933년에 서조선(西朝鮮)에서 첨채재배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무겁게 보지 않으면 안된다.그리고 첨채에 발생하는 갈반병이나 근절충으로 인해 농작물 전체가 자연 소멸되었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 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그리고 신곡농장(神谷農塲)에서 1936년에 재배에 착수하고 함경북도 무산군 농사집단지 면적 약 5,000정도를 개방하면서 이 중 2,500정보는 경지로 첨채재배에 할당했다는 사실 보도와 마찬가지로 서양엥서 사탕무가 프랑스에 소개되고 나폴레옹이 새로운 사탕무재배에 2만8천ha(280(km²):28,000정보)를 투입 할 것을 명령했다는 것과 비교할 때 무산농단지의 신곡농장 한 단위에서 사탕무 첨배 재배지 5,000정보를 투입했다는 것을 작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왜 갈반병과 근절충이 사탕무 재배단지에 발생되었는지 그것에 대한 기후환경문제를 우리는 반드시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이것은 다음번 글에서 말하겠다.조선인이든 아니면 한국인이든 1927년부터 첨채재배를 하기 시작하고 최소한 1938년까지 재배를 했다고 한다면 사탕무 농민들이 주요할 것인데 이쯤에서 궁금하게 생각되는 것은 과연 자본제국국가로 발돋움하던 미국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나 북부에 존재한 농장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 것인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독일로 접어 들어 갔을까 아니면 일본으로 접어 들어 갔을까?1930년대라면 일단 한반도 역사 기준으로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말하고 있다.그렇지만 일제가 우리 눈 앞에서는 본질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서 근원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나 중부에서 첨채재배를 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지금까지 글쓴이는 이를 밝혀 사실을 확인을 하고 있는 중이 아닌가.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영토를 제외하고 나머지 전부가 미국 영토라 하면서도 최초의 사탕무 공장은 1870년에 북아메리카대륙의 동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부도 아닌 서부 캘리포니아주의 알바라도(Alvarado)에서 미국설탕무산업의 아버지란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뉴잉글랜드 메인주 설리번(Sullivan)출신의 정치인이었던 에버니저 다이어(Ebenezer Herrick Dyer:1822-1906)에 의해 스탠다드제당회사(Standard Sugar Manufacturing Company)가 설립된 것이 시초라 하고 있다.그도 우여곡절 끝에 결국 성공했다고 하지만 화학자이자 기계공인 그의 아들 에드워드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고 독일에서 사탕무공장을 견학하고 기존시설을 개선하면서 다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유타주에 유타제당회사(Utah Sugar Company)를 설립함으로 인해 사탕무업계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고 하고 있다.이렇게 되자 1914년까지 미국의 사탕무산업은 유럽의 생산업체와 거의 같은 규모로 변모하여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경쟁했다 한다.2차세계대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큰 사탕무 생산지는 캘리포니아, 유타, 네브래스카였고 캘리포니아의 많은 사탕무농민들은 일본계 미국인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미국계 일본인(Japanese Americans)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미국시민이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야기다.그런데 당시 일본인이라고 하지만 조선인이 아니면 한국인 농민일 것이다.1924년에는 일본인을 혐오하는 배일사상에 의해 모든 일본인의 이주를 금지하였다.2차세계대전 중일 때 캘리포니아의 사탕무생산은 아이다 호, 몬타나, 노스다코타, 유타와 같은 내륙으로 이동했고 전쟁 중에 새로운 사탕무 농장이 시작된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은 사탕무 재배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탕무 생산에 익숙한 억류수용소에 있는 일본 노동자를 고용했다고 알려진다.그런데 위 현 사탕무 생산지 중에 유타가 보이지 않는다.2차세계대전까지 사탕수수 생산지 중 유타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현재 생산지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상함이 존재한다.마찬가지로 조선인이나 한국인 사탕무 농민들의 이야기가 지금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다.유타와 서조선, 황해도(黃海道)와 평남(平南)!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에 입각한 것으로 신중국인이나 열도일본인은 자연스럽게 나타내면서도 조선인과 한국인의 존재를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들어내지 않고 완전히 감추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사탕무(Sugar Beet)" rel="tag" target="_blank">사탕무(Sugar Beet)</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첨채(甜菜)" rel="tag" target="_blank">첨채(甜菜)</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베를린과 제네브라(Genevra)" rel="tag" target="_blank">베를린과 제네브라(Genevr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감자당(甘蔗糖)" rel="tag" target="_blank">감자당(甘蔗糖)</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서조선(西朝鮮)북조선(北朝鮮)" rel="tag" target="_blank">서조선(西朝鮮)북조선(北朝鮮)</a>,&nb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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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폭풍 황진(黃塵:dust storm)의 놀라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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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폭풍 황진(黃塵:dust storm)의 놀라운 역사글쓴이:한부울머리말1935년 9월 동아일보가 보도한 조선(朝鮮)의 괴이한 기상현상미국의 1930년대 기온상황가뭄과 북아메리카대륙 먼지폭풍사태1930년대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함경남도 북청은 오클라호마에서 더스트 보올(Dust Bowl)이 발생한 범위 내의 지명이란 역사찾기 결과물과 마무리머리말한반도에 엄청난 먼지폭풍(砂風:dust storm)이 과거 1930년 경에 발생했다고 하면 그대로 믿을 사람이 있을까?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왜냐하면 거대한 먼지폭풍이 발생할 지형과 지리적 여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더군다나 현재 나이가 많이 드신 분이라 할지라도 거의 100동안 한반도 어디에도 경험을 해보지 않았던 중요한 기억이기에 또는 풍문으로도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낯선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역사는 조용히 이런 엄청난 사실이 존재했었다고 말하고 있다.1930년경 한반도가 아닌 곳에 거주하던 우리역사주체들이 지금은 그 기억들이 다 사라지고 없다 하겠지만 분명히 먼지폭풍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여러 면을 통해 정확하게 알리고 있다.먼지폭풍은 사막이나 풀이 자랄 수 없을 만치 매우 건조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 할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인간의 이기심이 커 자연을 배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때문에 사막가까이나 아니면 본래 초원을 갈라 엎은 뒤에 맨 땅이 들어나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지형환경 조건을 충족시키는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그것도 한반도에 거주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지금처럼 역사적으로도 남의 나라 땅이었던 내몽고로부터 날아드는 먼지가 아니라 조선 영토에서 발생하는 먼지폭풍에 대한 것이니 더욱 의아하게생각 할 수 있다.역사적으로 모래먼지 즉 황진(黃塵)이라고 하면 본 블로그 글 “멜론(甜瓜:melon)은 조선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이 최상품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86”에서 비닐하우스(vinyl house)가 없었던 시절, 멜론(甜瓜:melon)이 의주(義州)에서 났다는 사실과 함께 생물학적 근거를 통하여 결국 한반도가 아닌 미국 콜로라도주(Colorado)의 아칸사스 강(Arkansas River) 계곡(Valley)에는 이전부터 멜론이 풍부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과거역사 임진왜란 당시 선조(宣祖,1552-1608,재위:1567-1608)가 한양(漢陽)에서 서진(西進)하여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몽진(蒙塵)한 곳이 의주(義州)라 했던 사실과 비교하여 보았던 것으로 그곳은 여러 기상학적으로 살펴보아도 사막 가까이에 있는 건조한 땅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이를 회진몽복(灰塵蒙覆)의 줄임말인 몽진(蒙塵)또는 몽수풍진(蒙受風塵)이라고 할 수 있었던 만큼 기후환경적으로 반드시 먼지폭풍에 의한 고통스러운 이동이었음을 견지하고 지적했던 것이다. 실제로 콜로라도 서쪽으로는 한반도 2배가 넘는 541,727 (km²)에 달하는 그레이트베이슨(Great Basin)사막이 존재한다.이 의주(義州)를 지금의 한반도 신의주라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지만 근원적으로 한양에서 즉 서울에서 서진(西進)을 하면 황해 바다임에도 서진(西進)했던 곳을 신의주(新義州)라 하니 그야말로 어안이 막히는 이상한 헛소리가 아닐 수가 없다.그렇다면 왜 한반도에 신의주란 지명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분명한 것은 본래의 의주가 아니라 다른 곳에 옮겨지면서 할 수없이 새 신(新)자를 붙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저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지명이 급조되었거나 본래 지명의 의미와 상관없는 곳에 새롭게 지명되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근세기 역사판짜기에 동원된 모든 역사사실들이 이렇듯 쇠사슬에 얽어 메어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야기다.때문에 한반도 역사가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와같은 지명의 변경은 거짓의 역사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이며 의주(義州)를 찾으려면 기후 환경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곳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것으로써 애초부터 이곳이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콜로라도주의 아칸사스 강 계곡가까이에 존재하는 도시라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그곳을 바로 본래의 의주(義州)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글쓴이가 할 수밖에 없다.우리가 지금까지 메론을 참외로 오인하였던 것도 가당찮지만 생물학적 판단으로 첨과 즉 메론(甜瓜:melon)의 근원지 또는 원산지 파악에서 비로소 찾았던 도시가 콜로라도의 주도 덴버(County of Denve)였다는 사실은 역사찾기에 개척같은 사실이다.그렇다면 선조가 1592년 음력 4월 30일에 한성(漢城)을 떠나 서진(西進)하면서 몽진하여 도착한 의주는 바로 덴버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도착한 시점이 바로 이른 초여름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우리 삼한역사 조선역사에서 일찍부터 놀랍게도 먼지폭풍에 대한 사실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알리고 있었지만 자손인 우리가 어리석고 미천하여 이를 바르게 알지 못하였고 엉뚱하게도 자학적인 역사에만 매달리며 부질없이 조상을 원망하고 울부짖는 짓만 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것이 아닐 수 없다.이와같으니 한반도 식민지역사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것이다.실제로 사막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한반도에 엄청난 먼지폭풍(砂風:dust storm)이 발생했다고 하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작된 역사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도 우리가 반성을 해야 한다.하지만 이런 역사사실에서 실제로 한반도 사람들이 거대한 먼지폭풍이 어떤 것인지, 사람의 숨 쉴 구멍은 모두 막아 눈만 내놓고 걷거나 생활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한반도에서야 지금까지 전혀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듯 심각한 환경적 재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실제로 그러한 고통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기에 본질의 역사에서 가볍게 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그러나 역사농단세력들이 아무리 숨기려 하더라도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원칙은 변할 수가 없다.한반도 역사를 추종하는데 이러한 문제들이 들어나는 것은 역사농단세력들에게 매우 귀찮은 것이며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만 이치와 천리를 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을 경고하지 않을 수가 없다.지금의 한반도 사람들의 먼지폭풍이란 의미는 1948년에 만들어진 신중국(新中國)의 내몽고에서 발달한 먼지폭풍이 성장위주의 신중국의 산업찌꺼기 아황산가스, 납, 다이옥신 등 유해 중금속을 싣고 남동풍(南東風)을 타고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곧잘 날아들어 한반도인들을 환경적으로 매우 괴롭히는 것이니 일단 귀찮은 문제가 틀림없겠지만 과거 역사가 말하고 있는 먼지폭풍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는 것이다.1935년 9월 동아일보가 보도한 조선(朝鮮)의 괴이한 기상현상하지만 놀랍게도 현재 네이버사이트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1920년 이후부터 신문발행이 허가된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원본 기사가 캡처되어 공개되고 있는데 바로 뉴스라이브러리 카테고리에는 일제병탄기인 1930년대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먼지폭풍을 말하는 것 같은 기사들이 줄 지어 나타난다. 위 그림을 아래에 풀어 놓았던 것으로 1935년 9월 10일자에 보도된 기사제목이 “괴(怪)!창공(蒼空)에 광란곡(狂亂曲) 열풍(烈風), 조상(早霜), 혹서(酷暑)로 재앙속출(災殃續出)”과 그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1]怪(괴)!蒼空(창공)에狂亂曲(광란곡) 烈風(열풍),早霜(조상),酷暑(혹서)로災殃續出(재앙속출)1935.09.10 동아일보怪(괴)!蒼空(창공)에狂亂曲(광란곡) 烈風(열풍),早霜(조상),酷暑(혹서)로災殃續出(재앙속출) 颱風(태풍),南朝鮮(남조선)에上陸(상륙) 發穗稻作(발수도작)에大被害(대피해) 風圈(풍권)에든地方(지방)은大田以南(대전이남)關釜聯絡船(관부연락선),昨夜(작야)부터缺航(결항) 【부산지국전화】제주도(濟州島(제주도))를 거처온 태풍(颱風(태풍))은 작八(팔)일에 목포(木浦(목포))를 지나 금九(구)일은 대구(大邱(대구)),부산(釜山(부산))간을 횡단통과하리라 한다. 풍속은 十六(십육)메돌로서 상당히 강한 바람인바지금(九日午前十一時(구일오전십일시))의 태풍중심은 거창(居昌(거창))에 잇으며 진주(晋州(진주)),사천(泗川(사천)),하동(河東(하동)),산청(山淸(산청))지방은 이바람 범위안에 들어 피해가 상당히 만흐리라한다.더욱이폭우가 쏟아지는 까닭에 발수(發穗(발수))중에잇는 벼에는 여간한타격이 아니라 한다. 이리하야 현해(玄海(현해))에도 폭풍우로인한 파도가 높으므로 관부연락선(關釜聯絡船(관부연락선))은 작 八(팔)일과금 九(구)일은 결항되고잇다“괴(怪)! 창공(蒼空)에 광란곡(狂亂曲) 열풍(烈風), 조상(早霜), 혹서(酷暑)로 재앙속출(災殃續出)”에서 괴(怪)란 단어에 느낌표(!)까지 동원된 것을 보면 일단 보도하는 기자도 놀라운 현상을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이며 이어 창공 즉 푸른 하늘에서 광란곡의 열풍이라 한 것은 푸른 하늘에서 열풍의 광란곡 같은 현상은 마치 뜨거운 열기를 가득 품으며 광란곡처럼 요동을 치며 열풍바람이 휘몰아치는 괴이한 현상을 그려볼 수 있다.이런 현상이 바로 먼지폭풍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분명 이러한 현상은 한반도에서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의 표현이다.그 다음 단어가 조상(早霜)이라 하였는데 이른 서리를 말하는 것으로 서리는 혹독한 추위가 밀려오기 전에 미리 위기의 상황을 알려 대비하고 준비하라는 자연현상이라면 가을도 아닌 여름에 벌써 서리가 내린다는 것은 한반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써 이로 인해 농작물이 여물기 전이라 특히 상해(霜害)피해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참으로 괴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그리고 그 다음 단어가 바로 혹서(酷暑)이다.광란의 열풍에 열기가 하늘을 찌르고 이른 서리하며 혹서 즉 뜨거운 날씨 탓에 재앙이 속출했다고 하고 있다.이러한 현상의 기상은 보통 그리고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내용을 보면 어마어마할 이야기가 사라지고 없고 다만 대전이남(大田以南)폭풍으로 인해 이삭이 패고 벼를 심고 가꾸어 거두는 일에 피해가 많을 것이란 사실과 관부연락선(關釜聯絡船)이 결항될 것이란 내용뿐이다.이것은 제목에서 이야기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써 괴이한 기상현상의 보도를 빼먹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같은 사실에서 조선에서 당시 심각한 어떤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1935.09.10 일자의 보도에서 동아일보가 빼 먹어버린 보도내용은 어떤 것일까?혹서 즉 당시의 더위는 얼마나 심했던 것일까?생각해보면 글쓴이 역시 지난 70년대까지의 젊은 시절을 떠 올리면 여름이나 겨울, 혹독한 기후에서 느끼는 체감기온은 현재 체감기온과 차이가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러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당시 거의가 못 먹고 헐벗었을 때 이므로 더위와 추위가 오늘날 느끼는 체감온도 보다 더 자극적이고 더 강열했다는 것은 인체가 받아들이는 체감에서 지방질이 없어 더 추위를 느꼈다든지 아니면 덜 입어 보호막이 없었다는 이유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언뜻 생각해보면 생활이 윤택이지면서 추위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약해져 추위나 더위를 더 강하게 느끼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발달된 냉방기구, 또는 보온기구등으로 인해 어지간한 더위와 추위를 별로 힘들지 않게 이겨내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키 어려운 것이다.때문에 현저하게 발달이 된 그래서 사람에게 유익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전기기구나 전열기구가 없었을 당시는 도리 없이 추위나 더위를 그대로 체감으로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헐벗고 배고플 때 기껏 추위를 이겨내는 것은 몸에 두르고 있는 얇은 천을 몇 겹 두르는 정도이거나 짐승가죽정도가 유일했을 것이며 한 여름에는 그늘진 곳을 찾아 자연바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 않는가.그땐 무작정 사람들에게 인내심만 강조되던 때이다.실제로 수치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더위를 이야기할 때 에어컨이 있는 현대보다 1934년 부터 1936년경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한 여름의 무자비한 열기에는 체감 정도가 훨씬 더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먼지폭풍이 발발한 시점에서 1930년 기온통계자료를 보면 더운 열기가 끊기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더위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미국의 1930년대 기온상황1930년대 1936년의 미국기록을 보면 그해 북아메리카대륙의 열파가 가장 심했다고 하고 있다.전자에서 동아일보의 기상현상에서 빼먹어버렸지만 괴이한 열풍의 광란곡 같은 현상, 마치 뜨거운 열기를 가득한 열풍바람이 상상되는 때가 그 전해인 1935년도이다.이때는 1929년에 시작된 사상 최대의 경제 대공황(Depression of 1929)으로 인해 모두가 헐벗었을 때이고 1934년 5월 9일부터 대초원지대에서 시작된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트 보올(Dust Bowl)의 한가운데서 더위가 발생되어 엄청난 인간의 고통과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한마디로 경제적으로 힘들 때 더욱 힘들게 했다는 이야기다.미국의 가뭄은 1933년 11월 11일부터 매우 강한 모래 바람은 상층토를 말려 벗겨져 나갔다고 표현한다.그해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에서 일련의 심각한 모래 바람은 경작지를 망가트렸다.1934년 5월 9일에 시작해서 2일 동안 강한 모래바람은 크고 무거운 언덕을 제거하였고 시카고 어떤 지역에 1,200만 파운드(lb) 즉 5,443(ton)의 먼지를 옮겨놓았다고 되어 있다. 2 일 후 이 같은 폭풍우는 동쪽으로 불어 먼지들이 각 도시에 도착하였는데 클리블랜드(Cleveland), 버팔로(Buffalo), 보스턴, 뉴욕 그리고 워싱턴이다.어쨌던 1930년 초부터 시작된 이러한 열파에 의해 사망자가 5,000명이 넘었고 농작물피해가 심각했으며 이 열풍은 지속되었다고 한다.아마도 위의 동아일보에서 이야기하려고 한 보도내용이 이와같은 상황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미국 전역의 기온이 38°C(100°F)를 넘으며 6월 하순부터 열풍이 시작되었고 중서부 지역은 6월 최고 기온을 기록했으며 더불어 가뭄 상황이 악화되면서 북동부에서는 기온이 90°F(35°C)로 상승하면서 남과 북은 또한 열기와 가뭄이 계속되었다고 한다.그 열기는 캐나다까지 퍼져 가뭄이 전체 대륙을 덮었다고 알려진다.또한 그 해 7월은 기온이 사상최고치를 나타냈었는데 노스다코타주(州) 스틸(Steele)에서는 기온이 121° F(49°C)에 달했으며 이는 노스다코타의 기록이며 오하이오주(州)에서는 기온이 43°C(F110°F)에 이르렀고 이는 1934년 이전 기록과 거의 같았으며 그 외 텍사스, 오클라호마, 캔자스, 알칸사스, 미네소타, 미시간,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펜실베니아, 루이지애나, 네브래스카, 위스콘신, 웨스트 버지니아 및 뉴저지주(州)도 기록적인 고온을 유지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니 가뭄 즉 한발(旱魃)의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가 있다. [미국대륙기온지도]위 지도에도 나타나지만 당시 미국내 기온의 변화상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온타리오주(Ontario州)와 매니토바주(Manitoba州)의 주도에서는 43°C(110°F)이상의 기록적인 최고치를 기록했고 시카고 미드웨이 공항은 1936년 7월 6일부터 17일까지 12일 연속으로 100°F(38°C)이상의 온도를 기록했다. 그 해 여름 일리노이주 마운트 버논(Mount Vernon)의 1936년 8월 12일에서 29일 사이에 여름철 기온이 100°F(38°C)이었다.미국 중서부의 일부방송국은 1936년 7월 25일 네브래스카주(Nebraska州) 링컨(Lincoln)에서 33°C(91°F)와 최저 기온을 32°C(90°F)으로 보도했으며 남서쪽 사막은 1934년 7월의 열파가 진행되는 동안 캔자스주 애티슨(Atchison, Kansas)에서 34°C 이었다고 하고 있다.1936년 8월은 5개 주에서는 가장 뜨거운 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일일 최고 온도가 38°C(100°F)이상의 상태로 오래 동안 겪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가뭄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고 동일한 시간에 일부 주에서도 늘 평균 이상이었다.열파와 가뭄은 대부분 9월에는 끝나 평균상태로 돌아가지만 많은 주는 여전히 평균보다 더 건조하고 뜨거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때문에 많은 농부들의 여름 수확물이 거의 파괴되었고 대지와 잔디밭은 마른 채로 남았다고 자료는 말하고 있다.당시는 오존층의 위협이 극히 적었을 때다.지표면의 온도가 지금처럼 위협을 받거나 자외선이 지표까지 그대로 도달할 위험이 적은 상태라 할 수 있지만 지금 최고 온도를 나타내는 것만큼 기온 상승하여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심각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이렇게 기온이 상승되면서 발생하였던 사태가 바로 공포의 먼지폭풍 바로 그것이다.백과사전을 보면 모래바람(砂風:dust storm)이 자주 발생하는 북미대륙의 로키산맥 동쪽의 산록분지로서 대초원지대(Great Plains)지형이 사발(bowl)모양을 한데서 비롯되어 더스트 보울(dust bowl)이라고 하는데 그것에 대한 주요원인으로 남북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아 밀(小麥:Wheat)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농부들은 약 11만(km²)에 달하는 새로운 곡물지대를 확보했고 1930년이 되자 밀 생산량은 10년 전에 비해 3배가량 증가하면서 그것과 비례하여 시오트(Sea Oats:Buffalo Grass) 즉 버팔로그레스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1934년 봄이 왔을 때 연례적인 가뭄기간 동안, 엄청난 규모의 먼지 폭풍이 형성되었다고 알려진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역사에서 황진(黃塵)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바로 임진왜란 시 선조가 당한 몽진의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가뭄과 북아메리카대륙의 먼지폭풍 사태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먼지폭풍에 의한 피해는 1930년 전반부터 특히 1938년까지 이어졌다한다.동시에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街)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발단된 대공황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그 여파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경기불황과 함께 밀어닥친 피해에서 사람들에게 와 닿는 고통이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먼지폭풍에 의한 피해가 이를 더욱 가중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기상학적으로 뇌우(雷雨:thunderstorm)유출 및 돌풍전선(突風前線:gust front)과 연관되어 나타날 수 있는 더운 먼지 또는 먼지폭풍(duststorm)등으로 불리는 기상상황은 1934년 봄에 먼지 폭풍이 휩쓸고 지나 간 후 대평원에 거주하던 35만명(萬名)이상의 주민들이 짐을 챙겨 서부로 북부로 이동하게 했을 정도라고 알려진다.더러운 삼십(Dirty Thirties)이라고 하는 말은 1930년대 더스트 보울(Dust Bowl)이 약 10 년간 지속되었고 1930년에서 1936년까지 미국과 캐나다 대초원 땅에 심각한 농업피해를 야기한 심한 폭풍의 시기였기 때문에 농사자체를 생각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천막 집- 텍사스 출신의 가뭄 피난민들이 캘리포니아 근처 엑세터(California near Exeter에 진입. 가족7명] 더러운 이란 말은 당시 가뭄과 먼지폭풍으로 인하여 사람들 몸메 번지가 들어 붙어 까맣게 더러워짐에도 물이 없어 씻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니 일반인들에게 그러한 기후환경이 주는 삶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큰 것이었을 것이다.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인들이 초췌한 환경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한발과 함께 어려운 시기라 할 수 있는 1930년과 1940년 사이에 대략 350만명의 사람들이 대초원들 밖으로 이동했다.1934년 5월 9일부터 대초원지대에서 시작된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트 보올(Dust Bowl)시작된 1년동안 86,000명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는데 이 숫자는 1849년 골드러쉬(Gold rush)동안에 이주자들 수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이 심각성을 반영한다.이곳의 이주자들은 오클라호마, 아칸소, 미주리, 아이오와, 네브라스카(Nebraska), 캔자스, 텍사스(Texas), 콜로라도에서 자신들의 농장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북부지역은 상대적으로 덜 하였지만 남부평원은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고 한다.1930년에 동부에서 처음 가뭄으로 타격을 입었고 이듬해부터 서부(西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이에 더하여 1934년에는 대평원에 사막화가 진행되었는데 대공황이 이로 인해 더 길어 졌다는 것을 자료들은 하나같이 말하고 있다.특히 미국 중남부에 위치한 오클라호마주(Oklahoma州)는 토양이 말라버려 먼지구름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검은 눈보라(Black Blizzards) 혹은 블랙 롤러(Black Rollers)라 하였을 정도이니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다.[한눈으로 볼 수 있는 국가 가뭄 상황:THE NATION'S DROUGHT SITUATION 'AT A GL'ANCE]가장 피해를 많이 받은 지역으로 대평원(Great Plains)으로써 오클라호마(Oklahoma), 텍사스 펀핸들(Texas Panhandle), 콜로라도(Colorado)와 뉴멕시코(New Mexico)을 중심으로 약 1억(億)에이크(100 million acres) 즉 404,685(km²)가 넘는다고 하였으니 한반도(韓半島)넓이가 227,943.05(km²)이라면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는데 한반도 두 배정도의 피해 지역이었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먼지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창이 없는 모자를 쓰고 콧구멍과 얼굴을 바셀린을 묶은 손수건으로 덮어 먼지가 덮힌 황무지에서 먼지폭풍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썼다.1934년 5월 11일, 심한 먼지폭풍으로 북아메리카대륙 동해안까지 3억 4천만톤(340,000,000t)이상의 먼지가 날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뉴욕타임지(New York Times)는 먼지가 "뉴욕 시민들의 눈물과 목구멍을 막았다"하였고 보스톤과 애틀랜타까지 먼지는 날아갔으며, 심지어 몇 백 마일(mile) 즉 적어도[4~500(km)]떨어진 해상에 운행하는 선박 갑판에서도 먼지를 보았다고 한다.이 먼지폭풍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수백만(萬)명의 농민들이 땅을 포기하게 했고 특히 텍사스와 오클라호마(Oklahoma)의 주민 50만(萬)명이 집을 잃었다고 하였으며 이 지역의 인구 4분의 1이 피해지역을 떠나기 위해 자신의 재신을 챙겨 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으며 수치가 장확하지 않겠지만 20만(萬)명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고 알려지는데 오클라호마에서 왔다고 하여 이들을 오키(Okies)라고 불렀다고 한다.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이주민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대도시 근처에 판잣집과 장막을 세우고 농업을 포기하면서 버려둔 부자재로 만든 집에는 배관 공사를 할 수 없어 부족한 전기와 오염 된 물, 쓰레기와 폐기물 등으로 종종 장티푸스, 말라리아, 천연두 및 결핵까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아마도 서부쪽으로 이동한 주민들은 모두 이와같은 처지이었을 것임을 알 수가 있다.이런 식의 가난에 시달린 이민자들로 가득 찬 농촌 캠프가 급기야 시골을 점령했고 그것을 좋아할 리가 만무한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은 법률가들로 하여금 그들을 해산 시키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이것에 효과가 없자 때로는 폭력이 난무하면서 이민자들을 폭행하고 그들의 판잣집을 불태우는 등 테러가 다반사로 발생하였다.만약 이와같이 주민의 결속력이 극도로 와해된다면 어떤 특별한 역사관이나 국가관이 버틸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이 당시 들어나지 않는 역사존재가 되었지만 만약 이곳에 있었던 조선인이나 한국인들의 처지는 어땠을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이렇게 자연재해로 인해 피난 한 대평원의 주민 특히 캔자스와 오클라호마 주민들은 먼지에 의해 병이 나기 시작하면서 폐렴과 영양실조로 점차 사망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어 어떤 구성원이든 소멸되는 형태가 나타난다.앞에서 언급했지만 먼지폭풍의 극단적 피해지역이 오크라호마(Oklahoma), 아칸소(Arkansas), 미주리(Missouri), 아이오와(Iowa), 네브래스카(Nebraska), 캔자스(Kansas), 텍사스(Texas), 콜로라도(Colorado), 더 하여 뉴멕시코(New Mexico)로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서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다.미국 역사상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인구가 대이동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고 하였으며 농사를 망쳐 은행 빚을 갚지 못한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려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형태가 계속되었다고 알려진다.아메리카 원주민 말로 ‘와이오밍’은 대평원이라는 뜻이다. 대평원은 대륙 가운데 위치한 충청(忠淸)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지금까지 살펴본 재해들은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훼손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재해로써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드는 아픈 역사인 것이 틀림없다.이때 조선인이나 한국인들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나 있었을까?일제식민지 기간이니 오죽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거의 내팽겨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미국의 와이오밍 같은 지역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평원을 뜻하는 의미 하듯이 척박한 땅이었지만 그나마 사막화를 막은 것은 뿌리가 깊은 여러해살이풀이 땅을 뒤덮고 있어서인데 갑자기 남북전쟁과 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수요가 급증한 옥수수와 밀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갈아엎자 대평원의 생태 균형이 깨져버린 결과라고 하기에는 피해가 너무 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30년대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그렇다면 이러한 한발과 먼지폭풍이 한꺼번에 겹쳐 발생한 상황에 중심에서 찾아야 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어떻게 이를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그것의 실마리는 바로 1920년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동아일보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안타깝지만 사실에 접근 할 수 있는 자료는 단지 이것 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가 이토록 빈약한 것임을 새삼알게 하는 것이다.서두에 게시한 1935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보도가 1934년 5월 9일부터 대초원지대에서 시작된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트 보올(Dust Bowl)의 발생일자와 약간의 시간 차이가 있다 하지만 1930년 전반에 걸쳐 발생한 기후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전혀 비교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1935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보도는 내용면에서 상당한 보도사실이 누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제목과 전혀 다른 내용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명확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먼지폭풍이 발생하는 현상과 같은 기사사실의 제목이라 할 수 있어 실제로 북아메리카대륙 정 가운데서 발생한 가뭄에 대한 당시 동아일보에서 받아 쓴 기사가 아닌가 하는 것이며 1930년대의 광란의 기후와 비교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당시에 조선 영토내에서 발생한 심각한 기상상황을 자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독자들께서도 이해 하실 것이다.동아일보의 보도 사실만으로 이 모든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마치 바늘을 찾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세계삼한역사찾기란 명제에서 이 같은 글쓴이의 무모한 시도는 그나마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서두에 언급한 것이지만 네이버사이트, 뉴스라이브러리에 나타난 동아일보기사 자료가 비록 일제강점기란 압제란 역사사실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 것임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물론 당시에 사실적인 보도라고 하겠지만 동아일보가 일제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보도를 완벽하게 처리 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100%의 진실을 기대할 수 없다 하겠지만 역사찾기에 관한 궁금증만은 해소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없지 않다.그러나 당시 동아일보 역시 받아 쓴 보도라 하고 일편 걱정스럽다는 것은 이러한 글쓴이의 역사찾기가 대체로 정확했다 하더라도 1945년 미국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존 보도자료가 다시 수정되거나 왜곡될 수 있는 어떠한 조치가 가해 졌을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우려스럽다 하는 것이다.대체로 미국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당시 상황등과 동아일보가 같은 시기에 보도한 기사내용에서 거의 일치하는 문맥과 제반 사실들이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만은 구태어 부정하고 싶지 않는 것이다.“1935.09.10 이라 보도 제목인 “괴(怪)! 창공(蒼空)에 광란곡(狂亂曲) 열풍(烈風), 조상(早霜), 혹서(酷暑)로 재앙속출(災殃續出)”과 같은 심각성의 한발사태에 따른 당시 상황설명의 보도와 주민들의 고통에 따른 모습의 보도는 당시 북아메리카대륙 자료와 거의 일치하는 보도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어떻게 이런 똑같은 기후상황이 한반도와 북아메리카대륙 동시에 발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그래서 1930년 가뭄의 발생상황과 그로인한 피해상왕등의 보도를 묶어 다음과 같이 게시하는 것이다.함경남도 북청은 오클라호마에서 더스트 보올(Dust Bowl)이 발생한 범위 내의 지명이란 역사찾기 결과물과 마무리위 표는 동아일보 한발의 대한 보도기사를 종합적으로 시간대별로 발췌하였으며 이것과 명확하게 비교하거나 사실적 접근이 가능한 북아메리카대륙 한발과 먼지폭풍에 대한 사실들을 비교분석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가뭄은 표[NO:A2]1930년부터 축적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동아일보 조선사회면에 등장하는 가뭄 즉 한발에 대한 보도 분석에서 거의 같은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면이 1932년부터 나타나고 있음을 위 보도기사 명세서 표[NO:1]기사에 완도(莞島)에서 한발(旱魃)로 인하여 음료수 즉 식수가 부족하여 십리나 물 길러 다녀야 했다고 기사화되었으며 표[NO:2]기사는 대전 및 충청남도 전도 그리고 보은과 아산등에서 앙판(秧坂)은 균열(龜裂)이 되어 충청남도 전도의 7할 이상이 이앙을 중단했다 하였으며 때문에 맥령(麥嶺) 즉 보리고개조차 희망이 없어져 전멸상태임을 알리고 있으며 1933년 7월 26일 표[NO:3]기사에는 천안(天安)에서 한발(旱魃)이 발생하였는데 8년이래 이와같은 경우가 처음으로 수은주가 화씨100 도 즉 섭씨 38°C(100°F)로 20여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보도되고 있는데 또한 미국의 가뭄도 표[NO:A1]1933년 11월 11일부터 매우 강한 모래바람은 상층토를 말려 벗겨져 나갔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이와같은 상황이 발생되려면 동아일보 보도와 같은 수은주가 지속하면서 사전에 유지되어야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먼지폭풍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원인 부터 거의 상황들이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의 글 소제 "미국의 1930년대 기온상황"에서 잘 설명했듯이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트 보올(Dust Bowl)의 한가운데는 이와같은 무서운 더위가 지속적으로 발생되었음을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표[NO:A3]1934년 5월 9일부터 대초원지대에서 시작된 먼지폭풍, 모래바람(砂風:dust storm) 즉 더스트보올(Dust Bowl)의 한가운데서 더위가 발생되어 엄청난 인간의 고통과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마찬가지로 동아일보보도를 보면 표[NO:4]에 1934년 5월 30일 즉 약 20일 후 상황의보도임을 알 수 있는데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괴천후(怪天候)가 一個月(일개월)동안 계속되면서 전혀 햇빛을 볼 수가 없어 흉년 징조가 보였다고 하고 있고 1개월동안 매일 담천(曇天) 즉 구름이 하늘을 가리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엄청난 먼지구름, 즉 검은 눈보라(Black Blizzards) 혹은 블랙 롤러(Black Rollers)라 표현 한 것이다.즉 함경남도 북청(北靑)은 검은 눈보라(Black Blizzards) 혹은 블랙 롤러(Black Rollers)가 발생했다고 하는 북아메리카대륙 중남부 오클라호마주나 대평원의 중심이 되었던 더스트 보올(Dust Bowl) 범위 내에 존재한 지명이라는 사실이다.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긴가.아마도 한반도 사람들은 기절초풍할 이야기다.그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위 표에 보면 이와 관련된 사실들이 마치 현장을 묘사하듯 보도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표[NO:5]1934.06.21충청남도 아산(牙山)지방은 작년 그러니 1933년 가을 부터 우량이 부족하여 모내기에 곤란하였고 식수까지 결핍되어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표[NO:6] 1934.06.23 보도내용은 폭서가 전조선(全朝鮮)에 밀어 닥쳤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연일계속되는 불볕으로 철없이 뛰어오르는 수은주라 하면서 광분하는 수은주라 하였을 정도로 도로의 "아스팔트"는 힘없이 녹아지고 들판의 곡식은 말라죽게 되었다고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기후현상이 전조선(全朝鮮)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임을 알 수가 있다.표[NO:7]은 거제 통영에서는 화씨100도가 오르내리는 한발(旱魃)에 의해 염병(染病) 즉 장질부사가 만연함을 알리고 있으며 같은 날 보도 표[NO:8]경상나도 함양군에는 한발(旱魃)로 인해 농가 14호가 소실되어 대화(大火)를 알리고 있다.1934년의 무서운 열풍은 대조선이나 북아메리카대륙이나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표[NO:A4]미국자료를 보면 이듬해인 1935년 4월 14일에 발생한 검은 일요일(Black Sunday)이라는 것은 더스트보울(Dust Bowl)의 일환인 미국의 대초원지역에서 3억톤(ton)의 표토를 날려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먼지폭풍인데 처음 텍사스북부의 스피어 먼(Spearman)에 접근하여 피해를 낳기 시작하면서부터 1935년 4월 14일 오후, 그레이트플레인스(Great Plains)대초원의 거주자들이 이 먼지폭풍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고 이 폭풍은 오클라호마 팬핸들(Oklahoma Panhandle)과 오클라호마 북서부(Northwestern Oklahoma)를 먼저 휩쓸었으며 이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비버(Beaver)를 오후4시경에 치고, 이어 보이즈 시티(Boise City)를 오후5시15분에, 텍사스 아마릴로(Amarillo, Texas)를 오후7시 20분에 쳐 피해를 낳았다고 알려진다.이 결과 역시 오클라호마와 텍사스가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폭풍의 영향은 물론 다른 주변 지역까지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와같은 당시 현장 보도는 덴버(Denver, Colorado)소재 AP통신사(Associated Press)기자 로버트 가이거(Robert E. Geiger)에 의해서이며 그날 오클라호마 주 보이시(Boise City)에 있었고 그에 의해 블랙선데이(Black Sunday)와 더스트보올(Dust Bowl)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지고 있다.그렇다면 이 동시간의 동아일보의 보도는 어땠을지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위 북아메리카대륙의 사건과 동일하다고 판단 할 수 있는 동아일보 보도 기사는 찾을 수가 없다.위 북아메리카대륙 검은일요일 먼지폭풍 보다 하루이틀 전의 상황은 표[NO:9]1935.04.10보도에는 함경남도내에 장기한발에 의해 산화(山火)가 빈발(頻發)하고 있다는 사실과 표[NO:10]김소월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한발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등을 알 수 있고 표[NO:11]1935.04.23일자 신의주(新義州)발보도는 서조선(西朝鮮)에 흔하지 않는 한발(旱魃)에 의해 곳곳에서 대산화(大山火)가 빈발하다는 것이다.그러나 표[NO:12]1935.04.24일자보도를 보면 함경남도 영흥(永興)에 한발(旱魃)과 폭풍(暴風)에 의해 곡식과 묘자리, 꽃이 시들고 마르는 형상이 지속되며 그러니 4월 20일부터 돌연 내습한 폭풍은 3.4일 계속되어 이미 발아한 곡묘가 고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먼지폭풍에 의해 토양이 비산(飛散)즉 날아서 흩어진다 하였으니 북아메리카대륙 검은일요일의 닉네임을 가진 폭풍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표[NO:13]똑같은 시기 1935.04.25 일자의 평안남도 신안주(新安州)보도를 보면 한발(旱魃)이 너무나도 심해 청천강(淸川江)상류가 고갈되어 목재운송이 막히고 동강수를 이용하는 관개사업도 위협을 받는다 하였다.표[NO:14]1935.04.25일자 황해도(黃海道) 황주(黃州)보도에는 해서지방(海西地方)에도 한발(旱魃)이 계속되었다 하고 있으며 놀랍게도 적벽강(赤壁江)의 큰 강물도 고갈이 되어 강바닥을 육지같이 걸어다니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고 있다.우리는 이 대목에서 섣부르게 넘어갈 수 없다.바로 동아시아대륙 호북성의 양자강 강변 황강(黃崗)시 황주적벽(黃州赤壁)이라 하기도 하고 동파적벽(東坡赤壁)이라고 불리는 황주(黃州)를 말하고 있음이다.어찌한가.이렇게 따져 들어가니 놀랄일이 한 둘이 아니다.본 블로그 글 "조선 철갑상어알젓 캐비어(Cavia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7 "에서 노스다코타주 리치랜드카운티의 와페턴(Wahpeton)까지 이어지는 북쪽 레드강(Red river:캐나다와 미국국경경계선지점)에서 흔히들 중국역사처럼 인식하고 있는 적벽(赤壁)을 찾을 수 있다 하였고 캐나다 민요 홍하의 골짜기(Red River Valley)의 무대가 위니펙 호수(Winnipeg Lake)란 사실에서 미네소타강으로 들어가는 상류지역임을 알 수 있었는데 여기가 곧 적벽(赤壁)을 연상케 한다는 사실까지 밝혀었다호북성의 양자강 강변 황강(黃崗)시 황주적벽(黃州赤壁)이라 함은 분명 이곳을 지칭했을 것이다.그러나 이 황주의 황해도 위치가 혼란스러운 것이 틀림없어 정확한 위치는 다시 한번 따져 볼 일이다.또 표[NO:15]1935.04.25 같은 일자 황해도(黃海道) 풍천(豊川)보도에도 동일한 구역 해서(海西)일대에 비가오지 않아 대소맥흉(大小麥凶) 즉 밀 흉년을 이야기 하고 있다.한반도 황해도에 밀 흉년이라니 말이 되는가.한반도에는 애초부터 밀 생산이 되지 않았던 지역이다.표[NO:16]1935.04.26 평안북도 용천(龍川)에도 해빙 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비가 내리지 아니하는 한발이라 식수가 고갈되었다고 하였으며 표[NO:17]보도 역시 함경남도의 장기간(長期間)의 한발(旱魃)끝에 속출(續出)하는 산화(山火)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표[NO:18]청천강연안일대(淸川江沿岸一帶)에 검은일요일이 발생된 16일째 되는 4.30일자 보도는 작년 같은 기간에서 부터 한발(旱魃)이 계속하여 토질이 너무나 건조하게 되었으며 도리어 폭풍만 연일계속되어 전답이 전부 초토화되었다고 하고 있다.한반도 황해도에 연일 폭풍이 계속되었다 하는데 도대체 폭풍이 황해도만 발생했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그렇지 않는가.동서 허리가 짧은 한반도에서 발생할 이야기가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다.표[NO:19]1935.05.10일자 평안북도 신의주발 보도에는 평안북도는 수십년(十數年)이래 처음으로 개천이 고갈되어 못물도 부족할 정도로 한발이 심하고 매일같이 강풍이 불어 이런 현상의 춘한(春旱)은 수십년동안 없었던 상황이며 이와같은 지역으로 함경남도지방인 군선(群仙), 평안남도 안주(安州), 경상북도 김천, 영동(永同)등으로 나타난다.이렇게 흔한지 않는 봄 가뭄이 어떻게 한반도와 동시에 북아메리카대륙에도 발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또 위 표에 특이한 것이 있는데 표[NO:20]1935.05.11일자 함경남도 함흥(咸興), 안변, 풍산발에 의하면 남북조선에 걸쳐 한발이 계속되었다 하면서 1935년 2월이후로 하늘도 무심하야 기다리는 비는 내리지않고 매일같이 모진바람만 계속되는 괴천후(怪天候)라 하였으며 이를 흥진만장이라 하였지만 기사가 오타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감추려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흥진만장이 아니라 황진만장(黃塵萬丈)의 세계라는 것인데 하늘 높이 치솟는 누런빛의 흙먼지 현상을 비유한 것으로 중국고사에 나오는 말이다.이것이 아마도 결정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이 황진만장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다.남북조선(南北朝鮮)에 걸쳐 일어난 현상이라 하고 특히 함경남도 함흥(咸興)에서 이러한 보도가 나왔다는 것은 검은일요일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이외 같은 날 보도로 평안북도 백마(白馬), 전라북도 신태인((新泰仁), 평안북도 방현(方峴)등지에서 하지도 지나간지 여러날이 되어도 한발은 계속하고 폭풍만 더 심하여 경작은 전혀할 수없게 되어 폐농 지경이라 하고 주린 창자를 초근목피로 채워가면서 겨우 보리 고개를 넘어가는 농민에게 큰 걱정이다 하였다.표[NO:24]1935.05.11보도 역시 황해도 재령군(載寧郡)을 비롯하여 16개군에도 금년 1935년 1월경부터 비가오지 아니하야 농민들은 푸른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하였고 표[NO:25]와 표[NO:26]을 보아도 평북지방(平北地方)에 한발(旱魃)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과 저수량이 계속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등을 알리고 지속적을 산불이 계속 발생한다는 보도를 볼 수가 있다. 표[NO:27]과 표[NO:28]를 보면 남도(南道)에는 한발로 인해 농민간의 물싸움이 일어나고 특히 김제평야, 만경평야, 옥구평야, 전주평야, 나주평야등 한발의 피해로 울거나 외치는 대중이 백만(1,000,000명)이라 하였으며 온 산하가 흉작이라 대겸지옥(大歉地獄) 즉 흉년에 의한 지옥이라 하고 있다.조선의 쌀 총생산량(朝鮮米總生產量)의 3분지1 이상을 생산하여 조선이 자랑하는 곡창(糓倉)지대가 이제 흉년(凶年)으로 인해 농작물(農作物)을 거둘 것이 없게 된 땅이 되었다고 하였다.표[NO:29]는 이러한 극도의 곤란한 기후환경에 의해 농사를 망친 농민이 비관하여 열차에 치여 자살한 사실까지 실로 끔찍한 장면들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이다.마지막으로 첨부할 이야기는 위 투신자살한 사람의 이름이 아주 난해하다.한국인의 이름이 아니라 사택풍차(寺澤豊次) 53세라 하였는데 분명 일본인의 이름이다.그런데도 기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지극히 상식적으로 굳이 구분하지도 않았다. 왜일까?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창씨개명에 의한 것이라 그냥 뭉개버릴 것인가. 아니면 당시에 일반 대중들은 조선인(朝鮮人)이라고 굳이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일반적인 사항이라는 것일까.지난 30년대 일제탄압아래 존재했던 사회일반사실들이 이처럼 궁금할 수밖에 없다.조선인이라 대명사에는 일본인도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다.기상상황의 이 모든 보도들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미국자료처럼 1934년 5월 9일에 이미 마를 때로 말라 있던 대초원의 상층토가 벗겨지며 모래폭풍(Dust Bowl)을 일으킨 사실이 정말로 조선(朝鮮)땅 한 가운데서 벌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에 더하여 1년 후 1935년 4월 14일 텍사스북부의 스피어 먼(Spearman)에 접근하면서 발생한 블랙선데이(Black Sunday)역시 조선(朝鮮)땅에서 발생한 것이 과장 없는 정확한 사실이라면 그래서 정말로 조선인(朝鮮人)들에게 다시없는 고통스럽고 끔찍했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사태였다면 결국 이런 끔찍한 기후재앙이 발생한 정확한 위치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한반도역사가 고집하는 한반도이었는지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하는지를 독자여러분께서는 이 시점에서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그래도 조금은 의심이 있다는 하는 독자가 있다면 끝으로 글쓴이가 위에 게시한 사진 그림을 유심히 볼 필요성이 있다.바로 1807년에 설립했다고 하는 미국상무부 산하의 정부기관인 미국해양대기관리처(美國海洋大氣管理處)소속 국제종합해양기상센터(ICOADS)에서 돌출한 지구 표면 온도 데이터인데 확장 된 해수면 온도 버전4(Extended Reconstructed Sea Surface Temperature Version4(ERSST.v4))라 하는 것이다.놀랍게도 문제의 먼지폭풍, 더스트보올(Dust Bowl)사태가 발생한 시기인 1934년 11월의 섭씨온도 기준(℃)으로 해수면 기온의 변이[SST(Sea Surface Temperature)anomalies]상태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1.5~3.5(℃)범위의 현상이 몇 일 간 지속된다면 엘니뇨의 특성으로 간주되지만 과학자의 의견은 열대 태평양의 기온이 정상에 가깝다는 것이며 서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낮다는 것을 종합하여도 엘니뇨(El Niño)나 라니야(La Niña)상태가 아니라는 결론이다.1930년대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가뭄과 먼지폭풍의 기후현상에서 당시의 기후체제가 알래스카 근처의 고진폭순환기형(high-amplitude circulation anomalies near Alaska)에 가깝다는 과학자들의 의견도 있고 또 한편으론 동태평양의 해수면의 온도가 높고 대서양의 해수면 온도가 과하게 높아 북아메리카대륙에는 거대한 고기압이 형성되고 겨울이 끝나면서 고기압은 서쪽으로 이동하였으며 미국 서부해안에 자리 잡았던 고기압으로 습한 날씨가 사라졌고 전통적으로 중앙 평원에 내리는 봄과 여름강우를 간섭했다고 하였으므로 결국 가뭄과 동반하여 먼지구름이 발생하면서 비구름의 형성을 돕는 증발을 막기 때문에 먼지구름의 존재 자체가 강우를 줄이는데 일조한 것이라고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NASA and the Lamont-Doherty Earth Observatory have discovered that the 1934 drought was 30% more severe than the runner-up drought (in 1580) and extended across 71.6% of western North America.미항공우주국(NASA)과 콜롬비아대학 라몽도 헤르티 지구 관측소(Lamont-Doherty Earth Observatory)과학자들은 1934년 가뭄이 1580년에 발생했던 두 번째로 심한 가뭄보다 30% 더 강했으며 북미서부지역의 71.6%로 확장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기후학적으로 이보다 더 세세한 것은 역사에 관심이 많은 기상학자에게 넘길 수밖에 없으나 그렇더라도 한반도와 밀접한 우리 입장에서는 대륙 간의 해수면온도의 현격한 차이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위 게시 그림에서 한반도(A)해수면 온도 상황과 북아메리카대륙(B)해수면 온도 상황을 비교할 수 있고 해수면의 온도의 영향으로 육지의 기압이 변이된다고 할 때 한반도는 낮은 기온(푸른색)의 기압이 흐름을 알 수 있고 반면 북아메리카대륙의 기압의 흐름은 더운 공기(붉은색)가 흐름을 알 수 있다.해수면 온도가 상승하면 고기압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와같은 기후학적인 이론들은 1934년에 동아일보가 보도한 한발의 사태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먼지폭풍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조선인에게 큰 피해를 준 사실이 정확하게 세계삼한역사관을 뒷받침하는 것이다.동아일보의 한발과 먼지폭풍에 관한 보도는 한반도에서 발생한 사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결론이다.그렇다면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사태발생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겠는가.두 말할 필요도 없이 북아메리카대륙이다.이것이 바로 글쓴이가 한결같이 주창할 수밖에 없는 세계삼한역사관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가뭄" rel="tag" target="_blank">가뭄</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몽진(蒙塵)" rel="tag" target="_blank">몽진(蒙塵)</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황진(黃塵)" rel="tag" target="_blank">황진(黃塵)</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먼지폭풍(砂風:dust storm)" rel="tag" target="_blank">먼지폭풍(砂風:dust storm)</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더스트 보올(Dust Bowl)" rel="tag" target="_blank">더스트 보올(Dust Bowl)</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열풍(烈風)" rel="tag" target="_blank">열풍(烈風)</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조상(早霜)" rel="tag" target="_blank">조상(早霜)</a>,&nb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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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미(khoomei)의 역사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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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미(khoomei)의 역사적 의미 글쓴이:한부울 머리말흐미(khoomei)란 창법구황금(口簧琴)이라 하는 주즈하프미국 서부영화와 흐미의 관계서부개척사와 조선역사충돌마무리(몽고와 멕시코) 머리말 인간의 목소리와 악기음으로 구성되는 음악은 본래 신(神)을 부르는 행위라 했다. 우리나라의 의식음악(儀式音樂)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과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목소리를 이용하여 내는 소리가 노래가 되었다는 것은 본래 신(神)을 부르는 행위로써 주술적 의미가 강한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소리의 기능은 노동이나 인간 고통에 대한 승화차원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민요이다. 그러한 이유로 목소리가 악기와 동일하게 취급되거나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악기가 없이 소리 내는 농요(農謠), 어로요(漁撈謠)는 추임새가 반주 역할을 했다. 점차 악기가 발전함에 따라 굳이 목소리를 세밀하게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겠지만 대신 음악의 여러 장르가 새롭게 생성되고 그것에 맞춰 수많은 현대가수들이 탄생하였으며 그들의 독창적인 음악성에 환호하는 세대도 확대되어 이제는 남녀노소 누구라도 현대음악에 심취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바탕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변해 노래를 굳이 신(神)을 부르는 소리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대중문화 밑바탕에는 이러한 정령의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1936년 빌보드 차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수라고 하기 보단 창극이나 오페라극단에서 소리광대이며 가극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하였고 각종 독특한 소리기법들에서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판소리창법이나 이탈리아의 벨칸토(Bel canto)창법 등이 탄생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리를 잘하는 사람을 소리꾼이라고 하는데 판소리의 창법이 주는 호소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세계 어떤 가수라 할지라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기묘한 발성법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 아닐 수가 없다. 도대체 사람이 낼 수 있는 목소리 기법의 기능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그렇지만 판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소리기법등장에 놀랄 수밖에 없는데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바로 몽골 투바족(Tuvans:Tuva)의 흐미(khoomei)의 발성법이다. 이 흐미의 주요한 발성법 세 종류의 기괴한 소리를 들어보면 판소리에서 찾을 수 없는 마치 신(神)을 부르는 듯한 독특한 소리에 실로 놀라지 않을 수 가 없는 인간의 능력을 감탄해 마지 않는 것이다. 이 소리는 정말 어디선가 꼭꼭 숨어 있는 신(神)을 찾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발성법임을 느끼게 했던 것이며 소름이 돋았을 정도로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인간이 어떻게 그러한 기괴하고 이상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나날을 지나며 인내하면서 엄청난 연습이 없으면 불가능할 창법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우리에게도 대중적인 문화역사가 풍부했던 것은 틀림없다. 각 지방의 민요들이 있는데 서울경기를 중심으로 하는 경기민요(京畿民謠),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도민요(南道民謠),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지역에는 동부민요(東部民謠), 황해도와 평안도지방의 서도민요(西道民謠)등으로 확실하게 구분되고 있으며 이를 뒤 받쳐 주던 전통악기로는 해금, 가야금, 대금, 소금, 단소, 피리, 태평소등이 있으며 네 군데 민요를 소화하는 소리꾼들이 만들어내는 특이한 창법들도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각 창법을 보며 웅장하면서 호탕한 소리인 우조[羽調]를 많이 사용하고 발성초(發聲初)가 진중하다는 동편제(東便制)가 있고 슬픈 계면조의 노래가 대부분으로써 정교한 시김새(꾸밈음)를 사용하고, 가벼운 발성으로 일관하는 서편제(西便制)가 있다 하였고, 경기 남부와 충청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드름이 많고 노래라기보다는 글을 읽 듯하는 중고제(中高制)와 씩씩하고 호탕한 느낌을 주는 호걸제(豪傑制)가 있다고 하여 이러한 창법들은 모두 독창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남도민요의 특징에서 음(音)이 옥타브 따라 내려올 때 눌러 내거나, 흘러내리거나, 굴리는 소리를 자유스럽게 구사함으로써 슬픈 감정을 자아내게 하며, 혹은 그러한 시김새가 구성진 맛을 나타내는 것처럼 소리꾼들이 목으로 만들어내는 창법은 매우 다양했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이 판소리의 오래된 창법이라고 이름 한다. 이 경이로운 창법들은 판소리 소리꾼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기능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광대소리꾼이 아닌 명창(名唱)이라 귀하게 대접하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예능 보유자'인 인간문화재로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우리나라의 대중적 문화측면에서 간단하게 살펴본 것이기는 하나 독특한 창법을 특징으로 하는 판소리가 어쩌면 몽골 투바족(Tuvans:Tuva)의 ‘흐미(khoomei)’와 비교하여 볼 수 있는 역사성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가 없지 않다. 흐미(khoomei)란 창법 판소리 보다 훨씬 주술적인 의미가 강한 ‘흐미’가 세계삼한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자. ‘흐미’를 우리말로 보면 조금의 감동이나 놀라거나 찔릴때 쓰는 ‘아이구’ 구어 ‘흐미’라 하는 전라도사투리처럼도 들리지만 동일한 의미인지는 아직은 알기 힘든다. 그러나 어문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산스크리트어가 우리말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토속사투리와 흡사하다는 주장을 인용할 때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한다.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흐미'의 어의는 본래 신을 찬미하는 감탄조에 따른 명칭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흐미’에 대해 설명한 백과사전을 보면 일반적으로 회메이, 후미라 하고 투바어(Хөөмей)로 회메이, 몽골어(Хөөмий)로 호미, 러시아어(Хоомей)로 호메이라고 하는데 몽골족, 투바공화국의 전통 음악의 일종인 목으로 하는 소리(노래)라고 정리되어 있으며 영어로는 회메이(khoomei)라고 쓴다. 이것의 창법의 특징은 마치 바위들 사이에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느낌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사물과 현상에는 정령(精靈), 즉 영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인 힘 또는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정령신앙(精靈信仰:Animism)을 나타내는 목소리로 알려진다. 자연이 내는 소리를 인간이 흉내 내는 소리(Sound mimesis in various cultures)인 것이다. 투바(Tuvans:Tuva)의 목소리 창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회메이는 낮은 목소리에 신디사이저 테라민(theremin)이 같이 연주하는 것과 같은 창법의 한 가지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목소리 전부를 아울러서 칭하는 말이기도 하단다. 특히 투바(Tuvans:Tuva)의 목소리는 성대에서 나오는 밑 음(音)에 따른 배음(倍音:harmonic overtone)을 나게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서 동시에 여러 음정을 낼 수 있다고 되어 있으며 그들의 음악은 초원과 말(馬:horse)에 관한 것이어서, 가사의 내용은 미국 서부(西部)의 카우보이(cowboy)음악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오래된 동양인의 발성법을 역사가 뒤처진 카우보이들이 본을 딴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어째서 동아시아 몽골인의 정령신앙 믿음의 소리를 미국 서부 텍사스주 카우보이 음악에 접목시켜 따를 수밖에 없었을까? 세계삼한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래 미국 1920년대 텍사스의 카우보이 가수 아서 마일스(Arthur Miles)의 외로운 카우보이(Lonely Cowboy)라고 이름이 붙여진 첫 번째 곡과 두 번째 곡을 한번 감상해보고 그 다음에 흐미 창법의 독특한 세 가지 발성법을 비교해 볼 수 있다. Arthur Miles - Lonesome Cowboy Pt. II Tuvan throat singing - Тувинское горловое пение - Хөөмей (회메이Khoomei) Tuvan throat singing - Тувинское горловое пение - Каргыраа (카르구라Kargyraa) Tuvan throat singing - Тувинское горловое пение - Сыгыт (스구트Sygyt) Arthur Miles was a 1920s Texan singer of cowboy songs. He is credited with independently utilising a style of overtone singing, similar to the Tuvan style called sygyt, as a supplement to the normal yodeling of Country Western music. Two recordings exist that are attributed to Arthur Miles. The recordings are the first and second parts of a tune titled "Lonely Cowboy". 아서 마일스는 1920년대 텍사스의 카우보이 가수로 알려져 있고 서양음악을 보완하기 위해 몽골 창법 스구트(sygyt)라는 투반(Tuvan)스타일을 삽입하여 만든 노래로 투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위 동영상이 주요한 창법으로써 회메이(xмей), 카르구라(kargyraa), 수구트(sygyt)라 하여 세 가지이며 미국 서부(西部)의 카우보이(cowboy)음악과 비슷하다는 창법 역시 수구트(Sygyt:Сыгыт)인데 휘파람이란 뜻으로써 중간 음역의 기본음에 높은 음(音)을 같이 발성하는 창법으로 중간음역이 약하고 높은 음(音)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후메이와 다르며 수구트(sygyt)는 여름의 산들바람과 새들의 노래를 묘사한다고 되어 있다. 위 창법 세 가지 이외 보르방나드르(borbangnadyr), 즐란득(chylandyk), 둠죽타아르(dumchuktaar), 에젱일레에르(ezengileer), 칸집(kanzip)이 있는데, 이들을 세 개의 주요한 창법기술의 변형이라고 여긴다고 정리된다. 본래 투바(Tuvans:Tuva)의 창법은 많은 곳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지고 고대 티베트 승려들은 ‘가짜 성대’라 하는 카르구라(kargyraa)로 성대보다 아래 음(音)을 내는 창법을 받아들였으며 한편, 팔세토(假聲:falsetto) 이외에 높은 음(音)을 낼 수 있는 창법 수구트(sygyt)이 있다는 점이 현대들어 스트레스 해소나 심리치료, 명상음악 장르라 할 수 있을 미국의 뉴에이지 음악가(New-age musician)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미국의 뉴에이지 음악은 반 기독도적(反基督敎)색채가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종교가 이질적인 것이라면 당연하게 뉴에이지의 색깔이 정령신앙(精靈信仰:Animism)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러한 의미를 꺼려한다는 것이 현실이며 역사성이 있음에도 그것을 굳이 외면하는 형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몽골과 이웃한 튀르크 민족들 사이에서도 투바(Tuva)의 회메이(Хөөмей), 알타이(Altai Kai:АлтайКАЙ)와 하카시아(Хака́сия:하카스공화국)의 카이(Кай)처럼 ‘흐미’와 똑같은 창법이 있다고 설명되고 있고 몽고 서쪽 알타이(Altay)지방에서 시작된 이 몽골 특유의 창법은 독특한 발성법으로 인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까지 등록되었다고 하고 있으며 가장 큰 특징은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듯한 창법이라고 특징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구황금(口簧琴)이라 하는 주즈하프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의 목소리 창법인 회메이(khoomei)와 똑 같은 음(音)을 내는 작은 악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인데 이를 주즈하프(Jew's harp)라 하는 것으로써 편자형 따위의 금속테에 철사를 친 원시적인 현악기며 이빨과 이빨 사이에 물고 손가락으로 현(絃)을 퉁겨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Young man with Jew's harp by Dirck van Baburen 네덜란드 화가 디르크 반 바루렌(Dirck Van Baburen:1595-1624) Jew's harp found in the US 1860s-CivilWar 위 사진은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때 발견한 주즈하프이다. 물론 이 악기(樂器)는 동양적인 냄새가 짙다. 중국자료를 찾아보면 이를 구황금(口簧琴), 또는 구황(口簧), 구현(口弦), 취금(嘴琴)이라 하여 오래되 민간악기라 하였고 주로 아시아(특히 동남 아시아, 동남 아시아와 남아시아, 북아시아), 아메리카대륙, 오세아니아(大洋洲) 및 유럽에 넓게 퍼져 있으며 상대적으로 아프리카대륙에는 기록이 적다고 말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중국자료에서 명칭한 구황금이나 구황에서 황(簧)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궁중음악에서 쓰인 대표적인 아악기(雅樂器)의 하나인 생황(笙簧)의 황(簧)자를 명칭에 사용하고 있는 것도 예사롭게 볼 이야기는 아니다. 口簧琴,又稱口簧、口弦、嘴琴,是一種古老的民間樂器,廣泛使用於亞洲(特別是東南亞、南亞以及北亞)、美洲 、大洋洲以及歐洲,非洲的記錄則相對較少。 口簧琴的樂器主體是一個一端固定於框式琴臺上,另一端可自由振動的簧片,樂器演奏者將琴臺置於雙唇之間,以撥動簧片或拉扯一根繫附於琴臺上細繩的方式,使簧片振動發聲,並以演奏者的口腔共鳴產生樂音。 中國的口簧琴 民族音乐学家從傳說中推測认为新石器时代晚期出現。先秦时期称“簧”,《诗经·小雅》:“巧言如簧。”约在唐宋时期有“竹簧”、“铁簧”、“铁叶簧”、“雅簧”等名,明清时期主要称“口琴”,现在通常称“口弦”。在中国少数民族地区流传广泛,各民族称呼不一。与古代汉文化的名称有密切关系。在流传有口弦的38个少数民族语言的汉译名多大100个以上。 簧在少数民族中是谈情说爱的乐器之一,还常被用来作为青年男女定情的信物。多片制的簧往往配有一个小竹筒,竹筒表面刻有精致的花纹,随身携带,以便在需要的场合演奏 위 중국자료에 보면 이 악기의 구조설명이 있는데 고정된 한쪽 끝에 곽(框式)을 세워 금대(琴臺)를 만들고 끝단을 갈라지게 하여 자유진동을 가능하게 한 황편(簧片)을 악기연주자들의 입술사이에 넣고 황편을 튕기거나 당기는 방식으로 황편(簧片)을 진동시키는 것으로 연주자의 입속에서 공명을 일으켜 음을 발생시키는 악기라고 설명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국립음악학자들은 신석기시대 후기에 출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진(秦)시기에 황(簧)이라 칭하였다고 나타난다. 즉 시경소아(詩經小雅)편에 교언여황(巧言如簧)이란 기록이 있다 하였다. 당송(唐宋)시기에는 죽황(竹簧), 철황(铁簧), 철엽황(铁叶簧), 아황(雅簧)이라 하였고 명청(明清)시기에 구금(口琴)이라 하였으며 현재는 구현(口弦)이라 한다고 설명된다. 중국 소수민족지역에 널리 퍼져 있으며 각 민족의 명칭은 대체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고대 중국문화 명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였다. 이 소수민족이라는 것은 중국문화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이 황(簧)은 소수민족간의 사랑과 애정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청춘남녀간의 사랑의 표식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고도 하였고 이 공명 조각은 작은 대나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나무표면에는 절묘한 무늬를 새겨 각자 몸에 지니고 다니고 편의에 따라 연주에도 사용된다고 설명된다. 미국 서부영화와 흐미의 관계 그런데 놀랍게도 위 구황금(口簧琴)악기를 서양에서 ‘주즈하프(Jew's harp)’라 하면서 남부전쟁 이후18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서부영화에 등장한다. 주즈(Jew's)는 유대인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유대인하프’라 하였고 이 악기가 서부영화에 등장하였던 것을 보면 미국이주민들이 이를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주즈하프가 등장하는 서부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한번 보자. 마치 한족(漢族)의 "명문귀족(guest families)이라고 하는 객가(客家)를 하카(Hakka)라 하는 것처럼 들리는 후카(Huka)라는 이름이 현재는 알져지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쨌던 후카 프로덕션(Huka Productions)이름의 회사가 제작한 미국 서부영화 롱 라이더스(THE LONG RIDERS)는 1980년에 제작된 월터 힐(Walter Hill)감독의 작품으로 미국시민전쟁(Civil War)이 끝난 후 서부로 가는 기차와 은행을 타겟으로 습격이 잦던 때인 1876년 9월에 이야기로써 살인자이며 강도고 의적(義賊)으로 민간에 알려지기도 한 제시 제임스(Jesse Woodson James:1847-1882)가 이끄는 무법갱단은 사형제도가 없는 미네소타(Minnesota)주 노스필드(Northfield)의 스퀘어 헤드(squareheads)에 있는 은행을 강탈하기 위해 가는 기차에서 아래 장면이 전개된다. 롱 라이더스(THE LONG RIDERS)동영상 제목:the Jew's Harp and another sings along. 위는 편집하여 주즈하프(Jew's harp)를 연주하고 또 다른 멤버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만을 게시한 것이다. 인디언 혼혈 청년으로 분한 배역이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플레이밍 스타"Flaming Star"에서 노래 한 "A Cane And High Starched Collar"와 같은 음색이라고도 하며 영국민요 제목이 "내가 두고 온 소녀 "The Girl I Left Behind Me"바로 그것이다. 이 노래는 1650년경에 미국에 수입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으로서 미국 상비군(US regular army)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알려지는 노래이며 놀라운 것은 바로 주즈하프(Jew's harp)라는 입에 물고 있는 조그마한 악기로 특이한 음색과 구황금(口簧琴)이 말하고 있는 비슷한 음색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아시아의 투르크계 종족들은 코무즈(komuz)라고도 한다. 이 주즈하프(Jew's harp)는 편자형 따위의 금속 테에 철사를 친 원시적인 현악기로써 이빨과 이빨 사이에 물고 손가락으로 현을 퉁겨 소리를 내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서양악기로 알려진 것임에도 놀랍게도 동양 알타이(Altai), 몽골족, 투바(Tuva)공화국의 전통 음악의 일종인 목구멍 소리 흐미(khoomei:Хөөмей, Хөөмий, Хоомей)와 같은 음색을 나타내며 또한 동양 중국악기인 구황금(口簧琴)을 소개한 설명과 같다는 사실, 그리고 투르크계 코무즈와도 비슷한 악기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이에 한 가지 더 부연한다면 이 주즈하프는 유대인 하프라고 하는 것도 이상스럽지만 동양악기임에도 오히려 서양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서 어쩌면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는 것을 동서양 차이 만큼 구분코저 하는 심리를 읽을 수 있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바라 볼 때 매우 미묘하게 다가오는 것 중에 하나이다. 아래는 서양인들의 주즈하프에 대한 설명이 있다.There are many theories for the origin of the name Jew's harp. According to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this name appears earliest in Walter Raleigh's Discouerie Guiana in 1596, spelled "Iewes Harp". 유태인의 하프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많은 이론이 있다는 전제와 함께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이 이름은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의 총신으로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 탐험가인 월터 롤리(Walter Raleigh:1552-1618)의 기아나 발견(Discouerie Guiana,The Discovery of Guiana:1596)때 가장 먼저 사용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이를 "Iewes Harp"이라 하였다 한다. It has also been suggested that the name derives from the French "Jeu-trompe" meaning "toy-trumpet". 이 이름은 다시 프랑스어 Jeu-trompe 에서 파생되어 장난감 트럼펫(Jeu-trompe)이라 하였다. e.g. that the instrument was actually made, sold, or imported to England by Jews, or purported to be so; or that it was attributed to them, as a good commercial name, suggesting the trumps and harps mentioned in the Bible. 이 악기 도구가 유대인에 의해 영국에서 만들어져 팔렸거나 또는 수입되면서 상업적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말하고 있으며 성경에 언급되길 나팔소리와 하프를 암시한 사실을 또한 부첨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실제 정체가 애매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동서양 자료가 동일하게 이 악기를 역사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 중에 하나로 말하고 있고 중국자료에서 처럼 전국시대(B.C.403-B.C.221)시기인 기원전4세기경 중국에서 이를 연주하는 그림을 볼 수 있다 하였으며 이 악기에 대한 일반적인 영어 이름과 때로는 "유대인의 트럼펫"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나 유대교(Judaism)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This instrument is native to Asia and used in all tribes of Turkic peoples in Asia, among whom it is variously referred to as a temir komuz (literally, iron komuz), agiz komuzu (literally, mouth komuz), gubuz or doromb. 이렇게 볼 때 동서양이 하나의 악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악기는 아시아를 원산지로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아시아의 투르크계 모든 종족이 사용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아야 할 대상이다. 투르크계에서는 이를 철 코무즈라 하는 테미 코무즈(temir komuz), 입 코무즈라 하는 아지즈 코무즈(agiz komuzu), 그리고 구부즈(gubuz) 또는 도롬브(Doromb)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알타이 코무즈(Altai khomus) 알타이 카무스(Altai khomus-kamus) 투르크계 Demir-khomus from Tuva, Demir-Xomus 슬로바키아(Slovakian)의 드럼비아(drumbľa) 코무즈 역시 앞에서 말한 구황 악기의 구조처럼 이빨사이에 끼우고 공명강(共鳴腔)을 만들어 손가락으로 튕겨 혀를 진동 시키면 꿀벌, 말벌, 파리의 흉내를 내는 윙윙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설명되며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여러 코무즈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악기는 한문으로 구금(口琴)이라 하여 동양적인 악기가 틀림이 없다는 것과 유대인 하프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역사혼돈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일부 악기제조사에서는 ‘유대인하프’란 이름을 상업적으로도 기피하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특수한 종교관을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특별한 종교개념을 배제하고 나면 순수하게 역사만이 남는데 그 역사는 세계삼한역사를 가르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서양인들은 이를 스토피 하프(Snoopy's Harp)라 하거나 영국의 하프를 주즈하프라 하지 않고 프랑스어인 겜바드(guimbarde)라 하며 입 하프(mouth harp)라 하거나, 북아메리카대륙 미주리주(Missouri州)남부에서 아칸소주(Arkansas州)북서부에 걸쳐 있는 고원지대 오자크 고원과도 악기가 연과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역명을 따 오자크하프(Ozark harp)라 하였으며 또한 어떤 세력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주스 하프(juice harp)등으로 명확하지 않지만 다양하게 불리었다는 사실 또한 알 수가 있다.. 어쨌거나 앞에서 언급한 뉴에이지 음악의 색채처럼 자연의 소리이거나 또는 특이하게 심령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주술(呪術)이나 마술(魔術:witchcraft)과 관련이 있다 하고 샤머니즘 의식에서 흔히 사용되는 악기로 알려지고 있다. 서부개척사와 조선역사충돌 자연의 소리를 내는 기괴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입안에서 조그마한 악기를 물고 튕겨 내는 소리는 신(神)을 부르는 소리처럼 들였으며 이를 명확히 정령신앙(精靈信仰:Animism)에 사용되었을 것이란 짐작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고 또한 주술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위에 예를 든 것처럼 미국 서부영화가 주는 의미는 기존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측면이 비일비재함을 알 수가 있다. 이제 철부지 때 서부영화를 즐겨보던 것이 나이가 들어 서부개척사와 서부영화를 연계하여 볼 수 있었고 뒤늦게 아 이런 것이구나 하고 볼 때는 후회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우리역사가 절단난 과정과 광경을 재미로 또는 흥미로 보았다는 사실에서 서글픔이 없지 않다. 특히 서부영화의 주 무대가 주로 텍사스(Texas), 뉴멕시코(New Mexico), 애리조나(Arizona)주라는 것을 상기할 때 이 지역들의 당시 정치적 환경과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의 짧은 역사에서 맨 먼저 이야기 되는 것은 바로 서부개척사이다. 영화 서부개척사(西部開拓史,How The West Was Won:1962)를 보더라도 미국 서부의 미개발지 광활한 땅을 향해 일반 미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용기만 있으며 가족과 함께 동부 뉴욕을 떠나 서부로 향할 수 있었고 그들이 희망하는 것은 넓은 땅을 차지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기존역사주체가 지배하던 땅에서 미국이민자, 이주자들은 그냥 이방인이고 나그네일 뿐이다. 만약 정당한 법체계가 기존역사주체에게 존재하고 이를 엄하게 통제하였다면 서부개척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독립운운하고 있지만 어쨌던 비정상적으로 나라를 새운 것이다. 거대한 땅을 일시에 차지 하려면 어떤 기존 역사주체와 피나는 전쟁을 해야 하지만 서양인들이 곧잘 주장하는 자본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토지를 할양(割讓)받는 식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 솔직히 불만이다. 어떻게 수천년 역사를 가진 전통적인 영역을 국가와 국가간이라 할지라도 단순하게 합의만으로 그냥 넘겨줄 수 있는 이야기인가 하는 말이다. 역사 상식적으로 적어도 수당이 만주 요동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거대한 전쟁을 치루었듯이 수많은 장비와 수백만 인원의 군사가 동원되어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치루어 승리해야만이 한쪽이 굴복한 상태에서 영토를 차지 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하여 동부13개주를 차지했다는 역사도 그렇고 그것을 기반으로 북아메리카대륙 전역을 할양으로만 차지할 수 있었던 근거의 역사사실이 불분명한 것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 보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설쳐되던 곳이 과연 유럽지역이었던가. 아니다. 미국이주민들이 무작정 서부에 도착하면서 그곳 적당한 곳에 정착하고자 하여도 기존 소유지가 있어 그것을 극복하기란 만만찮았을 것인데 이러한 문제를 다 비껴가고 마을을 꾸미고 도시를 만들어 스스로 보안관이 되거나 판사가 되어 자치을 했다고 할 때 기존 역사주체를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무엇때문에 방관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법지대라 했던 것일까? 만약 기존 역사주체가 존재하던 땅이라고 할 때 졸지에 밀려드는 백인들에게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한체 땅을 내주어야 했다면 그래서 그것에 대해 아무런 보호나 지킴을 받을 수 없었다면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국가에게 애국심을 발휘할 어리석은 백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나라가 아니며 국가라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당시 만약 조선인과 한국인이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존재했었다고 할 때 당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국가는 어떤 지경에 놓인 것일까? 1860년~1870년이라면 병인양요(丙寅洋擾:1866)나 신미양요(辛未洋擾:1871)가 발생될 때인데 그렇다고 나라자체가 망할 수있는 형편은 아니지 않는가. 만약 이런 상태에서 땅이 미국이주민들에게 마구 넘어갔다면 국민과 백성이 느끼는 무력감이란 것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국가의 대한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상황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당시 그런 상황을 조선이 어떻게 설득하고 이해를 시켰으며 이러한 부조리함을 어떻게 극복했을지 정말 궁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미국이 자랑하고 있는 서부개척사는 강탈의 역사이다.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법자시대라는 엄청난 역사 블랙홀 앞에서 무엇인가 티끌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강박이 없지 않다. 이 시기는 기존 역사가 감당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기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는 시기이다. 우리 땅임에도 개발지라 하여 한마디 반대도 할 수 없는 입장, 서부지역 넓은 광활한 지역에 가로 놓이는 철도시설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환경이었다면 그래서 정부에 하소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면, 엄청난 사욕에 눈이 멀고 일확천금을 노린 무법자들에게 한없이 내쫓기는 입장이었다면 더군다나 조선인이나 한국인들이 마음대로 총을 소지 할 수 없었던 엉뚱한 법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흰 옷을 즐겨입는 무기력한 멕시코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어서 당시 상황을 생각만 해도 암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1846년과 1848년 사이에 발생했다고 하는 멕시코-미국전쟁(Mexican-American War)을 끝으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서부지역을 평정했다고 알려지고 그래서 불과 70년 역사를 가진 신생국가로 북아메리카대륙의 거대한 땅을 한꺼번에 차지한 막강한 신흥국가로 존재했었다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최소한 남북전쟁이 끝난 후까지도 서부는 미국이 관할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과 때문에 경제권은 휘둘렀을지 모르지만 절대적인 정치적 권한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있음을 짐작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무법자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들이 서부지역 영토를 거의 빼앗다시피 누군가에게 강제적으로 강탈했을 가능성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 백인(WHITE)이라 하던 미국이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정치세력을 만들고 미국대륙전체를 통제했다고 보기에는 그들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이란 역사주체는 정체가 분명치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기존 역사주체를 어떻게든 소리 소문 없이 망가뜨리고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여겨지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 기존역사주체가 정치적으로 위기였다는 것은 기존 사실을 토대로 어느정도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1863년부터 시작하여 1869년에 완공한 대륙횡단철도개설사업으로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자본력을 이용한 토지 착취 바로 그것이다. 철도개설사업합법화한 토지에 대한 자본적 이득이 무기화 될 수 있는 근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합법화된 토지 자본력을 바탕으로 자치 행정력과 경찰권이나 법 집행권을 그들이 소유하여 남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기존역사주체가 이를 극복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1862년 7월1일에 상원과 하원을 통과한 태평양철도법(The Pacific Railway Act)을 근거로 가설되는 철로주변 200feet(약 60m)의 땅이 철도회사에 무상을 주어지고 철도회사는 부동산회사를 만들어 분양을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연방정부는 모든 농민들에게 각각 160에이커(약 196,000평)의 공유지를 무상으로 불하하는 자작농법 또는 홈스테드법(Homestead Act:1862.05.20)발효하였고 이 법 때문에 2억7000만 에이커(미국전체면적 10%)이상의 공유지가 이주농민(미국이주민, 이민자)들에게 공여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즉 모든 농민이라고 하였지만 미국이주농민이다.이들은 이러한 토지를 공여받는데 등록지 10달러, 토지권리증 발부수수료 6달러, 토지중계인수수로 2달러의 비용만이 들었을 뿐이다.이런 해택을 미국이주민들 수백만명이 해택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전체면적 쓸만한 땅 10%가 그냥 넘어가버린 것이다. 권력주체를 생각해 보면 본래 역사주체 군주의 제정권한(帝政權限)이 축소되면서 내탕금(황실재산)을 재정골갈을 빌미로 끊어버린다든지 경제적으로 압박을 주면서 연방정부의 권한이 확대시키는 형국이었다면 문제는 심각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고종이 1903년부터 1906년까지 상하이 덕화은행(德華)을 경유하여 독일 베를린에 있는 디스콘토게젤샤프트(도이체은행전신)에 100만 마르크(500억원추정금액)를 비자금으로 맡겼지만 이를 일제가 강탈해 간 사건을 볼 때 재정압박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 자행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연방정부를 장악한 세력이 미국이주민 정치세력들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미국대통령은 연방정부의 수반과 경제수반으로 그 권한만 가지고도 황실을 충분히 제어했을 것이란 예측도 가능하다. 이러한 환경들이 바로 당시 주요한 역사적인 위기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인 환경에서 만약 북아메리카대륙 특히 서부에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도시(대전, 보은, 아산, 천안, 북청, 신의주, 영흥, 신안주, 황주, 풍천, 용천, 함남, 함흥, 안변, 풍산, 백마, 신태인, 방현)의 이름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그 도시들의 상황은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오밀조밀하게 오늘날처럼 도시와 마을이 곳곳에 이어지고 마을과 도시, 도시 간에 정보가 빨라 금방 그때 상황변화를 감지하는 시대가 아니라 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날처럼 발달이 되지 않는 상태에 있는 운송수단자체가 초보단계라 할 때 그래서 지배계층이나 특수계층인들 끼리만 공유하던 시대에서 동떨어져 있었다면 100km[250리(里)], 또는 200km[500리(里)]밖에 있는 상황을 일반인들이 간단히 알기란 솔직히 힘든 시기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도보로 움직인다 하여도 기존 긴 역사동안 사람들이 많이 다녀 본 길을 따라 왕래 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길을 접촉하지 않는 서양인 즉 미국인들과는 절대로 마주칠 기회가 적었을 것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대다수 미국도시는 횡단철로를 따라 생성되면서 주변 땅들은 상업지역으로 변모하자 바둑판처럼 도시계획에 맞춰 시작한 시기가 동시기 19세기 중엽부터라고 할 때 엄청난 변화가 불었을 것이란 예상을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서부 개척시대 때 미국이주민들은 위 영화처럼 서부로 무작정 들이닥쳐 기존 역사주체의 관리가 세세하게 미치지 않거나 또는 농사가 잘되지 않는 한지(閑地)의 땅을 차지하여 한동안 자치적으로 마을을 꾸미거나 소도시를 설립한다 하여도 이를 알기도 없고 막을 방법도 없었다고 보는 편이 보다 현실적이다. 예를 들어 서울과는 멀리 떨어지거나 중앙행정관리가 미치지 않는 한적한 유휴지가 있고 토지대장상 등재가 되지 않는 곳이 곳곳에 넓게 퍼져 있었다면 그래서 그곳에 철로가 생기면서 미국이주민들이 손쉽게 안착하고 나름대로 마을이나 소도시를 꾸며졌다면 빠르게 진행하는 산업발달과 확충되는 자본력으로 도시가 몰라보게 빠르게 확장하였을 것이고 마을이 군소도시가 되고 기존 작은 마을을 흡수하거나 통합하면서 기존 역사에 남아 있는 명칭의 도시들은 자연적으로 소멸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오래된 사진들에서 서울의 풍경을 한 컷 한 컷 볼 수 있지만 600년 역사도시치고 하나같이 더럽고 추잡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600년도시라고 할 때 하수시설등이 유럽못지 않게 발달했을 것이란 짐작은 왜 하지 못할까? 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죽어가는 도시 바로 그것이다. 19세기 초 서울이라고 풍경을 찍은 사진들이지만 글쓴이는 미국의 큰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미 개발지역으로 내 팽개쳐 진 것이며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없을 도시로 이렇듯 한반도에 존재했던 도시로 남아 있을 뿐 실체는 먼지처럼 사라지거나 흡수되어 지금은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정확한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가 글쓴이의 상상으로 끝날 이야기는 아니다. 역사기록에 남아 있는 수많은 도시들이 본래 땅에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만 한반도에 사라진 도시들이 치밀한 계획아래 새롭게 생성되었다고 한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과연 이런 사실을 조선인이나 한말 한국인 중에 권력이나 특정계급소유자가 아닌 일반 민중들이 얼마나 알고 있었고 이를 설혹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을 지워버리고 오히려 생명을 부지 할 수 있는 일에만 골몰했을 것이 틀림없다. 설혹 소수의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기억으로 남겨진 상태로는 생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동란은 이러한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해결한 모멘트로 이용되었을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 북아메리카대륙 전체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존재했다고 할 때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한글판 신문보도가 있었지만 아마도 극 소수였다는 사실과 일반백성들의 문맹율(文盲率)이 높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한글판 뉴스매체가 이런 보도를 할 수 없었겠지만 보도가 가능했다 하더라도 사실상 실효성이 전무할 수밖에 없다는데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아마도 이러한 불리한 환경으로부터 산업발달과 함께 정치 환경이 갑자기 변하면서 나라전체가 남의 주머니로 넘어간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일반민중들은 어디론가 자꾸 이동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동양인 얼굴을 하고 있는 조선인과 한국인들은 참으로 불행한 역사를 멍에처럼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는 조선인과 한국인들은 얼마든지 현실에 적응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밀려나 나그네가 되고 이방인취급을 받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대다수 조선인이나 한국인들은 정체성을 핑계삼아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변화된 정치환경을 적극 수용하고 적응하려 하였을 것이며 미국이주민과 가능하면 융합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모색했을 것이며 그리고 역사적인 조국은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또한 높은 것으로 유추할 수가 있다. 삶의 질을 택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역사 정체성에서 굳이 이질감이나 차이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인물들은 거의가 친일파라고 해야 하며 또는 동양인이 아닌 서양계 조선인과 한국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친미주의자들도 이 분류 속에 포함될 것이다. 일제(日帝)란 단어는 우리가 벗을 수도 없는 멍에로 언제까지나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고통이라 했다. 이러한 상황을 글쓴이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자주자주 되뇌고 있지만 참으로 괴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마무리(몽고와 멕시코) 결국 이러한 사태를 짐작할 수 있는 요인으로 미국 서부시대에 명성이나 평판을 얻은 미국 국경지방의 무법자 또는 법률가를 지칭하는 총잡이들이 황금을 얻기 위해 짐승처럼 설쳤다는데 있을 것이다. 이들을 중앙정부가 뚜렷하게 막을 방도가 없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고의로 방치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때문에 그들 스스로 자치 경찰권과 법률 권한을 소유하게 되면서 그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권력이 남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으며 이렇게 진행되었다면 토지 소유권도 마음대로 주물렀을 가능성도 있다. 서부의 무법자들은 총잡이일 뿐만 아니라 법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취했다는 것은 단순하게 총잡이라고만 할 수 없는 법률 집행관(lawman)으로써 경찰관이나 보안관과 같은 법 집행하는 관리(law-enforcement officer)로 행세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며 수많은 조선인과 한국인들이 이런 식에 제도하에 그들 손아귀로부터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도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다. 특히 무법자나 법집행관들은 남북전쟁(The Civil War:1861-1865)때 계급장을 달고 있던 장교나 일반병사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과 전문고용가, 사업가, 의사까지 직업도 다양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데 이들에게 역사나 국가정체성 따위가 있을리가 없다. 때문에 미국이주민 정치세력들은 이를 충분하게 최종 목적을 위해 이용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가 있다. 대다수가 일확천금을 노렸고 은행, 기차, 그리고 역마차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으며 주요 범죄자들은 특히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기회를 찾던 백인들에게도 범행을 자행했다는 것을 보면 그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특히 텍사스(Texas), 뉴멕시코(New Mexico), 애리조나(Arizona)주, 그리고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멕시코인 들과 아메리카 인디언을 상대로도 살인과 강도짓을 자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피해를 본 사람들 속에 수많은 조선인이나 한국인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정리를 하면 무법자들이 설쳐 되었던 북아메리카대륙 특히 남부지역은 당시 정치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사 배경장소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본 블로그 글 “휴스턴(Houston)은 몽고성(蒙古城)이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5”에서 한어자료를 통해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지역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안되는 지역임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休士頓的官方綽號為 太空城(Space City),因為它是約翰遜航空中心的所在地,任務監控中心也設在這裡 因此,(休斯敦)是在月球上說的第一個詞。許多當地人喜愛稱作(牛沼城)。其他綽號還有 全球城市, H鎮, 腳爪城 或 蒙古城。 "휴스턴(Houston)시당국의 닉네임은 우주도시(Space City)이며 존슨 우주 센터(Johnson Space Center)소재지로서 임무 조정 센터(Mission Control Center)제어 장비가 설비되어 있기 때문에 휴스톤(Houston)은 달(月球)탐험에 상징적인 곳의 이름이며 많은 현지사람들은 우소성(牛沼城)이라 칭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고 다른 별명으로는 갤베스턴섬(Galveston islands)이 평행사도 장벽처럼 되어 있는 모양이 비춰지는데서 H진(鎭)이라 하고, 각조성(腳爪城) 혹은 몽고성(蒙古城)이라 한다"고 나온다. 텍사스지역은 분명 몽골영역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자료에서 텍사스(Texas州)의 휴스턴(Houston)을 몽고성(蒙古城)이라 했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지난 2014년에 올린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에서 밝히길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1901년에 코리아호와 시베리아호(Siberia:11,284t) 그리고 1904년에 몽골리아호(Mongolia:13,639t)와 만주리아호(Manchuria:13,639t)의 이름으로 운송선을 만들어 운행하기 시작했고 1914년 8월 15일 파나마운하(Panama Canal)가 완성되기 전까지 카리브해를 포함한 북아메리카대륙 동서연안을 항로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무엇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연안을 항로로 삼은 이처럼 적지 않는 선박을 굳이 동아시아대륙 지명을 붙여야 했던 사실을 의심했던 적이 있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글쓴이는 절대로 위 지명은 동아시아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흐미, 호메이(khoomei)가 몽골족, 투바 공화국의 전통 음악의 일종인 목으로 하는 노래라 했기 때문에 몽골역사와 연관되는 것이 틀림없으나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부 카우보이 음악에 흐미의 창법이 삽입되었다는 것은 지역적으로 몽골관습이 그곳에 남아 있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엄밀하게 보자면 13,000톤급의 거대한 선박의 몽골리아호라고 명명한 이유와 일맥하는 이야기다. 때문에 텍사스주는 몽골 고유영역일 가능성이 본 블로그 글을 통해 상당히 진척이 된 상태에서 이런 사실들을 재 확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올린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에서 멕시코만 상해(上海)에 위치한 텍사스주(Texas州)를 몽고(蒙)라고 지도에 표식하였다는 사실도 이와같은 역사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뿐만아니다. 본 블로 글 "사할린(Sakhalin)은 섬(島)이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8 "에서 먼저 북아메리카대륙 사우스다코타주(South Dakota)의 블랙힐스(Black Hills)가 사할린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아무르(Amur river) 역시 미주리강(Missouri rivers)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이라는 사실과 그와 동시에 미시시피강 하구 뉴올린어즈(New Orleans)가 바로 아무르강(Amur river)하구(河口)임을 알 수 있었으며 오호츠크해(Okhotsk sea)도 바로 미시시피강을 근원으로 하는 오호타(Okhota)가 퉁구스(Tungus)말로 강(river)이라는 뜻에 부합하면서 이를 "거대한 강"이라 한 것과 일치하는 것은 미시시피강도 거대한 강이라는 의미가 함께 있어 동일한 의미를 판단할 때 오호츠크해는 아무르강 즉 미시시피강이 흘러드는 곳 멕시코만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으며 더하여 아무르 하구의 니콜라옙스크항(Nikolayevsk)을 외만주(外滿洲)라 했던 것과 같이 뉴올리언즈(New Orleans)를 외만주로 보았던 것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중삼중으로 이를 동일선상에서 비교검토할 수있는 것은 진실성에 부합한다고 보아 명확한 것이라고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더 붙인다면 위 외로운 카우보이 노래 끝단에 흐미와 다른 듯하지만 평원의 말을 주제로 하는 흐미와 별개의 발성법이라 할 수 있는 요들송(Yodel:Jodel)이 짧게 가미되어 있다. 흐미는 지금까지 풀이 한 대로 옛 몽골인들이 신을 부르는 목소리로 그에 대한 역사성을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는 역사사실이다. 그러나 알프스 요들송이 서양인들이 즐겨 부르는 카우보이 노래 속에 삽입되는 것은 흐미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볼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흐미와 함께 요들송이 가미되어 있다. 요들송(Yodel:Jodel)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지방의 주민들 사이에서 불리는 전통 민요 가운데 한 장르로서 일반적으로 흐미 발성법 보다 난이도가 낮은 것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알프스 지방의 토속적 창법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 먼저 이 알프스(Alpes)의 어원을 살펴보면 프랑스어(French), 노르만어(Norman), 포르투갈어(Portuguese), 스페인어(Spanish) 모두 똑같이 :From Latin Alpēs, from albus ‎(“white”‎).라틴어(Alpēs)에 근원하는 것으로 흰색(white)을 의미한다. Uncertain, possibly ultimately from Proto-Indo-European *h₂el- or from a non-Indo-European source. Compare Middle High German albe ‎(“high mountain”‎), whence German Alb ‎(“mountainous area”‎). 또한 독일어(German)어원을 살펴보면 고대인도유럽어의 근원자체가 불확실하지만 독일 'albe'의 높은 산이란 의미와, 독일어'Alb'의 의미로 '산이 많은 지역'으로 어의를 풀이하고 있다. 즉 알프스라 명칭은 흰색의 높은 산으로서 산들이 많은 군집형태의 산맥을 총칭하는 명칭임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알타이(altai)가 어딘가?-용연향(龍涎香, ambergris)http://blog.daum.net/han0114/17050533 "에서 밝혔듯이 알타이(Atai)란 단어가 황금의 산이듯이 어떤 산맥이 아니라 산맥에 부분적인 요소가 있으며 때문에 본 블로그에서 살펴본대로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하는 산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알프스 역시 이 지역에서 이름하고 있는 산의 이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알타이는 부분적인 요소가 강한 명칭인 반면에 알프스는 전체를 나타내는 명칭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북부지역에는 높고 흰산이 많다. 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에서 히말리야도 찾았고 백산도 찾았으며 천산도 찾았다. 유럽대륙에 있는 알프스 산에 대한 위치역사를 완전하게 부정하기 싫지만 지금까지 밝혀 본 사실에서 신중하게 재고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목소리 발성법에서 이처럼 기괴하고 놀라운 다양성이 있는 기법들은 난이도가 높아 어려운 것에서 부터 단계가 낮은 발성법까지 존재한다고 할 때 동양사적 정령신앙이 바탕이 된 것이 틀림없는데 필요에 의한 같은 환경이라면 생성될 수 있는 관습적인 행위나 방법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동일할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흐미와 요들은 같은 태생적 논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목소리로 낼 수 있는 독특한 창법 기능을 고안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첫째 정령 신을 매개로 한다면 서양인들의 종교관보단 상대적으로 정령신에게 유연성이 있는 동양인들의 사고가 더 합당하다 할 때 정령 신으로 다가서는 것은 흐미나 요들이 동일하게 취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목소리 기법과 기능의 차이가 없을 수가 없겠지만 생성의 근원은 동일 선상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굳이 요들송은 서양인들의 전유물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고 이중적으로 보기때문에 발생하는 편협에 따른 오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냉정하게 살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상식선에 알고 있는 사실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요들송의 알프스는 유럽대륙에 있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여도 지금까지 밝혀본 사실과 정령 신에 가까운 동양적 사고가 훨씬 적합한 것이라면 부정만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연은 역사를 부정하지 않겠지만 역사는 언제든지 자연을 부정할 수가 있다는 전제가 현실 역사를 깨우치고 있다. 자연을 역행하고 이치를 말살하려는 서양역사는 온 천지를 거짓 역사의 악취로 진동을 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자료들을 감안하여 보면 텍사스주는 몽골영역이 확실하고 그곳에는 코가 크고 검은 얼굴의 악라사(愕羅斯), 어르쇠라고 하는 대비달자(大鼻㺚子)사람들이 많이 거주했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이들이 현재 멕시코인으로 둔갑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이 흐미의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서부개척사" rel="tag" target="_blank">서부개척사</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알타이코무즈(Altai khomus-kamus)" rel="tag" target="_blank">알타이코무즈(Altai khomus-kamu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드럼비아(drumbľa)" rel="tag" target="_blank">드럼비아(drumbľ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흐미(khoomei)" rel="tag" target="_blank">흐미(khoomei)</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투바(Tuva)" rel="tag" target="_blank">투바(Tuv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카르구라(kargyraa)" rel="tag" target="_blank">카르구라(kargyra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수구트(sygyt)" rel="tag" target="_blank">수구트(sygyt)</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구황금(口簧琴)" rel="tag" target="_blank">구황금(口簧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주즈하프(Jew's harp)" rel="tag" target="_blank">주즈하프(Jew's harp)</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휴스턴 몽고성" rel="tag" target="_blank">휴스턴 몽고성</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멕시코 대비달자" rel="tag" target="_blank">멕시코 대비달자</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롱 라이더스(THE LONG RIDERS)" rel="tag" target="_blank">롱 라이더스(THE LONG RIDERS)</a>

정조론으로 본 서구와 일본역사의 동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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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론으로 본 서구와 일본역사의 동질성 글쓴이:한부울 1)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 굴레2) 서세 식민주의와 생물학체계의 역할3) 서구세력 등장과 일본역할 4) 서세 대리국의 정조론5) 일본과 친일성향의 생물학자 6) 유럽역사와 조선의 운명 7) 미국(米國)과 정조론 1)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 굴레 뉴욕시 록펠러 센터의 GE 빌딩(GE Building)에 본사를 두고 1926년부터 라디오방송을 시작하여 1938년 TV 방송을 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방송사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의 한 해설자가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중계에서 일본선수단이 들어오자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을 강점했던 국가지만, 모든 한국인은 발전 과정에 있어 일본이 문화 및 기술, 경제적으로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라는 되먹지 못한 이야기를 하여 한국인들의 대다수의 가슴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 같은 발언은 뉴라이트 개념인사들이 떠벌리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발언은 열도일본인들을 옹호한 것이라 하기보다 미국외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가 주도한 동양 일본서구화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18세기말부터의 산업혁명과 이은 서양선진문화기술경제까지 일본을 통해 전수된 사실을 말하고 싶다는 서양지식인들의 기본 사고를 알 수 있는 것이며 어쩜 미국지도자 대부분이 이와같은 생각을 공통적으로 할 것이란 판단을 한다. 결국 이 발언 속에는 그들이 주도한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으며 자본제국주의에서 나올 수 있는 나름대로 정제된 발언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동계올림픽을 조심스럽게 치루고 있는 주인 잔치 상에 재를 뿌리는 망언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쌓기에 충분했다. 한국인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NBC 는 해설자 조슈아 쿠퍼 라모(Joshua Cooper Ramo:1968-)를 퇴출했다고 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이러한 조치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배운대로 술회한 것인데 자신은 퍽 억울해 할 것 같다. 이 사람은 유대 자본의 단체 국제컨설팅 회사 키신저협회의 공동 최고경영자이자 부회장이며 다국적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Starbucks)와 미국의 운송 업체 페덱스(FedEx)의 이사직을 가지고 있는 저명한 인물이다. 정말 아무데나 눈치없이 떠벌리는 사리분별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무지한 사람은 아니란 말이다. 또한 미래 미지의 권력과 부(富)를 깨울 새로운 본능을 제안하는 <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The Seventh Sense : Power, Fortune, and Survival In the age of networks>의 저작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충분히 옳고 그름의 판단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어 어쩜 계산된 발언일 수 있고 최근 북한문제와 위안부문제로 우리정부와 정치적 갈등이 있는 열도일본 우익분자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서양역사관 자체가 그러한 발언을 쉬 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사고는 아마도 그가 매우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밝혀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쨌던 간에 한반도 식민지 역사는 비록 타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한반도 한국인들이 쉬 빠져 나올 수 없는 암흑같은 늪이고 깊고 깊은 함정이며 우리 후손들도 싫으나 좋으나 언제까지나 도리 없이 가지고 가야할 짐덩어리고 치욕이며 멍에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열도일본인들에게 받은 모열감이나 치욕들을 다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식민지역사는 굴레가 되어 우리 스스로 도저히 없앨 수 없는 트라우마이고 가슴앓이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한반도 식민사관은 우리 대에서 마무리하지 못한체 또 다시 후손들에게까지 짐을 물려 줘야 할 고통스러운 것이 틀림없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잊을 만하면 매번 이런 모욕적인 망언들을 한반도 인 전체가 아무런 항의도 못한체 숙명처럼 듣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진정 알려하지 않고 모른다고 해서야 어떻게 구렁텅이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겠는가. 2) 서세 식민주의와 생물학체계의 역할 위 식민지발언을 아무렇게 할 수 있는 서구인들의 심리는 우월심리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동양사람이니까, 아시안이니까 아무렇게나 말을 던져도 될성 싶은 것이다. 서구세력이라 함은 하나의 체제에서 피지배 민족 중에, 바스크(Vasco)귀족 가문 출신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Sanctus Ignatius de Loyola,1491-1556)가 만든 예수회를 기반으로 15세기부터 준동한 해양세력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정확하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들 조상은 해적이고 범죄자일뿐이다.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 없음에도 근대사가 그들을 자랑스럽도록 만든 것에 불과하다. 당시 그들의 기록에는 마치 세상이 무법천지처럼 묘사하였지만 세계 다양한 문화와 종교들을 융합하고 들어나지 않게 은유하며 세력균형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고 윤리와 덕을 표방하는 정치로 세계를 통치하던 '하나의 체제'가 존재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러한 체제에 반한 비주류집단이며 관리가 느슨하고 허술한 외곽지 또는 도서(島嶼)를 찾아 주로 그들의 자본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일삼던 무리들로써 이를 서양제국이라 하지만 서구세력이라고 하는 것이 맞고 이들은 오늘날 유럽연합체제형태를 갖추고자 한 세력으로써 나름대로 예수회가 주창하는 교리를 기본으로 조직적 활동을 하던 세력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서구세력들이 만든 근대사 전체가 허구라고 하는 주장은 동양인이 아니라 러시아 수학자 입에서 나온 말이다. 러시아의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란 저서에서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고, 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음모라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예수회가 파견한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탐험가로 지리학자연구자로, 생물학자, 그리고 지도연구가로, 좀 더 적극적인 예수회 선교사로 곳곳에 드나들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솔직히 근대사를 무한정 신뢰할 수 없게 하는 것은 그들을 미화하고 본질과 다르게 치장하였던 결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사건과 다른 이야기가 우리의 상식이 되었다고 본다. 어쨌거나 예수회가 주도하는 서세들이 끝내 망가뜨려 놓은, 비록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의 체제"가 당시 관리하는 규정이나 규칙들에 의해 자유로울 수 없었음이 분명하여 신분으로 위장했어야 했고 각 지역들을 마음대로 활동하기에는 제약들이 많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때문에 그 제약을 벗어나려 애를 썼고 그들 구성원들은 거의 해적신분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그들이 선구자처럼 또는 스스로 탐험가, 연구가으로 둔갑해가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국제법도 그렇지만 엄격하기는 더했을 당시의 해적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도적이고 범죄자이다. 그들이 숨어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뿌리를 내리려 했던 것으로 약탈과 침탈, 노략질, 모자라면 살인까지 기본적인 행위로 삼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561년 교황비오4세(Pope Pius IV)의 승인에 의해 창설된 '성 스테파노 기사단(Order of Saint Stephen)'은 어떤가.이교도라 하여 이슬람 상선을 끊임없이 약탈하였고 레반트에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했다. 그들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라고 하고 있지만 해적시대이고 식민약탈시대였다.수많은 상선들을 대상으로 멕시코만과 카리브해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은 1650년부터 1725년까지를 해적의 황금시대(Golden Age of Piracy)를 맞이했고 이 때 영국 엘리자베스1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있었다는 것은 서구세력들이 해적질만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1655년 카리브해 섬들 가운데 동쪽 끝에 있는 바베이도스(Barbados)에서는 잉글랜드의 인간 쓰레기들이 모두 카리브해로 모였다라는 말이 나올정도였다 하였으니 충분히 알만한 이야기다. 또한 웃기는 이야기는 바로 사략선이야기다. 사략선(私掠船:privateer)이라하면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아 개인이 무장시킨 선박을 뜻하는데 근세기 유럽국가(?)들은 상비해군력을 보충하기 위해 사략선에 교전자격을 부여했다고 알려지지만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이 사략선들은 영국의 무역로를 무너뜨렸고 쌀, 소금같은 화물을 물론이고 상아와 황금도 약탈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영국은 무역회사일 가능성이 높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이 독립한 후에도 해적질은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미국독립이란 개념자체를 의심스럽게 하는 이야기지만 비로소 남북통일이 된 뒤 사회가 안정화되자 해적들이 급격히 사라졌다 한다. 이런 사실을 부인하겠지만 남북전쟁이전까지 해적들은 거의 미국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부터 미국이란 나라가 서서히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미에 이야기 하겠지만 이 시기는 바로 조선(朝鮮)에 대한 침략모의가 시작된 정조론(征朝論)이 가시화된 시기이다. 그들 나름대로는 해적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있고 그러한 처지가 정당했다고 거품을 물겠지만 죄없는 엄청난 사람들이 그들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면 역사에 대해 반성을 해야 마땅하고 지금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우월감에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무조건 배를 타고 나가면 자유롭고 해양을 누비며 무역과 상업행위를 하면서 불법을 자행하고 그런식에 방법으로 끊임없이 자본축적을 하였으며 지배체제의 관리가 못 미치는 지역에서 은신처등을 마련하고 현지인에게는 철저하게 약탈을 일삼으며 잔인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그들을 정상인으로 취급하거나 그러한 행위를 역사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근대사는 이들을 전부 귀족처럼 또는 영웅처럼 미화하고 상징화했다는 사실은 재고되어야 마땅한 이야기다. 글쓴이가 그동안 근대사 전반에 걸쳐 보는 과정에 가장 관심있게 탐구해본 것은 바로 생물학체계이다. 이것은 역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편에 생물데이타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삼한조선에서도 그 만한 생물학체계를 갖추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오늘날 생물학체계를 보면 아마도 당시 조선에서 그만한 생물학체계가 존재했었다 하여도 가치 있는 자료들은 모두가 빼앗겼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지만 모자라도 너무 모자란다. 왜 서구세력들처럼 체계적인 활동을 통해 완벽하게 기초를 세움으로써 세계 모든 자연생태와 현상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할 수는 없었을까? 만약 그런 노력을 끊임없이 했었더라면 위대한 역사가 연기처럼 한꺼번에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서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장악하여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다. 예수회에서는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데 선교사들은 대부분 교육과정을 통해 논리학, 라틴어, 그리스어, 비유럽어, 과학, 예술, 고전번역, 철학, 법학 등의 학식이 풍부한 지식인들이었고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보여지며 특히 유럽에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했으며 검증할 수 없는 것이지만 1556년에 예수회는 3개의 대륙에 74개의 대학네트워크를 이미 운영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근세기에 강력한 힘을 갖게 한 서세는 바로 예수회의 치밀한 준비때문이라고 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지리지에 각종생물 서식지와 데이타가 나타나지만 세세하지 못한 부분에 항상 불만이 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왜 서양 생물학체계처럼 세세하고 완벽을 기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본래의 역사기록이 아니라는데 더욱더 확신하게 만들 뿐이다. 역사가 그들에 의해 농단당하지 않았서야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서구세력들에 의해 구축된 생물학체계를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역사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혼란스러움까지 극복해야 하는 이중 어려움이 있다는 점도 없지 않다. 우리는 현재처럼 생물학체계가 완성된 것은 바로 생물학의 아버지란 닉네임을 가진 린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시기가 1758년에 자료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세종지리지가 1454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체제가 반드시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이 만들어지고 세종지리지에 각지역 생물명칭과 서식지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어떤 식의 체계가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지만 체계라고 하기엔 현재 기록은 보잘 것이 없다. 겨우 겨우 이름정도, 서식지나 분포지정도, 자세하지 못한 설명 등 정체를 알 수 있을 만큼만 기록된 사실이 여간 답답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세종지리지에 나타나는 것 보다 좀 더 세밀한 자료가 있었을 법하지만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이런 것을 보면 비록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의 기억 프로그램(UNESCO Memory-of-the-World Programme/Program)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주는 역사연구가치는 솔직히 한반도란 한계에 맞춰 볼 수밖에 없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다. 서구세력들이 구축한 생물학체계는 세계전체 영역을 다루면서 기존 서식기원지까지 마음대로 조작, 변형시킬 수 있는 권한까지 가졌으니 무엇을 더 비교하겠는가. 때문에 세계를 지배한 하나의 체제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턱 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생물학체계를 이야기하며 할 이야기가 많다. 사실상 서양생물학자에 의해 생물학체계가 구축된 1758년은 산업혁명시기와 이어져 있어 세계 경제계와 과학계를 휘어잡고 있던 서세들에게는 흰 백지에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매우 쉬운 일이었고 역사 게임은 끝난 것과 같은 것이다. 기존체제가 존재했더라도 산업혁명으로 인해 물질이 풍부하게 되자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물질욕에 사로잡혀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고 이를 염려하며 위기의식을 느끼던 기존 체제의 관리자들은 미래가 불안했지만 오히려 잿밥에 눈이 어두워 있었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자본과 물질 파고에는 어떤 방책도 속수무책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기존체제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은 손 뒤집기 보다 쉽웠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들을 친일파라 하고 매국노라 하지만 국가관이 투철했다고 해도 목숨을 내놓고 대적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간사성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시장경제체제가 발달이 되어 자본력의 힘이 어느정도인지 실제로 경험해본 우리가 더 잘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 그래도 목숨이 다 할 때까지 국가를 지키고 역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천하의 이치일 것이다. 농사만 짓고 수공업정도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던 사람들이 삶의 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사회에 소비재가 충만하면서 각종 편의기구까지 등장하여 쾌락과 소유욕을 자극하는 자본이 주는 힘과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기다가 자본은 신문을 지배하며 여론을 부추길 수 있었고 여론이 극대화되는 분위기에 기존 사회가 혼란스럽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자 급기야 제정체제(帝政體制)에 대한 권태감과 체제의 부정요소들이 낱낱이 들어나 사회에 이슈로 부각되면서 제정(帝政)의 치부가 들어나고 이에 자극받은 민중들이 극단적으로 반감을 표출하게 만들면서 험악한 사회분위기 만연할 때 최고 권력자는 무력을 동원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재정이 부족한 제정정부가 나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야 맞다. 체제흔들기 위한 여론은 개혁이나 혁신이란 이름으로 기존 체제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들면서 자본이 쉽게 사회저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사실과 자본주 농간은 어디든지 개입하고 사주하여 체제자체가 힘을 쓸 수 없도록 만든 것도 분명하게 존재하던 때이다. 산업혁명의 파고와 그에 따른 개혁이나 혁신이란 욕구는 하나의 체제가 견디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은 1858년 일본사회가 서구세력들에 의해 혼란스럽게 변한 것과 똑 같다 할 수 있다. 서구의 식민주의는 이러한 약점을 찾아 잠입하고 무단으로 개입하였으며 뒤에서 사주까지하였다면 기존 체제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아마도 조선도 이런 과정으로 체제가 흔들리고 나중에 체제 해체까지 수모를 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세의 식민주의는 어쨌거나 첫째가 기존 체제의 전복이 목표였다. 영국의 박물학자이며 우생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프랜시스 골튼(Francis Galton)의 사촌인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1882)이 1859년에 발표한 저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으로 말미암아 기존 근원종까지 생물체계를 다시 정리하게 만들었고 이를 연계한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이고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 .Social Darwinism)은 "우월한 사회나 국가가 열등한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여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약육강식의 식민지주의를 합리화하였으며 그것에 끝나지 않고 체제 전복에 이어 사회구성원들 종교개종까지 하길 강요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이런 과정에 선교사가 개입한 것은 바로 예수회가 개입한 증거이다. 예를 들어 16세기부터 기존 역사가 존재한 영역에 함부로 들이 닥쳐 온갖 만행을 일삼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같은 유럽세력들은 결국 남아메리카 잉카 문화(Inca文化)을 점령하고 폐쇄까지 시켰으며 그들이 실시한 식민지주의 교육으로, 군사력에 의한 무단지배와 병행하여 기존 정령신앙(精靈信仰)을 무력화하고 그들의 그리스도교도로 개종시키기 작업을 끊임없이 진행했다는 사실에서 그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그 다음 단계는 근거지의 생물학체계까지 건드려 마무리짓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결국 그들이 지나간 곳에 기존 역사 체제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사실은 지금 우리가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3) 서구세력 등장과 일본 그렇다면 실제로 자본력을 가진 서구세력들이 기존체제를 사라지게 만들고 그들의 역사를 재창조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근대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엄연히 세상은 서세들이 원하는대로 동양과 서양이 구분되어 정확하게 2등분이 아니면 균형이 맞아야 하지만 근대사는 세상 전체가 서양인의 위주로 서술되고 편집되었다는 것을 바보가 아니면 금방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들이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근대사에서 한반도에 서양선박이 들락거렸던 19세기초엽부터라고 판단되며 1816년 영국군함 알세스트호(Frigate Alceste)가 충청도 마량진에 입항하여 동태를 살피고 1832년 영국상선 암허스트호(Lord Amherst)가 몽금포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할 때 부터이고 정확하게는 1840년 아편전쟁부터라고 할 수가 있다. 앞에서 러시아의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가 말하길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고, 또한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라 한 것처럼 중국과 유럽의 역사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중국과 유럽의 역사는 거의 만들어낸 것으로써 하나의 체제를 각 민족, 각 종족으로 억지로 분리시켜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고려가 거대한 국가라면 그것은 동서양 하나가 되는 국가이거나 현재 서구문명문화가 근거하는 로마, 그리스역사를 기초로한 연합체제 국가로써 조선이 계승권을 승계받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고려가 조선에게 중국이란 명칭을 승계했다해서 절대로 망한 국가체제가 아니라 서양세력들이 감추고 있지만 포괄적 서세가 적대한 서양귀족과 왕족계보들이 소속된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20세기초엽부터 미국(米國)에서는 'COREA' 와 'KOREA' 명칭 사용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신문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COREA" 사용을 금지하고 "KOREA" 를 사용하기를 종용한 사실은 "COREA" 명칭아래 그들도 속해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정리를 하자면 "COREA" 는 다민족 대륙명칭"이며 "KOREA 는 단일민족 한반도"명칭이라고 정리할 수있다. 만약 세계삼한역사연구가 사실대로라면 북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 전체가 "COREA" 라 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 주장은 "COREA" 가 프랑스어로"COREE"라 할 때 이미 포괄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역시 이 COREE 란 명칭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서양인들은 이 "COREA"란 명칭으로 인해 혼란이 지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태극문양을 즐거이 상징으로 삼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를 글쓴이는 고려(高麗)라고 하는 것이다. 고려(高麗)는 유럽역사의 중국이라 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神聖羅馬帝國:962-1806)부터 연결됨을 본 블로그 글"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에서 최종 확인바가 있다. 다시 돌아가자. 전자에서 말한 것처럼 추악하고 비열한 서구세력들의 도발행위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극에 달하는데 시작은 1차아편전쟁이고 2차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연대 1858년에 발생한 해적선 에로호사건(The Arrow Incident)이며 이것을 빌미로 영국, 프랑스가 연합하여 청조(淸朝)를 압박하면서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일으켰고 결과적으로 1858년 러시아, 미국(米國), 영국, 프랑스와 청(淸)정부사이에 맺어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비준하게 만들었으며 영국과 프랑스 연합조직은 천단(天壇), 이화원(颐和园), 원명원(圆明园)등에서 주요 문화재를 약탈하고 이를 소각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베이징(北京, Beijing)자금성에 입성하여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을 강제적으로 맺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왜 천단, 이화원, 원명원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바로 미래까지 북경을 노출 시키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혼다세오사무로(本多淺治郞 著)의 일본역사강의(日本歷史講義)의 목차(目次)에 보면 朝鮮北部と支那との關係 조선북부와 시나와의 관계, 朝鮮南都と我との關係 조선남부와 일본과의 관계, 支那朝鮮の交通 시나조선의 교통, 목차(目次)에 구분되어있다.이러한 명칭이 주는 사실에서 볼 때 위에 조선 북부에 지나(청조선)이 있다 한 사실이고 남부에 일본이 있다 한 것이데 조선 북부에 북경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조선 내에는 그들이 실토한 것처럼 경비가 심해 서양인들이 함부로 왕래가 불가능하지만 북부지역에 무역거래소를 열고 그곳에 서양인들이 많이 들락거렸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그곳을 1883년 청조와 조선간에 상민(商民)무역 통상조약 중강통상장정(中江通商章程)의 장소로 알려져 있고 역시 서양인들이 중국이라고 하는 곳으로써 조선특별시 봉성(奉省)이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존 역사를 사라지게 만드는 가장 적합한 수단은 유적이나 유물들을 태워 없애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를 보면 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전란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고 하는 문장들이 주를 이룬다. 그렇게 해야만이 새롭게 재창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역사가 다 그 모양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역사만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싶은 조선영역과 북경이 그러한 처지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북경은 중국 성도라고 알려지지만 사실상 고려(COREA)의 관할지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공교롭게도 애로호사건 다음해 1859년은 다윈의 종(種)의기원이 발표된 해이며 이것은 서구의 식민주의가 태동할 때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란 저서는 그들에게 상징성과 마찬가지다. 이때부터 서구세력들은 온천지를 소유화하기 위해 준동을 하였고 그들의 무기인 자본력으로 전쟁을 도발하는 것은 또 다른 자본을 축적할 수있는 기대감이 충만하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며 어떤 거대한 체제가 있어 그것을 전복시키고 해체시키는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그짓을 계속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제국주의에 의한 도발은 계속되었고 최종 목표는 우리가 예상하는 조선(朝鮮)임을 알 수 있는데 제1차 아편전쟁(第一次鴉片戰爭:1839-1842)으로부터 조선 신미양요(辛未洋擾:1871)까지의 서구세력들이 개입된 사건 정황은 정말로 치밀하였으며 기존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체계적으로 그들이 하나하나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서세가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자신감을 얻었던 것은 바로 애로호사건에 의한 1858년에 체결된 천진조약(天津條約)이다. 천진은 인천이란 의혹도 있으나 인천과 제물포(濟物浦:Jemulpo/Chemulpo)는 다른 지명일 가능성도 높아 아직 더 찾아야 한다. 제물포는 보스톤이란 추측도 본 블로그에서 밝혀 보았지만 탐구과정에서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선 노력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한계를 절실하게 경험했으며 좀 더 서세들이 활동한 것처럼 적극적이지 않으면 어느것도 밝힐 수 없다는 사실도 느꼈던 바가 있다. 때문에 역사찾기에는 지금환경으론 한계가 분명하게 있다. 당시 만다린이라고 알려진 중국공관들은 사실상 중국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해야 했던 서양인들의 일반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며 서양인들은 청조(淸朝)를 중국이라 하면서 압박하였던 것은 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전 성격이 강했다. 청조라 하였지만 조선 중앙정부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오히려 만다린을 서양인들이 코리언 만다린(corean mandarins)라고 했지 청 만다린((Qing mandarins)이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고 청조를 청정부(Qing Dynasty)라 하였지 청제국(Qing Empire)이라 하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하게 있다. 또한 일본인들은 지나조선(支那朝鮮)이라고 한 호칭에서도 우리는 바르게 이 혼란스러움을 극복해야 한다. 例へば支那朝鮮の政府が古風の専制にして法律の恃む可きものあらざれば、...支那朝鮮の士人が惑溺深くして科學の何ものたるを知らざれば、[脱亜論]위의 글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원문 문장을 발췌한 것인데 "지나조선의 정부..." 또는 "지나조선의 선비..." 등의 문구가 발견된다. 일본인들이 지나조선(支那朝鮮)이라 한 것은 바로 조선내에 청정부를 말한 것임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서양인들에 의해 청조가 중국처럼 만들어진 것도 사실상 그들의 계략이 숨어있는 것으로 조선의 위치를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다. 청조를 압박한 나라를 살펴보면 러시아, 미국(米國), 영국, 프랑스인데 1858년 일본에게 불평등조약을 요구한 서세5개국 중 네덜란드만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네덜란드는 바로 일본연합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조선영역내에 존재하였던 일본을 그들이 접수하고 이어 청정부까지 손안에 넣으려 했던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http://blog.daum.net/han0114/17049532"의 소제<일본정부가 발행한 네덜란드어 화폐>에서도 설명했지만 네덜란드가 1641년부터 1859년까지 일본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 독점적으로 허용한 무역상관(商館)을 설립할 때부터의 역사과정의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왜 네덜란드만 허용했다고 할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4년 후 1602년 인도네시아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가 설립되면서 식민지화했다고 하지만 자바(Java)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면 일본정부가 네덜란드 화폐를 발행한 이유나 사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인데 네덜란드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글쓴이가 이를 파헤치기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것 같지만 이미 결론은 네덜란드가 일본이거나 일본을 가장한 서세무역연합체라는 사실이 거의 확인 되었다고 본다. 조선(朝鮮)을 점령하기 위해 먼저 네덜란드라 인식되는 서구대리국무역상업연합체(西歐商業聯合體) 또는 일본무역연합체 명칭으로 만들어야 했고 서구(西歐) 5개국이 깊숙하게 개입한 상태에서의 일본(日本)은 1858년부터 시작된 왕권복고(王政復古)와 명치유신(明治维新)이란 역사 사건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이미 아시아를 탈피하고 서구로 들어간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구실을 찾았다고 볼 수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일본 구성원들 스스로가 유럽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오히려 구성원들은 서구인일 가능성도 높다. 일본이 끝까지 독립적으로 국가를 영위한 것처럼 하고 있지만 글쓴이의 판단은 그렇지 않다. 서구자본력이 어떤 식으로든지 투입된다고 할 때 상식적으로 자본을 지원받는 입장에서는 크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당시 일본 내 거주하던 네덜란드인이라 할지라도 일본은 사형으로 처벌했다고 알려지는 것도 동양열도일본인들이 할 수 없는 것이며 서구인들이 구성원으로 상당하게 일본을 점유하고 서구인들에 의해 통제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일본인들의 정체성이 딱히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유럽인들의 충실한 개나 사냥꾼으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으며 서구인들에게 완전 귀속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동양열도인들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역사 딜레마(dilemma)가 분명하게 존재한 것이다. 만약 특별하게 민족, 혹은 국민정체성에 구애되지 않았던 체제였고 일본(日本)은 삼한역사(三韓歷史)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역사성과 그 구성원들이 이미 서구쪽에 기울어져 있었다고 볼 때 동양역사의 일본이 아닌 서구역사의 모태가 될 수밖에 없는 체제 환경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크다. 일본에게 1858년 수호통상조약을 요구한 5개국의 서구인들은 조선을 상대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역할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일본을 앞세워야 했던 당시 국제상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란 판단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서구세력들은 일본이란 가면을 쓰고 서구 친정체제를 만들었고 그 마수를 조선을 전복시키는 방법 또는 수단 방편으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1858년 이전의 일본과 이후의 일본(日本)이 다르다는 것은 여러면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근대사를 바탕으로 진행과정을 맞춰보면 1854년에 우라가(浦賀)에 들어닥친 미국(米國)의 페리함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미일화친조약(米日和親條約)을 맺었고 그로부터 4년뒤 1858년에 미국(米國)을 포함하여 서구세력 5개국으로부터 불평등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나약했던 일본이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조선(朝鮮)을 상대로 위협했다거나 도발했다는 것은 당시 힘의 원리상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선두로 한 서양연합체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조선이 아니었던가. 일본 스스로가 강화도사건을 촉발시킨 부분에는 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은 일본이 독자적으로 감행했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며 1854년에 들어닥힌 신생국 미국(米國)으로 인해 힘이 강해진 상태라고 하겠지만 등뒤에서 미국(米國)을 포함한 서양연합체가 일본을 조정했거나 도발을 유도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서구자본세력들의 대리국(對理國)이라 칭하는 것이다.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 또는 운양호사건(雲楊號事件)이라 하는 내용을 간단하게 보면 1875년 9월 20 일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있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초지진(草芝鎭)에 함포공격을 가했고, 제물포 해안의 영종진(永宗鎭)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에게 공격하여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혀놓고 퇴각한 사건이라 했다. 1871년 신생국이지만 서구세력 중에 군사력이 강했다고 보는 미국도 신미양요를 일으켰지만 본전도 못찾고 결국 달아났던 사례가 있다. 1866년에 예수교 천주교를 탄압했다고 침입한 병인양요(丙寅洋擾)의 프랑스는 어떤가. 달아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요(擾)라는 것은 큰 전쟁이나 난이 아니라 그냥 어지럽게 한다는 소요이다. 그런데 그로 부터 불과 4년후 미국에게 불평등조약을 맺기까지한 일본이 프랑스와 미국(米國)도 못한 짓을 일본 스스로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아주 이치에 맞지도 않는 헛소리에 불과하게 들리는 것이다. 힘의 균형과 도발이 그저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하여 그것이 사실처럼 인정되는 것은 곤란하다. 더군다나 사실과 이치를 바탕으로 하는 역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자에 언급한 2차 아편전쟁에서 1858년 애로호사건처럼 해적선에 꽂은 영국깃발을 조선 청정부(清政府)군인들이 손상시켰다고 시비을 건 것처럼 이 사건도 이와 똑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에 의한 강화도사건은 강화도를 목표로 한 1871년 신미양요와 판박이다. 즉 이것은 일본, 미국(米國) 따로 나눌 것도 없는 한 세력이 4년을 간격을 두고 도발한 사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1858년으로부터 약 18년 경과 후를 비교할 때 조선(朝鮮)이란 체제의 아우라 가리개에서 적어도 임진왜란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발방지를 한 것이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인데 그로부터 근 250여년을 조선의 보호받았던 일본이 1858년 서구5개국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갑자기 전환하여 서세앞잡이가된 것은 이해하지만 독자적으로 조선을 겁박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1868년 프랑스가 도발한 병인양요(丙寅洋擾)나, 1871년에 미국(米國)이 도발한 신묘양요(辛未洋擾)는 조선을 이겨내지 못한 도발로 끝이 난 것이다. 그렇다면 4년후 이들의 연속되는 협공에 조선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또는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맺었다는 것은 이미 내부적으로도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지경에 이른 것이고 조선내부나 일본의 권력 중심부에 순수한 조선인이나 일본인들이 존재했다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더 크다. 서구세력들의 힘을 빌려 왕정복고와 동시에 유신체제를 완성하였다는 것은 스스로가 개혁이나 혁신을 통하여 체제유지를 했다는 차원이 아니다. 서구세력들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자본이며 자본을 빌려 재정부족에 막았다든지 아니면 급하게 개발경제로 인프라를 구축 때문에 자금이 필요했다든지 어느쪽이라도 서세의 높은 이식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그것에 반대급부를 제공하기 위해 체제자체가 위험을 부담해야만 했을 것이다. 어떤 결정권을 서세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 뻔하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일본은 유럽국민국가(Europe, 國民國家:nation-state)체제처럼 서구국가조직들이 모여 만든 연합체제에 완전하게 귀속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역사상황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당시 조선 가까이에 일본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고 조선으로부터 정치적 간섭을 지속적으로 받았던 일본이라면 더욱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근대사에서 이를 속이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미국을 포함한 서구세력들에게 1858년부터 식민지가 되었고 조선침략의 발판으로 삼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일본도 쿠바처럼 조선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끝내 일본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米國)이 쿠바에 상륙한 역사는 1898년 이전에는 나타내지 않고 미서전쟁(米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이라는 상황을 통해 쿠바를 점령한 것이 기록의 전부로 역사가 비슷하다. 쿠바를 식민지화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연속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서구 유대 자본력이 침투하거나 지원을 받게 되면 폭등하는 이식(利息)은 기본이고 받아먹는 즉시 즉사하는 독약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독립을 원하던 반체제에서 서구의 자본을 두려워할 턱이 없다. 이를 최종정리하면 서구5개국의 불평등조약을 맺은 1858년 이후의 일본은 오늘날 유럽역사의 모태로 발전한 것이며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연합조직체가 바로 한반도 식민지 역사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4) 서구 대리국의 정조론(征朝論) 이 연합체의 행보는 이후 어김없이 정확하게 꼭 지점으로 다가서는데 1870년대 일본에서 등장했다고 하는 조선(朝鮮)에 대한 침략모의가 정조론(征朝論)이다. 이 정조론이 생성되고 난 후 1년만인 1871년에 미국에 의해 신묘양요가 발생한다. 이어 일본이 아니라 서구연합세력이라고 판단되는 힘에 의해 1875년 강화도사건이 발생하며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1882년 5월 22일에 서세의 우두버리격인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했고 1882년 8월 30일 임오군란을 핑계로 일본과 제물포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리고 결국 1881년을 마지막으로 조선체제가 해체국면을 맞이 하게 된다. 그리나 조선체제자체가 해체는 되었지만 왕정은 유지되었다고 보여지고 그것 때문에 다시 1885년 1월 9일 조선의 한성부에서 일본과 맺은 한성조약(漢城條約)이 체결되는데 이것은 개화파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이 쿠데타를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후속책임을 적반하장으로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피해액을 요구하고 맺은 조약이다. 김옥균도 서세연합세력의 앞잡일 가능성이 매우 짙게 나타난다. 김옥균(金玉均)일당이 쿠데타를 일으킨 갑신정변은 급진개화파의 개화당이 일으킨 정변이며 이 개화당의 다른 명칭으로 독립당, 일본당, 혁신당이라 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일본의 사주를 받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다. 물론 일본은 서세의 대리국 또는 연합체성격으로 봐야 혼란이 없다. 김옥균이라는 이름은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라고 하여 얻은 이름인데 글쓴이는 이를 백인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며 김옥균이란 이름은 한반도 역사가 편찬 되면서 명명한 것이 아닌가도 의심된다. 그리고 본 블로그 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한반도 역사 지배http://blog.daum.net/han0114/17050756"란 글에서도 말했지만 1884년에 전파되었다고 하는 미국종교로 알려진 감리교(監理敎)는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선교가 이루어졌고 고종가까이에 접근이 가능한 것을 노려 고종의 윤허까지 요청한 사실과 그가 소속된 명칭이 일본당이라는 것은 무슨 말을 할지라도 역사의 어두운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든 인물임에 틀림없다. 왜 조선체제가 해체되었는데 한성조약을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조선체제가 해체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한성에 고종황제만을 고립시킨체 권력을 한정시키고있었다고 보여지고 최종 골치아픈 고종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이 모든 사건들은 결국 실행을 가능한 철저한 기획아래 진쟁한 것이며 1870년에 등장한 정조론이 축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1858년부터 정조론을 주도한 서세의 리더격인 미국(米國)이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조론의 최초계획은 일본을 점령한 1858년 서구5개국의 발상이어야 하고 그것은 그들이 넘어서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조선을 붕괴시키는 것이었으며 당시까지 조선(朝鮮)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정조론은 조선(朝鮮)은 제거해야 될 대상으로써 유일(cho·sen) 또는 하나의 체제(One regime)를 무너뜨리기 위한 백서(白書:whitepaper)라고 볼 수가 있다. 조선이 유일체제 지배국이었던 이유는 기존 동아시아역사사실과 다르게 1644년에 고려(高麗) 중앙정부라고 판단되는 명(明)나라를 멸망시킨 청(淸)나라가 정복왕조의 중앙정부를 장악할 수가 없었다고 보이며 소위 4이(四夷)의 천자의 나라 중국(中國)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체제국은 바로 조선(朝鮮)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골드러시(gold rush)와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號)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6 "에서 세세하게 밝혔던 것으로써 실제로 1866년의 미국(米國) 상선(商船)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사건이 빌미가 되었다고 하지만 1871년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한 것은 서구세력의 지속되는 기획된 것으로써 의도적인 도발이며 정조론(征朝論)의 시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정확히 조선(朝鮮)은 10년을 겨우 버티고 중심 세력으로부터 물러나는 치욕을 맞이한 것임을 알 수있는데 미국인 역사가 월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의 저서 "아시아역사[Asiatic history]"고대기원(Era)편에서 모던조선(Modern cho-sen)의 연대를 1392년부터 1881년이라고 단정을 한 사실에서도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가 이 연대를 누구보다도 확신한다는 것은 바로 미국이 정점(頂點)에 있다 할 것이다. 5) 일본과 친일성향의 생물학자 서구세력의 활동은 일본 역사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유럽역사를 기준으로 냉정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다음편에 이야기 할 "호랑이" 글 초두에서 말할 예정인 친일성향의 서양생물학자란 존재를 파악하는 일이다. 지칭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들에 의해 이상한 생물학체계가 만들어진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반드시 사전에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일본이란 국가를 동아시아에 배치해 두어야 했고 이것을 위해 거대한 음모가 작용한 것으로 파악되며 어떤 큰 외압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생물학체계변형이라 할 수밖에 없다. 현재 열도일본의 생태환경이 대다수 냉대와 온대, 그리고 소규모 범위의 아열대기후인 것에 반해 18세기 린네(Carl von Linne:1707-1778)가 생물학기초를 세울 때부터 일본(Japanese)에 대한 생물학표본범위가 엄청나게 넓었음을 알 수 있고 왠지 모르지만 세계생물학계에서 일본생물표본에 관심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중요한 생물분류체계를 보면 일본학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 독일생물학자들이 일본을 다녀가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당시 본을 다녀가지 않으면 유명해질 수 없었다는 상황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혹 일본을 방문하지 않더래도 방분한 생물학자들에게 생물표본을 공여받거나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일본은 세계생물표본채집집합장소로 오인되기까지 한다. 때문에 일본은 세계생물학 표본 근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론적으로 현대 일본열도 자연환경을 보면 이런 일이 가능 할 수가 없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한자를 중심으로 한 일본이란 국명을 호칭하지만 영어 "Japanese" 라 하는 발음이 이상하게도 동남아시아의 자바(Javanese)의 호칭과 비슷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자바니스(Javanese)와 재퍼니스(Japanese)가 스펠링에서 v, 와 p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발음상에는 수많은 명칭이 있다. P p ㅂ ㅂ과 ㅍ의 중간음 V v ㅂ 영어의 V 발음과 동일 동양에서 소리내는 음이 'V'와 'P'가 다르지 않다 하였고 'V'와 'P'는 같다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와어(Djawa, Jawa) 원음인 자와(Jawa)의 “Wa” 발음이 무슨 원리에 의해 “Pa”로 변화되었는지 음운학적 근거를 제시하라는 분도 있지만 사실상 본 블로그에서 이미 이 사실을 거론한 적이 있다. 네덜란드의 화(和:Wa)를 일본인들이 자기 상징처럼 사용하는 것이나 본 블로그 글 "1.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2"에서 말했듯이 잉글랜드인들이 사용하는 방언인 왜(倭:Wa)와 웨기(Waggie)가 된다는 사실 등에서 자연스럽게 변형이 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일본을 지칭하는 서양인들의 명칭이 확실하지 않지만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가 시팡구(Cipangu)라 한 것을 보면 'p' 발음이 서양인에 의해 상당히 강해지고 있으며 음운에서 '와'가 '바'가 된다든지 '파'로 강하게 변형되는 상황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The early Mandarin or possibly Wu Chinese (呉語) word for Japan was recorded by Marco Polo as Cipangu. In modern Shanghainese, a Wu dialect, the pronunciation of characters 日本 'Japan' is Zeppen [zəpən]; 만다린이나 소주(蘇州)의 방언 오어(呉語)에서 마르코 폴로의 시팡구(Cipangu)라 기록하였고 오어(呉語)방언인 상해(上海)현대어는 일본을 저펀'Zeppen[zəpən]'이라 발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대체로 'p' 발음이 강하다. 여기서 본 블로그가 발견한 일본과 쿠바의 위치가 동일한 사실에 비추어 쿠바(Cuba)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의미, 쿠바는 캐리비언 섬에 살던 원주민을 타이노(Taino)에 의해 유래된 것이라 하였고 옥토가 풍부한 곳(cubao), 또는 큰 장소(coabana)의 의미가 있다 하였다. At Cubanacan, that is, in the interior of the island, near Jagua and Trinidad, where the auriferous sands have been washed by the waters as far as the limestone soil.두번째의미, 쿠바나칸에서 유래되었고 쿠바나칸은 석회석 토질이 물에 씻겨 금을 함유한 모래를 가진 곳으로 자구와(Jagua)와 트리니다드(Trinidad)근처 섬 내부에 있는 명칭이라 하였다. Cuba:The name is derived from the Taino word ciba meaning stone, mountain, cave. This word is probably the origin of the name for the Cibao mountain range in the neighboring Santo Domingo island. 쿠바의 명칭은 돌, 산, 동굴(stone, mountain, cave)의미인 타이노어(Taino) 시바(ciba)에서 파생하였고 아마도 인근 산토 도밍고 섬에 있는 시바오 산맥(Cibao mountain range)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진다. 즉 쿠바(Cuba)의 시바(Ciba)는 시팡구(Cipangu)와 대입되고 자구와(Jagua)와 자와(jawa)나 자바(java)나 자파(japa) 어느 것이든 연결이 가능하다. 오히려 일본이란 위치가 동아시아 열도보다도 카리브해 쿠바와 밀접하게 접근하고 있다. 물론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 "에서 명확하게 밝혀본 결과에서도 1926년 당시 일본(日本:Japanese)이 위치한 곳이 바로 서인도제도라고 불리었던 쿠바를 중심으로 카리브해(日本海)의 각 도서(島嶼)와 멕시코동부(東部)까지 영역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만약 자바(Java)가 서인도제도에 존재한 지명이라면 자바가 결코 일본이 아니라는 주장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쿠바와 자바 섬의 형태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동서(東西) 인도제도(印度諸島:Indies)를 서양지리학자들이 근세기에 의도적으로 나누고 구분하였던 것은 하나의 체제 역사를 분리, 분해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본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가 발견한 동인도제도가 서인도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곳에 황금이 난다는 시팡구(Cipangu)가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다. 좀 특이한 예로써 바이러스 생성위치에 관한 것을 보면 바이러스가 생물학분류체계에 속하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여름철이 되면 지금도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일본뇌염바이러스(日本脳炎:Japanese encephalitis virus)는 열대기후의 풍토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온다습하고 미개발 지역이 많은 열대지방에서 많이 발생하는 병이라서 열대병(熱帶病, tropical disease)에 속한다라고 되어 있는 것에 반해 알다시피 일본이 속한 동아시아 열도가 이 바이러스의 표본지라고 하는 것은 결코 맞지 않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일본풍토병 리케차(Japanese river fever)가 그런 것인데 본 블로그 글 "일본풍토병 리케차(Japanese river fever)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7"에서 밝혔지만 리케차(rickettisia)는 발진티푸스(發疹-typhus)의 병원체로서 로키산열(Rocky Mt. spotted fever)환자의 혈액 속에서 이 병원체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현대 일본과학자들도 이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풍토병이라고 알려진 일본홍반열(日本紅斑熱:Japanese spotted fever or oriental spotted fever)이 현재 열도(列島)에서 발병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앞에서 서구세력의 엄청난 능력을 살펴보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맞다. 바이러스입자는 표본을 수집하거나 채집하는 곳의 위치명을 속명이나 종명에 두는 것이 맞는데 하필 열도일본이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일본 뇌염 자료를 보면 아시아에서 주로 발생한다고 했지만 바이러스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진화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하였으며 가끔 서태평양근처 미국영토에서 발생되는 풍토성 전염병이라 하였는데 이런 풍토병들은 본래 해적들의 은신처라고 할 수 있는 곳인 대서양에 무수히 많은 섬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1930년에 일본뇌염바이러스를 대항해 백신을 만든 것도 일본이라 하였는데 열도에서 발생한 환자가 없는데 무엇때문에 백신을 만들었을까? 정말 모를 일이 아닌가. 식물표본에 일본학명이 붙은 것들도 보면 일본바나나(Japanese Banana, Japanese Fibre Banana)가 그렇고, 일본시나몬(Japanese cinnamon)이 그렇다. 현재 열도의 기후와 맞지않는 하나같이 열대식물이라는 사실이다. 열도일본을 세계 전체 생태계로 취급한 사실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현재 열도일본 기후를 감안하지 않는 비상식적이 수준의 세계생물학분류체계가 엄청난 수의 종들이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본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은 당시 생물학자들이 현재 열도일본에서 생물표본들을 수집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은 본 블로그에서 이미 수많은 생물들의 근원지 파악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열도일본과 기후환경, 생태환경에서 생물분류체계와 이런 차이가 현저히 들어나는 것은 역사모순 만큼 뒤틀림이 존재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인데 당시 생물학자들이 열대기후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엉터리 학자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결국 생물학 아버지로 알려진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e:1707-1778)로부터 시작되는 근대생물학체계는 이런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가장 요인으로 부가되는 것은 바로 2차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기존 역사위치와 전혀 다르게 위치변경이 존재하였을 것이란 반증이다. 역사를 비교할 때 신뢰할 수 없는 자료들이 현재 전세계에 판을 친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한다면 지금 당장 일본생물학분류체계를 바로 고쳐져야 한다. 현재 동아시아 열도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닌 어떤 곳에서 그 많은 채본을 하였는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로인해 수많은 유명하고 존경받아야만 하는 생물학자들이 형편없는 사기꾼으로 매도당하지 않게 지금이라도 세계생물학계는 이를 재고하고 수정해야 마땅하며 왜 그런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솔직하게 밝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인류사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이야기다. 생물학자 본인들이야 말로 근세기에 벌어진 이상한 역사판짜기로 인하여 자신들의 명성이 손상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18세기 때 역사가 이렇듯 뒤틀림이 발생할 것이란 예측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친일성향의 생물학자라고 글쓴이가 구분하는 것도 사실상 무리가 많다. 글쓴이가 판단할 때 서구무역상업연합체 성격의 정치단체가 생성될 시기인 1858년을 깃점으로 진실된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친일성향의 생물학자로 구분하였지만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역사를 바로잡고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지금 그 시대적 상황을 보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세밀하게 구분을 하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라틴어 주격에서 japonicus(남성격), japonica(여성격), japonicum(중성격)의 학명을 사용하며 명명한 생물학자들을 보면 '일본의 린네'란 별칭을 가지고 있던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 네덜란드의 동물, 조류 학자인 콘라드 야콥 테민크(Coenraad Jacob Temminck:1778-1858), 일본생물학의 전문가인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Balthasar:1796-1866), 독일식물학자인 요제프 게르하르트 주카리니(Joseph Gerhard Zuccarini:1797-1848), 자연사 박물관의 동물 관리자 독일인 헤르만 슈레겔(Hermann Schlegel:1804-1884), 네덜란드 출신 박물학자 마틴 후튠(Maarten Houttuyn:1720-1798)등이다. 19세기에 활동한 친일성향의 생물학자들은 대다수가 네덜란드와 독일인이며 인도유럽어족(語族) 서게르만어파(語派)종족으로 게르만계네덜란드(German-Dutch)로 구분지울 수 있다. 5) 유럽역사와 조선의 운명 이들에 의해 일본은 대리국으로써 명실공히 식민지 제국으로 발돋음한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 했다는 역사는 현재 열도일본은 물론이고 당시 서양세력들에게도 큰 선물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생각해보면 그러한 식민지란 역사적, 정치적 구속으로 인해 부수적으로 그들에게 안겨지는 전리품은 지대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세계사학자들은 유럽상업자본(商業資本:commercial capital)은 식민지 착취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 이것은 자본괴물인 로스차일드(Rothschild)를 만들었고 로스차일드 시오니즘 동맹체(Zionism alliance frame:同盟體)가 만들어진 과정에서도 이와같은 식민지 착취에 대한 의혹이 짙다. 자본이 괴물이 아니라 자본을 시장경제 이외 부정적인 곳, 또는 자본에 취약한 곳을 찾아 집중적으로 투자하거나 운영하는 사람들을 자본괴물이라 한다. 늘 이러한 곳에 유대자본이 버티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운영하는 자본은 결국 하나의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효율적인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다. 조선(朝鮮)이 자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재정결핍이 제일 컸을 것이지만 주요 원인으로는 자본에 의한 민중들의 권태감과 새로운 체제의 기대감에 따른 혼란된 심리적 상황이 더 크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자본파고에 체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것으로 풀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더 한 것은 자본이 여론을 지배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여론을 부정적으로 몰아갔다는 사실, 서구세력들의 치밀하고 냉정한 조선(朝鮮)체제 흔들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강력했던 제정체제가 한순간에 힘을 읽는다는 것은 프랑스혁명이 잘 말해주고 있다. 본 블로그 글 "태프트 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은 없었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751"에서 밝혔던 이야기지만 소설가 박경리(朴景利:1926-2008)선생의 유고집 ‘일본산고(日本散考), 증오(憎惡)의 근원(根源)'에서 일본의 그토록 잔인한 식민정책중심부에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옛날 지독한 반체제가 일본으로 건너갔나 보다." 하였고 “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 잔인무도한 그들 조상인가 보다 하고 뇌까린 적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혹 박경리선생은 세계삼한역사관을 조금이라도 눈치채었을까? 언제인지는 확실 않지만 상대적으로 조선에게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증오의 대한 근원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처럼 마치 역사적으로 숙명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음을 알 수가 있다. 작가의 이러한 예측은 거의 맞아 떨어진다.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이전 옛 조선(三韓朝鮮)이 오늘날 유럽을 형성하고 있는 서양세력들을 기본적으로 체제유지를 위해 과하게 핍박하였고 “왜(倭)”라 하며 천시하였던 역사가 존재했을 것이란 짐작은 되지만 어떤 식의 극단적 차별행위가 행해졌는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서양역사를 보다보면 짐작이 가능한 것인데 유럽프랑스역사에서 구신(舊新)종교대립이라고 하는 위그족의 탄압이 이와 같은 성격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바시(Wassy)학살과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olomew)로 시작된 위그노전쟁 혹은 프랑스 종교전쟁(French Wars of Religion:1562-1598)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카톨릭과 개신교간에 종교 갈등에서 발발된 것이라지만 충돌기간도 거의 40년 정도이며 사상자만도 작게는 2,000,000명, 많게는 4,000,000명라 하였으니 종교적인 문제로 이와 같은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임진왜란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입장에서 보면 위그노 전쟁이 아니라 내란, 반란(反亂)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조선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과 시기적으로 크게 겹치는데 마찬가지로 위그족들의 반란(反亂)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이다. 임진왜란에서 사상자 수가 50만명(萬名)정도라고 하지만 한반도 역사가 10/1축소되었다고 보면 거의 피해상황이 근사치로 접근되고 조선 전국토가 유린 당했다 하며 농경지 1/3이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등은 피해상황이 적지 않음을 알리고 있다. 프랑스역사자료는 위그족 피해상황을 나타냈고 임진왜란 상황은 조선의 피해상황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조선에서 왜구(倭寇:wi:we)라 한 사실과 네덜란드를 일본인들이 화(和:Wa)라 한 사실, 그리고 잉그랜드의 방언에서 왜(倭:Wa)와 웨기(Waggie)라 한 사실 등에서 동일 선상에 놓고 볼 수 있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위그노(Huguenot)라 하면 프랑스개신교(French Protestants)라 알려져 모두가 체제입장에서는 좋지 않게 보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와같은 칭호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임진왜란이 평정되고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條)의 송사조약(送使條約)을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있는 반면 프랑스에서도 느무르(Nemours)조약보다 더 가혹한 조항이 있어 그것을 1588년 앙리 3세가 발표한 11개의 조항으로 된 연맹조약라 하는데 상당히 비교가 되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 에서 밝히길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의 선조 내력에서 1650년경에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1625-1645)의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Klaes van Rosenvelt)가 그의 조상임을 알 수 있고 이주한 시기는 네덜란드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뉴 네덜란드(1664:New Netherland)를 세우던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라 했으며 어머니 마사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아일랜드인의 피가 섞인 혼혈여성으로 밝혀지며 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인 위그노 신자(Huguenot)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얄타회담(Yalta Conference:1945.2.4-2.11)에서 결정적으로 한반도 분단 형국을 맞이하게 한 미국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는 1882년 대조선이 해체되던 시기에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Sara Ann Delano:1854-1941)역시 프랑스계 위그노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문제는 그들이 보잘 것 없는 한국을 판단하는 정치의식이 거의 같다는데 놀란다.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만난 테헤란회의(1843.11.26-12.3)에서 한국을 40년 동안 도제관리가 필요하다고 한 사실이 있다. 원문에 보면 “apprenticeship”라 하였는데 견습기간(見習期間) 또는 이를 도제(徒弟)라 하고 18세기말부터 진행된 산업혁명 이후 공장제 생산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공장소유주가 도제를 고용해 훈련시키는 제도로써 노동일지를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공식적 관찰결과를 적게 되는 생산제도의 한 방편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독립을 시키되 40년간 도제처럼 그들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일본식민지 암흑같은 생활 36년을 어렵게 마쳤다고 생각한 한국인들에게 또 다시 40년을 도제 즉 견습국으로 미국의 관리하에 두어야 했으니 일제식민지와 또 다를 바가 없는 참으로 암울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루스벨트 주장대로 남북한은 각각 서구세력의 통치를 받았는데 북한은 소련 스탈린에게 남한은 미국에 의해 1945년부터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란 제도아래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루스벨트가(家)의 두 대통령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내린 처분들은 그야말로 극약처분 바로 그것이다. 이 두 대통령은 똑 같이 한국인은 자치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선을 긋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 민족상잔이란 전쟁으로 인하여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고 그것마저도 분단이 되면서 암울했던 시대에 미국은 전범국인 일본처럼 경제원조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 자립하여 현재 세계경제대국이 된 사실을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당시 한반도 역사가 말하듯 보잘 것 없는 문맹율도 높고 부패가 만연한 관리와 뛰어나지도 않고 나약하게 남의 나라 침략만 받고 살았던 그래서 늘 속국민이었던 한국인들을 왜 그렇게 모질게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박경리 선생이 지적하고 의문을 가졌듯이 일본이란 식민주의에 몰입된 서구세력들이 지난 위그족 즉 왜구(倭寇:wi:we)시대의 핍박받은 앙갚음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낳게 하는 것이다. 두 루스벨트 대통령은 뿌리부터 위그노였다는 사실이 자꾸 켕긴다. 6) 미국(米國)은 정조론과 무관한가. 그렇다면 미국(米國)은 정조론과 정말로 무관한가. 정조론(征朝論)을 완성한 미국(米國)은 1945년 비로소 세계를 장악하고 세계질서를 손아귀에 넣은 후 한반도에 일본식민사관을 만들어야 했을 때 실제로 하나의 체제로 존재한 조선(朝鮮)역사를 손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작업에는 전자에서 언급한 위그노 즉 왜구라는 시대에서 저변에 깔려있는 원한의 역사에 대한 강박과 심리적 압박이 지배했을 것이란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다. 아마도 현재 한반도인들이 내면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강박과 트라우마 정도가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열도일본이 독자적으로 이런 역할을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서구세력제국들은 대리국가 형태에 불과한 열도일본을 조선과 상대적인 강한 일본을 만들고 조선과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에 심으면서 최종 그들의 원하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야 한다. 그 덕에 한반도 사람들은 영원히 그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역사의 낙인이 찍혀버린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이미 1858년에 구상된 역사프레임속에 갇혀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있는 곳에 일본을 심어 역사의 라이벌 또는 숙명적인 관계로 삼는 것은 그들에게 손해가 될 것이 없다. 그들의 힘이 필요하다면 항상 일본 뒤에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면 된다. 현재도 그러한 양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한반도인들만 모르뿐이다. 언제든지 감쪽같이 껍데기만 벗어던지면 되고 골치 아픈 역사굴레에서 빠져나오는 것까지 치밀하게 계산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유럽대륙에는 역사적으로 동질성의 서구세력들만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모양새는 역사연속성이나 지속성이 아니라 근세기에 물리적으로 조정하고 정리한 느낌이 크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러시아의 수학자 포멘코의 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증거이다. 서로가 같은 역사이면서 다른 것 같이 꾸며서도 결국 동질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현재도 유럽연합체를 근거로 “하나의 제국”을 모방하려고 하는 상황을 볼 수 있으며 어쩌면 근대사 전체에서 유럽제국과 일본역사의 밀월 관계는 아마도 영원히 가지고 가야할 비밀이 아닌가 한다. 역사가 진실성을 가진 것 보다 근대사가 가지는 것은 어떤 축을 중심으로 개연성을 파악하는게 더 정확하다. 이런 과정을 좀 더 세세하게 설명을 하면 17세기부터 불어 닥친 유럽역사 주요사건들에서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있는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산업혁명이 나열될 수가 있으며 이 주요사건은 어떤 연관성이 긴밀하게 있고 굵은 선을 연결하듯 하나의 축으로 이어져 잘 짜여진 시나리오를 보는 듯하다. 1534년에 에스파냐(España)군인 출신이며 수사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1491-1556)에 의하여 설립된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이를 총체적으로 지휘 조정한 느낌이 있고 이 조직을 바탕으로 기독교국가 연합체제를 치밀하게 구상하였을 것이며 이러한 원대한 목표를 위해 예수회에서 장기적으로 수많은 특출한 인재를 적극적으로 키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마침내 그들에게 닥쳐온 중세 르네상스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각처에서 예수회가 양성한 인재들이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중세기의 르네상스(Renaissance, Rinascimento)는 프랑스어로 “Au printemps, c’est la renaissance de la nature”라 하여 “재탄생”이란 의미와 같이 문예부흥과 학예부흥을 통하여 과학토대가 마련되면서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는 것이기에 그들에겐 황금 같은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바탕들은 근세기에 역사판짜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학분야 세계생물학계와 지리학계를 휘어잡을 수 있는 동력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세계전역에 걸쳐 지도를 만들고 그리고 편집하여 배포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거대한 역사성에서 찾을 때 한꺼번에 지울 수도 없는 고대역사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접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세계전역에 존재하던 역사성을 서서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것은 가능하겠금 산업혁명은 그들 편이었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에서 밝혔듯이 금속활자를 처음 사용한 예는 고려(高麗) 고종21년(1234)이며 고려금속활자(高麗金屬活字)가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1398-1468)에 의해 인쇄기로 탄생되면서 문예부흥과 학예부흥을 촉진시켰다 하였으며 이 인쇄기로 인하여 정보지식의 전파가 급속도로 빨라졌다고 알려진 것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의 종교혁명과정과도 밀접한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 국민국가(國民國家,Nation state)개념과 경제적 형태로서의 자본제적 시장경제체제는 전통적인 절대왕정체제(Absolute monarchy) 혹은 제정체제(帝政體制)를 붕괴시키게 되며 서양세력이 소유한 자본에 의해 절대왕권이 속박되고 끝내 왕정체제가 해체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이 시장경제체제는 그들이 판다하기에 고약한 절대왕권을 극복했겠지만 또 다른 거대한 자본괴물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인류사에서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상대적이지만 지배력의 기울기는 평형을 이룬다고 보아야 맞다. 역사가들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상대적으로 통일 된 국가와 정체성의 조기출현에 주목한다 하였지만 상업을 주관하는 주식회사가 국가라는 등식으로 근대사 전반에 걸쳐 인식되어 나타난다는 것도 정상이라 할 수없다. 주식회사가 마치 국가처럼 근대사가 확대시키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만약 절대체제가 있는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것으로 국가조직처럼 행위한다면 절대체제관리들이 그들을 그냥 두고 보았겠는가. 반역단체조직이라고 아마도 씨를 말려 버렸을 것이다. 절대로 행해서는 안되는 위험한 짓이라는 것은 주식회사 통째로 날라 갈 수 있는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의 절대적인 왕정체제(Absolute monarchy)가 존재하였고 일부 유럽왕국들이 존재하였겠지만 이를 국가완전체로 본다는 것은 넌센스(Nonsense)다. 하지만 19세기 중엽부터 유럽왕국들은 일본과 합체된 국가조직체로 곳곳에 나타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체제를 상대하기가 개개 유럽왕가와 그들의 회사들의 힘이 부족했을 것이란 판단이 있고 그들은 어차피 봉건제도의 봉건주(封建主)로써 체제의 감시를 피해만 해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본이 있다 하여 토지를 마음대로 매입할 수 없었던 때가 아닌가. 이것들이 일본연합체로 합체되면서 명치유신(明治維新)이라 하였고 밝은 정치로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뜻인데 유신(維新)은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B.C.403)시집, 시경(詩經)대아(大雅)의 문왕(文王)편에 “주(周)나라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문왕(文王)이 나와 나라를 혁신시켰다”에서 나온 문언에서 보며 개혁이고 혁신한다는 뜻이다. 자본주 조직체 일루미나티(Illuminati) 또는 광명회(光明會)가 라틴어로 ‘계몽하다’ 혹은 ‘밝히다’라는 뜻의 “illuminatus”의 복수형 인 것도 자본으로 세상을 밝히겠다는 목적을 볼 수가 있다.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존 나라가 있었다면 새롭게 혁신하고 개혁하겠다는 뜻인데 기존 막부정권을 있었다고 하지만 서구세력들에 의해 나라가 또는 자치체제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일본이되 기존 네덜란드 세력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다. 유신정권이 들어서고 바로 탈아입구(脫亞論)주창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지배력을 가진 조선(朝鮮)의 통치력이 자체적으로 크게 약화되었거나 혹은 그들에 의해 약화되어 이미 세계질서의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진 것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서구세력의 자신감에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당시의 일본정치상황을 들여다보면 1858년에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제국들이 전부 모여드는 형태가 되었고 표면적으로 일본(Japanese)이란 국명을 내 걸고는 있지만 사실상 서구세력들의 거대한 무역 상업적 동맹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세력들에 의해 체결된 조약들은 대부분 불평등 조약(不平等條約:Unequal treaty)이다.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런 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역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부정부패와 재정결핍에서 오는 제약과 압박이 있었을 것이고 일본은 서구자본이 절실하게 필요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조선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서구세려들을 끌어들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근대일본역사에서 보면 페리에 의한 1854년 미일화친조약(米日和親條約)에 이어 1858년에 경제 확대를 위한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맺게 되는데 미국(米國),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5개국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서구자본력의 합체 의미라 할 수 있고 일본입장에서야 굴욕적인 통상조약이라 하지만 오히려 적극적이거나 지배력을 서구세력들에게 넘겨주는 시점으로 이를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カ国条約)이라 한다. 이미 안전하게 주인이 바뀐 것이다. 이때부터 막부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데 이를 ‘안세이[安政]의 대옥(大獄)’이라 한다. 서구세력들은 기존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일본역사가 어떻든 간에 일본은 서구세력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넘겨준 것이다. 이것은 조약의 형식을 빌었지만 일본이란 국명을 앞세워 이 5개 국가가 상업적으로 단합하고 연합하였으며 2년 뒤 포르투갈(1860), 1년 후 프로이센(1861), 5년 후 벨기에(1866), 이탈리아(1866), 덴마크(1866), 또 2년 후 스페인(1868), 스웨덴(1868), 노르웨이(1868), 마지막으로 1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1869)까지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총 유럽 국가들을 망라한 상태의 경제연합체제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절대 개개별로 국가라 할 수 없는 체제 귀족이나 봉건공작 또는 왕실가족, 하나의 주식회사 형태일 것이며 기실 조선(朝鮮)과 조선 중앙정부(만다린)로부터 국가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日本)을 앞세운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근대사는 기존 상식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들의 거대한 자본을 축으로 세계경제질서를 장악하려 하였던 것은 그들의 힘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며 결국 영국금융을 지배하고 영국국가 만큼 거대해진 유대자본가 나탄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1777–1836)가 탄생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이 인물은 세계금융을 지배한 세력이며 후발주자 미국(米國)으로 볼 때 이 위치에 있는 자본주가 바로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1837-1913)이다. 모건은 미국의 상징처럼 여러 포스트지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엉클 샘(Uncle Sam:US)으로 상징된다.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국제금융은 모건에 의해 미국으로 넘어간다. 금융의 힘은 어지간한 국가는 매치고 내던질 수 있는 힘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돌이켜 볼 때 현재 열도일본에서는 1858년에 서구세력들의 이 같은 조치를 굴욕적인 통상조약이라 하고 있지만 이때부터 조선(朝鮮)에 예속된 도쿠가와 막부정권(德川幕府)시대보다 훨씬 힘이 강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구세력들이 연합한 국민국가체제가 바로 신생국가이며 이러한 국가조직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명실 공히 조선(朝鮮)과 대등하게 경제규모를 바탕으로 상대가 가능했다는 자신감을 찾을 수가 있다. 때문에 노골적으로 스스로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Greater Japanese Empire)이라 칭하면서 역사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1868년 4월 6일에 왕정복고를 완성한 후 덴노(てんのう:天皇)가 통치 원칙을 공포한 5개 조항의 어세문(五箇条の御誓文:Charter Oath, The Oath in Five Articles)을 보면 1조(条), 널리 회의를 일으켜 제반 문제를 공론에 따라 결정한다. 2조(条), 상하 합심하여 활발하게 경륜을 편다. 3조(条), 문무백관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기 그 뜻을 이루고 불만이 없도록 해야 한다. 4조(条), 구래(舊來)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천하의 공도를 따른다. 5조(条), 지식을 세계에 구하고 호국(護国)의 기반을 굳건히 다진다 라고 하면서 대외 공표하였다는 것은 선포적인 의미가 있으며 1조(条)부터 4조(条)까지 서구 국민국가체제를 말하고 있으며 마지막 5조는 서구선진문물을 취해 호국을 하겠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팔굉일우(八紘一宇)라 하여 극에 달하는데 “팔방의 멀고 넓은 범위 즉 온 세상이 하나의 집이 된다” にほんしょき의 「六合くにのうちを兼ねて都を開き、八紘あめのしたを掩おほひて宇いへにせむ(The World Under One Roof)하였고 이는 얼굴이 가려진 유럽연합체제 즉 일본의 침략 논리를 뒷받침하는 주요 개념의 하나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고 “세계가 한 지붕 밑에 있다”하여 서세의 식민주의를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체제의 본 모습은 어디서 볼 수 있는가. 더 이상 열도일본이라 하지 말자. NBC의 해설자 조슈아 쿠퍼 라모(Joshua Cooper Ramo)의 역사관이 이토록 노골적인 것을 감안하면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인데 이제 역사 가면을 벗고 솔직해졌으면 한다. 진동하는 구린네는 어찌할려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국민국가" rel="tag" target="_blank">국민국가</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데지마" rel="tag" target="_blank">데지마</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예수회" rel="tag" target="_blank">예수회</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탈아입구" rel="tag" target="_blank">탈아입구</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쿠바나칸" rel="tag" target="_blank">쿠바나칸</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J. P.모건" rel="tag" target="_blan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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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호랑이와 조선호랑이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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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호랑이와 조선호랑이 찾기 글쓴이:한부울 서(序)인도(印度)와 코리아호랑이의 종(種)알타이의 본질1844년 국제환경호랑이 먹이사슬일제병탄기의 해수구제사업호랑이는 아시아지역에서만 서식하였다?마무리 서(序) 글쓴이가 제목에 한국호랑이만 찾을 것인가 했다. 그렇다면 한국호랑이 말고 또 우리와 관계되는 호랑이가 또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름이 변형이 되었지만 조선호랑이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한국호랑이와 조선호랑이는 같은 것이 아닌가.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하겠지만 동부호랑이와 서부호랑이가 그것이다. 동부호랑이를 조선호랑이 또는 카스피해호랑이, 인도호랑이, 벵갈호랑이, 서부호랑이를 한국호랑이, 시베리아호랑이, 아무르호랑이 라고 정리되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명확하게 근원적으로 생각해야 할 구분은 1844년 이후 세분화작업에 의해 생성된 종명들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해야하고 동부호랑이는 조선호랑이로 서부호랑이는 한국호랑이로 최종 단일 명칭으로 구분 정리되어야 마땅하다. 한국호랑이, 혹은 조선호랑이의 역사정체 찾기가 다른 생물체를 찾는 것 보다 어렵다는 것은 서세 주도에 의한 근세기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본래의 서식지를 인위적으로 엉뚱하게 변형시켜버린 생태 환경적 요소가 크기 때문이고 또한 생물학적으로도 한국호랑이의 개체 근원이 다른 개체인 것처럼 완전하게 변이, 변형시켜버린 상태에서 그것이 변한 원인 조차 찾을 수 없는 혼란 그 자체이며 이것은 역사를 잃어버리고 고유의 영토를 잃어버리는 순간부터 발생할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적, 숙명적흐름에서의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근원의 참 실체를 생물학계 전반에 걸쳐 생산된 엄청난 자료들이 그나마 찾으려 하는 모든 것을 방해하고 있고 진전을 철저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현재 남아 있다는 생태 기록과 생태적 기술 환경은 참 실체를 더욱 찾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곤욕스럽게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생각해보면 참 실체를 막고 있는 이런 자료들이 눈덩이처럼 쌓이게 시작한 시기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재론한다면 서세의 생성과 함께 태생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예수회와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기적으로 따진다면 중세 르네상스라 판단되지만 변혁의 큰 폭풍은 바로 유대인 산업부르주아(bourgeois)계급반란에 의해 발생한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을 지적할 수 있고 더불어 등장한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키며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에 의해 대륙서쪽 영역에서의 영토주인들이 마구 바뀌기 시작하는 혼란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그러한 시각을 만들고 사실의 역사를 더욱 꼬이게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폴레옹이란 존재는 어느날 갑자기 종속국(從屬國)으로 전락해버린 에스파냐(España)를 압박하여 북아메리카대륙 루이지애나(Louisiana)를 차지하고 1803년에 미국(米國:이주민)에게 한반도 넓이 10배에 달하는 2,147,000㎡를 단돈 $1500,000에 매각하는 이상한 조약을 맺게 되면서부터 역사굴레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되게한 장본인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은 서세의 반란의 상징으로써 서세의 생성은 기존 체제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4.19 이후 군사쿠데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은 마치 숙주를 기다렸다는 듯이 먹어대는 기생충들과 다르지 않다. 선조 조상님들의 숨결이 녹아 있는 역사고유의 영토를 부르주아 자본으로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감히 돈으로 취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과 진배없고 또한 성스럽게 여기던 역사연속성이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해석해야 맞다. 한 뼘도 안되는 영토를 가지기 위해 수많은 군사들의 피와 땀이 옥토에 뿌려지고 그것을 담보로 모든 변환을 받아들리는 순리적인 역사바뀜도 없이 탐욕의 모태인 자본이라는 무기에 의해 한순간에 끊어지는 역조현상은 역사이치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인류가 겪은 변괴 중에 가장 씁쓸하고 황당한 변혁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이질적인 역사변혁은 역사 새판짜기를 불러왔던 것은 물론이다. 글쓴이는 지금도 변함없이 역사가 정상적인 흐름이었다면 이런 황당한 비국가대 비국가영토 할양따위의 거래는 도저히 발생할 수도 또한 인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마치 국가체제가 북아메리카대륙에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미국영토를 할양과 매입, 그리고 무분멸하게 양도가 발생한 사실에 대한 사실적 검증이 필요한 것은 천리의 이야기며 정당한 이야기다. 근세기에 발생한 할양, 양도따위에 영토거래는 모두 무효화되어야 옳다고 보는 것은 국가공적인 재산이 사유재산처럼 함부로 취급되었거나 악용되었다는 사실의 역사가 이를 뒤받침하는 것이며 때문에 국가공권력으로 막아야 했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의 단속이 존재했었다 하더라도 이긴자는 이를 아마도 삭제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나폴레옹이 주는 단서(端緖) 캘리포니아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9"에서도 이에 대한 사실을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에서 풀어 보았지만 나폴레옹의 발흥은 역시 하나의 체제에서 발생한 체제불만자에 의한 반란임은 숨길 수가 없다. 그것에 동양인은 용서가 안되고 서양인은 용서가 되어야 한다는 어처구니 따위의 평가 잣대는 고려에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삼한역사 속의 반란은 대다수 서양인에 의해 만들어진 쿠데타이다. 우리 한반도 역사책에서는 반란자가 의례이 한국인이라야 하고 지금의 우리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진실된 역사속에서 밝혀진 것은 푸른 색 눈동자의 백인이 주동자, 주모자가 된 것이 틀림없다. 대신 동양인들이 더 순종적이고 더 도덕적이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쿠데타가 프랑스어이듯이 서양세력들은 체제반란을 늘상적으로 여기던 것이기 때문에 그들 핏속에 불만의 씨앗들이 지속적으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때 평서원수(平西元帥)라 일컫던 홍경래(洪景來,1771-1812)의 난(亂)이 나폴레옹난이라고 하였고 마찬가지로 서부지역에서 발생한 관서병란(關西兵亂)의 정주성 전투(定州城戰鬪:1811-1812)가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나폴레옹에 의해 발생했던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했고 발단의 사유와 결과에 따른 영향등에서 거의 일치된 사건임을 진단 한 것이다. 서쪽의 땅, 혹은 해지는 곳을 페니키아어 낱말 에레브(ereb)라 하였고 에렙 ereb =>아랍 arab =>유럽 Europe 으로 변한 것이라고 정리되고 있는 것을 대입하면 대륙 서부지역에 유럽제국이 생성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며 예수회가 등장하고 예수회가 양성한 선교사나 뛰어난 재능이 있는 소속 구성원들에 의해 체제전반적으로 점령당할 때 그동안 숨죽여 있었던 유럽인들이 이처럼 쿠데타로 발흥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또한 같은 시기에 청조(淸朝) 호북(湖北)서북부에서 청(淸)정부를 부정하고 ‘하나의 체제’를 인정하며 청조, 반권력 폭동이 발생하였던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며 이를 백련교(白蓮敎:White Lotus)의 난(亂)이라 하는데 백련교의 모태가 조로아스터교라 하는 것과 미래불인 미륵(彌勒:Maitreya)사상은 메시아(Messiah)를 뜻하는 것인 조로아스터교의 시조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ā)나 미트라 밀교(Mithraic Mysteries)의 미트라(Mithras)를 숭상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신라왕자인 궁예역시 미륵불로 상징되고 마찬가지로 미륵사상이 부흥한 신라(新羅)는 페르시아잔존세력이라고 유추할 수 있으며 또한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도 일맥하지만 미륵신앙은 불교의 원시경전(原始經典)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고 소승(小乘)이나 대승(大乘)을 막론하고 널리 시대가 근대기에 오면서 보편화되었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미륵불교는 원시종교로써 또는 조로아스터교 또는 미트라와 동일하게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기독교와 상반되는 종교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서양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편향적은 활동 에서 중심을 찾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모든 쿠데타가 어쩌면 뿌리 깊은 종교 갈등에서 유발된 것으로써 오히려 조선에서 정조(正祖)가 죽고 순조(純祖)가 즉위한 1801년(순조 1년)에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박해 사건이 발생한 이유에서 이와같은 여러가지 요인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것들을 내부적으로 보면 조선(朝鮮)에서 내사노비(內寺奴婢)폐지 등 사회제도 개혁이 이루어지고 혁신의 운동이 곳곳에서 진행되었지만 서양세력들은 오히려 청나라라고 하는 중국보다 조선(朝鮮)에서 체제 흔들기와 전복 획책 시도가 심했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조선위정자들은 예수회를 제거하려 했던 사건이 아닌가도 한다. 조선(朝鮮)의 어설픈 조치로 결국 예수회는 정식적으로 전면에 나서며 자릴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시각에서 출발할 때 또한 산업혁명(産業革命:Industrial Revolution)역시 이러한 흐름의 역사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예수회가 주축이 되어 만들기 시작한 근대사와 중세기사건들을 중심으로 고대사까지 역사자체가 뒤바뀌게 되었다는 설과도 맞물려 있다. 때문에 당시 하나의 체제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 시기를 정점으로 하여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려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이 시기를 정확하게 위 사건들의 개요를 언급한 것처럼 1800년 이후부터이다. 이런 흐름은 어떤 기존 강력한 물리적인 힘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정도로 사회 모든 분야에서 혼란이 야기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자학적인 동양사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단어는 서세동점(西勢東漸)과 탈아입구(脫亞入歐)이다. 서세동점이기 때문에 탈아입구를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실제로 당시 일본인들을 현재 열도일본이라고 하면 크게 영향력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미 그들은 조선의 종속국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당시 일본인들이 서양유럽세력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자본이란 무기를 업고 있는 엄청난 파향이 있었음을 예측할 수가 있다. 용어적으로 전자에 것은 ‘서세들이 동쪽을 점점 장악했다’는 말이며 후자의 것은 ‘스스로 아시아를 멀리하고 유럽에 들어가고자 한다’는 어구이지만 앞에 것은 지형적인 문제가 있고 후자의 것은 아시아가 과연 동아시아대륙을 말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알 수 없지만 근대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일본인들은 지금도 친서구적은 숨길 수가 없다. 본 블로그 글"유럽과 아랍의 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5"과 "아세아(亞細亞:ASIA)란 무엇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6"에서 유럽은 아랍을 근원으로 하는 의미라 하였고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를 등에 업고 서양역사문화를 스스로 검증도 없이 만들었으며 열등하던 그들의 문화를 유럽문화로 만들고 동양문화와 다른 전통적인 역사라고 우겨가면서 이를 서양세력들의 문화적인 바탕 또는 근거라고 주장하고 사실화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실상 아세아는 땅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나라와 나라 사이를 연결하는 단어로 충분하였지만 이것이 오늘날 동아시아역사로 대칭되면서 열등역사로 만들어진 것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결코 아세아(亞細亞)가 동양, 또는 아시아를 나타내는 말이거나 상징하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니 잘못된 것이며 아마도 정상적인 세상이 갑자기 뒤바꼈다는 사실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근대사는 서양(西洋)이 동양(東洋)을 지배한다는 식으로 역사전체를 호도하고 와전시켰던 면이 많다. 자본을 무기로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을 서세 즉 서양인(西洋人)이라고 하여 힘센 놈이 주인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에 식민주의를 합리화시켰고 그들의 부흥 역사를 개신교를 앞세워 개척의 역사 또는 프런티어 정신(Frontierism)이라 하여 탐욕과 파괴를 정당화하였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역사가 남김 고통들을 대략적으로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인도(印度)와 코리아 왜 타고르 시인이 코리아를 스스로 마음의 조국이라고 했을까? 조선이 코리아인가. 대한제국이 코리아인가. 어쨌거나 조선이나 대한제국이 타고르의 조국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역사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왜 그랬을까? 본 블로그 글 "시성(詩聖)타고르의 정신적 지주(支柱)는?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1 "에서 말하길 문학가이면서 역사가이고 또한 종교인이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의 정신적인 지주와 그의 조국이 코리아란 사실을 밝혀 알았던 것임을 알 수가 있었으며 재론한다고 하겠지만 그는 명확하게 코리아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가 무엇 때문에 코리아를 자신의 조국(祖國)이라고 하였던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일부 부분적으로나마 풀어 본 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작게나 큰 부분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귀화나 동화되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가 있었으며 이들을 귀화나 동화를 강요한 일본제국의 실체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점과 답을 얻기에 동분서부했지만 명확하게 영국인가 미국인가, 아니면 일본인가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기를 주저한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근세기 역사는 혼란 스러운 것임이 틀림없다. 처음부터 동양, 서양이라는 이원법(二元法) 또는 이분법(二分法)인 근원이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마치 과거 문화부흥을 이룬 오래된 역사가 서양인들에 만들어진 것처럼 꾸며졌고 지난 역사를 애리하게 관찰하던 러시아의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에서 주장했듯이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전체가 예수회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라고 과감하게 토로한 것과는 다르게 그들 역사처럼 치장하고 도색된 것은 확인할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나의 역사가 갈기갈기 찢어지게 된 사실을 정확하게 밝혔던 사실이다. 어느날 거처도 없이 떠돌이 이주민들 신분의 처지에서 근세기에는 제왕과 귀족, 종교최고관리자까지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무소불위의 무기가 되어 버린 자본을 손에 쥔 서세(西勢)가 되었고 마침내 서세동점이란 말과 함께 역사 전면에 등장하고서부터 모든 기존역사가 철저하게 종말을 고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창조된 서양우월주의역사가 함께 동시에 모든 것이 변형된 역사는 마침내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생물학분류체계까지 영향을 주면서 기존 생물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새롭게 등장한 서세만의 생물학체계를 만들어 세계화를 구축했다는 것이 여기서 말할 핵심적인 이야기다. 이런 논점을 수백번 본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지만 공허할 뿐이다. 이러한 환경이 만들어 낸 한국호랑이의 개체를 정확하게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내용과도 같다. 일제병탄기(日帝竝呑期)에 알다시피 한국호랑이가 철저하게 살육되어 사라지게 된 원인은 개체보호가 아니라 일제에 의한 통치목적에 의한 것을 알았고 생물학적 접근이 아니라 식민지정책에 일환으로 강제적으로 호랑이를 사라지게 만든 개연성등은 개체 말살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정당화하기위해 미화하고 서세가 목적한 바를 완성시켰으며 이러한 교묘한 장난질은 오늘날 한국호랑이의 개체파악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백령도(白翎島)와 제주(濟州) 들소(野牛, 兕, bison)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0"편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서세들의 행위는 북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식량이라고 주문하면서도 들소(野牛), 버팔로(buffalo)를 맹목적으로 말살한 행위와도 같은 것으로 기존의 무엇이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남겨두지 않겠다는 잔혹한 원칙이 그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말살정책이 그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은 기독교 신이 그들에게 내린 땅으로 착각하고 그러한 착각은 온갖 살육을 최선의 수단과 방법이라 판단했을 만큼 무지막지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어쩌면 북아메리카대륙의 이주민정치가들의 정책 입안에서 단순하게 이주민들을 위한, 이주민들에게 위험이 있을 수 있는 난폭한 야생동물들을 사라지게 만들 생각만으로 살육했을 것이란 생각은 매우 순진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살육이 필요한 야생동물은 궁극적으로 돈이 될 뿐만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중요한 역사근원지 바꾸기를 위한 역사판짜기에 필요했으며 그것을 위해 기존 야생동물들은 철저한 희생물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현실적으로 따질 때 그것을 주도한 주체를 비록 우리가 일본제국(日本帝國)이라고 한정시켜 보고 있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세계삼한역사에서 왜(倭)라 했거나 동양사적으로 일본(日本)이라 한 실체는 이미 본 블로그 글에서 서세유럽식민제국(西勢植民諸國)전체의 역사프레임 틀로 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인도는 언제부터 붙여진 명칭일까? 글쓴이는 신대륙을 공시화한 제노바 해적출신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에 의해서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오래된 역사의 하나의 체제를 깨어 분리시킬 수 있는 해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아메리카대륙 전체를 인도(印度)라 했다면 이는 바로 삼한(三韓)의 별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과 한문 인도(印度)의 음차(音借) 인디아(India) 역시 당시 서세(西勢)가 만든 명칭이라고 판단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아마도 서양인들에게는 이 인도란 명칭을 열등역사의 상징처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청조(淸朝)의 관리를 포르투갈어 만다림(Mandarim)하였다가, 영어로 만다린(mandarin)이라 한 사실과 언어 변음적인 문제에서 동일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문헌학자이며 페르시아와 터키어번역가인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1746-1794)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梵語)가 라틴어(Latin),그리스어(Greek:希臘語)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여 이를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 languages)이란 명칭이라 한 것도 인도와 유럽이 언어학적으로 합체되었다고 판단한데 있다. 언어만 그렇게 생각했을까? 존스는 이와 같은 사실을 연구하고 밝혀 알았던 장소 또한 인도라 하고 그가 머물렀다고 하는 동부 뱅골, 캘커타라 하는 곳도 진보적인 문명발달이 전제되었다 할 때 현재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인가 하는 문제에서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게 하는 문제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다르게 볼 수 있는 개요는 충분하다.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는 인도에서 법률, 음악, 문학, 식물학, 그리고 지리학을 연구했고 인도문학까지 탐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그가 근무한 뱅골 캘커타 윌리암포트(Fort William)에는 영국의 중추적 법원 기구 최고법원(Supreme Court of Judicature)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인도아대륙은 서양사가 말하고 있는 이런 사실과 무색하게 현재까지도 사회간접자본이 빈약하여 운송, 교통상태가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비교한다면 상당힌 논점의 공백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럼에도 존스는 인도에서 모든 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연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쨌던 간에 상당한 괴리를 던져주는 이야기다. 뱅골은 나라 이름이고 캘커타는 도시 명이라 할 때 이 나라와 도시는 선진문명을 기반한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때문에 뱅골이 존재하던 인도아대륙과 영국이 존재한 유럽(ereb:alab:Europe)간에 지금처럼 수만키로의 항로를 왕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이라고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서양사가 주장하는 것들은 현대판 소설과 같다. 늘 상 그들은 배만 타면 모든 것을 마치 신이 이루는 것처럼 무조건 이루어내는 희한한 재능을 가진 것처럼 미화하고 그들에게 유리하게 말하고 있지만 글쓴이는 이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더군다나 선박기술이 미숙할 때인 15세기, 16세기 시기에 선박을 이용하여 왕래가 가능한 곳이 있다. 그러나 지구를 마음대로 항해할 수 있는 거리가 24,000km(61,111里)에 달하는 기나긴 항로라 하면 그것은 미친이야기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기난긴 항로를 거쳤다 하여도 지금처럼 낙후된 환경인 인도아대륙에서 정상적인 목적을 달성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24,000km이상 떨어진 유럽대륙에 있는 영국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무엇을 하기에는 넘어야 할 공간적, 시간적 장애가 말도 할 수 없이 컸을 것이란 짐작이 된다. 만약 유럽과 인도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면 언제든지 문화적으로 융합할 수 있고 이동이 자유로워 윌리엄 존스와 같은 유능한 인재도 발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진실로 그의 활동공간이 북아메리카대륙 구릉성(丘陵性) 산지가 많은 뉴잉글랜드(New England)에 캘커타가 존재하고 뱅골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 글 "여진어와 영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6"에서 살펴보았듯이 어쩜 뉴잉글랜드가 여진9성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도 무리가 없을 성 싶을 역사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글쓴이가 주장하는 것처럼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이 어릴 때부터 거주하고 연구하며 유명한 저서를 만들게 한 인도아대륙이 아닌 곳을 찾는다면 구릉성이 많아 계곡, 골이라 하였을 뱅골과 캘커타(Calcutta)가 뉴잉글랜드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판단을 해보는 것이다. 동인도회사가 지배한 시대를 영국이 지배한 시대(British Raj:1877-1947)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도 캘커타(Calcutta:1877-1912)에는 당시 동인도회사를 위한 무수한 기관이 있었을 것이며 여러 박물관 도서관, 학자들의 연구소 등등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인프라가 완비된 곳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유적들이 현재 인도아대륙 동부 서(西)뱅골 지역에 있다고 하지 않길 바란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 할지라도 전혀 문명 인프라가 없는 곳에서 연구가 가능할 턱이 없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뉴잉글랜드에 동인도회사(英國東印度會社: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1708-1873)가 설립되었다고 할 여지가 있고 또한 인도 뱅골 캘거타 역시 그곳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기때문에 필요한 인프라가 설치된 문화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국의 귀족주의는 어떻게 설명될까? 사실상 브리티시라고 하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한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영국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지배한 것이 사실이라면 인도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국이 브리티시인가 하는 문제와 동인도회사가 영국 잉글랜드 역할을 하였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세계금융을 설립하고 지배하던 자본주와 소유주는 동인도회사의 소유주일 가능성이 있고 이들은 회사가 가질 수 있는 무력을 통해 모든 것을 취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때문에 기존체제가 이를 해적단체로 규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회사가 창출한 결과물은 당시 힘이 없었던 하류의 백인귀족 작센코부르크 잘펠트(Saxe Coburg Saalfeld)에게 승계를 했거나 그렇게 승계할 수 있도록 동인도회사의 소유주가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어 신흥귀족으로 추대받았을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귀족은 산업혁명에 의해 자본이 축척된 유럽금융지배세력에 의해 구축된 것이라 해야 당시 상황들과 맞을 것 같다. 로트실트 은행 런던 지점의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2세(Nathaniel Mayer Rothschild:1840-1915)가 1885년에 귀족 직함을 수여받았다는 것은 역할에 대한 보상이 아니겠는가 한가. 1680년대 영국국왕 찰스 2세(Charles II,1630-1685,wodnl:1660-1685)가 동인도회사에 대하여 징병권, 사관임명권, 교전권(交戰權)등을 부여했다고 하지만 본 블로그 글 "하노버(HANOVER)의 역사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2"에서 바라본 것처럼 잉글랜드왕족은 삼한왕족계보를 도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스스로 귀족이 지리멸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특별하게 역사적으로 거론할 가치를 못 가진게 분명하다. 미일간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던 1858년 기간에 세포이항쟁(Indian Rebellion:1857-1858)이 발발되었고 조선(朝鮮)의 사위국(壻國:son-in-law)인 무굴제국(Mughal Empire, Gurkani:1526-1857)이 사실상 와해되자 게르만계하류귀족들이 금융자본에 의지하여 귀족권위를 합법화하고 동인도회사를 뒤로 물러나게 한 후 정부와 의회를 앞세워 역사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 나타나는 모든 증거들을 만들고 취했다고 보이고 이를 스스로 대영국제국이라 칭하면서 실권 없는 서양 로얄 페밀리 상징으로 존속하게 했을 가능성을 생각 할 수 있다. 결국 본 블로그 글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1"에서 논한 것과 같이 서양사에서 인도(印度)라고 하는 명칭은 북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에서 근거한 사실은 숨길 수가 없으며 이를 인도아대륙으로 이동시킨 시기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란 판단이다. 예를 들어 언어학자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1746-1794)같은 사람과 같은 시대이긴 하지만 결코 인도에 간 이력이 없는 독립운동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1706-1790)이 미국독립에 대해 의견조율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많고 실제로 그가 캘커타의 포트윌리엄(Fort William)의 최고 사법 재판소 판사로 임명된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를 감추는 것이며 또한 그가 24세때 이미 동양학(東方學,東洋學)에서 명성을 얻었다는 사실과 윌리엄 존스의 별칭이 윤스(Yoons)라고 발음했다는 사실 등은 동양적인 요소가 많아 아마도 그가 활동한 체제가 동양오리엔탈시대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물론 동양이라고 하면 지금의 아시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윌리엄 존스의 인도유럽어족 연구를 뒷받침하고 있는 미국의 언어학자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1745-1801)역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인물인데 뉴잉글랜드 소속 코네티컷식민주(Connecticut Colony) 이스트윈저(East Windsor)출신으로 코네티컷주(Connecticut州)동부 및 뉴욕 허드슨강(Hudson江)유역에 근거하던 모히칸(Mahican)어(語), 그리고 알곤키안(Algonquian)어(語)와 온타리오(Ontario)호(湖)에 전통적으로 거주했던 이로퀴안(Iroquoian)어(語)가 인도유럽어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발표는 그들이 표본을 수집한 지역들이 전부 동부라는 사실과 월리엄 존스와도 지역적으로도 멀리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하플로 그룹[Haplogroup] R1(Y-DNA)을 가진 동부 인디언들은 백인 통혼 이전 사진을 보아도 안와상융기(眼窩上隆起, supraorbital torus)가 발달하였고 코가 좁고 높은 형질이 많이 보이는 백색인종, 유럽인종을 이르는 코카소이드(Caucasoid)적 특징이 있다라고 본 블로그에서 말한 적이 있다.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삼한역사가 곧 인도역사이라는 이야기며 여기의 구성원들은 모든 인종을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인도가 코리아라는 것과 동일선상에서 볼 수가 있어야 한다는 최종 이야기다. 만약 하나의 체제가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발상지에서 나온 단일민족이 이웃민족들을 잇달라 침략하여 자기네 언어를 전파했으리라는 추측은 서세들은 말하기가 두렵겠지만 인도유럽어족의 공통된 조상이 스키타이족(Scythians)의 언어라 한 것처럼 1924년에 발견된 금령총 금관(金鈴塚金冠)은 북방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내외 학자의 공통된 의견이라 한 점등에서 신라가 스키타이족이라 하는 것은 곧 유럽제국들은 신라(新羅)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설명을 피할 수가 없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후세 신라(新羅)는 고려(高麗)에게 흡수되었고 우리는 이를 단순하게 고려라고 하지만 이는 대명칭 코리아이며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962-1806)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벵갈, 벵골이라는 이름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것을 밝혀 알아야 조선호랑이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근대사는 이를 인도아대륙에 지명하고 고정하였지만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인(일본:서세연합체태동)이 벵골을 언급한사실과 또한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지명을 서세가 통칭 즐겨 사용하였다고 본다면 산스크리트어가 동양만의 언어가 아님도 알 수가 있고 뱅골이란 명칭도 어쩌면 포르투갈인, 스페인인들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인지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스페인어로 벵갈렌(Bengalen) 또는 더치 벵갈(Dutch Bengal)이라 하였고 이곳에 네덜란드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가 있었다고 알려지는 것이니 다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벵갈어(語)뱅갈리[Bengali:গঙ্গাহৃদ/ গঙ্গাঋদ্ধি/ গঙ্গারাষ্ট্র; Gangarid / Gangaridai / Ganga Rashtra]는 갠지스의 심장, 갠지스 강, 갠지스 국가란 의미가 있다. Bengali:গৌড় রাজ্য], Gauṛa rajya)Gauda Kingdom meaning radiant kingdom (from Sanskrit गौड़ gauṛa "white, radiant, fair, golden", rājya, राज्य "kingdom, state"). Bengal is described in ancient Sanskrit texts as 'Gaud-Desh'.Gauṛa rajya - 또한 벵갈[Bengal]은 벵갈어(語)로 고우라 처(গৌড় রাজ্য,Gauṛa rajya)라 발음하는데 ‘가우다 왕국’을 의미하는 ‘빛나는 왕국’이라는 뜻이며 산스크리트어( गौड़) 가우라(gauṛa)"백색, 빛나고, 공정하고, 금 빛"을 나타내며, 힌두어 라자(राज्य)는 왕국과 국가를 나타내기 때문에 “가우다 왕국”을 의미하고 있고 산스크리트어의 문헌에서 '가우드데쉬(Gaud-Desh)'는 빛나는 땅, 또는 '고우라 라자(Gauṛa rajya)'로 발음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빛난다는 것은 새벽·여명·서광(see aurora), 오스(aus)즉 밝다라는 것은 전부 동쪽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갈리아(Gallia), 골(Gaul)과 가우리(Caule, Cauly)와 음(音)이 연결되고 코레, 코라이(Cores, Core, Coray, Conray, Corie, Coria, Corai)로 이어지는 어원연관성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지금의 벵골의 땅, 방글라데시를 빛나는 왕국이라 할 수 있을까. 특별한 큰 변괴가 없었음에도 동남아시아에서도 저개발국가 또는 빈곤 국가라는 사실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은 태조의 경제적인 형편 문제가 아니라 그들은 어딘가에서 옮겨져 가난한 것이며 한반도 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은 한반도인도 그들과 다르지 않게 가난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경제환경은 구성원들의 능력문제라 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아시아대륙은 선진문명의 터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두 번의 큰 전쟁으로 어디선가 거의 옮겨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말 백색같이 빛나고 공정하며 금처럼 빛난 왕국은 과연 어딜 말하는 것일까? 이런 말은 역사문화의 발달을 추측할 수 있겠지만 지역, 지리환경적인 요소가 크다고 보면 대체로 빙산, 빙하 북쪽지역에서 지형환경적인 상징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다. 벵골을 가우다, 가우디, 가우리, 가우드 처럼 다 같은 음(音)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음절은 가우디이며 즉 가운데 중심으로써 한자권 중국(中國)의 상징적인 명칭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주장과 같음은 물론이며 최초의 아라칸 국가의 창시자가 인디언이라 하는 벵골 아라칸인(Arakanese)과 고대 그리스 이상향의 나라 아르카디아(Arcadia, Arkadia)와도 비교가 된다. 아카디아는 아르카디아가 어원이라고 말해지는 것과 같이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써 아르카디아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이렇다면 인도(印度)란 명칭에서 서세의 의도성이 없었다고 할 수가 없다. 인도(Indo), 인디아(India), 또는 인도네시아(Indonesia), 아메리카인디언(American Indian)이라는 명칭의 "indo"는 낙후의 상징성이다. 서세가 식민지지배 명칭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게 하는 열등한 역사 상징성으로 또는 이에 조작된 역사프레임이 있고 이 인도는 영국이 지배했다는 틀의 역사프레임을 바탕으로 한 치에 어긋남이 없이 역사판짜기가 단행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서두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나그네가 주인을 내쫓는 경우에서 생성된 추악한 결과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부터 한국(韓國)호랑이를 조선(朝鮮)호랑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인도(印度)호랑이라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의 생물학적인 분석에서 특히 아메리카 남북대륙 모두 스페인과 관계되거나 역사적으로 스페인의 관할 지역이었다는 곳에는 “CORIA”란 명칭이 통일성이 있게 나타난다.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 "에서 밝혀 보았던 것처럼 "CORIA FAMILY"명칭의 기원을 일반적으로 서기1100년 이전이라 하고 이것이 가문(페밀리)이름으로의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기에 이루어졌으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500~1600년 사이로 알려지는 것인데 이 시기는 신대륙발견(1492~1504)과 연결되고 있으며"CORIA FAMILY"명칭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처음 정착한 것도 이 시기라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어쩌면 코리아가 이 시기부터 페밀리명칭으로 변환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혹 코리아 명칭에서 워낙 역사성과 신적인 성스러움이 함께 녹아 있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이를 동경했거나 추종하여 가문명으로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한반도 코리아란 명칭에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오히려 코리아란 명칭이 친밀했고 오래전부터 서양인들 사이에 지칭되거나 사용되었던 명칭이라는 사실에서 동양권에서는 이 명칭이 오히려 낯설 수도 있다. 우리가 영어권에 언어에서 이 명칭을 뒤늦게 받아들인 경우이다. 이렇게 추단하는 것은 서양역사 중심에 코리아가 존재한 사실을 여러 면에서 밝혔던 바가 있기때문이다. 원시시대부터 인류에게 가장 삶과 관계가 있었을 구황식물 즉 구황작물에 대한 학명을 보면 디오스코리아(Dioscorea)라 한 사실과 스페인어 디오스(dios)는 신(神:god)이란 의미이므로 디오스의 의미를 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할 때 "디오스코리아"는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Dioscorea is a genus of over 600 species of flowering plants in the family Dioscoreaceae, native throughout the tropical and warm temperate regions of the world. 열대덩굴식물 야생 참마(wild yam)라 하는 디오스코리아는 서여과(薯蕷科:Dioscoreaceae)계통의 열대 및 온난한 온대지방에 서식하는 600여 종(種)의 개화 식물이라고 하여 마 성질을 가진 식물들이 거의 다 이 학명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겪을 수밖에 없었던 굶주림이란 원초적인 고통을 생각 할 때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식물임을 알 수 있고 때문에 신을 코리아와 같은 수준에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도 한다. 이 외 학명에는 가우리센스(caulescens), 코라이엔스(coraiense), 코리아눔(coreanum)등의 종명이 붙어 있는데 공통적으로 코리아 명칭과 함께 정확하게 원산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 국한하는 원산지가 아니라 전 세계 어디든지 원산지 종명(種名)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코리아란 명칭은 한반도에 국한된 명칭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과 글쓴이가 주장하는 하나의 체제를 코리아라 했을 가능성을 높게 진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두 말이 필요 없는 근원적인 역사성이며 또한 끊어질 수 없는 역사 연결성의 증거라 할 수밖에 없다. 영어에서“CORE”가 중심 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라 라틴어, 그리스어의 어원으로 자릴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코레가 모든 역사에 근원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은 라틴어(語),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하는 어원적인 것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본 블로그가 찾아낸 수많은 사실이 여기에 더하여 세계삼한역사의 산증인처럼 고고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이 대단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한가지를 더 부첨한다면 라틴어와 그리스의 어원을 밝혀 아는 촉매역할을 하는 언어가 프랑스어라고 한다면 산스크리어트어의 어원 밝혀 아는 촉매역할의 언어는 한글이라는 설과 비슷한 이야기다. 신채호선생이 주장한 “가우리”역시 이 코레의 범주에서 해석되었다는 의미라고 판단되며 이 언어자체가 인류의 중심, 또는 축을 의미하는 것이니 실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코리아(CORIA)란 의미도 고리(高離), 구리(句離:Guri), 구려(句麗:colee)나 고려(高麗)와 다르지 않고 또한 가우리(caule)와 다르지 않음에 있어 서양문헌에도 사람이 곧 하느님이란 삼한철학사상의 인내천(人乃天)을 말하고 있는 것은 실로 경탄해 마지않는 것이며 옛 프랑스어의 몸(body)의 뜻 코어“cors” 또는 라틴어 몸(body)의 뜻 코르푸스“corpus”가 “CORE”의 어원이라 하는 것은 신채호선생의 ‘가우리’의미를 상기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즉 우주의 중심이 태극이란 사실과도 일치하는 이야기다. 본 블로그 글 “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56”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아시아면이라고 알려지는 인도면(印度綿:Gossypium arboreum L)이 남아메리카대륙에 근거하고 육지면(陸地綿:Gossypium hirsutum L)이 북아메리카대륙에 근거한다는 사실도 이와 같은 상황 설명과 다르지 않다. 코리아의 목화 생산량은 당시 미국의 목화 생산량과 상당히 일치하는 것을 밝혔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서세들은 떠내기인 이주민에 불과하였지만 어느 시점부터 가짜주인이 진짜 주인인 것처럼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이제서야 진의를 깨우친다는 것이니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본래 주인이 쫓겨난 상황에서 왜 그런지 인구 증가 데이터에서도 나타난다. 이주민이고 나그네일 수밖에 없는 미국(米國)이 도발한 1812년 미영전쟁(War of 1812, American War of 1812 to 1815)시기 때 미국의 인구가 고작 700만명(7,239,900)이라 하였다. 이런 인구를 가지고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다차지하겠다고 난리였으니 얼마나 기발한 이야긴가. 반면 미국이 식민굴레에서 탈피하고자 한 영국 인구는 1811년 기준으로 11,970,200명으로 정확한 데이터가 서양인에 의해 밝혀져 있다. 영국 또한 이런 인구로 세계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으로 군림했다는 것도 솔직히 믿기지가 않는 이야기다. 반면 하나의 체제를 갖추고 세계삼한역사를 자랑하던 한국의 인구는 1881년부터만 나타나고 그 이전시기의 인구상황은 데이타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1881년이전 인구데이타가 서양자료에 나타나지 않을까? 그러나 조선의 종속국이었고 자치국이었던 일본은 1721년부터 인구데이타가 나타나고 1852년에는 방점을 찍고 있는데 인구가 무려 27,201,000명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지워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미국은 1812년때 겨우 700만명이었던 인구가 100년만인 1912년에 95,335,000명으로 기록되면서 거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세를 나타내는데 자그마치 1216%(12배)비율로 계산되며 이것을 자연증가수치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이때 인구규모는 하나의 체제에서 조선인구설에서 1억명과 거의 흡사한 것이다. 미국과 비교가 되는 영국의 인구는 1912년에 41,123,500명으로 계산되어 100년 만에 243%(2.43배)증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지극히 정상적인 자연 증가폭임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수치에서는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인들은 지금도 유럽이민자에 의한 이민증가라고 하겠지만 음성적인 인구가 양성적으로 바뀐다든지 아니면 구체제에 속하던 구성원들이 강압에 의한 전환이나 귀화, 동화한 인구가 포함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쩌면 서세는 내외면적으로 이전체제의 인적, 과학자원까지 정복하였고 삼한역사, 인도(印度)의 정체성까지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도 조심스럽게 짐작해야 한다. 1852년까지 세계무역거래 언어가 중국어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한문(漢文)과 한글을 사용하던 각계 인텔리전스(intelligence)들은 어쩔 수 없이 영어(英語)와 프랑스어로 사용언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삶의 큰 지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위해 전환했어야 했고 도리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미국의 비정상적인 인구 증가에서 정상적인 인구증가율를 계산해보면 세계인구 통계에서 1800년에는 10억 명, 1930년에는 20억 명에 도달되어 매년 0.53%의 인구증가율을 나타낸다고 되어 있어 이를 대입하면 1812년에 700만 명의 인구를 위 자연 증가율 0.53%를 적용하면 1912년에 미국인의 인구가 단순계산이지만 40,000,000명이 겨우 넘는다. 이것은 영국인구와 거의 일치한다. 그럼에도 미국인구가 1억 명 가까이로 증가되었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증가세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들은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근대사 전부를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되며 정확해야 할 인구수치가 이렇듯 상상 이상으로 어긋난다는 것은 상당한 역사모순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써 근대사 전체에 큰 영향을 음으로 양으로 주었을 것이라는 명확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본 블로그에서 주장한 라틴어(프랑스어, 그리스어, 영어)를 사용하던 코리안(corian)이 존재한 사실도 마냥 그냥 흘려버릴 수만 없는 문제이며 이것과 더불어 한국호랑이 개체와 또 다른 개체의 근원이 되는 호랑이의 실체가 숨어있을 것임을 확신할 수가 있다. 호랑이의 종(種) 아래는 고종34년(1879년)에 대한제국건립시 국명 조선에서 국호를 변경하면서 고종이 대신들에게 하였던 말이다.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에서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라고 나온다. 즉 한(韓)은 영어로 "COREA"이다. 즉 상식적으로 하나의 나라로 통합된 하나의 체제를 서양인들은 COREA 라 했던 것이 분명하다. 호랑이를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어떤 사료에도 생물학적인 개체변화 동향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글쓴이가 늘 안타까워하며 의문시 하는 사실이다. 그나마 접할 수 있는 사료 중에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호랑이를 사냥한 사체에서 벗겨낸 가죽을 호피(虎皮)라 하여 근거지와 호피 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호랑이 뼈를 약제로 삼아 호골(虎骨)이라 하면서 개체수와 생산지역을 나타내어 상황 정도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사료(史料)는 임금에게 조공(朝貢), 즉 진상한 기록에 대한 일기 식 내용이 전부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나라 사료에서 서양인들이 내놓은 생물학적 분류체계나 근거를 확보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우리에게 그나마 남아 기록들은 과학적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런 사료들이 남아 각 지방에 특산물을 백성들이 세금대신 임금에게 바치는 조공물이나 진상물의 기록임에도 이는 후일 조선(朝鮮)을 하찮은 조공국(朝貢國)으로 보게 하는데 일조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부담만 지우게 하는 것으로 가치를 논 할 수 없다. 지금도 조공에 대해 백과사전에서 설명하는 것을 보면 종속국(從屬國)이 종주국(宗主國)에게 때를 맞추어 예물을 바치던 모든 행위라고 정리되어 있다.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많다. 하지만 최소한 생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사료가 없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여도 잘못된 것이다. 물론 우리에겐 한문기록만 남겨져 있다는 불만도 있지만 세종지리지 이외 우리나라 최초 지리지라고 하는 세종 6년(1424)에 변계량이 의해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가 있고 1432년에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있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지리지라고 하는 1145년 김부식의해 편찬한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와 문종 1년(1451)에 세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부속사료로 취급되었다는 점도 생성에서 이미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더 세밀한 자료가 되지 못하고 있다. 호랑이를 우리는 범이라 하거나 19세기 이후 虎(범 호)와 狼(이리 랑)을 붙여 ‘호랑이’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알려지고 호랑이를 다르게 칡 범, 갈 범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호랑(虎狼)의 한문을 풀이해보면 이는 범과 이리를 동시에 칭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으며 어쩜 호랑이라고 하는 것은 타이거(Tiger)만 지칭한 것이 아닌 포괄적 명칭일 것이란 의심이 생긴다. 우리가 아는 ‘이리’는 분명 늑대(狼:wolf)이다. 우리말 ‘호랑이’는 범과 늑대를 총칭해서 지칭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무엇때문일까? 호랑이와 늑대는 불가분의 관계로 우리 조상들에게 비춰진 것은 아닐까? '칡'이나 '갈'에서 칡은 황색계통의 색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갈은 붉은 색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갈 범이란 붉은 늑대라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아메리카붉은늑대(Canis lupus rufus)는 붉은 털, 은회색의 이마, 흰 다리에 있는 어두운 반점, 그리고 크림색의 배가 특징인데 미국 애팔레치아산맥을 중심으로 남동부에 서식하던 것들이며 자연번식지 파괴 때문에 1900년 중반까지 멸종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이를 미시시피 계곡 늑대(Mississippi Valley wolf)라고도 한다. 호랑이는 잠시 미루고 그렇다면 늑대에 대해 잠시 좀 더 살펴보자. 늑대 종(種)의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선조 후보는 북아메리카에서 마이오세(中新世:Miocene-약 2300萬年~600萬年)시기 서식한 토끼잡이늑대(Canis lepophagus)로 작고 좁은 두개골을 가졌으며 이 모습은 코요테(coyote)와의 유전적 관계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자료에는 정리되어 있다. 이 코요테는 북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 일대에만 분포하며 초원이리(prairie wolf:郊狼,草原狼,叢林狼,北美小狼), 아메리카 자칼(American jackal)이라고도 하는데 학명 카니스 라트란스(Canis latrans)라 쓰며 회색늑대(gray wolf)와 동부늑대(eastern wolf), 붉은 늑대(red wolf)와 비교 할 때는 작지만 같은 가까운 친척이라 할 수밖에 없다. 붉은 늑대 界: 动物界 Animalia 门: 脊索动物门 Chordata 纲: 哺乳纲 Mammalia 目: 食肉目 Carnivora 科: 犬科 Canidae 属: 犬属 Canis 种: 狼 C. lupus 亚种: 紅狼 C. l. rufus 호랑이 Tiger 科學分類 界: 動物界 Animalia 門: 脊索動物門 Chordata 綱: 哺乳綱 Mammalia 目: 食肉目 Carnivora 科: 貓科 Felidae 屬: 豹屬 Panthera 種: 虎 P. tigris 호랑이의 종에서 현재까지 정리되고 있는 아종은 총 9종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린네가 명명한 판테라 티그리스를 근거로 할 때 분류가 필요한 아종은 크게 3종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베리아호랑이, 벵갈호랑이, 그리고 카스피해호랑이이다. 호랑이를 범(虎), 이리(狼)하지 않고 타이거(Tiger)로 통칭하여 보면 호랑이는 생물분류 체계적으로 동물계(動物界:Animalia), 척삭동물문(脊索動物門:Chordata), 포유강(哺乳綱:Mammalia), 식육목(食肉目:Carnivora), 고양이과-묘과(貓科:Felidae), 표범속(豹屬:Panthera)에서 1758년 생물학의 아버지라 하는 린네에 의해 판테라 티그리스(Panthera tigris Linnaeus, 1758)로 명명되었다. 판테라 티그리스(Panthera tigris)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 어원에서 속명(屬名) 판테라(Panthera)를 표범속이라 한 이유가 아래에 나타난다. The word Panthera is probably of Oriental origin and retraceable to the Ancient Greek word panther, the Latin word panthera, the Old French word pantère, most likely meaning "the yellowish animal", or from pandarah meaning whitish-yellow. The derivation from Greek pan- ("all") and ther ("beast") may be folk etymology. The word specific name tigris derives from the Classical Greek language τίγρις meaning "tiger" as well as the river Tigris. The Middle English tigre and the Old English tigras (a plural word) were both used for the animal. These derive from the Old French tigre, itself a derivative of the Latin word tigris. The original source may have been the Persian tigra meaning pointed or sharp and the Avestan tigrhi meaning an arrow, perhaps referring to the speed with which a tiger launches itself at its prey. 위 영어자료를 보면 본래 학명(學名)에서 속명(屬名) 판테라(Panthera)는 동양 원산지(Oriental origin)를 강조한 것이라 하였고 고대그리스(Ancient Greek) 단어 펜테르(panther), 또는 라틴어 펜테라(panthera), 고대 프랑스어 펜테레(pantère)와의 연결해서 “누른 동물(the yellowish animal)”을 뜻했거나 약간 희끄무레한 황색(whitish-yellow)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양자료에서 일반적으로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동아시아대륙이라고 보면 안된다. 대륙 동부를 뜻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즉 판테라의 속명에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누른 색, 또는 황색 계통의 동물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말은 우리가 호랑이를 칡범, 갈범이라 하여 범과 이리를 같이 병용해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설명임을 알 수가 있다. 동양적 어원이라 한 서양 자료의 설명에서 느끼는 것은 동양 원산지(Oriental origin)를 현재 서양인 관점에서 판단하면 오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소한 문제까지 민감하게 풀이가 되고 있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서양인들의 역사문화가 스스로 얼마나 동양문화에 종속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가 동양문화와 접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 도시국가들은 이미 동양문화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위치적 문제에서 "해뜨는 곳" 또는 "밝다"의 의미가 신적인 존재와 묶여 너무나도 강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분명코 동양사고적 문화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스어 '판pan(all)'과 '테르ther(beast)'의 조립 파생된 어원은 '모든 동물'로 풀이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이 속명(屬名)은 호랑이만을 지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고 최상위포식자라고 뭉뚱그려 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 앞에서 우리말 호랑이라 함도 범과 이리를 혼용된 어원에서 찾는 것과 거의 동일한 설명이다. 고양이과(貓科:Felidae)계통 속명으로 1816년 독일 자연학자 로렌츠 오켄(Lorenz Oken:1779-1851)에 의해 최초 명명되었고 영국분류학자 레지널드 이네스 포콕(Reginald Innes Pocock:1863-1947)에 의해 1916년 분류를 확대하여 사자(Lion:Panthera leo), 호랑이(Tiger:Panthera tigris), 재규어(Jaguar:Panthera onca), 표범(Leopard:Panthera pardus)을 넣고 개정하였으며 1929년에는 수마트라호랑이(Panthera tigris sumatrae Pocock)를 명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유전(DNA)분석에서 눈 표범(snow leopard:Panthera uncia)도 2008년에 국제자연보전연맹(IUCN)평가자에 의해 표범속(豹屬)에 속한다고 정리되었다. 그 다음 종소명(種小名)인 티크리스(tigris)의 어원을 보면 고대그리스어 티그리스(τίγρις)에서 기원하고 중앙아시아 티그리스강(river Tigris)뿐만 아니라 타이거란 호랑이(tiger)단어 역시 이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며 중세 영어 티그레(tigre)와 고대 영어 복수단어 티그라스(tigras)등은 모든 동물에게 사용되던 명칭이라는 사실과 일치하고 있으며 이것들이 동양이 아니라 고대 프랑스의 티그(tigre)에서 파생되었다 하여 이 어원은 라틴어 티그리스(tigris)의 파생어라 하였다. 원래 이 단어의 출처는 페르시아의 티그라(tigra)에서 찾을 수 있고 그 의미가 뾰쪽하다거나 날카롭다는 뜻이며 아베스탄어(Avestan) 티크리(tigrhi)가 화살의 뜻이 있어 아마도 호랑이가 먹이를 채어 먹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라고 조심스럽게 풀이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는데 위 이것은 판테라(Panthera)라 마찬가지로 일정하게 한 종류의 포식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 표범속(豹屬)에 속한 모든 포식자들을 통칭한 명칭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종소명 티크리스 또한 특정한 영역보다 날쌘 의미를 부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래전 총기류가 발달되지 않았을 때 호랑이와 그밖에 최상위 포식자들을 인간이 식별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웠고 위험스러운 것이므로 순간적으로 인간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며 이들 포식자들이 상당히 빠르게 느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다. The common name "leopard" /ˈlɛ.pərd/ is a Greek compound of λέων leōn ("lion") and πάρδος pardos ("male panther"). The name reflects the fact that in antiquity, a leopard was believed to be a hybrid of a lion and a panther. The Greek word is related to Sanskrit पृदाकु pṛdāku ("snake", "tiger" or "panther"), and probably derives from a Mediterranean language, such as Egyptian. The name was first used in the 13th century. Other vernacular names for the leopard include graupanther, panther and several regional names such as tendwa in India. The term "black panther" refers to leopards with melanistic genes. A term for the leopard used in Old English and later, but now very uncommon, is "pard". The scientific name of the leopard is Panthera pardus. The generic name Panthera derives from Latin via Greek πάνθηρ (pánthēr). The term "panther", whose first recorded use dates back to the 13th century AD, generally refers to the leopard, and less often to the cougar and the jaguar. Alternative origins suggested for Panthera include an Indo-Iranian word meaning "white-yellow" or "pale". In Sanskrit, this could have been derived from पाण्डर pāṇḍara ("tiger"), which in turn comes from पुण्डरीक puṇḍárīka (with the same meaning). The specific name pardus is derived from the Greek πάρδος (pardos) ("male panther").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포식자들을 통칭해서 분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다음은 호랑이 더불어 지정되는 표범속(豹屬)에서 표범(leopard)에 대한 어원(語源)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표범의 이름을 레오파드(leopard)라 하는 것은 그리스어의 합성어로서 레온(λέων:leon)과 파르도스(πάρδος:pardos)로 인식되어 숫 표범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즉 레오파드의 원래 뜻은 숫표범을 뜻한다. 고대에서 표범은 사자와 표범의 잡종이라고 믿었고 고대그리스어 헬라어(Έλλας:Hella)는 산스크리트어 프리다쿠(पृदाकु:prdaku) 즉 뱀(snake), 범(tiger) 또는 표범(panther)과 관련이 있다 하면서 이집트인과 같은 지중해언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 표범이란 용어는 13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표범의 다른 모국어는 그라펜더(graupanther)나 펜더(panther)라 하는데 이상하게도 인도동북부지역의 텐드와(tendwa)같은 지역이름도 포함이 되며 검은표범(black panther)이란 용어는 형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멜라닌 성분 유전자를 가진 표범을 의미하여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레오파드는 고대영어에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표범에 대한 용어는 파드(pard)인 것으로 나타난다. ["pard". Oxford English Dictionary (3rd ed.). Oxford University Press. September 2005. (Subscription or UK public library membership required.) OED gives examples of "pard" from OE until 1984.] 독일인 동물학자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앤토 마이어(Panthera pardus fusca Meyer,1794)에 의해 명명된 인도표범은 현 인도아대륙을 근원지로 삼고 있다. 이것은 인도호랑이와 거의 같은 분류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카표범으로 알려진 재규어(Jaguar:Panthera onca Linnaeus, 1758)는 린네에 의해 명명되었는데 이를 아메리카 표범이라고 하고 표범을 뜻하는 그리스어 판티르(πάνθηρ)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어원에서 보면 판 πάν는 "모두(전부,전체)"를 뜻하며 티르"θηρ"는 야수(동물, 짐승)를 뜻한다고 되어 있어 사실상 표범이라는 명칭은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아메리카표범 중에 하나는 린네가 명명한 퓨마속(Puma:Felis concolor Linnaeus, 1771)이고 이 외형은 표범, 호랑이에 가까우나 서식지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갑자기 줄어들어거나 감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 잔존하고 있는 곳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과 중앙아메리카대륙 일부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전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표범의 학명 판테라 파르더스(Panthera pardus)에서 판테라(Panthera)는 호랑이 설명과 같아 생략할 수밖에 없지만 표범 펜테르(panther)의 용어는 일반적으로 아메리카호랑이, 아메리카표범이라고도 하는 퓨마(puma)와 북아메리카 남서부 멕시코에서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Patagonia)까지 지역에서 서식하는 재규어(jaguar)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판테라(Panthera)의 기원은 인도유럽어족의 갈래인 인도-이란어(Indo-Iranian languages)로 흰색과 황색 또는 창백한 의미를 나타내고 산스크리트어에서 동일한 의미로 푼델카( पुण्डरकक:puṇḍárīka)라고 하는 호랑이에서 파생되었다고 설명되며 종명 파라더스(pardus)는 그리스어 파르도스(πάρδος:pardos)즉 수컷표범을 의미한 것이라고 설명된다. 서양인들도 호랑이와 표범을 거의 한 동물로 취급했던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어찌 보면 우리말 어원은 세계적으로도 근거가 있다고 보여지는 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식근원지를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호랑이와 연결되고 있는 대부분 포식자들이 아시아대륙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에 서식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호랑이의 단독 개체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표범속(豹屬)에 속하는 호랑이 이외 사자(lion), 표범(leopard), 아메리카표범이라 하는 재규어(jaguar), 눈표범이라 하는 회색표범(snow leopard)이 여기에 속해 있고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에 서식처로 알려지며 먹이사슬에서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최상위 포식자(Apex predator, alpha predator, super predator), 또는 정점포식자(top-predator, top-level predators)가 바로 이 표범속에 속해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이를 거의 같은 분류체제에 있었다는 사실과 서식지가 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이다. 학명에 분류명명법을 보면 2명법(二名法:binomial nomenclature)을 원칙으로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종(種)에 따라서 아종(亞種)이나 변종(變種:variety)이 있을 때에는 그 종(種)의 이름 다음에 그 이름을 표기하는데, 이런 형태를 삼명법(三名法:trinominal nomenclature)이라고 하며 이러한 예로 호랑이(en:Panthera tigris)라는 종(種)에서 사용되었던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고 아종(亞種)인 시베리아 호랑이는 기존 호랑이와 구분하기 위해 알타이카(altaica)를 붙여 “Panthera tigris altaica”로 명명한 사실에서 큰 의구심을 갖게 만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삼명법은 현저한 변이 변종이 생성되었을 때 사용한다 하였지만 특히 호랑이를 분류함에 있어 이 삼명법이 남발되었음을 확실히 감지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째든 생물학의 시조(始祖)라고 알려진 린네(Carl Linnaeus, 1707-1778)가 1758년에 명명한 호랑이의 대표 학명(學名)은 속명(Genus)과 종명(Species)으로 분류한 이명법(二名法:binomial nomenclature)이다. 이것을 판테라 티그리스(Panthera tigris, Linnaeus, 1758)라 하여 호랑이를 하나의 종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왠지 갑자기 1844년부터 친일(서세연합세력)성향의 서양학자들은 호랑이와 표범에 대해 종(種) 분류군에서 변이(變異)가 심한 다형종(polytypic species)이라 하여 각각의 분화(分化)된 종(種)을 명명해야 한다면서 동물분류학에서의 삼명법(trinominal nomenclature)을 적용하였는데 바로 속명(屬名)+종소명(種小名)+아종명(亞種名)으로 배열하였다. 이때부터 심각한 본래 서식처가 변이되고 변질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하나의 호랑이가 삼명법에 의해 벵골호랑이(Panthera tigris tigris Linnaeus, 1758)로 새삼스럽게 분류되면서 1815년 이것에 의해 독일 곤충학자이면서 동물학자인 요한 칼 빌헬름 일리거(Johann Karl Wilhelm Illiger:1775-1813)를 시작으로 1844년 네덜란드의 동물, 조류학자인 콘라드 야콥 테민크(Coenraad Jacob Temminck:1778-1858)에 의해 카스피해호랑이(Panthera tigris virgata Illiger,1815)와 시베리아호랑이(Panthera tigris altaica Temminck, 1884)가 삼명법으로 명명되어 아종으로 분류되고 말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벵골호랑이(Panthera tigris tigris, Linnaeus, 1758) P. t. fluviatilis Sterndale, 1884 P. t. montanus P. t. regalis P. t. striatus Svertzov, 1858 시베리아호랑이(Panthera tigris altaica, Linnaeus, 1758) 옛날에(별칭) P. t. amurensis P. t. altaica (Temminck, 1884) P. t. coreensis P. t. mandshurica P. t. mikadoi †카스피호랑이(Panthera tigris virgata) formerly: P. t. lecoqi P. t. septentrionalis P. t. trabata P. t. virgata (Illiger, 1815) 위 학명을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보았지만 이것들은 또 다시 분화를 하였는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갈갈이찢어졌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다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본래 벵골호랑이는 동부 호랑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린네가 처음 명명한 판테라 티그리스(Panthera tigris, Linnaeus, 1758)는 호랑이를 세부적으로 분류하지 않고 하나의 종(種)으로 명명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지형적인 영향에 의해 체형과 표피색깔 모양이 다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종(亞種)으로 분류한 이유가 서식지가 다르다는 이유가 크다. 때문에 서식지가 개정된 분류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개체 서식지 옮기기가 진행되었을 것임을 의심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린네 이후의 학자들은 경쟁적으로 이를 다르게 표본을 수집하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위 분류 상태를 보듯이 무분별하게 갈기갈기 찢기듯이 서식지를 종명으로 마구 남발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어 본래의 서식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행태적 행위가 학자가 가지고 있었던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서세의 궁극적인 목표가 ‘역사 새 판짜기’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본의 아니게 이용되었거나 스스로 협력하면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되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특히 이들 분류개정행위에서 들어나는 것은 린네(Carl Linnaeus)가 처음 호랑이를 분류체계화 한 후 약 50년이 지난 1815년에 독일 곤충학자이면서 동물학자인 요한 칼 빌헬름 일리거(Johann Karl Wilhelm Illiger:1775-1813)에 의해 카스피해호랑이(Caspian tiger)가 독립적으로 다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일리거는 주로 아메리카대륙에서 생물체들을 연구하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카스피해호랑이를 분류했다는 사실은 퍽 그가 활동한 사실과 대치는 것이라 더욱 의심된다 할 수밖에 없다. 1811년에 그는 코끼리(elephants), 미국 매스토돈(American mastodon:Mammut americanum), 털이 많은 맘모스(wooly mammoth)에 대한 분류학적 긴 코 분류 장비목(長鼻目:Proboscidea)를 소개한 것으로 알려지고 또한 일반적으로 태평양 해마(Pacific Walrus:Odobenus rosmarus divergens)의 아종(亞種)을 묘사하였으며 남아메리카 동부에 서식하는 마코 앵무(Macaw, Primolius maracana, Vieillot, 1816)와 남아메리카대륙 북서(北西)지역의 안장 타마린(Saguinus fuscicollis illigeri, Pucheran, 1845)을 명명했다는 사실에서 그가 중앙아시아 카스피해호랑이 표본을 채취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주로 아메리카대륙에서 활동한 이 일리거가 오늘날 유라시아지방에서 카스피해호랑이를 명명했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가 종명(種名)으로 사용한 “비르카타(virgata)"는 고대영어로부터 차입한 것으로서 가늘고 길다고 하는 의미의 가지, 막대, 야드를 나타내고, 고대영국의 면적단위의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서식지가 아닌 카스피해호랑이의 좁고 긴 줄무늬가 있는 형상을 토대로 아종명(亞種名)을 명명하고 아종(亞種)으로 분류하였다는 것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카스피해호랑이를 페르시아호랑이라 하거나 카스피 해 동남쪽에 있었던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한 주(州) '히르카니아(hyrcania)호랑이'라 했다고 알려지지만 두개골의 크기는 벵골 호랑이의 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과 유전 분석에 따르면, 시베리아 호랑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해지는 것이어서 형태적으로 큰 차이가 없어 보임에도 굳이 아종(亞種)으로 분류한 것은 서식지가 오늘날 흑해와 카스피해의 남부와 동부 강기슭 통로와 삼림,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중앙아시아, 아랄해 연안을 따라 발하슈호(Lake Balkhash)남부해안, 알타이산맥까지 영역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규정짓음으로써 1970년까지 야생기록만 남겨두고 멸종된 것으로 간주한 것은 매우 불명확한 처리가 아닐 수 없고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은 혹 카스피해가 유라시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글쓴이가 오래전부터 추측하던 허드슨베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게 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것들은 글쓴이가 우려하고 있는 인위적인 서식지 옮기기 또는 본래 서식지 나누기 행태가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또한 시베리아호랑이(Siberian tiger)도 이와 같은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며 본 블로그 글 전편에서 언급한 친일(서세연합체제)생물학자 네덜란드의 동물, 조류학자인 콘라드 야콥 테민크(Coenraad Jacob Temminck:1778-1858)가 1844년에 분류 개정한 학명 “Panthera tigris altaica Temminck, 1844”에서 아종명(亞種名) 알타이카(altaica)라 했다는 사실은 소위 알타이를 시베리아와 동일시 하고 있는 사실도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알타이의 본질 그렇다면 테민크가 분류한 알타이의 본질을 밝혀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상 19세기는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하는 물질시대가 도래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크다. 물론 알타이와 함께 바라보는 것은 골드러시이다. 알타이+산맥이라고 명칭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지칭일까? 논하나 마나 중복되는 명칭이다. 이미 몽골어(Монгол)알타이 단어 하나에 금(金)과 산(山) 의미가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구태여 산맥을 별도로 호칭한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산맥이라는 것은 후일 붙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alt" (gold) and "tai" (suffix – "with"; the mountain with gold) 19세기 황금에 의한 역사혼란은 사람들의 개념을 뿌리채 잡아 흔든 것으로 그 영향력은 기존 역사로 보아서도 지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이러한 사실은 모든 경제문화와 역사까지도 서양학자들이 장악한 환경에서 무한의 날개를 달았다고 해도 무방하며 여기에서 그들에게 장애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상식적으로 생각 할 때 아시아대륙에 존재했다고 하는 알타이산맥에서 예부터 금(金:gold)이 존재했다고 하는 구전으로나 기록으로 그러한 내용이 수 백 년 동안 전해져 내려와 검증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래서 세계가 똑같이 산업혁명이란 인간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홍역 앓이에서 그것이 더욱 자극할 수 있는 여지가 되어 엄청난 방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면 당연히 세계적으로 1848년부터 불어 닥친 골드러시(gold rush)는 두 말 필요 없이 아시아 알타이 산맥에서 난리통이 났어야 했던 것은 아무리 바보 멍청이라고 해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1840년에 시작된 1차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아시아대륙 알타이 코밑에 있었던 중국이란 정부는 그 이후 수많은 시간 동안 사회 전반에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서양세력들이 중국침탈 목적이 알타이산맥의 금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편수출이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중국사회가 그렇듯 혼란스러웠다면 그 이후라도 그들은 중국대륙북부 알타이산맥에 금이 있어 그것을 노려야 했을 터인데 그러한 소리는 여태 듣질 못했다. 왜 금이라면 자기 부모도 총으로 죽이는 그들이 왜 그렇듯 아시아알타이에 대해선 무심 했을까? 그것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캘리포니아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금산(金山) 즉 샌프란시스코 한문 명칭처럼 금이 많지 않았다는 결론이고 알타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골드러시가 발생한 곳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미 본 블로그 글 "알타이(altai)가 어딘가?-용연향(龍涎香, ambergris)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3"에서 충분히 따져 물었던 적이 있다. 번지수가 다른 골드러시가 발생된 것이다. 골드러시가 무엇인가. 산업혁명이란 거대한 풍랑에서 부(富)를 축적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자신의 신분을 완전히 탈바꿈할 수 있는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꿈을 꾸며 황금(黃金)을 찾아 전 세계에서 벌떼처럼 무수한 사람들이 금이 나는 곳으로 달려들었던 사실을 말한다. 사실상 캘리포니아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 골드러시가 작용한 것이 틀림없다. 간략하게 보면 캘리포니아 콜로마(Coloma)에 가까운 서터스 밀(Sutter"s Mill)에서 시작된 이 사건의 발단은 개척자 존 서터(John Sutter)가 고용한 현장 감독이었던 제임스 마셜(James Marshall)에 의해 시에라네바다산맥(Sierra Nevada Range)에서 발원하여 샌프란시스코만(灣)으로 흘러 들어가는 아메리칸 강(American River)가에 건설하고 있었던 제재소의 방수로에서 빛나는 사금을 1848년 1월 24일에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이때 소위 금이 넘쳐 흘렀다는 표현으로 이를 상징한다. 이 골드러시(Gold rush:1848-1849)역사가 비록 2년이 체 되지 않는 짧은 것이지만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를 완전히 탈바꿈시킨 원인이 되었으며 급기야 이러한 산업파동은 북아메리카대륙 최초횡단철도(Transcontinental railroad:1863-1869)를 건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이다. 바꾸어 말하면 골드러시로 인하여 미국인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상을 단번에 점령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였던 것은 물론이다. 그 만큼 당시 금의 파괴력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에서 밝혔듯이 횡단철도가 완성되기 전에는 엄청난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운영하는 연안수송선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이 회사는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수송선 보유척수를 늘릴 수 있었으며 횡단철도가 완성되던 1869년까지 3000톤급 미만의 구식 증기선의 일종 패들외륜선(paddle wheels)을 29척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패들외륜선은 1853년에 매슈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1794-1858)가 흑선(Blackship)이라 칭하기도 하는 2,450톤급의 전장길이 78 m, 폭 14 m, 홀수 6.25 m, 구식스팀엔진(Steam engine)으로써 당시의 범선형태와 동일한 것이다. 당시 패들외륜선들은 3000톤급 미만으로써 대양횡단용이 아니라 전부 연안용(for coast)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알아야 한다. 즉 흑선을 이끌고 일본 우라가(浦賀)로 들어간 페리는 결코 태평양을 횡단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다시말하지만 서부개척전에 미시시피강을 서양인들은 곧잘 태평양이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떤 식이든 관습은 무서운 것이다. 중국사서인 주서(周書)가 당시 키르키즈인을 얼굴이 하얗고 눈이 푸르다 한 것과 현재 키르키즈인들은 투르크라고 할 수 없는 몽골리안의 모습하고 있는 것은 아시아 종족에서 결코 몽골리안이란 개념만 가지고 볼 성질이 아니며 터어키어(Turkic languages) 알튼"altın"은 금(金:gold)의 의미이고 다으"dağ"는 산(山)을 의미라 하여 알튼다으(altındağ)가 금산(金山:altındağ:golden mountain)을 말하는 것과 역사성은 공교롭게도 중복되는 것이 많다. 때문에 알튼(altın)과 알프스(alps)역시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 알프스에 대해 본 블로그 글 "흐미(khoomei)의 역사 밝힘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5"에서 밝혔던 적이 있다. 그들이 비록 '알타티카'라고 하여 '시베리아호랑이'를 새롭게 창조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종(種)에서 아종(亞種)으로 구분하고 삼명법을 사용한 시베리아호랑이의 학명 “Panthera tigris altaica Temminck, 1844” 의 아종명(亞種名)에 알타이카의 명명은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림 것으로써 명명백백 잘못된 과정에서 생성된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과 함께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왜 시베리아를 아시아대륙에서만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입이 아플지경이지만 다시 거론하면 본 블로글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와 "버드나무(朝鲜柳:Salix koreensis)모순과 시베리아 http://blog.daum.net/han0114/17050602" 그리고 "사할린(Sakhalin)은 섬(島)이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8"에서 이미 시베리아는 사백력(斯白力)이어야 하는 고유명사라고 주장하고 확인하였으며 삼한의 전통에 따라 빛 나는(to shine), 새벽·여명·서광(see aurora), 오스(aus) 밝다, 여명을 보다, 새벽이라는 뜻을 가져 태백신(太白神)이 사백력(斯白力)이라 지칭했다는 사실을 밝힌 바가 있다. 서양자료에는 이 시베리아에 대한 어원이 명확하게 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도 그들에게 치명적인 명칭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알 것이다.그렇다, 시베리아는 타타르어로 "잠자는 땅(Sib Ir)"이라고 했고 투르크어(Turkic origin)로는"su(물)"과 "bir(야생의 땅)"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해뜨는 동쪽편이라 해야 맞다. 당시 물질가치를 가장 잘 챙겼다는 허드슨베이회사가 어디에 자릴 잡았던가. 서시베리아라고 하는 지금 아시아대륙이 결코 아니다. 1844년 국제환경 특히 알타이(altaica) 아종명(亞種名)이 부여될 시점인 1844년경에는 세계적으로 서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시기이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건으로써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西部) 입구(入口)라 할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서양인들이 황금의 꿈을 안고 몰려드는 골드러시(Gold rush:1848-1849)가 발생되었던 시기였다는 점, 그리고 그 이전부터 황금은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지속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1840년경부터 역사가(歷史家)들에 의해 옛 문헌들을 참고하면서부터 골드러시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알타이가 어디에 있었던 것에 대한 사실 판단이다. 태평양을 넘어 동아시아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철저한 서세가 만든 역사프레임이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밝혔던 것으로 사실상 16세기부터 서양인들의 관습적 지식에서 미시시피강을 태평양으로 보았다는 사실과 미시시피강을 건너 서부를 말하는 것과의 대치되는 것인데 오늘날 우리가 밝히고자 하는 역사사실과 같은 것으로써 이것을 사실화할 수 있다면 세계삼한역사는 크게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서세의 역사프레임은 오늘날 한반도 역사가 생성될 수 있는 기반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즉 골드러시의 시발은 기존 역사사실에 대한 지속성에 의한 확실성이다. 그리고 금에 대한 입소문은 대중편향성이 있기 때문에 막기도 힘든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산업혁명에 의한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가 팽배하고 모든 관계를 황금과 연관시켜 생각하려는 풍조와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에 의한 삶을 지배하는 것 중에 하나가 풍족함과 부유함이라 할 때 바로 황금이라는 가치를 최고로 여기던 시대이며 소유욕에 대한 집착이 컸던 서양인들에게 큰 욕망이 부풀렀던 시기였음이 틀림없다. 전자 소제 글 "알타이의 본질"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문제는 금이 넘쳐난다고 하던 알타이가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대륙가 아니라면 그래서 미시시피강을 건너 서부 로키산맥을 말한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가 애써 찾는 역사찾기는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당시 역사학자들이나 지리학자 또는 생물학자들은 ‘금(金)이 나는 산(山)’ 알타이(Altai)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금(金)이 나는 역사근원지를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것들이 주는 결과가 골드러시이다. 또 한 가지 사회풍조에서 기존 역사에 먹구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진화론(進化論:Evolutinary theory)에 의한 백인들의 프론티어 변혁에 따른 살벌한 바람이다. 이때가 무법천지 서부활극시대이다. 진화론은 영국의 박물학자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의 1859년 저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에 의한 순수한 생물학설이라고 믿고 있지만 서세들이 주동이 된 서양 개념 즉 사고의 향방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국주의, 인종차별, 민족주의, 군국주의를 합리화하고 집단학살(Genocide)과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를 예고하는 프론티어 사상을 창조하게 하였으며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이를 시행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고 현실에 적응한 생명체가 생존할 가치가 있고 당연히 그렇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즉 그들의 목적과 목표를 위한 것이라면 꺼림낌이 없었다는 말이다. 비록 세계사 모든 것에서 서양인들이 오리엔탈역사문화에 그동안 뒤처져 있었다 하더라도 자본을 휘어잡고 있던 서세들은 이 모든 것을 서양쪽으로 뒤바꿀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야기다. 즉 우수한 인종은 언제든지 열등한 인종을 착취해도 자연규칙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며 한 생명의 번성을 위하여 다른 생명이 말살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당시 1844년경의 상황이다. 즉 힘이 없는 민족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완성된 것이다. 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당시에 무소불위의 금융자본이다. 이 자본이 인종 우월성까지 판단하게 만든 것이다. 최신무기를 제조하고 또는 사들이고, 이를 위해 매장자원이 풍부한 영토를 속여 헐값으로 사들이며, 상대방 힘을 억제하기 위해 물리력을 동원하고 압력의 수단인 양병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모든 비용은 서세의 금융자본이 담당했다. 더불어 당시 생물학계 상황을 보면 1801년 프랑스 식물학자 오귀스탱 오지(Augustin Augie)에 의해 식물의 계통도가 작성되고 같은 해 발표된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1744-1829)의 저서<무척추 동물의 체계:Système des animaux sans vertèbres>에서는 획득형질 유전설, 또는 발달과 퇴화의 학설 용불용설(用不用說)에 의한 진화론이 대두되었으며 1809년에 발표한 "동물철학<Philosophic Zoologies>"에서는 동물의 계통수가 작성되었다. 그런데 1800년대에는 과거의 환경 변동을 알고, 미래를 예측한다는 화석를 연구하기 시작하는 단계라고도 하였다. 계통도를 그리려고 하면 화석의 위치나 변화한 화석이 존재하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그려야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인데 당시 존재하지도 또는 검증이 되지 않는 화석을 상상으로 그렸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어쨌거나 이러한 움직임의 반향은 생물학계 뿐만 아니라 기존 프랑스혁명에 의해 위축이 된 제정체제(帝政體制)와 기존 종교계에도 무한의 압박과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문제는 라마르크의 진화론이 프랑스 계몽사상의 흐름에서 탄생한 논리라는 사실과 이것이 프랑스혁명의 토양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프랑스혁명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일부계층 상업주의에 의한 체제반란 그 자체이다. 본 블로그 글 “다시 보는 정조와 루이(Louis)”글에서 프랑스혁명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던 이유도 마찬가지지만 유대인 자본계급인 부르주아(bourgeois)가 주동이 된 체제반란이라 한 사실과 또한 본 블로그 글 "북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9"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사실을 참고하면, 프랑스혁명은 그동안 억압되었던 무산계급층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사적인 해방이며 기회라 한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금융자본에서 자유로웠겠는가. 아니다. 당시 미국을 금융자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당시의 금융자본이라 함은 독점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인데 빌려주고 엄청난 이자를 취하는 노릇이다. 그도 미국자본주에게 단돈 1천 5백만 달러의 돈을 받고 거대한 루이지애나를 매각하는 어리석음도 그도 어쩔 수 없는 자본의 노예였다는 결론이다. 1800년대 루이지애나의 영토크기는 현재 미국 영토의 거의1/3 규모이며 이것은 2,100,000㎢ 로 한반도 넓이(222,135㎢)에 10배가 되는 영토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넓이의 영토를 돈을 주고 받고 사고 팔고 했다는 것이니 근대사는 참으로 역사가 아니라 장사꾼들의 치부(置簿)일뿐이다. 즉 유대인 상업주의 식의 라마르크 생물학 접근은 유대인 사상가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고 알려지고, 유대인에 대한 해부학적, 생리학적 특성과 원인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라마르크가 유대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화론에서 유대인종에 대한 편향성이 나타나는 이론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마침내 1844년에는 다윈의 진화론 ‘종(種)의 기원’을 촉발시켰다고 알려지는 무명의 저서<창조의 자연사의 흔적들:Vestiges of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가 출간되는데 어떤 목적 세력들의 의도적인 결과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조상이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오랑우탄이라고 적시하면서 당시 보수적인 학계와 종교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이런 서양인들의 의도된, 들어나지 않는 단계적 주장들은 당시 엄격한 체제 규율에 위축되었던 진보 프론티어 세력들에게 큰 자신감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Great Flood of 1844, the biggest flood ever recorded on the Missouri River and Upper Mississippi River in terms of discharge. 더군다나 북아메리카대륙에서는 1844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미주리강(Missouri river)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에서 대홍수가 발생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으며 당시 주민들의 인심이 크게 이반(離叛)되어 흉흉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같은 해 6월 6일에는 런던(유럽이 아닌)에서 125개국 5700만(萬)명의 회원으로 개신교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 청년회(YMCA)가 창설되었다고 알려진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도 동양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인 아편 전쟁(阿片戰爭,Opium Wars:1840-1842)이 있었고 2년 후 1842년 8월 29일에 영국과 남경조약(南京條約)을 맺었으며 1843년 10월에는 중영(中英)간에 호문조약(虎門條約:Treaty of the Bogue)이 맺어지고 1844년 10월 24일에는 중국과 프랑스가 황보조약(黃埔條約)을 맺게 되는데 청조(淸朝)는 광주(廣州), 복주(福州), 하문(厦門,Amoy下門), 녕파(寧波), 상해(上海) 다섯 개 항구를 개항하고, 영국(동인도회사)배의 통상을 인정하게 된다. 종전까지만 해도 동인도회사의 선박을 해적선이라 하여 통과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미국역시 이와 때를 맞추어 마카오 교외의 망하촌(望厦村)에서 망하조약(望廈條約:1844.7.3)을 맺게 되는데 오히려 중영조약(中英條約:Sino-British Treaty)의 조항보다 더 세밀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고 위 5개의 항구도시에 토지를 매입하고 교회와 병원을 세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으며 특히 외국인들에게 중국어를 배울 수 없도록 한 법률을 폐지하여 미국인에게 중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이 들어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국인들에게 우대를 한 것이다. 당시 서양세력들이 외교와 교역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중국어는 양이(洋夷:해적선을 운행하던 서양세력:동인도회사)들에게 막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결론적으로 아편전쟁은 하나의 체제가 무역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사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이 가장 선호하는 국가지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영국에게 부여한 동일한 대우를 받았으며 12년 후 조약을 수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취한 것으로 나타난다. 무력을 앞에워 강압적으로 서양세력 국가명을 인정하라 하였겠지만 이 시기에 나타나는 유럽국가명을 그대로 국가로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은 하나의 체제에서 일관된 주장이다. 이것이 인정되면서 모든 서양세력들은 유럽국가로써 자연스럽게 세계사에 입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 할 수가 있다. 그해 12월 4일에는 제임스 녹스 포크(James Knox Polk,1795-1849,재임:1845-1849)가 미국의 11번째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 미국대통령은 금융을 담당하는 경제수반이라 해야 맞다. 미국대통령의 지위나 권한을 오늘날 대통령의 지위나 권한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포크는 이때부터 오리건주를 미국영토로 소유화하고 1845년에 텍사스 공화국이 자발적으로 미합중국에 서명하도록 하여 텍사스 합병(Texas Annexation)을 이루고 1846년 멕시코 합중국(United Mexican States)과 미합중국 사이에 무력충돌(분쟁)속에서 미국(금융자본)이 끼어들기가 계속되면서 멕시코전쟁(Mexican-American War:1846-1848)이 발발된다. 단순히 “멕시코 전쟁”이라 하는 것도 미국이 끼어들기 한 것이 맞고 거의 남북전쟁 전까지 완전체가 못되던 미국(이주이민자조직)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여기저기 끼어들기가 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지만 국가주체가 아니라 금융자본조직체가 이를 대신한 것으로 미국(자본)은 이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 1812년 미영전쟁(American War,1812-1815)은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1803-1815)과도 얽혀 있고 근대사가 말하지 않는 많은 이야기를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기적으로 볼 때 나폴레옹전쟁 6번째(1813), 일곱 번째와 마지막전쟁(1815)은 미영전쟁(1812)일 가능성에 포함되어 나타난다. 그렇다면 나폴레옹Napoleon I,1769-1821재위:1804-1814)은 미국용병전사라 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지해야 할 것은 오리건주(Oregon州)영토편입과 텍사스주 합병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들이 아편전쟁과 무관한가에 대한 답이다. 청조가 1844년 망하조약에서 미국에게 5개의 항구도시에 토지를 매입하고 교회와 병원을 세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조치했다는 것은 이러한 영토매입과 무관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건일자가 일치하지 않고 약간의 년 수 차이가 나는 것은 먼저 동양사를 갈무리하고 나중에 서양사를 완성시키는 과정에서의 간격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의 영국의 자취는 1846년 오리건조약(Oregon Treaty:Treaty of Washington)북위49°와 북위 54°40′까지의 영토를 가지고 영국과 미국이 다투었다고 하는 것은 할양에 대한 서로 갈등이 아니었겠는가 한다. 영국이 서부를 영토관할지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허드슨베이회사의 활동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러시아아메리카회사와 서부에서 갈등할 때라고 보이며 미국은 대체적으로 자본으로 일을 마무리하는 쪽으로 전부 역사가 나열되고 있다. 그들이 신대륙이라고 하여 북아메리카대륙 동부(東部)를 차지했다고 하는 사실은 인정한다 해도 서부(西部)전역을 점령하여 니꺼니 내꺼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상대국이 사라진 이면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 등은 무리가 있다. 사실상 이때부터 서부개척사라 하여 프론티어 정신만을 이주자들에게 요구할 때이며 서부활극과 더불어 수많은 기존 하나의 체제 구성원들이 떼 죽임을 당했을 것이란 짐작이 되는 바다. 하노버왕가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이라고 알려진 명칭 뒤에는 청조(淸朝)나 중국(中國), 또는 조선(朝鮮)이 있고 청(淸)을 본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보면 북양정권(北洋政權), 북양군벌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혹은 오대호를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것은 아일랜드(Ireland)인이 주축을 이루며 또 반대쪽인 오리건주(州)에는 중국인이라고 하는 청조사람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1862년부터 시작된 대륙횡단철도공사에 동부의 아일랜드인과 서부의 중국인들이 철도공사인부로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대입할 수가 있다. 유니온퍼시픽철도(Union Pacific Railroad)지역은 비교적 평탄한 평야이기 때문에 철도 부설 인부도 키와 체격이 크고 힘이 센 아일랜드 인부를 확보할 수 있었으나 센트럴퍼시픽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는 인부 구인난으로 키도 체격도 작고 허약한 중국 인부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때문에 중국과 아일랜드인들은 체제속의 하나의 구성원으로 의심할 수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오리건 준주(Oregon Territory)에는 중국인이 상당히 많았다는 이야기다. 즉 동아시아대륙에서 철도일자리를 찾아 태평양을 넘어간 것이 아니다. 당시 중국인들의 아편흡입상황을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뉴욕에서도 습용하였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찾을 수 있고 서부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습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현재는 당시 사건의 진실성을 없애기 위해 사건 명칭도 여러 가지를 사용하여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지만 본래 중국인들이 동아시아대륙에서 넘어 간 것이 아니라 기존 오래전부터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840년부터 시작된 골드러시는 분명 금이 나는 곳으로 온 지역의 서양인들이 몰려들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설령 그곳에 본래 동양인이거나 동양오리엔탈역사문화가 존재한 땅이라 할지라도 이런 환경이라면 총을 소지한 서양인들에게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빼앗겼을 수도 있는 것이며 자본을 손에 쥔 자본주들은 정부를 압박하여 금이 채굴될 수 있는 산을 매입하고 소유권을 주장했다고 하면 그래서 백인들만이 채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면 금을 만질 수 있었던 주체도 백인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조선체제나 대한제국체제에서 내치는 국왕이 하되 미국자본들이 경제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그들 마음대로 의회를 움직여 허수아비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괴장히 높다. 이때를 프론티어정신으로 치장하고 체제가 방관할 때 어떤 식으로던지 살육이 곳곳에서 자행되었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소제 알타이 본질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840년에 시작된 1차 아편전쟁은 이상하게도 서양세력들의 중국침탈 목적이 알타이의 금(金:gold)이 아니라 아편수출이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며 결코 동아시아대륙 알타이는 금이 무더기로 산출되는 곳이 아님이 분명하다. 아마도 19세기 발생한 중국역사 대부분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이거나 동부 북부일 가능성이 높다. 정리해보면 1844년의 상황은 자본에 의해 지배당할 처지에 놓인 모든 동양문화영역에서 절대로 불리한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청(Qing)나라라고 하는 중국체제를 청조(淸朝:Qing dynasty), 청정부(淸政府:Qing government)라고 하였지만 결코 임페리얼(Imperial)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조선(朝鮮)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남부 텍사스와 멕시코는 1917년 손문이 대총통으로 하는 광동정부(호법정부)가 활동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1844년에 네덜란드의 동물, 조류학자인 콘라드 야콥 테민크(Coenraad Jacob Temminck:1778-1858)가 분류체계를 개정한 학명 “Panthera tigris altaica Temminck, 1844”에 알타이카(altaica)란 아종명을 붙이 이유는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1758년 린네가 명명했다고 알고 있는 벵골호랑이(Panthera tigris tigris, Linnaeus, 1758)학명에서도 1815년 일리거에 의한 카스피해호랑이의 아종명 생성과 1844년에 시베리아호랑이 아종명 알타이카의 생성과 더불어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아종명 벵골은 한참 늦은 시기인 1929년에 브리티시 동물학자 레지날드 인네스 포커쿡(Reginald Innes Pocock:1863–1947)에 의해 삼명법(Panthera tigris tigris)아래 아종(亞種)으로 삼은 명칭이라 한 것은 이전 벵골호랑이가 다른 명칭을 불리었을 가능성을 유추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호랑이 먹이사슬 이제는 이런 혼란된 분류체계속에서 호랑이 자체만으로 서식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호랑이와 밀접하게 관계되는 먹이사슬을 찾아 볼 수밖에 없다. 일단 호랑이에게는 천적(天敵:natural enemy)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상대 적(敵)이 존재했는데 큰 버팔로(large buffalo), 코끼리(elephant) 그리고 곰(bear)으로 나타나고 이것들은 놀랍게도 대부분 북아메리카대륙을 근거로 하는 동물이다. 본 블로그 글 "백령도(白翎島)와 제주(濟州) 들소(野牛, 兕, bison)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0"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들소와 유럽들소가 교잡에 의해 혼종이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이야기 했고 유럽들소는 이른 19세기에 멸종되었으나 약간 늦지만 북아메리카들소는 20세기 초까지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사실을 볼 때 비록 북아메리카대륙들소 보다 유럽들소가 몸 집 큰 것이라 하지만 본래 애팔래치아산맥(Appalachian)을 근거로 하는 들소를 유럽들소라 하였으며 북아메리카대륙의 들소는 서부지역으로 몰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였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의 식민지 13개주는 마치 유럽국가들을 떠 올리게 하는 역사사실들이 많다. 야우(野牛)라고 하는 들소 역사 역시 모순이 없지 않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록키(Rocky)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북아메리카지역, 특히 서부평원에 수천만 마리(5000만 마리)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유럽들소니 북아메리카들소니 하지만 북아메리카대륙을 서식지로 하는 들소일 것이라 확신이 있다. 더군나다 캐나다 서부 앨버타(Alberta)주 남서쪽에 있는 헤드 스매시드 버펄로 지대(Head-Smashed-In Buffalo Jump)지역은 버펄로(아메리카 들소)의 뼈가 여전히 많이 발견되는 곳으로 알려지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이다. 1811년에 독일 곤충학자이면서 동물학자인 요한 칼 빌헬름 일리거(Johann Karl Wilhelm Illiger:1775-1813)가 코끼리(elephants), 미국 매스토돈(American mastodon:Mammut americanum), 털이 많은 맘모스(wooly mammoth)에 대한 분류학적 긴 코 분류 장비목(長鼻目:Proboscidea)를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다고 전자에 이야기 했지만 이것은 호랑이 먹이사슬을 이야기 하는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이야기다. 그가 학명을 부여키 위해 분명히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에서 표본을 취했다는 사실 등은 긴 코 분류, 장비목의 코끼리 역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서 서식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곰은 본 블로 글 "황금곰(金熊:Golden Bears)과 함길도(咸吉道)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0"살펴보았듯이 "Ursus arctos arctos Linnaeus, 1758 Brown Bear"은 '빨리 흐르는 강'의 뜻인 서스캐처원주(Saskatchewan)지역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은 바로 황금곰(金熊:Golden Bears)이 서식하기 좋은 서식처임을 알 수 있었고 주 남부에는 프레리(Prairie)초원이 있고 북부에는 침엽수림(針葉樹林:coniferous forest), 중간부의 이행대인 혼합림(混淆林:mixed forest)이 구성되고 있어 포식자 최상위에 있는 동물들이 서식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They range from tropical forests, evergreen forests, ravines, woodlands, mangrove swamps, grasslands, savannas, and rocky country. Some other preferred habitats include dense thickets, long grass or tamarisk shrubs along river banks. 대체적으로 상대적인 적이 최상위포식자 위치에서 바라보았지만 호랑이의 서식지를 살펴보면 열대임야, 상록수림, 협곡, 삼림지대, 맹그로브 습지, 목초지, 대초원, 그리고 바위가 많은 곳과 강둑들을 따라 난 조밀한 덤불, 긴 잔디밭 또는 위성류(渭城柳)관목이 있는 곳이라 하였다. Humans have also altered the natural habitats of tigers by their destruction and encroachment on the tigers' feeding range; humans are destroying their habitats by cutting down trees, moving into their preferred locations, polluting the water and air, and hunting their prey. 인간들은 호랑이 번식하는 곳에서 호랑이들의 자생지들을 바꾸고 나무들을 절단하여 번식지들을 소실시키거나 인위적으로 근원서식지를 이동시켰으며 물과 공기를 오염시켜 호랑이를 제거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예상된 우려는 호랑이의 절멸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Superstition has surrounded tigers for centuries; their body parts are used in Asian medicines. Necklets of tiger claws are thought to protect a child from "the evil eye"; tiger whiskers are considered either a dreadful poison (in Malaysia), a powerful aphrodisiac (in Indonesia), or an aid to childbirth (in India and Pakistan); the bones, fat, liver and penis of a tiger are prized as medicines. 물론 인간의 잔인성도 여기에 포함될 수밖에 없을 것인데 위 자료의 설명에서 보면 호랑이의 신체가 약제로 사용되었고 호랑이 발톱은 목걸이가 되어 흉안(凶眼)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호랑이 수염은 무시무시한 독약으로 간주되거나 강력한 최음제로 인식되었고 또한 출산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알려짐에 따라 약제를 위해 무차별 사냥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란 추측 또한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호피나 호골등이 진상품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약제등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일이다. 그외 약제용으로 사용된 호랑이의 뼈, 지방(fat), 간장(liver) 그리고 음경이 있는데 보신용으로 귀한 약제로 취급되었을 것이 뻔하다.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호랑이 절멸을 유도한 것은 상업주의에 빠진 인간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병행해서 알 수가 있다. 이제는 그렇다면 호랑이 먹이사슬에 대해 알아보는데 호랑이 서식지를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호랑이의 먹이사슬이기 때문이다. Tigers prey on deer, moose, rabbits, birds, fish, bear, elk, lynx, hares, pigs, cattle, goats, and some smaller animals. The main food of tigers are buffalos, antelopes, and rodents. 그것들을 보면 사슴(deer), 큰사슴(moose), 토끼들(rabbits), 새들(birds), 물고기(fish), 곰(bear), 엘크(elk), 시라소니(lynx), 산토끼(hares), 돼지(pigs), 소(cattle), 염소(goats), 버팔로(buffalos), 영양(antelopes), 그리고 설치류동물(rodents)등으로 열거된다. 글쓴이 판단에서 이미 호랑이의 적이라 할 수 있는 큰 버팔로, 코끼리, 그리고 곰까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또는 북서부에 서식지로 삼고 있는 것은 실제로 먹이사슬로 나열된 위 동물들의 근원 서식지와 동일한 영역에서 서식했을 것이란 충분한 짐작이 가능하며 때문에 근원적으로 호랑이의 자연스러운 본래의 서식지가 먹이사슬에 갇혀 있는 동물들이 산재하는 곳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본다. 그처럼 왜 먹이사슬이 중요한가. 한 생물개체를 인위적으로 이동 또는 말살했다 하여도 먹이사슬 모두를 제거할 수 없는 것이며 자칫하면 생태계의 균형을 깰 위험이 있기 때문에 거의 100% 증명이 될 수 있는 근거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알아볼 것은 호랑이와 늑대가 공히 먹이로 하는 설치류 호저(豪猪:porcupine)이다. 이것을 가시 도치류 또는 퀼 돼지(quill pig)라고 하는데 A species of New World porcupine, 신대륙호저라고도 하며 캐나다호저(Canada porcupine)라고 하는 것으로 학명은 린데가 1758년에 명명한 에레티존 도르사툼(Erethizon dorsatum Linnaeus,1758)이다. 물론 이 호저는 북아메리카대륙을 서식처로 하고 있는 북아메리카대륙호저(North American porcupine)이다. 호저들은 여러 가지 자연번식지를 가지고 있는데 밀림, 툰드라, 목초지 그리고 사막 관목 공동체를 포함하여 발견되며 특히 알래스카의 흰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에 서식하는데 이는 호랑이 영역과 겹쳐진다. 이 북아메리카대륙 호저는 아메리카 인디언(원주민)의 바구니들과 옷과 같은 것들을 꾸미는데 딱딱한 깃촉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놀라운 것은 이 호저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만 서식하는 설치류라는 점이다. The name "porcupine" comes from Latin porcus pig + spina spine, quill, via Old Italian—Middle French—Middle English. A regional American name for the animal is quill pig (crested porcupine)North American porcupine (Erethizon dorsatum), 어원에서 보면 포큐파인(porcupine)은 라틴어 포르쿠스 픽(porcus pig)의 주격으로 수컷 돼지 또는 '가시돼지(Quill pig)'로 불린고 porcus(a tame swine)1.a tame swine, a hog, pig 2.hog 3.the sea-hog, porpoise 라틴어 spina spey-(“sharp point”‎).spine 의미가 모두 날카로운 가시를 말하고 있다. Natural predators of this species include fishers (a cat-sized mustelid), wolverines, coyotes, (Gray wolf)wolves, American black bears, and cougars, as well as humans. The only known avian predators of this species are golden eagles and great horned owls. 그런데 이 호저는 같은 포식자, 호랑이와 늑대를 동시에 천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호저의 자연포식자들은 호랑이 이외 대부분의 캐나다와 미국 북부 지역의 북방수림 지역에서 발견되는 포어성(捕魚性)동물인 아메리카담비(美洲貂:American Marten)가 있으며 다음은 툰드라지대 이외에 스칸디나비아반도, 러시아, 알래스카의 침엽수림등에서 발견되는 울버린(Wolverine:貂熊,狼獾)이 있고, 북미 서부 대초원의 “이리(狼)”라고 하며 교랑[郊狼:Canis latrans 혹은 초원랑(草原狼), 총림랑(叢林狼), 북미소랑(北美小狼)]등으로 불리는 코요테(coyotes)가 있다. 그런데 교랑의 랑은 바로 호랑이의 랑이 바로 그것이며 북아메리카 및 중앙아메리카 일대에 분포한다는 사실이 또한 놀랍다. 이것은 호저와 지역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회색늑대科学分类 编辑界: 动物界 Animalia 门: 脊索动物门 Chordata 纲: 哺乳纲 Mammalia 目: 食肉目 Carnivora 科: 犬科 Canidae 属: 犬属 Canis 种: 狼 C. lupus 二名法Canis lupus Linnaeus, 1758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하게 관찰할 것은 호저의 천적에서 먹이사슬 첨단에 속하는 학명(gray wolf:Canis lupus),[a] also known as the timber wolf or western wolf, 이라 하는 "회색늑대"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있었던 아종(亞種)을 카니스 루푸스 찬코(Canis lupus chanco)라고 하고 티벳늑대, 한국토종늑대, 몽고늑대 등으로 불린다. 본 블로그 글 "회색늑대(Canis lupus coreanus)를 모계로한 진돗개와 딩고(澳洲野犬,dingo) http://blog.daum.net/han0114/17048784 "에서 한국늑대(Canis lupus coreanus)는 대한민국에서 멸종위기 야생동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는 것인데 북아메리카 대륙 북부지역에 남아 있는 바로 학명 카니스 루푸스 찬코(Canis lupus chanco)와 같이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고 한 적이 있다. 또 하나의 포식자 곰(熊)은 미국 및 캐나다의 대부분 주에 발견되는 아메리카 흑곰(American black bears, Ursus americanus)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리고 쿠거(Cougar) 또는 팬서(Panther)라고도 하며 아메리카 대륙의 대형 고양이과 동물인 퓨마(Puma, Puma concolor)가 있다. 이것은 아메리카표범에 말한바가 있다. 가만히 보면 호랑이와 회색늑대의 먹이사슬 호저의 포식자들은 거의 대부분 북아메리카대륙을 서식처로 하는 동물들이다. 그런데 호랑이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식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아예 빠져 버렸다는 것을 누가 곧이 듣겠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특히 회색늑대(Canis lupus, wolf, 또는 gray/grey wolf)는 북아메리카, 유라시아, 북아프리카 황무지에 서식하는 개과의 종으로 이리나 말승냥이로도 불린다. 영어의 "wolf"라는 단어는 고대 영어의 "wulf"로, 이는 고대 게르만어파 "*wulfaz"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하며 또 이는 고대 인도유럽어족의 "*wlqwos"/"*lukwos"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되면서 상존지역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아니면 서부라고 판단한다. 고대 영문학에서는 앵글로색슨 왕과 그 전사 이름의 접두사와 접미사에 "wulf"라는 명칭을 붙여졌으며 그 예로, Wulfhere, Cynewulf, Ceonwulf, Wulfheard, Eanwulf, Wulfmeer, Wulfstan, Aethelwulf 등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으며 이도 근원으로 따진다면 뉴잉글랜드가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던 이런 식을 따져보면 북유럽권의 역사가 모두 북아메리카대륙과 연관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또한, 늑대와 관련된 이름으로 기독교화 이전 게르만족의 전사들 이름에 Wolfhroc(Wolf-Frock), Wolfhetan(Wolf Hide), Isangrim(Grey Mask), Scrutolf(Garb Wolf), Wolfgang(Wolf Gait) and Wolfdregil (Wolf Runner) 등으로 늑대와 관련된 이름을 붙여졌다고 알려진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독일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이 북아메리카대륙 중북부지역이며 호랑이 서식처와도 연관되고 있는 사실도 알고보면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라틴어의 “lupus”는 사비니인(Sabini)의 외래어로 에드워드 톱셀에 따르면 원래 이 말은 그리스어로 사자발을 뜻하는 λεοποσ(leopos)과 빛을 뜻하는 λουκᾶς(loukas)에서 두 단어가 합성어로 되었다고 하였으며 라틴어 사전을 보면 카니스(canis)는 개(a dog)를 의미하고, 루푸스(lupus)는 늑대(a wolf)로 풀이되고 있다. 그것은 개나 늑대나 같은 동종으로 보았던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북극늑대(C. l. arctos)는 북극의 높은 섬에 생존하고, 동부늑대(C. l. lycaon)는 북아메리카 동부 숲에서 서식하였으며, 멕시코늑대(C. l. baileyi)는 멕시코 등지의 남쪽에 서식하는 것으로 공히 회색늑대(Canis lupus)종(種)이다. 동부늑대와 멕시코늑대는 일부 원시적인 특성과 체계적인 친화성을 가지고 있어 같다해야 맞다. 캘리포니아 남부 해안의 화석에서 북극늑대와 비슷한 툰드라늑대(C. l. albus)가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약 480만 년 전부터 약 4천 년 전)후기에 큰 크기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의 대형 회색늑대의 아종(亞種)이 남아 있으며 현재 늑대는 더는 그곳에 거주하지 않다 하지만 오래전에는 빙하 주기에 의해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멕시코늑대와 비슷한 작은 늑대가 캔자스와 남부 캘리포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는 플라이스토세 후기 늑대들의 북극 생활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며 유랑 생활을 하며 따뜻한 곳에서 대량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리된다. 특히 옐로스톤 강에 서식하던 늑대(Yellowstone Wolf)들의 역사를 보면 서부 산악지대 와이오밍(Wyoming), 몬타나(Montana), 아이다호(Idaho)에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을 1871년 그랜트 대통령에 의해 지정되었고 그 때 늑대들이 감소세에 있었지만 정부가 특별히 보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은 미국대통령이 보호지역으로 지정하였다는 사실도 재고할 필요성이 있다. 1883년 1월, 내무행정장관은 공원에서 사냥을 금지하는 법규를 발표하였으나 이 규칙은 늑대, 코요테, 곰, 퓨마 그리고 다른 작은 약탈자들에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1886년 8월 1일에 미육군(米陸軍)이 공원관리를 인수한 직후, 관리관인 무스 하리스(Moose Harris)는 어떠한 야생 생물이라 할지라도 공공 사냥을 금지하였고 최소한 1914년까지 어떠한 늑대도 사살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미국도 해수구제사업(害獸驅除事業)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이다. 1907년에 서부가축 및 축산업자들의 정치적 압력은 미국 연방 정부 내 내무부 산하기관인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United States Fish and Wildlife Service)을 움직여 결국 동물 피해 통제라는 공동프로그램에 의해 제정된 해로운동물통제법(Animal Damage Control Act)은 1907년 39개의 국립산림에서 1800마리의 늑대와 23,000마리의 코요테를 살상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 호랑이가 빠졌다. 회색늑대가 있었으면 호랑이가 없었을리가 없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1933년까지 유지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동안 해로운동물이라는 명목아래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희생되었을 것인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더불어 생각할 것은 호랑이가 아예 빠졌다는 것도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회색늑대는 원래 북위 20°이북의 모든 지역에 서식지가 있었다고 알려지지만 지금은 절멸에 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북위 20° 이북의 모든 지역이라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 대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늑대는 모든 곳으로 퍼져 미국 남동부에서 시에라네바다 산맥 서부 캘리포니아, 멕시코 열대 및 아열대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또한, 늑대는 동부 뉴펀들랜드 섬, 밴쿠버 섬, 서부 알래스카 남동부 섬, 북극 제도, 그린란드 등 주요 섬에서도 서식하고 있다고 알려지니 번식력은 대단한 동물임에 틀림없다. 그런 늑대가 지금은 멸종단계에 있다는 사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북미의 늑대는 인간 인구의 증가와 농업의 확대와 동시에 개체수가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20세기 초에 늑대는 애팔래치아 산맥 일부와 오대호 지역 북서부 지역을 제외하고 미국 동부에서 멸종했다 하였다. 캐나다에서는 1870년에서 1921년 사이 뉴브런즈윅 주와 노바스코샤 주에서 늑대가 멸종했으며 1911년에는 뉴펀들랜드 주에서 멸종했다. 그리고 북부 로키산맥에서 늑대는 1920년대에 사라졌다고 알려진다. 이것에 운명은 호랑이 신세도 마찬가지였다고 보여진다. 1850년에서 1900년 사이 퀘벡 주와 온타리오 주 남부(南部)에 늑대가 멸종했고 대평원에서 늑대 개체수(個體數)의 감소는 1860년-70년 사이 아메리카들소 등 다른 먹이의 개체수(個體數)감소와 맞물려 시작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900년에서 1930년 사이 야수 종(種)을 멸종하기 위한 집중적 육식 동물관리프로그램으로 인해 사실상 미국 서부와 캐나다 국경 인근 부분에서 멸종되다시피하였고 회색늑대는 알래스카와 미네소타 주 북부를 제외한 모든 연방 및 주에서 멸종되었다고 나타난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900년부터 1930년까지 멸종하기 위한 집중적 육식 동물관리프로그램으로 멸종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가 있다. 이를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1907년부터 시작된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이 실시한 해로운동물통제법(Animal Damage Control Act)에 의한 관리는 바로 일제가 실시한 해수구제사업과 동일한 것임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일제병탄기의 해수구제사업 일제병탄기의 1915년부터 실시된 해수구제란 실체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도대체 해수구제사업(害獸驅除事業)이란 무엇일까?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발행 잡지‘조선휘보(朝鮮彙報:1915-1920)’에 따르면 이 사업에 경찰관과 헌병은 3321명, 공무원 85명, 사냥꾼 2320명, 몰이꾼 9만1252명이 1915년부터 4220일간 동원됐다고 하였으니 일수가 11년 205일이며 1926년 까지 사업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사업의 명칭에서 보면 해로운 짐승들을 몰아내어 제거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전자에서 이야기 한 미국(米國)연방정부 내 내무부산하기관인 미국 어류(魚類) 및 야생동물관리국(United States Fish and Wildlife Service)이 실시한 동물피해 통제라는 공동프로그램에 의해 제정된 해로운동물통제법(Animal Damage Control Act)과 거의 같은 성질의 정책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마저 한반도 일제(日帝)와 북아메리카대륙 미국(米國)의 연결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해수구제사업의 목적에서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즉 미국은 상업주의의 이유가 분명한데 이 동물피해통제란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서부(西部)가축 및 축산업자들의 정치적 압력이 컸기 때문이라지만 한반도 일제(日帝)는 조선인민들이 맹수들에게 피해가 막대하여 이를 막기 위해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것에서 추구한 정책 목적 자체가 차이가 분명하게 있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일제에 대한 것들은 거의가 허수가 많다. 미국정부는 맹수들이 가축을 해치고 축산업자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가축시장과 축산육가공품에 대한 안전한 공급보장을 정부가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상당히 현실적인 문제을 해결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면서 이미 폭정과 압정을 마다하지 않는 강압정책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식민지 인민 따위가 걱정스러워 이런 정책을 펼친다는 것은 매우 기만적이며 위선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정책자체의 진위를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잡지 '조선휘보(朝鮮彙報)'에 따르면 1915~1916년 사이 호랑이, 표범 같은 맹수의 공격으로 사상자 351명이 발생했고 가축 피해도 1만3830마리에 달했다고 하였다. 위 기록을 보면 일제도 맹수들의 공격으로 가축피해가 많아지는 것을 염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결국 미국과 동일하게 가축업자와 축산업자들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지만 굳이 인민을 위한 것이라 포장하였다. 미국과 일제는 어찌하여 이렇듯 하나인 것처럼 역사에 나타나는가. 지금까지 한반도 역사학자들은 엉뚱하게도 일제병탄기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실시한 사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사람들이 맹수들에게 피해를 보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여 인민생활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이를 합리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가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역사는 참으로 응대할 수 없는 소설같은 것이다. 누가 이처럼 거짓을 지어내고 날조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참으로 기발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지금까지 식민지기간동안의 해수구제사업으로 인하여 한반도 내의 호랑이, 표범, 곰, 늑대 등의 포식동물들이 거의 절멸에 이르렀다는 현실적인 의문에 당위성이 완성된 것은 틀림없다. 애초부터 한반도에 호랑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호랑이의 근원종이라 할 수 있는 “한국호랑이”라고 하거나 “조선호랑이”라고 하는 거대한 몸집의 호랑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한반도에 호랑이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동아일보에서 확인할 수 있어도 몸집이 남중국호랑이 크기 정도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 모든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제정책에서의 대상이 된 동물은 미국의 동물피해 통제라는 프로그램에 대상이 된 동물들과 같이 거의 절멸했다는 결과가 동일하게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은 이로 인해 거대한 생태계가 뒤틀려지면서 자연재해가 발생했고 자연계가 난리가 났지만 오히려 서세 생물학자와 역사학자들에게는 철호의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그것은 진화론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여론이며 종전 생물학체계에서 새롭게 분류체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발상이 자연스럽게 생성되었고 너도 나도 표본을 찾아 그들의 이름을 올리기에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생물학계 상황이라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자연 생태학적인 책임감 따위가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때문에 특히 1844년부터 서세학자들은 이러한 환경을 이용하여 생물분류체계에 집착하였다는 것도 납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존 생태계를 흔들고 새롭게 표본이 만들어지는 곳에 오히려 신대륙(新大陸)이라는 프레임의 역사는 걸맞게 변이를 재촉할 수 있었으며 모든 영역에서 이 파급의 효과는 지대했을 것이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미국이나 한반도 정책입안자들에 의해 실행되었던 것은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들을 생태계가 위험함을 감수하더라도 완전한 절멸을 권장했거나 유도했다는 것이므로 맹수나 포식자들의 씨가 마르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 왜 호랑이가 없어야 하는가. 이렇게 없어진 것이다. 한국호랑이의 근원종(種)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현재 미국을 보면 주요 맹수나 포식동물들은 거의가 사파리공원(Safari park)이나 동물원에서 개체수를 조정해가며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일반 산야(山野)에는 맹수나 포식동물은 포획의 대상이며 일반인들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1910년부터 서세연합체제(西勢聯合體制)의 우두머리가 되어 버린 미국(米國)은 대한제국을 조정하며 일본을 가칭했다면 이것은 명확히 의도된 역사판짜기에 따른 본래 역사장소 감추기를 위한 술책이 그 이면에 무차별적으로 실행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일제에 의해 1915년 호랑이 11마리, 다음해에는 13마리를 잡는 등 공식 통계로 약 200마리가 잡혔다고 알려지고 기록에 남기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호랑이 500마리, 표범 3000마리 이상이 일제에 의해 잡혀 멸절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였다. 늑대 같은 경우에는 약 1,400마리가 포획되었다. 또한 토목공사나 삼림벌채로 인한 서식지의 파괴도 컸고 곰 역시 약 1,000마리 가량이 포획되었다고 알려진다. 곰(熊:bear)이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늑대가 1,400마리가 포획되었다는 사실에서도 그냥 늑대라고 했지만 이 늑대는 회색늑대(Canis lupus:gray wolf)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조선(朝鮮)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시식해 ‘조선을 먹는다’는 정치적인 행사에 정호군(征虎軍)이 사냥한 호랑이 고기 시식회를 1917년 12월7일 조선호텔에서 야마가타 정무총감을 포함해 실력자 120명을 초대해 열었고 같은 해 12월20일 도쿄제국호텔 대연회장에는 체신대신, 농상무대신, 육군대장 등 정재계 요인 2000여명이 참석하여 시식회를 열었다고 알려진다. 호랑이 고기는 육회용으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이 요리가 특색요리로 존재한다. 그것에는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데 생육, 생달걀, 양파, 소금, 후추, 및 기타양념이 들어간다. 스테이크 타르타르(steak tartare)와 흡사하고 특히 독일인들이 많은 노스 다코타(North Dakota),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위스콘신(Wisconsin) 및 미네소타(Minnesota), 미주리에 특산물이며 이 음식의 원조는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의 클라크(Clark)인 것으로 나타난다.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주 브라운카운티(Brown County)에 애버딘(Aberdeen)과 케슬러(Kessler's)식료품 가게에서 공급한다고 되어 있다. The definition of tartare is a type of ground raw meat or fish with seasoning.참고로 타르타르(tartare)의 정의는 조미료가 들어간 생고기 또는 생선의 일종이라고 설명된다. 본래 스테이크 타르타르는 프랑스어로 필레 아메리칸 프리파리(Filet américain préparé) 즉 미국식 안심요리라는 뜻이라고 자료에 나타난다. 그러나 글쓴이의 생각은 타타르인들의 요리로 보는 것이 옳다. 서로 감추기에 급급하지만 대체로 독일인과 일본인이 여기서 이처럼 묶여 나타난다. 해수구제에 대한 정책을 정당화한 프랑스기사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La regne du tigre en Corée Death / Being Eaten Alive:“La regne du tigre en Corée” (Korea under Japanese rule; after the Japanese ban on owning weapons, the Koreans are seen as defenseless). 한국은 호랑이 왕국(La regne du tigre en Corée)이란 제목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1909년 12월 12일 발간된 일간지인 르 피티 주르날(Le Petit Journal:1863-1944)의 삽화가 있는 부록에 남겨진 호랑이의 민간인 습격 그림과 그것에 따른 설명에서 정부는 조만간 전국적으로 공포에 쌓인 호랑이와 늑대를 체계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해수구제사업이며 해로운동물통제법(Animal Damage Control Act)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랑이는 아시아지역에서만 서식하였다? 이런 모순된 주장은 어떻게 생성 되었을까? 호랑이는 아시아대륙에만 서식했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입증에만 몰입된 나머지 생물생태학적인 사실을 경시하는 서양인학자들의 사고가 그렇다는 것이며 매우 아시아적인 이야기로 그야말로 편집증환자가 할 수 있는 주장이다. 호랑이는 애초부터 아메리카대륙에는 살지 않았다? 참으로 코메디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호랑이는 수영도 곧잘 한다. 어딜 못가겠는가. 미안하지만 호랑이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해수구제로 사라지기 시작하여 서부의 호랑이마저 가축및 축산업자들의 정치적 압력으로 사라지게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다. 동부는 본래의 호랑이가 서식한 곳으로 소위 벵골호랑이라고 하고 인도호랑이라고 불리던 특히 산악 북부지역이 대표적인 서식처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바로 애팔레치아산맥(Appalachian Mountains)을 중심으로 서식하던 호랑이라 할 수 있다. 호랑이와 회색늑대는 동반된 포식자들이다. 이 회색늑대를 말승냥이(timber wolf)이라고도 하는 것도 본 블로그 글 "화기삼(花旗蔘)은 고려인삼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1"에서 개마고원(蓋馬高原)을 마다산(馬多山)이라 하여 말이 많은 산, 즉 말이 뒤 덮여 있는 고원이라고 해석된다 하였던 것처럼 캔터키주 동부 애팔래치아산맥(Appalachian Mountains of Eastern Kentucky)에 접해 있는 고원에 마운틴 플레저 호스(The Mountain Pleasure Horse)란 말이 존재한 것에서 애팔래치아산맥의 원시 동물 유형으로서 밝혀지고 유전자테스트 결과 테네시보행말(Tennessee Walking Horse)과 로키산맥말(Rocky Mountain Horse)이 섞여 승마용인 아메리칸 새들브레드(American Saddlebred)로 나타난다 한 이 혈통 추적에 결과에서 보았듯이 말 생육의 근거지로 개마고원이라 했다는 사실에 더하여 회색늑대 즉 말승냥이가 가장 활동이 많았던 곳으로서 추측이 가능한 것은 회색늑대의 별칭 말승양이 풀이에서 보면 그렇다. 일찍이 린네는 동부 시베리아호랑이를 벵골호랑이(Panthera tigris tigris, Linnaeus,1758)로 분류하였다고 보이지만 1844년 변이된 진화론 주장에 영향을 받은 서세학자들이 본격적으로 학명을 새롭게 분류하기 시작한 결과 동부의 벵골호랑이와 서부의 시베리아호랑이가 등장한 사실이다. 물론 시베리아라 함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툰드라 지역 전역을 말해야 옮지만 현 시베리아를 지칭하는 것을 기준으로 할 때 서부를 시베리아라고 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서부(西部)시베리아호랑이가 아종(亞種)으로 구분 될 필요성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보고 이때부터 뚜렷한 연고사실이 없음에도 여기저기 서식지를 아시아대륙으로 옮기며 서세생물학자 너도나도 아종을 명명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더욱 이상한 것은 브리티시(British)생물학자 레지널드 이네스 포콕(Reginald Innes Pocock,1863-1947)에 의해 동부(東部)시베리아호랑이를 뒤늦은 1929년에 수마트라호랑이(Panthera tigris sumatrae Pocock,1929)라고 새롭게 명명함과 동시에 벵골(Bengal)이란 학명을 만들어 삼명법으로 시베리아호랑이와 다른 아종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현 캐나다 동부 동물원의 호랑이가 모두 수마트라호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수마트라호랑이라 함은 바로 인도네시아를 서식처로한다는 이야긴데 인도네시아는 열대성기후의 지역이다. 그런데 추운날씨의 지역인 캐나다동물원에서 사육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것은 호랑이가 추운 날씨를 근원으로 삼고 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하게 한다. 알타티카를 붙여 1844년에는 시베리아호랑이만 분류된 사실은 어떤 것도 개입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시베리아호랑이를 굳이 알타이라 했다는 사실도 서부시베리아호랑이를 생성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는가 판단되며 이것이 아시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1929년 이때부터 인도(印度)명칭이 아시아쪽으로 옮겨지면서 전체 생물분류체계가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인식되는 부분이다. 오늘날 호랑이는 아시아에만 퍼져 서식한다는 사실에 어느 누구도 크게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아시아대륙생물학자가 감히 서세학자가 장악한 현 과학계기득권에 함부로 대항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연구와 발표를 의무로 해야 할 과학자가 바른 말을 못했어야 어찌 학자라고 할 수 있겠는지 생각 해 볼 문제이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에는 원초적으로 호랑이가 없었던 것일까? 호랑이가 한국 땅에서 번식이 컸었다는 것을 한반도를 의식하여 아시아지역임을 구분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라 하겠지만 엄격하게 이야기한다면 한반도에 한국호랑이가 서식했다는 사실자체가 엉터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대입하기는 무리가 따르지만 한반도에 큰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아마도 이러한 프레임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가는 사실이다. 호랑이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큰 호랑이라고 알려져 있는 한국호랑이가 한반도에 서식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라 아닐 수 없다. 먹이사슬만 보면 그렇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가 있다. 한반도가 세계에서 천예자원이 가장 풍부한 곳이며 본질적으로 인류 기원이 확실한 땅이라고 떠든다면 그것을 어찌 정상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한반도에는 자원이 풍족하지 못해 원초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왜 믿으려 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자원만으로 살던 시대와는 큰 차잉가 있겠지만 가난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현 아시아대륙 남쪽인 인도나 인도네시아에 호랑이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여기를 중심으로 퍼졌다는 남방기원설도 그렇지만 북방설이 유력하다고 정리되고 있는 문제도 아시아대륙에만 시베리아가 있다고 하는 잘못된 상식에 의해 파생된 오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왜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툰드라지역은 시베리아라 하지 않는지 그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 소제 "알타이의 본질"에서도 언급한 사실이지만 시베리아가 아시아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다.본 블로그에서는 일찍이 생물학적으로 버드나무가 시베리아에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대부분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생육한다는 사실을 밝혔던 바가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백력이라고 하는 시베리아의 어원에서도 빛 나는(to shine), 새벽·여명·서광(see aurora), 오스(aus) 밝다, 여명을 보다, 새벽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바로 태양이 뜨는 동쪽이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북아메리카대륙을 깃점으로 하고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솔직히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동시베리아와 서시베리아가 존재했다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지만 본래 시베리아는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 호랑이 시베리아산(産)의 화석종(種)은 수십만년전의 것으로 가장 오랜 것이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확실히 현생의 호랑이와 연결이 닿는 것으로 간주된다. 시베리아가 아시아대륙에만 있으니 호랑이가 아시아대륙에만 서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정체가 밝혀지면 이 모든 사실은 허구가 됨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화석동물을 동정(同定)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기타의 이론(異論)도 없지 않으나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적어도 시베리아산(産) 화석이 현생의 호랑이와 동일종으로 인정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몇 가지 논거를 들면 첫째 더운 동남아시아의 호랑이는 낮 동안 깊은 숲속이나 물가에서 지내며 숲에 숨어드는 것은 잠복대기를 하고 있다가 기습사냥을 하는 생존상의 필요에서일지도 모르나 그렇게 어두운 숲속을 좋아하는 것이 습성이라 가정해도 북방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알려진다. 때문에 남방에서의 이와 같은 행동은 더운 날씨 때문에 피서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니 남방기원설은 근원적으로 약하며 이는 호랑이가 더운 데보다는 추운 지방의 동물이란 것을 시사하는 것인데, 호랑이가 실제로 추위보다는 더위를 못 참는다고 되어 있다. 또 한가지의 모순은 호랑이가 인도에는 있고 스리랑카에는 없다는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본래 스리랑카의 포유동물은 인도 대륙과는 공통종 또는 근연종(近緣種)이어서 코끼리, 멧돼지, 늘보, 곰, 표범 따위는 두 곳에 다 있는데, 호랑이만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보르네오는 스리랑카보다도 포유동물상(相)이 특수하고 지형역사(地史)적으로도 오래된 것인데, 여기에도 호랑이는 없다는 남방기원설이다. 같은 섬이라도 월리스선(Wallace's line)의 서쪽인 수마트라 자바 발리 섬에는 호랑이가 있는 것은 대륙에서 이동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사실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동부 및 동북 아시아대륙도 그에 딸린 섬인 해남도, 대만, 일본 및 사할린에는 호랑이가 없다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옛날 시베리아의 생물상은 현재와는 달리 기후가 따뜻하고 초목이 무성해 대형 사슴의 일종인 무스(moose)나 순록 등 호랑이의 먹이 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호랑이의 개체수가 많아지고 오늘날과 같이 그곳의 기후와 생물상이 변화되면서 먹이감이 줄어들자 호랑이는 타 지역으로 이동하며 분포를 확대해 갔다고 설명되는데 이것에는 역사성과 여러가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 숨어 있는 이야기다. 티벳고원을 분포의 공백지대로 남기고 주로 중국대륙을 거쳐 동남아시아와 인도로 남하했다는 것도 그렇고 한편으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스피해 주변과 파키스탄으로 서진해 남하한 것들과 인도에서 만났다고 되어 있으나 뚜렷하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이렇게 퍼진 호랑이들이 지역적 변이로서 고정된 형질(形質)을 가지게 돼 현재의 호랑이에서 보는 지방적 아종(亞種)이 됐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률적이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아시아대륙에서 동쪽이나 서쪽에 차이가 무엇이 있을까? 오히려 서쪽이 건조한 지역이 아닌가. 오늘날 아시아에 편중된 호랑이 서식지 문제는 단순하게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물론 복잡한 조건이나 다양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며 각 아종의 형질을 계통적으로 변이되었다고 하겠지만 인위적으로 서식지를 이동시켜 단절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다. 전 세계에서 100년 전만 해더라도 약 100,000마리의 호랑이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0년 조사 결과, 전 세계 단 3,200 마리만 남아있음을 확인했고 이것은 97%의 호랑이가 멸종되었다고 결론내려진다. 그것도 아시아대륙에만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니 이를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생태 환경적으로 본래 서식지와 비교하여 부족한 것이 많아 호랑이가 자연 사멸되었거나 환경적으로 도태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호랑이 먹이사슬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들은 호랑이 번식하는 곳에서 호랑이들의 자생지들을 바꾸고 나무들을 절단하여 번식지들을 소실시키거나 인위적으로 근원서식지를 이동시켰으며 물과 공기를 오염시켜 호랑이를 제거했다고 말하고 있다. 19세기 말엽부처 시작된 서양인들에 의한 기존역사 파괴와 생태질서파괴에 이어 그 자리에 새로운 역사판짜기 일환에 의한 그들의 부질없는 욕심을 채워 넣었던 것이 오늘날 생물학분류체계이다. 호랑이가 아시아대륙에만 서식한다는 사실과 호랑이 개체가 95%가 감소한 원인은 고의적이라 할 수 있는 개체 감축과 축소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변질에 의해 자연적 감소현상을 이야기 하지만 근원적인 원인이나 그에 따른 이유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더군다나 현재 활동범위는 호랑이가 많았던 시기의 7%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했고 전부 아시아대륙으로 방글라데시, 부탄, 캄보디아,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네팔, 러시아, 태국, 베트남 등에 존재할 뿐이라 했다. 무엇인가 자연이치에 맞지 않을 것 같은 결과가 아닌가. 왜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포식자로 타고난 맹수라고 하는 호랑이가 아메리카대륙에서는 생존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메리카대륙을 신대륙으로 가름하고 모든 역사를 만든 것에 비유해야 할 이야기다. 의문을 가지지만 누구하나 이에 적극적인 답을 내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아메리카대륙에 상당히 많은 근원종의 호랑이가 생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사가 아메리카대륙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양학자는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했다 하더라도 그동안 동양인 생물학자들은 이런 말도 안되는 사실에 동의하면 안된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비판을 하지 않는 학자가 과연 올바른 학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서양학자들 못지않게 거의가 서양교육을 받았고 때문에 서양학자들을 암묵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서양학계에 인정받으려면 오히려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확연히 들어나는 의문점을 쓸데없는 망상이라 치부할 것이고 서양인들이 완성시킨 분류체계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조차 터부시 할 것이니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현재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기초가 되는 생물학 자료들은 19세기 서양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토대이고 바탕이며 근거로써 실체가 그것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미래 과학지식까지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인 생물학자나 과학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라 할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아메리카대륙에는 호랑이 근원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가. 서양학자들이 심어놓은 허수들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마무리 정리 소제 “호랑이의 먹이사슬”에서 호랑이의 먹이사슬을 살펴보았지만 개체들을 보면 사슴(deer), 큰사슴(moose), 토끼들(rabbits), 새들(birds), 물고기(fish), 곰(bear), 엘크(elk), 시라소니(lynx), 산토끼(hares), 돼지(pigs), 소(cattle), 염소(goats), 버팔로(buffalos), 영양(antelopes), 그리고 설치류동물(rodents)로 나타난다. 버팔로(buffalos)에 대해 본 블로그에서 알아본 결과는 본 블로그 글 "백령도(白翎島)와 제주(濟州) 들소(野牛, 兕, bison)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0"에서 아메리카의 야우(野牛)라고 하는 버팔로 들소 역사에서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애팔래치아산맥(Appalachian)에서 록키(Rocky)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북아메리카지역, 특히 서부평원에 수천만 마리가 살았다는 사실을 밝혀 알았다. 그리고 위에서 직접적인 먹이사슬의 주요하게 본 것 중에 하나는 설치류동물 중에 호저(豪猪:porcupine)이다. 이 호저의 천적 중에 하나가 바로 회색늑대이다. 이 회색늑대가 호랑이와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물론 회색늑대는 호랑이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예는 드물지만 호랑이 사체를 청소하는 일에 회색늑대가 담당했다 한다. 그리고 호랑이와 회색늑대의 경쟁적인 먹이 또한 바로 호저이다. 호랑이에게 가장 심각한 부상을 초래하는 동물도 호저이며 호저가시에 찔린 호랑이의 절망적인 선택이 바로 인간사냥이라 알려질 정도인데 늙어 활동이 부자유스러운 호랑이가 공격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인간으로 알려져 있는 것도 모든 호랑이가 인간을 마구 해친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호랑이가 인간을 습격하는 이유에는 인간스스로가 호랑이 서식지를 파괴하는 경우와 먹이의 감소에 따라 호랑이의 이동이 시작되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고 가축을 잡아먹다가 급기야는 인간마저도 습격하게 되며 그리고 호랑이가 질병, 부상, 노화 등으로 인해 쇠약해지면서 공격하기 쉬운 인간을 택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으며 위 2가지 경우에서 얻어진 경험을 통해 인간을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달려드는 경우를 말하고 있다. 미국 로키산맥을 근거로 하는 옐로스톤 회색늑대는 유명했다 한다. 이 회색늑대가 20세기 초 인위적인 개체 줄이기 정책인 해수구제나 해로운동물통제법에 의해 멸종까지 이르게 한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2014년 1월 10일자 조흥섭기자의 기사를 보면 윌리엄 리플(William J. Ripple:1952-)미국 오리건 주립대 교수 등 연구진은 지난 10일치 <사이언스>에 실린 총설 논문을 통해 세계의 대형 포식자 실태와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을 폭넓게 분석한 사실을 밝혔는데 1995년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회색늑대를 복원한 뒤 예상치 못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며 단지 먹이인 엘크가 줄어든 것만이 아니며 사슴이 뜯어 먹어 자라지 못하던 나무들이 무성해졌고, 이는 다시 생태계에 연쇄적인 파급효과를 냈고 결국, 회색늑대는 식물이 저장하는 탄소의 양을 늘려 기후변화를 완화하는 한편,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의 영향을 완충하는 구실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퓨마가 지금은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반작용으로 사슴이 급증했고 사슴은 어린나무와 풀이 돋는 강변에 출몰하여 큰 나무뿌리가 지켜주던 강둑은 약해져 홍수에 쓸려 내려갔다고 되어 있다. 결국 퓨마가 있어 강둑을 지켜 준 셈이다. 이와같이 최상위 포식자는 수효도 적고 넓은 지역을 배회하며 많은 양의 고기를 먹기 때문에 쉽사리 인간이나 가축과 갈등을 빚어 결국 해수구제(害獸驅除)등에 의해 희생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연구진들이 연구한 결과에서는 최상위 포식자가 목축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에서 실은 그렇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맹수가 야생 초식동물을 솎아주어 풀의 생산성을 높여주고 초식동물의 질병이 가축으로 퍼지는 것을 막아 줘 오히려 목축의 지속가능성을 높여 주며 물론 가축을 잡아먹는 등 직접 피해는 존재한다지만 이런 비용과 장기적 편익에는 오히려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특히 일제가 벌렸던 1915년부터의 해수구제사업의 예나 북아메리카대륙에서 1907년부터 실시된 해로운동물통제법(Animal Damage Control Act)에 의해 1911년에 뉴펀들랜드 주에서 회색늑대가 멸종하고 북부 로키산맥에서 1920년대에 사라졌다는 것은 이에 의해 20세기 초엽인 1930년대의 "먼지폭풍 황진(黃塵:dust storm)의 놀라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3"에서 알아본 자연의 무서움이 생성되게 하였으며 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와 미시시피 대홍수(Great Mississippi Flood of 1927)가 발생한 기후 자연의 현상 이면에는 이러한 과학적인 불균형이 발생한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자료에는 이러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없겠지만 호랑이 등 해수구제사업 후 일기현상과 자연현상이 어떻게 변이되어 나타났는지에 대한 상황을 검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연현상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특히 한반도에서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호랑이 먹이사슬에 속한 엘크(elk)에 대해 알아보자. 엘크에 대해 다시 글을 올리겠지만 우선 호랑이의 먹이사슬 개념에만 먼저 알아보면 놀랍게도 우리나라 사서(史書)에 “큰 사슴”이라 하여 기록된 것을 찾을 수가 있는데 글쓴이는 이를 무스(moose)라고 확신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스와 엘크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해동역사 물산지(物産志)총론에 조선에는 포(麅)가 많다 하였다. 포는 큰 사슴이라 하였고《조선부》 자주(自注)에, “포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다. 산에서는 포가 나지 않는다.” 하였다. 狍子 번체 麅子 1.노루의 일종 2.노루의 한 종류 [포]큰 사슴(麠屬); 노루(鹿屬) (麃와 同字) 鹿(사슴록) + 包(쌀포) [ 복사용 문자 : 麅 ] 5획 (총16획) elk ホウ·しか páo 麅鹿賞(포록상) 淸代, 每年 12月에 王이 大臣 등의 三品 이상된 者에게 賞䁑하는 賞與를 말함. 麅 (radical 198 鹿+5, 16 strokes, cangjie input 戈心心口山 (IPPRU), composition ⿸鹿包) 1.roe deer, Capreolus, a small spotted deer found in N.China 비록 뿔이 하나라고 하여 헷갈리게 하고 있지만 위 한어사전에는 포자가 노루일종이라 하였고 또는 큰 사슴이라 하였으며 엘크라 한 사실이 나타난다. 결정적으로 영어사전에 엘크에 대한 설명에서 보면 북 유럽이나 아시아에 사는 큰 사슴이라 하였고 북미에서는 이를 무스(moose)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스는 엘크이다. moose (North America) or elk (Eurasia) 북아메리카대륙 무스에서 유일 종이 바로 말코손바닥사슴(Alces alces Linnaeus, 1758)또는 북아메리카대륙 큰 사슴이다. 말코손바닥사슴은 유럽에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와 폴란드 동부에 걸쳐 살며, 시베리아를 거쳐 동쪽 지역까지 분포하고, 북아메리카에서는 캐나다와 알래스카에, 남쪽으로는 미국의 유타 주와 콜로라도 주의 로키 산맥에 걸쳐 서식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서에 등장하는 포가 엘크인지 무스인지를 밝혀 아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북아메리카대륙의 무스 서식지는 밴쿠버섬(Vancouver Island)을 제외한 모든 캐나다 영역이며 알래스카(Alaska)가 대부분이고 뉴잉글랜드북부(northern New England), 뉴욕위쪽(New York), 록키산맥 위쪽(Rocky Mountains), 미네소타북부northern Minnesota, 위스콘신 북부northern Wisconsin, 미시간(Michigan)의 어퍼 반도(Upper Peninsula), 슈 피리어호(Lake Superior)의 아일 로얄(Isle Royale)등으로 열거된다. 무스는 서쪽 록키산맥에서 남쪽으로 범위를 확장했고 1868년에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에서 처음 목격 된 후 20 세기 초 유타 주(Utah州) 유인타 산맥(Uinta Mountains)의 북쪽 경사면으로 확장되었다고 알려진다. 결론적으로 최상위 포식자들의 먹이사슬도 그렇지만 특히 호랑이의 먹이사슬에서 보면 주요한 먹이들은 전부 북아메리카대륙을 서식지로 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독일인들의 집산지라고 알려진 곳에 아직도 호랑이 육회음식이 유명하다는 사실을 밝혀 알았다. 그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노스 다코타(North Dakota),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위스콘신(Wisconsin) 및 미네소타(Minnesota), 미주리[Missouri]이다. 이곳이 어딘가. 조선(朝鮮)에서 호랑이 많았다고 하는 함경북도, 함경남도 등은 위 지역에서 찾아야 할 지명들이다. 본 블로그 글 "함경(咸鏡)의 빙하와 움푹들어간 땅, 끼어있는 바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7"에서 함경도의 함경(咸鏡)이 바다빙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함(咸)은 바닷물을 의미하는 것이며 허드슨만(Hudson bay)이 깊숙이 들어와 있는 캐나다서부지역은 옛날 빙하의 침식을 받은 많은 호수들이 있고 5대호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습지 및 초원을 볼 수 있어 이것을 담고 있다는 뜻의 함(咸)이라 하여도 부족함이 없다 하였으며 경(鏡)은 ‘거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이 경(鏡)도 잔잔하다와 맑다는 뜻도 있어 바다가 ‘거울처럼 맑다’든지 또는 ‘잔잔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순백의 차갑고 깨끗한 빙하(冰河)를 떠올리게 하여 함경은 바다빙하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다고 하는 함경도는 캐나다일대이고 그것이 남쪽으로 남하 한 것을 고려한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부첨할 것은 왜 조선호랑이가 벵골호랑이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조선에서 백호가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이는 벵골호랑이만이 가지고 있는 돌연변이 현상이라는 사실을 이에 답으로 말할 수 있다. 조선에서 신령한 동물로 취급받은 백호(白虎:white tiger)는 주로 벵골호랑이의 루시즘(leucism)형질 발현으로 백색 털인자가 발현된 흰 호랑이이라고 밝혀졌고 recessive mutant of the tiger 호랑이의 열성돌연변이라 하였으며 알비노증(albinism)즉 색소결핍증과는 다른 것임을 말하고 있다. [A white tiger at the Cougar Mountain Zoo] 위 미국 동부 워싱턴 이사콰란 도시에 쿠거 마운틴 동물원에는 백호가 있다.전해오는 사서를 보면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선생이 저술한 야사(野史)에 선조 33년(1600년) 경자(庚子)에는 자기 향리에서 수백의 인명을 해친 큰 백호(白虎)가 횡행하여 방어사(防禦使) 원신(元愼)이 잡으려고 고심을 하다가 못 잡고 나국(拿鞫:체포심문)까지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범이 다니는 길에 틀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걸려서 틀을 달고 산으로 뛰는 호랑이를 활로 명중하여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한 예는 광해군 2년 경술(1610) 7월 13일(병진)에 중국책사(冊使)가 조선관리에게 흑백 호피(黑白虎皮)와 같은 물품을 계속 바치도록 독촉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조선에서 흑호와 백호가 존재했었다는 반증이다. 끝으로 호랑이에서 우리 한국호랑이만 이야기 하고 있지만 호랑이는 근원적으로 동부호랑이와 서부호랑이가 조선과 고려(COREA)에서 똑같이 서식되었거나 관리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동부호랑이는 바로 조선호랑이며, 서부호랑이는 고려호랑이 즉 한국호랑이라 해야 본래 서식지와 일치하고 합당하다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동부[벵갈호랑이-BLACK PINE ANIMAL SANCTUARY, ALBION, INDIANA]인디애나주 동부[벵갈호랑이-POPCORN PARK REFUGE, FORKED RIVER, NEW JERSEY]뉴저지주 동부 [벵갈호랑이-THE WILDCAT SANCTUARY, SANDSTONE, MINNESOTA]미네소타주 서부 [시베리아호랑이-SAFE HAVEN WILDLIFE SANCTUARY, IMLAY, NEVADA]네바다주 서부 [시베리아호랑이-Calgary Zoo in Calgary, Alberta]캐나다 앨버타주 서부[시베리아호랑이-THE WILD ANIMAL SANCTUARY, KEENESBURG, COLORADO]콜로라도주 서부[시베리아호랑이-WILDCAT RIDGE SANCTUARY, SCOTTS MILLS, OREGON]오리건주, 서부 [시베리아호랑이-Young Siberian tiger dies at Greater Vancouver Zoo]벤쿠버동물원 *****************************************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알타이" rel="tag" target="_blank">알타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먹이사슬" rel="tag" target="_blank">먹이사슬</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조선호랑이" rel="tag" target="_blank">조선호랑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한국호랑이" rel="tag" target="_blank">한국호랑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시베리아호랑이" rel="tag" target="_blank">시베리아호랑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무르호랑이" rel="tag" target="_blank">아무르호랑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카스피해호랑이" rel="tag" target="_blank">카스피해호랑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인도호랑이" rel="tag" target="_blank">인도호랑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회색늑대(gray wolf)" rel="tag" target="_blank">회색늑대(gray wolf)</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메리카 자칼" rel="tag" target="_blank">아메리카 자칼</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판테라 티그리스(Panthera tigris)" rel="tag" target="_blank">판테라 티그리스(Panthera tigri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재규어(Jaguar)" rel="tag" target="_blank">재규어(Jaguar)</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코끼리(elephants)" rel="tag" target="_blank">코끼리(elephant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미국 매스토돈(American mastodon)" rel="tag" target="_blank">미국 매스토돈(American mastodon)</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맘모스(wooly mammoth)" rel="tag" target="_blank">맘모스(wooly mammoth)</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태평양 해마" rel="tag" target="_blank">태평양 해마</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마코 앵무" rel="tag" target="_blank">마코 앵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안장 타마린" rel="tag" target="_blank">안장 타마린</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벵갈호랑이" rel="tag" target="_blank">벵갈호랑이</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르카디아" rel="tag" target="_blank">아르카디아</a>

소화기와 자명종(問辰鍾:鬧鐘)으로 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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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화기와 자명종(問辰鍾:鬧鐘)으로 본 역사 글쓴이:한부울 1. 소화기(消火器)서양역사와 삼한역사와의 간격 2. 자명종(自鳴鐘)역사가 주는 불편함 3. 정리 1. 소화기(消火器)서양역사와 삼한역사와의 간격 a. 소화기의 손잡이를 잡고 화재 현장으로 가져간다. b. 바람을 등진 채 호스를 화점으로 향하게 한다. c.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안전핀을 뽑는다. d. 호스를 왼손으로 잡고 호스 끝을 화재 쪽으로 향하게 한다. e. 불의 아래쪽에서 마당의 비를 쓸듯이 뿌린다. 위는 현대 청정소화기로 알려지고 있는 할로겐간 화합물(interhalogen compounds:HCFC-123)소화기까지 등장한 시대의 우리가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소화기(消火器:fire extinguisher)에 대한 사용법을 간단하게 게시한 것이다. 소화기라는 것은 과학적인 발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문명이기(文明利器)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한반도 역사를 감안하면 조선시대 때 소화기의 역사에서 서양보다 한참 뒤처졌을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혹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과연 소화기란 개념이라도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일까 궁금하여 따져 본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조선시대 사회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화재를 대비한 구화조건이 완벽하며 놀라울 정도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시기적으로 따진다면 최초의 소화기가 1723년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 암브로스 고드 프리(Ambrose Godfrey)에 의해 특허가 주어졌을 때 보다 훨씬 빠른 1530년 중종(中宗:25)의 명에 의해 이행·윤은보·신공제 등이 펴낸 관찬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조선이 이를 선행했다는 기록으로 보아야 옳다. 그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금제(禁制)】편 “○ 금화(禁火)하는 공사 각처에는 모두 저수하는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방목토가(防木土架)와 구화기계(救火器械)를 준비하여 둔다.”하고 있다. 금화(禁火)편에 보면 “병조ㆍ의금부ㆍ형조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와 5부(部)의 당직 숙직하는 관원들이 순행하면서 금화한다. 궁궐 안에 화재가 나면 큰 종을 치든가 대신 호각[螺]을 부는데 궁궐에 있는 자는 뛰어가서 구원하되, 장병[將卒]은 당직 장소를 떠나지 않으며, 번에 나간 장병들은 각기 본위(本衛)에, 여러 관청의 관원들은 각각 그 조방(朝房)에 모이며 여러 관청의 인원과 공장(工匠)들과 5부 방리의 사람들과 번에 나간 별감과 각 차비인(差備人)들은 모두 궐문 밖으로 가서 대령한다. ○ 여러 관청을 모두 5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구화패(救火牌)를 주는데, 그 부 안에서 불이 나면, 병조ㆍ형조ㆍ한성부ㆍ의금부ㆍ금화사의 관원들이 부속(部屬)의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구원한다. ○ 의금부에서는 망화인 나장(望火人羅將)을 정하며, 여마(輿馬)·구목 및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사복시(司僕寺) 또는 군기시(軍器寺)의 종은 항상 종루에 올라가서 망을 보다가 이궁(離宮)이나 관청에서 불이 나면 종을 치며 사가(私家)가 연소(延燒)되어도 종을 친다. ○ 바람이 어지럽게 불면 금화사(禁火司)에서 방리(坊里) 각 호에 목탁을 흔들면서 순찰 경계한다.”라고 되어 있다. 公私各處 並開貯水坎 置防火土架救火器械 또한 “공사 각처에 모두 물을 저장하는 구덩이를 파고 화재를 방지하는 흙더미와 구화기계를 비치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화재가 났을 경우 관원들이 불을 끄는 작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지급한 증명패(證明牌) 혹은 구화패(救火牌)는 화재를 틈 타 도적들이 약탈을 자행할 우려가 있으므로, 불을 끄는 관원에게 구화패를 지급함으로써 신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금화조건(禁火條件)이라 함은 조선시대 특히 한성(漢城)의 부내(府內)나 각 궁궐의 화재를 예방하고 화재가 났을 때 효율적으로 불을 끄기 위해, 평소 미리 대비하여 관리들이나 군대, 백성들의 진화(鎭火)에 대한 역할을 분담하고 있는 조직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화재는 조심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그 금화조건을 아래에 나열합니다 하여 첫째 구화(救火)하는 사다리인 제자(梯子) 및 저수기(貯水器)·급수구(汲水具)는 공조(工曹)로 하여금 적당하게 만들어 궐내의 각처에 적당한 곳에 두고 저수(貯水)하여, 번(番)을 든 지킴이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여 뜻하지 않은 근심을 대비하고, 급수인(汲水人)은 형조(刑曹)로 하여금 정하게 하며, 둘째 만일 궐내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장루자(掌漏者)는 불을 끌 때까지 종을 칠 것이며, 입직별감(入直別監)·소친시(小親侍)·방패(防牌)·근장(近仗)·사옹(司饔)·각색장(各色掌)·내시(內侍)·다방(茶房)·행수(行首)·견룡(牽龍)들은 불을 끄며, 그 밖의 군사들은 직소를 떠나지 아니하고 각기 그들의 소임을 지킬 것이며, 굳게 각 문을 지키고 승명하는 자 외에는 출입을 허락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증명패(證明牌), 구화패(救火牌)를 구화인들에게 지급하는 것이나 출입을 막는 것은 화재로 인해 귀중품의 도난을 막으려 했던 것이므로 사고 후도 생각한 것이다. 이미 중종 1530년경에 불 끄는 사다리인 제자(梯子) 및 물을 저장하는 기구 저수기(貯水器)·물을 뿌리는 급수구(汲水具) 등을 만들어 사전에 예방하면서 구화 즉 소방조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세계 제일이 아니겠는가 한다. 그 뒤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은 국조보감, 그리고 승정원일기에 수총(水銃), 수총기(水銃器), 수총거(水銃車)을 사용한 기록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 수총(水銃)을 한국고전번역원 주석에서 소화기(消火器)의 일종이라 하였다. 이제부터 조선이 사용한 소화기의 기록들을 한번보자. (1)조선왕조실록 경종 3년 계묘(1723) 5월 25일(계묘) 관상감에서 서양국의 수총기를 만들 것을 계청하다 ○觀象監啓請製西洋國水銃器, 上從之。 本監官員許遠, 入往燕中得來, 乃救火災者也。 仍令各軍門造置, 地部以經用匱乏, 請待年豐, 上亦許之。 관상감(觀象監)에서 서양국(西洋國)의 수총기(水銃器)를 만들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본감(本監)의 관원(官員)인 허원(許遠)이 연중(燕中)에 들어 갔다가 가져온 것으로 화재(火災)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어 각 군문(軍門)에 영을 내려 만들어서 비치하도록 하였는데, 지부(地部)에서 경비가 바닥이 났다며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만들자고 청하니, 임금이 역시 허락하였다. (2)국조보감 제56권 / 경종조 3년(계묘, 1723) ○ 8월. 문신종(問辰鐘)과 수총(水銃)을 제조하도록 명하였다. 이 두 기기는 모두 서양에서 새로 만든 것인데, 종은 밤낮의 시각을 알려주는 것으로 흐리거나 비가 올 때라도 추측하기 쉽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청(淸) 나라가 진하사(陳賀使)를 인하여 우리 나라로 보낸 것이다. 총은 물을 끌어 아래에서 위로 올려주는 것으로 불을 끄는 데 편리한 것이다. 이것도 관상감 관원이 중국에서 얻어 가져온 것이다. 아울러 관상감에 내려 견본대로 만들도록 명한 것이다. (3)승정원일기 602책 (탈초본 32책) 영조 1년 10월 12일 병자 17/37 기사 1725년 雍正(淸/世宗) 3년 수총(水銃) 1본(本)을 만들어 들인다는 호조의 계 ○ 又以戶曹言啓曰, 頃因觀象監啓下牒呈, 彼中覓來水銃, 徐待秋成擧行事, 草記蒙允矣, 一本, 自本曹, 今始造成內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또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지난번에 관상감에 계하한 첩정으로 인하여 저들이 요구하는 수총(水銃)을 추수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가 거행하도록 초기(草記)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1본(本)을 본조에서 이제 만들어 궐내로 들입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위(1) 부터 (3)사서기록은 1723년을 동시에 같은 기록으로 보이고 1725년 승정원일기까지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같다. 먼저 (1)기록을 보면 관상감(觀象監)에서 서양국(西洋國)의 수총기(水銃器)를 만들 것을 계청(啓請)하다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계청이라는 것은 임금께 아뢰어 청(請)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때는 1723년이고 관상감(觀象監)이라는 곳은 조선시대 때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수(曆數), 점산(占算), 측후(測候), 각루(刻漏)등의 수리천문과학을 담당하던 관청(官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시 서양국(西洋國)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수총기를 만들 수 있는 재원들이 집합된 곳으로써 임금께 만들 것을 청했다는 이야기다. 조선에서 이러했다면 서양국(西洋國)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살펴보았다. The first fire extinguisher of which there is any record was patented in England in 1723 by Ambrose Godfrey, a celebrated chemist at that time. It consisted of a cask of fire-extinguishing liquid containing a pewter chamber of gunpowder. This was connected with a system of fuses which were ignited, exploding the gunpowder and scattering the solution. This device was probably used to a limited extent, as Bradley's Weekly Messenger for November 7, 1729, refers to its efficiency in stopping a fire in London. In 1723, in England, the first fire extinguisher was patented by chemist, Ambrose Godfrey. It used a fire-extinguishing liquid and gunpowder.(수류탄형 소화기:Un estintore in vetro tipo “bomba a mano)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소화기는 1723년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 암브로스 고드 프리(Ambrose Godfrey)에 의해 특허가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화약의 땜납 챔버(chamber)를 포함하는 소화액통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은 점화 된 화염시스템과 연결되어 화약을 폭발시켜 소화액을 분산시키는 장치이며 이 장치는 1729년 11월 7일 브레들리 위클리(Bradley's Weekly)에 의해 런던에서 화재를 막을 수 있는 효능에 대한 것만 알리기 때문에 아마도 제한된 범위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하고 있다. 1723년이라면 조선시대 수리천문과학 관청인 관상감에서 임금에게 수총기(水銃器)를 만들 것을 청하는 시기와 똑 같은 년도이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서양국에서 최초로 소화기를 발명했다는 똑 같은 년도에 조선 관청에서 이와같은 소화기를 만들 것을 임금께 청한 것이다. 이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소화기란 문명기기에 대해 공유했다고 보아야 옳다. 이와 동시에 의문스럽게 하는 것은 조선사서기록에서 왜 영국이라고 하지 않고 서양국이라고 하였을까 하는 물음이다. 분명 영어 자료에는 영국 유명한 화학자에 의해 개발된 소화액통점화시스템의 장치가 분명함에도 영국이라고 하지 않고 서양국(西洋國)이라고 그냥 막연하게 지칭하고 기록했을까 하는 의문이 대단히 크게 부각된다. 무엇 때문에 그 잘난 영국(英國)을 영국(英國)이라고 조선실록에서는 칭하지 않았을까? 무엇을 알리기가 두려워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후세 편집자들의 장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시기에 영국이라 함은 당시 하노버 왕가의 시조(始祖) 조지1세(George I,1660-1727,재위:1714-1727)때이며 1720년경에 잉글랜드 즉 영국회사의 시장점유율은 네덜란드에게 압도당했을 때이므로 당시 영국의 힘이 빠졌을 때이다. 그리고 이시기는 영국이란 주체가 역사전면에 나설 수 없었을때이지 않는가 한다. 조선은 경종(景宗,1688-1724,재위:1720-1724)때이다. 이 경종을 본 블로그 글 "다시보는 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에서 도팽 루이(le Grand Dauphin, 1661-1711)과 대비한 적이 있다. 즉 부르몽가의 대비였던 것이다. 루이15세는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3-1738),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7년전쟁(1756-1763)까지 전쟁에 휩쌓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반면에 조선 영조는 정미환국(丁未換局,1727), 이인좌난(李麟佐亂,1728)이 있어 이 역시도 평탄치 못했음도 알 수가 있었다. 특히 숙종 부터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에서 볼 때 소론(少論)은 프랑스가 되고 노론(老論)은 프랑스와 반대세력이 된다고 하였고 그래서 숙종이후 소론은 늘 노론에게 밀린다고 풀이 했다. 노론이 경종을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과 즉위 후 신사옥사에 의한 모친 장희빈의 왕비책봉문제와의 갈등, 신임사화(辛壬士禍) 또는 신임옥사(辛壬獄事)는 즉위 1년 후인 1721년부터 다음 해 1722년까지 당파인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 왕세제 책봉문제로 충돌한 사건, 대리청정과 치세와 독살설 등이다. 물론 이것들은 왕위계승전쟁과 비슷하다. 잉글랜드 조지1세 역시 선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54세의 나이에 영국 왕에 올랐고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으며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알려진다. 그는 점차 각의를 주재하지 않게 됐고도, 1721년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에게 전권을 줘 각의를 주재하게 하면서, 이른바 '각의의 수석'(Primius inter pares, the first in equals)이라는 개념이 생겼으며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지며 이 조지1세 역시 1727년 6월 11일 당뇨 합병증의 원인으로 서거한다. 개략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경종과 조지1세의 재위기간이 길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서거과정도 갑작스럽게 맞이한다는 사실, 그리고 중요한 하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 중에 하나가 하노버 선제후국이라는 사실과 1714년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가 영국 왕 조지 1세(George I)로 즉위해 동군연합(同君聯合)을 이루었다는 사실들은 동부사건으로 치부되는 면이 많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상속 문제가 컸던 것 같다. 이시기에 하노버왕가와 부르몽왕가에 대한 위상정도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부르몽 왕가루이14세부터 16세까지)위세는 컸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솔직히 한성부가 런던이라 하지 않더라도 런던과 한성부는 거의 가깝게 동서(東西)에서 공존하고 한성부 서쪽에 런던이라는 영국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크다. 이를 생각하면 황당함, 오묘함이 그 자체이다. 만약 이런 정보 유통이 가능했다면 조선은 그야말로 대단한 국가체제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당시 영국도 조선 권내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자. 소위 산업혁명 이후 통신 정보가 아무리 빨라도 유럽과 동아시아대륙 항해거리가 거의 30,000km가 넘는데 영국의 소식을 같은 동 시간에 바로 소식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문명기기 발명품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거의 같은 공간과 시간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서양국이라는 주체가 새로운 과학 문명이기를 발견하고 발표가 되면서 동시에 조선이 그 정보를 알아 임금에게 동일하게 만들 것을 청하고 요구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인 간격을 현 동아시아대륙 극동이라는 프레임과 유럽대륙이란 공간 사이에는 도저히 설명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계삼한역사관을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쉽게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首個現代滅火器由英國人佐治·孟比(George Manby)於1816年發明。當時的設計是使用銅罐,內藏壓縮空氣及3加侖(約7公升)碳酸鉀溶液。19世紀末起開始使用碳酸—硫酸滅火器。內藏的滅火劑主要為碳酸氫鈉(即小蘇打)溶液,另一小容器內則為硫酸。使用時將小容器打破,兩者混合後產生二氧化碳的壓力將溶液推出。 그 이후 소화기 발달은 계속되는데 위 신중국 자료에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처음 현대에 사용되는 소화기와 비슷한 장비를 개발한 사람은 1816년 영국의 군인 조지 만비 대령이었는데, 그의 소화기는 3 갤런짜리 구리용기에 진주회(眞珠灰:탄산칼륨(Potassium Carbonate,K2CO3)를 담고 공기를 압축해 넣은 형태였고 그 소화기에는 아랫부분에는 탄산칼륨이 있었으며 윗부분에는 압력공기가 있었기에 탄산칼슘을 뿌릴 수 있었다고 설명된다.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은세계삼한역사관점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 한 것이다. 그 이외 얼마나 놀라운 과학적 발달을 이루었는지 아래 경세유표의 기록을 알 수가 있는데 참고하기에 그만이다. Em 1881 Almon M. Granger patent, the United States gives America, or fire extinguisher based on sodium bicarbonate and sulfuric acid 경세유표 제2권 / 동관 공조(冬官工曹) 제6 사관지속(事官之屬) 이용감(利用監) : 제조 중대부 1인, 첨정 상사 2인, 별제(別提) 중사 2인, 학관(學官) 하사 4인. 서리 2인 조례 8인. 提調及僉正二人。以精於數理者擇差。其別提二人。以有目巧手巧者爲之。其學官四人。就司譯院觀象監。極選其精於數理。嫺於官話者。各取二人。歲入北京。或行貨以購其法。或厚價以購其器。凡安炕燒甓造車造器鍊鐵鍊銅燔瓦塼瓷。以至引重起重解木解石轉磨轉碓取水代耕風磑輪激之法。虹吸鶴飮之制。諸凡農器織器兵器火器風扇水銃。以至天文曆法所需儀器測器。凡係實用之器。無不傅學。歸而獻之於本監。本監聚巧匠。按法試造。其有成效者。提調及工曹判書。考工課最。或授以牧官察訪。或授以縣令郡守。其有大功者。陞之爲南北漢副使。或錄用其子孫。則不出十年。必有成績而國富兵強。不復見笑於天下矣。 제조 및 첨정 2자리는 수리에 밝고 익숙한 자를 택해서 차임(差任)하고, 별제 2자리는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자를 시키며, 학관(學官) 4자리는 사역원(司譯院)과 관상감(觀象監)에서 수리에 정통하고 관화(官話)에 익숙한 사람 각각 2명을 엄선하여 해마다 북경에 들여보내어, 돈을 사용하여 그 방법을 구하거나 또는 넉넉한 값으로 그 기구를 매입할 것이다. 무릇 구들 놓기, 벽돌 굽기, 수레 만들기, 그릇 만들기, 쇠 불리기, 구리 불리기, 기와ㆍ벽돌ㆍ자기(磁器) 굽기에서 무거운 것을 끌어당기기, 무거운 물건 들어올리기, 나무 켜기, 돌 켜기, 멧돌ㆍ방아ㆍ물방아 찧기, 바람으로 멧돌돌리는 법과 홍흡(虹吸)ㆍ학음(鶴飮) 따위 제도와 모든 농기구ㆍ직기ㆍ병기ㆍ화기ㆍ풍선ㆍ물총[水銃]에서 천문역법에 소용되는 의기(儀器)ㆍ측기(測器) 등 실용에 관계되는 모든 기구는 전습(傳習)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여 돌아와서 본감(本監)에 바치면 본감에서는 솜씨 있는 공장을 모으고 그 법을 상고하여 시험삼아 제조한다. 그리하여 성과가 있는 자는, 제조와 공조 판서가 만든 것을 고찰하고 으뜸으로 된 자는 감목관(監牧官)이나 찰방(察訪)을 제수하거나 또는 현령이나 군수를 제수한다. 그리고 큰 공이 있는 자는 승격(陞格)해서 남ㆍ북한 부사(南北漢副使)로 삼으며, 그 자손을 녹용(錄用)한다. 위 경세유표(經世遺表)는 국정(國政)에 관한 일체, 행정 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토지제도·부세제도의 개혁에 대해 논한 책, 정약용이 1808년(순조 8년) 유배지 강진군에서 짓기 시작하여 1817년(순조 17년) 집필을 끝냈다. 이와 같이 하면 10년을 넘지 않아서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며,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사도 강해져서 다시는 천하의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참으로 조선은 미래를 위해서도 과학을 연구하고 문명이기들을 재빨리 제조하면서 사회전반에 걸쳐 발전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 자명종(自鳴鐘)역사가 주는 불편함 두 번째로 볼 문명이기는 자명종이다. 자명종(自鳴鐘) 또는 알람시계(alarm)는 사람이 지정한 날짜 및 시간에 소리가 울리도록 만든 시계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1723년(AD)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만들게 함과 동시에 그해 10월에는 서양국(西洋國)의 문신종(問辰鍾)을 관상감(觀象監)에 내려 새로 만들게 하였으며 이것은 진하사(進賀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돌아올 때에 청(淸)나라 임금이 우리나라에 보낸 것이라 하였다. 새로만들게 했다는 것은 기존 자명종도 있었지만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 제조케 했다고 이해해야 맞다. 문신종(問辰鍾)이라 함은 일종의 탁상시계로 누르면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이 있는 동양명칭의 기기이다. 참 이상하지 않는가. 서양국과 가까이에 접하고 있을 것 같은 청나라는 도대체 그 실체가 무엇인가. 위 글에서 문신종을 청나라가 서양국에서 받아 다시 조선에 주었다면 청나라와 서양국은 붙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닌가. 또한 서양국을 청나라고 한들 이상할 것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77년과 1801년 등 몇 차례에 걸쳐 일본 사신들이 조선에 일본 자명종을 선물한 기록이 보인다고 하였지만 이미 자명종(自鳴鐘)은 아래 자료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17세기 1631년에 명나라에서 들여왔다고 되어 있다. 또한 동양사에서는 이야기 하는 명나라의 정체가 의심되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631년(인조 9) 7월 정두원(鄭斗源)이 명나라에 진주사(陳奏使)로 갔다가 서양사람 육약한(陸若漢)에게서 선물로 받아왔다는 기록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자명종 전래에 관한 기사라 하였고 이 시계는 전래 당시에는 시제(時制)가 맞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었던 것 같으며 당시에 쓰고 있던 시제는 1일이 100각이었지만, 서양법에 따른 이 시계에 적용되는 시제는 96각이었던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서양인이라는 것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동양사에서 자세히 따져보면 동양사이기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곧잘 서양인이라는 표현이 난무한다. 이 사실에도 어색하기가 그지 없는 이야기다. 또한 김육(金堉)의 잠곡필담(潛谷筆談)에 “서양 사람이 만든 자명종을 정두원이 북경에서 가져왔으나 그 운용의 묘를 몰랐고, 그 시각이 상합(相合)됨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1636년에 김육이 명나라에 가서 자명종을 보았으나 그 기계의 원리와 운용의 묘를 몰랐다는 것으로 보아 그 사용방법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라고 되어 있다. 쉽게 구조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한 <잠곡필담>에 의하면 “효종 때에 밀양사람 유여발(劉與發)이 일본상인이 가지고 온 자명종에 대하여 연구한 끝에 그 구조를 터득하였는데 기계가 돌아가면 매시 종(種)을 친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여발은 우리나라에서 자명종의 원리를 처음으로 체득한 사람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자명종을 제작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1669년(현종10)10월에 천문학교수 송이영(宋以頴)이 자명종을 만들었다는 현종실록의 기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17세기인 1631년에 명나라에서 들여왔다고 되어 있다는 사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715년(숙종14) 4월 관상감 관원 허원(許遠)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자명종을 본떠서 새로운 자명종을 만들었다는데 이것으로 보아서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기계시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외 자료에서도 조선(朝鮮)에서도 앞서 기술한 것처럼 1669년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頴)등이 보다 복잡한 자명종을 만들었다는 것은 명나라에서 만든 것 보다 더 세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723년에는 청나라에서 가져온 자명종을 복제해 문신종(問辰鍾)을 만들었다 했으며, 1731년에는 최천약(崔天若)이 자명종을 만들었다고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759년에 홍대용은 나경적(羅景績:1690-1762)이 만든 자명종 후종(候鐘)을 자신의 천문대 농수각(籠水閣)에 설치했고 또 친구였던 황윤석과 함께 1772년 2월에는 염영서(廉永瑞)라는 사람이 만든 자명종을 구경하러 갔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였다. 그리고 1759년에 만든 후종(候鐘)은 자명종이라고 하고 있지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한자 후(候)는 기후나 계절 또는 5일간의 날씨를 말하는 것이라 할 때 오늘날 날씨예보의 성격이 큰 것이며 후종(候鐘)을 제작하여 천문과 과학을 연구하였다는 것은 천문시계(Astronomical clock)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기술이 점점 발달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 상황이 이렇다 하면 실제로 서양국에서는 어떠했는지를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In China, a striking clock was devised by the Buddhist monk and inventor Yi Xing (683–727). The Chinese engineers Zhang Sixun and Su Song integrated striking clock mechanisms in astronomical clocks in the 10th and 11th centuries, respectively. A striking clock outside of China was the water-powered clock tower near the Umayyad Mosque in Damascus, Syria, which struck once every hour. It was constructed by the Arab engineer al-Kaysarani in 1154. In 1235, an early monumental water-powered alarm clock that "announced the appointed hours of prayer and the time both by day and by night" was completed in the entrance hall of the Mustansiriya Madrasah in Baghdad. 중국에서는 불교승려이자 발명가인 장수(张遂)가 시계를 고안했고 중국 기술자인 장사훈(張思訓:Zhang Sixun)과 소송(蘇頌,Su Song:1020-1101)은 10세기와 11세기의 천문시계에서 눈에 띄는 시계 메커니즘을 통합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중국 밖에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부근의 수력시계탑으로 한 시간에 한 번 종을 쳤다고 하고 있다. 그것은 1154년 아랍 기술자 알 카이 사라니(Al-Kaysarani)에 의해 세워졌다 하였으니 아랍인들의 문명기기 발달은 대단한 것이었음도 알 수가 있다. 또한 1235년에 기도시간이 정해진 시간을 밤낮으로 알려주는 수력에 의한 알람시계(water-powered alarm clock)는 바그다드에 있는 무스탄시리아 마드라샤에 있다고 한다. From the 14th century, some clock towers in Western Europe were also capable of chiming at a fixed time every day; the earliest of these was described by the Florentine writer Dante Alighieri in 1319.The most famous original striking clock tower still standing is possibly the one in St Mark's Clocktower in St Mark's Square, Venice. The St Mark's Clock was assembled in 1493, by the famous clockmaker Gian Carlo Rainieri from Reggio Emilia, where his father Gian Paolo Rainieri had already constructed another famous device in 1481. In 1497, Simone Campanato moulded the great bell (h. 1,56 m., diameter m. 1,27), which was put on the top of the tower where it was alternatively beaten by the Due Mori(Two Moors), two bronze statues (h. 2,60) handling a hammer. 14 세기부터 서유럽의 시계탑 중 일부는 매일 고정 된 시간에 종이 울렸다. 이 중 가장 초기의 것은 피렌체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에 의해 1319년에 묘사 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여전히 가장 유명한 원래 인상적인 시계탑은 아마도 베니스의 세인트 마크 광장의 세인트 마크 시계탑(St Mark's Clocktower)이 그것이라 하였는데 아래에 나타난다. 이 시계는 1493년에 이탈리아 북부도시 레지오 에밀리아(Reggio Emilia)의 유명한 시계 제작자 지안 카를로 레이 니 에리(Gian Carlo Rainieri)에 의해 조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지안 파올로 레이니에리(Gian Paolo Rainieri)는 1481년에 또 다른 유명한 장치를 이미 만들었다 하고 1497년 시몬느 캄파 나토(Simone Campanato)는 탑 꼭대기에 놓인 큰 종(높이 1.56m, 직경1.27m)주조성형하였으며 두에 모리(두 무어흑인)가 망치를 휘두르는 두 개의 청동상(h.2,60)을 놓았다고 했다. 모양은 아래와 같다. [그림비교]Horologivm Venetiarvm In Platea Divi Marci-Francisco de Holanda(Álbum dos Desenhos das Antigualhas)The clocktower in c. 1538-40, as drawn by Francisco de Holanda 위 그림에서 잠시 비판할 것이 있다. 이탈리아인 시몬느 캄파 나토(Simone Campanato)가 1497년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북쪽에 있는 시계탑을 설치한 원본 그림과 현재 사진을 비교해 보면 완전히 다른 건물처럼 보이는 것인데 이것은 본래 유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는 광경들이다. 위 그림3가지를 비교 원본과 다른 것을 체크해 보았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결론에 이른다. 현 유럽 유물들이 전부 이렇다고 한다면 너무 심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길 권유하고 싶다. An early prototype of the alarm clock was invented by the Greeks around 250 BC. The Greeks built a water clock where the raising waters would both keep time and eventually hit a mechanical bird that triggered an alarming whistle.알람 시계의 초기 프로토 타입(원형)은 기원전 250 년경 그리스인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말해지고 그리스인들은 물을 길러서 물을 길러주고 결국 기계적인 새를 치면 놀라운 호각이 울렸다고 한다. User-settable mechanical alarm clocks date back at least to 15th-century Europe. These early alarm clocks had a ring of holes in the clock dial and were set by placing a pin in the appropriate hole. 하여튼 위 영어자료에는 사용자가 설정할 수 있는 기계식 자명종 시계는 적어도 15세기 유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 초기 자명종은 시계 다이얼에 구멍이 뚫어 구멍에 핀을 꽂아 넣었다고 되어 있다. Another mechanical alarm clock was created by Levi Hutchins, of New Hampshire in the United States, in 1787. This device he made only for himself however, and it only rang at 4 AM, in order to wake him for his job. 다음에 나타나는 자료는 15세기유럽시대때 자명종 발명사실들을 빼버린 듯한 것이 나타나 다시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아래 같은 사실이 발견되고 찾아진다. 첫 기계적 자명종이 1787년에 미국 뉴햄프셔 주(New Hampshire) 콘코드(Concord)출신인 레비 허친스(Levi Hutchins:1761-1855)가 발명하였다는 것은 공히 나타나는 사실이다. 이 장치는 그에게 맞춰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를 깨우고 일을 시작하게 만들기 위해 새벽 네 시에만 종이 울리게 하였다고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견이 있는데 영국시계제작자들은 18세기때 미국으로 이주한 사실을 들어 1787년에 최초 자명종을 발명했다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 보다 더 이른 시기에 자명종 발명사실들은 독일과 영국에서 선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미국이 최초가 아니라 독일과 영국이 먼저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유럽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것에 대표적인 것이 15세기에 뉘른 베르그(Nuremberg)에서 만들어진 청동 종으로 된 독일 철 벽시계라고 하며 오픈 프레임 워크 구조로 19 인치(inch)높이의 시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1500년대의 알람시계로는 미국 역사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The Clockwork Universe: German Clocks and Automata 1550-1650"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도 왜 미국박물관에 소장되고 있을까?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과 대입하면 자명종(自鳴鐘)이 17세기 1631년에 명나라에서 들여왔다고 하는 기록에서 위 사실에 맞출 때 역사 개연성을 얻을 수가 있다. 사실상 이러한 반론이 없었다면 조선이 기술한 도입한 시기와 서양국의 기술이 처음 들어난 시기가 일치하지 않아 최초란 공백에서 역사상호관계 결정을 유보해야 한다고 망설려지는 상황이었으니 다행히 명확해 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독일과 영국을 명조(明朝)라고 해서야 욕을 먹을 소리가 아닌가. 본 블로그에서 최근 글에서도 밝혔지만 유럽국가들은 근세기에 생성된 명칭임을 감안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랄 뿐이다. 어쨌던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 후 프랑스의 발명가 안토니 레디어(Antoine Redier:1817-1892)는 1847년에 처음으로 수정이 가능한 기계적 자명종에 대한 특허를 제출하여 득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alarm clock. alarm clock inventor Antoine Redier 그렇다면 조선에 자명종 기술이 들어 온 시기는 대체로 17세기로 나타나지만 조선사서에서 서양국을 독일인지 또는 영국인지 명확하게 기술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 분명하게 세계삼한역사관점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당시 중국이라고 하는 명조(明朝)는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라 할 수 있으며 합스부르크왕가(1438-1740)를 중심으로 한 주체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과학자들이 천문기계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상당한 기술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조선과학자라 함은 기어코 동양인만을 한정시켜 볼 수 없다는 상황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들은 경종(景宗,1688-1724,재위:1720-1724)과 또한 대입되고 연결되는 이야기다. 그 시기는 오늘날 동아시아대륙 역사가 그러하듯이 1644년에 멸망한 명조(明朝)에도 혼란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대입할 수 있고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대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30년 전쟁(1618∼1648)이라고 하는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 벌어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시기이다. 물론 자명종이란 특수한 기술을 전수받았던 곳은 다름 아닌 페르시아 아랍권역으로써 서양국인 유럽이 아니라 아랍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자명종이 발달한 것은 아랍에서 바탕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것 역시 신성로마제국과 연결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근대사 한반도 한국판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개국(開國)이전에 이미 국산화한 자명종을 보급하고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한 체 일본으로부터 불평등 조약,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면서 개국(開國:1876)을 맞이했다고 매몰차게 몰고 있다. 이 자료는 또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는데 1898년에 창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1901년과 1902년에는 자명종 광고가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는 자명종이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 역사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소화기(消火器)서양역사와 삼한역사와의 이상한 간격을 알아보았고 또한 조선이 받아들이는 자명종(自鳴鐘)역사가 주는 불편함도 함께 알아보았다. 주요한 것은 당시 조선은 서양국과 가까운 곳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조선과 서양국이 왜 근접하여 서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을까 하는 답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면 안된다. 기존 역사사실을 대입하려고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왜 조선과 서양국은 서로 과학 기술을 공유하며 공생공존하려 했을까? 하나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 밖에 서쪽에 있는 도시에 사는 서양인들이라고 할 때 그들의 소속은 하나의 체제속에 존재해야 했던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들의 기술이 조선에서 필요할 때 즉시 공급하고 그것에 대가를 받았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은 많은 문물을 공개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 체제였으며 상대적으로도 공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공급하고 공유하려 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그것에 인종이나 문화, 종교 따위에 편견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고 해야 맞다. 많은 조선인들은 세계문화국으로써 부끄럽지 않기 위해 가슴을 열고 연구하고 지식을 구하였으며 그것을 조선사회 발달에 총력을 기우렸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의 수도 한성부는 대단한 도시였다. 모든 구화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개시하여 알았지만 철저한 사회 위기 시스템을 철저하게 갖춘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스스로가 하는 자학의 역사는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은 것이 올바른 것이며 더 나아가 정신건강에도 좋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좋은 역사를 열도일본인처럼 분에 넘치게 만드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올바르게 보아야 하는 원칙만으로도 이렇듯 어는 민족에게도 부족하지 않는 세계에서 유일무일한 역사문명국으로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당장 소화기와 자명종을 선정하여 세세하게 살펴보았지만 모든 역사의 흐름은 우리의 역사가 주도를 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가 있었으며 몰라 볼 수 없었던 사실들을 우리는 명쾌하게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이 보다 더 무엇을 우리가 요구하겠는가. 우리가 역사를 몰라 자학하는 것을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역사를 탓해서야 되겠는가. 바로 알면 이렇듯 도저히 자학할 수 없는 빛나는 세계의 역사 그 자체임을 어찌 글쓴이만 알고 말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소화기(消火器)" rel="tag" target="_blank">소화기(消火器)</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자명종(問辰鍾:鬧鐘)" rel="tag" target="_blank">자명종(問辰鍾:鬧鐘)</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관상감(觀象監)" rel="tag" target="_blank">관상감(觀象監)</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수총기(水銃器)" rel="tag" target="_blank">수총기(水銃器)</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암브로스 고드 프리(Ambrose Godfrey)" rel="tag" target="_blank">암브로스 고드 프리(Ambrose Godfrey)</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조지 만비 대령" rel="tag" target="_blank">조지 만비 대령</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장수(张遂)" rel="tag" target="_blank">장수(张遂)</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장사훈(張思訓:Zhang Sixun)" rel="tag" target="_blank">장사훈(張思訓:Zhang Sixun)</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소송(蘇頌Su Song:1020-1101)" rel="tag" target="_blank">소송(蘇頌Su Song:1020-1101)</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시몬느 캄파 나토(Simone Campanato)" rel="tag" target="_blank">시몬느 캄파 나토(Simone Campanato)</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레비 허친스(Levi Hutchins" rel="tag" target="_blank">레비 허친스(Levi Hutchin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The Clockwork Universe: German Clocks an" rel="tag" target="_blank">The Clockwork Universe: German Clocks an</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안토니 레디어(Antoine Redier)" rel="tag" target="_blank">안토니 레디어(Antoine Redier)</a>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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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삼한역사 글쓴이:한부울 머리말1920년 시카고 그리고 필라델피아태풍과 허리케인이 구분되어야 했던 역사1926년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 제물포와 보스톤마이애미 허리케인 발생부터 소멸까지의 상황1926년에 동아일보가 보도한 태풍마무리 머리말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 역사는 열도일본 뿐만아니라 미국과 소련, 신중국의 관심사였다.결정적인 자료를 보면 그렇게 볼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러시아제국 마지막황제 일가족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도 미국 못지 않게 적극적이었다고 본다.왜냐하면 우리나라 역사를 강제적으로 한반도에 안착시킴으로써 미국의 용인하에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아시아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이 역사적으로 일개 도시 경사(京師)에 묶여 있는 중국을 거대하게 만들고 새시대에서 그들이 중국행세를 크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도일본은 일제 본질에서 모자라도 한 참 모자란 이런 틈바구니에 이용물에 불과하지만 곧 가난을 잊게끔 충분하게 보상까지 받는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런 틈바구니 역사에서 열도일본인들이 안하무인격에 한 껏 어깨에 바람을 넣고 끄떡 거리고 있는 것은 스스로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존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하늘인 미국이 도와주었기 때문이고 특히 한반도 전쟁상황을 이용하여 무기를 조립하면서 공급에 의해 엄청난 수익이 그들을 배불리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 사람들은 전쟁을 겪으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지만 상대적으로 열도일본인들은 취할 것을 다 취했다는 것을 그들은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 사람들은 전쟁통에 잃어버릴 것을 다 잃게 만들면서 전범국이라 내 세운 열도일본인들을 배부르게 만든 것도 미국이라면 이치를 떠나 정의롭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평화조약이니 운운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 글 마무리에서 영토문제를 다시 거론 하겠지만 미국은 이미 1945년 9월 2일 요코하마 근해에 정박한 미주리(USS Missouri:45,000 tons)의 선상에서 태평양전쟁 패전국인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 문서에 조인하게 하면서 완전히 끝을 낸 사실을 약 6년이 지난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유엔을 앞세우고 열도일본을 상대로 회담을 시작하여 1952년 4월 28일에 평화조약을 발효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역사 저 편으로 이미 사라진 독일과 그 추축국들은 체제를 잃어버렸고 사망처리된 시점이다. 전리품으로 역사를 새롭게 뜯어 고친다하여도 반대할 세력이 있을 수가 없다. 때문에 열도일본으로 묶여 1945년 이후 체제가 친미성향으로 바뀌면서 완전히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고 패전에 의해 항복한 상대라 하기엔 미국이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새로운 일본만들기에 적극적으로 지원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구글에서 태평양전쟁 당시의 사진이나 기록물들을 볼 수 있으나 이것도 열도일본인 모습만을 위주로 한 자료만 공개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편중된 이미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당시 정보가 귀한 세상사람들에게 역사 이미지를 바꾼다는 것이 그렇듯 어려운 것 만은 아닌 세상이었고 가장 처참하고 참혹한 인류 최대 피해를 낳은 전쟁을 치룬 끝이었으니 참으로 혼란스럽고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어두운 시대였던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이러한 시기에 의문을 가지도록 하는 여러가지의 문제가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전범국 일본이 36년간 식민지배를 했다고 하는 한반도에서 민족간 처절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정확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삼팔선을 일본열도에 그어서도 될 태평양전쟁 후처리에서 난데없이 핍박받았던 한반도에 그었다는 사실도 미국에게 무책임하다고 해야 할 이야기지만 어떻게 일본 식민지지배를 받았다고 하는 한반도에서 민족간 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전범국인 일본과 평화조약을 굳이 맺어야 했던 것인지 그렇다면 그 저의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역사적으로도 따져 묻을 것이 많다. 현재에서도 그렇지만 처음부터 삼팔선은 분쟁의 씨앗으로 조성된 것이 틀림없다. 과한 이야긴지 모르지만 결과는 전쟁이다. 지금도 미국이 촉발시키면 타버릴 수밖에 없는 늘 우리가 불안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궁극적으로 전쟁이다. 전쟁은 쌓아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핵도발이 문제를 발생시킨 것이라고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것이 60년이 훌쩍 넘도록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목매달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이와같은 미국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전쟁 불안감때문이다. 여기서 깊은 오해가 생긴다. 얄타회담때나 포츠담회담 때 미국과 소련정치지도자들은 어쩌면 열도보다 한반도를 분쟁의 터로 삼아야만 역사물적재산과 기억의 소산인 인적재산을 척결할 수 있고 또한 전쟁을 핑계로 재론의 여지를 없애면서 계획된 역사틀잡기가 가능해진다는 이런 판단이 조금이라도 사전에 그들에게 있었다라고 하는 오해소지가 분명하게 있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시대가 도래하는 위험보다 역사틀잡기가 우선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2차세계대전을 마치고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미국은 소련과 냉전시대를 조성하였고 방어선을 한반도 남한을 제외하고 그으면서 1950년 1월 12일에 이를 에치스라인(Acheson line declaration)이라 선언하여 남침을 촉발한 원인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국의 이미지와 매우 상반된 이런 전쟁 후처리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하고 남는다.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에서 불공정하게 정책을 펼친 미국의 한반도 전 후 조치에 대한 진의를 세세히 밝혀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미국이 왜 자기나라에 총뿌리를 들이된 전범국 일본을 향후 동맹국으로 택하고 평화조약까지 체결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은 미국과 전범국인 일본이 내면적 동질성의 역사를 가지고 때때로 분화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헝크러진 근대사의 진실이 좀 처럼 풀리지 않는 이유이다. 다급하게 냉전시대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관계를 구촉했다는 설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소련입장에서 여러가지 거부한 내용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위와 같은 패전국이란 원칙에서 일방적인 평화조약이었다는 사실과 미국이 적법한 영유권을 가지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일본의 여러 섬이 할양되었다는 영토에 대한 불만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들끼리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언제가는 우리가 나서 일본의 여러 섬들이 실제로 일본의 소유이었는가에 대한 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재검토 되어야 할 문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온갖 조약문서에 등장하는 영토문제에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본래의 주인은 미국도, 소련도, 패전국인 열도일본도 아닌 바로 세계삼한역사의 주체인 우리가 본래 주인임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본 블로그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이해할 것이다. 이에 대한 논제는 간단하다. 대한제국의 황제 서명이 없어 강압적으로 체결한 을사늑약(乙巳勒約:1905)과 정미7조약 (丁未七條約:1907) 2개의 조약이 법률상으로 무효라는 사실과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1945.7.26)에서 일본이 강탈한 영토는 반환한다는 국제법상 원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머지않아 이러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기위해 우리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때가 곧 다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 뒤 치닥거리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본 글의 주제인 태풍(허리케인)문제는 실제로 우리역사에서는 대체적으로 낯선이야기다. 다만 수해로 기록된 것이 많은데 매년 자연재해가 엄연히 존재했던 삼한역사 땅에서 일상적인 위험과 공포로 맞이 했던 태풍에 대한 기록들을 명쾌하게 우리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은 비극적인 요소를 떠나 한반도 역사의 전반에 나타나는 서글픔이라 할 수 있고 또 다른 지배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아무리 뒤집어 보아도 태풍이라는 한문 용어를 찾을 수가 없을까.이것을 역사모순적 행태라고 하기엔 문제가 많다. 역사연속성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었다면 그동안 역사고서를 통하여 시정되고 바로 고쳐졌던 부분을 일부라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잔존한다고 하는 몇 안되는 역사고서에서 조차도 찾을 수 없다면 통째로 빼 버렸거나 들통날 것이 두려워 근세기에 조작이란 못된 짓을 저질렸을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1910년 이전역사도 마찬가지지만 그 이후 특히 한반도에서 식민지체제에서 일반서민들을 매년 공포로 몰아넣었던 허리케인이던지 태풍이던지 간에 이에 대한 자료를 찾는 다는 자체가 무모한 것이 되어 버렸다. 조선왕조실록 정본이 철종대에 끝난다는 것은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고 왜곡되었다고 사학계에서 인정하고 있어 역사성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보기때문이다. 때문에 이것들을 우리가 실제 역사로 취급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무엇이 이토록 역사가 꼬이고 서글프게 만들었을까. 역사밝힘이 그렇듯이 언제가는 명백히 들어날 수밖에 없는 진실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를 무조건 덮어버리고자 하였던 역사 농단 세력의 고약한 저의가 근간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서야 당연히 일만년역사라는 것을 알지만 5000년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고 하는 한반도 역사 상황은 우리와 같이 오랜전통의 역사가 없는 민족이나 국가들보다 자연재해 동향을 알아볼 수 있게 한 역사사실에서는 우리가 딱히 나을 것이 없다. 무엇인가 남다른 특별한 것이 반드시 있을 터이겠지만 그래서 서양세력들이 탐을 내고 달려들었겠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부끄럽고 창피한 역사뿐이다. 솔직히 이를 역사라고 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것일 수밖에 없다. 비록 한반도 지형에 맞게 잘 꾸며졌다고 하겠지만 불행하게도 후손들에게 긍지와 자존조차 보존할 수 없게 하는 부끄러운 역사 그 자체이다. 기존 뛰어나고 훌륭한 역사주체들이 남긴 우수한 과학적 자료는 다 어디에 있을까? 세계 어떤 곳에 우리가 절대로 찾을 수 없도록 꼭꼭 숨겨져 있을까? 지난 역사사실에서 매년 발생하는 기후상황과 자연재해에 관한 것은 후손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임을 무식자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천문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에게 천문지식이 그대로 전수되었던 것도 없다. 모두 중국으로부터 이어진다는 설명이 부첨되어 있을뿐이다. 태풍자료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이러한 말도 아되는 프레임에 의해서다. 후세에 참고가 되고 지식이 될 만한 알짜배기 자료나 데이터는 오늘날 세계질서를 독점하고 있는 국가의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이미 그들의 것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서두 설명이 길었지만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지구상에 아주 보잘 것 없는 역사주체라 할지라도 자국 역사 구성원이나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삶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에 관한 기록은 지속적으로 남겨 후손들에게 보다 안전한 길이 될 수 있거나 사후보전처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문헌들이 즐비하여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은 근세기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 당하면서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번 뼈저리게 서글픔을 느끼는 것은 고려사절요에서 찾을 수 없는 고려역사의 사실들을 중국역사서로부터 알게 된다는 비참한 현실이다. 어느민족 어느국가든지 겪어야 했던 일상적인 전쟁으로 인해 유독 삼한역사만 큰 소실이 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이름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라 절단의 의미를 갖다 붙여 기록이라 하면서 우리에게 남겨졌던 것은 정작 중요한 것은 전부 중국사에 이관시켜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그러한 빈곤한 과정의 역사를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고 태풍이나 허리케인처럼 자연재해에 대한 명칭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글쓴이가 연구하면서 늘 아쉬워 하는 것은 본 블로그 글 2014년 글 "환국(桓國)의 강역(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4" 에서 밝힌 것처럼 환국의 강역을 나타내는 고서 삼성기(三聖記)와 환국본기(桓國本紀)에 덧붙여 원초적인 역사 기록 언어에 대한 종류와 명확성을 보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물론 그렇더라도 역사농단세력에 의해 그것조차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했겠지만... 1920년 시카고 그리고 필라델피아 태풍과 허리케인을 이야기 하려면 동아일보 1926년 보도와 연관시켜야 하는데 1920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동아일보가 가진 당시 신문발행사정을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동아시아대륙에서 벌어졌다고 하는 러일전쟁은 허구라기 보다 발생 주체와 위치가 크게 잘못 알려져 있던 사건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함축적으로 이야기 하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거론 될 수밖에 없는 지명에 의한 영토문제는 아마도 미국이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불안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지만 그 당시 상황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메야 하는 처지도 그 고민보다 100배 더 클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현실이 존재한다. 그래도 그들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핵심에 대해 정확한 상황을 알기가 힘들고 특별한 방법이 무수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서두에서 언급하였지만 우리가 일제식민지기간 동안 많이 발생하였던 수많은 주요한 사건들에서 명확하게 알 방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때로는 똥도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처럼 일제병탄시기인 1920 년 때 일제문화정책 일환에 의해 창간되었다고 하는 동아일보에서 글쓴이가 찾고자 하는 자료들을 종종 찾을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기도 하지만 일편 서글픈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틀림없다. 당시 일제압제란 상황에서 독자적 신문발행이 자유롭지 못했을 것 같은 동아일보의 보도내용들을 보면 어떤 유수한 세계일간지 못지 않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세계전역의 뉴스가 상당히 지면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내용 면에서도 당시 시대상황을 생각할 때 상당히 충실한 것으로 파악되면서 세계유력지라 평가되던 뉴욕타임스와 뉴욕 월드, 뉴욕 저널과 비교하더라도 조금도 뒤처질 것 같지 않는 착각에 빠진다. 무엇이 이와같은 정도의 보도가 가능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자료를 찾아 알아 본 결과 동아일보와 특히 뉴욕타임스와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름에 감지할 수 있다. 아주 미묘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1851년 1부에 1페니짜리(penny paper)의 신문으로 출발하면서 노동계급을 위한 값싼 신문들을 발간하던 뉴욕타임스의 탄생은 근원적으로 자본주의와 색채를 달리한다는 사실이 있겠지만 귀족이나 지식자들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폭넓게 다수를 공급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특별한 영업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東亞日報)가 당시 적어도 한국민만을 상대로 하였다고 볼 때 서민을 위한 신문인 것처럼 인식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겠지만 또 하나의 가정은 한문과 병용한 한글을 깨우친 서양인들도 적지 않아 동아일보가 한글과 한문을 병용하여 보도함을 고집하였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본 블로그 글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5 "의 소제 '10)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허구'란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을 부추기면서 선정적 기사를 경쟁적으로 촉발했다하여 엘로저널리즘(黃色言論:yellow journalism)의 기수로 알려진 뉴욕 월드(New York World:1889)와 뉴욕 저널(New York Journal)은 한정된 여론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목적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고 나선 것은 경제논리상의 문제이다. 뉴욕타임스가 그 주인공인데 기존 신문과 다른 '인쇄하기에 적합한 모든 뉴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란 슬로건으로 서양인 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란 글로벌한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즉 언어가 다른 폭 넓은 독자를 겨냥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를 유대인출신인 아돌프 옥스(Adolph Simon Ochs:1858-1935)가 1896년에 인수하고 발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보도의 방향성에서 식민지제국의 어용신문으로 변신하여 언어, 문화, 인종,종교를 달리한 대상을 폭넓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체제를 선전하거나 광고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자본제국의 미국체제에 적극적으로 의존하면서 종속적인신문으로 족했을 것이며 어쨌던 이 신문은 곧바로 세계유력지로 성장되었다 한다. 말 그대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지역에 배포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뉴욕타임스가 기존 신문과 달랐다는 것은 세계유력지답게 주요한 뉴스를 보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 크며 당시 미국이란 체제에 동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유력지라는 대명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래 내용은 뉴욕타임스가 고급 정보를 얻어 보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도 잘나가는 신문은 정권과 유착하면서 좋은 정보, 고급정보를 취하고 선점한다는 것과 같다. 1904년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타임스(The Times)와 함께 최초로 해군전투 현장을 연결하여 무선전신(無線電信)전송을 받을 수 있었고 바로 동아시아대륙(?)에서 벌어 졌다고 하는 러일전쟁(露日戰爭:Russo-Japanese Wars)전장에서 중국소속이었던 스팀 보도선(報道汽船) 해문(press-boat Haimun)으로부터 전장상황을 보고 받아 제정러시아해군 발트해 함대가 일본해군에게 완전히 괴멸되는 보도를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러일전쟁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1차대전도 그러했지만 언제나 방관자로 남아 경제이득만 챙긴 것으로 알려진 미국까지 합해 통신보도의 필요한 지원과 혜택을 제공받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당시에 모든 충돌은 경제내면에서 발생되고 또는 촉발되는 요인에서 찾을 수가 있으며 19세기까지는 영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권력이 그러한 칼날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20세기 초부터 미국이 이를 인수하여 대자본의 권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898년 미서전쟁부터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갈등대상에서 벗어나 대체 조직을 사용하거나 대체인력을 고용하여 이를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자료 전반에서 찾을 수가 있고 이를 미국정치인들은 수동적 공격 정책(passive aggressive policy)이라 하면서 중립국 형태를 지향한 것이 된다. 이러한 기조는 일본에 의해 진주만(眞珠灣:Pearl Harbor)기습공격이 시작된 1941년 12월 7일전까지 유지되었다. [SS Haimun at Anchor off Chinampo] 위 사진은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게시한 것으로써 평양 인근의 항구인 진남포(鎭南浦)에 닻을 내리고 있는 중국소유의 통신보도선 해문이다. 물론 뉴욕타임스는 이 선박에서 보낸 보고서에 의해서 보도가 가능했다 한다. 세계유일했던 통신보도선을 한국영역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당시 한국영역은 세계질서의 주요한 각축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증거라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은 거의 10,000km가 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뉴욕(New York)에서 해문통신보도선을 이용하여 무선통신전문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당시에 무선통신사정을 생각해보면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본 블로그 글 "무선통신 역사로 본 뉴욕과 경성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4"에서 밝혔듯이 1900년에는 이태리계 영국인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1874-1937)가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해군군함에 무선전신시설을 설치하여 고작 121km 거리에서 소식을 교환할 수 있다 하였고 1901년 12월 12일 마르코니는 2,575km 떨어진 영국 잉글랜드 서남부 콘월 주(Cornwall)의 폴듀(fall due)에서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세인트존스(Saint John's)사이를 무선으로 잇는 부호를 이용하는 무선모스통신을 받아 역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이면에는 과학자들의 의심이 컷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뉴욕에서 동아시아대륙 진남포에 있는 해문보도통신선까지의 거리가 10,000km 가 넘는다는 것은 무선모스통신 거리의 한계 무리선을 넘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대기권에 전파를 반사하는 전리층이 존재한다 하여도 당시 과학자들이 의심한 지구의 곡률을 감안할 때 1905년에 해군무선통신을 뉴욕에서 받을 수 있었다 하는 것에서 크게 날조된 것이라고 보지않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단언하지만 뉴욕타임스가 뉴욕에 있었다면 통신보도선의 위치는 그곳으로부터 모스통신이 제어할 수 있는 한계치의 거리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약 3~4년간 발달 속도를 감안하여 거리가 121km 보다 더 길었을 터이지만 대서양을 넘는 거리 2,500km 가 자스트(just)라 할 때 이 거리 범위 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간에는 열도일본인들이 군국주의를 앞세워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헛소리를 그대로 인용하여 한반도 거문도에 무선중계소가 있어 어선으로 위장하고 대한해협을 순시중이던 일본함선 '신농환(信濃丸)'으로부터 "적함 발견"이라는 무선을 받은 일본 해군은 즉각 러시아발틱함대를 기다렸고 힘들지 않게 괴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주장까지 덩달아 인용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나중에 이야기 또 하겠지만 미국과 상응하는 발전적인 시설들은 한반도에 존재할 수가 없다. 한반도가 그렇듯 과학적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이런 무분별한 황당한 이야기가 우릴 놀라게 하지만 사실상 근거가 있어 하는 주장은 아니라 열도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 인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르코니가 실험한 것이 1901년이라면 1905년에 거문도 무선중계소가 설치되었다는이야기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어 우릭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반도가 어딘가. 북아메리카대륙 뉴욕에서 동해안을 한참지나고 또한 파나마운하를 지나도 기나긴 항로 태평양을 횡단해야만 한다. 시대는 1905년이다. 파나마운하가 개통된 것이 1914년이다.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에서 충분하게 설명한 이야기로 미국에서 기자재를 가지고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다. 이것을 말하려면 당시 1904년까지의 대한제국은 미국과 거의 같은 과학적 발달을 소지한 국가체제였다는 점을 먼저 주장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런 언급은 없고 무조건 한반도를 북아메리카대륙 상황처럼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고 열도일본인들이 그렇듯 뛰어난 것처럼 세뇌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사 어디에도 대한제국이 과학적으로 미국과 거의 동등하게 발달했다고 하는 문구는 눈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한반도에 설치되어야 할 무선중계소라면 그렇게 강대국이라고 하는 일본 대마도 부근에는 왜 무선중계소라는 것이 없어 거문도에 있다는 중계소에 의존했을까? 솔직히 대마도와 거문도와 거리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다. 대한제국을 보호하려고 하던 러시아가 동일한 체제에 주체라고 할 때 설령 거문도중계소가 존재하더라도 가시같은 일본함대에게 보고하게 만들었을까. 1904년이라면 을사늑약이전이다. 러일전쟁에서 십이면 아홉이 일본이 패한다고 했다. 글쓴이가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상식에 벗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무선중계소를 한반도에 세우려면 당시 특허권을 가지고 있던 마르코니의 허가를 받아야 할터인데 그러한 문제는 무시하고 한반도 조선 상황이라 하여 역사가 그러니 하면서 마구 함부로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무기를 팔목적으로 링컨대통령을 압박하는 영국금융조직을 경계하기 위해 러시아함대가 뉴욕에 상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세력, 또는 유럽세력 또는 식민지제국 등의 모든 당시 권력은 금융조직으로부터 생성되었다. 또한 발틱함대라 하지만 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에서 밝혔듯이 허드슨베이(Hudson Bay)가 발트해라 했다. 그렇다면 러시아함대는 뉴욕에서 무선통신이 가능한 거리 최대거리 2,500km 넘지 않는 곳에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항로 길목 북아메리카대륙 동해안 어디에서 일본함대가 기다렸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료를 보면 러시아의 거대한 군사력을 대적한 일본은 기습적인 공격이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은 한반도와 전혀 관계없는 곳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뉴욕타임스가 당시의 세계 질서를 지배하는 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장소와 시간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며 때문에 신뢰성과 사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뉴욕타임스가 말하는 1904년 러일전쟁의 상황보도는 이러한 관점으로 다시 관찰 할 이야기가 틀림없다. In 1904, The New York Times, along with The Times received the first on-the-spot wireless telegraph transmission from a naval battle, a report of the destruction of the Imperial Russian Navy's Baltic Fleet at the Battle of Port Arthur in the Straits of Tsushima off the eastern coast of Korea in the Yellow Sea in the western Pacific Ocean after just sailing across the globe from Europe from the press-boat Haimun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위는 뉴욕타임스가 동아시아 한국동해안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상황을 보도한 것이다. 러시아가 아무리 멍청하다 하더라도 220일간 29,000km 휘돌아 있는 진, 없는 진 다 빼버리고 일본을 공격하겠다고 전략을 꾸렸다는 주장 자체가 황당한 소설과 같다. 이와같이 무리하게 꾸미는 것에서 생각할 때 이미 사라진 러시아제국을 바보천치로 몰아부치는 것으로써 마치 망자에게 온갖 패악질을 하는 것과 같아 반드시 지양되어야 옳다. 사라진 러시아제국은 현재 소련이라 할 수 없다. 대한제국의 서양계일 뿐이다. 때문에 바보천치가 되었더라도 그들이 그로인해 차지한 영토보상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다. 문제는 러시아가 일본을 깨부시기 위해 출발한 곳이 지금의 발트해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 뉴욕타임스의 자료에도 이와같은 의혹을 감지할 수 있고 이것의 신뢰성은 다시 검토할 것이지만 보도하는 내용을 풀어보면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입장에서도 이것이 과연 한반도 영해에서 벌어진 이야긴지 아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명에 대한 위치 상황 확인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에서 동의가 가능하지만 이것을 굳이 한반도라고 한다면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위 통신환경적 요인이다. 러일전쟁 당시 제정러시아의 주력함대라 하는 발트함대 전함이 일본해군에게 완전히 파괴되는 과정에서의 장소가 동아시아대륙 위치라고 한사코 우기지만 중국 소속 보도선박(報道船舶) 해문(press-boat Haimun)의 정체, 또는 존재유도관계도 역시 밝혀야 하겠지만 우선 발트해 함대가 일본함대에게 파괴된 곳이 위에서 포트 아서(Battle of Port Arthur)라 하는 위치 설명에서 보면 근대사가 고집하고 있는 설명과 차이가 너무 많이 있다. 분명 포트 아서는 육지에 붙은 항구라 할 때 포트 아서를 기습공격을 감행한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발트함대가 포트아서 쪽으로 들어간 것은 틀림없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220일 소모해 가며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항로를 길게 잡았다는 주장이 정상적이라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라도 항로하여 전장으로 뛰어 들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발트함대는 포트아서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에서 포트아서가 황해에 있었다면 황해로 들어가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면 황해어디에서 받았을 것이다. Port Arthur in the Straits of Tsushima off the eastern coast of Korea in the Yellow Sea 우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러시아의 발트해 함대가 북유럽 발트해에서 유럽을 휘돌아 전 세계(?)를 가로질러 항해했다하고 그런 후 서태평양(western Pacific Ocean)의 황해(Yellow Sea)에 있는 한국동해안(eastern coast of Korea) 끝, 벗어난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보도는 지형적으로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든 이야기다. 황해와 동해안을 같이 묶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라 할 수 없다. 또한 한국동해안을 벗어난 대마도해협(Straits of Tsushima)이라 한 것은 그렇다 해도 대마도해협에 마치 포터 아서(at the Battle of Port Arthur)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한반도 지형사정과 전혀 맞지 않는 위치 문제가 골치가 아프도록 한다. 아무리 어물쩡 넘어가고자 한다 하여도 이와같은 보도사실은 세계유력지라 한 뉴욕타임스가 보도할 내용이라고 하기엔 의문 투성이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당시 일본함대가 발틱함대를 공격하는 장소가 제각기 주장이 다르다. 지금 현재 일본이 주장하는 러시아함대 격돌지는 한반도 동해안이라 하고 신중국자료에 나타나는 황해상을 격돌지라 하거나 뉴욕타임스가 말하고 있는 보도내용은 한반도 동해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서해안이라고 볼 수 없는 황해가 아니라 또 다른 제 3 지역, 대마도해협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현재까지 모든 근대사가 주장하는 것 중에 가장 의문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바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29,000km를 항해하여 마침내 포트아서를 기습공격한 일본을 황해로 들어가 공격해야 함에도 정비하기 위해 거꾸로 전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운행했다고 하는 것은 가히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현재 블라디보스톡이란 도시의 생성도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이다. 무엇때문에 러시아의 발트해함대가 동아시아대륙 연해주에 있는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까? 만화도 이런 만화가 없다. 이것은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보았자 거짓말은 거짓말을 양산하는 결과로 발트해함대가 근원적으로 출발한 곳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이고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들이다. 문제는 포트 아서(Port Arthur)의 정확한 위치다. 지금까지 동아시아대륙역사에서는 즉 한반도 동해안이 아닌 서해안 즉 황해(黃海:Yellow Sea)북부지역에 있는 요동(遼東)반도 남쪽 끝 여순(旅順)이라 한 것에서 이러한 오류가 눈덩이처럼 크게 쌓인 것이다. 위 뉴욕타임스가 보도하는 내용에서 보면 대한해협이라고 하는 조선해협이나 또는 대마도해협 부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지역에 포트 아서가 있다고 포괄적으로 보도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요동반도 여순이라 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다. 뉴욕타임스가 대마도해협의 장소를 명확하게 한국동해안을 벗어난 지역이라 하였고 전치사 "at"를 사용하면서까지 포트 아서의 위치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지만 실제로 대마도 어디에도 포트 아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유력지인 뉴욕타임스의 보도 정확성을 믿는다면 위 보도에서 표현하는 위치는 분명 현재 동아시아대륙의 요동반도 남쪽 끝 여순(旅順)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황해라 부를 수밖에 없는 북아메리카대륙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황해는 늘 상식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미시시피강에 범람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뉴올리언즈는 모래퇴적이 쌓인 곳이다. 그러니 황해라고 할 수 있는 곳도 멕시코만과 미시시피강이 만나는 하구라 할 수 있다. 물론 뉴욕타임스의 이 보도 조차 오보라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당시 뉴욕타임스가 내건 것은 이런 중대한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신뢰와 믿음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할 때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사실을 어쨌던 인정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여순은 포트 아서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하다. 글쓴이는 이미 오래전에 이 포트 아서를 멕시코만 북부해안에 위치한 포트아서라 하였다. 본 블로그 글 "토네이도(Tornado)로 본 유럽지명과 모스크바(Moscow)지명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3 "에서 동유럽에 위치한 모스크바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을 가능성과 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 를 바탕으로 할 때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 북동부에 있는 얕고 넓은 만(灣:bay) 허드슨베이(Hudson Bay)를 발트해라 한 사실에서 그곳에서 갈 수 있는 곳은 유럽을 휘돌아가 아니라 당시 유럽국가들이 꿰 찾고 있었던 북아메리카대륙 동해안을 휘돌아 남부 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본 블로그 글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2015.03.21 14:58]소제 13). 대비달자 악라사와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2"에서 이미 1898년 미국자본이 쿠바에서 도발하여 스페인을 쫓아내는 것 같지만 바로 대한제국의 대동아공영권 영역을 하나 하나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러일전쟁은 수동적공격정책을 지향한 미국자본이 제공한 용병대리전쟁(代理戰爭)으로서 멕시코만에 있는 포트아서(旅順軍港:Port Arthur)를 공격한 것이며 스페인 멕시코친미계를 재펜(japan) 또는 일본으로 이름을 통칭하고 기습공격하게 한 것으로 대한제국의 일부를 미국대체조직 일본이 가지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대한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멕시코와 텍사스주를 멕시코반란세력들에게 공여한다는 조건이 붙었다고 볼 수 있고 1905년 7월 29일에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체조직 일본과 맺은 또 하나의 주고 받기 식에서 이와같은 맥락에 의한 것임을 밝혔던 바가 있다. 1905년 이후 카리브해 제도에 일본 즉 "japanese" 라는 국명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은 이와같은 것이다. 즉 포트아서는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여순이 아니라 멕시코만에 있는 포트 아서이어야 하고 그곳으로부터 시작한 땅 따먹기가 오늘날 미국서부영토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글쓴이의 여러 주장과 뉴욕타임스가 보도하는 내용은 위치상 일치하는 것이며 러시아함대가 파괴되었던 여순구공격(旅順口攻撃) 또는 여순항해전이 발생한 즉 포트 아서 전투(Battle of Port Arthur)의 장소는 조선해협 또는 대마도해협에서 벗어난 지점에 있는 포트 아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아마도 뉴욕타임스가 위 보도자료에서 한반도가 아닌 곳인 동해안에서 벗어난 대마도해협의 포트아서라 한 지형구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언급한 동아일보와 뉴욕타임스의 연결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920년 일제조치로 발행하기 시작한 동아일보가 당시 환경에 반해 상당한 보도 수준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뉴욕타임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아래 뉴욕타임스 이력을 참조하면 알 수가 있는 일이다. In 1910, the first air delivery of The New York Times to Philadelphia began.The New York Times' first trans-Atlantic delivery by air to London occurred in 1919 by dirigible. In 1920, a "4 A.M. Airplane Edition" was sent by plane to Chicago so it could be in the hands of Republican convention delegates by evening. 뉴욕타임스는 1910년에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처음으로 항공배달을 했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런던으로 첫번째로 배달한 것이 1919년 대서양횡단비행으로 가능했다 하였으며 마침내 1920년에 비행기로 항공기판(版)를 시카고(Chicago)로 보내지면서 그 날 저녁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 것에서 1920년 일제에 의해 동아일보가 창간된 시점과 일치한다고 보았을 때 그리고 세계유력지의 도움이 있었다고 볼 때 당시 동아일보는 시카고에 있었으며 뉴욕타임스가 항공배달한 원판을 번역하여 그대로 인용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태풍과 허리케인이 구분되어야 했던 역사 이제부터 왜 포트아서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러시아가 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까지 점령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지를 본격적으로 찾아보자. 이것을 찾기 위해 허리케인 역사는 세계삼한역사의 중요한 자료라고 하고 싶다. 현재 북아메리카대륙은 허리케인으로 인하여 심한 몸살을 연속적으로 앓고 있다. 매년 그러하니까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지의 사람들의 고통은 우리가 겪는 태풍피해보다 훨씬 더 강도가 큰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최근 2017년 8월 13일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하비(Harvey)가 중심기압 938(hPa)에 평균속도(215 km/h)의 강도로 6시간 후 업그레이드가 되면서 카리브해 서쪽방향으로 진행하였고 멕시코 남부에 있는 캄페체만(Bay of Campeche)을 통과, 록포트(Rockport, Texas)를 상륙한 후 휴스턴(Houston)을 강타하고 재차 8월 30일 캐머런(Cameron, Louisiana)에 재상륙하여 또 다른 피해를 낳았는데 9월 22일 포트 아서(Port Arthur)에서 북쪽으로 16킬로 떨어진 미국 국립기상청 관측소는 하비로 인해 무려 1,640mm의 강우량이 기록되었다고 발표하였고 700~1900억($)달러 피해액이 산출되어 우리나라 원화로는 140조억원이라 하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피해와 동시에 수많은 이재민을 남겼고 북아메리카대륙 텍사스남부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매체들은 보도하고 있다. 이어 9월 2일에 하비(Harvey)가 소멸함과 동시에 또 다시 2017년 8월 30일경 카리브해(Caribbean Sea)에서 발생한 어마(Hurricane Irma)는 중심기압(中心氣壓) 914(hPa)를 유지하면서 평균 풍속 ≥250 km/h(≥156 mph), 파고 ≥5.5m를 유지하다가, 중심기압이 920-952(hPa)까지 상승되면서 급격히 사피어-심프슨 열대저기압(Saffir-Simpson Hurricane Scale:SSHS)의 5등급까지 발달한 허리케인 어마(Hurricane Irma)는 드디어 글쓴이가 이 글을 쓰는 시간인 9월 9일 밤부터 플로리다주 주민 65만명 피난케 하였고 폭우를 동반하며 앞을 볼 수 없도록 무섭게 물아치면서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상륙하는 허리케인의 광폭한 광경을 CNN 생방송을 통해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사실상 어떤 자연 재해이던 그 피해에 대해 규모가 어떠니 저떠니 하는 비교는 근원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지만 적어도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선조들이 매년 이런 피해를 겪었고 재정을 망가뜨릴 수 있는 피해액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 후손들은 과거 발생한 태풍의 정확한 위치조차 모른다고 하는 것은 불효가 아닐 수 없고 또한 조상님들께 실제로 면목이 서지 않는 이야기다. 어쨌서 이런 천하에도 없을 상황이 우리에게 있단 말인가. 역사농단이 결국 우리의 정체성까지 말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실제로 우리의 선조들은 이보다 더 한 고통을 자연재해로 인해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그것에 따라 지혜롭게 세세하게 데이터를 만들어 대비했을 것이 틀림없지만 우리 후손에게 전달된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겉 껍데기 뿐이다. 세계삼한역사가 하나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 사실이라면 각각 구성원부류에서 다른 종교문제와 문화의 의한 갈등, 그리고 인종, 민족간의 갈등 등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이와같은 기록들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 고서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종교, 문화, 인종, 민족에 의해 발생한 갈등을 전했을 것이 틀림없지만 이를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포괄적으로 민족이 하나인 것처럼 기록되었다는 것은 고서를 찾는 글쓴이에게도 실망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자연재해가 발생한 거대한 사건 현장이 몇 백 년이 흘러 비록 지명이 변하고 결국 나라조차 바뀌었다 하여도 결코 근원이 변했다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며 때와 같은 장소가 아니라 해서 자연이치의 근본을 속이거나 감출 수는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언제까지고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진실을 간직한다는 것을 알기에 역사찾기를 결코 멈출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굳은 역사철학은 글쓴이의 머리 속을 늘 강하게 지배한다. 생각해보며 애초부터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가 우리나라에 태어날 수 없는 근원적으로 과학적인 문화 토양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결코 아닐 것이다. 존재했지만 적어도 한반도 삼한의 과학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고 있었더라도 근세기 역사판짜기에 의해 전부 빼앗겨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태풍이란 명칭은 과연 신조어일까?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공포심을 낳았던 태풍은 절대로 신조어의 대상이라 할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마치 태풍이 전에는 우리나라에 없었던 것처럼 말할 수 있겠지만 자연의 이치는 매년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몰아치는 거대한 폭풍들이 존재했음을 정확하게 알리고 있다. 근래에 들어 북아메리카대륙에 이어 태풍이 빈발하는 것에 원인으로 지구 온난화가 해수 온도상승을 유발하고 폭우를 발생시키는 습기 찬 공기를 발생케 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본래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이러한 거대한 폭풍은 수시로 발생한 것이라고 해야 맞다. 물론 지금처럼 흉폭해지는 강도가 더하고 덜했으면 몰라도 취약한 지역에 범람으로 이어짐은 당연하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서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그나마 고서에서 수해(水害)가 빈번했다는 것은 이와같이 볼 수밖에 없다. 현재 NASA에 의해 수집 된 자료에는 플로리다를 강타한 어마(Irma)경로의 해양 표면 온도가 카테고리 5등급 허리케인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수온이 30°C 이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은 현대들어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온난화문제도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주장인 것은 틀림없다. 또 태풍이 빈발하는 다른 요인으로는 대서양의 10년 주기 진동이 허리케인 형성 조건에 영향을 주면서 현재 허리케인 상태가 양호한 상태에 있는 대서양의 장기주기에 의한 것이며 대서양의 따뜻한 해수면 온도와 약한 수직 바람 전단은 거대한 허리케인으로 형성되고 강화되는데 유리하게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상대적으로 동양태풍보다 더 심한 피해를 낳는 허리케인은 대서양의 특수한 환경조건도 크게 감안해야 한다는 사실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풍과 허리케인을 굳이 구분해야 하는 현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동양역사, 서양역사란 역사프레임 때문에 태풍이 갈라져야 하는 기막힌 사실부터 집고 넘어간다. 태풍은 왜 동양태풍과 서양태풍으로 나누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동양태풍이란 말도 없고 서양태풍이란 말도 없다. 하지만 동양태풍이나 서양태풍이라 하지 않았지만 이런식으로 교묘하게 분리된 것이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태풍인가 허리케인인가?(2015.06.04 20:25) http://m.blog.daum.net/han0114/17050757 "에서 글쓴이가 밝히길 북서태평양(Western North Pacific)상에 태풍자료가 1939년 이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주목하고 의혹스럽게 바라보았으며 태풍과 허리케인이 달라야 하는 시대적 배경에서 근세기에 적어도 서세가 데이터 자료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 1939년 이후부터라고 해야 맞을 것 같지만 본격적으로 세계인들에게 공개를 위한 자료화한 것은 한반도에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시작되기 약 석 달 전인 1950년 3월 23일에 세계기상기구(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WMO)가 발족된 이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하게 한반도가 주목되어야 할 사실이 하나 둘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서두에서도 이상하게 본 이야기다. 한쪽에는 살상이 되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새롭게 동양과 서양태풍을 분리하기 위해 국제기구가 발족되었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마찬가지이야기다. 이미 1945년부터 한반도는 냉전시대의 상징처럼 남북한이 충돌하면서 내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살상을 위한 참혹한 참상들은 한마디로 가당찮게 기존 역사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기위한 세계에 공개된 학살현장으로써 사실상 부족함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이 종전 된 후 피아 사망자수가 500만명이라 하였다는 것은 전체 인구의 1/6 이니 약 17%가 되는 것이라 이러한 사망자 숫자는 폭격으로 인한 것으로써 재래식 공격에 의한 살상보다 무차별 폭격이 주요 원인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도 본 블로그 글 "코리언(corean)학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0" 편에서 언급하였던 내용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꽃피었다 하면서도 수많은 유물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전시 문화재 보호에 대한 1899년과 1907년 헤이그 협약의 원칙이 무시되면서 공산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불가피한 행위였다고 하지만 전쟁사 기록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퍼부은 폭탄의 숫자는 단일전쟁으론 최고라 하였다. 말로 안되는 무차별 폭격이었던 것이다. 공산세력을 척결한다는 이유였지만 끝내 또 다시 삼팔선을 대신할 휴전선만 남기고 언제까지고 갈등할 수 이쓴 요인으로 남겨진 것이다. 또 다시 휴전선이 한반도를 갈라 놓았을 때 전쟁을 했던 이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정당한 사유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반복되고 있다는 말이다. 또 다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같은 무차별 폭격이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이를 우리가 나서 막을 수 있을 것인지 현 국제정치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 역시 장담할 수가 없어 오히려 한국전쟁때보다 더 참혹한 결과를 맞이 할 수 있다는 불안은 우리민족에게 존재한다. 무차별 폭격에서 안타깝지만 미국에겐 한반도의 역사유물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세계기상기구(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WMO)가 발족된 이후 1951년 9월 8일에는 난데없이 전범국인 일본과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San Francisco Peace Treaty)을 맺었다는데 분노하는 것이다. 전범국이 아니라 미국의 동맹국으로 위치를 확인하는 협정이었고 한반도 전쟁으로 인한 동북아 질서개편에 일환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서두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다분히 새로운 동아시아대륙 질서를 위한 미국 포석 이면에는 영토의 확실성을 보장받겠다는 의도가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극단적인 반공운동이었던 매카시슴(maccarthysme)으로 인해 블랙리스트에 올라 결국 미국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은 많고도 많다. 왜 이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궁극적인 것은 백색인종의 우월성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새로운 미국 건설을 위한 확고한 방침 때문이다. 실제로 아래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1926 Miami hurricane)발생 사실들은 서양인들이 본격적으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 년대 1939년 보다 앞선 것이라 더욱 의혹스럽게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 틀림없지만 문제는 똑같은 태풍이 한반도에도 발생했다고 하는 동아일보의 보도는 이런 의혹에 기름을 붓는 것이다. 늘 글쓴이가 앵무새처럼 되 뇌이는 것이지만 기존 역사를 쪼개어 동양사와 서양사를 만들어야 했다는 것은 근세기 서양세력들이 세계질서를 장악한 상황아래 놓여진 부정하기 힘든 그들만의 강구된 일정한 팩트로서 갈라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태풍(颱風)이라는 한자어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이어야 하고 그것을 번역할 수 있는 외국어는 다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번역의 명칭은 역사개체 속에 기존하는 것으로 한정되어야 마땅하고 번역이란 명칭아래 결코 실체가 구분되거나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번역은 번역일 뿐 번역하는 언어별로 역사가 결코 달랐다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19~20세기에 들어 동양역사와 서양역사가 서양세력들에 의해 거의 강제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혼란이 불필요하게 생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무수히 많은 역사가 각기 언어별도 개체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원칙아래 이것을 독립이라 규정하면서 특히 영어를 필두로 그리어와 라틴어가 이를 주도한 느낌이 없지 않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이렇게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려(高麗)가 한자(漢子)를 사용했다. 고려정치체제 아래 한자만 특별하게 사용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은 고집이 아니다. 이미 영어자료에도 나타나지만 10세기부터 시작된 고려를 "united corea" 라는 연합, 연방 수식어는 정치형태의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연합, 연방이란 단어 속에 여러이해집단과 인종, 종교, 문화, 민족등이 다르다는 전제가 있다. 고려정치권내에 라틴어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어도 존재했다고 보아야 하며 고문서로 이를 기록하고 알렸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한 진본을 우리는 찾을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중국학자가 고려를 방문하여 저장된 문헌들을 대했을 때 수세기 전의 고문서들이 넘쳐났다는 토설이 이를 반증한다. 또한 본 블로그 글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2012.01.22 17:25) http://m.blog.daum.net/han0114/17050475 " 에서도 밝혔듯이 1377년 최초의 고려금속활자의 원본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라 한 것과 구텐베르크가 인쇄기술자로써 1450년 인쇄소를 설치하고, 고딕 활자를 사용하여 최초로 36행의 라틴어 성서, 즉 구텐베르크 성서(Gutenberg Bible) 또는 라틴어 불가타(Vulgata)성경을 인쇄했다는 사실과는 실체가 결코 다르다고 단정할 수 없고 또한 상대적으로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고려에서 발명된 하나의 판, 인쇄할 수 있는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로 완성된 것이니 근본이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1888년 최초의 고려금속활자 원본을 소개한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1853-1922)가 스스로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역관의 도움 없이도 한문서적들을 읽을 정도로 한학에 능통했고 수많은 고서적 수집하는 등 동양문화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면에 숨길 수 없는 역사전통성과 그 내면에 동질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반드시 동양역사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가 서양역사의 개체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이것에서 혼란스러운 것은 동서양이 분리되면서 마치 서양인들이 동양인에게 이러한 역사유물들을 기증하는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분리된 문화영역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이전 역사 속에서는 프랑스인 그들도 같은 역사체제의 구성원이었던 사실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를 현대인들이 눈치조차 챌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을 뿐이다. 1900년에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의 대한제국관에 고려금속활자의 원본을 기증한 이 프랑스인은 프랑스의 초대대사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서양세력이라 단정할 수 없는 어쩌면 순수한 코리아일반시민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고려가 생성된 10세기 때부터 여러 도시국가들을 연합하면서 대왕이 다스리던 방대한 국가체제라고 할 때 하나의 언어로만으로 국한되거나 제한되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미 고려체제아래 여러 언어로 각자 다른 문화와 민족성에 맞게 본질의 역사기록이 변질되지 않는 범위에서 남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필연적 개연성은 많고도 많지만 특히 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종이역사를 보더라도 이와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본 블로그 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2013.06.06 21:32)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 " 에서 글쓴이가 밝히길 남송(南宋)작가 장단의(張端義)가 쓴 귀이록(貴耳錄)에 전하는 것에“선화(宣和) 연간에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이서(異書)가 아주 많아서 선진(先秦)이후부터 진(晉), 당(唐), 수(隋),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서책이 모두 있어서, 몇 천 가(家), 몇 천 집(集)이나 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당시 고려가 세계문화의 저장고란 성격이 짙고 이서(異書)를 세상(世上)에 흔하지 않는 보기 드문 서적(書籍). 귀(貴)한 책(冊)이라고 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신분이 어떻던 생전에 볼 수 없었던 책을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하며 언어가 다른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희귀한 책을 말하는 것으로써 우리가 고집하는 한문만을 통하는 것이 아니거나 알 수 없었던 각 지방의 희귀한 언어를 사용한 문헌들임을 알 수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재 마치 워싱턴DC에 있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이나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신중국 백도백과(百度百科)자료에는 송(宋), 원(元), 명(明), 청(清)시대때 그들 나라에서 서사(書寫)쓰고 적는 것을 모두 고려종이(高麗紙)로 사용했었다고 하고 청(清)건륭(乾隆)시에는 그들 나라에서 고려종이를 방제(仿制) 즉 모조했다는 글이 있는데 백과사전에서 서사(書寫)란 의미를 서지학적(書誌學的)인 용어라 하면서 넓은 의미로서는 어떤 언어를, 또는 문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일 전반을 가리킨다 하였으니 주로 빼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당시 고려의 문화적 지배력은 대단한 것이다. 근세기에 비로소 고려의 역사문헌들을 체계적으로 빼기거나 모사(模寫)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송, 원, 명, 청이라 하는 중국 조대명(朝代名)들은 참으로 무색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비록 다른 언어로 역사기록이 이루어졌겠지만 결국 하나의 체제에서 발생한 하나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며 이것을 근세기에 서세(西勢)들은 오리엔탈(Oriental)이라고 통칭하고 이를 동양(東洋)이라 간격을 두면서 아시아(ASIA)로 만들어 역사심기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이 근세기에 마치 처음부터 역사가 달랐던 것처럼 여러 개의 역사로 분리되고 이질화된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의 시기는 빨라야 중세기정도이다. 즉 중세기 역사부터는 모든 것이 뒤틀어졌다는 것을 러시아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말을 빌려서 알 수 있지만 그것도 더 늦은 근세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태풍이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면 오늘날 역사학자간에도 의구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어째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이 태풍(颱風)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에서 서두에 잠시 언급한 내용이다. 고려나 조선에서는 태풍이라는 자연재해가 아예 없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참으로 기괴하고 이상함이 그 내면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아마도 허리케인을 의식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태풍이 없는 세상에 존재했다고 믿어야 하겠는가. 이참에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신뢰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한번 지적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실록이 전 세계사적으로 기릴 만한 걸작이라 하여 1997년에 유네스코(UNESCO)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실은 정확하거나 신뢰할 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글쓴이의 명확한 판단이다. 어떤 면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 역사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일부의 기록일뿐이다. 왜냐하면 백과사전에도 자세하게 적시된 이야기지만 국사편찬위원회가 동란이 끝나고 1년 남짓 후인 1955년부터 1958년까지 4년 동안 태백산본(太白山本)을 8분의 1로 줄여 인쇄하고 사진을 찍어 영인하여 A4판 양장본 48책으로 간행하였다는 사실과 이를 국내 도서관 뿐만아니라 난데 없이 전쟁통에 유럽과 미국의 주요대학의 도서관에 널리 반포하였다는 사실을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 무엇이 그렇게 급해 쪼그라든 우리나라 한반도 역사를 이렇소 하고 알릴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이미 서두에서 걱정스럽게 자문한 것으로써 바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왜 한국전쟁 중에 시작되었을까 하는 의문과 맥락을 같이 하고 1951년에 발족된 세계기상기구와 최종 목적하는 의미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코리아 역사 없애기와 한반도 역사 알리기다. 상당한 많은 분량을 없애버리고 줄여 인쇄하고 전쟁통에 자국의 아픔이나 고통과 상관없이 마치 무엇인가에 의해 확실하게 정리가 된 것처럼 스스로가 세계만국에 공개하고 반포했다는 것은 굳히기가 가능했다고 판단했고 이러한 멍청한 짓을 우리 사학계가 나서 저질렀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가 유일 할 것이다. 때문에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안타까운 것은 오히려 이것들이 기존 역사로 굳히기에 들어간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심히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듯 세밀하고 정밀하다고 국제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명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본 블로그에서 과학적인 면으로 모순을 다반사처럼 안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이제 역사사건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의 대표적인 태풍이 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은 한반도 역사의 이해할 수 없는 생성과정과 빈곤한 실체라 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동양역사의 중심언어라고 하는 한자(漢字)인 태풍(颱風)이란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선에서 생각해보아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어쨌거나 역사연속성에 의한 자연재해상황이 통째로 빠졌다는 이야기며 이 바람에 태풍사실도 이제는 남의 것이 되었다는 참으로 기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고종19년(1882년)세 번째 기사 조미 조약(朝美條約)이 체결되었다. 第三款, 美國船隻在朝鮮左近海面, 如遇颶風, 或缺糧食煤水, 距通商口岸太遠, 應許其隨處收泊, 以避颶風, 購買糧食, 修理船隻, 所有經費, 係由船主自備。 미국 선척이 조선의 근해에서 태풍(颱風)을 만났거나 혹은 식량·석탄·물이 모자라고 통상 항구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졌을 때에는 곳에 따라 정박하여 태풍을 피하고 식량을 사며 선척을 수리하도록 한다. 위는 조선(朝鮮) 고종19년(1882년)세 번째 기사인데 태풍(泰風)을 구풍(颶風)이라 하고 있다. 이것이 유일하다. 국립국어원(國立國語院)이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標準國語大辭典)에서는 구풍을 “열대지방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하고 돌개바람과 비슷한 뜻이라고 풀이하면서도 원래 태풍을 구풍이라 했고 현재 태풍(颱風)은 ‘신조어(新造語)’라 말하고 있다. 하기야 태풍도 돌개바람인 것은 맞다. 그러나 역사기록이 이렇듯 두루뭉실해서야 어찌 역사기록으로 가치를 이야기 하겠는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5권 /문종인효대왕(文宗仁孝大王)2, 34년(1080)에 나타나는 구풍(颶風)이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종조(太宗朝), 세조(世祖), 성종(成宗), 중종실록(中宗實錄)과 헌종(憲宗)11년(1845)각사등록(各司謄錄:1577-1910)의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에 나타나는 구풍(颶風)은 말 그대로 회오리바람 즉 토네이도(Tornado)일 뿐이다. 이것을 태풍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크고 작음을 모르는 눈감고 아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구풍을 태풍이라고 찾으니 진짜 태풍을 찾을 수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이 태풍(颱風)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통째로 태풍을 빼 버린 것이다. 태풍의 태(颱)라는 글자는 청나라 초기 왕사진(王士禛:1634-1711)이 지은 향조필기(香祖筆記)에 처음 등장하며 그는 대만(台灣)지역 기후를 설명하면서 “바람이 크고 맹렬한 것을 ‘구(颶)’라 하고, 더 심한 것을 ‘태(颱’‘라 한다(台灣風信與他海殊異,風大而烈者爲颶,又甚者爲颱)”라고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즉 구는 돌개바람이고 태는 허리케인이다. 대만은 오래전부터 허리케인이 많이 와 닿는 지역이었을 것이니 바로 플로리다 근처이다. 단, 태(颱)는 1918년 세상에 나온 중화대자전(中華大字典)에도 실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 글자를 널리 쓰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상 허리케인은 1000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태풍을 말한 것이며 큰 자연재해를 사람들에게 매년 안겨 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태풍은 바람도 존재하지만 강우(降雨)를 동반하면서 폭우로 인해 곳곳에서 범람을 발생시킨다는데 더 큰 무서움이 있다. 대홍수와 수해는 이 허리케인이 쓸고 지나간 현상이다. 현재 허리케인을 바람이 크고 맹렬하다고 대입하는 것은 일부현상만 이야기하는 꼴이 아닌가. 분명 본 블로그 글 "구풍(颶風)이 발생한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9 " 에서 구(颶)를 고전번역원에서 한결같이 “사나운 바람”이라 고만 해석한 것을 동아시아대륙에 불어대는 태풍(颱風)을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토네이도라 정리하였고 이어 본 블로그 글"토네이도(Tornado)로 본 유럽지명과 모스크바(Moscow)지명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3 "에서 토네이도(tornado)가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 사실을 근거로 삼한역사가 기록한 토네이도는 모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것임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세세하게 확인한 바가 있다. 그리고 변명이 궁하니 태풍을 기존 한반도 사학자들이 난데없이 신조어(新造語)라 하고 있지만 이것이 한문이 아니더라도 음을 태풍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많고 이를 허리케인이라 할 사실과 더불어 태풍(颱風)을 신조어라 하는 것은 궁색하기가 짝이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태풍인가 허리케인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7 "에서 1936년 8월 11일 동아일보 호외(號外)기사를 바탕으로 태풍의 진로와 발생상황을 처음으로 살펴본 결과 당시 충주에서 집중호우(集中豪雨)가 있었고 이어 한강홍수(漢江洪水)로 인한 위급한 상황까지 맞이한 것은 바로 1936년 동태평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Eastern Pacific hurricane)의 영향을 받은 수해(水害)이었음이 밝혔던 바가 있었다. 이러한 밝힘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즉 동아시아대륙의 서태평양에서 생성되는 태풍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이치적 사실을 토대로 본 결과에 의한 이러한 사실들은 결코 삼한역사의 터전이 동아시아대륙의 한반도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상황을 조선왕조실록에 기재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밝혀질 것을 염려한 조작된 것이다. 이제 무수한 사례와 진실이 교차하는 것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분명하다. 진실이 이처럼 낱낱이 밝혀질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에 한반도 태풍과 비교할 수 없도록 차라리 태풍이란 기록을 삭제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과거 삼한 역사에서 등장하는 토네이도나 허리케인 같은 태풍을 동일하게 태풍이라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제3제국(第三帝國:Dritte Reich,1933-1945)독일제국을 제압하고 1945년부터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이 장악한 세계는 코리아 위치부터 조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태풍들을 동아시아대륙에서 발생한 태풍이라 하면서 태풍과 허리케인을 구분이 어렵게 한 것이 틀림없다. 이것의 결과는 1951년 발족한 국제기상기구가 그것이다. 기후학적으로 보아도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토네이도와 허리케인이며 실제적으로 형태적으로도 다를 수밖에 없다. 기후학적으로 토네이도는 국부적으로 강력한 저기압이 발달하면서 강한 풍속을 가진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것이며 그 생성원인은 온대저기압의 불안정이나 한대기단과 열대기간 사이에 형성되는 강한 한대전선(polar front:寒帶前線)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바람의 지름이 보통 태풍의 1000분의 1밖에 안 되며 태풍과는 달리 수평방향의 확대보다 수직방향의 규모가 크게 나타나는 바람이므로 일단 피해규모가 광범위하지 않다는 것인데 확연히 태풍과 같은 허리케인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왜 태풍을 태풍이라 하지 못하고 한사코 구풍이라 고집했을까? 따지고 물어도 결과는 같고, 사실과 진실은 결코 거짓과 조작사실과 병존할 수 없다는 결론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태풍과 허리케인 역시 병존할 수 없고 하나 이어야만 한다. 최소한 1939년 이전까지의 태풍은 허리케인이고 허리케인은 태풍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월한 백색유럽역사를 만들기 위해 광분하던 서세는 고려(高麗:CORE)가 동서양으로 분리되어야 했고 한자기록의 고려(高麗)와 라틴어의 고려(高麗)가 구분되어야 했던 것처럼 고려가 그리스(Greece)이기에 그리스어(Greek)가 고려어(高麗語)라는 사실에서 굳이 서세 입장에서는 한자(漢字)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리스어가 대신하고 라틴어가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 한자의 형상의 어원처럼 영어의 어원을 라틴어에서 찾는 것과 같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처럼 19세기때 서양인 지식자들 속에 한자(漢字)를 습득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이와같은 대비를 증명케 한다. 백과사전을 보면 로마제국의 동부에서는 그리스어가 거의 공용어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로마(羅馬)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Latin語)인구보다 그리스어 인구가 더 많았지만 교회역사가 유럽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중세시대에는 라틴어가 교회의 지배적인 언어로 인용되었고 라틴어 위주의 명칭들이 공용어처럼 사용되었다고 현재 모든 자료들이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다. 고려어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글쓴이에게 조언을 부탁드린다. 아마도 한반도 인들은 고려어의 실제 형태가 어떤 것인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이야기다. 태풍의 어원(語原)에서도 그러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는데 태풍의 영어 단어인 ‘typhoon[taɪ|fu:n]’은 그리스신화에 티폰(Typhon)Τύφωνα[Týfona]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과 ‘티폰(Typhon)'을 파괴적인 폭풍우[폭력적인 해양 선풍(旋風:Tourbillon marin d’une extrême violence)]와 연관시킴으로써 'taifung'을 끌어들여 'typhoon'이라는 영어(英語)표현을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영어(英語)의 ‘typhoon'이란 용어는 1588년에 영국에서 사용한 예가 있다 했으며, 프랑스에서는 1504년 ‘typhon'이라 한 사실을 들고 있어 영국보다 이르다는 것도 어쩌면 한글 생성과 프랑스어 생성과도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어보다 프랑스를 고급언어로 인정했다. 어쨌던 이것은 언어적인 문제라고 하지만 동서양 구분될 수 있는 개연성이 여기에 존재한다. 프랑스에서 “티폰”이라 이름 했다는 것은 곧 조선(朝鮮)에서도 태풍이라 했다는 말과 절대로 다르지 않고 물론 한문(漢文)을 그대로 음(音)을 따라 발음을 했건 간에 어떤 한자(漢子)가 사용되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세속(世俗)으로 전해지는 음(音)은 한결같이 지속적으로 태풍(Typhon)이라 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래 언어의 관계형태를 묶어 보았는데 참고하길 바란다. [한글과 프랑스어] 1926년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 전 세계의 태풍은 북대서양 서부 및 서인도제도 부근에서 11%, 북태평양 동부 및 멕시코 앞바다에서 약 17%, 북태평양의 동경(東經)180°, 즉 세계 각국의 시차(時差)를 결정하는 기준 경도선(經度線)의 서쪽에서 남중국해 사이 가장 넓은 바다지역에서 약 38%, 인도양(印度洋)남부,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에서 동경 90°까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에서 약 28%, 벵골 만(灣)과 아라비아 해(海)에서 약 6%가 발생하고 있는 것을 백과사전에서는 정리하고 있다. 숫자적으로는 서태평양선상에서 발생하는 태풍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대신 위력적인 면에서는 북대서양 서부 및 서인도제도 부근과 북태평양 동부 및 멕시코 앞바다에서 발생하는 태풍이 가장 위협적인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에서 지형상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보이고 이것을 오늘날 허리케인(hurricane)이라 한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허리케인이 주는 공포와 피해는 어마어마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허리케인을 포함하는 태풍은 7월, 8월, 9월 동안에 내습한 태풍 수가 전체의 91%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태풍은 7∼10월 사이에 많이 발생하며, 적도(赤道:equator)를 사이에 둔 남북 위도 5° 이내에서는 태풍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알려진다. 일반적인 태풍발생 특성은 열대저기압의 수온 27℃ 이상의 해면에서 발생하고 회전하는 물체 위에서 보이는 가상적인 힘의 원심력인 전형력(轉向力:Coriolis force) 즉 코리올리 힘(Coriolis force)이 비교적 약한 북위 5° ~20° 에서 발생하며 북반구에선 코리올리의 힘에 의해 바람이 오른쪽으로 쏠리며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일반적으로 발생 초기에는 서북서진(西北西進)하다가 점차 북상하여 편서풍(偏西風)을 타고 북동진(北東進)한다고 알려진다. 일반적인 허리케인 방향은 동해안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관측소를 동해안쪽에 두었던 것이다. [Coriolis(kôr'ē-ō'lĭs)] 코리(cori)에-접미사(olis)가 붙어 있는 코리올리 힘(Coriolis force)은 프랑스 수학자 귀스타브 코리올리(Gustave Gaspard Coriolis:1792-1843)에 의해서라 하지만 코리(cori)의 의미는 코레(core)와 함께 우리에게 주는 것에서 생각보다 크게 나타난다. 중심축(CORE)이라는 의미가 분명하게 있다. 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돌기 때문에 낮과 밤, 계절의 변화가 생기며 이로 인해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받는 열량의 차이가 발생하고 또한 대륙과 바다, 적도에서는 일사(日射:sunlight)에 의한 열에너지가 풍부해지면서 극지방과 같은 지역에는 열에너지의 결핍에 따른 열적 불균형이 일어나 이런 열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현상 중에 특히 저위도(低緯度)지방의 따뜻한 공기가 바다로부터 수증기를 엄청나게 공급받으면서 강한 바람과 많은 비를 동반하며 고위도(高緯度)로 이동하는 기상현상을 태풍 또는 허리케인이라 하고 허리케인은 고도차가 일반적으로 “970 hPa” 헥토파스칼 이하이며 중심부의 최대 풍속은 초속 32m/sec 이상으로 알려지는 것이다. 허리케인은 시속 120~320km의 회전속도로 불고, 시속 16~32km로 이동하며, 직경이 약 1,000km에 이르는 것으로 소멸하기까지 1주일 내외가 걸린다고 한다. 특히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한반도 사정을 보면 7~9월 여름에 서해(西海)중부 먼 바다 해상까지도 27~28℃의 수온일 경우에 태풍발달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의 서해(西海)나 동해(東海)에서도 태풍이 발달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사례가 여태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북위 25° 이상의 해상에서 태풍이 잘 발생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양열용량(Ocean Heat Content)과 하층과 상층의 바람 차이가 커질수록 강해지는 수직풍 시어(Vertical Wind Shear)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동아시아대륙 상에 놓고 풀어보면 서두에 이야기 했지만 특히 멕시코 만(灣)의 수온의 에너지를 받아 강력하게 되는 허리케인 하비의 경우처럼 한반도 서해안에서의 수온이 아무리 높아도 태풍이 생성되어 나타나는 것은 유사이래 지금까지 찾아 볼 수 없었고 수직풍 이어가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약해진 태풍이 한반도 서해안에서 다시 살아나 피해를 준 사례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오히려 고기압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남해 지역에서 강하게 발달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관측소가 있으려면 남해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금부터 태풍현상에서 참으로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동양태풍이라고 하는 동아시아대륙에서 발생하는 이름하여 태풍과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다른 이름인 허리케인이 그것도 같은 년도, 같은 월, 같은 일자 그리고 같은 시간에 발생하고 똑 같이 진행하면서 더군다나 태풍의 진로 방향도 같아 다만 이름만 다른 두 개의 태풍 또는 허리케인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만약 그런 사실이 정말 있다면 그것은 세기의 기네스북 감이 아닐 수 없으며 기상과학자들이 못 볼 것 보았다고 난리를 칠 이야기다. 그렇듯 판으로 찍어낸 듯 같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자연이치적으로 이러한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여 참으로 헷갈리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한쪽의 보도는 한글이고 또 다른 한쪽의 기록은 영어라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한쪽은 번역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의 사건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이니 둘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1920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동아일보가 전하는 보도를 보면 1926년 9월 15일부터 태풍이 발생하였고 그래서 보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16일, 17일, 18일을 거쳐 9월 19일에 마지막으로 비교적 약해져 소멸단계 있는 태풍에 대한 예보와 함께 보도가 끝난다. 물론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동아시아대륙의 태풍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또 다른 태풍 즉 미국허리케인 자료에는 동아일보가 보도한 거의 같은 시기인 1926년 9월 11일에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에서 생성된 허리케인은 대서양을 가로 질러 카리브해(Caribbean Sea)로 서북으로 이동하고 소엔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제일 북쪽에 위치한 세인트 키츠 섬(St. Kitts)으로부터 9월 14일에 보고되었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물론 보고를 받았던 기관은 미국기상청(United States Weather Bureau)이다.생각해보면 미국기상대가 이 허리케인의 발생상황을 처음 보고 받았으니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보도기관 즉 신문사에게 전달했을 것이 뻔하다.그렇다면 신문이 보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빨라야 1926년 9월 15일이 될 수밖에 없다.정확하게 동아일보가 처음보도한 일자와 일치한다.미국기상대의 보고서를 동아일보도 받아 보도 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이 상황에서 미국의 허리케인 자료는 어떤 것인가.바로 당시 어마어마한 피해를 낳았던 1926년에 발생한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이라 명명한 태풍이다. 이것의 발생부터 소멸하기까지의 정확한 위치를 살펴보고 글쓴이가 기존 본 블로그에서 밝혀본 사실을 근거로 비교하면서 동아일보의 보도가 우릴 착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일시에 해결하고 또한 우리 역사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풀어 우리가 여태 잘못알고 있는 역사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 생성(Formed) 1926년 9월 11일 소멸(Dissipated) 1926년 9월 22일 최고풍속(Highest winds) 1-minute sustained: 150 mph (240 km/h) 150마일 저기압(Lowest pressure) 930 mbar(hPa); 27.46 inHg 930밀리바(hPa, 헥토파스칼)수은주인치 피해(Damage) $78.58 million (1926 USD) 영향권지역(Areas affected):터크스(Turks), 케이커스제도(Caicos Islands), 바하마(Bahamas), 플로리다(Florida), 알라바마(Alabama), 미시시피(Mississippi), 루이지애나(Louisiana) 최근 어마(Hurricane Irma)가 발생하기 전 휴스톤(Houston)을 초토화시킨 허리케인 하비(Hurricane Harvey)의 최저 중심 기압 938 hPa, 최대풍속 59(m/s)로 나타나는데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은 최대풍속에서 초속42m로 나타난다. 태풍(颱風)발생기준으로 따질 때 최고풍속(Highest winds)이 150mph(240 km/h)이기 때문에 4등급(210~249 km/h)으로 분류되었으며 이 정도면 지붕이 날아가고 해안 지역에 큰 침식이 일어나며 내륙 지역에 침수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머지 않아 최고의 등급인 5등급으로 상승한다. 이 태풍은 워낙 큰 피해를 주었던 허리케인(hurricane)이기 때문에 이름을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Great Miami Hurricane)이라고 하였으며 정작 이 허리케인(Unnamed)에게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에 각 지역마다 기상관리소가 존재하였지만 허리케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기관이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글쓴이가 이야기 하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아도 역사농단 실체들이 그때까지 제대로 활동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위 지도에 보면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은 서(西)대서양에서 1926년 9월 11일 서경 43° 0' 0"W , 북위 15° 0' 0"N 범위에서 발생하여 1926년 9월 22일에 루이지애나주(Louisiana州)데리더(DeRidder)근방에서 소멸된 것으로써 피해액이 $78.58 million(1926 USD)라 하였고 현재 환율계산으로 하면 1570억 달러($)의 큰 피해를 냈다고 알려지는데 오늘날 환율로 따져 178조가 되다 하니 우리나라 1년 예산의 약 45%수준의 규모이다. 이 피해는 곧바로 플로리다주의 경제공황으로 발전했다. 이상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이다. 경기의 거품이 붕괴되고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은행들이 폐문하였고 부유한 사람들은 갑자기 돈을 잃고 거지가 되었다. 이런 플로리다주에 피해상황에서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동아일보 1927년 4월 23일자 보도로 전하여 지는 것인데 난데 없이 동아시아대륙에 있을 일본이 직격탄을 맞았고 일본재계혼란과 더불어 조선상계(朝鮮商界)가 대공황(大恐慌)을 겪으며 쑥대밭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야 말로 글로벌한 이야기다.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을 미국입장이야 1926년과 연이어 1928년에도 발생한 허리케인 피해로 재정적인 부담이 커 그렇다고 하겠지만 거의 1만km 떨어진 일본에서 직격탄을 맞았다고 야단 법석을 떨어야 했을까? 미국이 이 여파가 컸던 것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이로인해 1928년에 일부국가들에서 야기된 경제공황들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따져 볼 이야기지만 대체로 수긍이 안가는 것은 아니라 직격탄은 미국이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문에 1929년 10월 24일, 뉴욕주식시장이 대폭락하였고 이를 ‘검은 목요일’이라 하는 경제대공황 이 발생한 요인으로 취급될 수 있다. 하지만 경제대국이라고 하여도 동아시아일본은 이런 와중에 안끼이는데가 없는데 일본 역시 1927년의 금융공황으로 시작해 1929년의 미국과 똑같이 세계공황을 거치며 1930년에서 1931년에 최고의 공황을 맞이 했다고 하여 이를 소화공황(昭和恐慌:Showa Depression)이라 하고 있다. 아무리 세계가 한지붕이라고 하지만 가장 넓다고 하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북아메리카대륙과 동아시아대륙의 경제상황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과 다르게 물론 파나마 운하가 개통이 되었다고 하지만 1920년에 운송이 원활했다고 할 수 없고 동아시아대륙에 위치한 일본은 지리적 환경에 의한 무역의 한계가 있었을 것이 뻔하며 엄청난 운송비의 문제로 인해 원가 상승이 발생하여 경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문제가 분명하게 있었음에도 미국과 상응한 경쟁력을 가진 것이라면 이것은 무엇인가 경제학적으로도 매우 뒤틀려 잘못되고 한참 잘못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같은 불리한 무역환경을 극복하려면 일본이 플로리다 가까이에 있든지 미국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일본이 미국과 대등한 경제대국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무한의 뻥에 가깝다. 다시 허리케인피해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 피해지역으로는 카리브해지역의 투르크(Turks)와 케이커스제도(Caicos Islands), 바하마(Bahamas), 플로리다(Florida)주(州)가 가장 큰 피해를 낳았고 북아메리카대륙 본토는 알라바마(Alabama)(州), 미시시피(Mississippi)(州), 루이지애나(Louisiana)(州)로 나타난다. 만약 과거 일본이 피해지역에 존재했다면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마이애미시티에서 발생한 사망자수 114명과 미국인 사망자수가 총 372명이라 하였지만 이 숫자에는 미국 외 지역의 재난인구수는 포함되지 않았고 약 43,000명의 노숙자는 대부분은 마이애미 지역이며 실종자 수는 추정조차도 불확실하다고 말해진다. 물론 일본인들의 피해상황은 나타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제물포와 보스톤 1926년 카리브해 폭풍(Caribbean a storm)은 마이애미 기상청(American Weather Bureau)에 의해 묘사되길 아마도 미국을 강타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허리케인이라 하였고 플로리다주(Florida)의 포트 로더데일(Fort Lauderdale), 데이니어(Dania), 브로워드 카운티(Broward County) 남동쪽에 있는 할리우드(Hollywood), 할렌데이(Hallandale) 및 마이애미(Miami)를 강타했다고 기록에 세부적으로 나타난다. 거의 허리케인이 최고조를 달할 때인 1926년 9월 18일에 사망자는 325명에서 800명으로 추산하였는데 이전 역사상의 폭풍으로 인한 재산 피해가 이와 같이 크지 않았다고 덧붙이고 있지만 이에 대한 데이터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조선지배상황과 연결할 수 있는 이야기다. 마이애미 허리케인 발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면 1926년 9월 6일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에서 생성된 폭풍은 대서양을 가로 질러 카리브해(Caribbean Sea)로 이동했다고 세인트 키츠 섬(St. Kitts)으로부터 9월 14일에 보고되었다. 2일 후 바하마(Bahamas)로 이동했고, 9월 17일 플로리다 남부(South Florida)쪽으로 향했다. 9월 17일 오전 10시(at 10 A.M). 워싱턴의 기상국(Weather Bureau in Washington)은 금요일 밤 바하마제도 뉴프로비던스(New Providence)섬의 북동 해안에 위치한 나사우(Nassau)를 통과하여 플로리다 해안으로 밀고 들어가자 "매우 심한 폭풍(a very severe storm)"임을 발표했다. 신문도 보도했지만 독자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시각이 9월 17일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시 뉴스매체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한정이 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이애미 기상예보자(Miami weatherman) 리처드 그레이(Richard Gray)는 오후 6시 직전 워싱턴의 기상국(Weather Bureau)에서 허리케인 경보를 발령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1926년에는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경고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고 알려진다. 그럼에도 동아일보는 이 허리케인을 어떻게 알고 보도 했을까? 동아시아대륙의 태풍인 것처럼 묘사했지만 이와같이 보도 속도가 빨랐다는 것은 이외라 할 수 있고 알 수 없는 한반도 사람들을 위해 이같이 보도 했다는 것은 마이애미 기상예보자 조차 당시 대대적으로 알릴 방도가 없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한반도 역사가 거짓이 아니라면 참으로 대단히 발빠른 보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이 이렇듯 동아일보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한 허리케인을 빠르게 보도하도록 도왔을까? 동아일보 캡쳐한 원문을 보면 보도 마지막에 인천관측소(仁川觀測所) 발표(發表)라는 것이 보인다. 인천관측소가 한반도에 존재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거문도에 무선중계소가 있었다는 사실과도 느낌은 다르지 않다. 인천기상관측소라는 것은 제물포기상관측소를 말함인데 영어로 "The Chemulpo Meteorological Observatory" 라 하였다. 이에 대한 놀라운 자료가 있다. 1872년 7월에 미군 통신단(Signal Corps)에 의해 설립된 미국기상학저널인 기상월보[Monthly Weather Review]의 자료에 따르면 FIG. 1.-The Chemulpo Meteorological Observatory.사진과 함께 1905년 9월 발행된 기상월보(Monthly Weather Review)에 소개된 관측소가 바로 제물포기상관측소가 인천관측소라고 하고 있다. 제물포관측소가 대한제국에서 세웠다면 무엇때문에 세웠을까? 물론 빈번한 허리케인을 파악하기 위해 동해안에 세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반도에 인천은 서해안이니 태풍이 지나가는 관문도 아닐뿐더러 기상관측소가 있을 하등에 이유가 없다. 그것은 한반도로 이름만 이관되었다는 뜻이다. 대자본국 미국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매년 무수히 많은 거대한 허리케인의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고통속에서 그나마 허리케인을 미리 예보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 바로 제물포기상관측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미국에서의 기상관측소가 대서양과 맞대고 있는 동해안 메사추세츠 밀톤(Milton, Massachusetts)에 미국기상학자 애보트 로치(Abbott Lawrence Rotch:1861–1912)가 개인적으로 1884년에 설치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밀톤의 부루힐 기상관측소(Blue Hill Meteorological Observatory)이다. 그것의 역사를 풀어보면 본래의 기상관측소 건물과 본래 원석 탑은 결국 바람이 몰아부치는 비가 벽을 꿰뚫고 들어와 기구와 기록들을 손상시켰고 원석의 의한 진동 또한 구조상 문제까지 있다하여 1908년에 본래 고층 건물을 제거하고 1740년대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고딕 리바이벌 건축(Gothic Revival architecture)양식 네오고딕 건축(Neo-Gothic)형식으로 3층으로 보강하였다고 하는 자료가 눈에 띈다. 때문에 이런 약력을 가지고 있는 메사추세츠 부루힐기상관측소(Blue Hill Meteorological Observatory)와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이던 아니던 간에 인천에 세운 기상관측소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도 상당히 앞선 기상학건축물이라 생각되며 어떻게 미국동부에서도 당시까지 미국이 뛰어난 기상학자에 의해 개인의 이름을 빌어 설치하였다고 하는 기상관측소를 그것도 과학적으로도 크게 낙후되었다고 하는 한반도 제물포에 실제로 존재하게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건물의 약력이나 제물포기상관측소의 사진으로 보면 모양새가 당시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세련 된 것임을 알 수 있어 실제로 제물포기상관측소의 실체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앞에서 태풍보도를 한 동아일보 캡쳐 원문에 인천관측소발표라고 보도된 내용에서 적어도 1926년까지 인천이라고 하는 제물포(Chemulpo)는 본래 허리케인 태풍이 빈발하는 곳을 관찰하기 위한 장소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고 당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매년 휩쓰는 허리케인을 관찰하기 위해 적재의 장소인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에 있는 보스톤(Boston)에 설치했다고 볼 때 제물포는 바로 보스톤이라고 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이 관측소가 세워진 곳은 본 블로그 글 "청구(靑丘)와 bule hill, http://blog.daum.net/han0114/17050123 "에서 밝혔듯이 바로 청구라고 할 수 있는 부루힐(bule hill)언덕에 세워진 것은 제물포관측소의 사진 전경과 다르지 않다고 믿고 싶다. 마이애미 허리케인 발생부터 소멸까지의 상황 허리케인의 경고 경로를 보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우스 플로리다의 유일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 된 경고를 듣기 위해 라디오를 소유했을 뿐이라고 했다. 최고조를 달한 허리케인은 그날 저녁(9월 17일)바람이 강해지면서 기압계가 계속 떨어지고 파도가 솟구치기 시작했으며 강풍(Gale-force winds)은 해안을 강타했다, 새벽 2시, 폭 96.5km(60 miles wide)넓이의 허리케인이 해안을 강타했다. 마이애미에서 사망한 100명의 사람들 중에는 대부분 시력을 읽고 희생이 되었는데 강풍에 의한 파편에 맞아 익사했다라고 알려진다. 여전히 위협하고 있는 허리케인은 북서쪽에 있는 남부의 대습지대(大濕地帶) 에버글레이즈 호수(Everglades)를 가로질러 오케 코비 호수(Lake Okeechobee)까지 휩쓸어버렸으며 광폭의 바람은 호수의 가장 약한 제방을 뚫었고 호수의 남서쪽 해안에 있는 무어 헤이븐(Moore Haven)의 작은 마을을 경고도 없이 약 4.5m높이의 호수물이 그대로 마을을 덮쳐 건물들은 형체도 없이 붕괴되었다. 폭풍은 멕시코만(Gulf of Mexico)으로 이동하였고 마침내 최후를 맞이 하기 전 플로리다의 먼 북서쪽 끝에 있는 펜사콜라(at Pensacola)와 앨라배마 주 모바일(at Mobile)을 강타했다.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는 천(千)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마을의 대다수 건물 등이 아무 것도 안 남고 완전히 파괴되었거나 강이 범람했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동아일보에게 전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라델피아 신문은 "플로리다 남동부 지역을 쓸어 버렸다."고 표제를 달았다. 특히 필라델피아에는 항공으로 뉴욕타임스가 전달되었다고 서두에서 이야기 했다. 때문에 필라델피아의 신문들은 뉴욕타임스를 인용했을 것이다. 다시 살펴보면 열대성 저기압은 9월 11일 중앙 대서양에서 형성되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9월 6일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이다. 주로 이곳에서 허리케인이 발생한다. 북서쪽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꾸준히 강화된 열대성 폭풍은 그 다음날 허리케인 강도에 충분히 다 달았지만 폭이 넓은 대서양에서의 싶지 않는 관찰 결과에서, 약 9일이 경과한 1926년 9월 15일까지는 폭풍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고 되었다. 허리케인은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북쪽에서 마침내 허리케인 강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폭풍이 카테고리 4등급(Category 4 hurricane)의 허리케인과 같은 강도에서 최고 강도에 도달 한 다음날까지 강화가 계속되었으며 그 강렬함은 9월 18일 마이애미 근처에 상륙하기 위해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Turks and Caicos Islands)와 바하마(Bahamas)를 횡단하면서 그 힘은 계속 유지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힘의 열대성저기압은 바하마섬 전체와 남부 플로리다 전역에 엄청난 파괴를 발생케 한 것이다. 폭풍은 수없이 많은 주민들이 집을 잃지 않기 위한 섬을 가로 지르는 수백 개의 구조물을 세웠지만 이것들은 맥없이 파괴되었으며 이것에 의해 적어도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진다. 플로리다 남부를 강타 할 때, 대부분의 사망자는 오케 코비 호 (Okeechobee)근처에서 발생했으며 폭풍이 몰아치고 둑이 붕괴되면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익사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 한 사실이다. 허리케인은 플로리다 반도를 빠르게 지나 서해안 포트 마이어스(Fort Myers)근처에서 멕시코 만(灣)으로 이동했고 폭풍은 주변 지역을 휩쓸면서 강풍은 나무를 쓰러뜨리고 전기 시설을 무참히 파괴하였다. 그 후 각각 9월 20일과 21일 앨라배마와 미시시피주에서 강도가 약해지면서 육지의 상호작용으로 허리케인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9월 22일에 소멸되었다. 아래 그림은 진로 방향을 시간대별로 그린 것이다. 전자에서 소멸을 살펴보았으니 허리케인 생성부터 시간대로 별로 자세히 알아보자. 처음 허리케인은 1926년 9월 11일 소엔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마르티니크섬(island of Martinique)에서 동쪽으로 1,770km(1,100mile) 떨어진 곳에서 시간당 시속 100km/h(65miles)의 열대성폭풍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자료를 볼 수가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9월 6일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에서 발생하여 9월 11일 중앙대서양에서 형성되었다고 믿어지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서북서(西北西)방향으로 추적하면 허리케인은 9월 12일 서서히 강화되고 강열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소앤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동쪽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예측이다. 9월 14일 오후 저녁 세인트키츠(at Saint Kitts)에서 열대성저기압이 바람을 몰고 일으키며 허리케인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다음날 스팀선 마투타(Matura)에서 관측하길 우연히 열대저기압과 마주한 상태에서 28.82inHg 수은주인치(水銀柱inch:976mb=hPa)를 기록했다고 알렸다. [UTC=그리니치 평균시(GMT:Greenwich Mean Time)] 동아일보가 보도하기 시작한 시간 마침내 본격적 활동이 시작된 9월 15일 06:00(UTC)를 기준으로 허리케인은 버진제도(Virgin Islands)북부에서 더욱 강열하게 강화되고 있었고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Saffir–Simpson scale)열대저기압등급 카테고리 4에 해당하는 강도에 이르면서 9월 16일까지 계속 강화되었으며 강도는 150mph(241km/h)라는 풍속을 9월 16일 18:00(UTC)에 기록했고 이 강도로 터크스와 카이 코스 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부근으로 허리케인이 지나갔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 직후 허리케인은 바하마(Bahamas)의 마야과나 섬(Mayaguana)을 강타했고 섬을 지나친 허리케인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9월 17일 남부 바하마(Bahamas) 나소(Nassau)근처를 지나가면서 엄청난 힘을 유지했다고 알려진다. 9월 18일 맹그로브 산호초(Mangrove Cay)지역의 안드로스 섬(Andros Island)에 2번째로 상륙했고 그 후 허리케인은 안드로스섬을 건너 플로리다로 가는 도중 멕시코 만류(灣流), 걸프스트림(Gulf Stream)을 통과했는데 걸프스트림 지역을 유구(琉球)라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물이 공처럼 구(球)를 그리면서 흐른다는 의미라 하였기 때문에 허리가 구부러지 쿠바도 들어가지마 스트림지역에 있는 제도들이 모두 여기에 속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로에 의해 플로리다 남부 근처 페리네(Perrine)해안으로 허리케인이 들이 닥쳤으며 9월 18일 12시(UTC) 다운타운 마이애미(Downtown Miami)남쪽으로 24km(15 mile)떨어진 곳에서 최소 233km/h(145 mph)의 풍속과 27.46 inHg 수은주인치(930 mb)의 기압을 추정할 수 있었다. 당시 허리케인의 크기가 매우 커 가장 바깥쪽의 등압선까지 횡단 길이가 604km(375 miles)가량이나 떨어져 바하마 중부섬인 롱섬(longisland)까지 이어졌고 허리케인급(級)의 바람은 플로리다 위쪽부터 키(Keys)에서 가까운 세인트루시에 카운티(St Lucie County)까지 보고 되었다. 18일 20시 30분(UTC)경 허리케인의 중심부는 멕시코만(Gulf of Mexico)의 푼타 라사(Punta Rassa)를 통과했고 그때까지 중심부의 압력은 28.05 inHg(950 mb)로 상승했지만 태풍의 눈 주위의 적란운(積亂雲)의 풍속은 169km/h(105 mph)로 감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허리케인은 육지의 상호작용에 의해 플로리다 남부에서 급격하게 약화되었지만 6시간 후 푼타 라사 (Punta Rassa)에서 멕시코만(灣)으로 들어간 후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9월 20일 멕시코 만(灣)의 따뜻한 수온은 열대성저기압의 3등급(Category 3 hurricane)에 상응하는 풍속 201km/h(125 mph)의 풍우로 두 번째 강열한 절정(secondary peak)을 맞이했다. 그리고 멕시코 만을 통과하여 더 북서(北西)쪽으로 진행했지만 플로리다주(州)해안의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지역을 평행하게 진행하면서 서(西)쪽으로 서(西)쪽으로 서서히 휘어져 갔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크게 약화된 허리케인은 앨라배마(Alabama)주 페르디도 해변(Perdido beach)근처로 두 번째 육지로 접어들었고 그 날 오후 21시30분(UTC)에는 풍속이 185km/h(115 mph)를 기록하였으며 육지 상륙 후 허리케인은 앨라배마의 평행사도(平行砂島) 장벽 섬(barrier islands)에서 빠르게 약해지면서 구불구불 움직였고 열대성 폭풍으로 미시시피주(州) 걸프 포트(Gulfport)근처에서 9월 21일에 마지막으로 해안으로 이동하면서 다음날 루이지애나에서 소멸하기 전에 약한 열대저기압(tropical depression)상태에서 퇴화하고 말았다고 정리된다. 최종 마이애미 허리케인의 사망자 수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초기 추정치에 따르면 마이애미만도 사망자가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부상자 역시 2,000명 이른다고 알려진다. 심각한 사상자로 인해 휴양지는 일시적인시체 공시관이나 병원으로 변했으며 주택과 사무실 건물들은 허리케인에 의해 전복되어 약 3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난민캠프로 사용되었다는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 1926년에 동아일보가 보도한 태풍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1926.09.15부터 9.19일까지의 동아일보의 보도에 등장하는 태풍과 1926.09.11부터 9.22일까지의 미국허리케인이 각각 다른 종류의 태풍인가 비교하며 살펴볼 것이다. 분명 1926년 당시 동아일보의 켑쳐된 보도를 보면 어디에도 허리케인이라 한 적이 없고 오직 태풍이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당시 공교롭게도 시기적으로 너무나도 허리케인과 일치한다고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동아시아대륙에서 발생하는 이름하여 태풍과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다른 이름인 허리케인이 그것도 같은 년도, 같은 월, 같은 일자 그리고 같은 시간에 발생하고 진행하면서 더군다나 태풍의 진로 방향도 같은 다만 이름만 다른 두 개의 태풍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글쓴이의 물음이고 의문을 표시한 것이다. 우리는 동아일보가 보도한 대로 폭풍이 발생한 곳은 한반도라고 지금까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다른 잣대로 증명할 방법도 없었고 비교할 대상이 우리에게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똑같은 태풍이 위도는 같지만 경도가 다른 곳에 동경이 아닌 서경 위치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동아일보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생한 태풍이라고 이야기해야 했겠지만 한반도 역사가 그것을 용인하였으니 한반도 구성원들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한반도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그것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같은 규모의 태풍이 발생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어느 누구도 답을 할 수 없는 자연이치에 의해 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거짓말 할 수 없는 자연이치는 명확하고 정확했다. 즉 같은 조건의 두 개의 태풍이 같은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고 확실한 이야기다. 때문에 한쪽은 허구라 할 수밖에 없다. 어느쪽일까? 즉 동아일보의 보도가 정말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1926.09.15부터 19일까지의 한반도 기후상황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새빨간 거짓이고 허구라는 이야기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당시 동아일보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게 하는 답이다. 동아일보 보다가 시작한 1926년 9월 15일까지의 북아메리카 대륙 허리케인의 진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최초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은 서(西)대서양에서 1926년 9월 11일에 서경 43° 0' 0"W , 북위 15° 0' 0"N 범위에서 발생했다고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1926년 9월 6일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근처에서 생성된 폭풍은 대서양을 서쪽으로 가로 질러 카리브해(Caribbean Sea)로 이동했다고 하는 것이며 미국기상대로 세인트 키츠 섬(St. Kitts)으로부터 9월 14일에 보고되었다는 사실과 9월 11일에 소엔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마르티니크섬(island of Martinique)에서 동쪽으로 1,770km(1,100mile)떨어진 곳에서 시간당 시속 100km/h(65miles)의 열대성폭풍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서북서(西北西)방향으로 추적하면 허리케인은 9월 12일 서서히 강화되면서 강열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소앤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동쪽에 머무르고 있었고 9월 14일 오후 저녁 세인트키츠(at Saint Kitts)에서 열대성저기압이 바람을 몰고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허리케인으로 발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보도로 완성되기 까지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동아일보가 보도한 9월 15일은 조건상 자스트(정확)라고 해야 맞다. 미국 자료도 9월 15일 06:00(UTC)를 기준으로 허리케인은 버진제도(Virgin Islands)북부에서 더욱 강열하게 강화되고 있었고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Saffir–Simpson scale)열대저기압등급 카테고리4 에 해당하는 강도에 이르면서 9월 16일까지 계속 강화되었으며 강도는 150mph(241km/h)라는 풍속을 유지하며 9월 16일 18:00(UTC)에 기록했고 이 강도로 터크스와 카이코스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부근으로 허리케인이 지났다고 되어 있다. [Tracks of centers of Anticyclones, septemper, 1926. inset departure of Monthly mean pressure from Normal] [1] 위 동아일보의 1926.09.15 개황(槪况)을 보면 어제(9.14)필리핀 동쪽방향 바다 위에서 출현한 태풍은 오늘(9.15)아침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쪽 방향 200km 해상에서 740(粍:mm)를 알리며 북쪽으로 행하고 있다고 했으며 대륙의 흑룡강(黑龍江)지역의 회오리바람은 동북동(東北東)쪽으로 이동하여 오후에는 천둥소리와 비(雷雨)가 있다 하였다. 740(粍)라 한 것은 일본단위로써 mm 인데 강수량을 표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동아일보의 보도에서 태풍이 9월 14일 필리핀(Philippines)동쪽 해상에서 발생했다고 하고 이튿날인 9월 15일 아침에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쪽 방향 200km 해상에서 740(粍:mm)를 알리며 북쪽으로 행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허리케인 자료를 보면 약 9일이 경과한 1926년 9월 15일까지 폭풍이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06:00(UTC)를 기준으로 허리케인은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북쪽에서 마침내 허리케인 강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구분해서 볼 것은 필리핀 동쪽 해상에 발생한 허리케인은 9월 15일 아침(06:00(UTC))기준으로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쪽 방향 200km 해상에서 강우량 740(粍:mm)를 알리며 북쪽으로 진행했다고 한 것은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북쪽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가 있는 곳을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라 했던 것인데 버진 아일랜드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허리케인은 9월 12일 서서히 강화되고 강열해지면서 여전히 소앤틸리스제도(Lesser Antilles)의 동쪽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과 9월 14일 오후저녁까지 세인트키츠(at Saint Kitts)에서 저기압이 바람을 몰고 일으키며 허리케인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 수가 있다. 바로 세인트키츠가 있는 소앤틸리스제도임을 있는데 이곳은 희한하게 8개의 크고 작은 섬이 남북으로 이어지면서 환(環:ring) 형태를 만들고 있는 지형이다. 이곳을 글쓴이는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라 판단한다. 팔중산열도를 지금은 대만(臺灣:Taiwan) 동쪽바다에 약 212km 남짓에 야에야마 제도라고 하는 곳인데 석원도(石垣島)라고 하는 이시가키 섬이 약간 동쪽으로 떨어져 있다.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혼란을 멈춰야 한다.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는 8개의 무거운 산으로 만들어진 열도라는 이야기다. 즉 소앤틸리스제도이다. 사실상 필리핀 앞바다가 무한정 넓어 정확하게 지정하지 않으면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태풍 생성지는 기압과 높은 온도, 수온이 높은 곳, 습도 높은 뉴기니섬 주위나 필리핀 동부해상에서 발생하는데 특히 태풍 낸시(Typhoon Nancy)의 경우는 1961년 9월 7일, 마셜 제도의 콰잘레인 환초(Kwajalein Atoll)부근의 저기압 지대에서 열대저기압이 발생한 것이라 하는데 필리핀에서 거리를 재어보면 거의 4,500km 가 넘는다. 그 만큼 폭이 넓다는 이야기다. 물론 마이애미 허리케인 역시 카보 베르데 섬(Cape Verde Islands)에서 소앤틸리스제도의 마르티니크섬까지의 거리가 약 4,000km 이니 비교하면 대형태풍은 거의 같은 거리에서 힘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낸시는 최대풍속이 345 km/h 인데 관측을 전제 하에 전 세계에서 발생한 열대저기압 중 가장 큰 수치를 기록했다고 알려지는 것이어서 진행방향도 특이 했었다는 것인데 생성지에서 완전히 온 원을 그리며 일본열도 남방 기주반도(紀州半島)를 지나 일본 중부를 통과하고 북서부에 있는 아키타를 거쳐 북해도와 오츠크해지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완전히 크다란 원을 그리며 휘어진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1926년 9월에 발생한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태풍경로는 현재 위치지명을 대입할 때 1961년 때 발생한 태풍 낸시보다 더 굴곡점이 심하게 나타나 필리핀 앞바다에서 팔중산열도로 들어가는 과정의 원이 꺽여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1951년 태풍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그러한 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경우가 된다. 때문에 동아일보가 보도한 태풍의 경로는 동아시아용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 경로는 그대로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에 적용하면 다음과 그림과 같이 적용된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열대저기압권뿐만아니라 고기압권 내의 날씨도 보도하였는데 9월 15일 고기압이 천도(千島)방면과 중국내륙간(中國內陸間)에 있으며 764(粍:mm)를 알리고 있다 하고 있다. 그 외 기상의 상태에서 날씨(天候)가 만주(滿洲)는 산뜻하게 개이고(好晴) 조선(朝鮮)은 남부가 영향을 받는대신 북부(北部)에는 맑고(晴) 중부이남(中部以南)은 맑게 개인상태(晴天)이며 일본(日本)은 장기(長崎)에 뇌우가 있는 외에 기타는 대개 산뜻하게 개이나 동북지방 북해도(北海道)에는 비가 내리는(降雨)곳이 많다 하였다. 즉 일본의 나가사키 장기(長崎)는 어쨌던 허리케인 영향권내에 있다는 이야기다. 글쓴이가 판단할 때 오래된 생각이지만 쿠바의 아바나(Havana)가 아닌가 한다. 앞으로 예상(豫想)으로 여송(呂宋) 동쪽 방향에 있는 태풍(颱風)은 점점 북상(北上)하나 그것의 위치(其位置)가 멀리 떨어져 있어(遠隔) 조선(朝鮮)은 중국(中國)고기압세력권에 있음으로 내일(明日) 조선(朝鮮)날씨는 대개 맑음과 흐림이 상반된다하였다. 여송(呂宋)을 필리핀이라 하였다. 당시 필리핀은 푸에르토리코, 여송, 버진아일랜드 그리고 소앤틸리스제도까지의 영역을 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고 그 후 이 지역들은 모두 일본령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진단된다. 미국이 일본동양계를 동아시아대륙의 열도로 보내고 난 후 동양역사질서를 잡았고 동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일본에게 양해를 구하는 행태를 취했다는 것들은 모두 이러한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된다. 그리고 포괄적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기존 카리브해에 있던 도서들을 묶어 동아시아대륙에 옮겨놓고 일본 소유로 할양한 것 등은 모두 이러한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천도(千島)라 함은 우선 온타리오 호(Lake Ontario)의 북쪽 끝에서 그 하류의 세인트 로렌스 강(Saint Lawrence River)에 걸쳐 1,864개의 군도(群島:archipelago of 1,864 islands)로 이루어진 사우전드 제도(Thousand Islands)를 말하는 것 같지만 일본세력이 북부까지 넓혔다고 볼 수 없어 플로리다주 남서부해안에 위치한 텐 사우전드 아일랜드(Ten thousand islands)가 아닌가 한다. 故日本又称“千岛之国” 옛날 일본을 칭하기를 천(千)개 섬(島)의 나라라 했다는 사실에서 일본을 현재 캄차카 반도 남단에 있는 쿠릴열도(Kurilskiye Ostrova)를 천도열도(千島列島)라 하거나 지시마열도라고 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일본은 최초 포르투갈이라고 볼 수 있고 이어 잉글랜드의 앨비언(Albion)시대가 이를 이었으며 명실공히 네덜란드인이라고 하는 미국인 스스로가 통치하기 시작한 시기를 20세기초라 할 때 포르투갈, 잉글랜드, 네덜란드 전체를 포괄적으로 보면 천도는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존재하는 텐 사우전드 아일랜드(Ten thousand islands)를 말하는 것일 수가 있다. 이러한 점도 허리케인의 진로가 증명한다. [2] 위 동아일보의 1926.09.16 날씨개황(槪况)을 보면 태풍은 석원도(石垣島)남방 100km 곳에 접근하여 738(粍:mm)를 나타내고 상당히 우세한 것으로 석원도(石垣島)방면은 폭풍우(暴風雨)로 변하였다는 사실과 일본해(日本海)와 9주(九州) 남동(南東)방향 해상에 작은 저기압이 있다고 알려주고 고기압(高氣壓)은 일본(日本)동(東)쪽방향 해상과 몽고(蒙古)방면 사이에 있어 761(粍:mm)를 나타낸다 하였고 만주와 조선(滿鮮)은 일반적으로 매우 맑으나 점점(稍) 냉기(冷氣)가 일어나고(催) 일본(日本)과 구주(九州)는 하늘이 맑게 갠(晴天)상태로 본주(本州) 방면은 대개 흐림(曇天)이라 하였다. 석원도 남방 방면 100km 까지 접근했다는 것은 태풍의 진위를 밝힐 수 있는 매우 명료한 이야기다. 허리케인은 버진제도(Virgin Islands)북부에서 더욱 강열하게 강화되고 있었고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Saffir–Simpson scale)열대저기압등급 카테고리4 에 해당하는 강도에 이르면서 9월 16일까지 계속 강화되었으며 강도는 241km/h(150mph)라는 풍속을 9월 16일 18:00(UTC)에 기록했고 이 강도로 터크스와 카이 코스 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부근으로 허리케인이 지나갔다고 되어 있는데 위 동아일보 보도와 맞춰보면 버진 아일랜드 북부에서 강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석원도 남방 100km에 있는 것과 같아 버진 아일랜드 가까이에 있는 푸에르토리코가 석원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3] 위 동아일보 1926.09.17 개황(槪况)을 보면 어제 석원도 남방에 있던 태풍(颱風)은 북동(北東)쪽으로 방향을 바꿔 오늘 아침(今朝)에는 석원(石垣)과 오키나와(冲繩) 중간해상에서 735(粍:mm) 내외를 나타내고 있는 까닭으로 유구(琉球)방면은 폭풍우(暴風雨)가 있고 석원도(石垣島)는 어제(昨日)부터 전신불통(電信不通)이라 했다. 만약 석원도가 푸에르토리코가 맞다면 오키나와 즉 유구는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미국이 카리브해 제국들을 침략한 이력을 보면 푸에르토리코를 1898년에 침략하고 미국소유로 들어간 것은1917년이며, 도미니카는 1870년에 구매하려고 시도했고 1916년~1924년까지 미군이 주둔했었고 재정까지 장악한 것은 1905년~1945년까지이다. 또한 아이티는 미군이 주둔한 것이 1915년~1934년까지이고 재정을 장악한 것도 1916년부터 1941년까지이다. 이것은 곧 일본이라 할 수 있는 개연성은 높아진다. 그리고 동아일보의 보도에서 동해도(東海道) 충합(冲合)에는 753(粍:mm)의 저기압(低氣壓)이 북동(北東)으로 이동하여 있고 고기압(高氣壓)은 오호츠크해(Sea of Okhotsk)에 762(粍:mm)의 것과 몽고(蒙古)방면에 760(粍:mm)의 것이 있다 하면서 큰 기후로는 만주와 조선(滿鮮)은 대개 대단히 맑고, 일본은 구주(九州)남단(南端)으로부터 관동(關東)지역인 치바의 보소반도(房總半島)까지 남안지방(南岸地方)은 비(雨)가 있고 기주반도(紀州半島)에는 100量, 100(粍:mm)에 달하였고 기타지방은 대개 흐림이라 하였다. 9월 17 일 오전과 오후의 고기압의 지도를 보면 동해도 충합은 쿠바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오호츠크해는 바로 멕시코만을 말하고 있으며 몽고 역시 글쓴이가 일찍이 휴스톤을 몽고성이라 했듯이 그 지역을 몽고지역이라 하였던 것이라 할 때 텍사스주가 그렇게 불리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 구주(九州)는 위 지도로 파악할 때 바하마와 터크스케이커스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본래 동해도(東海道)라는 지명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현재 동경(東京)으로부터 시즈오카(静岡)·나고야(名古屋)를 경유 쿄토(京都)·오사카(大阪)·고베(神戸)에 이르는 간선 도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아마도 에도시대때 쿄토(京都)에 이르는 주로 바다에 면한 15개 지방을 이름이라 한 것으로 유추한다면 일본이라 한 배경에 도시이름들이 동쪽 해안으로 몰려 이름한 것이 아닌가 한다. 태풍 예상(豫想)은 유구(琉球)방면의 태풍(颱風)은 북동(北東)으로 이동하여 일본(日本)에 점차 접근하는데 과연 일본(日本)을 직접 엄습할는지 안할는지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나 내일(明日) 조선해협(朝鮮海峽)방면은 태풍(颱風)의 영향으로 차차 악화되어 해상에는 다소 험악화할는지도 알 수 없겠으나 기타지방은 대개 맑을 듯하다고 인천관측소(仁川觀測所發表)가 발표하였다. 앞에서 유구는 오키나와로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황국이라 하였다. 일본은 이 보도만 보면 쿠바를 말하거나 플로리다까지를 포함한 것처럼 인식되는 것인데 일본은 당시 상당한 지역을 점유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두 개의 미국 중에 스페인을 꺾은 미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대목에서 조선해협(朝鮮海峽)방면은 태풍(颱風)의 영향으로 차차 악화되어 해상에는 다소 험악화할는지도 알 수 없다 하였는데 한반도 지형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오키나와에서 오는 태풍이라면 제주도를 걱정해야 맞다. 그러나 난데없이 조선해협(朝鮮海峽)을 운운하는 것은 여기서도 동아시아지역의 기후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며 조선해협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허리케인 진로를 생각하면 지금의 플로리다해협(Straits of Florida)이나 아니면 유카탄해협(Yucatán Channel)둘 중에 하나이다. [4] 위 동아일보 1926.09.18 개황(槪况)을 보면 어제 유구(琉球)방면에 있던 우세(優勢)한 태풍(颱風)은 북경(北京)으로 이동(移動)하여 지금 아침(今朝) 구주(九州) 남동(南東)방향 해상(海上)에서 730(粍:mm)내외를 나타낸다고 하였고 고기압(高氣壓)은 몽고(蒙古) 방면에서 766(粍:mm) 고도(高度)를 알리고 만주(滿洲)는 대단히 맑은 것에 반해 조선(朝鮮)은 황해(黃海) 측(側)은 맑으나 동해안지방(東海岸地方)은 곳곳에 뇌우(雷雨)가 발생(發生)하여 해협(海峽)방면은 한층 더 악화(惡化)하였다고 하였다. 일본(日本)은 일반적으로 비(雨)가 내리고 남해안지방(南海岸地方)에는 바람과 비(風雨)가 있다. 동아일보의 보도를 그대로 동아시아대륙에 적용해보자. 이미 태풍은 일본 유구방면에 17일 오후까지 있던 것이 구주(九州) 남동(南東)방향에서 일본 남해안의 기주반도로 들어가는 상황인데 갑자기 북경(北京)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동아일보가 착각하였던가 인쇄가 잘못된 것인지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를 동아시아대륙 지형사정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동아시아대륙에 북경이 어디인가. 일본열도 기주반도(紀州半島)라는 것은 열도로는 정 남해안이다. 그런데 동경도 아니고 북경으로 이동했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일까? 참으로 난해하다. 허리케인을 적용한다 하여도 북경방면이라면 동해안을 이야기 한다고 보았을 때 아마도 필라델피아나 메사추세츠, 또는 뉴욕주 정도로 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을 고기압지도로 보았을 때 자꾸 동부지역을 가르키고 있으며 실제로 마이애미 허리케인이 발생하였을 때 북아메리카대륙 권내에 고기압등고선을 보면 분명 동부지역에 거대하게 퍼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동부지역을 1926년 당시 동아일보가 중국이라고 보도했던 곳이다. 이것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하게 하는 것이다. 1926년 9월 18일에 북아메리카대륙의 고기압 지도를 보면 고기압(高氣壓)은 몽고(蒙古)방면에서 766(粍:mm) 고도(高度)를 알리고 있다 하였는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 남해안을 강하게 포지하여 허리케인의 육지상륙을 막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허리케인의 명이 다했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가 있다. 대신 만주(滿洲)와 조선(朝鮮) 황해(黃海)쪽은 맑으나 동해안지방(東海岸地方)은 곳곳에 뇌우(雷雨)가 발생(發生)하여 조선해협(海峽)방면은 한층 더 악화(惡化)하였다고 하였는데 위 지도를 보면 훨씬 이해가 빠르다. 즉 북아메리카대륙 동해안은 뇌우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추후 기상을 예상을 동아일보의 보도는 구주남동충(九州南東冲)의 태풍(颱風)은 북동(北東)으로 이동(移動)하기 때문에 일본(日本)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기후(天候)가 험악하게 변화고 있는데 그중에도 근기지방(近畿地方) 동해도(東海道)가 더욱 심(甚)하다. 에도시대때 근기지방이라 함은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경제와 문화 중심지다. 위 고기압의 지도를 보면 당시 일본이 쿠바라 할 때 아바나 지역이 허리케인 권내에 들어가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반면 조선(朝鮮)은 남조선(南鮮) 연안지방(沿岸地方)이 다소악화의 모양이 있을 뿐이라 했다. 내일(明日)은 몽고(蒙古)방면의 고기압(高氣壓)때문에 대개 맑을(晴天)것이나 차가운공기(冷氣)가 나타날 듯하다고 17일 인천관측소(仁川觀測所)가 발표했다. 사실상 동아일보가 보도하는 것은 거의 하루가 늦은 것으로 파악된다. 허리케인은 저녁(9월 17일)바람이 강해지면서 기압계가 계속 떨어지고 파도가 솟구치기 시작했으며 강풍(Gale-force winds)은 해안을 강타했던으로 나타난다, 9월 17일 남부 바하마(Bahamas) 나소(Nassau)근처를 지나가면서 엄청난 힘을 유지했다고 하였으며 그리고 9월 18일에 마이애미로 상륙한 것으로 나타난다. 9월 18일 맹그로브 산호초(Mangrove Cay)지역의 안드로스 섬(Andros Island)에 2번째로 상륙했고 그 후 허리케인은 안드로스섬을 건너 플로리다로 가는 도중 멕시코 만류(灣流), 걸프스트림(Gulf Stream)을 통과했다. 이 경로에 의해 플로리다 남부 근처 페리네(Perrine)해안으로 허리케인이 들이 닥쳤으며 9월 18일 12시(UTC) 다운타운 마이애미(Downtown Miami)남쪽으로 24km(15 mile)떨어진 곳에서 최소 233km/h(145 mph)의 풍속과 27.46 inHg(930 mb)의 기압을 추정할 수 있었다. 새벽 2시, 폭 96.5km(60 miles wide)넓이의 허리케인이 마이애미 해안을 강타했다. 여전히 위협하고 있는 허리케인은 북서쪽에 있는 남부의 대습지대(大濕地帶) 에버글레이즈 호수(Everglades)를 가로질러 오케 코비 호수(Lake Okeechobee)까지 휩쓸어버렸다. 당시 허리케인의 크기가 매우 커 가장 바깥쪽의 등압선까지 횡단 길이가 604km(375 miles)가량이나 떨어졌고 허리케인급(級)의 바람은 플로리다 위쪽부터 키(Keys)에서 가까운 세인트루시에 카운티(St Lucie County)까지 보고 되었다. 18일 20시 30분(UTC)경 허리케인의 중심부는 멕시코만(Gulf of Mexico)의 푼타 라사(Punta Rassa)를 통과했고 그때까지 중심부의 압력은 28.05 inHg(950 mb)로 상승했지만 태풍의 눈 주위의 적란운(積亂雲)의 풍속은 169km/h(105 mph)로 감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5] 위 동아일보 1926.09.19.개황(槪况)은 일단 하루전인 18일의 태풍상황이다. 태풍(颱風)은 어제(昨日) 일본4국충(日本四國冲)을 지나 기주반도(紀州半島)에 상륙(上陸)하여 일본중부(日本中部)를 통과(通過)하야 금일 아침(今朝) 북서부 아키타(秋田:Akita) 부근에 있는데 세력(勢力)은 748(粍:mm)로 약해(衰)졌다 하였다. 18일 20시 30분(UTC)경 허리케인의 중심부는 멕시코만(Gulf of Mexico)의 포트 마이어스(Fort Myers)와 푼타 라사(Punta Rassa)를 통과했고 그때까지 중심부의 압력은 28.05 inHg(950 mb)로 상승했지만 태풍의 눈 주위의 적란운(積亂雲)의 풍속은 169km/h(105 mph)로 감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사실과 비교가 가능하다. 일본 4국충(日本四國冲)이라 하는 것은 바로 터크스케이커스제도와 바하마제도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고기압(高氣壓)은 중국(中國) 내부의 땅(奧地)에서 766(粍:mm)의것과 오호츠크해(海)에 764(粍:mm)의 것이 있다고 했으며 때문에 만주(滿洲)는 대단히 맑으며(好晴) 조선(朝鮮), 일본(日本) 해안지방海岸地方)은 흐림(曇)이며 남조선(南鮮)으로부터 경인지방(京仁地方)은 대단히 맑다(好晴)라고 되어 있다. 일본(日本)은 동북지방(東北地方)이 험악(險惡)할뿐 기타(其他)는 대개 회복(恢復)되었다. 태풍이 약해진 상태에서 예상(豫想)되는 기후상황은 북서부 아키타(秋田:Akita)부근의 태풍(颱風)은 세력(勢力)이 쇠퇴(衰退)하여 하등의 염려할바가 없다 했고 내일(明日) 9월 20일의 조선날씨는 대단히 흐릴(陰曇)듯하다고 18일 인천관측소(仁川觀測所)가 발표했다. 반면 허리케인은 18일 20시 30분(UTC)경에서 6시간 후 플로리다 주 서해안 푼타 라사 (Punta Rassa)에서 멕시코만(灣)으로 들어간 후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9월 20일 멕시코 만(灣)의 따뜻한 수온은 열대성저기압의 3등급(Category 3 hurricane)에 상응하는 풍속 201km/h(125 mph)의 풍우로 두 번째 강열한 절정(secondary peak)을 맞이했다고 기록되었으며 이 허리케인은 멕시코 만을 통과하여 더 북서(北西)쪽으로 진행했지만 플로리다주(州)해안의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지역을 평행하게 진행하면서 서(西)쪽으로 서(西)쪽으로 서서히 휘어져 갔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크게 약화된 허리케인은 앨라배마(Alabama)주 페르디도 해변(Perdido beach)근처로 두 번째 육지로 접어들었고 그 날 오후 21시30분(UTC)에는 풍속이 185km/h(115 mph)를 기록했다고 알려지며 육지상륙 후 허리케인은 앨라배마의 평행사도 장벽 섬(barrier islands)에서 빠르게 약해지면서 구불구불 움직였고 결국 열대성 폭풍으로 미시시피주(州) 걸프 포트(Gulfport)근처에서 9월 21일에 마지막으로 해안으로 이동하면서 다음날 루이지애나에서 소멸하기 전에 약한 열대저기압(tropical depression)으로 퇴화하고 말았다고 최종 정리되어 있다. 마무리 이러한 글을 마무리 하는 심정은 솔직히 상당히 벅차다. 언제나 없는 시간을 쪼개어 새로운 사실을 찾아 세계삼한역사연구를 열성껏 하는 입장이지만 글쓴이 스스로가 이와같은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의무적으로 또는 누가 시켜 이런 글을 쓰라고 했다면 아마도 처음부터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글쓴이가 이런 연구를 하기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또한 생각 해보면 이러한 새로운 사실을 혼자만 알기에 벅찬 것이고 본 블로그를 한사코 찾아주시는 열정적인 애독자님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했던 요인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어쨌던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쓰는 글이라서 참으로 힘든 작업이었던 것은 분명하며 글이 자꾸 늦어지는 부분에서 큰 이해가 있으시길 바랄 뿐이다. 이참에 허리케인을 좀 더 파고들어 명확한 답을 구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며 이 번 글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준비 해 둔 자료를 바탕으로 더 많은 허리케인에 대한 글을 쓰고 여러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가까운 시간에 이제 동부편을 올리고자 한다. 이 글을 완성한 시간이 무척 길었던 것은 기상학적인 지식이 풍부하지 못함으로 인해 수많은 시간을 자료 찾기에 급급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공부도 많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물학적 판단은 어느정도 이력이 나 있지만 기후학적 문제에서는 좀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길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글을 발표하면 그것이 싫으나 좋으나 글쓴이의 주장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대륙에서 발생하는 태풍과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허리케인을 비교해가며 진로방향과 그것에 따른 저기압과 고기압의 위치를 밝혀야 했고 낯설 수밖에 없는 지명에 행적을 추적하고 지형을 관찰하며 역사사실과 다른 점을 일일이 검토하고 본 블로그에서 글쓴이가 이미 밝혔던 것들을 근거로 혹은 바탕으로해서 최종 마무리 지울 수 있었다는 모든 작업에서 힘든 만큼 보람은 지대했다고 말하고 싶다. 나름대로의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공치사하긴 싫지만 블로그가 그토록 확신에 찬 지난 글들이 죄다 사실로 확인되는 기쁨도 맛볼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당시 북아메리카대륙 고기압을 추적하면서 멕시코만이 한 때 오호츠크해로 불리었고 동아일보조차 지명을 그렇게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경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도 이미 블로그에서 밝혔던 사실이 아니라면 아직도 헤메고 있을지도 모르는 복잡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본 블로 글 "사할린(Sakhalin)은 섬(島)이 아니다.[2014.03.25 11:17]http://blog.daum.net/han0114/17050698 "에서 먼저 북아메리카대륙 사우스다코타주(South Dakota)의 블랙힐스(Black Hills)가 사할린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아무르(Amur river)는 미주리강(Missouri rivers)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이라는 사실과 그와 동시에 미시시피강 하구 뉴올린어즈(New Orleans)가 바로 아무르강(Amur river) 하구(河口)임을 알 수 있었으며 오호츠크해(Okhotsk sea)도 바로 미시시피강을 근원으로 하는 오호타(Okhota)가 퉁구스(Tungus)말로 강(river)이라는 뜻에 이어 "거대한 강"을 말하고 있는 것은 미시시피강도 거대한 강임을 알아 동일하다고 판단하여 오호츠크해는 아무르강 즉 미시시피강이 흘러드는 곳 멕시코만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내렸으며 더하여 아무르 하구의 니콜라옙스크항(Nikolayevsk)을 외만주(外滿洲)라 했던 이유에서 뉴올리언즈가 외만주로 비쳐지는 것은 명확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외(外) 만주라는 것은 내(內) 만주가 있었을 터이고 북아메리카대륙 멕시코만으로 둘어쌓인 곳을 말하는 것임도 알 수가 있다. 본 글에서도 잠시 돌이켜 보면 이미 태풍은 일본 유구방면에 17일 오후까지 있던 것이 구주(九州) 남동(南東)방향에서 일본 남해안의 기주반도로 들어가는 상황을 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북경(北京)으로 이동했다고 한 동아일보 보도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했다가 위 지난 글쓴이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 결말을 지울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보스톤을 찾았던 이야기도 1872년 7월에 미군 통신단(Signal Corps)에 의해 설립된 미국기상학저널인 기상월보[Monthly Weather Review]의 자료에 FIG. 1.-The Chemulpo Meteorological Observatory.의 설명을 붙인 사진 한장은 우리 근대역사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매우 충격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월보에서 한반도에 존재하던 인천관측소라는 데서 이상함이 발동했다. 솔직히 무엇때문에 서해안을 끼고 있는 인천에 설치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태풍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라면 먼저 남해 어디쯤에 설치해야 하였을 것인데 인천에 이 관측소가 설치되어야 했던 이유가 불분명한데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진은 바로 1905년의 제물포 기상관측소(The Chemulpo Meteorological Observatory)라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미국 동부에 유일하다고 믿어지는 메사추세츠 밀톤(Milton, Massachusetts)카운티 부루힐에 있는 기상관측소 역시 이와 같은 동일선상에 놓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서 고민을 하게 만든 것이다. 모두다 공통적으로 태풍을 관찰하기 위함이고 빈번하게 발생되었던 곳임을 알 수가 있다. 1884년에 설치했다고 하는 미국의 부루힐기상관측소를 그대로 두지 않고 왜 1908년에 철거하고 새롭게 건축을 다시 했을까? 건물의 이력을 보면 최종 원탑은 콘크리트로보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도 철근을 사용한 것이 최초하고 하였다. 무엇인가 부수고 새로 건축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1908년이면 사진 한장이 말해주는 1905년보다 늦은 시기가 분명했다. 사진 한장에 비춰지는 제물포관측소, 인천관측소는 소위 위 허리케인 글에서 동아일보에 기사 끝을 마무리 하던 인천관측소라는 사실은 동아일보가 남긴 가치로 허리케인 보도만큼 큰 것이다. 그리고 어떤 언덕인지 알 수 명확하다고 할 수 없지만 언덕위에 당시 기상관측소라 믿기지 않는 상당히 값어치가 있는 고고한 건물에서 매우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도 있다. 알고 보니 이 건물은 원석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을 1908년 철거하고 새롭게 네오고딕 건축(Neo-Gothic)형식으로 지어졌다 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지만 부루힐 기상관측소(Blue Hill Meteorological Observatory)가 인천관측소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시 조선의 기득권층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었다고 보이고, 메사추세츠, 뉴욕주 등지에 서양인들이 많아 밀물처럼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닌가 하며 제물포가 인상 받듯이 주요 무역항으로써 또는 옛 조선의 거대한 항구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때문에 미국 동부에서의 모든 활동들은 이러한 조선 기득권층들에 의해 촉발되거나 유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인천 관측소 역시 이런 정치적인 환경과 허리케인이라는 무서운 자연재해를 방지하기 위해 존재했다고 보았을 때 이러한 추측 범주는 상식선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또한 이 글의 서두를 돌이켜 보면 동아일보가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받아 한글로 번역하는 수준에서 보도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한반도가 아닌 곳에서 발행했을 것이 틀림없고 뉴욕타임스가 비행기로 보내줄 수 있는 지역이라 한정하였던 곳이 딱 두군데라 하였는데 한 곳은 1910년에 귀족들이 있었을 법한 필라델피아로 다른 한 곳은 1920년에 시카고로 항공기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1920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동아일보는 시기적으로 시카고에 있었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시카고는 당시의 경성이었을까?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을 살펴보았던 과정을 설명하면 미국 자체적인 관리의 힘이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자연재해의 타격으로 미국이 힘을 잠시 잃었다는 생각에 미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경제와 미국경제는 하나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미국은 1898년에 미서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을 패배시키고 카리브해의 도서들을 전부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미국이 현재 미국이라고 단언할 수가 없지만 일본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은 위 허리케인을 추적하며서 나타나는 지명들이 모두 일본과 연관되어 있다. 스페인의 지배지역을 미국이 스페인을 쫓아내고 차지했으나 1926년이니 거의 30년이 되도록 일본영역이었다는 것은 여러가지 역사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자료를 보며 미국은 당시 러일전쟁에서 군사적으로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미국의 은행가들은 러시아인들과 싸우기 위해 일본에게 전쟁자금을 대출했다고 하는 자료가 있다. 이것은 펙트이고 미국정치인들이 주창한 수동척공격형태이다. 미국에게 자본은 거대했을 것이지만 이런 대자연의 재해를 제어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1926년까지 북아메리카대륙에서도 허리케인을 추적할 수 있는 충분한 시설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자본가가 대중을 위해 돈을 쓰지 않는 이치이다. 그리고 인천관측소가 발표한 허리케인 상황들이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것에서 사실이라면 보도 속도가 당시 미국이란 체제에 비해 상당히 빨랐다고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모든 당시 데이터는 워싱턴 D.C 에서 관리한 것 같으며 이곳에 미국기상청(United States Weather Bureau)이 존재했을 것이고 특히 9월 14일까지 허리케인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카리브해에 특별한 기상관측소가 없었다는 사실이 나타나는 것과 함께 볼 때 동아일보가 보도하는 수준과 거의 비슷한 것 같다는 결론이다. 지금은 국립허리케인센터(The National Hurricane Centers HURricane DATabases :HURDAT)라고 하는데 이곳의 데이터베이스가 1851년부터 1949년까지 대서양(Atlantic Ocean)과 동태평양(Eastern Pacific Ocean)에서 발생한 열대성저기압에 대한 세부정보를 담고 있는 특별한 두 개의 별도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다. 아마도 1945년까지도 이것들은 완전하다 할 수 없었던 증거이다. 그러나 북아메리카대륙에 조선세력이 있었다면 1926년 동아일보가 보도하는 수준은 매우 수준이 높았다고 하지 앟을 수 없다. 본 블로그 글 "루스벨트가와의 역사적 악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8 "에서 밝혔지만 1920년에 비로소 뉴욕에서 30만(萬)명의 상비군(常備軍:standing army)을 신설하는 등의 경찰활동들을 실시했다고 볼 때 같은 시기에 일제에 의해 동아일보가 창간하게 된 배경은 오늘날 미국이라고 단정 할 수 없지만 엉클샘(Uncle Sam)을 상징하고 경제를 주도하는 지배체제가 조선을 지배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1933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가 추진한 정책 또한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한 것이 틀림없는데 당시 기록으로 볼 수 있는 조선이 처한 자연환경과 재난환경에서 이 미시시피강과 연결되고 일치하고 있다는 점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었다. 서두에도 언급하였지만 과연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목적이 무엇일까? 정말로 평화조약인가. 아니면 미국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불안정한 영토적인 문제를 확실하게 잠금장치하려는 것은 아닐까?열도일본을 내세우고 편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이와같은 일방적인 행위를 하는 미국을 제어할 만한 국가가 없다는 점도 있다. 세계질서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본래의 미국이 잠금장치를 확실하게 하려는 영토의 본래 주인은 역사적으로 사라지고 없는 상황이니 크게 반론을 제기하거나 부정할 상대도 솔직히 없다. 그럼에도 불안을 느끼는 모양이다.그러나 만약에 미국이 힘을 잃게 된다 할 때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미국에게도 위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은 군국주의를 내세우며 전쟁을 할 수 있는 법안을 곧 의회에서 처리될 예정에 있다. 일본은 미국에게 아주 편한 상대로 인식되어 이러한 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동맹관계라고 하여 어부지리를 얻어 부강해지고 군사적으로 강력해질 때 언제든지 미국이 힘이 약해지던가 미국이 자기 만족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면 일본은 이 평화조약을 강제성이 있었다 하여 모든 것을 거부하고 제자리로 가지고 가려고 애를 쓸 것이 뻔하다. 그러면 결국 미국이 의도한 것과 반대로 보존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다.남의 나라 걱정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미국이 붕괴된다든지 아니면 각 주가 분리 독립요구가 거세져 연방국이 힘을 잃을 때 위 평화조약은 오히려 미국을 옥죄는 것으로 나타나 일본에게 상당히 유리한 것으로 작용될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어중이 떠중이로 이용물에 불과하던 열도일본은 아마도 태평양 모든 제도를 가지려 할 것이틀림없다.그리고 주제넘게 대동아공영권을 다시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국제조약이라는 것은 강자에게 약한 편이다.물론 이와같은 여지를 미국이 낳았다.잘못된 역사와 비뚤어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은 언제든지 이를 현실화하려고 애를 쓸 수 있기 때문에 미래는 미국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위 마이애미 허리케인의 글쓴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카리브해에 있는 제도가 필리핀과 연결되고 여송과 연결되며 일본이 소유하고 있는 팔중산제도와 석원도, 그리고 오키나와, 유구제도, 또한 러시아와 영토문제로 갈등하고 있는 사할린과 쿠릴열도까지 이 지명들은 본래의 지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따진다면 만주도 그렇고 오호츠크해도 그렇게 풀 수밖에 없다.제정러시아가 관활할 때 뉴올리온즈는 니콜라옙스크항(Nikolayevsk)이라 했음도 알 수가 있다.천도를 쿠릴열도라 하는 것도 엄밀히 따진다면 오호츠크해에 있는 열도 또는 천도를 말함인데 지금의 멕시코만에서 플로리다주 남서해안에 붙어 있는 텐 사우전드 아일랜드(Ten thousand islands)지명이라는 사실은 이 또한 영토의 소유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다분히 많다.허리케인으로 알아본 지명들을 보면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가 소엔틸리스제도, 석원도(石垣島)는 푸에르토리코로 밝혀지나 버진아일랜드가 포함될 수 있으며 필리핀이라 함도 푸에르토리코와 버진아일랜드 그리고 더하여 소엔틸리스제도까지를 대비해 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식민지환경을 감안해야 하고 오키나와(冲繩)를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를 말하는 것과 유구(琉球)역시 이와같은 범주에 있으며 터크스와 카이 코스 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까지를 확대하고 볼 수 있고 구주(九州)는 바하마와 터크스와 카이코스군도 그리고 쿠바를 말한 것이 아닌가 하며 동해도(東海道)는 쿠바본토 동해쪽으로 접하는 도로를 말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일본4국충(日本四國冲)이라 함은 도미니카, 아이티, 쿠바, 바하마를 대비케 한다. 이미 2015년에 본 블로그 글 "1차 려몽 일본원정으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에서 쿠바가 일본이라는 것을 밝혔지만 미국이 1905년 비밀각서라고 알려진 태프트-가쓰라 조약(Taft-Katsura Agreement:1905)에서 일본에게 필리핀과 교환 조건 운운하는 것도 다 이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필리핀과 여송이 같다 할 수 있겠지만 여송은 버진아일랜드라 생각할 수 있다.문제는 조선해협이다.플로리다해협(Straits of Florida)이나 아니면 유카탄해협(Yucatán Channel)으로 보았지만 좀 더 깊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문제이다.그리고 카리브해라고 알려진 중앙아메리카대륙과 접한 바다를 일본해라 했던 것 같다. 사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영토(TERRITORY)항 제2조(Article 2)를 보면 많은 지명들이 본래 지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미국은 제주도(Quelpart), 거문도(Port Hamilton) 및 울릉도(Dagelet)를 일본에게 모든 권리와 소유권, 청구권을 포기해라고 주문한다. 타이완(Formosa)과 펑후제도(澎湖諸島:Penghu or Pescadores Islands)와 쿠릴 열도(千島列島Kurile Islands), 사할린(Sakhalin)를 마찬가지로 주문한다. 남극(南極) 또한 이와같고 남중해에 있는 남사군도(南沙群島:Spratly Islands)와 서사군도(西沙群島:Paracel Islands)까지 거론하였으며 그리고 일본영토로 화한 남서제도(南西諸島:Nansei Shoto:류쿠제도(Ryukyu Islands)), 大東諸島(Daito Islands), 남방제도(南方諸島:Nanpō Islands):(보닌 제도(Bonin Islands), 로사리오제도(Rosario Island) 및 화산열도(Volcano Islands火山列島)), 그리고 더글라스 리프(Parece Vela:Douglas Reef)와 남조도(南鳥島:Marcus Island)까지를 일본이 스스로 소유권과 청구권을 포기하게 하거나 미국의 신탁통치에 동의해야 하였고 긍정적인 조치가 있을 때까지 미국이 권리를 갖게된다는 등으로 나와 있다. 문제는 미국이 이 소유권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어쨌거나 명확한 것은 이와 같은 영토들은 본 블로그가 밝힌 다수의 영토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으로써 실제 주인은 미국도, 일본도 아니라는 주장을 전제해야 한다. 그만큼 세계삼한역사연구의 기대는 크다.불안정한 영토문제를 미국은 1945년 종전 후 6년 동안 공을 들였고 1951년부터 이 잠금장치를 서둘러 했다고 보이는 것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며 그외 다수의 잠금장치이다.남의 영토를 끝까지 지키려는 이러한 무리한 수단들은 언제가는 오히려 역이 되어 화살이 그들에게 달려들 것임을 끝으로 힘주어 말하고 싶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보스톤" rel="tag" target="_blank">보스톤</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시카고" rel="tag" target="_blank">시카고</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인천" rel="tag" target="_blank">인천</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허리케인" rel="tag" target="_blank">허리케인</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조선해협" rel="tag" target="_blank">조선해협</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1926년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 rel="tag" target="_blank">1926년 그레이트 마이애미 허리케인</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제물로chemulpo" rel="tag" target="_blank">제물로chemulpo</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니콜라옙스크항" rel="tag" target="_blank">니콜라옙스크항</a>,&nb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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