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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평(天坪)의 큰사막은 그레이트베이슨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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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평(天坪)의 큰사막은 그레이트베이슨사막글쓴이:한부울1)백산은 일좌산(一座山)이 아닌 지척(地脊)의 산맥군이다.2)천리천평(千里天坪)과 스네이크 강 평원(Snake River Plain)3)백두산과 마자마산(Mountain Mazama) 세기의 화산폭발4)미졸라의 대홍수(Missoula Floods)와 흑수백산과 신시(神市)1)백두산은 일좌산(一座山)이 아닌 지척(地脊)의 산맥군이다.정조 21년 정사(1797)9월 18일(갑신) 헌납 정지원(丁志元)이 상소하여 북도 군오의 퇴폐함과 그 개선책을 아뢰다 而北路中六鎭與三、甲, 凡限衣帶一水, 最當要衝之初地헌납 정지원(丁志元)이 상소하기를, 북도 중에서도 육진(六鎭)과 삼수(三水)ㆍ갑산(甲山)은 가는 강줄기 하나만을 경계로 삼고 있어 가장 요충의 첫 지역을 당하고 있습니다. 臣聞白山之下, 有曰天坪, 卽古所謂大漠也。 東連甲山之虛項, 北接茂山之長坡, 南通寶多之緩項, 緩項嶺下, 乃爲甘坪, 甘坪之東南, 卽排星浦。 而長坡、茂山之空地也, 緩項、甘坪, 乃吉州、甲山間空地, 排星浦, 乃北靑、咸興間空地也。신은 듣건대, 백산(白山) 아래에 천평(天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곧 옛날에 이른바 대막(大漠:사막지역)이라는 곳이라 합니다. 동쪽으로는 갑산(甲山)의 허항(虛項)과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무산(茂山)의 장파(長坡)와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보다(寶多)의 완항(緩項)과 통하는데, 완항령(緩項嶺) 아래는 곧 감평(甘坪)이 되고 감평의 동남쪽은 곧 배성포(排星浦)입니다. 그런데 장파와 무산은 공지(空地)이고 완항과 감평은 곧 길주(吉州)ㆍ갑산(甲山) 사이의 공지이고 배성포(排星浦)는 곧 북청(北靑)ㆍ함흥(咸興) 사이의 공지입니다.먼저 위 조선왕조실록 정조 21년 정사(1797)9월 18일 기사에 나타나는 놀라운 사실을 먼저 이야기해보자.臣聞白山之下, 有曰天坪, 卽古所謂大漠也。백산(白山) 바로 아래 천평(天坪)은 옛 대막(大漠)의 지역었다고 당시 정5품계의 헌납관직 정지원(丁志元)이 감히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 이와같은 글을 올렸다.백산(白山)이라고 하면 지금 우리는 한반도의 백두산(白頭山)으로 알고 있다.그런데 위 게시한 구글 위성사진을 보면 도대체 백두산 아래(白山之下) 천평(天坪)이란 지명과 함께 대막 즉 큰 사막(大沙漠), 크레이트 데저트(Great Desert)라는 놀라운 지형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그것도 백산아래하고 하였다.이 사람이 헌납이란 관직에 있으면서 감히 임금을 농락하고 우롱하려는 것인가.그랬다간 아마도 죽음을 면치못했으리라.그것도 그냥 사막이 아니라 대막(大漠) '거대한 사막'이라고 하였다.대막이라고 하면 영어로 "Great" 가 꼭 붙는 경우다.일반적으로 연평균 강수량이 250mm 이하인 지역을 사막이라 정의하며 식물이 살기에는 매우 열악하고, 드물기는 하지만 식물이 전혀 살 수 없는 곳도 있다. 세계거대한 사막 10위 권을 보면 1.사하라 사막, 2.아라비아 사막, 3.고비 사막, 4.칼라하리 사막, 5.파타고니아 사막, 6.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7.시리아 사막, 8.그레이트베이슨 사막, 9.치와와 사막, 10.그레이트샌디 사막이다.이중에서 백산 즉 백두산처럼 기후가한랭지가 되어야 하는 조건의 사막을 찾아보면 알타이산맥(Altai Mountains)아래 면적 1,295,000km²의 고비사막(Gobi Desert)과 면적이 760,000km²의 남아메리카대륙 안데스산맥(Andes山脈)를 경계로 하는 파타고니아 지역에 펼쳐져 있는 파타고니아사막(Patagonian Desert), 마지막으로 492,000km² 의 네바다 주(Nevada), 유타 주(Utah)서부와 캘리포니아(California)동부, 아이다호(Idaho)주까지 걸쳐 있는 그레이트베이슨사막(Great Basin Desert)이다.위 3개의 사막 중에서도 백산아래 평원 즉 스네이크강평원(Snake river plain)이 있는 곳은 바로 그레이트베이슨사막(Great Basin Desert)이다.첫째 백산(白山)이라고 하면 분명 눈이 내려 된 빙하가 녹지 않는 상태에서 산 봉우리가 사시사철 흰색으로 보여 그것을 보던 사람들이 백산(白山)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데 알타이산맥(Altai Mountains)에서 가장 높은 3957m의 이히드버그드 산(Ikh Bogd:Tergun Bogd) 뿐만아니라 그 주위의 높은 산 전체가 백산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메마른 색상이다.파타고니아사막(Patagonian Desert)은 안데스산맥을 경계로 하여 동족으로 길어 뻗어 있그 그 위쪽으로 머리가 흰색으로 보이는 산이 없기 때문에 백산(白山) 아래 평지라고 할 수 없는 지형이다.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시에라네바다산맥(Sierra Nevada Mountains)동쪽에 위치한 그레이트베이슨사막(Great Basin Desert)의 북쪽 평원 스네이크 강 평원(Snake River Plain)이며 이것을 천평(天坪)이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 사막은 덥고 건조한 여름과 눈이 내리는 겨울이 있는 온대 사막이다. 천평(天坪)이라 하는 것은 하늘 가까이에 있는 고도가 높은 지역으로 초원같이 평야같은 평원이다.아이다호주(Idaho)의 스네이크 강 평원(Snake River Plain)을 보면 동쪽 끝의 고도가 1500m 가 넘고 서쪽 끝의 고도는 700m가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위 구글위성 지척거리 398.12 km 인 것처럼 1,000리(里)가 바로 천리천평(千里天坪)이라 하여 길이가 천리가 넘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하늘처럼 높은 곳에 있는 광활한 땅이라 하여 천리천평(千里天坪)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환웅이 백두산에 내려오시고 처음 터전을 잡았던 신시(神市)라 전한다.그런데 일대가 한반도 백두산 지금의 천리천평이라 하는 곳의 주의 반경이 30㎞인데 80 리(里)도 되지 않는다.이것을 이름만 천리천평이라고 하고 있다.백과사전을 보면 백두산의 이름은 먼 옛날부터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고 문헌에 의한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으로 산해경(山海經)의대황북경(大荒北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 하였고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불함’에 대하여 최남선(崔南善)은 ‘冠韜’의 역음으로 보고 그 뜻을 천주(天主)인 신명(神明)으로 해석했다하고 또한 중국에서는 몽고족의 ‘불이간(不爾干)’, 곧 신무(神巫)의 뜻으로 보아 백두산에 신(神)이 있다는 공통점을 말하고 있다.한대(漢代)에는 백두산을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하나의 산(山)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고 남북조의 위(魏)시대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하였고 또는 ‘도태산(徒太山)·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고 하는 것도 도(徒)는 모여서 뭉친 한 무리, 같은 뜻을 가지고 모인 한패, 동류(同類), 따르다 종(從)과 같고 태(太)도 크다와 심하다는 뜻이 있어 모이는 것이나 무리, 패가 심할 정도로 많다 또는 크다라고 풀이 할 수 있다.즉 이것은 절대 한반도 지형처럼 하나의 산(山)이 아니라 무리, 한패, 동류(同類)라는 모여있는 뜻이 있어 지척(地脊)이 있는 등골뼈가 있는 두두룩하게 줄진 곳, 척추가 있는 산맥(山脉)으로 보면 된다.북사(北史)에 “말갈국 남쪽에 종태산(從太山)라 한 것이나 도태산(徒太山)이 같고 중국말로 태황(太皇)이라 하며, 세상사람들은 이 산을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산상에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용변을 본 뒤 그릇에 담아갔고 산에는 곰·범·이리가 있는데 모두 사람을 해하지 않고, 사람 역시 감히 죽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하(夏), 은(殷), 주(周), 진(秦)에 이르기까지는 불함산(不咸山)으로 불렀으며, 당나라때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부르다 금이 많이 나는 땅에 세운 금나라때부터 지금의 장백산으로 굳어졌다 하였는데 이 장백산(長白山)도 긴 거리의 백산이 모여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에서 청조 건륭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는 옛 천산은 동진경(山海經)에서 삼위산(三危山) 서쪽 삼백 오십 리에 천산이 있고 한서(漢書)서역전에 서역에 남북으로 걸쳐 있는 큰 산(南北有大山)이라 하였으며 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金史高麗傳] 黑水靺鞨。居古肅愼地。有山曰 白山。蓋長白山。金國之所起焉。"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의 지역에 산다. 그곳에는 산이 있는데, 백산이라고 한다 하였으며 대개 ‘장백산(長白山)은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라고 정리된다.금나라는 금(金:Gold)이 많이 산출되던 곳이다.그곳은 물론 알타이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본 블로그 글 "알타이(altai)가 어딘가?-용연향(龍涎香, ambergris)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3 "에서 이미 다 밝혔던 바다.백산과 장백산은 어떻게 다를까? 백산은 말 그대로 사시사철 눈이 덮혀 있는 산을 말하는 것이며 장백산은 이러한 산들이 무리가 되어 길게 늘어서 있는 산맥군을 길 장(長)자를 써 장백산이라고 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때문에 동아시아대륙에서는 이것을 혼용하여 부르지만 이 지명은 엄연히 달라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있다.2) 천리천평(千里天坪)과 스네이크 강 평원(Snake River Plain)또 2,000년 전 중국 산해경(山海經:BC 6세기)에서는 백두산을 ‘사막 가운데에 있는 불함산(흰 산)’이라고 기록하였다고 한다.사막내에 있다는 불함산은 어떤 산일까?놀랍게도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시에라네바다산맥(Sierra Nevada Mountains)동쪽에 위치한 그레이트베이슨사막(Great Basin Desert)내 동남쪽 끝단에 3,982m에 달하는 휠러 봉(Wheeler Peak)이 있고 주변의 사막지대에서 급격히 솟아올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사슬을 이루듯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스네이크 산맥의 남쪽 부분 대부분이 공원에 속해 있는데 특히 이 휠러 봉(Wheeler Peak)의 이름은 쇼손족(Shoshone)의 도소 도야비(Doso Doyabi) 즉 의미가 백산(White Mountain)이라는 명칭을 2019년 미국지명위원회(United States Board on Geographic Names)로부터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그렇다면 2000년 산해경에서 말한 사막가운데 불함산(弗咸山:不咸山)은 바로 이 훨러 피크(Wheeler Peak)가 아닌가 한다.위 사진은 소위 불함산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사막 내에 있는 백산이다.재론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명확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은 백두산 즉 백산이라는 것은 단좌산(單坐山) 즉 일좌산(一座山)이 아닌 백산군(白山群)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즉 몇 개의 봉우리가 천지를 둘러쌓고 있는 오늘날 백두산이 아니라 척추처럼 내리뻗은 지척(地脊) 대간(大幹) 또는 정간(正幹)즉 특히 남북으로 연결된 백산 산맥군(山脉群)에서 우리는 백두산(白頭山)의 실체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현실역사로 볼 때 옛 사람들이 산 정상에 눈이 얼어 빙산처럼 사시사철 흰 색으로 보일 때 그것을 백산이라고 했다면 백두산 높이 2,744m 보다 거의 더 높은 고산(高山)이 많은 북아메리카대륙 로키산맥에는 이러한 백산(白山)은 수백 수천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것을 옛 역사와 맞추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하늘의 땅 천평(天坪), 천리천평(千里天坪), 삼지평(三之坪)이란 명칭만 보더라도 그저 평이한 하나의 산이 아니라 척추의 지척의 대간인 백산이 위치한 곳이어야 함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지리형태로 찾아보니 세계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그것도 대막 즉 거대한 사막인 그레이트베이슨사막(Great Basin Desert)이 존재하던 곳의 위편에 거대한 그야말로 태고적 분화구가 상당수가 아직 남아 있는 고도가 1500m 이상인 그곳을 하늘의 땅이라 하는 천평이 있어야 할 곳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천평 위에 수많은 산맥군을 볼 수 있는데 그곳에서 백산을 찾아야 함을 알 수가 있다.이 천리천명은 천리하고 하였지만 이것은 고도가 높은 중부와 동부만의 거리이며 실제거리로는 삼지평(三之坪) 동(東部), 중(中部), 서(西部)을 다 합하여 로 나눈 약 540km 1,375리(里)를 자랑하는 스네이크강평원(Snake river plain)이라는 것도 알 수 있어 그 천평 바로 위에 있었을 백산(白山)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지 않을 수가 없다.이 백산들이 밀집해 있는 아이다호주(Idaho州)는 미국역사에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바로 주도(州都)는 프랑스어 보이스(Les bois:woods) 즉 숲(woods)이란 지명의 보이스(Boise)인데 프랑스계 캐나다(미국)인 모피 덫을 놓는 사냥꾼들이 1800년대 초반에 이 지역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으나 아마도 이것은 양키위장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이 숲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생장하는 미류나무 즉 목화나무(cottonwood)이다.특히 아이다호의 지명은 쇼쇼니족어(Shoshone language)의 '태양은 산(山)에서 내려온다(the sun comes from the mountains)' 혹은 '산들의 보석(gem of the mountains)'이란 의미를 갖는데 쇼쇼니족어의 아이다호를 영어 "Ee-dah-how"로 해석하고, 이렇게 영어로 번역된 인디언들의 생각의 의미가 "Behold! the sun coming down the mountain." 즉 보아라! 태양이 산에서 내려온다."이라 하고 있다.이것을 다시 풀어보면 "아이"는 경상도 방언으로 "알라"와 같고 회교도에서 "알라(Allah)"는 최고신이라 하는 것으로써 태양신을 말하며 셈족어 'Il' 또는 'El'로 'El'는 신(神)을 뜻하고 라(Ra:Radium)는 이집트의 태양을 말한다고 하였으니 바로 태양신(太陽神)이며 우리에겐 천지신명님이라고 기도한다.이것은 본 블로그 글 "4.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http://blog.daum.net/han0114/17050747 "에서 언급함과 같이기독교에서도 근본으로 태양신을 믿으며 미국워싱턴DC 한복판에 세워진 방첨탑(方尖塔) 오벨리스크(obeliskos)가 세워져 있는 것은 바로 태양신의 숭배사상으로 부터 나온 것이다.이것이 고려시대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와 태일신(太一神)이라 하였고 근세기에 들어 상제(上帝), 천제(天帝)라고 불렀다.이 천제의 아들이 바로 천자(天子)이다.때문에 단군(檀君)을 모시는 우리나라 역사정체성과 정통성은 천자국(天子國)이라고 하는 것이다.이처럼 계통이 뚜렷하다.본 블로그 글 "흰자작나무(白樺:Betula populifolia)는 박달나무(Korean birch)http://blog.daum.net/han0114/17049402 "에서 자작나무에서 백화가 무엇이고 무엇이 신단수(神檀樹)이며 세계수이고 단목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박달나무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충분하게 알아 보았으며 결과적으로 생물학적 분석에서 그것은 북아메리카대륙 횡단종으로서 토착종인 학명 베툴라 파피리페라(Betula papyrifera)라는 것도 알았으며 세계인류역사가 위대한 인간의 몸에서 창출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세계의 심장(heart)이며 영혼(soul, 'mind)이라는 "코레(core)"에서부터 출발했음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하늘을 오르는 곳에 높은 정령숭배처가 있었던 것은 당연하며 그곳 주위에는 반드시 우주목(宇宙木), 세계수(世界樹), 중심축(中心軸:axis mundi), 지혜의 나무일 수 있는 흰 자작나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우리는 잘 알게 되었다.태백산(太白山)꼭대기에 신목(神木)이 있었고 이것은 흰 종이자작나무(白樺:white birch)이며 이것을 신단수(神檀樹) 또는 단목(檀木)이라 하였고 단목(檀木)은 천신(天神)으로서 탱그리(檀君:Tengri)가 단군임 상징하는 동시에 삼한민족의 근원적인 신앙체이고 숭배의 상징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본 블로그에서 충분하게 알아보았던 사실이다.BC 8937년 황인천황(桓因天皇)은 처음으로 국가 즉 신시(神市)를 건국하면서 인류최초로 불을 사용하였고 천황의 아들인 한웅은 무리 삼천(三千)을 거느리고 사람들이 콩을 천신께 바치고 고했던 산마루 신단수(神檀樹)아래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름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단군(Tangun)이 환국환인에 이은 천신(天神)인 것은 몽고어 텐그리(탱리(撑犁): Tengri), 투르크어 탕그리(Tangri)라 하는 것처럼 우리말로는 당골을 하늘의 중심, 태양신 즉 텡그리즘(Tengriism)을 말하는 것과 같고 텡그리는 흉노, 선비, 투르크, 불가리아, 몽골족, 헝가리 그리고 알타이지역에서 텡그리즘이라 불리는 최상위 신(神)이라 한 것도 이 지역에 모든 종족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숭앙을 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그러니 이제는 단일민족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는 것이 좋다. 즉 단군을 섬기고 숭앙했던 민족은 지구전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본 블로그 글 "알타이(altai)가 어딘가?-용연향(龍涎香, ambergris)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3 "에서 이 알타이지역을 본 블로그에서는 로키산맥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때문에 이들 종족들은 싫거나 좋거나 간에 로키산맥을 근거로 하는 종족들임을 알 수가 있으며 이것에서 좀 더 적극적이었다고 보이는 고대 투르크인은 탱그리, 예르숩, 우마이, 엘리크, 지구, 물, 불, 해, 달, 별, 공기, 구름, 바람, 폭풍, 번개와 우레, 비와 무지개 등 우주를 다스린다는 17신(神)을 믿었다고 되어 있으며 몽골사람은 99 텡그리 신들이 우주를 다스린다 믿었다.이는 북유럽을 근거로 하는 켈트족(Celts)이 지향하던 다종교, 다신교(多神敎)와 같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군 즉 당골이라고 하는 탱그리 신(神)은 하나의 신(神)으로 하늘이 주체가 되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는 태양신이라 한다.터키, 몽골, 중국, 비잔틴, 아라비아, 페르시아의 중세 문헌에 쓰여진 원문을 보면, 명백하게 투르크와 몽골의 신성은 텡그리에 속한다. 하느님을 부를 때 타타르족은 탱그리, 알타이족은 탱그리, 탱게리, 투르크족은 탄리, 하카스 공화국 사람은 티기르, 추바시 공화국 사람은 튜라, 야쿠트족은 탕가라, 시베리아의 카라카이족과 발카족은 테이리, 다게스탄 공화국의 쿠미크족은 탱기리, 몽골에선 텐게리(텐그리)등등 대부분이 비슷하다.유럽 켈트족이라고 하여 다를 것이 없다."태양이 뜨는 땅" 그곳은 단군탱그리 신앙 즉 태양신이 숭앙받던 곳임을 말하고 백산 바로 아래 신시(神市)를 창업한 그 위대한 업적이 존재했던 성스러운 땅임도 알 수가 있다.이곳은 특히 근세기에 다른 모르몬 그리스도교 종파의 정착민과 자주 충돌을 일으킨 도시라고 하며소위 복음주의 기독교와 후기성도교(모르몬교), 다신교, 그리고 카톨릭교들의 충돌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왜냐하면 하늘의 천신이 내려온 신성한 땅이기 때문이다.특히 모르몬교(Mormonism)는 1820년 14세이던 조셉 스미스(Joseph Smith, Jr.1805-1844)가 뉴욕주 팔마이라(Palmyra) 집 근처 숲에서 당시 분쟁이 격화되던 개신교파들 사이에서 어느 교회에 속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방문과 계시를 받아 시현 하였고 1823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천사 ‘모로나이’로부터 계시를 받고 4년 후에 그 천사가 준 땅 속에 묻혀 있던 금속판에 새겨진 고대의 역사 기록을 찾아 번역한 것이 바로 1830년에 출판된 모르몬경(Book of Mormon)이라고 하는데 이 경(經)에서 지금의 아메리카 인디언은 바로 구약시대인 서기전 600년 경에 예루살렘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유대인의 후손이라 하고 1세기부터 4세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도 기독교회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 "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대아메리카인디언들이 철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를 사기즉 날조된 것이라고 폄하했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었다.즉 복음주의 개신교미국인들은 신대륙발견이전까지 역사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지만 모르몬교는 아메리카대륙에도 역사가 존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제일처음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를 주도로 하는 유타주(Utah)에 정착한 모르몬교 신도들이 아이다호주에도 처음에 정착하고 개척하여 지금도 몰몬교 신도의 비중이 약 20% 가량 된다하고 있다.바로 아이다호주 내에 이러한 백산군은 수도 없이 많고 백두산처럼 천지(天池)를 가진 화구(火口) 칼데라(caldera)를 가득 채운 화산호수(crater lake)도 비일비재하다.그곳에는 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에서 밝히 압록강과 천산 및 실제로 존재하였을 백두산과 백산의 상징이라할 수 있는 티벳(Tibet:Tebet)왕국의 히말라야까지 모든 게 한 곳에 들어 차 있는 모습도 우리는 명확히 확인할 수가 있었다.위에서 열거한 사실들에서 볼 때 백산은 북아메리카대륙 특히 로키산맥 군에서 상당히 많은 지형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고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는 지방정부들도 백산이라 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여러 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그러나 실제로 백산을 어떤 곳을 지칭했는가 하는 문제 보다 먼저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것은 아마도 고대오랜 시간 또는 시대별로 백산의 의미를 다르게 담아 여러가지 형태로 지명 했음도 우리가 알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태양신이 내려왔다고 하는 하늘의 땅이라고 하는 천리천평(千里天坪)이란 곳 즉 스테이크 강 평원은 지리학적으로 어떤 지역인지 간단하게 살펴보고 백두산을 보자.서부(西部)스네이크 강 평야는 수 킬로미터의 빙하성호소퇴적(氷河性湖沼堆積, glacio-lacustrine)이 가득 차 있는 거대한 구조성지구대(tectonic graben) 또는 두 개의 평행한 단층애로 둘러싸인 좁고 긴 열곡(裂谷)이며, 퇴적물은 백두산과 마찬가지로 유문암(流紋岩:rhyolite), 현무암(玄武岩:basalt)이며 현무암으로 덮여 있는 곳인데 해발고도 약 700m 고지이다.동부(東部)평야는 북미판 이동과 거의 평행인 유역과 산 구조물 지역을 가로지르는 지형학적 함몰이 있고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완만한 경사면을 가진 밑바닥의 면적이 넓은 거대한 순상화산(楯狀火山)으로부터 분출된 현무암에 의해 묻혀 있으며 현무암 밑에는 유문암이란 화산암이 암석권을 통과하면서 분출된 유문암 용암과 화성쇄설(火成碎屑)화산암과 수많은 분화구가 현존하고 있으며 고도가 약 1,500m 이상의 고지이다. 중부(中部)스네이크 강 평야는 동쪽평야와 비슷하지만, 암석·광물(rock and mineral)따위가 다른 종류의 암석·광물층 사이에 끼어 있는 호수(레이크)와 하천(스트림) 해저먼화석층(Hagerman Fossil Beds)을 포함한 퇴적물의 두꺼운 구간을 가지고 있어 차이가 있다고 설명된다. 우리는 여기서 도시국가라 할 수 있는 신시(神市)역사를 한번보지 않을 수가 없다.삼성기전(三聖記全) 상편(上篇) 安含老元董仲後 桓雄氏 繼興 奉天神之詔 降于白山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劃井地於靑邱 持天符印 主五事 在世理化 弘益人間 立都神市 國稱倍達 뒤에 환웅씨가 계승하여 일어났다.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사이에 내려왔다. 자정과 여정(子井女井)을 천평(天坪)에 마련하고 청구(靑邱)에 정지(井地)를 정했다. 천부인(天符印)을 지니고 다섯가지일을 주관하였으며 세상에 머무르며 인간을 교화하고 크게 이롭게 하였다.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배달(倍達)이라 하였다.임승국교수가 한단고기 주해에서 말하길 일설에는 서쪽 산 기슭에 500리 벌판이 있는데 이곳을 북계룡(北鷄龍)이라 하며 앞 날의 도읍지라 한 사실에서 볼 때 이곳은 서부(西部)스네이크 강 평야이고 아이다호주(Idaho州)의 주도인 목화나무(cottonwood)숲의 도시라고 하는 보이시(Boise)를 '푸른 구릉' 청구(靑邱)라 할 수 있는지는 더 살펴볼 일이다.그리고 이곳에 자정여정(子井女井)을 마련하였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우물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신시(神市)를 우리는 도시국가로 인식할 수 있다.마찬가지로 시(市)를 본 블로그 글 "부르주아(bourgeois)와 조선의 요민(饒民)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2 "에서 서구 프랑스가 지칭하던 부르주아의 시민(市民)이라는 단어 역시 한자(漢字)로 풀어 보면 시(市)는 저자, 시가, 장사, 팔다 라는 의미가 있고 훈(訓)과 음(音)이 슬갑 불(市)이라고 하지만 저자 시(市)라고 하며 추위를 막기 위해 바지 위에다 무릎까지 내려오게 껴입는 옷을 '슬갑'이라 하는데 '불'은 글자 모양이 땅 아래로 꽂인 모습에서 이를 '뿌리'로 본 이유라 하였고 이 '뿌리'는 '불'을 의미한다고 하였다.시(市)는 '저자' 옛 것의 시장을 말함인데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반찬거리를 사고팔기 위하여 열리는 작은 규모의 시장이며, 시원(始原)에는 나무를 베어낸 벌판에 깃대를 꽂아서 교역의 장소임을 표시했고 옛날 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곳에 시장이 들어선다 하였다.강희자전(康熙字典)에 시(市)를 보면 【易·繫辭】日中爲市,致天下之民,聚天下之貨,交易而退,各得其所。해가 중천에 떴을때 시장이 열리고 천하의 백성을 이르게 하고 천하의 재화를 모아 교역하여 물러나 각자 있을 자리를 얻음이라 한 것처럼 시(市)를 슬갑 불이라 한 것처럼 태양을 상징하는 불(火)이 되어 하늘과 사람과 땅을 내리 꽂는 빛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3) 백두산과 마자마산(Mountain Mazama) 세기의 화산폭발한편으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본 한반도 백두산을 형성하고 있는 지질학적 문제에서 모든 학자들이 백두산이 가지고 있는 세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확실한 검증이 이루어진바가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듯 확신을 하는지 큰 의문을 가지고 있다.한반도 백두산은 역사적으로 어떤 실체인가를 어느정도 확신을 할까?지금까지 들어나는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한반도 백두산에 대한 지질학적인 두 가지 선도적인 이론이 있는데 첫째 마그마가 판을 관통해 올라오는 열점, 핫스폿이 형성(hot spot formation)되고 있다는 점과 둘째는 백두산 아래로 가라앉는 태평양 판(Pacific Plate)의 미지의 부분(uncharted portion)이 어떤 형태인지 지금까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는 땅속 맨틀형태를 그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이 활화산인 것은 맞다하겠지만 어마어마한 화산이 폭발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것처럼 호들갑떨고 있는 상황에서 몇자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과학적으로도 불확성이 많지만 현재 한반도 백두산은 역사성을 따질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백두산의 화산폭발은 한반도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백과사전에서는 고려사(高麗史)의 세가(世家)에서 고려 정종 원년(946년)에 ‘이 해 천고(天鼓) "하늘의 북"이 울리므로 사면령을 내렸다는 기록과 일본의 역사서인 흥복사연대기(興福寺年代記) 천경 9년(946년) 11월 3일에 ‘천경의 밤에 하얀 화산재가 눈과 같이 내렸다.’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한쪽은 고려사가 현재 전달되는 것은 고려사절요신세를 면치못하는 것이고 한쪽은 소위 일본서기가 새롭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사로 취급할 수 없는 일본사료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뢰성이 매우 떨어지는 것이다.실제로 백두산에서 화산폭발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현 한반도란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의 화산폭발규모가 서기180년 뉴질랜드의 타우포 호수(Lake Taupo)의 분출과 1815년 인도네시아의 숨바와 섬 탐보라 산(Mount Tambora)의 폭발에 버금가는 화산 폭발 지수(火山爆発指数:Volcanic explosivity index) 최고의 강도, 거대한[colossal (VEI 7)]이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지난 5,000년 동안 가장 격렬한 폭발(most violent eruptions)중 하나인 "밀레니엄(Millennium)" 또는 "천지(天池:Tianchi)" 폭발로 알려지며 일본 홋카이도(Hokkaidō)남부와 그린란드(Greenland)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산먼지 테프라(tephra)가 발견된 이 폭발은 화산정상의 상당부분을 파괴하여 오늘날 천지(天池)가 가득 찬 칼데라(caldera)가 거대하게 패여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이것과 절대적으로 비교가 되는 것은 같은 화산 폭발 지수(火山爆発指数:Volcanic explosivity index) 규모(VEI 7)라고 하는 미국 오리건주 남서부에서 1902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크레이터호국립공원(Crater Lake National Park)과 비교되는 것으로써 캐스케이드산맥(Cascades Mts)길이 약 1130km. 평균높이 2438m. 최고봉은 레이니어 산(Mountain Rainier) 4392m. 중의 높이 2,486 m 마자마산(Mountain Mazama)이 폭발해서 생긴 칼데라호(湖)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화산호수는 수심 약 590m, 면적 650 km²의 호수는 주위가 높이 150∼600m의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칼데라는 지름 10km에 달하고 칼데라북쪽은 속돌(輕石)의 사막이며 기타 저지대는 사슴, 담비, 독수리, 부엉이 등 많은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대삼림지대이다. 백두산(白頭山)역시 큰 칼데라(large caldera)에 의해 원뿔(cone)이 잘려져 있는 성층화산(成層火山:stratovolcano)으로 폭 5km(3.1mi)에 깊이가 850m(2,790ft)로 부분적으로 천지(天池:Heaven Lake)의 물이 채워져 있고 호수의 둘레는 12~14km(7.5~8.7마일), 평균 깊이는 213m(699ft)이며 최대 깊이는 384m(1,260ft)으로 천지의 면적은 9.165 km², 수량(水量)은 19억5,500만 m³로 나타난다.화산호수의 면적 규모로 보았을 때 마자마산(Mountain Mazama)는 650 km² 이고 백두산 천지의 면적이 9.165 km² 이니 백두산 천지는 70배 넘는 수치로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매우 작은 칼데라 호수임을 알 수가 있다.백두산과 비교되는 마자마산(Mazama Mt)도 성층화산(成層火山:Stratovolcano)으로 활화산이어서 성질은 똑같다고 보지만 솔직히 규모자체가 비교할 수가 없다.1980년 미국 워싱턴주(州) 스카마니아(Skamania)군의 세인트헬렌스 산(Mount St. Helens:2950->2549m)화산폭발보다 42배 강력한 화산 폭발 지수 7 (VEI 7)이었다고 하는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즉 세인트헬렌스산이 화산폭발로 원뿔 성층부분이 약 400m가 잘려나간 반면 마자마산의 붕괴된 산체의 높이가 3,700 m로 가정하고 이 대분화로 인하여 약1200m 낮아진 상태의 고도는 2,486 m라는 이야기다.원뿔 위쪽 산전체가 400m 날라가버린 것도 놀랍지만 이것의 3배에 달하는 1200m 가 화산폭발로 날라가버렸으니 그 주위에 파편이나 화산재가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란 짐작이 간다.이런 대자연 변괴가 지금으로부터 7700년전이라고 하니 기원전 5700년쯤 된다.놀랍게도 한반도 백두산의 화산폭발에 대해 고려사서(高麗史書)에 따르면 개성(開城)에서는 천국에서 나오는 천둥소리(천년 폭발과 비슷한 폭발 소리-likely the explosions from the Millennium eruption)가 들렸고, 그 후 화산 남쪽 약 450km(280mi) 떨어진 고대 한국의 수도에서는 죄수들이 사면을 받고 석방될 정도로 황제를 공포에 떨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사서 흥복사사사((興福寺:book of Heungboksa)에 따르면 같은 해 11월 3일, 산에서 남동쪽으로 약 1100 km(680mi) 떨어진 나라시(일본:city of Nara)에서는 "백회비(white ash rain)"의 사건이 기록되었고 3개월 후인 947년 2월 7일, 백두산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0km(620mi) 떨어진 교토 시(京都市)에서 "드럼 우레(drum thunders)" 소리가 들렸다 하였으며 천문봉분화(天文峰:Tianwenfeng)는 만주 신화에도 기록되어 있고 만주인들은 그 산을 "불의 용(Fire Dragon)", "불의 악마(Fire Demon)" 또는 "천국의 불(Heavenly Fire)"이라고 묘사했다고 알려진다.4) 미졸라의 대홍수(Missoula Floods)와 흑수백산과 신시(神市)그렇다면 한웅께서 BC 3,898년에 하늘의 땅이라고 하는 천리천평(千里天坪) 청구(靑邱)에서 신시(神市)를 개업하기 이전에 서기전(BC) 7197년에 환인(桓因) 안파견(安巴堅)께서 동남동녀 800 을 이끌고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 파내류산(波奈留山)땅에 환국(桓國)을 개국한 곳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삼성기전(三聖紀全) 상편(上篇) 安含老元董仲 " 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斯白力之天爲獨化之神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長生久視恒得決樂乘遊至氣妙契自然無形而見無爲而作無言而行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부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우리 환국이 세워질 때 최고 오래된 한분의 神이 있었다. 그 神은 흰 힘이 서로 나누어진 것이다. 하늘은 홀로 화하여 神이 된 것이다. 광명이 우주를 비추니 생물이 권리를 얻게 되었고 그리하여 만물이 창생되었다. 환인께서 항상 기쁜 마음으로 오래 오래 사셨으니 그 묘함이란 氣를 타고 노니는 것이며, 모습 없이 볼 수가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인(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환인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위 안함(安含), 로원(老元), 동중(董仲) 삼성(三聖)이 펴내 이미 세조 3년(1457)에 존재한 것으그것으로 나타나는 삼성기전(三聖記全)을 보면 환인께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다.이것은 인류가 불을 처음사용하였던 기원과 일맥하는 것이다.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 安含老元董仲古記 云 波奈留之山下 有桓仁氏之國 天海以東之地 亦稱波奈留之國. 其地 廣 南北 五萬里 東西 二萬餘里 摠言桓國 分言則 卑離國, 養雲國, 寇莫汗國, 句茶川國, 一群國, 虞婁國(一云畢那國), 客賢汗國, 句牟額國, 賣句餘國(一云稷臼多國), 斯納阿國, 鮮稗國(一稱豕韋國 或云 通古斯國) 須密爾國 合十二國也. 天海 今曰北海 傳七世 歷年三千三百一年 或云六萬三千一百八十二年 未知孰是. 파나류산(波奈留之山) 밑에 한님의 나라(桓仁氏之國)가 있으니 천해(天海)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오 동서가 2만리려리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 사납아국, 선비국, 수밀이국을 합해 12국이다. 천해(天海)는 지금의 북해(北海)라 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 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삼성기전 상편을 보면 환국(桓國)은 인류시원역사라고 하여도 부족함이 없다.그러나 위 삼성기전에서 말하는 천해를 지금의 북해라 한다는 풀이는 무엇인가 핵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삼성기(三聖紀)를 계연수(桂延壽)로 부터 전달받은 이유립(李裕岦:1907-1986)은 친일의혹이 있는 자로써 어떤 형태의 수정이 있었을 것이란 짐작이 가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예를 들어 북아메리카대륙이란 틀을 아시아대륙으로 옮겨심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면 필요이상으로 천해를 북해로 해석하고 실제를 감추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천해(天海)가 정말 북해(北海)라고 해석하면 환국의 강역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만약 천해를 지금의 북태평양을 지칭했다면 북아메리카 전역이 우리나라 역사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최소한 계연수선생께서 이유립에게 전달하기 전 원본을 찾아 확인할 수 없으니 우리가 이치적으로 따져 이 명칭의 풀이를 할 수밖에 없다.흑수(黑水) 백산(白山) 땅 혹은 파내류산(波奈留山)땅이라고 하는 곳은 홍적세(洪積世:Pleistocene) 빙하시대때인 14000년 전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 지역을 뒤 덮은 코딜레란 빙상(Cordilleran Ice Sheet) 동쪽 미졸라빙하호수의 빙하댐이 터지면서 15,000년에서 13,000년 이전 사이에 미졸라의 대홍수(Missoula Floods)라고 하는 대범람 자연재해로 클라크 포크(Clark Fork)와 컬럼비아 강(Columbia River)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워싱턴(Washington) 동부와 오리건(Oregon)서부의 윌라메트 계곡(Willamette Valley)전체지역을 침수시킨 곳으로 본 블로그에서는 이곳 컬럼비아강을 흑수(黑水)로 판단하였고 오래된 빙상(Ice sheet)이 시간을 통해 녹으면서 로키산맥(Rocky Mts) 고산(高山) 정상에 빙하가 남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지역 전체를 백산(白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산맥군을 히말라야(Himalayas)라고 하였을 것이며 흑수아래 백산 땅을 파내류 땅이라 하였을 것이며 서기전(BC) 7197년 천계(天界)에서 환인(桓因)께서 내려오신 땅이 그곳이 아닌가 한다.바로 평원지역이 많은 오리곤주(Oregon)전체 지역을 인류시원의 땅으로 지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소위 한반도 백두산과 비교가 되는 크레이터호국립공원(Crater Lake National Park)의 마자마산(Mountain Mazama)에서 서기전(BC)5700년경에 대규모의 화산이 폭발하면서 약 1200m 높이의 원뿔이 잘려 많은 화산재와 지름 2mm 이하 화산쇄설물(火山碎屑物:Pyroclastic rock)만들면서 최소 40km 이내에 평균 두께 7.47m로 침전되거나 계곡에 쇄설물의 두께가 70~80m가 될 수 있다는 자료를 참고 할 때 반경 100km 내에서는 사람 살기가 힘들어 안전지대로 이동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흑수백산, 파내류 땅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였던 곳이 지금의 스네이크 강 평원(Snake River Plain)이 아니었겠는가 한다.마자마산과 스네이크 강 평원 간의 거리를 재어보니 약 488km 이다.그렇게 보면 화산폭발을 피해 안전한 지대를 찾아 한웅께서 BC 3,898년에 하늘의 땅이라고 하는 천리천평(千里天坪) 청구(靑邱)에 도시국가 신시(神市)를 건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 정조 21년 정사(1797) 9월 18일 기사에 정5품계의 헌납관직 정지원(丁志元)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 백산(白山) 바로 아래 천평(天坪)은 옛 대막(大漠)의 지역었다고 하는 사실은 오늘날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룰}*************************************************<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순상화산" rel="tag" target="_blank">순상화산</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그레이트베이슨사막" rel="tag" target="_blank">그레이트베이슨사막</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스네이크강평원(Snake river plain)" rel="tag" target="_blank">스네이크강평원(Snake river plain)</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큰 사막(大沙漠)" rel="tag" target="_blank">큰 사막(大沙漠)</a>,&nb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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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십자기(red cross flag)는 조선(朝鮮)깃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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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십자기(red cross flag)는 조선(朝鮮)깃발인가. 글쓴이:한부울들어가기1870년대 조선의 입장일본은 재무, 영국은 왕실 일장기는 토마스 윌슨 엔 손스 주식회사 선척기다.청조는 고려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려했다.삼태극과 세계사상청조와 하노버왕가 동질성레드크로스 깃발과 만주국(청)나가기들어가기 많은 사람들이 글쓴이에게 묻는 것이 있다.바로 조선의 깃발은 어떤 것인지 밝혀달라는 것이다.그러한 요구에 글쓴이도 난감하다.그러고 보니 조선(朝鮮)은 왕실 상징 깃발이라고 하는 어기(御旗)와 제일태극도(第一太極圖)정도가 현재까지 알려져 있을 뿐 조선국의 국기라 하여 특별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하지만 조선에서 국기가 없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바로 조선은 어떤 상징형상만 가지더라도 세계 모든 국가 또는 회사들이 알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을 것이란 판단이다.물론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의 시각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들어난 사실만으로도 충분하게 이러한 추측을 할 수가 있다.현재 국기라는 것은 앞선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 언급하고 정리하였지만 애초 서양인들이 주창하던 국기(國旗)라는 것은 국가주의(國家主義:statism), 또는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내셔날리즘(nationalism)에 대한 것은 분명 아니다.상인함선깃발(merchant ensign) 또는 상인 깃발(merchant flag)이라고 하여 해양세력의 무역사무소가 차려진 곳의 도시(city) 또는 소도시(town)의 읍(邑)을 표시하는 깃발로써 또는 그러한 곳에 스스로의 신분을 나타내며 그 지역을 거점으로하는 회사 또는 특별한 상업가문을 나타내는 표식으로써 상선기(商船旗) 또는 선척기(船隻旗:vessels flag)라 하여 선박에 게양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물론 이와같은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관세제도로 볼 수 있는 세관관리의 한 방편으로 거대한 지배체제를 가진 하나의 통일된 체제에서 위계적이고 체계적인 항해질서를 관리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다는 것은 두 말할필요가 없다.서양해양세력들은 거의가 자유자본주의를 표방하던 무역회사들이다.그리고 이런 세력들은 초창에 독점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영업을 하던 대상이었을 것이 틀림없다.때문에 관리입장과 무역을 하고자 하는 세력간의 간접적으로 충돌도 많이 야기되었을 것이다.복잡해지는 상방의 상행위 거래관계에서 최소의 질서가 필요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이것들을 정치적인 용어로 말하면 미나키즘(minarchism)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의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관을 가지고 군사, 치안, 법률 등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또는 야경국가(夜警國家:Night-watchman state)로써의 관리라 할 수 있고 작은 시, 읍에서 생성된 회사조직들을 최소한의 관리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바로 이 체제가 대조선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하나의 체제 세계통치국의 면모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때문에 시민 깃발 또는 민간인의 선상 깃발(船旗)이라 하여 "시빌엔사인(civil ensign)" 이라고 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시빌(civil)은 '문명화된 시민'이라는 뜻으로 여러관청이 있는 큰 도시로 해석할 수 있고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진보, 발전된 도시국가를 뜻하는 것인데 부르주아적인 상업 성격이 강하다.당시 국기(國旗)라 한 것은 현재 국기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있다.국기이니 뭐니 하지만 당시는 세계통치국이었던 조선(朝鮮)이 거대한 무역시장을 가지고 이런 세력들을 상대했다고 보기때문이다.본 블로그 글 "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56 "에서 살펴보았지만 코리아를 1904년에서 1909년까지 방문한 어멀리 켐프(Emily Georgiana Kemp :1860-1939)는 한국이 세계에서 5번째 면화생산국이라고 하였고 당시에도 육지와 바다 교통의 새로운 인프라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무역 개방되면 급속한 발전을 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였다.목화만 이런 규모일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한반도 역사를 보면 이양선들이 19세기초부터 들락거리며 개방을 요구하였다던지 또는 조선을 미개한 국가로 묘사했다던지 또는 쇄국정책을 빗대어 조선정부를 형편없는 국민의 언론자체를 막는 독재적인 정치형태를 설명하며 열을 올렸던 이유가 다 여기에 있었다고 보인다.생각해보면 간단하다.기존의 세계부유한 자원이 산재되어 있는 영토를 가진 하나의 체제가 지금까지 세계역사를 지배하고 모든 문화, 종교, 경제까지 통괄하거나 통치하고 있었다고 할 때 그러한 엄격함에 의해 그들이 자유롭게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무슨짓을 도모했겠는가.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무도한 해적선과 같은 선박들이 해안곳곳에 들어닥쳐 양민에게 피해를 주면서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할 때 조선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접근할 수 없도록 국내법을 적용하여 무력으로 막는 수밖에 없다.선박들의 입출항의 절차문제, 내부규정에 의한 항로질서정립, 규정된 항만사용권리제한 등의 문제점에서 각 선박들에게 각자 사전 절차를 통한 등록이나 허가를 받게하거나 규약을 지키게 함으로써 해관질서를 도모케 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때문에 허가나 등록된 선박에는 깃발을 게양토록하여 조선의 해관관리가 용이하고 식별이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정례화(定例化)된 표식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보아야 맞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고 있는 1897년 대한제국건립부터 특히 작성된 편자미상(編者未詳)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 각국기도(各國旗圖)에는 대한제국을 포함한 40개 국가의 국기(國旗)를 담고 있다고 나타난다.이것은 아마도 당시 초기의 조선을 출입할 수 있는 해양국가라고 할 수 있는 상업회사를 등록한 기도(旗圖)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그것과 마찬가지로 1882년에 최초로 워싱턴 미국 해군성(United States. Navy Dept. Bureau of Equipment)이 50여 개국의 각종 왕기(王旗), 군함기, 상선(商船)기, 국적기, 신호기, 해군삼각기, 함대기(艦隊旗) 등의 다양한 국기를 모아 펴낸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란 제목의 책은 이와 성질이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어쩌면 1881년 조선이 안타깝게 해체되고 난 후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를 나중에 편집하여 재빠르게 도감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그 도감속에 태극기(太極旗)가 실려 있다 하여 그것을 원형이라고 하거나 1882년 박영효(朴泳孝)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 겸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과정을 기록한 사화기략(使和記略)에 의하여 그해 9월 박영효(朴泳孝)는 선상에서 태극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를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의 기(旗)를 만들어 그 달 25일부터 사용하였으며, 10월 3일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고종에 의해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는 사실을 두고 태극기는 조선국기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통용하였다고 하는 것에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때문에 이렇게 생성된 태극기라고 하기 때문에 삼한조선의 세계통치국으로써의 정통성이 부족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왜냐하면 조선은 해양국가라고 할 수 없고 그렇게 분류되지 않기 때문이다.본 블로그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 이야기 했듯이 인터넷 기학 학회(Flags of the World : FOTW)자료를 보면 조선(朝鮮:KOREA)에서 등대선에 사용하던 깃발을 볼 수가 있고 지금의 기독교국가들의 깃발을 보듯이 상당히 색채와 디자인이 서양국기와 거의 비슷한 형태인 것을 알 수 있고 붉은십자기 즉 레드크로스 변형의 도안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일반적인 깃발형태라고 할 때 조선관리들의 보편적인 인식이 쉽사리 붉은십자기를 생각할 수가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이런 도안의 깃발들이 모두가 조선영해 연안 무역으로 인해 빈번하게 왕래하는 서양선박을 관리하기 위한 항로표식(航路標識:Beacon)이란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좌측편의 도안을 보면 거의가 레드크로스(Red Cross)와 거의 흡사한 도안인데 일면 성 안드레아 십자기(St Andrew's Cross)라고도 부르며 파란색 바탕에 X 자 모양(The Saltire)의 하얀색 십자가인 스코틀랜드깃발을 연상하게 하고 겹쳐지는 또 하나의 십자가에서 아래 작대기가 빠진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Tau Cross' 를 꺼꾸로 뒤집은 것과 같다.이러한 해관표식을 조선내에서 사용했다는 시기가 서양세력들이 호시탐탐 조선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하던 때와 겹쳐지는 1871년임을 알 수가 있다.이러한 사실들은 한반도 역사와는 기본 괘(卦)를 달리하는 것이다.당시 서양세력 즉 한반도를 방문하던 선교사, 여행가, 지리학자등이 주장했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위 조선 내 항구연안 관리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써 아래 상황들은 과연 한반도 조선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좌측편의 깃발은 조선연안(朝鮮沿岸)에는 선박(船舶:vessel)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난해한 지형조건을 알릴 필요가 있어 등선(燈船:Light ship)이라는 배를 세워두는 것으로써 무역선박들이 왕래하는 항로(航路)에 등대를 세우기 곤란(困難)한 하구(河口), 천해(淺海), 암초(暗礁)가 있을 곳에 정박(碇泊:渟泊)하여 두고, 그 선상(船上)에 높이 등화(燈火)를 걸어 놓고 항로(航路)를 알리어 주는 것이라 하였다.붉은 십자기를 연상하게 하는 레드크로스(Red Cross)와 같은 깃발을 조선에서 항로길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이다.우측편 깃발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흘러 1883년(고종 20)에 사용하던 해관선척기(海關船隻旗:customs vessels used in korea)로 해관은 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로써 외국배가 항구(港口)에 설치(設置)한 관문(關門) 즉 해관(海關)을 통행할 때 반드시 그들의 선박(船舶)에 게양하게 한 깃발임을 알 수 있는데 엑스 자가 붉은 색에서 검은 색으로 변했다.이러한 선척기는 첫째 조선해안에 나타나는 위험스럽다 할 수 있는 괴선박, 또는 해적선을 구분하기 위해 조선해관에서 허가한 배들만 통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의 깃발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다시금 조선관리체계를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그만큼 엄격했던 반면에 여러가지 깃발의 모양이 현대적이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즉 조선은 어기나 옛 궁중에서 사용한 깃발들이 동양적이고 묵화적인 반면에 이렇게 진보된 도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현재 이것들이 서양국기화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적잖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1870년대 조선의 입장18세기말엽에 발생한 프랑스혁명은 도시국가로써 그 바탕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19세기들면서부터 이러한 형태의 국가는 서양사에 의해 당연히 부풀려졌고 마치 당시 무수히 많은 국가들이 난립한 것처럼 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프랑스혁명에 의해 급격하게 생성된 내셔날리즘에 의한 독립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면서부터 특히 조선체제에 포함되었다고 보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해양세력들의 혼혈인 크리올(Criole)들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이 크게 활발하게 확대했다는 사실과 19세기초부터 기존 제정체제에 환멸을 느낀 대중들에 의해 이런식의 분리심리에 의한 무수히 작은 국가 즉 시민국가들이 생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잡다한 상선기(商船旗) 또는 선척기(船隻旗:vessels flag)가 필요했을 것이란 논리가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다.그러한 논리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소수의 국가민족집단, 시민집단, 회사조직, 상업카르텔조직 이런 것들이 세력화되면서 서로 경쟁 또는 대립으로 나타나고 각각의 독창성을 나타내려 할 때 각각의 상징적인 깃발이 생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실제로 19세기때 선적기의 상황을 보면 다양한 종류의 깃발이 상당히 많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서양해양세력의 동향인데 이때 일본에서는 미국 양키가 주도한 안세이불평등조약(安政五カ国条約,Ansei Five-Power Treaties:1858)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고 난 후 일본은 해양무역연합세력의 거점으로 나타났다.일본이란 국명은 생성됨이 삼한역사의 백제로부터 기인한다고 하고 있지만 사실상 스페인 몰락한 귀족이었던 바스크(Basques)가 핵심이다.오히려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라고 하던 중세 유럽 때부터 내려온 귀족 가문들의 시초는 대부분 로마를 약탈하던 이민족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도 이들과 비교해볼 만 한 것이다.임진왜란 이후 조선 남방에서 반(班)을 반(盤)으로 번(番)으로 바꿔 불렀다고 하고 이것을 남반, 남번, 남만이라고 한 사실과 서양몰락한 귀족들에게 교황이 'Dux'라는 칭호를 내렸고 이것이 오늘날 공작을 의미하는 'Duke'가 되었다는 사실과 이들이 부르주아 생성과 어울리는데 성터주변을 파서 해자를 만든 후에 파낸 흙을 해자를 따라 쌓은 후에 그 위에 목책이나 석벽을 올린 일종의 토성(土城)저택에서 안전하게 살았다고 자료에 나타난다.이러한 일본은 조선을 상대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1876)을 요구하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전문(前文)과 총 12관(款)의 조항(條項)에서 명확한 것은 조선해관을 통해 이루어지던 관세무역행정을 그들이 장악하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조약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굳이 일본과 조선은 상호 평등한 자격조건이라는 것을 강조하였고 현 외교부(外交部)격인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일본정부가 마음대로 접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한 그들의 언어를 문서에 사용하도록 하였고 제5조에서는 별도로 정하는 두개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 국민의 왕래, 통상을 허가하도록 하였다.또한 이것에 더하여 일본선박이 태풍 또는 연료, 식품 결여로 불가항력일 경우 개항장 이외의 지역에 기항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 표류 선원을 보호하여 송환하도록 요구하고 조선해안을 측량도록 허용하게 하면서 그곳의 깊고 얕음을 살펴 도지(島地)를 편제하게 하여 그들이 언제든지 조선의 해항(海港)이나 요새(要塞)를 침략하도록 사전조치하였음도 알 수가 있다.물론 이 조약조문들은 역사조작이 발생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진의가 불투명하지만 어쨌든 조건상 갑이 조선이었고 을이 일본이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특이하게 볼 것은 어쨌거나 조선백성들이 각자 임의로 무역할 때 양국 관리들은 간섭·제한·금지할 수 없게 하였으며 일본 영사파견권리와 영사재판권을 인정하여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허락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조문은 마치 조선이 일본과 크다란 전쟁으로 하여 패배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1876년에는 어떤 거대한 전쟁이 국제적으로 발생하였을까?생각해보면 1876년 이전 전쟁은 바로 1870년(AD) 프로이센-프랑스전쟁(Franco-Prussian War)이 존재한다. 1874년(AD) 강화도 연안 포대 축조 완성. 일본의 ‘정한설(征韓說)’로 각 군영(軍營)에 엄중경계령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일본세력은 다름아닌 경제력(상징적 영국과 미국)이다.절대왕권이 상처를 받았고 뒤이어 경제력이 몰수 당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즉 강화도조약은 일본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정한론(征韓論)과 정조론(征朝論)을 주창한 결과로써 경제력이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그것은 세계통치국이었던 대조선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것이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표식이다.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유럽종주권을 독일 프로이센 황제에게 빼앗긴 것과 같은 것이다.독일유대인 상업가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는 그의 저서 '금단의 땅(A Forbidden Land, 1880)'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조선은 온 세상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천연자원이 풍부하다라고 한 사실을 읽으면 바로 조선은 세계최혜(最惠) 자원보고(資源寶庫)의 땅을 가진 국가체제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을 통째로 빼앗아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임을 여러 문장속에서 그 진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자원이 절대적으로 빈약하였다는 한반도 역사와는 근본이 다른 이야기이다.식민사관학자들의 자원이 빈약설은 최악의 헛소리인 것이다.조선의 엄청난 자원의 소유권이 1876년부로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고 이것을 조선에서는 크게 염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조선의 해관관리 깃발 위 2종을 사용한 시기를 인터넷 기학 학회(Flags of the World : FOTW)자료는 1871년이라 하였는데 일본세력이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한 시기도 같으며 1870년 일본 외무서기가 헬타호(號)를 타고 부산에 입항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관리들에 의해 거절당하고 물러간 후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청조(淸朝)에 협조를 얻어 대신 그해 청일통상조약(淸日通商條約)체결되면서 결국 최혜국 대우와 협정관세율을 서로 인정한다는 협약을 이루었다고 하였다.꿩대신 닭이다.5년전 1866년(조선 고종 3년) 8월 21일에 평양 군민(軍民)들이 대동강을 거슬러 무단으로 침입한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응징하여 불 태워버린 사건을 핑계로 조선원정으로 표현되는 한국군사작전(Korean Campaign 1871)또는 1871년 미한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으로 명명된 1871년 6월 1일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였다.미국은 프랑스 신부 리델을 길잡이로 삼아 5척의 군함과 1,200여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고 강화도 앞 물치도에 함대를 정박시킨 미군은, 6월 10일 초지진을 공격하였다.초반공격에 조선군이 패퇴하였지만 김선필(金善弼:1807-1883)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정비를 한 후 재차공격하여 초지진에 주둔한 미군을 공격하였고 미군들은 사방이 포위된 진지를 버리고 퇴각하였다.그리고 염하(鹽河)를 항해하며 다수의 전함이 암초에 부딪혀 피해를 입었고 물치도(勿淄島)로 퇴각하였으며 20일 동안 포로 석방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사실상 이 충돌은 미국이 조선에게 패한 전쟁이라고 한다면 결국 경제력으로 제압하여 한 사실이 실패했다는 이야기다.이것이 아마도 1870년 일본 외무서기 하나부사(花房義質)가 헬타호(號)를 타고 부산에 입항하여 통상을 요구한 사실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즉 조선의 자원과 보물들을 탐내던 장사꾼들은 양사방으로 침범해들어갔다.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 했던 유대계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과 같은 부류의 잡범들도 많았을 것이고 조선이 그토록 서양인들을 경계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음이고 조선을 침범한 것들이 해적선집단이나 불법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세력으로 단정하여 입국이나 입항을 금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때문에 동시에 겹쳐지는 보불전쟁(普佛戰爭)이라고 하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이 전쟁은 대조선 북부에서 벌어진 사건임을 알 수 있는데 프랑스는 먼저 1870년 7월 14일 군대에 동원령을 내렸고, 7월 19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프랑스군은 마르스라투르 전투(Battle of Mars-La-Tour:1870.08.16)와 그라블로트 전투(Battle of Gravelotte:1870.08.18)에서 참패해 괴멸되었으며 스당 전투(Battle of Sedan:1870. 9. 1)에서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고, 제3공화국(French Third Republic)의 초대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1797–1877)가 1871년 2월 26일에 프로이센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때1870년부터 1940년까지 69년간 프랑스에서 존속한 가장 안정적이었던 공화정 체제라고 말하고 있다.하지만 이때 조선에서는 병인박해(丙寅迫害)라고 하는 사건들이 전개되며 1866년부터 1871년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합친 것과 같다.조선으로부터 통상요구가 거절되고 난 후 여진족(女眞族) 앵글로(Anglo)계의 청조(淸朝)와 해양무역연합세력인 일본간에 통상조약이 조선의 뜻과 무관하게 이루어졌다고 보이지만 조선(朝鮮)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단면이다.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청이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 통치국으로써 체제의 주체이며 청조(淸朝)는 조선정부역할을 하면서 서양해양세력들과 무역교섭권에 깊숙하게 관여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지금까지 보아온 상황들을 종합할 때 무역관례를 들어 서양세력들이 조선에게 깃발을 요구하였을리가 만무하고 그들이 요구하였다 하더라도 조선은 기존정통성을 훼손하는 국기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이것이 핵심적인 이야기다.선척기가 시작된 것은 무역이 활성화되면서부터이고 각 선박들이 조선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부터 각각의 선박의 출처여부를 파악하여 입항을 철저하게 관리 한 것으로써 선척기를 게양하도록 했다는 것은 조선영역에서는 조선관리의 감시체제가 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일본은 재무, 영국은 왕실 고종실록 12권, 고종 12년 8월 22일 丙戌 1번째기사 1875년 조선개국(開國) 484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영종진 난지도에서 정박하다영종 첨사(永宗僉使) 이민덕(李敏德)이, ‘이양선(異樣船)이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가 항로를 측량할 때이다.】 二十二日。 永宗僉使李敏德以"異樣船蘭芝島留碇"啓。 【日本軍艦雲揚號, 航路測量時】 이러한 상황을 식민지사에 찌들어버린 현대역사학자들은 조선에서 당시 국기에 대한 개념이 무지했기때문에 발단된 해프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예를 들어 위 고종실록 12권에도 나타나지만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이 '운요호(雲揚號)사건'을 일으켜 강화도를 포격하면서 영종도에서 살육, 방화, 약탈을 자행한 후 적반하장으로 보상을 요구하였고 그들은"처음부터 운요호에 일본국기(일장기)를 게양했는데 왜 포격을 가했는가" 라고 트집을 잡았다는 말을 해석하여 당시 조선은 국기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고 말하고 뿐만아니라 조선정부는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고 아주 대놓고 조선인들을 바보취급 했다.이와같이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식민지역사관은 우리를 참으로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세계사에서 주장하는 최초의 국기사용의 역사와 이러한 국기란 개념을 서양사만을 바탕으로 이를 마치 사실처럼 전제하고 있는 것에서 우선은 재고할 필요성이 있고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 즉 사회, 경제적 문제를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정치체제의 국가 통제주의(statism)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1850년 이전까지는 국가주의(國家)란 개념이 희박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본 블로그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도 이야기 했듯이상선기(商船旗)를 영어로 시빌 엔사인 "civil ensign" 즉 '시민의 선상 깃발(船旗)'이라는 의미인데 이 시빌(civil)은 '문명화된 시민'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도시국가를 뜻하는 것이다.즉 해양세력의 무역사무소가 차려진 곳의 도시(city) 또는 소도시(town)의 읍(邑)을 표시하는 깃발인데 이를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또는 엔사인(Ensign)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것이 오늘날 국가의 국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글쓴이가 단언컨데 태극기가 생성되던 시기와 이유와 전혀 상관없이 대조선(大朝鮮)이 해체된 싯점 1881년 이전까지는 절대로 한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 국기(國旗)라는 개념자체가 성숙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그것은 1882년에 워싱턴 미국 해군성(United States. Navy Dept. Bureau of Equipment)이 50여 개국의 각종 왕기(王旗), 군함기, 상선(商船)기, 국적기, 신호기, 해군삼각기, 함대기 등의 다양한 국기를 모아 펴낸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란 제목의 책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 대조선을 관리하기 시작한 당시 경제권을 가진 조직체가 이를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아마도 이것이 세계국기라 하여 채집하고 도서로 펴낸 것은 시초라고 보는 것이다.A medieval ship flag captured from a Danish ship by Lübeck forces in 1427 showed the arms of Denmark, Sweden, Norway and Pomerania. The original flag was destroyed in World War II during a British attack on Lübeck, but a 19th-century copy remains in Frederiksborg Palace, Denmark. The saint accompanying the Virgin Mary and infant Christ is Saint James the Greater, identified by his scallop shell emblem.1427년 뤼베크군(Lübeck forces)에 의해 덴마크 배(Danish ship)에서 노획된 중세(AD1000~1450) 선박의 깃발은 덴마크Denmark), 스웨덴(Sweden), 노르웨이(Norway), 포메라니아(Pomerania)의 문장(紋章)을 보여주었는데 이 깃발원본은 2차 세계대전때 영국의 뤼베크(Lübeck)공격때 훼손되었고 대신 19세기에 만들어진 사본은 덴마크 프레데리크스보르궁전(Frederiksborg Palace)에 남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이것 역시 한반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폭격운운 따위로 증거가 인멸된 상태이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여튼 서양사에서는 어쨌던 다수의 선박깃발을 국기개념으로 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물론 대조선으로부터 1882년에 자료들을 서양세력들이 장악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 미국해군성이 만들었다고 하는 세계 해상국가들의 각종 깃발도감은 거대한 제정국가체제에서 획득한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실제로 선박깃발 자료들을 보면 영국왕립해군(Royal Navy)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세계표준화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영국해군에서는 제독이 직사각형 계급깃발을 달았고, 함대제독은 연합 깃발(Union Flag)을 달았으며, 해군장성은 성 조지 십자가(St George's Cross)를 게양한다는 사실과 영국상선해군(商船海兵)현재 사용하고 있는 깃발은 한쪽 구석에 영국 국기(Union Jack)가 그려져 있는 빨간 기(The Red Ensign)라고 명시되어 있다.그리고 위계깃발(Rank flags)로는 선박의 깃발(Ensigns), 배의 선두깃발(Jacks), 구분기호(Distinguishing marks), 좁고 기다란 삼각기(Pennants), 선주기(社旗, 船主旗:House flag), 사설신호(Private signal)등이 전부 이 영국왕립해군의 방식을 따른다는 사실이다.실제로 1853년 일본 강호시대때 양키고래잡이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 Perry)가 일본 우라가(浦賀)에 입항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일본이 1876년에 강화도를 침략한 윤요호가 제시한 깃발은 어떤 것일까?위 고종실록에도 이양선(異樣船)이라고 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당시 조선관리들은 얼마든지 일본선적기를 식별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그러나 이양선이라는 것은 이상한 모양의 배라는 뜻으로, 조선말기에 조선연해에 출현했던 외국의 선박을 이르던 것이라 정의한 것처럼 조선 가까이에 존재하던 일본배가 아님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근원적으로 보면 고종실록(高宗實錄)은 일제강점기 이씨왕조직(일제가 폄하한 명칭)이란 기관인 이왕직(李王職)의 주관 하에 고종45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편낸 정통성이 없는 역사서라는 것을 알 때 사실상 실록자체 기록만으로는 정확하게 진단을 하기가 힘드는 것이다.1876년 2월 27일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이 있었던 년도이지만 세계사적으로 보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영국동인도회사(英國東印度會社: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1708-1873)를 해체 헌납시키고 인도(印度)를 영국의 직할령으로 전환하면서 1876년 5월 1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여제(Empress of India)”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이런 조치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난 후 정확하게 2달 후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즉 글쓴이가 판단할 때 운요호사건을 일으킨 선박자체가 아마도 영국왕실의 사주를 받은 영국동인도회사의 소속 무장한 상선으로써 해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짓이 아닌가도 여겨진다.이때 브리튼(British)에서는 유대인출신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1804-1881)가 1876년 1월 1일에서 1876년 12월 31일까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대리청정을 수행하였고 빅토리아여왕에게 인도여제라는 칭호와 왕관을 수여한 인물이 버티고 있었으며 1875년에는 수에즈 운하(Suez Canal)의 주식 매입을 반대하는 외무부 권고를 무시하고 의회가 거래를 승인하기 전에 로스차일드가(Lionel Rothschild:家,1808-1879)로부터 400만 파운드를 빌려 수에즈운하 주식 17만주를 매입하면서 1876년에 이집트를 보호국(保護國)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집트와 인도는 영국에 직할령으로 성립되던 시기가 또한 일치한다.이것은 상당한 역사흐름의 무엇인가 이상함을 발견하는 것이다.또한 1875년 5월과 6월 인도 봄베이(Mumbai) 데칸(Deccan)에서의 폭동이 발생하는 것과 1875년 4월 24일 세금에 고통 받던 울산(蔚山)농민들이 아전의 횡포에 항거, 폭동을 일으킨 사실이 있고, 1873년 아나톨리아에서 극심한 가뭄과 1874년 홍수가 일어나 기근에 의한 오스만제국의 심장부에 광범위한 불만을 야기시켰고 농업생산부족은 필요한 세금 징수가 어렵게 되면서 1875년 10월 오스만 정부는 파산을 선언하고 발칸을 포함한 외딴 지방에 세금을 인상해야 했다. 1875년 7월 당시 오스만제국의 지방이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의 개신교에 대한 종교적 박해와 세무행정의 부당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으로 인해 발칸전지역을 지배하던 튀르크군벌 오스만제국의 비정규군은 1876년 4월 개신교 불가리아 약 10만명의 폭동자들을 학살하였다.이러한 사건들의 묶음은 명확히 하나의 사건이다.일장기는 토마스 윌슨 엔 손스 주식회사 선척기다.실제로 근대사에서 당시 강화도를 침입한 윤요호의 깃발이 일본기라고 주장하였지만 이 일본기는 한반도와 열도역사인 것처럼 그렇게 꾸민 것이다.위 그림에서 설명으로 덧붙이자면 위 일장기와 비슷한 깃발은 창업주 토마스 윌슨(Thomas Wilson)이 창업한 토마스 윌슨 엔 손스 주식회사(Thomas Wilson & Sons Co Ltd)의 선척기임을 알 수가 있다.즉 이 문양은 일본 국기의 문양이 처음부터 어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 일본의 상선기(商船旗:Civil ensign, merchant ensign or merchant flag)의 일장기(日章旗)는 1870년(明治 3년)제정된 태정관 포고(太政官布告) 제57호 상선규칙(商船規則)에 따라 정했다라고 하였다.그러나 토마스 윌슨선박회사의 선척기가 최소 1825년에서 1859년까지 먼저 사용했다는 이야기다.이 회사는 한 때 포경기지 였던 킹스턴 어폰 헐(Kingston upon Hull)항구를 근거지로 1825년까지 창업주는 첫 증기선을 소유했고, 1841년, 1850년에 장남 데이빗, 이어 찰스와 아서를 그의 파트너로 사업에 참여시켜 토마스 윌슨엔 손스 주식회사(Thomas Wilson & Sons Co Ltd)라 하였으며 1859년까지 무역화물은 고래 뼈(bones), 철(iron), 참나무 껍질(oak bark), 상용목재(deal timber)를 포함하여 많은 발트 항구로 운송하였다. 그렇지만 이 발트항구가 지금의 북유럽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대서양을 두고 동북부지역인 캐나다 허드슨베이지역임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1869년 토마스 윌슨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찰스와 아서가 뒤를 이었고 프랑코-프러시아 전쟁(Franco-Prussian war:1870)이 끝난 후 트리에스테(Trieste)에 아드리아기지(Adriatic Base)를 두고 베네치아(Venice)및 흑해까지 영역을 확대했고 1875년에 북미로의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뉴욕 행 헐(Hull)호가 개통되었다고 하였다. 몇 척의 배가 유실되었지만 1876년에는 43대의 기선이 있었고 알려지고 1878년 헐(Hull)에 있는 41개 해운사 중 6척 이상의 선박을 가진 곳은 5곳에 불과했다 하여 상당히 많은 선척의 회사임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지중해에 이탈리아에 위치하는 베네치아는 본 블로그 글 "빈랑으로 본 대만과 베네주엘라의 미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0 "에서 밝히길 베네주엘라의 해안도시 리틀베니스(Little Venice)에서 베네치아를 찾아야한다고 한 적이 있다.때문에 지중해라는 것은 지금의 멕시코만을 포함한 카리브해지역임을 할 수가 있어 강화도를 침범한 윤요호는 1875년부터 북미항로를 서비스하기 시작한 이후에 영국이 아닌 일본이 북아메리키대륙에 있는 강화도를 침범하였다는 사실과 윤요호에 일장기를 게양한 사실에서도 바로 토마스윌슨 엔 손스 주식회사의 선척기(船隻旗:vessels flag)임을 알 수가 있다.다시 말하지만 하나의 체제로 세계를 통치하던 대조선은 국기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대조선에서는 일본의 선척기가 어떤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왜냐하면 수많은 국가가 아닌 해양운송회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죄다 알 수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제발 조선(朝鮮)에서 국가 개념도 몰랐다고 하지 말길 바란다.앞에서 본 것과 같이 빅토리아시대라 할 때가 바로 코리아시대(Corean Era)라고도 했다.1890년에 영국인들이 말한“COREAN” 시대(Era)라고 한 의미http://blog.daum.net/han0114/17050588 "에서 밝히길 1890년 주한 영국대사관 초석(礎石)에 기록된 내용에서 당시 시기를 "The 499th of the Corean Era"코리안시대 499주년이라 표기를 하였다는 사실에서 보면 분명 이때가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의 통치시대라 하여 빅토리아시대(Victorian era)라고 하는 때와 겹친다.조선의 통제권 혹은 상징성이 유대인출신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에 의해 빅토리아여왕으로 넘어간 사실을 알 수 있고 미국인 역사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가 조선(朝鮮)이 해체되었다고 하는 1881년 이후부터는 아마도 조선의 실제적인 권리를 장악한 브리티시(British)해양세력들에 의해 모든 통상무역 관리가 이루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사실상 조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일본이라고 역사에 기록하고 있지만 대조선의 통치권이 필요한 세력은 바로 브리티시 영국이라 할 때 일본과 영국은 상호보완관계에 있었던 역사실체가 아니었는가 한다.이것을 알기 쉽게 풀어보면 바로 양키(Yankee)와 앵글로(Anglo)이다.물론 조선이 거대한 국가체제로써 세계통치국의 면모를 알 수 있는 것은 없다.그것들은 철저하게 비밀로 하여 각자 유럽제국들에 의해 분배가되었고 각자 것이 되어버렸다.다만 우리가 추측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대조선의 상제(上帝)라고도 하던 황제성상(皇帝聖上)권위에 대한 신수설(神授說)을 바탕으로 하는 용(龍:dragon)의 상징성과 해치(獬豸) 또는 고려견(高麗犬)이라고 하는 사자(獅子:lion)형상을 포함한 삼한 천자국(天子國)의 정통성(正統性)이 끝까지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때문에 어기(御旗)와 8개의 거대한 한국을 관할하던 태극팔괘도(太極八卦圖) 또는 제일태극도(第一太極圖)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청조는 고려태극기 국기로 사용하려했다.청나라는 조선이 자국 속국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조선국기라 하지 못하고 고려국기라 하였을까?고려(高麗)가 조선(朝鮮)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인가?굳이 1392년에 사라진 고려(高麗)를 명칭하면서 조선(朝鮮)이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조선(朝鮮)이 대청국(大淸國)의 종속국(從屬國)이라고 한다면 고려속국이 아니라 조선속국이라 해야 하지 않는가.청은 왜 조선이라 하지 못하고 고려를 부기해야 했을까.이러한 형태는 만약 고려와 조선이 분리되어 1881년 까지 존재하고 있었다면 가능한 이야기다.문제는 서양국가 어느 누구도 청나라 하지 않고 청정부라 했다는 사실이다.청은 조선의 정부인가 아니면 고려의 정부인가.지금까지 글에서 조선은 세계통치국이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다른 국가들처럼 국기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그와 마찬가지로 청나라, 청정부도 마찬가지로 국기라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아래 자료에서 알 수가 있다.军旗是一个国家军队的标志,是一支军队的荣誉所在。清政府时中国并没有现代意义上的国旗、军旗,直到1881年9月在英国定购的“扬威”、“超勇”两艘巡洋舰回国后,为和国际接轨李鸿章经清廷批准制定了军旗、国旗的质地、章色。万年国旗为羽纱质地,正黄色,用羽纱镶嵌青色五爪飞龙,龙头向上,分为大小四号,头号横长1丈5尺6寸,宽1丈6寸5分;二号横长1丈3尺9寸,宽9尺5寸;三号横长1丈1尺5寸,宽7尺6寸;四号横长9尺6寸,宽6尺三寸。军旗提督用五色长方旗,诸将用三色长方旗,上角饰以锚形。위 글을 풀어보면 "清政府时中国并没有现代意义上的国旗、军旗" 청조(淸朝) 역시 현대적인 의미의 국기(國旗), 군기(軍旗)가 없었다고 했다.다만 1881년 9월 영국에 주문한 '양위(扬威)', '초용(超勇) 명칭의 순양함(Cruiser:巡洋艦)두 척이 귀국할 때까지, 국제접궤(외교가)인 이홍장(李鸿章)관리하에 청나라 정부(清廷)가 군기를 제정 비준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때 조선이나 청조(청정부)는 별도의 국기를 1881년까지 공통적으로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이 시기에 이홍장(李鸿章)은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소위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자유자재로 우군과 적군이 없이 변신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역사기록에 나타난다.서양세력들을 등에 업은 이홍장(李鸿章)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휘하인 양무파(洋務派)관료들을 지배하고 사적군벌을 양상하며 북양수사(北洋水師)라고도 하는 북양해군(北洋海軍)를 창설하였다.함대를 사들이고 하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하는데 이홍장은 유대자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1644년 명조(明朝)를 멸망케하고 세워진 청조(淸朝)를 서양해양세력들은 청정부(Qing Government)라고 지칭하였고 또 다른 명칭으로는 청군벌(清軍閥) 또는 북양해군(北洋海軍), 북양정부(北洋政府)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반식민지, 반봉건사회에서 사적 무장력을 가지는 군벌(軍閥)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서양제국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권한을 확대코저 하는 것이며 제국주의의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거나 민중에 대한 수탈적 방법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 것이다.이러한 배경은 강화된 지방분권적 경향과 정통적 권위를 갖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부재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바로 대조선이 힘을 잃고 와해될 때이며 이때 우후죽순처럼 각자의 국가만들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1894년 청일전쟁이라고 하는 갑오전쟁(甲午戰爭)이 발발하여 그 이듬해 북양함대가 압록강해전(Battle of the Yalu River)으로 전멸당하고 정여창(丁汝昌:1836-1895)제독이 자살하면서 끝내 패배하면서 이홍장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하관조약(下關条約)을 맺고 북경조약으로 산동반도를 일본에 내어주었던 상황에서 청조의 대표격인 이홍장(李鴻章1823-1901)은 난데없이 1896년 영국을 방문하고 당시 영국여왕으로부터 빅토리아 훈장(鎻章:Royal Victorian Order)을 수여 받았다는 사실에서 보면 이홍장은 청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영국을 위해 일했고 때문에 수훈훈장을 영국여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그의 행동에 많은 의문점을 남기는 것이 사실이다.때문에 훗날 중국인들은 이홍장을 반역자라고 낙인을 찍는다.공교롭게도 동양인에게 수여가 최초라고 알려진 빅토리아훈장은 이때 처음 제정하였다.처음 제정한 훈장을 그것도 동양인 이홍장에게 공훈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그러나 신중국 자료에는 이를 황가기사훈장(皇家騎士勳章)이라고 명칭하고 있는 것은 빅토리아여왕의 자격문제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고려가 황실이라는 사실은 이것으로 증명된다.실제로 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8 "에서 고려(高麗)의 야간(夜) 큰 전쟁에서 우진(牛陣:소를 이용한 대진)으로 승리한 전도(高麗月夜大戦牛陣得勝全圖:Victory with cattle during the night in Korea war)를 볼 수 있었고 조선군(朝鮮軍)은 각 군영제를 5군영(五軍營)로서 전영(前營), 후영(後營), 중영(中營). 좌영(左營), 우영(右營)의 다섯 영(營)으로 나누거나 또는 지방에 따라 중영(中營)을 뺀 4영군기(四營軍器)로 하거나 아니면 좌영(左營), 우영(右營), 중영(中營) 등 3개 진영으로 나누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어 위 삽화그림에 좌영과 우영의 깃발이 보이는 것은 바로 조선 군영제라는 것도 알 수가 있었고 고려가 조선병영을 이끌고 전쟁을 하였고 청은 고려임이 명확하게 밝혀졌다.즉 청일전쟁이 아니라 갑오전쟁이라 한 것은 바로 고려를 상대으로한 서양일본과의 전쟁임을 풀어 볼 수 있는 것이다.이때부터 중국부흥이란 기치를 내걸며 순문(孫文:1866-1925)등에 의해 국민당 전신인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고 바로 본격적으로 앵글로계인 만주족을 축출하고 중화회복운동을 하였고 이를 동조한 세력들은 마침내 신중국을 만들기 시작하여 1894년에는 청일전쟁(동학혁명)시작되어 1895년 3월에 종결되고 난 후 청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였으며 그해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시해사건이 발생하면서 불안해진 고종(高宗)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하던때이다.다시 언급하지만 본 블로그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2 "에서 박견(狛犬)으로 본 고려(高麗)는 당(唐)이고 중국(中國)이라하였다.중국천자의 가문을 황가(皇家)라고 하였다면 당연히 고려 또는 상속한 조선왕가가 로얄(황실)이 되어야 하지만 잉글랜드의 하노버왕가(Hanover)나 빅토리아의 시가쪽 왕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Sachsen-Coburg und Gotha)를 본가로하는 빅토리아 여왕이 결코 황가(皇家)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하늘아래 임금이 둘이 될 수 없듯이 동서양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속에서 천자 즉 세계통치자의 황가(皇家)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때문에 잉글랜드가 이러한 삼한 정통성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서양일본 천황제(天皇制)로 보완하려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본 블로그 글 "동조선과 서조선 그리고 광동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8 "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1910년 한일병합은 정한론(征韓論)의 완성이며 일본제국 관직명에서 특이하게 훈독(訓讀)을 사용하였고 옛 중국이라고 하는 수당(隨·唐)에서 사용하였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 사실과 당명(唐名)과 중국의 품계제 위계(位階)를 가졌다는 것은 스스로 중국체계를 갖춘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었다.현재 유럽서양세력들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범국이면서 패전국인 일본천황을 없애지 않고 그대로 유지시킨 이유가 바로 이러한 부족한 정통성의 문제를 없앨 수가 없었던 것이고 또한 브리티시(British)라는 조선체제를 그대로 전통유럽왕실계보로 보존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심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현재 한반도역사학자들이 말하길 "고종은 왕가(王家)를 대한제국을 건립하면서 황가(皇家)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국가(國家)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따질 때 대단한 모욕과 같은 반인륜적인 비유가 아닐 수 없다.본 블로그 글 "1890년에 영국인들이 말한 'COREAN 시대(Era)'라고 한 의미http://blog.daum.net/han0114/17050588 "에서 광서제(光緖帝)는 겨우 4살 되는 나이에 재위하여 1880년 9살 되는 해까지 황제자리에 있었지만 거의 친정은 할 수 없었으며 즉위 1874년부터 1881년까지는 적모(嫡母)인 동태후(東太后)가 섭정하였고 조선이 해체되던 시점인 1881년부터 1889년까지는 큰어머니이자 이모이기도 한 서태후(西太后)가 섭정을 하여 신중국을 동태후(東太后)라고 한 것으로써 서양을 서태후(西太后)라 한 것이라면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볼 때 서태후는 즉 빅토리아여왕이 1881년부터 집권했다고 할 수 있다.어쨌던 영국대사관이 만든 이 초석(礎石)에는 그러한 모든 시대를 중국시대, 혹은 빅토리아시대라 한 것이 아니라 코리아시대(Corean Era)라 하였다.또한 청조(淸朝:1616-1912)를 연호가 순치(順治)에서 강희(康煕)로 바뀌는 1662년부터 따로 볼 필요가 있는데 금(金), 청(淸)이 신라(新羅)를 잇고자 한 것처럼 바로 파사국(波斯國) 즉 페르시아의 전통풍습을 고집한 청조는 대조선 서쪽에서 일어난 강씨국(康氏國)이라 하여 아랍계임을 알 수가 있다. 고려의 군사들이 터본을 두르고 있는 것을 볼 때 페르시아기풍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었다.본 블로그 글 "어르쇠 흑요석(黑曜石)과 아라사(愕羅斯)정체http://blog.daum.net/han0114/17050711 "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면에서 활동한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 's Bay Company:1670-1869)가 지목이 될 수밖에 없으며 1670년에 설립이 되었다는 사실과 시기적으로도 일치하며 이들의 실체가 바로 청교도(淸敎徒:Puritan)세력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때문에 청조(淸朝)는 1662년부터 또 다른 세력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그리고 손문이 이질적으로 적대시하여 만줒족을 축출해야 중화주의가 세워진다는 원칙과 관계된다 할 것이다.그렇다면 위에 먼저 게시한 그림에서 대청국기 즉 청조국기라고 하는 형태를 한번보자.위 그림에서 보듯이 황룡(黃龍)이 아니라 바탕만 황색이고 다섯개의 발톱이 새겨진 청룡(青龍)의 깃발이다.왜 청나라의 국기는 푸른 용, 청룡(青龍)이 그려져 있을까?북양군벌의 수군수사(水軍水師)의 깃발을 보면 북양수사전국장령기(北洋水師全軍嬇(將)領旗), 북양수사분군장령기(北洋水師分軍嬇(將)領旗), 선척기 상기(商旗)정도가 있을 뿐인데 특히 수군수사(水軍水師)깃발에서 새겨진 글에서 원문에는 장수 장(將)이 아니라 한자 궤(嬇)가 붙어 있으며 여자 녀(女)자에 귀할 귀(貴)자의 파자가 되어 전서(篆書)를 보면 재물을 두 손으로 잡아당기는 모양을 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는 귀한 신분이나 재물을 가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자희(慈禧)서태후(1835-1908)가 지휘하는 북양수군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것은 충분히 빅토리아여왕(Queen Victoria, Alexandrina Victoria;1819 -1901,재위:1837-1901)과 대비될 수 있는 사실이다.물론 나중에 동양의 빅토리아가 방해가된다 생각한 서양세력들이 정리가 필요했을 때 서태후는 팽당하는데 에드먼드.T.백하우스(Edmund Trelawny Backhouse:1873–1944)의 저서에서 서태후(西太后·1835-1908)의 죽음은 이질이나 노환이 아닌 측근인 군벌 원세개(袁世凱:1859-1916)의 총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서양지배하는 역사에서 사용가치가 없는 존재를 측근을 이용하여 제거한 것이다.청나라 국기가 황룡이 아니라 청룡이라는 사실에서도 본 블로그 서두에 게시한 조선문장(朝鮮紋章)에는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황룡이 도안되어 있고 이것을 조선임금 어의(御衣)에 새겨 사용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 오히려 조선이 황룡(黃龍)을 사용하는 천자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동양의 청조(淸朝)는 페르시아세력과 앵글로계 만주족 즉 동서양의 두 개의 실체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1662년부터 세력화한 잉글랜드에 의해 조정되었거나 흡수되었다는 사실이다.1660년 왕정복고(Restoration)에 따라 찰스 2세(Chalres II,1630-1685,재위:1660-1685)가 귀국하여 이듬해 즉위하였다. 결국 해양세력인 만주족 청(淸)은 서양세력들에 의해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우리가 여기서 다시한번 정리하고 보아야 할 것은 명조(明朝)가 건주여진(建洲女眞)출신 노추(奴酋)누르가치(奴兒哈赤)에게 멸망하던 시기는 1620년 순수, 순결주의[Word origin of 'puritan'C16: from Late Latin pūritās purity]청교도(清教徒:puritan)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창하던 찰스1세(Charles I:1600-1649,재위:1625-1649)의 탄압을 피해 아메리카대륙에 상륙하던 시기와도 일치하여 본래 청조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청(清)이라는 한자는 해양세력의 체제 명이고 교황(敎皇:Pope)중심이 아닌 순수, 깨끗함을 앞세운 복음중심의 청교도(淸敎徒:Puritans)는 엘비온(Albion)과 연결되며 이 잉글랜드세력은 청(淸)을 조선(朝鮮)의 중앙정부 노릇을 하게 만든 세력으로 이 잉글랜드 왕조가 인도(印度)와 브리티시를 묶으며 빅토리아여왕을 등장시켜 세계통치국이었던 대조선의 왕권을 장악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그 이후 하는 수 없이 조선을 승계한 대한제국과 분리된 만주국(滿洲國)의 전신으로 빅토리아계 러시아왕조와 밀접한 관계가 이어지고 대한제국과 연계된 상태에서 러일전쟁은 이러한 틀을 완전히 깨버리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러시아는 대한제국은 하나라고 볼 수 있고 일본 즉 서양연합세력에게 패한 러시아는 대한제국으로부터 물러나 결국 모든 권한이 서양연합세력에게 넘어가 버렸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마건충: "내가 생각하건데, 귀국의 국기는 백성을 상징하는 백색 바탕에 신하를 상징하는 청색 구름과 임금을 상징하는 붉은 용을 그리되, 우리 청국기의 용 발톱이 5개이니, 4개로 구별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청나라의 국기에 그려진 용의 발톱은 5개이며, 조선을 속국으로 보는 의미에서 4개의 발톱을 그릴 것을 권했다.) [태극기역사]이것은 소위 한반도역사의 청나라 속국이어야 하는 전제로 엮어놓은 허구이다.방위를 나타내는 사신(四神) 중 하나로 동쪽을 담당하는 신을 청룡이니 청룡은 동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권위의 상징인 용 문양은 계급 봉건사회에서 황제를 나타내기에 사용자체를 제한했다하지만, 많은 사람이 용 문양을 좋아해 신분에 따라 발톱의 개수를 달리해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알려지는 것도 사실 한반도 역사가 생성된 것과 같은 것이다. 황제는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 태자나 제후국 왕은 4개 발톱인 사조룡(四爪龍), 민간에서는 삼조룡(三爪龍)을 사용했다. 그래서 오조룡이 그려진 조선임금의 곤룡포(袞龍袍)는 중국 황제가 내려주는 것을 예로 여겼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꿰맞추려하는 헛소리다. 전자에서 거론했지만 대청국기라는 위 그림을 보면 룡기(龍旗, The Dragon flag)라 했지만 청룡이다.황룡기가 아니다.상기 그림을 보면 위의 것은 룡 발톱이 4(1872)개이고 아래 것은 5(1890)개로 청국기가 다르다.오히려 1872년에 그려진 청국기에는 발톱이 4개가 그려진 것을 감안할 때 위 논리가 전혀 맞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청조가 처음 국기를 제작하였다고 하는 것은 1881년이다.청룡의 삼각깃발이 아닌 고려국기가 청조국기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지금까지의 태극기 상식과는 완전히 괘를 달리하는 것이지만 고려는 동국연합(同君連合)성격이 강한 중원체제라는 사실이다.그래서 조선(朝鮮)에서는 이를 중앙조정(中央朝廷)이라고 했다.때문에 위 사진에서 대청국속(大淸國屬)이라는 것은 일제가 첨부시켜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그리고 동양역사의 삼한천자의 정통성으로 받아들이는 상징 드레곤 즉 용(龍)을 황실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은 청조선[清(支那)朝鮮]뿐만아니라 잉글랜드 브리티시(British)역시 용(龍:Dragon)을 사용한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본 블로그 글 "방울뱀(Rattlesnake, 響尾蛇)으로 본 마지막 대조선(大朝鮮)http://blog.daum.net/han0114/17050522 "에서 밝혔듯이 미국독립전쟁이전 발행한 일간지 The Massachusetts Spy, or Thomas's Boston Journal Newspaper 에 실린 미국의 방울뱀과 영국의 드라곤의 대립관계까지 설명을 하였다.미국의 방울뱀은 원주민들의 풍이족(風夷族)의 관습이 그래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잉글랜드의 왕가 상징은 고려개(高麗犬), 사자(獅)이다.그러나 브리티시 상징은 분명히 드레곤이다.고려왕실의 상징을 그대로 이어 사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자이다.태극(太極)은 삼한의 정통성과 고려를 연결해주는 상징임이 틀림없고 만주(滿洲) 여진족인 청조(淸朝)가 태극기를 사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 일제가 이를 조작했다고 본다면 청조가 태극기를 사용한 고려국기(高麗國旗)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려는 스코틀랜드와 정확히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본 블로그 글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5 "에서 이미 풀어본 사실이다.잉글랜드왕가는 북유럽 노르만, 플랜태저, 랑카스터, 요크까지 혼존하다가 비로서 튜더왕가에서 1603년에 대가 끊기고, 1707년에 대가 또 한 번 더 끊겨 동군연합(同君聯合:personal union)이란 이름아래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이란 체제가 생성되었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코리아체제와 같은 것이다.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이라 했지만 이것은 코리아연합(United Corea)체제가 더 무게가 있는 명칭이라 여겨지는 것으로 그레이트브리튼은 연합, 연방국가체제라는 것으로써 바로 코리아연합, 연방체제를 말하는 것이다.본래 유럽역사는 조선역사보다 고려역사를 더 많이 포함시켜 놓았다고 볼 수 있다.예를들어 인도유럽어족의 한 일파인 켈트어파를 쓰는 아리아족을 가리키는 켈트족(Celts)과 연결되면서 프랑스 북부지방 골족(gol)과 갈리아(Gallia)와 이어지는 고로(高盧:골)는 고구려민족임을 알 수가 있고 프랑크왕국 분열되고 난 후 고려태조 왕건재위와 일치하는 군트람(Guntram the Rich:920-973)에 의한 신성로마제국 성립은 신라(神羅)에서 고려(高麗)로 이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기때문이다.삼태극과 세계사상조선시대(朝鮮王朝)의 어기(御旗)를 분명 삼태극이라 한다.이것은 시킴(Sikkim)왕국의 상징이며 티벳(Tibet)의 국기에 나타나는 문양이기도 하다.자료에 따르면 삼태극 사상이 한국인의 사유체계(思惟體系)의 중심을 이룬 것은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사상을 통해 태동한 민족의 시원과도 관련이 있고 기독교 카톨릭의 삼위일체(三位一體:Τριάδος )와도 연결되며 삼국시대 무렵, 음악, 미술, 건축 등 각종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음양 태극이 등장하기 이전, 당조(唐朝)시대까지 삼태극은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천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이론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한서(漢書卷二十一上)의 율력지(律曆志第一上)에 보면天之中數五,地之中數六,而二者為合。六為虛,五為聲,周流於六虛。虛者,爻律夫陰陽,登降運行,列為十二,而律呂和矣。太極元氣,函三為一。極,中也。元,始也。"하늘에서 중앙이 5 이고 땅의 중앙은 6 이라 이 둘이 합하니 6 은 빈것이며 5 는 소리이라 돌고 흐름은 6 이 빈것이네. 빈것은 괘로 다스리니 음양이며 오르고 내림의 움직임이 늘어세운 12 이 율려와 같다.태극의 본래 원기는 3 을 담아 1 가 되는 것인데 끝과 중앙을 말하며 처음 시작이다." 즉 "태극원기는 셋을 담아 하나가 된다(太極元氣, 函三爲-)"는 것은 태극의 하나가 움직이 시작되면 삼태극 관념이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이러한 관념은, 송대(宋代)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이래로 음양 2기(氣)만을 포함하는 음양태극 관념으로 변화되었다고 설명한다.즉 태극의 본래 원리는 삼태극임을 알 수가 있다.이 삼태극을 불선에서는 우선(右旋) 또는 희선(喜旋)이라 하는 것으로 난디아바타라(Nandy-avatara)라고 하여 원이나 각을 중심에서 선을 그리면서 하나의 통일된 질서를 형성하는 형상이며 이를 "기쁨(Nandy)"의 "신(神:avatara)"이라고 해석한다.또한 삼태극은 다르마의 수레 세바퀴(法輪), 뱀·멧돼지·새를 묘사하거나 무상(無常)·무아(無我)·열반(涅槃)를 뜻하고 규율·명상·지혜를 의미하거나 부처(成佛)·달마(法)·승가(僧迦) 뜻하며 본질(근저)·자연·원기(에너지)를 뜻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바탕(Ground)·과정(Path)·결실(Fruit )을 나타낸다 하였다.여진족은 앵글로계통의 서양왕조라 해도 과언아니기 때문에 빅토리아여왕과도 연결되어야 한다.그외 삼태극과 궤를 같이하는 서양문양들을 보면 미노안(Minoan)시대의 시칠리아의 트리스켈리온, 켈트 트리스겔리, 켈트족의 나선형 삼위일체, 미케네 문명의 그릇, 리키아의 동전, 팜필리아의 금화, 그리고 피시디아와 같은 많은 고대 문명에서 나타나는 켈트 족의 트리스켈리온(Triskelion), 영국 잉글랜드 남서부의 데번(Devon)교회당 세 마리 토끼(Three hares), 삼족오(三足烏:Three-legged crow), 원형을 그리며 도는 모양 토모에(Tomoe), 몰타(Malta)의 거석 신전의 삼엽형(三葉形:Trefoil)도형, 고대 그리스의 정족(鼎足), 삼발이(三脚臺:Tripod)삼각대를 장식, 고대 파간(Pagan) 켈트족의 이미지에서 개조된 종교적 상징, 노르웨이의 상징인 발크누트과 비슷한 3개의 타원(호(弧))으로 만든 도형 트리퀘트라(Triquetra), 그외 아즈텍 스와스티카(Aztec swastika), 바슈키르어(투르크 어족:Bashkirs symbol )의 태양과 다산의 상징, 이탈리아 볼세나, 에트루리아(Etruscan)장식등에 나타난다.이러한 것들은 삼한 삼태극과 고려연합이 그대로 이어짐을 알 수가 있다.고려를 치나스타나(Chinasthâna) 또는 치니스탄(震旦;Chinistan)이라고 했다는 것은 삼한(三韓)조선(朝鮮)을 다르게 표현한 명칭으로 진단(震壇) 또는 진역(震域), 진국(震國), 진단(震旦)이라 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동방(東邦)중심의 역사를 뜻하는 것이다.그렇다면 고려대대학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1898년의 통상약장유찬(通商約章類纂)에는 대청국기[大淸國旗]와 북양수사전군궤령기[北洋水師全軍嬇領旗], 북양수사분군궤령기[北洋水師分軍嬇領旗], 상기[商旗]를 싣고 있고, 그 바로 뒤에 태극기를 대청속 고려국기‘大淸屬 高麗國旗’라고 한 사실에서 이 고려국기(高麗國旗)가 과연 조선(朝鮮)을 나타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고려를 나타내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한반도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속(屬)을 속국(屬國)이란 개념으로 볼 수 없고 동등하거나 고려(高麗)가 청(大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그런데 여기서도 이상하게 고려(高麗)가 아닌 조선(朝鮮)의 태극기를 청나라 사신 마건충(馬建忠:1845-1900)이 대신 도안하여 그려준 것이라고 설명한다.조선국기를 청나라 정치인이었던 마건충이가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마건충이가 태극을 중시했다는 사실은 여기저기 묻어나는 것이며 청조가 신라와 고려(高麗)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마건충이 고려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명확한 것은 세계통치국이었던 당시 조선은 국기가 필요하지 않았을 때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그리고 청조(淸朝)가 만주족이라고 하여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노르만족, 앵글로계 유럽인들의 중심의 국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 적이 있던 것처럼 브리티시의 왕가가 근저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북양수사 청군벌(清軍閥)의 대표격인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 1896년 브리티시를 방문하고 당시 빅토리아여왕으로부터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 받았다는 사실등이 이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마건충이 태극(太極)에 조예가 깊었던 것은 켈트족(Celts)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뿐만아니라 삼태극(三太極)의 문양이 범 세계적으로 강하게 퍼져 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청조와 하노버왕가 동질성본 블로그 글 "하노버(HANOVER)의 역사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2 "의 청교도(淸敎徒:Puritans)와 청(清)나라, 후금의 만남이란 소제에서 청교도혁명이라 하거나 또는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1642-1651)이라고도 하는 충돌에서 1차(1642-1646), 2차(1648-1649), 3차(1649-1651)의 결과가 찰스1세(1600-1649,재위:1625-1649)의 처형으로 이어지는 것은 마치 조선의 병자호란 때 제16대 임금 인조(仁祖,1595-1649,재위:1623-1649)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수모당하는 모습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이때부터 잉글랜드왕가는 스코틀랜드왕가에 피신상태에 있었다는 과정과 또한 일맥하는 것이다.오히려 이때부터 만주족인 홍타이지(皇太極)숭덕제(崇德帝,1592-1643,재위1626-1643)가 국호를 청(淸)으로 개칭하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만큼 하노버왕가는 청(淸)으로도 분장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물론 이러한 논리는 태극기 조차 청나라가 사용했을 가능성을 더한다.국가의 국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이제 갖 태어난 국가입니다. 앞으로 이런 국기를 가질 테니까 잘 보아주세요. 하는 의미말고는 당시상황에서 크게 볼 의미가 없는 것이다.유럽국가들이 역사와 전통이 있는 것이 아니다.유럽국가들은 근세기에 생성된 회사체제의 국가들로써 각 회사가 근거하던 도시국가체제인 것이 확실하고 그 도시에는 시민국기라고 하는 도시상징기가 존재했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사실상 국기는 선적기가 변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근세기 서양국기들은 거의가 이 선척기(船隻旗:vessels flag)에 의한 것으로 선척은 바다를 운행하는 거대한 배를 이른 것이며 상선(商船)등에 꽂아 식별을 하던 것들이 오늘날 국기가 된 경우가 많다. 이를 상선기(商船旗)라고도 하는 것이다.본래 선척기라 함은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로써 엔사인(Ensign)이라 하는 것이다.이것은 오늘날 시민이라고 하는 국민국가를 표식하는 것으로 해양세력의 무역사무소가 차려진 곳의 도시(city) 또는 소도시(town)의 읍(邑)을 표시하는 깃발이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국가라고 확대해석하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본 블로그 글 "일본 상선기(商船旗)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0 "에서 밝혔듯이 해양세력들이 깃발을 함선에 달고 해양을 누비고 다녔다는 것은 첫째 해적으로 보지 않도록하는 장치이며 세계통치국인 조선제정체제가 인정하는 무역회사의 소속 함선인가를 나타내는 식별표 같은 것이며 그것을 통해 통관과 무역관리의 수단과 방법이 정해지게 하는 중요한 알림표식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다고 본 블로그에서 주장했다.그러니 19세기에 난립하던 국기들은 모두 이와같은 성질의 선척기 또는 상선기라고 보면 정확하다.그것은 지금의 유럽국가 어디어디를 비교하여 선적기와 국기를 동일하게 확대시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위 본 블로그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조선은 해양세력들을 통제하는 제정체제였기 때문에 이들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틀림없다.그래서 그들에게 통관, 즉 해안을 출입하려고 한다면 반듯이 선척이나 상선인 함선에 표식기를 꽂아 조선관리들이 선박정체를 식별이 가능하도록 통고에 의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우리가 한국(COREA)이라고 하는 조선(朝鮮)은 적어도 1881년까지 세계산업의 중심지였다고 판단되며 때문에 온갖 함선들이 이런 식별표시를 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때문에 근세기에 서양해양세력들이 조선 주위를 그렇게 배회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이것은 펙트이다.서양해양세력들은 조선 수많은 해안도시에 직접 들어가 상행위를 하고 싶었지만 체제를 문란하게 할 위험성이 있다고 하여 아주 극소수의 해안 항구만 개방하고 그곳에서만 서양해양세력들이 상행위를 하겠금 제한했다는 것도 체제를 보호할 목적인 것이지만 현재 서양역사나 한반도 역사는 조선이 우물안에 개구리처럼 문을 안으로 걸어잠궈 쇄국하고 서양해양세력들을 일방적으로 막았다고 불평하지만 사실상 무질서한 서양해양세력들의 난립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북아메리카대륙 미국이란 거대한 땅을 생각해보라.그곳에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서양해양세력들이 기를 사고 달려들려고 했을 것이 뻔하지 않는가.왜 한반도만 쳐다보고 당시 상황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가.조선의 해관(海關)은 적어도 아편전쟁이후 일부를 풀어준 것으로써 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이며 오늘날의 세관과 마찬가지이고 무조건 조선의 해안에 출입하려고 하는 선척이나 상선 선박에 그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표식하도록 한 것이다.그러하니 엄밀하게 따진다면 조선에서 조선항구를 통행하는 모든 선박은 선척기를 부착하도록 하였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특성에 맞게 선척기, 즉 상선기를 만들어 꽂아 조선관리의 허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어야 근대사가 말하는 국기의 생성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제한조치는 일본이란 거대한 해상무역연합체가 위협으로 느끼거나 압박감을 가졌다면 그들에 의해 국기가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때문에 대조선의 역사가 그들에 의해 해체가 되고 역사뒤안길로 사라지게 하면서 국기마저 후진국 생성과정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에서는 한결같이 1881년을 기준으로 대조선이 해체된 것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때부터 조선의 힘이 많이 쇠락한 상태로 황실이 풍지박산되었을 확률이 높다.즉 1881년 황실권한이 대폭 제한되어 조선황실의 제정상태가 마침내 제기능을 할 수 없을 만치 어려운 상태에서 만약 서양해양세력들의 자본으로 대체되었다고 하면 그 이후 상황은 우리가 충분하게 상상할 수 있는 역사가 될 수 있다.결국 청조는 조선을 속국으로 역사화된 동양왕조이다.그러나 청조는 잉글랜드의 하노버왕가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으로써 결국 조선을 하노버왕가의 속국으로 만들어 인도제국을 통째로 먹어버리고 인도황제권한을 하노버왕가의 마지막 여왕인 빅토리아여왕인 것처럼 역사전체를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것은 바로 전자에서 언급한 것처럼 브리티시(British)의 유대인출신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1804-1881)가 1876년 1월 1일에서 1876년 12월 31일까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대리청정을 수행하면서 신장 152㎝의 영국여왕 빅토리아(Queen Victoria:1819-1901)에게 인도여제(印度女帝:Queen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Empress of India)라는 칭호와 왕관을 수여한 사실과 연결된다.이것은 청조(淸朝)말기 2대 황제를 섭정하며 국정을 농락했던 '중국의 마지막 여황제' 서태후(西太后:1835-1908)와도 관계가 있고 그녀의 죽음은 이질이나 노환이 아닌 측근인 군부 실력자 원세개(袁世凱)의 총격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어쨌던 이러한 극단적인 의혹이 가시화하고 있는 것은 청조(淸朝)말기의 주요관리들이 브리티시 즉 잉글랜드 왕가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레드크로스 깃발과 만주국(청)그렇다면 조선(朝鮮)이 가지고 있어야 할 국기를 밝힌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즉 조선은 브리티시 상징처럼 드레곤 즉 용의 상징성에다 발톱이 5개와 황룡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19세기 중반부터 독립국가, 민족국가들이 난립하기 시작했지만 이들 국가들은 모두 "COREA"란 원래 하나의 체제에서 담벼락으로 갈라놓듯이 갈라진 국가라는 것을 타고르 시에서부터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했던 사실이다.즉 타고르가 자신의 고국 즉 조국을 "COREA"라 한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본 블로그 글 "시성(詩聖)타고르의 정신적 지주(支柱)는?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1 "에서 말했듯이 그곳은 분리되지 않았던 체제 COREA 이며 그리고 시성(詩聖)타고르의 정신적 지주(支柱)라고 하던 바로 "COREA" 이다.얼마나 많은 선박들이 코리아 해안에 들락거렸기에 외국선박을 관리하는 선박이 별도로 필요할 정도였고 선박들을 개별적으로 식별하기 위한 깃발까지 고안하여 게양하고 운행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적잖게 놀란다.이와같은 것은 코리아가 세계 선박을 상대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때 엄청났던 실제 상황을 여실히 알 수 있는 기록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반도역사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던 그림들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사실에서 생소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이 깃발그림들이 사이트‘1871-1945 Version’에서 발견된 것에서 1871년이라는 시기를 볼 때 유태인계 상인 독일인 오페르트가 아직 한반도인지 알 수 없는 코리아(Corea), 즉 현재까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조선(朝鮮)이란 영역에 발을 디뎠을 시기 1866년 에서 불과 5년 정도 차이가 날 뿐임을 알 수 있어 그렇다면 위 그림의 깃발들은 오페르트가 조선을 방문할 시점에도 조선연안에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다시말해 오페르트가 조선을 방문하고 그린 삽화에 이 깃발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라는 이야기다.당시 코리아 영역 주요 항구 근처에 들락거리던 배를 감시하거나 유도하기 위한 함선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함선에 꽂은 깃발들이 위 그림 모양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이러한 조직적인 것은 근대사를 관찰하는데 상식이다.오페르트가 조선을 방문한 시기를 나열하면 처음 1866년 3월 영국인 모리슨(Morrison, James)과 함께 로나(Rona)호로 충청도 해미(海美)에 접근하였던 사실, 또 5개월 후 1866년 8월 영국상선 엠퍼러(Emperor)호를 타고 접근한 사실, 2년 후 1868년 5월 영국 상선 차이나(China)호를 타고 접근한 사실로 꼽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반드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오페르트가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A Forbidden Land, 1880>이라는 제목의 책은 1866년 8월 2차로 엠퍼러(Emperor)호를 타고 조선을 방문할 때 기록이기 때문에 정확한 년도는 1866년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어 이미 조선에서 위 깃발들을 사용할 때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책 서두에 등장하는 삽화인데 “The steamer at Anchor 'EMPEROR‘ at Kang-Wha Island, Kang-Kiang river, W.C. of COREA.”이란 하단 설명이 붙어 있는 그림이다.이 그림에서 첫째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십자 깃발을 꽂은 스팀기선(steamer汽船) 즉 외륜기선(外輪汽船)이 그려져 있다.물론 뒤 풍경에 관한 것은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기로 한다.우리는 위 그림삽화에 등장하는 이 목재 스팀(steamer)선 외륜기선(外輪汽船)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이 외륜기선(外輪汽船)의 최초발명자는 스코틀랜드인 제임스와츠(James Watt:1736-1819)이고 세계 최초의 기선에 의한 정기항로를 개설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1765-1815)인데 풀턴에 의해 진수되었으며 마침내 1807년 허드슨강(Hudson river:490km)에서 뉴욕(New-York)과 올버니(Albany)간을 정기 항행을 하였던 배가 아래 그림의 클러먼트호(Clermont號)이다. 그런데 강화도 앞에 정박해 있던 배가 목재스팀선으로 이 클러먼트호(Clermont號)와 같은 종류의 배란 사실이다. 이 배의 길이는 42m, 폭 4.3m, 흘수선 2m, 엔진은 20마력이었고, 시험항해 중에 4.5노트의 속도를 냈다고 한다. 이후 1816년에 증기선 엘리즈 호는 도버해협을 횡단했다 하였고 1818년 증기선 사바나호(Savannah)는 대서양을 건넜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 21m, 배수량 70톤, 기관 14마력 속력6노트인 소형 기선 엘리제(Steam ship Élise)호는 1816년에 영국의 뉴헤이븐(Newhaven)을 출항하여 난항 끝에 17시간을 항해하여 프랑스의 르아브르(Le Havre)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영국해협(English Channel)을 횡단한 기선이 되었다.배수량 320 톤, 길이 98 ft(30m)이고 기관 90마력인 사바나(Savannah)호는 1819년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 항구에서 출발하여 영국 리버풀을 목적지로 하여 대서양을 항해하는데 29일 11시간 만에 목적지에 닿았다고 한다.그것도 열대성바람과 해류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연기를 뿜는 스모크스텍(smokestack)이 점점 더 작아지고 휠이 하나 두개씩 붙여졌지만 장거리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왜그런지 설명에서 보면 이 기선의 평균 수명은 4~5년 정도로 짧고 이는 배가 약하게 만들어졌거나 유지가 허술하기 때문일 것이라 하며, 유목(流木)이나 다른 장애물과 충돌하여 가라앉기도 하고, 과열도 인해 보일러가 폭발하는 경우도 자주발생하였기 때문에 속력을 많이 낼 수 없었고 애초부터 거대한 대양을 항해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1810년에서 1850년까지 기선사고로 약 4,000명 정도가 사망했었다는 것은 이 기선이 주는 구조적으로 취약함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실제 이러한 기선(스팀선)의 형편이 1866년까지 크게 개선 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이것과 대비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866년 8월에 있었던 미국 상선(商船) 목재 스팀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평양에 나타났다가 군민(軍民)들에 의해 응징되어 불 태워진 사건이다.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의 사진을 보면 구조적으로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규모가 기존 소형 선박보다는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배수량이 614톤이고 길이가 388.1미터 (127피트 4인치)이며 승무원이 150 명이나 되었다는 것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룬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양을 넘나들 수 있는 배가 아니다.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크기규모가 늘어났다는 것은 1810년대 기선보다 훨씬 강화된 엔진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 만은 확인이 가능하다.그러하더라도 미국뉴욕이나 또는 조지아주에서 남아메리카대륙 혼곶을 휘돌아 동아시아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대한 태평양을 가로 질러 횡단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거의 불가능한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러한 이유로는 첫째는 탑승하는 사람들의 공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폭풍이나 해풍, 추위더위에 대한 기후문제뿐만아니라 우선적으로 배 자체의 신뢰성이 떨어져 누가 감히 보험을 여기에 투자할 자가 있을 것이며 실제로 지구 한바퀴를 돌아 가야하는 지겹고도 험한 항로길에 안심하고 탑승할 승객이 과연 몇이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이미 이 이야기는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 "에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이 스팀은 애추부터 북아메리카대륙 연안용으로 만든 것이다.때문에 대양을 횡단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이야기다.이 배의 또한 결함으로 알려진 것은 배를 타고 승객들이 갑판으로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이다.연기가 갑판전체를 휘감고 있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런 식으로 어떻게 태평양을 횡단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며 어떻게 운행이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좁고 좁은 공간에서 견딜수가 있겠는가.적어도 철로 만든 배가 등장하면서 어지간한 암초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선체와 고속엔진으로 발전하기 전 까지 절대로 동아시아대륙으로 서세가 진입할 수 없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하였다.조선이 해체되던 시점 1881년까지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동아시아대륙으로 넘나들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 때문에 근세기에 동아시아대륙이라고 하는 위치에 서세들이 감히 목선이나 목재 기선으로 한반도에 접근하였다는 사실 모두가 거짓임에 틀림이 없다 해야 맞다.그리고 당시 어떠한 자료에도 이 증기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적이 없음도 강조하고 싶다.태평양을 횡단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오페르트의 기행문이다.그가 실제로 코리아에 방문하기 위하여 이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반도역사에 마취된 사람말고는 없다.그의 저서에는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가 엠퍼러(Emperor)호를 타고 1866년 8월 조선을 방문하고 난 후 프랑스함장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1812-1882)는 군함 3척을 이끌고 같은 해 9월18일부터 10월1일까지 서울 양화진과 서강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정찰과 수로탐사를 한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프랑스는 다시 10월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면서 군함 7척, 함재대포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 안내인으로 리델신부(Ridel,李福明:1830-1884)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과 최인서(崔仁瑞) 및 심순녀(沈順汝)등 3명을 앞세우고 강화도를 침략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데 이것 역시 한반도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현재 신중국, 한반도, 열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대륙에 1881년 이전 시기에 서세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렸다는 것을 확인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크지만 그렇다고 하여 엉터리를 진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여기저기 그려 오려 붙인 삽화, 그림 따위가 있으나 그것에 의존할 수도 없으며 더군다나 해적들이 남긴 항해일지 따위가 있다 하더라로 도덕질, 파괴, 살인을 일삼던 무리들의 기록을 역사증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삽화, 그림, 지도, 항해일지, 기행문일체가 근대사 전체를 움직이거나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좀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이 프랑스 함장 로즈에대해서도 의문점이 산재되어 있다.그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앞세운 군함7척중 하나인 그에리어(Guerriere)는 소형구축함(Frigate)으로 1,092 tons, 승무원 350을 승선할 수 있는 것으로 1812년에 목숨을 다한 배라는 사실과 이 그에리어는 5등 프리게이트(fifth-rate frigate)로 분류된 것으로 취급이 쉽고 또한 화력을 겸비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보다 대형함대의 적을 헛점을 찌를 수 있고 반면 이 프리케이트 보다 소형의 적에 대해서는 화력으로 압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만들어진 함선으로서 경비나 교전국 해운을 혼란시키는데 사용되었다는 배이다.또한 로즈는 프랑스 멕시코 개입전쟁(French-Mexican War:1861-1867)이 일어나던 싯점에 멕시코에서 복무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런데 난데 없이 극동사령관이라고 하여 요코하마에 근무했다고 하니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 아닐 수 없다.본 블로그 글 "요코하마가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3 "에서 요코하마를 멕시코라 했을 가능성에서 멕시코는 근원적으로 도시이름이라는 어원에서 이를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또 하나는 오페르트가 타고 온 엠퍼러(Emperor)호가 영국 상선이라고 분명히 했다.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영국배를 표시하기 위해 배의 전면에 레드 크로스, 붉은 십자가가 꽂혀 있는 것을 삽화에서 목격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영국 함선부류의 기록에는 이 엠퍼러호가 등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똑 같은 증기선에서 똑같은 이름인 엠퍼러호가 다른 삽화에 그려져 있는데 바로 프랑스 배이다.위 삽화 그림의 하단 설명을 보면 분명 도버에 도착한 것을 시민들이 나와 환영을 하는 모습인데 이것에는 프랑스 국기가 달려있고 아래단 설명으로 이는 엠퍼러호(Emperor) 와 엠프레스호(Empress)임을 알 수가 있다.여기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때문에, 어찌하여 똑 같은 증기선에 똑 같은 이름이 영국상선에 엠페러라고 하고 프랑스 상선에도 엠퍼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당시 배를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에 절대로 같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다.배가 특정지역이 아니면 건조가 불가능한데 이러한 정보가 손바닥보듯 알려진 상태에서 이름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삽화 두 그림 중 하나가 잘못그려졌다는 반증이다.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영국, 프랑스란 국명이 근세기에 생성된 것이라면 그것을 다 포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라는 역사주체임을 알 수 있고 조선 영역에서 만들어진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절대로 같은 이름을 같은 종의 배에다 붙이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그렇다면 제일 위 그림에서 지적한 강화도 앞에 정박한 스팀선(steamer船) 외륜기선(外輪汽船)엠퍼러(The steamer at Anchor 'EMPEROR)에 꽂혀 있는 깃발은 조선의 깃발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이미 앞 깃발 사이트에서 보듯이 형태적으로 거의 비슷하다.그리고 1871년부터라고 하였으니 그 이전에도 흰바탕에 붉은 흡사한 십자선을 그려놓은 깃발을 등대 역할의 작은 배, 등대선 깃발용으로 또는 출입국관리해군선박에 꽂는 깃발용으로 그리고 코리아(朝鮮:Corea or Korea) 령내에서의 항로표식(航路標識:Beacon)을 제어 관리하는 선박에 꽂는 깃발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에서 이러한 형태적인 것에 기본은 래드 크로스라는 것을 추측하고 예상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레드 크로스 깃발, 즉 붉은 십자가 깃발(Red Cross flag)은 서양 특히 잉글랜드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사실이 지금 밝혀지고 있다. 나가기이제 이 긴 글을 정리하자.위 그림에서도 잉글랜드의 래드 크로스 깃발이 서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만주국 군기(滿洲國軍旗:manchurian army red cross flag)가 래드 크로스 깃발과 거의 같다.만주국이 어딘가.바로 손문이 축출하고 중화를 다시 세우겠다고 하던 만주국이다.손문은 한족이니 북방 민족을 오랑캐라 하여 무시해서 그런 기치를 내걸었을까?아니다.계통적으로 동양역사와는 결이 다른 종족이라는 말이다.이 만주국을 지금 동아시아대륙 동북삼성이라고 생각하면 반도역사와 다를 것이 없다.만주는 아열대지방이다.이 글을 읽는 분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본 블로그 글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 "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 "에서 주창했듯이 중원(中原)이라고 하는 곳도 멕시코 영역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곳에서 강남(江南)과 망강남(望江南)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길다란 목구멍 처럼 보이는 곳에 후금(喉衿)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이 후금 즉 목구멍을 만주(滿洲)라고 하였던 사실도 이제 알아 볼 만한 때가 되었다고 본다.그렇다면 만주국은 바로 중앙아메리카연합 영역이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그 곳에서 사용하던 만주군(滿洲軍) 깃발이라고 하니 이 영역들은 모두 삼한영역에 들어가는 것으로 주체는 분명 코리아이고 코리아 깃발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그것이 바로 상징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깃발 자체가 오래전부터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당시 이 깃발을 사용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고 보이고 모든 선박에 당연히 이러한 표식을 즐거이 달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삼한이 해체되고 난 후 근세기 역사를 틀어 쥔 서세들은 그들 입맛에 맞는 깃발들을 차용하여 제것 처럼 만든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실제로 그러한 역사가 존재한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근세기에 일본제국이 만주국을 괴뢰정권으로 만들어 지금의 동북삼성에 깔아 놓은 역사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러니 일제는 이름만 있을 뿐이지 실체는 없는 것은 일본역사가 일본사기(史記)로 존재하는 것 같아도 실체가 없는 것과 동일하다 할 것이다. 이 실체들은 모두 서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창고에 존재하는 것들일게다.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래드 크로스 깃발이라 할 수 있다.이렇게 볼 때 물론 빙산의 일각인 내용이라고 하겠지만 만약 본 블로그의 주장들이 사실로 들어난다면 감히 단언컨데 근세기에 일어났다고 하는 동아시아 역사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단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이것이 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당저(當宁)가 주는 의미-조선의 임금들은 전부 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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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저(當宁)가 주는 의미 글쓴이:한부울 조선의 임금들은 전부 천자이다. 当宁(當宁) 《ZDIC.NET 汉 典 网》2.指皇帝。 唐 白居易 《画元始天尊赞序》:“﹝皇帝﹞命设绘素,展仪形,五彩彰施,七寳严饰:所以表当宁之瞻仰,感在天之圣神。” 宋 陈造 《赠钱郎中》诗:“孤忠当宁知,宏图时宰领。” 明 李东阳 《同年祭陆鼎仪文》:“疾疢婴其志意,造化歛其形躯。当宁临轩而嗟悼,士林掩涕而欷歔。” 위의 자료를 제공하는 "ZDIC.NET" 는 설문해자(說文解字)와 강희자전(康熙字典)을 제공하고 한자의 전서(篆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까지 찾아 볼 수 있는 신중국 사이트이다.그런데 위 자료를 해석해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当宁(當宁)는 황제(皇帝)를 가르키는 말이다.당(唐)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画元始天尊赞序》에 황제가 그림을 그리기를 명하고 몸을 내놓으니 다채로운 빛깔 밝아지며 칠보(七寳)가 치밀하게 꾸며지게 하는 것은 소위 현 당저(当宁)를 우러러보기 위함이니 어찌 하늘과 성신에게 감사하지 않겠는가. 남송사람 진조(陳造)의《赠钱郎中》시에 홀로 외로운 충성을 바치는 것을 당저가 알고 있으니 원대한 일을 할 때 솔선해서 나서 일을 하지 않겠는가. 명(明)사람 이동양(李東陽)의《同年祭陆鼎仪文》에 갓난아기들의 질병과 열병이 뜻하는 것은 몸 형상의 조화를 거두는 것이지만 당저(当宁:天子)가 보좌에 앉지 않고 평대에 임하면서 탄식하고 슬픔에 쌓이니 선비들은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우는구나.위와 같은 내용에서 당저(当宁:天子)라 하는 것은 바로 천자를 이르는 말임을 알 수가 있다. 세조 8년 임오(1462,천순 6)2월21일 (병술) 순 왕세자빈의 애책문(哀冊文) 그 애책문(哀冊文)에 이르기를,維天順五年十二月庚午, 王世子嬪韓氏卒于私第。 遂就殯焉, 以翌年二月庚寅將厝于坡州普施洞之原, 禮也。 蜃衛宵嚴, 鶴關曉闢。 雲旌旂旎, 以飜風殲, 歌凄咽而訴月。 我主上殿下哀少陽之喪, 偶痛元孫之失慈, 緬懷冥遊, 增悲喪事, 俾稽令典, 式(楊)〔揚〕貞儀。 其詞曰: “天祚大東, 奕業重光。 妊〔任〕、姒迭纉, 陰敎用彰。 我聖當宁, 前星重景, 贊德小海, 孰司內政? 上黨 “유(維) 천순(天順) 5년 12월 경오에 왕세자빈(王世子嬪) 한씨(韓氏)가 사제(私第)에서 졸(卒)하여 마침내 빈전(殯殿)에 모셨다가, 다음해 2월 경인에 장차 파주(坡州)의 보시동(普施洞) 언덕에 장사지내니, 예절대로 한 것입니다. 신거(蜃車)를 밤중에 차비(差備)하여 빈전(殯殿)을 새벽녘에 여니, 명정(銘旌)은 펄럭이면서 바람에 나부끼고, 만가(挽歌)는 구성지게 목메어서 달빛에 하소연합니다.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세자(世子)께서 짝을 잃으신 것을 슬퍼하시고 원손(元孫)의 어진 어머니를 잃은 것을 가슴 아파 하시면서, 저 세상에 계실 것을 아득히 생각하시고 상사(喪事)를 더욱 슬퍼하시며, 영전(令典)을 상고하여, 이에 정숙한 의식(儀式)을 드높혀 거행하게 하였습니다. 그 사(詞) 말씀에 이르기를, ‘하늘이 대동(大東)에 임하시니, 대대로 왕업(王業)이 거듭 빛났고, 태임(太任)·태사(太姒)가 바꾸어 대를 이어서 음교(陰敎)가 빛났습니다. 우리 거룩한 당저(當宁)와 전성(前星)이 거듭 빛나시니, 소해(小海)에서 덕(德)을 도와서 그 누가 궁내의 일을 다스리겠습니까? 위는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27권, 세조 8년 2월 21일 丙戌 3번째기사 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장순 왕세자빈의 애책문(哀冊文)이다.놀라운 것은 우리의 거록하고 성스러운 당저 즉 우리의 천자라 하여 "我聖當宁"라 한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위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사본한 것인데 아래 설명에 현 임금 세조를 당저라 하였다고 정확하게 설명이 일치하고 있다.여기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곧 조선 임금 세조는 중국의 천자임을 만천하게 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보라 어리석은 자들이여.이렇게 눈 앞에 들이 되어야 믿겠는가.이제 의심치 말라.조선이 바로 중국이며 천자국임을....또한 위 기록에서 비록 왕세자빈이 졸하여 상거가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상거를 신거(蜃車)라 하였다.이 신거란 무명조개(Giant Clam)형태의 주대(周代)의 영구차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주(周)나라는 바로 조선이 대대로 이은 선대왕조이며 천자국이다.주나라의 모든 관습을 조선이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자 이제 여기서 명료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조선왕조실록에 세조실록이라 하여 세조 명 이외 명(明) 영종(英宗)의 연호(年號)를 사용한다.즉 조선은 속국으로 자체적으로 연호라고 하지 못하고 있다.연호 천순5년(天順五年)때 왕세자빈이 졸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한반도 역사는 지금까지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해 독자적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근대사에서 중국이라고 알려진 청나라를 이은 중화민국이 성립되면서 연호가 폐지되었고 자연스럽게 서양인역사농단자들에게 골치아픈 중국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되었다.그와같은 변혁기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국이 되어버렸다.중국은 사라졌다.그러나 괴이하게 조선을 죽이고 일본이 살았으니 그 일본의 왕이 마치 중국천자처럼 행세하고 일본만이 지금까지 연호(年號)를 사용한다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가당찮고 목불인견이 아닐 수 없다.제대로 알아야 한다.자신의 나라의 역사가 얼마나 똥같이 취급되고 있는지를 그대들은 아는가.똑똑하고 다 아는 것처럼 굴지만 그대들은 바보들이다.19세기 서양일본인들의 철면피같은 짓이 얼마나 천일공론할 일이며 그 같은 천벌 받을 짓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고 지금까지 위대한 조선 선대 조상님을 가슴아프게 한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석고대죄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을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칠보(七寳)" rel="tag" target="_blank">칠보(七寳)</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당저(當宁)" rel="tag" target="_blank">당저(當宁)</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신거(蜃車)" rel="tag" target="_blank">신거(蜃車)</a>

곶감이 주는 역사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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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이 주는 역사모순 글쓴이:한부울 들어가기 논재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사항이 있어도 가타부타 하기 싫어 직접적인 언급을 삼가하고 있었다.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소속된 것도 아니라서 자유롭게 생각하지만 최근 상황을 보면 안타까운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지난 정권들을 보면 무엇인가 국민들에게 소통을 스스로 차단하고 부정한 짓을 저질러 파토가 나 촛불혁명을 불러일으켰던 것을 감안하면 현 정권이 좋던 싫던 하고 있는 짓이 일단 국민들을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며 쓸데없이 정부가 나서지 않고 사회흐름에 맡겨놓고 있다는 사실들이 일단 좋게 보이는 것은 틀림없다.아무리 좋은 정부라 할지라도 국민개개인의 인권이나 자유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그리고 대통령을 비방하거나 함부로 말을 해도 과거 정권처럼 겁박을 하거나 스스로 압박감을 느껴 감히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럼에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니 정부가 하는 짓들이 모두가 좋다고 할 수 없는 부분도 이해해야 한다.그러나 그렇더라도 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서 정부의 대처가 그렇게 국민들에게 간단할 수 없는 것이니 언론스스로가 자각하여 국민들에게 진정한 언론이 되어야 하겠지만 현재 메이저신문사들은 마치 언론권력을 억지로 만들고 그러한 틀아래 특권의식까지 사로잡혀 오보나 거짓뉴스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취급한다는 사실에 가끔식 놀라때가 많다.솔직히 요사이 언론사 기자들의 횡포라 할까 그들만의 특권의식은 급기야 여론을 왜곡하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여 분열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국민의 정서나 국민의 생각을 왜곡하는 것은 전혀 국가와 국만에게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안하무인격이 되어 그들이 쌓아놓은 언론권력만을 믿고 국민에 반하여 자기목적을 달성코자 하는데는 한편으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이러한 작태를 어떻게 깨부셔야 할는지에 대해 최근 사태심각성을 인지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고심을 하던차다.잘못하여 그들을 건드리면 공권력에 의한 언론탄압이라고 몰아붙이니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지금까지 이런 상황에서 가능하면 메이저 신문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 편이지만 약국에 들려 옆 자리에 그냥 너부러져 있는 중앙일보 메인편에 눈이 가고 큰 활자체로 역시나 언론탄압운운하면서 법무부가 오보를 낸 기자는 검찰청 출입 제한을 하겠다는 식의 기사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혼자 속으로 이제사 무엇인가 하긴 하는구나 싶어 보니 기사가 언론탄압을 합리화하기 위해 가당찮게 전개된다.국민절대다수가 현재언론이 취하는 작태에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분명하다.정부가 나서 공정행정체제기반을 세워야하는 것은 당연하고 애초부터 불손하게 의도된 언론행위에 무거운 제재를 어떤 식으로든지 해야만이 맞고 그래야만이 넘쳐나는 왜곡된언론, 거짓보도, 거짓 뉴스를 없앨 수 있을 뿐만아니라 사회적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기자가 기사를 오보하거나 거짓으로 보도하였다 하더라도 시정조치하여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 책임의식이 없다.그들에게 그러한 책임운운하는 것이 현재 언론환경에서는 오히려 불편한 것이 된다.어떠한 책임의식도 가지지 않는 다는 것은 그들에게 최소한의 언론 도덕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다.때문에 법무부에서 이렇게라도 막가는 기자들을 막으려했던 것이며 오죽했으면 그렇게 하겠는가 하고 생각해본다.문제는 저질 언론으로 여론을 왜곡시켜 그들의 존재를 부각하고 언론권력아래 숨으려는 것이다.현 정부가 취하고 있는 세계언론지수에 대한 자료를 보면 이명박 정부(李明博政府,2008-2013)때인 2009년 69위, 박근혜 정부(朴槿惠政府,2013-2017)때인 2016년에 70위하던 지수를 2018년 43위로 상승시켰고 2019년 41위로 끌어올린 것은 이 정부가 국민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언론에 대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이를 미국의 언론지수 2019년 48위와 비교해도 돋보이는 결과이다.그렇다고 분별없고 저질스러운 저널리즘에 대한 배려가 한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이제 정부가 이러한 왜곡된 여론을 조장하는 짓에 대해 강력한 철퇴를 내려도 무방하다.그래서 사회가 안정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그러한 제재가 결코 탄압이 될 수 없다.공정한사회, 바른 언론행위의 향상을 위해 반드시 이러한 파렴치한 언론부조리에 대해 철퇴를 내려야 할 현재 사회적 상황이다.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는 것은 때론 불안하기도하며 위험스럽기까지 하다.더 이상 지체없이 어떤 획기적인 조치가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에 크게 공감한다.이런 생각은 글쓴이의 현재 사회를 보는 개인 생각이지만 심각하고 답답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잠시 엇길을 갔다.곶감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친숙한 과일음식이다.감 또한 우리나라 제사상에 올려지는 조율이시(棗栗梨枾) 네번째로 올려지는 신성한 과일이다.그만큼 우리나라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 우리나라 식물역사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가 있다.곶감에 대한 우리나라 속담도 많다.애써 알뜰히 모아 둔 재산을 조금씩 헐어 써 없앤다는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 한다'는 것과 마음에 안 맞아 기분이 안 좋다는 '곶감이 접반이라도 입이 쓰다'는 말, 잇따라 먹을 복이 쏟아지거나 연달아 좋은 수가 생긴다는 '곶감 죽을 먹고 엿목판에 엎어졌다', 또는 당장 먹기 좋고 편한 것은 그때 잠시뿐이고, 정작 좋고 이로운 것은 못 된다는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다' 까지 많다.또한 재미있는 설화로는 4세기경에 완성된 인도의 교훈 설화집[판차탄트라(Panca-tantra)]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데 <호랑이와 곶감>에서 “호랑이가 왔다. 울지 말아라.” 하는데도 아이가 계속 울자 호랑이는 내심 호랑이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라고 생각하였고 다시 어머니가 “곶감 봐라. 울지 말아라.” 하니 아이가 울음을 그치니 호랑이가 놀라 도망쳤다는 것에서 곶감이 달고 맛있어 아이들이 좋아했다는 옛이야기는 많고도 많다.곶감은 달다는 공통적인 의미가 담긴 것이다.그렇다.곶감은 과당이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는 건조시 농축된 항산화원이 생성된다는 사실에서 건강에 이롭다는 동양의학설을 뒤받침하고 있다.미국본토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은 일찍이 감을 곶감으로 사용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영어로 페르시몬(persimmon)이라는 말 자체는 미국 동부의 원주민인 알곤킨 족의 알곤킨어 언어(Algonquian language)인 미국 버지니아(Virginia)주의 인디언 추장 포와탄(Powhatan:1550-1618)에서 퍼차민(putchamin), 페이시민(pasiminan), 또는 페사민(pessamin)에서 유래된 말로 "말린과일(a dry fruit)"이라는 뜻이다.곶감은 햇볕에 수분이 마르면서 오그라들고 비타민 C가 발생하고 이것이 가장 잘 알려진 항산화제일 수도 있지만 수천 개의 다른 항산화제가 포함되어 있으며, 새로운 항산화제는 항상 발견된다. 그런데 감 종류에서 상업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일본종으로 디오스피로스 카키(D. kaki)속에 일본 푸유(Fuyu)와 하치야(Hachiya)가 있다.동양감종(D. kaki)에서 떫지 않는 감(non-astringent persimmons)으로 구분되는 품종에는 FUYU, MATSUMODA-WASE FUYU, HANA FUYU, GIANT FUYU, JIRO, MAEKAWA JIRO, ICHI-KI-KEI-JIRO 가 있고 떫은 감(Astringent persimmons)에는 HACHIYA, GIOMBO, CHOCOLATE, TANENASHI, SAIJO, GREAT WALL, NIKITA'S GIFT 가 있다.미국에서 푸유와 하치야는 상업적으로 재배되는 가장 인기 있는 품종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동양종 디오스피로스 카키(D. kaki)에서 왔다는 재배종으로 샤론(Sharon)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원산지며 샤론평원에서 재배되었다고 이름붙여진 것으로 하치야처럼 떫은 맛이 덜하지만 익기전에 먹을 수 있고 심이없고 씨앗이 없어 장점이다.하지만 이것 이외 감과류(Diospyros genus)는 모두 700~800종이 넘는다.그러나 동양종이면서 일본종으로 알려진 푸유(Fuyu)와 하치야(Hachiya)와 비교되는 미국토종인 디오스피로스 버지니아(D. Virginia)의 식품의 활성산소 흡수능력(ORAC)값은 무려 12,307 이다.이 수치는 말린 건포도(currant)7960 나 살구(Apricot)3234보다 3배 이상 더 높다고 자료에서 말하고 있다.즉 동양종인 디오스피로스 카키(D. kaki)보다 미국토종인 디오스피로스 버지니아(D. Virginia)가 훨씬 더 높은 영양소를 포함한다는 이야기다.곶감은 열매에서 수분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항산화제를 포함한 영양소가 더 농축되어 있다. 열매가 마를수록 더 널리 퍼지는 일정한 형태의 항산화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숙성 과정이 한 몫 한다.이 건조과정의 단점은 과당이 고농축(高濃縮)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너무 많지 않도록 한다.일본감과 미국감비교Nutrition Facts (per 100g/3.5 oz)그리고 이 곶감에는 건강에 이로운 점이 많은데 열거하면 거의 10가지나 된다.전자에서 말한 곶감에 농축된 항산화원이 생성, 광섬유의 우수한 공급원, 잎 추출물에서 저혈당효능, 콜레스테롤 감소, 독감질병예방, 동맥경화증에 좋은 영양소, 뇌졸중 감소, 혈압조절, 눈 건강, 페놀 추출물에서 항염증 및 항염증 활동확인과 간암 세포사멸작용 등이다.이러한 자료는 물론 영어권의 자료이지만 맹신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어쨌든 앞에서 동양종과 미국종을 잠시 비교해 보았는데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하치야(Hachiya) 그림 푸유(Fuyu)그림 미국종 버지니아(D. Virginia) [kaki or sharon fruit (Diospyros kaki)] 위 표에도 나타나지만 모든 항목에서 미국종인 버지니아가 월등한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즉 동양종보다 더 우수하다는 이야기다. 감나무의 역사와 고전기록 감(柿)은 속씨식물문(被子植物門:Magnoliophyta), 쌍떡잎식물강(雙子葉植物綱:Magnoliopsida), 진달래목(柿树目:Ericales), 감나무과(柿树科:Ebenaceae), 감나무속(柿树屬:Diospyros)의 낙엽활엽 교목이다.Taxonomy and etymology:The generic name Diospyros comes from a Latin name for the Caucasian persimmon (D. lotus), derived from the Greek diós (Διός) and pyrós (πῡρός). The Greek name literally means "Zeus's wheat" but more generally intends "divine food" or "divine fruit".디오스피로스(Diospyros)라는 총칭은 고욤나무(Date-plum) Caucasian persimmon(豆柿:D. lotus)의 라틴어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그리스어 diós(Διός)의 제우스(Zeus) 와 피로스(pyrós)의 밀(πῡρός:小麦)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지고 그리스어 이름은 문자 그대로 "Zeus의 밀"을 의미하지만, 더 일반적으로 신(神)의 음식"divine food" 또는 신(神)의 과일"divine fruit"의미로 설명된다.영어에서 곶감(persimmon)이라는 말 자체는 미국 동부의 원주민인 알곤킨 족의 알곤킨어 언어(Algonquian language)인 미국 버지니아(Virginia)주의 인디언 추장 포와탄(Powhatan:1550-1618)에서 퍼차민(putchamin), 페이시민(pasiminan), 또는 페사민(pessamin)으로 변화되어 유래된 말로 "건과(a dry frui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감나무(persimmon)를 한자로 한자로 시수(枾樹)라 한다.동양자료에는 동아시아 온대의 특산종으로 중국 중북부, 일본, 한국 중부이남에서 널리 재배하는 과실나무라 하였고 중국에서는 BC 2세기경에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양자강 유역이 야생종의 원산지로 많은 품종을 재배한다라고 되어 있다. 대마반(大磨盤:Tamopan)은 떫은감의 대표종인데 라틴어 이름으로 Latin Name: Diospyros kaki 이다.사실상 떫은 감이었던 일본종(種)으로 알려진 이 감나무는 하치야(Hachiya) 또는 푸유(Fuyu)와 같은 개량종을 만들었는데 많은 시간을 걸쳐 변종재배종임을 알 수가 있다..우리나라에서 감나무 재배의 역사는 고려시대인 1138년(인종 16)에 ‘고욤(D. lotus)’에 대한 기록이 있고, 1470년(성종 1)에도 건시·수정시(水正枾)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초기의 진상물에 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에 이미 재배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감의 주산지로 기록되어 있는 곳은 합천·하동·청도·거창·의령·창원·함안·남원·해남·곡성·정읍·함평·태인·담양·광양 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기(京畿)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토산】감[枾]경기(京畿)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감[柿]경기(京畿)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 감[柹]충청도(忠淸道) 영동현(永同縣) 감[柹]충청도(忠淸道) 공주목(公州牧) 감[枾]충청도(忠淸道) 임천군(林川郡) 감[枾]충청도(忠淸道) 한산군(韓山郡) 감[시(枾)]충청도(忠淸道) 은진현(恩津縣) 감[枾] 일찍 익는다. 속칭 조홍(早紅)이라 이른다.충청도(忠淸道) 회덕현(懷德縣) 감[枾]충청도(忠淸道) 연산현(連山縣) 감[枾]충청도(忠淸道) 부여현(扶餘縣) 감[枾]충청도(忠淸道) 서산군(瑞山郡) 감[枾]충청도(忠淸道) 태안군(泰安郡) 감[枾]충청도(忠淸道) 면천군(沔川郡) 감[枾]충청도(忠淸道) 온양군(溫陽郡) 감[枾]충청도(忠淸道) 덕산현(德山縣) 감[枾]충청도(忠淸道) 비인현(庇仁縣) 감[枾]충청도(忠淸道) 보령현(保寧縣) 감[枾]충청도(忠淸道) 신창현(新昌縣) 감[枾]충청도(忠淸道) 예산현(禮山縣) 감[枾]충청도(忠淸道) 해미현(海美縣) 감[枾]충청도(忠淸道) 당진현(唐津縣) 감[枾]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감[枾]경상도(慶尙道) 기장현(機張縣) 감[枾]경상도(慶尙道)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감[枾]경상도(慶尙道)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감[枾]경상도(慶尙道)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감(枾)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 감[枾]경상도(慶尙道) 영산현(靈山縣) 감[柹]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감[柹]경상도(慶尙道)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 경상도(慶尙道) 개령현(開寧縣) 감[柹]전라도(全羅道) 정읍현(井邑縣) 감[柿]전라도(全羅道) 고창현(高敞縣) 감[枾]전라도(全羅道) 보성군(寶城郡) 감[柿]ㆍ 세종 지리지 경기 토공(土貢)감[柿]충청도 연감[紅柿]경상도 홍시(紅柿)ㆍ곶감[乾柿]경주부 토공(土貢)홍시(紅柿)안동대도호부 토산(土産)홍시(紅柿)전라도 곶감ㆍ연감[紅柿子] 세종지리지 경기도(京畿道)에서는 감[柿]을 토공(土貢)으로 바쳤으며 충청도(忠淸道) 홍시[紅柿], 경상도(慶尙道) 는 홍시(紅柿)ㆍ곶감[乾柿], 경주부 토공(土貢) 홍시(紅柿)을 바쳤으며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토산(土産)으로 홍시(紅柿), 전라도 곶감ㆍ홍시[紅柿子]를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아시아인 페르시몬이라고 알려진 Diospyros kaki 는 해충이나 질병에 시달리지 않고, 햇볕이 가득하고 물이 잘 드는 토양에 반나절을 좋아하는 것으로 재배가 용이하다.일본 자료를 보면 중국 당나라 때 단성식이 지은 수필집 유양잡조(酉陽雜俎) 목편(木篇)에 칠절(七絶)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곧 감[柿]을 말하고, 감은 첫째 수명이 길고, 둘째 그늘이 많으며, 셋째 새의 둥지가 없고, 넷째 벌레가 없으며, 다섯째 단풍 든 잎이 아주 보기 좋고, 여섯째 열매가 아름다우며, 일곱째 낙엽이 비대(肥大)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였다.칠절(七絶)一 壽,・・・長寿。上手に食すれば寿命が延びる。二 多陰,・・・葉がよく茂り日蔭をつくる。農作業の休憩場所になる。三 無鳥巣,・・・鳥の巣無し。四 無蟲,・・・虫がつかない。五 霜葉可翫,・・・秋霜にやられず。紅葉は目の保養に。六 嘉實,・・・実が美味しいこと。七 落葉肥大。・・・落葉腐葉土は良い肥料になる。디오스피로스 가키나무는 감의 가장 널리 재배된 종(種)이다. 우리나라 곶감의 어원을 보면 ‘곶다’이다. ‘곶다’는 ‘끝부분이 다른 물체의 공간이나 속에 들어가게 하다’는 뜻인 ‘꽂다’의 옛말이다. 이 ‘곶다’의 어간 ‘곶’에 ‘감’이 붙어 ‘곶감’이 됐다. 즉 ‘곶’+‘감’이다. 꼬챙이에 꽂아서 말린 감이라는 의미로 추정할 수 있다.감 재배에 관한 옛 문헌을 살펴보면, 고려의 약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1236)’에 “경상도 고령지방에서 감을 재배하였다”고 적힌 기록이 최초라고 자료에 나타난다. 상주 감 재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동국여지승람(1530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감은 대홍시로 전국적으로 기이한 품종이라는 내용이 있다.감은 라틴어의 어원처럼 ‘신의 과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효능이 다양한 것으로 전자에서 살펴보았다.1757~1832년 전국적인 명품으로 인정받아 ‘조홍감’이라는 새 이름이 지어졌으며 19세기 이전부터 ‘상주둥시’로 불리게 됐다. 표주록(漂舟錄)/ [조완벽(趙完璧)의 일본ㆍ안남국 여행기-이수광] 三往安南國。安南去日本海路三萬七千里。自日本薩摩州開洋。海水西高東下。晝夜行五六十日。抵安南興元縣。其地甚煖。水田耕種無時。三月間有始耕者。有將熟者。有方穫者。桑則每年治田種之以飼蠶。有木花樹高大。花大如芍藥。人上樹摘取。果則橘荔子外無他果。饋以乾柹則不識之。안남국은 일본에서 해로(海路)로 3만 7천 리나 떨어져 있다. 일본의 살마주(薩摩州)에서 바다로 가면 해수(海水)는 서쪽이 높고, 동쪽은 낮다. 주야로 50~60일 가야 안남국의 흥원현(興元縣)에 닿는다. 그곳은 아주 따뜻하고 논에 경종(耕種)을 아무 때나 해서, 3월에 처음으로 경종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농사가 다 되어 곡식이 익으려 하는 것도 있고, 수확하려는 것도 있다. 뽕[桑]은 매년 밭에 심어서 누에를 친다. 목화나무가 있는데 높고 커서, 꽃은 작약(芍藥)꽃 만하여,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 딴다. 과일로는 귤(橘)ㆍ여자(荔子)외에는 다른 과일이 없다. 곶감을 주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위 표주록을 보면 안남국의 사람들은 곶감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였다. 감나무의 종과 그 원산지 (1)Diospyros discolor Willd.1809kamagong, mabolo, butter fruit, velvet-apple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科: 柿树科 Ebenaceae屬: 柿属 Diospyros種: 异色柿 D. blancoi二名法 Diospyros blancoi Diospyros discolor Willd마볼로(Mabolo)나 벨벳-애플(Velvet-apple)(Diospyros discolor)은 중국에서 필리핀까지 이르는 동아시아의 토착감이다. 그것은 익으면 밝은 빨간색이 된다. 중국에서는 시지(柿子)라고 하며 또한 한국의 망고(Korean mango)로 알려져 있다. 디오스피로스 브란코이(velvet apple, 벨벳감(velvet persimmon) 또는 마볼로나무(mabolo tree)로 알려져 있는 에보니나무(ebony trees)와 디오스피로스 속의 나무다. 그것의 식용 과일은 보통 적갈색인 고운 벨벳 같은 털로 덮여있고 부드럽고 크림 같은 분홍색 살과 과일 크림 치즈에 버금가는 맛과 향을 가지고 있다. 필리핀이 원산지로 카마공(kamagong)은 보통 나무 전체를 가리키고, 열매에는 마볼로(mabolo)나 타랑(tálang)을 적용한다. 해수면부터 해발 2,400피트에 이르는 다양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교묘한 열대 나무다. 씨앗은 보통 30 에서 45피트(feet)떨어진 곳에서 심는데, 이것은 25 에서 30피트(feet) 떨어진 곳에서 심을 수 있으며 일년 내내 많은 양의 강우량이 필요하다. 씨앗이 심은 나무는 열매를 나눠주는데 6~7년이 걸릴 수 있지만, 베인 나무에 의해 번식된 나무는 3~4년 안에 열매를 맺으며 매우 생산적인 나무다. 과일이 모양, 색깔, 털, 맛 등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은 식물에 유전적 변화가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씨앗이 없는 품종은 존재하며, 보통 품종에서는 큰 씨앗이 상당량의 과일을 차지하기 때문에 매우 인기가 있다. 카마공 목재Kamagong timber는 매우 밀도가 높고 단단하며 어두운 색으로 유명하다. 다른 많은 매우 단단한 나무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목재는 철과 같고 거의 깨지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철목iron wood"이라고 불린다. 고운 가구와 장식품 등 카마공 목재(kamagong wood)에서 나온 완제품은 관세청으로부터 제대로 문서화하고 승인을 받지 않으면 수출할 수가 없다. 가마공은 목검(bokkens)이나 에스크리마 스틱[eskrima sticks((eskrima필리핀의 전통 무술)]같은 무술 훈련 도구에도 인기가 있다. 벨벳 애물나무(velvet apple trees)의 잎에는 실린드린(cylindrin)과 α-와 β- 아미린의 지방 에스테르가 들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소아르보리놀 메틸 에테르와 아미린 혼합물은 모두 대장균(Escherichia coli), 녹농균(綠膿菌:Pseudomonas aeruginosa), 칸디다 알비칸스(효모양 진균(酵母樣眞菌).Candida albicans), 황색포도상구균(黃色葡萄狀球菌:Staphylococcus aureus), 백색종창균(Trichophyton mentagrophytes)에 대한 항균 활동을 보여주었다. 격리된 아밀린 혼합물에 대한 항염증 및 진통 특성도 나타났다.그것은 멸종위기에 처한 나무 종이며 필리핀 법에 의해 보호되고 있으며 산림국, 환경부, 천연자원부의 특별한 허가 없이 카마공목재를 수출하는 것은 불법이다.(2)Diospyros kaki L.f. Japanese persimmon, kaki persimmon, Asian persimmonalso called the persimmon, Oriental persimmon or kaki,Diospyros kaki is commonly called Japanese persimmon, Chinese persimmon, kaki (from the Japanese name 柿, pronounced [kaki]), kaki persimmon, and Oriental persimmon.감, 오리엔탈 감 또는 카키라고도 불리는 디오스피로스 카키는 동양종으로 알려져 있다.이것에 대해 본 블로그 글 "감(杮:persimmon)이 주는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0 "충분히 알아보았지만 일본명이 붙여져 있다는 것은 원종(原種)이 아닌 귀화식물(歸化植物:naturalized plant)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감나무는 특이하게 ‘The name Diospyros was originally applied to the Caucasian Persimmon(D. lotus).’이라 하여 원래 백인 감나무 또는 카프카스(Caucasian) 제족, 카프카스사람(Caucasian Persimmon:Diospyrus lotus)이라고 명명되고 있으나 이는 제사상에 오르는 감이 아닌 이 나무의 열매를 따서 말린 것을 한방에서는 군천자(君遷子)라 하고 고욤나무, 또는 고염, 소시(小枾)라 하는 것이다.대목(臺木:)접을 붙이는 나무으로는 이 고염을 말한다.디오스피로스 가키는 일반적으로 일본식 감이라고 하며 중국식 감, 카키 감, 동양식 감으로 불린다.Diospyros kaki (Asian persimmon, Japanese persimmon)[林柿(아시아 감, 일본 감)는 한국에는 일찍부터 재배되었다 하였으며 품질 좋은 재래종이 육성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역시나 한반도 역사를 맞춰 하는 이야기라 믿을 것이 못된다. 하지만 현 미국이 일본이라고 볼 때 미국인들의 근거는 곧 대조선을 말하는 것이다.일본은 재래종 외에 8세기경 중국에서 전래되었고, 지방종을 포함하여 800여 종의 품종이 있으며 특히 단감은 일본 특유의 품종으로 발전했다. 이상하지 않는가.일본열도에 들어가는 모든 문물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들어가는 것은 없다.그럼에도 왜 일본종인가.이상하지 않는가.감나무는 7덕과 5절(七德五節)이 있다고 하는데, 7덕(七德)이라 함은 수명이 길고, 그늘이 짙으며, 새가 둥지를 틀지 않고, 벌레가 생기지 않으며, 가을 단풍이 아름답고, 열매가 맛이 있으며, 낙엽은 훌륭한 거름이 된다 함이요, 5절(五節)이라 함은 잎이 넓어 글씨 연습하기 좋아 글문이 있고, 나무가 단단하여 화살촉 재료가 되기에 무기 무가 있으며, 열매가 겉과 속이 똑같이 붉어 표리가 같으므로 충이 있고, 홍시는 노인들도 먹을 수 있으므로 효가 있으며, 서리 내리는 늦가을까지 열매가 가지에 달려 있으므로 절이 있다 함이다The scientific name Diospyros kaki L. f. may be used erroneously for this plant. However, Diospyros kaki L. f., published in 1781, is a later homonym of Diospyros kaki Thunb., published in 1780. So the name Diospyros kaki L. f. is taxonomically illegitimate and not accepted.학명 Diospyros kaki L. F.는 이 식물에 잘못 사용될 수 있다 하고 있다. 그러나 1781년에 출판된 디오스피로스 카키 L. F.는 1780년에 출판된 디오스피로스 카키 툰브(Thunb)의 후대 동음이라고 하는데 현재 린네의 아들(Carl Linnaeus the Younger:1741-1783)인 학명자 디오스피로스 카키 L. F.(1781)라는 이름은 분류학적으로 불법이며 받아들여지지 않는 서양인들의 별난 모순도 없지 않다.일본의 린네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스웨덴식물학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에 의해 어떻게 분류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門: 被子植物门 Magnoliophyta綱: 双子叶植物纲 Magnoliopsida目: 柿树目 Ericales科: 柿树科 Ebenacea屬: 柿树属 Diospyros種: 林柿 D. Kaki Diospyros kaki Thunb.(1780) 아시아 또는 일본 감(Diospyros kaki)은 상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감으로, 일본, 중국, 한국 원산지로 낙엽이 넓고 뻣뻣하며, 중국에서는 시지(柿子)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페르시몬(Japanese persimmon), 일본어로 카키(柿)라고도 한다.과일은 달콤하고 때로는 섬유질처럼 부드러운 질감으로 약간 톡특하고 과일의 재배는 먼저 아시아, 인도, 네팔의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1800년대에 캘리포니아와 남부 유럽, 1890년대에 브라질에 도입되었다고 자료에 나타난다.이 캘리포니아 종은 미국종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한다.수많은 (특정한 특색을 갖도록 개발한 식물의) 품종들이 선정되었다. 어떤 품종들은 사각사각하고 단단한 상태에서 먹을 수 있지만 수확 후 약간 부드러워질 때 최고의 맛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재배변종 '하치야(Hachiya)', 푸유'(Fuyu)', 세이조'(Saijo)'는 널리 재배되고 있고 미국대륙에서 인기가 대단하다. 열매는 탄닌 함량이 높아 덜 익은 열매는 싸리한 쓴맛 떫은 맛이 난다. 과일이 성숙함에 따라 탄닌 수치가 감소한다. '하치야'와 같은 감은 소비 전에 완전히 숙성시켜야 한다. 이 과일은 익으면 껍질이 얇아진 껍질피부가 두껍고 껄쭉한 젤리로 변하는데 이것이 바로 익은 감, 홍시(紅枾)이다. 또한 이 종에는 이스라엘의 샤론평원의 이름을 딴 "샤론 과일"( 것)이 있고 이스라엘에서 사육된 재배변종 '트리엄프(Triumph)'의 상품 이름이다.대부분의 상업적인 수분-가변성 감들과 마찬가지로, 열매는 이산화탄소에 노출되어 익는다. "샤론 과일(Sharon fruit)"은 핵이 없으며, 씨앗이 없고 특히 달콤하며, 통째로 먹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스페인의 발렌시아지방에는 "리베라 델 쉬커(Ribera del Xuquer)", "스페인산 감(persimon)" 또는 "로조 브릴란테(Rojo Brillante"("밝은 빨강"))라고 하는 다양한 형태의 카키(kaki)가 있다.(3)Diospyros lotus L. date-plum, Caucasian persimmon, lilac persimmon豆柿(学名:Diospyros lotus),又名君迁子、黑棗、猴棗,为柿科柿属下的一个种。它原產於西南亞和東南歐,在古希腊語中稱“Dios pyros”,即“諸神之果”,這亦是柿属屬名的來源。其果實味道像是櫻桃和棗混在一起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門: 被子植物门 Magnoliophyta綱: 双子叶植物纲 Magnoliopsida目: 柿目 Ericales科: 柿科 Ebenaceae屬: 柿属 Diospyros種: 君迁子 D. lotus二名法 Diospyros lotus L. 바로 고욤이며 중국이름은 두시(豆柿)다.Date-plum (Diospyros lotus), 이라고도 알려진(lotus persimmon)은 서남아시아와 남동유럽이 원산지다. 우리나라에서 감나무 재배의 역사는 고려시대인 1138년(인종 16)에 ‘고욤’에 대한 기록이 있다했다.이것의 영어 이름은 아마도 페르시아어 호르말루[(柿子) خرمالو ]에서 유래된 것으로, 자두와 대추 모두를 연상시키는 이 과일의 맛을 지칭하는 말 그대로 "plums and dates"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한자어로는 소시(小枾)·군천자(君遷子)·우내시(牛奶枾·牛嬭枾)·정향시(丁香枾)·흑조(黑棗)·이조(imagefont棗)라고도 하며 조(棗)자가 쓰이는 것은 열매의 모양이 대추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종은 <오딧세이(Odyssey)>에 언급된 <로투스 나무(lotus tree)>의 종 중 하나이다.아래 정리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나무는 카프카스(Caucasus)의 중하산지대에서 자란다고 되어 있어 백인 감나무라 하지만 카프카스지대의 감나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들은 보통 해발 600m까지에서 자라며 중앙아시아에서는 2000 m까지 상승되며 평지에서는 평지에서는 좀처럼 자라지 않지만 단풍나무와 다른 낙엽성 종들과 함께 자란다. 그것은 토양이 필요하지 않고 바위 비탈에서 자랄 수 있지만 햇빛이 잘 들어오는 환경이 필요하다. 미국, 북아프리카는 물론 그 범위 내에서 재배한다.익지 않은 잎과 과일은 전통적으로 천을 검게 염색하는데 사용되었고 한방에서는 열매를 말렸다가 갈증을 푸는데, 또는 열을 제거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딸꾹질을 멈추게 한다든가, 동상을 푸는 데 사용했고 가을에 서리가 내린 뒤 채취하여 항아리에 저장, 발효시켰다가 먹으면 건강에 좋다고 도 했다.고욤나무의 잎도 지혈·진해제로 이용된다. (4)Diospyros malabarica (Desr.) Kostel. 1834 black-and-white ebony, pale moon1820년경 조선후기실학자 유희(柳僖:1773-1837)가 만든 어휘사전(語彙辭典) 물명고(物名攷)에는 “감의 옛자(古字)는 시(柹)이고, 범어(梵語)로는 진두가(鎭頭迦:산스크리트어:tinduka)이다.이 자료가 나타나지 시작한 시기와 Diospyros malabarica Kostel.1834, Diospyros embryopteris Pers.1807 명명시기가 비슷하고 진두가가 어쩜 감나무의 원간이 아닌가도 여겨지는 대목이며 위 지도에 위치에서 말레이시나의 위치가 중앙아메리카대륙 온두라스(Honduras), 엘살바도르(El Salvador)로 나타나 말레이시아(馬來西亞:Malaysia)가 존재했던 역사위치 가능성이 무척 높다.이와같은 분류변천은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이 종(種)은 시작부터가 의도적으로 인도(印度)를 아시아대륙에 세울 목적으로 이용된 종(種)이라고 판단된다.어쩜 Diospyros malabarica Kostel, Diospyros embryopteris Pers, Garcinia malabarica Desr가 동일한 종으로 등장하는 것은 진두가가 감추어지고 있다는 느낌도 적지 않다.1919년과 1920년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완전하게 지배했던 시기로 이 종이 동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를 노란점이 표시하고 있는 것은 인도와 말레이를 대입할 수 있는 것으로써 안남국(安南國)에서 곶감이 무엇인지도 알지못했다는 모순도 존재한다.디오스피로스 말라바리카(Diospyros malabarica), 가우브나무(gaub tree), 말라바르 흑단나무(Malabar ebony), 흑백 흑단(Black and White ebony) 또는 페일 문 에보니(pale moon ebony)는 인도 아대륙과 동남아시아의 토착종이다. 장수하고 매우 느리게 자라는 나무인데, 지름이 70cm까지 검은 줄기로 높이 35m까지 이를 수 있다.미국 원주민 운동가인 페일 문(Pale Moon)은 1990.08.03 에 11월을 미국 인디언 문화 유산의 달(Native American Indian Heritage Month)에 대한 입법에 영향을 주었다.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菊类植物 Asterids 目: 杜鹃花目 Ericales 科: 柿樹科 Ebenaceae 属: 柿屬 Diospyros 種: D. malabarica(Desr.) Kostel. 열매는 둥글고, 익으면 노랗다. 그것의 일반적인 이름은 인도 남서부의 해안인 말라바르에서 유래되었다. 태국에 있는 앙퉁 성의 지방나무다. 나무의 껍질과 익지 않은 과일은 모두 인도의 고대전승의학(傳承醫學)·장수약론(長壽藥論) 아유르베다(Ayurveda)에서 약용된다고 적었다. 이 나무는 산스크리트 작가들에 의해 틴두카(Tinduka)로 언급된다.익지 않은 잎과 과일은 전통적으로 천을 검게 염색하는데 사용되었고 불경에 나오는 달콤한 맛을 지닌 열대성 감나무인 진두가(tinduka)를 찾아보았더니 위키피디아에서는 이를 "Diospyros malabarica" 즉 Gaub Tree, Malabar ebony, Black-and-white Ebony 혹은 Pale Moon Ebony라고 표시한다. 인디아 남서쪽이 원산지로 말라바(Malabar)라는 지명에서 말레이에보니(Malabar ebony)라는 이름과 라틴어 학명을 얻었다고 한다. (5)Diospyros nigra (J.F.Gmel.1791) Perrier black sapote, chocolate pudding fruit, "black persimmon"검은감나무(학명: Diospyros nigra 디오스피로스 니그라)는 감나무과의 과일 나무이다.열매인 검은감은 감의 하나이며, 또한 과육이 부드러운 과일을 가리키는 말 사포테(sapote)라 불리는 과일의 하나로, 검은사포테(스페인어: zapote negro), 초콜릿푸딩과일(chocolate pudding fruit)등의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원산지는 과테말라,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파나마 등 중·남미 지역이다.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菊类植物 Asterids 目: 杜鹃花目 Ericales 科: 柿樹科 Ebenaceae 属: 柿屬 Diospyros 种: D. nigra Binomial name Diospyros nigra(J.F.Gmel.) Perrier 검은 사포테(Diospyros nigra)는 멕시코의 토착감이다. 열매는 녹색껍질과 하얀색으로 익으면 진한 갈색으로 변하면서 검게 익는다. 본 블로그 "흑시(黑柿)-검은 감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1 "을 참고하기 바란다.(6)Diospyros virginiana L. American persimmon, eastern persimmon, commonDiospyros virginiana is a persimmon species commonly called the American persimmon,common persimmon, eastern persimmon, simmon, possumwood, possum apples, or sugar plum.이제 미국감이라고 하는 디오스피로스 버지니아(Diospyros virginiana)이다.물론 린네가 1758년에 명명한 학명을 가지고 있다.버지니아는 서양세력들이 처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자리를 잡고 서양역사를 만들던 곳이다.시몬(simmon)은 19세기 친남미적인(Southern Americanism) 곶감(Cree pasiminan)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따뜻하고 온화한 곳에 자란다는 미국원주민명칭 파섬우드(possumwood)이라고도 한다.디오스피로스 버지니아(Diospyros virginiana)는 흔히 미국 감, 흔한 감, 동쪽감, 심몬, 파섬우드, 파섬사과 또는 설탕 자두라고 불리는 감의 종이다.남부 코네티컷/롱아일랜드에서 플로리다까지, 서쪽으로는 텍사스,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캔자스, 아이오와까지를 분포지로 하고 있다.이 나무는 야생으로 자라지만 선사시대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의해 과일과 나무를 위해 경작되어 왔던 것으로 알려진다.The fruit is round or oval and usually orange-yellow, sometimes bluish, and from 2 to 6 cm (3⁄4 to 2 1⁄4 in) in diameter. In the U.S. South and Midwest, the fruits are referred to as simply persimmons or "'simmons", and are popular in desserts and cuisine. Commercial varieties include the very productive Early Golden, the productive John Rick, Miller, Woolbright and the Ennis, a seedless variety. Another nickname of the American persimmon, 'date-plum' also refers to a persimmon species found in South Asia, Diospyros lotus. 열매는 둥글거나 타원형이며 보통 주황-노란색이며, 때로는 푸르스름하기도 하며, 직경 2~6cm(3⁄4~2 1/4인치) 미국 남부와 중서부에서 과일은 단순한 감이나 "simmons"이라고 불리며, 디저트와 요리에 인기가 있다. 상업적 다양성으로는 매우 생산적인 얼리 골든(Early Golden), 생산적인 존 릭(John Rick), 밀러(Miller), 울브라이트(Woolbright), 그리고 씨앗이 없는 품종인 에니스(Ennis)등이 있다. 미국 감의 또 다른 별칭인 대추자두'date-plum'은 남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감나무종인 Diospyros lotus 를 가르키는데 이것을 고욤나무라 하고 고려시대부터 재배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진다.이 나무는 남대서양과 걸프 지역에서 매우 흔하며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가장 큰 크기에 이른다. 서식지는 남부로, 코네티컷에서 플로리다까지 해안가를 따라 나타나며, 알레그니스의 서쪽은 오하이오 남부, 아이오와 주 남동부, 미주리 주 남부에서 발견된다. 루이지애나 주, 캔자스 주, 오클라호마 주까지 도달하면, 150feet[45.72(m)] 높이의 강력한 나무가 된다.이 화석의 잔해는 북미 북동부의 섬 덴마크령 그린란드 알래스카(Alaska)암석과 네브라스카 백악기의(공룡이 생존하던 1억 4600만 년에서 6500만 년 전의)암층에서 발견되었다.디오스피로스 버지니아(Diospyros virginiana)는 1만년 전까지 북아메리카 대륙을 돌아다녔던 메가파우나(巨大動物相, megafauna,지렁이와 작은 척추동물들(두더지류, 생쥐, 토끼, 흙파는 쥐류, 뱀, 도마뱀 등))에 의해 소비된 진화적인 잔해물로서 그 과일의 확산을 도우며 그 과일을 먹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과일은 비타민 C가 풍부하다. 익지 않은 과일은 매우 떫다. 익은 과일은 생으로 먹거나, 요리하거나, 말릴 수 있고 당즙(Molasses)은 잼을 만들 수 있다. 차는 잎으로 만들 수 있고 볶은 씨앗은 커피 대용품으로 사용되며 다른 인기 있는 용도로는 감파이, 감 푸딩, 감 캔디와 같은 디저트가 만들어진다. 열매는 또한 홉(hops), 옥수수 가루 또는 밀기울로 발효시켜 맥주의 일종으로 만들거나 브랜디로 만들어진다. 그 나무는 무겁고 튼튼하며 매우 촘촘하며 목재 선반가공에 사용된다.科学分类 编辑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菊类植物 Asterids 目: 杜鹃花目 Ericales 科: 柿樹科 Ebenaceae 属: 柿屬 Diospyros 种: 美國柿 D. virginiana 二名法 Diospyros virginiana L. 아메리카 감(美國柿:Diospyros Virginiana)은 미국 동부의 원산지다. 그리고 남북전쟁 때 이 씨앗들은 단추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진다.가을이나 첫서리가 내린 후에 수확하여, 그 열매는 날것으로 먹거나, 햇빛에 익히거나, 미국 중서부에서는 스팀에 쪄 먹으며, 때로는 그 목재가 흑단(黑檀, ebony:Diospyros ebenum)ebony예: 악기)의 대용품으로 쓰이기도 한다. (7) Diospyros peregrina (Gaertn.1788) Gürke (Indian persimmon)인디안 감(Diospyros pergrina)은 서벵골 연안(coastal West Bengal)이 원산지로 느릿느릿 자라는 나무이다. 열매는 녹색으로 익으면 누렇게 변하며 그것은 비교적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맛으로 요리 응용보다는 전통적인 의학(traditional medicine)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인도의 벵갈 지방에 특히 이 나무가 많기 때문에 인도감 또는 벵갈감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종류도 많고 여러 가지 원예 품종도 있다. 넓은 의미의 진두가는 태국, 자바, 말레이시아, 세레베스 섬에도 자생하지만 인도의 진두가와는 다른 종이다.진두가는 인도 대륙 서해안 지역과 동인도, 스리랑카의 열대 해안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상록활엽 아교목으로 나무 높이는 6~10m 정도이고 옆으로 많은 가지가 벌어진다. 여름철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묵은 잎 사이에서 새싹이 돋아나 작은 꽃이 다닥다닥 붙는다.잎의 길이는 10~23㎝이며, 껍질의 색이 매우 곱다. 과실은 직경 4~6㎝인데, 풋과일은 떫은맛이 강해 염색용으로만 이용하고, 익으면 황색으로 변하면서 단맛이 나서 식용이 가능해지는데, 과육 속에는 감의 씨와 비슷한 씨가 4~8개 있다. 열매의 크기는 작지만 맛이 좋아 인도에서 정원에 즐겨 심는다.열대성 감나무들은 종류가 대단히 많아서 약 200여 종이 이른다. 감나무류는 목재가 단단해서 갖가지 공예품을 만들거나 가구를 짜는데, 진두가 역시 목재의 결이 곱고 단단하여 가구, 건축재, 선박 건조용으로 쓰인다.목재로 쓰이는 감나무 중에 심재가 검은색을 띠면 흑단(黑檀), 보라색을 띠는 것을 자단(紫檀)이라 하여 최고급 공예재로 쓴다. 인도에서는 목재를 에보니(Ebony), 세이론 에보니(Ceylon ebony), 마르베 우드(Marbee wood)라 한다.‘생활의 과학’ 아유르베다(Ayurveda) 의서에 의하면 인도감나무는 피부 감염 등으로 인한 작열감, 발열, 설사와 이질, 당뇨와 요로 감염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용되는 부분은 나무껍질과 잎, 꽃, 과실 등이다.나가기원천적으로 아메리카원주민 인디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감이며 곶감이다.인디언들은 감을 일상적으로 말려(건조시켜) 먹었던 것으로 알려지는 것은 영어어원인 페르시몬이라는 단어 의미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그러나 여기에서도 동양역사와 서양역사 속에 등장하는 감나무가 아니라 동서양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감의 근원적인 문제를 따져야 한다는 사실을 불편하게도 눈치챌 수가 있는 것이다.이렇게 세부적으로 감(枾:persimmon)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원천적으로 어떻게 감이 생물학적으로 동서양이 정확하게 구분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솔직히 도무지 알길이 없다.분명하게 감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그럼에도 현재는 아시아종 즉 동양종과 서양종 중에서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기반으로 하는 미국종 디오스피로스 버지니아(Diospyros virginiana)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미국종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찾으려면 고려1138년(인종 16)시대 기록에 나타나는 고욤나무일 것인데 이것은 대목이라고 하여 접붙일 수 있는 디오스피로스 로투스(Diospyros lotus)란 감나무 종이다.그렇지만 이 감에서 그러한 사실을 찾아 보고 명확하게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현재 세계적으로 감나무전체를 지배하는 듯한 모습으로 발전한 일본종 즉 카키에 대한 왜곡된 생물학적 사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역사학적으로 생물학적 자연이치에 의해 무엇인가 찾아 잡아보려 하는 것이다.일본종이 카키가 왜 감나무에서 이렇듯 발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일까?일본은 열대아기후가 본 근거지에 대한 역사사실이다.그러나 일본종을 생물학적으로 찾아보면 온대기후에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분류되고 있다.때문에 일본은 온세계 각 곳의 기후를 총 망라한 형태로 생물학적 분류체계를 지배한다는 것에 가끔 놀라는 것도 사실이다.지금부터 그러한 문제점을 정리해보자.우리나라 역사서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에 감의 토산(土産), 토공(土貢)으로 나타나는 곳은 경기(京畿), 충청도(忠淸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로 경기도를 제외하면 하삼도(下三道)라 하거나 삼남지방(三南地方)이라 한 남쪽지방에서 토산으로 산출된 것으로 나타나며 이런 지역적인 문제는 공히 우리나라 두 사서(史書) 지리지가 일치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한편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농무부(USDA)가 제공하는 식물의 내한성구역(Plant Hardiness Zone Map)에서 말하는 감나무 재배지역을 말하는 것에서 보면 거의 남부지역과 일치하는 것은 오히려 동양종(Asian Persimmon)이라고 하는 학명 디오스피로스 카키(Diospyros kaki)에서 분리된 재배종들인데 가장 잘 성장할 수 있는 내한성구역(zone)으로써 "6a, 7,7,7,7,7,7,7a, 6b, 6b, 7, 7a, 7, 6b, 7, 7a(6b), 6b(7a), korea kaki 5b(6a), 6b(7a), 6a, 7(8) Ormond, 6b, 6a(6b), 7, 6a(6b), 6a(6b),7" 구역(Zone)으로 나타나 기온이 (°F)0~5,((°C)-17.7~-15)와 (°F)10~15((°C)-12.2~-9.4) 사이에 포진하고 있어 이 지역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거의 남부지역으로 버지나아,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중북부, 아칸소전체, 오크라호마중남부, 루이지애나북부, 텍사스중북부라는 구역임을 알 수가 있다.반면에 미국토종인 디오스피로스 버지니아(Diospyros Virginia)는 그보다 상위지역인 5, 5, 5a, 5,5,5a, 4,5,5,4(5), 5, 5a, 5,5,6,4b, 5,5,5,5,5a, 5,5,6,5,5,5, 내한성구역(Zone)으로 나타나고 이 지역에서 성장에 적합한 기온이 (°F)4~6((°C)-15.5~-14.4)에서 (°F)-20)~ -10((°C)-28~-23.3)사이지역으로 거의 뉴욕과 덴버를 기준으로 하는 북위 39° N와 40° N 사이임을 알 수가 있다.미국농무부(USDA)가 제공하는 식물의 내한성구역(Plant Hardiness Zone Map)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면 즉 감나무의 동양종과 서양종이 북아메리카대륙 전체 지역에 다 들어간다는 의미가 크다.그러나 이상한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의 미국종인 지역보다 동양종이 차지하는 내한성구역에서 일본종이 인기가 많다는 사실이다.이와같은 사실은 오히려 일본 열도본토보다 더 확실한 기후성을 나타내고 감의 질이 극대화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그러나 동서양이 구분되어 아시아에서 일본열도를 비교하려치면 구도 이상하게 변한다.물론 신중국지역인 동아시아대륙도 그렇지만 한반도 역시 이와같은 현상을 벗어날 수가 없다.이 구글그림지도에서보면 미국종의 위도는 바로 한반도 기후를 감안할 때 함흥과 원산, 또는 평양이라는 내한성구역을 대입할 수 있고 동양감 또는 일본감이라고 하는 디오스피로스 카키(Diospyros kaki)의 경우 구글 지도에서도 나타나지만 북위 댈러스 32.46° N 와 애틀랜타 33.46° N 인 것을 감안할 때 현 동아시아대륙에서 신중국 양자강 이북지역이 기준선임을 알 수가 있고 한반도는 제주도 남쪽 바다이며 일본은 남부지역 시코쿠(四国), 규슈(九州)지역만 들어갈 뿐이다.여기서 동양종이 성장해야 할 지역구분에서 심각한 어긋남과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다.신중국, 한반도, 열도에서 성장하는 감나무종류를 보면 거의가 중간 구역이다.근원적으로 서양자료들에서 동양 즉 아시아지역 기후 환경과 큰 괴리가 존재함을 알 수가 있다.이 말은 서양이 제공하는 자료들에서 동서양종이라고 구분하고 있지만 결국 원천적으로 감나무는 하나의 종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고 그것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옛 아메리카원주민들이 "말린과일(a dry fruit)"을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지형이나 기후임을 우리는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기에 현재 미국종의 분포지로 나타나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남부지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 지역은 내한성구역으로 바로 동아시아대륙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 곳으로 그렇지만 미국농무부가 제공하는자료와 어긋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고 미국종이라고 하지만 동양종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임을 발견할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를 하면서부터 이러한 점들이 뒤죽박죽 마구 혼입되어 실체를 분간할 수 없는 것으로써 이 감나무 역시 이러한 지적에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이와같은 사실에서 글쓴이가 냉철하게 판단할 때 아무리 서양학자들이 이와같은 사실들을 주장하고 결코 글쓴이가 지적하는 문제를 부정하겠지만 감나무의 근원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주요 위 학명들을 명명한 서양학자들을 보면 비록 독일학자, 프랑스식물학자라고 하지만 이들의 활동지역은 모두가 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이다.독일의 식물학자, 약사, 식물 분류학자라고 하는 칼 루드비히 빌데노브(Carl Ludwig Willdenow, 1765-1812)가 그렇고, 프랑스의 식물학자, 전염병학자 루이 오귀스트 조셉 데스루소(Louis Auguste Joseph Desrousseaux:1753–1838)도 마찬가지며 요한 프리드리히 그멜린(Johann Friedrich Gmelin, 1748-1804), 칼 빌헬름 셸레(Carl Wilhelm Scheele,1742-1786), 조셉 게르트너(Joseph Gaertner:1732-1791)가 그렇다.그들은 국가를 말하고 있지만 19세기 혹은 그 이전에 도시국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 활동한 것을 확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결국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인물은 바로 스웨덴생물학자이며 식물학의 시조(始祖)인 린네(Carl Linnaeus:1707-1778)이다.이 사람은 모든 식물의 근원적인 문제에서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동양종이며 일본종이라 하는 디오스피로스 카키(Diospyros kaki)를 명명한 린네 아들 칼 린네 영거(Carl Linnaeus the Younger) 또한 이러한 지적을 피할 수가 없다.더군다나 린네아들이 명명한 디오스피로스 카키(Diospyros kaki)를 현재과학자들이 이를 부정하고 있다는 모순도 있다.무엇인가 근원적인 맥이 맞지 않는다.우리는 미국종인 디오스피로스 버지니아(Diospyros Virginia)를 린네가 학명을 명명했다는데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왜냐하면 린네가 미국종과 고욤종을 명명한 1758년은 1776년 미국독립전쟁 이전시대이기 때문에 미국이란 국가가 존재하지 않을 때이다.그럼에도 린네는 미국종을 정확하게 표본을 채집하고 분석하였으며 학명을 명명했다는 사실이다.우리가 아는 모든 학명의 근원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찾지 않으면 안된다.서양자료에는 특히 지금의 동양종인 디오스피로스 카키(Diospyros kaki)를 중국에서 기원전 200년부터 사용한 기록을 이야기한다.이렇게 되니 현재 디오스피로스 카키(Diospyros kaki)가 재배종이라고 하지만 일본종으로 종명이 산재되어 상업성이 크게 미국대륙을 지배한다고 할 정도로 넓게 분포되어 나타나고 있다.백과사전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감나무 재배의 역사는 고려시대인 1138년(인종 16)에 ‘고욤’에 대한 기록이 있고, 1470년(성종 1)에도 건시·수정시(水正枾)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초기의 진상물(조정에 상납하는 세공)에 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에 이미 재배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고욤이라는 감은 바로 린네가 명명한 디오스피로스 로투스(Diospyros lotus L)인데 속명 'lotus' 의미는 오히려 불교적인 성격이 짙고 어원을 보면 그리스 로토스(Greek lotos)에서 왔으며 1580년대 이집트 하얀 연(Egyptian white lotus)에 붙여졌고 히브리어(Hebrew lot) 몰약 "myrrh"으로 부터 왔다고 이야기 하고 있으나 사실상 연(蓮:Indian lotus)이라는 개체는 역사적으로 인도, 이집트, 중국신화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감나무는 씨를 뿌려 묘목을 만들면 열매가 크게 퇴화하므로 반드시 접목으로 번식시킨다고 알려진다. 이때 대목(臺木: 접을 붙이는 나무)으로는 감나무의 공대(共臺) 또는 고욤나무가 쓰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위 고욤은 유럽을 원산지로 하고 있다.하지만 이것은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것으로써 카프카스(Caucasus)의 중하산지대를 말하지만 이 카프카스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이라고 해야 맞다.그곳에서 자라는 연이 너무 맛있어서 그것을 먹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연꽃과 함께 머물며 연꽃을 먹고 싶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카프카스 위치에 대해서도 우리는 앞으로 상당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이와같은 판단을 하기까지 여러가지 자료를 수집하고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세계삼한역사관의 본질은 여기서도 변하지 않는 철칙처럼 논리적으로 굳건하게 뒤받침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마무리하면서 우리나라 사서에 기록하고 있는 감나무 토산지역으로 경기, 충청, 경상, 전라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한반도와는 당장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것은 역사가 아니라 과학이다.그럼에도 한반도 역사는 엉뚱한 곳에 존재하는 근원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모여 있는 쓰레기와 같다.무엇이 역사라고 말할텐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곶감" rel="tag" target="_blank">곶감</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유희" rel="tag" target="_blank">유희</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조율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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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코리안)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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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코리안)이란? 글쓴이:한부울머리말1895년경의 역사배경한국인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정리머리말한국인은 누구인가.수많은 외세 침략에 의해 정말로 혼혈이 되어 버렸다는 것인가.한반도 역사관점에서 외세침략을 크게 보아 서한무제(西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점령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사실과 여수전쟁(麗隋戰爭), 나당(羅唐)침략에 의한 고구려, 백제멸망의 역사, 993년, 1010년, 1019년 3차에 걸친 거란족 요(大遼)나라의 고려침략, 1231부터 1257년까지 여몽전쟁(麗蒙戰爭)에 의한 몽골이 고려지배, 왜구(倭寇)들의 침략인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왜란(丁酉再亂), 만주여진족의 침략인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이 그것이다.그렇다고 하여 장기간동안 식민상태가 아니었기때문에 전체구성원들의 혼혈과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한 비약이다.그렇더라도 한반도 구성원은 단일민족이라는 현실성 팩트가 있다.현재 한반도 구성원들을 혼혈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헛소리일뿐이다.그럼에도 기존 기록된 역사 사실들은 단일민족이란 주장보다 다민족적 역사사실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성은 존재하고 있다.때문에 단일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한반도 역사가 조작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간단한 물음에서조차 우리가 이처럼 망서려야 하는 입장은 역사가 그동안 우릴 바보로 만들었다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역사가 무엇때문에 존재하는가.사실 기록이다.물론 이것조차도 사가들에 의해 변색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잔존하고 있는 기록에서 단일민족이란 주장은 공허한 이야기만 될 뿐이다.그러함에도 현실적으로 한반도 구성원은 단일민족이라 할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기록들은 산산히 흩어지거나 나눠어져 우리 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까지 도달하게 된다.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역사 아니다.이제 어떻게 할텐가.나는 조선인인가? 한국인인가?이 물음은 북한과 남한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적 판단이 아니지 않는가. 1895년경의 역사배경 아래사진은 영국(the British)의 화가, 탐험가, 작가, 인류학자였던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1865-1924)다.이사람은 1895년경 풍경과 초상화를 그리면서 미국, 일본, 한국을 차례로 여행하고 세계를 다녔다고 하였는데 미국은 물론 북아메리카대륙전체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 시기는 영국잉글랜드에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와 열도를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시대적배경이 못된다.특히 19세기 이전까지의 서양인들의 주장에서 보면 세계를 마치 자기집 건너방을 왔다갔다하는 식의 이동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부터 모순적인 사실임을 우리는 냉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교통편의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현재 편의적인 사실에 편승한 측면이 많고 자유자재로 교통이동이 손쉬웠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그럼에도 그들은 온천지를 자유롭게 제약을 받지 않고 기록을 완성시키고 있다는데 근대사의 크나큰 모순적인 문제점이라고 보는 것이다.랜도어가 정말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태평양을 건너 일본과 한국을 방문했는가.전혀 아니다.북아메리카대륙과 동아시아를 손쉽게 연결하고 싶지만 사실이 아니다.오늘날 우리가 알고 싶은 역사가 매우 어긋난 역사적인 배경이 존재함에도 이를 등한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배제함으로써 제일 중요한 가능성을 무시한다데 있다.때문에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것에서 역사배경과 역사위치모순을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당시 랜도어가 여행했다고 하는 미국, 일본, 한국은 같이 붙어있는 역사위치가 아니다.하여 나란히 배열하고 있는 국명에서 억지스러움이 보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서는 지리적 거리감이 주는 불편한 진실은 쉽사리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즉 랜도어가 말하는 것은 당시 북아메리카 대륙에 영국, 미국, 일본, 한국이 나란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쉽게 알아차려야 한다는 사실이다.이것 때문에 글쓴이는 시간과 초를 나누면서 이를 밝히려 애쓰는 것이다.동아시아의 역사흐름에서 볼 때 랜도어가 방문했던 1895년이라면 시기적으로 1894년부터 손문에 의해 하와이에서 중흥회가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신중국생성 태동이 시작될때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이홍장(李鴻章)은 고의적으로 영국(자본)과 밀통하여 청일전쟁(1894.7.25~1895.4)이 발발하게 한 사실과 동시에 동학혁명(1894.02.15.~1895.04.24)의 발발은 청일전쟁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서양역사학적으로는 당시에 쿠바 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제2차 독립반란(1895.2.)과 그리고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1895.10.01)발생하고 그러한 역사장소가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 옛 지중해연안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유럽 땅이라 할 수 있는 베네수엘라(Venezuela)의 국경지대임과 다시금 돌아와 동아시아역사에서 조선의 부패한 관리들 사이에 벌어진 근대화운동인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에 의해 조선에서 갑오경장(甲午更張:1894.07.27.~1896.01.01)으로 이어지며 조선에서는 공화국체제에 있을 법한 재판소(법원) 구성법 등 34건의 개혁안의결과 함께 군제(軍制)개혁과 더불어 을미개혁(乙未改革:1895-1896)이 단행되었으며 결국 갑오경장에서 친일본세력과 친러시아세력간의 다툼이 친러(親露西亞)정권인 제3차 김홍집내각(1895.7~1895.10)성립시켰고 이러한 파장과 알력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閔妃)가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1895.10.08)이 발생하여 고종을 두렵게 만들었고 결국 아관파천(俄館播遷:1896.02.11~1897.02.20)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내부적으로 꺼져가는 조선의 마지막 숨통을 이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이렇게 보면 현실적으로 조선 각 지역에서는 민란과 반란이 연이어 발생되고 이러한 혼란을 정부가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정치세력들은 그들의 권익과 사익을 위해 사분오열되면서 서로 아귀다툼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여기서에서 모든 것에서 조각조각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이상한 것은 조선은 이 시기까지 오직 독단적으로 군주가 일인절대권력을 가지고 통치하였다는 사실만을 알 뿐인데 재판소(법원) 구성법 등 34건의 개혁안의결과 함께 군제(軍制)개혁까지 이루었다고 하는 을미개혁이 진쟁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채로운 것이다.조선의 개혁가들이 동분서주한 것처럼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도 개혁가들은 똑 같은 개혁을 서둘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1895년 공화국체제에 있을 법한 재판소(법원)구성법이 제정된 이후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되고, 개항장이 증설되었으며, 1898년 2월 독립 재판소인 한성재판소와 경기재판소가 각각 한성부와 경기도관찰부에 합설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던 한반도 역사상황인 동양근대사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도 알 수가 있다.이러한 사실에서 마치 프랑스공화국(제3공화국)의 법체제아래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프랑스는 천연자원이 적은데도 소득수준이 독일 소득수준보다 높았고 프랑스에서는 조세 및 정부지출이 독일보다 낮았다고 말하고 있다.프랑스는 그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1894-1906)에 휘말려 있었을 시기인데 프랑스는 독일을 상대로 한 방어전쟁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독일이 원하는 배상금을 요구하자, 온 나라 국민이 돈을 모아 갚으면서 겨우 독일압박으로부터 벗어날수 있었기때문에 반 독일 감정과 반유대주의가 온 유럽을 휩쓸었다고 했다.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고하게 옥살이를 하게 만든 것이 바로 드레퓌스(L'affaire Dreyfus)사건이며 그가 간첩죄로 몰려 갖은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 핵심이다.결국 그 사건은 프랑스를 개혁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그리고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이 청일전쟁같은 느낌과 독일이 요구하는 배상금을 프랑스 국민들이 돈을 모아 갚는다는 사실은 또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조선에서 청일전쟁의 전쟁터가 되면서 그 복구비용으로 일본이 나서 차관을 스스로 제공하였고 그것은 조선의 재정을 일본의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고, 식민지 건설을 위한 기초 작업을 하기 위한 것으로써 4차례걸쳐 제공한 1,300만환의 차관은 조선을 압박하게 하여 곤경에 빠지자 조선민중들이 나서 국채 보상 운동을 벌렸다는 것과 같은 스토리임을 알 수가 있다.물론 시간적으로는 차이가 있을 지은정 그에 대한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조선은 왜 프랑스로 둔갑하는 것일까?글쓴이가 본 블로그 글 "부르주아(bourgeois)와 조선의 요민(饒民)http://blog.daum.net/han0114/17050842 "에서 주장했듯이 프랑스는 조선의 한성부 즉 파리와 같은 위치역사에 불과할 뿐임을 재고 한다면 수긍히 갈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다 이 모양이다.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미국과 영국자본은 조선에게 차관을 제공한 것이라고 보면 정확하다.어쩌면 조선에서 막강한 자본을 가진 세력의 귀족들간에 아귀다툼은 전쟁으로 확산되었을 수도 있다.미국과 영국은 어떤 위치의 국가 역사성과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무한의 자본을 가지고 19세기초부터 조선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세력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프랑스는 본 블로그 글 시리즈로 엮은 글 "다시보는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 ", "다시보는 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 ", "다시보는 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7 "에서 프랑스왕이 곧 조선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에 역사성이 대체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음도 알 수가 있다. 한국인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렇다면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의 글, 코리아 혹은 조선[Corea or Cho-sen (1895)]에서 말한 한국인을 묘사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데 지금의 한반도 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상당한 충격적인 요소가 많다.우리가 진정 한국인인지 조선인인지도 모르면서 역사를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서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지만 그래도 서양인의 기록으로 그러한 정도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지만 현실을 결코 망각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때문에 신중하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번역하여 풀어보면서 글쓴이의 생각도 첨가해 보고자 한다.4 장(CHAPTER IV)코리안(Corean)들은 중국인(Chinese)이고, 따라서 체격과 외모가 똑같다는 사실에서 중국인과 같지 않다고 한다면 반대편에 있는 이웃 일본인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문제는 어느 쪽도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중국인과 일본인이 이 나라에 계속 침입한 것에서 그들의 일반적인 모습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과 물론 내가 구분하고자 하는 것은 백인과 흑인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코리안(Corean)들은 몽골 태생(Mongolian origin)의 다른 민족들과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통적으로 속한다 하겠지만 그것과 완전히 다른 분파의 형태이다.작가는 이미 어떤 모습의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 중국인이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신중국인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역사사실과 작가가 알고 있는 사실에서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특별한 것은 작가는 바로 코리안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지만 코리안은 중국인과 다르고 일본인과 다르다고 하였으며 몽골인과 닮았지만 계통적으로 완전하게 다르다 하였다.그러나 우리는 작가가 왜 제목에서 굳이 코리아 혹은 조선[Corea or Cho-sen] 즉 고려 혹은 조선이라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볼 사한이다.한반도역사에서는 고려는 조선에 병합되어 망한 국가라고 나온다.즉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고려(高麗)는 유럽과 아랍이며 14세기말엽에 대조선(大朝鮮:indies)에 흡수병합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때문에 작가는 고려와 조선을 구분하기가 곤란해던 것으로 파악할 수가 있으나 고려인(高麗人:Corean)을 중국인(Chinese)이라고 하였다.그뿐만 아니라, 코리안(Corean)의 집단을 보면, 그 사람들 가운데서도 거의가 특징적으로 백인이나 아리안(Aryan)에 친밀하게 접근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왕국의 상류층이라는 사실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매우 흔한 타입은 누런(황색)피부색 얼굴의 눈꼬리가 올라간 높은 광대뼈 두껍고 쳐진 입술이다. 그렇지만 다시 보면 티벳인(Thibetans)과 힌두인(Hindoos)들을 많이 닮은 얼굴임을 알게 되고 만약 관찰을 더 멀리까지 가지고 간다면 일반적으로 쿨리계급(coolie classes)가운데 아프리카인들처럼 흑인 남성들이나 혹은 소아시아의 민족같은 사람들을 왕국 곳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타자를 치거나 기독교(십자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조선(Chosen)보다 더 흥미로운 나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시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거의 모든 인종의 표본들이 작은 반도에 도달하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느 정도 모든 이동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이론을 반증할 것이며 결코 그 반대이야기는 아니다.위 글에서도 보면 코리안 거의가 특징적으로 백인이나 아리안(Aryan)에 친밀하게 접근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왕국의 상류층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특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백인이나 아리안에 친밀하게 접근한다는 것은 고대 아리안의 역사를 코리안에 접목하고 있다는 것에서 특별하게 볼 것이 있다.이 아리안들이 공유한 인더스계곡문명(The Indus Valley Civilization)이 기원전 2000년경에 절정을 달했다 하였는데 이 시기는 바로 단군에 의한 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년)과 맞물려 있다.그리고 코리안중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형태는 누런(황색)피부색 얼굴의 눈꼬리가 올라간 높은 광대뼈 두껍고 쳐진 입술을 가진 사람이고 그들은 티벳인(Thibetans)과 힌두인(Hindoos)들을 많이 닮은 얼굴이며 좀 더 나가면 일반적으로 쿨리계급(coolie classes)가운데 아프리카인들처럼 흑인 남성들이나 혹은 소아시아의 민족같은 사람들을 왕국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였다.한마디로 온 세계인종을 다 망라(網羅)한 것이다.또한 놀라운 사실은 조선이란 땅에 모든 인종표본을 볼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또는 북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한 것인데 지금의 동아시아 한반도가 그 이동위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더하여 작가는 코리안의 인종표본들이 이동한 방향의 반대이야기는 결코 아니라고 라틴어 "vice versa" 로 못을 박고 있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사실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곳이 코리안들이 존재하는 위치라고 말하고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한반도 지형사정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 코리안(Corean)의 황실(royal family)을 예로 들면 황제와 황후, 특히 민씨 가문의 황후쪽의 모든 왕자들이 여느 백인(Caucasian)처럼 희고, 그들의 눈은 전혀 심하게 눈꼬리가 올라가지 않았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처럼 전혀 올라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일부 사대부 가문(귀족)의 구성원들은 유럽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다.물론 중산층은 몽골의 유형이고 비록 중국이나 일본인의 각각 일반적인 표본보다 다소 더 세련되고 기골이 장대하지만 그들은 북쪽의 이웃인 만주족(Manchus)만큼 그렇게 강하거나 키가 크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점이 많다.우리가 보았듯이, 코코라이스(Ko-korais)와 푸유스(Fuyus)의 커다란 침략이 이것을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민씨가문은 백인처럼 희고 눈꼬리가 올라가지 않았으며 작가 새비지처럼 한 모습이라고 하였다.때문에 코리안의 사대부가문들은 모두가 유럽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다.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글쓴이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코리안 즉 고려인들은 일부라고 할지라도 유럽계통의 사람들과 역사사실이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는 것이다.중산층은 몽골유형이고 중국인이나 일본인하층민 보다 다소 더 세련되고 기골이 장대하지만 만주족만큼 키가 크지않고 강하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만주족이 계층적으로 남부사람과 북부사람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그러한 체격의 문제는 바로 침략을 한 주체가 코코라이스와 푸유스라 하였는데 놀랍게도 코코라이스는 고구려(高句麗)를 말하고 푸유스는 부여(扶餘)를 말해 침략을 한 주체가 고구려와 부여임을 알게 한다.이것은 동아시아역사가 말하는 사실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다.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코리안(Corean)은 잘생긴 남자로 얼굴은 달걀모양의 타원형이고, 일반적으로 얼굴 전체를 볼 때는 길지만, 옆얼굴 윤곽은 약간 오목한 편이며, 코는 눈 사이의 미간(眉間)이 다소 평평하며, 넓은 콧구멍을 가지고 있다. 턱은 대체로 작고 좁으며 들어간 반면, 입술은 대개 코리안(Corean)얼굴의 취약한 부분으로 일반적으로 두껍고, 윗 입술이 위로 올라가 이를 드러내는 반면, 아랫입술은 측은하게 아래쪽으로 늘어져 기질적으로 힘이 부족하거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좋은 이빨을 가지고 있고 멋진 흰색이다.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에게는 축복이다.코리안들의 전반적으로는 잘생긴 남자로 얼굴은 달걀모양의 타원형이고, 일반적으로 얼굴 전체를 볼 때는 길지만, 옆얼굴 윤곽은 약간 오목한 편이며, 코는 눈 사이의 미간(眉間)이 다소 평평하며, 넓은 콧구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특이하고 기묘하게 보이는 특유한 아몬드형태의 새까맣고 신비스러운 동양 눈은 아마도 그들의 얼굴을 보완하며 그 속에는 온화함과 자부심과 부드러움이 묘사되어 있다. 다소의 경우는 기민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에서 예외이며, 하층계급에서는 검은 눈(black ones)이 거의 주요한 특성이고 광대뼈가 두드러진다. 털은 뺨과 턱, 입술 위 아래는 거의 없지만 머리에는 꽤 풍성하다. 코레아에는 머리 모양에 대한 매우 신기한 관습이 있고, 그 관습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여기서 "~wear your hair"는 보통 일반적으로 머리모양을 말해 조선인의 머리 모양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즉 상투를 튼다든지, 댕기머리, 특히 왕족과 귀족들의 머리모양의 관습을 생각할 수가 있다.랜도어의 글에서 모든 것이 충격이고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한반도역사에서 침략을 받았다던 우리 역사의 한 축이었던 부여와 고구려가 코리아를 침략했다는 사실에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Fuyu Kyrgyz language, the easternmost Turkic languageKoguryoic languages, also called Fuyu, a group of languages of Korea and Manchuria mentioned in ancient Chinese sources Buyeo kingdom, also called Fuyu고구려어, 고대 중국 원천 부여 왕국에서 언급된 한국과 만주의 언어군인 푸유(Fuyu)라고도 불린다.영어자료에는 푸유 키르키즈어(Fuyu Kyrgyz language)는 부여(扶餘)키르키즈어라고 해석하고 최동단(最東端) 투르크어라고 하고 있다.위치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지금의 동아시아대륙 동단(東端)인 만주와 한반도에 투르크어가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고구려어는 고대중국원천(古代中國源泉) 부여왕국(扶餘王國)에서 사용된 지금의 한국과 만주의 언어군으로 부여(Fuyu)라고 불린다고 하였다.정리박찬승(민족, 민족주의2010) 자료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이광수(李光洙)의 조선민족론(朝鮮民族論,1933)이전까지는 조선인이 단일민족이라고 표현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신채호(申采浩)의 독사신론(讀史新論,1908)과 박은식(朴殷植)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1911)등에서 조선인이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인정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은 일제에 의한 기획적인 것이라고 할 때 1933년 이전까지 단일민족이 아닌 다민족 상황이 조선을 지배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사실도 여러방면에서 증명되지만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코리안은 여러인종들을 포괄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아래 사진그림은 1865년 독일유기물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Baron Justus von Liebig:1803-1873)가 우루과이 프레이 벤토스(Fray Bentos)에 설립한 리빅 육류 회사(Liebig's Extract of Meat Company)의 광고인데 최소한 1899년 OXO로 명칭이 바뀌기 이전까지의 광고임을 알 수 있다.위 그림들을 보면 전부 코리안들의 낯선 일상의 사진들이다.특히 고고학적 유적과 문헌은 기원전 6세기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스틸트워크가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어로는 stilt walker를 뜻하는 κωλοβαθριστής(kolobathristēs), κῶλον(kolobathron), "stilt", ".(kolon), "limb"와 βάθρον(bathron), "base, strist"의 죽마다리 합성어였다. 벨기에에서는 1411년부터 벨기에 남부의 주 나무르(Namur)의 죽마걷기사람들이 죽마 위에서 전투하는 것을 연습했다하고 습지나 침수 지역의 주민들은 때때로 습지에서 불어난 강물을 벗어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죽마를 사용했다 한다. 프랑스 남부 랜즈 지역의 목동들은 그들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죽마위에 서서 양떼를 관찰하곤 했다한다. 그렇게본다면 코리아에서 죽마타는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우리나라의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있는데 이 죽마고우가 죽마를 같이 타던 옛친구라는 말이니 이것도 서양관습인 것 같지만 실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것으로써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말이다.이것에 대해 나중에 하나하나 다시금 풀어볼 예정이다.위 그림은 대중일간지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의 1894년 8월 13일자 "LES EVENEMENTS DE COREE, AGITATION A SEOUL" 이란 설명의 삽화사진이다.즉 코리아의 정치적 상황(사건)이라 하여 "서울 동요(動搖)"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서울 내 온갖 민족, 종족, 사람들이 모여 어떤 상황을 끼리끼리 모여 수근거리고 무엇인가에 대해 심히 걱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일부는 군인들에게 환호를 하고 응원하는 모습도 보인다.이러한 모습들에서 서울에는 수많은 종족, 민족들이 모여 어우러져 산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다.이때 사건은 바로 1894년 8월 1일부터 발발한 청일전쟁 때문이다.1894년 3월부터 동학혁명이 발생되어 진행되고 일본이 동학혁명에 정식으로 개입하여 청나라와 충돌이 야기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청나라는 조선군인이거나 고려군인으로써 즉 코리아라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http://blog.daum.net/han0114/17050728 "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 "에서 충분히 알아본 사실이다.이 신문은 프랑스 파리인 무아즈 폴리도르 미요(Moise Polydore Millaud:1813-1871)에 의해 창간된 보수적인 파리(Paris)일간신문으로 1863년부터 1944년까지 발행되었다고 알려지고 1895년 발행부수가 200만부나 되어 세계 최대 신문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광수(李光洙)의 조선민족론(朝鮮民族論,1933)이 발표되었던 1933년이라면 바로 미국의 민주당(民主黨, Democratic Party)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재임:1933-1945)와 나치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히틀러(Nazi Germany,1933-1945)가 세상에 등장하던 해이다.이것은 세계역사학적으로도 상당한 의문을 제시하는 상황들이다.조선체제내에 수많은 당이 존재하고 각 민족과 종파들에 의해 나눠지고 분열된 결과라 할 수 있다.이렇게 취임한 루스벨트는 독재정권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장기집권을 하면서 미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으로서 국무성의 의견을 무시하고 거의 독단적으로 외교 업무를 처리했다고 한다조선의 마지막 역사가 이상하게 종지부를 찍은 것에서 의문을 가진 우리들에게 더더욱 궁금한 것이 아닐 수 없다.어떻게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라고 하는 2차세계대전을 상대로 한 주역자 두 세력들이 1933년 동일한 년도에 생성되고 동일한 년도에 퇴임 또는 사망하였는가 하는 도플갱어(doppelganger)적인 의심이 묻어있는 것이다.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똑같은 상황은 연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이때는 신중국의 내전이라고 하는 마지막 국공내전 5차전(1933.10~ 1934.10)이 벌어질 때며 조선에서는 비록 일제치하라 할지라도 새로운 체제를 정비하는 듯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조선일보가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른 철자법으로 발행 개시하기 시작했다고 나와 있다.위 랜도어의 글에서보면 조선 또는 코리아에서의 구성원들을 보면 상위계층 즉 우리가 사대부라고 한는 귀족들은 유럽인과 생김새가 동일하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서두에서 한반도역사가 주장하는 외세침입에서 그렇듯이 많은 변형이 있어야 함에도 코리안(Corean)들은 중국인(Chinese)이라고 하지만 중국인과 일본인과 거의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몽골 태생(Mongolian origin)이라고 하지만 계통적으로도 완전히 다른 분파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더군다나 코리안들의 상류층은 특징적으로 백인이나 아리안(Aryan)에 친밀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다시말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다.코리안의 일반적인 형태는 누런(황색)피부색, 즉 황인종 얼굴의 눈꼬리가 올라간 높은 광대뼈 두껍고 쳐진 입술이라 하였는데 한반도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다시 보면 이러한 코리안들이 티벳인(Thibetans)과 힌두인(Hindoos)들을 많이 닮았고 또는 쿨리계급(coolie classes)가운데 아프리카인들처럼 흑인 남성들과 혹은 소아시아의 민족같은 사람들을 왕국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고 있다.그래서 이러한 혼입에 코리안들은 상류층부터 하층계급까지 마치 세계인종표본을 보는 듯하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이 다민족사회라는 것을 입증하게 하는 것이다.특히 코리안(Corean)의 황실(royal family)을 예로 들면 황제와 황후, 특히 명성황후(민씨가문)의 황후쪽의 모든 왕자들이 여느 백인(Caucasian)처럼 희고, 그들의 눈꼬리가 올라가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 영국인인 그들처럼 모습을 하고 있다 말하고 일부 사대부 가문(귀족)들의 구성원들은 유럽인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여기서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가야 하는 것이 있는데 비로 코리안들을 침략한 외세가 어떤 민족인가 하는 것이다.물론 우리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 아닌 타민족일 것일 분명한 것인데 놀랍게도 침략세력이 고구려와 부여라고 하고 있다.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긴가.어떻게 동이족인 고구려와 부여가 한반도를 침입할 수 있는가.이 같은 사실은 실로 천지개벽할 이야기가 아닌가.무엇이 우리역사인가.참혹하고 처참한 전쟁을 유발시켜 인류가 남긴 고귀한 유물을 파괴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게 만들며 세계질서를 한꺼번에 흐트러버린 히틀러와 루스벨트와 그 추종세력들은 현재 이토록 혼돈의 역사가 되게 한 책임이 진정없는 것인지 묻고싶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명성황후" rel="tag" target="_blank">명성황후</a>,&nb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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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로 알게하는 고구려는 유럽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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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로 알게하는 고구려는 유럽역사 글쓴이:한부울1.고서가 말하는 상추2.상추의 역사3.종교와 약용 전통4.상추종류와 어원5.결어 1.고서가 말하는 상추 해동역사 제26권 / 물산지(物産志) 1 채류(菜類) 상치[萵苣]○ 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隋)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주었으므로, 인하여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치이다. 《천록지여(天祿識餘)》 ○ 살펴보건대, 와거는 지금 속명이 ‘부로’이다. 살펴보건대, 《묵객휘서(墨客揮犀)》에는 이르기를, “와채(萵菜)는 와국(萵國)에서 왔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였고, 《청이록(淸異錄)》에는 이르기를, “고국(高國)으로부터 왔다.” 하였고, 《천록지여(天祿識餘)》에는 이르기를, “고려로부터 왔다.” 하였다. 이는 아마도 와국(萵國)이 잘못 고국(高國)으로 되고, 고국이 또다시 바뀌어서 고려로 된 것인가? 그러나 전대의 역사서를 두루 상고해 보아도 와국이란 나라가 없으며, 오로지 《당서(唐書)》 실위열전(室韋列傳)에 파와부(婆萵部)가 유성(柳城)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와국인 듯하다. 그리고 이는 모두 동이족(東夷族)에 속하는 나라여서 잘못 전해져 고려로 된 것인가? 상고할 수가 없다.부(附) 고려 사람들은 생채(生菜)로 밥을 싸 먹는다. 《원시선(元詩選)의 양윤부(楊允孚)의 난경잡영(灤京雜詠) 자주(自注)》 ○ 원시(原詩)에 이르기를, “해홍은 붉은 꽃만 같지 못한데, 살구가 어찌 파람(巴欖)처럼 좋겠는가. 다시금 고려의 생채를 말할진댄, 산 뒤편의 향초(香草)를 모두 가져온 것 같네.[海紅不侶花紅好 杏子何如巴欖良 更說高麗生菜好 摠輸山後蘪菰香]” 하였다. 산림경제 제1권 치포(治圃) 상추[萵苣] 부로 萵苣。白莖者佳。紫者劣。六月耕 纂要。 二三月間。與芥子同種。至六月收子。更種於七月。 俗方 八月。下種待長。治畦分栽。來年摘取隨澆。中心肥大。卽萵笋。 閑情錄 상추는 줄기가 흰 것이 좋고 줄기가 붉은 것은 못한데, 6월에 심는다. 《사시찬요》 2~3월경에 겨자와 함께 심고, 6월이 되면 종자를 받았다가 7월에 다시 심는다. 《속방》 8월에 종자를 뿌리고 싹이 자라기를 기다려서 이랑을 치고 갈라 심는다. 이듬해에 잎을 따 먹되 수시로 물을 주면 중심 부분이 비대해지면서 즉시 상추의 순이 돋아난다. 《한정록》 조선 말기에 실학자 한치윤과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기전체로 서술한 사서 해동역사(海東繹史)제26권 채류(菜類) 상치[萵苣]편에보면 ○ 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隋)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주었으므로, 인하여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치이다.라 하였고 ○ 살펴보건대, 와거는 지금 속명이 ‘부로’이다 하였는데 산림경제 제1권 치포(治圃)편에는 상추[萵苣]를 '부로'라한 기록이 보인다.천금채(千金菜)그런데 묵객휘서(墨客揮犀)에는 이르기를, “와채(萵菜)는 와국(萵國)에서 왔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였고, 청이록(淸異錄)에는 이르기를, “고국(高國):고구려.으로부터 왔다.” 하였고, 천록지여(天祿識餘)에는 이르기를, “고려로부터 왔다.” 하였다. 이는 아마도 와국(萵國)이 잘못 고국(高國)으로 되고, 고국이 또다시 바뀌어서 고려로 된 것인가? 라고 되려 묻고 그러나 전대의 역사서를 두루 상고해 보아도 와국이란 나라가 없으며, 오로지 당서(唐書) 실위열전(室韋列傳)에 파와부(婆萵部)가 유성(柳城)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와국인 듯하다고 예측하고만 있다.파와부(婆萵部)가 고국인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파와부는 어디일까?그리고 이는 모두 동이족(東夷族)에 속하는 나라여서 잘못 전해져 고려로 된 것인가? 상고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후세 역사농단자들에 의해 각색된 것으로써 사실을 왜곡하려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파와부(婆萵部)는 이란(Iran:波斯) 페르시아를 파사라 하였으니 그렇고 와(萵)는 와국(萵國)과 연결되니 이슬람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그리고 이사람들을 동이족으로 혼돈한다는 사실이다.더 한번 보자. 그렇다면 상추를 서양에서는 어떻게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을까?간단하게 생각하면 본래 상추의 기원이 이집트라는 사실과 강희자전에서 상추가 와국에서 나왔다고 한 사실을 대입하면 이집트(埃及)와 와국(萵國)은 같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그런데 현재 동아시아역사의 중국이란 프레임에서는 중국 수나라 사신이 분명 고려 또는 고구려라 하여 상추가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하고 있지 않는가.고려 사람들은 생채(生菜) 즉 상추 잎으로 밥을 싸 먹는다고 하고 있지 않는가.고구려라함은 와국(萵國)과 동일하게 보았으니 처음 서양에서는 상추가 시작된 곳이 이집트라 하였고 즉 고구려가 이집트와 연결된다는 사실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유럽역사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가 동아시아 동단에 존재했던 고구려와 연결된다고 하니 기절초풍할 이야기다.도대체 상추가 천금채(千金菜)라고 하면서 옛 중국 수나라사신이 고구려사람에게 천금을 주어야 얻을 수 있다는 귀한 식품이 고구려 사람들에게 실제로 어떤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분명하게 있다는 사실이다. 성호사설 제5권 만물문(萬物門) 생채ㆍ괘배(生菜掛背) 원(元) 나라 사람 양윤부(楊允孚)의 시에,更說高麗生菜美 고려 식품 중에 맛 좋은 생채를 다시 이야기하니 / 摠輸山後藦菰 향기로운 새박나물과 줄나물을 모두 수입해 들여온다 / 스스로 주하기를, ‘고려 사람은 생나물로 밥을 쌈싸 먹는다.’ 하였다. 우리나라 풍속은 지금까지도 오히려 그러해서 소채 중에 잎이 큰 것은 모두 쌈을 싸서 먹는데, 상치쌈을 제일로 여기고 집집마다 심으니, 이는 쌈을 싸 먹기 위한 까닭이다. 위 성호사설을 보면 특히 고려식품 중에 생채를 이야기 하였는데 이 생채가 바로 상추라고 하였고 고려사람은 생나물로 밥을 쌈을 싸 먹는다 하지 않았는가.고려사람들은 상치쌈을 제일로 여기고 집집마다 심는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치커리(chicory 菊苣)는 고려 꽃상추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59 " 와 "민속놀이 팁캣(Tip-cat)과 자치기의 공통점이 주는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404 "이란 글에서 고구려와 생채 즉 상추가 하나의 역사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였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들여다 보았던 바가 있다. 2.상추의 역사 [1]莴苣(学名:Lactuca sativa),又名萵菜、春菜,是菊科莴苣属之一年生或二年生蔬菜。在台灣原來萵苣僅只指菜心,現在泛指莴苣属類蔬菜。它是一种很常见的食用蔬菜,中国、日本等国的人往往烹熟后食用,在西方文化中人们往往放在沙律、漢堡包等食品中生食(称生菜)。在香港,為了跟西生菜(結球萵苣)區分,叶用的莴苣又稱為唐生菜。 科学分类 编辑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菊类植物 Asterids 目: 菊目 Asterales 科: 菊科 Asteraceae 属: 莴苣属 Lactuca 种: 莴苣 L. sativa 二名法 Lactuca sativa L. 상추는 영어로 레투스(Lettuce:Lactuca sativa)라 하는 것으로 국화과, 즉 아스테라과[Compositae/Asteraceae, 菊花科]에 속한다. 잎채소로 재배되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줄기와 씨앗을 위해 재배되는 경우도 있고 상추는 서양인들에게 식품으로 수프, 샌드위치, 랩과 같은 다른 종류의 음식에서도 볼 수 있지만 샐러드에 가장 많이 사용되며 또한 데치거나 삶을 수가 있다고 설명된다. 한 가지 품종인 우순(莴笋), 우주(莴苣州), 즉 아스파라거스 레터스(asparagus lettuce) 줄기상추(Celtuce)는 줄기를 위해 재배되는데, 줄기는 날 것으로 먹거나 익혀먹는다. 이것의 분류체계는 Lactuca sativa var augustana 이다.상추는 잎이 무성한 녹색으로 주로 사용되는 것 외에도, 수세기 동안 인간이 사용한 것으로 종교적이고 약학적인 의미가 많다고 알려진다.영어자료를 보면 본래 유럽과 북아메리카는 상추 시장을 근원지로 하여 근세기에 지배했지만, 20세기 후반에는 상추의 소비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전세계적인 식품이 되었다고 하지만 근원지는 유럽과 북아메리카대륙을 동시에 말하고 있어 북아메리카대륙에 오히려 근원이 아닌가도 한다. 康熙字典萵【申集上】【艸部】查询·新华字典《集韻》烏禾切,音倭。《類篇》萵苣,菜名。《杜甫·種萵苣詩序》堂下理小畦,隔種一兩席許萵苣,向二旬矣。又《續博物志》萵菜,出萵國,有毒,百蟲不敢近 상추는 유럽지중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자료가 많이 보인다.때문에 대체적으로 상추는 유럽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모든 자료에서 공히 알 수가 있다.그러나 유럽지중해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북아메리카대륙 서남부와 많이 겹쳐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위 강희자전에 보면 와채(萵菜) 즉 상추는 와국(萵國)으로부터 나왔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궁금한 것은 와국이란 어딜까?하는 의문이다.상추의 근원지가 유럽이라고 하면 유럽국가 어디겠지 한다.하지만 유럽 중에서도 현재 이집트가 상추의 모든 근원으로 나타나 이집트를 지정할 수밖에 없고 그것과 함께 고구려가 괴이하게도 동서양역사자료에서 서로 가깝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와국은 고구려인가. 아니면 이집트인가.이렇게도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다.그렇다면 고구려가 이집트란 말인가.이렇게까지 결론에 도달한다.본 블로그에서 살펴본 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이집트와 페르시아가 신라(新羅, Shilla, Silla)와 연결되고 이슬람의 태양신이 라(羅:Ra)와 연결되는 것은 곧 신라을 의미하는 것이니 삼한인 고구려가 이집트와 엮이지 못할 이유도 없다.앞에서 언급했지만 본 블로그 글 "상추(萵苣)는 고구려에서 나왔다"란 상당히 이른 글도 있지만 송조(宋朝)사람 도의(陶殼)가 편찬한 청이록(淸異錄)에는 “고국(高國)으로부터 상추가 왔다"라고 하여 고구려를 상추 근원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와같은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핵심적인 이야기다.영어자료에는 상추라고 하는 레투스(Lettuce)는 씨앗에서 기름을 생산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ancient Egypt)에서 처음 재배되었다고 하고 있다.근대사를 보면 솔직히 이집트가 거대한 나라였다고는 하지만 존망자체가 불분명하다.더군다나 유럽역사가 이집트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의문투성이다.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이집트는 1517년부터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조선이 해체되던 시점인 1882년 영국 보호령이 되었으며, 1920년 비로소 미국이란 자본국가가 생성되던 시기이면서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영국인들의 주도로 이집트고고학유물들이 발견되던 때인 1922년에 유럽열강들에 의해 오스만제국의 해체와 더불어 이집트왕국으로 독립하고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가 되어 피라미드(pyramid)·스핑크스(sphinx)등 유적 덕분에 세계 유수의 관광국이 되었고 석유·면화·쌀 등이 산출 되고 주민의 대부분은 아랍인이라고 현재 역사서가 그렇게 쓰고 있다.이집트역사는 상당히 많은 음모론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일부역사학자는 사실상 피라미드(pyramid)·스핑크스(sphinx)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수수께끼 같은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때문에 이집트문명은 추상적인 것이 많다.20세기초 스미스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e)와 프리메이슨 학회(Freemasons), 예수회(Jesuits)가 자금을 지원한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의 중심에 있는 탐험에 관한 사실이 1909년 4월 5일, 피닉스 가제트(Phoenix Gazette) 1면 기사에 실리면서 상당히 유명해졌던 이야기가 있는데 콜로라도 강(Colorado River)위 높은 곳에 있는 인공 터널의 미로(迷路)에 고대 공예품, 상형문자, 갑옷, 원시 인도(印度)와 이란(Iran:波斯) 신(神)들의 조각상, 미라로 가득 찬 가상의 성채를 찾아내는 굉장한 기행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그렇지만 진실이 알려진 것은 거의 없고 비밀에 쌓여 있을 뿐이다.오히려 스미스소니언협회 등이 주동이 되어 중요한 고대유물들을 묻어버리고 진실이 문혀버리는 불편한 진실을 염려하는 고고학적 은폐의 불안한 징후들을 감지한 역사학자들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있다.그랜드캐년의 탐험폭로는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 미로와 같은 것이며 유물들도 이집트문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하였으니 이와같은 사실들이 밝혀져 제대로 알려져야 하지만 설로 끝나고 대신 끝모를 음모론만이 생성되면서 기득권세력에 의해 기존 역사를 건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의혹이 상당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변광현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영국인들이 아시아역사보다 2000년을 훨씬 빠르게 역사기원을 설정하고 조작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이집트역사 정체가 불분명한 상태로 유럽역사가 올라타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오늘날 유럽역사의 근원적인 의문점이다.이집트는 고대 그리스어로 이집트를 지칭하는 아지포스(Aigyptos:Αίγυπτος), 영어로는 이집트(Egypt), 프랑스어는 에집트(Égypte), 라틴어는 아집투스(Agyptus)에서 유래했다 하고 원형은 고성(古城) 멤피스 헤카파(Hekaptah)의 오칭으로 푸타(Ptah) '신(神)들의 집'이라는 뜻으로 알려진다.아랍어는 '광활한 나라'라는 뜻의 미슬[Julia(misrمِصر‎)]이라고 하며 아시리아(Assyria:BC2500-BC609)의 설형문자에서 유래했고, 남송(南宋)의 조여괄(趙如适)이 편찬한 '제번지(諸蕃志)'에서는 마슬(Maṣr蜜徐籬مَصر‎)로 번역하였으며 중국 명조 마환(馬歡)이 정화(鄭和:1371-1434)의 남해원정에 참여하고 쓴 견문서 영애승람(瀛涯勝覽)에는 이집트를 미식(米息)로 로마제국행성(羅馬帝國行省)으로 번역하였던 것이다.이집트는 근세기에 영국의 첩보기관의 정보원 각축장이 되었던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1913년부터 이집트무덤을 발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1922년 투탄카멘(Tutankhamon)의 무덤을 발견할 때까지 영국 학자들에 의하여 2000년을 뛰어 넘는 유럽역사가 만들어지는 시작이라고 해야 맞다. 고 변광현 교수의 글 "상고시대에 대하여"에서 말하길 근세기 200년 동안 영국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집트와 크레테 문화에 대한 무엇인가를 속여서 자신들의 고대 역사를 조작하고, 더나아가 유럽의 고대 역사를 아시아 역사 이전의 것으로 조작한 것인데, 그 공작의 일환으로 진실된 입을 봉하기 위하여 발굴 관계자들을 하나씩 살해하고, 그 의문을 덮어버리기 위하여 군첩보부에서 언론과 소설가를 앞장세워 무덤의 저주라고 속인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상추재배 역사가 매우 오래 되어 기원전 4500년경의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작물로 기록됐으며, 기원전 550년에 페르시아 왕의 식탁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고, 그리스, 로마시대에 중요한 채소로 재배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반면 중국에는 당나라 때인 713년의 문헌에 처음 등장하고, 한국에는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으며, 중국의 문헌에는 고려의 상추가 질이 좋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서두에 말한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근원은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뿐이다.상추 생식은 기원전 4천년 고대 이집트 왕조 시작 전부터 숭배된 신(神) 민[敏,Min]의 신성한 식물로 여겨지면서 시작되었고 축제 기간 동안 그의 숭상 근처에 놓였다 한다. 이 식물은 신이 "지칠 줄 모르고 성행위를 행하도록(perform the sexual act untiringly)" 돕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종교의식에서의 사용은 무덤과 벽화에서 많은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 재배된 품종은 키가 약 75cm(30inch)로 현대 로메인 상추(romaine lettuce)의 큰 것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상추들은 이집트인에 의해 개발되어 그리스인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과 상추들을 공유하였다고들 말한다. 서기 50년, 로마의 농업가 콜루멜라(Lucius Junius Moderatus Columella: AD4-70)는 상추의 여러 종류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 중 일부는 오늘날의 상추의 조상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상추는 많은 유럽 중세 문헌에 등장하는데, 특히 약초로서 등장한다. 빙겐(Bingen)의 힐데가르드(Hildegard)는 1098년에서 1179년 사이의 한약재에 관한 그녀의 글에서 상추를 언급했다. 1586년, 요아킴 카메라리우스(Joachim Camerarius)는 양상추[head lettuce], 잎상추(loose-leaf lettuce), 로메인 상추(romaine (or cos) lettuce)등 세 가지 기본적인 현대 상추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으며 15세기 후반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에 의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상추가 처음 소개되었고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사이에 많은 품종이 유럽, 특히 네덜란드에서 개발되었으며 18세기 중엽과 19세기 초에 출판된 책들은 오늘날 정원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품종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을 근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서기 50년경에 설명했듯이, 상추 잎은 종종 요리되어 로마인들이 기름과 식초 드레싱을 곁들여 먹었지만, 때때로 더 작은 잎들은 날것으로 먹기도 하여 생식한 것이다.이 생식은 상추로 쌈을 먹는 우리나라 고구려 사람들을 생각케 하는 것이다.로마황제 서기 81-96년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 Augustus:51-96)통치 기간 동안, 식사 전에 상추 샐러드를 대접하는 전통이 시작되었고 로마 이후의 유럽에서는 상추 잎 위에 뜨거운 기름과 식초 혼합물을 붓는 방법뿐만 아니라 주로 큰 로메인 타입(large romaine types)으로 상추를 서리하는 전통도 이어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오늘날, 상추의 대부분의 잎들이, 재배되고 있다. 대부분의 상추는 샐러드에 단독으로 사용되거나 다른 채소, 야채, 고기, 치즈와 함께 사용된다. 로메인 상추(Romaine lettuce)는 종종 멸치와 계란을 포함한 드레싱과 함께 시저 샐러드용으로 사용된다. 상추잎은 수프, 샌드위치, 랩(wraps:납작빵에 여러 가지 소를 넣고 말아 싼 음식)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줄기는 날 것으로 먹기도 하고 요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상한 것은 중국의 상추 소비는 건강상의 위험과 생 잎 먹는 것에 대한 문화적 혐오 때문에 서구 국가들과는 다르게 발전했다고 했다. 즉 유럽에서는 상추를 생식하지만 중국인들은 생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온 상추가 아닐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우리나라사람들이 상추 잎을 쌈으로 먹으며 생식하는 것은 중국 동양풍속이 아니라 바로 유럽풍속이라고 하는 것인데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한반도 사람들이 중국인들을 따라하지 않고 유럽인들의 음식습성을 따라한다는 사실에서 이를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가.중국에서는 "샐러드"가 요리된 야채로 만들어져서 뜨겁거나 차갑게 제공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상추사용은 또한 서양보다 더 다양한 요리에 사용되었고, 두부와 고기 요리, 국과 볶음 또는 다른 야채와 함께 다양한 요리에 섞여 기여했다고 하며 주로 국과 볶음식으로 먹는다고 알려진다. 3.종교와 약용 전통 상추는 먹을 수 있는 잎이 많은 채소로서의 통상적인 목적 외에도 약초와 종교적 상징으로서 고대시대에 여러 가지 용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들은 상추를 성적 능력과 여인에 대한 사랑의 촉진과 여성의 출산 상징으로 생각했고 로마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성적 효력을 증가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식물을 남성의 발기부전과 연결시켜 장례식 동안에 제공했다는데 그리스 아도니스(Adonis)의 죽음 신화에서 그 역할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19세기의 영국 여성들은 상추가 불임을 야기할 것이라고 믿었고 상추는 가벼운 마약성분을 가지고 있으며 천금채(天金菜)라고 하는 재배된 락투카 사티바(Lactuca sativa L.)가 야생상추들보다 낮은 수준의 마약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속성 때문에 앵글로 색슨족에 의해 "잠꾸러기"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했다. 마약 효과는 상추의 줄기에 있는 하얀 액체(latex)에서 발견되는 두 세스퀴테르펜락톤(sesquiterpene lactones)의 속성으로, 락투카리움(lactucarium) 또는 "상추아편"이라고 불린다. 상추는 유대인의 유월절(逾越節) 만찬(晚餐)의 일부로서도 먹는데, 그곳에서 마짜(matzah:無酵餠)와 함께 먹는 쓴 약초(bitter herb)로 여겨진다. 일부 미국 정착민들은 천연두(smallpox)가 상추를 섭취함으로써 예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란(페르시아)의 한 믿음에서는 장티푸스(typhoid)에 걸렸을 때 씨앗을 섭취하면 낳는다고 하였으며 민간요법 또한 그것을 통증, 류머티즘, 불안, 신경과민, 기침과 광기에 대한 치료법이라고 주장하였다.상추의 종교적 유대관계는 이 식물을 먹는 것을 금하는 종교적 금기가 있고 이라크 북부 야지디사람들(Yazidi people)사이에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다. 상추는 처음에 지중해 변두리의 바위 더미 위나 숲속 공터에서 생장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 야생종은 아편(阿片,鴉片,opium)과 유사한 마취제를 함유하고 있어 고대 로마인(Ancient Rome)은 식사 후 이 식물의 잎사귀를 먹으며 잠을 청했다고 알려진다. 상추를 먹으면 졸음이 오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2]毒萵苣(学名:Lactuca virosa)科学分类 编辑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菊类植物 Asterids 目: 菊目 Asterales 科: 菊科 Asteraceae 属: 莴苣属 Lactuca 种: 毒莴苣 L. virosa 二名法 Lactuca virosa L. 고대 이집트인들은 독상추(毒萵苣:Lactuca virosa)를 마약과 최면약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진통과 최면 효과(鎮痛藥和鎮靜劑效用)가 있는 락투세린(Lactucerin)과 락투신(Lactucin) 성분이 있기 때문에 19세기에 아편을 얻을 수 없을 때 의사들에 의해 진통제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상추는 자연적 치료법, 대체치료법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편이라고도 한다.또 독상추의 흰 즙은 남성 장기를 발기시키는 효과가 있고, 독상추의 줄기가 잘려나간 뒤 하얀 즙이 흘러나와 정액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남성의 성욕을 촉진하는 작용한다고 여겼던 것이다.고대 그리스에서는 식전에 독상추를 먹어야 할지, 식후에 먹어야 할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고 알려지고 고대 로마의 의학자이며 철학자인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Claudius Galenus:129-199)는 식사후 상추를 먹고 잠을 충분히 자고 다음 날 일어나면 기운이 넘친다고 식후에 독상추를 먹을 것을 권했다고 한다.분명한 것은 고대 로마와 고대 이집트의 몰락 후에도 그들이 독상추를 먹는 풍습이 남아있었다고 했고 이 독상추들은 또 다른 야생종 식물들과 교잡하여 오늘날 상추를 낳았다고 생각하고 있다.오늘날 상추의 야생 조상인 독상추(poisonous lettuce) 이명 야생상추(毒莴苣:Lactuca virosa)는 오늘날에도 중부유럽과 남부유럽의 많은 지역에 널리 퍼져있고 파키스탄 펀자브지역(Punjab Region)과 인도 그리고 호주(Australia)지역에 재배되고 있으며 북아메리카에서는 캘리포니아(California), 앨라배마(Alabama), 아이오와(Iowa), 워싱턴(Washington) DC에서 소개된 대로 기록되었으며, 대륙의 다른 지역에서도 야생으로 자란다. 4.상추종류와 어원 락투카 사티바(Lactuca sativa)는 국화과 Asteraceae(sunflower or aster)의 락투카 Lactuca (lettuce)속이다. 이 종은 1753년 식물학의 시조(始祖) 린네(Carl Linnaeus:1707-1778)가 자신의 식물의 종(種) 제2권(second volume of his Species Plantarum)에 처음으로 기술한 종(種)이다.Lactuca sativa 의 동의어로는 Lactuca scariola var. sativa, L. scariola var. integrata 등이 있고 Lactuca scariola 는 그 자체가 일반적인 야생 상추(common wild) 나 가시상추(prickly lettuce)인 Lactuca serriola 의 동의어다. 락투카 사티바(Lactuca sativa)는 또한 많은 분류학 그룹, 아종, 품종을 식별한 많은 분류학 그룹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길들여진 상추의 다양한 재배그룹(cultivar groups)을 묘사하는 것이다. 상추(Lettuce)는 서남아시아의 몇몇 락투카 종(Lactuca species)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가장 가까운 관계는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온대지방과 아열대지방에서 흔한 가시상추(野莴苣:Lactuca Serriola)가 있다.[3]가시상추(野莴苣:Lactuca Serriola)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門: 被子植物门 Magnoliophyta綱: 双子叶植物纲 Magnoliopsida目: 菊目 Asterales科: 菊科 Asteraceae屬: 莴苣属 Lactuca種: 野莴苣 Lactuca serriola二名法 Lactuca serriola L. [4]Lactuca scariola var. sativa 동아시아[5]Lactuca scariola var. integrata 북아메리카[6]Lactuca scariola var. integrifolia. 세인트루이스 인근, 이스라엘 에루살렘가시상추(野莴苣:Lactuca Serriola), 락투카 세리올라는 비록 쓴맛이 있지만 샐러드로 먹을 수 있다.어린 잎은 날것으로 먹거나 요리할 수 있으나, 고대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존재는 의식적인 사용을 암시 할 수 있는 그 최면의 속성과 더 관련되어있다.고대 그리스인들은 또한 그것의 톡 쏘는 듯한 즙이 눈 궤양에 대한 치료제라고 믿었고 피타고라스학파사람들은 상추내시(lettuce eunuch)라 하였는데 그것이 배뇨(排尿)를 야기하고 성욕을 완화시켰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 나바호족(Navajo)은 그 식물을 의식의 구토제로 사용했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는 마룰라(μαρούλα) 또는 야생상추 아그리오마룰로(αγριομάρουλο)라고 하는 품종의 잎과 연한 싹을 삶아 먹었고 그 상추는 점점 더 많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페사흐의 마로르(유월절(Passover)의 정찬(Seder meal)에서 먹는 고추냉이무우 또는 기타 쓴 풀이나 양념:쓴약초)로 사용하였다.가시상추 락투카 세리올라(Lactuca serriola)는 락투카리움(lactucarium)을 함유하고 있으며 락투카리움(lactucarium)은 식물의 줄기를 통해 흐르는 우유빛 수액(흰 라텍스)으로 공기와 접촉한 건조시킨 것을 약초로 사용했다. 락투카리움(lactucarium)의 표준적 정의는 락투카 비로사(Lactuca virosa)로부터 그 생장이 되지만 락투카 사티바(Lactuca sativa)와 락투카 카나덴시스 엘롱가타(Lactuca canadensis var. elongata)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더 적은 양의 락투카리움(lactucarium)이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락투카 세리올라(Lactuca serriola)나 락투카 퀴르키나(Lactuca quercina)로부터 얻은 상추아편(lettuce-opium)도 품질이 뛰어났다고 말한다. LACTUCA (noun)Sense 1Meaning:An herb with milky juice: lettuce; prickly lettuceSynonyms:genus Lactuca; Lactucacommon lettuce; garden lettuce; Lactuca sativa (annual or perennial garden plant having succulent leaves used in salads; widely grown)cos lettuce; Lactuca sativa longifolia; romaine lettuce (lettuce with long dark-green spoon-shaped leaves)head lettuce; Lactuca sativa capitata (distinguished by leaves arranged in a dense rosette that develop into a compact ball) 한문 와(萵)의 어원을 보면 艸(풀초) + 咼(입비뚤어질와) 喎(괘)와 동자(同字)을 가지고 입구(口)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冎(과)가 합(合)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1. 입 비뚤어지다 2. 사곡하다(私曲--: 사사롭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 3. 부정(否定) 과 a. 입 비뚤어지다 (와) b. 사곡하다(私曲--: 사사롭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 (와) c. 부정(否定) (와) d. 화하다(和--: 서로 뜻이 맞아 사이 좋은 상태가 되다) (화) e. 고르다 (화) f. 성(姓)의 하나 (화) g. 가르다 (과) h. 쪼개다 (과) 등으로 나타나며 [식물] 국화과에 속한 한해살이풀로는 와거(萵苣), 거와(苣萵)라고 하며 학명은 "Lactuca sativa"로 정리된다.이것을 1. 상추. (= 莴笋, 莴苣笋) 2. 양상추. (=叶莴苣:Leaf lettuce, 金莴菜, 千金菜) 라고 한다.상추 잎에 밥이나 고기 따위를 얹고 고추장이나 된장 따위와 함께 싸서 먹는 쌈을 와거포(萵苣包)라고 하며 상추 잎을 넣고 만든 시루떡을 와거병(萵苣餠)이라고 하며 이뇨(利尿), 치루(痔漏), 하혈(下血), 젖분비 따위에 약으로 쓰는 상추 씨를 와거자(萵苣子)라 한다.OriginModern Latin, from Latin lactūca (“lettuce”)락투카의 어원을 보면 로마인들은 상추를 락투카(lactuca (lac meaning milk in Latin), 라틴어 ‘락’(lac)은 우유를 뜻하고 상추를 자른 단면에서 나오는 흰색 액체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알려진다. 락투카리움(lactucarium)은 이 흰색 액체에 함유된 쓴맛이 나는 성분으로 진정작용을 하는 특성이 있어 상추쌈을 먹으면 졸린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 성분 때문이다. 지금은 이를 라텍스(latex)라고 하는데 상추의 이 낱말이 속명(lactuca)이 되었고, 사티바("뿌리다" 또는 "재배하다"라는 뜻) sativa (meaning "sown" or "cultivated")를 추가하여 종명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상추라는 단어는 원래 중세영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프랑스어 "letues"이나 "laitues"에서 유래되었고 로메인(romaine)이라는 이름은 로마 교황 정원(Roman papal gardens)에서 그런 종류의 이름을 사용한데서 유래한 것이며, 로메인 상추(romaine lettuce)의 또 다른 용어인 코스(Cos)는 비잔틴 시대(Byzantine period)의 상추 농업의 중심지인 그리스 섬 코스(Cos)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상추를 구분하면 ① 결구(Crisp head)상추, ②버터헤드(Butter head)상추, ③코스 또는 로메인 (Cos or Romaine)상추, ④잎(Leaf)상추, ⑤줄기(Stem)상추, 그리고 ⑥라틴(Latin) 상추 등 6가지로 분류되며, 더 세분할 경우 기름용으로 이용되는 오일시드(Oil-seed)상추를 포함하기도 한다.가. 결구상추(Crisphead)그림 1. 결구상추아이스버그 레터스 (Iceberg lettuce)결구상추는 크게 아이스버그(Iceburg)와 바타비아(Batavia) 그룹으로 나눈다. 크고 단단하게 결구(結球)를 하는 형은 주로 아이스버그(Ice- berg)형을 가리킨다. 이 명칭은 아래에 설명하는 바타비아(Batavia) 그룹에 속하는 아이스버그(Iceberg) 품종과 다르다. 최초의 아이스버그(Iceberg) 형은 그레이트 레이크(Great Lakes) 품종이며 1948년 미국에서 개발되었다(Bohn and Whitaker, 1951). 전형적인 미국 품종으로 크고 무게는 약 1㎏ 정도되며 외엽은 6~7매 정도된다.이 상추는 먼저 좌엽(座葉); 로제트: 잎·꽃잎 등의 장미 꽃부리 모양의 배열단계를 거친다. 초기의 잎은 가늘고 길며, 각 연속적인 잎은 잎폭이 증가하게 된다. 약 10~12개의 잎이 컵 모양을 형성하게 되는데, 나중의 잎들이 감싸게 되며, 이 잎들은 안쪽에서부터 계속 자라 커지며, 속이 채워지게 된다. 잎의 질은 고급의 결구상추(Great Lakes Group)에서부터 그보다 못한 결구상추(Salinas Vanguard group)까지 다양하다. 외엽색(外葉色)은 밝은 초록 혹은 어두운 초록이며, 안쪽 잎들은 거의가 흰색부터 크림색의 노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다음의 결구상추의 또 다른 형은 바타비아(Batavia) 상추가 있다. 이런 종류의 결구상추는 유럽에서 유래되어, 대부분이 여기에서 발견된다. 영국의 웹스원더풀(Webb’s Wonderful)은 바타비아(Batavia) 형 품종인데, 이것은 미국에서는 조생종 결구상추로 나누기도 하며 프랑스에서는 바타비아(Batavia)라는 단어 이름의 한 부분으로 많은 종류의 품종들에 붙치어진다. 이들은 아이스버그(Iceberg) 종류의 결구상추와 결구형태와 재배방법이 비슷하며, 수확기에 모양이 매우 다양하고, 작으며 구(球)가 단단하지 않고, 무게는 약 500g 정도 된다.나. 버터헤드상추(Butterhead)그림 2. 버터헤드상추보통 살라다나(saladana) 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으며 결구(結球)는 비교적 부드럽고, 일반적으로 정아는 완전히 포합(抱合)하지 않는다. 엽면(葉面)은 평골이고, 결각(缺刻)과 주름이 없다, 엽(葉)은 담록색이나 녹색이고, 엽육은 얇고 부드럽다. 유럽과 남미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수송성(輸送性)은 없지만, 조생종(早生種)이기 때문에 도시근교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결구상추(Crisp Head) 형의 재배가 곤란한 시기와 가정원예로도 재배될 수 있다.이 경우 결구시키지 않고 수확하여 출하되고 있다. 버터헤드(Butterhead) 상추는 유럽에서 시작되어 대부분 이 지역에서 재배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보통 두 종류가 재배되고 있는데, 생육되는 계절과 관계가 있다. 여름에 재배되는 버터헤드상추는 노지(露地)에서 자라며, 무게는 약 350g에 달하고 있다. 겨울형보다 추대(抽薹)가 늦으며, 생육속도가 빠르다. 겨울에 재배되는 것은 구(球)가 작고 여름형 보다 결구력이 약하며, 무게는 150~200g에 이른다. 미국에서는 모양과 크기에 따라 두가지로 나눈다. 보스턴(Boston)형은 구(球)가 크고, 밝은 색깔이며, 연한 잎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빕브(Bibb)형은 작으며, 진한 초록색 잎을 띠고 있다. 모든 버터헤드(Butterhead)상추의 잎들은 비교적 얇고 반들반들하고, 기름기가 있고, 부드러운 결을 가지고 있다. 외엽(外葉)의 색은 대부분 아이스버그(Iceberg)의 상추보다 엷은 빛을 띠고 있으며 결구엽은 노랑색을 띄고 있다.다. 코스 또는 로메인 상추(Cos or Romaine)그림 3. 코스 또는 로메인 상추코스(Cos) 또는 로메인(Romaine) 혹은 로맨(Roman)으로 알려져 있다. 코스(Cos)상추는 예로부터 지중해 유역에서 재배하고 있으며, 이 이름은 터키에 근접한 동부 지중해에 인접해 있는 코스(Kos)라는 섬에서 유래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현재에도 많은 다양한 품종이 자라고 있으며, 색깔은 노랑에서부터 진한 녹색에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입성(立性)이고 잎은 길고, 스푼형의 엽형(葉形)을 하고 있다. 중륵(中肋)은 크게 밖으로 나온다. 엽수는 많고, 심부는 결속하여 장형의 반결구상(半結球象)을 이루고, 죽순모양을 이루지만 단단하지는 않다. 잎의 조직은 비교적 거친편이다. 많은 부분이 녹색인데, 반결구형이기 때문이다. 결구내엽은 노랑색이며, 무게는 750g정도 나간다.라. 잎상추(Leaf)그림 4. 잎상추잎 혹은 컷팅(Cutting lettuce)상추 품종은 주로 국내에서 재배되고, 그 모양이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는 형으로 지중해 지방에 원종이 있고 결구는 하지 않는다. 특히 결구상추의 원종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잎상추를 쌈문화의 영향을 받아 크게 청치마, 청축면, 적치마, 적축면 등 4가지로 나뉘어지고 있다. 엽연은 가늘고 오그오글하며, 엽색은 담록색의 것이 많다. 저온을 만나면 색소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 많아져 짙은 적색이 된다. 엽육은 얇지만 엽수는 많다. 또 추대(抽薹)가 늦은 성질이 있다. 미국에서는 일반가정의 정원에 많이 재배되고 있다.마. 줄기상추(Stem)그림 5. 줄기상추이 상추는 줄기 또는 아스파라거스(Aspa- ragus)상추라고도 불린다. 줄기(Stem) 상추는 이집트와 중동 국가들에서 발견되고 있고 이집트인들의 무덤에서 판단해 보건데, 이것의 기록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나타난다. 줄기(Stem)상추는 중국에서도 또한 흔하다. 그들은 이 상추를 AD 6세기에 알고 있었다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찍이 중동을 통해 전래되었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줄기의 직경은 5~7㎝에 이르고 각종의 조리와 요리에 이용되고 아삭아삭하고 식감이 좋다. 줄기(Stem)상추로는 셀투스(Celtuce)가 대표적인 품종이다.바. 라틴상추(Latin)이것은 글라세(Grasse) 상추라고도 불리워진다. 이것의 기원 역시 유럽이지만 사우스아메리카(South America)와 미국 일부지역에서도 재배되고 있다. 이것의 위로 뻗는 성질과 긴 잎들은 코스(Cos)상추와 닮았지만, 잎의 길이는 코스(Cos)보다 짧다. 잎의 조직은 빕비형 버터헤드(Bibby-type butterhead) 상추와 닮았다. 이것은 부드럽지만 두터우며, 일부 품종들은 질긴 잎을 하고 있다.사. 오일시드상추(Oil-Seed)그림 6. 오일시드상추이 상추는 초기의 생장속도가 빠르고 추대 또한 매우 빠른 상추이다. 이들은 Lactuca serriola로 분류되거나 다른 명칭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상추(Lactuca sativa)의 원시형태 흔적을 가지고 있다. 이 상추는 다른 상추의 씨보다는 50% 가량 큰 씨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이 씨들은 가정용으로 요리에 기름을 넣는데 이용하였다. 이것들은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지만 아마도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이 처음으로 이용한 상추 종류일런지도 모른다. 이 상추는 잎이 길고 폭이 좁으며, 추대와 개화도 매우 빠르다. 이 상추는 품종과 재배의 발달에 의해서도 완전히 순화되지 않은 하나의 집단으로 여겨진다.5.결어해동역사가 인용하길 청조(淸朝) 고사기(高士奇:1645-1704)가 쓴 천록지여(天祿識餘)에 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隋)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주었으므로, 인하여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하였다는 것은 상추는 고려 즉 고구려가 근원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근원지가 무엇인가.바로 토착물이라고 해야 맞다.그리고 수나라사람들이 이 상추를 구하기 위해 천금을 들였을 정도라 하였으니 이 상추의 효능에 대해 가치를 그만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다.귀했다는 이야기며 수나라에서 자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로부터 수입하여 식용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그러나 현재 자료들에서 상추는 지중해 또는 유럽·서아시아·북아시아 등지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그 지역을 원산지로 추측되고 있고 서기전 4500년경의 이집트벽화에 상추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재배시기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을 뿐만아니라 이집트가 근원지라 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그렇지만 우리나라 한반도에는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다고 추정된다 하고 있다.오늘날 이러한 설명들은 도대체 무슨 뚱단지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고구려에서 상추를 구하려고 천금을 주었다고 분명히 했음에도 한반도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고구려에는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을지 모른다고 하니 이처럼 엉뚱한 답이 있을까 한다.즉 한반도에는 고구려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렇다면 고구려는 어디에 존재했을까?똑같은 지리적 환경을 놓고 고구려가 위치하였다고 하는 기후적환경여건과 서양쪽의 이집트가 현재 자리잡고 있는 지리적기후환경이 최소한 동일해야 하겠지만 한반도 역사를 바탕으로 고구려가 위치한 지리적 위치가 북위 38° 에서 50° 사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이집트는 북위 22.3° 에서 31° 사이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엄청난 기후적환경에 따른 괴리까지 존재한다는 이야기다.상추가 자라는데 알맞은 온도는 15∼20℃이며 고온에 의해 추대(抽薹)가 이루어지고 산성토양에 약하며 충분한 수분을 필요로 한다고 되어 있다. 고랭지에서는 주로 결구상추가 재배되며 평지의 봄·가을 재배에서는 잎상추가 재배된다고 알려진다.상추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물이 충분하고 특히 날씨가 따뜻해야 한다. 하지만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물이 매우 귀한 나라이다. 이집트의 기후(Climate of Egypt)는 전 지역이 사막 기후(BWh)로 판정되어 있는데 전 지역의 지형 특성상 사하라 사막에 영향을 받아 사막 지형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이집트역시 상추를 키우기가 쉽지 않는 기후지대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그리고 고구려가 위치했다고 하는 한반도 북부지역 현 만주지역의 기후는 어떤가?매우 추운 표고가 높고 찬(冷地) 고냉지지역들이다.이런 기후는 결구상추가 자랄 수 있을 뿐 잎상추는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다.미국에는 경지면적의 5/6 가량이 캘리포니아(California)·애리조나(Arizona)주에 있다는 것도 상추기후가 따뜻한 곳이 아니면 잘 자라지 못한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북위 50° 이상에 존재하는 영국에는 한냉지역이니 결구상추와 배추상추가 많다고 나타난다.사실상 이집트도 상추 근원지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이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어떤 것인가.오늘날 재배하는 상추는 락투카 스카리올라(Lactuca scariola)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식물학적으로는 4가지 변종이 있는데 줄기상추, 결구상추, 잎상추, 배추상추로 구분된다.위 게시한 상추분포도를 참고하면 일단 Lactuca scariola var. sativa(L.) Boiss.,1875, 는 동아시아용(4)으로 전락한 것이 보인다. 반면 Lactuca scariola var. integrata Gren. & Godr. 북아메리카(5)는 Lactuca serriola 의 동의성을 감안하더라도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분포도가 나타남을 알 수가 있으며 특히 이집트인들이 사용했다고 하는 독상추(毒萵苣:Lactuca virosa)는 동부뉴욕(New York), 서부캘리포니아 오클랜드(Oakland),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근원지가 표시되고 있다.지금까지의 조사에서 결론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는가.고구려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즉 최소한 고구려가 존재한 곳은 유럽지중해지역이나 북아메리카대륙 캘리포니아, 애리조나지역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이집트는 어디에 존재해야 할까?지금의 이집트 지역이 맞는가?아니라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무엇인가.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못지 않는 문명형상을 애리조나의 그랜드 캐년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그곳에서 와국(萵國)을 찾아야 한다.4대문명의 하나인 이집트문명을 애리조나의 그랜드 캐년에서 찾아야 한다.신대륙은 서양세력들만의 이야기다.서양인들이 말하는 신대륙은 존재하지 않았다.세계종교로 자리잡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과연 이집트 종살이를 하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려했었던 것이 사실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여간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다.그것에는 유대인의 보호기관인 스미스소니언 연구소가 자신들만의 입장만을 고수하기 위해 무리한 역사은폐를 시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구려가 이집트이고 와국(萵國)인가 하는 물음이다.최소한 이집트는 고조선시대와 같은 동일한 역사군내에 두어야 맞다.고조선의 부여와 고구려가 되어야 맞다.부여와 고구려는 삼한역사의 한 축이라고 해야 맞다.본 블로그 글 "한국인(코리안)이란?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9 "이란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코리안(Corean)들은 특징적으로 백인이나 아리안(Aryan)과의 친밀하게 접근하고 매우흔한타입은 누런피부색의 얼굴이며 티벳인, 힌두인이 닮은 얼굴들이고 쿨리계급(coolie classes)의 아프리카인 흑인남성, 소아시아의 민족,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더불어 모여 살았던 코리아?세계역사가 아닌가.기원전 한반도를 침략을 한 주체가 코코라이스와 푸유스라 하였지만 놀랍게도 고구려(高句麗)와 부여(扶餘)를 말한다는 사실 등을 종합할 때 고구려가 이집트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의 진정한 역사라고 칭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높은 긍지를 가져도 무방할 것이라고 본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잠두(蠶豆) 누에콩과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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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두(蠶豆) 누에콩과 지중해 글쓴이:한부울 이번 이야기는 누에콩 잠두(蠶豆)이다.누에콩잠두는 완두콩과 구별이 되어야 하지만 이상하게 우리나라 고서 산림경제 귀농편에보면 豌豆 원두。一名蠶豆。色靑似菉豆而大。今出咸鏡道。京中籍田亦有之。此見醫鑑。라 하여 잠두와 완두 두 종을 동일하게 보았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놀랍게도 지금의 함경도(咸鏡道)에 출토된다고 했다.그런데 현재 서양자료를 통해 살펴본 결과 누에콩과 완두콩은 속명(屬)이 다르고 품종역시 다른 것으로 나타나며 완두콩은 주로 유럽 대서양과 지중해가 원산지라 하였고 잠두콩은 한어자료에 分布于北温带和南美 북온대지방과 남아메리카대륙으로 설명되어 나타나지만 북아프리카와 남서아시아로 나타난다.남서아시아라고 하였지만 현 지리학상 지중해동부와 겹친다.하여 잠두콩은 완두콩과 강낭콩 등과 함께 지중해 동부 쪽에서 기원전 6000년 전부터 쓰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말하고 있다.즉 위 세품종은 태생이 동일하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그렇다면 우리나라 고서 산림경제가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서양 분류체계에 따른다면 잠두와 완두는 일단 다른 종으로 구분해야 함도 알 수가 있다.강낭콩에 대해서는 이미 본 블로그 글 "강낭콩(菜豆)으로 본 강남(江南) http://blog.daum.net/han0114/17050629 "에서 물명고(物名攷:1820)에 변두(藊豆), 작두(鵲豆), 용과두(龍瓜豆)등으로 표기되어 있는 강낭콩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또한 원산지라고 하는 강남이라 함도 현재 동아시아대륙 양자강 하류가 아니라 미국 텍사스주와 멕시코사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그레이트(great), 대강(大江)이라고 알려진 리오 그란데(Rio Grande)를 지목하였던 바가 있다. 즉 현재 신중국에서 사용하는 장강(長江)이란 용어가 아니라 대강(大江)이라고 풀어 볼 수 있고 길 장(長)과 큰 대(大)가 어쨌던 같은 의미이니 서로 혼입되면서 20세기에 신중국에서 사용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거대한 강(江)은 바다(海)라는 의미와 함께 곧 긴 강, 혹은 큰 강을 말하기 때문에 거대하다 할 때 서양에서는 그레이트(great)라고 묶어 표현한 것과 스페인어로 그란테(Grande)라 한 것은 다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본 블로그에서 말한 것이지만 미시시피강이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에 19세기까지 서양인조차도 이 강을 거대한 바다로 보았고 영역적으로는 미시시피강 서쪽전부를 중국바다와 인디즈(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 즉 오늘날 동아시아와 북아메리카대륙 사이에 있는 태평양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성경통지[盛京通志]에서는 강낭콩이 운남지방(雲南地方)에서 온 것이므로 운두(雲豆)라고 한다는 말이 나오므로 해남, 남부를 통하여 들어왔다는 것도 알 수 있고 더불어 그곳으로부터 가까운 일본에는 17세기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과 같은시기라고 추정하는 것이다.즉 동아시아대륙에서는 남부가 넓고 일본열도가 동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도를 꿰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것때문에 사실상 일본을 자연지리적 배경으로 하는 생물학배치의 위치가 일치할 수가 없는 것이며 서양 해양세력들의 억지스러운 분류체계가 얼마나 엉터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실제로 위 익숙지 않는 콩들 대부분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17세기에 만주(滿洲)지방에 강낭콩이 재배되었다 하여 한반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만 보아도 매우 빈약한 이론임을 알 수가 있다.생각해보면 여름작물이라고 하는 강낭콩이 현재 한반도 북부 추운지방인 만주(滿洲)에서 재배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이렇듯 실제로 이치적으로 보아도 기존 분류체계가 이처럼 엄청난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중국의 남쪽지방과 강낭콩이 재배되었다고 하는 만주가 근접하거나 밀접한 사실을 우리는 알지못하기 때문에 오는 혼란이며 이것이 오늘날 글쓴이가 그토록 대중에게 말하고자 하는 일예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이러한 우리의 역사지식들은 우리를 바보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강남제비는 추운과 더운 곳을 명확하게 구분짓는 것이다.강남갔던 제비를 인용하더라도 그렇지만 강남(江南)에서 자란다는 "강낭콩"역시 따뜻한 곳에서 재배되는 작물임을 알 수가 있다.따뜻한 지방은 아열대지방이나 열대성기후를 가진 곳이다.강남콩은 일제침탈기에 많은 품종이 일본을 통하여 들어와서 재배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반도 역사이야기에 결부 시킬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가 된다.문제는 이 강낭콩의 원산지가 동아시아 신중국의 양자강 남쪽 즉 강남(江南)이 아니라 북아메리카의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운남(雲南)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남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콜롬비아, 페루가 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원산지 확인 사실은 이미 여러 본 블로그 글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이다.즉 강남이란 역사명칭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중앙아메리카대륙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동시에 본 블로그 글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1 "에서 지적했듯이 더운지방에 풍토병 장독(瘴毒)이 성행할 수 있는 곳에는 끊임없이 운무(雲霧:cloud of dew)와 수증기 구름이나 뿌연 안개가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장소이며 높은 습도 때문에 식물학적으로 선태류나 착생 관다발식물이 두텁게 착생이 가능한 삼림(森林)이 우거진 소위 운무림(雲霧林:cloud forest)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며 특히 세계운무림분포지중에서 중앙아메리카대륙의 멕시코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파나마와 남아메리카대륙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그리고 볼리비아 중앙으로 이어지는 안데스산맥(Andes Mountains:7,000km)을 깃 점으로 하는 역사장소가 바로 운남성이라고 하였던 바 이 지역들이 신중국 남부를 가름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이다.이러한 사실들은 역사 지리적으로 바로 강낭콩의 원산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신중국대륙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완두와 잠두 뿐만아니라 강낭콩 재배기후가 모두 흡사하다고 여겨지는 입장에서 실제로 중국땅에서만 출토되었다고 하던 누에콩 잠두(蠶豆)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산림경제 제1권 / 치농(治農) 豌豆 원두。一名蠶豆。色靑似菉豆而大。今出咸鏡道。京中籍田亦有之。此見醫鑑。 완두(豌豆) 원두. 일명 잠두(蠶豆). : 빛깔이 푸르고, 녹두와 같으며 조금 크다. 지금 함경도에서 나는데, 서울의 적전(籍田)에도 있다. 《동의보감》 豌豆。社前。於大麥根邊種之。以灰糞匀蓋頻鋤。至五月收之。諸豆之中。豌豆耐陳。多收熟早。神隱 완두(豌豆) 시골에서는 원두라 하고, 일명 잠두(蠶豆)이다. 는 사일(社日) 이전에 보리 뿌리 옆에 심고 오줌재[尿灰]와 거름을 고루 덮고 자주 매주다가 5월이 되면 거둔다. 모든 콩 중에 완두가 가장 오래 저장할 수 있고, 수확이 많으며, 빨리 성숙한다. 《신은지》 豌豆。八月間。或挾麻同種同收。閑情錄 완두는 8월 무렵에 익는데, 더러는 깨[麻]와 섞어 심었다가 같이 거둔다. 《한정록》 하두(夏豆)는 잠두(蠶豆)를 말하는 것으로, 달리 호두(胡豆)ㆍ한두(寒豆)ㆍ잠두싸리ㆍ갯활량나물이라고도 하는데, 호흡 중추와 중추 신경을 자극하는 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東醫學辭典》 《東醫寶鑑》 《中醫大辭典》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위 사서기록을 보면 완두 즉 원두(豌豆)는 잠두(蠶豆)라 함을 알 수가 있다.그리고 또한 하두(夏豆), 더운지방에 나는 콩이라는 것도 알 수 있는 상황이다.반면 호두(胡豆)이외 한두(寒豆)라고 한 것을 보면 추운지방에서도 이 콩이 재배된다는 것도 알 수 있지만 내한성의 문제라 할 수밖에 없다. 산림경제(山林經濟)는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농업과 일상생활에 관한 것을 기술한 책인데 이 저술시기가 1715년이니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e:1707-1778)저서 식물의 종(Species Plantarum)"1758 이 발표되던 시기보다 빠르다.때문에 산림경제가 생물근원적으로 서양자료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체계적인 문제에서는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다.린네는 속씨식물, 쌍떡잎식물강, 콩목(豆目), 콩과(豆科:Fabaceae), 콩아과(蝶形花亞科:Faboideae), 콩족(豆族:Fabeae)에서 5속(屬)을 나누고 그 속(屬)에서 완두속(豌豆屬: Pisum)과 잠두속(蠶豆屬:Vicia)으로 구분하고 있다.때문에 우리나라 산림경제만 두고 보면 본래 원두와 잠두가 같은 계열의 콩일 수도 있다는 판단만 가능하게 한다.현재 서양 식물분류체계에서 콩과(豆科:Fabaceae), 콩아과(蝶形花亞科:Faboideae), 잠두속(蠶豆屬:Vicia) 잠두콩(蠶豆:Vicia faba)으로 분류되고 완두속(豌豆屬:Pisum)의 완두콩(豌豆:Pisum sativum)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다른 종으로 분류한 것이다.근원지 판단에서는 강낭콩은 콩과(豆科:Fabaceae), 콩아과(蝶形花亞科:Faboideae), 채두아족(菜豆亚族 :Phaseolinae), 채두속(菜豆屬:Phaseolus)의 강낭콩(Phaseolus vulgaris)과 그리고 콩아과(蝶形花亞科:Faboideae), 콩족(豆族:Fabeae) 혹은 잠두족(蠶豆族:Vicieae)의 렌즈속(小扁豆屬:Lens), 렌즈콩(Lens culinaris, lentils) 더하여 병아리콩족(鹰嘴豆族:Cicereae), 병아리콩속(鹰嘴豆屬:Cicer), 병아리콩(chickpeas:Cicer arietinum) 등은 모두가 지중해 동부 쪽에서 원산지로 나타나며 기원전 6000년 전부터 재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콩과(豆科:Fabaceae), 콩아과(蝶形花亞科:Faboideae)는 원산지가 동일하게 여길 수 있는 근거가 된다.지금도 지중해지역에서는 토양의 침식을 막기 위해 보호 작물로 심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겨울철에 토양의 양분을 공급해주기 때문에 많이 심는다고 알려지며 균류에 감염될 수 있다는 것도 부첨적으로 말하고 있다.원산지를 논할 때 우리나라 사서 산림경제 치농편에 보았듯이 조선시대 이 콩들이 분명 재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당시 함경도(咸鏡道)에서 출토 되었다는 기록은 무엇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함경도(咸鏡道)는 덥다고 할 수 없는 곳이다.그렇지만 분명히 함경도에서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의 한반도지형에는 이 잠두콩이 재배되지 않으며 다량이 수입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어떻게 된 것인가. 잠두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콩아과(蝶形花亞科:Faboideae), 콩족(豆族:Fabeae) 혹은 잠두족(蠶豆族:Vicieae)의 잠두콩 학명 비시아 파바(Vicia faba)는 누에콩(잠두), 또는 파바콩(faba bean)이라고도 하며 콩과(Fabaceae)의 종자식물(種子植物)이라는 것을 전자에서 언급하였다. 인류가 기원전 6000년 전부터 사용하고 재배되었다는 것도 앞에서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유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이 전 자료의 공통적인 설명이다.다른 명칭으로는 호두(胡豆), 불두(佛豆), 천두(川豆), 왜두(倭豆), 라한두(羅漢豆)라고 하며 잠두(蠶豆:Vicia faba)는 서양에서 말이나 다른 동물들에게 먹이로 사용되면서 작고 단단한 씨앗을 가진 다양성의 야생콩(field bean), 틱콩(tic bean) 또는 진드기콩(tick bean)이라고 하며 또는 말사료 콩(Horse bean), 말먹이용 잠두(Vicia faba var.equina Pers)라는 이름이 여러가지로 존재하는 것도 알 수가 있다.어쨌던 간에 서양자료에 누에콩은 오래된 세계 농업에서 재배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재배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식물들 중 하나이고 또한 재배하기 가장 쉬운 식물들 중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그것들은 여전히 토양침식을 막기 위해 재배되고 비옥한 토지를 위해 심는 작물 간작(間作)으로 재배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들은 겨울동안, 또 하나의 콩과식물로서 토양에 질소를 고정시키기 때문이라고 알려진다. 누에콩은 여름콩이지만 내한성 또한 높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거칠고 추운 기후를 견딜 수 있고 대부분의 콩과식물과는 달리, 누에콩은 점토질뿐만 아니라 염도가 높은 토양에서도 자랄 수 있지만, 영양이 풍부한 비옥한 토양을 선호하는 것은 물론이다.때문에 춥지만 함경도에서 비옥한 토양에서 자랐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그리고 속명(屬名) "파바(fava)"라는 용어는 미국과 같은 일부 영어권 국가에서 사용되지만, '넓적한콩'이라고 하여 영국,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영연방 국가에서 사용하는 흔한 이름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잠두콩은 일부 사람들에게 포도당-6-인산염 탈수소효소 결핍증(G6PDD)라고 알려진 신진대사 장애와 연관된 질환인 누에콩(broad beans)을 먹고 나서 생기는 용혈성의 반응인 "잠두 중독증"을 유발시킨다고 알려져 주의를 요하는데 이 병은 주로 스페인인·이탈리아인·그리스인·아르메니아인·유대인 등 지중해지역 사람들에게 국한된다고 말하고 있다.그렇다면 이 콩이 재배되는 지역은 이러한 병이 생성된다고 이해된다.하지만 과연 서양인들이 지정하는 지금의 지중해란 지역은 그러한 역사지리적환경과 동일한 지역인지는 알 수가 없다.신중국자료에서도 서양자료와 마찬가지로 잠두의 원산은 남아시아 서부(지중해동부)와 아프리카북부로 나타내고 있다.이것은 아메리카대륙 중부와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와 비슷한 기후를 말하고 있다.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서한(西漢)의 장건(張騫, ?-BC114)이 서역(西域)으로 출사할 때 중국에 전해진 것으로 8세기경에 중국 시사(侍史)들이 일본에 다시 전래하고 천축인(天竺人)보리선나(菩提僊那,Bodhisena:706-760)가 훗날 도일 후 행기(行基)에 맡겨 효고현(兵庫県)의 무고촌(武庫村)에 심었다고 알려져 중국과 일본은 자연스럽게 이 잠두의 전래흐름을 말하고 있으나 과연 유럽지중해와 연결시키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科学分类 编辑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蔷薇类植物 Rosids 目: 豆目 Fabales 科: 豆科 Fabaceae 属: 蚕豆属 Vicia 种: 蚕豆 V. faba 二名法 Vicia faba L., 1753 이렇게 보면 지중해지역과 그에 따른 생물학적 기후는 매우 중요하게 다가온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한정록 제16권 치농(治農)편에 8월 초경에 심되 땅이 비옥하면 더욱 좋지 않다. 강남(江南)에서 이 콩을 많이 심는데 옹전(壅田) 및 논에 심는 것으로 홍두(紅豆)와 백두(白豆) 두 종류가 있다. 곡우(穀雨)뒤에 심어서 6월에 씨앗을 거두고 재차 심어서 8월에 또 씨앗을 거둔다. 위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 : 1569~1618)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치농편에 보면 콩들 가운데 오직 잠두(蠶豆)만이 오래 묵어도 좀먹지 않고 또 수확량도 많고 일찍 익는다 하였고 곡우(穀雨)즉 양력(陽曆) 4월 20, 21일 뒤에 심어서 6월에 씨앗을 거두고 재차 심어서 8월에 또 씨앗을 거둔다 하였으니 곡우(穀雨)란 모심기철에 필요한 비가 내린다 하여 이름한 것이다.주기가 2개월이지만 봄에서 여름이 수확기가 틀림없다.그리고 잠두(蠶豆)는 강남(江南)에서 많이 심고 밭에 비료를 준 옹전(壅田) 및 논에 심는 것으로 홍두(紅豆)와 백두(白豆) 두 종류가 있고 잠두(蠶豆)와 백두(白豆)라 한다 하였다. 강남에서 잠두콩을 많이 심는다 하였다.이것을 현재 밝혀진 지형구도를 대입하면 지중해가 강남이 된다.정확하게 이야기하지만 지중해기후와 동일한 곳은 북아메리카대륙 캘리포니아주와 그 아래 멕시코 북부지역으로 리오 그란데(Rio Grande)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강남을 또 한반도 한강 남쪽 광의적으로 서울특별시의 한강 이남 지역 전체를 말할 수도 있고, 좁은 의미로는 한강 이남 지역 중 동쪽의 강남구, 서초구, 강동구, 송파구 지역을 옛 강남(江南)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본래 강남(江南)은 다 잘 아다니피 현 동아시아대륙 신중국과 한반도는 아니다.江南,长江下游南岸,东南丘陵北部的江浙长三角地区。狭义上指代宋朝时的江南东路即江东和两浙路(现在长江流域下游南岸的浙江全境、苏南,皖南及上海地区)。广义上还包括江苏安徽兩省的长江北岸、江西、福建、廣東及湖北、湖南、廣西部分地区。古代又号吴越、江东、江左。 江南是中华漢文明的发源地之一,有南京、杭州等古都,以及历史文化名城如苏州、绍兴、宁波、无锡、徽州、鎮江、扬州等,历史上长期是东亚漢地乃至世界最庞大的城市群及经济中心위 신중국 한어자료를 보면 강남은 장강 하류남안(南岸), 동남 구릉북부의 강절(江浙) 즉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 장삼각(長三角)지구라 하였다.좁은 의미에서 송나라 때의 강남 동로(江南东路), 즉 강동과 통칭 절강로(현재 장강 유역 하류 남안의 절강전체경계, 강소남부, 안위(安徽)남부 및 상해 지역)를 가리킨다 했고 넓은 의미에서는 강소(江蘇) 및 안휘(安徽), 양성의 장강長江) 북안(北岸)이며, 강서(江西) 복건(福建) 광동(廣東)과 호북(湖北), 호남(湖南), 광서(廣西) 부분지구도 포함된다 하였으며 고대에는 오월(吴越), 강동(江东), 강좌(江左)라고도 불렸다 한다. 강남은 중화 한(漢)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라고 하였고 남경(南京), 항주(杭州) 등 고도를 비롯하여 역사문화의 명도시인 소주(苏州), 소흥(绍兴), 녕파(宁波), 무석(无锡), 휘주(徽州), 진강(鎮江), 양주(扬州) 등이 있었고 역사상 오랜기간동안 아시아와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도시군 및 경제의 중심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尔雅·释地篇第九》写道:“江南曰扬州”“江南”在成书于秦、汉以前的古籍之中即特指長江以南之地,即开始泛指大约今江苏、上海、安徽淮河以南部分及浙江、福建、江西、广东。 在先秦时期也有其他关于江南的说法。《史记·秦本纪》中亦载:“秦昭襄王三十年,蜀守若伐楚,取巫郡,及江南为黔中郡。”这里的江南指的是现今湖南全境和湖北南部部分地区。이아·석지편제구[尔雅·釋地篇第九]에서는 "강남은 양주(扬州)"라고 하며, 강남은 진(秦)·한(汉) 이전의 고적(古籍)가운데 즉 양자강(楊子江) 이남을 가리키며, 즉 지금의 강소(江江苏)·상해(上海)·안휘(安徽)·회하(淮河)이남을 두루 가리키기 시작했고 선진(先秦)시대에도 강남에 대한 다른 설이 있었다 하며 사기 진본기《史记·秦本纪》에도 "진(秦)소양왕(昭襄王) 30년, 촉(蜀)과 무군(巫郡)을 취했고, 강남을 검중군(黔中郡)"이라고 썼다. 여기서 강남은 지금의 호남전역과 호북 남부 일부 지역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물론 이것은 현 동아시아 신중국대륙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 블로그 글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 "에서 누루하치(奴児哈赤)는 후금(後金, 喉衿) 즉 요충지 목구멍이라 하였고 후금이라는 곳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사이에 위치한 과테말라(Gwatemalla), 벨리즈(Belize), 온두라스(Honduras), 엘살바도르(El Salvador), 니카라과(Nicaragua), 코스타리카(Costa Rica), 파나마(Panama)가 속해 있는 육교처럼 좁다랗게 길게 뻗어 이어진 중앙아메리카대륙이라고 하였다.또한 본 블로그 글 "강낭콩(菜豆)으로 본 강남(江南)" 에서 강낭콩 즉 강남콩의 원산지가 중앙, 남아메리카대륙 분포지에 집중적으로 표시되어 강낭콩의 원종(原種)임을 알게 하였고 "망강남(望江南:Senna occidentalis)으로 본 강남(江南)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0"에서는 석결명(石決明)이라고도 하는 콩과의 한해살이풀 망강남이 멕시코가 원산지라고 한 것처럼 분포지도에서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대륙을 포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도 이와같다. 즉 강남은 현재 미국 텍사스주와 멕시코에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그레이트(great), 대강(大江)이라고 하는 리오 그란데(Rio Grande) 이남지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라고 하는 강낭콩은 본래 스페인인이 발견하고 처음 중앙아메리카에서 이 콩을 유럽으로 가지고 들어올 때 에호테(Ejote)라 하였는데 멕시코 고대왕국 아즈텍 나와틀어(Aztec Nahuatl word) ‘Ayecotl’ 의 변형어로서 통통한 콩과 주머니모양의 녹색콩을 나와틀족이 ‘Exotl’ 한 것이 스페인어화 한 것이라 하였고 아즈텍 나와틀어(Aztec Nahuatl word)의 ‘Ayecotl’는 프랑스어화 되어 강낭콩요리 아리코(Haricot)란 용어가 되었으며 유럽종 강낭콩은 프랑스어로 ‘haricots verts’라고도 하여 학명 "Phaseolus vulgaris L"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는 프랑스 콩(French Bean)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아니라 형태적으로 녹색콩(Green Bean), 신장콩(Kidney Bean), 보통콩(Common Bean)등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강남은 오늘날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의 멕시코주 또는 중앙아메리카대륙이라고 여겨지는 것이고 이곳이 지중해성 기후(Mediterranean climate)라 할 수 있는 것이다.지중해성 기후 또는 지중해 기후라는 것은 쾨펜의 기후 구분(Köppen climate classification)에서 온대기후에 속하며, 기호는 'Cs'이며 여름은 아열대 고압대의 영향으로 기온이 높고 건조한 건기가 지속되고, 겨울에는 고위도 저압대의 영향으로 다소 따뜻한 우기가 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남북위 30˚~40˚ 사이 중위도 대륙 서안에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 있으며 연 강우량 측면에서는 대체로 온대 기후 중에서 가장 비가 적게 내린고 쾨펜은 최한월 평균기온이 −3˚C 에서 18˚C 사이의 지역을 지중해성 기후라고 구분지었다. 이런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는 곳으로는 유럽 남부 지중해연안과 남아프리카(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아메리카 칠레 중부지역, 호주 남서부 일부지역, 알제리 북부, 튀니지북부, 모로코 동부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위 지도영역에 표시된 노란색지구가 세부적으로 꼽을 수가 있다.위 항목에서 잠두콩(蠶豆:Vicia faba), 완두콩(豌豆:Pisum sativum), 강낭콩(Phaseolus vulgaris), 렌즈콩(Lens culinaris, lentils), 병아리콩(chickpeas:Cicer arietinum)모두가 지중해를 원산지로 하는 것은 이러한 지중해성기후에 맞는 식물이라는 일반적인 공통성도 읽을 수가 있다.강남콩의 원산지로 알려진 미국 텍사스주와 멕시코에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그레이트(great), 대강(大江)이라고 하는 리오 그란데(Rio Grande) 이남을 말한다는 것을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다.고려에서 잠두콩이 재배되었다고 알려진다.그렇다면 분명이 고려를 이은 조선에서 이 콩을 재배하고 있어야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에는 공물편에 어디에서도 잠두 즉 누에콩을 찾을 수가 없다.즉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역사 장소가 한반도라고 할 때 이러한 이야기는 대체로 맞는 것이 된다.당연히 고려에서 생산되던 누에콩 또는 그외 희귀 콩이 조선시대에도 재배되어야 하지만 없다 하는 것은 역사가 단순하게 보더라도 한반도에 고려와 조선이 공존하며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된다.고려의 땅과 조선의 땅이 다르다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잠두콩으로 본 지중해기후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캘리포니아주 및 멕시코 주와 똑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유럽역사가 이곳과 혼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즉 지중해연안에서도 동부쪽의 국가와 중동국가들은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혹은 멕시코주 중앙아에리카대륙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풍푸한 충적토로 비옥해진 땅을 경작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지중해와 유프라테스 강의 사이의 전략적인 지점이 이곳에 있을 수가 있을 것이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페르시아만으로 유입되는 곳을 따지면 바로 지금의 멕시코만이라고 할 때 이곳은 지중해문명의 터전이 아니었는가가 의심되는 것이다.고대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전개되며, 요르단강 유역은 사해(死海)의 염분농도가 높은 지역으로 지구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라고 알려진 곳도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본 블로그 글 "황금곰(金熊:Golden Bears)과 함길도(咸吉道)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0 "에서 말하길 과연 역사지명 시리안(Syrian)이 현재 아시아대륙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면서 서단(西端)이 지중해 동안(東岸)에 임해 있고, 남서부는 높은 산맥으로 레바논과 접하며 북서부에도 해안선과 평행인 산맥과 계곡이 있으며 그 동쪽 일부가 사막의 서쪽 끝이 되면서 사막의 북동부에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의 강, 유프라테스강(江)의 상류가 남동방향으로 시리아 동부를 가로지르고 흐르고 있는 시리아(Syria)가 맞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이 있다 하여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에서 이미 여러 가지 관점으로 풀어 본 결과 이 지명들에 기존 역사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했고 지금의 중동 홍해(紅海)가 서홍해(西紅海)란 사실에서 본 블로그 글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은 바다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 에서도 놀랍게도 동홍해(東紅海)가 캘리포니아만(Gulf of California)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던 바가 있다.아리안족이 들어온 인도 북서부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 유역과 함께 세계 3대 문명발상지의 하나인 인더스 강 유역 문명이 꽃피었던 곳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러한 구도는 바로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아닌가도 한다.본래 인더스강은 인도문명과 결부되는 것으로 본 블로그 글 "인더스(Indus)는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25 "에서 말하길 미시시피강을 옛부터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아버지강(父河:The Father of Waters), 물의 수원(水原:The Gathering of Waters)으로 지칭되었다 했으며, 거대한 진흙(The Big Muddy)있는 곳, 큰 강(大河:Big River), 오래된 강(老人河:Old Man River), 위대한 강(偉大之河:The Great River), 나라의 몸(國家之體:Body of a Nation)이라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옛부터 북아메리카대륙 전체가 인도(印度:India)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 "에서 1667년 런던[London]에서 인쇄한 것으로 지도제작자 존 오버톤(John Overton:1640-1713)이 그렸다고 하는 지도에 보면 중국바다와 인디즈(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라 하였던 곳이 바로 미시시피강임을 알 수 있었다.인류의 4대문명은 북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사실을 전 세계대륙으로 흩어놓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분명한 것은 인류의 기원역사 주체는 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사실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잠두콩의 근원지 파악(1)Vicia americana Muhl. ex Willd.1837-1920, (1802)– American vetch, purple vetch, mat vetch(2)Vicia nigricans Hook. & Arn.1876-1920, 1830-black vetch Vicia nigricans ssp. gigantea (= V. gigantea Hook.) – giant vetch(3)Vicia sativa L.1600-1899, 1753– common vetch, narrow-leaved vetch, tare구황야생완두(救荒野豌1753– bush vetch科学分类 编辑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蔷薇类植物 Rosids 目: 豆目 Fabales 科: 豆科 Fabaceae 亚科: 蝶形花亚科 Faboideae 族: 蚕豆族 Fabeae 属: 蚕豆属 Vicia L., 1753 模式种 救荒野豌豆Vicia sativa L., 1753 *********************<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미시시피강" rel="tag" target="_blank">미시시피강</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누에콩" rel="tag" target="_blank">누에콩</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산림경제" rel="tag" target="_blank">산림경제</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성경통지" rel="tag" target="_blank">성경통지</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장독(瘴毒)" rel="tag" target="_blank">장독(瘴毒)</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잠두(蠶豆)" rel="tag" target="_blank">잠두(蠶豆)</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리오 그란데(Rio Grande)" rel="tag" target="_blank">리오 그란데(Rio Grande)</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인디즈(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 rel="tag" target="_blank">인디즈(The Sea of China and the Indie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운남지방(雲南地方" rel="tag" target="_blank">운남지방(雲南地方</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운두(雲豆)" rel="tag" target="_blank">운두(雲豆)</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만주(滿洲)" rel="tag" target="_blank">만주(滿洲)</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강남(江南)" rel="tag" target="_blank">강남(江南)</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운무림(雲霧林:cloud forest)" rel="tag" target="_blank">운무림(雲霧林:cloud forest)</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린네(Carl von Linne:1707-1778)" rel="tag" target="_blank">린네(Carl von Linne:1707-1778)</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완두속(豌豆屬: Pisum)" rel="tag" target="_blank">완두속(豌豆屬: Pisum)</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잠두속(蠶豆屬:Vicia)" rel="tag" target="_blank">잠두속(蠶豆屬:Vici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렌즈콩(Lens culinaris lentils)" rel="tag" target="_blank">렌즈콩(Lens culinaris lentils)</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병아리콩(chickpeas:Cicer arietinum)" rel="tag" target="_blank">병아리콩(chickpeas:Cicer arietinum)</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함경도(咸鏡道)" rel="tag" target="_blank">함경도(咸鏡道)</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파바콩(faba bean" rel="tag" target="_blank">파바콩(faba bean</a>

중국 원산지 과일 이동에서 밝혀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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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산지 과일 이동에서 밝혀진 역사 글쓴이:한부울 2020년 경자년이다.경자년은 시작의 해이고 풍부, 풍만의 해이며 물질부분에서 부자의 해이기도 하다.또한 20의 숫자가 나란히 있는 것에서 올해는 완성에 대한 희망도 크다.숫자 '1' 이 체(體)가 되고 '2 '가 용사(用事)가되어 움직임 동(動)이라 할 때 완성의 숫자 '10' 이 2(둘)이니 끊임없는 움직임은 완성에 가깝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글쓴이가 생물학적 분석으로 기존역사와 차이가 있는 괴리(乖離)문제를 들여다보길 이미 근 10년이 다 된 것 같다.그동안 캄캄했던 것들이 이제는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것 같다는 위안이 오늘에 잡히는 것도 있다.서양인들이 18, 19세기 세계생물학분류체계를 만들면서 일본 종(種)을 'JAPONICA'이라하고 사용시작한 것은 1753년이라고 알려진 것이며 린네 식물의 종을 발표한 시기보다 빠르다.그러니 본래 자포니카를 사용한 시기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이것은 근대화를 받아들여 사회개혁이나 경제발전을 이루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매우 자연이치적인 이야기가 되어야 맞다.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동백나무(Camellia japonica L. 1753)라고 알고 있는 학명의 식물이 한 예이다.현재 자포니카로 알려진 일본의 위치는 동아시아대륙 동쪽에 위치한 열도이다.이것을 불변이다.그렇지만 당시부터 자연생물학적판단은 일본의 자연적인 위치를 현재 열도지리환경보다 더 확대되어 나타나도록한 것은 그들도 의도적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결국 후세들이 이렇게 조작하였겠지만 워낙 현대과학적인 시각에서 괴리차이를 크게 느끼게 하는 것이기에 글쓴이가 이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나서는 것이다.때문에 이러한 현상들을 절대로 간과되어서도 안되고 이를 기피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이다.지금의 우리는 당시에 서양과학자를 질타할 수 있겠지만 그들도 오늘날 상황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그렇더라도 어떻게 이처럼 무리하게 일본영역을 확대하여 생물학체계를 세울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서양에서 식물체계를 세우기시작한 18세기시대 서양과학자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했을까?대표적으로 18세기의 식물의 종(Species Plantarum)을 1758년에 발표한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e:1707-1778)는 개신교 루터교부목사인 아버지가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혈통에서 처음으로 정립된 성씨를 사용한사람이라고 알려진다.그는 자신의 스웨덴 농가에서 자라나던 라임 나무의 라틴어인 "Linnaeus"을 성으로 삼았다고 알려진다.린네는 그의 아버지에게 라틴어, 종교, 지질학을 배우고 중등교육 기관 김나지움(Gymnasium)에서 그리스어, 히브리어, 신학, 그리고 수학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예수회를 해체하기 전까지 예수회에서는 반체제학습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547년 최초의 예수회 대학을 설립하고 논리학, 라틴어, 법학등 학문능력이 뛰어난 선교사들을 세계곳곳에 배치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린네 아버지도 이러한 교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물론 예수회와 신교(루터교)가 동일한 것은 아니나 예수회가 군대적 규율에 기반하여 교황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교조적이고 수직적인 형태를 가졌다는 것은 기존 반체제학습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일단 반체제에 따른 행동들이 표출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어느듯 시대가 그들을 우월하게 만들며 그것들이 거역할 수 없는 대세라하면서 출세욕과 공명심으로 가득한 일부 기생학자들의 어긋난 저서활동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일부 학자들이 설령 그것들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시정하려해도 세력에 밀려 포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모든 생물탐사는 상당한 경비 즉 자본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자금력이 뒤받침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때문에 이러한 서양학자들의 돌출된 활동을 간단하게 볼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생각해보면 학문이란 정의와 선의만으로 들여다볼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하는 것도 비판이나 비평이 학문을 더 심도높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당시 생물학분류체계를 세우면서 이러한 역사적인 비판과 비평이 존재하였는지 알 수 없다.기존 체계가 그들에게 정복되고 난 후 정의의 역사성이나 도덕성과 상관없이 양심있는 후세학자들의 검증은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생물학체계를 봄에 있어 무조건 다 글쓴이가 하는 작업에 대한 공감을 유도해 낼 수 없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이치로 보는 것이다.본 블로그에서 이상한 여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생물학적 분석과 디옥시리보 핵산(deoxyribonucleic acid) DNA 를 분석한 근원적인 분포범위에 이격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글쓴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할말이 산처럼 많다.결국 자포니카라고 하는 일본이란 역사명칭은 그들 해양세력들을 대변하는 역사 상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9세기에 들어 그들의 역사정체를 감출 수 있어야 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일본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들어 내지 않기 위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다른 곳으로 변이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그렇지만 북아메리카대륙이 아닌 아시아대륙에 집어넣고자 한 생물학체계는 그들을 난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야말로 혼돈 그자체라는 것이다.그것은 분명 유럽대륙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서양역사가 아시아역사와 별도로 생성되고 나뉘면서 발생되는 문제로써 당연한 결과라 할 수밖에 없다.유럽은 곧 자포니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유럽은 이민자들의 영역이다.세계각 해양세력들이 전부 한 곳으로 집합한다고 할 때 근원과 원산지는 그들의 원초적인 거주지를 포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또 한가지 문제를 지적하면 아메리카대륙전체가 신대륙이라는 명칭아래 모든 유럽역사 사실이 고스란히 빠졌다는 모순 그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현재 세계생물학분류체계는 본래 아메리카대륙 남북에서 발전된 것이다.이것이 19세기이후 전세계대륙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존재론적 측면으로 해석한다는 기독교의 창조론(創造論)이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1882)에 의해 1859년에 발표한 저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에서 진화론(進化論)으로 발전 되고 다시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이고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에 의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 .Social Darwinism)에 이른 것은 그들이 결코 가져서는 안될 우매한사상이었던 "우월한 사회나 국가가 열등한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당위성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혼돈으로 빠져들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좁게보면 마치 한반도조선을 지배한 일제가 식민주의적 당위성을 열거하고 합리화시킨 제반논리와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세계를 삼한역사라고 생각하면 이러한 흐름은 그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어야 했다.기획적이고 계획적이라 해도 시작하기조차 힘든 실로 거대한 음모가 전제되지 않으면 거의가 불가능한 이야기다.그만큼 그들은 모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1570년 포르투갈에 의해 나가사키가 개항되어 예수회가 점령하다시피하였고 그 이후 네덜란드(Captain:甲比丹,甲必丹,加比旦)가 남만무역을 위해 1609년에 히라도(平戶)에 무역상관의 설립하였던 17세기부터 시작된 서양인에 의해 확대 생산된 유럽화는 일본근원지를 만들게하고 그곳에 생물학 분류체계를 심게되었다는 사실들을 알 수 있지만 현재 동아시아 열도에 이와같은 생물학분류체계가 세워져졌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이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19세기이전역사를 모른다 하여도 또 다른 일본이 존재한 것처럼 확대시켜 놓은 것은 어찌 눈치채지 못하겠는가.당장 자연 이치에 전혀 일치하지 않는 분포지에 대한 속명(屬名)과 종명(種名)이 이렇듯 난무하는데는 그들의 어리석음이 있다 할 것이다.때문에 생물학 전체가 혼란을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 서양과학계는 지금이라도 이를 수정하도록 시정조치해야 마땅하다.현재 일본열도는 서양우월주의가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 내팽겨친 후유증상(後遺症狀)의 표본 그 자체이다.생물학적으로 보면 일본 종(種)은 거의가 지형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또는 멕시코영역이나 특히 무수히 많은 카리브해(Caribbean Sea)도서(島嶼)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다.이러한 사실들은 본 블로그에서 생물학적 분석에 바탕을 둔 수많은 글을 통해 심도 있게 이를 증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누누이 이야기 했지만 일본역사전체에서 들어나는 것은 해양세력의 조직이며 해적집단의 이동이며 이것이 결국 19세기 중엽 서양무역(貿易:trade)연합세력으로 나타난 것임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이것은 어쩌면 동인도회사(西洋東印度會社)의 서양주체 주식회사 집합체라고도 할 수 있다.때문에 일본은 대부분 거주지가 고정되지 않고 유동성이 많고 또한 명확할 수가 없는 것이며 더군다나 게르만족의 독일과 더치(dutch)가 서로 섞여 있듯이 혼입된 것과 동경(東京)이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으로 뉴욕(New York), 런던(London)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홍콩(香港:Hong Kong)으로 잔상이 비춰진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17세기초 네덜란드가 일본에 처음상륙하였을 시기 1606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에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런던 회사(London Company), 플리머스회사(Plymouth Company)가 난립한 사실도 사실상 서양국가로 변하기 위한 단초였다.그들에게 전통(傳統:tradition)이나 정통성(正統性:legitimacy)따위에 말은 실제로 어울리지 않는다.오직 여건에 맞춰'장사아치'란 형태말고 이야기 할 것이 없다.그들에게 15세기이후부터 아랍역사와 중국역사가 왜 필요했을까?완충장치다.거르는 단계가 필요했고 그것들이 확대 재 생산되므로써 오늘날 삼한역사가 한반도에 쳐 박혀 볼 품 없이 재앙의 덩어리 판도라항아리가 되었던 것이다.16세기 말엽부터 본래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그리고 카리브 해(海)의 무역제해권 다툼에서 포르투갈조직을 밀어내고 차지한 것은 네덜란드라고 하는 더치(Dutch)조직이며 이 조직이 오늘날 국가조직처럼 행세한 회사(會社)이고 이 더치(Dutch)의 무역회사들은 더욱 무역영역을 넓히면서 독점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1596년 본토(本土)암스테르담에서 원국회사(遠國會社)를 설립한 사실이나 1625년 맨해튼 남쪽 끝에 뉴 암스테르담이라고 한 것이나 결코 이러한 명칭들은 본래 정통성이 있는 역사가 아니라는데 있고 역사위치 또한 한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치 오래전부터 지금의 유럽대륙에 존재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 위치를 역사적으로 고수한 것처럼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그들은 인구가 소수이고 규모가 적어 유럽과 북아메리카대륙을 오가며 지배할 능력이 전혀없었다.오히려 당시에 강력한 지배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체제 감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은신하기에 바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러한 사실들은 이미 땅 속에 깊이 파묻어 버린 지가 오래된 이야기다.그들 주체는 국가권력(國家權力)을 참칭(僭稱)한 무역회사일 뿐 엄밀하게 따진다면 그들을 제어하던 하나의 체제 삼한세력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정론이다.이것이 진실 된 역사(歷史)이다.1600년대 초반 아메리카대륙의 네덜란드 식민지라고 알려지는 코네티컷(Connecticut),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델라웨어(Delaware)주(州)를 뉴 네덜란드(Nieuw-Nederland:1614-1674)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상업 활동에 필요한 지역으로 그들의 활동영역이었을 것이며 그들의 발자취를 처음 남긴 곳으로 족했을 것이지만 그러한 활동도 하나의 체제감시때문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무역사무소 건물을 건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자치지역(自治地域)허가를 체제로부터 득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예는 아편전쟁(阿片戰爭:Opium War)후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상해조계(上海租界)가 설치되면서 외국인 통치 특별구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이 비유할 수 있고 특별구(特別區)에 영국, 미국, 프랑스가 각각 조계를 설치하고 ‘공공조계(公共租界)’와 ‘프랑스조계’로 재편되었다는 사실과 거의 같은 것이며 알다시피 상해 전 지역이 아니라 일부 지역만 할양(割讓)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처음 체제의 허락하에 활동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이것에 더한다면 그동안 축적한 자본으로 일부 토지를 매입하였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결코 주 전체를 장악하거나 지배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이 해양서양인들에게는 장사하기조차도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이 뉴 네덜란드(Nieuw-Nederland)가 애초 존재도 없었던 미국독립에 근거지가 된 사실과 네덜란드인 즉 더치인(Dutch people)들은 미국독립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1775-1783)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직접 참여한 사실에서 지금도 네덜란드인들이 미국사회에서 상당히 우대받는 역사 평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고할 때 미국인에 의해 얼마든지 꾸며지고 사실화나 미화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특이한 것은 해양세력들의 연합체가 일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든 거주근원이 모호하게 나타나며 여기저기 해양을 근거지로 본거지가 없이 떠돌아다니던 시절의 서양일본 주체들은 모두가 주식회사란 조직아래 움직였을 것이므로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시대에 따라 또는 그들의 발전기, 쇠퇴기에 따라 영역 변천이 심했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영구거류영역과 거주지, 정착지, 자치주까지 이것들이 19세기 혼란기에 그들의 국가형태, 영토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그들이 결코 인정치 않을 것이다.확실한 것은 과거 해양세력이었던 일본 영토는 카리브해(海) 도서(島嶼)지역에 넓게 퍼져 영역이 한곳에 고정되거나 고착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 결론적 판단이다.물론 그들의 본거지는 지금의 카리브해(海:Caribbean Sea)가 틀림없지만 이들은 어디를 가나 그들의 거처가 곧 영역이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며 이것은 마치 식민주의의 표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렇듯 그들이 쫓겨다니면서도 지배의식이 강했다는 점이 있다.이것을 단순히 어떤 한 국가로 보려는 노력은 그들에게 정체성으로 상당기간동안 스스로 도모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포니카라고 하는 일본의 위치는 어딜 말한 것인지를 파악하려 한다. 아래자료는 신중국 중국농업백과전서 자료이다.중국농업백과전서(中国农业百科全书)를 통해 중국과수업발전사(中国果树业发展史)를 일편할 수 있는데 과일재배가 본격적으로 활성된 것은 송대(宋代:960-1279)부터라고 하고 있고 이것은 곧 고려(高麗:918-1392)때 부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여기서도 카리브해에 일본이 귀속되어 모든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잠시만 보면 알 수가 있다. 宋元明清至民国时期(公元960~1948年)这一时期国内外农业文化交流进一步发展,果树品种交流和果品贸易进一步扩大,果树原有产区不断扩展,并形成了一些新的产区;传统果树栽培技术趋于完善,得到了总结和提高,出现了多种果树专著,并为中国果树业的现代化做了一些准备。早在唐代日本遣唐使就由海路带回去中国的桃、梅、杏、枇杷、枣、银杏、柑橘、葡萄和石榴等多种果树;桃、李也在唐代传至印度。宋代海运远较唐时发达,国内外果树交流得到加强。10世纪中,林檎传入日本;13世纪枇杷传至印度。当时,东南沿海的福州和泉州是著名的水果产地,有荔枝、龙眼、佛手柑、香蕉、橄榄、杨桃、枇杷、金柑等名产。范成大的《桂海虞衡志》(12世纪)果志部分就记述了50多种南方果树。福建大量生产的果脯是对外贸易的传统货品;荔枝也外销,“东南舟行新罗(朝鲜)、日本、琉球、大食(阿拉伯帝国)之属,莫不爱好,重利以酬之。”1974年在泉州湾发掘出一艘南宋木构海船,发现有椰子壳、桃、李、杨梅、橄榄、荔枝的核和银杏种壳。据《东京梦华录》(1147年)等文献记述,宋代都市中出现了专门经营果品的行市,其中有南北干鲜果品、蜜饯等。银杏古树中国各地皆有,不乏千年以上的老树,其中以山东莒县浮来山定林寺的最大,树龄相传已在3000年以上,干周达15.7米。据此,银杏在中国栽培历史应相当久远,但直到宋代当时首都开封栽培后,才引起重视,其名称首见于元代王祯的《农书》。原产中国的杨桃、金柑、佛手柑等都是在宋代才普及。外来的扁桃、无花果也是在这一时期才在中原地区大量栽种,例如,无花果在明初朱的《救荒本草》(1368年)中列为救荒植物。番石榴也是在当时从国外引入的;而木菠萝则是从东南亚引进。위 한어자료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다.송원명청(宋元明淸)과 민국(民國)시기(960-1948)에 국내외 농업문화 교류와 과일 품종의 교류가 확대되어 과수의 생산지역이 확대되었고, 일부 새로운 산지가 형성되었으며, 전통 과수 재배기술이 완비되어서, 일부 과수의 현대화 준비와 전문 저서가 출현하였다.당대(唐代)에 일찍이 일본(日本) 견당사(遣唐使)가 중국의 복숭아(桃), 살구(梅), 매실(杏), 비파(枇杷), 대추(枣), 은행(银杏), 감귤(柑橘), 포도(葡萄)와 석류(石榴) 등 많은 종류의 과수(果树)를 바닷길을 통해 가지고 갔다. 복숭아(桃)와 배(李)도 당대(唐代)에 인도(印度)로 전해졌다. 송조(宋朝)의 해운은 당조(唐朝)때에 비해 훨씬 발달하여, 국내외 과수 교류가 강화되었다. 10세기 일본(日本)에서 사과(林檎)가 들어왔고 13세기 인도(印度)로 부터 비파(枇杷)가 들어왔다.;당시 동남(東南)해안의 복주(福州)와 천주(泉州)는 유명한 과일 산지로, 여지(荔枝), 용안(龙眼), 베르가못(佛手柑:bergamot), 바나나(香蕉), 올리브(橄榄), 키위(杨桃), 비파(枇杷), 금감(金柑:Kumquat)등이 있었다.범성대(范成大)의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12세기)과지(果志)부분에는 50여 종(種)의 남방과수(南方果树)들이 서술되어 있다. 복건(福建)대량 생산물로 과포(果脯)는 대외무역전통상품(对外贸易的传统货品), 여지(荔枝)도 해외 판매를 했다. 동남(東南)으로 주행하면 신라(朝鮮), 일본, 류구, 대식(大食:아라비아)에서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어 이익을 크게 남겼다. 1974년 천주만(泉州湾)에서 남송(南宋)목조 해선을 발굴했는데 야자껍질(椰子壳), 복숭아(桃), 자두(李), 양매(杨梅), 올리브(橄榄), 여지(荔枝)의 핵과 은행(银杏)종자껍데기가 발견되었다. 동경몽화록(东京梦华录,1147년)등의 문헌에 따르면 송대(宋代)도시에 과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시세(行市,가격)가 나타났는데, 그중에는 남북 말린과류(干鲜果品), 과일을 설탕에 재는 밀전(蜜餞)등이 있었다고 한다. 은행나무(银杏古树)는 중국 전역에 수 천 년 이상 된 고목이 적지 않은데, 이 중 산동성(山东) 쥐현(莒县) 부래산(浮来山) 정림사(定林寺)의 가장 크고, 수령이 3000년 이상 된 것으로 전해졌으며, 둘레길이(干周达)는 15.7m에 달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의 재배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는데, 송대(宋代)당시 수도 개봉(開封)재배 이후에야 비로소 중시되었고, 그 명칭은 원조(元朝) 왕정(王书)의 농서[农书]에서 처음 나왔다. 원산 중국산 키위(杨桃), 금감(金柑), 베르가모트(佛手柑)등은 모두 송대(宋代)에야 비로소 보급되었다. 외래(外来)의 편도(扁桃), 무화과(无花果)도 이 시기에야 중원지방에서 대량 재배하였는데, 예를 들면 무화과(无花果)는 명초, 주숙(朱橚)의 구황본초(救荒本草,1368)에서 구황식물로 지정되었다. 번석류(番石榴)도 당시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고, 목(木) 파인애플(菠萝)은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했다.[한부울] 위 자료에서 해운위주의 과수교류(海运为主的果树交流)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明清两代基本上处于统一安定的环境,东南沿海一带大小城镇的兴起,商品发展的刺激,果树栽培也有了新的发展。同时,国内外果树交流和果品贸易更加频繁。原产中国的杏、荔枝和柿,于17~18世纪从欧洲被转引至美洲,而美洲所产的热带果树也在此期由海路引种到中国。如杧果虽早在玄奘的《大唐西域记》等文献中就有记载,但正式引种是1561年从荷兰引到台湾;菠萝、番木瓜是17世纪从葡萄牙引至中国南方;番荔枝传至台湾是在1614年。这一时期中国传到日本的有无花果,核桃和中国樱桃。명청(明清)두 세대는 기본적으로 통일적이고 안정된 환경에 처해 있으며, 동남연안(东南沿海) 일대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흥기하여 상품 발전의 자극이 되었고, 과수 재배에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아울러 국내외 과수 교류와 과일 무역은 더욱 빈번해졌다. 원산인 중국산 살구(杏)와 여지(荔枝), 감(柿)은 17~18세기 유럽(欧洲)에서 아메리카(美洲)로 전달되었으며, 아메리카(美洲)산 열대과수(热带果树)는 이번 기간에 해로에서 중국으로 인도되었다. 망고(杧果)는 일찍이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记)'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만 정식으로 인용된 것은 1561년 네덜란드(荷兰)에서 대만으로 전해졌고, 파인애플(菠萝), 파파야(番木瓜)는 17세기 포르투갈(葡萄牙)에서 중국 남방으로 인도 되었다. 슈가 애플(sugar apple) 번여지(番荔枝)가 대만에 전래된 시기는 1614년이고 이와같은 시기에 중국에서일본으로 전해진 것이 무화과(无花果), 호도(核桃), 중국앵두(中国樱桃)이다.[한부울] 明清两代原来的果树产区得到了迅速扩大,新的产区也不断形成。例如珠江三角洲成为柑橘、香蕉和荔枝产区,并不断扩大。《广东新语》(1700年)载:广州堤岸皆种荔枝、龙眼;广东定安县(现属海南省)出现栽植5万株槟榔的商品果园。品种数量也显著增加,如宽皮橘类的品种在历史文献中著录的共117个,其中明清两代文献中占74个。一些著名的地方品种也相继育成。山东莱阳茌梨,上海水蜜桃在明代已育成,并由此形成莱阳梨产区和以上海为中心的长江三角洲水蜜桃新产区;肥城佛桃出现于清代中叶,这些品种流传至国外后,对品种改良起了重要作用。早在明代,日本从中国浙江天台山带去广橘、乳橘、瓯柑等种子,在鹿儿岛播种,后来选出了无籽的柑橘,称为“温州蜜柑”。 명청(明清) 두 시대(代)의 원래 과수 산지가 빠르게 확대되었고, 새로운 산지도 끊임없이 형성되었다.예를 들어 주강삼각주(珠江三角洲)는 감귤(柑橘)과 바나나(香蕉), 여지(荔枝)의 산지가 되었고, 계속 확대되었다.《광동신어:广东新语》(1700년)에 재(载) : 광주제방(广州堤岸)에는 모두 여지(荔枝)와 용안(龙眼)이 심어져 있는데, 광동정안현(广东定安县:현 海南省)에 5만 그루(株)의 빈랑(槟榔)을 심은 상품 과수원이 생겨났다. 관피귤류(宽皮橘类)의 품종은 역사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총 117개이며, 이 중 명청 2대 문헌 중 74개를 차지한다. 몇몇 유명한 지방 품종도 잇따라 양성되었다. 산동래양장이(莱阳茌梨), 상해 중심지역인 장강삼각주(长江三角洲) 수밀도(水蜜桃) 신산지가 형성되었고, 비성도(肥城佛桃 亦称肥桃,又名佛桃)는 청대 중엽에 전해내려왔다. 일본은 일찍이 중국 명대 절강성 천태산(天台山)으로 가서, 광귤(广橘), 유귤(乳橘), 구감(瓯柑:tangerine)등의 종자를 가고시마(鹿儿岛)에 파종하고 그 이후 씨 없는 감귤을 생산해 온주밀감(温州蜜柑)이라 했다.[한부울]위 지도그림은 한어자료에서 붉은 표식을 한 부분을 재해석하여 구도해 본 것이다.송대(960-1279) 해외무역의 중심지이자 문화 중심지였던 동남(東南)해안 복건성(福建省)의 복주(福州)와 천주(泉州)에서 동남쪽으로 가면 신라(新羅)와 일본(日本) 그리고 대식국(大食國:사라센:Saracens)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위 동아시아대륙 지형을 그대로 대입해보면 어디하나 맞아들어가는 것이 없다. 전혀 아닐 올시다이다.일본의 위치가 대만 남쪽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든지 알 수가 있다.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대식국(大食國)인 사라센(Saracens)이 어디에 위치한 나라인가?사라센인(Saracen)은 대체로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등지를 아우른 이슬람 제국의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로써 원래 로마제국(羅馬帝國:Imperium Romanum:330-1453)말기에 시나이반도(Sinai Peninsula)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어(Σαρακηνός :Sarakinós)에서 유래 했는데 이 말은 아랍어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Oriental)'이란 뜻의 شرقيين (사라킨)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하고 아라비아 페트레이아 혹은 디세르타(Arabia Petraea Deserta)라고 하는 암석의 아라비아: 고대 아라비아를 나눈 3구분의 하나로 아라비아 반도 서북쪽, 시리아 사막지대를 가리킨다고 되어 있지만 사막은 남아메리카대륙 서부 페루사막을 인용할 수 있다. 그들은 카이바르(Khaybar:Medina 북쪽의 오아시스) 주변과 유프라테스 강(Euphrates)까지 뻗어 있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알려진다.남아메리카대륙 북부 동쪽에는 사막이 없을까?아니다. 콜롬비아 타타코아 사막(Tatacoa desert)과 라과히라 사막(La Guajira Desert), 베네주엘라 코로 사막(Medanos de Coro)이 있다.이러함에도 사라센이 동아시아대륙 남부 바다 한 중앙에 위치한다면 누가 믿겠는가.솔직히 그 아래 필리핀(Philippines)이란 섬나라가 있을 뿐 거대한 이슬람제국이 존재할 곳이 없다그리고 사라센의 어원에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중동(中東:Middle East)이란 위치도 맞지 않는다.다만 일치할 수 있는 곳은 태양이 뜨는 지역이며 중(中)은 가운데 중(中)으로 아메리카대륙 중심부 중앙아메리카대륙 또는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에서 동쪽을 말함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바로 아메리카대륙에서 중앙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북부의 동쪽지역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그곳에서 대식국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랍계 이슬람교도(Arab Muslims)라는 말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작가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였다.이것을 다시 풀어보면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그의 저서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에서 주장한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친 것일 뿐 실제로 역사가 차지하는 중요성과는 별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용어는 그렇게 생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리고 위 신중국자료에서 주행(舟行)이라고 하였는데 주(舟)는 물 위를 떠있는 작은 나뭇잎 같은 조각배를 이르는 표현처럼 일엽편주(一葉片舟)라 한 것을 감안할 때 주(舟)는 주로 소형 배만 지칭한 것이다.즉 대양을 함부로 떠 다닐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연결된 한정된 위치에서 상호간 교역수단으로 이용되었음도 알 수가 있다.이런 소형배를 타고 중국에서 지금의 중동 대식국 즉 사라센(Arab:Saracen)까지 왕래했다는 것은 정말로 열도가 만든 만화같은 이야기라 할 수밖에 없다.본 블로그 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 "에서 이미 허리케인으로 알아본 지명들을 보면 팔중산열도(八重山列島)가 소엔틸리스제도, 석원도(石垣島)는 푸에르토리코로 밝혀지나 버진아일랜드가 포함될 수 있으며 필리핀이라 함도 푸에르토리코와 버진아일랜드 그리고 더하여 소엔틸리스제도까지를 대비해 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식민지환경을 감안해야 하고 오키나와(冲繩)를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를 말하는 것과 유구(琉球)역시 이와같은 범주에 있으며 터크스와 카이 코스 군도(Turks and Caicos Islands)까지를 확대하고 볼 수 있고 구주(九州)는 바하마와 터크스와 카이코스군도 그리고 쿠바를 말한 것이 아닌가 하며 동해도(東海道)는 쿠바본토 동해쪽으로 접하는 도로를 말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일본4국충(日本四國冲)이라 함은 도미니카, 아이티, 쿠바, 바하마를 대비케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우리는 결코 바보가 될 수 없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동백나무(Camellia japonica" rel="tag" target="_blank">동백나무(Camellia japonica</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김나지움(Gymnasium)" rel="tag" target="_blank">김나지움(Gymnasium)</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디옥시리보 핵산(deoxyribonucleic acid)" rel="tag" target="_blank">디옥시리보 핵산(deoxyribonucleic acid)</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원국회사(遠國會社)" rel="tag" target="_blank">원국회사(遠國會社)</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아편전쟁(阿片戰爭:Opium War)" rel="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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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화재와 에도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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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화재와 에도화재 글쓴이:한부울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대화재(Great Fire of London:1666.9.2-9.6)와 열도일본의 도쿄대화재(明暦の大火:1657.3.2-3.4)가 10년간격을 두고 선후로 분리되어 나타지만 도플갱어(Doppelgenger)의 한 쌍처럼의 사건으로 눈에 비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영국의 수도가 런던이라면 당시 일본의 수도를 에도 즉 지금의 도쿄이다.시기가 17세기 똑 같은 시대에 그것도 대화재라고 하여 수많은 피해를 발생시킨 것이 나란히 대화재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이것은 오늘날 동양과 서양역사가 분리되고 동양과 서양 문화가 다른 것처럼 이식되어 있지만 사실상 같은 사건임을 명확하게 진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왜 그러한지 알아보자.이미 우리는 서양일본세력을 여러가지 경우를 통해 살펴보았다.그렇다면 서양일본세력이라 함은 곧 서양주체세력으로 19세기전반에 걸쳐 들어나는 잉글랜드를 그것과 동일선상에서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근세기 역사농단세력이 역사를 농단질한 키 포인트는 하나의 역사를 동양과 서양으로 분리시켜 놓았다는 사실이다.즉 하나의 사건이 분리되어 마치 동양에서 일어난 사실과 서양에서 일어난 사실이 독립적인 것처럼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시차적으로 약 10년간격을 두고 다른 사건처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본 블로그를 통해 알아본 여러 예에서도 거의 10여년을 그렇게 똑 같은 간격을 두고 발생한 사건들이 하나의 사건이란 사실을 이미 밝혀 확인했기 때문이다.그 정도는 그들도 할 수 있는 짓이었다고 본다.어찌 시간 분초까지 같을 것을 바라겠는가.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16세기역사때부터 일본과 잉글랜드는 매우 흡사한 면이 많다.대표적으로 정해년(丁亥年)난리라고 하는 열도일본역사에서는 바로 오닌의 난(應仁-亂:1467-1477)이라고하며 정치적 변동 및 계속되는 내란의 시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쇼군(將軍)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내란이라고 하였다.그러나 같은 시기에 서세(西勢)의 총수라고 여겨지는 잉글랜드왕권을 놓고 랭커스터가(家)와 요크가(家)가 싸운 전쟁을 장미전쟁(薔薇戰爭:1455-1485)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어 정해년(丁亥年)난리라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보면 곧 수차례의 장미전쟁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17세기 청교도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통치:1649-1658)에 의하여 찰스가 1세(Charles I,1600-1649,재위:1625-1649)가 처형당하면서부터 잉글랜드는 사실상 역사적으로 미아가 된다.이것은 동시대에 일본역사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에도 막부(江戶幕府) 또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라고 하는 막부정권(1603-1868)이 시작된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수많은 다이묘들의 연쇄적인 충돌이 다반사로 존재하던 시대이다.하지만 잉글랜드는 역사 미아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를 숙주로 하여 불사조처럼 재생하게 되었고 바로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1707)에 의해 스코틀랜드와 합병에 의해서 국가명맥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http://blog.daum.net/han0114/17050765 "에서 스코틀랜드와 고려역사는 역사적으로 동질성을 말했고 결국 고려의 역사 전통성은 잉글랜드가 취하면서 스코틀랜드란 매개를 이용하여 놀랍게도 삼한전통성의 끄나풀을 잡고자 애를 썼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실제로 서양인들이 코리아라고 하는 명칭은 곧 고려라고 인식되는 것으로 고려건국초기에 이미 신성로마제국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밝힌바가 있다.유럽군주전통성의 제일 머리 꼭대기는 바로 고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고려는 그리스이다.신라와 백제는 동서로마이다.고스란히 삼한역사가 유럽역사로 탈바꿈한 것이 바로 핵심이다.고려는 당시에 모든 서양인들의 정체성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현재 열도일본인들이 조선(朝鮮)만을 그들이 유별나게 폄훼하고 비하(卑下)하지만 고려(高麗)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역사에서 잘 들어난다.고려(高麗)는 일본인들에게 "카라[から]"고 하여 중국 당(唐)으로 묘사되기가 일 수 이다.카라[から]라는 일본어는 한자로 바로 韓, 漢, 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조선 사람을 "漢人" 또는 "唐人"이라고 불리었다는 사실과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카라비토(唐人·漢人)로 불리었던 것과 조선이 제공한 문화가 거의다 중국문화라고 하면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 조선은 삼한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삼한을 이끄는 것은 바로 천자이다.천자가 거하는 곳을 중국이라 했다.그곳에 서양인들은 해상무역의 창구가 존재하기 때문에 제일먼저 중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에 ‘카라카미’는 ‘한신(韓神)’이고, 결국 이 신화는 일본이 고대 한반도 도래인들에 의해 개척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삼한을 카라(から)라고 하고 통일삼한을 "唐"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옛부터 한당(韓唐)이라 하면서 카라(から)라 하였으며 현재의 일본 천황가에서도 신라신(神)인 ‘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神)인 ‘카라카미(韓神)’라 하면서 제사를 모시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본 블로그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2 "에서 일본인이 만든 박견사전(狛犬事典:上杉千鄕著)에 실린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의 박견(狛犬,こまいぬ)사진에서 일본에서 박(狛)을 고려(高麗)라 한다는 사실을 일본사전에 분명히 하고 있으며 덧붙여 말하길 한반도 고대의 국명인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를 명사(名詞)로 붙인 것이고 이것은 고려(高麗)로부터 전래했지만 다른 의미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찌보면 자기부정인 것이다.고대 오리엔트(Orient), 인도(india)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사자(獅子)를 코끼리 (象)로 대체하거나 또는 동시에 상(像)을 세웠고 고대 오리엔트 제국에서는, 성스러운 것, 신(神)이나 왕위의 수호신(神)으로서 사자(獅子)를 이용하는 일이 성행했다고 보는데 그 좋은 예가 고대 오리엔트 신화에 나오는 괴물 스핑크스(Sphinx)라 했다. 스핑크스는 원래 동물의 왕 사자에 대한 주물(呪物)숭배(Fetishism)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도 일본이 본래 사자상을 박견(狛犬)으로 변형시킨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사전에서도 박견(狛犬)을 고려견(高麗犬), 당사자(唐獅子)라고도 하고 원형은 사자모형이며 인도(印度, india)에서 불상(佛像의 대좌(臺座)를 장식할 때, 더러는 사자의 의구(意區)를 썼다하고 한편 중국에서는 전한시대(前漢時代)부터 궁궐(宮闕)이나 묘실(廟室)앞에 수호신으로 석조 사자상(獅子像)을 안치한 풍습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삼한의 풍습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것에 따라 실제로 박견 즉 고려개, 사자를 문장으로 사용한 영국(잉글랜드)의 국장은 공식적으로는 지배권의 문장(Arms of Dominion)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장 꼭대기 장식에서 커다란 왕관 위에 올라선 사자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그렇게 볼 때 고려(高麗)는 일본이나 잉글랜드에게는 전통역사주체임을 알 수 있다.이제 두 화재를 보자. 먼저 일본화재를 보면 1657년 3월 2일 메이레키 대화재, 명역대화(明暦の大火)라고 하고 후리소데 화재(振袖火事), 마루야마 화재(丸山火事)라고도 불리는데 일본 에도(江戸:지금의 東京都)에서 일어난 화재이다.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1543-1616)는 에도를 근거지로 삼아 막부를 개창하여 첫 쇼군(재임:1603-1605)이 된 그가 지배하던 1603년부터 1868년까지 막부의 중심지였다.이 화재로 에도(江戸)의 60-70%가 불에 탔으며 사망자는 100,000여명에 달했다고 알려진다. 에도 성(城)의 천수각(天守閣)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들이 소실되었고 에도 시가지가 파괴되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이것들은 기록만 존재할 뿐 어디에도 이러한사실을 뒤받침할 길이 없다.지금의 에도 즉 도쿄에 그러한 시가문화흔적을 말살시키기 좋은 것은 기록상 화재역사로 만들면 그이상 이야기 할 것이 없다.한반도 역사에서 과거역사의 유물, 유적등을 무조건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여 흔적자체를 지워버리는 수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화재가 발생할 때 고사이 천황(後西天皇,1638-1685,재위:1654-1663)이 재위했다고 하는데 이세신궁(伊勢神宮), 오사카 성(大坂城), 교토 다이리(内裏) 등의 화재와 메이레키 에도 대화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지진, 물난리 등의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으며, 당시 사람들은 천황의 부덕을 탓했고 천황 자신도 이를 괴로워하다 양위하였다고도 전한다.마찬가지로 잉글랜드는 찰스1세의 아들 찰스 2세(Chalres II,1630-1685,재위:1660-1685)가 이와같은 혼란기에 집권하여 네덜란드와의 2차 전쟁과, 대역병이라고 하는 페스트전염병, 런던의 큰 화재(런던 대화재)로 시달렸다고 한 사실과 일치한다. 일본에서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일본어: 明暦の大火)는 1657년 3월 2일(메이레키 3년 음력 1월 18일)에서 3월 4일(음력 1월 20일)까지 3일간 일본 에도(江戸)에서 일어난 화재로써 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하고 있는데 혼묘지(本妙寺)에서 미혼 여성이 입는 일본의 전통 예복 후리소데(振袖)를 불에 태우던 도중에 바람에 옮겨붙어 시작되었다는 설과 혼묘지에서 일어난 화재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었다는 설, 또는 에도의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에도 막부가 고의적으로 방화를 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개발계획을 하고 불을 지르는 것은 역사를 다시 쓴다는 의미가 더 크다.이러한 이야기에서 위키자료를 보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데 옛날 에도에서 17세 소녀인 우메노(梅乃)가 살고 있었고 부유한 전당포 가문의 외동딸이었던 우메노는 에도에서 열린 마츠리[祭]에 나서던 도중에 잘 생긴 소년의 모습에 반하게 되면서 소년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던 우메노는 부모에게 시집을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인해 좌절했고 음력 1월 18일에 상사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우메노의 부모는 딸의 결혼에 반대한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 슬픔에 빠지게 되고 며칠 뒤 에도의 큰 사찰인 혼묘지(本妙寺)에서는 우메노의 장례식이 열렸다. 일본의 장례식에서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아끼던 옷을 관에 덮어주는 풍습이 있었고 우메노의 어머니는 우메노가 마츠리에 나서던 도중에 입었던 붉은색 후리소데를 덮어주었다. 어느 날 혼묘지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우메노의 후리소데를 몰래 빼돌려서 시장에 팔았다. 그렇지만 3년 동안 우메노가 입었던 후리소데를 입은 3명의 소녀들이 매년 음력 1월 18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혼묘지에서 열린 소녀들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우메노의 후리소데를 알고 있던 일꾼들은 죄책감과 불길함에 시달리면서 이 사실을 스님에게 고백하게 되고 스님은 우메노의 부모에게 우메노의 한과 저주가 서린 후리소데를 불에 태워 없애기로 결정하였고 혼묘지의 스님은 뜰에 불을 피우는 동안에 불교의 경전을 외우면서 우메노의 후리소데를 불에 던져버린다. 그런데 불에 타고 있던 우메노의 후리소데가 예상치 못한 돌풍에 날아가면서 혼묘지의 본당의 지붕에 앉았고 우메노의 후리소데에서 시작된 불은 혼묘지의 본당과 사찰 전체를 불태웠으며 3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한 상태에서 강한 북풍이 불면서 불은 삽시간에 에도 전체로 확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을 도쿄대화재(明暦の大火:1657.3.2-3.4)라고 한다.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는 1666년 9월 2일 새벽 2시경, 빵 공장에서 일어난 불이 런던 시내로 번진 대화재를 말한다. 당시 화재는 소방담당자의 무책임으로 인해 조기에 진화되지 않았고, 5일간 87채의 교회, 1만 3천채의 집이 불탔다고 하였으며 당시 인구 8만 명 중 7만여 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피해를 본 사람이 전체 인구 중 87%에 달한다. 공식 기록에는 단 3명만이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귀족(왕족)외의 빈민이나 일반 사람들은 전혀 국가에서 관여 또는 사망자 수를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였으며 이 화재로 세인트폴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도 불타 버렸다.이 성당만 탓겠는가.이 런던화재지도를 보면 전 시가지에 3/2가 화재구역임을 알 수가 있다.당시 영국 국왕인 찰스 2세는 이재민들에게 식량지급약속을 하였다.찰스2세는 사실상 여기저기 망명생활을 하였고 런던페스트가 유행하면서 또 다시 런던 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화재가 일어나기 1년전 1665년 부터 영국-네덜란드 전쟁(Second Anglo-Dutch War:1665-1667)이 발생했고 네덜란드는 재정을 정비하고 해군을 확장하여 무역을 진흥시켰으나, 잉글랜드는 1660년의 왕정복고 후 찰스 2세가 항해 조례를 갱신하고, 1664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뉴네덜란드를 침공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이를 뉴욕으로 고쳤다고 알려지며 그기에 더하여 다음 해 1665년 3월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여 2차 전쟁이 개시되었으며 잉글랜드는 로스토프트 해전(Battle of Lowestoft)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무찔렀으나, 이후 프랑스가 네덜란드 편을 들어 참전했고 잉글랜드의 동맹국 뮌스터 공국도 참전했으나 프랑스에게 패배했다.또한 전쟁과 별도로 같은 시기에 잉글랜드는 자연재해와 전염병 그리고 대화재가 발생하여 국가존망이 위태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래도 견디었다는 것을 보면 잉글랜드란 나라가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런던대역병(Great Plague of London:1665-1666)은 선페스트(Bubonic plague)로 이 병원균은 1894년에 이르러서야 밝혀진 것인데 이에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박테리아로 밝혀졌으며, 주로 박테리아에 감염된 쥐벼룩이 사람을 물면서 전파되었던 것으로 토마스 곤블 박사(Dr Thomas Gumble)는 1665년과 1666년 동안 페스트로 인한 총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이라고 추정했다.페스트는 주기적으로 대규모 전염병을 일으켰으며 1603년에는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3만 명, 1625년에는 3만 5천 명, 1636년에는 1만 명, 그 밖의 해에는 그 수가 적었지만 1650년 영국의 인구가 약 525만 명이었는데 1680년에는 약 49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는 것은 이와 같이 전쟁, 대화재, 그리고 대역병까지 큰 인명손실이 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1665년부터 1666년 2년동안은 겹쳐발생한 재해때문에 잉글랜드는 엄청난 고난의 시대였다고 판단된다.솔직히 이정도라면 도시국가는 거의가 피폐하면서 동시에 망할 수밖에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지게 서양주도세력으로 부활하고 나타난 것은 참으로 희귀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대화재가 발생한 곳이 일본도 수도이고 잉글랜드도 수도이다.기록된 사건 년도만 10년정도 차이있을뿐이다.똑같이 내전과 전쟁, 자연재해와 대화재 그리고 대역병으로 수많은 재산과 인명이 손실되는 형편에 있었고 도시, 곧 나라전체가 대 혼란이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br><br>tag : <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오닌의 난" rel="tag" target="_blank">오닌의 난</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도쿄대화재(明暦の大火" rel="tag" target="_blank">도쿄대화재(明暦の大火</a>,&nbsp;<a href="/_blog/tagArticleList.do?blogid=0Bcql&tagName=런던대화재(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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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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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0 **************** 世界三韓歷史硏究 **************** 애초 모르던 것인가? 따져보면 모두 천리가 있고 근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르지 않음은 태생부터 이미 속이 같다는 것인데 어리석은 너와 내가 이기(利己)에 눈이 멀어 같음을 알지 못하였구나. 이기를 던져버리고 하나라는 깨달음이 있다면 천리와 근원을 알아 몰라 생기는 괴로움과 고통은 눈녹듯 사라지고 성통(性通)하는 기쁨이 모두에게 넘쳐 날 것이 아닌가.

블로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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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卦;(bagua)

無極生有極、有極是太極、

太極生兩儀、即陰陽;

兩儀生四象: 即少陰、太陰、少陽、太陽、

四象演八卦、八八六十四卦

就是六十四个“象
八卦符號通常與太極圖搭配出現.

 

[添主] 孺崽雙寅, 寅頭人腿, 寅口星光

세상이 당장 무너져내린다 해도 바르게 지켜야 할 것은 바로 태(胎)이고 본(本)이다.

 

송구스럽게도 우리는 태와 본을 바르게 지키질 못했고 태와 본을 알지 못한다.

 

태(胎)와 본(本)은 조상이고 부모이다.

 

조상과 부모는 역사이고 진리이며 종교이며 천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효하여 우리는 여태껏 망실해 헛것만 채우는데 급급했다.

 

때문에 세상에 선이 상실되고 정의가 사라지고 진리가 함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이다.

 

어찌 이를 온당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조상과 부모를 똑바로 찾아 섬기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와 근원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그러한 잘못에 자유롭지 못하다.

 

조상과 부모가 없는 자손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각성이 한 참 늦고 모자랐다. 

 

너와 내가 태와 본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또한 근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자기 실종이고 종국에는 회피와 나만 괜찮다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매 순간 이러한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회한(悔恨)은 많고도 많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다는 것은 진정한 태와 본을 찾는 것이고 조상과 부모를 찾는 일이며 근원을 찾아 바로 세우는 것이므로 지금까지 지은 죄가 크다 하여도 천지신명으로부터 사해 받는 일이라고 생각해보지만 부끄러움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애써 보지도 않았다는 죄책감일 게다.

 

그래서 그렇듯 노력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뜻대로 이루어지는 않는다.

어떤 것이든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는 것이며 또한 이미 지난 역사가 아닌가.

 

나태한 나를 채찍질 해보고 역사찾기에 몰두하며 몸부림쳐 보지만 아직 갈 길이 너무나도 멀다는 것을 알 정도이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한 해가 가고 또 새 해가 무릇 다가 오는구나.

다가오는 해에는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매년 결실이 허 하기는 마찬가지다.

먼 길을 당겨 가깝게 잡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지금 진실된 노력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부울]

 

스페인 독감과 역사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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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독감과 역사 재해석

 

글쓴이:한부울

 

1. 개요
2. 스페인독감이란
3. 1차세계대전과 중앙동맹국(中央同盟國)
4. 감염과 각국의 인명손실
5. 총독부자료가 말하는 조선 무오년독감(戊午年 毒感)
6. 스페인 독감과 세계삼한역사
7. 100년만에 찾아온 불청객
8. 정리

 

1.개요

 

독감을 뜻하는 인플루엔자(influenza)라는 단어는 18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발병한 독감을 칭하는 말 인플루엔시아 디 프레도(Influenza di freddo), 추위의 영향(influence of the cold)이란데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진다.

In other words, wherever there is winter, there is flu. In fact, even its name, “influenza” may be a reference to its original Italian name, influenza di freddo, meaning “influence of the cold”

즉 겨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독감이 있다는 뜻이다.

겨울에 독감이 발병하는 이유에 대한 가장 적합한 이론은 다음과 같다.

1)겨울에는 창문을 봉한 채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독감에 걸린 사람과 같은 공기를 마시게 되어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쉽다.

2)겨울에는 낮이 짧아지고, 햇빛의 부족은 비타민D와 멜라토닌(melatonin)의 수치가 낮아지는데, 둘 다 생성을 위해 햇빛이 필요하며 이것들은 우리의 면역 체계를 손상시키고, 차례로 바이러스와 싸우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3)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더 춥고 건조한 기후에서 더 잘 살아남아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2007년경, 피터 팔레스(Peter Palese)박사라는 한 연구원이 1918년 독감 대유행 이후 출판된 오래된 논문에서 특이한 논평을 발견했는데, 1919년 논문의 저자는 플루 바이러스(flu virus)가 뉴멕시코의 캠프 코디(Camp Cody)로 도착하자 실험실의 기니피그(guinea pigs)들이 병에 걸려 죽기 시작했다고 서술했다.

연구원 팔레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몇몇 기니피그들에게 독감을 감염시키려 했고, 확실히 기니피그들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기니피그들이 팔레스에 의해 접종되었을 때 독감 증상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이 바이러스는 한 기니피그에서 다른 기니피그로 전염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어 독감이 따뜻하고 습한 기후보다 춥고 건조한 기후에서 더 잘 전염되는지 여부를 시험하기로 결정하고 기니피그를 온도(41°F, 68°F, 86°F)와 습도(20%-80%)에 따라 다르게 유지되게 만들었다. 팔레세는 이 바이러스가 고온과 고습보다 저온과 저습에서 더 잘 전염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림 1 참조).[Hannah Foster:PhD candidate Harvard University]

 

그림 1 - 실험 설정 기니피그는 이웃한 상자에 수용되었다. 상자(1)에 있는 기니피그는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 펠레스는 상자(2)에 있는 얼마나 많은 기니피그들이 다른 온도와 습도 수준에서 상자(1)에 있는 기니피그로부터 감염되는지를 관찰했다. B, C) 온도에 관계없이 낮은 습도에서 100% 전송속도였다. 높은 습도에서는 낮은 온도에서만 매개가 발생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는 인플루엔자가 실제로 낮은 습도와 낮은 온도에서 더 오래 생존한다는 것을 암시했고 습도가 매우 낮은 43°F에서는 대부분의 바이러스가 23시간 이상 생존할 수 있었던 반면, 높은 습도와 90°F의 온도에서는 1시간 만에 생존 배양이 감소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2. 스페인독감이란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에 의하면 1918년 발생한 스페인 독감(Spanish flu)19181월부터 192012월까지 약 3년간 지속되면서 당시 세계 인구 18~19억명의 4분의 1정도, 27% 해당하는 약 5억 명의 감염자가 발생했고 사망자 수는 5,000만 명, 어쩌면 1억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유럽대륙은 물론 미국, 일본, 인도, 중국을 거쳐 남태평양 군도, 북극에도 번졌다고 하고 있으며 20세기 최초이자 최대의 팬데믹(pandemic)이었다고 적고 있다.

 

네이버지식백과에 따르면 인플루엔자 범유행은 조류독감(AI) 바이러스가 인체 내에서 '대변이'를 일으켜 호흡기 전염병을 유행시키는 현상을 말하며 팬데믹의 어원은 그리스어 'pan(모두)+demic(사람)'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한번 감염되면 전 세계로 전파되어 모두가 사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 A(Influenza A virus subtype, H1N1)의 대변이는 바이러스가 자연 숙주인 조류로부터 직접 인체로 침입해 적응한 후 변이를 일으키는 예와 제3의 숙주를 통해 유전자 재배열 과정을 거쳐 인체로 침입하는 경우을 말하며 바로 제3의 숙주를 통해 유전자 변이를 통해 나타나는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것이 되는데 1918년에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5,000만명을 사망케했던 '스페인독감'도 조류독감의 일종이며 인플루엔자 AH1N1 아형(subtype)이라는 병원체로 밝혀졌다고 설명된다.

 

스페인독감의 기원에 있어서는 이견이 많으나 1차세계대전이 마무리되던 시점에서 병사들이 귀향하기 위해 모여있던 캠프에서 발병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3일 열병"이란 이름처럼 짧은 증상기간 이후 단순한 감기 증상을 가지고 귀향한 병사들이 각지에 전파함에 따라 유례없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인기 작가이며 역사가인 존 엠 베리(John M. Barry)2004년 보고서에서 19181월 캔자스 주 하스켈 카운티(Haskell County, Kansas)에서 처음 스페인독감이 발병했다고 말했다.

그해 311일에 미국 뉴욕주의 뉴욕시에 속한 자치구 퀸즈(Queens)에서도 환자가 생기고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3월과 4월까지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나중에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처음 하스켈카운티 지역 의사 로링 마이너(Loring Miner)가 미국 공중보건청의 학술지에 이를 경고하였으며 191834, 하스켈 카운티의 요리사 알버트 기첼(Albert Gitchell)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군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미군 시설인 포트 라일리(Fort Riley)에서 병가를 낸 것은 이 병에 노출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고 이후 며칠 만에 이 캠프에 있던 522명의 병사가 병에 걸린 것으로 보고되었다고 자료는 말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자료에는 미국 캔자스주(Kansas)에 위치한 외딴 농장에서 시작되었다 하고 농장에 살던 앨버트 기첼은 스페인독감에 감염된 후 미 육군에 징집되었고 많은 신병으로 붐비던 캔자스 퍽스톤 기지에 입소한 앨버트 기첼은 취사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으며 191834, 엘버트 기첼은 열과 두통을 호소하며 의무실을 찾게 되면서 곧 기지를 휩쓸면서 3주도 안 되어 1100명이 중태에 빠졌고 38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쓰고 있으며 19183월 수송선 25척이 미군 병력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향했고 병사들의 감염상태에서 19184월 미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였고 전장엔 독감이 발발하기 시작했으며 2천만 명이 감염되고 2만 명이 사망함으로써 결국 유럽전역으로 퍼졌다고 하고 있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에타플스(Étaples)에 있는 주요 영국군 주둔지와 병원 캠프는 스페인 독감의 중심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311일에 발생한 독감은 미 전역으로 퍼져나가 1주일 뒤 조지아주의 군부대에서는 28500여명의 군인 가운데 2900여명이 독감 증세를 보인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4월 하순에는 필라델피아 시민 1000명 중 158명이, 볼티모어 시민 1000명 중 148명이 같은 증세를 보였고 그 무렵 독감은 이미 대서양을 건너 1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유럽의 서부전선까지 휩쓸고 있었다고 하였으나 새로운 연구는 이 질병이 프랑스 북서부 에타플스(Etaples)와 잉글랜드의 올더숏(Aldershot)의 영국군 기지(British army bases)에서 발생했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위 기사가 말하는 퍽스톤이란 지명은 없다.

아마도 포트 라일리(Fort Riley)에 있었던 펀스톤 켐프(Camp Funston)가 아닌가 한다.

포트 라일리는 1887년에 미국기병학교(US Cavalry School)의 부지가 되었고 "버팔로 병사(Buffalo Soldiers)"라고 불렸던 유명한 검은 9기병대와 10기병대(all-black 9th and 10th Cavalry Regiments)19세기와 20세기 초에 여러 번 포트 라일리(Fort Riley)에 주둔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이 요새에는 5만 명의 병사가 주둔하였고, 1918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발병지점으로 확인되어 요새병사들이 전 세계에 퍼뜨렸다고 설명된다.

 

 

 

 

 

 

 

고병원성으로 발전한 것은 19188월 유럽 전선에 투입된 79만명의 미군이 도착한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ittany)의 항구 도시 브레스트(Brest), 유럽에서 석탄을 실은 증기선이 기항하는 석탄보급지 서(西)아프리카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의 수도 프리타운(Freetown), 그리고 전쟁물자를 취급하는 많은 회사들로 넘쳐나는 곳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의 보스턴(Boston)에서 더 치명적인 변종이 동시에 나타났으며 이 스페인 독감은 아일랜드(Ireland)전역에도 퍼졌고 아일랜드 군인들을 돌려보냄으로써 전염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프리타운에서만 1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브레스토에서는 822일부터 915일까지 1350명의 군인이 입원해 370명이 숨졌으며 보스턴은 1개월간 시 전체 인구의 10%가 감염되어 이 중 60~70%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189월부터는 뉴욕(New York)과 필라델피아(Philadelphia)를 거친 독감이 철로를 따라 미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미 인구의 28%가 감염되었고 67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미국인의 평균수명이 10년이나 낮아졌다는 기록도 있으며 교회와 극장은 폐쇄되었고 야외에서 야구경기를 치를 때는 마스크를 착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1차 세계대전의 연합군(The Allies of World War I)이 그것을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라고 명칭한 것은 이 전염병이 191811월에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옮겨간 후 스페인언론의 더 큰 관심을 받았지만 당시 스페인은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고 또한 전시검열(wartime censorship)을 받지 않아 자유로웠다는 이유때문이다.

It was nicknamed ‘Spanish flu’ as the first reported cases were in Spain.

이와같이 처음 보고된 사례가 스페인에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당사국의 신문들은 사기를 떨어뜨릴지도 모르는 뉴스에 언론 정전으로 검열당했고 그래서 다른 곳에서도 인플루엔자 환자가 발생했지만, 대서특필된 것은 스페인이었다는 사실과 첫 번째 감염자 중 하나가 스페인 국왕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성을 더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좀 더 추궁해볼 문제이다.

 

3. 1차 세계대전과 중앙동맹국(中央同盟國)

 

스페인독감이 1차세계대전 막바지인 19181월부터 발병이 확인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하였는데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동원된 유럽군 6,000만 명 중 800만 명이 전사하고 700만 명이 영구장애인, 1500만 명이 중상을 입었다 했으며 독일은 남성 활동 인구의 15.1%를 잃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7.1%를 잃었으며, 프랑스는 10.5%를 잃었다고 나타난다.

합해보면 사상자만 하더라도 3,000만명 즉 유럽군전체의 반이다.

이 전쟁기간동안 기근과 다른 질병등으로 수많은 민간인도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전쟁기간이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민간인의 사망률이 평시보다 474000명 높았다는 것은 대부분 식량 부족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된 영양실조 때문이며 그것에 비근한 예로 전쟁이 끝날 무렵, 기근으로 인한 기아로 인구40만명인 중동 레바논(Lebanon)에서 약 10~20만 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이란(Iran)의 시골지역과 도시지역 모두에서, 페르시아 국가가 910,400명에서 2,431,000명의 주민들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페인 독감 사망률표에 그 당시 전체 인구(1,129)8%에서 21.7%사이로 사망률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 이후 소련정부(蘇聯:Soviet Union)가 들어설 시즘인 1921년에는 러시아기근으로 5백만에서 1천만 명이 죽었다고 알려진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10월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러시아 내전(1917.11~1922.10)으로 민간인 및 비전투원을 포함한 총 사상자 700만명1,200만명이고 사회적 혼란과 광범위한 폭력이 있었고 1921~1923년 일련의 기근은 약 1,600만 명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500만 명까지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구 러시아제국 내에서 2,000건 이상의 집단학살(集團虐殺),제노사이드 (genocide)가 발생하여 약 60,000~200,000명의 민간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또한 1915년에서 1926년 사이에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무기력성뇌염 또는 기면성뇌염(encephalitis lethargica)의 전염병이 거의 5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되어 있다.

인류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변곡의 흐름은 끝없이 역류하였으며 이로인해 1914년부터 1920년까지 실로 인류가 어마어마하게 희생당한 것이다.

 

다 아시다시피 1차 세계대전(World War I, WWI)1914728일부터 191811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미국은 전쟁 중 영국과 독일 간에서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가 1917116, 독일 외무 장관 아서 치머만(Arthur Zimmermann)이 멕시코 주재 독일 제국 대사 하인리히 폰 에카르트(Heinrich von Eckardt)에게 보냈던 암호 전문 치머만 전보에서 독일이 미국과의 중립 유지가 불가능하다면 멕시코와 동맹을 맺으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멕시코에게 함께 일본을 동맹에 끌어들여 미국을 공격하자는 제안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대가로 재정적 지원과 함께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되돌려 주겠다는 내용때문에 미국은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는 미국 영토에 대한 독일의 공격에 한한다는 내용으로 191746일에 제의하여 하원 결의안 373:50, 상원 82:6으로 승인되었고 126일에는 오스트리아에도 선전 포고를 하여, 그 범위가 이탈리아 전선까지 확대되었다.

즉 미국은 독일이 미국영토을 공격하는 것을 전제로 참전한다는 말이다.

위 치머만의 암호전문만 보더라도 독일과 멕시코, 일본은 영토를 맞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가 있다.

멕시코 대통령이 일본을 설득할 수 있거나 일본은 멕시코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일본은 멕시코와 같은 영토에 있었던지 명확하지 않지만 멕시코와 국경을 적어도 맞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독일이 멕시코에게 잃어버린 영토,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탈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곳이 일본영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당시 자료들을 보면 텍사스주에 지주 일본인들이 많아 유럽계 이민자들과 충돌이 잦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1차세계대전의 동맹국이었던 독일과 헝가리오스트리아, 오스만제국, 불가리아왕국이 러시아제국으로부터 서쪽, 영국·프랑스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여 중앙동맹국(中央同盟國)이라 칭 한 것에서 유럽대륙에서 지리적 형태를 보면 현재 오스만제국을 중앙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어 그것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국역승정원일기 고종 30년 계사(1893) 기록에 인도(印度:India)와 터키(Turkey)사이에 합스부르크왕가(House of Habsburg)의 오스트리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터키는 오스만제국이다.

또한 순조32(1832)1125일 부 영길이국표기(附英吉利國漂船記)에 영길이국 선원이 지나온 길에서 작은 나라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큰 나라로 하나는 법란(法蘭:프랑스), 둘은 품송(品松:프로이센), 셋은 아라사(鵝羅斯:러시아), 넷은 오지리아(奧地里亞:오스트리아)을 거쳐 왔습니다라고 한 사실을 참고 해야만 한다.

독일제국이 프로이센이다.

당시 동쪽에 있었다고 하는 러시아와 아라사가 같은 것일까?

아니다.

상기컨데 미국은 유럽전쟁 즉 삼한전통계보의 싸움이라고도 하는 1차세계대전 참전에서 종반기 19174월 의회 제의하고 찬성을 얻어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시기적으로 러시아제국멸망과 정확하게 교차되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19173월 붕괴된 이후 유럽동부전선이 해소되었는데 10월 혁명으로 인해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聯合國:Allied Powers)즉 협상국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했다고 되어 있다.

즉 다시말해 미국이 러시아를 대신하여 대체하는 것과 같은시기, 동일한 지형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한반도 대한해협으로 역사바라보기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6 "

에서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여했고 러시아제국의 영토와 권한을 자연스럽게 인수한 것이라고 언급하였지만 참으로 놀라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유럽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

그것은 합스부르크왕가의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아노 1(Maximiliano I,1832-1867,재위:1864-1867)가 멕시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과 연결되고 라틴어 오스'aus'가 동쪽을 의미하듯 오스트리아는 유럽에 속할 국명이 아니라 태양이 떠오르는 위치 아메리카 동쪽에 존재하던 국가명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과 연결된다.

결국 1917년 미국의 개입으로 중앙동맹국(中央同盟國)들이 차례로 투항하고 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19181111일에 끝이 맺게 된다.

중앙동맹국이라고 하는 것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들이 중앙아메리카대륙에 귀속되어 아메리카대륙 전체로 보았을 때 중앙(中央)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17116일 독일 외무 장관 아서 치머만(Arthur Zimmermann)암호전보로 독일이 멕시코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멕시코와 일본을 동일하게 본 상황이며 러시아제국을 그대로 인수한 미국을 상대로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1차세계대전 후 판도는 우리가 알기에는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서양사 자료에 어디에도 조선이라는 명칭은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청조가 망한 후에도 이를 중국이라 하였고 조선은 이러한 중국 프레임에 모두 흡수되어버리고 만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가 어머니인 빌헬름2세가 독일제국(Deutsches Kaiserreich:1871-1918)의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빅토리아여왕의 계보를 잇기위한 싸움으로써 또 한번의 유럽패권싸움인 고려천자계보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4. 감염과 각국의 인명손실

 

19185월에는 영국, 스칸디나비아, 폴란드까지 덮쳤고 5월말부터는 인도를 초토화시켜 당시 인구의 5%나 되는 1700만명을 쓰러뜨렸다.

독감은 전선이든 후방이든 가리지 않았고 소문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6월에는 카리브해의 푸에르토리코, 브라질, 남태평양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감염이 되었고 극지방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독감의 증상은 감기에 걸린 듯한 증상을 보이다가 피로, 발열, 두통의 첫 증상을 느낀 지 몇 시간 만에 일부 피해자들은 급속도로 폐렴에 걸리고 환자의 피부에서 산소가 빠져나가면서 보랏빛으로 변해 산소 부족을 예고하며 질식해 죽을 때까지 공기를 마시기 위해 몸부림치곤 했다 한다. 

전자에서 언급했듯이 처음 미국병사들이 머물던 캠프에서 기르던 식용 조류에서 발병했고 역시 신체적 특성이 인간과 매우 유사한 식용 돼지를 통해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병사들에게 쉽게 감염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페인독감은 대부분 젊은 성인들을 사망케 하였다.

1918~1919년 미국에서 스페인독감 사망자의 99%65세 미만에서 발생했으며, 사망자의 절반 가까이가 20~40세 청년층에서 발생했다고 하였다.

스페인독감 마지막해인 1920년에 65세 미만 사망률은 65세 이상 사망률의 절반으로 6배 감소했지만 여전히 65세 미만 사망률의 92%까지 발생했다.

보통 인플루엔자는 일반적으로 2세 미만의 유아, 70세 이상의 성인, 면역이 약한 계층에게 가장 치명적이기 때문에 젊은 성인들의 사망률은 상당히 이례적이라 하는 것이다.

1918, 노인들은 1889년부터 1890년까지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 아형 H2N2에 의한 즉 일찍이 러시아 독감(Russian Flu)으로 알려진 유행성 독감에 노출되어 부분적으로 보호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유라시아대륙의 러시아와 아메리카대륙간의 지형적 거리문제가 있는 것을 감안할 때 현재지형과 지리적상황에서 그대로 수긍하기가 매우 힘든 이야기다.

때문에 러시아와 미국은 같은 영역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1889년부터 1890년까지 유행한 독감은 러시아독감이 아니라 미국독감이라 해야 맞다.

 

 

 

1918년~1920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Global Mortality of the 1918–1920 Spanish Influenza Pandemic]에 의거한 각국의 피해상황을 한번보자.

 

[중국]먼저 위 사망표를 참고할 때 중국 전체인구 4억7200만명의 사망자가 400만명~950만명이며 사망률이 0.84~2%인 것은 결코 낮은 수치는 분명코 아니다.

그러나 다른 자료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중국의 피해상황을 깜깜이식 추정만 하고 있다.

추정치라 하는 것도 영국이 지배하는 중국 항만도시인 홍콩에서 발견된 낮은 사망률에 대비한 것이며 전체적으로 의사소통 불량으로 더 이상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어 중국 내부를 관통하는 독감을 어느정도 막았는지는 모두 가정에서 근거한 것이라 하고 있다.

일부 신문과 우체국 보고서와 선교사들의 보고는 독감이 실제로 중국내부를 관통했고 중국 농촌의 일부 지역에서는 독감이 심했다는 사실만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중국은 1918년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독감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그러나 당시 중국 내에서는 중앙집중화된 건강 통계 수집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과 일부 내부 보고서에서는 1918년에 적어도 몇몇 지역에서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사망률이 꽤 높았을 것으로 추측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최소한 중국 전체가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해 독감상황에서 심하게 걸렸다는 증거는 거의 없고 중국 내륙의 의료기록은 부족하지만 당시 영국령 홍콩과 광동, 북경, 하얼빈, 상하이 등 서양인들이 왕래가 심한 중국 항만도시에서 기록된 방대한 의료자료들을 비교하는 정도에서 비교적 낮은 수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자료들은 중국 내 영국, 프랑스, 기타 유럽 식민지의 한정된 관리들과 비중국계 외국인들에 의해 주로 운용되는 서양인들이 운영하던 세관에 의해 수집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중국의 항구 도시에서 나온 정확한 자료들은 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낮은 사망률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홍콩과 광동의 영국 당국은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률을 0.25%0.32%로 보고했으나 인플루엔자가 훨씬 더 파괴적이었던 인도 캘커타나 봄베이 같은 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의 사망률보다 훨씬 낮다는 것은 신빙성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지금의 지리형태에서 인도아대륙의 인도와 신중국대륙의 중국이 가깝게 인접해있다는 얼마든지 서로 상통할 수 있는 근접생활권이라고 할 때 적어도 인도 사망자 수치만큼 피해가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한정된 정보에 의한 수치를 보면 19182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상하이시에서도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는 266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중국 도시에서 기록된 방대한 자료에서 추론한다면, 1918년 중국 전체에서 독감으로 인한 제안된 사망률은 세계 평균(3~5%)보다 훨씬 낮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대신 중국 항만도시 홍콩의 사망률이 0.25%, 광동이 0.32%로 나타내고 있다.

 

인도(India)는 당시 인구 25,178만명에서 약 1,217만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인구의 약 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그러나 위 스페인독감 사망표는 인도인구를 3억569만명으로 기록하여 위 현재 글로벌통계 숫자보다 약 5,391만명이 더 많이 산정되어 있다.

인도 영국자치구(India's British-ruled districts)에서만 사망자 수가 1,388만 명이었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는 1차 세계대전의 모든 사상자보다 많은 1,700만에서 1,800만 명의 인도인이 사망했다고도 한다.

한동안 스페인 독감은 인도 내에서 ‘뭄바이(Mumbai) 폐렴’이라고 불렸다.

소설 '봄베이 열병(The Bombay Fever)'의 저자인 시딘 비두쿠트(Sidin Vidukut)는 1918년 6월에 들어온 스페인독감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과 민간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인도인들이 사망했다고 썼다.

시사인자료를 참고하면 힌두교는 상대방의 카스트를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 최대한 개인 간 접촉을 기피하는 종교다.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인도문화라고 한다.

그리고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는 대신 밥 먹기 전과 후의 손 씻기는 인도에서 상식에 속하고 아무리 게을러도 하루 7번은 손을 씻는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에도 사망률이 낮아만 했다.

그렇지만 결국 인도는 전체인구의 6%를 잃었다 하고 이것은 전체인구를 2억5천으로보면 1500만명, 3억569만명으로 보면 1800만명이다.

상대적으로 영양이 부족하고, 비위생적이고 통풍이 잘 되지 않는 주거지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 크며 아픈 사람들을 간호하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이 죽었다고 알려진다.

자료에 따르면 1918년 5월말부터 인도에 들어간 전염병은 19187월 초까지 매일 230명이 이 병으로 사망했고 이는 6월 말보다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도 타임스는 "주요 증상은 높은 열과 등 통증이며 3일간 지속된다"고 보도한 것은 미국이 설명한 "3일 열병"과 일치하며 "붐바이(良港:Mumbai,Bombay)의 거의 모든 집에는 거주자들이 높은 열로 쓰러져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러시아1918년 인구가 9천만이었다.

여기서도 일단 미국을 동일선상에 넣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에 사망자 수는 45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이 수치를 제시한 역학자들은 이를 "암흑의 사격(shot in the dark)"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인용한 의미가 어두워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쏘는 것이기에 정확성에 대한 확신이 거의 없다는 것으로써 추측이나 추정에만 국한 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란 예상이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통계가 만약 겹칠 위험이 있다면 통계수치를 나타내는데 학자들이 부담이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는 러시아전체인구 1억8,100만명으로 수치되고 사망자가 45만명이며 사망률은 5(per1,000)이며 재통계수치는 0.24%이다.

인구만 하더라도 글로벌통계수치와 차이가 배(9,100만명)가 차이가나며 러시아에 대한 당시 사망자수를 정확하게 돌출해 낼 수 없었다는 역사상황을 우리가 짐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1917년은 러시아사회주의혁명이 두 차례 발생한 해이다.

191738일에 발생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세력은 수도인 페트로그라드(Saint Petersburg)를 장악하고,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집권하면서 결국 로마노프 왕조(House of Romanov:1613-1917)가 세운 러시아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Aleksandrovich Nikolai II,1868-1918,재위:1894-1918)는 폐위되었으며, 러시아 제국은 쌍방 1,300만명의 희생자를 만들며 내전을 통해 1920년 끝내 멸망했다.

그러나 또 다른 자료에는 러시아인구가 약 2,100명이 늘어난 상태의 인구(11,250)로 산정하고이것의 약 0.4%를 잃었다고 하여 이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인플루엔자 관련 사망률을 보였다는 것으로 말해진다.

또 다른 연구자료에서는 러시아가 내전의 와중에서 일상 생활의 기반 시설들이 붕괴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수치는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연구자는 러시아의 사망자 수가 2%, 270만 명에 가깝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미국에 비해서는 상당히 높은 수치이다.

 

다음은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설정을 하고 있는 일본이다.

글로벌통계자료에는 당시 일본의 인구는 5,596만명으로 수치되고 2,300만 명(41%)이 감염피해를 입었으며, 최소 39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는데 이는 인구의 0.69% 라 하고 있.

일본에서는 19197월까지 257,363명의 사망자가 인플루엔자에 기인하여 추정 사망률을 0.4%, 데이터가 있는 거의 모든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훨씬 낮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를 보면 전체인구 5,503만명의 사망자가 38만8천명이고 사망률은 0.67에서 0.7%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대유행이 발생했을 때 자국 섬으로의 해상여행을 심각하게 제한했던 결과라고 말한다.

 

미국은 어떤가.

미국은 인구 1320만명에서는 약 28%가 감염되었으니 2,889만명이고 50~675000명이 사망하여 사망률이 인구 0.48~0.64% 또는 0.65 %라고 하고 있으며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서도 동일한 수치가 표시된다.

이 수치는 일본수치와 흡사하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Native American tribes)들은 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고 알려지며 포코너스 지역(Four Corners area)에서는 미국 원주민들 사이에서 등록된 사망자가 3,293명이었고 알래스카에서 이누이트(Inuit)와 알래스카 원주민(Alaskan Native)마을 전체가 죽었다고 알려지고 캐나다(Canada)에서는 5만 명이 죽었다고 기록된 것이다.

 

영국인구는 1918년 당시 3,828만명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절정을 이루면서 일련의 물결 속에서 영국을 강타했다.

전쟁이 끝나자 북부 프랑스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독감은 기차역에서 도시의 중심부로, 그리고 교외에서 시골로 퍼졌다.

영국인구의 4분의 1이 영향을 받았다 했으니 957만명이고 228000명이 사망했는데 인구의 0.59%이다.

반면 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는 전체인구 3,402만명의 사망자 20만명 사망률은 0.49%~0.58%로 나타난다. 인구가 약 400만명 차이가 난다.

 

프랑스1918년 인구가 3,285만명이다.

4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인구의 1.2% 로 상당히 높은 수치이다.

프랑스에서는 역학 데이터가 불완전하지만 125000~25만 명의 민간인과 3만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되어 있다.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는 전체인구 3,283만명에서 사망자가 24만명 사망률은 0.39%~0.73%까지 넓어진다.

프랑스가 미국사망률보다 많은 수치라 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프랑스 서부 항구(western harbours of France)에 상륙한 미군과 인도차이나 군인(Indochina's troops),그리고 프랑스 전선후방 공장에 고용된 중국인 노동자(Chinese workers hired in the French factories)들과 함께 미국에서 온 것으로 알려지고 당시 프랑스 서부전선의 끔찍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은 감염피해를 더욱 확산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1차세계대전 중 유럽대륙 프랑스에는 전쟁물자공장에 일하는 중국노동자가 상당수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은 프랑스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다는 가정을 세울 수가 있다.

왜냐하면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 상류를 중심으로 특히 많은 중국인들이 존재했다는 자료가 존재하고 프랑스 역시 루이지애나(Louisiana)를 중심으로 존재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Germany)은 글로벌인구통계수치에 1918년 당시 인구가 6,456만명으로 나타나며 러시아만큼 이상하게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자료가 명확하지 않다는 국가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가 없다.

물론 전쟁당사국이니 여러가지 문제가 있고 또한 패전국으로 처리되면서 모든 자료들이 숨겨지거나 폐기되는 형태를 맞이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1918/19의 바이러스에 의한 피해는 약 320,000(0.49%)명에서 350,000(0.54%)명의 사망이 발생했을 것이란 추측이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통계가 정확한 수치가 아니며 1918년 여름과 가을의 이 병이 맹렬하게 유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제국의 붕괴와 비교했을 때, 그 전염병은 대중이나 군사 및 민간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 위에 제시된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 의거하면 전체인구가 5,845만명으로 나타나고 사망자는 22만명이며 또한 프러시아(Prussia)의 사망자 수가 23.6만명으로 나타나 독일 사망률은 0.37~0.38%이고 프러시아는 0.45%로 더 높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외 유럽전체사망자가 230만명으로 나타나고 사망률은 0.48%로 수치된다.

 

특이하게 중동 이란(Iran)의 인구가 글로벌인구통계자료에는 19181,129만명이다.

그런데 당시 다른 나라에 비해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추정치에 따르면 902,400명에서 2,431,000명 사이라 하였다.

전체 인구(1,129)8%에서 22%가 사망했다는 것인데 인도(6%)보다도 더 사망률이 높다.

 

멕시코(Mexico)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 전체인구 1,455만명에 30만명이 사망했고 사망률은 2.3%~2.06%로 나타난다.

 

브라질1918년 인구가 2,627만명으로써 로드리게스 알베스(Rodrigues Alves,1848-1919,재위:1902-1906)대통령을 포함해 30만 명이 사망했다고 나타난다.

그러나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는 사망자가 18만명으로 사망률은 0.6~0.68%로 수치된다.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의 총 사망자는 76만명~96만명으로 사망률은 0.84~1%로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가 표식하고 있다.

 

아프리카(Africa)전체는 사망자 237만명의 사망률은 1.82%이다.

 

오세아니아(Oceania)전체사망자는 8.5만명이고 사망률은 명확하지 않는 대신 서사모아는 전체인구 3.6만명에서 23.6% 사망률의 ,8500명이 사망했다.

 

전 세계에서 오직 한 지역만이 발병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바로 브라질의 아마존 강 삼각주에 위치한 마라죠(Marajo)라는 고립된 섬이이고 또 한 곳은 나폴레옹의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인데 감염상황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이 외 상당한 수의 나라가 피해를 보았지만 엄청난 사망자 수는 최대 50%의 감염률과 사이토킨 폭풍(cytokine storms)으로 의심되는 증상에서 60세 이상의 노인보다 젊은 사람들을 다수 사망케 했다는 사실을 서두에서 언급했다.

1918년 스페인독감의 증상은 특이하여 처음에는 뎅기(dengue), 콜레라(cholera), 장티푸스(typhoid)로 잘못 진단되었다 한다.

한 관찰자는 "가장 두드러진 합병증 중 하나는 점막, 특히 코, , 장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말하고 귀에서 피가 나고 피부에서 꽃잎 출혈도 발생했다"고 말했다.

사망자의 대다수는 인플루엔자와 관련된 흔한 2차 감염인 세균성 폐렴(bacterial pneumonia)에 의한 것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또한 폐에 대규모 출혈과 부종을 일으켜 사람들을 사망케 했다.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것은 1914년 뉴질랜드에 의해 점령되었던 이전의 독일령 사모아인 서부 사모아였다. 인구의 90%가 감염되었고; 성인 남성의 30%, 성인 여성의 22%, 어린이 10%가 사망했다고 나타난다.

심지어 사망률이 낮은 지역에서도 많은 성인들이 불구가 되어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방해를 받았고 일부 지역사회는 모든 상점을 폐쇄하거나 고객들에게 외부 주문을 남기게 하였다.

의료 종사자들은 아픈 사람들을 돌볼 수가 없었고, 목수들은 그들 역시 독감으로 인해죽은 사람들을 매장할 수 없었으며 굴착기(steam shovel)와 관(coffins)이 없이 많은 곳에 그냥 묻힌 시체(bodies buried)는 여기저기 공동묘지(Mass graves)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19188월부터 치명적인 제2의 물결이 강타한 후 최고조에 이른 후 갑자기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소되었다는 시기가 11월 11일이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는 1918년 1016일에 4,597명이 사망했지만 1차세계대전이 끝나는 1111일에 이르러서는 인플루엔자가 거의 도시로부터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 질병의 치사률이 급격히 감소했다는 한 가지 설명은 희생자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발병한 폐렴의 예방과 치료에 대해 의사들이 더 효과적으로 대응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입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론은 1918년 바이러스가 치명적이지 않은 변종으로 매우 빠르게 변이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 더 위험한 변종의 숙주가 소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병원 바이러스가 덜 치명적이 되는 경향을 말하고 있다.

    

5. 총독부자료가 말하는 조선 무오년독감(戊午年 毒感)

 

1918년 당시 조선인의 인구수가 이상하게도 글로벌인구통계에 집계되지 않고 있다.

1917년 인구가 1,699만명이고 1918년에 데이타가 없고 1919년 인구가 1,741만명이다.

양 두해에 42만명의 차이가 있고 이를 2로 나누면 21만명이 되고 다시 1917년 인구수에 보태면 1,720만명으로 산출되는데 이를 1918년 인구로 보면 될까 한다.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의 경우 인구 346,619명 중 46%159,916명이 감염되었고 1,297, 인구의 0.37%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인구는 5,596만명으로 나타나고 2,300만 명(41%)이 감염피해를 입었으며, 최소 39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되는데 이는 인구의 0.69%이다.

또 다른 자료 에는 5,500만 중 2,500(45%)이 감염되어 48만명, 전체인구의 0.87%가 사망했다고 하고 있다.

1918-1920"스페인"인플루엔자 범세계적 사망(Global Mortality of the 19181920 Spanish Influenza Pandemic)에 보면 5,503만명의 38.8만명으로 published death rate(per 1,000)6.7 0.67%가 된다.

그러나 다시 재계산된(reclculated) 사망률은 7(per 1,000) 0.7%이다.

전 세계적으로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감염률은 평균적으로 40%를 거의가 넘는다.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에서는 조선인이 128만명이 감염되고 그 중 4(감염자 중 3.12%, 전체 인구의 0.2%)이 사망했다는 통계를 말하는데 이것은 세계 최소 감염에 최소 사망률이 된다.

128만명의 감염률은 당시인구 1,720만명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면 7.4% 밖에 되지 않되니 평균 40%에 훨씬 못미친다.

세계평균감염율 40%가 넘으니 아예 감염이 적게 된 것이다.

사망률도 세계평균 2%~5%이니 사망률도 따져보면 0.2%가 되어 매우 작은 수치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인용자료에 의하면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당시 조선인 1,678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2,113(44%)이 감염되어 139,128, 전체인구의 0.83%가 사망이 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수치는 세계통계수치와 엇 비슷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스페인독감을 1918년이 무오년이니 무오년독감이라 불렀다.

조선은 당시 왜 글로벌명칭을 따르지 않았을까?

만약 조선에서 발병된 것이 맞다면 굳이 스페인독감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당시 신문기사에 나오는 상황을 보면 충청남도에서 특히 기승을 부려 서산시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인 8만명이 독감에 걸렸고 예산군과 홍성군에서 수천명이 사망했다 하였으며 경성부에서는 268명이 죽었고, 그중 조선인은 119명이었다 하는데 당시 경성부에 외국인들이 반 이상이 되는 것으로 나머지 149명이 오히려 외국인감염자가 되므로 그 비율이 경성부전체의 56%를 차지 한다.

경성에는 외국인들이 조선인들에 비해 더 많이 거주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신동아 20074월호에 보면 세계적으로 고병원이 창궐하기 시작한 2차 바이러스 기간인 8~10월동안 조선(朝鮮)에서는 9월에 이미 서울에 환자가 나타났다 하고 10월에 전국적인 유행이 절정에 달해 공사립학교와 사숙(私塾)은 휴학, 각 관청과 단체에서는 시무를 보지 못했다 하였으며 11월 들어서는 정점을 말하고 있는데 개성군(開城郡)의 경우 다른 때의 7배의 사망률을 보였고, 충남 서산(瑞山)지역은 8만 명의 인구 중 64000명 전체인구 80%가 이 질병에 걸렸으며 매일 100명 이상 150명씩 사망하여 사망자를 처리할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고 일반 농가에서는 사람이 없어 추수를 못한 논이 절반 이상이라고 총독부 연감을 인용하고 있다.

 

(1)191811-인천에서 하루에만 2천명 사망[每日申報] 

"인천(仁川)도 사망자(死亡者)가 매일 이천명(每日二十名)" 19181103

"전세계(全世界)를 습()한 독감(毒感), 각 군 도처에 없는 곳이 없다" 19181103

"사망자(死亡者)가 반일(半日)에 십칠명(十七名), 인천의 독감은 더더욱 창궐" 19181104

"유행독감(流行毒感), 모조리 멍석말이" 19181102

 

위 매일신보에 보듯이 엄청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의료붕괴현상이 당시에 발생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보도내용을 보면 "유행 감기로 인하야 창궐되는 악성 감기는 아직도 감퇴되는 모양이 없어서 인천 같은 데는 요사이 날마다 20명의 사망자가 생기어 날마다 발인 없는 날이 없고, 각 절에는 불시에 대번망(大繁忙)을 이루는데 이 감기에 대한 예방칙은 전혀 없고 다만 감기에 걸리지 않기만 바라는 바이다.(매일신보, 1918113)"라고 하고 있다.

"감기가 의주, 신의주, 용암포, 철산, 정주, 박천, 희천, 진남포, 성천군, 중화군, 강동군, 개천군, 통강군, 강서군 등 평안도(平安道)각 군에 전염되어 많은 사망자를 냈다. 포병공장(砲兵工塲)에서도 7000명이 결근하였고, 철도원에서도 7500명이 결근하여 운송에 차질이 생겼다. 공주에서도 11800명이 감기에 감염됐고, 목포의 경우는 총인구 4531명 중 580(12.8%)의 환자가 발생했으며, 원산에서는 1만 명이 걸렸다.”(매일신보, 1918119일자)하였다.

 

물론 이러한 자료가 말하는 곳은 지금의 한반도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는 1016일에 4,597명이 사망했지만 1차세계대전이 끝나는 1111일에 이르러서는 인플루엔자가 거의 도시로부터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놀랍게도 인플루엔자의 소멸 징후의 기사들이 조선(朝鮮)에서의 보도가 봇물처럼 넘쳐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2)191811-서울, 대구 등 대도시는 줄어들고 지역은 확산[每日申報] 

"대구(大邱)의 독감(毒感)은 차차 종식되는 듯" 19181106

"각지독감(各地毒感): 평안도(平安道) () ()에 심하지 않은 곳이 없다" 19181109

"각지독감(各地毒感): 철도종업원(鐵道從業員)칠천명이 결근" 19181109

"각지독감(各地毒感): 공주(公州) 목포(木浦)에 창궐(猖獗)" 19181109

"각지독감(各地毒感): 원산元山에는 일만 명 학생에게는 적다" 19181109

"김천(金泉)에도 독감, 우편국원은 전멸" 19181106

"각지(各地)의 독감(毒感), 날이 추워질수록 점점 심해간다" 19181107

"독감(毒感)이 점차종식(漸次終熄), 그러나 지방은 지금이 한창이다" 19181108

 

(3)191811-서울, 부산은 안정세, 다른 지역은 확산 

"경성(京城)의 독감(毒感)은 적이 침식(沈熄), 죽는 자가 훨씬 줄어" 19181112

"경성(京城) 독감(毒感)이 아주 종식(終熄)" 19181118

"병세 또 악화 ; 사망률은 더욱 상승, 독감유행"부산일보[釜山日報] 19181112

"아직 휴교, 독감과 관련하여"부산일보[釜山日報] 19181112

"출정군인(出征軍人)이 독감(毒感)에 고생(苦生), 거의 다 앓는다고" 19181113

"독감(毒感)의 유행(流行)과 우편국(郵便局)의 고난(困難), 전멸된 곳이 많다" 19181114

"독감(毒感)으로 인()하여 수확(收穫)이 극난(極難), 손해가 비상하다"19181116

"삼수(三水)의 독감(毒感), 군수가 죽었다" 19181119

"휴업중의 각교 수업개시, 독감환자 감퇴"부산일보[釜山日報] 19181119

"독감(毒感)의 종두법(種痘法), 한 번 주사로 면한다, 미국의 신발명" 19181120

"강진(康津)의 독감 사람이 많이 죽었다" 19181122

"인천(仁川)에는 반수(半數), 인천의 독감조사 무서운 그 수효" 19181125

"독감(毒感)의 참화(慘禍)를 받은 진주(晋州), 사망자가 천여명" 19181126

"전독제(前獨帝)도 윤감(輪感)으로 고생하는 중이다" 19181129

 

그러나 위 당시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1918113일과 1918119일자까지 독감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사를 볼 수 있지만 놀랍게도 필라델피아에서 소멸되기 시작한 19081111일 경에 조선에서도 116일부터 대구독감이 차차 종식되는 듯 하다 하였으며 118일 독감이 점차종식되어 가지만 지방은 한창이라 하였고 1112일 부터 경성과 부산의 독감이 침식, 종식, 안정되가며 1118일엔 아주종식되었다는 기사를 발견할 수가 있다.

침식(沈熄)불이 밑으로 잠기며 꺼진다는 표현이고 종식(終熄)은 불이 꺼져 끝났다는 이야기로 한때 매우 성하던 일이나 현상이 끝나 멎거나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즉 유행독감을 불에 비유한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스페인독감이 1111일에 이르러서는 인플루엔자가 거의 도시로부터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인 116일부터 그런 징후가 나타난다하였고 1118일에 아주 종식되었다고 기사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징후는 같은 대륙에서 벌어진 상황이라고 유추할 수밖에 다르게 설명할 수가 없다.

또 다른 자료를 보면 당시 일제 치하에 있었던 한반도에 스페인독감이 상륙한 것은 19189,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와서 한반도를 덮쳤다고 말하고 있다.

 

6. 스페인 독감과 세계삼한역사

 

스페인 독감은 실제로 유럽대륙 스페인에서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전자에 언급하였듯이 1차세계대전 중에 중립국이었으며 언론사에 대한 엄격한 검열(檢閱)을 강요받지 않았으며, 따라서 스페인은 질병에 대한 초기 기사를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독감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러한 이유는 상당히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엇인가 당시 역사학자들이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실제로 유럽스페인에서 프랑스서부전선 발병지 중 하나라고 판단되는 곳에서 시작되어 옮겨갔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최초의 발병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서양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니 스페인이 최초 발병지는 아니라는 말은 정답이라 해야 맞겠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우한코로나바이러스'라 하듯이 사실상 질병 발병지를 근원으로 명칭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미국 캔자스주 포트 라일리(Fort Riley)의 펀스톤 켐프(Camp Funston)에서 발병한 것이 맞다면 "미국독감"이라고 해야 맞다.
그럼에도 왜 스페인독감이라 해야 했을까?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가 발행되었고 위에서 언급했지만 보다시피 스페인독감이라 하지 않았고 무오년독감(戊午年 毒感)이라고 한 사실에서 적어도 일제 총독부기관지라면 미국의 정보를 따랐을 것이고 공식적인 글로벌명칭 서반아독감(西班牙毒感)정도라고는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무오년독감 또는 그냥 독감(毒感)이라고 가자들이 명칭하였다.

 

이것은 조선입장에서 질병 발생 근원지를 바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굳이 스페인독감이라 하여 구차한 설명이 그것에는 필요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다시 재론하면 서두에 언급한 내용이지만 스페인은 1차세계대전 중에 중립국이었으며 언론사에 대한 엄격한 검열(檢閱)을 강요받지 않았고, 따라서 스페인은 질병에 대한 초기 기사를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다고 했다.

스페인은 미서전쟁(美西戰爭:1898)에서 미국에게 패전하여 쿠바를 포기하고 필리핀, ,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할양하고, 미국은 스페인에 2,000만 달러를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사실상 이러한 사건 설명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거의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스페인은 이상하게도 역사기저에서 그 때부터 날개쭉지를 잃어버린 평범한 국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왜 당시 자본만을 앞세운 세력이었던 미국에게 이런 불평등한 조치를 당했어야 하는가 하는 말이다.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전쟁은 황색신문들의 충성심발로에 의한 찌라시기사들이 전부인데 이것을 어떻게 정상적인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전쟁이 발발되지도 않았고 스페인이 미국에게 패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스페인이란 역사 측면에서 미국은 최후 동일선상에 놓고 보아야하는데 역사갈취꾼이다.

당시 이 독감의 감염자 한사람인 알폰소 13(Alfonso XIII,1886-1941,재위:1886-1931)의 가문은 부르봉왕가(House of Bourbon)의 사람이다.

이 부르봉왕가는 프랑스 루이시대를 끝으로 권한이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1801-1837)로 넘어가면서 당시 유럽왕가들을 움직였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에 끼이지도 못하고 2류 왕가로 전락하고 만다.

때문에 유럽왕가쟁탈전에서 이미 밀려난 것이다.

하여 중립국이라고 한 것인데 그 결과 사람들은 황색신문기사가 스페인독감이라 하니 이 병이 스페인에만 국한된다고 잘못알았고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으로 고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발병의 발원지가 스페인이 아니라는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저널리스트 헨리 데이비스(Henry Davies)의 책 "The Spanish Flut & Co., 2000"에 보면 1918년 봄 로이터 런던 지사(Reuters' London office)의스페인의 한 통신사(news service)"마드리드(Madrid)에서는 이상한 형태의 전염성 질병이 나타났다"고 알렸고 전염병은 약한 것으로 사망자는 보고되지 않았다."고 전언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보고가 있은지 2주만에,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독감에 감염되었다고 한다.

1918년 봄이라면 3, 4월이라 할 수 있는데 처음 캔자스주 하스켈 카운티(Haskell County)에서 질병이 처음 발생한 날짜와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이미 19181월부터 미국 캔자스주 에서 이 질병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이 병이 어디에서 연결되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고 여러가지 추론만 존재한다.

 

 

 

위 도표에도 나타나지만 1918년 스페인독감의 발원 기원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세 가지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1)영국의 훈련기지인 올더숏(aldershot)과 프랑스의 북서부항구 에타플스(Etaples)에서 발생되었다고 하는 주장으로 1차세계대전의 참호에서 병 근원이 처음 발견되었다는 주장.
2)중국 산서성(山西省:Shanxi Province)에서 1917년에 발생한 호흡기질환이 스페인독감의 발병원인이라고 하는 주장.
3)지금까지 잘 알려진 미국 캔자스주 켐프 펀스톤(Camp Funston)에서 1918년 3월 발생하기 직전 병사 48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위 세가지의 발병기원을 보면 전부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지만 사실상 켐프펀스톤의 발병원인이 현재까지 최초 발병지로 인정받고 있는 경우이다.

1)번 주장은 바로 유럽서부전선인 영국과 프랑스 참호에서 발병이 되어 미국으로 들어갔다는 설이다.

3)번 주장은 이미 전자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나머지 2)번 주장은 2014년 역사학자 마크 험프리스(Mark Humphries)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통한 주장인데 이사람은 동양인을 혐오하는 측면한 주장인지 알 수 없으나 중국인이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원초적으로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으로 몰고갔다고 한 사실이다.

당시 1차세계대전 영국과 프랑스전선(British and French lines)후방에서 일하기 위해 96,000 명의 중국인 노동자를 동원한 것이 대유행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현 동아시아대륙 신중국 산서성(山西省)을 발원지로 지목한 것이다.

 

현재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의 주도 세인트 존스(St. John's)에 뉴펀들랜드 메모리얼 대학(Memorial University of Newfoundland)의 연구자 험프리스(Humphries)는 이러한 새로 발견된 기록에 기초했다.

그는 최초발병되기 몇 달 전인 191711월에 중국북부를 강타한 호흡기 질환이 1년 후 중국 보건 당국자들에 의해 스페인독감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된다는 기록적인 증거를 발견했다는 근거이다.

2016년 중국 의학협회 저널에 게재된 이 보고서는 1918년 스페인독감바이러스가 중국, 인도차이나군인과 노동자들을 통해 유럽으로 수입되었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져진다.

그냥 설인 것이다.

이 바이러스는 1918년 유행병이 발생하기 몇 달, 어쩌면 몇 년 전부터 유럽군대에서 유행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말도 있다.

유럽대륙이 전쟁터이고 당시 서부 전선의 참호는 비좁고 더럽고 축축한 환경에서 생활하던 병사들이 병이 났고 이것은 영양실조로 인한 면역 체계가 약해진 직접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최초발병지 지도를 잠시 보더라도 1918년을 감안할 때 대륙간 이동운송도구인 여객선은 몰라도 여객기상황은 이때쯤 완전히 초보단계였다.

즉 비행을 하여 승객들을 이동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객선은 19세기초부터 운행되었다고 서양자료들은 거품을 물고 있지만 대륙횡단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웠던 시대 또한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대륙간 이동으로 인한 전염은 극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글쓴이의 주장은 절대로 대륙간 이동은 한계가 있어 바이러스 전염경로라고 할 수 없다 할 때 과연 서양자료들이 일률적으로 주장하는 위 그림과 같은 대륙간 이동설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논점은 나중 기회 있을 때 서술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서양에서도 이러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제하는 것으로 중국인 근로자에 의한 발병고리에 연관되는 이야기가 나타난 거론을 하게 하는데 1917년과 1918년 캐나다 전역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할리팩스(Halipax)로 수송되면서 스페인독감과 연관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결국 중국인노동자들이 처음부터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대표적으로 마크 험프리스(Mark Humphries)의 저서 "마지막 전염병(The Last Plagu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13]에 따르면, 그 노동자들은 대부분 중국 시골의 농장 일꾼들이라했다.

They spent six days in sealed train containers as they were transported across the country before continuing to France. There, they were required to dig trenches, unload trains, lay tracks, build roads and repair damaged tanks. In all, over 90,000 workers were mobilized to the Western Front.[All About History magazine] 그들은 프랑스로 계속 가기 전에 전국(the country)을 가로질러 운송되는 밀봉된 열차 컨테이너에서 6일을 보냈다고 하였다.

전국을 가로지르다고 표현하였는데 캐나다를 관통했다는 말인지는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다른자료에서 1917년에 대부분 시골농장의 북부중국인(?)들이 영국과 프랑스로 보내졌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산서성(山西省)이라고 하는 곳은 그렇듯 북부가 아니다.

신중국 산서성은 한반도 위도위치와 같은 위치에 있다.

문제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과연 당시 프랑스의 위치문제도 그렇지만 산서성의 위치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이다.

어쨌던 모든 공식자료에 산서성(山西省)에서 캐나다 밴쿠버로 이동한 사실은 생략한체 중국인노동자들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밴쿠버(Vancouver)로 끌려(?)갔고, 기차편으로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할리팩스(Halipax)로 가서 영국과 프랑스를 향해 대서양을 건너 전선 후방에서 일하고 있던 군인노동자들과 대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 중국인노동자들의 여행은 매우 비밀스럽게 지켜졌고 그들은 기차에서 나가는 자체를 막았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밀봉된 열차 컨테이너'라 하고 있다.

험프리스는 1917년부터 유럽으로 이동하던 25,000 명의 중국 노동근로자 중 3천명 이상이 의료 검역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독감같은 증상을 보였다는 의료 기록을 발견했다고 하였다.

몇명 중국인과 경비병들은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전염병처럼 독감을 앓았으며 프랑스에 도착한 후 많은 사람들이 중국병원으로 갔고 수백 명의 중국인들이 독감과 비슷한 호흡기 질환을 앓아 죽었다고 했다.

위에서 프랑스(?)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계속 갔다 하였는데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냥 전국(캐나다 혹은 미국)을 가로질러 운송되는 밀봉된 열차 컨테이너에서 6일을 보냈다고 하였는데 끌려간 그곳에서, 참호를 파내고, 기차선로를 깔고, 도로를 건설하고, 손상된 탱크를 수리하도록 요구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이 바로 프랑스가 위치한 서부전선에 동원된 노동인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험프리스(Humphries)1918년에 25,000명의 중국인 노동자를 한 명씩 헤아려 3천 명 정도가 의료 검역에서 걸렸고 도중에서 내려졌다고 한다.

당시 이들의 병은 인종적 고정관념 때문에 중국 게으름(Chinese laziness)’ 탓이라 하였고 캐나다 의사들도 근로자들의 증상을 유행병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였으며 중국인 노동자들이 본래 습성대로 생활하던 관습을 캐나다인들이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생활을 같이 한 상태에서 인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중국노동자는 벌써부터 캐나다 밴쿠버부근에 정착하던 거주민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어쨌던 중국 노동자들이 1918년 초에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고, 수백 명이 곧 사망했다고 하였으며 험프리스는 이것이 스페인독감의 발병시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서부항구(western harbours of France)에 상륙한 미군과 인도차이나 군인(Indochina's troops), 그리고 프랑스공장에 고용된 중국인 노동자(Chinese workers hired in the French factories)들과 함께 캐나다가 아닌 미국에서 온 것이라 하여 이 중국인노동자들은 이미 미국에서 일부가 감염이 되어 프랑스서부전선으로 들어간 것이라고도 풀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대륙 내에 미국 동부 도시와 떨어진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주요 논점은 즉 발병의 원인을 중국인노동자로 보고 인도차이나군인이라는 측면에서도 여러가지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특히 서양자료들이 제시하는 여러곳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는 중국인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외국인들은 이들 중국인 노동자들을 가리켜 쿨리(coolie)라 불렀다.

즉 '힘든 일을 하는(苦力) 사람들'이란 뜻이다.

한편으론 미국이나 중앙아메리카에서 백인들이 중국이민자를 칭크(Chink)라 했다.

칭크는 중국의 예절방식 칭칭(Chinese courtesy ching-ching)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청조를 청(Ch'ing)이라는데서 변형이라는 설이 있는데 칭크(Chink)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대략 1880년경이며 형용사인 칭키(chinky)는 1878년에 처음으로 인쇄되어 알려졌다.

중국노동자 쿨리(coolie)들을 미국인들이 이민을 제한하기위해 캘리포니아주가 1862년에 반쿨리법(Anti-Coolie Act of 1862)을 제정할 정도로 미국인들이 불안해 하면서 사업을 하는 중국인이민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게 만들면서 1882년에 제정된 중국인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이 발효되기전까지 노동력을 착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863년에 캘리포니아주의 세크라멘토(Sacramento)에서 시작된 북아메리카대륙횡단철도 건설과 1881년 캐나다 서부 태평양철도 가설노동자들 대다수가 중국인노동자가 아니면 아일랜드인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본 블로그 글 "인도대추(印度棗:Zizyphus mauritiana)가 가르쳐 주는 인도(印度)
http://blog.daum.net/han0114/17049986"에서 말하길 인도대추는 자마이카(Jamaica)에서는 쿠리자두(coolie plum, crabapple)라고 하였는데 이 쿠리는 19~20세기 초 미국 즉 북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온(?) 중국(中國)과 인도(印度)의 노동자를 일컫는 용어라 하며 힌두어 큘리(quli)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중국인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1881년 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1882년 중국인추방법이 시행되면서 부터 미국에서 쫓겨 나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조선의 스페인독감이 러시아로부터 기차를 통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라고 밝혀진 사실이 있는데도 그렇게 판단할까?

만약 마크 험프리스(Mark Humphries)의 주장이 맞다면 본래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던 코리아 중국인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위 우측그림을 보면 중국 공연자들은 죽마장대발 놀이로 프랑스 에타플스(Etaples)의 야외 극장에서 노동군단원들과 영국군을 위문하고 있다. 두 관객은 사이에 작은 철조망으로 분리되어 있으나

그렇듯 중국인들이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영국군과 잘 협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본래 죽마장대놀이는 전통적 고려(Corea)문화이기 때문에 중국공연자는 고려인(COREAN)이며 고려노동자와 영국군인을 위문하기 위한 장면 임을 추측할 수가 있다.

좌측그림은 리빅스 육류추출회사(Liebig's Extract of Meat Company)의 광고판에 나타난 그림인데 COREA 의 영역에서 독창적 문화요소이며 특징적인 것에서 다룬 것인데 이 그림에보면 코리안 여인들이 죽마로 만든 장대발을 이용하여 허들 장애물넘기(jumping hurdles)장면이다.

이것을 스틸트라 하는데 고고학적 유적과 문헌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이전까지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에서 스틸트워크(stiltwalking)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벨기에에서는 1411년부터 나무르의 스틸트 워커stilt walkers들이 스틸트 위에서 전투연습을 해왔다
습지나 침수지역의 주민들은 때때로 늪에서 일하거나 불어난 강을 건너는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스틸트를 사용하고 프랑스 남부 랑드(Landes)지역의 양치기들은 시야를 넓히기 위해 스틸트에 서서 양떼를 관찰하였고 그곳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 활동에서 습기찬 땅을 횡단하는데 종종 사용하였다.

근대에 들어 이를 서커스(circus)에 넣어 한 가지 곡예로 사용했다.

즉 이와같이 유럽인들에게 오래전부터 전통놀이라고 알려진 스틸트로 코리안들이 즐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영국인들도 친밀했을 것이다.

또한 코리안이 중국이라 하는 것은 본 블로그 글 "한국인(코리안)이란? http://blog.daum.net/han0114/17050849"에서 브리티시인류학자였던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1865-1924)가 코리안(Corean)들은 중국인이고, 따라서 체격과 외모가 똑같다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인용한 것이다.

 

7. 100년만에 찾아온 불청객

 

지금 세계인전체를 페닉상태에 빠지게 하고 사그라들 기색이 없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ronavirus Disease-19, COVID-19)는 백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계속이어질 암울한 전망을 낳고 있다.

 

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코로나바이러스(Coronavirus)1937년 닭에서 최초로 발견되었고, 조류뿐만 아니라 소, , 돼지, 사람 등을 감염시킬 수 있는 것으로 코로나바이러스과(Coronaviridae)에 속하는 리보핵산(RiboNucleic Acid, RNA)바이러스로 외피에 존재하는 곤봉 모양의 스파이크(Spike) 단백질로 인해 왕관 형태의 모양을 띠기 때문에 태양의 코로나(Corona)에서 바이러스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사람과 동물의 호흡기와 소화기계 감염을 주로 유발하는 것으로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를 일으키는 사스-코로나바이러스(SARS Coronavirus, SARS-CoV), 2012년 중동호흡기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MERS)를 일으키는 메르스-코로나바이러스(MERS Coronavirus, MERS-CoV), 그리고 2019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ronavirus Disease-19, COVID-19)를 일으키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SARS-CoV-2)가 있다.[카이스트신문(http://times.kaist.ac.kr)참조]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1918년 스페인독감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범유행병이다.

코로나바이러스와는 다른 종이다.

이것이 인류에게 영향을 준 것을 시대적으로 보면 1918년 스페인독감이 발생한 이후 40년 뒤 1958년에 아시아 플루( A, H2N2 )가 발생했고 10년뒤인 1968년에는 홍콩 플루(A, H3N2)가 발생했으며 그로부터 40년을 터울로 2009년에 신종플루(A/H1N1)가 발생한 사실을 열거 할 수가 있다.

 

세부적으로 잠시 집고 넘어가자면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독감은 전자의 기술한 내용과 같고 1958년에 발생한 아시아 플루(A/H2N2 )는 미국에서 7만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고 첫 번째 발병이 19572월 말에 중국에서 발견되어, 19576월에는 미국으로 퍼져 전 세계적으로 2백만명이 사망했다.

1968년 발생한 홍콩 플루(A/H3N2 )는 미국에서 34,00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는데 이 바이러스는 1968년 초에 홍콩에서 발견되어, 그해 말에 미국으로 확산되었으며 1968-6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백만여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혹은 신종 플루(A/H1N1)200953일 기준으로 멕시코 베라크루스주에서 발생하여 사망자가 150명을 돌파하면서 페닉상태에 이르렀고 이어 미국으로 넘어들어가 전세계로 퍼진 것인데 최종 종료일 2010810일 기준으로 세계적으로 160만명의 감염자와 사망자 18,036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독감사례를 코로나바이러스 상황과 비교하는 것에서 좀 이격이 있지만 어쨌던 대범유행병 독감이라는 차원에 묶어보면 100년이란 터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소제를 달아 본 것이다.

 

현재 우한폐렴 즉 신종코로나19 로 인해 세계전체가 공포스러운 분위기다.

202044일 오전6시기준 코로나19 주요국의 사망자는 이탈리아 14681, 스페인 11198, 미국 7004, 프랑스 6507, 영국 3605, 이란 3294, 중국 3322, 네덜란드 1487, 독일 1275, 벨기에 1143명을 각각 나타내고 있고 치명률은 이탈리아 12.3%, 프랑스 10.1%, 네덜란드 9.5%, 스페인·영국 9.4%, 벨기에 6.8%, 이란 6.2%, 스웨덴 5.8%, 중국 4.1%, 미국 2.6%, 한국은 1.7% 수준이다.

세계확진자 1093,394명이고 사망자가 58,740명으로서 평균치명률이 5.4%이다.

이 수치는 1918년 스페인독감의 최고 수치 5%를 넘는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주로 호흡기로 전염되고 감염되었을 경우 바이러스는 폐를 침범하며, 고열과 기침, 호흡곤란 등의 증상이 발생하고 폐렴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 끝에 심한 경우 폐포가 손상되어 호흡 부전으로 사망에 이른다고 알려지며 잠복기는 3~7일이지만 최장 14일까지 이어지기도 한다고 알려졌고 가장 무서운 것이 무증상전염사례들이라 하였다.

 

신중국 무한시(武漢) 무창구(武昌)에 화남(華南)수산시장에서 새우를 팔던 여성 웨이()모씨가 지난해 1211일 첫 발열증세를 보였고 자신의 거주지인 아파트 아래층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서도 평소와 다르게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 1216일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동시에 그녀가 사는 아파트주민 11명이 근처병원에 잇따라 입원한 것으로 발병의 시초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으로 갑자기 확산되는 추세를 차단하기 위해 중국정부는 20201231100만명의 무한시를 봉쇄하였고 이후 6000만명의 인구가 사는 호남성(후베이)까지 봉쇄조치가 되었지만 이 바이러스는 중국을 넘어 20201월 감염자가 전세계 여러 국가로 확산되자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에 대해 130'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즉 판데믹(Pandemic)이 선언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판데믹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전국민이 전염병 페닉에 빠졌던 적이 있고 신종 베타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증으로 2003년 발생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과 유사하면서도 치사률은 30% 정도로 높다하여 당시 상당히 공포스러운 사태를 맞이하였던 것으로써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인 MERS-Corona 바이러스가 그 원인 바이러스였다고 알려지는 것이다.

이것들의 유전자 염기서열이 박쥐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하다 하여 박쥐를 원인 동물로 보고 있으며 중간 매개 동물이 낙타일 수 있다는 연구가 있었다.

메르스는 2012년부터 중동지역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나타났으며 2015년까지 천 명 이상의 감염자와 4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또 다른 변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원인인 사스(SARS)보다 전염성은 떨어지나 치사률은 30~40%로 사스(9.6%)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더 치명적인 공포심을 유발하였다.

우리나라에도 2015520일 메르스 최초 감염자가 확인되었고 첫 환자가 발생한 지 68일 만에 메르스가 사실상 종식되었다.

메르스 사태로 감염된 사람은 총 186명이며, 그중 38명이 사망해 치사률은 20.4%로 기록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한중인 중국인이 120일 최초 감염자로 확진된 이후, 331일까지 모두 9,887명이 감염자로 확진되었고 31번환자로 인해 대구경북지역에 포괄적 전염이 이루어져 심리적으로 거의 패닉상태에서 있다가 점차 회복되어 지금은 안전하다고 판단되지만 사망자만도 202044일 현재 177명으로 집계된다.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疾病管理本部)의 주의를 보면 1918년 스페인독감때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사람이 밀집된 공공장소는 최대한 피하고 특히 발열이나 호흡기 증상이 있는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좋고 개인적으로는 손으로 눈이나 입 등을 만지는 것을 피하며 손을 자주 씻고 개인 위생을 철저히 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실제로 발열이나 기침 등 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마스크를 착용하고 가까운 보건소나 선별진료소의 안내를 받도록 하고 있다.

 

8. 정리

 

일부 역사가들은 스페인 독감을 "잊혀진 유행병"이라고 칭하였다.

당시 전세계인구 4분의 1, 27% 해당하는 약 5억 명의 감염자가 발생했고 사망자 수가 5,000만 명~1억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 스페인 독감에 대해 경각심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만약 현재 세계인구가 20197월 기준으로 약 77억명이라 할 때 27%라면 자그마치 20억명이나 된다.

전세계국가수가 253개이니 평균적으로 한 국가당 약 8백만명이 감염된다는 소리다.

예를들어 한국인구가 5,178만명에서 27%1400만명이 감염자가 발생한다는 이야기며 내 주위에서 4명 중 한명이 감염된다는 말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이고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움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 그러한 감염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특히 사이토킨 폭풍(cytokine storms)에 의한 젊은이들의 공포심은 또 어땠을까?

아이러니한 이야기자만 오히려 당시 서양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전시검열(wartime censorship)에 의한 보도통제와 같은 시스템에 의해 공포심을 덜 유발시켰다는 점에서는 일부 다행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1918년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이러한 깜깜이는 계속되었다는 것은 솔직히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사라지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일제가 식민지통제한 한반도 조선상황을 보면 위에서도 알렸지만 총독부기관지라 일컫던 매일신보가 독감에 대해 세세하게 보도를 했다는 사실은 서양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매우 배치된다는 느낌을 우선 받는다.

세상사람들 뿐만아니라 한반도 주민역시 이 스페인독감이 어떤 병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고 설령알았다고 하여도 치료방법이 전무했다는 사실은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이지만 실제로 가장 감염이 많았고 사망자수가 많았던 인도와 이란의 경우에서 보면

인도(India)는 당시 인구 25,178만명에서 약 1,217만명이 사망했거나 다른 자료에는 최고 1,800만명이라 하였는데 이는 인구의 약 5%에 해당하는 수치라 하였고 이란은 인구 19181,129만명에서 사망자가 최소 902,400명에서 최고 2,431,000명이라 사망률이 21%에 달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보편적으로 미국 경우를 보면 감염률이 28%이다.

이 비율로 대입하면 인도의 경우 25천만명에서 감염자가 7000만명이며 이란은 1,129만명에서 감염자가 3백만명에 이른다.

이렇게 대입한 수치는 전세계평균수치라고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란은 최고로 사망자가 발생하여 4명 중에 한사람이 사망했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으나이러하였음에도 당시 사람들은 무슨 병인지도 알 수 조차없었고 그냥 돌림병이라고 알려졌다는 사실에서는 실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명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2013년에 놀랍게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 본사를 둔 미국 리스크 모델링 및 데이터 분석 회사의 보고서[2013, AIR Worldwide Research and Modeling Group]에는 "1918년 역사적인 대유행을 바탕으로 AIR Pandic Flu Model을 사용하여 오늘날 유사한 대유행의 영향을 추정했다는데 이 모델에서 "현대판 '스페인 독감' 이벤트는 미국에서만 153~278억 달러(US$15.327.8 billion) 34조원의 추가 생명 보험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예측했고 188,000명에서 337,000명의 미국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2013년에 예상한 것이니 2012년 신종플루가 세계적으로 성행하였을 때 위기의식을 가지고 이런 보고서를 발표했겠지만 현재 코로나바이러스19 를 예측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주목을 끄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한코로나19 사태를 보면 이와같은 형상이 동일하게 여겨질 정도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2043일현재 미국의 코로나19 확산 현황에서 확진자 272,998명이며 사망자가 7,005명에 이른다.

아직 미국상황의 최 정점을 4, 5월로 보는 것으로 이것에 더하여 미국전염병연구소(NIAID)의 앤서니 파우치(Anthony Stephen Fauci,1940-)소장 역시 CNN방송과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COVID-19)로 인한 사망자가 20만 명에 이를 수도 있다는 다소 충격적인 전망과 수백만 건의 감염사례를 예측했다고 보도되었다.

이런 사망자의 예측은 미국리스크모델링 데이터분석회사 예측과 거의 일치하는 수치이다.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이야기지만 상당히 위험스러운 국면인 것은 틀림없다.  

 

본문 소제 5. 총독부자료가 말하는 조선 무오년독감(戊午年 毒感)에서 밝혀본 사실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역사적인 측면에서 고려하고 또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풀어볼 수 있는 상황은 여러곳에서 잔존해있다고 보지만 1918년 당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스페인독감이 소멸되는 시점이 일제통치 아래에 있었던 한반도 조선의 경성(京城)의 무오년독감사정과 매우 동일하다는 사실은 충격 그자체이다.

그렇다면 결국 스페인독감의 발병의 시초도 조선(朝鮮)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험프리스(Humphries)가 주장한 독감의 발병원인이 중국인노동자로부터 시작된다는 설은 매우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독감의 명칭 스페인은 북아메리카대륙 캔자스주에 존재해야 맞다.

미서전쟁이 끝난 1901년부터 미국은 스페인과 같은 진로에 편승한다.

이러한 의문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진단할 수 있는 것으로 미국 캔자스주에서 발병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에서 원초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서양역사가들이 말하는 스페인독감이라는 명칭은 즉시 붙여진 것이 아닐 것이다.

1차세계대전 연합국에 의해 처음 불려진 것이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질병이 어느정도 소멸되고 난 후 비로소 보도에 붙어 나온 명칭일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19세기초부터 언론을 지배하는 황색신문들이 넘쳐나던 시대이다.

이 거대하고 치명적인 질병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가지고서도 여러 명칭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도탓을 하고 있었던 마당이니 보도자체가 얼마나 사회전반적으로 영향이 있었던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보면 어쩌면 황색신문이 생성하는 기사들이 역사가 된 사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마저 생긴다.

전술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러시아제국과 독일제국의 정보가 미국이외 다른 나라들에 비해 왜 그처럼 어두웠을까?

러시아제국이 1917년 3월에 멸망하고 바로 나선 주체가 미국이다.

미국은 당시 유럽제국의 패권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유럽왕조들의 싸움이었음에도 미국은 이때부터 1차세계대전 정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미국이 참전하면서부터 사실상 전쟁은 끝나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바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자본력이다.

미국이 스페인차에 편승했다는 것은 이 병이 스페인의 왕 알폰소 13(Alfonso XIII,1886-1941,재위:1886-1931)와 주요 스페인정치인들에게 감염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식으로든지 스페인은 독감에 상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본문 소제 '6. 스페인 독감과 세계삼한역사'에서 언급하길 스페인은 유럽왕가들을 움직였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에 끼이지도 못하고 2류 왕가로 전락하고 말았고 때문에 유럽왕가쟁탈전에서 이미 밀려난 처지라고 하였다.

그러한 권한이 미국자본가들에 의해 잠식당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스페인독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럽대륙에서 발병한 것임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스페인에서 학교, 막사, 정부 건물과 같은 좁은 지역에서 일하거나 살았던 사람들의 30-40%가 감염되었다고 한다. 마드리드 전차의 운행도 줄여야 했고, 모두 건강한 직원들이 일할 수 없어 전보 서비스를 할 수 없었다고도 하고 특히 '스페인독감(Spanish influenza)'이라는 용어는 영국에서 급속도로 유행했다고 한다.

나이얼 존슨(Niall Johnson)의 책 "영국과 1918-19 인플루엔자 판데믹"(Routledge, 2006)에 따르면, 영국 언론은 스페인의 독감 전염병을 스페인 날씨 탓으로 돌렸는데 "... 건조하고 바람이 부는 스페인의 봄은 불쾌하고 건강에 해로운 계절이다."이라고 타임즈의 한 기자가 보도했다 한다.  

1918년 여름까지 이 바이러스는 유럽본토의 다른나라들로 빠르게 퍼지고 있었고 헝가리의 비엔나와 부다페스트는 독감에 대한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독일과 프랑스의 일부지역에도 비슷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독일제국 베를린 학교의 많은 어린이들이 아프고 학교에 결석한 것으로 보도되었고, 무기공장의 휴업은 생산을 감소시켜 막대한 차질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통제가 되었다지만 이렇게 보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에서 유행하는 독감은 1918625일 영국(Britain)에 도달했다 한다.

UCLM(Universidad de Castilla-La Mancha)대학의 María-Isabel Porras-Gallo
와 Ryan A. Davis 저서 스페인 인플루엔자 판데믹
(The Spanish Influenza Pandemic of 1918~1919)에 따르면 7월 런던 섬유업계에 전염병이 돌면서 하루 저녁에만 400명 중 80명이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런던에서는 독감으로 인해 정부 직원이 결석했다는 보고가 25%에서 50%에 이른다고 기록된다.

그 전염병은 급속도로 대유행병이 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말하고 있다.

19188, 6명의 캐나다 선원들이 세인트 로렌스 강(St. Lawrence River)에서 사망했고 같은 달, 스웨덴 군대, 그 후 그 나라의 민간인,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노동 인구 중에서도 감염이 보고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본문에 게시한 1918년~1920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Global Mortality of the 1918–1920 Spanish Influenza Pandemic]를 보면 아프리카상황이 매우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ern Africa)은 전체인구 676.9만명의 30만명이 사망하여 사망률 43.97(per1,000) 4.39%를 나타내고 이 수치는 세계평균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아프리카대륙에서 발병한 높은 수치는 본래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고온, 고습에 영향을 적게 받는다는 사실에서 이외라는 것이다.

아프리카대륙의 총 사망자가 237만명이고 사망률은 평균 1.82%였다.

그 중 가장 심각했던 곳은 바로 카메룬(Cameroon)이었는데 전체인구 56.1만명에서 44.5%25만명이 사망했다.

19189월이 되자, 유럽대륙에서 성행하던 독감은 보스턴 항구를 통해 미국에 도착했다.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사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1918년 10월 학교와 군대에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독감(毒感)은 악성(惡性)으로 변했다 하였다.

이것은 가장인명피해를 낳은 2차감염이라고 하는 것인데 1차 캔자스주에서 발생하여 유럽으로 전파되고 유럽에서 다시 미국으로 전파된 상황을 그려볼 수가 있는데 사실상 이렇게 되므로써 미국전역에서 퍼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되자 의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붐비는 장소나 다른 사람들을 피하라고 촉구했다.

다른 이들은 계피를 먹거나, 와인을 마시거나, 심지어 옥소(Oxo)의 고기 음료(beef broth)를 마시는 것을 포함한 치료법을 제안했다.

의사들은 또한 사람들에게 공공장소에서 입과 코를 가리라고 말했고 한때, 아스피린(aspirin)의 사용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요인이라 하여 비난받았다고 한다.

우스게 소리로 1918628, 사람들에게 독감의 증상을 알리는 공지가 영국신문(British papers)에 실렸기에알고 보니, 이것은 실제로 비타민 회사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알약인 포마민트(Formamints)에 대한 광고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지금이나 그때나 가짜 '치료제'를 광고해 돈을 벌려고 했다.

때마침 현재 '우한코로나19 영향으로 도쿄 한 복판 약국에서도 이와같은 현상이 목격되는 바다.

이 광고는 포마민트가 "감염 과정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하며,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하루에 네 다섯 개의 알약을 먹도록 강요했다.

 

 

 

물론 학교와 극장은 문을 닫았고 뉴욕시 보건부는 거리에 침을 뱉는 것을 불법으로 하는 위생법 개정안을 엄격하게 시행했다고 알려진다.

미국인들은 감염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비슷한 조언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악수를 하지 말라하고, 실내에 머물며, 도서관 책에 손을 대지 말고,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권고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00년전에 그러하였음에도 현재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것에대해 당연시하고 아픈사람만 마스크를 해야하며 마스크를 쓴 사람은 예의가 없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에 과연 같은 미국인이 맞는가 하는 의문도 가져보게 하는 것이다.

당시의 미국인들이 실행한 마스크쓰기가 잘 전달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지금의 한반도 주민들이 아닐까 한다.

10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사가 달라졌다.

1차 세계대전은 일부 지역에서 의사 부족을 초래했고, 많은 의사들이 병에 걸렸다.

학교와 다른 건물들은 임시 병원이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의대생들이 감염된 의사를 대신해야 했던 것은 지금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낸시 브리스토우(Nancy Bristow)의 저서 "American Pandemic:1918년 유행한 인플루엔자 전염병의 잃어버린 세계"[Oxford University Press, 2016]에서 말하길 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 5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는 이 바이러스가 미국 인구 1320만명의 25%2,580만명을 감염시켰다 했으며, 미 해군 수치가 전해군의 40%까지 올라갔다 하였는데 바다에서 고립되어 복무하는 조건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이 독감은 제2차 감염기간인 19189월에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에 있는 군사 기지인 캠프 데븐스(Camp Devens)에서 6,674건의 발병 사례가 보고되었고 대부분이 이등병인 약 850명의 군인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하였는데 이는 조선에서 1918년 10월 학교와 군대에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독감[風邪]"부산일보[釜山日報] 1917년 12월 09일
"폭위[暴威]를 떨치는 풍사[風邪]의 신 스페인독감"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30일

위 글은 바로 조선총독부 기관지라 알려진 매일신보의 기사이다.

사실상 1917년 12월부터 조선(朝鮮)에서는 유행성 독감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부산일보가 보도했던 것 같다.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륙 캔사스주에서 1918년 1월 처음 발생한 것 보다 훨씬 바른 시각이다.

 

풍사(風邪)를 일본에서는 감기라 하고 한자사전에는 바람이 병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을 이르는 말이며 백과사전을 보면 풍(風)은 봄철에 발생하는 기후이지만 일년 내내 바람이 나타나므로 일년 내내 발생할 수있고 외감병(外感病)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으로 다른 사기(邪氣)와 결합하여 여러 가지 병을 야기한다 하였다.
또한 사(邪)는 감기(感氣)를 말하거나 요사스런 기운이라 하였다.
그러나 풍(風)은 역사적으로 풍이(風夷)와 견주어 볼 수 있는 것으로 옛 환국(桓國)을 세우는데 주축이 되었던 풍이족(風夷族)을 풍이(風夷)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풍이(風夷)는 풍이(馮夷)와 같고 풍이족(風夷族)은 뱀(巳)의 상징성을 가지며 취래장풍기만리(吹來長風幾萬里) 즉 취래(吹來)는 불어온다는 말이고 장풍(長風)은 오래 부는 바람으로 해석되지만 바람은 풍이(風夷)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바람(風)이 기만리(幾萬里)를 불어온다고 하였던 것은 수만리의 영토를 풍이(風夷)가 차지한 것이란 말과 같다라고 본 블로그에서 전한바가 있다.
바람은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모두 날라 들어간다.
바로 1년내내 불어되는 센바람 하리케인(Hurricanes)과 회오리돌풍 토네이도(Tornado)가 그것이다.
풍이족은 뱀을 상징하였는데 뱀은 방울뱀으로 묘사하였고 방울뱀(rattlesnake)은 살무사과에 속하는 방울뱀속(Crotalus)과 꼬마방울뱀속(Sistrurus)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의 고유종이며, 캐나다의 앨버타주 남부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남부에서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 중부에 걸쳐서 분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대부분의 종들은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에 살고 미시시피강 동쪽에는 4종이, 남미에서는 2종이 발견되며 미국에서 방울뱀의 종류가 가장 많은 주가 텍사스와 애리조나라고 하고 있다.
방울뱀은 대초원, 습지, 사막, 숲을 포함한 매우 다양한 서식지에서 발견될 수 있다.
방울뱀의 가장 유력한 조상 지역은 멕시코의 시에라 마드레 오시덴탈(Sierra Madre Occidental)지역이다. 조상의 가장 유력한 초목이나 서식지는 소나무 오크 숲(pine-oak forests)으로 보인다
본 블로그 글 "방울뱀(Rattlesnake, 響尾蛇)으로 본 마지막 대조선(大朝鮮)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2"에서 방울뱀은 미국독립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 사람들의 상징적인 동물이 되었고, 개즈던 깃발(Gadsden Flag)에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고 미국 군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미국 내의 정치운동에도 이용되고 있다.
본 블로그 글 "모계사회 회귀운동단체 피멘(FEMEN)과 풍이족(風夷族)이 주는 뱀, 용(龍)상징성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1에서는 장풍(長風)이란 면면히 이어 온 풍성의 후예, 즉 풍이족(風夷族)이 역사에 불어오는 바람을 의미하고 장풍이 기만리(幾萬里)를 간다고 했으니 풍이족(風夷族)의 후예가 세계 넓게 퍼져 사는 영역이 그만큼 넓어질 것이라는 말이라 했다.
이 바람이 기만리(幾萬里)를 불어온다.
한인천제가 지금으로부터 9,900년 전에 한국(桓國)을 세우고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썼던 구한족(九桓族)의 지도자가 되면서, 사(巳)에 획을 하나 그어 파(巴)자를 만들고 용이라고 하였다. 한인천제의 이름을 안파견(安巴堅)이라고 하였는데, 안파견에 들어 있는 파(巴)는 용을 의미하는 문자이다. 이후로 용은 풍이족(風夷族)이 12제국을 하나로 묶어 한국을 세우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하화족(夏華族)의 역사에서는 풍이를 풍씨(風氏)라고 하였다.
본 블로그 글 "산양호(山羊湖)는 고트레이크(goat lake)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1"에서 조선왕조실록 예종(睿宗:1年)1469 년 6 월 29 일 기사를 인용하길...臣竊惟本國, 表裏山河, 幅員幾於萬里, 戶數百萬, 兵一百萬, ...馮燕納款, 隋六師大敗, 而唐賓之, 遼隻輪不返, 而宋事之, 金稱父母之鄕, 元爲甥舅之國。
삼한은 본시 안팎 영토넓이가 몇 만리라는 것은 거의 북아메리카대륙의 넓이를 말하는 것으로 군사가 1백만명이라 하였으며 풍연(馮燕) 또는 풍이(馮夷)가 거한 황하(黃河) 즉 미시시피강의 신 하백(河伯)에게 정성을 바쳤고 수나라의 육사의 모든 군사가 고구려에 대패하였다는 사실과 당조는 신라를 손님으로 깍듯이 대우하였으며 요조는 고려에게 패군하여 처참하였고 송조는 고려를 섬겼으며  금조는 고려를 부모의 고향이라고 하였고 원조는 조선을 장인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던 바, 삼한은 반도역사가 말하는 중국역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으며 위에서 말하는 원조(元朝:1271-1368)역시 고려(高麗)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풍사는 감기 또는 독감이라 하는 말이다.

굳이 매일신보가 풍사라 한 것은 풍이의 땅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불어온 감기라는 것쯤은 얼마든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풍사(風邪)는 삼한조선이 관할 했던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된 독감이라는 사실이 여러각도에서 일치함을 알 수가 있다.

 

끝으로 험프리스(Humphries)가 제기한 북부 중국인노동자의 실체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그 북부중국인은 분명 1910년에 멸망한 청조(淸朝)의 유민(遺民)이라 생각할 수 있고 어쩌면 조선유민(遺民)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던 19세기 잔혹한 서세의 할큄에서 견딜 수가 없어 처절하게 갈라진 고려인(高麗人)들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사실상 서양역사에는 다른 역사명칭은 다 살아남아도 조선이란 명칭은 서양세력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되고 아예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신영어체인 "Korea"가 남아 있을 뿐이다.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에서 언급하였듯이 "COREA"란 명칭사용은 1878년 5월 뉴욕에서 선대이메거진(Sunday Magazine)에 의해 마지막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현재 어느누구도 한국인을 COREA 라고 표기하지 않는다.

물론 구영어체인 "Corea"은 어느 순간에 신영어체 "Korea"란 명칭에 죄다 흡수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라짐과 흡수라는 과정속에서 우리에겐 한반도 역사만이 존재할 뿐인데 그렇더라도 삼한이 가진 기존 영광스러웠던 역사는 결코 지워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주장한 것처럼 삼한전통계보의 방계 청조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지만 고려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8"에서 충분히 나타나고 설명한 사실이다.

신라를 통합한 고려(高麗)를 지나라 하는 것도 전통중국 지나조선(支那朝鮮)으로 합칭되어 불리어졌지만 지금은 그 고려도 사라지고 조선도 사라져 지나만 남았는데 이것은 현재 신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지금 우한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가 앓고 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1918년 스페인독감에 대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도 보고 해석도 나름대로 해보았다.

지금은 전 세계인이 코로나바이러스19 의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온마음을 다해 응원하는 바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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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도시(腰衣:Loincloth)와 열도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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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도시(腰衣:Loincloth)와 열도일본

글쓴이:한부울

먼저 로인클로스(腰衣:Loincloth)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백과사전을 보면 허리(腰)에 둘러 입는 형태의 의복으로 초기에는 매는 끈의 형태로 시작된 요대(腰帶)형태였으며, 요대가 커져서 허리를 전부 가리는 요의가 되고 점차 스커트의 형태로 발전하였고 엉덩이와 사타구니(loin), 서혜부(鼠蹊部)를 둘러싸는 직4각형 모양의 천조각이라 했으며 BC 3000년경 이집트인들은 몸을 여러 겹 싸서 앞에서 묶거나 띠를 두르는 직물인 쉔티(shenti, schenti, shendyt)를 입었다고 되어 있다. 패션큰사전에서는 허리에 둘러 입는 형태의 의복으로 초기에는 매는 끈의 형태로 시작된 요대 형태였으며, 요대가 커져서 허리를 전부 가리는 요의(腰衣)가 되고 점차 스커트의 형태로 발전하였다고 말하며 기후가 따뜻한 아열대 또는 열대지역인 아프리카, 중앙 아메리카,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많이 입었으며, 이집트의 쉔티(shenti)가 대표적인 요의이다. 쉔티(shenti)는 바느질을 하지 않고 천을 허리에 둘러 끈으로 고정한 모습이라했다.

일본자료를 보면 사이즈나 소재, 속옷과 표착의 차이외, 만들어진 천을 그대로 허리(腰)에 묶거나 벨트로 고정하는 것과 허리끈을 꿰매어 묶는 등의 고정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다 하였고 사타구니에 끼우는 것(인도·dhoti 등)과 굽히는 것(고대 이집트·shenti 등)의 착장 방법의 차이 등으로 지역마다 다르다고 하였다. 또 바지따위의 가랑이 아래 길이, 고하(股下)로 통과하는 형식의 지방에서는, 남성(특히 전사나 노동자)이 사타구니에 통과하는 형식, 여성이 허리띠 형식과 착장(着装:몸에 붙임)방법이 성분화(性分化)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고하를 통과하는 형식이 노동(労働)때의 움직이기 쉬움을 고려하여 고안된 형식으로, 허리띠 식에서의 파생했기 때문이라 하면서 인도네시아 자바인(Java), 말레이인(Malay)등 회교도 허리에 감는 의복 사롱(sarong), 버마의 론지(Longyi)는 통형으로 꿰매며, 로인크로스이면서 통의(筒衣)분류되기도 한다 하면서 자신들의 훈도시(ふんどし)를 영어표기에서 로인크로스(loincloth)로 표시한다라고 하고 있다.

훈도시(ふんどし)는 들보라 하고 남성의 음부를 가리기 위한 폭이 좁고 긴 천.(=下帯)라고도 하며 속어(俗語)로는 게의 배 딱지, 아감딱지, 새개(=えらぶた:鰓蓋:operculum)라고 하였다. 일본자료에서 훈도시(褌:ふんどし:Fundoshi)를 로인클로스(腰衣:Loincloth)라 한 것이다. 또 훈도시를 한문으로 곤(褌)이라고 하는데 곤(褌)은 통이 좁고 가랑이가 짧은 바지로 상고시대부터 착용되었으며, 지금의 잠방이와 같은 형태이고 고구려의 궁고(窮袴)와 비슷하나 가랑이가 좀 더 짧다라고 했지만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옷은 통이 좁고 가랑이가 길며 속속곳 따위의 안쪽에 받침으로 대는 헝겊 '밑바대'를 댄 바지라 했고 고려(高麗)시대에는 무인(武人)들이 이러한 군복으로 입었다고 되어 있다. 즉 잠방이는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게 한 짧은 홑고 의(衣)이다.

고구려와 고려시대의 통의(筒衣)는 짧은 바지라고 보이지만 일본 훈도시와 차이가 있고 훈도시는 요사이 말로 속옷 팬츠(pants)라 해도 과할 정도로 국부 가리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본자료가 말하는 것처럼 고구려나 고려의 통바지와는 비교자체가 불가한 것이다. 이런 가리개를 의복삼아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명치유신 전까지 일본인들이 착용했다는 사실이다.

훈도시는 띠 모양의 천을 몸에 감아 신체 후부에서 완결하는 것과 끈을 이용하여 바퀴모양인 윤형(輪形)으로 완결하는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하였는데 속속곳의 형태이지만 천이 아니라 끈으로 둘어 맨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현재 열도일본인들이 훈도시를 해석하는 것을 보면 다분히 자기 미화적으로 나타난다. 굳이 한문으로 곤(褌)이라 한 것에서 부터가 그렇고 곤을 한문 합성한자로 풀이한 것을 보면 의복 의(衣)의 의부(意符)와 군(軍)의 성부(聲符)가 합성된 글이라 하여 군(軍)이라는 의미의 전투복에서 유래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벌거벗고 싸움질 한 것은 고대 왜구들이 생각나며 13세기에서 16세기 경 서양해양세력이었던 해적이라 할 수 있는 해구(海寇)들 역시 이와같았다고 판단된다. 즉 상식적으로 보면 짧은 바지 내에 속속곳을 입었을 것인데 훈도시는 바지를 벗어버리고 속속곳만 차고 전투를 했다고 하는 것이니 기가찰 노릇이 아닌가.

하기야 삼국사기기록에서 왜구들이 벌거벗은 상태로 훈도시에 칼만 차고 날뛰었기에 그것을 군인이라 해석한다면 군인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일본자료가 주장하는 훈도시의 역사를 보면 전국시대때 천(布)값이 비싸기 때문이라 하였고 전사자(戦死者)의 신분은 곤(褌)의 유무(有無)로 구별하고 있었으며 당시에는 삼베(麻)가 주류였으나,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와 무명(木綿)을 대체하여 무사(武士)외에 일반 서민에게도 보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훈도시는 남방전래설과 북방전래설이 있는데 남방전래설의 근거는 동남아시아, 폴리네시아나 남아메리카대륙에서 육척곤(六尺褌:6척 길이,181.8 cm의 샅가리개, 척은 피트와 같은 단위)와 거의 같은 형상의 것을 대입하고 있다는 점이고, 대륙전래설은 중국대륙에 '독비곤(犢鼻褌)'여름에 농부(農夫)가 일할 때에 입는 '쇠코잠방이'이라 불리는 남성의 국부가 소(牛)의 코(鼻)처럼 보이는 곤(褌)의 유행이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샅가리개라 함은 남성의 고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독비곤이라 하여 소코잠방이는 인도의 레슬링하는 사람들이 입는 랑곳(Langot)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훈도시는 랑곳과도 또 다르다.

그림:육척 훈도시같은 건 엉덩이를 가리지 않고 중요한 부위만 가리는 모양인지라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T팬티.[나무위키:출처]

그러나 남방전래설은 몰라도 북방전래설은 그들이 어디든지 묻어가려고 하는 습성에서 나온 잘못된 착각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러한 옷을 입게 된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더위에 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점이 있어 노동하는 남성들에게 불편하지 않는 옷에서 출발한 것으로써 전혀 옷이 필요치 않는 문화에서 전래된 것이며 대체적으로 습기가 많은 아열대기후나 열대기후의 종족들이 이런 가리개 정도의 옷을 입었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 여성의 경우는 생략하겠다.

다음은 영어자료에서 발췌한 것인데 훈도시가 로인크로스라고 하니 이를 보면 로인클로스(腰衣:Loincloth)는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단 하나의 천 조각, 전형적으로 몇몇 더운 나라의 남자들이 입는 유일한 옷이라고 하였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열대기후에 맞는 가리개 정도의 옷이다. 훈도시는 엉덩이를 덮는 수준도 아니라 엉덩이를 다 들어내놓고 끈으로 사타구니(가랭이)를 이어 고리에 연결한 것이 전부이다. 훈도시와 마찬가지로 로인클로스 역시 다른 어떤 옷도 필요하지 않거나 옷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에서 입는 옷이라 하였다.

이것들은 조금의 차이가 있듯이 용도가 다른데 옛 스리랑카(Sri Lanka)나 인도(India)의 논(rice field)에서 레슬링하는 선수와 농부들이 흔히 속옷이나 수영복으로 사용하였다 하고, 이것을 신할라(Sinhala)의 아무다야(amudaya)라 불리고 카우피남 (Kaupinam), 카우피나(Kaupina) 또는 랑곳(Langot)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인도 남성이 허리에 끈을 걸쳐 가랭이만 천으로 감싸는 속옷으로 입는 것이며 특히 종교적으로는 인도(印度:India)의 베다, 베딕시대(Vedic Period:B.C 2000-B.C 1500)초기부터 사용되어 왔고 시바(Shiva)의 신자들은 카우피남(Kaupinam)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인류역사를 통틀어 성기와 알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남자들은 엉덩이가 아닌 성기를 덮는 근본적인 옷, 즉 가리개로 인식한 로인클로스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것의 재료가 나무껍질, 가죽, 천조각으로 다리사이에 끼어넣고 성기를 덮는 형태이다. 그러나 그것의 방법이 간단하면서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가지 형태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개인들이 사용하던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 또는 브리치클롯트(breechclout)는 가랭이(thighs)사이를 지나 벨트로 고정된 소재(나무껍질, 가죽, 천)의 띠로 구성되어 있는데 로인클로스(Loincloth)와 달리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는 옛날 노예나 열대 지방의 원주민 등이 사용한 것이니 더 볼 품이 없었다고 보인다. 대신 로인클로스는 긴 천 조각으로 가랭이 사이를 지나 허리에 감겨 있다. 좀 더 발전한 것이다.

또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에 대해 1902년~1906년에 샤이엔 인디언(Cheyenne)과 카이오와족(Kiowa)의 가문의 문장과 역사를 연구하는 문장학(紋章學)에 정통한 미국민족학자 제임스 무니(James Mooney:1861-1921)는 본래 샤이엔(Cheyenne)은 '로인클로스를 입고 말을 탄다'라고 주장했다. 이 사람은 인디언맨으로 알려져 있고 옛 북미 대륙의 동부에서 남동쪽 걸쳐 미시시피 강 유역을 거주지로 삼았던 체로키족(Cherokee)에 들어가 몇 년 동안 공동생활을 했다고 했다.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서, 남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허리에서 발끝까지, 주로 다리를 덮는 겉옷를 하였는데 그 형태는 부족마다 달랐고 재료는 사슴·염소의 부드러운 가죽 벅스킨(buckskin)으로 만든 레깅스(leggings)를 착용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좀 더 추운 날씨의 기후에 맞게 레깅스를 한 것이다.

많은 부족에서는 로인클로스(Loincloth)의 덮개를 앞뒤로 늘어지게 하였으며 다른 부족에서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의 허리띠 바깥쪽으로 고리 모양으로 구부려 안쪽으로 넣개 하여 더 잘 어울리도록 하였고 때로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가 훨씬 짧고 전체적으로 앞뒤로 장식된 앞치마 천 조각이 붙어 있었다고 하고 있다.

비슷한 스타일의 로인클로스는 고대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즉 중앙아메리카의 특징이기도 하며 현대 멕시코 지역의 남성들은 천으로 감는 로인클로스(wound loincloth)를 입었다고 알려진다. 로인클로스의 한쪽 끝이 위로 올려져 있고, 나머지는 가랭이 사이를 지나 허리에 감긴 다음, 등에 집어넣어 고정시켰다. 또 1492년 신대륙 발견탐험가 콜럼버스(Christopher:1446-1506) 이전의 남아메리카에서는 고대 잉카 남자(Inca men)들이 끈이나 줄로 가랭이 사이에 천을 띠처럼 끼고 있었다고 말해지며 천은 뒷면의 줄로 고정되어 있었고 앞부분은 앞치마를 걸어 항상 잘 장식되었다고 하였다.

대부분 일반적인 면으로 되어 있지만, 지금은 T셔츠(shirts)처럼 때때로 상징이 장식된 앞치마가 있는 것인데 이 옷은 일본에서 엣추 훈도시(etchu fundoshi)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에서 문화적으로 다양한 아마존 토착민(Indigenous people of Amazon)들 중에도 여전히 조상들이 착용한 로인클로스를 입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엣추 훈도시(etchu fundoshi)는 어떤 것일까?

위글에서 멕시코남성들이 입는 로인클로스(loincloth)로써 앞치마처럼 늘어진 것을 일본인들은 엣추 훈도시라고 했다. 게시된 나무위키자료를 보면 훈도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써 명치유신 이후 일본군에서는 육척훈도시 보다 더 쉽게 제작하여 착용할 수 있는 엣추 훈도시를 장병들에게 군용 속옷으로 보급하였고 이것을 이후 민간으로 확산되어 보편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명치유신(明治維新)이 1868년부터이니 이때부터 군용으로 보급이 되었고 나중에 민간이 따라 사용했다는 것인데 군용이라는 것은 옛 곤이라는 한자 의미의 군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전달될 수 있는 것으로써 일본인들이 착용한 것은 훈도시이고 훈도시는 군용이 먼저가 아니라 민간에서 습한아열대기후나 열대기후에 맞춰 민간에서 먼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명치유신 때부터 활동지가 바로 멕시코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엣추(越中)라는 것은 현재 열도에서 호쿠리쿠도(北陸道)의 도마야현(Toyama)을 말하는 것으로써 고대율령국이라 한다.

솔직히 한반도도 그렇지만 열도지도만 보고 있으면 지명이 정상적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위 지도에서 북륙도라고 할 곳은 오히려 혼슈 북쪽지역이어야 함에도 이상하게 동해에 접한 띠같은 곳을 호쿠리쿠도(北陸道)라 하였다.

어쨌던 중앙아메리카대륙의 고대잉카제국의 남자들이 입었던 로인클로스(loincloth)를 엣추 훈도시라 하였으니 일본인들이 본래 중앙아메리카대륙 습하고 무더운 아열대기후의 멕시코에 있었던 종족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지만 현재 위치는 동해 북쪽가까이에 가져다 놓아 기후는 훈도시의 본질과 완전히 동떨어지는 상황임을 알 수가 있다. 로인클로스(loincloth) 또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는 남북아메리카 그리고 중앙 즉 메소아메리카에서 공통적으로 원주민들이 입었던 요의(腰衣)였다고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글에서 남아메리카대륙의 아마존 토착민들 중에도 여전히 조상들의 로인클로스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니 오래전부터 열대기후인 남아메리카대륙 중북부지역에서 이와같은 옷이 입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이 바로 인도였다.

또한 1500년 4월 22일 포르투갈 항해사인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1467-1520)은 마누엘 1세(Manuel I,재위:1495-1521)와 엔히크(Henrique)왕자 명령으로 인도(印度)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대서양서쪽해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우연히 브라질 북동쪽 해안 몬테 파스코알(Monte Pascoal)에 도착하여 다음날 프레이드 강(Frade river)하구에 정박하자 현지 투피니킴 인디언(Tupiniquim Indians)의 무리가 해변에 모여들었고 그들은 바로 로인클로스 요의(腰衣)를 입은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곳은 평소 농사일을 하던 인도인이었으며 그들은 지금까지 인도를 찾지 못했다고 하고 있지만 바로 인도(印度)를 정확히 찾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현재 브라질이 아니라 당시에 진짜 인도(印度)였다는 사실이다.

얼마전 게시한 본 블로그 글 "금련화(金蓮花)와 석가(釋迦)탄생지 인도(印度)https://blog.naver.com/iikhan/221968912424 "에서 석가의 성(性)을 '찰리(刹利)'라 하였다는 것도 바로 칠레(chile)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과 석가께서 탄생하신 룸비니(Lumbinī)를 금련화(金蓮花)로 밝혀 네팔(Lumbini in Nepal)남부 테라이(Tarai)지방이 아니라 안데스산맥 칠레 북부지역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인데 이러한 주장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남아메리카대륙이 인도(印度)라는 주장은 본 블로그에서 수십차례 이야기 한 사실이며 주요한 글만 하더라도 무려 15개가 된다. 그렇다면 서양해양세력들은 인도(印度)에 도착하고 정작 발견하였음에도 무엇때문에 엄청난 역사 부정을 하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금련화(金蓮花)와 석가(釋迦)탄생지 인도(印度)

************************금련화(金蓮花)와 석가(釋迦)탄생지 인도(印度) 글쓴이:한부울​소제:석가(釋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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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본 블로그 글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에서 주장했듯이 동서양을 분리하고 현재 아메리카대륙의 동해, 즉 대서양이 대동양이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덮고 동아시아로 옮겨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식민주의에서 동양을 식민지 뭐니 하는 역사를 만들려면 곧장 현재 인도아대륙을 인도라 하여 동아시아로 들어갈 수 있는 바탕을 깔아놓고 해양시대를 서양세력들의 창구역할을 하게 한 열도일본과 연결하여 일본이 서양역사문물을 전래하는 보루로 만들면서 일본을 동아시아 위치에 놓아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한 것이며 근세기 역사전체가 이틀에서 꿰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세력 입장에서도 최종 이러한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서영세력들의 집합체인 연합국이 2차세계대전에서 승전을 하고 전쟁이 마무리되자 열도일본에 진출할 중앙아메리카대륙과 카리브해에 거주하던 열도일본세력과 빅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과 일본사이에 체결된 센프란시스코평화회담을 유심히 볼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게 역사적으로 지극히 불리한 조약들은 이때 소급하여 적용하는 식으로 틀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상기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다시한번 정리를 해보자.

문제는 이 요의(腰衣)에는 크게 나누어 하나는 로인클로스(loincloth)라는 것과 하나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가 있다. 둘 다 옷이라고 볼 수 없는 것으로 그저 가리개 정도인 속속곳 임을 알 수 있지만 특이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는 자료에서 말하길 옛날 노예나 열대 지방의 원주민 등이 사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로인클로스(loincloth)로 역시 따져보면 습한 아열대기후에서 나타나는 의복형태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은 이 로인클로스를 입고 겉옷을 걸친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기후가 춥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대기후에 아메리카원주민들은 습하고 더운 기후가 그런 옷을 입도록 한 것이 틀림없다.

종교적으로 풀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로인클로스(loincloth)라 하고 이것이 인도(印度)의 베딕시대(Vedic Period)초기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시바(Shiva)의 신자들은 카우피남(Kaupinam)을 입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베딕 즉 베다시대라 함은 인류최초사회생활을 상상하게 하는 시기이다. 당시에 의복이 어느정도 보급되었는가 하는 것은 여러자료에도 알 수 있겠지만 아주 초보적인 단계로 인식할 수 있고 특히 더운 열대지방의 기후라고 하면 긴옷을 입기란 힘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천왕문(天王門)에서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 사천왕상(四天王像)의 생령좌(生靈座)에는 로인클로스(loincloth)를 입은 마구니 악귀(惡鬼)가 엎드리거나 쪼그려 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을 여러 블로그에서 생령좌의 아귀라 하고 옛 신라때 왜구들의 출몰이 심했을 때이니 훈도시를 하고 있는 악귀는 왜구(倭寇)라 한 것이다. 아다시피 불국사는 1937년 경북불교협회에서 발행한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 15년 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으로 지어졌고,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중건했다는 절이다. 신라때 출몰하던 왜구들의 극성때문에 건립되었다고 하고 그래서 그런지 수호신 사천왕 발 밑에 왜구가 엎드려 밟게 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왜구는 일찍이 삼한인들에게 악귀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인도 베다, 베닉시대라 함은 기원전 2000년까지 올라가는데 이때는 원시불교가 존재했을때이니 오늘날 불교와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때 시바(Shiva)신(神) 즉 오늘날 대승불교의 대자재천(大自在天)이 되어 나타나자 이 신(神)의 신자(信者)들이 로인클로스(腰衣:Loincloth)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만약 그러한 전통이 대승불교에 전해 졌다면 사천왕이 밟고 있는 것은 시바를 믿는자 중에 악귀가 있어 밟게 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고 당시에도 해적들이 설쳐되었다면 분명히 해적을 악귀로 상징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도 한다. 물론 왜구들의 훈도시를 시바의 신자의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일게다.

또 한 가지는 오늘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훈도시문화를 BC 3000년경 이집트인들이 몸을 여러 겹 싸서 앞에서 묶거나 띠를 두르는 직물인 쉔티(shenti)를 입었다고 되어 있는 부분과 결부시키려 노력하지만 이것도 자세히 보면 당시 나름대로의 문명제국에서의 페션이었다고 보아야 맞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훈도시문화는 그들이 원천적으로 거주지가 기후적으로 습기가 많고 아열대기후에 맞게 착용한 것이다. 그곳을 카리브해를 포함한 메소(중앙)아메리카라 하는 것이고 멕시코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주지일 것이란 확신이 들게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여러형태로 만들어져 남아메리카대륙 열대지역까지 확대되었다는 사실도 예측할 수가 있다.

분명 본 블로그 글 "운남성(雲南省)은 남아메리카북서부이다.http://blog.daum.net/han0114/17050801"와 "캘리컷(Calicut:古里)이 있었던 곳 브라질 쿠리치바http://blog.daum.net/han0114/17050739"에서 잉글랜드가 남아메리카대륙 브라질을 점령하면서 당시까지 존재한 무굴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본 블로그에 밝혀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인도가 남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본 블로그에서 만큼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1500년 포르투갈 항해사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1467-1520)이 오늘날 브라질에서 인도를 찾았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고 그곳의 원주민들이 투피니킴 인디언(Tupiniquim Indians)이 착용했다고 하는 의복은 전통적으로 인도에서 논(rice field)에서 레슬링선수와 농부들이 흔히 속옷이나 수영복처럼 사용하였다는 카우피남 (Kaupinam), 카우피나(Kaupina) 또는 랑곳(Langot)이라는 요의 로인클로스(loincloth)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인들이 훈도시라고 하는 로인클로스(loincloth) 또는 브리치클로스(breechcloth)는 열대기후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전반적인 편의성에 의한 매우 간편하게 끈으로 연결하여 속속곳, 성기를 가리는 목적의 가리개처럼 만들어 걸쳤다고 해야 맞다. 우리는 여기서 훈도시 자체만을 놓고 미개인의 문화라던가 원시적인 비문명적이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중요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은 과연 지금의 열도에 존재하는 일본인들의 본거지 즉 근원적인 거주지가 명백하게 현재 열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형태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열도는 부분적으로 아열대(亞熱帶)가 될 수는 있어도 열대기후가 아니다. 시간적으로 고대 때 부터라고 해도 옷을 전혀 걸치지 않을 정도로 일년 내내 매우 덥고 비가 많이 내리는 지방의 기후대가 분명히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오카야마(Okayama)에서 열리는 훈도시만 걸치고 벌거벗은 일본인들의 광란을 사이다이지 에요 하다카 축제(Saidai-ji Eyo Hadaka Matsuri)라 하며 물로 정화를 받는 행사가 지속되고 있다. 다분히 훈도시문화가 미화된 것이다.

일본이 쇄국상태에서 개혁바람이 몰아친 1868년 명치유신이래 신문명국을 모토로 탈아입구(脫亞入歐)란 명목아래 준서양국, 명예백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 오늘까지의 제어할 수 없는 일본현황이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미개인들이 착용했다고 하는 훈도시문화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서양 노예신분으로 또는 서양무사계급아래 철저한 종속관계에 있었던 농노신분에서 쉽사리 탈피할 수 없었다는 이유가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왜구들의 약탈과 노략질, 강간, 살인등 일본이 우리역사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것이며 때문에 일본인들은 조선사회 귀족이나 사대부(士大夫), 지식자들에게 믿음을 얻지 못했으며 벌거벗은체 훈도시에 칼만 차고 은혜도 모르는 근본이 없는 종족이라는 소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왜구의 본 근거지가 일본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해양시대를 열었던 서양해양세력들의 역사가 오늘날 일본역사가 된 마당이니 그들이 착각할 만도 하다. 일찍부터 삼한역사주체들이 하나의 체제 속에 끊임없이 반발하는 왜구, 해적들과의 큰 전쟁부터 작은 전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상대하면서 잘 제어하였지만 과하다싶어 때로는 본거지를 점령하고 정벌하거나 토벌하여 그들의 조직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솔직히 그들은 우리에게 매우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이다.

만약 한국이 다시 번영하여 옛 고려나 조선처럼 세계통치국의 위치가 된다면 그들은 또 다시 우리주변을 맴돌며 왜구, 해구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엉터리 역사가 준 교육효과일게다. 이 교육효과로 그들의 반체제 근성이 많이 누그러뜨려졌다고는 보이지만 그들이 현저하게 궁지에 몰린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반체제 일원으로써 반란세력으로 존재할 것이고 그들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골머리를 썩여야 할지 모른다. 다시금 말하지만 일본은 분명히 지금의 열도가 본거지의 역사가 아니다.

서양세력들은 왜 한반도 옆 열도에 일본을 앉혀 우릴 지속적으로 압박받게 만들었을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분명 우릴 경계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왜 서양세력들은 그토록 우릴 경계하는 것일까?

보라, 서양세력들이 현 일본과 전혀 빅딜이 없었다면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과 같은 전범국이면서도 미국은 그들 일본왕부터 철저하게 사면을 단행했고 그것도 모자라 거금의 경제원조를 제공하였으며 매우 의심이 가는 항목이지만 한반도에 갑자기 불을 붙여 동족간 전쟁하게 만들면서 열도일본인들이 고스란히 받아먹도록 군수기지로 활용하게 하면서 급속하게 경제발전을 이룩하게 하였으며 그 덕분에 오늘날 세계 7대 경제대국 "G7"일원이 되게 만들었다.

그것이 일본이 진주만공급으로 급습하여 미국을 2차세계대전에 참여케 한 구실을 만든 댓가일까? 아니면 1905년 가쓰라-태프트협약의 소급조치인가. 미국과의 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항복했다는 댓가로 독일처럼 동서로 가르지도 않고 온전하게 만들면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도록 조치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빅딜이 존재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과의 빅딜이었을까?

혹 서양역사 전반적인 틀을 인정하고 협조한다는 빅딜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패전국신세가 된 일본인들은 한반도 한국과 독도영토권을 두고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있어 한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일본이란 국명아래 그동안 서양인들이 저질렀던 악행과 악역을 지금의 열도일본에게 전가시키고 유럽인들은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손결이 전혀 없는 우월한 지도국으로 변신하여 빠져 나간 것에 대한 댓가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열도일본인들에게는 그런 조치가 전혀 손해될 것이 없다.

그들이 그렇듯 부르짖었던 천황제를 그대로 존치하게 만들었고 패망이란 멍에를 쓰게 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열도일본인들에게는 영광이며 굉장한 추억속에 군사프라이드 그 자체로도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최고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것이니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준서양국이 되었으며 명예백인이 되지 않았는가.

다시금 보아도 훈도시는 서양세력들의 노예신분, 농노신분, 무사계급신분, 용병신분에 있었던 그들의 아픈역사를 나타내는 증표이기도 하다. 서양해양세력들의 본거지가 중앙아메리카대륙과 카리브해를 포함한 남아메리카대륙라는 것은 일본인과 겹치는 역사이다. 물론 기후는 매우 습하며 더운 날씨 아열대기후이다.

생각해보면 일본이란 역사주체가 지금의 열도에 존재한다는 것은 기존역사체계에서 생물과학적으로, 또는 기후과학적으로, 더하여 인종적, 종교적으로도 전혀 일치하는 것이 없는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생성된 역사 그차제라 해야 맞다. 그렇게 따진다면 한반도 역사도 그 수준에서 마찬가지다. 열도는 일본인들이 2차세계대전 끝으로 서양연합국과의 빅딜에 의한 신일본역사공간일뿐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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